그런데 방금 백이강이 기사 중 한 명을 ‘켄’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파국의 이니시아>에서 내가 아는 켄이라면 딱 한 명뿐인데.
왠지 모를 위화감에 내 어깨를 붙들고 있는 기사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굉장히 익숙한 낯이 눈에 들어왔다.
“와, 배신자 켄이잖아?”
“……뭐?“
갈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더없이 평범한 일반인의 모습을 한 ‘켄 베르도’. 이자가 바로 2황자의 심복이었다.
황태자인 백이강의 호위 기사로 위장한 채 2황자에게 백이강의 모든 것을 사사건건 전달하는, 말 그대로 ‘배신자’.
“아, 미안. 아직 비밀이지?”
사람 좋게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자 켄의 얼굴이 사납게 찌그러졌다.
느닷없이 정곡을 찔린 사람의 상판치고는 썩 보기 좋았다.
날 포함한 수많은 독자들이 원작에서 얘 때문에 얼마나 복장이 터졌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까 빌런치곤 너무 평범하고 멍청하게 생겨서 왠지 모르게 맥이 빠졌다.
“거기 죄인, 지금 뭐라고 했지?”
그때, 멀어져 가던 백이강의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했다. 거리가 꽤 있는데도 용케 내 말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전하, 출신이 불분명한 불속지객의 헛소리일 뿐입니다.”
백이강의 눈길이 도로 내게 닿자 나를 연행하려던 켄의 갈색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배신자라고 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이어지는 내 무던한 대답에 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네까짓 게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전하께 반말을……!”
그도 모자라 다급히 내 입을 닫으려는 급박한 손짓이 허무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켄, 죄인은 내가 직접 데려가지.”
무언가 생각하는 듯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던 백이강은 간단히 고개를 까닥이며 나에 대한 연행을 멈출 것을 명했다.
안 그래도 감옥에 끌려가는 건 내키지 않던 참인데 잘된 일이었다.
뭐가 됐든 일면식도 없는 세계의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는 낯이라도 익은 흑막의 곁에 있는 게 덜 위험해 보였다.
“예? 하, 하지만 전하! 이런 더러운 꼴의 신원 불명인 자를 황궁에 들일 수는…….”
“내가 의견을 물었던가?”
“……존명.”
스산하게 날아드는 백이강의 눈동자를 마주한 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내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 값싼 입을 함부로 놀리다간 곧바로 죽을 거다, 명심해라.”
켄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훑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협박의 말을 뱉었다.
칼을 든 기사가 하는 협박치고는 전혀 무섭지 않았지만, 예의상 고개를 끄덕인 나는 마찬가지로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너나 잘해.”
대답을 마친 나는 빠르게 백이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꽤 열받아 보이는 켄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켄에게 건넨 대답은 조롱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었다.
그도 그럴 게 켄은 2황자가 시키는 일을 전부 끝낸 어느 날,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끝내 살해당하기 때문이었다.
“얌전히 따라와.”
백이강은 곁에 다가선 나를 힐끗 보더니 도로 무심히 고개를 돌리고는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지금 내게 백이강은 좋아하던 소설 속 인물을 떠나,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었다.
만약 백이강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목이 댕강 잘리고도 남았겠지.
아니면 볕도 들지 않는 냉혹한 감옥 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죄인,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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