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백이강의 마법 같은 한마디가 허공으로 퍼졌다.
머지않아 잘 다려진 구릿빛 양피지가 홀연히 공중에 나타나더니,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 서명해. 청도운.”
느닷없이 눈앞에 들이밀어진 종이 뒤로 백이강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뭐야? 갑자기 어디서 이렇게 길고 커다란 계약서가 튀어나온 거야?!
“자, 잠깐만. 이런 건 대체 언제 준비한 거야?!”
“문제라도?”
내 물음에 백이강의 고개가 담백하게 옆으로 기울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밀려드는 황당함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우리 만난 지 아직 한 시간도 안 됐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계약서를 꺼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게다가 글씨도 엄청 많고, 작고, 촘촘해! 그래서 뭐라고 쓰인 건지 하나도 안 보여……!
“별것 아닌 일에 잘 놀라는 편이군.”
하지만 백이강은 여전히, 놀라는 내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별것 아닌 일’이라니……. 보통은 이게 굉장히 ‘별것’이거든요…….
“그으래. 너 잘났다.”
덕분에 백이강이 먼치킨 캐릭터라는 사실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그는 원작을 대표하는 흑막답게 지능과 능력을 포함, 다방면으로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우월한 편이었으니 확실히 이런 일쯤은 별것도 아닐 터였다.
“서명 하나에 오만 년이 걸리는군.”
잘 보이지 않는 글자를 읽기 위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데, 그를 지켜보던 백이강에게서 마뜩잖은 불만이 날아들었다.
쯧, 재촉하긴. 이렇든 저렇든 결국 또 뭔가를 도와달라는 거겠지? 그냥 서명해도 괜찮으려나……?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백이강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흑막이라는 거지만……. 주인공들 소원이 뭐 별거겠어? 대충 들어주고 감사받고 끝내자.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냐.”
이 세계에서는 손가락이 곧 펜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허공에 손을 휘젓자 금세 내 사인이 그려졌다. 우여곡절 끝에 꾸역꾸역 서명을 마치자 계약서는 기다렸다는 듯 눈부신 빛을 내며 자취를 감췄다.
뭐 하나 제대로 읽지도 못했는데 덜컥 사라져 버리다니……. 왠지 찝찝한 게, 꼭 사기당한 기분인데…….
“그럼 이제 계약을 이행하도록 하지.”
흡족한 얼굴로 나를 직시하는 백이강의 입가에 희미하게 얹힌 묘한 미소가 수상하게 실룩였다.
뭐지, 저 수상한 입꼬리는? 괜히 불길하게…….
“야, 계약서 읽을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냐. 뭘 해야 하는지 아직 보지도 못했거든?”
“읽지도 않은 계약서에 서명하다니…… 혹시 바보인가?”
“네가 빨리하라며!”
내 억울한 호소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던 백이강은 곧 야트막한 한숨을 쉬더니, 나 또한 계약자이니 ‘계약서’를 외치면 나타날 거라 답했다.
“계약서.”
순순히 그 단어를 뱉자, 말간 허공에 아까의 구릿빛 양피지가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어라, 이거 갑자기 왜 이렇게 잘 보여? 아까보다 글씨가 세 배는 더 커진 것 같은데.
이거 기분 탓 아닌 것 같은데.
“……야, 잠깐. 이거 완전 사기야.”
백이강……! 누가 최종 흑막 아니랄까 봐 계약서를 아주 제멋대로 써놨잖아! 저 망할 사기꾼이!
<계약서>
1. 을 ‘청도운’은 갑 ‘하일 데르지오’(이하 ‘백이강’)를 황제로 만든다.
2. 을 ‘청도운’은 갑 ‘백이강’이 앓고 있는 불치병을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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