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일이 있었어.”
켄을 데리고 백이강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나는 켄을 문밖에 둔 뒤 홀로 들어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래서.”
“그래서…… 바깥에 켄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말이지……. 한 번 정도는 이야기를 들어줘도 괜찮지 않을까…….”
역시나 백이강의 반응은 차갑다 못해 싸늘했다. 벌써부터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게 한겨울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물론 그가 환영할 거라 생각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은 켄도 가족을 빌미로 협박당한 거고, 이래저래 사정을 들은 데다가 그간의 정도 있었으니 이렇게까지 매몰찰 거란 예상은 못 했지…….
“제국의 기사단장이 몇 대 얻어맞았다고 정말 갱생할 거라 생각했다면, 진심으로 유감인데.”
코앞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과 함께 낮은 말소리가 스산하게 내려앉았다.
문 쪽은 무심코라도 쳐다보지 않는 걸 보아하니 이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은 듯했다.
“진짜야, 전이랑은 다르다니까. 한 번만 만나보자. 응?”
백이강은 켄이 갱생했다는 말을 일절 믿지 않았다.
물론 한 번 배신한 놈이 두 번 못 하리란 법은 없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켄은 또다시 목숨을 버려가며 2황자에게 붙을 정도로 멍청한 놈이 아니었다.
나야, 원작을 읽었으니 이 정도 추측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나만 알고 있으면 뭐 해! 정작 백이강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렇다고 내가 켄은 배신하지 않을 거라며 원작의 내용들을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고, 이걸 어쩐다.
“내줄 시간 없다.”
“나한텐 잘만 내주면서.”
“그야, 너는.”
너는, 뭐?
백이강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 사람 면전에 대고 한숨 쉬지 말라니까.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만나봐. 긴히 할 얘기가 있다잖아. 혹시 알아? 중요한 정보를 물어 왔을지.”
진짜 마지막 찔러보기다. 이번에도 까이면…… 켄, 너는 그냥 앞으로도 백이강과 마주치지 말고 죽은 듯이 살아라.
그런데 이번에는 백이강의 표정이 조금 전과 달랐다. 뭔가 생각을 마친 듯한 그는 기다란 눈매를 가늘게 휘며 나를 천천히 직시했다.
“그럼 하나 똑바로 해두지. 이건, 네 부탁인가?”
“엉? 어…… 뭐, 그런 셈이지……? 나도 켄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긴 하니까.”
불쑥 날아든 긍정적인 의문에 속아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백이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쳤다.
……뭐야, 갑자기 왜 저렇게 흉흉하게 웃지? 방금 대화에서 웃을 만한 일은 없던 것 같은데?
“네 부탁을 들어주면, 넌 내게 뭘 해줄 거지?”
아, 이 망할 백이강. 또 시작이네! 도대체가 저놈의 영악한 성질머리는 변하질 않냐! 이런 와중에 나한테 뭘 뜯어내려고 하다니, 황당해서 헛웃음도 안 나와…….
“야, 진짜 치사하게 이럴 거야?!”
“싫으면 무르고.”
억울해진 내가 다급히 반박하자, 백이강은 미련 따윈 없다는 눈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서류철 위로 바쁘게 움직이는 만년필 소리가 마치 바깥에서 날 믿고 기다리는 켄의 시선처럼 따갑게 귓가로 날아들었다.
아니…… 내가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하지만 2황자 밑에서 일했던 켄은 분명 캐낼 만한 정보가 많을 텐데…….
“……하아, 뭘 원하는데.”
혼잣말처럼 작게, 그리고 아주 조용히 읊조리듯 뱉은 말이었다.
만약 백이강이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냥 이대로 넘어갈까 생각도 했다마는…… 죽어도 멈추지 않을 것처럼 바삐 움직이던 백이강의 손이 우뚝 멎었다.
“뭐든 들어주는 건가?”
넌지시 물으며 흥미를 품고 반달처럼 휘어진 눈이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달처럼 번득이는 보랏빛 안광이 저리도 형형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