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을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시선으로 내 뺨을 가만히 어루만지던 백이강은 별안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묘하게 호기로운 태세인 게, 꼭 뭔가를 하려는 듯 보였다.
잠깐만, 이 상황 왠지 익숙한데……. 전에 인명부에 갔던 날도 대뜸 이러지 않았냐고.
“어디 가려고?”
“서고에.”
조심스레 목적지를 묻자 백이강은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가볍게 답했다.
그런데 이 남자, 아무리 잠을 못 잔다지만 시간 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암만 봐도 지금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인데요.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나는 슬그머니 백이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나더러 불면증을 고쳐달라 해놓고 정작 본인은 조금도 협조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협조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매번 남들은 다 자는 시간만 골라서 일을 만들 리가!
“왜 그러지?”
내가 막아서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는 눈이었다.
보통은 아무리 일이 좋다고 해도 새벽까지 야근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도 회사에서 알아주는 프로 야근러였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다고요.
“왜긴, 나더러 불면증 치료를 도와달라 했으면 당연히 너도 협조해야지. 이건 나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남들이 자는 시간에는 너도 자! 저번처럼 자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부러 큰소리를 낸 나는 백이강이 딴 곳으로 새지 못하도록 재빨리 집무실의 문 앞을 가로막았다.
“……자는 시늉을 하라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조용히 따라와.”
그의 손을 덥석 붙든 내가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어째선지 손에 힘을 주어도 백이강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보기보다 힘이 세다니까.
“어딜?”
“어디긴, 당연히 침대지. 오늘은 아무리 일이 많다고 해도 안 봐줄 거니까 순순히 와.”
지지 않을 기세로 또박또박 말을 받아치는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던 백이강의 눈빛이 순간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형형한 보랏빛 눈동자 안쪽에 곤란한 표정을 한 내가 선명하게 담겼다.
저렇게 무섭게 노려봐도 하나도 안 무섭다.
……아마도.
“흠…….”
이윽고 뜻 모를 숨을 짤막이 흘린 백이강이 내 어깨 위로 천천히 손을 올렸다. 내 목 부근을 어루만지는가 싶던 그는 갑자기 나를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헉, 야, 갑자기 당기면……!”
느닷없는 힘에 방심한 내가 균형을 잃고 기울기도 잠시, 백이강이 기다렸다는 듯 내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댔다.
“유혹이 서툴지만 넘어가 주지.”
다소 능글거리는 말을 자연스럽게 마친 백이강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황당함에 굳어버린 나를 홱 지나쳤다.
“……유혹? 누가 그딴 걸 했다고……!”
게다가 뭐? 서툴러?! 이건 수십 명의 애인을 울렸던 청도운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다.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만은 백이강을 침대에 눕히고 만다.
무엇보다 쟤가 안 자니까 나까지 전염된 건지, 요새 잠이 안 온다고! 이러다 나도 불면증 생기겠어!
병 고쳐달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잠에 미련이 없어?
“내가 재워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좀 넘어가자.”
“다음에. 오늘은 바빠서.”
멀어지는 백이강의 뒤를 급히 쫓은 나는 그의 팔을 냅다 붙들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까와 같은 담담한 낯으로 거절을 던졌다.
도대체가…… 이게 무슨 삼류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도 아니고, 나는 왜 매달리고 있는 거야?! 정작 병을 못 고쳐서 아쉬운 사람은 백이강일 텐데 왜 내가 간절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