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강,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낮에 숲을 복구한 이후, 나는 오후 내내 백이강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호시탐탐 말 걸 기회만 노렸다.
그런데 분명 내가 뒤에 있는 걸 알면서도 백이강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스레 내 시선을 피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아, 결국 나는 꼼짝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은 네가 있어 보이는군.”
밤이 되고, 침실까지 쫓아오고 나서야 드디어 백이강의 대답을 간결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아까 낮부터 느낀 건데…… 백이강, 왠지 나한테 화내고 있는 것 같지 않나? 묘하게 삐진 것 같기도 하고.
숲을 원래대로 고친 뒤부터 괜히 쌀쌀맞게 구는 것 같단 말이지. 그래도 낮에는 날 걱정해 주길래 괜찮은 줄 알았건만, 아니었나?
딱히 이렇다 할 만한 말은 안 하지만 표정이나 태도에서 느껴지는 게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본인은 아닌 척 굴어도 내게 뭔가 불만이 있다는 것이 확실히 눈에 보였다.
“마법부 선배들한테 다 들었어. 너 그동안 나 때문에 황실 회의에서 시달렸다며? 그거 왜 말 안 했어?”
그러나 그쪽 사정이야 어쨌든, 내 볼일부터 보기로 했다.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너만 쌓인 게 있는 게 아니라고요.
“말하면, 뭐가 달라지나?”
그런데 백이강은 내내 숨기던 것을 들킨 것치고는 퍽 평온한 얼굴로 되물었다.
게다가 뭐가 달라지냐니…… 진심으로 묻는 건가? 지금까지 날 이용해서 이것저것 도움받은 게 몇 갠데?!
“당연히 달라지지! 내가 널 도울 테니까.”
백이강이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나는 그게 뭐든 조금의 고민도 없이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고맙단 소리를 듣고 이 거지 같은…… 아니, 난감한 빙의에서 깨어나지!
특히나 백이강은 해결의 끝을 죽음으로 맺는 본투비 사악한 인간군이었다.
물론 그가 흑막이니만큼 이러한 방식을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최종 목표가 황제인 이상, 그런 식으로 피 튀기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이 말인즉, 나는 지금 전적으로 백이강의 모든 것을 커버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백이강이 만약 내게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곤란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말이다.
“그건 네 일이 아닌데, 왜?”
“왜냐니, 나 때문에 네가 피해를 봤으니 내가 돕는 건 당연하잖아.”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묻냐는 내 단호한 대답에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보이던 백이강이 곧 나를 향해 이리 오라며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뭐야? 다 큰 남자가 얇은 침의만 입은 채로 침대에 앉아서 오라고 하면 내가 순순히 갈 것 같아?
내가 무슨 오라고 하면 오는 개인 줄 아나!
“청도운, 안 와?”
“……가.”
저렇게 무서운 얼굴로 말하면 안 갈 수가 없다. 쟤가 흑막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순응할 일은 없을 텐데, 쳇.
입술을 삐죽이며 슬금슬금 다가가자 백이강은 눈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지금 네 할 일은 날 재우는 거야. 다른 건 필요 없어.”
“야,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말 돌리면-”
“청도운, 착각하지 마. 넌 이 계약에서 ‘을’이야. 계약서에 쓰인 것 외엔 신경 쓸 필요 없어. 그건 내 일이니까.”
매정하게 말을 마친 백이강은 내 손을 덥석 낚아채고는 힘으로 나를 제 옆에 팽개치듯 내던졌다.
덕분에 멋지게 고꾸라져 침대 시트에 얼굴을 박은 나는 황당함에 이도 저도 못 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기껏 도와준다고 했더니 뭐? ‘내 일’?
기어이 이런 식으로 영역을 굳이굳이 나누시겠다? 심지어 말이 안 통한다고 힘으로 제압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