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아, 저래도 되나 몰라아?”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서 즐겁고 유쾌한 목소리가 새살맞게 흘러나왔다.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본데…….”
그럴 리가 있나! 암만 비바람이 몰아친다 한들, 저렇게나 탁 트인 곳인데! 물론 내가 아닌 다른 이라면 모를 테지만.
“역시 재밌다니까.”
푹신한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채 마법구가 보여주는 화면을 뚫어져라 보던 남자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흩뜨리며 앉아 있던 의자에 더욱 편안히 등을 기댔다.
벌써 수없이 재생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돌려봐도 통 질리지 않았다.
이 진귀한 걸 저 혼자만 봐야 한다니!
너무 아쉬워서 애꿎은 마법구를 붙들고 그 안에 뛰어들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좀 속이 뻥 뚫릴 것 같기도?
손바닥이 거칠게 지나간 자리에 주황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뽑혀 나왔다. 그를 본 남자는 쯧, 혀를 차며 대충 머리칼을 털어냈다.
마법구 너머로 부서진 동상의 머리통을 줍고 있는 황태자, 하일 데르지오의 모습이 선명히 비쳤다.
그리고 그 곁에서 허망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신원 불명의 마법사 청도운까지.
“거기, 마수 새끼야.”
-하찮은 인간 놈이 감히…… 내 이름은 ‘까막’이다!
마수라 불린 검은 새가 씩씩대며 레지를 향해 성을 냈다. 그러자 레지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그래, 까마귀야. 네가 보기엔 어때? 우리 전하 말이야.”
-내 이름은 까마귀가 아니라 까막…….
“그래, 까마귀야.”
자비도 없이 뚝 끊긴 말에 훅 찾아든 적막도 잠시, 정말 대단하지 않냐며 한껏 고양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그에 까막이 컴컴한 눈매를 팩 찌푸리고는 레지를 응시했다. 저 미친놈이 또 시작이라는 중얼거림을 무사히 삼켜낸 까막은 마법구로 눈을 돌렸다.
-……대악마께서 주시하고 계신다.
“그럴 만도 하지. 저렇게 남몰래 제국의 상징인 동상을 쳐부수는 황태자가 얼마나 기특하겠어?”
-아니, 그쪽 말고.
까막의 대답에 여태껏 웃음기로 가득하던 레지의 얼굴이 삽시간에 정적을 머금었다.
이윽고 돌아보는 시선에는 조금 전과 달리 즐거움이 깡그리 사라진 채였다.
“설마 우리 귀여운 신입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명확한 주어는 없었으나 충분히 이해되는 레지의 물음에 까막의 사고가 일시에 정지했다.
으응……? 레지가 말하는 신입이라면 단 한 사람, 청도운뿐일 텐데. 그런데 청도운이 ‘귀여운’ 축에 속하나……?
일순간 도운의 모습을 떠올린 까막은 질린 눈으로 날개를 푸덕였다.
보통 귀엽다는 말은 작고 귀여운 것이나 사랑스러운 것을 두고 지칭하는 말이 아니던가.
청도운은 인간에게 별 관심이 없는 까막조차도 곧잘 기억할 만큼 체구가 꽤 있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운의 어깨는 바다처럼 떡 벌어졌고, 신장은 치즈를 온종일 늘려둔 것처럼 높고 길었다.
길을 지나간다면 누구나 한 번씩은 돌아볼 법한 건장함이었다.
-딱히 귀엽지는…….
“무슨 소리야? 앙증맞은 게 귀엽기만 한데. 그래서, 누굴 탐낸다고?”
생각보다 격하고 단호하며, 또 난해한 레지의 반응에 까막의 뇌리가 황당으로 물들었다.
-크흠, 아직 결정 난 건 아니다. 그저 흥미를 느끼고 계신다는 거지.
“그 정도에서 멈춰야 할 거야. 딴 놈은 몰라도 도운이는 내주기 싫으니까.”
스산한 말이 들려오자 까막은 슬그머니 눈알을 굴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다분히 의도적인 헛기침을 두어 번 마치고 나서야 조막만 한 심장 한편이 침착함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