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이제 단상으로 가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필립의 말에 백이강의 고개가 대충 주억였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뜻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태도였다.
가만 보면 백이강은 가족들이랑 하나같이 사이가 별로네. 형제도 안 좋아해, 아빠도 싫어해……. 나도 누나들 볼 때마다 헛구역질이 나오긴 하지만.
……오죽 인간적인 면이 없었으면 이런 걸로 친밀감이 느껴지냐.
“금방 올 테니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여기 있어.”
“에잉, 맨날 그 소리야. 내가 뭐 돌아다닌 적 있나.”
입을 삐죽이며 반박하자 순간 근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백이강은 물론이고 아셀, 심지어 내게 감정을 잘 보이지 않는 필립까지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뭔데…… 이러면 내가 문제아라도 된 것 같잖아……!
“……아셀, 잘 감시해라.”
“예, 전하.”
아이고, 이젠 감시하라는 말을 대놓고 하네!
그래도 전에는 내 안위를 위한 일이네, 어쨌네 입발림하더니 그거 다 때려치우기로 한 거야?! 다른 겉치레는 잘만 하면서! 망할 백이강!
내가 서러워하든 말든 백이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필립과 함께 조용히 파티장을 떠났다.
홀로 덩그러니 위쪽에 남겨진 탓일까, 아래에 있던 자들의 주목이 전부 내게로 쏠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밖에서는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백이강과 내가 이렇게 떨어지는 걸 남들은 처음 보는 일일 테니.
“아래로 내려가시겠습니까?”
넌지시 묻는 아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밑쪽으로 눈이 돌아갔다.
슬쩍 보니, 내가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온갖 질문으로 나를 물어뜯을 것이 뻔한 개떼…… 아니, 사람들의 초롱초롱한 눈이 보였다.
붙잡히면 보나 마나 귀찮아질 게 빤한 일이다. 절대 내려가면 안 된다.
“그냥 여기 있을게요.”
근데 이 높은 곳에 혼자 있으려니 다들 나만 쳐다봐서 좀 불편한데.
저들 딴에는 흘끔흘끔 바라보는 거겠지만, 그런 식으로 나를 보는 사람이 수십이 넘어가다 보니 퍽 곤란했다.
“아셀, 내가 꼭 이 앞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까요? 슬슬 부담스러운데.”
“뒤쪽으로 살짝 물러나시는 정도라면 괜찮을 겁니다. 청도운 님께선 저들에게 얼굴을 비칠 의무가 없으시니까요.”
간만에 아셀이 맞는 말을 했다. 그의 말대로 뒤쪽으로 걸음을 물리니까 자연히 아래쪽이 보이지 않아서 막혔던 숨통이 탁 트였다.
“설마 여기로 누가 올라오진 않겠죠?”
“이 위쪽은 본궁과 이어지기 때문에 정계 귀족이 아닌 이상 올라올 이유가 없습니다. 특히나 오늘 같은 날에는 더욱…….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묻는 족족 돌아오는 담백한 대답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우직하게 올곧은 소리만 하는 아셀이 내놓는 답은 보통 정론에 가까운지라 받아들이기가 편했다.
“3황자께선 도착하셨을까요?”
그런데 이번 물음에는 아셀이 대답하지 못했다. 잠깐 고민하는 듯한 눈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의 말에 속이 슬금슬금 뒤틀리기 시작했다. 당장 만나러 가도 모자랄 판에 여기서 멍하니 사람 구경이나 하고 있자니 시간이 다 아까웠다.
하지만 3황자 만나러 가는 이유를 속 시원히 말할 수가 없으니 아셀을 끌고 갈 수도 없고…….
으음, 아니면 저번처럼 말로 살살 구슬려서 떼어낼까?
하지만 아셀은 이제 절대 내 곁에서 자의로 떨어지려 하지 않을 거다. 이미 내게 여러 번 통수를 당했으니 호락호락하지 않겠지.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다.
능력 뒀다 뭐 해? 마법을 써야지! 내 분신을 세워두고 도망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