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조금, 아니 많이 불공평한 것 같다.
똑같이 칙칙한 옷을 입었는데 나는 어느 마을에나 하나쯤 있을 법한 힘 잘 쓰는 장정같이 보이고, 백이강은 어느 귀족가의 도련님이 잠시 일탈한 것으로 보이는 게 말이 되냐고.
에라이, 더러운 세상…….
나는 베이지색 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를, 백이강은 회색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었다. 당장 사람들 틈에 섞여도 절대 눈에 띄지 않을 법한 완벽한 옷차림이었다.
아무튼, 경비 인력의 눈을 피해서 몰래 황궁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옷차림도 옷차림이지만 황성이 개방되어 있기에 인파 틈에 섞이니 딱히 힘들이지 않아도 금세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강아, 모자 잘 눌러써.”
귀 아래로 살짝 튀어나온 그의 흰 머리칼을 본 나는 까만 모자 안쪽으로 머리칼을 쑥 집어넣어 주었다.
백이강과 같은 하얀 머리는 세간에서 쉽게 보기 힘들었다. 나 또한 흰 머리는 원작에서도 오직 백이강뿐인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백이강이 모자를 쓰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머리 색이 그의 존재를 인증하는 꼴인지라 답답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근데 이강아, 거기 반대편에도 튀어나왔어.”
“넣어줘.”
“네가 해라, 좀.”
정리해 달라며 내게 얼굴을 내미는 백이강의 모습에 툴툴대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지만 내 손은 이미 그의 머리를 향해 뻗치고 있었다.
“이제 됐나?”
“음, 완벽해. 근데 뭐…… 사람이 워낙 많은 데다 불빛도 많아서 네 머리카락 좀 튀어나와도 아무도 모를 것 같긴 해. 그래도 조심해.”
“그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백이강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음, 괜히 느낌이 이상하네…… 이건 무슨 기분이지?
“갈까.”
“아, 응.”
백이강이 내민 손을 잡은 나는 그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노을이 거의 모습을 감춘 탓에 완연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다소 쌀쌀한 바람이 시원하게 귓가를 스쳤다.
걸으면 걸을수록 시장 한복판에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온갖 길거리 음식이 사방에서 유혹하고 축제로 신난 아이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유쾌한 소리가 분주하게 귓가로 날아들었다.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 게임에 져서 우울한 소리, 원하던 인형을 얻어 기쁨에 내지르는 비명 소리까지.
전부 익숙하지만 그와 동시에 낯선 소리였다.
“와, 사람 진짜 많다.”
한국에서 흔히 보던 야시장 풍경 같지만, 그보다 규모가 훨씬 커서 그런지 좀 더 웅장한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나도 여기까지 나온 건 오랜만이군.”
백이강도 모처럼 무뚝뚝한 얼굴 위로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그러고 보면 백이강 입장에서는 자기가 다스릴 나라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기분이려나? 무슨 기분인지 공감할 수는 없지만 함께 즐거워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난 처음이야. 네가 알려줘야 해.”
내 말에 백이강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이내 피식 웃어 보인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침 갈 곳도 있고…….”
“갈 곳?”
역시 백이강이 계획 없이 나왔을 리가 없지. 갈 데를 미리 정해둔 걸 보면 갑작스레 집무실을 뛰쳐나온 건 아닌 듯했다.
그럼 사흘 전에 집무실에 들어설 때부터 이런 일을 계획했던 걸까? 불만 하나 없이 묵묵히 일한 건 오늘, 나와 함께할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까.
왠지 그러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구경하다 가지. 급하지 않으니.”
“으음, 좋지. 어쨌든 너무 눈에 띄지만 않으면 돼.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글쎄…… 사람이 많으니 그럴 일은 없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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