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운 님, 이제 집무실로 가시나요?”
어쩌다 도피처가 된 황태자궁 입구에서 딱히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자,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안나가 다가와서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으음, 생각 중이야.”
진짜 생각 중이다. 이제부터 어쩔지를.
어차피 내가 어딜 가든 안나와 그림자가 따라붙을 테고, 누구와 뭘 하든 그 눈들이… 정확히는 백이강이 나를 보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이거,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도 안전하다는 소리 아닌가? 뭘 해도 백이강의 손바닥 위라면 그 구석구석 바쁘게 누벼주지!
우선은 저번에 아킬라를 두고 도망쳤던 놈이 있는 쪽으로 산책이나 가볼까. 안 그래도 요새 계속 일만 해서 답답하던 참인데.
…물론 놀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것도 다 계획된 일이다. 내 마음대로 쉰 적은 없다고.
“그럼 오랜만에 산책이나…!”
“도운 님, 죄송하지만 전하께서 일이 끝나면 집무실로 오라고 하셨습니다만.”
“아이고, 갑자기 하나도 안 들리네. 귀에 물이 들어갔나?”
내 자유에 초를 치는 안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나는 모른 척 웃어 보이며 재빨리 정원 쪽으로 뛰쳐나갔다.
* * *
“왜죠.”
“예?”
“왜 저하께서 제 눈앞에 계시냐고요…….”
분명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나왔는데, 왜째서… 아니, 어째서 눈앞에 조금 전 아침에 만났던 이안이 있는 걸까.
“하하, 저는 원래 이맘때쯤 정원을 산책하곤 합니다. 이렇게 마주친 것도 우연인데, 함께 걸으시지요.”
“…아.”
미처 이안의 산책 시간까지 파악할 생각은 못 했다.
당연하다. 어느 누가 산책하러 나오자마자 황자를 만날 거라 예상할 수 있겠냐고!
더군다나 이런 건 원작에도 없는 내용이니 내 능력 밖이다.
아오, 진짜! 저렇게 해사하게 웃는 면전에 대고 너랑 걷기 싫다고 할 수도 없고…!
따로 걷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제국의 황자가 뒤, 혹은 앞에 있는데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러시죠…….”
답정너가 따로 없었다. 정해진 답을 뱉은 나는 해쓱한 얼굴로 이안의 옆에 다가섰다.
뒤에 있는 안나에게까지 대화가 들릴 만한 거리가 아님에도 이안은 자연스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내게 적당한 예의를 갖췄다.
“그런데 저하, 호위는 두지 않으십니까?”
“아시다시피 황족에게는 그림자가 있으니까요.”
하물며 마법사인 나도 안나를 데리고 다니는데, 정작 황자인 이안은 방에 있을 때와 같이 호위가 없었다.
그림자가 있다고는 해도 당장 곁에 아무도 없는 건 위험할 수도 있는데….
“뭣보다, 지금은 대륙 제일의 마법사께서 제 곁에 계시지 않습니까? 다른 호위가 필요치 않지요.”
“헛.”
나더러 대륙 제일… 이라고 했다.
제국 제일도 아니고, 무려 대륙…….
“으흠, 그렇죠. 대륙 제일의 마법사가 옆에 있는데 호위가 다 무슨 소용이에요? 저만 믿으세요, 저하. 흠흠.”
절대 기분 좋은 게 아니다. 그저 비위를 맞춰주려고 하는 거라고. 군데군데 끼어 있는 콧소리는 착각이다.
백이강은 절대 저런 소리 안 해준단 말이야!
어쩌다 이안과 함께 산책하게 되면서 이런저런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안은 나보다 한참 어린데도 대화를 나눔에 있어서 딱히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역시 내 정신연령이 이안과 같다는… 아니지, 이안이 또래보다 성숙한 걸로 하자. 그래야 내 속이 편할 것 같다.
“아하, 마법부에 들르셨군요.”
“네. 마력 측정 때문에 잠깐 머물렀죠.”
이안과 도란도란 떠들며 길을 걷던 중, 문득 그의 걸음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