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셀, 제가 밤에 직접 이곳으로 온 게 아니에요?”
“다른 그림자가 밤새 도운 님의 방 앞을 지켰습니다만, 방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셀의 흔들림 없는 담담한 눈이 결백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래, 더 들을 것도 없다. 이건 무조건 백이강이 범인이다.
역시, 내가 내 발로 여기까지 올 리가 없는데! 뭔가 이상하다 했지!
홀라당 속았다는 생각에 곁에 있던 백이강을 노려보자, 그는 서늘한 낯으로 아셀을 스치듯 훑었다.
“수련장이 편했나 보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입이 살아 있는데.”
둘이서 당최 영문 모를 대화를 나누기도 잠시, 이내 아셀의 입이 꾹 다물렸다. 백이강이 딱히 별말을 한 것 같진 않은데… 왠지 모르게 위압감이 느껴졌다.
“백이강,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
“나야 모르지. 아셀이 피곤해서 헛소리를 했을지도.”
의심을 담뿍 담은 어투로 추궁하였지만, 백이강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하며 앞만 보고 걸었다.
정작 반응을 보인 건 다른 사람이었다. 아셀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 실언입니다. 도운 님께선, 밤중에, 이곳으로, 자리를 이동하셨습니다.”
딱딱 끊기는 절도 있는 말소리가 더없이 어색했다. 누가 봐도 방금 막 지어낸 거짓부렁이었다.
“이젠 하다 하다 공범을 대놓고 만드네. 하여간, 못됐어.”
아셀은 입이 텁텁한지 연신 침을 삼키며 먼 곳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반면 백이강은 내 마뜩잖은 중얼거림을 가볍게 무시했다.
이윽고 다이닝룸 앞에 도착한 순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백이강이 날 혼자서 옮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물론 백이강이 나를 안아 들지 못할 거란 소리는 아니지만… 솔직히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그림은 아니니까.
그럼 혹시…?
“백이강, 너 설마 ‘그 힘’을 쓴 건 아니지? 고작해야 나 하나 옮기겠다고 그랬을 리가…….”
당장 아니라고 대답해, 이 망할 흑막 놈아.
초조한 눈으로 애탄 물음을 던지자 백이강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다이닝룸 앞의 기사들이 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백이강의 눈치를 살폈다.
“글쎄, 어떠려나.”
이도 저도 아닌 오묘한 대답이 돌아왔다.
애초에 속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는 걸 보고만 있을 내가 아니다.
“아,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벌컥.
“…헙.”
내가 소리치던 그 순간,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백이강이 그 찰나에 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낸 모양이었다.
훤히 열린 문 안쪽으로 황제와 델시아, 이안과 피엘이 나와 백이강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꿀꺽.
식은땀이 흐르고 흘러, 끝내 목으로 넘어가는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사람이 왜 저렇게 많아? 분명 황녀와의 식사 자리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째서 다들 모여 있나요…?
“나중에,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지. 단둘이.”
뭐가 그리 기꺼운지, 살가운 낯으로 피식 웃은 백이강이 내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이고는 태평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 그래도 하나같이 불편한 사람들뿐인데, 저 미치게 능글맞은 백이강 때문에 두 배로 착잡해졌다.
황제는 말해 뭐해, 눈빛만 봐도 날 그리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단숨에 알 수 있었고, 델시아는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며, 나머지 황자들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황녀와의 아침 식사라며…!”
다급히 백이강의 옆으로 따라붙은 나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에게 따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