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깨닫겠지. 나밖에 없다는걸.”
더없이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같으면 뭔 소리냐며 비웃었을 텐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계획이란 게 뭐야?”
슬쩍 화제를 돌리자 두 사람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진중한 눈으로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흘 뒤, 약혼식이 진행될 거다.”
“생각보다 빠르네.”
의외라는 내 반응에, 백이강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델시아를 향했다.
“아르테의 대신들이 미리 와서 준비하는 바람에 시기가 앞당겨졌지.”
“윽, 그건 어쩔 수 없었어. 우리는 국가적 대사(大事)가 있으면 먼저 가서 준비하는 걸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니까.”
아, 그래서 일부러 일찍 왔던 거구나. 약혼식을 최대한 빨리 추진하려고….
“아무튼 약혼식 전날 밤, 델시아는 따로 준비된 마차를 타고 아르테로 돌아갈 거다.”
“응? 그럼 약혼식 당일에는 어쩌고?”
적어도 약혼식 날까지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사자가 있어야 약혼을 무르든 나발이든 할 텐데?
“그날이 바로 이번 계획의 하이라이트야.”
의문을 품기 무섭게 델시아가 들뜬 얼굴로 슬금슬금 묘한 웃음을 보였다. 아니, 묘하다기보다는 불길한…….
“요새 웨딩드레스 사이즈가 넉넉하더라고.”
이어서 의미심장한 말을 뱉은 델시아는 살살 웃으며 내 어깨를 겨누어 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음, 딱이야’라며 상쾌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운아, 네가 입는 거야.”
“뭘…?”
“뭐긴 뭐야, 웨딩드레스지!”
더없이 화사한 결론이 단칼에 들이닥쳤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정신 나간….
“그거지.”
슬쩍 말을 얹은 백이강은 보기 드문 흡족한 표정을 한 채 델시아를 따라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내 체격에 드레스가 웬 말이야, 이 사람들아!!
“절대 싫어, 진짜 싫어!”
“그래… 이 낯선 외국 땅에서 부모님 얼굴도 못 보고 성격 파탄자 신랑과 내 귀한 여생을 눈물로 보내라는 거구나…? 나는 사랑 없는 혼인으로 병을 앓다가 일찍 죽을 테고, 고국에 남은 내 연인은 복수를 위해 펜디움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겠지…… 훌쩍.”
…뭐지. 백이강 여자 버전을 보는 것 같은 이 불쾌한 기분은. 뻔뻔하게 연기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그,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할 것까지는….”
“그런 결말도 나쁘지 않지. 아르테 따위는 하루면 충분히 삼킨다.”
백이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 느긋한 모습이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여서 마냥 웃어넘기기가 어려웠다.
“뭐야? 따위? 이 무례한 남자가! 말 다 했어?”
“사실인데, 문제라도?”
그런데 얘네는 어떻게 된 게 잠깐만 정신을 팔면 싸우고 있냐. 애들도 아니고!
“윽… 그만! 알았어, 알았다고. 드레스만 입는 거라면 뭐….”
“무슨 소리야? 드레스까지 입은 마당에 약혼식도 참석해야지.”
“맞는 말이다. 약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해야 해.”
죽일 듯 백이강을 향해 으르렁대던 델시아는 잽싸게 나를 보며 단호히 말했다. 게다가 백이강도 동의한다며 나를 홱 돌아보았다.
두 사람, 왠지 나를 겨냥할 때만 죽이 잘 맞는 것 같다? 이거 기분 탓 아닌 것 같은데…….
“안 해, 절대 안 해!”
이번엔 나도 질 수 없다. 매번 어물쩍 넘어가 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벌떡 일어서서 두 팔로 급히 엑스자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