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식까지는 아직 사흘 남았으니 당분간 여기서 쉬도록 해.”
백이강은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거나 뺨을 잡아당기는 등, 내가 괜찮다는 것을 별별 방법으로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주변을 채우고 있던 약품들을 치웠다.
내가 쓰러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꽤 많은 이가 갖가지 약재를 보내온 모양이었다.
당장 저기 구석만 보더라도 상당히 화려한 약통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아마 대부분은 백이강에게 잘 보이겠다고 보낸 거겠지만, 아무렴.
그나저나 좀 의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백이강이 내가 죽을까 봐 눕지도 못하고 침대 옆을 지키고 있었다니.
밤샘 간호 같은 낯간지러운 행위는 백이강보다는 안나가 할 법한 일인데 말이지.
저 망할 인성도 가끔은 회개하는 모양이지?
이래서야, 진심의 감사 인사는 내가 먼저 하게 생겼네….
하지만 순순히 간호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자니 어쩐지 배알이 뒤틀렸다. 그 말은 내가 들어야 한다고, 내가!
대신 좋은 소리 하나 해주지.
“있잖아. 내가 아까 죽…. 아니, 쓰러질 때 생각한 게 있는데.”
구석에서 약재를 발로 밀어내던 백이강이 내 말소리에 눈을 돌렸다. 음… 딱히 이런 상황에서 할 법한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뭐, 내가 언제는 때를 가렸나?
“그 왜,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고들 하잖아.”
물론 백이강은 죽을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을 테니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거, 너더라.”
“….”
안 그래도 새벽이라 조용한데, 백이강까지 아무런 말이 없으니 두 배로 적막했다. 단지 어둠에 잠긴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직시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냥 그렇다고…….”
백이강이 끝끝내 침묵을 유지한 탓에 혼자 떠든 것 같아 머쓱해진 나는 괜히 목덜미를 긁으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음의 문턱에 선 내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엄마도, 아빠도, 누나들도 아닌 백이강이었다.
내가 쓰러지는 순간, 내게 가장 먼저 손을 뻗었던 사람.
생명이 스러지는 그 순간에도 나는 백이강의 온기에 닿아 있었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는 엄마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던데… 이런 불효자가 있나. 이 사실은 관짝까지 비밀이다.
별안간 가만히 있던 백이강이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재가 가득 쌓인 구석의 경계선을 밟은 그의 얼굴 위로 새파란 달빛이 스몄다.
어스름한 그림자 아래 드러난 건조한 시선과 더없이 차가운 표정이 눈에 익었다. 빙의한 이후로 늘 봐온 백이강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내게 점점 다가올수록, 나도 모르게 침대 위쪽으로 슬금슬금 물러나게 되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잡아먹힐 것 같다는 불길한 기운이 든 탓이었다. 다시 말해,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인간의 본능적인 뒷걸음질이랄까.
그러기도 잠시, 기어이 내 등에 침대 헤드가 닿았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데가 없었다.
“뭐야…. 갑자기 왜, 왜 그러는데….”
뭣도 모르고 덜컥 겁부터 집어먹은 나를 아랑곳하지 않은 백이강은 계속해서 내게 다가와, 종내 침대 위로 올라왔다.
덕분에 침대 헤드에 거의 들러붙다시피 한 나는 순식간에 다리 사이로 들어차는 백이강을 보며 당황한 눈을 연신 깜박였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도망갈 거였다면 침대를 벗어났어야 하는 건데…. 당혹한 나머지 안일하게 굴다가 퇴로가 완전히 막혀 버렸다.
곧이어 천천히, 아주 조금씩 백이강과 나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이내 그가 내 코앞까지 다가섰을 때, 마침내 백이강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