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돌아보니 목에 시뻘건 자국 두 개가 선명히 새겨진 것이 보였다. 어떻게 봐도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자국인지라 벌레에 물렸다고 둘러대기는 어려울 듯했다.
퍽 야릇한 그 상흔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순간 공포심인지 뭔지, 심장 한편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이내 손으로 입가를 가린 나는 침음하며 탄식했다.
백이강, 왜 갑자기 폭주하는 거지? 대체 무슨 버튼이 눌렸길래 그동안 전연령가로 행동하던 놈이 난데없이 입을 못 써서 안달이냐고!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이 어울리지 않는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생각에 잠기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급하게 원래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느릿느릿 커튼 밖으로 나섰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백이강이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떴다. 그러고는 어스레한 미소와 함께 내게 손을 뻗었다.
“청도운, 이리 와.”
언젠가부터 툭하면 저런 식으로 날 부른단 말이지. 내가 무슨 개인 줄 아나? 오라고 하면 가게.
…그렇지만 안 갔다가는 또 깨물려고 들지도 모르니까.
나는 별수 없이 못마땅한 표정을 겨우 억누른 채 백이강에게 다가갔다. 순순히 앞에 서자 그가 보기 드문 온화한 눈으로 나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드레스는 어때.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어딨어? 처음부터 내 의사는 없던 드레스인데!
…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참자.
“나보단 네가 마음에 들어 보이던데.”
“그래?”
말끝을 올린 그의 보랏빛 동공 위로 뜻 모를 이채가 돌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묘하게 불길한 게, 조짐이 영 안 좋았다.
음, 일단 지금은 최대한 비위를 맞춰주자. 여기서 붙어먹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까….
그런데 내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백이강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만들라고 하고.”
순간 너무 황당해서 숨 쉬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다시 만들라고 한다니, 진심인가? 당장 내일이 약혼식인데? 그랬다간 라타가 매일 밤 나를 저주할지도 모른다.
아니, 저주로만 끝나면 다행이겠지. 한동안 의상실 근처로는 지나가지도 못할 거다.
하지만 백이강은 전혀 괘념치 않는 얼굴로 원하면 말하라며 너그러운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이게… 이게 폭군이 아니면 뭔데……!
“됐어. 저거면 충분해.”
“별로 좋은 얼굴이 아닌데.”
어딘가 비뚜름한 백이강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이 몹쓸 흑막이 내게 원하는 대답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 같아서는 끝까지 모른 척하고 싶은데, 그가 바라는 답이 뭔지 알 것 같다는 게 너무 서글픈 일이었다.
하긴, 어차피 백이강 앞에서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망할 가스라이팅! 이거 한국에서는 범죄야, 범죄!
“…드레스 예뻐.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긴 개뿔, 들겠냐?
속내와는 전혀 딴판인 기계 같은 대답이었지만, 역시 백이강이 바라던 답이 맞는지 그의 입가가 흡족하게 휘어 올랐다.
“네가 좋다니 다행이군.”
정말이지, ‘저 망할 폭군 성정이 없어졌나?’ 하면 도로 돌아오는 게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이래서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건가.
우여곡절 끝에 피팅을 마친 우리는 자연스레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멀쩡히 일하던 백이강이 내가 웨딩드레스를 보러 의상실에 간다는 소리에 다 때려치우고 곧장 나오는 바람에 필립이 울고 있다나 뭐라나.
이 사달이 난 게 내 잘못은 아닌 것 같다마는… 괜히 미안하단 말이지.
일단 혼자서 일하고 있을 필립을 위해서라도 백이강을 집무실에 도로 앉혀두고, 나는 마법부에 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