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의 인터뷰 이후, 여기저기서 러브 콜이 쏟아졌다.
각종 토크 쇼와 잡지, 버리아어티 쇼와 예능 프로그램까지.
하지만 윤 대표는 도형을 쉽게 내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괜히 얼굴을 비치며 말을 얹을수록 잡음이 많아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시간이 흘러, <별을 담은 잔> 방영일이 다가왔다.
그럴수록 해성과 도형의 관계가 재조명되고, 그들을 궁금해하는 기사들이 하나둘 늘어 갔다.
결국, 윤 대표는 조 대표와 상의해 해성과 도형을 심야 토크 쇼에 내보내기로 했다. 처음부터 결정된 일이었으나,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들이 출연하기로 한 건, 점잖은 MC의 진행 덕인지 시청자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좋아요. 도형이와 함께 나가서 이야기를 한다면, 괜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줄어들겠죠.”
해성은 두 손 들고 찬성했다. 도형과 함께 프로그램을 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제법 들떠 있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스케줄을 하는 내내 가슴이 뛰어 진정되지 않았다. 집에 가서 도형에게 말한다면, 아니 이미 알고 있겠지.
뭐라고 말할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잔뜩 기대했건만.
“…잘, 모르겠어요. 좋은 건지.”
막상 집에 와 보니 도형은 어쩐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그게 무척 서운했지만 해성은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왜?”
물론, 노력과 행동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다.
잔뜩 기대하며 집에 돌아온 탓인지,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조금 서운했다.
“우리 둘이 같이 나가서 이야기하면, 괜한 억측들은 더 줄어들 거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 주면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전에 도형에게 약속했던 걸 떠올린다면 토크 쇼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고 말해야 하는 게 옳다.
도형이 싫다고 하는 건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고.
내키지 않는다면 굳이 시도하지 않는 게 맞을 테니까.
하지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면. 의미 없는 변명이나 이유들이 자꾸만 머리를 떠돌았다.
“그게… 반대가 되면요?”
물론 도형도 해성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저 또한 해성과 똑같이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랬다.
마냥 좋아할 수 있는 일일까. 만약, 그때와 같은 비난들이 제게 쏟아진다면.
또 이름을 알리고 싶어서, 저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하경을 짓밟고 해성을 이용한 게 아니냐는 말이 들린다면.
‘…이번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한번 바닥을 경험해 본 사람은 어떤 시련이 와도 무던하게 넘긴다던데.
저는 그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넘어지고 쓰러진 채로 영영 그 자리에 머무를 것만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물론, 여론이 저들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건 알고 있다. 댓글과 커뮤니티의 반응 역시, 저들에게 우호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미 한번 경험을 해 봤으므로 더욱, 불안했다.
“도형아.”
그때, 해성이 도형의 손을 힘껏 그러쥐었다.
하지만 도형은 해성을 마주하지 못했다.
곱씹고 있는 불안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제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이 어둠을 그에게 내보일 정도의 용기는 없다.
“김도형.”
나긋한 목소리에 슬쩍 눈을 들어 마주하자, 해성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도형의 몸을 제 품으로 끌어당긴다.
뒤이어 해성의 페로몬이 잔잔하게 퍼져 나와 도형의 코끝에 살랑거린다.
제 욕구를 들끓게 하는 강한 힘이 아니었다.
마치 저를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는 듯. 부드럽고 잔잔한 향이었다.
“내가 지난번에….”
언젠가의 일을 기억하는지 물으려고 했으나, 제가 한 말이 워낙 많아야지.
답지 않게 이것저것 줄줄 말하지 않았나.
그래, 꼭 사람이 바뀐 것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다.
“말한 적 있지. 네 그림자에 갇히는 건 내가 될 거라고.”
“…응.”
“기억해?”
“기억해요.”
깊이 골몰하고 있으면서도 제 말에 재깍 대답하는 모습에 웃음이 픽 새어 나온다.
그의 몸을 힘껏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짙은 입맞춤을 남긴다.
“그런데 왜 걱정하지.”
거추장스러운 수식어나 감정을 담지 않은, 오롯한 제 진심이었다.
“나, 어디 도망간 적 없는데.”
가슴 한구석으로 크게 진동이 일었다.
아, 짧게 이어지는 탄식 끝으로 옅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내가 전부 막아 줄 수 있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들이 하는 말이나, 마음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응. 알아요.”
“하지만 딱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건 있어.”
해성은 도형의 어깨를 힘껏 붙잡았다. 그러곤 제 품에서 떼어 내 한참 그 속을 들여다보며 눈을 마주한다.
“적어도 지난번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
“…….”
“붙잡아 보지도 못한 네 손을 놓는 일도 없을 거고.”
“…형.”
“아무것도 모르고 날 선 말을 듣게 놔두지도 않을 거야.”
“그러다, 형이 다치면요?”
말을 뱉고 난 뒤 깨달았다.
두려운 건,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과 말이 아니었다.
해성에게 쏟아질 야유와 비난이었다. 지금까지 착실하게 쌓아 온 해성의 세계가 저 하나로 무너지게 될까 덜컥 겁이 났다.
“이것도 지난번에 말한 건데….”
하지만 해성이 보여 주는 건, 옅은 미소뿐이었다.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눈빛으로 도형을 가만히 지켜봤다.
“나,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야. 김도형.”
“형이 지켜 온 것들이 무너질까 봐-”
“이 정도로 무너질 일이었다면 언제고 무너졌을 거야. 그리고 내 다짐은 여전해.”
그의 커다란 손이 도형의 머리를 쓸어 넘긴다.
사랑스럽게 도형을 바라보던 눈꼬리가 길게 휘어지고,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낭창한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모든 걸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
더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모든 걸 버리라고 할 생각은 없다지만, 변함없이 제 마음을 드러내는 해성의 굳건함에 할 말을 잃고야 만다.
“너를 위해서라면 전부 버릴 수 있어. 정해성의 명성, 지금의 자리, 앞으로 내게 올 기회까지도 모두.”
“왜, 그렇게까지….”
“김도형을 너무 사랑하니까.”
더는 우는소리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만한 각오로 부딪치겠노라 말하는 해성의 마음에 어떻게 딴지를 건단 말인가.
부정적인 생각으로 두려움에 떨 수만은 없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내일을 무서워하며 나아가지 못하는 건, 오로지 저만을 위한 해성의 다짐을 비웃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무 늦게 깨달았잖아. 그에 대한 각오야. 물론, 언제든 행동으로 옮길 수 있고.”
도형은 제 아랫입술을 힘껏 짓씹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 간신히 참아 내며 다시금 품으로 폭 안겼다.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응, 짧게 전할 수 있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언제고 내게 도망쳐.”
지금도 당신이 내 도피처라는 말은, 입안에 걸려 있다.
“내가 네 방패가 되어 줄게. 댐이 되어 주기도 하고, 가끔은 온전한 너만의 세상으로 남을게.”
나직이 대답하던 해성은 도형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괜찮다는 말을 대신한 손짓이었다.
“응.”
결국, 도형 역시 어렵게 대답을 했고.
“…나가요. 프로그램.”
한참이나 고민하던 것들을 떨쳐 낼 수 있었다.
“같이, 이겨 내요.”
비록 그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고 해도.
해성과 함께라면 모두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는 혼자 울던 김도형이 아니었고, 덩그러니 홀로 남아 버린 세상도 아니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며 저를 꽉 안아 주는 해성의 품이 따뜻했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만 같은 행복이 도형의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
촬영장이 분주했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게스트, 해성과 도형이 출연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조명부터 음향, 세트장의 준비까지 완벽했다.
한차례의 리허설을 거친 뒤, 드디어 녹화 준비가 끝났다.
해성과 세트장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던 도형이 숨을 고르게 쉬며 주먹을 힘껏 말아쥐었다.
“긴장돼?”
해성의 물음에 도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요.”
이럴 때 솔직해지는 건 귀엽지.
입꼬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리던 해성이 도형의 손 위를 살포시 덮어 잡아 주었다.
“잊지 마.”
그의 낮은 목소리에 도형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
그보다 더 힘이 되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도형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짧은 대답이었으나 조금은 차분해진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잠시 후, PD와 조감독의 사인으로 방송이 시작됐다.
“요즘, 대한민국이 아주 떠들썩하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파경과 재결합으로 모두의 귀추를 주목시키고 있는 커플을 모셨습니다. <별을 담은 잔>으로 새롭게 돌아온 정해성 씨, 김도형 씨. 안녕하세요.”
소개와 이어진 MC의 인사에 해성과 도형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벌써 20년째 여러 프로그램의 진행자 자리를 꿰차고 있는 그녀는 은태란. 과거 아나운서로 활약하다가, 우연히 맡게 된 프로그램에 정착한 케이스였다.
“안녕하세요, 정해성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해성 씨는 화면보다 실물이 낫네요. 훨씬 잘생겼어요.”
“감사합니다.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도통 이런 자리에 나오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하기엔 넉살 좋은 어투였다.
태란은 해성의 말에 웃으며 도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김도형입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해성은 몰라도 도형은 그녀를 만난 게 처음이 아니었다.
“우리, 이번이 두 번째죠? 두 분의 첫 열애설과 결혼 소식을 이 프로그램에서 알렸던 것 같은데.”
오래전, 도형이 해성과의 열애설을 인정하며 출연했던 프로그램이었다.
태란은 해사하게 웃으며 도형을 바라보다가 이내 질문을 죽 써 둔 카드를 힐끔 쳐다봤다.
첫 질문은 으레 그렇듯, 드라마에 관련한 이야기였다.
나태석 감독과 두 번째 촬영이라는 점.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소연과의 촬영이라는 점.
간략하게 드라마에 대한 소개를 한 뒤,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됐다.
“사실 두 분도 아실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나오신 건 아닐 테니까.”
“그렇죠. 언제 질문하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성 씨는 빨리 밝히고 싶은 모양이네요?”
태란이 웃으며 말하자, 해성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으나, 그는 이 바닥의 섭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과하게 들뜨거나 안달이 난 모습은 오히려 독이 된다.
이전에 그러한 모습을 보여 주어 가산점을 얻었다면, 이제부터는 진중한 모습으로 임해야만 한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지 않나요? 딱 그런 마음입니다.”
“소문에는 해성 씨가 그렇게 과묵하다더니, 아닌 것 같아요. 말을 너무 잘하시는데요? 도형 씨, 해성 씨가 평소에도 이런 편인가요?”
“예전에는 분명 그런 이미지였는데, 요즘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요.”
“진짜 몰라?”
“네?”
갑자기 치고 들어온 해성의 질문에 도형은 놀랐고, 태란은 그런 두 사람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저희가 이번 특집을 준비하면서 질문을 몇 개 추려 봤는데요. 먼저, 해성 씨가 두 분의 관계를 밝히기 전에 스캔들이 있었잖아요?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