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The And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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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늘 행복하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라고 했던가.
해성은 인생 최대의 난관 앞에 봉착하고 말았다.
전날 프로포즈를 하고, 도형과 추억의 카페를 간 것 까지는 좋았다.
행복한 데이트를 갈무리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핸드폰을 보던 도형이 사색이 된 얼굴로 해성을 마주했다.
 
‘형, 엄마… 화났대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 머리를 번뜩 스쳐 지나갔다.
저들의 관계를 알맞게 정립하고자 일을 벌이고, 수습했다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도형의 가족들.
물론, 제 가족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도형을 두 팔 벌려 환영해 줄 것이다.
처음 결혼을 할 때도 저보다 도형을 더 끔찍이 여기던 사람들이니.
하지만 도형의 어머님은 말이 다르다. 처음부터 저와의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니까.
 
‘도형이가 너무 외로워질까 봐 겁이 나.’
 
언젠가 저를 앞에 두고 한 말이었다.
어쩌면 도형의 모친은 그때의 제가 일에 더욱 치중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한데, 지금 그 어머니가 화가 났단다.
결국, 도형을 설득해 다음 날 곧장 어머니를 뵈러 가기로 했다.
그게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이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자리가 자리이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딱딱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평소 같았다면 어색하다고 이야기했을 도형의 어머니도 당연하다는 듯 존댓말로 받아쳤다.
 
“…저는 도형이 엄마인데, 정해성 씨에게 그렇게 불릴 이유 없어요.”
“엄마….”
“넌 조용히 해.”
 
평소에는 말대꾸만 잘하던 도형도 제 엄마의 목소리에 입을 꾹 닫고 말았다.
저도 잘한 건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해성과의 관계에 대해 언질이라도 줬어야 했는데, 자신의 상황에만 급급하다 보니 깜빡 잊고 말았다.
슬쩍 눈을 굴려 동생 은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은형도 시선을 피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건 도형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똑같이 모친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제가 못 미더우시다는 점,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 같아도…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
“하지만 가벼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지난번에는, 가벼운 선택이었고요?”
 
냉철한 한마디에 해성은 또 한 번,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탓인지 다리가 저려 오기 시작한다. 그 위에 얹은 손을 꽉 쥐었다가 펴며 입을 열려는데, 도형의 모친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방송을 처음 봤을 때.”
 
그리고 다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곧게 세운 한쪽 무릎을 힘껏 그러쥐다가,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듯 한숨을 터트렸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엄마.”
“내 새끼,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사람 구실 못하면서 산 것만 2년이에요. 이제 겨우, 겨우 사람답게 산다 싶었는데. 또, 왜 하필… 정해성 씨인지.”
 
울음 섞인 말을 어렵게 내뱉은 그녀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오래전,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깊은 밑바닥까지 끌려 내려갔는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도형을 보러 갔을 때, 그녀는 제가 무너지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해야만 했다.
도형은 새카만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리 내어 울지도, 누군가를 탓하지도 못한 채로.
방에서 나올 때까지 숱한 날을 기다렸다. 제대로 밥을 먹고, 억지로라도 웃어 주기까지 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왜.”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그 어둠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만난 빛이, 제 아들을 어둠으로 기어 들어가게끔 만든 장본인이라니.
하늘을 원망해야 할지, 또 같은 선택을 한 제 아들의 등짝을 두드려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해성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모습에 놀란 건, 비단 도형의 모친만이 아니었다.
도형 또한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해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도형이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방송에 나와서 한 말, 늘 그랬듯 방송이기에 한 말은 아닙니다.”
“…….”
“형, 그만해요. 괜찮아. 얼른-”
“입 발린 다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도형이에게 어떻게 할 거라는 약속 같은 것도, 어머니께 하지 않을 겁니다.”
 
해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한다.
 
“행동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도형이 꼭, 행복하게 해 줄 겁니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그들을 반대하더라도 도형은 이미 해성과 미래를 살아가겠노라 다짐했다는 사실을.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너무 높이 올라간 사람은 옆에 두지 못하는 법이라고 말렸으나, 그때도 도형은 해성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뭔지,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닫고 만다.
 
“정말, 다 버릴 수 있어요?”
 
그러니 결국, 방송에서 말했던 그의 다짐을 되묻는 수밖에.
 
“네. 전부 버릴 수 있습니다.”
“정해성 씨가 이룬 게, 그렇게 많은데도?”
“도형이를 또 한 번 놓치는 일보다는 낫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걸 놓는 일.”
 
진실인지 거짓인지 당장은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다짐만큼은 진심이리라 믿었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까지 와서 무릎을 꿇을 이유도 없었겠지.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쓰린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아요.”
“엄마!”
 
도형의 외침에 잠시 말을 잇지 않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선으로 해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켜볼 수는 있겠죠. 만약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물론,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지만.
지금은 이런 으름장이라도 놔야만 했다. 그래야 제 아들을 조금이라도 더 소중히 생각할 것 같아서.
 
“꼭,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더불어 해성이 허튼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얄팍한 믿음도 존재했다.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사이이니, 이 정도 믿음은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어차피 제가 말려도 되지 않는 거라면, 지켜보는 일로 만족해야겠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던 그때, 도형이 다가와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고마워, 엄마. 그리고…미안해.”
 
이어지는 말에 그녀는 말없이 눈물을 삼켰다.
어둠에 갇혀 있던 도형을 떠올리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잘 살게. 꼭… 엄마 걱정 안 할 수 있도록, 행복해질게.”
 
아무 말도 없이 도형의 등을 토닥이던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저를 올려다보는 세 사람을 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먹고 가. 어제 갈비 좋은 거 들어왔어.”
 
결국, 종착점은 엄마의 마음이다.
조용히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도형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번에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보란 듯 잘 살고 말 거라는 다짐이 한층 더 강해졌다.
 
***
 
이후, 두 사람은 결혼식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화려한 결혼식은 한번 해 보았으니, 이번에는 가까운 사람만을 모아 조촐하게 진행하자는 도형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두 사람의 예복을 맞추러 다녔다. 이전에는 책자만을 보고 선택했으나, 이번에는 함께 보고 싶다는. 이 또한 도형의 뜻이다.
 
“형, 이거 어때요?”
 
새하얀 턱시도를 입고 나오는 도형의 모습에 책자를 보던 해성이 탁! 소리가 나도록 책을 덮었다.
한참 도형을 바라본다. 순백색이 저렇게 잘 어울렸던가. 아니면, 오늘따라 도형이 빛나 보이는 걸까.
 
“…예뻐.”
“그 말만 벌써 여섯 번째야.”
“뭘 입어도 예쁜데 어떡해.”
“…웃겨, 진짜.”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지만, 그 말이 싫지만은 않은지 도형 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꼬박 3일 동안 예복을 골랐다. 출장 서비스를 위한 케이터링 업체를 선별하고, 사회와 주례를 맡아 줄 사람들까지 섭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원래 살던 집을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가도 좋을 테지만, 새로운 곳에서의 시작 또한 괜찮을 테니까.
두 사람의 새 보금자리는 지금 해성이 마련한 그 집이었다.
 
“도형아, 이건 어떡할까.”
 
한창 집 정리를 하던 중, 해성은 옷장 구석에서 커다란 박스를 발견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도형에게 들고 가자,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게 대체 뭐길래. 의아하게 생각하던 해성이 박스를 바닥에 내려 두고 펼쳐 보았다.
그 속에 있는 건, 두 사람의 첫 번째 결혼식 사진들.
커다란 액자와 앨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걸 아직도 안 버리고.”
 
속이 헛헛해졌다. 저와의 모든 추억을 끌어안은 채 홀로 견뎌 냈을 도형을 생각하니 더욱.
 
“어떻게 버려요. 이걸.”
 
도형은 해성의 곁에 다가와 씁쓸하게 웃었다.
박스 안에서 액자를 꺼낸 도형이 그 위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래두, 뭐… 좋네.”
“뭐가 좋아.”
“우리 집에는 결혼사진이 두 개일 테니까.”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도형의 모습에 해성은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정말.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그 말이 퍽 사랑스러워서, 도형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어 주었다.
 
“세 번째는 없도록 할게.”
“당연하지. 이걸 어떻게 세 번이나 해. 못 해요. 힘들어.”
 
너스레를 떨며 고개를 젓던 도형이 다시금 박스 안을 살폈다.
그리고 조그만 상자 하나를 꺼내 열어 본다. 그 안에 있는 건, 해성과 나누어 끼었던 결혼반지.
두 사람은 말없이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진실 어린 약속도, 행복을 꿈꾸는 미래도 없던 증표다.
하지만 도형은 외면하지 않았다. 반지 하나를 꺼내 해성에게 끼워 주고는,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걸, 내가 껴도 되는 건가.”
“그럼. 당연하지. 처음부터 형 반지였는데.”
 
언제나 정직하고 올곧게 저를 마주하는 도형에게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돌려줘야 채워질 수 있을까.
드넓게 뻗어 가는 그 애정이 고맙고 미안해서, 해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절대 빼지 말아요.”
 
담담하지만 간절함이 담긴 한마디에 해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러곤 도형의 반지를 빼 반대쪽 손에 끼워 주며 그 위에 입술을 맞댔다.
 
“절대로 뺄 일 없을 거야. 두 번 다시는.”
“…응. 그거면 됐어.”
 
과거와 현재를 모두 짊어진 두 사람의 얼굴에는 행복만이 남아 있었다.
몇 번이고 거듭된 약속을 마음에 담은 채, 둘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두 개의 결혼사진, 결혼반지.
그리고 두 번째 결혼 생활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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