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첫 단락, 첫 페이지.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콘텐츠다. 『설국』의 첫 문장은 한 번 읽으면 좀처럼 잊을 수 없다.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책을 펼쳐 드는 순간 하얀 바닥과 캄캄한 밤이 공존하는 흑백의 세계로 미끄러지게 만드는 저항할 수 없는 문장이다. 『이방인』의 시작도 충격적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관습화된 감정에 대한 거부를 담고 있는 이 문장은 무방비상태에서 듣는 총성과도 같았다. 첫 문장에 대해서라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해도 지치지 않을 것 같다. 처음보다 끝에 더 관심 갖게 된 건 '경장편소설' 시리즈를 만들면서부터다. 경장편소설은 중편소설보다 길고 장편소설보다 짧다. 지금은 경장편소설로 출간되는 작품들이 많지만 수년 전만 해도 경장편이라는 분량은 익숙한 길이가 아니었다. 가장 익숙하지 않은 건 작품이 끝나는 지점이었는데, 경장편은 다른 길이의 소설에 비해 끝맺는 방식이 독특하고 낯설다. "이렇게 끝나나요?" "충격적인 결말!" 마흔여섯 중년 남성의 '자위 개발서'라 할 수 있는 경장편 『자기 개발의 정석』을 출간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참고로 작가는 처음이 아니라 끝을 정해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경장편 소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손꼽히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는 이렇게 끝난다. "노래할까요." 은교 씨와 무제 씨의 여백 가득한 대화는 돌림 노래처럼 서로의 말을 받는다. "무서워요/ 무서워요?/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두려움을 잊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노래할까요." 이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