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폐허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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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야영지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나는 눈앞에 있는 지도가 덜덜 떨려 눈을 부릅떴다.
……왜 이렇게 지도가 움직여 대냐.
그러나 사실, 내 분노로 손이 발발 떨려 쥐고 있던 지도가 같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양옆에서 정신 나간 주제로 말을 하는 놈들을 애써 외면하는 중이니까.
‘저놈들에게 반응하면 휘말리고 말 거다……. 그러니 절대 반응해서는 안 된다. 무시하자, 무시하자.’
그렇게 되뇌며 야영지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그러나 뚫린 귓구멍으로 양쪽에 있는 다비와 루스의 대화가 들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복이는 목덜미가 예민해서 빨아 주면 좋아해.”
“눈치가 없습니까. 기복 님은 목덜미가 아닙니다. 깊숙한 곳을 좋아합니다.”
진지한 그들의 목소리에 목구멍에서 욕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며 참아야 했다.
‘반응하지 말자, 반응하지 말자…….’
한 번 더 지도의 위치를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보스는 목덜미를 빨아 주면서 깊숙한 곳까지 넣어 줘야 하는군.”
몇 걸음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이드의 모습이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머릿속에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던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하나도- 하나도 안 좋아, 안 좋다고!”
몇 시간이나 양옆에서 정신 나간 대화를 해 댄 놈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내가 화를 내자 놈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눈을 찡그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쪽이 엉뚱한 곳이 성감대라고 하니 기복 님이 화를 내잖습니까.”
“네 녀석이랑 했던 엉터리 섹스가 생각나서 화를 내는 거겠지.”
두 사람은 방금과 같이 태연한 어조로 말을 하면서 서로를 한심하다는 듯이 흘겼다.
“닥쳐, 좀 닥쳐! 네놈은 저딴 소리에 반응하지 말-!”
나는 두 놈을 향해 노발대발 소리를 치다 자이드를 휙 쳐다봤다. 이 두 놈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이드도 상당히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향해 타박을 할 때다.
“……둘 다 아닌가.”
자이드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내려갔다. 표정이 담겨 있지 않은 무감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내가 멈칫하자 앞에 있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보스의 성감대는 내가 알아보겠다.”
자이드가 내 앞으로 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몸집을 가진 놈이 정면에서 거침없이 걸어오자 절로 주춤했다. 짐승 한 마리가 다가오는 것 같아 손끝부터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훌쩍 다가온 자이드와 한 걸음 채 남지 않았을 때다.
나는 메인 목을 쥐어짜며 기겁하듯 소리쳤다.
“썅, 오, 오지 마! 오지 말라- 흣.”
불현듯 커다란 손이 내 목덜미를 잡고 쓸었다. 문질러지는 감각에 등줄기가 오싹해져 왔다. 경련하듯 몸이 떨렸다. 그러자 지척에 있던 자이드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목덜미. 맞다니까?”
오른쪽에서 다비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삐걱삐걱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다비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자이드를 빤히 보고 있었다.
어쩐지 서늘한 기운이 맴돌아 몸에 소름이 돋아왔다.
“손 떼시지요.”
왼쪽에서는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스의 목소리와 함께 겨울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몸에 한기가 돌았다.
내가 몸을 움츠리자 눈앞으로 루스의 하얀 손이 뻗어졌다.
“다시, 기복 님을 치유 불능 상태로 만들고 싶습니까.”
루스의 손에 힘줄이 툭 튀어나온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살벌한 손이 다비의 팔에 닿았다.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비의 시선이 내게 닿았고, 목덜미에 닿은 손가락의 끝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정적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 즈음, 목가에 닿아 있던 손이 뒤로 빠졌다. 이어서 다비에게서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기복이에겐 손 떼지.”
시선을 내리자 다비 녀석이 제 팔을 붙들고 있는 루스의 팔을 잡고 있는 게 보였다. 다비의 손에도 살벌하게 힘줄이 불뚝 튀어나온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기복이가 네놈이랑 밤늦게 들어왔었지.”
칼날 같은 공기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나는 다비의 목소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차려졌다.
“그 시간까지 뭘 했는지 묻고 싶네.”
다비의 묘한 목소리와 함께 자이드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가 궁금함을 담은 눈빛을 하더니 곧장 물어왔다.
“두 사람, 왜 함께 들어왔는가.”
나는 목이 삐쩍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어제, 저택 방 안으로 들어가다 두 사람과 복도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그들은 뒤따라오던 루스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표정을 굳혔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나는 그들이 뭐라고 입을 떼기 전에 마력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온갖 헛소리를 하며,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 말에 놈들은 더는 캐묻지 않았고 다행히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무사히 넘어갔다 싶었는데…… 다비 놈이 어젯밤에 관해 물으니 심장이 덜컹거렸다.
“…….”
내가 입술을 어물거리며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려던 차다. 옆에 있는 루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했을 것 같습니까. 그 야밤에.”
나는 훽 하고 루스를 돌아봤다. 루스가 전날 밤을 상기하듯 느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뗐다.
그 낌새를 눈치챈 나는 얼른 놈의 입을 막기 위해 엇갈려 있는 두 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하긴 뭘 해……! 사, 산책하다 우연히 만난 거라고.”
나는 놈들을 향해 와락 말을 뱉었다. 그러자 두 놈의 의심 어린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루스가 살짝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모습이 보였고, 나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다. 더해서 루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앞에 있는 놈들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러자 팔을 부러뜨릴 듯 잡고 있던 놈들의 손이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냅다 엇갈린 녀석들 팔을 떼어내며 말을 뱉었다.
“어, 어두워지기 전에 주변에 야영지 좀 찾아봐!”
이러다 길바닥에서 자야 할 판이라고 뒷말을 이으며, 다비 놈은 오른쪽, 루스는 왼쪽, 앞에 있는 자이드에게 저 앞쪽을 찾아보라며 등을 팍팍 떠밀었다. 그러나 숲은 위험하다며, 놈들이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여기서 가만히 있을게! ……잠 정도는 편히 자고 싶다고……!’라며 놈들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그들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봤고, 나는 필사적으로 놈들을 떼어내려 설득했다.
그도 그럴 게, 어제 일을 딱히 상기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다비 놈이 또 2배 타령을 할까 봐 겁이 났으니까.
나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결국 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멀어지는 놈들의 뒤통수를 보며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아…….”
주변이 조용해지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놈들의 모습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평화로움을 찾아오자 진이 쭉 빠지는 기분이 함께 들었다.
어디 쉴 만한 곳을 찾다가, 가까이에 있는 나무로 다가갔다.
나는 빳빳한 나무에 등을 기대며 우거진 수풀로 채워진 정면을 쳐다봤다. 산들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동시에 중얼거리듯 말이 튀어나왔다.
“주의한다 하지 않았냐…….”
한풀 꺾였던 놈들이 다시 으르렁대고 있었다. 놈들은 예전보다는 주의하긴 했다. 그러나 내가 녀석들의 마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선에서만 주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이른 아침부터 전사 마을을 빠져나와 해가 지고 있는 지금까지 마력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정신 나간 말들로 싸워대고 있었다.
“…….”
나는 이미 수풀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놈들이 간 방향을 쳐다봤다.
그래도 놈들이 찾으러 갔으니, 내가 한참이나 지도랑 씨름하며 찾던 야영지는 금방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능력치가 어마어마하게 높아 감당이 안 되는 게 문제긴 한데- 막막할 때는 놈들이 그만큼 도움이 된다. 이런 걸 양날의 검이라고 하는 걸까…….
“……느긋하게 쉬면서 기다리자.”
난잡한 소리에 혹사당한 귀와 온종일 걸어오느라 떨어진 체력에 휴식을 줄 겸 바닥에 앉았다.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나무들 틈으로 불그스름한 빛이 들어왔다. 해가 저물고 있는 숲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시원한 바람이 피부를 간질이며 지나갔다. 눈썹 가에 있는 앞머리가 살랑거렸다. 사사삭, 주변에 있는 나무들도 흔들렸다. 온갖 흉측한 소리에 시달린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듯하다.
“-어디 보자.”
나는 시선을 내리며 손에 든 지도를 내려다봤다. 지도에는 현재 내가 있는 곳 주변으로 ‘야영지’라는 글자와 함께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야영지는 보이지 않았다. 없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아니면 우거진 숲 때문에 못 찾는 걸 수도 있겠다.
“원을 이렇게 그려 두면 어떡하냐고.”
나는 투덜거리며 지도를 쳐다봤다. 서쪽은 마을 하나 보이지 않고 울창한 숲 표시만 잔뜩 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야영지와 산, 약초 같은 것들이 추가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야영지를 표시한, 빨간 원은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휘갈겨진 동그라미의 크기가 애매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참 난감했다.
밤의 숲은 위험해서 해가 저물기 전에는 야영지에 도착해야 하는 상황이다. 야영지 주변에는 마을과 같은 결계가 처져 있어 안전할 테니까.
나는 ‘야영지’에서 ‘바위산’이라 표시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참 남았네.”
불구가 된 남자가 용을 만났다고 말한 곳이자, 목적지였다. 그래서 오늘 해가 뜨는 시간부터 쉬지 않고 서쪽에 있는 바위산을 향해 걸어왔지만,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내일도 엄청 걸어야겠네…….”
나는 손에 든 지도를 접으며 등에 닿는 나무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고 고즈넉한 숲속의 소리를 들었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놈들이 와야 할 텐데-’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으흠?”
멀지 않은 곳에서 웅성웅성, 사람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들로 가려진 그곳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불빛이 살짝 보인 듯했다.
“어-.”
나는 눈을 깜빡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 소리, 불빛, 그리고 지도에서 표시된 위치가 이쯤이었으니까…… 저기가 야영지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곧장 불빛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찾았구나, 라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걸어가다 멈춰 섰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기대고 있던 커다란 나무 하나가 덩그러니 보였다.
“……기다릴까.”
놈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갈까,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다시 앞으로 몸을 틀었다.
“확인하고 기다리지, 뭐.”
웅성거리는 소리로 보아하니 다른 모험가들이 꽤 모여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천막이 남아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머물 수 있는 천막이 있는지 확인을 하고, 다시 놈들을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향했다. 앞에 있는 수풀들을 헤치고 걸어가자 마침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모닥불을 발견했다. 더해서 불 주변에 사람들이 설렁설렁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저-.”
나는 모여 있는 모험가들을 향해 냉큼 걸어갔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 있는 걸 보니, 야영지가 맞는 것 같다.
천막이 남아 있냐 물어보려 걸음을 재촉하던 나는 문득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주변에 천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영지라기엔 사람들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했다.
가만히 멈춰 있던 나는 다시 한 걸음 떼다, 얼빠진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
열댓 명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닥불 앞에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몸 전체를 가리는 검은 망토에, 후드를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있었다.
그들은 얼빠진 내 목소리를 듣고서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들과 눈이 마주침과 함께 나는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 위에는 차림새와 달리 [잡도적]이라는, 본 적 있는 표식이 붙어 있었다. 더해서 앞에 있는 그들은 모두 레벨 50 정도로 다 같이 파티가 맺어진 자들이었다.
“웬 놈이냐!”
“……무기?”
“무기?”
얼굴을 드러낸 놈들은 나를 보고 사납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러더니 놈들도 내 표식을 보고서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어서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표식은 처음 보는뎁쇼.”
“무기니까 무기상인 것 같습니다요.”
“레벨이 100인뎁쇼. 심지어 보라색 파티도 맺어 있습니다요.”
나는 얼굴에 빨간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수상한 이들의 모습을 얼빠진 채 쳐다봤다. 그러다 그들의 경계 가득한 눈빛을 발견하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인상을 쓰고 있는 놈들을 보니 느낌이 안 좋았다.
나는 당황하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 그냥 지나가는 무기상입니-.”
그 순간 가장 앞에 있던 잡도적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동시에 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수상한 자다, 죽여라!”
앞에 있는 놈이 ‘매우 쳐라!’라는 톤으로 말을 뱉었다. 그러자 열댓 명 되는 놈들이 허리춤에 있는 무기를 잡아 들었다.
놈들이 내게 발을 뗄 즈음 나도 황급히 허리춤에 있는 단도를 집어 들었다.
“아, 아니! 난 그냥 무기상일 뿐이라- 으앗!”
“무기상이 위험한 서쪽 숲에, 그것도 파티까지 맺고 나타날 리가 없다!”
놈들이 우르르 내게 몰려와 사정없이 몽둥이와 칼을 휘둘렀다.
나는 바닥을 구르면서 놈들의 공격을 빠르게 피했다.
도적이 아닌, 잡도적 놈들이라 그런지 화려한 스킬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근거리 공격만 하고 있어, 한두 놈씩 기절을 시키면서 도망치면 놈들을 따돌릴 수 있을 듯하다. 놈들의 능력치 수준을 파악하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다.
“-그것을 불러내라!”
앞에 있는 잡도적이 자신들이 밀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톤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뒤쪽에서 간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요!”
나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공격을 피해 가며 놈들의 목덜미를 쳐댔다. 한 놈씩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잠깐의 틈으로 나는 시선을 돌렸다. 저 간사한 놈이 누굴 부르러 가는가 싶어 흘끗 보니,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모닥불을 향해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산불이라도 내려는 건가. 이런 마법이 난무하는 세계에서는 주변 몬스터들에 의해 불도 쉽게 사그라들 것이다. 큰 타격이 없으리라 생각하던 나는 바닥에 그려져 있는 빨간 마법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뭐 하는-.”
불길한 예감이 심장께를 스쳤다. 나는 간사한 놈을 막으려 서둘러 발을 뗐다. 그러나 이미 나뭇가지가 마법진에 떨어졌다.
둥그런 마법진의 형태를 따라 불이 화르르 타올랐다. 그러더니 바닥에서부터 이글거리는 연기가 피어올라 왔다. 뿌옇게 올라오던 연기는 이내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몬스터……?”
나는 연기가 만들어 내는 형체가 몬스터임을 깨달았다.
눈이 크게 벌어져 연기를 쳐다보고 있자 잡도적 놈이 기고만장하게 말을 뱉었다.
“대장이 거금을 주고 사들인 몬스터 마법진이다! 네놈은 이제 몬스터의 밥이 될 것이다!”
몬스터의 형체가 서서히 선명해짐과 함께 표식이 보이자 나는 우뚝 굳어 버렸다. 잡도적의 말대로 연기는 [Lv. 80]의 표식을 단, 강력한 몬스터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는 앞에 있는 도적 떼만큼이나 많은 수였다.
그 광경에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미, 미친 거 아니냐…….”
이 무식한 잡도적 떼가 무슨 생각으로 이만큼이나 몬스터를 소환하는가 싶어 경악스러웠다. 상대하는 게 버거우면 도망을 칠 것이지, 미친것도 아니고 누가 몬스터를 소환한단 말인가. 자기들도 죽으려 작정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아직 형체가 온전하지 않은 [Lv. 80] 몬스터들의 얼굴이 일제히 나를 향해 있는 걸 보고 의문을 느꼈다. 그러다 곧 그들이 자신만만하게 몬스터를 소환한 이유를 깨달았다.
‘……하나같이 역겨운 피를 뒤집어쓴 이유가 이거구나.’
상황 파악을 한 나는 일단 이곳에서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황급히 뒤를 도는 순간이다. 머리에서부터 퍼쩍거리는 고통이 몰려왔다. 딱딱한 곳에 몸이 쿵 하고 부딪혔다.
“억-!”
머리에서 주르륵 흐르는 액체가 느껴졌다. 붉은 시야 틈으로 흙바닥을 밟고 있는 철 신발이 보였다.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어디서 본 듯한 몽둥이를 들고 있는 잡도적이 보였다. 몬스터에게 정신이 팔려 앞에 있는 허접한 잡도적 놈들을 간과하고 말았다.
“흐…….”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몽둥이에 스턴 기능이 있는지 마비가 되어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잡도적이 몽둥이를 크게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허접한 잡도적에게 죽는 건가, 절망감에 아득해지던 차다.
“어잇? 형님. 이놈 얼굴이 반반한 게…… 대장님 취향인 것 같은뎁쇼?”
어른어른 붉은 시야로 몽둥이를 든 채 멈춘 놈이 보였다. 이어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들자 무리 중 가장 앞에 있었던 잡도적 놈의 얼굴이 보였다.
“흠.”
몽둥이를 든 놈과 함께 형님이란 놈이 수더분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비실비실한 게…… 대장 취향이 확실하다. 피칠을 해라.”
“알겠습니다요.”
간사한 목소리와 함께 얼굴에 두툼한 손이 닿아 왔다. 이어서 얼굴과 목가에 무언가를 바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 치덕치덕 뭔가를 묻히더니 들고 있던 통을 뒤집었다. 찐득하고 뜨거운 게 몸 전체를 적셨다. 쇠 비린내가 역겹게 풍겨와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윽-.”
“몬스터 밥이 안 된 거로 다행인 줄 아슈.”
간사한 놈이 투박한 손으로 널브러진 내 몸을 옆으로 돌렸다. 뭐 하는 건가 싶어 불길함을 느끼는데 놈이 몽둥이를 들어 올려 다짜고짜 내 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흐악-.”
등이 터져나갈 듯한 고통이 밀려와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몽둥이의 강렬한 스턴력이 몸을 강타했고, 이내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 * *
나는 양반다리로 앉은 채 앞을 바라봤다. 어두운 천막 속에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가만히 앞을 바라보다 몸을 양옆으로 흔들어 보았다.
철컹, 철컹.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몇 번 더 흔들어 보았다.
철컹, 똑같이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개냐…….”
나는 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철기둥을 보다 시선을 돌렸다. 사방이 모두 길쭉한 철기둥으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철창 전체를 감싸고 있는 밤 색깔의 커다란 천이 보인다.
불과 몇 분 전, 정신을 차리고 철창에서 어리둥절해 있는 것도 잠시, 호랑이가 살 것 같은 케이지 안에 내가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해서…… 나는 시선을 내렸다.
“……시발.”
어쩌면 개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 시야에는 하얀 레이스가 달린, 하늘색의 드레스가 보였다. 어디 중세 시대 공주나 입을 것같이, 개같이 샤랄라한 드레스였다. 그리고 그 뭣 같은 드레스는 천이 빌어먹게 부족했는지 어깨를 훤히 드러낸 상태로 내 몸에 끼워져 있었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쇄골 아랫부분에 위치한 상의가 판판한 가슴팍을 따라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이 아슬아슬한 느낌이 거지 같아 차라리 발가벗고 싶을 지경이다.
그렇게 드레스를 보고 있으니 빡침과 수치심에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어느 변태 새끼가 이딴 걸 처입혀 놓냐고, 시발……!”
나는 또 한 번 발악하듯 몸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두 손목이 등 뒤에 밧줄로 묶여 있어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지만 수시로 몰려오는 수치심에 계속 발버둥을 치게 된다.
팔목이 쓰라려 왔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동작을 멈췄다. 팔목이 아파서가 아니다. 팔목 따위 신경도 쓰이지 않을 만큼, 더 좆같은 게 보여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나는 머리카락을 배꼽까지 기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발버둥을 칠 때마다 거추장스러운 회색 머리칼이 시야에 치렁치렁 흔들리면서 피부를 때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내 몸에 끼워져 있는 것들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손목에 묶인 밧줄은 마력이 담긴 밧줄이었다. 허리춤에 있던 단도와 물품들도 사라진 상태라 맨손으로 풀 수가 없었다.
“……썅, 아무도 없냐고……!”
조용한 공간에 내 목소리만 초라하게 울렸다. 천막으로 덮인 철창 밖에서는 정신을 차린 후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정하자, 진정해…….”
참을 수 없는 차림새에 자꾸만 속이 뒤틀리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 지랄발광해 봤자 체력만 낭비될 뿐이었다. 이 꼴을 만든 새끼를 만나면 곧장 주먹다짐을 해야 하니까 최대한 체력을 아껴둬야 한다.
“후우…….”
나는 속을 달랠 겸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기억나는 대로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니까…… 야영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망토를 쓴 잡도적들을 만났고, 몽둥이에 맞아 스턴이 걸렸고…… 지금 이 꼴이 됐다.
마지막 기억까지 더듬은 나는 몸을 살짝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해 봤다. 그러자 또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래도, 스턴만 먹혔나 보네.”
혹시 몸 어디가 망가졌나 싶어 움직여 봤지만, 스턴만 세게 먹혔던 모양이다. 몽둥이로 맞은 머리나 등 부분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레벨을 헛먹은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렇게 적막한 곳에서 기억을 더듬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철창 안에서도 내 머리 위 표식만은 보라색으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 찾고 있으려나…….”
보라색 파티가 여전히 빛을 내고 있었다.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면 돌처럼 굳어 버리는 패널티가 발생하지 않은 걸 보니, 세 놈과 멀리 떨어진 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나가는 것도 시간문제다.
나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마어마한 놈들이 나를 찾고 있을 테니까. ‘금방 나가겠네.’라고 태평한 생각을 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그렇게 철창에 등을 기대려던 차다.
무언가를 떠올린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꺼, 꺼내 줘! 나가게 해 달라고!”
미친 듯이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개새끼들아! 꺼내 달라고!”
몸에 피가 온통 밖으로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내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아주 샤랄라한 드레스를 입고 있단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절대, 절대 안 된다.’
절대, 그놈들한테 이런 치욕적인 꼴을 보여줄 수는 없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온갖 수치를 주는 놈들이다. 대놓고 이런 쪽팔리는 꼴을 보인다면…… 그 미친놈들의 반응이 심히 두렵다.
“당장 꺼내 달라고! 이, 개 같은-!”
계속해서 바락바락 목 터져라 악다구니를 썼을 때다.
천막 밖으로 드르륵, 문소리가 들렸다. 다시 닫히는 소리와 함께 뾰족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또각대는 소리가 내 쪽으로 다가옴으로써 철창이 어두워졌다. 천막에 사람 형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기억상 도적 중에 여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실루엣이 여자였다. 나는 잠깐 멈칫하다 말했다.
“나 좀 꺼내-.”
“시끄러워서 정말. 얘, 목청 참 좋다.”
천막 앞에서 콧소리가 가득한 하이 톤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자 기묘한 느낌에 말을 멈춰야 했다.
“…….”
자세히 보자 짝다리를 짚은 여자가 팔짱을 끼고 있는 실루엣이 보였다.
……분명 여자 그림자다. 근데 목소리가…… 억지로 쥐어짜서 말하는 것 같았다.
이질감이 느껴져 몸에 닭살이 피어올랐다.
그러던 차에 한 번 더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장!”
여자 뒤에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그 실루엣은 고깔을 머리에 뒤집어쓴 것 같은 형태였다. 내가 납치당하기 전에 봤던 검은 망토를 쓴 사람의 형태와 흡사했다. 이내 고깔이 앞에 있는 여자 옆에 섰다.
“그, 그 녀석은 오늘 잡아 와서 아직 교육이 안 된 녀석이야. 오늘 밤에 방에 넣어주려고 했는데-.”
“아- 얘구나?”
다시 앞에 있는 여자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보다 목소리가 굵어진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할 만한 아이?”
“드, 들었어?”
“얘가 목청 좋게 소리를 질러대는데, 안 물어볼 수가 있겠니.”
“이, 입에 재갈을 물리는 걸 누가 잊었나 봐.”
당황한 듯 허공에 손을 휘저어 대는 고깔 실루엣이 보였다. 그러더니 앞에 있는 여자가 고깔 어깨를 손으로 찰싹 때리며 말했다.
“나가서 그거 들고 와. 들어온 김에 내가 교육할 테니까.”
“대장이 지, 직접 교육한다고?”
“한 번 더 말해야겠니.”
계속해서 목을 쥐어 짜내는 인위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헉, 아, 알겠습니다요!”
고깔 남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실루엣이 허둥지둥 멀어지기 시작했다.
문소리가 들렸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앞에 있는 여자가 내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쟤는 당황만 하면 산적 시절 말투가 나온다니까.”
“…….”
상황을 파악하려 얌전히 대화를 듣다 보니, 앞에 있는 여자가 말하는 교육이라는 게 뭔진 몰라도 상당히 불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밧줄로 묶인 손목을 존나게 비벼댔다.
도망갈 태세를 갖추려 열심히 버둥대고 있는데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뭐 하니?”
앞에서 여자치고 상당히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철창 전체를 감싸고 있던 천막이 거둬졌다.
“그-!”
바쁘게 팔을 움직이고 있던 나는 갑자기 들어오는 환한 빛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반쯤 젖혀진 천막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몸에 경련이 일었다.
“흐학!”
너무 놀라서 입에서 기괴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게…… 진한 색조 화장이 얹혀 있는, 수염 덥수룩한 남자의 얼굴이 철창 밖에서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수염만큼이나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그 괴기한 얼굴을 마주하니 몸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사람 얼굴 보고 그렇게 놀라면 실례잖니.”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던 남자가 문득 눈을 좁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이어서 수염에 파묻힌 두툼한 입술을 핥았다. 마치 구운 고기를 한 입 베어 먹기 전의 산적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읏흠, 살결이 하얗고 고운 게- 내 취향이네.”
콧구멍을 벌렁거리더니 산적이 내 몸을 쭈욱 훑었다. 그 시선에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무, 무슨-.”
“이쁜이. 한 번 더 무례하게 반응하면 벌을 줄 거야.”
새침하게 턱을 치켜들자 길게 늘어진 턱수염이 철창에 닿았다. 흠칫하던 그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가오는 발소리와 함께 앞에 있는 기괴한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숙였던 허리를 바로 했다.
천막이 다시 가려졌고 나는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대, 대체 뭐냐.’
방금 그 충격과 공포의 여장 남자는 뭐냐고……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대장, 가져왔어!”
“땡큐.”
가까이에서 여장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깐 넋 놓고 있다, 다시 밧줄을 풀기 위해 손목을 비틀었다.
“오늘 애들한테 나 찾지 말라고 전해. 이 방에도 못 들어오게 하고.”
“알겠어!”
“참, 얘. 아까 당황하니까 산적 시절 말투가 나오더라? 품위 없게.”
“주, 주의할게.”
“좋아. 나는 여기 이쁜이랑 시간 보내야 하니까 나가 봐.”
천막 안에서 여장 남자의 대화를 듣다 보니, 이 뭣 같은 드레스를 입게 된 원흉이 저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취향인 이쁜이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지척에서 역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앞에 있던 천막이 다시 화악 거둬졌다. 빛이 확 쏟아지자 눈이 찡그려졌다.
“이쁜이. 자는 거야?”
“……눈깔 삐었냐-.”
건장한 사내한테 뭘 자꾸 이쁜이냐며, 말하려 했다. 그러나 차차 빛에 적응이 된 눈과 함께 말문이 막혔다. 사라진 천막으로 인해 철창 앞에 있는 여장 남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까는 놀라서 얼굴만 보였는데, 지금 보니 커다란 산적 같은 몸에 까만색 초미니 드레스가 입혀져 있었다. 더해서 터질 듯한 장딴지에 끼워 넣은 어마무시한 굽의 가죽 부츠와 수북한 털 위로 쭉 올려진 가터벨트가 보였다.
‘……시발.’
이곳에 와서 마주한 그 어떤 몬스터보다 앞에 있는 이 여장 남자가 가장 공포감을 주고 있었다.
“무례하게 눈깔이 뭐니!”
“제발 좀…….”
우락부락한 산적의 몸과 달리 새침하게 행동하는 남자를 보자 속에서 뭐가 올라올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려던 차에 남자가 먼저 몸을 틀었다. 골반을 흔들며 뒤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또각또각, 부츠 굽 소리가 바닥에 울렸다.
그 순간 이 여장 남자, 변태의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잡도적]에 [Lv. 80]이라는 높은 레벨을 달고 있었다. 겉모습과 동일하게 위험한 녀석이었다.
“안 되겠어.”
앞에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태가 바닥에 있던 박스에 손을 뻗었다. 놈이 몸을 숙이자 미니스커트가 달랑 들어 올라가는 게 보였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안쪽을 보게 된다면 며칠 동안 음식을 입에 넣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충격적인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나는 방 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은 낡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환경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빈 케이지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말을 예쁘게 하도록 교육해 줘야겠어.”
변태의 메스꺼운 목소리와 함께 가까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차마 시선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으로 그림자가 지자 앞으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 그걸 왜 들고-.”
나는 변태 새끼의 손에 까만 채찍이 들려 있는 걸 보며 기겁했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변태가 높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채찍으로 철창을 내려치자 사방이 찌잉 하고 울렸다.
“흡-.”
이어서 철창이 쨍하고 두 쪽으로 갈라졌다. 사방에 있던 철기둥이 양옆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앞을 보자 변태의 채찍이 빨갛게 변한 게 보였다.
“이쁜이.”
변태가 채찍을 한 번 바닥으로 찰싹 내려치며 내게 걸어왔다.
나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에 맞춰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뭐가 무섭냐면, 저 모습을 가까이서 눈에 담아야 하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벌을 받을 시간이야.”
후후, 음흉한 웃음을 짓는 여장 남자의 괴기한 모습에 어느 때보다도 머리에 빨간 불이 돌았다.
‘……나한테 왜 이러냐고……!’
나는 실룩샐룩 다가오는 놈의 걸음에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리고 싶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놈의 움직임을 파악해야만 했다.
나는 놈과 거리를 계산하며 눈동자를 슬쩍슬쩍 움직였다. 놈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통로를 찾던 중, 변태의 뒤편에 나무로 된 미닫이문이 보였다.
일단 철창은 부서졌으니, 어떻게든 변태 뒤편으로 이동하면 도망칠 수 있겠-.
“이곳에서 도망친 아가씨는 단 한 명도 없어. 그렇게 눈알을 굴려 봤자 소용없으니 포기해.”
“흣-.”
도망갈 계획을 세우던 나는 어느새 거리가 확 좁혀진 걸 보고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퍼드득 떨었다.
앞에 있는 변태가 웃으며 투박한 손으로 내 어깨를 문질렀다. 그 감각에 소름이 끼쳐왔다.
“치, 치워!”
투박한 손을 팍 쳐내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발바닥에 생각지 못한 드레스 자락이 밟혀 몸이 휘청거렸다. 다리를 서둘러 뻗어 보았지만, 치렁치렁한 드레스 자락이 또 밟혔다. 가슴팍에 걸린 옷이 조금 내려갔다. 동시에 몸이 기울어졌고 긴 머리카락이 시야를 반 틈 가렸다.
서둘러 팔을 버둥거려 봤지만, 밧줄에 묶인 상태라 이 역시 소용없었다. 몸은 바닥과 가까워졌고 이내 단단한 돌바닥에 쿵, 부딪혔다.
“으…….”
바닥에 부딪힌 가슴팍이 얼얼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 때문에 꼴사납게 엎어지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얼얼함을 삼키던 차에 다리 쪽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섬찟함에 뒤를 확 돌아 보았다.
“뭐, 뭐 하는-!”
“살결이 고와서 줄 자국이 선명하게 남겠어.”
콧소리를 내며 변태가 발목까지 오는 드레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둔부까지 드레스를 걷어 올리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맨다리에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두툼한 손에 있는 채찍 손잡이를 고쳐 잡은 변태가 억지스러운 톤으로 말했다.
“볼기를 맞으면 이쁜이도 말을 잘 듣게 되겠지?”
꿈도 이런 악몽이 없다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상황을 인지하자 몸이 얼었다. 특히나 앞에 있는 변태의 모습은 악몽 그 자체다.
경직돼 있던 나는 채찍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빌어먹을-.”
변태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몸을 옆으로 굴렸다. 그러자 휘잉-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왼쪽 귓가에 들렸다. 이어서 채찍이 돌바닥을 가차 없이 내려쳤다.
내가 가까스로 피한 것을 본 놈이 멈칫하더니 상당히 걸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고.”
변태가 또각거리는 부츠를 옆으로 돌렸다. 초미니 드레스를 입은 변태의 이두박근이 채찍을 휘두름과 함께 점점 불룩 튀어나오고 있었다.
다시 채찍을 들어 올릴 것이라 예상한 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몇 걸음 채 되지 않은 거리에 여장 남자가 서 있었다. 놈을 발로 찬 뒤 곧장 바닥에 패대기친 상태로 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거리가 애매했고, 손목도 묶여 있는 상태였다. 더해서 놈은 높은 레벨의 무기까지 들고 있었다. 나는 무기도 없을뿐더러…… 현재 내 꼴로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어떻게든 이 끔찍한 상황에서 도망칠 방법을 찾으려 머리를 쥐어짜던 중, 놈이 채찍을 드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아까와 같이 내려치려 했다.
“흐읍!”
나는 박살이 난 철창의 쇠기둥 하나를 바닥에서 재빠르게 쥐었다. 그리고 채찍이 휘둘러지는 순간 몸을 틀었다. 반동을 이용해 쇠기둥을 힘껏 남자 쪽으로 던지고 옆으로 굴렀다.
채찍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더해서 쇠기둥이 깡, 하고 큰 소리를 내더니 떼구루루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야!”
아슬아슬하게 피한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몇 걸음 앞에 있는 변태가 우람한 팔목을 아프다는 듯이 쥐고 있는 게 보였다. 탄탄한 변태의 손목은 발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다행이다. 꽤 힘을 실은 덕에 대미지가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다.
“저런 난폭한 것을 던지면 어떡해!”
앙칼진 소리가 빽 하고 들려왔다. 이어서 변태가 우락부락한 이두박근을 움직여 눈가에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변태가 역할 놀이에 심취해 있는 것을 보며 나는 묶인 손을 움직였다. 최대한 드레스 자락을 뒤로 말아 쥐었다. 흘끗, 틈을 노리다가 변태가 눈을 감는 순간 허리와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한 번에 일으켰다.
“……지금 네놈 모양새가 가장 난폭하다고!”
나는 곧장 문가를 향해 뛰어가며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뛰고 있음에도 더는 발치에 옷자락이 걸리지 않았다. 뒤로 묶인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최대한 모아 든 덕이었다. 거칠 것 없는 맨발에는 차가운 돌바닥이 느껴졌다.
“여, 열리라고!”
문 앞에 도착했건만, 드르륵 소리를 내며 그렇게 잘 열리고 닫히던 나무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아무리 발로 밀어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문을 열려고 애쓰는 그때,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되겠어.”
또각또각, 굽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휙 돌렸다. 진한 화장이 되어 있는 부리부리한 변태의 눈과 마주쳤다. 노려보는 무시무시한 눈빛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아무리 내 취향이라도- 과격해질 필요가 있겠어.”
쥐 잡아먹은 입술에서 순간 가래 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읍.”
살벌한 표정의 여장 변태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나는 몸을 틀어 필사적으로 문가를 팍팍 발로 쳤다. 다행히 굳건했던 문이 빠지직,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무 문의 내구도가 그리 강하진 않은가 보다.
몇 번 발로 차던 나는 거리를 파악하기 위해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여장 남자의 채찍 사정거리에 근접해지고 있었다.
“그런 연약한 몸으로 부술 수 있겠니?”
놈의 메스꺼운 목소리에 기겁하며 몸통으로 문을 부서져라 쳤다. 몸이 얼얼했지만, 뒤에 있는 놈이 더 공포스러워 아픔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놈의 걸음이 멈춰지는 순간이다. 나는 저 변태 채찍에 맞을 바에 차라리 몸통을 박살 내자 싶었다. 그래서 몸을 뒤로 살짝 물린 다음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몸을 날렸다.
빠각-
문이 산산조각이 나며 박살 났다. 그러자 눈앞에는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허름하고 어두운 복도가 나타났다. 창문 하나 보이지 않는 복도를 본 나는 주춤했다.
“어머, 힘도 좋아.”
또각또각, 복도를 울리는 굽 소리와 변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자각한 나는 천 자락을 조금 더 끌어 잡고 앞에 보이는 복도를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못 빠져나가, 이쁜이. 얌전히 엉덩이를 주련.”
뒤에서 들리는 굵은 하이 톤의 목소리에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울리는 소리와 달리 여장 변태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저 변태는 여장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굽 높은 힐을 벗어 던지고 달려오는 호러스러운 광경은 펼쳐지지 않았다.
“……시발.”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듯 어둡고 습한 복도를 내달리던 나는 다 무너져가는 이 저택이 상당히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간이 켜져 있는 촛불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다가 마침내 커다란 철문을 발견했다. 뻗은 복도 끝에 있는 그 문은 척 보기에도 밖으로 나가는 문으로 보인다.
“소용없어.”
뒤쪽에서 콧소리가 담긴 걸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더욱 다리에 힘을 주며 철문을 향해 뛰어갔다. 어두운 복도를 가로질러 가자 망토를 쓴 남자가 보였다. 그의 머리 위에 [잡도적] 표식이 얼핏 보였다. 잡도적 역시 나를 발견했는지 곧장 내가 있는 방향에다 대고 소리쳤다.
“누구냐!”
나는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잡도적을 보았음에도 정면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레벨 50 정도의 잡도적은 지금 뒤에 쫓아오는 놈보다 상대하기 쉬웠으니까.
피 칠갑한 잡도적의 얼굴이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는 그때, 잡도적 뒤에 있는 철문이 열렸다. 이어서 비슷한 차림새의 적이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썅…….”
상대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나 골치 아팠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저 잡도적이 들어온 걸 보니, 저긴 밖으로 나가는 문이 확실한 모양이다.
“저, 저 차림은-.”
두 사람은 허겁지겁 달려오는 나를 보고서 놀란 얼굴을 했다.
“타, 탈출한 것 같은뎁쇼?”
얼빠져 있던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어서 들고 있는 몽둥이를 고쳐 잡더니 내 쪽으로 마주 다가왔다.
“여긴 지나갈 수 없다!”
전투 태세를 갖춘 두 잡도적을 향해 나는 피하지 않고 돌진했다. 지금은 여장 남자가 있는 이곳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시발. 양심 없는 것들아, 비켜!”
네놈 대장 꼴을 보고도 앞을 막아서는 거냐고! 이 양심도 없는 것들!
나는 와락 소리를 치며 두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팔이 묶인 상태라 싸울 수는 없지만, 레벨 50짜리 적들과의 근접전에서 회피는 가능할 것 같았다.
잡도적 놈들과 가까워졌고, 앞에서 곧장 몽둥이가 휘둘러졌다. 어깻죽지로 날아오는 몽둥이를 보고 몸을 틀어서 피했다. 그러자 다른 한 명도 내려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을 파악하고 방금 어깨 쪽으로 몽둥이를 휘두른 놈에게 몸통을 날렸다.
“크헉!”
박치기당한 놈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문도 박살 낼 정도의 힘으로 부딪쳤으니 저놈은 상당히 대미지를 받았을 게 분명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놈이 내 몸통 박치기를 보고 주춤했다.
“그 레벨로 되겠냐!”
그 틈을 타 놈들이 막고 있는 철문으로 냅다 뛰었다. 철문으로 다가가 어깨로 밀었다.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습한 공기가 살갗에 닿아왔다.
나는 얼른 철문 밖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타, 탈출이다!’
등 뒤로 철문이 쿵,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그럼에도 아직 안심할 순 없었다. 주춤하던 한 놈이 뒤를 따라올 수도 있으니까. 더해서 복도에 울리던 구두 소리로 보아 여장 남자도 뒤를 쫓아올 것이다.
“……일단 숨자.”
나는 앞으로 걸어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숨을 만한 곳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마을로 추정되는 이곳은 온통 안개로 덮여 있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 숨을 곳이-.”
그때, 서늘한 바람이 음산하게 불어오며 안개가 살짝 걷혔다.
나는 앞에 보이는 광경에 멈춰 섰다. 나무로 된 집들이 모두 무너져 있었다. 마을 기둥들은 녹이 슬어 있었고, 곰팡이 피고 낡고 부서진 폐허 마을이 보였다.
“흡.”
하지만 내가 멈춰 선 이유는 폐허가 된 마을 때문이 아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마을을 돌아다니는 [Lv. 80] 표식들이 잔뜩 보였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 있자 안개 곳곳에서 짐승 소리가 들려왔다. 코 안으로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
안개 너머에 몬스터들이 잔뜩 깔려 있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잡았다!”
얼어 있는 그때, 등 뒤가 화끈거리는 고통이 밀려왔다.
“윽-!”
“이 마을은 대장님이 거금을 내고 소환한 몬스터들 천지라 도망칠 수 없슈!”
잡도적이 의기양양하게 말을 뱉고서 나를 붙들었다. 놈을 밀치려 했지만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잡도적의 손에는 스턴 몽둥이가 들려 있는 게 보였다.
“놔…….”
“놓치면 벌을 받으니 그럴 수 없슈.”
피 칠갑을 한 잡도적 놈이 부축하듯 내 묶인 팔을 제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서 다시 그 미친 저택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대장의 몬스터들이 세상에 깔리면 우리 도적 떼의 시대가 올 테지.”
갑자기 뭔 개소린가 싶어 말을 하려는데 입이 제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얌전히 대장의 것이 되는 게 좋슈.”
나는 옆에서 제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망할 놈의 목소리에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 뭐라는 거야…….”
띄엄띄엄 말을 뱉은 나는 힘이 빠져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앞에 있는 녀석이 들고 있는 몽둥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스턴 몽둥이를 맞았음에도 이번엔 기절을 안 했다. 이놈도 더는 몽둥이를 휘두를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스턴이 풀리면 다시 도망갈 기회가 있다는 소리다.
그렇게 생각을 하던 차에, 저택의 철문과 열 걸음 채 남지 않은 게 보였다. 안개 틈에 있는 저택을 보자 여장 변태가 떠올라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그쯤 앞에 있는 철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리는 게 보였다. 문이 활짝 젖혔고, 안에서 맞이하듯 기다리고 있는 [Lv. 80]의 여장 변태의 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헛수고라고 말했잖아. 이쁜이.”
여장 변태가 요염한 손짓으로 제 얼굴에 있는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을 좁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으…….”
잡도적 놈이 여장 변태를 보자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질질 끌려가며 눈동자를 돌렸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몬스터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스턴이 풀린다고 해도, 앞에 있는 여장 변태를 따돌리고 사방에 깔린 몬스터까지 피해서 도망칠 수 있을까 걱정이 몰려왔다.
“잡아 왔습니다요!”
“말투. 말투!”
쾅-
뒤에서 커다란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곰팡이 냄새가 쾨쾨하게 맡아졌다.
“자, 잡아 왔어!”
“좋아. 내려놔.”
내 몸이 바닥에 패대기가 쳐졌다. 아릿함에 눈가를 찡그렸다.
또각또각, 눈앞에 위협적인 높이의 검은 부츠가 시야에 들어왔다. 시선을 들자 그 뒤로 촛불만 켜져 있는 어두운 복도가 보였다.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왔단 것을 실감해 소름이 돋았다.
“다리 아프게 도망을 가고 그러니.”
“그 추잡한…… 신발을 벗으면 되잖-.”
“추자압? 방금 추잡이라고 했어?”
“읏-.”
앞에 있는 여장 변태가 채찍을 휙 휘둘렀다. 채찍은 내가 아닌 옆의 바닥으로 내리쳐졌다. 짜악, 살을 터뜨릴 듯 날카로운 소리에 숨이 들이켜졌다.
“자꾸 나를 자극해 봤자 좋을 거 없어.”
여장 변태가 몸을 살짝 구부리더니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장 변태의 차림 때문에 내 시야에 아주 끔찍한 것이 보였다. 역함이 확 올라왔다. 순간 진짜 토할 뻔했다.
“욱.”
메스꺼움을 겨우 참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불룩한 티팬티를 보고 싶지 않았다.
시야를 차단하자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투박하고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흠칫, 눈을 뜨니 앞에 시야에 역한 것이 다시 보였다. 하마터면 속을 게워낼 뻔했다.
“흣, 치, 치워!”
둔부를 쓰다듬는 두툼한 손길이 느껴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굳은 몸을 움직이려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그러자 여장 변태가 내 몸을 확 엎어뜨렸다. 등을 짓눌러오는 뾰족한 굽에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윽!”
“나를 힘들게 했으니, 이제 벌을 받아야지.”
여장 변태가 바닥으로 채찍을 찰싹 휘둘렀다. 그 소리에 목을 살짝 움츠리다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땀으로 인해 화장이 흘러내려 아까보다 더 기괴해진 변태의 얼굴이 보였다. 꿈에 나올까 봐 두려운 비주얼을 마주하자 머리털까지 쭈뼛 섰다.
여장 변태가 까만 채찍을 든 두툼한 손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흡-.”
이번에는 채찍 방향이 정확히 내 쪽을 향해 있었다. 꼼짝없이 맞겠구나 생각하며 몸에 잔뜩 힘을 주었을 때다. 밖에서 괴물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공간에 눈을 깜빡였다. 채찍이 매섭게 날아올 것 같았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상함을 느끼다가 이내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어느 정도 감각이 돌아온 상태였다.
그쯤 가까운 곳에서 여장 변태의 굽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동자를 돌려보았다. 여장 남자가 동작을 멈춘 채 문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밖에 무슨 일-.”
변태가 문에 서 있는 잡도적에게 말을 하던 차다. 갑자기 철문에서 쾅-! 벼락이라도 내려꽂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 나가 봐!”
“아, 알겠습니다요!”
여장 남자가 소리치자 잡도적이 후다닥 철문으로 손을 뻗었다. 주의가 돌려진 것을 파악한 나는 곧장 몸을 굴렸다. 방심하고 있던 변태 놈의 다리를 밀치자 하이힐이 삐끗했다. 예상대로 여장 변태가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끼약!”
하이힐에 찍힌 얼얼한 등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서 곧장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며 철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허억!”
문 앞에 있던 잡도적을 발로 까고 나가려는데, 놈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했다. 순간 주춤했지만 다시 발을 들어 올렸다. 등짝을 가차 없이 차려던 차다.
잡도적의 머리통 너머, 그러니까 안개로 가득 찬 마을이 황색 빛으로 번쩍인 것을 보았다.
“…….”
나는 강렬한 황색 빛을 보고 멈칫했다. 아니, 정확히는 안개 틈으로 보였던 호박색 눈동자를 보고 몸이 얼어 버렸다.
“안 잡고 뭐 해! 자꾸 미적댈 거니?!”
뒤편에서 아프다며 우는 소릴 하던 변태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어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고, 굽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앞에 있는 잡도적이 정신을 차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고장 난 로봇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피 칠갑을 한 잡도적의 얼굴이 경련으로 떨리고 있었다.
“대, 대장.”
“뭔데 그래!”
“자, 자이드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뎁쇼……?!”
나는 앞에 있는 잡도적의 입에서 ‘자이드’의 이름이 들려오자 몸이 움찔했다.
“……자, 자이드? 어, 어떤 자이드?”
“조, 종적을 감췄다던, 도적들의 우두머리 자이드 말입니다요.”
잡도적의 얍삽한 목소리가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여장 변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확 지나쳐 가더니 앞에 있던 잡도적을 냅다 옆으로 밀쳤다.
“비켜 봐!”
나는 여장 변태의 우람한 뒷모습을 보다 그 너머를 쳐다봤다. 안개 틈으로 아까보다 더 가까워진 형상이 보였다. 계속해서 안개가 조금씩 거둬지고 있었고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싸늘해 보여 절로 뒷걸음질이 쳐졌다.
내가 움직임과 동시에 여장 남자의 듬직한 어깨가 굳어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내 어딘가 넋 놓은 듯한 두 사람의 대화가 앞에서 들려왔다.
“……자이드가 왜 우리한테 오는 거 같니?”
“저희가 자이드의 빈 소굴을 털었다는 걸 들은 거 아닐깝쇼?”
“……보복하러 온다는 말이니?”
“옙!”
“그럼……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맞습니다요!”
낭창하게 말을 하던 얍삽한 잡도적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 틈으로 눈빛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숨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누구랄 것 없이 철문 밖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집하던 하이힐까지 벗어 던지며 튼튼한 장딴지로 허겁지겁 뛰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
시끄러운 두 사람이 사라지자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닿아왔다. 등줄기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돌리자 안개 틈으로 걸어오는 자이드가 보였다. 그는 두 사람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내가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얼어 있던 나는 놈이 안개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황급히 뒤를 돌았다.
‘……시발-.’
현재 상태를 상기한 나는 몸을 숨기기 위해 어두컴컴한 복도 안을 제 발로 들어갔다. 눈을 바쁘게 움직이며 숨을 공간을 찾던 중, 목덜미에 바람이 훅 닿아왔다. 공기가 무거워 숨이 막힌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존재감에 목이 빳빳해질 때다.
“-어디 가는가. 보스.”
늪지대에서 들려오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맨 어깨를 쥐어오는 커다란 손에 놀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윽!”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몸이 푸르르 떨렸다.
……나도 안다. 그가 잡도적이 아닌, 나를 찾으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차마 반갑게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상태를 수습하기도 전에 놈이 나를 찾아 버렸으니까. 다른 놈들도 그렇지만, 나를 ‘보스’라고 부르는 놈에게 어떻게 이런 꼴을 보여줄 수 있겠냔 말인가.
“…….”
내가 계속 뒤를 돌아보지 않고 멈춰 있으니, 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사라져서 계속 찾았다.”
그 말에 몸이 절로 움찔했다. 그가 밤이 될 동안 계속 나를 찾아다녔음을 깨달았다.
나는 망할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를 외면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바로 뒤에 놈이 있는 상황이다.
‘……이 꼴은 내 의지가 아니잖아. 떠, 떳떳하게 대하자.’
속으로 되뇌면서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며 말했다.
“나,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많이 차, 찾았냐.”
한 걸음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자이드의 가슴팍이 보였다.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자 길쭉하게 뻗어 있는 무감한 눈이 보였다. 그 속의 호박색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
자이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와 목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어서 내 발끝까지 내려가던 눈동자는 다시 올라와 내 눈을 빤히 마주했다.
어색한 침묵 속 마른침을 삼키는데, 그의 무감한 눈에 신기함이라는 감정이 얼핏 스쳤다. 곧이어 그의 굳건한 입술이 열리더니 악의 없는 물음이 흘러나왔다.
“보스는 이런 걸 좋아하는가.”
놈의 물음에 순간 벙쪘던 나는 귓가에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진지하게 물어오는 놈에게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식으로 소리쳤다.
“좋아할 리가 있냐……!”
그러자 놈이 눈을 깜빡이더니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왜 그러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 것 같았다. 그 뜻이 아니더라도, 나는 해명해야 할 것 같아 마저 말을 뱉었다.
“이건 내가 입고 싶어서 입은 게 아니라! 어떤 변태 새끼가 날 이따위 꼴로 만든 거라고……!”
내 말에 놈의 눈이 다시 한번 내려가더니 내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오해-.”
오해하지 말라고 강조하듯 말을 뱉으려던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시종일관 무심해 보이던 놈의 얼굴에 옅은 홍조를 봤기 때문이다.
“뭐, 뭔데.”
나는 놈이 왜 갑자기 얼굴을 붉히는가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닭살이 돋은 나는 어깨에 올려져 있는 놈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묶인 팔로 인해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어깨만 들썩거려졌다. 그러자 놈의 시선이 내려갔다.
“옛날에 만든 거군.”
놈이 내 몸을 돌려 팔목을 감싼 밧줄을 보고 나직하게 말을 뱉었다. 그 뜬금없는 소리에 멈칫하다 내 팔목을 흘끗 봤다. 그러다 다시 놈을 쳐다봤다. 놈의 머리 위에 있는 [도적]이라는 표식이 눈에 박혀 왔다. 그러자 잡도적이 자이드 소굴을 털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
어쩐지…… 낮은 레벨의 잡도적이 들고 있기엔 무기가 상당히 강하다 싶었다. 더해서 몽둥이가 낯익다 싶었는데 그 이유가 자이드의 부하, 졸개들이 쓰던 무기여서 그랬구나를 알아차렸다. 그쯤 생각한 나는 자이드에게 본인 소굴의 근황을 알려주었다.
“잡도적 놈들이 네 창고를 털었다던데.”
“그렇군.”
“……태연하네.”
자이드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긴, 박살 난 소굴이니 미련 없을 만하지.’
어깨를 으쓱일 즈음, 휘잉- 스산한 바람 소리가 저택 밖에서 들려왔다. 문가에 있는 촛불이 흔들렸다.
“…….”
잠깐의 정적이 흐르자 망각했던 내 꼴이 자각됐다.
나는 몸을 틀어 뒤로 묶인 팔을 놈에게 내밀었다.
자이드 본인이 만든 거니까, 쉽게 풀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럼 이것 좀 풀어-.”
그래서 놈에게 풀어 달라고 말을 하려는데 철문 밖에서 크르륵, 몬스터의 소리가 합창하듯 들려왔다. 소리가 심상치 않아 철문을 우뚝 쳐다봤다. 그러자 철문 밖에서 메스꺼운 콧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문 열면 이쁜이만 데리고 돌아와.”
“아, 안에 자, 자이드가 있는뎁쇼……?”
“그래서 몬스터를 몽땅 풀었잖니! 자이드가 한눈 판 사이에 빠르게 데려와!”
“대, 대장님도 같이 들어-.”
바닥을 내려치는 채찍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고, 얍삽한 놈이 ‘아, 알겠습니다요!’라는 겁먹은 대답이 들려왔다.
“…….”
조용한 저택 안, 그것도 철문과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나는 저 두 사람의 대화가 아주 잘 들리고 있었다. 놈들이 몬스터를 데려왔구나, 곧 닥칠 상황을 쉽게 파악했다.
그리고 저놈들이 무서워하는 자이드의 눈동자도 철문을 향해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자이드가 다시 나를 내려다봤다.
당연히 대화 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는 전혀 급해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보스. 위험하다.”
“……알아. 그러니까 이것 좀 풀어-.”
“무기가 필요하다.”
“뭐, 뭐?”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을 뱉은 자이드가 쥐고 있던 내 어깨에 힘을 가했다. 진지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이 심히 당황스러웠다.
“네, 네놈은 맨손으로도 싸울 수 있잖아.”
다비와 루스를 경험한 바로, 이놈도 무기 없이 저 몬스터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이드는 다짜고짜 내 어깨를 감싸 쥐더니 복도 안으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수가 많다.”
“자, 잠깐. 보지도 않았으면서!”
“소리를 들었다. 무기가 필요하다.”
그는 소리만으로 몬스터의 수를 파악했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적이 엄청 많은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전혀 위급하지 않은 표정이다.
……뭔가 이상한데, 라는 생각을 할 때 놈은 가장 가까이 있는 방문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아, 아니, 자, 잠-.”
다급하게 말을 뱉던 나는 철문을 내려치는 듯한 굉음을 듣고 멈칫했다.
굳어 있는 그 틈에 자이드가 문을 닫았고, 문 사이로 피 칠갑을 한 잡도적떼와 우글거리는 몬스터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찰나로 보았다.
쿵-
닫힌 문을 언 채로 쳐다봤다. 그러자 문을 짚고 있던 자이드의 손에서 황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약해 보이던 나무 문이 점점 굵직해지는 것을 보며, 문에다가 마력을 집어넣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 확실히 수가 많긴 한데…….’
닫히기 직전 저택 안으로 들이닥친 적들의 수를 보니, 자이드의 말대로 많긴 했다. 확실히 무기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자꾸 꺼림칙한 기분이 올라왔다.
“-쉽게 부수진 못할 거다.”
문가에서 손을 뗀 자이드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그리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내 팔을 잡더니 허름한 방의 중앙으로 나를 끌었다. 중앙에는 테이블이 있었는데, 디자인이 마치 산적 놈들이 모여서 도박이라도 할 것처럼 생겨 먹었다.
나는 커다란 테이블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했다.
“그, 그럼 우리 천천히 다른 방법을 찾아- 으앗!”
놈에게 질질 끌려가던 나는 묶인 손에 쥐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놓쳐 버렸다. 그 바람에 치렁치렁한 밑자락이 맨발에 밟혔다. 발이 미끄러져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나는 팔을 앞으로 뻗으려 했다. 그러나 밧줄에 손이 묶여 있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그대로 몸통을 바닥에 꼬라박겠구나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흡-.”
앞으로 기울던 몸이 갑작스럽게 뒤로 확 당겨졌다. 딴딴한 곳에 몸이 부딪혔다. 메마른 사막의 향기가 코안으로 훅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고, 눈앞에 검은 가운과 구릿빛 근육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뻣뻣하게 굳은 자이드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라서 심장 소리가 귓가까지 울렸다. 그런데 듣다 보니, 내 심장 소리뿐 아니라 다른 심장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아마 앞에 있는 놈의 심장 소리로 추정된다.
침묵 속 자이드의 목울대가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게 보였다. 동시에 내 허리를 붙들고 있는 놈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흠칫하며 몸을 뒤로 물리려는데, 머리 위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 무기가 필요하다.”
“아, 아니- 흐억!”
허리를 쥔 손에 힘이 확 들어가더니 갑자기 다리가 들렸다. 이어서 시야가 뒤바뀌었고 허름한 방의 돌바닥이 눈앞에 보였다.
나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뒤늦게 놈의 어깨에 짐짝처럼 들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내려 줘!”
내가 놈의 어깨에서 몸을 흔들자 회색 긴 머리카락이 시야를 이리저리 가려댔다. 움직임을 멈출 즈음, 허리를 붙든 놈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몸이 공중에 들렸고 엉덩이에 차가운 게 닿았다. 몸이 짐짝처럼 중앙 테이블 위에 안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휙휙 저으며 얼굴에 붙은 긴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어느 정도 머리카락이 떼어지자 나는 앞에 있는 놈에게 항의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가, 갑자기 뭐냐고! 밧, 밧줄부터 풀어-.”
자이드의 호박색 눈동자가 뜨겁게 일렁이는 게 보였다. 그 매서운 눈빛을 가까이서 마주하자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하겠다.”
앞에서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말을 뱉었다.
“그, 그것보다 다른 방법을-.”
다른 방법도 있을 거라며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놈이 치렁치렁한 원피스 자락을 덥석 쥐어왔다. 큼지막한 손이 천 자락을 위로 들어 올렸고, 하얀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치마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 다리가 확 드러나자 귓가가 후끈거렸다.
커다란 손이 내 허벅지를 움켜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놈이 내 다리 사이에 자리하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천천히 몸이 뒤로 넘어갔고 차가운 유리 테이블이 느껴졌다.
“흐읍!”
커다란 유리 테이블 위에 몸이 온전히 젖혀졌다. 그 상태로 커다란 놈이 짓누르기까지 하니 숨 쉬는 게 버거웠다. 더해서 등 뒤로 묶인 팔이 짓눌려 아팠다.
“흐으…… 무, 무겁다고- 흣!”
눈을 찡그리며 목가에 있는 검은 뒤통수에 비키라는 듯이 말을 뱉으며 어깨를 비틀 때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이 닿아 왔다. 눈을 부릅뜨던 차에 놈이 목덜미를 냅다 빨아올렸다. 숨이 크게 들이켜졌다. 춥춥, 낯부끄러운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고 몸이 후끈 더워졌다.
물컹하고 축축한 혀가 목덜미 한 곳을 집중적으로 빨아댔다. 놈의 널찍한 등판이 앞에서 꿈틀거렸다. 마치 야생 동물이 목덜미를 물어뜯는 장면과도 흡사해 보였다.
“읏, 아,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그, 그냥-.”
츄릅, 침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떼어졌다. 이어서 자이드가 상체를 일으키며 나직하게 말했다.
“-목덜미가 아니군.”
“뭐라- 윽!”
내 위를 짓누르고 있던 놈이 비키자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불편한 자세에 몸을 움직이니 다리 사이에 위치한 자이드의 다리와 닿았다. ……아니, 다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리치곤 얇고, 아니라기엔 너무나도 두껍고 뜨거웠다. 그것이 나의 허벅지 사이에 닿아 있었고, 나는 눈을 부릅뜨며 시선을 내렸다.
“어, 언제.”
놈의 뭉툭한 것이 움직일 때마다 내 맨살에 툭툭 닿고 있었다. 언제 자이드가 바지에서 흉물을 꺼냈는지 모르겠다.
나는 등을 움직여 몸을 뒤로 물렸고 살짝 닿아 있던 그의 것을 떼어냈다. 안전거리를 확보하려 뒤로 물러나는데, 놈이 내 허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불안하게 시선을 들어 올리자 그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넣겠다.”
“아, 아니, 대체 뭔- 흐그윽!”
허리를 잡은 딴딴한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가 내 쪽으로 더 다가왔다. 그러자 벌려진 아랫부분에 발딱 세워져 있는 커다란 게 닿았다. 뭉툭한 귀두가 입구에 맞물려왔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구가 쭈욱 벌어지는 감각에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으으…… 읏!”
길쭉한 것이 쉬지 않고 뭉근하게 들어왔다. 그 묘한 자극에 발가락이 절로 오그라들었다. 내부가 꽉꽉 채워져 숨이 막힐 지경이다.
끊임없이 들어오던 길쭉한 꼬챙이가 배 속 깊은 곳을 푸욱 하고 찔렀다. 아랫배에 힘이 확 들어갔다.
“하-.”
머리 위에서 탁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잔뜩 찌푸리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자이드의 무감했던 눈이 열기를 띠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려는데 타액이 반지르르하게 묻어 있는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려던 차에 그가 허리를 쳐올렸다.
“아흑, 흣-.”
악물린 이 틈으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충분히 들어왔다고 생각한 것이 안으로 더 파고들어 왔다. 그러더니 거대한 것이 뒤로 물러났다.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주르륵 빠지는 감각에 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자이드가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 숨을 돌리는데 그 순간 아래를 콱 하고 박아왔다.
“으흑! 아-!”
허리를 퍼뜩거리던 차에 다시 거대한 것이 꿈틀거리면서 빠져나갔다. 배가 텅 비는 감각이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그러다 단숨에 안이 또 쳐올려졌고 입에서는 물기 어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아! 아아, 아!”
아래에 맞물려 있는 그것이 본격적으로 안으로 들어왔다가 뒤로 빠지기를 반복했다.
철퍽, 철퍽, 철퍽 아래를 칠 때마다 몸이 무자비하게 흔들렸다. 생리적인 눈물이 핑 돌았다. 아래를 치는 감각에 정신이 없음에도 뒤로 묶인 팔이 무게에 짓눌려 아픈 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몸을 이리저리 비틀 때,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큿…… 아픈, 가.”
“아파, 파, 팔, 아읏!”
내가 허겁지겁 말을 뱉자 놈이 안쪽 깊숙한 곳에 푸욱 하고 삽입했다.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흣!”
눈앞이 번쩍거렸다. 백지가 된 시야에 넋 놓고 있는데, 뒤에 묶여 있던 팔이 들렸다. 그러더니 답답한 팔목이 자유로워졌다.
시야가 차차 돌아왔고, 시선을 내리니 치렁치렁한 드레스가 배까지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양쪽으로 벌려진 허여멀건 다리와 그 위로 놈의 탄탄한 복근이 보였다. 무엇보다 눈길을 붙드는 건 살짝 발기되어 있는 내 아랫도리였다.
나는 팔을 눈가로 올려 보았다. 팔목이 쓸려 빨갛게 돼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위에서 태워 버릴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는 자이드가 보였다.
“……진작 풀어 줬으면 됐잖-.”
풀 수 있었으면서 왜 여태 안 풀어 준 거냐고, 괜히 피만 떨어지고 있었잖아! 원망을 담은 눈빛으로 자이드에게 따질 때다.
멈춰 있던 자이드가 갑자기 나를 향해 팔을 뻗어왔다. 눈앞으로 뻗어지는 큼지막한 손에 말을 멈췄다. 놈의 손이 내 어깨, 아니 그 아래로 향하는 게 보였다.
“왜, 왜, 뭔데. 흡!”
가슴팍 부근까지 내려와 있는 드레스의 윗부분을 커다란 손이 덥석 붙들었다. 그러더니 냅다 아래로 내렸다. 판판한 가슴팍에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볼 것도 없는 같은 납작한 가슴팍이 드러났을 뿐이다. 그런데 왜 결합되어 있는 놈의 아래가 더 커지는 건지 모르겠다.
“뭐, 뭐 하는 건-.”
그의 손이 가슴팍 부근으로 다가왔다. 불길하게 말을 뱉을 즈음, 놈의 손가락이 돌기를 꾹 눌렀다. 순간 나는 멍하니 놈을 쳐다봤다.
……뭐 하는 걸까. ……비록 지금 내 꼴이 이렇지만 나는 남자다. 만질 것도 없을뿐더러 아무런 느낌도 없는 곳이다. 대체 왜 만지는 건지 어이없어서 놈에게 말을 하려고 했다.
“거기 만져 봤자…… 아읏!”
놈이 손톱으로 살짝 긁자, 허리가 절로 튕겨 올라갔다.
내 입에서 야릇한 소리가 터져 나왔음을 인지하자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방금, 뭐야…….’
안 좋은 예감이 속에서 올라왔다. 방금 반응은 남자에게서 나올 반응이 아니지 않나……. 그렇게 두려운 기분을 느끼던 차에 위에서 선선한 말투가 들려왔다.
“여기군.”
고개를 들자 무감정해 보이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 속에는 이채가 돌고 있었다. 불길함이 등허리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순간 안쪽 깊이 결합해 있는 거대한 것이 철퍽, 움직였다.
“아으……! 하, 앗!”
자이드가 허리를 얕게 쳐올렸다. 그러면서 돌기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입에서 간드러지는 신음이 나왔다. 수치스러움에 몸 전체가 뜨거워졌다. 소리를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아흣! 아!”
안쪽에서 또 찔꺽거리며 움직였고, 동시에 돌기 부근을 돌리듯이 문지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허리가 옆으로 비틀어졌다. 내부에 가득 결합한 그것이 꿈틀댔다. 집요하게 배 안쪽을 찌르며 돌기를 자극하고 있으니 신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아, 아! 아응!”
돌기가 꼬집히듯 잡혔다. 아픔과 쾌감이 몸을 강타했고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야릇한 쾌감이 이어지자 허리가 흔들렸다. 스스로의 몸짓을 자각한 나는 돌기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손을 붙들었다. 위에 있는 놈에게 만지지 말라는 듯이 말을 뱉으려 했다.
“하, 하지…… 흣-.”
그런데 목소리가 잔뜩 젖은 채 흘러나와 애원하는 투가 되어 버렸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소름이 돋았다. 멈칫하고 있으니 놈이 나를 보고 짧게 말을 뱉었다.
“보스. 야하다.”
말만 보스지, 대체 네놈은 보스를 뭐로 보느냐며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보니 보스라는 말이 놀리는 것 같다.
“읏, 마, 말만, 아흑-!”
그러나 놈은 제 할 말만 뱉고 곧장 내 양팔을 붙들어 위로 확 올렸다. 갑자기 올라가는 팔과 함께 결합한 곳이 움직여 몸이 웅크려졌다.
“흐, 아……읏.”
앞에 있는 놈이 머리를 숙여왔다. 가슴팍에 습한 숨결이 닿았다. 이어서 물컹한 게 돌기 부근을 문질렀다. 흠칫하며 몸을 떨자 안에 있는 거대한 것이 움직였다. 비비듯이 들어오더니 깊은 곳까지 닿아 왔다. 배 안까지 삽입이 되자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다.
그쯤, 돌기 부근이 축축한 것에 감싸졌다. 질척이는 감각에 허리가 들어 올려졌다. 이어서 추릅, 침 소리가 가슴팍 부근에서 들려왔다.
“응…… 그, 그만, 아!”
적나라한 소리에 귀가 후끈거렸다. 나는 가슴팍을 지분거리는 놈을 떼어내려 팔을 움직였다. 그러나 놈이 양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돌기가 자극당하자 간질간질한 기분에 몸이 비비 꼬였다.
그 순간 아래에 있는 것이 뒤로 물러났다 안을 끈적하게 파고들어 왔다.
“흣- 으, 흑! 하응, 윽-.”
돌기 부근이 쪽쪽 빨릴 때마다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입구 부근에서 즈즈즛, 내벽이 딸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다시 뿌리 끝까지 콱 삽입됐다. 빠듯하게 맞물려 있는 부분이 뜨거웠다. 이어서 맹렬한 추삽질에 눈앞이 번개가 치듯 번쩍거렸다. 입에서는 울음과도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돌기를 이로 잘근 깨무는 자극까지 더해지자 눈앞이 핑핑 돌았다. 안쪽부터 진득한 자극이 계속해서 몰아쳤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엉망으로 할딱대는 숨이 터져 나왔다.
“아…… 아읏, 아, 힛, 응, 아-.”
자이드의 부드러운 입술이 오므려지더니 애무를 하듯 돌기를 빨았다. 다리가 비틀리듯 움직였고, 그의 탄탄한 다리와 닿았다. 그러자 가슴팍을 진득하게 빨아올리던 검은 뒤통수가 떨어져 나갔다. 가슴께에서 느껴지던 자극이 멈췄다.
그렁그렁한 시야를 내리니 타액으로 젖어 빳빳하게 세워진 돌기가 보였다. 차가운 공기가 그곳을 감싸 소름이 돋을 즈음이다.
깊은 곳을 채우던 거대한 것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이어서 철벅, 철벅 찍어 박듯 안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입구를 들락날락하는 두툼한 것이 속도를 올리자 입에서는 신음이 멋대로 터져 나왔다. 내벽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쾌감에 허리가 흔들렸다.
“아, 아! 아! 아아-.”
추삽질이 더욱 빨라졌고, 맹렬한 기세에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비릿한 향과 철떡철떡 살이 빠르게 마찰하는 난잡한 소리에 정신이 아찔했다.
번개가 내려치듯 강렬한 쾌감에 눈물이 줄줄 흐를 때다. 위에서 흥분을 담은 신음이 터져 나왔고 배 깊은 곳에 무언가가 퍼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큿.”
그 순간, 몸 전체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누군가 몸 전체를 막대기로 휘젓는 느낌이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지러웠던 감각이 차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
그렇게 익숙한 검은 공간을 마주한 나는 멍청하게 허공을 바라봤다.
‘어째서…… 나는 무기로 변하는 과정에서 미친 듯이 느껴 버린 걸까…….’
그래, 변신 과정이 이런데 안 느낄 수가 있나. 한두 번도 아니니 그건 이제 그렇다 치자……. 지금은 남자인 내가 가슴 좀 만진다고 사정 없이 야릇한 신음을 질러댄 것이 문제니까…….
‘……마음 잡으면 뭐 하냐고…….’
매번 마음을 다잡으면 이 미친놈들은 색다른 방법으로 심란함을 선사했다.
그렇게 멍하니 검은 공간을 보고 있는데 몸이 번쩍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 이틀 상대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냐. 수시로 마음을 다잡아야지 어쩌겠어. 위급한 상황에 무기로 변했고, 그거면 된 거지……. 일이나 하자.’
이러나저러나 전설의 무기로 살아야 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며 감각에 집중했다. 시야가 트였고, 이제 공격을 대비해 마력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멍청한 소리가 길게 늘어져서 나왔다.
-……어-.
바닥에 가루가 된 잔재들을 쳐다봤다. 자이드의 마력으로 인해 강화됐던 문짝이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벌써 적들이 쳐들어온 건가 싶었다. 뚫려 있는 문 너머를 보니 수많은 몬스터와 잡도적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에 흥건한 핏물을 쳐다보던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고 무기가 된 몸통을 내려다봤다. 양날 검 중앙을 단단히 쥔 자이드의 손을 따라 시야를 올렸다. 그러자 자이드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뚫려 있는 문을 향해 있었다.
-네가 한 거냐……?
마력이 밖으로 뿜어지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주변이 초토화되어 있으니……. 자이드가 스킬을 썼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이드의 입에서는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다 죽어 있는 걸까, 머릿속에 물음표로 가득 찼다.
-……어? 그럼 왜-.
나는 얼빠진 얼굴로 박살 난 문짝을 쳐다봤다. 문이 뜯기거나 괴물들이 들어오는 건 보지 못했다. ‘그럼 내가 무기로 변한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는 건데, 자이드의 마력이 들어간 문을 한순간에 박살을 낼 사람이 누가…….’까지 생각하던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때, 가루가 된 문 너머의 복도에서 핏물에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적인 걸음 소리는 정확히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얼어 있던 나는 소리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쳐다봤다. 복도에 휘청거리고 있는 촛불 틈으로 익숙한 모습을 본 것 같다…….
-…….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루스의 형체를 보며 나는 속이 바짝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마침내 그가 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고, 루스의 손에 천 자락이 들려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것을 자세히 쳐다봤다. 그러자 사라진 나의 무기와 옷이 들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힘겹게 맞춘 장비를 되찾았음에도 나는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나는 기분으로 루스를 보고 있자, 그가 테이블과 자이드를 훑으며 입술을 열었다.
“기복 님의 장비를 챙겨오느라, 한발 늦었군요.”
감미로운 목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리니 왠지 으스스한 느낌도 들었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나는 변신이 풀리면 내 꼴이 어떨지를, 그리고 내 옷가지를 들고 있는 저놈에게 옷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빌어먹-.’
속으로 욕을 되뇌며 시야를 차단하려던 그때, 쾅-! 벼락이라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흔들리더니 우르르르, 무언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통을 쥐고 있던 자이드가 뒤로 훌쩍 점프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빠른 이동과 자연재해라도 일어난 것 같은 커다란 소리에 벌렁벌렁, 놀란 심장을 느끼며 앞을 보았다.
-……어.
내 입에서는 또 한 번 멍청한 소리가 나왔다.
……분명, 작고 허름한 방에 있었는데, 지금은 사방이 확 트여 있었다.
눈앞에 안개 낀 폐허 마을이 보였다. 심지어 안개가 모두 거둬져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상태다. 낡은 나무들의 잔재들과 쓰레기로 가득했던 마을 바닥에는 유혈 사태라도 일어났는지 저택 안과 같이 피로 적셔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모양을 유지하고 있던 허름한 저택이 바닥으로 폭삭 내려앉아 있는 광경을 멍하게 보고 있을 때다. 느긋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뒤쪽에서 들려왔다.
“-여기 있었구나.”
그의 목소리에 소름이 끼쳐 왔다. 차마 상대를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야를 돌리지 않고 있는데, 자이드 놈이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 버렸다.
강제로 시야가 돌려진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에 담아야 했다. 그러자 가장 먼저 빨간 손이 눈에 들어왔다. 장갑을 낀 줄 알았다. 그러다 손끝을 타고 찐득하게 떨어지는 액체를 보고 온통 피로 덮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흡.
숨을 들이켜며 빠르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느새 밝아오는 태양으로 인해 역광을 받은 놈의 얼굴이 보였다. 그늘이 져선지 몰라도 입꼬리가 올라가 있음에도, 상당히 무서운 감이 있었다. 아니……. 웃고 있어서 더 무서운 것 같다.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움찔하듯 몸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자이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붉은 눈동자가 자이드를 향하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이내 차가움이 깃든 목소리가 고요한 마을에 작게 울려왔다.
“……무기로 변해 있네.”
탐탁지 않다는 기운을 풀풀 풍기며 그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몸 전체에서는 붉은 마력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더해서 초토화된 마을 배경과 걸어오는 길마다 핏자국이 뚝뚝 남겨지고 있으니 귀신이라도 다가오는 것 같았다.
오금이 저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우습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나서더니 가장 늦게 오는군요.”
“아아…… 거슬리는 것들을 모조리 없애고 오느라.”
대체 저놈은 마을이 거슬리기라도 했나 싶다. 원래도 폐허였지만 이렇게 폭삭 무너져 있지는 않았다. 그가 저택처럼 마을 전체를 박살 낸 듯하다.
경악스럽게 무너져 내린 마을을 보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상함은 의아함이 되었다. 눈을 깜빡이며 다비의 손을 쳐다봤다. 그의 손에는 피뿐이었다. 시야를 돌려 뒤편에 서 있는 루스의 손을 쳐다봤다. 그 역시 맨손이었다.
-…….
멍하니 두 사람의 손을 보던 나는 나를 쥐고 있는 자이드를 올려다봤다. 자이드의 검은 머리통 위에는 놈들과 같은 [Lv. ?] 표시가 떠 있었다.
나는 이제 저 물음표가 어마무시한 놈들에게만 붙는 기호란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물음표 아래에 있는 자이드의 무감한 얼굴을 쳐다봤다. 놈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호박색 눈을 아래로 내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불쑥 말을 뱉었다.
-수가 많다며. 무기 필요하다며…….
“…….”
어떤 상황이든 덤덤한 자이드의 호박색 눈동자가 내 중얼거림에 흔들렸다. 심지어 시선을 피하기까지 한다.
그런 놈의 반응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이 새끼가 나한테 공갈쳤다는 것을.
-맨손으로 가능했잖아! 변신은 왜 한 건데!
저 물음표 놈들이 했으면 같은 물음표인 네놈도 할 수 있단 소리잖아!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시발, 정보는 무슨 정보냐고!
알아낼 정보가 뭐가 있다고……! 설마 태연하게 고개 끄덕였던, 네놈 보물 창고가 아쉽기라도 했냐고! 그럼 진작 그놈들 모가지를 잡고 쥐어뜯었으면 됐잖아! 이미 다 죽어 버려서 변신한 의미도 없는데- 그래, 백번 양보해서 쓸데없는 변신은 넘어간다 쳐……. 시발, 가슴은 왜 만져 댄 거냐고……!
나는 분통을 터뜨리며 놈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자 놈이 나를 쥔 손을 다리 쪽으로 멀찌감치 떨어뜨렸다.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자 기가 찼다. 놈의 목덜미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래로 내리면 다냐?! 안 듣겠다 이거냐고!
대놓고 외면하는 몸짓을 보이자 나는 더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내가 변신 풀 거란 생각은 안 하냐고!”
나는 분통함에 곧장 변신을 풀었다. 그리고 자이드 놈이 무시할 수 없도록 정면으로 가서 눈을 부라리며 올려다봤다. 자이드 놈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해가 점점 뜨고 있는 하늘로 인해 자이드의 구릿빛 피부에 또다시 홍조가 피어오르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사람이 화를 내고 있는 와중에 얼굴을 붉히는 놈을 보자 어이없어하는 것도 잠시,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보스의 모습에 자제가 안 됐다.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놈을 보고 있자 바로 앞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
그의 사과에도 나는 뭐라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피가 밖으로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피부 위로 뚫릴 듯한 시선들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서 있을 뿐이다.
휘잉- 새벽바람이 차갑게 살갗에 닿아왔다. 동시에 휘날리는 회색 머리칼이 보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현재 내 꼴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제발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 있어야 했다.
“……그 상태로 네놈에게 안겨서 귀엽게 울었다는 건가.”
몇 걸음 앞에서 다비 놈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알을 파 버려야겠네.”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한기가 돌아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기복 님의 모습을 혼자 보려 했습니까…….”
뒤에서 루스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기 중으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이번엔 저도 참을 수 없군요.”
앞뒤로 걸음 소리가 다가올 때마다 몸이 압박되는 느낌이 들었다.
빳빳하게 굳은 채 있는 그때, 바로 앞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감대 정보를 알아냈다.”
동굴에서 들려오는 듯한 굵직한 목소리가 황폐한 주변에 울렸다. 그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그러자 코앞에 서 있는 자이드의 탄탄한 팔이 올라가는 게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고, 퍼뜩 뒤로 물러나려던 차다.
길쭉한 손가락이 돌기 부근을 꼬집는 감각이 느껴졌고 입에서 신음이 내질러졌다.
“아흣-!”
야릇한 하이 톤이 메아리처럼 마을에 울렸다. 그 소리가 반복적으로 귓가를 타고 들어오자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돌기에 머물러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고, 차가운 바람이 닿아왔다.
앞뒤로 다가오던 걸음 소리가 우뚝 멈췄다. 마을에 신음이 작게 울리다가 사라졌다.
“보스의 성감대는 젖꼭지다.”
고저 없는 톤이지만 확신이 들어가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에 멍하게 입술을 뻐끔거리던 나는 이내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눈을 부릅뜬 채로 고개를 쳐들자, 어쩐지 득의양양해 보이는 자이드의 얼굴이 보였다. 만족스러운 듯 어깨가 평소보다 올라가 보이기도 했다.
“……깊은 곳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그렇단 말이지-.”
앞뒤에서 되새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죽빵을 꽂을 것 같던 조금 전과 달리 놈들의 목소리가 제법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뒤쪽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루스가 보였다. 더해서 턱을 쓸며 고개를 까딱하는 다비 놈의 모습도 보였다. 두 사람은 꽤나 좋은 정보라도 공유받았다는 듯이 자이드를 향해 말했다.
“꽤 가치 있는 정보네.”
“젖꼭지라- 기억해야겠군요.”
상기되어 있는 목소리들이 주변에서 들려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혀 합심하지 않던 놈들이, 이런 거지 같은 정보에 한마음 한뜻이 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주먹이 절로 꽉 쥐어졌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던 중 앞에 있는 다비 놈이랑 눈이 마주쳤다. 놈의 길쭉한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눈동자가 내려갔다. 그리고 그윽한 눈으로 한 곳을 보며 느리고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기복이처럼, 앙증맞고 귀엽긴 하네.”
갈증이 난다는 듯이 제 입술을 축이던 다비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이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것이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불이라도 뿜을 듯한 소리가 벼락같이 터져 나왔다.
“대체- 그딴 게 뭐가 정보냐고! 이 새끼들아!”
“기복 님, 먼저 옷을 추스르는 게 어떠십니까. 음흉한 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네놈도 음흉하다고!”
나는 씩씩거리며 고개를 훽 내렸다. 온몸의 피부가 당장이라도 익어 버릴 듯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곧장 허리까지 내려가 있는 드레스의 상의 부분을 가슴까지 쭈욱 끌어 올렸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같은 남자들 앞에서 내가 왜 가슴을 필사적으로 가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발정 난 하이에나 눈빛으로 가슴을 쳐다보는데, 어떻게 떳떳하게 가슴팍을 까고 있겠냔 말이다.
“망할. 망할……!”
나는 옷을 추스른 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왔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가발을 확 벗겨내며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곧장 얼굴을 치켜들고 루스가 있는 쪽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러자 루스의 보랏빛 눈동자에 밝은 이채가 살짝 도는 것이 보였다.
“썅- 뭘 기대하는 거냐고!”
루스의 앞으로 돌진하듯 다가가 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루스가 망설이듯 내 옷가지들을 움켜잡았다.
“장비 내놔!”
“……여기 있습니다.”
마치 아쉽다는 듯 미련이 뚝뚝 흐르는 손짓으로 내 손 위에 장비를 올렸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냅다 다 부서져 있는 담벼락 뒤로 쾅쾅 걸어갔다. 뒤에서 놈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미친놈들, 미친놈들.’
가까운 담벼락 뒤로 몸을 숨긴 나는, 같은 남자 앞에서 숨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내 처지에 화풀이하듯, 빌어먹을 드레스를 찢듯이 벗으며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원래 장비인 하얀 망토 옷으로 빠르게 갈아입었다. 허리춤에 단도도 단단히 차고 발에는 신발을 끼워 넣으며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씩씩 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넝마가 되어 있는 하늘색의 드레스가 바닥에 보였다. 나는 그 드레스를 콱 밟고서 담벼락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담벼락 앞으로 걸어오고 있는 다비 놈이 보였다.
“다 갈아입었어?”
“그럼 여태껏 입고 있겠냐!”
“옷은? 다음에 입어야 하잖아.”
“썅, 그걸 왜 입냐고!”
태연하게 미친 소리를 하던 다비 놈이 나를 지나쳐 담벼락 뒤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흙투성이가 되어 버린 드레스를 보고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아…… 사 놔야겠네.”
“사서 너나 입-.”
입맛을 다시며 담벼락을 걸어오는 다비 놈에게 왈칵 말을 뱉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 위로 커다란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옷자락이 펄럭거릴 정도로 바람도 크게 일었다. 동시에 거대한 무언가가 빠르게 머리 위를 지나갔다.
“어…… 어?”
주변을 덮던 그림자가 한순간에 사라졌고,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해가 뜨기 시작하는 방향으로 용 한 마리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슴푸레한 하늘로 인해 용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머리 위를 지나가던 찰나에 뭔가를 본 듯했다.
긴가민가함에 우뚝 용을 보고 있자 옆에 놈에게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꼬리네.”
다비의 말에 숨을 들이켰다.
“보스가 찾던 용이군.”
“기복 님, 가시지요.”
이어서 들려오는 자이드와 루스의 목소리에 내가 본 게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하늘에 향했던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용을 보고 굳은 나와 달리 평소와 같이 여유로워 보이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그들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울렁댔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듯 깊게 호흡을 뱉은 뒤 앞에 있는 놈들에게 말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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