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지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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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훨훨 날고 있는 용의 모습이 점처럼 작아졌다. 폐허가 된 마을에서 용을 쫓아 쉬지 않고 달렸음에도 거리가 좁혀지긴커녕 멀어지고 있었다.
용은 계속해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고, 나는 해가 하늘 높이 뜨기 시작하는 시간까지 뛰어야 했다. 그러자 체력이 쭉쭉 떨어져 거친 숨이 쉼 없이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
나는 세 놈과의 거리를 확인할 겸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지친 기색 하나 없는 괴물 같은 세 놈의 굳건한 모습이 보인다. 더욱 악착같이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이놈들은 멈춰 서서 나를 기다렸다가 용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런 놈들에게 먼저 가란 식으로 손짓을 휙, 날리지만 놈들은 끝까지 날 기다렸다가 갔다.
지금도 루스가 걱정스레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기복 님. 힐을 해 드리겠습니다.”
“나, 나중에…….”
나는 멀리 있는 용의 방향을 눈짓하며 그럴 시간 없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아직 힐이 필요할 정도로 체력이 바닥난 것은 아니다. 거리를 좁히는 게 우선이다.
그러나 헉헉대는 꼴을 보이니 루스가 더 권하려는 듯 입을 열려고 했다. 내가 고개를 양옆으로 내젓자 루스가 멈칫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용이 나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보스가 무기로 변하면 들고 뛰겠다.”
뚝딱 변하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자이드가 앞에서 지껄여댔다. 그러나 놈을 타박할 기운이 나지 않아 헥헥거리며 거의 숨소리에 묻히듯 말을 뱉었다.
“그럴, 시간이 어딨, 냐고…….”
그러자 아쉽다는 듯이 눈꺼풀이 내려간 자이드의 얼굴이 보인다. 무시하고 용이 간 방향을 확인하려 고개를 들려던 차다. 앞에서 다비의 능글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아서 가 줄 수 있대도.”
“…….”
나는 이제 말할 힘도 없어 그냥 이를 악물고 뛰었다. 용이 점처럼 보일 만큼 거리가 벌어졌지만 아직 위치는 보였다. 그저 더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앞에 있는 다비 놈을 지나쳐 쫓아갔다.
저 용도 계속 날고 있진 않을 것이다. 무조건 어디선가는 멈출 거다.
그렇게 용만 주시하며 발에 힘을 실어 땅을 내디뎠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팔목이 붙잡혔다.
단단한 힘에 의해 발을 멈춘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다비 놈이 내 팔목을 꽉 붙들고 있는 게 보였다.
“하아, 왜…….”
멈추면 더 힘든 감이 있어 일부러 계속 달렸는데, 놈이 나를 멈춰 세웠다. 그 때문에 숨을 헥헥 뱉으며 놈을 노려봤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멀끔한 얼굴을 보다가 손목을 비틀었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이러다 용을 놓칠지도 모른다. 내가 놈의 팔을 쳐내려 하자 다비 시선이 팔목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내 뒤편에 있는 하늘을 쳐다봤고 이어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곧이어 다비의 입술에서는 한가로운 투가 흘러나왔다.
“그런 속도면, 용을 놓칠 텐데.”
“…….”
그는 안기라는 듯이 두 팔을 내 쪽으로 벌려왔다.
“자. 얼른.”
재촉하듯 용이 있는 하늘을 향해 고갯짓을 까딱했다.
나는 와인색 셔츠로 감싸진 탄탄한 가슴팍을 노려보듯 쳐다봤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을 쫓고 싶다며.”
움찔하며 시선을 들어 올리자 붉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싱글벙글 살판 난 얼굴을 꺼림칙하게 보다가 뒤를 흘끔 돌아봤다. 그러자 하늘을 날던 용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게 보인다.
……놈의 말대로 이렇게 뛰다간 결국엔 용을 놓칠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계속 뛰고 있음에도 거리가 점점 벌어졌으니까.
날고 있는 용을 쫓는 건 일반적으로 무리로 보인다. 그러나 이놈들은 일반적인 놈들이 아니었고, 심지어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마 용을 쫓을 수 있는 충분한 이속을 가진 걸로 추정된다.
‘그래……. 애저녁에 박살 났던 자존심을 인제 와서 챙겨서 뭐 하냐…….’
고작 뛰는 걸로 놈들의 도움을 받는 건 안 내켰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가려고 했으나……. 용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오기를 부리는 건 관둬야 할 듯하다.
“…….”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 놈에게 엉거주춤 다가갔다.
‘……단순한 탈 것, 그러니까, 말을 탄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되뇌며 다가가자 앞에 있는 녀석의 팔이 더욱 벌려졌다. 얼른 안기라며 재촉하듯 말이다.
내가 놈의 품으로 몸을 기울일 때,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 와인 셔츠가 보이던 눈앞에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허리에 닿는 탄탄한 팔이 느껴져 시선을 내렸다.
“……망할.”
망할 공주님 안기를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낯짝 부끄러운 자세를 더는 못 보고 눈을 확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놈의 입매가 곡선을 그리며 흡족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말을 탄 거라고, 되뇌며 놈에게 버벅 말을 뱉었다.
“빠, 빨리 쫓아.”
“응.”
놈에게서 즐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허리를 붙든 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바람이 휙 불었다.
나는 어벙하게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 있는 풀떼기들이 훽훽 지나가고 있었다. 빠른 속도에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휘날렸고, 하얀 망토 옷이 펄럭댔다. 공기 저항을 받아 피부에 속도감이 제대로 느껴졌다.
‘이놈은 이속이 몇인 거냐…….’
고속도로를 맨몸으로 주행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기겁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드니 다비의 날렵한 턱선 위로 놈의 조각 같은 이목구비가 보였다. 쭉 뻗은 눈이 앞을 향해 있고 제법 충실히 용을 쫓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눈을 끔벅이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루스와 자이드가 뒤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놈들은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다비와 비슷한 속도로 오고 있었다. 그러다 집요한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쳐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
나는 유유히 날고 있는 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용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용에 버금가는 이속을 가진 놈과 그를 가뿐하게 따라오는 무시무시한 두 놈을 보자, 새삼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능력치가 어떻게 이러냐고.’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놈들의 사기급 능력치를 직접 확인할 때마다 어쩐지 경악과 허무함이 몰려왔다.
현타를 느끼고 있을 즈음, 어느새 훽훽 지나가는 주변으로 정글과 같은 무성한 풀들이 차차 줄어들고, 메마른 돌 더미들이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짜 땅끝으로 온 것 같네.’
그렇게 주변 풍경이 빠르게 바뀌는 걸 보는데 다비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고개를 드니 황폐한 바위산 위에 용이 두어 바퀴 맴도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뾰족한 발톱이 있는 두 다리를 산꼭대기 위로 뻗었다. 커다란 날개가 펼쳐졌다가 서서히 몸 안으로 굽어졌다.
마침내 용이 산의 가장 윗부분에 똬리를 틀듯 안착했다.
“여기가 본거진가.”
속도를 늦춘 다비에게서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입을 떠억 벌리며 용을 쳐다보다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저, 저걸 어떻게 잡냐…….”
용은 산 하나를 온몸으로 감싸듯이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크기가 말도 안 됐다. 멀리 있을 땐 몰랐는데, 가까워질수록 집채만 한 거대함이 실감이 됐다.
“보스급 아니냐고…….”
심지어 용의 머리 위에 빨간색으로 [Lv. 15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저 정도의 레벨의 용이라면 보스 몹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기복 님. 내려오시는 게 어떠십니까.”
용의 위용에 긴장하고 있던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가까운 곳에 루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내 어깨를 감싼 손을 찡그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길에 그제야 내가 도착했음에도 여전히 다비 놈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곧장 몸을 펄떡이며 놈에게 말했다.
“내, 내려 줘!”
머리 위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몸이 바닥으로 기울여졌다.
나는 빠르게 두 다리를 땅에 뻗었다. 빌어먹을 자세에서 탈출한 나는 구겨진 옷자락을 툭툭 폈다.
그쯤, 아주 성가시다는 목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려왔다.
“언제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단 말이지.”
나는 또 몸 안에 한기가 도는 것을 느끼며 허리를 바로 했다. 그러자 차갑게 굳은 보랏빛 눈동자가 내 뒤쪽을 향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아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니 루스가 천천히 두 팔을 벌려왔다.
“안기실 거면 저쪽이 아닌, 제게 안기십시오.”
뭔 말을 하는가 싶어 기껏 기다렸더니, 헛소리를 뱉어댔다.
“필요 없어!”
나는 그런 루스 놈을 확 지나쳐 갔다. 그러자 진작 도착해 있는 자이드가 보인다.
자이드는 바위산 꼭대기에 안착한 용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위산 위에 있는 용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자이드의 검은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휘날렸다.
그의 옆으로 걸어가자 높은 콧날이 돋보이는 수려한 옆모습이 보였다. 자이드의 호박색 눈동자는 용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깊은 눈매가 왠지 결연해 보인다.
……그래도 이놈이 가장 정상적-.
“용의 날개는 구워 먹어야 한다.”
시선을 돌리려던 나는 무감한 목소리에 멈칫하며 그를 쳐다봤다. 여전히 결연해 보이는 눈빛으로 용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살짝 열린 입술이 방금 그가 말한 게 맞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더해서 그 밑에 있는 목울대가 꿀꺽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인제 보니 놈의 표정은 결연함이 아니라 만찬을 앞둔 기대감인 모양이다.
‘어떻게 저 무시무시한 용을 보고 구워 먹을 생각부터 하냐고…….’
세 놈은 지하 세계의 통로인, 강력한 용을 마주했음에도 아주 태평했다.
나를 제외하고, 긴장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런 태평한 놈들을 데리고 과연 무사히 네스키를 잡을 수 있을까 걱정되어 심란함이 올라왔다.
“이제 잡으면 되는가.”
자이드가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심란함을 뒤로하고, 놈에게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하 세계 통로 때문이라고 확실히 알려주려 했다. 그러나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옆에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기복이는 저것의 배를 찢어 주길 원하는 거지?”
그의 말을 듣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단순히 몬스터를 잡는다고 표현하면 될 것을 굳이 저렇게 말을 해야 하나 싶다. 놈의 언어 선택에 식겁하며 목적을 확실히 말했다.
“그런 걸 원할 리가 있냐! 지하 통로로 가야 할 뿐이라고……!”
말을 정정하며 옆으로 다가온 놈을 쳐다봤다. 그러자 창백한 빛이 도는 다비 놈의 옆얼굴이 보였다. 용을 바라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 따분함이 담겨 있었다. 시원스레 뻗은 입술에서는 으음, 소리가 들려왔다.
단번에 시시하다는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에 나는 멈칫했다.
‘보스급 몬스터를 좀 더 후벼파지 못해 지루하다는 건가…….’
생각할 즈음, 반대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기 직전이라면 지하 통로를 열겠지요.”
또 한 명의 살벌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스가 단정한 얼굴을 하고서 내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용이 있는 곳을 향해 있었다.
“…….”
루스까지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하늘 중앙에 태양이 내리쬐고 있건만 주변을 둘러싼 체격 좋은 놈들로 인해 내게는 그늘 하나가 만들어졌다.
가까이 있는 세 사람을 올려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그들이 하나둘씩 나를 쳐다봤다. 보스 사냥을 앞두고 있는데 아니, 곧 위험한 지하 세계로 갈지도 모르는데, 하나같이 산책이라도 나온 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놈들이 가까이 있단 이유만으로 공기 흐름이 묵직한 압도감을 주고 있었다. 그들의 몸 안에 흐르는 강력한 마력이 원인인 듯하다.
‘……그래. 이렇게 강한 놈들이랑 함께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놈들의 강렬한 마력을 체감하고 있으니, 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던 긴장감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 *
아까 전만 해도, 물음표 놈들이 곁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생각했다.
나 혼자 지하 세계로 떨어질 줄 모르고 한 생각이었다.
“시발…….”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컴컴해서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이곳은 던전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던전과는 달랐다. 사방이 엄청 넓기도 했고, 내부 자체가 평범한 던전과 달리…… 에일리언 기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높은 천장과 벽에 끈적끈적한 액체가 붙어 있어, 바닥으로 떨어질 때마다 치익, 녹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더해서 곳곳에 심장처럼 불룩대는 알들이 있어 징그러웠다. 안에서 에일리언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
나는 떨어지려는 액들을 피해 가며 간간이 빛나는 붉은빛을 따라 한발씩 앞으로 나아갔다. 지하 공간에는 음습한 공기가 돌고 있어 몸이 축축 쳐졌다. 바닥을 밟을 때마다 신발에 쩌억쩌억, 찐득한 게 달라붙어서일 수도 있겠다.
“어디가 어딘지 당최 보이질 않냐…….”
캄캄한 주변을 파악하려 귀를 기울여 보았다. 던전 안에는 알에서 들려오는 작은 맥박 소리와 내 걸음 소리만 들려왔다. 이상한 괴물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긴 했지만, 아직 몬스터를 만난 적은 없었다. 이곳에 떨어진 지 얼마 안 됐으니 그럴 만하다.
“……무기 혼자 있으면 어떡하냐고.”
아까 전만 해도 싱그러운 공기가 흐르는 지상에 있었는데, 한순간에 축축하고 습한 곳에 오게 됐다. 아니, 용을 보고 지하 세계에 가게 될 거라는 예상은 충분히 했다. 그러나 파티를 맺어서 온다는 위험한 지하 세계에 혼자 떨어질 줄은 전혀 몰랐다.
‘빌어먹을, 용 새끼…….’
빌어먹을 상황의 발단은 이랬다.
세 놈이 용을 향해 공격 마력을 모았고, 공중에 붉은색, 하얀색, 황색의 마력이 뒤섞였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보는 순간이었다. 바람이 강하게 일었고, 바위산 꼭대기에 있던 용이 날개를 펼치는 게 보였다. 낌새를 눈치챈 듯이 용이 사나운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러더니 입을 쩌억 벌리며 우리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입 안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뾰족한 이빨과 날름대는 혀가 선명히 보이자 나는 기겁하듯 숨을 들이켰다.
‘흡-’
이런 나와 달리 세 놈은 태연하게 용을 마주 바라봤다. 그리고 사정거리 안에 들자마자 곧장 용에게 마력을 퍼부었다. 그러자 기세 좋던 용이 놈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처맞고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딱딱한 비늘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날개도 꺾여 피가 줄줄 흘렀다. 공격 한 번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가 깎인 상태가 됐다.
루스의 말대로 죽기 직전인 용이 살기 위해, 지하 문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명색이 레벨 [Lv. 150] 몬스터가 속수무책으로 맞기만 하니 기가 막혔다. 그러다 세 놈의 레벨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맨손이긴 하지만, 게임 세상에서도 뭐 이런 미친놈들이 있나 싶어 물음표로 표기된, 분류도 되지 않은 세 놈의 마력이 담긴 공격이니 그럴 수밖에.
‘의외로 네스키도 쉽게 잡으려나…….’
나는 지하 세계로 꽁지 빼려고 열심히 문을 만들고 있는 용을 바라봤다. 그러다 용이 문을 온전히 만들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주는 세 놈을 쳐다봤다.
이렇듯 압도적으로 강한 놈들과 있으니 몬스터가 불쌍해짐과 동시에 든든한 마음도 들었다.
‘설마, 한 방 거리는 아니겠지, 그러면 허무한데.’
근거 없는 자신감을 느끼던 차에 용 앞에 검은색 문이 생성됐다. 거대한 문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고, 파스슥-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지하 문이 개방되는 것을 본 나는 놈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용이 앞장서 들어가겠거니 생각하고 문과 가까워졌을 때다.
도망칠 것 같던 이 용 새끼가 꼴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당황스러움에 멈춰 있는데, 파충류 같은 다리로 내 몸통을 콱 잡아챘다. 그리고 이 망할 새끼가 나를 지하 세계로 냅다 처넣어 버렸다.
‘썅…….’
두툼한 발톱에 짓눌려 몸이 아픈 것도 잠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까만 곳으로 내 몸은 추락했다. 푸른 하늘이 보이는 위쪽을 향해 다급하게 손발을 휘저었다. 그러나 몸은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졌고, 저 멀리 문 밖으로 용이 처참하게 죽는소리가 들려왔다.
음습한 기운에 의식이 멀어지기 직전, 세 녀석의 발소리를 들은 것 같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지하 세계에 혼자 덩그러니 떨어진 상태였다.
“……놈들도 들어왔나 보네.”
나는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호칭은 여전히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마 파티원인 놈들 모두 지하 세계 어딘가에 있는 걸로 추정된다. 페널티를 받아 꼼짝없이 몬스터의 먹이가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근데, 어떻게 찾냐는 거지…….”
넓어도 너무 넓은 이곳에서 놈들의 위치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 놈들을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 내 말소리만 해도 저 끝까지 메아리치다가 사라지는 중이다.
“뭐 이러냐고.”
신세 한탄을 하며 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다리를 옮겼다.
이곳에 혼자 있는 건 위험하다. 서둘러 놈들과 합류를 해야만 한다. 놈들과 만난 후에 본격적으로 네스키를 찾아 나서든 하고, 혼자인 지금은 몸을 사릴 필요가 있었다.
‘-엇갈리려나.’
나는 잠깐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는 오히려 가만히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놈들도 나를 찾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이런 곳에 어떻게 가만히 있냐.’
숨을 곳 하나 없는 곳에서 가만히 있는 것도 위험해 보였다. 결국 나는 하염없이 앞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동굴 형태의 던전을 걸어가던 나는 멀리서 크르륵, 소리를 듣고 멈춰 서야 했다.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봤다. 몬스터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둘러 허리춤에 있는 단도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함께 달랑거리는, 스턴 기능이 있는 지팡이도 함께 쥐었다.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뒤로 한 발짝씩 물러섰다.
“…….”
어둠에 가려진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경계하고 있는데, 앞이 아닌 양옆에서도 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커졌고,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나는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내 걸음을 따라 여러 곳에서 따각따각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어두운 곳에서 무언가가 꿀렁거리는 게 보였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가 움직이는 듯했다.
불길한 기분이 몸을 감쌀 즈음, 몬스터의 형체가 지하 붉은 불빛에 비추어졌다.
“흡.”
수북한 털이 보이더니, 이어서 들소와 닮은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얼굴은 함몰되어 촉수가 구더기처럼 꿀렁대고 있었다.
나는 징그러운 몬스터의 레벨을 빠르게 확인했다. [Lv. 100], 나와 같은 레벨이었다. 위험하긴 해도, 상대 못 할 정도는 아니다. 나도 원거리 공격이 나가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상태고, 저놈들과 달리 지력이 있으니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한두 마리일 경우지, 이렇게 바글바글하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
나는 어둠 속에서 우글거리고 있는 형체들을 주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최대한 소리를 안 내려고 하는데, 발을 움직일 때마다 찐득한 발소리가 던전에 울려댔다. 그러자 내 걸음 소리에 몹들이 따각따각 걸어왔다.
‘망할, 망할.’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러나 내가 한 걸음 옮기면 몹들은 몇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이러다간 몹들에게 둘러싸일 것이 분명했다.
거리가 더 좁혀지기 전에 숨을 곳이 필요했다. 서둘러 눈동자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붉은 불빛은 가까운 곳만 비췄고, 그 이상은 어둠뿐이었다.
초조함에 단도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저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사이에 세 녀석이 나를 찾아올 수 있을까,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며 염려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웬 바람인가 싶어 그 방향을 쳐다봤다. 그러자 어둠 속에 차가운 빛이 도는 무언가가 보였다. 조금 더 집중해서 보니, 길쭉한 것에 빛이 돌고 있었다.
‘뭐지……?’
나는 바람이 일었던 방향으로 조금 걸어갔다. 그러자 지하 붉은빛을 받아 철창이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철창 안에서부터 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철창이 흔들렸다. 의아하게 보며 한 걸음 더 다가가자 바람과 함께 뭔가가 열리는 것이 보였다.
‘……문?’
철창으로 된 문을 가만히 보고 있던 차에 발굽과 바닥이 부딪치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이, 일단 저기 숨자.’
따각거리는 소리가 아까보다 가까워진 것을 깨달은 나는 곧장 철창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지금은 이쪽으로 오고 있는 몬스터들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철창으로 걸어가는데, 찐득한 바닥 소리 때문인지 한 몬스터가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훈련된 부대처럼 다른 몹들도 똑같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따각따각 다가오기 시작했다.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앞만 보고 빠르게 걸어갔다. 곧이어 감옥과도 같은 형식의 문이 지척에 보였다.
‘……괘, 괜찮으려나.’
어쩐지 어두운 철창 안을 보자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생각하던 순간이다. 뒤에서 크르릉, 몬스터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까웠다.
나는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뒷발을 탁탁 바닥에 치고 있는 들소 몹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몹을 따라 뒤에 있는 몹들도 하나둘씩 같은 행동을 했다.
나는 몹들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들이박을 준비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흐읍!”
머릿속에 도망치라는 신호가 크게 울렸고, 그 길로 곧장 그 철문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뒤에서 달려오는 발굽 소리가 살벌하게 커졌다.
나는 눈을 홉뜨며 철문 안으로 필사적으로 몸을 밀어 넣고 철문을 쾅 닿았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저 많은 몹이 달려온다면 철문이 얼마나 버틸지 모를 일이다.
나는 안쪽으로 뛰어가려고 달릴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안쪽으로 발을 내디디려는데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뚝 끊긴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주변이 왜 이렇게 조용하지 싶어 이상함에 삐걱삐걱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철문 앞에 들소 몹들이 몰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함몰된 얼굴에서 잔뜩 성난 듯이 콧김을 뿜어대고 있었다. 흠칫하며 다시 도망을 치려는데 이상함을 발견했다.
“뭐, 뭐지…….”
촉수로 가득한 들소의 얼굴이 내 쪽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철문을 부수거나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철창 앞에서 주춤거리는 것 같았다.
공격을 멈춘 몹들을 의아하게 주시했다. 계속해서 경계했지만 몹들은 철창 밖에 모여 있을 뿐이었다.
“다, 다행인가.”
이유가 어떻든 간에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렇게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바글바글한 [Lv. 100] 몹들의 모습에 막막함이 올라왔다. 위험하다고 알려진 지하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인, 절망적인 신세라는 것이 새삼 실감되었다.
“……이러고 있으면 놈들이 찾아주려나.”
지금으로서는 철창 안에서 세 놈을 기다리는 게 안전할 듯하다, 그렇게 결론 내리며 떼거리로 몰린 몬스터들을 주시했다.
콧김을 뿜어대는 몹들의 움직임을 한동안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람 말소리 같은 게 작게 들려왔다.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하다.’라며 힘겹게 말을 뱉는 소리가 숨소리와 섞여서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방향은 철창 안쪽,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사람……?”
나는 어둠으로 덮인 안쪽을 쳐다봤다. 안쪽에서는 계속해서 힘겨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목을 쥐어짜는, 죽기 직전의 사람의 목소리와도 비슷했다.
확실히, 안쪽에 사람이 있는 듯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여 봤다. 하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마-
‘……구해 달라는 거겠지.’
그러나 안쪽은 소름이 돋을 만큼 한기가 돌았고, 몸은 쉽사리 움직이질 않았다.
“대체 왜 저기에 사람이 있는 건데…….”
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유는 짐작이 가능했다. 미친 사람처럼 혼자 지하 세계에 오진 않았을 거다. 당연히 파티를 맺고 왔다가 파티원들이 전멸해서 지금의 나처럼 철창 안에 옴짝달싹 못 하고 갇혔지 않았을까 싶다.
“…….”
계속해서 희미하게 사람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악착같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다 보니, 순간적으로 전사 마을에서 봤던 절망으로 가득 찬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썅.”
발바닥부터 스멀스멀 불길함이 올라왔다. 그러나 나는 철창 안쪽을 향해 다리를 움직였다.
‘저렇게 살고 싶어서 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외면하냐고…….’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손에 있는 단도와 지팡이를 생명줄처럼 붙잡으며 불길한 안쪽으로 걸어갔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아까처럼 바닥이 끈적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까보다 더 다리가 무거운 감이 있었다.
“윽-.”
안으로 들어갈수록 썩은 내와 비린내가 풍겨왔다. 눈을 찡그리며 멈칫하는데 괴로운 신음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나는 멈춘 발을 다시 움직이며, 사람이 있는 곳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마침내 어두운 공간 끝에 촛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촛불 앞에는 생각했던 대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에게서 ‘크…… 어…….’와 같은 힘겨운 소리가 들렸다.
“……거, 거기 괘, 괜찮아요?”
쫄아서 방금 내 목소리가 작긴 했다. 그래서 한 번 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저, 어-?”
발아래 딱딱한 게 툭 하고 치였다. 눈을 내리자 아른거리는 촛불로 인해 바닥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나는 발치에 있는 하얀색 돌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눈동자를 스르륵 돌려보았다. 주변에는 하얀색 돌, 아니……. 돌이라기엔 아는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건-
‘……해, 해골?’
나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해골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전에 봤던 들소 몹 형태의 뼈들이 보여 몬스터의 뼈인 줄 알았다. 그러나 두개골, 팔다리, 갈비뼈들이 바닥 아래 온통 흩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흡-.”
그제야 이곳에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지독한 냄새에 소맷자락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빨리 이곳에서 저 사람을 구해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큼 다가갔다.
“……필요……하다.”
그때 앞에 있는 사람이 가래가 끓는 소리로 말을 뱉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귀신의 목소리처럼 불길하게 들려왔다.
“…….”
내가 우뚝 멈춰 있자, 촛불 앞에 앉아 있는 존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앉은 몸과 달리 계속해서 몸이 커졌다. 점점 커지는 몸은 이내 3m는 족히 되어 보이게 거대해졌다.
앞에 있는 존재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 이곳을 채우고 있던 촛불이 거칠게 휘날렸다. 어른거리는 공간 속에서 앞에 있는 존재가 뒤를 천천히 돌아보기 시작했다.
“……왔……다…….”
앞에 있는 존재가 촛불에 드러났을 때, 나는 앞에 있는 자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촛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피부의 반쪽이 벗겨진 상태였다. 다른 반쪽은 시체처럼 회색의 주름진 얼굴을 갖고 있었다. 두 눈은 시체처럼 푹 파여 있었고, 입은 네 갈래로 찢어져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피부에서 악취가 나는 진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
푹 파인 눈이 정확히 나를 보았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앞에 있는 거대한 존재의 머리 위에는 빨갛게 [네스키]라는 표식이 떠 있었다.
네스키. 내가 모험 내내 찾던 놈이었다. 지하 세계에서 그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날 줄은 몰라 당황스러웠다. 그의 이름 옆에는 익숙한 [Lv. ?] 표식도 함께 있었다.
피가 밖으로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상대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리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마력…… 배설…….”
네스키가 긁히고 쉰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했다.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달그락,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리자 해골 여러 개가 층층이 꿰어져 하체에 걸쳐져 있는 게 보였다.
죽은 사람의 뼈들을 주렁주렁 옷처럼 걸치고 있는 기괴함에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신발 아래에 딱딱한 뼈가 밟혔다.
빠각, 오래된 뼈는 쉽게 부러졌고, 그 소리는 어두운 공간에 널리 울렸다.
그 순간 아득했던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마주한 상황이 자각됐고, 곧장 도망을 치기 위해 몸을 뒤로 돌렸을 때다. 쉰 냄새가 뒤에서 훅 풍겨왔다.
“흣-!”
찐득한 무언가가 어깨에 얹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쫘악 끼쳤다.
경직된 몸과 함께 어깨에 있는 것이 더욱 묵직해져 왔다. 그리고 뒤통수에 토할 것 같은 입김이 닿았다.
“……배설…… 시간…….”
“윽!”
어깨를 부서뜨릴 듯 짓누르는 힘에 의해 다리가 굽혀졌다. 어깨가 박살 날 것 같은 고통에 얼굴이 구겨졌다. 계속해서 어깨가 아래로 눌러졌고, 무릎이 딱딱한 땅에 닿았다.
그제야 어깨를 짓누르는 힘이 거둬졌다.
나는 빠질 것 같은 어깨를 뒤로하고 곧장 몸을 일으켜 달아나려 했다. 허둥지둥 한쪽 다리를 굽혀 일어나려던 차, 다시 무릎이 땅에 부딪혔다. 동시에 머리가 뒤로 확 젖혀졌다.
“아윽-.”
목이 꺾이자 억눌린 숨이 터져 나왔다. 진물이 나오는 손이 이마를 짓누르고 있었다. 손에서 벗어나려 목에 아무리 힘을 줘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힘이 압도적으로 너무 강했다.
나는 찡그린 눈을 들었다. 그러자 젖혀진 고개로 인해 푹 파인 눈이 보였다. 그 속에는 초점 없는 검은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독한 어둠이 몸을 휘어 감는 듯했다.
숨을 멈춘 채 있자, 질퍽한 손에서부터 얼굴 가로 진물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고개를 비틀 즈음이다.
네스키가 해골이 꿰여 있는 옷 틈으로 길쭉한 것을 꺼내 드는 행동을 보였다. 그리고 꺼내든 그것은, 무릎을 꿇은 내 얼굴과 가까워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네스키의 성기를 보는 순간 손끝부터 차게 식어갔다. 이어서 그 거대한 것은 내 얼굴로 향했고, 입가에 닿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마를 짓누르는 손으로 인해 고개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싫, 웁-.”
입 안으로 네스키의 성기가 파고들었다. 입이 쭉 벌어졌고 역겨운 것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목젖까지 쑤셔지는 그것에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비릿하고 시큼한 냄새에 치가 떨려왔다.
잘라 버릴 생각으로 곧장 이를 세웠다. 하지만 고무 기둥처럼 딱딱해 무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턱에 힘을 주며 물었다. 그러나 네스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둥 역시 잘리기는커녕, 진물만 줄줄 흘러나왔다. 입 안으로 느껴지는 진한 액에 토할 것 같았다.
“……완전……해, 져야…… 한다.”
위에서 한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입 안을 빠듯하게 채우던 게 물러났다. 그러다 다시 안으로 집어넣어졌다. 뒤로 젖혀진 고개로 인해 내려찍듯이 목젖까지 찔러댔다. 진물과 쿠퍼액이 목 안으로 넘어갔다. 토가 올라와 입에서는 욱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욱, 웩, 욱-.”
목 안으로 넘어가는 액들을 모조리 토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개가 젖혀져 있다 못해, 입 안 가득히 들어와 있는 성기 때문에 토하는 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개를 비틀어 성기를 뱉어내려는데 커다란 불알이 얼굴을 찰싹 쳤다. 그러더니 잔뜩 벌어진 입으로 추삽질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턱가에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목 깊은 곳이 찔릴 때마다 눈물이 맺혔다.
“크…… 허…….”
위에서 몇 번 입 안으로 철벅철벅 찔러 넣더니 쇳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입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던 기둥이 불현듯 동작을 멈췄다. 꿈틀거리는 움직임에 제발 아니길 빌며 눈을 질끈 감았다.
“웁-.”
목 깊은 곳까지 찔러진 기둥이 한 번 더 추삽질을 하고 입 안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이마를 짓누르던 손이 떨어져 나갔고, 아려오는 턱과 함께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어지러웠던 정신이 차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비릿하고 끈적한, 역겨운 맛이 입 안에서 느껴지는 그 순간 몸을 진저리치듯 떨었다.
“흐…… 씹, 욱, 우에엑-.”
젖혀진 고개로 인해 목 부분이 쑤시듯 아파져 와 머리를 앞으로 숙였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바닥을 짚자 토가 왈칵 올라왔다. 벌어진 입을 통해 바닥으로 토가 쏟아졌다. 피가 섞인, 흐린 액체들이 투둑투둑 뱉어졌다. 역겨운 액을 보자 또다시 속이 메슥거려 속엣것을 게워냈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쏟아낼 즈음에서야 고개를 들었다.
“하으…….”
괴로움에 인상이 오만상 찌푸려졌다. 더러운 바닥에서 얼른 몸을 일으키려는데, 손과 가까운 곳에 단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스턴 지팡이도 나란히 떨어져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무기를 떨어뜨렸나 보다.
나는 앞에 떨어진 무기를 보고 곧장 손을 뻗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솟자 몸이 빠르게 움직여졌다. 두 무기를 덥석 쥔 나는 주저앉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몸을 일으킨 나는 곧장 뒤에 있는 네스키를 향해 스턴 지팡이로 공격을 퍼부었다. 더해서 네스키의 거지 같은 아랫도리에, 단련하고 단련한 찌르기 스킬로 단도를 박아 넣었다.
“뒤져, 이 새끼야-!”
필사적으로 있는 공격을 다 퍼부은 나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온갖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대미지가 시원하게 먹힌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기를 허공에 휘둘렀나 싶어 네스키를 쳐다봤다.
“시, 시발…….”
썩은 몸통에서 진물이 쭈룩 나오는 게 끝이었다. 타격감이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 기분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행인 점은 네스키가 움직임을 멈췄다는 거다. 단도 대미지는 안 먹은 것 같지만, 자이드 소굴에서 가져온 지팡이의 스턴은 먹힌 듯하다. 그렇다면, 네스키한테서 도망칠 틈이 생겼다는 소리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나는 곧장 뒤를 돌았다.
“…….”
그리고 왔던 방향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부디 스턴이 오래 지속되길 바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러자 아까 들어왔던 철창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스키보다 들소 떼를 상대하는 게 더 가망이 있어 보여, 막무가내로 돌진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바글대던 들소 몹들이 철창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철창 밖으로 발을 뻗을 즈음, 던전이 지진이 난 듯이 흔들렸다. 다리로 지탱하고 있는 바닥이 흔들렸고, 쿠구궁- 천둥소리가 들렸다. 뒤쪽에서 스멀스멀 어두운 기운이 피어올랐다. 차마 뒤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아 곧바로 철창 밖을 향해 뛰었다.
“…….”
끈적한 바닥을 우다다 뛰어가다 보니, 어느새 무너질 듯이 흔들리던 던전이 잠잠해지고 있었다. 던전이 고요해지기 전에 빨리 숨을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이 이상 뛰어다니면 발소리가 크게 울려 위험했다.
고개를 좌우로 휙휙 둘러보았다. 그러자 맥동하는 커다란 알 뒤에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숨을 곳이 마땅히 없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뛰어가 알 뒤로 몸을 숨겼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다. 몸 안에 마력이 파도가 치듯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매연을 강하게 들이켠 것처럼 숨이 막히고 텁텁했다.
나는 가슴께를 붙잡고 숨을 토해냈다.
“켁, 켁.”
내부를 뭉근하게 휩쓰는 거북한 기운에 눈을 찡그렸다. 속이 자꾸 메스껍게 일렁거렸다. 머리 역시 어지러운 감이 있어 알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가만히 멈춰서 호흡을 고르고 있으니, 속이 다시 안정되는 듯했다.
“하아…… 속이 왜 이러냐…….”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때, 저 멀리서 귀가 쨍하게 울릴 만큼 큰 소리가 들려왔다. 철들이 부딪치는 소리와도 같았다.
나는 그 철 소리가 내가 뛰어온 방향에서 들렸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마……력…….”
음울하고 어두운 목소리가 던전 안에 울려왔다. 그게 네스키의 목소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레스탈로스…….”
메아리처럼 퍼지는 말에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네스키가 내 정체를 알아챈 듯하다.
‘어, 어떻게 안 거지.’
그러다 아까의 행위가 떠올랐다. 더해서 이 몸의 액은 온통 레스탈로스의 마력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심지어 타액까지도.
“레스……탈로스…….”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까보다 가까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방에서 들소 몬스터들의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커다란 알 뒤,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 소리가 머리를 쿵쿵 울려댔다. 다가오는 네스키와 함께 주변의 들소 몹의 소리 역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기세 좋게 네스키를 잡으러 왔건만, 이렇게 숨어 있는 꼴이 우스웠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전설의 무기고, 네스키를 잡으러 왔다고 해도……. 그건 무기를 사용할 든든한 파티원과 함께 있을 때의 일이었다.
전설의 무기 혼자 아무것도 못 하는데, 최종 보스와 맨몸으로 맞짱 뜰 수는 없었다.
“…….”
잔뜩 숨을 죽이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네스키의 역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아니까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크르르릉, 몹들의 소리도 크게 들렸다.
나를 발견했나 싶어 눈동자를 황급히 돌려보았다. 그러나 알 뒤에 기깔나게 몸을 숨겨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단도를 쥐고 있으려던 나는 네스키의 성기에 타격 없이 꽂혔던 단도가 떠올랐다.
‘시발…… 단도는 들고 있을걸.’
무기가 없다는 걸 깨닫는 그 순간, 냅다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는 발굽 소리가 네스키의 방향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네스키 본인이 세상에 풀어놓은 몹일 텐데-.’
설마…… 자기들끼리 공격을 한다고? 싶으면서도 내심 들소 몹을 응원했다. 네스키의 피가 깎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숨을 죽이고 있던 차다.
네스키의 목소리가 음침하게 울려왔다.
“……흡수……한다…….”
들소 몬스터의 발굽 소리가 멈췄다. 그러더니 끼기깅긱, 짐승 비명이 연달아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무언가가 퍽퍽하게 부딪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뭐, 뭐야……?’
눈을 크게 뜬 채 울부짖는 몬스터의 소리를 들었다. 의아함과 어쩐지 모르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함께 올라왔다.
그러나 내 고개는 이미 뒤로 돌아간 상태다. 빼꼼히 고개를 들자 3m 되는 거대한 몸집의 네스키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달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들소 몬스터가 네스키의 앞에 있었다. 몬스터는 네스키에게 꼼짝없이 몸통을 잡힌 상태였다.
두 몬스터의 자세에 대해 묘한 느낌을 받을 즈음이다. 네스키가 죽어 가는 숨소리를 내며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들소 몬스터의 입에서는 끼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스키의 움직임에 틈이 벌어졌고 네스키의 다리 사이에 있는 굵은 성기가 들소 몬스터의 뒷다리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게 보였다.
“……!”
순간적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로 겨우 소리를 억눌렀다. 입을 틀어막는 와중에도 네스키가 기계처럼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때마다 들소 몹이 뒷발을 차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네스키는 대미지를 입지 않았고, 몹은 끼긱낑, 울부짖을 뿐이었다.
‘시발…….’
역함이 올라왔다. 나름 사람의 형체를 지니고 있는 네스키와 촉수가 달린 들소 몹의 행위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서둘러 고개를 돌리려는데, 주변에 깔린 어둠 사이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눈을 좁히니, 어둠 속의 형체가 들소 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떼로 몰려다니는 몹들이었지.’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하던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우르르 덤벼들 땐 언제고, 한 마리가 달려들었음에도 다른 몹들은 어둠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발굽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게 마치, 철창 밖에서 주춤대던 모습과 닮아 보였다.
‘……이상한데.’
네스키가 강하고 자시고 가늠할 판단력이 없는 몬스터들이 동족이 울부짖는데 덤벼들지 않고 있으니 희한했다. 그러다 몬스터들 사정에 신경 끄기로 했다. 지금 내 코가 석 잔데 다른 생각할 겨를이 어딨나 싶어 시선을 돌리려 할 때다.
“…….”
네스키의 추삽질에 들소 몹의 수북한 털이 땅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네스키가 한 번 더 찌덕찌덕 움직였고 몹의 갈비뼈가 점점 선명해졌다.
이내 네스키가 행위를 멈추었다. 들소 몹은 해골과 다름없이 빠싹 말라 있었다. 네스키가 들소 몹 다리에 박은 것을 빼냈다. 그러자 들소 몹이 찐득한 바닥으로 넘어갔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들소 몹은 서서히 형체가 사라지고 하얀 뼈만 남기 시작했다.
“레스……탈로스…….”
던전에 네스키의 쉰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나를 찾는 목소리가 귓가에 박히자 경련하듯 몸이 떨렸다.
나는 알 뒤로 잽싸게 몸을 웅크렸다. 아까보다 더 심한 공포감이 몰려와 손발이 달달 떨렸다.
‘시발, 시발.’
방금, 충격적인 행위를 통해 지능이 낮은 몹들이 어째서 네스키 주변으로 다가가지 않는지 짐작했다. 몹들은 학습된 공포로 네스키에게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더해서 네스키의 주변에 수북하게 뼈가 쌓여 있던 이유가 방금 그 짓거리 때문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레스탈로스…….”
레스탈로스라며 나를 찾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쳐왔다. 그도 그럴 게, 시선을 돌리기 직전에 네스키의 다리 사이에 엄청난 것이 잔뜩 솟아 있는 걸 봤으니까.
그 끔찍한 걸 잔뜩 세운 채 나를 부르고 있으니……. 공포감에 졸도할 것만 같았다.
“……각인…… 각인…….”
쉰내가 진동할 것 같은 목소리가 던전 안에 울려왔다.
나는 흠칫했다. 레스탈로스만 주야장천 불러대던 네스키가 이제는 각인이라는 말로 염불을 외워댔다.
‘시발…… 제발, 좀 가라…….’
각인이란 게 뭔진 모르겠지만, 말만 들어도 저놈이랑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주인…… 각인…….”
네스키가 움직일 때마다 진물과 같이 질긴 액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가까웠다. 두려움에 머리마저 울렁거리는 기분이다. 숨소리를 최대한 내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상태로 마주친다면 진짜 끝장이다.
알 뒤편까지 다가온 걸로 추정되는 걸음 소리에 등허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식은땀이 몸을 타고 줄줄 흘러댔다.
부디 그냥 지나가 달라며 속으로 간절하게 되뇌던 그때, 주변에 모여 있던 몹들이 네스키의 움직임에 크르릉, 경계하기 시작했다. 동족이 죽어서일까, 소리가 제법 살벌했다. 동시에 내가 숨은 알 바로 뒤편에서 네스키의 발이 바닥과 맞물려 찐득하게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긴장한 채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어서 들소 몹들이 미친 듯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멀어지는 걸로 보아, 들소 몹들이 네스키에게서 도망치는 소리인 듯하다.
“……완전……해진다…….”
쥐어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문에 네스키가 방향을 틀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 소리는 몹들이 달리는 쪽을 따라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네스키가 충분히 멀리 갈 때까지 입을 틀어막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저 끝까지 네스키의 발소리가 희미해진 것을 들었을 때에야, 내내 억눌렀던 숨을 내쉬었다.
“하아…….”
가쁘게 숨을 내쉬며,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다. 계속 호흡을 뱉으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니 아득했던 감각들이 살아나는 듯했다. 그러자 여태껏 눈치채지 못한 하나의 사실이 감지됐다.
“…….”
나는 등 뒤에 있는 알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보았다. 커다란 알은 심장처럼 빠르게 맥박하고 있었다. 이곳에 떨어졌을 때부터, 알이 울룩불룩 뛰는 것을 봤던지라 원래 이렇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원래 이렇게 흔들렸나?’
나는 등 뒤에 있는 커다란 알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뻔히 쳐다봤다.
다다닥, 알이 양옆으로 진동을 할 때마다 바닥에 달칵달칵, 부딪혔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치솟고 있었다.
‘이렇게 강하게 뛰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알 전체가 떨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불길하게 알을 살피던 나는 바닥과 조금씩 부딪히던 알의 끝에 금이 갔다는 걸 발견했다.
쎄한 느낌을 받은 나는 웅크린 몸을 퍼뜩 일으켰다.
그 순간, 쩌적- 아랫부분부터 위쪽으로 길게 금이 가는 게 보였다. 나는 곧장 뒤로 물러났다. 금이 간 곳이 선명해지더니 양쪽으로 투둑, 갈라졌다.
깨진 알 틈으로 촉수가 꾸물꾸물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다, 다른 곳으로-.’
서둘러 피할 곳을 찾아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러나 지하는 어두웠고, 숨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멀리 도망치고 싶어도 네스키가 아래를 잔뜩 세운 채로 지하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빠각-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알이 완전히 부서져 껍질이 찐득한 바닥에 부딪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알이 있던 자리에는 붉은색 촉수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돌아선 내 눈앞으로 촉수 하나가 뻗어졌기 때문이다. 촉수는 나를 가늠하듯 불룩거리는 움직임을 보였다.
온몸에 닭살이 돋아왔다. 일단 촉수에서 멀어지자 생각하며 몸을 조심스레 틀었다.
“……흣-.”
바닥에서 발을 떼는 순간이다. 앞으로 뻗은 발과 무관하게 몸이 뒤로 당겨지기 시작했다. 더해서 허리와 목, 팔, 허벅지를 강하게 압박하는 감각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미끈거리는 촉수가 내 몸을 감고 있는 게 보였다.
계속해서 칭칭 감아대는 촉수를 보고 나는 사지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놔, 놓으라고……!”
이대로 있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아 나는 오만상을 지으며 펄떡펄떡 몸부림쳤다. 하지만 고무처럼 질긴 촉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읏!”
그쯤 촉수가 옷 사이로 파고들어 오기 시작했다. 맨살에 닫는 끈적한 느낌에 저항하듯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사지를 붙든 촉수에 힘이 가해졌다.
발버둥을 치던 나는 강한 압박에 힘이 탁 풀려 버렸다.
맥없이 늘어져 있던 나는 망토 옷이 마구 풀어 헤쳐지는 것을 보고 다시 힘을 내 발버둥을 쳤다.
“붙잡혀 있을 때가 아니란 말-.”
맨 가슴에 찐득한 촉수가 닿자 짓씹듯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저 멀리서 크르릉, 몬스터의 소리가 던전 안에 울려왔다.
나는 곧장 입을 합 다물었다. 촉수에 정신 팔린 나머지 목소리를 내고 있었음을 인지했다.
“…….”
내가 움직임을 멈추자, 몸을 칭칭 감아대던 촉수가 얼굴 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목덜미에 닿는 미끈한 촉감에 저항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반대편 팔을 타고 올라오던 촉수가 코앞에서 보였다.
“……!”
불룩하게 세워진 촉수를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목을 타고 올라온 촉수가 입술 위를 비벼댔다.
촉수가 입에 들어온, 거지 같은 경험이 한 번 있었던지라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강하게 부딪치는 촉수의 힘에 의해 이가 깨질 것 같아, 결국 입을 벌려야 했다.
“훕!”
벌려진 입 안으로 촉수가 쑥 들어왔다. 아까 역겨운 것이 들어왔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막무가내로 쑤셔지니 입 안이 쓰라렸다. 그래서 촉수를 콱콱 깨물며 뱉어내려 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 표식도 달리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임에도 무기가 없으니 대미지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 그만-.’
목젖을 찌르는 촉수로 인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떠억 벌어진 입은 침을 삼키지 못했다. 턱이 아파 괴로웠다. 촉수가 입 안에서 꿈틀대니 숨쉬기도 버거웠다.
“흐웁…….”
괴로움에 허덕거리며 시선을 내리자, 허리춤을 문지르는 촉수가 보였다. 촉수가 움직일 때마다 바지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바지가 헐벗겨지기 전에 떼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을 흔들었건만 압박만 심해질 뿐이었다.
“……흡…….”
힘이 빠져 몸을 축 늘어뜨린 나는 온통 풀어 헤쳐진 몸을 쳐다봤다. 맨몸에 비벼대는 촉수로 인해 몸통이 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쁜 호흡을 내쉬던 차에 불룩불룩 이상한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고개를 들자 알에서 나왔던 촉수들이 덩어리지는 게 보였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끔뻑였다. 시야가 트였고, 덩어리가 아닌, 촉수들이 뭉쳐 들소 몹의 형태를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흐으…….”
더해서 내 몸을 감싼 촉수들이 들소의 몸통 쪽으로 나를 당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근육을 압박하고 있는 촉수로 인해 저항할 힘이 나지 않았다. 입 안에서 엉망으로 움직이고 있는 촉수 때문에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망연하게 있는 사이, 들소 몹의 불완전한 몸통과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었다.
‘들소 몹한테 죽는 거냐고…….’
물컹한 게 몸에 닿았다. 소름이 끼쳐와 눈을 질끈 감았다. 던전 안을 밝히던 붉은 빛이 차단됐다. 점점 몸 전체를 삼킬 듯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놈들이 찾고 있을 텐데…….’
이렇게 죽는 건가 아님, 들소가 되는 걸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낄 때다.
찐득한 바닥을 밟고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감은 눈 밖으로 빛이 번쩍였다.
눈이 부신 빛이 지나가고 입 안과 사지를 압박하던 촉수가 탁- 풀렸다. 등에서부터 느껴졌던 뜨거운 열기가 사라지자 몸이 허공에 떴고 곧 추락했다. 아니, 추락하는 줄 알았다.
몸이 단단한 곳에 닿았다. 이어서 어깨를 감싸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괜찮으십니까……!”
앞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향초 향과 목소리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른거리는 시야로 하얀 머리칼이 보였다.
조금 더 시선을 올리자, 흔들리고 있는 보랏빛 눈동자가 보였다.
“루스…….”
시야가 선명해지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루스가 보였다.
“……예.”
나는 그에게 괜찮다며 안심을 시켜주려 했다. 그러나 차마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몸이 빨래처럼 쥐어짜진 나머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근육이 풀려 버렸다.
“……힘이…… 안 들어가.”
녹초가 된 나는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마주하고 있던 루스의 얼굴이 설핏 찡그려졌다. 이어서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힐을 하고 있으니…… 곧 회복되실 겁니다.”
루스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답할 힘도 없어 눈꺼풀을 끔뻑이는 걸로 대신했다.
그렇게 루스의 힐을 받고 있으니, 잔뜩 풀려 있던 몸이 조금씩 활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더해서 어딘지 비몽사몽 했던 정신도 서서히 맑아지고 있었다.
“…….”
맥없이 뜨고 있던 눈을 들어 올리자 흐려졌던 시야가 또렷한 빛을 찾았다. 그러자 가련해 보이는 루스의 얼굴 역시 또렷하게 보였다.
시선을 돌리자, 어깨를 붙들고 있는 커다란 손에서 하얀빛이 돌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생명력이 쭉쭉 들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깔딱깔딱 바닥을 치던 체력이 한순간에 회복이 되고 있으니, 새삼 루스의 능력이 감탄스러웠다. 나는 놈을 쳐다보며 고맙다며 말을 하려 했다.
“고마-.”
그때, 루스의 뒤편으로 붉은빛이 번쩍거리더니 던전이 살짝 흔들렸다. 다가오는 형상에 눈을 크게 떴다. 앞에 있는 루스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지는 게 얼핏 보였다.
“……별말씀을요.”
탐탁지 않아 하는 루스의 얼굴 뒤편으로 핏빛 머리카락을 본 것 같았다. 계속해서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고, 마침내 딱딱하게 굳은 남자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복! 찾았잖아……!”
다비가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소리치며 다가왔다.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고 있는 루스의 옆에 다비가 자리했다. 이어서 커다란 몸을 숙이더니 와락, 나를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어깨를 감싸고 있던 루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익숙한 풀 향이 코 안으로 맡아졌고, 단단한 상체에 끌어 당겨져 몸에는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어, 야, 야.”
이리저리 몸이 당겨진 나는 겨우 다비의 품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다비의 어깨너머, 어둠 속에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이내 크르릉,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따각따각 발굽 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려왔다.
“이, 이봐, 뒤에!”
나는 어둠 속에서 몬스터가 달릴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나만 알아차린 모양이다. 이 두 놈은 뒤에 있는 몹을 일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당황스레 다비 놈 가슴팍을 짚었다. 그러나 다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밀침에 나를 더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놈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황급히 루스를 쳐다보며 말을 뱉었다.
“루…….”
심란한 눈빛을 하고 있는 루스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멈칫했다. 왜, 왜 그러지, 싶던 차에 앞쪽에서 발굽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들소 몹 떼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흡!”
잔뜩 벌어진 눈으로 무언의 비명을 지르던 차다.
황색 불빛이 시야에 번쩍거렸다. 그 순간, 달려오던 들소 떼가 한순간에 액체처럼 녹아내렸다.
……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까만 형체가 보였다. 그 정적인 걸음 소리가 매우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을 주시하고 있자 가까워지는 형체와 함께 던전 안, 붉은 불빛에 구릿빛의 단단한 몸이 비쳤다.
“…….”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살피듯 쭈욱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러더니 딱딱하게 굳어 있던 놈의 턱에 힘이 풀렸다.
“무사하군.”
자이드 특유의 무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경계하고 있던 나는 앞에 있는 녀석이 자이드라는 것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그를 마주 쳐다봤다. 표정에 변화가 없어서 몰랐는데, 얼굴에 땀방울이 반짝거리는 걸로 보아 엄청 찾아다닌 듯하다.
“……네가 준 무기 덕분에.”
자이드에게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덕분에 네스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비록 그 좋은 무기를 일회용으로 날려 버렸지만, 목숨값을 대신해 줬으니 아깝진 않았다.
그렇게 자이드의 묵묵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그때, 어둠 속에서 들소 몹이 다시 보였다. 그리고 그 몹은 지체 없이 자이드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피-.”
피하라는 말을 끝까지 뱉기도 전에, 자이드가 몬스터 방향으로 팔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 이글거리는 마력이 맴돌더니 몬스터가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
짧은 순간 심장이 덜컹거렸던 나는 허탈한 기분으로 자이드를 쳐다봤다.
자이드는 아까와 다를 바 없이 편안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더해서 같은 시야에 있는 루스와 다비는 뒤 상황은 안중에도 없는 듯 서로를 탐탁지 않게 보고 있었다.
……진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강한 놈들이란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지하 세계에서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을 봐서일까, 은연중 계속 놈들을 걱정하고 있었나 보다.
평소와 다름없는,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모인 세 사람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이놈들에게 안정감을 느낄 줄이야…….’
몸에 힘을 풀자, 내 등을 감싸고 있던 다비의 손이 점차 느슨해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붉은 눈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놈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위로 올라오며 내 몸을 훑어댔다. 왜 그러냐는 식으로 쳐다보자 그의 입에서 못마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복. 왜 남의 정액을 잔뜩 묻히고 있어.”
“정액이 아니라…… 촉-.”
말을 하려는데 어쩐지 목이 잠겨 기운 없이 말이 뱉어졌다.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뱉으려는데, 기침이 터져 나왔다. 숨이 턱턱 막혀 계속해서 기침을 하자 놈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콜록콜록, 기침이 쉬이 멈추지 않아 켁켁거리기까지 하다 겨우 진정을 했다.
방금까지 힐을 받아 생기가 돌았는데, 기침 몇 번 했다고 체력이 확 깎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을 때는, 기침 소리를 듣고 몰려든 들소 몹들이 보였다. 이내 몹들이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고 눈앞에는 또다시 황색 불빛이 번쩍거렸다.
“……마력이 이상한데.”
몹을 처리하고 있는 자이드를 멍하니 보는데, 다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꽤나 심상치 않아 보여 나는 자이드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러자 코앞에 있는 다비의 경직된 어깨가 보였다. 시선을 올리자 다비가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위쪽에서 루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하얀 손이 내게로 뻗어졌다.
아까와 달리 다비가 순순히 손에 힘을 풀었다.
나는 맥없이 덜렁 들려가 루스의 품으로 옮겨졌다. 이어서 차가운 손이 피부에 닿아왔다.
그의 체온으로 인해 내 몸이 상당히 뜨겁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붕 뜨고 어지러운 느낌이 들더라니…….
루스와 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시원한 마력이 몸 안으로 들어와 순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이 멎었고, 루스는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기복 님. 이곳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루스의 빤한 시선에 나는 목에 힘을 주어 힘겹게 말을 뱉었다.
“여기 온 뒤로…… 몹한테 쫓기다가…….”
나는 말을 멈추었다. 뭣 같은 행위가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거북함이 올라와 입을 어물거리고 있자 루스가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네…… 네스키를 만나서 도망치다가…… 여기에 숨어-.”
“……네스키를 말입니까?”
“어, 어…….”
네스키라는 말에 루스의 표정이 한층 가라앉기 시작했다.
“설마…… 네스키의 액을 마셨습니까.”
“그…… 부, 붙잡히는 바람에 삼키긴 했는데…….”
루스의 심각한 얼굴에 나는 심장이 덜컹거리는 듯했다.
“……왜……?”
불안하게 루스를 쳐다보자 루스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착잡하게 말했다.
“기복님 안에…… 네스키의 마력이 잠식되고 있습니다.”
잠식……? 내가 어리둥절하게 그를 보자, 루스가 시선을 내렸다. 그의 시선은 내 손끝을 향해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내렸다.
“뭐, 뭐야-.”
손가락 끝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겁하며 손가락을 옷에 마구 문질렀다. 그러나 손끝에 단단히 착색된 듯 지워지지 않았다. 심지어 점점 진해지는 듯했다.
나는 손을 떨며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러자 루스의 어두운 표정이 눈앞에 보였다. 내 시선을 받은 그가 잠긴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잠식이 진행되면 힐이 통하질 않습니다.”
그의 말에 머리가 멍해지는 듯했다. 다시 시선을 내리자 손가락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짙어지는 색과 함께 살이 썩어가는 것 같았다.
“손에…… 감각이 없어.”
“……네스키의 마력은 독처럼 육체를 타고 퍼집니다.”
“그, 그럼 어떻게-.”
덜컥 겁에 질려 물어보는 그 순간 지진이 난 듯 바닥이 흔들렸다. 이어서 멀리서부터 찐득한 액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루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루스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라서 시선을 옮기자 자이드 역시 루스가 보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온다.”
아까와 달리 사뭇 진지한 목소리가 자이드에게서 들려왔다. 더해서 자이드 손에 황색 마력이 조금 더 진해졌다. 탄탄한 몸에 걸쳐진 검은 가운이 바람이 불듯이 펄럭거렸다.
주변에 몹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흐으…….”
멀리서 들려오는 끈적한 액체 소리가 커질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숨 쉬는 게 힘드니 안겨 있는 자세가 불편했다.
루스를 밀어내려 했으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 움직임에 루스가 나를 돌아봤다. 내가 답답해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가 품에서 내려 주었다.
“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눈을 찡그리고 있는데 앞에 창백한 손이 뻗어졌다.
시선을 들자 코앞에 다가온 손이 작게 떨리는 게 보였다. 조금 더 고개를 드니 다비의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이내 그의 쭉 뻗은 콧날에 잔주름이 생기더니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데,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네스키를 죽이면 해결될 테니까.”
나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호흡이 가빠와 고개만 끄덕였다.
그쯤 어두운 곳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각……인…….”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진 상태였다.
네스키의 목소리와 함께 가슴에 통증이 일어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촉수로 인해 옷이 풀어 헤쳐져 맨살이 손에 닿아왔다.
“-각인…… 그렇군요.”
앞에 있는 루스가 나직하게 각인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러더니 복잡함을 담은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온몸에 흐르는 식은땀과 더불어 눈가에 맺힌 땀 때문에 눈을 살짝 찡그렸다.
“……하아, 각인이 뭔데……?”
“……온전히 서로의 마력에 묶이는 겁니다. 쉽게 말해, 무기에 이름을 새기는 거죠.”
그의 말을 듣자 절대 네스키의 이름 따위 새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레스탈로스는 그런 것도 있구나 생각하는데, 루스가 물끄러미 내 손을 바라보더니 말을 뱉었다.
“……저와 각인을 한다면, 기복 님 안에 있는 네스키의 마력이 없어질지도 모르겠군요. 저와 기복 님, 서로의 마력만 남게 될 테니까요.”
“그럼 하면-.”
“하지만…… 생명부터 모든 것이 온전히 서로에게 종속됩니다. 평생, 온전한 연결이라는 건 심오합니다. 역대 레스탈로스의 기록에 의하면 최초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각인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흔들리는 루스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보라색 파티를 허락도 없이 걸 만큼 무지막지한 놈이 망설이고 있는 걸 보니, 각인이 주는 무게감이 상당한 것 같다. 그것을 깨닫자 나 역시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누가 각인을 할까 싶다. 게임 세계에서 ‘평생’은 얼마나 오랜 시간일지 가늠도 가지 않는다. 또, 이런 세상은 예측불허하다. 생명부터 온전한 연결이 된다는 건, 때론 저주이지 않을까…….
“……레스……탈로스…….”
그때, 네스키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제법 가까워진 목소리에 앞에 있던 루스가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자 세 놈이 일제히 어두운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유롭던 다른 때와 달리 경계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긴장하며 어두운 곳을 보다가, 마침내 드러난 네스키의 모습에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앞에서도 골치 아프다는 듯한 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태를 갖춘 걸 보니…… 기복 님의 마력을 흡수했나 보군요.”
여전히 3m쯤 되는 커다란 몸에서 진물이 줄줄 흘러나오곤 있었지만, 벗겨진 피부와 무너져 내린 반쪽 얼굴이 복구되어 있었다. 반송장과 다름없던 네스키가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니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적이다.”
몇 걸음 앞에 있던 자이드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자이드의 황색 마력은 더 강하게 이글댔다. 네스키의 걸음마다 황색 마력의 부피가 불어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떨려왔다.
“적이면 죽여야지.”
앞에 있던 다비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뒤를 돌았다. 그의 검은 재킷 아래로, 창백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붉은 마력이 손을 타고 모여들고 있었다.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루스가 네스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루스가 발을 앞으로 내디뎠고, 비단 같은 흰 머리가 휘날렸다. 단정한 감색 제복 아래에 있던 길쭉한 손가락에서도 눈부신 마력이 피어올랐다.
“하아…….”
나는 앞에 있는 살벌한 세 사람을 보며 숨을 내쉬었다. 휘몰아치고 있는 마력 때문인지, 속에서 올라오는 네스키의 마력 때문인지 몰라도 속이 울렁거렸다.
더군다나 세 사람의 마력으로 인해 던전 전체가 흔들려 시야까지 어지러웠다.
천장 위에 매달려 있던 액체들이 뚜둑, 떨어졌다. 치익, 바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던 차에 녀석들이 네스키를 향해 마력이 담긴 손을 뻗었다.
“…….”
그 순간, 던전이 무너질 것 같은 강력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앞을 바라봤다. 연기로 가득한 동굴 안에는 빨간색과 황색, 하얀색의 마력이 뒤섞인 광경이 보였다.
계속해서 폭탄 같은 굉음이 전체를 울려댔다. 네스키의 쥐어짜는 듯한 흐느낌이 굉음 사이에 들려왔다. 동시에 숨 막히고 갑갑해진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흐…….”
앞을 보는 게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찐득한 액체가 묻은 가슴팍이 보였다. 그곳을 쥐고 있는 내 손가락도 함께 보였다. 몸이 절로 흠칫했다.
손을 천천히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끝만 거뭇했던 손이 손바닥까지 올라온 게 보였다.
나는 손바닥을 지그시 눌러보았다. 마비가 된 듯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꺽……끽끽…….”
두려움을 느끼던 순간이다. 연기 속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쇠로 긁는 듯한 웃음소리에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자욱했던 연기가 조금씩 걷어지더니 어둠 안에 있던 형체가 드러났다.
네스키는 입을 귓가까지 찢은 채 웃고 있었다. 공격을 퍼부을수록 네스키의 웃음은 더욱 진해졌다. 그 괴기한 모습에 털끝이 쭈뼛 섰다.
“……각인 ……결, 합…….”
무지막지하게 퍼부어 대는 놈들의 공격에도 중얼거리는 네스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질척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네스키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
네스키의 비명에 동굴이 흔들리더니 바닥에서부터 어두운 연기가 올라왔다.
시야 전체를 빠르게 덮어오던 검은 연기는 앞에 있는 놈들과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붉은빛이 있던 동굴이 점점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순간, 시끄러운 굉음이 뚝 멈췄다. 먹먹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시선을 들자, 네스키를 향해 맹렬히 공격을 퍼붓던 세 놈이 보였다. 놈들은 네스키를 향했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네스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나는 눈동자를 돌려 주변을 봤다. 그러나 세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게 칠흑으로 덮여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하-.”
앞에 있던 다비가 기가 찬 숨을 뱉었다. 그러더니 손에 맴돌던 붉은 마력을 앞을 향해 퍼부어 댔다. 어디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력이 사그라들었다. 검은 공간에 파동이 일어 몸이 찡하게 울려왔다.
“아무래도, 네스키가 스킬을 쓴 것 같군요.”
루스가 굳은 목소리로 말을 뱉더니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가 손을 뻗어 하얀 마력을 뿜었다. 그러자 뻗어나가던 마력이 투명한 막에 가로막혀 사그라들었다.
“-바닥. 위험하다.”
어딘가에 갇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자이드가 불쑥 말을 뱉었다.
그는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바닥을 내려다봤다. 마냥 까맣다고 생각한 바닥에는 자세히 보니, 검은색으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뭐, 뭐야…….”
그리고 그 마법진에서 검은 기운이 불길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탄 냄새도 쿰쿰하게 올라와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어서 피어오르던 검은 기운이 점점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연기가 뭉쳐질수록 형체는 선명해졌고, 그 위에 하나둘씩 표식이 달리고 있었다.
“……소환진이군요.”
루스의 읊조리는 말과 동시에 연기는 완전한 몬스터의 형태로 변했다. 곳곳에 괴성이 울려 퍼졌다.
루스가 달려오는 몬스터들을 보고 입매를 찌푸렸다. 이내 손을 들어 올려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그러자 달려오던 몬스터들이 얼음처럼 굳더니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세 놈의 공격에 바글거리던 몬스터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또다시 정적이 흐를 즈음이다. 자이드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환된다.”
자이드의 말대로 바닥에서 또다시 연기가 피어올랐고, 아까처럼 몬스터의 형체를 만들어댔다. 표식까지 달린 몬스터들은 곧장 우리에게 달려들었고, 자이드는 묵묵히 몬스터들을 처리했다.
“…….”
나는 몬스터가 계속해서 소환되는 이곳에 두려움을 느꼈다. 놈들은 몬스터에게서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투명막을 깨려고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한마디로 쉼 없이 마력을 쓰고 있었다. 아무리 세 사람이 강하다고 해도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마력이 바닥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무기로 변하면 될 일이다.
‘네스키의 마력에 잠식된 상태로 놈들과 연결이 돼도 괜찮은 걸까.’
나는 시선을 내렸다. 검게 물들어가는 손이 보였다. 네스키의 지독한 마력이 계속해서 몸을 타고 올라왔다. 마력이 공유되는데,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었다.
콰광-
귀가 먹먹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녹아내린 몹들이 보였다.
잠잠해진 것도 잠시, 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네스키가 만든 투명막 안에서는 몬스터가 끝도 없이 리젠되고 있었다.
막막하게 앞을 보던 나는 다비의 목덜미에 맺힌 식은땀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전사 마을에서 만났던, 불구가 된 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공격을 할 때, 소환술을 쓰는 걸 봤어요. 위험한 몬스터를 끊임없이 소환해서…… 저와 제 동료들은 순식간에 몬스터에게 둘러싸였어요…….
쏟아지는 공격에 동료들의 마력이 순식간에 바닥나고 말았죠. 사지가 찢겨 죽은 동료들을 뒤로 한 채, 비명이 난무하는 어둠 속에서 저는 빛 하나만 보고, 말 그대로 기어서 도망쳐 와야 했죠.’
절망으로 가득 찬 남자의 눈빛이 강렬하게 떠올랐고, 심장이 덜컥거렸다.
“빌어먹을…….”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앞을 바라봤다. 놈들은 떼로 달려드는 몬스터에게 쉼 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래……. 이 상황에서 각인이 대수냐.’
당장 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중 일을 왜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투명막 안에 몬스터들이 사라지면 다시 밑에 마법진이 그려지는 걸 보며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각인하자.”
내 목소리가 어두운 곳을 울렸다. 놈들이 멈칫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최대한 놈들을 향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력 바닥나기 전에, 각인해서 내 마력 가져가.”
루스가 긴 머리를 쓸어 올리다 말고, 뻣뻣하게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또다시 가슴께에 통증이 일어 눈을 찡그렸다.
막힌 숨을 토해낸 뒤 세 녀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는…… 괜찮냐.”
“기복 님만 괜찮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루스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스의 동의와 함께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자이드의 호박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 시선을 마주하자 자이드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다.”
이어서 그 옆에 있는 녀석을 쳐다봤다.
“기복이가 원한다면.”
굳어 있던 다비의 표정이 조금 풀리더니, 입에서 평소와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들의 흔들림 없는 대답에, 각인에 대한 조금의 걱정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어차피 레스탈로스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녀석들뿐이잖아. 계속 함께해도 괜찮-.’
괜찮다고 생각하던 중, 전사 마을에서 불구가 된 자를 마주한 뒤로 계속 긴장이 된 이유를 알아차렸다.
겁도 없이 네스키를 잡겠다고 말한 처음과 달리, 세 사람과 함께하면서 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닥칠까 봐 은연중 불안했던 것 같다.
나는 녀석들에게 꽤나 마음을 준 듯하다.
“하자.”
나는 놈들에게 각인이라는 것을 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놈들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리젠되는 텀에 각인을 하죠.”
루스의 말에 나는 퀴퀴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쳐다봤다. 세 사람은 다시 손 안에 마력을 모았고 몬스터들이 표식을 다는 순간 마력을 쏟아냈다.
쿠궁, 바닥이 진동했다. 몬스터들의 괴성을 들으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천장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강한 녀석들이 마력을 퍼부어도 투명막은 끄떡없었다.
네스키가 세 녀석들의 공격에도 피해를 받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내 몸속에 있는 네스키의 마력 때문인가.’
그렇게 결론을 내릴 즈음, 앞에서 놈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진동이 멈췄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하늘을 향했던 고개를 내렸다. 눈앞에는 다비의 모습이 보였다. 각인을 하려는 모양이다.
“아플 거야.”
“……상관없어.”
다비의 말에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아픈 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마력을 온전히 내어주고 네스키를 처리해 무사히 놈들과 이곳을 빠져나가는 거다.
“할게.”
다비가 몸을 숙이려 했다. 나는 어떻게 하는진 모르겠지만 각인이라는 것을 얼른 하라는 식으로 몸에 힘을 풀었다.
그 순간, 하얀 손이 다비의 가슴팍을 가로막았다. 다비가 움직임을 멈추자 나는 시선을 들었다. 루스의 손이 다비를 막고 있었다.
뭐 하는가 싶어 눈을 끔뻑이는데, 루스의 입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뱉어졌다.
“단 한 번의 각인입니다. 제가 하도록 하죠.”
루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이드의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아니다. 내가 보스와 하지.”
자이드가 내게로 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동시에 앞에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침내 자이드가 두 사람 앞에 섰다. 내게로 몸을 기울이려던 자이드를 이번에는 다비가 가로막았다. 그러더니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네놈들보단 내가 낫지.”
“제가 가장 안전합니다.”
“보스의 뜻에 따르도록 하지.”
자이드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잠깐 입을 다물더니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쏟아지는 시선에 나는 움찔했다. 그러다 지금 그런 걸 따질 땐가 싶어, 기가 차서 뭐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다시 다물었다. 세 사람의 눈빛이 상당히 진지했으니까. 그러자 루스가 ‘단 한 번의 각인’이라 말했던 게 상기됐다.
‘한 번만 각인된다고……?’
그 말은 한 사람만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세 사람은 무기에 대한 열망이 아주 강하다 못해 환장하는 자들이었다…….
내가 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남은 두 사람은 맨손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여태 레스탈로스를 제외하고 그들을 감당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으니까.
“…….”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선택하냐고…….’
저 세 명이라면 누구든 괜찮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놈들이 전설의 무기인 내게 끌렸던 것처럼, 나도 선택받은 자인 세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끌렸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사실을 굳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놈들은 여러모로 비범한 놈들이고, 인정하는 순간 거대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인정하나 안 하나 나는 언제나 놈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지독한 운명으로 엮인 세 사람 중 단 한 사람을 어떻게 선택하냐고…….’
못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잠잠하던 바닥에 검은 마법진이 다시 그려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놈들이 각인만은 양보 못 한다는 듯이 서로를 흉흉하게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다급하게 세 놈에게 말했다.
“그냥 누, 누구든 빨리해……. 이, 일단 살아야 하잖아!”
지금은 몬스터가 끊임없이 리젠 되는 투명막에서 탈출하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진 마법진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뒷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몬스터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가슴께가 또 지끈하게 아파져 왔다.
잠시 시선을 내리며 고통을 삼켰다.
그렇게 주저앉아 있는 내 앞으로 창백한 손이 뻗어졌다.
“응. 내가 할게.”
다비의 손이 내 어깨를 잡아 왔다. 나는 흠칫하며 눈을 들었다.
다비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빤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그의 시원한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금방, 네스키 처리해 줄게.”
“……나, 나는 뭐 하면 되는데?”
“기복이는 그냥 힘 풀고 있으면 돼.”
다비의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른 각인하란 식으로 몸을 늘어뜨렸다.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뱉어냈다. 어떻게 각인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놈은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말한 대로 최대한 힘 풀고 있으면 될 듯하다.
“……흣.”
불현듯 판판한 배에 다비의 큼지막한 손이 닿았다. 몸이 움츠러들었다. 다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배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하는 건가……?’
각인이 되는 건가, 긴가민가하던 차에 바지가 확 내려갔다. 휑한 느낌에 감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바지가 벗겨진 허연 다리가 보였다. 이어서 다비가 내 옷을 바닥에 던지더니 양 허벅지를 손으로 쥐어왔다. 놈이 내 두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익숙한 자세를 보며 꺼림칙하게 물었다.
“이것도…… 변신이 필요한 거냐……?”
“비슷하지. 기복이 안에 액을 넣어야 하니까.”
“…….”
그래……. 그렇구나. 새삼 놀랄 것도 없던 나는 들었던 고개를 다시 뒤로 젖혔다. 천천히 바닥에 머리를 댔다. 천장으로 추정되는 어두운 곳을 가만히 바라봤다.
가슴께가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더니, 입에서 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아래에서 버클을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벅지가 더 벌려지더니 다리 사이에 다비의 체온이 느껴졌다. 입구에 두툼한 게 닿아 나는 숨을 들이켰다. 들어갈 곳을 찾듯 입구 부근을 문지르더니 이내 두꺼운 게 안으로 들어왔다.
즈즈즛, 입구에서부터 마찰 소리가 들려왔다. 굵고 길쭉한 것이 내부를 가득 채우더니 목까지 뚫을 기세로 깊숙이 쑤시며 들어왔다.
“하으읏!”
안 그래도 숨 쉬는 게 힘겨웠는데, 거대한 게 몸 안에 들어오니 더욱 숨 쉬는 게 벅찼다. 위에 있는 다비 역시 탁한 숨소리를 토해냈다. 너무 깊숙이 들어와 살짝 빼려고 할 때였다.
안을 채우던 거대한 게 뒤로 물러났다. 내벽이 밀려나는 느낌에 발가락까지 오므려졌다. 한참이나 뒤로 빠지던 것이 다시금 안을 파고들어 왔다.
“아읏!”
철퍽, 딱딱한 바닥에 등이 부딪혀 아릿했다. 길쭉한 것이 쭉 들어와 배가 불룩해졌다.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며 움직이자 안에 있던 거대한 것이 더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입구가 빠듯해지는 느낌과 함께 다비가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평소보다 더 뜨겁고 머리가 울리는 감각이 들었다. 얼굴에 흐르는 게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다.
몸이 계속해서 흔들렸고 나는 정신없는 시야 틈으로 붉은 머리칼을 보았다.
‘……어지러워.’
핑글핑글 도는 시야로 다비의 머리통을 보고 있던 때다.
시야에 검은색 머리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머리칼은 점점 가까워졌다.
갑자기 아래를 치던 행위가 멈췄다. 다비와의 깊은 결합 상태에서, 바닥에 누워 있던 상체가 살짝 들렸다.
눈가를 찡그리는 그때, 등 뒤에서 단단한 손이 닿아왔다. 그 손은 내 어깨를 쥐어왔고, 눈앞에는 다비의 와인색 셔츠가 보였다.
“……읏…….”
네스키의 마력 때문에 시야가 뒤흔들리는 건가, 왜 갑자기 다비 놈의 품에 안겨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자이드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바로 뒤통수에서 들려왔다.
“함께하겠다.”
뜨거운 체온과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자이드가 내 뒤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리둥절하던 나는 머리칼을 간질거리는 숨소리에 눈을 들어 올렸다. 탐탁지 않은 눈으로 내 뒤통수 너머를 쳐다보는 다비의 얼굴이 보였다.
“안 된다니까.”
“보스, 잠식된다. 시간이 없다.”
자이드의 목소리에 다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할 즈음, 뒤에서 천 자락을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마지못하다는 듯이 다비가 한숨을 쉬었고, 등 뒤에 단단한 몸이 더 밀착됐다.
앞뒤로 단단한 벽에 갇힌 듯 몸이 옴짝달싹할 수 없을 때야 이상함을 느꼈다.
“뭐 하는-.”
목소리를 내는 순간 배 속에 들어와 있던 기둥이 꿀렁거렸다. 오싹한 감각에 다비의 가슴팍에 몸이 기울어졌다.
“넣겠다.”
뒤통수에서 자이드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비의 것이 꽉 들어찬 입구에 또 다른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눈이 크게 벌어진 채 멍하게 있던 나는 겨우 목을 돌렸다. 그러자 구릿빛 가슴팍이 눈앞에 보였다. 자이드의 몸과 내 몸이 과하게 밀착돼 있었다.
상황이 파악됨과 동시에 결합한 부위에 거대한 것이 닿아왔다.
“하, 하지…… 하으으하악!”
가득 채워진 입구에 또 하나의 무지막지한 것이 비집고 들어왔고, 입에서는 비명도 아닌 숨넘어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아래가 잔뜩 벌어져 장기가 온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공포와 두려움에 눈물이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계속해서 비집고 들어오는 거대한 기둥에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입구가 잔뜩 늘어나다 못해 찢어지는 듯했다.
하나로도 힘든데 뒤에서 비슷한 크기가 또 삽입되자 죽을 것 같았다. 가차 없이 들어오고 있는 기둥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멀어지는 듯했다.
“아흐으-.”
잠깐 사이 정말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눈앞이 번쩍거리더니 어느새 기둥이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배 안이 넘치도록 가득 차는 더부룩한 느낌에 토할 것 같았다.
입구가 불로 지지듯 화끈하게 아팠다. 입에서는 의지와 상관없이 엉엉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파……. 아파.”
“하아…… 기복, 너무 조여.”
잔뜩 몸이 경직되자 다비가 큰 손으로 등을 토닥거렸다.
안에 들어찬 무자비한 기둥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밑이 빠질 듯한 감각에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흐…….”
커도 너무 컸다. 나를 죽이려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벌어진 입에서는 바람 소리만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앞뒤로 느껴지는 체온과 숨소리, 내부에서 맥박이 느껴질 때마다 몸에 소름이 돋아왔다.
“-어쩔 수 없군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루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다비 너머로 힘겹게 시선을 들었다. 루스의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에 지독한 갈증이 스쳤다. 안 좋은 예감에 들었고 나는 저항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늘어진 몸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마침내, 지척으로 다가온 루스를 보며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주, 죽을 것 같…… 하윽!”
말을 뱉자 배에 힘이 들어가 안에 들어찬 두 개의 기둥이 느껴졌다.
몸을 움츠리며 숨을 뱉던 나는 다시 한 놈을 말리려 시선을 들었다. 길쭉한 다리를 감싼 남색 제복 바지가 보였다. 그가 바지춤에 손을 얹더니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기겁하며 말을 했다.
“그, 그만, 힘들, 어. 읏…….”
“죄송합니다.”
루스의 정중함과 난처함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에게 기복 님을 뺏길 순 없죠.”
나는 이건 아닌 것 같다고 강경하게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검붉은색의 위협적인 성기가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게 보였다.
나는 퍼뜩 몸을 물렸다. 그 순간, 안에 들어차 있던 것이 불룩 움직여졌다.
“끄윽-.”
몸에 힘이 풀려 다비 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턱 쪽으로 길쭉한 손가락이 뻗어졌다. 늘어져 있던 나는 손가락에 의해 고개가 들렸다. 턱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가해졌고 입이 절로 벌어졌다.
“우웁-!”
그때, 입 안으로 묵직한 게 불쑥 들어왔다. 그 거대한 기둥이 입 안 전체를 빠듯하게 채우다 못해 목까지 밀고 들어왔다.
턱이 빠질 것 같은 크기에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살기 위해 입에 있는 것을 뱉어내려 했다. 그러자 턱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이를 세우려던 나는 멈칫하며 시선을 들었다. 머리 위로는 달뜬 숨을 뱉어내는 루스의 얼굴이 보였다.
“힐이 있으니 상관은 없지만…… 될 수 있는 한 조심히 머금어 주셨으면 합니다.”
“훕…… 욱!”
루스는 침 삼키기조차 벅찬 크기를 들이밀며 양심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던 차에 배 안에서 불룩거리던 기둥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작은 움직임에도 뇌까지 흔들리는 기분이다.
앞쪽에 있던 기둥이 밖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감각이 마비됐나, 싶었던 입구가 다시 화끈거려왔다. 동시에 뒤쪽에 있던 자이드의 것도 움직였다. 숨을 들이켜자 목 안에 들어찬 루스의 성기가 움찔했다.
“우웁-! 웁!”
입에 있던 것에 신경이 쏟아질 즈음, 배가 텅 비는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배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앞에서 탁한 신음이 들려왔다.
앞에 있는 다비의 것이 바깥으로 쭈욱 빠져나가더니, 안쪽을 치고 들어왔다.
철퍽, 깊숙한 곳이 찔러지자 몸이 퍼드득 떨렸다.
“욱! 훕-.”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던 차에 뒤에 자이드의 것이 푸욱 파고들어 왔다. 시야가 울컥 흔들리더니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 순간 입 안에 루스의 것이 목젖 안까지 쳐올려졌다. 젖혀진 고개로 인해 아까보다 목 안 깊이 처넣어져 컥컥대는 소리가 나왔다. 검붉은 기둥은 몇 번 더 안을 쳤고, 고개가 완전히 뒤로 젖혀졌다.
딱딱한 가슴팍에 뒤통수가 닿았다. 눈물로 가득 찬 시야에는 어느새 자이드의 얼굴이 보였다. 호박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자이드의 눈가가 찡그려졌다. 그러더니 다시 배 안을 채우던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웁…… 욱-.”
다비의 것도 뒤로 빠졌다 이내 허리를 쳐올렸다. 깊숙한 내벽에 기둥이 찔러졌다. 뒤이어 자이드의 것이 내벽을 비비며 삽입됐다.
철퍽, 철퍽, 제각각 배 안까지 치고 들어오는 두 개의 기둥은 단단하고 거대했다. 내장을 박살 낼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어, 후웁…… 웁-.”
이어서 목 안까지 가득 들어찬 성기가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곧장 입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쩔퍽, 입술과 얼굴을 때리는 음낭에 눈이 질끈 감겼다. 눈물이 투둑 흘러내렸다. 그제야 눈가가 따갑다는 것을 느꼈다. 계속 벌리고 있던 턱과 아래에 고통이 몰려 눈이 따가운 줄 몰랐다.
입에 가득 삽입된 루스의 것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 침을 삼키려 하는데, 다시 목 안까지 쭉 삽입됐다. 침이 턱을 타고 질질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마하…… 웁! 읍, 웁-.”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루스의 성기에 목소리가 먹혀들어 갔다. 그래서 고개를 좌우로 흔드니 몸이 흔들렸고, 결합한 아래가 뭉근하게 내벽에 닿아왔다.
아찔함에 허리를 튕겼다. 앞뒤로 찔러지니 시야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입구에 감각이 없어져 더는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정신없이 온몸을 들락날락하는 성기들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으, 훕, 훕.”
찌걱찌걱, 철퍽철퍽 계속해서 두 개의 기둥이 아래를 박아왔다.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물에 젖은 것처럼 귓가에 울렸다. 코안으로는 야한 냄새가 훅훅 맡아졌다.
몸이 반으로 쪼개질 것만 같아 꺽꺽대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목까지 삽입이 되고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는 기둥으로 인해 토할 것 같은 소리뿐이었다.
“욱, 웁-.”
앞쪽에서 다비가 허리를 쳐올리고 빠지면 뒤에 삽입된 기둥이 아래를 쳐올렸다. 계속해서 내벽이 자극당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자비 없이 쑤셔 넣는 추삽질에 맞춰 끈 떨어진 인형처럼 몸이 멋대로 흔들렸다.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옷이 아래로 점점 내려갔다.
어깨 쪽에서 뜨거운 숨결이 닿아왔다. 더해서 뒤로 젖혀진 상체 위로, 빨간 머리카락이 흐릿하게 보였다. 가슴팍에 질척거리는 무언가가 닿았다. 눈이 따가워 몇 번 깜빡이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야가 트이자 가슴팍에 다비의 머리칼이 보였다.
같은 시야에는 어깨에 닿아 있는 검은 머리도 보였다.
“허욱-.”
그때, 루스의 것이 다시 목 안을 치고 들어왔다.
철퍽, 입가에 음낭이 부딪혔다. 허리를 움찔거리자 다비가 가슴팍을 빨다 이를 세웠다. 돌기가 깨물리는 감각에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얕게 안을 자극하고 있던 자이드의 것이 아래를 푸욱 쑤셨다. 단단한 것이 배 안을 불뚝 찔러오자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
“……각인……하겠습니다.”
먹먹해진 귓가로 루스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그러더니 축 늘어져 있던 손이 들려 올라갔다.
힘겹게 시선을 드니, 루스의 차가운 손이 검게 변하는 내 팔을 잡고 있는 게 보였다. 이어서 루스가 고개를 숙이더니 나의 팔 안쪽에 입술을 묻었다. 그와 동시에 입 안에 있던 것이 뒤로 쭈욱 빠져나갔다. 완전히 밖으로 나가는 듯했던 성기가 거세게 퍽, 퍽 안을 치고 들어왔다. 그 맹렬한 기세에 살짝 들었던 고개가 뒤로 완전히 젖혀졌다. 그러자 어깨를 지분대던 자이드의 머리카락이 볼에 닿아왔다.
“우…….”
자이드가 고개를 살짝 비틀더니 어깨를 타고 올라와 목가를 쪽쪽 빨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혀가 목을 자극했고, 침 소리가 질척하게 귓가에 박혀왔다. 이내 몇 번 살을 깨물던 자이드가 입술을 떼더니, 억눌린 숨소리와 함께 속삭였다.
“각인, 한다.”
동굴에서 들려오는 듯한 깊은 목소리와 함께 깊숙하게 결합 되었던 기둥이 귀두 끝까지 쭈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오싹함에 몸을 움츠리는 순간 안쪽을 향해 푹푹 찔러 넣었다. 헐렁헐렁한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하아……기복.”
빳빳해진 돌기를 혀로 굴리던 다비가 가슴께에서 얼굴을 뗐다. 찬 공기가 닿자 혹사당한 돌기가 따끔한 게 느껴졌다.
그는 돌기를 손톱으로 한 번 더 꾹 누르더니,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젖꼭지에 예쁘게 새겨 줄게.”
나는 아득해진 정신 틈으로 다비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또렷이 들려왔다. 그래서 뭘 새긴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거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으…… 웁.”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다비를 제지하듯 팔 하나를 들어 올렸다. 아니, 올리려 했다. 그러나 녹초가 된 몸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다비의 옷자락에 손이 겨우 닿는 듯하다, 미끄러졌다. 하지만 다행히 다비가 눈치챈 듯하다.
“싫어?”
“……흐…….”
입가에 철퍽철퍽 부딪히는 음낭으로 인해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당장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만 입에서 나왔다.
나를 보던 다비가 상체를 들었다. 그러더니 늘어져 있던 내 다리를 들어 올렸다. 허벅지가 욱신거리는 느낌과 함께 아래 삽입이 깊어져 얼굴이 일그러졌다.
겨우 눈동자를 내리자, 다비의 어깨 위로 내 두 다리가 맥없이 얹혀 있는 게 보였다. 다비가 한쪽 허벅지를 쥐어왔다. 안쪽으로 얼굴을 묻은 다비가 뜨거운 숨을 뱉으며 말했다.
“그럼, 여기로 할게.”
질척한 혀가 닿아 오는 순간 안에 들어와 있던 다비의 것이 안쪽을 거세게 치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기세를 못 이긴 몸이 두 사람 사이로 폴더처럼 접히기 시작했다. 다비의 어깨 위로 올라간 다리가 멋대로 흔들릴 때마다 허벅지가 욱신거렸고, 허리가 쑤셔왔다.
“아훕, 훕-.”
온 내벽을 자극하는 두 기둥이 결합 부위에서 움직일 때마다 찔걱찔걱 물기 어린 소리가 들려왔다. 위, 아래 마구잡이로 강렬하게 쳐올려지자 감각이 둔해져 더는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정신이 붕 뜨고 눈앞은 문득문득 점멸하고 있었다.
차차 모든 게 아득해지던 그때, 루스의 것이 목젖을 찌를 정도로 깊이 들어왔다. 입이 헐도록 치던 루스의 것이 움직임을 멈췄고, 루스의 입술이 닿아 있던 팔 한쪽이 따끔거렸다. 어른거리는 시선을 들자 그가 치아로 내 팔을 콱 깨물고 있었다. 하얀 팔을 타고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하우……욱!”
몸이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배 안을 가득 채우던 두 기둥의 추삽질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나가 빠지면 하나가 안쪽을 콱콱 박아대 헐떡거리는 숨을 겨우 뱉어내던 차다.
거대한 기둥이 동시에 깊숙한 곳을 콱 찔러 넣었다. 눈앞이 번개가 치듯 번쩍거렸다.
“…….”
어깨와 허벅지가 불로 지지는 듯한 뜨거움이 느껴졌다. 여린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느낌이 선명해질 즈음, 넋 나갔던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아릿한 고통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흐릿한 시야에는 허벅지 안쪽에 얼굴을 파묻은 붉은 정수리가 보였고, 어깨에는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흣.”
몸을 물어뜯는 짐승 같은 놈들을 넋 놓고 보던 때다.
루스의 뒤로 몬스터 형체가 선명해지더니 표식이 달리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놈들에게 몬스터가 다가온다고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하게 목소리를 쥐어짜는 순간이다.
“훕-.”
배 안쪽에 넣어진 기둥이 꿀렁댔다. 이어서 내부에 액체가 잔뜩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입을 채우던 것 역시 삼키지도 않았는데, 목 안으로 끈적한 액이 멋대로 넘어갔다.
아래위로 퍼지는 액과 동시에 몸이 델 듯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더니 몸이 어딘가로 휩쓸려갔다.
-…….
익숙한 검은 공간에 들어온 나는 속에 있는 마력이 파도가 치는 듯해 어지러웠다.
점차 마력이 불어나는 느낌이 들었고, 울렁임도 심해졌다.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진 마력은 불현듯 세 갈래로 뻗어 나갔다.
바깥으로 퍼지는 감각과 함께 깊은 곳에 있던 응축된 마력이 자유롭게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
온전하고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예전처럼 애쓰지 않아도 시야가 트였다. 온갖 색깔이 섞인, 형용하기 어려운 색이 눈앞에 이글대고 있었다. 전직관의 구슬에서 봤던 색이었다.
그 색이 묘하게 진해지더니 마법진이 그려진 공간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달려오던 몬스터들이 한순간에 액체처럼 녹아 버렸고 투명막이 연기처럼 거둬졌다.
“이야…….”
“……대단하군요.”
“듣던 것 이상이군.”
세 사람의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시선을 내리자 내가 그들의 무기인, 대검, 지팡이, 양날 검으로 변해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저마다 무기를 쥐고 있었는데도 각각의 감각이 선명했고, 내 의식은 한곳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기이한 감각에 혼란스러워하던 차다. 찐득한 액체가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더 회복된 것 같냐…….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3m의 거구의 모습이 그사이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러다 네스키의 주변으로 하얀 뼈들이 더미로 쌓여 있는 걸 보고 알아차렸다. 우리가 투명막 안에 있을 때, 네스키는 주변 몬스터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다는 것을.
-…….
그러자 아까 네스키가 몬스터를 잡고 하던 역겨운 짓이 떠올랐다.
메스꺼움을 느끼고 있는데, 몸이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돌리자 세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놈들은 생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끊임없이 마력이 들어온다.”
“공격하겠습니다.”
“기복. 마력에 집중해.”
놈들이 무기가 된 나를 쥐고서 제각각 한마디씩 했다. 네스키를 경계하던 아까와 달리, 상당히 여유로워 보이는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잠식이 그친 걸로 보아 확실히 각인된 것 같다. 그래서 놈들이 여유를 찾은 건가 생각하며 대답했다.
-어, 그, 그래.
놈들이 무기를 그러쥐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마력에 정신을 모았다. 그러자 여태까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광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에 집중을 하는 순간 어떠한 통로로 마력이 쭈욱 치솟기 시작했다. 놈들이 스킬을 쓴다는 것을 알아채고 좀 더 기운에 집중을 하던 차다. 온갖 감각들이 선명하다 못해 활짝 열리는 듯했다.
그 순간 놈들이 스킬을 썼고, 몸 안에 무언가가 폭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더니 노인과도 닮은 네스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마력이 네스키에게 닿자, 그의 형체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져 갔다. 네스키의 눈이 푹 꺼지고 살이 타들어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내 의식은 거대한 기운에 휩쓸렸다.

খেলত আৱদ্ধ হৈ থকা মই অস্ত্ৰOù les histoires vivent. Découvrez mainten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