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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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을 보며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되리라 생각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 사이로 신선한 아침 공기가 퍼졌다. 가게 안은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로 가득했다. 햇살이 부드럽게 유리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아침이라 아직 한적한 주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지현은 익숙한 일상이 반복되는 것이 권태롭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런 반복 속에서 안정감을 찾곤 했다. 물건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고, 모든 것이 천천히, 나른하게 흘러가는 아침이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도시의 생활을 접고 시골로 옮겨온 후, 한적한 일상은 고독함으로, 생소한 환경은 메마름으로 변해갔다. 지현은 늘어가는 정적과 대화 없는 날들이 편해졌고, 도시의 분주함 속에서 눈치 채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끼며 지내고 있었다.

지현은 그동안 수많은 고비를 넘겨왔다. 매 순간 자신을 억누르며 견뎌왔던 시간들.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어느새 잃어버린 것이 더 많아져 버렸다. 지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22년 낯선 이국땅에서의 삶은 언제나 버겁고 힘들었지만, 가족을 지키고 안정된 일상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왔다.

한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험상궂은 표정의 여성이었다. 얼굴에는 상처가 있었고, 어두운 색의 가죽 자켓은 낡고 해졌으며, 지퍼가 활짝 열린 채 안에 낡고 지저분한 티셔츠가 드러나 있었다. 여성의 돌출된 입은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지현은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여성은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며, 지현의 인사에도 반응하지 않고 찾는 물건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왠지 모를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계산대에 서 있던 지현은 여성이 가져온 물건의 가격을 스캔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15.80, please."
여성은 구겨진 지폐 몇 장을 상체 안쪽에서 꺼내 지현에게 던지듯 건네며 물었다.
"Do you have any wig caps?"

지현이 조심스레 답했다.
"Yes, we do. They're in aisle 3 on your left."

"No, I am asking for a free wig cap."
여성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Sorry, we don't offer free wig caps. They're two for a dollar."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뭔가가 잘못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I don't care if it's a dollar or ten dollars. You should give me a free wig cap. Now you're telling me it's two for a dollar? Are you messing with me? Do you think I care about a dollar?"

여성은 점점 공격적으로 변했고,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지현의 심장이 요동쳤다. 몸의 긴장이 척추 끝까지 전해져 허리까지 아파왔다. 지현은 그동안 그랬던것처럼, 맞서기보다는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 했다.

"What? What? Are you gonna do something? Huh? Huh...?"
여성은 거친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쥔 채 지현을 노려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지현은 계속되는 욕설에 여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여성이 지현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순식간에 상황은 폭력적으로 변했다. 지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얼어붙은채로 눈앞의 여성을 바라볼 뿐이었다. 상대의 눈에는 분노와 경멸이 가득했고, 무언가를 더 중얼거리며 가게 문을 거칠게 밀치고 나가버렸다.

나를 부르는 시간들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