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빨리 지나가면 좋겠어..'
무거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홀로 겨울을 지내고 있는 그의 이름은 방혁수.
벽구석에는 검은 곰팡이가 수를 놓듯 내려와있고, 밤새내린 눈이 녹아 창틀사이로 물이 흘러드는 작은 월세방에서 2년넘게 살고있다. 값비싼 세간살이라곤 에너지효율 4등급의 미니냉장고와 발로 차야 돌아가는 고물세탁기, 여행용 가스렌지 뿐이다.
'밖에 나가기 싫지만 라면이 다 떨어졌다. 오늘 못 먹으면 죽을 것 같다.'
있는 옷 없는 옷 주워입고 절뚝거리며 밖을 나서는 혁수의 발걸음이 불편해보인다.
등록금을 모으며 사회경험을 쌓겠다는 다짐과 함께 휴학을 하고, 공사판에서 삽질을 하다가 그만 위에서 떨어진 철강재에 머리를 부딪힌 후부터 다리 한 쪽이 잘 굽어지지 않았다.
"현수학생, 이게 얼마만이야 그래?
오늘보니 더 핼쓱하네 에그그..맨날 라면만 먹지말고 밥을 먹어 응?"
'현수 아니고 혁수.....'
동네슈퍼 아줌마는 유일하게 날 걱정해주시는 분이시지만,
"3500원"
가격할인따윈 해주지않는다.
나는 집앞에 누군가 서있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숨겼다. 주인집 아줌마였다.
"학생! 있는 거 다 알아! 3개월치 밀린 거 어쩔꺼여! 이번 주까지 방 빼!
안 빼면 내 가만 안 둘거여!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지 암만!"
첫달 방값 밀렸을 때까지만 해도 착하고 인자하신 아줌마, 추우니까 감기 조심하란 말과 함께 찐감자도 몇알 주시곤 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가면서 성격이 점점 변해갔다.
다 내 탓이다. 돈을 벌지 못하니 줄 수 있는 게 이 노래..아니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인기척을 없애는 데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춥다. 추워도 너무 춥다. 라면..라면 먹어야 하는데..아줌마가..아..
"죽은 건가.."
"아냐 숨 쉬고 있어"
"이건 뭐지?"
"요상하게 생긴 물건이다. 섣불리 만지지말고 샤먼에게 도움을 청하자""
웅성거리는 소리에 찡그린 표정으로 실눈을 떴다. 하늘이 파랗다. 구름이 떠다닌다. 나무가 지나간다..
'나무가 움직이다니....?'
사실 움직이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긴 나무판자에 엎어져 묶인 채로..
"뭐..뭐야, 여기가 어디야! 너희들 뭐야. 당장 풀지 못해!"
되는대로 소리를 질렀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건지 풀어 줄 용의가 없어보인다. 나는 손님인가, 아님 고기인가..무섭지않다. 무섭..다..수없이 마인드컨트롤을 해보지만 실제상황..아니,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 불안하기만 하다.
얼마나 흘렀을까..희미하게 나무타는 냄새가 코를 스치더니 이윽고 여자와 아이들이 모여있는 작은 부락에 도착했다. 그들은 나를 모닥불 근처에 내려놓더니,
"샤먼을 모시고 오라. 정찰하는 도중에 우리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 인간을 발견했다. 저항하지 못 하는 상태이니 따로 전사들은 부를 필요없을 것이다."
들린다.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확실하게. 뭐지? 몰래카메라인가? 한국사람치고는 얼굴이 엄청 까만데? 그때였다. 사내아이들이 조심스레 오더니, 호기심어린 눈동자로 날 쳐다본다. 그러다가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콕콕 찌르는데, 내가 반응이 없자 더 세게 찌르는 것이었다.
'아..신이시여. 저에게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시옵소서.'
는 개풀, 놈들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어먹어줄테다.
"갸가가갹! 야약!"
"으아아아! 사람 살려! 저게 내 손을 먹으려 해요"
"웬 소란이냐. 저리 물러서 있거라."
허리가 굽어 키가 120cm가량 되어보이는 흰 머리의 노파가 소란을 잠재웠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하는 말이,
"너는 무엇이냐?"
"에..예? 아..저는 대한민국 서울에 거주하는 26살 방혁수라고 합니다."
"너는 무엇이냐?"
"말했잖아요.대한민국 서울에.."
"너는 무엇이냐?"
"사람"
"너는 무엇이냐?"
"두 발로 걷는 동물..대학생..추운 게 싫은 사람..부모님은 안 뵌지 오래.. 돈 없어..그만 물어..넌 뭔데..그건 라면이야..먹는거..이건 내 옷..빨면 냄새 덜 나.."
날이 저물고, 한 동안 똑같은 물음에 지쳐갈때쯤..
"이 자는 다른 세상에서 온 자로구나. 특별히 사악한 뜻은 없는 걸 보니 안심이로군. 낯선 자라고 하나 이 또한 신의 뜻! 다같이 이방인을 위한 의식을 치루도록 하자."
그들은 나를 중심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위협하는 행동을 하더니 갑자기 눈 앞에 무언가를 내민다. 애벌레다. 살이 오를대로 오른 통통한 애벌레가 원시인 손에서 꿈틀대고 있다.
'어쩌라고?' 멍하게 바라보자,
"먹어라. 어제 물소만한 썩은 나무줄기를 파서 잡아놓은 것이다. 30년 동안 이만한 놈을 본 적이 없다.
넌 이걸 먹을 자격이 충분하다."라고 말하는 것이아닌가!
아뿔싸..어디선가 이 장면을 TV에서 본적이 있었다. 아마존 원주민이 마음을 열겠다는 의미로써, 그들이 주는 것은 뭐든 맛있게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애벌레를 받았지만 난 비위가 약하신 몸이다. 트릭을 써볼까?
난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애벌레가 입속으로 들어가는 모션을 취하고 재빨리 손에 감추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게 말이 돼? 당연히 알아챘을거야. 이건 만 5세 아이들이나 속는 거란 말야.'
"우오오오! 환영한다."
토..통했다. 생각보다 순수한 듯하다.
미지의 세계에 떨어진 첫 날밤은 뜨거운 환호와 함께 흘러갔다.
새벽의 찬 기운에 일찍 잠이 깬 혁수는 어젯밤이 꿈이 아님을 알았다. 월세방은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고, 꺼져버린 모닥불 주위로 여기저기 지은 나무움막들과 희뿌연 안개에 가려진 검은 숲만 보일 뿐이다.
현재 혁수의 소지품은 어른들의 기호식품과 라이터, 라면 5봉지, 5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