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주의
*고어주의
*호러룬 샴x랄세이-Chapter 1-1.동병상련-
곳곳에 찢어진 곳을 서툰 박음질과 지저분한 헝겊으로 기운 소파. 헝겊 아래로 솜뭉치가 돌처럼 두드러져 있어 울퉁불퉁한 소파. 빈 틈으로 새는 물처럼 바느질한 곳마다 실밥이 터져 있는 소파.
이렇게 쓰레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볼품없는 소파였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장 아늑한 침대가 되어줄지도 몰랐다. 혼자 무섭고 아픈 일을 겪어 상처투성이가 된 누군가에게는, 아무리 낡은 소파라 해도 그를 어느 좋은 소파보다도 따뜻하게 감싸주지 않을까.
그 '누군가'는 살을 찢는 듯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지쳐 쓰러져 있었다. 그렇게 차가운 공기만 남겨진 길가에 혼자 버려지다시피 누워 있었던 그는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망가진 채 밤 거리에 버려져, 어둠과 하나가 되어가는 인형이 된 것 같은 기분. 그건 정말 춥고 무서웠다. 그런 그의 침대가 되어 준 '볼품없는' 소파야말로, 추위에 떨고 있던 그를 따뜻하게 안아 준 품이 되어주었다.
그런 소파 위에는 의식이 없는, 체구가 작은 15살 남짓한 남자아이가 누워 있었다. 쌕쌕거리는 가는 숨을 몰아쉬면서. 그는 깍지를 낀 손을 배에 올린 채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지만, 사실 그는 여전히 아팠다. 그의 몸 곳곳에 있는, 붕대로 가려진 상처들이 그의 아픈 기억들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쪽 귀와 어깨, 오른쪽 눈과 가슴에 감겨 있는 붕대.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 난,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찍힌 듯한 흉터... 특히 오른쪽 눈과 가슴에 감긴 붕대는 완전히 검붉은 피로 물들어 원래의 흰 색을 잃었는데, 마치 어둠에 침식되어가는 빛, 절망에 침식되어가는 그의 희미한 희망 같았다.
그런 붕대를 빨갛게 물들인, 상처에 고여 있었던 검붉은 샘은 그의 끔찍했던 기억들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 기억들 역시 비수가 되어 그의 상처를 더 아프게 했고 말이다. 절망과 고통, 그 모든 암흑을 담은 검붉은 샘물. 그의 입가에 말라 붙은 피가 그 암흑이 그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런 그가 덮은 담요와 그가 벤 쿠션 역시 소파처럼 헝겊으로 기운 흔적과 실밥이 터진 흔적이 가득했다. 거의 넝마나 다름 없었지만, 그래도 추위에 떨고 있었던 그에게 있어서는 따뜻한 털코트 같은 담요와 포근한 털모자 같은 쿠션이었다.
랄세이. 소년의 이름이었다. 그는 다크월드 서쪽 끝에 위치한 왕국에서 혼자 살고 있던 왕자였다. 그는 검붉은 연못에서 묻어났던 끔찍한 일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늘 해맑은 모습을 잃지 않았던,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했던 순간에, 랄세이가 '그 곳'에 다녀간 이후로 큰 스크래치가 나고부터... 그의 몸에는 검붉은 샘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절망의 샘물이. 상처는 그런 랄세이를 더 깊은 심연 속으로 끌어들였고, 그에게 있어서 행복은 검붉은 샘물에 의해 묻혀갔다.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는 절망과 마주하게 될 텐데, 과연 괜찮을까.
"...으..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빛을 잃어 흐릿해진, 초록빛 눈을 가늘게 떴다. 랄세이에게 있어서 하나뿐인 눈이었지만. 다른 한쪽 눈은 잃어버려, 초록색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검붉은 샘이 고여있었지만.
어쨌거나, 가뜩이나 이제 막 의식이 돌아와서 정신이 멍한 상태인데,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낯선 풍경은 깨어난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가 누워 있는, '볼품없고 낡았지'만 그 어느 침대보다도 따뜻하고 편안한 소파, 가장자리 쪽에 이가 다 빠져 있는 식탁, 식탁 바로 밑에 깔려 있는 찢어진 카펫,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빛만 새어나오는 전등, 소파와 식탁을 둘러싸다시피 있는 먼지 쌓인 잡동사니 더미... 잡동사니들 중 작은 물건들은 선반과 수납장 위에 놓여 있었지만, 사실상 선반과 수납장은 '작은 물건들이 놓여 있'다기보다 '덮여 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정돈도 안 되어 있는 상태에 물건만 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낡은 가구와 잡동사니가 가득한 이 좁은 방은, 왕자로서 커다란 성에서만 살아왔던 그에게 있어서 낯선 곳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긴 어디지? 아까 전만 해도 이런 곳에 있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그는 이런 생각 뿐이었다. 아직 그를 감정의 심해 바닥까지 끌고 가라앉을, 아픈 상처에 대한 고통과 절망이 들이닥치진 않은 듯 했다. 하지만 그런 비수가 또 다시 그의 가슴을 찌르고 눈을 파낸다면, 그는 얼마나 아플까. 잠깐의 고통이라도, '나쁜 기억'에 담긴 고통은 영원히 지속될 텐데.
어쨌거나, 누운 채로는 방을 제대로 살펴 볼 수 없으니, 랄세이는 몸을 반쯤 일으켜보기로 했다. 여긴 어디인지. 어쩌다가 이런 곳에 오게 된 건지...
그런 그가 소파로부터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그는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커다란 창이 그의 가슴을 푹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욱신거림은 가슴부터 시작해, 온 몸으로 퍼져나갔고. 욱신거리는 느낌이 온 몸을 세게 짓누르는 듯한 고통. 온 몸에 소름이 쫙 돋는 듯한 고통. 동시에 멍했던 머릿속이 띵해지면서 새빨간 색깔이 깔려 그의 생각을 짓누르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시 소파에 누워 웅크린 채 가슴을 움켜쥐고 신음하는 것 뿐이었다.
"윽...!"
비록 새빨간 칼날이 상처를 더 후비는 듯한 고통 때문에 랄세이는 뭔가를 생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갑작스럽게 자신을 덮친 거무스름한 것이 무엇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의 습격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가슴에서 느낀 통증보다 더한 고통. 이는 감정의 바다에 물거품처럼 힘없이 떠 있던 그를 심해 바닥까지 세차게 끌고 내려갔다. 마치 먹잇감을 바다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잡아먹으려는 바다 괴물처럼.
거무스름한 '무언가'는 랄세이를 덮치자마자 그에게 엄청난 고통을 떠넘겨주었다. 빨간 칼로 상처를 더 후비는 듯한 욱신거리는 고통 뿐만 아니라, 가슴을 불로 까맣게 태우는 듯한 절망의 고통까지.
랄세이는 가슴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의식을 잃기 전 그 아픈 기억들이 자신을 못박고 있음 역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못이 하나하나 박힐 때마다, 괴로웠던 그는 가슴과 오른쪽 눈에 고여 있던 검붉은 샘이 자신의 머릿속에까지 고임을 느꼈다.
그 일로 인해 검붉은 심연 아래로 가라앉기 전만 해도, 그는 가라앉을 일 없이 자유롭게 바다를 헤엄칠 수 있었다. 그 곳에 가서 끔찍한 일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랄세이는 항상 낙관적이었고 해맑았던 소년이었다. 비록 늘 혼자였어도, 그는 낙천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동쪽 끝에 위치한 카드 성에서 어둠의 샘이 솟아오르고 세계의 평화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랄세이는 카드 성의 스페이드 왕과 샘을 봉인하고 평화를 되찾기로 마음먹고는, 카드 성으로 향했다. 스페이드 왕이 포악한 폭군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카드 성에서 여러 잔인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샘을 봉인해달라는 부탁은 왕에게 있어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고, 왕이 이 정도 부탁은 흔쾌히 허락해 주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낙관적이다 못해 천진난만한 그는 앞으로 자신에게 들이닥칠, 끔찍한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이 '끔찍한 일'로 인해 망가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검붉은 샘물이 흐르는 절망의 시발점은 랄세이가 카드 성 문지기들을 만나고부터 시작되었다. 문지기들의 공격에 어깨에 칼자국이 나고, 성 복도 곳곳에 널려 있던 덫에 한쪽 다리가 찍히고... 카드 성으로 올 때 아무런 긴장도,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오직 희망만을 품고 온 랄세이는, 세상이 온통 하얗지만은 않다는 걸, 절망으로 물든 검은 세상도 존재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왕실에 다다른 그는, '낯선 검은 세상' 때문에 생긴 두려움을 억누르고 용기를 내어 스페이드 왕을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다. 카드 성에서 솟아난 검은 샘 때문에 세상의 평화가 깨졌다고. 그러니 이 어둠의 샘을 봉인할 필요가 있다고. 하지만 잔인하고 포악한 폭군이었던 왕은 랄세이의 이야기를 듣기는 커녕, 이를 아니꼽게 여기고는 그를 공격했다. 날카로운 창 같은 혀로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래도 성에 안 찼는지, 왕은 피를 흘리며 반쯤 죽어 있는 랄세이에게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과 똑같아져야 할 필요가 있다'며, 그의 오른쪽 눈을 뽑아버렸다.
랄세이는 그 눈이 뽑혔을 때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눈에서 피며 힘이며, 모든게 다 흘러나오는 듯한 고통과 함께 한쪽 시야에 펼쳐졌던 선명한 빨간색. 그리고 그 빨간색이 어느정도 희미해지고 나서 보였던, 뽑힌 자신의 눈과 떨어진 안경... 액정이 깨져 거의 산산조각이 나, 못 쓰게 된 안경은 말라버린 뼛조각 같았다. 그리고 뽑힌 오른쪽 눈의 초점 사라진 초록색 눈동자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는 앞으로 그에게 끝없는 검붉은 심연으로 떨어질 거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는 듯 했다. 가뜩이나 죽을 것 같이 아픈데, 이는 그에게 고통과 더불어 공포감까지 심어주었다.
'낯선 검은 세상'을 이제야 인식했다는 건 그에게 돌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주었다. 이렇게 스페이드 왕이 부탁을 들어주기는 커녕 그의 가슴을 찌르고 눈을 파냈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서 희망을 품고 있었는가. 무엇을 위해서 웃고 있었는가. 이렇게 희망이 무의미해진 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거라면, 그동안 그가 항상 행복할 거라고, 세상이 항상 하얀 모습일 줄 알고 품었던 그의 희망은 대체 왜 존재해왔는가. 그가 '검은 세상'을 인식하자마자 물거품이 되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희망. 하루아침에 무의미해진 희망. 그런 작은 빛이 커다란 어둠 앞에선 한없이 덧없어짐을 인식하자, 그는 검붉은 심연 아래로 가라앉아감을 느꼈다. 희망은 곁에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다. 동시에 불어온 차가운 바람과 그의 눈 앞에 펼쳐진 황량한 밤 거리. 그리고 망가진 인형이 되어 버려진 그... 사실상 그는 자신이 입은 부상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가장 무서웠고 가장 아팠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차츰 약해지자, 그제야 상처로부터 빨간 칼이 완전히 빠짐을 느낀 랄세이는 움켜쥔 가슴에서 손을 뗐다. 가슴에 감긴 붕대가 구겨져 있었다. 그렇게나 아파서 세게 움켜쥔 걸까. 하지만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생긴 흉터는 여전히 욱신거렸는데도, 움켜쥘 수도 없었다. 그 끔찍한 기억이 담긴 못에 박혀 생긴 흉터. 이는 갈수록 아파오는데도, 그는 이 흉터를 어떻게 처리할 수 없었다. 그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 흉터를 감싸 줄 '또 다른 붕대' 였다.
그런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보기로 했다. 이번엔 상처에 무리가 가지 않게, 아프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쉰 듯 탁한, 커다란 검은 바위를 연상시키는 목소리였는데, 이 낯선 목소리는 그런 그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아, 깼니?"
목소리는 바로 그의 옆에서 들려왔다. 분명 옆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아무것도 없는' 옆에서 갑작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어느새 그의 곁엔 누군가가 서 있었다. 가장 먼저 낯익은 파스텔 빛의 녹색 담요가 눈에 띄었는데, 가운데에 찢어진 검은 하트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 이는 담요가 아니었다. 부상당했을 때 입고 있었던, 무릎까지 내려오는 그의 튜닉이었다.
튜닉과 색이 같은 챙 넓은 모자와 가장자리가 찢어져 있는 분홍색 머플러는 소파 옆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자신이 입고 있어야 할 옷은, 저 이가 한 손에 들고 있었고 말이다. 스페이드 왕이 그의 가슴을 찔렀을 때, 분명 그의 튜닉은 찢어졌을 것이다. 그럼 이 앞에 서 있는 '누군가'가 옷을 꿰매 준 건가? 랄세이는 이런 생각으로 그의 옷에서 시선을 옮겨 '누군가'를 올려다 보다가... 또 다시 화들짝 놀라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꽤 심하게 다쳐서 많이 걱정했건만, 생각보다 빨리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하지만 아직 상처가 다 낫진 않았으니.. 여기서 몸을 좀 회복하는 게 좋을 듯 하네."
자신의 옷을 수선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두려움에 눌려 사라져버린 뒤였다. 그의 옷을 꿰매주고(그의 추측이었지만)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누군가'의 행동과 말과는 전혀 다르게... 랄세이가 마주한 것은 거의 망가져 무덤 속에 몇 십 년은 갇혀 있던 좀비처럼 보이는, 거대한 고양이 인형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안경은 카드 성에서 잃어버린 지 오래라 그에게 있어서 흐릿한 시야로 뭔가를 본다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이 인형의 얼굴이 얼마나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얼굴 곳곳에 바느질한 흔적과 그 곳에 실밥이 터져 있었고, 오른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거의 뜯겨져 나가기 직전인 단추가 너덜너덜하게 끼워져 있었으며 그 주위는 삐뚤삐뚤하게 박음질한 흔적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랄세이가 가장 겁을 먹었던 건, 이 인형의 왼쪽 귀가 찢어져 있었고 오른쪽 머리에 누군가가 뜯어 먹은 자국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곳엔 찢어진 천에 깊은 이빨 자국이 나 있었고, 피 묻은 솜덩어리가 그 찢어진 부분으로 튀어나와 있었는데, 이는 뜯어먹힌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뇌를 연상시켰다.
아프겠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불쌍하다... 평소에 랄세이는 이 고양이 인형을 보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역시 아픈 상처와 더 큰 상처를 입을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동정의 감정보다 공포의 감정이 더 앞섰다. 저 이, 날 걱정해주는 척 내 다른 한쪽 눈마저 도려내서 자기하고 닮을 필요가 있다며 그 곳에 단추를 박진 않을까, 어디선가 들은 괴담에서처럼 내 몸에도 바늘을 꽂고 박음질해서 인형으로 만들어버리진 않을까... 두려움 때문에 이런 생각이 앞선 그는, 이 고양이 인형을 보자마자 새파랗게 질린 채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인형 역시 본인을 부패한 시체 보듯이 기겁하며 소파 끝으로 물러가 몸을 움츠린 랄세이의 모습을 보자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해칠 의도는 아니었는데 저렇게 무서워하니... 하지만 그는 한 편으로는 당황스러웠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서쪽 왕국의 상처 많은 왕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매정한 세상으로부터 가슴 한쪽이 부서지는 듯한 상처를 받았으니, 이 왕자는 만나는 이들마다 왠지 모를 트라우마가 생겨 두려움을 가지고 꺼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을 해칠 거라는, 또 상처를 줄 거라는 두려움과 피해망상.
일단 그는 랄세이에게 자신은 그를 해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걸, 세상이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잔인하지만은 않다는 걸 밝히기로 했다. 그를 더 아프게 하는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해서.
"아.. 무서워하지 말게나. 해치지는 않을 테니. 그저 자네를 도와주고 싶을..."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랄세이는 여전히 소파 끝에서 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마치 맹수들에게 쫓겨 궁지에 몰린 작은 토끼처럼 말이다. 하나뿐인 그의 초록색 눈동자는 이 인형 역시 스페이드 왕처럼 그를 해칠 거라는 그 '두려움'이 잔뜩 서린 채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형은 여전히 잔뜩 겁먹고 자신을 경계하는 이 왕자의 오해를 풀고 싶었다. 그가 '두려움'이라는 비좁은 감옥 속에서만 갇혀 지내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형은 또 다시 당황함을 느끼고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저기.. 오해는 좀 풀었으면 좋겠네. 난 그저 자네를 걱정하고 있었을 뿐이야. 해칠 의도는 전혀 없네. 나는 자네를 다치게 한 그 폭군처럼 잔인한 다크너가 아니니까."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결박한 랄세이를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으나, 이는 언제까지나 그의 '바람'에 불과할 뿐이었다. 깊은 상처와 이에서 흐르는 검붉은 샘물로 인한 트라우마, 그 트라우마로 인해 생긴 피해망상, 그 피해망상으로 인해 생긴 '두려움'. 여러 요인들이 하나의 사슬로 연결된 '두려움'은 랄세이 스스로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내고 있었으나, 이를 떨쳐내는 일이란 인형이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요인들로 털실 뭉치처럼 복잡하게 엉켜 있는 사슬이 풀어진다고 풀어지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전히 엉켜 있는 사슬에 사로잡힌 랄세이에게 인형의 이야기가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여전히 이 인형 역시 자신을 잔인하게 해코지할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그래서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흔들리는 눈동자로 인형을 응시하면서, 몸을 더 웅크렸다.
"..다가오지 마세요..."
고양이 인형은 그런 랄세이의 '두려움'을 덜어내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는데도, 이 왕자에게 어떻게든 다가가고 싶었다. 검붉은 샘이 고여 붕대에 감겨 있는 왕자의 오른쪽 눈을 보자, 눈구멍에서 떨어져 나가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단추가 생각나 왠지모를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자기 같은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해서 자기 자신을 거울로 보는 듯한,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어야겠다는 그런 연민의 마음.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여전히 자신을 꺼려하는 랄세이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나도 자네 마음 잘 알겠네. 자네도 당연히 내가 무섭겠지... 하지만 그 '두려움'으로 자네를 옭아매는 건 자해나 다름없어. 그러니 자네만 손해일 테니, 내가 자넬 해칠 거라는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것 같..."
'두려움'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건 자해나 다름없다... 이 말에 랄세이는 끌어안은 다리와 두 팔 사이에 파묻은 고개를 살짝 들어 이 인형의 말에 귀 기울이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어느정도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한 인형이 마음 놓고 그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랄세이는 또 다시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제서야 이 인형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을 뿐, 완전히 마음의 문을 활짝 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형의 갑작스러운 접근은 그의 마음의 문을 세게 닫았고, '두려움'은 그의 닫힌 마음의 문에 무거운 자물쇠를 이중삼중으로 걸어 잠갔다. 그 뿐만 아니라 '두려움'은 그에게 또 다시 '이 인형이 스페이드 왕처럼 그를 해칠 것'이라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는 또 다시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왼쪽 눈마저 뽑아 단추를 박을' 이 인형과 최대한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맹수들에게 포위당한 토끼의 뒤엔 낭떠러지가 있는데, 천적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둔다고 토끼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더 뒤로 갔다간 절벽에서 떨어져 온 몸이 바스러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토끼와 같은 처지였는데, 그의 뒤에도 낭떠러지가 있다는 걸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랄세이는 이 괴물 같은 고양이 인형을 경계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소파 끝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더 물러난다면, 그는 소파 밑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낭떠러지 따위는 자신을 또 해치려는 '두려움' 때문에 이미 잊은 지 오래였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다가 뭔가 허전함을 느끼더니,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짐을 느꼈다.
동시에 들려온, 철퍼덕 하고 넘어지는 소리와 짧은 비명소리. 인형은 자신이 몇 번이나 당황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상황으로는 이를 일일이 세어 볼 겨를이 없었다. '자신 때문에' 자신이 도와주고자 했던 이가 소파에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이 왕자에게 있어서 소파는 꽤나 크고 높을텐데. 그의 키의 한 두 배 정도 되려나. 그리고 그가 이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적어도 타박상은 입었을 텐데. 가뜩이나 그는 심하게 다친 부상자인데... 과연 괜찮을까.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랄세이가 떨어졌던 소파 끝으로 향했는데.. 그가 소파 아랫쪽을 보자, 떨어져 누워 있는 부상자를 보자, 왠지모를 죄책감이 그의 목을 세게 짓누르는 듯 했다.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그의 눈 아래, 랄세이는 옆으로 누운 채 몸을 공처럼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고통 반, 무서움 반으로 떨고 있었고. 그리고는 이를 악문 채 검붉은 피로 물든 붕대가 감긴 가슴을 움켜쥐고 신음하고 있었는데, 그의 신음에선 흐느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눈가엔 고통으로 가득한 눈물이 그렁그렁 했고 말이다.
"으윽... 아.. 아파..."
인형은 그의 울음 베인 신음소리와, 신음하는 와중에 이따금씩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듣게 되자 죄책감이 그의 목을 더 세게 압박함을 느꼈다. 자신 때문에, 아주 추하고 무섭게 생긴 자신 때문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더 아프게 했다. 하지만 정작 인형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비록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인 랄세이라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무서워할 텐데 어떻게 도움을 주겠는가. 여전히 그가 경계심을 버리지 않은 상황에서 억지로 도와주려 했다간 그는 더 큰 화를 보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머뭇거림도 잠시. 결국 날카로운 창 여러 개가 가슴을 쑤시는 듯, 욱신거림이 온 몸을 짓누르는 듯한 고통을 이기지 못한 랄세이는 끝내 작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느끼는 듯한 신음하는 소리가 이제는 완전히 흐느끼는 소리로 바뀐 것을 걸 보아, 인형은 그가 울고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인형은 그의 흐느낌에서 고통, 즉, 아프다는 목소리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목소리 역시 들을 수 있었다.
'아파. 너무 아파. 하지만 왜 내 상처를 보듬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을까? 사실... 이 정도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상처를 안고 버려지는 게, 혼자 고립되는 게 너무 아프고 너무 무서워.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내게 손을 내밀어줬으면 좋겠어...'
그가 울음을 터뜨린 이유 역시 고통 때문이 아니라, 상처를 어루만져 줄 이가 없다는 외로움과 세상으로부터 버려질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 이라고 인형은 생각했다. 그의 흐느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그의 마음의 상처는, 그런 인형의 머뭇거림을 멈춰주고 인형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단번에 결정해 주었다.
비록 랄세이가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상처 많은 왕자의 아픔을 덜어내 주기로 했다.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이제 다시 웃을 수 있도록.
그는 랄세이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여전히 떨고 있는 랄세이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으면서, 이렇게 물었다.
"...괜찮니?"
"....?"
랄세이가 다시 고개를 들고 고양이 인형 쪽을 쳐다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는 작게 훌쩍이면서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흔들리는 눈동자로 인형 쪽을 올려다보았는데, 이에는 그를 괴롭게 했던 '두려움' 뿐만 아니라 그 '두려움' 속에서 나타난 작은 괴물의 눈빛 역시 반짝이고 있는 듯 했다. 괴물은 자신을 둘러싼 그 '두려움'을 먹어치우더니, 이내 그의 공포로 가득한 감정의 틀을 찢고 폭주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했다.
이를 인형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그가 단순히 '겁에 질려있다고'만 생각하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의 눈동자 안의 작은 괴물이 그의 이성을 찢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 채.
"...자넬 무섭게 한 건 정말 미안하네... 아프게 한 것도 미안하고 말이야... 분명 나는..."
"가, 가! 가 버려!"
방금 전만 해도 겁을 잔뜩 먹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형을 소심하게 밀어내려 했던 랄세이. 하지만 그는 언제 이렇게 소심했냐는 듯, 이젠 극도에 다다른 '두려움'으로 인해 이성을 반쯤 잃고 말았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악을 쓰면서, 손톱을 세우고 할퀼 기세로 이 인형을 무력으로 밀어내고 있었으니.
그의 이성을 찢고 폭주한 괴물은 또 다시 인형에게 달려들어 마구 공격해대기 시작했다... 마치 얼마 전에 광란에 미쳐 그의 한쪽 머리를 물어뜯었던 인형의 옛 친구처럼 말이다.
비록 그런 랄세이를 반드시 위로해야겠다는 다짐은 굳게 했다지만, 그의 이성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감정의 괴물은 얼마 전 자신을 공격했던 옛 친구를 연상시켜서 인형은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랄세이가 또 화를 당하지 않게 그를 효과적으로 위로할 수 있을지 떠올리기는 커녕, 머릿속에서 몰아치기 시작한 혼돈을 억지로 억누르려고만 했다. 그래서 그는 어지럽게 널린 머릿속을 제대로 정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괴물에게 지배당해 이성을 되찾지 못한 랄세이에게 진정하라는 말, 자기는 그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말만 계속해서 되풀이할 뿐이었다.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을 따라하며 중얼중얼대는 앵무새처럼 말이다. 그는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닫힌 랄세이의 마음을 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당혹스럽게 한 왕자의 감정의 괴물과 더불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에게 큰 상처와 지금의 흉측한 외모를 떠넘기고 간 자신의 '옛 친구'가 떠올라 속이 많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랄세이 역시, 그런 인형이 진정하라고, 자긴 그의 적이 아니라는 똑같은 말만 쳇바퀴처럼 되풀이할수록, 이 고양이 인형에 다한 신뢰를 잃어갔다. 오히려 저 친절한 척 하는 모습 뒤에 스페이드 왕 같은 모습을 숨기고 있을 거라는 피해망상만 더 커져갈 뿐이었다. 그런 그는 인형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게 여전히 두려웠기 때문에, 자신의 이성을 찢고 나온 괴물에게 차츰 침식당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저리 가! 가 버리라니까!"
'두려움'은 그가 누구인지를 까맣게 잊게 만들었다. 그가 누구인지. 그의 성격이 어떤지.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오직 그가 눈 앞의 인형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머릿속을 가득 메우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어떤 수단이든지 가리지 않고 써서 이 '본인의 왼쪽 눈마저 뽑아 단추를 박을' 괴물 인형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그래야만 이 '죽거나 죽이거나'인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랄세이가 그런 태도를 보일수록 인형은 더욱 더 당황스러워졌으나, 그렇다고 그 역시 물러날 수 없었다. 비록 상황이 많이 곤란해졌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입은 상처를 보는 듯한 이 왕자의 상처를 치유할 필요가 있었고, 왕자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자신과 같은 그의 상처를 보듬어준다면, 그는 물론이고 자신 역시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인형이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방심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순간 무언가에 긁혀 실밥이 터지고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는데, 이는 인형에게 있어서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나는 소리였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살을 찢고, 거기서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달까...
...아니나 다를까. 이는 그냥 기분 탓에 생긴 느낌이 아니었다.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는데... 그 자리에 붉은 얼룩이 묻은 솜이 살을 찢고 튀어나와 있는 게 아닌가. 마치 죽어가는 이가 입가에 문 피거품처럼 말이다. 그런 솜 아래쪽에는 수직으로,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긁힌 자국이 있었고. 순간 '옛 친구' 때문에 한쪽 머리가 물어뜯기고 눈에 박힌 단추가 거의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 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 또 다시 '옛 친구'가 나타나 자신의 손등을 물어뜯은 듯 했다.
인형이 자신의 손등에 생긴 상처를 확인함과 동시에 울먹이며 그를 밀어내던 랄세이 역시 조용해졌다. 그는 한쪽 손을 다른 한 손으로 감싼 채, 난처함과 미안함이 한데 뒤섞인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하나뿐인 눈동자로 인형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인형을 공격적으로 대할 것 같지 않았다.
"...저... 또 다치고 싶지 않아서..."
그는 또 다시 울먹이면서, 기어들어가는 투로 작게 말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좀 전만 해도 그의 흐느낌에선 '두려움'이 가득했는데, 이제는 그 '두려움'보다 죄책감이 더 묻어나는 듯 했다. 죽을 죄라도 진 듯이 말이다.
인형은 여전히 동그마니 누워 자신을 응시하는 랄세이를 보다가, 왼손으로 감싼 그의 오른손 손톱에, 약간의 피가 묻어있는 걸 발견했다. 그제서야 인형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깨닫게 되었다. 자신 때문에 겁에 질려 있던 랄세이가 자신을 밀어내다가, 그만 그를 할퀴고 만 것이었다.
비록 그가 인형에게 몸과 마음, 둘 다 상처를 줬다 하더라도, 인형은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랄세이 역시 자신처럼 상처가 있어서, 그만큼 아픔이 있어서 그를 두려워했던 것 아닐까. 자신이 상처에서 '옛 친구'를 보았던 것처럼, 랄세이 역시 온 세상이 붉게 물든 카드성으로 보이고, 만나는 이들이 스페이드 왕처럼 보여서 그랬던 것 아닐까. 그런 랄세이도 무서웠을 것이다. 그런 연민의 감정을 인형은 짙게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그런 랄세이를 원망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상처를 주었다고 바로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오히려 이기적이었다. 그건 양쪽 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마음을 열고 그 아픔을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동병상련'을 '역지사지'로 느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인형은 방금 전처럼 똑같은 말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하며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위로를 '강요' 하기보다는, 왕자의 상처에 직접적으로 다가감으로써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고 있는 그의 넉넉한 우산이 되어주기로 했다.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끝없는 도화지 같은 하얀 벌판만 넓게 펼쳐진 고독한 설원. 살을 찢는 듯한 채찍 같은 날카로운 눈보라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추운 설원. 이 곳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눈과 바람, 별 하나 없는 깜깜한 하늘 뿐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아니, 두 가지 더 있었다. 몸 곳곳에 선홍빛 붕대를 감은, 상처투성이의 한 소년과 한 사내. 둘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서로가 적인지, 자신에게 피해를 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둘 다 추위에 지쳐있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지경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추위를 덜어내고 지금이라도 서로가 따뜻하게 힘을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랄세이와 인형, 둘은 이 절망이 휘몰아치는, 끝없는 얼음 협곡 같은 설원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둘 다 몸과 마음을 녹일 따뜻함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치유하기 위해서, 인형은 그 먼저 다가가기로 했다. 비록 랄세이는 여전히 마음을 닫고 있어도, 그가 여러 번 노크함으로써 신뢰를 준다면 언젠가는 이 왕자 역시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그런 인형은 이번에야말로, 수포로 돌아가는 일 없이 랄세이를 따뜻하게 감싸주기로 했다. 차가운 기운만이 감도는 설원에서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이 서로의 상처를 녹여줄 수 있는 것이니. 그래서 그는 먼저 자신의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랄세이의 상처를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사를 드러내보기로 했다.
"...괜찮아. 괜찮네. 자네만 이렇게 아파하면서 삶을 사는 게 아니니까. 나도 상처를 가지고 있으니 자네가 그렇게 아픈 것, 충분히 이해하네. 다시 얘기하지만, 나는 자네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해.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비만 맞고 있던 자네의 우산이 되고 싶었을 뿐이야.."
"....."
"자네... 내 모습이 많이 무서웠을 테지. 나처럼 이렇게 끔찍하게 생긴 다크너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하지만 이것 하나는 이해해줬으면 하네. 내가 이런 상처를 입었으니 자네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다는 것 말이지. 뭐랄까, 동병상련의 마음이랄까. 피를 흘린 적이 있는 이들은 상대방이 피를 흘릴 때 얼마나 아픈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 피를 멎게 할 수 있네. 비록 자네가 내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무서워했긴 하다만... 그래도 나는 자네가 마음을 열기까지 기다리겠네. 언젠간 자네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멎게 할 날을 말이지..."
"아..."
순간 랄세이는 정신이 멍해짐을 느꼈다. 그는 여전히 먼지 쌓인 바닥에 누워 있었지만, 온몸에 힘이 빠지고 마치 어두운 심연에 물거품처럼 힘없이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만 해도 그는 흉측한 괴물을 보듯이 인형을 경계했다. 심지어는 인형을 멀리하다가 소파에서 떨어져 화를 보기도 했고, 인형을 밀어내다가 그의 손등을 할퀴기까지 했다. 왜냐고? 그런 랄세이는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카드 성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두려움'에 결박당해, 그는 자신을 위로하려는 인형마저 스페이드 왕처럼 그를 해칠거라는 생각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랄세이가 인형을 그렇게나 무서워했던 것이었다. 그런 인형 역시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음을 전혀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건넨 인형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했던 랄세이는 또 다시 돌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했다. 방금 전만 해도 그의 이성을 찢고 나온 괴물과 그를 옭아맨 '두려움'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런 인형도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기는 커녕 자신이 오히려 그 상처를 무섭다고, 추하다고 더 아프게 했다는 기분이 들어 랄세이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상처는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오른쪽 눈을 잃은 자신의 상처를 보는 듯한 거울과 같았는데. 그는 인형에게 상처를 준 부메랑이 자신에게 돌아온 것 같아 너무나 괴로웠고 부끄러웠던 것이었다. 이렇게 남에게 상처를 줄 거면 본인은 무엇 하러 치유 기도를 써 왔던가. 무엇 하러 착한 '척'을 하고 다녔던가. 그는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에,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 웅크린 몸 안쪽으로 거북이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런데도 정작 인형은 그런 이기적인 자신의 우산이 되고싶었고, 자신이 마음을 열기까지 기다리고 있다니... 자괴감과 죄책감의 감정이 덩굴처럼 그의 몸을 옭아매며 타고 올라가 목을 조르는 듯 괴로웠다.
좀 전만 해도 울음이 베어, 거칠었던 랄세이의 숨소리가 차츰 쌕쌕거리는 고른 숨소리로 바뀌었다. 이제야 붕대 아래 깊은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어느정도 작아진 듯 했다. 그 상처 아래의 깊은 마음의 상처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그런 그는 옆으로 누워 있던 몸을 살짝 일으켰다. 한쪽 손으로는 여전히 바늘로 찌르는 듯 불규칙적으로 잔통이 느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흐르던 눈물을 훔치고 바닥을 짚으면서 말이다. 그는 옆에 있던 소파에 몸을 의지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바늘로 찌르는 정도에서 창으로 찌르는 정도로 변했기 때문에 또 다시 바닥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그는 상체만 조금 일으킨 채, 여전히 가슴을 움켜쥐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러자 인형은 그런 랄세이가 이번만큼은 어느정도 자신에 대한 악감정을 어느정도 내려놓고 마음의 문을 잠근 자물쇠에 열쇠를 끼우기 시작했다고 느꼈는지, 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가 또 무서워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괜찮니? 여전히 많이 아프다면 소파까지 데려다줄까?"
"....."
이에 랄세이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인형을 올려다보았다. 초점을 잃은 그의 초록빛 눈동자는 인형에게 미안하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통곡하며 용서를 비는 듯한 빛이 서려있었으나, 정작 랄세이는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 듯. 그런 그는 상처를 주어서, 그리고 사과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정말 죄송하다는 눈빛을 인형에게 보내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인형은 또 다시 상처에 무리가 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랄세이를 안아 올렸는데, 그제서야 그의 얼굴빛에 안심의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의 설득이 통했는지, 마음의 문을 이중삼중으로 잠가놓던 랄세이가 자물쇠를 하나하나 열쇠로 끼워넣으면서 문을 열 준비를 시작하고 있는 듯 했으니.
그런 그와는 다르게, 그의 품에 안긴 랄세이는 가슴 속에 일렁이고 있던 죄책감의 물이 이제는 목까지 차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인형의 품은 폭신폭신한 쿠션처럼 편안했고 아늑했다. 그의 왕국에 있던 그 어떤 침대보다도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따뜻하고 포근한 털실 스웨터 같은 이 인형을, 그는 대체 왜 '괴물'로 간주하고 있었던가. 왜 자기 마음대로 '훨씬 더 아플'거라고 단정짓고 있었던가. 하지만 그는 그 괴로움에 더 기대고 싶었다. 그럴수록 죄책감이 더 쌓여갔지만, 괴로운 만큼 상처가 치유되고 마음을 녹이듯 더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는 인형의 품에 베개를 베듯이 몸을 기댔다. 황홀할 만큼 포근했다. 코끝이 순간 시큰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런 랄세이를 안은 인형은 소파에 그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이번 역시 아프지 않도록. 다행히 이 부상당한 소년은 이젠 더 이상 아파하는 기색 없이, 안색이 조금 더 편안해 보였다. 마치 폭신한 솜사탕 같은 구름 위에서 잠이라도 잔 듯이. 그런 그는 인형 쪽을 힐끗 보더니, 깨어나기 전에 자신이 덮고 있던 담요를 옷을 입듯이 몸에 주섬주섬 걸치기 시작했다.
인형 역시 그에게 안도가 가득한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그의 옆에 앉아 꿰매고 있던 그의 튜닉을 집어들었다. 스페이드 왕이 그의 가슴을 찢어놓음과 동시에 찢어진 튜닉을, 그의 상처를 꿰매는 심정으로 다시 수선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가 다시 튜닉의 연두색 천에 바늘을 끼워 넣으려 할 때였다.
"....고마워요."
그의 옆에서 누군가 작고 수줍게 감사를 전하고 있음을,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랄세이였다.
랄세이는 이제 완전히 본인을 괴롭게 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듯 했다. 방금 전만 해도 그는 인형을 '왼쪽 눈마저 빼내 단추를 박을' 거라고 간주하고는 두려워했는데, 이제 그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차츰 마음을 열려는 듯,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원에서 소년과 사내는 처음엔 서로를 경계했으나, 이제는 두 사람 모두 따뜻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제 동행하며, 눈길을 걸으면서 서로가 아플 때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이들은 곧 추위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인형은 속으로 또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이 왕자에게 자기 자신을 소개해 보기로 했다. 비를 맞고 있던 그에게 우산을 건네주기 위해,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난 심이라고 하네. 심이라고 쓰고 샴이라고 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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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델타룬 소설/Undertale&Deltarune Novels
Fanfiction어느 평범한 언델타룬 덕후의 소설입니다. 는 제가 개인적으로 델타룬을 더 좋아하는지라(랄세이 처돌이거든요) 델타룬 소설이 더 많다는 점 양해 부탁드려요. 주로 단편, 어쩌다가 한번 장편이 올라오기도 해요. 많이 부족하고 재미도 없지만, 양해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