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행위예술의 역사에 대해 발표하게 된 C조입니다."
정국은 턱을 괸 채, 스크린 앞에 얌전히 서서 발표를 시작한 태형을 조용히 응시했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의 단정한 차림을 한 태형은 가히 압도적인 비쥬얼을 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잘생겼다고 생각이야 줄곧 해왔었지만, 첫 변신을 하고 왔던 날 그 이상으로 수군대며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새삼 그것이 다시 한번 증명되는 듯해보였다. 바스락, 바스락. 정국은 책상 위에 놓여진 평가지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너네 진짜 잘했다 전정국. 옆에서 속삭이는 남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행위예술은 육체를 통해 예술행위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표출한다는 점에서..."
태형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던 게 아주 잠시 같았는데, 어느새 발표는 본론 부분으로 넘어와 있었다. 정국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발표에 집중하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태형을 바라보고, 태형의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는 있었음에도 정작 그 안에 담긴 내용은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가 않아서였다. 그냥 조금은 굳어진 태형의 표정과, 신중하게 끊었다 이었다를 반복해나가는 태형의 호흡과, 떨림도 없이 차근차근 말을 잇는 태형의 목소리. 그런 태형의 동작 하나하나만 눈에 와 박힐 뿐이었다.
"..."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보니 제법 초반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다. 태형이 진지한 모습을 할 때마다 정국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태형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 날이 처음이었고, 그 이후로도 태형은 방심한 순간에 문득문득 예기치 못한 얼굴이 되곤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그러나 정국은 이제 그럴때마다 당황하며 굳어지지 않았다. 반사작용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맥박을 고스란히 느꼈고,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었다. 다 알고 있어서였다. '당연히 잘하지.' '우리 꾹이랑 하는건데.' 문득 어제 태형의 그 목소리가 생각났다. 작게 웃을 때마다 제 목에 와 닿았던 따뜻한 숨결도 생각났다. 마지막으로는, 끌어안은 두 몸 사이에 느껴졌던 심장의 박동도 생각났다. 정국은 태형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넘어가 한국에서 행위예술의 전개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태형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주변의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공식적으로는 태형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던,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럴줄 알았던 발표의 끝이 다 와가고 있었다. 정국은 그것이 문득 실감이 났다.
"수고했어 꾹아."
태형은 정국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손을 맞잡으며, 정국은 깁스에 싸여있는 태형의 반대쪽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는 이상하게 태형의 눈만 보였었는데. 정작 이렇게 단둘이서만 마주보고 서 있자니, 그 눈을 다시금 보는 것이 너무나도 민망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빠져나가버린 수업 후의 텅 빈 교실이었기에 더욱 더 그랬다. 정국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발표는 너가 해 놓고 뭔 소리야."
"그래. 우리 둘다 너무너무 잘했어."
태형의 말에 정국은 입술을 깨물었다. 팀플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으로도 훌륭했다. 태형은 끝까지 잘 마무리했으며 교수로부터는 칭찬까지 들었다. 그러나 정국은, 막 과제 하나를 완벽히 마쳤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너무나 무거운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붙들고 버틴 돌멩이 하나가 가슴 속 아주 깊은 곳에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정국이 아무 말이 없는 사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태형은 먼저 입을 열었다.
"여튼...팀플 핑계로 못보니 이제 어떻게 억지 데이트 하지."
"..."
생각해봐야겠다. 짧게 덧붙이며, 태형은 꼭 붙잡고 있던 정국의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손으로 대신 가방을 추켜올렸다. 정국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저 아까처럼 그대로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가라앉은 눈으로 태형을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정국은 그렇게 느꼈다. 생각의 줄기들이 모조리 한데 뒤엉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끔 혀끝에 무겁게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렇지. 우리 팀플 끝났지. 핑계 같은 것도 없지. 긴 울림과 함께 들려오는 그 소리들이 튀어나오려는 속마음을 콱콱 짓눌렀다. 천천히, 정국은 생각을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머릿속 기억들을 한가닥 한가닥씩 더듬었다. 그림같이 재현되는 생생한 목소리들이 꼭 영화 속 장면들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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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차원 김태형과 CC가 된다는 것 -;뷔국
Fanfiction"이름이 뭐예요." "...예..예?" "이름, 이름이 뭐냐구요." "...전..정국인데요..." "헐 정국이요? 이름도...이름도 잘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