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악녀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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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름다움.
다섯 차원 업그레이드된 존재.
미모와 연기력 둘 다 잡은 이기적인 유전자.
트로피 수집광.
이 모든 묘사의 주인공인 설린하는 숨을 몰아쉬며 절벽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 언니. 지금이라도 그냥 대역 쓰자고 해요.”
매니저가 옆에서 같이 절벽 밑을 내려다보며 목소리로 징징댔다.
설린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긴장으로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그걸 티 내는 게 더 싫었다.
“올해도 트로피 모으려면 열심히 해야지.”
전 세계 연기 대상 트로피 수집가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아. 그래도요, 언니. 여기 은근 사고도 잦고, 특히나 실종된 사람들은 한 명도 못 찾았대요.”
“어디서 이상한 말만 주워들어 갖고.”
“진짜라니까요? 아, 진짜. 감독님이 괜히 이상한 장소에 꽂혀서!”
“반대로 촬영 무사히 끝나면 대박 나겠네.”
“일단 사고가 안 나야죠!”
“안 나, 안 나. 연기 하루 이틀 하니?”
막상 뛰어야 하는 건 자신인데 매니저가 울상이다.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 건지.
“촬영 들어갑니다!”
“네!”
설린하는 심호흡으로 긴장을 풀며 표정을 재정비했다. 안전장치도 다 있고 더미 테스트도 몇 번이나 끝냈다.
무섭지만 안전하다.
사고만 일어나지 않으면.
“꺄악!”
그리고, 그럴 때 꼭 사고는 일어난다.
“설린하 씨!”
“잡아!”
순식간의 일이었다.
돌풍이 불었다. 예상치 못한 강한 돌풍이었다. 급풍에 안전장치 하나가 빠졌다. 중심을 잃은 설린하의 몸이 허공을 붕 날았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절벽에서 벗어난 몸이 절벽 아래로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설린하는 그 순간 기절해 버렸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으…….”
온몸이 쑤시고 뒤틀리고 차가웠다.
‘절벽에서 바다로 다이빙했으니 당연히 춥고 아프겠지…….’
설린하는 무심히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등 뒤로 딱딱한 돌바닥의 감촉이 느껴졌다.
‘죽진 않았네……?’
누운 채 눈을 깜빡이는데 보일 리 없는 것들이 보였다. 빽빽한 나무들과 그 위에 수북이 쌓인 흰 눈.
‘……산? 숲?’
나무 한 그루 없는 절벽 위에서 찍다가 바다로 떨어졌는데, 웬 숲? 게다가, 쌩하니 불어온 칼바람이 얇은 옷을 파고들었다. 분명 여름이었는데 이 날씨는 대체…….
‘나, 혹시 엄청 다쳐서 몇 달 동안 정신 못 차리고 있었나?’
하지만 그렇다기엔 장소가 영 적합하지 않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움직여 보는데 몸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았다.
“어, 괜찮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니 더욱 이해되지 않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보이는 거라곤 그저 나무, 낙엽, 돌, 산. 길도 없었다. 그냥 눈 쌓인 낙엽 위에 드러누운 상태였다.
“……뭐지? 뭐야? 뭘까? 몰카?”
몰카면 대충 느낌이 있었을 텐데.
배우 경력 만렙을 채우니 이제 촬영장 공기만 마셔도 무슨 일 있었구나, 감이 온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그냥 진지한 촬영 현장이었다. 게다가, 이런 위험한 몰카는 기획할 수도 없고. 대 여배우를 상대로 이런 몰카를 했다간 몰매 맞는다.
“그럼……, 기절해서 꿈꾸는 중?”
그러나, 꿈이라기엔 너무 현실적이다. 피부를 때리는 차가운 바람, 신발에 스며드는 눈의 한기.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어떤 괴물.
‘……괴물?’
괴물이었다.
‘안녕하세요, 괴물이에요’ 하고 인사하지는 않았지만, 5층 빌라 높이만 한 크기에 악어처럼 쩍쩍 갈라진 가죽을 온몸에 두른 저 괴생물이 괴물이 아닐 리 없었다.
“키에엑!”
괴물이 치켜든 두 앞발에 붙은 날카로운 발톱이 설린하를 향해 날아들었다. 물론, 괴물은 ‘저 이제 공격해요~.’ 하고 예고를 날리지 않았다.
부웅―!
“뭐, 뭐야, 이거 뭐야!”
설린하는 본능적으로 몸을 굴렸다.
배우라는 직업은 결국 멘탈과 체력 싸움이다. 체력을 위해 익힌 온갖 격투기와 운동이 빛을 발했다.
쿵!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들기 직전, 몸을 굴려 피했다. 그러나, 괴물에게는 기다림이 없었다.
“으!”
체력을 단련했다고는 하나, 실전과는 감각이 달랐다. 두 번째 공격은 피할 수 없다. 설린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쌩한 바람이 코앞을 스쳤다. 몸이 동강 나는 고통 대신 가죽이 찢기는 끔찍한 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
설린하는 놀라 질끈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달이 세 개 뜬 밤하늘이 보였다. 그 검푸른 밤하늘을 예리한 은빛이 갈랐다.
“뀌에에엑!”
괴물이 내지른 기괴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너무 크고 끔찍한 소리였다.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 만큼.
조금 전 산비탈을 구를 때 어디를 삐끗하기라도 했는지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설린하는 고개만 들어 괴물을 돌아보았다. 괴물은 사방에 진득한 녹색 피를 흩뿌리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새카만 망토를 휘날리는 한 남자가 있었다.
괴물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팔이 너무도 빨라 보이지 않았다. 허공을 가른 검의 흔적만이 달빛을 반사해 은색으로 반짝일 뿐이었다.
은색 반짝임이 흩뿌려질 때마다 괴물은 토막이 났다. 결국, 난자된 괴물이 무너져 내렸다. 남자는 묵묵히 칼을 휘둘러 이물질을 털곤 몸을 돌렸다.
괴물과 그 괴물을 고깃덩이로 조각낸 정체불명의 남자.
연기자일 리 없다. 연기로는 절대 저 느낌이 생기지 않는다. 저건 진짜 괴물이었고, 이 남자는 진짜 실력자였다.
그때, 괴물을 박살 낸 남자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조금 전 믿기지 않는 상황을 목도한지라 저절로 몸이 위축됐다.
설린하는 주저앉았던 몸을 애써 일으켜 세웠다. 어지간히 놀란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가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 *?”
그런데, 남자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예?”
느낌이 쎄했다. 세상에는 온갖 이야기가 다 있다. 그중 차원 이동에 관한 것도 상당수 차지한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앞뒤가 맞지 않는 장소와 계절, 지금도 믿기지 않는 거대한 괴물, 그리고……, 눈앞의 남자.
‘……설마, 차원 이동?’
그렇지 않고서야 이 모든 것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세상엔 이렇게 생긴 사람도 없다. 달처럼 하얀 피부에 회청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염색과 렌즈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오묘한 색이다.
한국인으로도 외국인으로도 볼 수 없는 남자의 외모. 몸에 걸치고 있는 옷도 중세 판타지 어딘가에 등장할 법한 복식이다.
“****…….”
결정적으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촬영 때문에 전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봤지만 그 어느 나라의 언어도 아니었다.
이로써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곳은 다른 세계다.
팔뚝과 목덜미에 소름이 타고 올랐다.
‘차원 이동이 실제로 있는 일이었어?!’
이런 건 소설이나 만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
‘소설에서는 차원 이동하면 언어 패치는 자동이던데…….’
그게 아닌 걸 보니 책 빙의는 아닌 모양이다. 정말로 우주 어딘가에 연결된 먼 세계로 와 버린 것이다.
“이런, 미친…….”
설린하는 머리를 싸쥐었다. 이걸 어쩔 것인가. 이제 차원 이동했으니 이 세계를 멸망에서 구하기라도 해야 하나.
남자가 그런 설린하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손바닥을 위로 해 손을 까딱거렸다.
‘……손 달라는 건가.’
의도를 알 수 없어 미심쩍기는 했지만, 어쨌든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다. 괴물이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니 얌전히 말을 듣는 편이 나았다.
설린하는 머뭇머뭇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금속 링을 꺼내 설린하의 손목에 채웠다. 금속 재질의 가는 팔찌가 가느다란 팔뚝에 맞게 조여졌다.
“이게 뭐…….”
설린하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며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어?!”
그때, 입이 어색하게 움직였다.
“뭐야, 이거. 어어?!”
내뱉은 말마다 낯선 언어로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자, 그는 여상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잘 작동하는군.”
“어어!”
남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설린하는 고장 난 사람처럼 “어어!”만 반복하며 그를 손가락질했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감탄사는 통역되지 않는다.”
“아니, 그, 어어!”
“이제 그만 일어나.”
“어어, 그, 일어나라고!”
“제대로 작동하는 건 확인했으니, 같은 말 두 번 반복할 필요는 없다.”
남자의 냉랭한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차원 이동을 했으니 통역이 되는 도구도 있을 수 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물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남자는 물끄러미 설린하를 바라보더니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여기가 어딘지 말해 주면 아나?”
“……모르겠죠.”
“네가 누군지는 스스로 답할 일이고.”
“……그건 그렇죠.”
남자는 입을 다물고 쳐다보기만 했다. 질문 한마디 던지는 것조차 생략하는 거만함에 설린하는 허허 웃고 말았다.
“저는 아마 이곳 기준으로는 다른 세상에서 이동해 온 사람이 될 것 같고요.”
“그렇겠지.”
남자는 차원 이동에 대해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침착하게 통역기를 끼워 준 것도 그렇고 이런 상황이 퍽 익숙한 느낌이다.
“혹시, 많이들 넘어와요?”
“그런 모양이더군.”
“아……. 직접 보신 건 처음이시구나.”
일상의 개념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차원 이동을 직접 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다른 세계 사람이랑 올해 딸기가 풍년이래요, 하는 뉘앙스로 차원 이동자를 말하고 있다니.
“몇 년에 한 번씩 시체나 뼈가 발견되긴 하는데, 살아 있는 건 처음이니까.”
“하, 하하…….”
정말 친절한 설명이십니다. 설린하는 영혼 없이 웃었다.
남자는 용건을 마쳤다 여겼는지 괴물의 오물로 더럽혀진 칼을 닦는 등 정리를 시작했다. 설린하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한 무심한 태도로.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었지만, 안전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잘 붙어 있어야 했다. 설린하는 ’마주하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배우의 미소’를 두르고 남자에게 사근사근하게 접근했다.
“그럼 그쪽은 혹시 기사……, 라든가. 뭐, 괴물이랑 싸우는 일 하시는 분?”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주변 온도가 더 떨어졌다.
‘웃었는데 공포스러운 남자라니.’
이거 딱 차가운 북부 공작 재질 아닌가. 찰떡 비유다 싶은 찰나, 남자는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 말투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나는 북부의 주인, 렌버드 가문의 가주이자 아클라인 왕국의 공작, 칼시온 렌버드다.”
“……와.”
……진짜 북부 공작이잖아.
감 좋단 말을 많이 듣긴 했는데, 이제는 진짜 자리 깔아야 할 때가 왔나 싶다. 설린하는 자신의 감에 감탄하며 북부 공작, 칼시온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과연 소개 듣고 보니 생긴 것도 북부 공작, 표정도 북부 공작, 괴물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실력도 북부 공작, 싸가지도 북부 공작, 어딜 봐도 북부 공작이었다. 심지어 이름마저도 북부 칼씨다.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설……, 아니, 셀리나라 합니다.”
본명 대신 외국에서 쓰는 이름을 말했다. 본명은 너무 튀고 발음도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셀리나.”
다행히 칼시온은 어렵지 않게 발음했다. 아주 이상한 이름도 아닌지 별다른 반응도 없었다.
“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명색이 공작이니 그에 맞춰 예를 갖춰야 하나 싶었지만, 이 세계 예법이 어떤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자신은 공작의 아랫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을 대하듯 편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 손은 뭐지?”
칼시온은 셀리나가 내민 손을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인사요.”
이걸 굳이 설명까지 해야 하나? 셀리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민했다.
‘아님 말고.’
손을 거두려는데 칼시온이 먼저 셀리나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그의 손아귀 안에 손이 쏙 들어가 보이지도 않게 감싸였다.
“여기서도 악수를 하긴 하…….”
쪽.
칼시온의 모양 좋은 입술이 셀리나의 손등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
순간 놀라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셀리나는 입을 벌린 채 굳어 버렸다.
손등 키스는 원래 살던 세상에도 있다. 시상식 같은 곳에서 외국인들과 인사할 일이 있을 때 간혹 받기도 했으니, 손등 키스 자체는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칼질만 잘할 것 같은 북부 공작의 표본 같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랬다는 게 놀라웠다.
인사는 짧고 간결했다. 형식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알려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칼시온이 고개를 들고 삐뚜름히 웃었다.
“행색은 평민인 것 같은데, 하는 짓은 귀족 영애군.”
셀리나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촬영하던 옷 그대로였다. 이번 배역이 가난함에 무너져 가던 비운의 여주인공이었던 관계로 옷차림이 매우 허름했다. 그걸 입고 바닥에 구르기까지 했으니 행색이 초라해 보이는 건 당연했다.
“제가 살던 곳엔 귀족 평민 구분이 없었어요. 그냥 사람입니다.”
“……그렇군.”
칼시온은 쯧, 혀를 찼다. 어째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혹시, 귀족이길 바라셨나요?”
“그쪽이 더 쓸모 있을 테니까.”
‘쓸모?’
구조하자마자 쓸모를 따지신다……? 어째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귀족이 아니면 쓸모가 없어요?”
“본인 하기에 달려 있겠지만, 확실히 덜 쓸모 있어지겠지.”
“쓸모가 없으면 어떻게 되죠?”
그 질문에 칼시온의 웃음이 짙어졌다. 분명히 웃는 모양샌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정말이지 북부 공작다운 웃음이었다……, 는 감상을 할 틈도 없이 본능적인 두려움이 일었다.
“살아서 산을 내려가고 싶으면 쓸모가 있어야 할 거야.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이곳은 괴물이 나오는 산, 심지어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랜지도 모르는 깊숙한 산속이다. 칼시온이 데려가 주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위험 지대였다. 이곳에서 잡을 수 있는 유일할 동아줄은 칼시온뿐이었다.
“저, 정말 쓸모 있습니다! 정말 쓸모 많고요. 존재 자체로 세상에 빛이 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분명 여기서도 그럴 겁니다, 네.”
셀리나는 다급히 자기 홍보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어필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흠…….”
그러나, 칼시온은 시큰둥했다. 저쪽 세상에서 잘나갔다는 건 별 쓸모가 없는 모양이다. 이러다 진짜 두고 가면 이쪽만 난리 나는 건데…….
‘저쪽이야 어차피 시체로 발견되는 차원 이동자 하나 버리고 간들 아무 문제 없겠지.’
더구나 저 싸늘한 언행을 보아 방금 만난 사람 하나 죽는다고 슬퍼할 것 같지도 않았다. 돌아서면 까먹겠지.
셀리나는 더욱 간절히 말을 보탰다.
“원하시는 방향대로 맞춰 드립니다! 이 한 몸 바쳐 필요 있어질게요!”
“그대가 내 땅에서 발붙이고 살고 싶다면 당연히 내가 원하는 걸, 그 한 몸 바쳐 최선을 다해야 마땅하지.”
최선을 다한 충성 고백을 당연하게 받는다. 당연한 정도로는 쓸모를 증명할 수 없다. 점차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셀리나의 머릿속도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 그럼 없는 몸이라도 하나 더 구해서 두 몸 바쳐서라도…….”
“하지도 못할 헛소리는 집어치워. 살던 세계에서는 뭘 했으며 렌버드의 발전을 위해 제공할 만한 지식이나 기술이 있는지를 묻는 거다.”
‘……어?’
의외로 상식적인 접근이었다. 다행히 피에 절어든 살인마 타입 북부 공작이 아니라 능력형 북부 공작이었나 보다.
셀리나는 재빨리 고민했다. 아무래도 예체능보다는 최신 기술이 잘 먹히지않을까.
“제게 핸드폰이라는 무선 통신 기기가 있는데요…….”
촬영 중이었어서 다른 물건은 없는데, 소품인 핸드폰은 주머니에 있었다.
“그 기술을 재현할 수 있나?”
“……아뇨.”
셀리나는 이과, 공대, 대기업 소속 외계인이 아니었다. 빠른 부정에 칼시온도 빠르게 답변했다.
“그럼 관둬.”
빠르게 망한 느낌이다.
웹소설 보면 핸드폰 하나로 신의 사자니 뭐니 사기 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도 있던데. 여긴 상대가 틀렸다. 핸드폰 하나로 잘 먹고 잘 산 사람은 상대가 북부 공작이 아니어서 잘됐을 것이다.
한 번 미끄러졌다고 내내 포기할 수는 없는 법. 셀리나는 방침을 바꾸어 솔직하게, 약간의 포장을 섞어 고했다.
“문화 예술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어쩌면.”
문화는 대부분 여유가 있을 때 대우가 좋아진다. 칼로 괴물을 때려잡는 판타지 세계에서도 그게 먹힐까. 긴가민가했다.
“어떤 문화 예술. 뭘 잘하는데.”
의외로 칼시온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몸으로 하는 웬만한 건 다 잘합니다.”
세계적인 탑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체력과 근성, 재능의 조합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안 배운 운동이 없고 안 배운 기술이 없다. 전문가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낯선 세계에선 먹힐 것이 뭔가 있을 수 있다.
“몸으로 하는 건 필요 없어. 기술적인 것.”
그런데, 그것도 별로인 모양이다. 결국, 셀리나는 긴가민가하면서 본업을 밝혔다.
“연기를 잘합니다. 배우였거든요.”
“연기? 연기라…….”
뜻밖에 칼시온은 흥미를 보였다. 처음으로 차가운 미소 대신 관심 어린 눈빛이 셀리나를 향했다.
‘……어, 어라? 이건가?’
설마하니 북부 공작이 연기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다. 셀리나에겐 잘된 일이었다. 살 확률을 높일 기회였다.
“네, 원래 살던 곳에서 전 세계에 절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배우였거든요. 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세계 최고였다고 자부합니다.”
“해 봐.”
“그러니, 무슨 배역이든……, 네? 뭘요?”
칼시온은 까딱, 간단히 턱짓했다.
“연기.”
“아, 아아. 예……. 갑자기, 여기서요?”
“왜, 못 해?”
’못 해?’가 ’죽을래?’로 들리는 마법을 느꼈다.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못 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셀리나의 진지하고 간절한 눈빛에 칼시온은 다시 한번 턱짓하곤 팔짱을 꼈다. 관람 모드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옆에는 아직 끈적한 녹색 피가 질질 흐르는 괴물의 사체가 있고 사방은 눈 덮인 숲속이다.
하지만, 못할 건 없다. 녹색 방에서 녹색 쫄쫄이 입은 사람을 상대로 눈물 콸콸 흘리는 러브 신도 찍는데 이쯤이야.
“무슨 연기를 할까요.”
“아무거나……. 흠, 악녀?”
“악녀요?”
갑자기 튀어나온 주문이 의아했으나, 추가 설명은 없었다. 하든가 여기서 죽든가 선택하라고 협박하는 눈빛만 돌아왔다.
‘……알아서 하라 이거지.’
셀리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허구한 날 시키는 게 상황극이다. 전 세계급 탑 배우를 무시하지 마라. 셀리나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과감하게 질렀다.
“야.”
조금 전까지 짓던 절박하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입매를 싹 내리고 눈을 날카롭게 뜬 채 짝다리를 짚고 고개까지 삐딱하게 틀었다.
“……뭐?”
칼시온이 태어나 처음 뺨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사람이 그랬다면 ‘아, 제대로 걸렸구나’ 속으로 노래를 불렀을 텐데, 단칼에 괴물을 토막 내는 북부 공작이 저런 표정을 지으니 목에 칼이 날아든 것처럼 섬뜩했다. 심장이 쪼그라들어 호두만 해졌을 정도다.
그러나, 다행히 심장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셀리나의 얼굴은 배우답게 매우 두꺼웠다. 얼굴에서 가죽 뜯어내면 두개골이 귤만 한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특출 나게 두꺼웠다. 어쨌든, 첫 타에 이런 반응이니 반은 성공이다.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살려 줬으면 다야? 연기가 그렇게 만만해? 이게 북부 공작이면 단 줄 아나.”
연기지만 쫄려서 속이 뜨끔뜨끔했다. 과연 칼시온은이 이걸 웃으며 받아 줄까 하는 게 문제인데…….
“아, 아아. ……큭, 그런 거군.”
다행히 그는 옹졸하지 않았다. 웃으며 받아 줬으니 이제는 마음껏 활개 쳐도 된다.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제 크기를 되찾아 감에 따라 입은 더욱 방자해졌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결론 내지 마. 지금 눈앞에 사람 안 보여? 사회성 없는 티 내지 마. 누가 북부 공작 아니랄까 봐.”
“좋아, 합격.”
간단히 합격이 떨어졌다.
“와……!”
오랜만에 쌩 신인 때 오디션 보던 기분으로 돌아갔다. 목숨만 건지자는 생각으로 전념했는데, 일단 목숨은 구한 모양이다.
‘일단 살았다…….’
셀리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악녀 주문을 하셨던 분은 자신을 향한 방약무인함에 크게 만족한 얼굴이었다.
“나를 상대로 이 정도로 까불 수 있으면, 내가 원하는 역할은 충분히 해내고도 남겠어.”
“역할……, 요?”
분위기를 따라 말꼬리도 다시 길어졌다. 민첩한 분위기 파악 능력에 칼시온은 더욱 만족스러워했다.
“그래, 마침 사람이 필요한 일이 있었는데 그대가 딱 적격이야.”
“무슨……, 일인데요?”
왠지 북부 공작의 일이라면 위험하든가 힘들든가 할 것 같은데.
“별건 아니고…….”
파삭―.
그때,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셀리나와 칼시온은 동시에 몸을 굳히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스락, 파삭, 하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괴물이 분명했다. 칼시온은 내리고 있던 칼을 한 바퀴 휘둘러 손목을 풀었다.
“일단은 사냥을 끝내고 얘기하도록 하지.”
사람 목소리를 들은 괴물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멧돼지 같은 생김새를 가진, 소 두 배만 한 크기의 괴물이었다.
칼시온은 괴성과 함께 달려드는 괴물과 달리 여유 있는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두 존재가 만난 것은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누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칼시온은 그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칼을 휘둘렀고, 괴물은 차근차근 고깃덩이로 변해 갔다.
‘아…….’
그리고, 셀리나는 바닥에 흩뿌려지는 괴물의 피를 보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아무리 촬영하며 온갖 괴물이나 피를 봐 왔어도 현실과는 철저히 달랐다. 괴물만으로도 비현실적으로 무서운데 칼시온은 그 괴물을 가지고 놀듯 쪼개고 있다.
공포 그 자체였다. 인간의 정신이 수용 가능한 공포의 수치를 넘어갔다. 셀리나의 의식이 점차 희미해졌다.
“안 일어나면 두고 간다.”
생존 본능이란 굉장한 것이었다. 기절한 상태에서도 무엇이 살 방법인지를 알았다. 셀리나는 눈을 번쩍 뜨며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앉기까지 했다.
괴물을 해체 완료한 칼시온이 피 묻은 칼을 닦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다른 괴물까지 몰려왔는지 해체된 괴물의 수는 늘어나 있었다.
“일 다 끝내셨습니까.”
“이쯤이면 될 것 같군. 이 소란을 피웠는데 더 몰려오지 않는 걸 보면.”
“……아, 예. 고생하셨습니다.”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생소한 말에 칼시온은 어이가 없었는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기분 전환 겸 운동 좀 했다고 고생했단 말까지 들을 줄은 몰랐군.”
“…….”
기분 전환 겸 운동의 결과물이 상당히 끔찍하고 잔혹하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셀리나는 세세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더 깊이 생각하면 자신만 힘들어진다.
“이제 그럼 돌아가나요?”
칼시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에 셀리나도 같이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그새 구름이 잔뜩 껴서 달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공기가 습했다.
“곧장 산 초입으로 내려가면 도중에 비가 올 것 같으니, 동굴에서 비를 피했다 가도록 하지. 천천히 얘기할 것도 있으니.”
칼시온은 통보를 마치자 바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셀리나는 허둥지둥 뒤를 쫓았다.
칼시온이 너무 빠르게 멀어져 버렸다. 저 인간이 곱게 기다려 줄 리가 없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다. 쓸모를 찾았다고는 하나, 귀찮음을 감수할 만큼 셀리나가 필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 진짜, 잠깐! 같이 좀!”
하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심지어 길도 없는 산인데!’
걷는 모양새였으나, 그의 다리가 월등히 긴 탓에 그 속도를 따라가려면 셀리나는 뛰어야 했다.
자신도 평균 신장보다 큰 키, 보통 사람보다 긴 다리를 가졌거늘.
사슴도 기린 옆에 서면 짧아진다. 평생 느낄 일 없던 짧은 자의 설움을 마음껏 느낄 기회였다. 물론, 고맙지는 않았다.
셀리나는 가파른 산비탈을 악으로 기어올랐다. 길이만큼 체력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산이 너무 험했다.
그냥 가파른 정도가 아니라 거의 암벽 타기 수준이었다. 키만 한 바위를 네발로 기어올라 넘어야 했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다 뛰어내려야 하는 곳도 있었다. 인적이 아예 없는 곳이라서인지 길이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칼시온은 그런 길을 대로라도 걷는 양 휘적휘적 일정한 속도로 나아갔다.
‘저것도 알고 보면 괴물 아냐?!’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그 생각밖에 안 났다. 괴물의 체력은 끝이 없었고, 셀리나는 점점 지쳐갔다.
‘이대로 뒤떨어져 죽고 싶지는 않은데.’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아무리 다리에 힘을 주어도 힘이 나지가 않았다.
‘저거, 나 떼 놓으려고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니겠지?’
급기야 그런 생각까지 들 무렵, 칼시온이 절벽 틈의 동굴로 쑥 들어갔다.
그 동굴로 들어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한 발만 삐끗하면 바로 추락사였다. 심지어 사방에 안개가 껴 어디가 바닥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셀리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가까스로 동굴에 몸을 던지듯 들어섰다.
“으아아!”
이 짧은 시간에 대체 몇 번이나 생사를 오간 것인가. 칼시온은 태연자약하게 동굴 벽에 기대 칼을 손질하고 있었다. 불까지 피워 놓고.
“제법인데. 못 따라올 줄 알았더니.”
“……좀, 기다려, 헉, 주시지!”
“지켜 줘야 하는 짐짝을 뭐 하러.”
‘말 한번 예쁘게도 하신다!’
울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괴물에게 습격당해 죽을 뻔, 산 타다 떨어져 죽을 뻔, 벌써 두 번이나 죽을 뻔했다. 바늘처럼 곤 선 신경에 냉정한 말까지 들으니 험한 말이 절로 나왔다.
“하, 완전 북부 공작…….”
혼잣말이지만 셀리나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이었다.
쏴아아―.
동굴에 들어오자마자 타이밍 좋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비 개려면 한참 걸릴 것 같네.’
셀리나는 이마를 훔치며 칼시온의 맞은편 벽에 기대앉았다. 칼시온이 무표정한 얼굴로 칼날을 불빛에 비추다가 입을 열었다.
“하던 얘기나 계속할까.”
“제 역할, 그거죠? 뭔데요?”
칼시온은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별건 아니고 내 애인인 척 사교계에 들어가서 살해 협박을 받도록 해.”
……조금 돌려 말해 줘도 됐을 것 같다.
“…….”
“…….”
셀리나는 멍해진 머리로 입만 벙긋댔다.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별거 아닌 게 아닌 것도 문제고, 애인인 척? 애인 대행? 이것도 문제고, 살해 협박이 제일 큰 문제였다.
“……네?”
결국, 생각이 현실을 못 따라왔다.
“통역이 제대로 안 될 만한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내 애인인 척…….”
“잠깐만요. 얘가 고장 난 것 같아서.”
셀리나가 다급히 칼시온의 말을 막고 다급히 팔찌를 때렸다. 팔찌는 묵묵히 맞았다. 말하는 기능이 있었다면 ‘공작을 못 패니 날 패는구나, 아이고 데이고!’ 하고 울었을 것이다.
“협박이 아니라 살해 시도를 당해도 좋고.”
“이거, 확실히 고장인 것 같은데…….”
“반응을 보니 제대로 들었군.”
악녀 연기는 합격이었지만, 못 들은 척 연기는 불합격이었다.
“지금 말씀하신 걸 문자 그대로 듣자면, 저보고 죽으라 하신 것 같은데요.”
“죽으라고는 안 했어. 죽을 ’뻔’하라는 거지.”
“그러다 죽으면요?”
“안타까워하겠지.”
마음이 안 따라가면 노력이라도 좀 하시죠. ’너 같은 거 하나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라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애도를 표해 봤자다.
“와, ×발. 고마워 ×지겠네.”
평생 입에 담지도 않던 험한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하필 이것도 통역이 됐다.
감히 공작 앞에서 저 오만불손한 언어 사용이라니. 칼시온이 눈을 찌푸렸다. 셀리나는 못 본 척 얼른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살려고 이 발악 중인데,”
“죽으라고는 안 했어. 내가 원하는 건 사교계 안에서 범인을 찾아내는 거니까.”
셀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범인요?”
칼시온의 눈빛이 한층 더 무겁고 날카로워졌다.
“내 예비 약혼녀가 죽었다.”
“헉…….”
죽을 위험에 처하라고 등 떠밀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역시 북부 공작의 주변엔 피비린내가 기본 옵션이었다.
“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상심이 크시겠어요.”
“상심할 것까진 없고, 화가 났지.”
“그럼요. 약혼녀가 될 뻔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아무렴 화가 나시겠죠. 그래서 범인을 찾아내고 싶으신 거군요.”
칼시온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틀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네? 사랑하는 약혼녀를 잃어서 분노하신 거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어. 면접 한 번으로 골랐으니까.”
“……네?! 아, 그건가. 정략결혼?”
“정략결혼이라기엔 상호 주고받는 것이 많이 없었지.”
“그럼, 중매?”
“중매보다는 선발에 가까웠지.”
……보통 결혼을 그런 식으로 하나? 선발이라니. 정략결혼보다 더 인간미 없었다.
“고작 얼굴 한 번 보고 고르셨다고요? 결혼할 사람을?”
“배우자의 자격은 서류와 철저한 사전 조사로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셀리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사고의 방향이 다른 것이 실감됐다. 결혼이든 약혼이든 거기에 감정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당연하듯 여기는 그의 태도까지 화룡점정이었다.
“……와, 진짜 북부 공작다우시네.”
“아까부터 듣자 하니 북부 공작답다는 말이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의미지?”
놀라서 혼잣말을 중얼거린 건데 그는 그걸 또 정확히 듣고 되물었다.
“잘생기셨다는 의미입니다.”
셀리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히 대답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입술에 침도 안 발랐다. 원래 거짓말할 때는 당당함이 포인트다.
“대답이 너무 빨라서 더 의심스러운데.”
“그럴 리가요. 계속 생각하고 있던 진심이라 바로 튀어나온 겁니다.”
그리고, 이런 류의 거짓말은 거짓말인 게 뻔히 보여도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진 않는다. 증거처럼 칼시온은 “하.” 하고 짧게 웃었다.
“또.”
“예? 더요?”
“잘생기면 다 북부 공작이야?”
‘……생각보다 아부를 좋아하는 분이셨나 보네.’
판 깔아 준다고 못할 줄 아나 본데, 자신은 명색이 배우다. 그것도 탑 배우. 판 깔면 더 미쳐 날뛸 수 있다.
“어유, 그냥 잘생김이 아니죠. 괴물을 단칼에 무찌르시는 강함과 눈빛만으로 의사 전달이 가능한 카리스마, 거기에 그 신비로운 회청색 머리카락과 심해처럼 깊은 눈동자, 옥처럼 투명하고 흰 피부가 더해진 잘생김이어야 북부 공작님다운 외모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네가 특이한 건가, 아니면 네가 살던 곳 사람들은 다 그렇게 주접을 잘 떠는 건가?”
칼시온은 그러면서도 다시 한번 픽 웃었다. 전보다 조금 더 커진 웃음이었다.
셀리나도 속으론 픽 웃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진지하게 이글거리는 진실의 눈빛뿐이었다.
“전 사실 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내 앞에서 이토록 뻔뻔하게 구는 인간은 처음 보는군.”
“……진짜요? 공작님이잖아요. 사람들이 아부 엄청 떨지 않아요?”
“글쎄……. 누구도 그대처럼 까불지는 않던데.”
잘 보이려고 노력하다 못해 까불었구나. 셀리나는 자중하며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왜, 계속하지.”
“……아닙니다.”
“재밌다니까?”
“네에…….”
이미 기는 바닥까지 죽었다. 칼시온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용건으로 돌아갔다.
“아부와 이어서 말하자면, 아무래도 북부는 중앙과 거리가 있어 관심 밖의 지대였지.”
“과거형이네요?”
“얼마 전, 북부에서 금광이 발견됐거든.”
아닌 척하려 해도 눈이 반짝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래, 보통은 그런 반응이지. 그렇다면 생각해 봐. 얼마나 많은 혼담이 쏟아졌을지를.”
“그랬겠죠…….”
잘생겨, 젊어, 공작이야, 거기에 금광까지 터졌다. 못 먹어도 한 번은 찔러 봐야지.
“그래서 가장 영향력 없고 가장 다루기 쉬운 남작 영애를 하나 골랐는데.”
“데?”
칼시온의 눈빛이 위협적으로 빛났다.
“죽었어.”
“헉.”
“약혼식 전날 밤에, 내 저택 안에서.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을 것 같나?”
사람이 죽어 나갔다는 말에 압도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칼시온의 눈빛이 흉흉해 입을 다물었다.
걸리기만 하면 누구든 죽여 버리겠다는 눈빛이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 사람이다.
왜 그 앞에서 아무도 까불지 않았는지 단번에 이해됐다. 칼시온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드러난 이의 수만큼 주변 온도가 낮아졌다.
“나는 이걸 렌버드 공작가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였다. 제깟 것들이 합격 줄 만한 사람이 아니면 다 죽이겠다는 협박인 거지.”
“네에…….”
“감히 내게 사람 목숨으로 협박을 했으니, 저들 목을 내놓을 각오쯤은 했으리라 믿어.”
얼어 죽겠다.
칼시온의 말은 이어졌다.
“겉보기엔 자살로 꾸며졌지만, 정황상 자살일 리가 없었어.”
“왜……그렇게 확신하신 건데요?”
“상흔이 너무 예리했어.”
“그걸로 어떻게 확신을 해요?”
“자신의 몸을 그렇게 예리하게 벨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남작 영애는 평생 테이블나이프 외엔 칼을 잡아 보지도 않은 사람이야.”
“그럼 누군가가 죽여 놓고 자살한 척 현장을 꾸며 놓았다, 이 말씀이신 거죠?”
추리물에 등장하는 상황 같았다. 모든 정황이 자살을 가리키지만 예민한 사람만큼은 타살임을 알아보게 되는.
“그렇지.”
“그걸 공작님 혼자 알아보셨어요?”
“그렇더군.”
“말은 해 보셨어요?”
“이미 조사는 끝났어. 그걸 뒤엎고 의문을 제기하는 걸 남작가에서 원하지 않았으니 별수 없었지.”
자살이든 타살이든 이미 공작가와의 혼인은 끝나버린 일이다. 들쑤시는 것이 더 괴로운 진실도 있는 법이다. 남작가의 입장도 이해는 됐다.
“상황이 그러면 보통 자살이 맞다고 우겨대는 쪽이 범인이던데.”
“짚이는 곳이 너무 많아서.”
역시, 북부 공작님답게 적도 많으시군요.
“그럼 그 짚이는 곳을 하나하나 캐다 보면 찾아지지 않을까요?”
“문제는 그 짚이는 대다수의 인원이 사교계 안의 인물들인데, 내가 수도의 사교계에는 영 어둡거든.”
이제야 느닷없는 스카우트의 해답이 드러났다.
“그래서 사교계에 직접 들어가 알아볼 사람이 필요하셨던 거였군요.”
“내게는 분명 보이지 않게 숨길 테니까.”
살인 사건의 배후다. 눈에 불을 켜고 알아보려는 사람에게 호락호락 틈을 보일 리가 없었다.
“문제는, 내 주변인을 들여보내자니 알려지지 않은 얼굴이 없더군.”
공작의 수하에게 본색을 드러낼 리가 없다.
“그렇다고 아무나 데려다 연기를 시키자니 뒷조사를 하면 결국 들통날 테고, 연기력도 문제고.”
“제가 딱이었군요.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니 배후도 없겠다, 연기력도 출중하겠다.”
칼시온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 외모. 갑자기 나타난 애인이라 해도 설득력 있는 이국적인 아름다움까지 가졌으니까.”
“……예? 뭐요?”
“이국적인 아름다움. 왜?”
온통 까만색인 세상에 분홍색 점 하나가 띵 찍혔다. 지금까지 그가 늘어놨던 살벌한 단어들과 완벽히 상반되는 예쁜 단어. 잠시 머리가 따라가지를 못해 멍해졌다.
“그런 말씀을 하실 분 같지가 않아서.”
칼시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그놈의 북부 공작 타령인가? 그쪽 북부 공작들은 눈이 없어?”
“저희 쪽은 보통은 죽일 놈 살릴 놈으로 구분하셔서…….”
“아.”
거기서 왜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요.
침묵으로 긍정해 버린 찐 북부 공작님은 모르는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이미 그것이 진실임은 명백해졌다.
‘역시나 그러셨군요.’
그나마 스스로가 살릴 놈 쪽으로 분류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적격이니 기왕이면 여기서 죽지 말고 날 도와줬으면 좋겠군.”
칼시온은 본색을 숨기려는 기색조차 없이 순수하게 협박했다.
셀리나로서도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안 한다 할 수는 없다.
“그런데요.”
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과정이 남아 있었다.
“이 일을 완수한 후, 제게 떨어지는 대가는 무엇이죠?”
보수 협상.
아무리 상대가 무서워도 내 입장이 별로여도 공짜로 일하지 말랬다. 한 번 열정 페이로 퉁치기 시작하면 십 년이 지나도 그 사람은 공짜로 남게 된다고.
칼시온은 산뜻하게도 대답했다.
“목숨?”
“…….”
이건 북부 공작의 농담인가, 북부 공작다운 진담인가. 셀리나는 십 초 정도 고뇌 끝에 진지 노선을 택했다.
“죄송하지만, 목숨은 원래 제 거 아니에요?”
“내가 구해서 성안까지 데려가 주지 않으면 없는 목숨이나 다를 바 없잖아?”
“…….”
부정할 수 없음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동기라는 게 있잖습니까. 저한테도 득 되는 게 있어야 열심히 하게 되죠.”
칼시온이 듣기에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단발적인 일이면 모를까, 범인을 색출할 때까지 대가 없는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일하는 중에는 내 애인 행세를 해야 하니 의식주 해결은 물론, 품위 유지비도 별도로 제공하지. 일이 끝난 후에는 충분히 정착할 수 있는 지원금도 주겠어.”
“그게 얼만데요?”
칼시온은 태어나 몇 번 겪지 못한 당돌한 질문에 헛웃음을 뿌렸다.
“꼭 집어 묻는 패기는 괜찮은데, 그 패기가 나를 향하니 낯설군.”
“낯설게 해 드려서 죄송하지만, 얼마인지는 분명하게 해 주셔야죠.”
페이에 관해서는 타협이란 없다. 셀리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긴장한 티가 역력한데 물러나지 않는 모습이 신선해 칼시온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세상 겁 없는 하룻강아지처럼 패기 좋게 들이대다가도, 또 아예 겁을 모르는 둔치는 아니다. 예민하게 기색을 알아차리면서도 물러서지 않을 때는 버티는 배짱까지.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최적의 인재다. 관대함이 찾아들었다.
“시세야 늘 바뀌기 마련이니, 방 세 개 이상 딸린 집 한 채와 하녀와 하인 두 명의 평생 치 연봉, 평균 생활비의 두 배.”
이 정도는 위험한 일에 뛰어든 정보원에 대한 일반적인 보상이다. 그러나, 이 일이 그것의 몇 배 이상으로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것은 칼시온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도록 하지.”
“……예?”
칼시온의 마지막 보수는 셀리나도 전혀 생각지 못한 뜻밖의 것이었다.
“돌아……, 갈 수 있어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칼시온의 설명이 이어졌다.
북부, 렌버드 영지는 대륙의 꼭대기에 위치했다. 렌버드에서도 북부의 꼭대기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마수의 땅이 끝없이 이어진다.
마수의 땅과 랜버드 영지 사이에는 사인다트 산맥이 우뚝 서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넘을수 없는, 만년설이 덮인 산맥. 괴물, 즉 마수에게도 험하기는 마찬가지라 사인다트 산맥 아래로 마수가 넘어오는 일은 거의 없다.
단, 겨울이 되면 마수의 땅에도 먹이가 줄어들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산맥을 넘어 내려오는 개체가 생긴다.
그래서 산을 넘어온 마수를 정리하기 위해 겨울이 되면 공작과 기사단이 한 번씩 산맥 밑쪽을 훑었다.
마수는 아무나 상대할 수 없다. 특별히 실력이 출중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상대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작이 직접 검을 들고 숲을 쏘다녔던 것이다.
그렇게 숲을 정찰하다 보면 가끔 셀리나처럼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사람을 만나고는 했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시체 상태로. 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통역기를 챙겨 들고 다녔다.
“그걸 진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통역기는 셀리나처럼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대마법사의 유산이었다.
약 이백 년 전, 차원을 타고 넘어온 위대한 대마법사는 렌버드에 많은 번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대마법사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도 위대한 대마법사였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돌아가야 한다며 귀환하는 방법을 찾았고, 그 답은 산맥 너머 마수의 땅에 있었다.
입구와 출구가 달랐던 것이다. 그 사실을 밝혀냈을 때, 대마법사와 당시 렌버드 공작은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대마법사는 자신의 세계와 이쪽 세계를 오가며 살게 되었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돌아갈 방법은 분명히 있다. 문제는, 출구가 마수의 땅에 있어서 나조차도 함부로 갈 수 없다는 점이고 다른 세계를 오간 기록은 그분이 유일했다는 점이지.”
그 말인즉, 대마법사가 아닌 일반인도 돌아갈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거였다.
“네가 일을 무사히 마친다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마수의 땅까지 데려다주도록 하겠다. 다만, 거기까지 간다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은 없으니 ’희망’일 뿐이야. 하지만, 그거라도 그대에겐 큰 동기 부여가 되겠지?”
셀리나는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통 차원 이동물은 이 세계에서 잘 적응해 열심히 살아가는 엔딩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안이 제시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곳에는 일도, 과거도, 추억도, 친구도, 가족도, 아무것도 없다. 말 그대로 낯선 땅일 뿐이다.
원래 세상에서는 전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돌아갈 수 있으면 당연히 돌아가고 싶다. 돌아갈 수 있다면 다소의 리스크는 감수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힘내도록.”
“네! 그럼 작전 회의 시작할까요?!”
“……뭐?”
의욕이 넘치다 못해 앞서 나가는 셀리나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칼시온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능력 있는 사람이지만, 기본적으로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수하들이 구체적으로 제 명령을 어떤 식으로 수행하는지까지는 깊게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둘만의 작전이다. 본격적으로 스스로 작전에 투입되는 아주 드문 상황이었다.
“제가 공작님과 성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작전은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럼 제 성격, 상황, 관계, 이런 모든 걸 미리 정하고 시작해야죠. 그때그때 대충 맞추다 보면 설정 구멍이 생기고, 금방 들켜요.”
청소년 극단부터 시작해 전 세계급 탑 배우가 되기까지 셀리나는 연기에 관해서는 빈틈없이 완벽했다. 본격적으로 대사를 읊기 전, 캐릭터를 잡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자, 그럼 우선, 제가 ’어떤 역할’을 연기하면 됩니까?”
’일’이 되자 셀리나는 칼시온의 살벌함 앞에 위축되었던 것도 잊고 의욕적으로 나섰다.
콩 벌레처럼 쭈그러들었다가 깃털 넣은 이불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분주했다. 갑자기 반짝거리며 생기를 찾은 셀리나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칼시온은 살짝 멍해졌다. 이건 또 단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신선함이다.
“……그럼, 악녀로 하지.”
“음, 악녀요. 그런데요, 악녀도 종류가 있잖아요.”
칼시온은 고개를 기울였다.
“악녀에 종류가 있나? 그냥 아까 한 대로 하면 안 되는 건가?”
“에이, 그건 임기응변으로 잠깐 둘러댄 거고요. ’악녀’라는 것 하나로는 허술해요. 악녀도 사람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어쩌다 악녀가 되었는가’라는 설정이 필요하죠.”
“그렇게 말해도 모르겠군.”
“음, 예를 들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다른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소박한 악녀도 있고,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야망 가득한 악녀도 있고, 또 본인은 좋은 의도에서 뭘 해도 주변의 모함으로 악녀가 되는 경우도 있고요.”
셀리나의 구체적인 예시는 ‘악녀’라면 그저 ‘나쁜 여자’ 정도로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칼시온의 개념에 충격을 주었다.
“……아, 그렇군.”
“네. 그러니까 악녀도 왜 악녀가 됐는지, 어떤 식으로 나쁜 짓을 할 것인지 등등의 설정을 잡는 게 확실하죠.”
“……음.”
칼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창작과 거리가 멀었다. 지금 당장 그럴싸한 악녀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건 무리였다.
셀리나는 즉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곧장 ’악녀’라기에 누군가 롤 모델이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또 구체적으로 물어보니 답하지 못한다.
“그럼, 악녀는 왜 생각하셨던 거예요?”
“죽은 악혼녀, 아이렐 남작 영애가 사교계에서 소문난 ’악녀’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 셀리나는 한층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악녀라는 호칭까지 얻었대요?”
“그게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서 문제다. 사교계 안의 일이니 밖에서 조사를 해도 정확히 알 도리가 없더군.”
쉽게 알 수 있는 정보였다면 셀리나에게 거래를 제안할 필요도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사교계의 소문난 악녀였다……. 원래 성격은 어땠는데요?”
“내 앞에선 순했지. 조사에 따르면 누가 모난 소리를 해도 웃으며 넘기고, 화도 못 내고, 남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는 성격이었다더군.”
“그런데, 사교계에서는 악녀라 소문이 자자했고요.”
“그래.”
겉보기에는 순둥이인데 사교계에서만 악녀. 정확히 무슨 악행을 했는지도 알려지지도 않은.
“그럼, 사교계 안에서 악녀가 되는 것부터 목표로 해야겠네요.”
그래야 사교계 안에서 악녀가 어떤 일을 당하는지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가능하겠나?”
셀리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썹을 모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남 욕먹는 겁니다. 예뻐서 욕먹고, 착해 빠져서 욕먹고, 돈 빌려줬다고 욕먹을 수도 있어요.”
사람을 욕하려면 무슨 핑계를 대서든 욕할 수 있다. ‘잘 보일 필요 없는 사람’, 또는 ’미운털 박힌 사람’만 되면 악역이 되는 건 순식간. 숨만 쉬어도 나쁜 년이 될 수 있다.
셀리나는 눈빛을 예리하게 빛내며 씩 웃었다.
“사교계에 길이 남을 역대급 악녀가 되어 드릴게요. 대신.”
그 눈빛이 칼시온을 향했다.
“그러려면, 공작님께서도 하셔야 할 것이 있어요.”
“내가 해야 할 일?”
“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공작님 애인이랍시고 악녀 짓을 하려면 그만한 배경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부하의 애인이나 친구의 애인 같은 걸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자신의 애인으로 세상에 내놓으려면 저도 셀리나를 애인으로 대해야 했다.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번거로워지는군.”
칼시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쉬운 건 그냥 위기에 처한 저를 구해 주시고 제 미모에 한눈에 반해 버리셨다는 설정이죠. 설득력 있잖아요?”
셀리나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칼시온은 얼굴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걸로 하지.”
“음…….”
생각하지 않고 대답한 티가 너무 났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을 텐데요. 셀리나는 턱을 긁으며 칼시온의 단단한 얼굴을 흘끔 보았다.
“그럼 지금부터 저를 한눈에 반한 눈으로 한번 봐 보시겠어요?”
“…….”
칼시온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게 어떤 눈인데?”
“…….”
이번에는 셀리나의 침묵이 따라갔다.
이걸 설명해 줘야 하는 것이었구나.
답답함이 가슴을 채웠지만 공작은 대역이 없다. 무조건 칼시온이 그 연기를 해내야 했다.
“그러니까,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럽고……. 예쁘고……. 보면 볼수록 좋아서 계속 보고 싶은, 그런 걸 보는……, 눈빛?”
“그런 게 세상에 있나?”
칼시온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셀리나도 따라서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고민했다.
“뭐, 공작님이 사랑 같은 걸 해 보셨을 리도 없고. 그쵸?”
“…….”
칼시온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이번에도 북부 공작답다는 말은 생략했다. 한 번만 더 말했다가는 정말 북부 공작답게 토막을 쳐 줄 것 같아서.
“자, 그럼……. 공작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시는 건 뭔가요?”
“음……. 이 녀석이려나.”
칼시온은 들고 있던 검을 들어 보였다.
“마수의 뿔에 최고급 철을 감싸 삼십 일간 두드려 만들었지.”
칼부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칼을 바라보는 눈빛은 당장 이걸 휘둘러 피를 보고 싶어하는 쪽이었다.
탈락.
“그럼……, 그 칼이 혹시라도 부러진다든가 잃어버린다든가 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사랑스러움이 안 되면 애달픔이라도 노려볼 생각이었다. 칼시온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새로 만들어야겠다는 기분?”
“…….”
다 집어치우고 싶다. 셀리나는 순식간에 바닥난 인내심을 겨우 다독였다.
“그, 지금 공작님이 저에게 한눈에 반해서 쳐다보는 눈빛을 만들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노력이라도 좀 해 보시면 어떨까요?”
“음.”
본래의 의도를 상기한 칼시온은 그 나름대로 마음을 잡았는지 진지해진 태도로 셀리나를 바라보았다.
“…….”
셀리나는 잠시 칼시온과 눈을 마주치다가 곧 내리깔았다. 무서워서 눈을 마주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살려 주세요.”
“최선을 다해 그대만 보이는 눈빛을 해 봤는데.”
“강렬하다고 다가 아닙니다.”
“어렵군.”
그 후로도 수십 번의 시도가 반복되었으나 번번이 실패였다. 억지로 웃어도 봤다. 그러나, 칼시온의 웃음은 두 종류뿐이었다.
‘네가?’ 하는 비웃음이거나 ‘곧 널 죽일 수 있겠구나, 신난다’ 하는 피에 젖은 웃음. 게다가 원래 짓던 표정도 아니라 딱 어색했다. 누가 봐도 연기구나, 알 정도.
방향을 바꿔서 묵묵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지켜보는 쪽도 시도해 보았다. 시종일관 ‘저걸 언제 죽일까’ 하는 것으로 보이기 딱 좋았다.
결국, 셀리나가 포기했다.
“……전략을 바꾸죠.”
“어떻게.”
칼시온도 지쳤다.
지치다니.
칼시온의 인생에 몇 번 없던 일이다.
혼자 마수 사냥 나왔다가 열다섯 마리에게 둘러싸여 세 시간 내내 칼을 휘둘렀을 때에나 지친다는 걸 느꼈었는데. 그놈의 사랑에 빠진 표정 연기가 마수 열다섯 마리와 싸우는 것보다 더 지쳤다.
“제가 공작님을 꼬시겠습니다.”
그때, 셀리나가 비장하게 선언했다.
“……뭐?”
툭 튀어나온 말이 놀라워 칼시온은 무심코 되물었다. 셀리나는 인상을 쓰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이, 진짜 꼬신다는 말이 아니고요. 연기엔 자고로 배경이 필요해요. 분위기 따라간다는 말인 거죠.”
“그래서?”
“뜬금없이 시작하는 연기가 너무 끔찍하시니까, 배경부터 잡고 들어가자 이거죠.”
“흠.”
“제가 작정하고 공작님 꼬시려고 숲속까지 기어 들어왔고,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안 떨어지는 걸 공작님이 생각 없이 받아 주신 거다, 이런 설정인 거죠.”
“내가 생각 없이 받아 준다는 부분에서 신뢰도가 하락할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겠죠. 그래도 공작님이 누군가한테 그런 표정으로 한눈에 반했다는 것보다는 신뢰도가 높을 것 같거든요.”
“…….”
입이 있되 말을 할 수 없는 진귀한 경험 또한 칼시온에게는 처음이었다.
“이대로 쭉 간다는 게 아니라, 공작님이 연기를 할 수 있게 배경 까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하는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군.”
“그럼, 포기하시게요?”
칼시온은 무심결에 울컥했다.
’관두시겠네요?’만 됐어도 그러지, 했을 것이다. 이게 뭐 그렇게 중요한 거라고. 방법이야 또 찾으면 된다. 셀리나를 투입하는 것은 우연히 발견한 최적의 방법이지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포기’라니. 포기란 못해서 놓는 것 아닌가. 칼시온의 호승심에 불이 붙었다.
“……누가 포기한댔나.”
칼시온이 으르렁댔다. 셀리나가 풉, 웃음을 흘렸다. 얼른 표정 고쳐 잡지 않았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포기하시는 게 아니면 배경부터 차근히 쌓아 가요. 일단, 표정이나 말은 안 돼도 행동에서 보이는 것도 있거든요.”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된다는 말이지?”
“제가 뭘 하든 그냥 다 오케이 하세요. 완급 조절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것뿐인가?”
“대신, 무조건 제가 말하는 건 다 들어주셔야 해요. 특히 사람들 앞에서는. 제가 그 어떤 미친 짓을 요구해도요.”
“……얼마나 미친 짓을 요구하려고?”
“사랑은 원래 미친 짓이에요. 미친 티를 팍팍 내야 사람들이 와, 공작님이 저런 짓을 할 정도면 진짜 사랑인가 보다 하겠죠.”
칼시온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다시 어렵다…….
“아, 그래도 처음에 사람 만날 땐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한마디 하셔야겠네요. 공작님 스스로도 마음을 모르는 상태라고 쳐도 어느 정도 마음이 있어야 절 성까지 데리고 가시죠.”
“그래서 뭘 하라고.”
“음…….”
대사를 뽑아내야 하니 셀리나도 잠깐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칼시온은 그 시간 동안 난생처음 두려움을 느꼈다. 대처할 수 없는 미지의 공포,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었다.
“이 여자는 내 것이다, 어때요?”
“노예 하려고?”
“아, 그게 그렇게 되나.”
셀리나는 다시 고민했다.
“남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다, 는요?”
“남의 손……. 하, 그냥 손모가지를 치면 되지.”
“알았어요. 다른 거 생각해 볼게요.”
말하면서도 조금 오그라든다 생각하긴 했다.
“이 여자에게 아무도 손대지 마, 는?”
“왜 그래야 하지?”
“……의문을 품으실 정도면 하면 안 되죠. 다른 걸 생각해 보겠습니다.”
“혓바닥에 소름이 안 돋을 만한 걸로 생각해.”
칼시온이 격렬히 항의했다.
셀리나는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더 거친 뒤, 결국 아주 순한 맛까지 내려왔다. 굳이 묘사하자면 소금 한 숟가락에 물 한 솥 넣은 만큼 순했다. 셀리나의 기준으로는 일상적으로 평범히 말할 수도 있을 법한 문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칼시온은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니, 그냥 상황을 잊읍시다. 평소대로 편하게 얘기해 봐요. ’내 검은 내 허리에 찬다’는 느낌으로.”
“내……. 하, 씨.”
급기야 욕도 나왔다.
“아, 진짜.”
셀리나도 같이 욕할 뻔했다. 그나마 장소가 장소니 만큼 참아 준 거다. 당장 목숨만 간당간당하지 않았어도 터졌다.
셀리나의 강점은 본인의 연기력을 타고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상대역까지 분위기에 쓸어 와 없던 연기력까지 뽑아내는 재능이 있었다. 지금까지 이 재능으로 연기력 말아먹은 남자 배우 몇 명에게 상을 안겨 줬는지 모른다.
칼시온에게 요구한 연기는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칼시온도 작정하고 가르치면 되겠지 했는데, 이 정도로 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포기를 고민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이게 대체 왜 안 돼요!”
“그 이유를 아는 건 배우인 너겠지, 공작인 나겠나?”
적반하장마저도 끝이 없다. 이것이 바로 북부 공작 클라스인가.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 참 오랜만이다.
칼시온, 이 자식.
아주 답이 없었다.
“하……. 자, 우리 차근차근 다시 처음부터 해 봅시다.”
답이 없어도 답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셀리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칼시온도 오기가 생겼는지 때려치우라는 말은 나오지는 않았다. 그나마 감사한 일이었다.
겨우 칼시온의 임시 연기 강의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다시 해가 저물 시점이었다.

“각하!”
거대한 성벽 앞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이 멀리서 다가오는 칼시온을 발견하고 바짝 기립했다.
칼시온은 혼자 산으로 들어갈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왔다. 수도에서 있던 짜증 나는 일을 털어 버리기 위해 혼자 들어가겠다 하여 기사단은 성벽에서 대기 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부상은 없으십니……, 엇, 이건?”
다가오던 기사 한 명이 칼시온의 품에 안겨 있는 자그마한 여자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부상은 없다. 숲에서 마수에게 습격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해 구조했어. 데리고 오느라 시간이 늦어졌다.”
“숲에서 말입니까? 거기까지 대체 어떻게…….”
산맥에서 내려오는 마수를 막기 위해 세운 성벽은 사람이 뛰어넘을 높이가 아니다. 틈새로 파고드는 마수가 없도록 쥐구멍 하나하나까지 철저히 관리한다. 외성 벽 정찰대의 눈을 피해 성벽을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이번에 내가 나올 때 몰래 따라 나왔다는군.”
딱 하나, 마수 사냥을 위해 기사단이 성을 나갈 때 숨어서 같이 빠져나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에? 허, 배짱 참…….”
마수의 숲에는 보기 드문 식물이 많이 자란다고 알려져 이런 경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렌버드에서 나고 자란 것이 아니라 마수 무서운 줄 몰랐던 거지. 갈 곳이 없다 하니 당분간은 렌버드의 보호하에 두기로 했다. 그리 알도록.”
품 안에 보호할 일이 아니라 감옥에 처넣을 일이었지만 지엄하신 공작의 명이다. 기사는 길게 토를 달지 않고 순순히 명에 따랐다.
“알겠습니다. 성에 먼저 기별을 넣겠습니다. 그럼, 무거우실 테니 제가―.”
“아니, 디온.”
디온이라 불린 회갈색 머리의 기사는 셀리나를 고쳐 안는 칼시온을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각하?”
“내……, 큼.”
“네?”
셀리나를 안은 칼시온의 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망토로 둘러싸인 셀리나의 손에도 불끈 힘줄이 솟았다.
드디어 특훈의 성과를 보일 순간이 왔다.
칼시온은 앞만 바라보며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디온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앞만 바라보는 눈빛이 평소보다 유독 이글거리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만큼 칼시온은 비장했다.
“내가 하겠다.”
“……예? 아……, 예……. 예?”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이라 디온이 되물었다.
그림자처럼 말없이 따르는 것이 친위대의 기본 소양이다. 거의 본능처럼 숙지 된 것이기도 했다. 그걸 깜박할 만큼 디온은 놀랐다.
칼시온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두 번 말할 수도 없었다.
이미 그의 손은 셀리나를 감은 망토 자락 안에서 잘 말리고 있었다. 돌돌돌. 존재가 소멸하지 않기 위해 힘을 준 것이지만, 사람들 눈에는 셀리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힘주어 안는 것처럼도 보였다.
“……?!”
디온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 버린 칼시온을 황급히 뒤따랐다.
머릿속이 수많은 가설로 빙빙 돌았다.
우리 공작 각하가 마수 사냥 갔다가 이상해져서 돌아왔다. 여자와 얼굴 마주하고 앉는 것도 불편해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직접 구해서, 들고, 계속 가신다고? 게다가 저 소유욕 득시글득시글 끓어 넘치는 ’내가 하겠다.’는 뭐란 말인가!
충격은 디온에서 시작해 기사단 전체로 번졌다.
“각하께서?”
“진짜 각하시지?”
“변신하는 마수 아니겠지?”
칼시온에게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내부의 동요는 눈으로도 보였다. 칼시온은 술렁임을 애써 무시하고 셀리나를 안은 그대로 말에 훌쩍 올랐다.
“성으로 돌아간다.”
공작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성안으로 통하는 문에 일렬로 늘어서 바짝 기립했다.
뚜각뚜각 소리를 내며 말이 걸었다. 그 뒤로 기사단도 각자의 말에 올라 칼시온의 뒤를 따랐다.
칼시온의 망토에 싸여 품에 안긴 셀리나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사방에서 집중된 눈빛에 얼굴이 따가울 정도였다. 특히, 디온의 눈빛이.
‘각하로 변한 마수이든가, 저 여자가 마수라 각하를 홀렸든가, 내가 지금 홀려서 마수가 만든 환상을 보는 게 분명하다!’
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담고 이쪽을 향했다. 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 가까이 오지 않아 칼시온에게 속삭일 틈은 있었다.
“……잘하셨어요.”
“…….”
칼시온은 묵묵히 말을 몰았다.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말려 들어간 손이 펴지지는 않았다. 안 하던 짓을 억지로 하니 속에서 불이 났다. 어색해서 불나고, 본인이 한 짓이 창피해서 불나고, 심지어 그걸 잘하지도 못해서 더 불이 활활.
하지만, 앞으로도 불날 일은 많이 남았다. 천불이 나도 연기를 해냈으니 된 거다. 셀리나는 그 점을 칭찬했지만, 칼시온에게 별 위로는 되지 못한 것 같았다.
연기는 비록 형편없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워낙 칼시온이 할 리가 없는 말이라 연기력과 관계없이 주변에 큰 충격을 주는 것에는 성공했다.
이 정도면 시작이 나쁘지 않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날도 올 것이다. 셀리나는 그 정도로 만족했다.
칼시온 일행은 성벽 옆에서 이어진 지하도로 들어갔다.
“성이 지하에 있어요?”
“성까지 바로 이어진 통로다.”
지하도는 한참 이어진 오르막길이었다. 이윽고 지하도가 끝나 빛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도의 끝은 산꼭대기에 있는 본성 입구였다.

북부 공작님을 유혹하겠습니다  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