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제가 사교계 전반의 기본적인 지식과 예절, 규칙 등에 대해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놀랍게도 예절 교사는 자넷 부인이었다.
‘왜 하필 자넷 부인이지.’
처음부터 셀리나에게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이미 딱 기선 제압하겠다고 분위기 살벌하게 잡고 눈에 힘주고 있지 않은가.
자넷 부인은 싫은 티를 내거나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일부러 일을 안 하거나 셀리나를 홀대하지도 않았다.
딱 하나, 경멸한다는 눈빛만 이따금 보냈다. 그 눈빛이 너무 콱 박히는 것이라 잊을 수가 없었다.
“각하도 같이 사교계 언어 같은 거 배우시기로 했는데요.”
“그건 셀리나 양의 기본 교육이 끝난 뒤입니다.”
너는 기본이 안 되어 있지 않니. 엄한 눈빛이 그렇게 말했다. 셀리나가 간이크지 않았다면 위축돼서 잘할 것도 못할 눈빛이었다.
셀리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투로 물었다.
“자넷 부인이 선생님으로 오실 줄은 몰랐네요.”
“각하께서 명하셨습니다.”
셀리나의 질문에는 ’네가 선생 자격이 있느냐’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의도가 섞여 있었다.
이걸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자넷 부인은 욱하는 반응조차 없었다. 꼿꼿한 자세와 흔들림 없는 눈빛. 셀리나도 덩달아 허리를 곧추세웠다. 사교계 영애들이 아니라 가문의 하녀장까지 상대하게 될 줄은 몰랐다.
“늘 공작저에만 계신 분인 줄 알아서, 의외라 여쭤봤어요.”
“저는 메린 남작 가문의 차녀로 태어나 수도 사교계에 잠시나마 몸을 담았던 경력이 있습니다. 그 후로 선대 공작 부인의 시중을 들며 여러 모임에 참가해 왔으니 예의를 갖추는 데 부족하지 않을 만큼은 될 겁니다.”
남작가의 여식이기는 하나 수도 사교계에 진출한 경력이 있는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자기소개를 마친 자넷 부인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러니, 렌버드 공작가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썩 꺼져 보다는 우호적인 권유였다. 어차피 이 주간 공부해 봤자 평생 몸에 배게 노력해야 하는 것이 갑자기 될 리 없으니 적당히 주제를 알고 꺼지라는 말이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렌버드 공작가의 명예를 실추시킬 만큼 못하면 어쩌죠?”
그 질문에 자넷 부인은 셀리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셀리나도 지지 않고 그 눈빛을 받았다. 대답이 진심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쳐 드려야겠지요.”
“그래도 안 되면요?”
자넷 부인은 느리게 한 박자 숨을 쉬고 입을 뗐다.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조치하겠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더 빡빡한 수업을 진행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가르치는 방법을 바꾼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는 것으로 해결해 버린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고. 이쪽이든 저쪽이든 안심하고 비빌 벽은 없었다. 사방이 절벽인 외길 하나뿐.
‘스릴 있고 좋네.’
셀리나는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다고 딱히 자넷 부인 손에 처리될 만큼 못할 것 같지도 않았다. 칼시온에게도 말했지만, 셀리나는 몸으로 하는 건 뭐든 다 잘했다.“오늘 자넷 부인께 수업 들으셨다면서요?”
셀리나는 멍하니 욕조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바라보다가 다가오는 하녀에게 눈을 돌렸다.
렌버드 성에서 일하는 하인, 하녀들은 총 삼백 명에 가깝다 했다. 그래도 자주 보는 사람들은 눈에 익었다.
처음엔 돌아가며 시중드나 싶었는데 이젠 아예 셀리나 담당이 정해진 모양이었다. 이 하녀는 천 쪼가리 잠옷을 강권할 때 워낙 열렬했어서 기억에 남았다.
“아……, 소문이 다 나나 봐요?”
“다들 셀리나 님한테 얼마나 관심이 많은데요.”
하녀는 친근하게 웃으며 셀리나의 머리에 향유를 발랐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온 정성을 다 쏟는다. 그냥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셀리나는 문득 의심이 들었다.
‘왜?’
왜 최선을 다하지?
자신은 승진을 시켜 줄 수 있는 공작 부인도 아니고 팁으로 줄 돈도 없다. 떨어질 것이 없는 사람에게 이유 없이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것은 의심스러웠다. 저번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넘어갔지만, 오늘 자넷 부인의 태도를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셀리나는 하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하녀는 수수해 보였지만 단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느 쪽이든 가능성이 있었다.
먼저, 스스로가 칼시온을 노리고 셀리나를 통해 접근할 방법을 찾는 중일 가능성. 그리고, 셀리나를 감시하고 속내를 캐내라며 보내진 누군가의 수하일 가능성.
어느 쪽이든 뒤를 더 캐려면 곁에 붙여 놓아야 했다. 셀리나는 어린애처럼 활짝 웃었다.
“아, 정말요? 사람들이 뭐래요?”
“뭐라긴요. 너무 예쁘시다, 저러니까 각하께서 홀딱 넘어가시지, 이런 말들뿐이죠.”
“꺄아! 하하하하.”
“아하하하.”
예쁘다는 말에 신나서 웃어 대는 셀리나와 그 장단에 맞춰 같이 웃어 주는 하녀. 둘 다 연기라고 치면 누구 한 사람 밀리지 않고 팽팽했다.
“아, 근데. 자넷 부인은 제가 되게 못 미더운가 봐요.”
“어머, 왜요?”
“렌버드 공작가의 명예에 흠가는 짓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막 눈을 이렇게 부라리면서…….”
“악! 그걸 셀리나 님한테까지 그러셨어요?!”
하녀는 숨이 넘어가게 웃어 젖혔다.
“그거, 저희한테도 맨날 하는 말씀이시거든요. 뭐만 했다 하면 렌버드 공작가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렌버드 공작가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마라, 맨날 명예 타령.”
“자넷 부인에겐 렌버드 공작가의 명예가 진짜 중요한가 봐요.”
“그러니까요. 선대 공작 부인 곁에선 어떻게 버티셨나 몰라요.”
셀리나는 불쑥 튀어나온 선대 공작 부인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칼시온에게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왜요? 공작 부인이시잖아요.”
“귀족 출신이시긴 했는데……, 자넷 부인 눈엔 좀 이래저래 모자란 점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계속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다가 맞기도 하고 그랬다던데.”
“헤엑. 맞아요?”
“선대 공작 부인 성격도 엄청나셨대요. 자기 뜻대로 안 되면 견디질 못하셨다니까.”
그런 선대 공작 부인에게 따박따박 행실로 잔소리한 인물이라니. 자넷 부인도 굉장했다. 보통 맞아 가면서까지 그걸 지적하진 않지 않나?
‘……뭔가 걸리는데.’
아직은 그게 뭔지 모르겠다.
하녀는 일부러 셀리나에게 정보를 흘리는 것인지, 원래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술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여기 지내는 사람 중에 자넷 부인 잔소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겠네요.”
“각하 빼고 없을걸요?”
“와, 그럼 공작님이 여태 결혼 못하신 거 반은 자넷 부인 탓이다.”
하녀는 그 말에 대해서는 그냥 웃고 말았다.
셀리나의 취침 단장 시중을 들고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다들 같이 몇 마디씩 거들고 웃고 있기는 하지만, 칼시온의 예비 약혼녀였던 아이렐의 죽음은 함부로 떠들 거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갑자기 욕실이 찬물을 쏟은 것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음, 오늘은 좀 더 꽃향기가 진한 향유를 바르고 싶은데.”
분위기를 살피던 셀리나는 괜히 향유에 까다롭게 굴었다. 향유를 준비한 하녀가 병을 살피더니 물어 왔다.
“준비해 온 건 이게 다인데, 다른 종류를 가져와 볼까요?”
“네, 부탁해요.”
이렇게 한 명 내보내고.
“오늘은 피곤해서 좀 편한 옷으로 입고 자려고요. 저런 거 말고.”
“아, 그럼 다시 가서 찾아와 볼게요.”
또 이렇게 한 명 내보내고.
한 명씩 내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제 셀리나에게 유난히 친근하게 굴던 하녀와 단둘이 남았다.
“우리 둘만 남았네요?”
셀리나가 거울 너머로 눈웃음을 치며 운을 뗐다.
“아,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아무래도 저랑 나이 대가 비슷한 사람이 편하니까 다음에도 그쪽이 와 달라고 부탁하게요.”
“아, 네. 전 쥬나라고 해요.”
“쥬나 씨. 앞으로 가까이 지내요.”
“그래요. 뭐 필요한 거나 불편한 건 저한테 다 말씀하시고요, 말 상대가 필요하실 때도 불러 주세요.”
셀리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얼마나 친해질지 알아볼 시간이다. 셀리나는 다른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척하다가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혹시…….”
쥬나도 똑같이 주변을 긴밀히 살피더니 얼굴을 바싹 가져왔다.
“다른 영애들도 그렇고 아까도 그렇고. 자꾸 까불면 죽는다, 욕심내다 죽는다, 이러는데……. 누가 실제로 죽었어요?”
“……아.”
쥬나가 낮게 신음하며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다들 죽는다, 죽는다, 그러는데 자꾸 듣다 보니까 그냥 협박하려고 말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물어보려고 해도 다들 이렇게 피하는 분위기라.”
당연히 셀리나는 누구보다 이 사건의 정황을 잘 알았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아무것도 몰라야 맞았다.
숲속을 헤매던 평민이 귀족 사회 깊숙한 곳에서 벌어난 스캔들을 알 리가. 심지어 모두들 쉬쉬하는 사건을.
쥬나는 셀리나가 당연히 모른다고 완전히 믿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뒤 사정도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다 보면 개인적인 생각이 많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거 진짜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특히 자넷 부인한테는. 각하께도요.”
“네, 네. 약속. 뭔데요?”
“사실은 한……, 한 달 전? 그쯤에 각하의 약혼녀가 될 뻔한 영애가 수도 저택에서 자살을 했어요.”
“헉.”
셀리나는 혼신의 놀란 척을 했다.
“각하께 약혼녀가 있었어요?!”
“아뇨, 약혼녀는 아니고 약혼녀가 될 뻔한 사람. 정략결혼이었으니까 사랑은 아니었을 거고요.”
“직접 봤어요?”
“그럼요. 수도까지 따라가서 시중든 게 저였는데.”
“와, 그랬구나. 어땠어요? 예뻤어요?”
쥬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예쁘다고 하기엔 좀……. 그냥 평범하고 수수하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사람이 좀 음침했어요. 말도 없고 표정도 어둡고.”
“아……. 공작님 취향이 어두운 여잔가? 나, 너무 밝죠?”
“아니에요! 셀리나 님은 취향을 뛰어넘은 취향인 거고. 공작님 취향이 뭐가 중요해요? 이렇게 예쁘시면 됐지.”
정말 아부 순발력 끝내준다. 칼시온의 취향이 말수 적고 조용한 여자인 건 확실한가 보다.
‘다행이다.’
일로 만났는데 서로 진짜 눈맞을 일은 안 생기겠다. 셀리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아이렐의 설명은 의외였다. 칼시온이 말했던 것과 달랐다.
얌전하고 조용한 여자.
음침하고 어두운 여자.
똑같은 사람을 설명하는 말이다. 비슷하지만, 느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을 묘사하는 양 달랐다.
“쥬나 씨는 별로 안 좋아했나 봐요.”
“전 완전 별로였어요.”
“왜요, 왜요?”
쥬나는 이미 아무도 없는 주변을 다시 한번 살피더니 목소리를 더욱 낮춰 속삭였다.
“이건 진짜진짜 비밀인데요……. 그 여자, 수도에서 미친 듯이 바람 피우고 다녔었어요.”
마치, 음모라도 꾸미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