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초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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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하루는 느리게 시작했다.
불과 오 년 전까지만 해도 선대 공작 부인, 칼시온의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 그래서 렌버드 저택의 사람들은 귀부인을 모시는 것에도 능숙했다. 아침 단장도 어제 두 번의 단장만큼이나 길었다.
“단장만 하다 하루 다 가겠네.”
“파티 있는 날은 정말 그러기도 해요.”
정원에서 따 온 싱싱한 생화를 셀리나의 머리에 꽂아 주며 하녀 한 명이 웃었다.
“아침 단장하고 손님 맞아 식사하시고, 다시 단장 풀고 쉬는 시간 갖다가 오후 단장 다시 하고 볼일 보시다가, 저녁때 파티 있으면 본격적으로 힘줘서 단장하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파티 있으면 단장 고치기도 하고 그래요.”
“…….”
내가 너무 인생을 쉽게 생각했나. 앞이 아득해졌다.
“종일 계속 새롭게 꾸밀 수 있다니, 너무 신나지 않아요?”
“…….”
꾸며는 주되 직접 꾸밈을 받아 본 적은 없는 하녀 눈에는 그것이 마냥 부러운 모양이었다.
그게 한두 번이면 좋았겠지. 하루에 최소 두 번, 사교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 하루에 다섯 번씩 이 짓을 해야 한단 말이다.
배우 생활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보다 심했다. 촬영이 없는 날엔 그나마 쉬기라도 했지, 여긴 이게 생활이었다. 쉬는 날이 없단 소리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당이 뚝뚝 떨어져 아침 간식으로 나온 과일과 과자를 입에 쑤셔 넣었다. 여기는 아침부터 웬 과자를 먹나 했더니 치장하는 시간이 길어 주는 것이었다.
셀리나가 치장하는 동안 칼시온은 아침 훈련을 다녀와서 다시 한번 씻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니 아침 식사 시간이 엇비슷하게 맞았다.
그리고, 피오넬도 마찬가지였다.
“피오넬 영애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면 어떻겠냐고 청해 오셨습니다.”
막 식당으로 이동하려던 참이었다.
“어제 저녁 대신 아침 먹는 거예요?”
“아니, 저녁은 저녁이야. 아침을 같이해도 저녁은 다시 초대해야 한다.”
도착한 날 튕기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셀리나는 칼시온의 팔짱을 꼈다.
자주 봐야 싸울 일도 자주 생긴다. 어차피 예법 때문에 저녁 때 만나겠지만, 자주 볼수록 죽이고 싶은 마음도 커지지 않겠는가. 어젯밤처럼 칼시온과 함께 자면 비명횡사할 걱정도 없으니 겁낼 것도 없다.
칼시온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막 식당으로 걸음을 떼는데, 다른 하인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로젤린 영애께서 곧 도착하신다는 전갈이 당도했습니다.”
“……로젤린이?”
“누구예요?”
피오넬이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새로운 여자 이름이 등장했다.
“티올란 후작가의 여식.”
“후작가…….”
피오넬은 백작가. 로젤린은 후작가. 쟁쟁한 집안 여식들 총집합인가.
“이러다 공작가 여식, 왕족 여식 다 모이겠어요.”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말지.”
“저도 머리에만 담아 두기 끔찍해서 말했어요.”
피오넬 같은 게 단계별로 업그레이드해서 나타나면 아무리 튼튼한 멘탈이어도 힘들겠다. 이제 레벨1 피오넬을 손봤나 싶은데 바로 레벨2 등장이요.
“로젤린이 도착하는 대로 같이 자리를 만들도록 하지.”
칼시온도 인간인지라 싫은 일은 한 번에 몰아 해치우나 보다.
피오넬에게도 이 이야기는 전달되었다. 피오넬은 로젤린이 온다는 말을 듣자마자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하녀들을 닦달했다 한다.
옷장을 뒤집어엎고 보석함을 탈탈 뒤지며 난리가 났다는 얘기를 칼시온과 함께 들었다.
‘나도 뭔가 준비해야 하나.’
셀리나가 입고 있는 옷은 어제 입었던 옷이었다. 하지만, 다른 옷을 찾는다 해도 이 이상 화려한 옷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로젤린은 이 옷을 처음 볼 테니, 그냥 입자.’
셀리나는 그냥 조용히 과자만 먹었다. 그에 옆에서 지켜보던 하녀가 한입 물 때마다 달려와 입술을 고쳐 주었다. 어느 순간 신경 쓰여서 과자가 제대로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결국, 몇 개 먹고 포기했다.
다행히 로젤린은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문전 박대에 가까웠던 피오넬과 달리 로젤린은 칼시온이 직접 성문으로 나가 맞았다.
“로젤린은 특별 대우예요?”
“피오넬을 특별히 박대하는 쪽이지.”
“아…….”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질척거리는 것도 적당히 예의와 눈치 차려 가며 해야지. 상대 입장이고 뭐고 저 좋을 대로 밀어붙이는 사람에겐 똑같이 예의고 뭐고 없이 걷어차게 되기 마련이다.
그걸 증명하듯, 피오넬은 당당히 성문 앞으로 나왔다.
“로젤린 영애가 온다니까 피오넬도 인사하러 나왔어요.”
“그래.”
“있다 다같이 식사하는 거죠?”
“음.”
“드디어 각하랑 식사할 수 있게 돼서 너무 기뻐요!”
“…….”
어젯밤, 너 그러다 죽는다고 협박하던 낮은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피오넬은 길고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중간중간 작은 꽃과 보석을 꽂았는데, 얼굴 주변이 온통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성숙하고 화려한 맛은 덜하지만 본인의 장점인 귀염성을 극대화시켰다.
‘여기선 얼굴에 글리터를 바르는 대신 머리에 보석을 박는구나.’
피오넬이 더 떠들기 전에 고맙게도 로젤린의 마차가 도착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총 열세 대였다.
그중 가장 크고 화려한 마차가 칼시온 앞에 멈춰 섰다. 앞뒤 마차에서 수행원들이 우르르 내리더니, 먼저 칼시온에게 절을 올렸다.
“레이디의 하차를 위해 잠시간의 시간을 부탁 올려도 되겠습니까, 각하.”
“그래.”
이런 사태는 칼시온도 처음인 듯했다.
대체 마차에서 내리는 데 무슨 준비가 필요하다고. 다시 인사를 올린 수행원들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최대한 서두른 듯 동작들이 급했다. 다시 마차 밖으로 나올 때에도 구르듯 서둘렀다.
이윽고 마차 문이 다시 열리고 로젤린의 모습이 드러났다.
수행원들과 다른 시간을 사는 것처럼 느리게 마차 계단을 밟고 내려서는 로젤린에게서 향긋한 꽃향기가 물씬 풍겼다.
오랜 시간 마차를 타고 왔음에도 흐트러짐이나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싱그러운 것이 경이로웠다. 잔잔히 띤 미소, 사뿐한 몸짓, 다소곳해 보이지만 강단 있는 눈빛. 로젤린은 피오넬과 완전히 정반대의 이미지였다.
“각하.”
칼시온을 향한 목소리마저도 반듯하고 고왔다.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온 객을 이리 직접 맞아 주시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칼시온 앞에 서자 잔잔하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꽃냄새가 뭉클 피어오르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 정도로 화사했다. 분명히 봄꽃처럼 환한데 공기가 서늘해졌다는 착각이 일었다.
칼시온의 옆에는 피오넬과 셀리나도 있었다. 피오넬은 싫어 죽겠다는 듯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못 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로젤린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옆으로 새지 않았다.
“감히 공작 각하의 영지를 방문하면서도 미리 허락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급하여 몸이 먼저 와 버린 것을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고개를 숙이며 살풋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피오넬이 저질렀을 무례를 돌려 깐다. 동시에 칼시온이 자신을 내쫓을 수 없게 배수진까지 확실히 쳤다.
셀리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진짜 무서운 언니가 등장했구나.
“나 갔다는 소리 듣고 바로 따라 출발한 거면서 내숭 떨긴.”
그러나, 피오넬에겐 전혀 무섭지 않은 모양이다. 뵈는 게 없으니 무서운 것도 안 뵈나 보다.
로젤린은 그제야 피오넬을 돌아보았다.
“피오넬 양.”
본 척도 안 해 놓고 돌아보는 눈빛은 칼시온을 향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워 보였다.
“너무 갑자기 출발하셔서 모두가 놀랐답니다. 특히, 헬렌 영애가 말도 없이 티 파티에 오지 않으셨다며 걱정을 많이 했어요. 물론, 저도요.”
한마디 한마디가 따뜻한 칼날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애정을 담은 염려였지만, 다시 한번 피오넬을 ’남의 티 파티를 말도 없이 펑크 낸 무례한 인간’으로 몰아붙였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따라와서 내가 멀쩡한지 확인할 만큼 우리가 친하진 않을 텐데.”
그러나, 피오넬도 만만치 않았다. 우회 공격엔 정공법이 쥐약이라더니. 주거니 받거니 하는 꼴이 한두 번 이런 게 아니어 보였다.
“날짜가 공교롭게 맞았지만, 저는 공작 각하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대표로 찾아온 것이랍니다. 물론, 피오넬 양의 안위도 걱정이 됐고요.”
피오넬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각하, 들어가서 천천히 이야기를 전해 드려도 될까요?”
끝까지 셀리나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듣도 보도 못한 여자가 칼시온의 바로 옆에 화려한 복장을 하고 서 있으면 어떤 포지션인지 뻔히 보일 터. 그걸 알면서도 로젤린은 셀리나를 보지 않았다. 마치 너 같은 건 경계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피오넬은 보자마자 파르르 떨며 경계했으니 자극하기 쉬웠지만, 이런 타입은 어렵다. 우선 경계할 만큼의 위치까지 그쪽이 인정을 해야 하니까.
그러나, 셀리나에게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셀리나는 칼시온이 대답하기 전, 먼저 움직였다.
“우리 이제 아침 먹어요?”
칼시온의 팔을 답싹 감아 안으며 올려다보았다.
셀리나의 키는 큰 편이다. 피오넬보다 한 뼘은 컸고, 배우 중에서도 큰 편이었다. 그에 비해서도 칼시온은 정말 컸다. 아무리 남자여도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칼시온은 셀리나보다 머리 하나만큼 컸다.
“먹어야지.”
칼시온은 여상히 대답했다. 살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셀리나의 버릇없는 행동을 탓하지도 않았다. 그제야 로젤린의 눈이 셀리나를 향했다.
“어머나, 이쪽은?”
그러면서도 질문은 칼시온에게.
“산에서 주웠다.”
“산에서요?”
렌버드 영지에서 가장 가까운 산은 마수가 나오는 사인다트 산맥밖에 없다. 렌버드 영주와 그 기사들에게만 허락된 마수로 인해 일반인에게는 금지된 지역.
로젤린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짧게 고민하다가 쉽게 답을 찾았다.
“사람이 아닌가요?”
로젤린의 물음에 칼시온은 셀리나를 돌아보았다.
“사람이 아니었나?”
“사람입니다. 이름도 있고요. 셀리나라고 합니다.”
더 이상 칼시온에게 질문이 가지 못하도록 선수를 쳤다.
로젤린이 자연스럽게 셀리나를 돌아보았다. 흠잡을 데 없는 사교적인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셀리나는 보았다. 로젤린의 눈빛이 바뀐 것을.
“아아……. 셀리나 양. 미안한데 들어 보지 못한 이름과 얼굴이라. 혹시, 어느 가문의……?”
아닌 척 말끝도 짧아졌다.
“사람이 중요하지 가문이 중요한가요?”
“아아.”
똑같이 생긋 웃으며 대꾸했으나 로젤린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아마 어느 가문의 이름을 댔어도 비슷했을 것이다.
“어쩐 일이세요? 레이디의 스카프라도 땅에 떨어진 건 줍지 않으시는 분이.”
곧바로 이어진 질문마저도 칼시온을 향하는 것을 보면.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레이디의 스카프와 달리.”
칼시온은 쓸데없는 핑계를 대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바보는 아니었다.
로젤린은 어깨를 툭 쳤을 뿐인데 칼시온은 정강이를 후려쳤다. 셀리나는 오, 하며 칼시온을 돌아보았다. 동시에 로젤린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시온은 아무 일 없던 척 자연스레 건물 안으로 걸음을 뗐다.
“각하의 사냥개만큼이나 쓸모 있는 모양이에요. 몇 년 전, 각하께서 들어온 혼담들을 거절하며 하셨던 말씀이었죠? ’결혼이란 게 내 사냥개만큼만이라도 쓸모가 있다면 백번이든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여전히 그렇고.”
로젤린은 마치 둘만의 산책처럼 대화를 이어 갔다.
“세상에, 결혼보다 나은 사냥개를 산에서 주우신 것이려나요.”
“글쎄, 두고 봐야 알겠지.”
“두고 보시려면 훈련도 시키셔야겠어요. 아무렴 필부의 초가도 아니고 렌시온 공작저의 지붕 밑에 지내는데.”
칼시온이 셀리나를 곁눈으로 돌아보더니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훈련이 되려나.”
“훈련 안 된 사냥개도 쓸모가 있나요?”
“관상용이란 쓸모도 있다던데.”
셀리나가 딴청을 부리며 끼어들었다.
“재밌네요.”
분명 이 깐족거림이 거슬릴 만도 하련만, 로젤린은 생긋 웃고 말았다.
“지금부터 슬슬 아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생각 있으면 같이할 건가?”
“아침은 아침이고, 저녁은 저녁대로 베풀어 주신다면요.”
“한 번이면 족하지.”
“그럼 기왕이면 성대한 저녁을 선택하고 싶네요, 각하.”
로젤린은 웃으며 칼시온의 얕은 수를 무너뜨렸다.
“편할 대로.”
“정말 편할 대로 해도 된다면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 두 아가씨들과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싶은데요.”
“방금 내 제안과 다른 게 뭐지?”
“각하만 없다는 것이 다르지요.”
칼시온 보러 이 먼 길 쫓아온 주제에 칼시온만 쏙 빼놓겠다는 당당한 선언이다. 모두가 기가 차 눈동자를 흔드는데 로젤린 혼자만 흔들림 없이 태연했다.
가녀린 장미 한 송이로 보이면서 너무나도 튼실한 기둥뿌리셨다. 내일이 없는 게 아니라 오후가 없는 분이신가.
과감하게 지른 로젤린의 제안에 ’편할 대로’라고 본인 입으로 말해 버린 칼시온은 셀리나를 내어 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내 손님들이 허락한다면.”
등 떠밀린 칼시온의 허락에 로젤린은 의기양양하게 둘을 돌아보았다.
피오넬은 즉시 울컥했다. 당장 거절의 말이 나올 것이 뻔했다.
그래도, 로젤린은 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목표는 피오넬이 아니라 셀리나니까. 알아서 시비를 걸어 주니 셀리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전 좋아요. 벌써 각하의 세계에 섞여 들어간 기분이에요.”
귀족가의 파티에 초대 받은 것처럼 철없이 기뻐하는 모습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럼 나는 각하랑 둘이 아침 먹을래.”
피오넬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시든가요.”
예상대로 로젤린은 시큰둥했다.
“오늘 아침은 생략하도록 하지. 이만 연무장으로 가 보겠다.”
칼시온도 절박하게 시큰둥했다.
“각하?!”
“그럼, 즐거운 아침들 되길. 저녁 때 보지.”
칼시온은 나머지 에스코트를 자넷 부인에게 넘겨 버리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순식간에 셋만 남겨졌다.
“하여간, 진짜 맘에 안 들어.”
피오넬은 로젤린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걸음마다 머리에 단 꽃이 하나씩 떨어져 날렸다. 저러고 돌아가서 저녁 될 때까지 또 종일 머리에 꽃 달고 있겠지. ……과연, 머리에 꽃 달고 다니는 애답다.
이제는 꽃처럼 웃으면서 말끝마다 칼바람 부는 애까지 합세해 둘이 되었다.
아직은 할 만 하다. 장차 칼시온을 노리는 모든 사람들의 공적이 될 예정. 둘 정도는 가볍다. 로젤린은 과연 어떻게 시비를 걸어올까. 지금까지처럼 사근사근하게, 알듯 모를듯 사람 속 긁는 방식이 예상되었다.
……만.
쾅!
“―?!”
몸이 날아갔다.
셀리나 혼자 기둥에 몸을 날려 처박히는 취미는 없다. 로젤린이 밀쳐서 날아간 것이다.
저 가는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거야. 사기다. 방금 그 쾅 소리는 셀리나의 등이 기둥에 부딪치며 난 소리였다. 온 내장이 다 울렸다. 기가 막혔다.
“지금 이―.”
따지려 입을 열기도 전에 로젤린의 한 팔이 셀리나의 머리 옆을 쾅 짚었다. 역시나 부러질듯 가는 저 팔 어디 그런 힘이 있으셨는지.
“……게 무슨 짓이신가요.”
저절로 존댓말이 나왔다. 머리 옆이 아니라 머리를 짚었으면 두개골 어디 한 군데에 분명 구멍 났다.
로젤린이 얼굴을 바싹 붙여 왔다. 소름 끼치게 아름답지만 표정과 눈빛만큼은 살벌했다.
로젤린은 ’당장 처죽여 버리고 싶은데 내 미모와 명성 때문에 참는 거지 너 때문에 참는 게 아니다 이 버러지야’라고 써붙인 표정으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야, 얼마냐.”
“……?”
예? 여기서 이런 상황에, 당신에게 들으면 안 될 대사 같은데요. 혼란이 셀리나의 머릿속에 찾아들었다.
로젤린이 참을성 없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얼마면 공작한테서 떨어져 나가겠냐고. 돈 몇 푼에 목숨 걸 필요 없잖아?”
머리 어디에 모드 변환 버튼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로 말투가 싹 바뀌었다.
칼시온을 향해 일침을 놓으면서도 사라지지 않던 말투의 나긋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돈 노리고 달라붙은 거머리에게 베풀 나긋함은 없었나 보다.
“기껏해서 몇 푼 노리는 거 아닌데요.”
셀리나는 태도의 변화 없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말 몇 마디 험하게 한다고 쫄 거라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다.
생각보다 강하게 버티는 셀리나를 향해 로젤린은 불쾌한 듯 한쪽 눈썹을 휘었다.
“그래, 네 딴엔 몇 푼이 아니라 큰돈을 노리는 거겠지. 하지만, 네 세상에서 가장 큰돈이어도 우리 세상에선 푼돈일 거란다. 네가 돈을 알아야 얼마나 알겠어? 숫자는 어디까지 셀 수 있니?”
로젤린은 돈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
광산이 발견된 이후, 렌버드 공작 부인 자리를 노리는 수많은 영애의 머릿속은 똑같았다. 모자람 없이 자라 평생 굶을 걱정 없는 영애들조차 노리는 렌버드의 돈인데, 어디서 나무뿌리나 캐 먹고 살았을 비렁뱅이가 노리지 않을 리 없다.
로젤린의 눈에 셀리나의 대답은 같잖은 자존심 한번 부려 보는 것에 불과했다. 돈이 있으면 뭘 할까. 돈을 써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너한테 얼마가 됐든 내가 줄 수 있는 돈은 네가 생각할 수 있는 단위 그 이상이야. 그래서, 불러 봐. 얼마야.”
셀리나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사실 불러 보래도 이 세계 물가를 모르니 부를 수가 없다. 하지만, 꼭 단위로 대답할 필요는 없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는데요?”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의 답변에 로젤린이 휘청 당황했다.
보통 돈 때문에 매달리는 애들은 둘 중 하나다. ’저는 돈 따위 필요 없어요!’라며 눕든가, ’이 정도면 오케이.’라며 세속적으로 손을 잡든가.
배 째고 누워 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다. 로젤린이 아무리 무서워도 두 눈 꾹 감고 귀 막고 제 할 말만 해 대면 되니까.
하지만, 로젤린 앞에 감히 딜을 거는 경우는 여태 한 번도 없었다. 사교계에서 로젤린의 지위란 그 정도였다.
지위를 무시당해 당황한 로젤린에게 셀리나는 다시 한번 강수를 놓았다.
“이런 딜 할 때는 선제시가 기본이죠. 그래서, 얼마까지 꽂아 주실 수 있는데? 지금 입고 있는 이런 옷 백 벌은 되나?”
로젤린의 표정이 다시 한번 더 요동쳤다.
그녀도 이 옷에 대해 아는 모양이었다. 아직 이 세계 물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누가 봐도 이 옷은 진귀했다. 문화재급인 옷이니 한 벌에 집 한 채 가격은 훌쩍 넘을 터. 아무리 로젤린이 날고 기는 가문 사람이라 해도…….
“그러지.”
“?!”
……이게 된다고?
셀리나는 놀라 속이 뜨끔했다.
전대 공작 부인이 입지도 못하고 아끼던 옷이다. 아무리 엄청난 대귀족이어도 결코 가벼운 돈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그 백 배의 돈을 주겠다고?’
원래 세계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만 없었다면 그냥 받고 튀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한 칼시온 쪽의 조건이 더 좋았다. 그렇다고 그 조건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
“전액 현금이든 보석이든 원하는 수단으로 주도록 하지. 받는 즉시 사라지도록 해. 됐나?”
“그러겠다고 안 했어요.”
“원하는 게 더 있으면 불러, 얼마든지.”
로젤린은 셀리나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여유를 부렸다.
“뭐든지요?”
“그래, 뭐든지.”
셀리나는 씩 웃었다. 이것도 줄 수 있으면 줘 보시지.
“그럼 공작님 마음도 갖다 주세요.”
“…….”
순식간에 10도 정도 온도가 낮아졌다. 로젤린의 눈빛이 삼엄하게 싸늘해졌다. 한층 더 낮게 깔린 목소리가 주변 공기를 얼리며 쏟아졌다.
“장난 칠 여유가 있나보지?”
“저 장난 아닌데요. 제가 다 가질 거예요. 지위도, 공작님 마음도.”
“……하, 어디서 같잖은 게 들어와서…….”
로젤린은 기가 차 헛웃음을 뱉더니 다시 한 번 정색을 했다.
“그 같잖은 욕심 때문에 죽고 싶니?”
오싹한 기운이 등을 타고 쏟아져 내렸다. 셀리나의 얼굴에서도 여유가 지워졌다.
두 번째다. 각각 다른 사람에게 ’죽는다’는 말을 들었다. 두 사람 모두 가벼운 협박조로 그 말을 쓴 게 아님을, 셀리나는 직감했다.
“렌버드 공작 각하의 옆자리는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리거든. 제 한 몸 지킬 힘도 없으면서 낄 자격이 되려나.”
그저 아이렐의 사건을 들먹이며 겁먹게 하려는 것인지, 진짜 목숨을 위협하는 건지.
정확히 어느 쪽을 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 자체에서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뭔가를 알고 있다.’
로젤린 본인이 범인일 수도 있고, 관련된 사람일 수도 있고, 또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로써 로젤린도 확실한 용의 선상에 올랐다. 순간 긴장해 얼었던 심장이 다시 뛰었다. 놀라서 얼어붙어 있을 때가 아니라 더 밀어붙여 로젤린이 더욱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게 만들어야 했다.
“사랑에 자격이 어디 있나요?”
셀리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로젤린과 눈을 마주쳤다.
“사람 대 사람의 만남에는 신분도 재력도 중요하지 않댔어요. 마음은 언제든 통할 거예요.”
언젠가 했던 극의 대사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도저히 자신의 머리에서 나올 법한 생각은 아니었으니 대사가 맞을 것이다. 대본 읽으면서도 ’이게 말이 돼?’라며 욕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건 로젤린도 마찬가지였는지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공작님 돈을 탐내시는 건 그쪽 같은데요. 제가 공작님 마음만 얻으면 돈? 그런 거 필요 없으니 다 드릴게요. 가지세요.”
내 돈은 아니지만.
그러자, 로젤린의 얼굴이 지금까지 중에 가장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깟 푼돈 몇 푼.”
“본인도 노리고 있는 게 그 푼돈 아니었어요?”
로젤린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설마.”
“공작 부인이란 지위도 갖고 싶을 수 있겠고요.”
“그까짓 거, 가질 수 있다면 얼마든 가질 수 있어. 가지지 않아도 그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질 수도 있고.”
그럼 대체 왜 시비야?
셀리나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피오넬은 칼시온을 ‘가지고 싶어’ 미치겠다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로젤린은 그렇지 않았다. 칼시온 주변을 서성이며 주변을 경계하긴 하는데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가 보이지 않는다.
렌버드의 재화도 별로다, 공작 부인의 지위도 별로다. 그렇다고 칼시온이라는 사람 자체를 원하는 눈치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지?
“난 일단 경고했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건 그냥 죽어도 싸지.”
로젤린은 저주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여전히, 그 속에 든 속내는 보이지 않았다.

북부 공작님을 유혹하겠습니다  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