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예행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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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일은 금방 다가왔다. 셀리나가 한 것은 매일 쓸 짐을 챙기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 같이 따라갈 하녀, 마차 배정, 기타 등등은 자넷 부인이 일임했다. 약혼녀도 아니고, 공작 부인도 아니고, 일개 ’여자’일 뿐이니 상관할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이건…….’
셀리나는 자신의 앞에 문을 열고 기다리는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호화로웠다. 푹신한 쿠션, 큼직한 창문, 아기자기한 소품들까지. 그러나, 생각하고 있던 풍경은 아니었다.
“오르시지요.”
문을 잡고 있는 마부가 공손히 조아렸다.
“다른 사람들은요?”
“각하께서는 각하의 마차에, 하인과 하녀들은 따로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누구 짓인지는 묻지 않아도 안다.
“저, 이거 안 타요.”
셀리나는 직접 마차 문을 쾅 닫고 칼시온의 마차를 찾았다. 칼시온의 마차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가장 큰 마차가 눈에 띄었다.
“엇, 아가씨……!”
칼시온의 마차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 하나가 셀리나를 알아보고 몸을 곧추세웠다.
디온이라 했던가. 평소에도 오며 가며 종종 얼굴을 마주쳐서 서로 알아보는 건 문제없었다.
“곧 출발하는데 왜 마차에 안 오르시고…….”
이 사람한테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기도 귀찮았다. 셀리나는 말 대신 벌컥 마차 문을 열었다.
안에 앉아 있던 칼시온이 돌아보았다. 그가 안에 있을 땐 허락 없이 갑자기 열려선 안 되는 문이었다.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해 몸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칼시온은 셀리나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확 치솟았던 분노와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다른 그 누구도 허락할 수 없는 무례였지만 셀리나는 그 범위 밖에 있었다.
셀리나는 이번에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칼시온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마차 문을 쾅 닫았다.
“마차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마차 배정, 그냥 자넷 부인한테 맡겼죠?”
“줄곧 자넷 부인이 맡아 하던 일이지. 배정에 문제가 생겼나?”
“제가 다른 마차에 타는 것부터가 문제 아닌가요?”
“왜 문제지?”
대화가 계속 물음표로 끝났다. 셀리나의 짧은 인내심은 더 이상의 물음표를 참지 못했다.
“사방에서 절 노리는데 저 혼자 마차 타고 가다가 무슨 일이 날 줄 알고요.”
“일부러 렌버드 영토 내에서 최대한 서쪽으로 이동해 경계에서 딱 하루 수도로 내려가는 노선으로 이동할 거다.”
“그래서요?”
“렌버드 영토 내에서는 괜찮아. 일부러 안전을 위해 삼 일을 더 이동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삼 일이나 더 들인다면 보안에 더 철저한 것은 맞겠다. 하지만, 그건 외부의 적에 한정된 이야기다.
“집 안에도 위험 요인이 있는데, 영토가 대수예요?”
칼시온은 팔짱을 꼬았다.
“적어도 내 눈이 닿는 곳에서 간 큰 짓을 벌이진 못해.”
본인 영지 안에서 일이 날 수도 있다는 말에 심기가 상한 모양이다. 그래도 목숨 걸린 일에는 양보할 수 없었다.
“사람이 맹목적이 되면 뵈는 게 없을 수도 있어요. 평소엔 안 그러던 사람이 홱 돌 수도 있다니까요?”
“……흠.”
칼시온은 적극적으로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또 부정하지도 않았다. 셀리나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여긴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전 여기 붙어 타고 갈 거예요.”
“마음대로.”
허락은 생각 외로 쉽게 떨어졌다. 마차 배정 같은 것은 그가 신경을 쓸 범주에 속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칼시온은 마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서류를 꺼내 들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용케도 읽는다. 셀리나는 할 것도 없고 얘기할 사람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창밖이나 내다보았다.
처음엔 창밖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렌버드 영지의 중심 도시 실렌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던 것보다 더 넓었다. 중앙 도로로 도시를 벗어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건물이나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마차의 문양을 발견하고는 저마다 인사를 올렸다. 수많은 사람의 인사를 받자 기분이 묘했다.
‘진짜 공작 부인은 언제나 이런 삶을 살겠지.’
모든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사는 삶은 연극 속 왕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 봤자 목숨 내놓고 사는 인생, 부럽진 않지만.’
짧은 시간이지만 공작 옆에 살아 보니 좋을 게 없었다. 신경 쓸 것은 얼마나 많고, 들리는 말도 얼마나 많은가.
전대 공작 부인이 쇼핑과 파티에 환장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스트레스를 풀 만한 취미 찾기도 어렵고 마음 트고 만날 친구도 없는 세상이다.
‘스트레스엔 쇼핑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차는 도시를 벗어났다. 이어진 풍경은 초원, 그리고 황야.
처음엔 초원과 황야도 낯설어 신기했다. 한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마수 산맥도 신기한 풍경 중 하나였다. 평야 끝에 벽이라도 세운 것처럼 쭉 이어져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국엔 그 산이 그 산이었다. 지루해진 셀리나는 창가에서 떨어져 의자에 푹 눌러 앉았다.
칼시온은 내내 서류만 쳐다봤다. 시내를 벗어나 도로 사정이 점점 나빠졌는지 마차의 흔들림이 커졌는데도 그랬다.
“뭐 보세요?”
칼시온은 눈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보고서.”
“무슨 보곤데요?”
그제야 힐끔 서류 위로 눈을 든다. 그의 눈이 말했다. 말하면 알아?
“도시 인구 밀집 현상과 지방 인구 분산 정책에 대한 연구 통계 및 분석.”
“…….”
그 눈이 지당하셨다. 말해도 모르겠다. 렌버드 관리를 위한 심오한 일에 집중하고 계신 것 정도만 알겠다.
중요한 일하시는 데 심심하다고 방해할 만큼 양심이 없진 않다. 셀리나는 찍소리도 않고 조용해졌다.
그렇게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한쪽엔 평원, 한쪽엔 마수 산맥이 이어졌다. 슬슬 지루함에 양심이 증발했다.
“이번엔 뭐 보세요?”
칼시온이 다른 서류 뭉치로 갈아타는 틈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온천수 수도관 열 손실 최소화 공정법에 관한 연구 결과 보고.”
“아, 네…….”
다시 마차의 덜컹거림만 남았다. 하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면 또 평원과 마수 산맥뿐이다. 칼시온이 서류 뭉치를 갈아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근데 그게 무슨 연구인데요?”
칼시온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이게 궁금해?”
심심한 사람은 뭐든 궁금하다. 셀리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궁금한데요!”
인생 살며 이토록 학문에 관심 가졌던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너무너무 궁금하니까. 온천수의 분자 구조부터 궁금할 지경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기다리는 셀리나를 보며 칼시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보통 자신이 아는 한, 이런 것을 즐겁게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일이니 들여다보는 것이고 영지를 위해 관심을 갖는 것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관심을 가질 수가 없는 분야인데.
“……별나군.”
절정의 미모를 가진 배우인데 성격은 의외로 털털하고, 대찬 듯하면서도 겁 많고, 생각 없는 듯 행동하면서 학문에 관심이 있다. 정말, 별나다고밖에.
“렌버드는…….”
칼시온은 멀리 마수 산맥이라 불리는 사인다트 산맥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정책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선 세계에 대한 설명이 우선이다. 수도에 가기 전, 이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도 해 둬야지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렌버드는 대륙의 북쪽 땅, 동과 서를 모조리 포함한 영지야. 그래서 그 밑으로 다른 나라와의 경계가 닿아 있기도 하지.”
“아. 뚜껑 같은 위치네요.”
칼시온의 설명이 어렵지는 않았다. 셀리나는 금방 이해하고 예시도 들었다.
“그렇지. 렌버드의 맨 위에는 사인다트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고, 그 위로는 인간이 갈 수 없는 마수의 땅이야.”
“산맥 중간이나 왼쪽 오른쪽 바다 건너서도 못 가요?”
셀리나의 질문에 칼시온이 작게 웃었다. 비웃음도 아니고 냉소도 아닌 웃음. 솔직히 귀엽다는 웃음이었다.
‘음?!’
셀리나는 질문 하나에 돌아온 따뜻한 시선에 당황했다.
“왜 바다에는 마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있구나.”
“대부분은 산맥에 막혀 내려오지 못해. 다만, 겨울이 되면 남하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칼시온은 가르치는 재미에 눈을 뜬 사람처럼 즐거운 기색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셀리나는 머리는 좋은 편이었지만, 공부에 재능 있는 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기특해하는 눈빛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예체능 과목을 제외하고.
칼시온의 즐거움이 신기해 셀리나는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듯 집중했다.
“그 점만 빼고 실렌자는 북부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지.”
그러니 저렇게 인구가 미어터지겠지. 여느 대도시 못지않은 규모였다.
“보통 북부는 살기 힘든 땅 이미진데.”
“그렇지. 렌버드의 다른 땅은 그래. 실렌자만 사인다트 산맥부터 이어진 온천 줄기가 있어 살 만하지.”
“아. 그래서 겨울인데도 따뜻한 거였구나.”
셀리나는 생각보다 영특하게 잘 따라왔다. 칼시온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가르쳐서 이해시켜야 하는 건 아니지만, 가르치는 걸 잘 따라오는 걸 보니 뿌듯했다.
“실렌자의 모든 땅 밑에는 온천수 수도관이 흐르고 있지. 그 온수가 각 집까지 들어가기도 하고.”
한마디로 온천을 이용한 도시 전체 보일러였다. 그래서 수도꼭지를 틀면 바로 온수가 나오는 것이었다.
‘살 만한데?!’
게다가, 그냥 온수도 아니고 온천수다. 이건 그냥 사는 게 아니라 퍼다 팔고 싶은 욕구가 물씬 느껴지는 자원이었다.
셀리나의 속물적인 발상을 모르는 칼시온은 진지하게 정책 발표를 계속했다.
“지금까지는 무난히 지내 왔는데 점점 인구가 늘면서 실렌자의 경계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 더 멀리까지 온천수의 온기를 유지할 방책이 필요한 실정이지.”
“그렇구나……. 꼭 그냥 한 나라를 유지시키는 것 같네요.”
잘은 모르지만 연말만 되면 도로 정비하고 수도관 다시 깔고, 이런 느낌이다.
“한 나라에 가깝지. 중앙의 간섭이 전혀 없는 땅이니.”
“세금도 안 내요?”
“렌버드는 개국 공신의 땅이라 면세다.”
땅만 뚝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도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다.
“그 정도면 그냥 독립해 버리는 게 낫지 않아요? 이렇게 귀찮게 왔다 갔다 할 일도 없고.”
상식적이며 쉬운 발상이었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칼시온의 대답은 영 찜찜했다.
“지금까지 공작님들도 다 한 번씩은 생각해 보셨을 텐데 왜 안 하셨대요? 아, 하긴 그래도 힘든가.”
“아니, 사실 힘들진 않아. 군사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이미 분리되어 있고 위험할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왜 여태 안 하고 귀찮게 적당히 맞추며 살았어요?”
“그게 더 귀찮아서.”
“……아아…….”
그러셨구나……. 귀찮으시다는데 뭐라 말을 하겠나.
“지금은 일 년에 한 번만 귀찮으면 되지만, 독립을 하려면 이것저것 할 게 많으니까.”
“그냥 한 번 후딱 귀찮고 마는 게 낫지 않아요?”
“선대들은 나보다 열 배 정도 사람을 더 귀찮아하는 성격들이셨다더군.”
대대로 대인 관계가 안 좋은 유전자였구나. 그야말로 북부 공작 가문에 물려 내려올 만한 유전자다. 셀리나는 단박에 칼시온의 성질머리가 저 모양인 것에 대해 이해했다.
“그리고, 왕세자가 책봉되기 전까지는 이 귀찮은 짓도 사실상 전무했지.”
“왕세자 씩이나 되는 분이 왜 그런대요? 왕세자가 공작보다 세지 않나?”
원초적인 질문에 칼시온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할 뻔했다. 이 여자랑 있으면 시시때때로 속에서 뭔가 치민다. 울컥 치밀어오르든가, 화르르 불타오르든가,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 한다.
“이유야 여러 가지지. 가장 우선 돈 문제가 있을 테고.”
“돈은 왜요? 왕세잔데 돈이 없어요?”
“많을수록 좋은 게 돈이니까. 권력은 돈에서 나오기 마련이니.”
결론은 뭐든 다 자기가 가지고 싶어 하는 욕심쟁이인 걸로.
“왕세자씩 돼서도 탐욕이 끝이 없나 보네요.”
“라센 왕세자는 입지가 불안한 편이거든. 그걸 보상하려 드는 걸 거야.”
여기서도 정쟁물 한판 찍고 있었구나.
궁중 암투물 시나리오 한 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왕세자로 책봉되기는 했지만 입지가 불안정하니 귀족을 잡아서 자기 권력을 부풀린다. 칼시온처럼 막강한 힘을 가진 귀족은 더더욱 꺾어서 자신의 발밑에 두려 할 것이다.
“진짜 귀찮겠네요.”
그런 애들이 한 번 찍으면 꼭 징그럽게 집요하다. 상대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근성으로 공격하는 타입들. 본인이 정쟁에 져서 물러나거나 칼시온이 바닥까지 추락하지 않는 한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어라?’
셀리나는 문득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칼시온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게 아니라, 죽어 버리면 더 좋은 거잖아.
칼시온은 형제도 후계도 없다. 그가 죽으면 저 엄청나게 넓은 영토와 부를 왕실로 귀속시킬 수도 있다.
‘……그럼 진짜 돈인데.’
후계를 만들지 못하게 예비 약혼녀부터 죽이고 차근차근 손을 쓰려 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칼시온과 자신은 죽으러 가는 중 아닌가.
등골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촉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왕세자도 용의자에 포함인가요?”
칼시온도 동시에 바람을 느낀 모양이다. 그의 눈빛에도 서늘한 한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직접 손을 썼든, 아니든. 적어도 관련은 있을 거라 예상한다.”
이쪽은 여자들만이 알 수 있는 사교계의 뒷면이 아니었다. 칼시온이 직접 부딪치는 정치적 관계였다. 그만큼 확신도 단단했다.
“제 목숨 잘 좀 지켜 주세요.”
셀리나는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수 협상은 조만간 다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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