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시온과 육체적으로 뜨거운 밤을 보내게 된 셀리나는 갑작스럽게 재개된 격한 운동에 마차에서 반 시체가 되어 드러누웠다.
낮에는 그렇게 마차에서 내내 뻗어 자니 아무리 피곤하게 운동을 해도 저녁이 되면 살아나기 마련. 또다시 불면의 밤을 맞아 둘만의 훈련이 시작되기를 내내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길고 긴 길을 지나 드디어 렌버드 영지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끼니 때를 제외하고는 내내 마차에서 자던 셀리나도 렌버드 영지를 벗어난다는 말에 아침부터 내내줄곧 눈을 뜨고 있었다.
“렌버드 영지를 벗어나는 순간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온다거나 떼로 습격해 온다거나 그러진 않겠죠?”
“그럴 수도 있기는 한데…….”
“그럴 수가 있다고?!”
셀리나의 불안에 불을 붙이는 일이었으나,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칼시온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도적 떼인 척 수를 쓸 수도 있고, 사냥하다 실수로 날렸다 할 수도 있고. 수도 전체는 왕의 땅이니 귀족 누구나 사냥을 할 수 있거든.”
“그럼 되게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아.”
설명은 보스전처럼 해 놓고 위험하지 않다니.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도 렌버드 기사단은 못 이기니까.”
“아하하하……. 그 아무것도 못 이기는 기사단이 왜 저번 암살자는 깜빡하고 놓치셨을까.”
“…….”
그날, 암살자를 들여보낸 것은 렌버드 기사단 최고의 수치가 되었다. 자존심이 북 긁힌 칼시온은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과도한 자신감을 내세우냔 말이다. 위험하지 않다, 우리가 이긴다, 이런 자신감을 내세우기 전에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먼저 읽어 주면 좀 좋으냔 말이다. 셀리나도 속으로 툴툴대며 다른 쪽 창밖을 내다보았다.
늘 서쪽을 향하던 마차는 오늘 아침, 처음으로 남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렌버드의 중심 도시 실렌자는 동쪽 끝, 이 나라 아클리온의 수도 미옹은 서쪽 중앙부에 위치했다. 북쪽의 모든 땅을 포함한 렌버드의 영지 안에서 동에서 서로 이동했으니 이제 남은 길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는 것뿐.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오른쪽에는 사인다트 산맥, 왼쪽엔 황야로 거의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자 위도가 바뀌면서 시시각각 풍경이 달라졌다.
들판에 억센 가시나무 대신 바람결에 흔들리는 녹색 풀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었다. 정오에 가까워 오는 시간이 되자 처음으로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꽃이 핀 들판 저 너머에 경계석이 서 있는 것도 보였다.
“경계다.”
꽃이 피는 위치를 중심으로 경계가 세워지다니. 북쪽 렌버드 땅이 볼모지처럼 느껴지는 기준이었다.
반대로 꽃이 피어나는 수도는 얼마나 번성하고 화려한 곳일까. 제각기 화려한 꽃잎과 향을 자랑하는 가운데 어느 것에서 독이 흘러나오는지 구분할 수조차 없는 화려한 무덤.
이제 저 무덤에 들어가 분칠한 시체들 사이에서 춤을 추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셀리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칼시온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차는 경계에서 멈춰섰다. 수도와 렌버드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안을 위해서인지 병사 몇이 경계석 부근에 보초를 서고 있었다.
“각하.”
기사단 중 한 명이 마차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칼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명령을 남겼다.
“추후 배치 조정이 있을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명에 따르겠습니다.”
마차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기사단이 나뉘었다. 일부는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 쪽으로 가고, 나머지는 마차 주변을 따라 다시 대열을 정렬했다.
분리가 끝나자 마차는 곧장 다시 출발했다. 경계의 보초들은 일반 백성의 통제를 위한 것인지 칼시온의 마차에 제재나 검문은 일절 없었다.
“저 기사들은 왜 여기 남는 거예요?”
셀리나는 멀어지는 기사들을 바라보다 물었다.
경계를 넘어선 순간부터 마차는 갑자기 질주하듯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사들과 경계석의 모습은 벌써 보이지도 않을 만큼 까마득히 작아졌다.
“수도에 들일 수 있는 사병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어. 그래서 경계를 넘은 순간부터 수도의 거주 지역에 들어갈 때까지가 가장 위험하다고 한 것이었다.”
“아…….”
칼시온의 입에서 위험이라는 말이 나왔다. 저절로 긴장이 바짝 되어 목울대가 조였다.
“여기부터 반나절만 달리면 거주 지역에 들어선다. 거기부턴 물리적인 공격은 거의 불가능하니 안심해도 돼.”
그럼, 거기 도착할 때까지는 긴장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셀리나는 더욱 긴장해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질주하는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심장도 같이 덜컹덜컹 내려앉았다. 이러다 바퀴가 빠진다거나 진창에 빠져서 멈춰 서기라도 하게 된다면…….
한 번 죽을 위기에 처해 보니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민감해졌다. 촬영이니까 어쩔 수 없지, 하며 절벽에서 뛰던 쿨한 셀리나는 이 세계 넘어오며 죽었다. 남은 것은 죽는 게 무서워 달달 떠는 쫄보였다.
“소, 손 좀…….”
긴장이 쉬이 사라지지 않으니 손끝이 식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한기는 곧장 온몸으로 퍼져 무릎이 떨릴 정도로 번져 들었다. 칼시온의 온기에라도 기대면 좀 덜 할 것 같아 도움을 요청했다.
칼시온은 어렵지 않게 손을 내어 주었다. 셀리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칼시온도 응답하듯 손에 힘을 주어 맞잡아 주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을 잡고 있으니 차츰 떨림도 잦아들었다.
칼시온의 손은 하얗고 길쭉길쭉해서 언뜻 보면 펜과 책만 들 것처럼 섬세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거쳐 온 험한 시간이 보였다.
굵어진 마디, 손등에 도드라진 핏줄, 손바닥을 덮은 굳은살.
고작 며칠, 밤마다 검을 휘둘렀다고 셀리나의 손바닥에도 굳은살이 박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칼시온에 비하면 고목나무 옆의 새싹이었다.
이렇게 손바닥이 나무처럼 단단해지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 얼마나 많이 검을 쥐고 살아야 했을까.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노련함의 증거가 오히려 제 입으로 내세운 자신감보다 신용이 갔다.
셀리나는 손끝으로 칼시온의 손바닥에 자리잡은 굳은살을 살살 긁었다. 옷에 난 보푸라기를 한 번 뜯기 시작하면 끝없이 손대게 되는 것처럼, 굳은살 긁기도 끝이 없었다.
가만히 손을 내주던 칼시온이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손가락을 까딱일 때까지 멈추지 못했다.
“아, 간지러우세요?”
칼시온은 말없이 셀리나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꽉 쥐었다.
“어…….”
깍지 끼운 손이 되어 버렸다. 셀리나는 당황하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이 간지러워 임시방편으로 셀리나의 손을 막느라 이런 건 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려고?’
시간이 흘러도 칼시온은 깍지를 풀지 않았다. 손바닥 안의 감각이 점점 더 민감해져 갔다.
‘땀 날 것 같은데.’
칼시온은 밖을 경계하느라 깍지를 끼우고 있는 사실조차 잊고 날카로운 시선을 창문 밖으로 던지고만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차는 거칠게 덜컹거렸지만, 깍지 낀 손바닥 안 만큼은 진공처럼 고요한 긴장이 스며들고 있었다.
셀리나는 혼자 민망해 눈을 굴렸다. 칼시온은 고목처럼 미동도 없는데 자신 혼자 의식해서 꼼지락거리면, 분위기가 더 어색해져 버리진 않을까.
이제 와서 ‘엄마야! 어떻게 여자 손을 이렇게 함부로 잡아요!’ 하고 호들갑을 떨며 손을 빼기도 늦었다.
가벼운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은 반길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손바닥에 새겨진 긴장감이 쉬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