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날이 밝았다가 저물고 있었다. 파티는 해가 질 무렵부터지만, 준비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해가 뜰 때부터 저물어 갈 때까지, 셀리나는 사람들의 손에 뼈만 남을 정도로 갈고닦였다.
아침부터 달려와 열정적으로 달라붙어 준 루메라와 보석가게 덕분에 셀리나는 갈고닦은 미모의 절정을 찍었다.
이 정도면 원래 살던 시대에서도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다, 고 셀리나 스스로도 평가했다.
“이 정도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시비를 걸고 싶을 정도로 눈에 띄겠죠?”
“예쁜데 왜 시비를 걸지?”
“안 그래도 아니꼬운데 예쁘기까지 하면 더 짜증 나거든요.”
칼시온은 별로 이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 모습을 점검하자, 동화책 표지에 등장할 법한 그럴싸한 커플이 비춰졌다.
“오늘 하루 꼭 지킬 철칙, 잊지 않았죠?”
“물론. 지금도 잘 지키고 있지 않나.”
칼시온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셀리나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오늘 하루 칼시온이 지켜야 하는 철칙. 그것은 셀리나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것이었다.
궁에 들어가기 때문에 호위를 대동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아무리 그래도 궁 안에서 일을 벌일까 싶지마는, 렌버드 공작령 안까지 암살자를 보낸 정신나간 사람이 있는 마당에 궁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이 있고 여기저기 눈이 닿지 않는 곳이 많아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셀리나는 궁이 처음이라 구조를 잘 모르니 더 위험했다. 복잡하게 꼬여 있는 길을 헤매다 인적 드문 곳으로 빠져 버리기 십상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앞서 맛본 사교계의 분위기상 칼시온이 붙어 있어야 셀리나가 사람 취급이라도 받을 수 있어서였다. 칼시온이 직접 주접을 떨고 다니지는 못할지언정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 정도는 보여주어야 셀리나의 입지가 확실해질 것이다.
이번 파티의 목표는 차후 열릴 사적인 파티의 초대를 받는 것이다.
초대를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존재감이 없어선 안 되었다.
이번 개국 300주년 파티는 웬만한 귀족 가문에는 모조리 초대장이 갔다. 때문에 파티 시간 내내 벽에만 붙어 있다 퇴장하는 사람도 상당수일 것이라 했다. 욕이든 초대장이든 받기 위해서는 튀어야 했다.
“평민이 귀족 되는 것도 별까지 뛰어가는 것만큼 힘든데, 귀족으로 태어나도 줄서기라니. 어디든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네요. 신분에, 경쟁에, 서열에.”
셀리나의 구시렁거림에 칼시온은 조소로 동의했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순조롭게 길을 나아갔다.
이번엔 시내쪽 방향이 아니라 정 반대편 궁 쪽 길이라 낯선 풍경이 창밖에 이어졌다.
“마차가 많네요. 다들 궁에 가는 길이려나.”
“그렇겠지. 시간 안에 도착하는 것도 중요하거든.”
“시작 시간요?”
“왕족 입장 전. 이후에는 왕족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 외에는 입장이 불가하거든.”
“그러다 늦으면요?”
“원칙대로면 불참이 되어 반역죄를 쓸 수도 있지만, 현실은 뒷문으로 슬쩍 들어가지. 물론 입장할 때 호명을 받지는 못하고.”
“다른 사람은 지각 좀 해도 괜찮겠지만, 공작님은 큰일나겠네요.”
어떻게든 시비를 걸려고 왕세자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황이다. 아예 반역죄라고 명문화된 실수는 최대한 저지르지 말아야 했다.
셀리나는 슬그머니 길을 내다보았다. 궁으로 다가갈수록 마차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 많은 귀족이 다 한 번에 모일 수 있을까요?”
“멀리서 오는 경우 하루 전에 도착해서 궁에 방을 빌린다고 하더군. 그보다 조금 덜 먼 경우 아침부터 가기도 하고.”
“우리는 왜 시간 딱 맞춰 가는데요?”
“일찍 가서 뭐 해, 귀찮게.”
칼시온의 머리에 늦는다거나 참가를 못했을 때의 경우는 아예 없었다. 늦어서 참가를 못하게 된다면 오히려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갔을 사람이다.
옆에서 달리는 다른 마차들을 바라보던 셀리나는 문득 그 마차들이 칼시온의 것 못지 않게 좋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먼 경우 미리 오기도 하고, 아침에 도착하기도 한다 했다. 시간 맞춰 가는 사람들은 적어도 시간 맞춰 올 자신이 있는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겠지?
“저 문장은 어디 거예요?”
셀리나가 가까이 있는 마차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붉은색 차체에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장식물들을 붙이고, 마찬가지로 진짜 금으로 만든 가문의 문장을 문에 붙인 마차였다.
“렌피티 후작가.”
칼시온은 힐끔 보자마자 바로 대답했다. 그가 한눈에 알아볼 정도면 상당한 유력 가문이라는 소리다.
“저건요?”
이번엔 어두운 분홍빛 마차를 가리켰다.
“……티올란이군.”
로젤린의 가문이었다. 셀리나는 칼시온과 똑같이 얼굴을 와작 구겼다.
얼른 다른 쪽 창문으로 고개를 돌려 다른 마차를 찾았다. 이번엔 짙은 남색 마차가 눈에 보였다.
“저건요?”
“시온드 공작가.”
셀리나는 머릿속에 떠올리던 이론이 슬슬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 주변에 달리는 마차들, 다 쟁쟁한 가문들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칼시온도 고개를 빼고 창문 밖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렇군.”
“제 추측인데요. 이거 입장 순서도 가문 간 눈치싸움 아니에요? 늦게 도착할수록 내가 더 잘났다, 이런 느낌 같은데.”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군.”
“멀리 살수록 중간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미리 출발한다면서요. 그럼 상대적으로 가까이 살수록 아슬아슬 시간 맞춰 출발하겠죠. 궁에 가까운 저택은 다 비싸지 않아요?”
“……그렇겠군.”
영지가 있어도 미옹에 저택을 마련해 놓는 귀족은 한정되어 있다. 미옹 한복판은 잡기 어려운 땅이고, 그만큼 비싸기도 하다.
늦은 도착은 자신의 집 자랑, 재력 자랑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재정 상태야 소문으로 다 퍼질 텐데.”
“굳이 그래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니겠어요? 눈앞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밟아야 안심이 되는 마음, 그런 거.”
“귀찮군.”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셀리나는 웃으며 동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정점이 아니니 우스운 꼴이어도 같이 뛰어야지, 별수 있겠어요?”
경쟁에 참가하지 않고 고고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은 정점에 올라선 자만의 특권이다.
눈치빠른 마부는 달리 명령을 받지 않아도 끄트머리쪽에 도착할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하며 달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무난하게 도착할 것 같았다.
셀리나는 마음을 놓고 편하게 창밖을 구경했다.
하지만 사고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앗!”
잘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심하게 요동을 쳤다.
마차와 함께 비틀거리느라 셀리나는 하마터면 마차 창문으로 튕겨나갈 뻔했다. 칼시온이 얼른 팔을 뻗어 셀리나를 잡으며 중심을 잡았다.
몇 번 더 요동치던 마차는 이내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지.”
곁에서 호위하던 디온이 마부의 말을 듣고 돌아와 보고했다.
“마차 바퀴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바퀴에?”
마부가 허둥지둥 내려 바퀴 이쪽저쪽을 살피며 수선을 피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른 가문의 마차들은 휭휭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저, 저기, 바퀴가 연결되는 안쪽에 이런 것이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전혀 본 적이 없는 물건인데…….”
마부가 마차가 이리된 것이 자신의 탓이 될까 봐 겁이 났는지 쩔쩔 매며 바퀴에서 떼어낸 무언가를 들어 보였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톱니 달린 철사 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바퀴에 엉켜들어 바퀴를 망가뜨린 것이었다.
“마차 점검을 안 했나?”
“분명히 했습니다요! 하지만 저 안쪽까지는 잘 안 들여다보는 곳이라…….”
마부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물건을 발견한 곳은 마차 밑으로 기어 들어가 낑낑대야 보이는 곳이었다. 평소 그곳까지 관리할 필요는 없다. 일부러 손을 쓰지 않는 한 거기에 뭔가 이상이 생길 일은 없으니까.
시내에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늘 마차에 붙어 있었지만, 마차 뒤에 몰래 접근해 감아 놓고 도망을 갔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며칠간은 잘 다니다가 속도를 내니 더 이상 바퀴 연결대가 견디지 못하고 망가진 것이다.
“……이것도 신종 수법일까요.”
이대로 파티 시작 시간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칼시온이 반역죄를 쓰는 것은 물론, 셀리나의 사교계 등장도 시작부터 어그러지게 된다.
누군가가 노리고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죽이는 것에 비해서는 귀엽네요.”
사교계 데뷔만 막으려 들었다는 점이 곱게 자란 아가씨나 할 법한 짓이었다.
“저택에서 새 마차를 불러와 갈아타면…… 시간이 빠듯하겠군.”
칼시온이 인상을 썼다. 그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훼방이 들어와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 자체에 짜증이 났다. 차라리 눈앞에서 칼을 날리면 시원하게 싸우고 끝내고 말 텐데. 이런 식으로 신경을 긁는 방식은 정말 취향에 안 맞았다. 이게 반복되면 사람 말라 죽으라고 저주하는 거나 뭐가 다른가.
짜증 난 몸짓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칼시온을 내버려 두고, 셀리나는 마차 주변을 돌며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마차를 기다렸다가 갈아타는 것은 시간상 위험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오늘의 파티를 놓쳐 버린다면,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른다.
다른 마차를 빌려 타고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궁은 저 멀리 입구가 작게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차라리 뛸까.’
그럼 확실히 인상엔 남겠지만 그걸로 영원히 놀림받겠지. 날 좀 놀려주세요 기도하며 등장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던 중, 셀리나의 눈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마차를 끌던 말이 셀리나의 눈에 들어왔다.
새카만 마차에 맞춰 흑마만 골라 매어둔 모양이다. 셀리나의 눈이 홀린 듯 말의 전신을 훑었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털, 쭉 뻗은 다리. 길게 찰랑이는 갈기. 마차만 끌기에는 아깝다 싶은, 아름다운 말들이었다.
“꼭 마차를 타고 들어가야 해요?”
“무슨 소리지?”
셀리나가 손가락으로 말들을 가리켰다.
“그냥 말 타고 들어가 버리면 안 되나?”
그제야 셀리나의 의도를 파악한 칼시온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전례가 없지는 않지. 남성 귀족들은 자신의 남성성을 자랑하려고 일부러 그러기도 하니까.”
“예의나 절차에 문제가 없다면 결정됐네요. 말 타고 가죠.”
“드레스 입고 괜찮겠나?”
“말이 뛰지, 제가 뛰나요.”
“말 내려.”
셀리나의 호쾌한 답변에 힘입어 칼시온도 호쾌하게 명령했다.
디온이 마부를 도와 마차 굴레를 벗긴 말을 끌고 왔다.
자연스레 칼시온에게 한 마리의 고삐를 넘기고, 자신이 가지고 돌아서는 디온의 등에다 대고 셀리나가 물었다.
“한 마린 저 주셔야죠?”
“예? 각하와 타고 가는 게 아니고요?”
“그럼 뭐하러 두 마릴 끌어오셨어요?”
“저도 궁 앞까진 가야죠. 호위인데!”
“아, 그냥 한 마리 더 끌어오세요. 시간 없어요.”
셀리나의 재촉에 디온은 더 따지지도 못하고 몸부터 움직였다.
“말을 탈 줄 알아?”
칼시온이 신기해하며 셀리나를 쳐다보았다.
셀리나는 보란 듯이 디온에게 고삐를 건네받고 말등에 휙 올라탔다.
안장과 등자가 없어 불안정하긴 했지만 안장 없이 말을 타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촬영을 하다 보면 별짓을 다 하게 된다.
익숙해 보이는 날렵한 동작에 칼시온은 감탄하며 자신도 말 위에 올라탔다.
“별걸 다 할 줄 아는군.”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한다니까요.”
셀리나는 웃으며 먼저 말을 출발시켰다.
드레스를 입고 있어 거추장스럽기는 하지만 아랫부분에 슬릿이 들어가 있어 말을 못 몰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등장하는 귀부인은 십 년 전 오를렝 백작 이후로 처음일 거야.”
“남자는 가끔 타기도 한다면서…… 아, 백작님이 여자분이세요?”
달리는 말 위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여유있는 셀리나에게 칼시온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응, 어릴 때부터 남다르셨다더군. 선대 오를렝 백작이 아들들을 제외하고 결정할 만했다 해. 직접 전쟁터에 나가 칼도 휘둘렀다 하고.”
“와……. 직접 전쟁터까지 나가시다니. 대단한 분이시네요.”
“나이를 먹고 좀 수그러지셨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기백을 당해낼 자가 없다지.”
“이 세계에서 보고 들은 사람 중에 최초로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오늘도 오시려나?”
“오시겠지. 그분도 번잡한 건 굉장히 싫어하셔서 늘 구석에 조용히 있다가 가장 먼저 빠져나가 버리시기는 하지만.”
아이렐의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사람이겠지만, 개인적인 호기심이 생겼다.
이 세상에는 관심도, 욕심도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벌써 적응해 버린 것인지 원하는 것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었다.
‘이러다 미련 남겠네.’
셀리나는 먼 훗날의 자신을 잠시 걱정했지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도 될 일이었다.
머릿속의 생각을 날려 버리듯 말에 박차를 더욱 가했다.
아침부터 머리에 온 힘을 준 보람이 있었는지, 있는 힘껏 말을 달려도 머리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시간 맞게 도착할 수는 있겠죠?”
“괜찮아. 이 속도라면.”
스쳐 지나가던 마차들이 거의 다 보이지 않았다. 뒤에 달려오는 마차도 보이지 않은 걸 보면 시간이 간당간당해진 것이다.
두 사람은 전속력으로 달려 왕궁에 도착했다.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등장한 남녀의 모습에 왕궁 경비병들이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다가온 것이 칼시온임을 알아보고는 덜 놀란 표정이 되었다.
“여기, 초대장.”
“예! 확인되었습니다! 옆은 동행이십니까!”
“음.”
“호위는 여기까지만 동행 가능하십니다!”
“알고 있어. 디온, 너는 돌아가서 다른 마차를 보내고 대기하도록.”
“예.”
칼시온의 동행이라 하니 특별한 검문도 없이 무사 통과였다.
초대장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칼시온이 말을 출발시켰다.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속도였다.
“궁 안에 들어왔는데 왜 아직 속도를 내세요?”
“궁 안에서도 갈 길이 멀거든. 파티가 열리는 궁 입구까지가 통과선이야.”
“앗.”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셀리나는 얼른 칼시온을 따라 말을 빨리 달렸다. 그래도 궁 안에 들어오니 앞서 가던 마차들을 다 따로잡았는지 저 멀리 줄 선 마차들이 보였다.
마침 마지막 마차의 문이 열리던 참이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자기가 마지막이라고 신나 있을 텐데, 안됐네요.”
내가 가장 돈 많다 자랑할 기회를 이렇게 어이없게 빼앗기게 되었을 테니.
멈춰 선 마차가 빠져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셀리나는 전력 질주했다.
뒤에 더 보이는 마차가 없자 마지막 입장객이려니 생각하고 문을 닫으려던 시종이 전쟁의 서막처럼 웅장하게 울리는 말굽 소리에 놀라 멈췄다.
“잠깐, 잠깐 문 닫지 말아 봐!”
시종의 다급한 외침이 파티장을 울렸다. 하지만 막 마지막 사람에게 주목하고 있다가 들어선 사람들의 시선은 잘 돌아오지 않았다.
셀리나는 일부러 시종의 앞까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리다가 급제동을 걸었다.
키히히히힝!
놀란 말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파티장 안 모든 사람의 목이 동시에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셀리나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미소를 띠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파티장 입구에 걸린 화려한 조명들이 셀리나의 장신구에 쏟아져 산산히 부서지는 빛가루를 만들었다.
빛의 비 속에 요요히 빛나는 셀리나는 순간적으로 모두를 신화의 한 장면 속으로 불러들인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켰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던 것은 칼시온이었다. 그는 먼저 말에서 내려 셀리나에게 다가가 팔을 뻗었다.
혼자서도 훌쩍 올라탔으니 내리는 것도 문제없겠지만 파티장에 입장할 때는 에스코트를 하는 것이 기본 예의였다.
셀리나는 칼시온의 손을 거절하지 않고 마주 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알아서 하라는 듯 눈빛을 빛내며 체중을 실어오는 제스처에, 칼시온은 여왕님이라도 만난 기분이 되었다.
실제 여왕이 이렇게 시킨대도 안 하고 뻗댔을 텐데, 셀리나의 눈빛에는 몸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
칼시온은 고분고분 셀리나의 의도대로 허리에 팔을 감아 말에서 내렸다. 그의 팔 힘으로 셀리나 한 사람의 체중 정도는 가뿐했다.
동화 속에서 늘 연출되는 장면이지만 실제로 이게 되는 남자는 많지 않다. 힘들이지 않고 한 팔로 여성을 안아 내리는 칼시온의 남성미 풍기는 모습이 한결 더 강렬하게 시선을 끌어모았다.
셀리나는 만족스럽게 칼시온의 팔짱을 끼며 시상식 레드카펫을 밟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온 세상이 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고,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시선과 관심에 흥미가 없었으면 배우가 되지도 않았다.
앞서 마지막 순번을 차지하려던 관심 집착 종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셀리나도 결코 관심에 대한 욕망으로는 지지 않았다.
“렌버드 공작과 일행이다.”
“어서 드시지요.”
시종은 초대장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렌버드 공작 각하와 일행 드십니다!”
시종의 목청 돋운 고함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술렁였다. 칼시온은 생김새부터 누가 보아도 렌버드 공작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워낙 파티에 얼굴을 안 보이는 인사라 실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꽤 있었다.
‘저분이 렌버드 공작이야?’
‘와, 생각보다 키가 더 커.’
‘마수를 한 손으로 날려 버린다더니, 진짜 그래 보이네.’
소문의 그 사람임을 확인한 사람들은 자신의 머릿속 상상도와 실물을 비교하느라 바빴다.
그중에는 셀리나를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도 다수였다.
‘누구야? 전에 소문 돌던 약혼녀? 약혼했나?’
‘죽었잖아, 무슨 소리야.’
‘그럼 저 여잔 누군데?’
‘몰라, 누구야? 예쁘긴 진짜 예쁘다…….’
파티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셀리나는 문득 앞서 마지막을 노리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궁금해졌다.
마지막 마차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바로 입구 근처에 있을 텐데…….
“피오넬?”
놀랍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 피오넬이라면 마지막을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할만했다.
피오넬은 자신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가 진짜 마지막이 등장해서 놀랐는지 셀리나와 칼시온을 돌아보는 눈이 평소보다 두 배는 컸다.
“아앗, 각하앙!”
황급히 정신을 차린 피오넬이 자신의 파트너를 버리고 칼시온에게 달려왔다. 셀리나에게 깨지고 나서 한동안 코맹맹이 혀짧은 소리는 줄어든 것 같더니, 그새 되살아났다.
“마차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앞에 가는 마차 중에 안 보여서 안 오시나 했는데, 이렇게 말을 타고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앞서 암살자를 보낸 범인과 달리 마차 사건의 범인은 너무 쉽게 티를 냈다.
“마차에 무슨 일 있는 걸 너무 잘 아네…….”
셀리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웃었다.
피오넬은 셀리나를 향해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칼시온을 향해 녹을 듯 달콤한 표정을 지으며 한 발 더 다가서려 했다.
“각하, 이렇게 파티장에서 뵈니까 너무 좋아요. 이따가 저랑 춤 한 곡…….”
“각하는 오늘 저랑 왔어요. 피오넬 씨는 그쪽 파트너랑 잘 지내세요.”
셀리나는 일부러 칼시온의 팔을 두 손으로 꽉 끌어안으며 얄밉게 말했다. 얘랑은 최대한 유치하게 싸워야 타격감이 좋다.
“이이잉! 피오넬은 각하도 너무 반갑단 말이에요!”
“마음으로 많이 반가워하세요. 셀리나는 각하랑 저기 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을 거예요.”
칼시온의 눈에 진한 감동이 떠오른, 몇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셀리나가 나서서 무찔러 주니, 이보다 더 듬직할쏘냐.
셀리나가 끌고 가는 대로 순순히 끌려가 주는 칼시온의 모습을 본 사람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뭐야, 완전히 공작히 잡혀 있네?’
‘공작보다 기가 더 센가 봐. 안 그래 보이는데.’
‘아냐, 못 들었어? 며칠 전에 디 아떼에서…….’
이틀 연속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셀리나가 남겨 놓은 일화들의 여파는 예상보다 길었다. 중앙에서 벗어나 가장자리로 이동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셀리나는 시선을 즐기며 다가올 도전을 기다렸다. 조금만 눈길을 옮겨도 사람들은 몰려다니는 하루살이처럼 와르르 와르르 감상을 쏟아냈다.
하지만 선뜻 다가오지는 못하는 거리가 있었다. 덕분에 셀리나는 여유롭게 그 유명한 장미궁의 내부를 구경했다.
과연,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말답게 장미궁은 궁 전체에 꽃이 피어난 것처럼 보였다. 기둥을 타고오르는 것처럼 조각된 덩굴장미에, 바닥의 타일은 가운데서부터 피어난 거대한 장미 한 송이 모양이었다. 돔 형으로 생긴 천장은 장미꽃 유리공예가 되어 있어 달빛을 색색으로 빛나게 했다.
곳곳에 피워 놓은 향로에서조차 은은한 장미꽃향이 번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에서 해야 할 일이 싸움밖에 없다니, 서글프기도 했다.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때, 용기 있는 한 명이 셀리나의 감수성 깊어지는 시간을 뭉개고 다가왔다.
놀랄 것도 없이, 로젤린이었다.
칼시온은 여전히 로젤린을 향해 예의상의 미소조차 지어 주지 않았다.
로젤린도 로젤린답게 아랑곳하지 않고 사교적인 미소를 띤 채, 우아하게 칼시온과 셀리나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뵙는 얼굴인데, 잘 지내시는 듯 보여 마음이 놓입니다. 그쪽의, 동행도.”
“왜 이제 와서 이름도 모르는 척하고 그러세요.”
셀리나는 똑같이 미소 지으며 지지 않고 받아쳤다.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로젤린도 미소를 지우지 않고 팽팽하게 맞섰다. 두 사람 모두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조금만 더 했다가는 둘 사이에 불도 붙을 것 같았다.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젤린 양도 여기 계셨네요?”
그때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셀리나는 곧 이어질 일대다수의 난투를 머릿속에 그리며 전의를 다졌다. 이 시점에 끼어드는 것은 로젤린 편이 아닐 수 없었다.
“리렐이라 합니다. 작년 개국 파티에서 인사드렸었는데,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어요.”
처음 등장한 인물이다. 이름도, 얼굴도 낯설었다.
셀리나는 칼시온의 팔을 끌어안은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마차 안에서부터 그렇게 연습하던 ’그 대사’를 드디어 실전에서 쓸 때다!
“리렐 영애. 만나서 반갑군.”
칼시온의 굵은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리렐은 황홀한 듯 어깨를 부르르 떨며 들고 있던 부채로 목덜미를 쓸었다.
셀리나의 눈썹이 불쾌함으로 휘었다.
‘어쭈, 이게.’
방금 전 저 행동은, ’흥분돼요’라는 의미였다.
칼시온이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혼잣말하듯 그냥 막 던진 모양인데, 하필 연인이라는 이름하에 동행한 셀리나의 앞에서 이 짓이라니. 설령 다 알아듣는 걸 전제로 장난을 친 것이라 해도 결코 웃어줄 수 없는 도를 넘은 장난이었다.
함께 배운 칼시온도 리렐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 무시로 일관했다. 일일이 상대해 줄 정도의 수고마저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쪽은 셀리나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동행이지만 앞으로도 쭉 동행할 예정이니 잘 지냈으면 좋겠군.”
칼시온은 연습한 그대로 줄줄 외웠다. 틀린 말도 없고 거짓말도 없다. 연기가 섞이지 않으니 누가 들어도 자연스러운 소개가 되었다.
물론, 한 번 더 꼬아 듣는 사교계의 터줏대감들에게는 이 말이 곧 ’나 얘랑 연애한다’로 들릴 것이다.
“셀리나예요.”
칼시온의 소개를 넘겨받아 셀리나도 한 마디 했다. 리렐의 무례한 제스처에도 생긋생긋 웃는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리렐이 새침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그렇지, 알아볼 리가 없지’라는 의기양양함이 담겨 있었다.
셀리나는 답변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팔짱 낀 칼시온의 팔뚝 위를 새끼손가락 끝으로 살짝 쓰다듬고는, 뺨을 감싸는 척 그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 건드렸다.
제스처에는 제스처로 답한다.
‘내 거야.’
라는 의미였다.
절대 알아들을 리 없다고 무시하고 있던 리렐은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비웃음이 무색해져 버렸다.
“어머나, 이게 누구신가요. 렌버드 공작 각하 아니신가요.”
한 명이 물러나니 또 한 명이 달라붙었다.
리렐은 한번 밀리고서는 슬그머니 발을 뺐다. 그 자리에 또 한 명이 새로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이쪽은 셀리나다. 앞으로도 계속 동행으로 모습을 보일 예정이니 잘 지내길 바란다.”
“각하의 동행이라니, 너무 좋으시겠어요.”
“제가 좋을 일인가요? 각하가 아니라?”
“각하의 동행을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반면에…… 셀리나 양의 동행을 바라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있기는 할까?”
“중요한 건 각하가 저한테 부탁하셨다는 거죠. 얼마나 매달리시던지.”
“그 마음이 영원할 거라 너무 믿지는 말아요. 남자들은 다 똑같으니까.”
다행히 사람들은 칼시온이 셀리나를 대동했다는 사실 하나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셀리나가 우려하던, 얼마나 현실적인 연인같이 보이는지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칼시온은 내내 셀리나만 바라보며 뻣뻣하게 형식적인 인사말 한마디만 던졌다. 날아오는 비수를 받아치며 처리하는 것은 셀리나의 몫이었다.
‘지친다, 지쳐.’
하나하나를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벼랑 끝에서 한 명씩 적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줄이라도 세워 번호표를 나눠 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중 누가 셀리나에게 암살자를 보낼 만큼 증오에 불타는지를 알아보아야 하니 대충대충 상대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나올 때까지 들이파야 하는 체력싸움이었다.
슬슬 볼에 경련이 날 것 같을 즈음, 입구의 시종들이 절도 있게 자세를 잡으며 문 앞에 모여 섰다.
사람들도 자연히 입을 다물고 문 쪽을 집중했다.
홀을 지나 저 끝쪽에 있는 단상까지 긴 카펫이 깔렸다. 짙은 남색 비단에 반짝이는 세공을 넣은 카펫이었다.
“아, 이제 왕족들 등장하는 건가요?”
“그렇지.”
“정말 주인공답게 등장하네요.”
문 앞에 자리한 시종이 목을 가다듬었다. 사람들이 들어올 때마다 가문명을 호명했던, 그 목청 좋은 시종이었다.
“왕비 전하와 공주 전하 듭십니다!”
닫혀 있던 문이 양 옆으로 활짝 열렸다. 때맞춰 악기 연주자들이 우아한 음악을 연주했다.
열린 문틈으로 등장한 제리엘 공주는 왕비의 손을 잡고 결혼식에 입장하듯 한 발 한 발 카펫을 밟았다.
파티장의 전원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 가운데를, 새하얀 겹겹의 투명한 원단과 수없는 레이스로 장식한 드레스를 입은 제리엘 공주가 걸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밟고 나아가는 빛나는 별 같은 모습이었다.
오늘을 위해 얼마나 준비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당장 죽을 것처럼 얘기하더니, 이런 거 준비할 여력 있으면 도망가 살 집을 짓겠다.’
셀리나는 속으로 불만을 중얼거리며 단상에 거의 다다른 제리엘 공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주와 왕비가 들어오자 시종들은 다시 문을 닫았다. 더 이상 들어올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셀리나가 칼시온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와요?”
“국왕 전하는 이런 곳에 드나들 여력이 안 되시지.”
“왜요? 바빠서요?”
“작년부터 치매기가 심해지셨거든.”
“앗.”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어쩐지 왕비는 급하고 왕세자는 나대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왕이 아예 죽어버린 것도 아니고, 오락가락 하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러다 어느 날 홱 돌아 엉뚱한 사람에게 왕좌를 넘겨 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 지금 국정은 누가 보는데요?”
“라센 왕세자와 왕비가 적당히 나눠 하고 있어. 왕세자는 대외적인 일, 왕비는 궁 내부에 관련된 일.”
“그 정도면 그냥 왕세자가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성격이 별로라 적이 많아.”
“…….”
셀리나는 잠시 복잡한 마음으로 칼시온을 바라보았다.
“왜. 뭐.”
“……아뇨. 우리 공작님은 성격이 참 좋으셔서.”
칼시온은 인상을 찌푸림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스스로도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라는 건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왕세자는 그냥 성격이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잔인해.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지.”
“아아…….”
그제야 셀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사람한테 화 좀 잘 내고 성질 잘 부리는 수준의 나쁜 성격이 아니라, 행동과 사고방식이 문제인 타입이었다.
“여차하면 사람 목 날려 버리고, 피 보면서 웃는 타입인 거예요?”
“……거기까진…….”
칼시온이 당혹스러워하며 셀리나를 돌아보았다.
“그쪽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이 많나?”
“……아뇨, 있긴 있겠지만 저도 얘기로만 들은 거라…….”
“굉장하군, 이쪽은 아직 그 정도의 폭군은 없었어.”
“이겨도 명예롭진 않네요.”
왕세자는 아이렐과 밀접한 연결고리는 없지만 칼시온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유력한 용의자다. 범인을 탐색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와 마주칠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물 대신 피 뽑아 먹고 내장 뽑아 줄넘기하는 놈은 아니라 하니, 다행이었다.
“그럼 왕세자도 오늘 안 나타나려나요?”
“가장 늦게 등장하겠지. 셋이 손 붙잡고 나란히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왕비가 왕세자 겁내는 건 알겠는데, 왕세자는 왜 그래요?”
“거슬리는 걸 못 참는 성격이라. 이름뿐이긴 하지만 공주가 후계 서열 2위니까 꼴도 보기 싫겠지.”
“이름뿐인 것치고는 꽤 잘 지내는 것 같은데요. 오늘 저 차려입은 것도 그렇고.”
“아직 궁의 내부 예산은 상당부분은 왕비가 쥐고 있으니 이럴 수 있지. 겸사겸사 이렇게 재산도 빼돌리는 거고.”
“아하.”
파티용이라는 명목하에 사들인 물건을 어딘가에 쟁여 놓으면, 그건 그것대로 재산이 된다. 언제가 될지 모를 먼 미래를 대비해 왕비 쪽도 살 궁리를 열심히 하는 중이었다.
칼시온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단상 위에 오른 왕비와 공주가 착석했다.
중간에 왕좌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 왕비와 왕세자의 의자가 자리했다. 왕비의 옆이 공주의 자리였다.
시간은 되었지만 단상 위의 자리는 아직 반밖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왕족이 등장했으면 행사는 바로 진행되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자연히 음악이 바뀌고 홀 가운데에 공연단이 들어와 공연을 시작했다. 행사를 위한 공연이 다 그렇고 그렇듯, 점잖고 지루했다.
행사의 일부니 생략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모두가 즐겁게 하면 위엄이 떨어지니 그럴 수도 없는. 그래서 그냥 무조건 진행에 의의를 두는 공연이었다.
셀리나는 벽에 기대 서서 건성으로 행사 진행을 지켜보았다. 먼 발치에서 내다본 귀족들도 비슷했다.
“이 공연은 언제까지 계속돼요?”
“글쎄.”
“지루해 죽겠네요.”
“곧 끝날 거야.”
“이거 끝나면 본격적으로 춤추고 노는 시간이라고 했던가요.”
사교 모임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누가 누구랑 춤을 추었네, 누가 신청을 거부했네, 내가 이 사람과 춤춰 보라 소개를 해 주겠네, 이런 사소한 대화들이 모두 연결고리가 되어 서로를 묶는 것이다.
“서로 안 뺏기게 신경 곤두세워야겠네요.”
어차피 절대 지지 않을 거면서도, 셀리나는 괜히 엄살을 떨며 칼시온의 팔을 꽁꽁 끌어안았다.
칼시온의 말대로 공연이 끝나자 춤곡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서서 춤을 추는 사람들은 없었다.
‘분위기 보나?’
그렇다기에는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단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비가 자리에서 우아하게 일어나더니, 옆에 앉은 공주를 가리켜 일어나게 했다.
“오늘은 내 몸이 좋지 않아 공주가 대신 첫 춤을 추겠소. 안타깝게도 왕실의 남성이 모두 자리하지 않아 이를 대신할…….”
거기까지 들은 칼시온과 셀리나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왕비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정신없이 사람들 틈을 뚫고 도망갔다.
방심했다가 큰일 날 뻔했다.
첫 춤은 이 파티를 개최한 왕족의 일원들이 추는 걸 깜빡했다. 왕세자가 있었으면 왕비든 공주든 추고 끝냈겠지만, 그가 없는 이상 누구랑 추든 마음대로였다.
자기 발로 멀쩡히 입장한 왕비가 갑자기 몸이 좋지 않다며 공주에게 첫 춤을 미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칼시온을 콕 찝어 놓은 것이다.
노는 분위기에서 춤 신청이 들어오면 공주든 왕비든 칼시온이 거절하고 셀리온이 방어하면 그만이지만, 이렇게 공적인 분위기에서 그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규칙이라는 이름에 매이면 거절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이 얽혀 버린다.
파티장 중앙 홀을 벗어나서도 겁이 나 회랑을 따라 한참을 뛰었다.
“헉, 헉……, 이 정도면 공주도 못 쫓아오겠죠?”
셀리나는 오랜만에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칼시온을 회랑 기둥 뒤에 숨겼다. 파티장 입구의 불빛이 손톱만큼 작아질 정도로 멀어졌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십대의 집요함은 함부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파티장의 음악이 끊이지 않는 걸 보니 칼시온을 찾다 찾다 다른 사람을 골라잡은 모양이다.
셀리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이전 파티에서는 공주가 춤추자고 한 적 없…….”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셀리나는 그제야 자신이 칼시온의 멱살을 잡고 기둥에 밀어붙인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만 그랬고, 파티장의 동태를 살피느라 밀어붙인 몸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지금은 자신의 몸으로 칼시온의 몸을 찌그러트리고 있었다.
밀리고 밀린 칼시온은 두 팔을 벌린 채 셀리나를 안은 것처럼 엉거주춤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셀리나가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쳐버렸다.
자석이 거리를 떼어놓아도 저절로 따라가 붙어버리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인력이 있다.
더 가까워지지는 않았지만 아무 일 없던 듯 밀치고 멀어지는 것도 힘든, 인력이 작용하는 거리에 두 사람은 묶여버리고 말았다.
가슴에 바위를 얹은 것처럼 가늘게 이어지는 호흡만 반복하는 동안, 칼시온과 셀리나는 서로의 눈과, 코, 입을 응시했다.
밤의 빛은 낮의 빛보다 신비롭다.
각자 다른 서로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깊게 느껴졌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빨려들어갈 것처럼.
칼시온의 가슴 위에 놓인 셀리나의 주먹에 어느샌가 모르게 조금씩 더 힘이 들어갔다. 엉거주춤하게 벌어졌던 칼시온의 손도 언제인지 모르게 셀리나의 등과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때 파티장에서 박수 소리가 스며나왔다.
외부의 잡음이 두 사람 사이의 인력을 느슨하게 했다.
“아, 이제, 춤. 끝났나 봐요.”
셀리나는 아침에 막 눈뜬 사람처럼 화들짝 몸을 떼어냈다.
“그렇, 군.”
“그, 이제. 들어가도 되겠죠?”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았는데 괜히 말을 더듬게 되었다. 칼시온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칼시온도 시선을 빗기고 있었단 사실을 알지 못했다.
셀리나는 괜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어, 여긴 붙어 있는 정원인가 봐요. 아, 미로정원인가? 공기도 좋은데 여기 산책 좀 하다 들어갈까 봐요.”
“위험해.”
“아, 맞네……. 그럼 이만 들어가요.”
걸을 때는 앞만 쳐다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파티장에 돌아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두 분이 어딜 갔다 오신 건가요? 이제 막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 인사를 드리려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당황했답니다.”
머릿속에서는 아직 당황으로 흔들리는 칼시온의 회청색 눈동자가 잔상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지만, 셀리나는 얼른 정신을 다잡으며 웃음 지었다.
몇 명인가를 걷어내고 춤이라도 좀 추면서 쉬었다 올까 고민하는 찰나, 한 비쩍 마른 남자가 다가왔다.
나이 지긋한 남자는 낡은 행색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움츠러들고 초라해 보였다. 얼굴 전체에 그늘이 진 사람이었다. 다들 조금이라도 더 화려하고 생기 있어 보이려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몹시 이질적이었다.
뭐 하는 사람인지 감을 잡지 못한 셀리나는 긴장해야 할지 태도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사이 다가온 남자가 칼시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칼시온이 그를 알아보고 얼굴을 굳혔다. 셀리나가 들이대거나 연기를 시키지 않는 이상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잘 지내셨습니까.”
“그대는 어땠는가.”
“각하의 안배로 잘 지냈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던 남자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씹던 음식을 뱉듯 겨우 다음 말을 이었다.
“……자식을 보내는 게 그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말로 이 남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지온 남작.
아이렐 영애의 아버지였다.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잠시 시간을 좀 내어 주십사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사실상 셀리나에게 하는 부탁이었다.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했으니 칼시온의 동행임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원래는 자신의 딸이 있어야 할 곳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달가울 리가 없다.
“저는 저쪽 테이블 가서 뭐 좀 먹고 있을게요. 슬슬 출출하네요.”
칼시온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장 밖으로는 나가지 않도록 해. 아무리 경비병들이 곳곳에 있어도 궁은 오히려 길거리보다 눈이 닿지 않는 곳이 더 많아.”
“그럴게요.”
껄끄러운 기분을 안고 셀리나는 자리를 피했다.
다과와 술이 올려져 있는 테이블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곳곳에 이런 테이블들이 있어 한 테이블에 사람이 몰려 있진 않았다.
셀리나는 적당히 사람이 없는 곳에 서서 투명한 분홍빛 액체가 든 술잔 하나를 들었다.
칼시온은 지온 남작과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랑이 오간 결혼은 아니고, 조건과 조건의 만남이었으니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어도 그 후에 정리할 것이 많을 것이다.
사건이 터진 직후 장례를 치르며 이미 한 번 정리를 끝내고 미옹을 떠났겠지만 불과 몇 달 만에 모든 것이 다 끝날 리는 없었다. 남은 가족들이 추후 정리를 하다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을, 이렇게 얼굴 마주친 김에 이야기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한때 공작의 장인이 될 뻔했으나 이제는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된 지온 남작으로서는 칼시온에게 만남을 청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셀리나는 술을 한 모금 홀짝였다.
“음?”
술이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이 세계 와서는 술을 입에 댈 일이 거의 없었다.
술이 일상적으로 보이는 곳도 아니었고, 칼시온도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식전주로 한 잔 정도 하는 것이 끝이었다.
저절로 청정한 몸이 되어가고 있던 셀리나의 입에 닿은 술은, 신이 내려주신 이슬처럼 맛있었다.
“도수가 낮은 것 같지는 않은데…….”
독한 술 특유의 매캐한 알코올 향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입안 가득 퍼지는 향긋한 꽃냄새와 혀끝을 도는 삼삼한 맛이 더 컸다.
그렇다고 향이 지나치게 강하지도 않았다.
“음, 진짜 괜찮은 술이네.”
과연 왕실 파티에 내놓을 만한 술이었다. 그런 술을 왕이 한 잔 한 잔 하사하는 것도 아니고, 대충 먹는 싸구려 와인처럼 사방에 깔아 두다니.
셀리나는 감탄하며 술잔을 손목으로 빙빙 돌렸다.
“술이 입에 잘 맞으시나 봅니다.”
그때 한 남자가 접근했다. 셀리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술잔을 빙빙 돌린 채 초점 없는 눈으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에.”
일단 들이대고 보자 주의의 어중이떠중이들은 언제나 있다. 이런 놈들은 상대해 주고 있으면 끝이 없다. 최선의 답은 벽을 세우는 것이다.
칼시온의 곁을 떠난 순간부터 주변을 빙빙 도는 남자들은 떠나지를 않았다. 이런 류의 남자들은 아예 무시해 버리면 더욱 달라붙으려 집요해지는 특성들이 있었다.
“왕실 파티 때마다 나오는 술은 대개 훌륭하지요. 이번 술은 화이텐 지방에서 생산된 특수 품종의 열매를 섞어 넣어 그 향기가 더 짙다고 합니다.”
묻지도 않은 지식 자랑은 기본이다.
“그렇군요.”
“이 술의 향기는……, 레이디의 아름다운 외모에 걸맞은 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멀리서 바라볼 때부터, 제가 레이디에게 취한 것인지, 술에 취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더군요.”
감동적이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 시 같지도 않은 시적인 표현도 덤이다.
“어쨌든 취하셨으면 곱게 가서 쉬세요.”
“예, 적당히 쉬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만, 제게 감히 레이디라는 아름다운 꽃과 함께 휴식을 취할 영광을 주실 수 없겠습니까?”
“없어요. 안녕히 가세요.”
이럴 때 잘 거절하는 방법도 자넷 부인이 달달 외울 정도로 가르쳐 놨지만, 셀리나는 그것들을 머리에서 싹 지웠다.
귀부인들과 영애들한테는 말꼬투리 하나 잘못 잡혔다가는 사교계 생활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 신경을 써서 대처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 이들에게서 아이렐에 관한 괜찮은 정보가 나올 거란 기대도 되지 않았다.
정보란 최소한 타인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주워 모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칼시온의 곁에 있던 것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들한테 기대할 정보는 없었다.
셀리나의 칼 같은 거절에 남자는 비틀비틀 물러났다.
“이, 이런 거절 처음이야……!”
울겠다. 셀리나는 혀를 차며 쓸데없는 놈 때문에 낭비한 자신의 목을 술로 달랬다.
“아름다운 꽃에는 벌들이 꼬이기 마련이지요.”
“파리도 같이 꼬이나 봅니다. 아름다운이 아니라 향기로운. 아무튼 전 꿀 빨리기 싫어요.”
“아, 예…….”
이렇게 또 퇴치.
“가시 돋친 꽃이 더 매력적인 법이지요. 레이디께서는 자신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듯합니다.”
“네, 가시 없어도 전 매력적이거든요.”
“이런, 그럼 제게는 그 가시를 거두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쪽 같은 남자 때문에 붙여놓은 가시인데요.”
다시 한 번 또 퇴치.
여자들에 비하면 훨씬 쉽고 명료했다. 안 듣는 척 주변에서 훔쳐 듣던 사람들이 숨어서 키득키득 웃었다.
“어쩜, 그렇게 깔끔하게 거절을 하시나요. 보다 보니 너무 재미있어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네요.”
그중 한 명이 웃으며 셀리나에게 다가왔다.
이건 순수한 호감일까, 또 다른 도전일까. 셀리나는 속으로 계산기를 돌리며 웃음으로 상대를 맞았다.
적당한 차림새, 적당한 외모.
이제 드레스만 보아도 어느 정도의 가문인지 대충 알아맞힐 정도는 되었다.
굳이 등급을 나누자면 피오넬 정도는 되지 않을까. 로젤린처럼 꼭대기에 속하지는 않지만 제 나름대로의 패거리를 가지고 있는 정도.
셀리나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친해져도 나쁠 것 없어 보였다.
“실례를 용서하시길, 저는 로일 가문의 비오렐이라 한답니다.”
“셀리나입니다. 렌버드 공작님의 동행으로 왔어요.”
“물론 알고 있지요. 아까 그렇게 화려한 등장을 했는데 못 알아볼 수가 없지요.”
“중간에 사고가 있어서 부득이하게 그리 등장하게 되었네요.”
“저런. 그래도 그게 오히려 멋진 인상을 남겼으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말아요. 나쁜 기억은 술로 잊는 것도 좋지요. 한잔할까요?”
비오렐은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셀리나에게 잔을 들어 보였다.
아직까지 신경을 긁는 소리는 없었다.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은 조금 더 지켜보고 내려야겠다.
셀리나는 함께 잔을 들어 화답했다.
그때 양 옆에서 불쑥불쑥 잔을 든 손들이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같이 잔을 부딪쳐 건배하게 되었다.
건배를 한 번 하니 금방 친해진 것처럼 사람들이 뭉쳤다.
“이번에 저희 집의 백마가 새끼를 낳았답니다! 어찌나 귀엽던지.”
“축하드려요!”
여느 모임에서 그러하듯 사소한 이야기들도 나왔다. 새끼 말을 위한 건배가 다시 한번 이루어졌다.
“이렇게 큰 파티는 오랜만인 것 같죠? 덕분에 평소에 잘 못 뵙던 분들을 뵙게 되니 너무 좋네요.”
“반가워요! 그런 의미에서 건배 한 번 더 할까요?”
다시 한 번 잔들이 부딪힌다.
셀리나는 잔을 입에 대고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비오렐을 주축으로 모인 사람들은 연거푸 술을 넘기는데 열심이었다.
‘아하, 주당 모임.’
술 잘 먹어봤자 좋을 것도 없는데 꼭 자부심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 더 많은 알콜분해효소와 싱싱한 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은 사람들.
셀리나는 입술 위에서 잔을 굴리다 천천히 기울였다. 잔이 기울어지는 각도에 사람들의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셀리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시원하게 한 번에 들이켰다. 순간 동그래진 눈알들에 다시 한 번 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셔 주지 뭐.’
셀리나의 주량은 측정 불가였다.
이전 세계에서도 셀리나의 주량은 워낙 유명했다. 본인이 술을 즐겨 먹거나 먼저 찾지는 않지만, 먹으면 끝도 없이 들어갔다.
“잘 드시네요. 하지만 독한 술이니 조심하시는 것이 좋아요.”
“염려 감사해요. 너무 맛있어서 그만.”
“그래도 한 번에 넘길 수 있는 것 자체가 잘 마신다는 증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다시 한 번 건배할까요?”
셀리나는 새로 받은 잔을 다시 한 번 높이 들어 올렸다. 막 술을 삼키려는데, 비오렐이 호쾌하게 외쳤다.
“반가우니 한 번에 다 마시죠!”
안 좋은 것들은 이 세계나 저 세계나 똑같다. 분명 반갑지 않은 요청일 테지만 비오렐의 말이기 때문에 다들 웃으며 따랐다.
독한 술 한 잔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시종 하나가 아예 술병을 들고 곁에 자리를 잡고 서 있다가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다시 잔이 채워지자, 몇 마디 오가지도 않고 또 누군가가 건배를 외쳤다.
“그거 아세요? 잔의 바닥을 상대에게 보이는 건, 내 마음 밑바닥까지 당신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랍니다.”
그냥 마시는 술에 별 의미를 다 갖다 붙인다. 사람이 취하면 밑바닥까지 드러나는 건 맞지만, 그게 진심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렇군요. 이럼 제 마음도 밑바닥까지 잘 보이시려나요?”
셀리나는 또 훌쩍 술을 들이켜고 비오렐을 돌아보았다. 벌써 몇 잔이 들어갔는데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방금 파티장에 들어선 사람 같았다.
“그 마음에 답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렇게 또 비오렐이 한 잔.
비오렐이 한 잔 하니 주변 사람들도 또 한 잔씩.
주변 사람들이 흘끔거릴 정도로 빠르게 술잔이 넘어갔다.
한 사람 한 사람 쓰러져 업혀 가거나 휴게실로 도망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워낙 독주였는 데다 빨리 마셔서 다들 신속하게 취기가 올랐다.
“잠시만, 웁……!”
“시이일례에에합니이이다아아!”
“저는 언제나 독주를 좋아하는데요, 이게 취할 때도 깔끔하게 취하고 깰 때도 깔끔하게 깨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왜 치즈는 나이프로 자를까요? 생각해 보면 포크나 스푼으로도 자를 수 있잖아요. 왜 나이프로 자를까요? 제가 정말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은데, 제가 언제나 독주를 좋아해요. 독주 안주에는 치즈가 딱이죠. 근데 왜 치즈는 나이프로 자를 거라 생각하세요? 저 지금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독주를 좋아해요. 취할 때도 깔끔하고, 깰 때도 깔끔해서. 그런데 치즈 있잖아요.”
아무리 격식 차리는 파티장이라지만 취객은 앞뒤가 없다.
각양각색의 주정을 선보이는 사람들을 한발 물러서 바라보며, 셀리나는 같은 속도로 술잔을 기울였다.
비오렐은 이미 어디론가 도망가서 보이지도 않았다. 남은 것은 빌빌거리다가 시종들의 손에 끌려나가는 패잔병들뿐.
“다들 좀 즐겁게 노실 줄 알았는데 체력들이 안 좋으신가.”
셀리나의 여유로운 한마디 말이 승리를 확정지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내심 셀리나가 술에 취해 실수하기를 바라며 지켜보던 적대세력들은 경악했다. 이 동네 유명한 주당들이 한 명씩 셀리나의 손에 고이 승리를 쥐여 주고 퇴장했다.
제각기 잘난 귀족들이어도 그중에서 무리를 형성하는 대장격인 사람이 몇 있었다. 로젤린, 피오넬도 그중 하나였고, 셀리나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처럼 비오렐도 그중 하나였다.
살롱에 끼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리에 끼어드는 것도 초반엔 수모를 좀 겪어야 했다. 그게 아니면 기꺼이 무리에 초대받을 만한 무언가를 본인이 손에 들고 있어야 했다.
셀리나의 경우는 모든 것이 이도 저도 아니었다.
렌버드 공작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가지고는 있는데, 연인이나 약혼녀로 공식 발표를 한 것도 아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이용하려나 했는데 말을 타고 등장할 만큼 털털하다. 평민이고 재정 상황도 확인할 수 없는데 자존심 세고 말발로도 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젠 주량으로 무찌르기까지.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히 구성되고, 그 흐름에 맡겨 흘러가던 사교계의 생태계에 파란이 일었다.
생태계 교란종의 출현이었다.
‘저걸 우리 무리에 끼워야 해, 말아야 해?!’
다들 계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머릿속 주판알이 덜그럭덜그럭 굴러갔다.
‘열심히들 계산해라.’
계산이 다 끝나면 누군가는 자신의 파티에 초대를 하겠지. 그래도 주당 모임의 초대장은 올 것이다. 그건 확신이 섰다.
다른 모임은 아직 미지수였다. 하지만 아직 파티는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으니 매력 어필의 기회는 아직 많이 있다.
‘저쪽 얘기는 아직 멀었나.’
셀리나는 칼시온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헉, 아이고.’
지온 남작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끼어들 타이밍이 아니었다.
이 와중 술을 너무 마셔서 슬슬 화장실 소식도 왔다.
화장실 가자고 칼시온을 끌어내기도 좀 그렇고, 혼자 가는 것도 단독행동이라 꺼려졌다. 하지만 칼시온 쪽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방광에는 자비가 없었다.
‘화장실이니까 파티장에서 멀지도 않을테고, 사람들도 계속 들락거리겠지.’
셀리나는 결국 혼자 파티장을 나서기로 했다. 지나가던 시종을 잡고 화장실 안내를 부탁하려는데, 하필 사방에 깔려 있던 시종들이 보이지 않았다. 급할 때는 꼭 이렇다.
시종이 보일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한번 의식하니 점점 더 급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찾아보자! 헤매다 보면 나오겠지. 정 안 되면 저기 미로정원도 있으니까.’
막 파티장을 빠져나가려는 셀리나의 앞에 피오넬이 불쑥 나타났다.
“뭐야, 누구한테 당했어? 졌냐? 울러 가냐?”
보는 사람 없다고 원래 말투로 쉴 새 없이 깐족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셀리나의 머릿속은 이미 화장실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피오넬을 스쳐 지나가 회랑으로 나서는데 거기까지 피오넬이 따라붙었다. 이렇게 조용히 당하고 있는 셀리나를 그냥 놓칠 수 없다는 의지가 보였다.
“그러게 왜 그렇게 나댔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그냥 집에 얌전히 돌아가……악!”
생각해 보니 피오넬은 여기에 익숙할 것이다. 얘가 직접 사람 죽일 인물이 아닌 것도 확실했다.
화장실 길 안내로 얘보다 좋은 사람은 없었다.
궁에 익숙하지, 얼굴 알지, 잘 보일 필요 없지, 만만하지.
셀리나는 피하려던 몸을 돌려 피오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잘 만났다. 조용히 얘기 좀 하자. 화장실로 따라와. 얌전히 따라오면 때리진 않을게.”
“너, 이, 이거 안 놔?! 너 내가 가만 가만 안 둘 거야!”
“그래 보든가. 가, 가서 얘기해.”
언제나처럼 쉽게 열이 뻗친 피오넬은 셀리나의 술수에 덥석 걸려들었다.
“그래, 내가 오라면 못 갈 줄 알고? 놔! 이거 놔! 내 발로 가!”
셀리나의 멱살 잡은 손을 뿌리친 피오넬이 먼저 앞서서 화장실을 향해 쿵쾅쿵쾅 달려갔다. 훌륭한 길잡이였다.
셀리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피오넬을 따라갔다. 아무리 급해도 피오넬에게 화장실 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보다 화장실 가는 길은 멀고 복잡했다. 피오넬을 앞세우지 않았으면 가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정원행이었다.
회랑을 지나 건물의 다른 입구로 들어가서, 또 거기서 굽이굽이 복도를 지나고, 심지어 휴게실로 만들어 놓은 방 안쪽에 화장실이 있었다.
싸우려고 인적 드문 곳을 일부러 찾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보는 사람도 없이 편히 일을 볼 수 있게 됐다.
“됐냐, 이제 얘기 하지? 내가 전부터 얘기했지만, 너 진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것 같은데……!”
“기다려.”
셀리나는 피오넬을 내버려 두고 부리나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뭐, 뭐야. 뭐야, 저거?”
피오넬은 쾅 닫히는 화장실 문을 멍하니 쳐다보며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화장실 안내책으로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한 박자 늦게 떠올랐다.
“너, 너 지금 날! 이게 진짜 겁도 없이!”
“아, 시원하다.”
그새 시원하게 용건을 마친 셀리나는 개운한 표정으로 피오넬을 마주했다.
아까는 화장실이 급해 빨리 길이나 찾아갈 생각으로 잡았는데, 피오넬과는 할 얘기도 남아 있었다.
“저번 조언은 고마웠어. 네가 제일 나쁜 년은 아니라고. 그런 것 같네, 이렇게 화장실도 안내해 주고.”
“너 진짜 짜증난다. 어떻게 각하는 너 같은 인간을 주워오셨지.”
“특출난 돌은 길바닥에 굴러다녀도 줍게 되기 마련이지.”
“칭찬 아니거든. 뭣도 없으면서 눈에 띄는 건 이 세상에선 독이야.”
“왜 독인데?”
피오넬은 이번에도 또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야기해 줄 것처럼 굴다가도 결정적인 질문을 받으면 조용해져 버린다.
셀리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지금 이 태도까지 더해서, 이제는 확신이 섰다. 피오넬은 분명히 뭔가를 알았다.
“넌 어디까지 알고 그렇게 말을 해?”
“…….”
그렇게 독이 바짝 올라 바락바락 대들던 피오넬이 돌처럼 조용해졌다.
“너도 그렇고 로젤린도 그렇고, 심지어 왕비님까지 똑같은 얘기를 하더라?”
“…….”
“그러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
“너무 이상하잖아. 공작님이랑 관련된 사람들마다 다 나한테 죽을 수도 있다 한마디씩을 해.”
피오넬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하지만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는 긴장으로 굳어있다는 쪽에 가까웠다.
조금만 더 두드리면 뭔가가 나올 것 같았다. 셀리나는 기세를 몰아 피오넬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몸이 닿기 직전까지 바싹. 그리고 코앞에서 눈을 마주치며 낮게 속삭였다.
“왜 죽었는지 아니까 그런 소리들을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자살이었잖아. 거기까진 못 들었어?”
드디어 피오넬의 말문이 트였다.
“들었지. 그런데 사람이 그냥 죽어? 이유가 있으니 죽었을 것 아냐.”
“혼자 죽었는데 그 이유를 내가 어떻게 알아!”
“내 말이. 이유도 모르면서 내가 죽을 거란 소리는 왜 했어?”
피오넬의 입이 합 다물렸다.
셀리나는 자신을 향한 피오넬의 눈동자에서 조금 더 선명해진 두려움과 분노를 읽었다.
셀리나가 죽을 거라고 협박해 놓은 건 저면서 왜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것일까.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피오넬은 눈동자를 떨면서도 셀리나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난 분명히 경고했어. 나대지 말라고.”
그러고는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쓰듯 힘주어 말했다.
“그때 돈 많냐, 든든한 배경 있냐, 이런 말도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공작님이 내 돈이고 배경이야. 그럼 이젠 죽을 일 없는 거니?”
“그게 언제까지 갈 것 같아? 너 오늘 하는 거 보니 하늘 모르고 날뛸 기세던데.”
“그래야 나도 좀 자리를 잡지.”
“야.”
지금까지 구석에 몰려 움츠러들기만 했던 피오넬이 갑자기 목소리를 깔며 오히려 한 발 다가왔다. 늘 셀리나만 피오넬의 멱살을 쥐었던 것 같은데, 이번엔 거꾸로 멱살을 잡혔다.
“네가 죽든 살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야. 하지만 난 너 같은 것들 때문에 각하의 명예에 흠집이 나는 것도 싫고, 설령 죽어버린다 해도 각하의 기억에 남는 것도 싫어.”
“공작님 일은 공작님이 알아서 하겠지.”
“그러니까 네가 더 싫은 거야. 차라리 진심으로 각하를 사랑하기라도 하지 그랬어. 사랑도 없는 게 네 욕심만 챙겨 대다가 자빠져 뒤질까 봐, 그게 신경이 쓰이는 거거든, 나는.”
피오넬이 칼시온에게 진심이라는 건 알았다. 칼시온도 그걸 알기 때문에 피오넬에게 심하게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금 그 말은, 단순히 사랑하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의 질투가 아니었다. 셀리나는 재빨리 피오넬의 말에서 행간을 읽었다.
“아이렐은 무슨 욕심을 그렇게 챙겨 댔는데?”
정략결혼이었으니 칼시온의 돈을 욕심내는 건 당연했다. 셀리나를 처음에 거절했던 그 수많은 가게에 자리를 얻을 때까지 뻔질나게 다니고, 많이 사 모으기도 했겠지. 하지만 칼시온의 재정 상황을 봤을 때 그 정도의 욕심으로 죽음까지 연결될 상황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니가 뭐가 예쁘다고 내가 거기까지 말해 줘야 해? 아, 진짜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는데, 각하랑 엮여 있으니 죽으면 또 안 되고. 내가 죽겠네, 진짜.”
피오넬은 한숨을 푹푹 몰아쉬더니 셀리나의 어깨를 확 밀쳤다.
방심하고 있던 셀리나의 몸이 휘청 밀렸다. 그 틈에 피오넬은 쏜살같이 달아나 휴게실 문을 밀어젖혔다.
도망가 버리기 직전, 피오넬이 결국 고민을 끝냈는지 들릴 듯 말 듯 하게 한 마디를 남겼다.
“남자 조심해.”
“뭐?”
피오넬은 대답 대신 문을 열어젖혔다.
일부러 힘주어 닫은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떨어질 듯 울었다.
‘남자?’
뜻밖의 단어에 문짝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남자, 남자…….’
뭔가 닿을 듯 말 듯 했다.
셀리나는 휴게실 안을 서성거리며 생각을 더듬었다.
아이렐과 남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다.
소심하고 명랑하지 않았던 그 아이렐이, 남자?
‘남자 못 꼬셔서 안달이 났었죠.’
시중을 들 때마다 쥬나가 반복하고는 했던 아이렐의 험담이 떠올랐다.
들을 때마다 악감정이 느껴져, 어지간히 사이가 안 좋았구나 생각하고 넘기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저 악감정에 가장 명예에 손상이 갈 만한 욕을 한 것이 아니었나?
자넷 부인의 엄한 얼굴도 떠올랐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 할 겁니다.’
작은 삼각형이 그려졌다.
칼시온과 약혼을 하기로 되어 있지만, 그 덕분에 끼어들게 된 수도의 사교계의 맛을 알아버린 아이렐. 거기서 남자와 모종의 관계가 생겼을 수 있다.
어차피 애정 없는 정략결혼이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애인을 만드는 것이 흠이 될 수는 있어도 파혼사유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라 추측되었다.
그렇다면 그저 남자가 생긴 것보다, 더한 일이 생겨버렸고, 그걸 자넷 부인이 보다못해 죽였다?
방의 알리바이는 모두 자넷 부인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저질렀을 리가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이렐은 진짜 타살일 수도, 자살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방에서 죽어갔던 것은 사실이다.
자넷 부인이 그 현장을 목격했다는 전제를 두면 둘 중 하나로 좁혀졌다.
‘협조, 아니면 방관.’
타살이라면 범인이 아이렐을 죽이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했을 수도 있고, 오히려 도왔을 수도 있다. 아이렐이 진짜 남자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면 진심으로 치워 버리고 싶었을 테니까.
자살이었어도 마찬가지다. 죽어가는 아이렐을 그저 바라만 보며 잘 죽으라고 손을 흔들어 줬겠지.
“남자. 남자 얘기부터 털어야겠네…….”
앞으로의 방향이 정해졌다. 어디를 털어야 하는지 발견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마침 파티에 왔으니 아이렐의 남자 이야기에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알 마나님들과 조금 더 친해져야 했다. 자넷 부인은 언제든 볼 수 있지만 이 사교계의 귀하신 분들은 쉽게 뵙기 어려우니까.
한 가지 단서는 찾아냈다는 생각에 휴게실 문을 여는 셀리나의 손이 가벼웠다.
“자, 파티장으로 돌아가야지.”
여기저기 꼬불꼬불 오기는 했지만 음악 소리와 빛을 따라가다 보면 금방일 것이다.
“……어라.”
하지만 문을 열어젖히고 나온 복도는 아무것도 없었다.
음악 소리도, 빛도.
복도를 밝힌 벽의 등불만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렇게 멀리 왔었나?”
들어올 때와 달리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가는 시종조차 없었다.
인적이 끊긴 복도는 고대의 무덤처럼 침묵했다.
셀리나는 저절로 오그라드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한 발 한 발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 걸린 등불이 위태롭게 일렁였다. 이러다 불까지 꺼지면 그대로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캄캄한 복도, 보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야말로 사람 하나 죽어나가기 딱 좋은 곳 아닌가.
이제 막 사건의 단서를 잡았다고 좋아라 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갑자기 눈앞에 황천길이 펼쳐졌다.
“망할 피오넬. 이거 길 못 찾아 갈 것 알고 지 혼자 먼저 돌아간 거지?”
셀리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며, 걸음도 소리 내어 쾅쾅 걸었다.
그래 봤자 허세였다. 뒤에서 화살 한 방 쏘면 끝이다.
암흑 속을 더듬듯 걸어가니 보통 걸음보다 배는 느렸다. 하지만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저벅저벅 걸을 수도 없었다.
겨우 복도 끝에 다다르니 이번에는 양쪽으로 나뉜 갈림길이었다.
“어, 어느 쪽이지. 어디지.”
셀리나는 일단 몸의 안전을 위해 복도에 등을 붙이고 서서 조금이라도 노랫소리를 들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궁이라 그런가. 방음도 완벽했다.
아무 쪽으로든 감에 맡기고 일단 가 보려는 차, 복도 끝에서 사람 발소리가 들렸다.
셀리나는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시종인가? 아님 또 다른 화장실 손님?’
그도 아니면 암살자.
그때 복도 저 끝에 나타난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
“거기, 누구지.”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칼시온의 목소리가 얼음동굴이라면 이 남자는 뜨거운 햇빛을 피해 들어간 시원한 동굴이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복도 끝에서부터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셀리나는 반색하며 남자쪽으로 다가갔다.
“아, 저는……!”
남자도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가 먼저 셀리나의 화려한 행색을 발견했다.
“파티에 오신 분입니까.”
“아, 네, 맞아요!”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여기까지는 파티 손님들이 올 장소가 아닌데.”
남자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셀리나는 흐린 불빛에도 빛바래지 않는 남자의 외모에 놀라 입을 벌렸다.
“어…….”
칼시온과 비교해 절대 뒤지지 않는 날렵하고 단단한 체격, 매끄러운 턱선, 그윽한 눈매, 부드러운 입술. 노랗게 익은 곡식이 가을 태양에 일렁이듯 찰랑거리는 금발, 그리고 그 태양이 떠 있는 하늘같이 반짝이면서도 깊은 푸른 눈동자까지.
칼시온도 외모로만 따지면 인간미 없다 평할 정도로 완벽했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잘생길 수 있지? 감탄이 나오는, 감정을 일으키는 외모였다.
사실 이 남자 만나려고 차원이동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누구에게나 로맨스를 만들어 주는 외모. 무슨 짓을 해도 로맨스에 당위성이 생기는 외모란 이런 것을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셀리나의 멍한 표정에, 남자는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예! 괜찮아요! 길을 잃어서 복도를 헤매다가 무서웠는데, 다행히 나타나 주셔서…….”
셀리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남자의 물음에 대답했다.
온 세상의 잘생긴 사람은 모조리 보았다 생각하고 살았는데, 역시 우주급으로 올라가니 그 이상이 존재했다.
“아아. 그랬군요. 파티장은 여기서 반대 방향으로 한참 떨어져 있습니다.”
반대 방향이었구나. 어쩐지 가도 가도 끝이 없더라니.
“어쩌다 여기까지 오시게 된 겁니까?”
“화장실을 왔다가……, 올 때는 급해서 막 왔는데 막상 돌아가려니 같이 온 사람이 사라져 버렸네요.”
“그랬군요. 궁은 처음입니까?”
“네, 이번이 처음이라…….”
“처음이신 분들은 종종 헤매고는 하지요. 이쪽 말고 파티장 안에도 화장실이 있으니 시종에게 그쪽을 안내받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역시나. 피오넬은 그 와중에도 엿을 먹인 것이었다.
뒤늦게 한 방 먹은 것을 알았지만 크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어차피 얻어낸 것도 있고, 겸사겸사 이런 미남도 만나게 되었으니까.
“파티장 근처까지는 모셔다드리도록 하지요.”
“아……, 파티에 가시는 분이 아닌가 봐요. 궁에서 일하시는 분?”
남자는 화사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일이 늦어져서 아직까지도 일을 하고 있었네요.”
“일만 하시고 파티는 안 가세요? 오늘 파티는 웬만한 귀족은 다 초대받았다고 하던데…….”
“저도 이제 파티장에 가 볼 생각이었습니다. 준비를 하려고 방을 나서다 레이디를 발견하게 되었군요.”
남자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미궁 같은 복도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저 멀리 빛나는 파티장과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신없이 걷던 회랑의 끝부분이었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실 수 있겠지요?”
“네, 여기부터는 아는 길이네요. 어, 그런데 지금 파티장 가시는 길 아니었어요?”
“저는 준비를 하고 찾을 생각입니다. 아직 건국제의 메인 행사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시작할 때 했던 공연이 다가 아니었나 봐요.”
“그럼요. 아직 한참 남아 있을 테니, 모쪼록 끝까지 남아 즐기다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남자는 꼭 자신이 파티의 주인인 것처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셀리나는 모처럼 힘들게 익힌 인사법을 제대로 쓸 상대를 만나 기뻤다.
“네, 감사해요. 덕분에 큰일 없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됐어요.”
“저도 레이디를 도울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완벽한 예의 바름으로 무장한 남자는 셀리나의 손에 가볍게 키스하고 몸을 돌렸다.
셀리나는 잠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 자신도 몸을 돌렸다.
올바른 얼굴만큼 성격도 올바른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사람들은 만나자마자 통성명부터 하는데 남자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셀리나의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깜빡했나 보지.’
셀리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남자에 대한 생각은 곧 돌아온 파티장의 화려한 시끌벅적함에 잊혔다.
“셀리나!”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칼시온의 음성이 쫓아왔다.
“아, 공작님.”
“어딜 갔던 거야. 궁 안도 위험하다 했잖아!”
셀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시온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 놀란 기색이었다.
“아……, 죄송해요. 잠깐 화장실에……. 가는 길에 피오넬을 만나서 화장실까진 같이 갔어요. 오는 길에 길을 잃어서 조금 늦어졌지만.”
“피오넬을 끌고 나가는 것까진 봤어.”
“그런데 뭘 걱정하고 그러세요.”
“피오넬이 혼자 돌아왔잖아. 그 뒤로 한참 시간이 지나도 그대는 보이지를 않고.”
셀리나가 웃으며 다독여도 칼시온의 추궁은 끝나지 않았다. 궁 안은 그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수 없는 곳이라 그런가. 평소보다 더 예민했다.
복도에서 헤매기는 했지만 셀리나가 파티장을 비운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술을 들이켜던 시간이 훨씬 길었다.
셀리나에게 이목을 집중하던 사람들도 다 알았다.
덕분에 칼시온은 잠시도 셀리나를 곁에서 떼어놓지 못하는 남자가 되었다. 피오넬이 일부러 먼 화장실로 데려가 헤매게 만든 덕을 보았다.
셀리나는 생긋 웃으며 애교스럽게 칼시온의 가슴에 안겼다.
“아이, 걱정하셨어요?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게 하시면 어떡해요. 그렇다고 화장실까지 공작님이랑 갈 수는 없잖아요.”
“같이 가, 그냥.”
“몰라아.”
장난스럽게 가슴을 두드리면서 셀리나는 진심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그는 셀리나의 신변만 생각해서 채근하는 것이었지만, 숨겨진 사실을 빼고 행동만 보면 잠시라도 연인과 떨어질 수 없어 안달 난 남자처럼 보였다. 본인조차 모를 그 사실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아예 옆에 매달고 다니시지 그러세요? 저만 따로 떼어 놓은 공작님 잘못이에요.”
“하……. 지온 남작과는. 아무래도 입장이 있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이제 절대 단독행동은 하지 말도록 해.”
“네에, 네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쫑알거리는 정부인지 연인인지와, 그것에 껌뻑 죽어 매달리는 북부공작. 그를 이렇게 길들이고야 만 셀리나에겐 앞으로 세기의 요부라는 별명까지 예정되었다.
‘요부 딱지 붙으면 남자들이 더 달라붙으려나.’
복도에서 떠느라 날려 버리고 있던 남자 조심히라는 피오넬의 말이 다시 한번 생각의 표면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 그 남자도 남잔데. 그 남자도 조심해야 했나.
공포에 질린 상황에서 구해 준, 백마 탄 왕자님 같은 남자가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해서 이성을 놓아버렸다.
“아, 아까 복도에서요…….”
칼시온에게도 이 얘기는 미리 해 둬야겠다 싶어 막 입을 여는데, 시종들이 수군수군 몰려들며 장내의 분위기를 환기했다.
“왕세자 전하 드십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왕세자가 등장을 안 했다. 왕은 치매에 걸려 불참일 테니 왕세자까지만 오면 끝이다.
무심결에 등장하는 왕세자에게 시선을 던지던 셀리나의 입이 다물렸다.
셀리나의 말을 귀기울여 듣던 칼시온이 끊어진 말을 보챘다.
“복도에서 왜.”
“저 남자.”
“……왕세자?”
“만났어요.”
셀리나는 복도에서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는 왕세자를 바라보는 눈을 떼지 못했다.
“……왕세자라고요? 아니, 왕세자겠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복도에서 저 남자를 만났는데, 길을 헤매는 걸 저 남자가 도와줬어요.”
“왕세자가?”
드디어 이해한 칼시온이 미간을 모으며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엄청 친절하고 정중하던데요.”
“왕세자가?”
다시 한 번 왕세자를 본다. 고개를 이리저리 갸우뚱하던 칼시온은 재차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니까요.”
“그럴 리가. 쓰레기를 줍느라 비키지 못한 시종이 눈에 거슬려 암살혐의를 씌워 죽인 작자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그의 반응에 셀리나도 똑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저도 지금 당황하고 있잖아요. 말을 해 줄 때 좀 제대로 잘생겼다 말을 하든가. 알아봤으면 뭐라도 하나 더 캐 보는 건데.”
“잘생겼다고?”
“……네? 네.”
칼시온의 얼굴이 최고치의 불쾌함을 드러냈다.
“저게 잘생겼단 말이야?”
“에이, 아무리 왕세자가 문제인물이어도 저건 확실히 잘생긴 거예요.”
“잘생겼다는 말을 너무 즉흥적으로, 쉽게 하는 것 아닌가? 처음에 나한테도 잘생겼다 했잖아.”
“예…… 그렇긴 했는데……, 잘생겼다는 말이 심사숙고 끝에 해야 하는 말이었나요?”
칼시온은 그렇다고까지 우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왕세자가 잘생겼다는 말은 내내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공작님이 더 잘생겼어요.”
“…….”
너무 심각하게 짜증을 내길래 놀리듯 한 말이었는데, 효과가 있었다. 칼시온의 미간에 패인 주름의 깊이가 아주 살짝, 얕아졌다.
“아무튼, 왕세자가 잘생긴 게 문제가 아니라. 제가 모르고 마주쳤었다는 게 문제인 거죠.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거잖아요.”
사실 칼시온이 묘사했던 것처럼 왕세자가 잔인무도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첫인상은 백마 탄 왕자님이었으니까. 실제로 왕자님이었고.
‘뭔가 있겠지.’
아이렐도 칼시온의 묘사와 쥬나의 묘사가 판이하게 달랐다. 하지만 파고 파다 보니 이야기가 왜 달라졌는지, 분기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왕세자도 그런 부분이 있을 거야.’
하지만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정말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 섣불리 찔러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 목이 잘린 채로 저쪽 세계에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알고 만났어도 뭐가 달라지겠나.”
“적어도 목숨 날아갈 짓은 덜 했겠죠.”
인적 드문 궁을 그렇게 자유로이 활보하는 것에서 의심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너무도 쉽게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딱 마주쳐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궁에서 일한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왕세자니까 당연히 궁에서 일을 하겠지. 준비를 하고 온다는 말은 왕세자로서의 복장을 갖추겠다는 의미였다.
어깨의 금장과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장식들이 화려하게 빛났다. 허리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힌 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이 파티장에서 유일하게 검을 찼다. 그것이 바로 왕세자의 특권일 것이다.
사람들은 왕비와 공주가 등장할 때보다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화기애애하게 무르익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물속에 잠긴 것처럼 가라앉았다.
왕세자는 그 가운데 혼자 숨 막히지 않는 물고기처럼 유유히 단상을 향해 걸어나갔다.
“일이 많이 바빴나 보네요. 어서 오세요.”
왕비가 웃으며 맞았다.
“아무래도 제 어깨에 놓이는 것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말입니다. 익숙해져야지요.”
왕세자도 똑같이 웃었다.
왕비와 왕세자의 연배는 거의 비슷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절대 모자 관계로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둘이 부부라고 하는 편이 말이 되었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새어머니를 향한 왕세자의 눈빛은 차가웠다.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치워 버리고 싶어 끓고 있었다.
짧은 순간 마주쳤던 시선이 각각 떨어져 나가고, 왕세자는 자신의 자리에 찾아가 섰다.
시종이 다가와 얼른 그의 잔을 채웠다.
왕세자는 잔을 들어 올리고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은 이 아클라인의 건국 300주년을 기리는 날이다. 선대 건국왕 이래 아클라인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물론 아클라인의 위상이 흔들린 적도 있었다.”
옆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담담하고 나직한 어조였다. 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아클라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강력한 국가로 거듭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앞을 가로막는 세력은 모두 처단할 것이다.”
이미 왕의 연설이었다.
왕권에 도전하는 자에게는 그 어떤 관용도 없을 것이라는 선언에, 귀족들의 머리는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왕세자는 흡족한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보고 짧게 외쳤다.
“아클라인 만세.”
귀족들은 전원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왕세자의 말을 복창했다.
“아클라인 만세!”
“아클라인 만세!”
하나가 된 우렁찬 목소리를 신호로 파티장에 음악 소리가 돌아왔다.
바짝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음악 소리로 다시 활기를 되찾아갔다.
본격적인 행사가 진행될 거란 왕세자의 말대로, 시작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려하고 성대한 공연이 이어졌다. 파티장 바깥에서는 불꽃도 쏘았다.
불꽃이 펑펑 하늘에서 터질 때마다 왕궁 밖에서도 와아아, 하는 환호가 울렸다.
“바깥에서도 축제인가 봐요.”
“그렇지. 건국제 날은 나라 전체의 가장 큰 행사니까.”
분위기가 무르익자 왕세자 등장 이전보다 파티장의 공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웃음소리와 흥분해 떠드는 목소리, 춤추는 발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였다.
셀리나에게 달라붙는 사람들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손님이 손님을 부른다고,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모습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두 분은 춤은 안 추시나요?”
“각하는 원래 안 추셨잖아요.”
“각하는 못 추시는 게 아니라 안 추시는 거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이들은, 또 시비를 걸어오는 쪽이다.
‘공작은 안 추는 거지만 넌 못 추는 거잖니.’
걸려 온 시비는 무시하면 안 된다. 무시해도 되는 건 상대보다 자신의 입지가 훨씬 높이 있을 때뿐.
그렇지 않을 때엔 무조건 전력으로 상대해서 상대가 시비를 걸 명분을 없애 버려야 한다.
“그러게요, 열심히 배웠는데 춤 한 번 못 추고 돌아가게 되는 거예요?”
셀리나가 떼쓰듯 칼시온의 팔을 흔들었다.
마침 노래 한 곡이 끝났다. 사람들이 플로어 바깥쪽으로 흩어졌다.
칼시온이 손을 내밀었다.
“추면 되지.”
셀리나는 칼시온이 내민 손에 활짝 웃으며 자신의 손을 겹쳤다.
“드디어 각하가 절 위해 춤을 춰 주시겠다네요. 너무 기다리던 순간이라, 대화 중 죄송하지만 잠시만 자리를 비울게요.”
셀리나는 못 추는 것 아니냐고 비웃던 사람들 쪽을 향해 일부러 양해를 구했다.
“흠, 흐흠. 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차마 악담을 이어가지 못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셀리나는 플로어에 올라섰다.
생전 춤추는 일이 없던 칼시온과 오늘 처음 등장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한데 모으고 있는 화제의 인물 셀리나. 두 사람이 플로어에 오르자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일시에 집중되었다.
“긴장하신 건 아니죠?”
셀리나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는 칼시온의 지긋한 손바닥 힘에 장난스럽게 웃었다.
칼시온이 별 싱거운 소리를 다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 곧바로 춤곡이 시작되었다.
춤은 자넷 부인의 교습 때에도 너무 완벽해 손댈 곳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춤도 수영처럼 자연히 움직인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추는 것이 처음이어도 딱히 긴장되지 않았다.
파티의 기본 예의가 춤이라지만 사람마다 신체능력과 감각은 천차만별이다. 아무리 잘 배워도 잘하는 사람, 못 하는 사람의 구분이 생겼다. 똑같은 몸짓이어도 더 아름다운 선을 뽑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셀리나의 선은 비단자락이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이며 나부끼는 것과도 같았다.
일부러 눈에 띄기 위해 몸짓을 크게 하거나 과감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자연히 시선을 끌었다. 유려한 움직임은 커다란 동작보다 더 우아하고 화려했다.
“여전히 재미있게 추시네요.”
셀리나는 눈웃음을 던지며 칼시온의 리드에 맞춰 몸을 빙그르 돌렸다.
무뚝뚝하기 그지없지만 칼시온의 춤은 다양하고 공간을 충분히 활용했다. 몸을 쓰는 것은 다 연결이 된다더니, 검을 가장 효율적으로 휘두르는 것을 아는 만큼 춤도 그렇게 췄다.
과감한 것 같으면서도 섬세함도 놓치지 않는 그의 춤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은 셀리나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닿아 있는 몸에는 아주 잘 전달되었다.
“재미있다니 다행이군.”
“네, 오늘 파티 중에 유일하게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되겠어요.”
“영광이야.”
칼시온도 셀리나를 마주 보며 입술 끝을 올렸다.
그의 미소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는 염두에 없었다.
곡이 끝나고, 멈춰 선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지켜보던 몇몇 사람이 무심결에 박수를 치려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무마했다.
원래 있던 자리로 막 돌아가려는데, 앞을 가로막은 사람 탓에 멈춰 서야 했다.
“멋진 춤, 잘 보았어. 어찌나 아름다운지 눈이 절로 가서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겠더군.”
“왕세자 전하.”
사방에 여자로 둘러싸여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일부러 걸음을 하셨다. 그냥 눈에 걸려서 왔다고 순수하게 믿어주기엔 너무 힘든 행차셨다.
셀리나와 칼시온은 예의상 고개를 숙여 왕세자를 맞았다.
“셀리나입니다. 복도에서는……, 실례했습니다. 제가 궁이 처음이라 왕세자 전하를 알아보지 못하여…….”
왕세자의 눈길이 셀리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대가 그 렌버드의 산새였군.”
“네? 산새……요?”
“소문이 그렇더라고. 어느날 갑자기 날아든 산새가 그렇게 귀엽고 아름다워 공작이 손에서 놓지를 못한다지.”
자신의 소문이 돌기는 돌았구나. 하지만 직접 소문에 대해 듣는 것은 처음이다. 왕세자의 입을 통해 그걸 알게 될 줄은 몰랐다.
“저도 처음 듣는 소문이라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대가 죄송할 게 있나. 복도에서는 오히려 헤매는 모습이 귀여워 내가 결례를 저질렀지. 서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똑같으니 이대로 없는 셈 치지.”
“감사합니다.”
왕세자는 생각보다 훨씬 상식적으로 반응했다. 칼시온의 설명대로라면 이유가 있든 말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셀리나의 목을 쳐야 했다.
왕세자는 셀리나의 목을 치는 대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 이번엔 칼시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귀한 걸음 하셨군, 공작. 이번엔 어느 미친 마수가 렌버드 성을 습격했다거나 눈사태가 나서 성벽이 파손되었다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야.”
“…….”
셀리나는 숙연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였다.
굉장한 핑계들인데 현실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노력조차 하지 않은 성의 없는 핑계였다.
지금까지는 그런 핑계들로 초대를 거절했는데도 왕세자가 죽이겠다고 쳐들어오지 않은 것이 용했다. 대신 지금 이렇게 빈정거림을 들어야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아니군. 렌버드 성이 무너졌어도 이렇게 아름다운 파트너를 자랑하려면 달려왔어야 했겠지.”
농담처럼 가볍게 던졌지만 함정이었다.
그렇다 하면 그동안은 널 능멸했었다 인정하는 것이 되고, 아니다 하면 왕세자의 평가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셀리나는 조마조마하며 칼시온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건 여성들끼리의 은밀한 대화도 아니니 셀리나가 끼어들 틈도 없었다.
칼시온은 거기에 그저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공작은 여전히 과묵하군.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으니 몇 마디 정도는 즐겁게 나누어 줄 줄 알았는데.”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칼시온의 방식은 유효했다. 매끄러운 핑계보다 어리숙한 침묵이 때론 더 복종에 가까울 수 있다.
왕세자의 마음에도 그 정도면 합격이었는지,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눈을 접었다.
조여들던 공기가 탁 풀려나갔다.
“그래, 내 그를 모르는 바가 아니지. 대신 벌로 이 아름다운 레이디 셀리나와 한 곡 출 영광을 주겠나?”
“제가 어찌 감히 전하의 뜻을 가로막겠나이까.”
“파트너의 허락도 받았으니, 레이디 셀리나. 그대는 허락해 주겠는가?”
“영광입니다.”
셀리나는 기꺼이 왕세자의 손을 잡았다.
왕세자의 춤 신청은 여러모로 셀리나에게 이득이었다.
아직 셀리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왕세자와 춤을 춘 여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도 있는 것이 첫 번째. 왕세자가 아무나와 춤을 추는 건 분명 아닐 테다. 그러니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왕세자가 나서자 주변에서 춤을 추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서 공간을 넓혔다.
왕세자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가운데에 서서 셀리나의 허리를 가볍게 당겨 안았다.
“이 정도로 공작이 칼을 빼 들진 않겠지?”
“그럴 짓을 제게 하실 거예요?”
셀리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물론 그럴 리 없지. 만일 공작과 칼을 마주대는 일이 있어도 그대를 핑계 삼지는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저는 평화롭고 즐겁게 사는 게 목표거든요.”
“저런, 그럼 상대를 잘못 골라잡았군.”
“렌버드는 조용하잖아요.”
“하지만 공작의 주변이 조용하지 않지. 이미 렌버드 공작의 파트너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주목받고 있지 않은가.”
왕세자는 유쾌하게 웃으며 허리를 잡은 채 빙 돌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실수 없이 춤을 이어갔다.
왕세자의 리딩은 유려했다. 동작과 동작 사이에 막힘이 없고, 셀리나의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칼시온보다 백 배는 더 잘 췄다. 칼시온도 재미있게 추기는 했지만 감성은 없었다. 그에게 음악은 그저 박자를 맞추는 도구에 불과했다.
왕세자는 음악에 몸을 흘린다는 느낌으로 추었다. 생긴 것만 잘생긴 것이 아니라 춤마저도 부드럽게 잘 추다니.
“백마 탄 왕자님의 주변보다는, 그래도 북부 시골의 공작님이 더 조용하지 않을까요?”
“하하하! 백마 탄 왕자님이라.”
진심으로 재미있었는지 왕세자는 아예 소리를 내어 웃었다. 셀리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불길한데.’
왕세자에게 잘 보여 놓으면 손해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너무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아까 복도에서까지만 해도 정말 그런 눈빛이었는데, 내가 왕세자라는 걸 알고 나니 그 눈빛이 바뀌었어. 그런데 말은 오히려 왕자님이라 해 주는군. 어느 쪽이 진짜일까?”
“제 눈에 전하는 한결같이 왕자님처럼 잘생기셨는걸요.”
“듣기 나쁜 소리는 아니군. 공작의 산새는 생각보다 아름답고, 예쁘게 우는걸.”
“칭찬이시라면 감사합니다.”
“공작의 손에 들어간 것이 아쉬워.”
안간힘을 써 붙들고 있던 셀리나의 미소에 실금이 갔다.
‘이 자식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방금 전에 만난 주제에, 칼시온이 뻔히 쳐다보고 있는 곳에서 수작질이라니.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왕세자는 눈치챘을 것이다.
그가 맞잡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아니, 아직은 아닌가? 둘이 결혼을 한 것도 아니까 내게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머릿속이 어지러운 것은 단지 빙글빙글 춤추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뭐 이런 미친…….’
차마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못한 말이 목구멍 안에서 빙빙 돌았다.
“너무 황송한 말씀에 제가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좋다고만 하면 될 텐데.”
‘이런 진짜 미친…….’
이렇게 웃다가 수틀리면 어떻게 사람 쳐 죽일지 모르는 미친놈이라니. 웃으며 상대하기 너무 어려웠다.
“그렇게 쉽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전하와 저는 오늘 처음 만났고…….”
“아, 그렇지. 내가 너무 성급했군. 하지만 너무 시간을 많이 줘 버리면 아예 공작에게 붙어서 떨어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이 급해지는 마음을 이해해 주게.”
‘와, 환장하겠네…….’
셀리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왕세자의 손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억지로 춤을 이어갔다.
칼시온과 추었을 땐 ’이렇게 금방?’이라고 생각되던 춤곡이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처음 복도에서 만났을 때에도 친절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질척대지는 않았다. 이러는 건 분명 셀리나가 칼시온의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칼시온의 여자라는 걸 알게 된 다음 들이댈 이유는 뭘까? 또 고민이 이어졌다.
‘의심?’
셀리나의 등장은 부자연스러웠다.
평소 여자에 관심 없던 칼시온이 갑자기 산에서 주워 왔다며 성의 손님으로 앉혀놓지를 않나, 뭘 하든 편을 들어 주고, 심지어 수도까지 데리고 와 파트너로 대동했다. 예비 약혼녀가 죽은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 안에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은 셀리나의 미모 하나뿐이었다.
‘저렇게 예쁜 여자면 렌버드 공작도 정신을 빼놓을 수 있지!’
이것이 모든 사람을 납득시킨 개연성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다 보면 이 개연성에도 틈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게 된다. 호시탐탐 칼시온을 노리고 있는 왕세자의 눈에도 이상해 보였을 수 있다.
혹시 왕세자가 아이렐의 사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면, 셀리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충분히 의심스러울 수 있었다.
“어디서 이렇게 아름답고 완벽한 여인이 뚝 떨어졌는지, 나도 신기하고 놀라워서 말이야. 지금까지 왜 한 번도 보이지 않았을까?”
“제 소문을 들으셨다면서, 제 정체는 하나도 모르세요?”
“그대의 이름조차 방금 들었는걸.”
왕세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의심해야 하는지 셀리나도 혼동이 왔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인 그가, 너무 순진무구함을 앞에 내세웠다.
“저는 귀족이 아니고 평민이라 파티는 이게 처음이랍니다.”
“진짜? 그런데 이렇게 완벽한 매너에, 화술에, 춤 실력까지 갖췄다고?”
“과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셀리나도 같이 장단을 맞추어 주기로 했다. 왕자를 처음 만난 평민 아가씨처럼, 행복에 겨워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
“처음에는 공작님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교사한테 얼마나 혼났는데요. 그래도 하다 보니까 소질이 있나 봐요. 나중에는 너무 잘한다고 아무 말도 못 하는 거 있죠.”
“그렇게 오랜 시간이지도 않았을 텐데, 정말 대단하군. 천재인 모양이야. 이거, 아클라인의 큰 인재를 만나게 되었군.”
왕세자는 얼씨구나 맞장구를 쳐 주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며?
북쪽에 처박혀 조용히 사는 칼시온마저 언제 위협이 될지 몰라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한다며?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 목숨을 쥐락펴락한다며?
지금 왕세자는 어딜 보아도 그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이미지 그대로, 늘 친절하고 다정한 왕자님을 그대로 빼어다 박아 놓은 것처럼 굴었다.
‘의심스러우니 일단 친절하게 접근하는 건가…….’
그렇다 쳐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자신의 성질을 죽여가며 친절할 필요가 있을까?
춤곡이 끝나자 왕세자는 더 질척거리지 않고 칼시온의 앞에다 셀리나를 데려다주는 매너도 잊지 않았다.
“이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재능도 많은 레이디를 곁에 둘 수 있다니, 행운의 남자였군. 공작.”
“……?”
칼시온은 ’뭔 소리야’라는 눈빛으로 셀리나를 돌아보았다.
“이런, 그대는 셀리나의 진가를 모르면서도 곁에 두고 있었던 것인가?”
“제가 모르는 진가를 전하께는 보여 드렸나 보군요.”
“글쎄, 공작도 열심히 찾아보게나.”
왕세자는 약 올리듯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고 셀리나의 손등에 입술을 댔다.
“오늘 그대 덕분에 아주 즐거웠어.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이 이상 기쁠 말이 없군.”
왕세자는 인사를 마치고 다른 쪽으로 미련 없이 지나쳤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여파는 잔잔한 호수에 바위가 굴러떨어진 것처럼 커다란 여운을 잔뜩 일으켰다.
춤 한 곡 췄을 뿐인데 셀리나는 기진맥진해 드러눕고 싶어졌다.
“이 정도면 데뷔로는 충분한 것 같네요. 이들 중 호기심 많은 사람이 용기를 내 줬으면 좋겠는데.”
적당한 가문의 파티에 초대장을 받기만 하면 오늘의 목표는 성공이다.
왕세자와의 춤이 이변이기는 했는지 이쪽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바뀐 것이 느껴졌다.
’공작이 멋모르고 데리고 온 정부’에서 ’어쩌면 진짜 진지한 관계일지도?’까지만 옮겨가도 대우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그런 가운데 당연히 적대적인 시선들도 많았다. 특히 로젤린 쪽에 뭉쳐있는 사람들이 그랬다.
단연코 로젤린의 눈빛이 가장 험악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작이랑 춤춘 것도 아닌데 쟨 또 왜 저러는 거지.’
다시 가서 2차전을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는 차, 셀리나의 눈에 성난 소처럼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자그마한 인영이 들어왔다.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피, 피해요. 도망가자.”
“뭐?”
“공자아아악!”
아까는 용케 피했다. 하지만 십 대의 집요함은 오늘도 여전했다.
제리엘 공주는 칼시온을 향해 직선거리로 접근했다. 저 요정같이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나풀거리며 다가오는데도 등 뒤에 폭풍에 흩날리는 불꽃이 보이는 듯했다.
이미 도망가기에는 늦었다. 셀리나는 다급히 칼시온의 앞을 막아섰다.
“안 돼요. 집에 갈 거예요.”
“누구 맘대로? 나도 공작이랑 춤출래.”
“제 거니까 제 맘대로요.”
“아직 결혼 안 했으니까 셀리나 거 아니야. 그리고 파트너는 돌아가며 쓸 수도 있는 거지. 셀리나도 왕세자 전하랑 춤췄잖아?”
“그건 공작님이 허락해 줬으니까요. 저는 허락 안 할 건데요?”
“왜 허락 안 해!”
공주는 여전히 성질도 급했다. 셀리나만 없었으면 당장 식장으로 가자고 손잡았을 사람이다.
“우리 공작님 너무 피곤해서요.”
“무슨 소리야. 렌버드 공작이 어떻게 피곤해?”
이 반응에는 셀리나도 일정 부분 동의하는 바였으나, 시치미를 떼었다. 어떻게 왕세자를 대할 때보다 공주를 대할 때 더 신들린 연기를 해야 했다.
“사람 싫어서 렌버드에만 처박혀 계신 분이 오늘 너무 오래 버티고 있었잖아요. 몸이 아니라 정신이 너덜너덜하실 거예요. 그쵸?”
이것은 연기가 아니라 진실일 것이므로 자신 있게 물을 수 있었다.
칼시온은 셀리나의 기대에 따라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앗…….”
미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 듯 공주가 놀라 비틀비틀 물러났다.
셀리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칼시온의 가슴에 매달려 부축하듯 파고들었다. 그의 덩치가 너무 커서 셀리나가 폭 싸안긴 모양이 되기는 했지만.
“그러니 저랑 공작님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공주님.”
공주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애절한 눈으로 칼시온의 망토 자락을 잡았다.
“공작, 다음 파티에는 꼭 나랑도 춤을 춰 줘.”
매몰차게 거절해 버리기는 어려운 어린아이의 순수한 집착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밀리면 계속 집착할 빌미를 주는 건데.’
셀리나는 긴장한 눈으로 칼시온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셀리나의 걱정과 무관하게, 칼시온은 일관된 사람이었다.
“그건 다음 파티 상황에 따라 결정하겠습니다.”
좋다, 싫다보다 더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