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버드 영지의 실렌자 성. 북부의 지배자가 거주하는 곳인 만큼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에 둘러싸인 곳이다.
“각하앙!”
그런데, 실렌자 성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하던 셀리나는 흠칫 놀랐다.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수치를 모르는 저 목소리. 저것은 분명 온 힘으로 애교를 피우는 콧소리다.
셀리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올 것이 왔구나.’
칼시온이 알짱거려서 거슬린다고 첫 번째로 꼽았던 사람. 첫 대적 상대는 콧소리마였다. 옆에 서 있던 칼시온의 미간도 꿈틀거렸다.
“아, 좀 비켜. 안내 필요 없댔잖아!”
자그마한 여자가 하인들을 밀치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무채색의 성, 무채색의 복장을 한 하인들 사이에서 화사한 분홍 프릴은 혼자 빛났다.
“각하! 각하! 마침 성에 계셨군요! 각하의 마음이 염려되어 이 피오넬, 렌버드까지 와 버렸어요!”
칼시온은 분홍 프릴 덩어리를 힐끔 일별하고 다시 몸을 돌리려 했다.
‘피하고 싶은 그 마음, 격렬히 이해하지만 그래선 안 되죠.’
셀리나는 칼시온의 팔에 팔짱을 끼고 힘을 꽉 주었다. 셀리나 하나쯤이야 매달고 뛸 수도 있는 칼시온이지만, 무슨 뜻인지 아니 참아 주었다. 대신,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고 불평 가득한 얼굴을 했다.
그사이 피오넬이라는 이름으로 일인칭을 대신한 여자가 코앞까지 달려와 멈췄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 칼시온을 올려다보던 피오넬의 눈이 자연히 그의 옆에 선 셀리나를 향했다.
‘이건 또 뭐야!’
피오넬의 눈빛이 그렇게 말했다. 칼시온을 향해서는 꿈꾸는 소녀처럼 반짝이던 눈빛이 셀리나를 발견하고는 칼처럼 날이 섰다.
같은 반짝임이어도 그 차이가 너무 확연해서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건, 명백한 적대감이다.
‘첫 번째 용의자.’
셀리나는 마음속으로 피오넬의 이마에 도장을 쾅 찍었다.
아이렐 남작 영애가 죽은 지 이제 한 달이다. 장례를 치르고, 남작가에 위로를 표하고, 사건을 수습하고 돌아온 지 이제 열흘 남짓.
수도에서 렌버드 성까지는 마차로 꼬박 일주일이 걸리는 거리라 했다. 그렇다면, 피오넬은 칼시온이 수도를 떠나자마자 짐을 꾸려 바로 따라온 것이다.
‘걱정되어 따라왔다며 옷은 저렇게 날 좀 보소, 난리가 났고.’
누가 보아도 빈집 노리고 쳐들어온 꼴이다. 빈집이라 생각했는데 칼시온 옆에 웬 야생 거머리가 달라붙어 있으니 곱게 보일 리가 없겠지.
‘그래도 저렇게까지 대놓고 자기 마음을 티 내다니?’
아이렐은 칼시온과 결혼할 예정이기 때문에 살해당했다. 그게 아이렐이라 죽은 것인지, 그 자리에 누가 앉든 죽을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위험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칼시온과 결혼할 사람을 다 죽이려 작정했다면?’
그렇다면 지금 피오넬은 목숨을 풍선처럼 달랑달랑 들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남자가 내 남자다 말하고 싶어 미치겠다! 온몸으로 소리 지르고 있으니까.
아이렐의 전적이 있음에도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딱 둘밖에 없었다.
그게 자기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바보든가.
‘……본인이 죽였든가.’
셀리나는 후자 쪽에 조금 더 무게를 실었다.
저렇게 동동거릴 정도면 홧김에 눈엣가시 하나 죽여 없애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피오넬은 셀리나를 무섭게 노려보다가 칼시온을 돌아보며 애교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나는 그대의 방문을 청한 기억이 없는데.”
축객령 같은 냉랭한 말에도 피오넬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피어나는 꽃처럼 상큼하게 웃었다.
“누군가를 초대할 만큼 여유로우신 마음이 아닐 것 같아 불청객이 될 각오까지 하고 각하를 위로해 드리러 찾아온 거랍니다. 이 마음, 몰라 주시지 않을 거라 믿어요.”
“지금 그것까지 알아주기엔 바빠서.”
밥 먹으러 가야 해서 바쁘다. 그러고는 식당이 있는 건물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칼시온의 걸음이 멈춘 탓에 함께 멈춰서 기립하고 있던 인원들이 칼시온을 따랐다.
“앗, 가악하! 이이잉!”
피오넬의 징징거림이 따라붙었다. 칼시온의 보폭을 따라가느라 거의 뛰다시피 했지만, 칼시온은 속도는 그대로였다.
“걸음이 너무 빠르셔서, 헥헥, 피오넬, 따라가기 힘들어요오.”
피오넬은 근성파였다. 한두 번 무시당하는 정도로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헉헉거리면서도 혀끝을 돌돌 마는 것을 잊지도 않았다.
“각하, 바쁘지 않으시면 차라도 하며…….”
“미안하지만, 보다시피 바빠.”
칼시온은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정말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알알이 느껴졌다.
‘안 되겠다. 술래잡기도 아니고.’
셀리나는 칼시온의 팔에 더욱 답싹 달라붙어 피오넬을 향해 힐끔 눈길을 주었다. 참 쉽고도 유치한 심리전이었다. 내가 너보다 가깝지롱, 이 정도의.
피오넬은 칼시온의 냉정한 반응에는 까딱도 하지 않았지만, 셀리나의 별것 아닌 도발에는 화르르 불이 붙었다.
피오넬은 어깨를 바르르 떨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던 걸 꾹꾹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예요, 그 여자는!”
“오다 주웠어.”
“…….”
진솔성이 도드라지는 참 멋진 대답이십니다. 물론, 반어법이다. 이럴 때 ‘내가 꽂힌 여자’ 정도만이라도 말했다면 일이 참 쉬워질 텐데.
‘무리한 기대는 하는 게 아니지, 그래.’
셀리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겉으로는 부끄러운 척 가볍게 웃으며 칼시온의 팔뚝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피오넬에게는 그 성의없는 답변도 불에 끼얹은 기름이 되었다.
“저, 진짜, 수도에서 엄청 힘들게 왔는데! 피오넬, 각하만 생각하여 그 멀고 힘든 길을 달려왔는데.”
피오넬에겐 직진밖에 없었다. 돌려 말하지 않는 칼시온과 상당히 수준이 잘 맞기도 했다.
보통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귀족의 세계는 은유와 비유의 우아한 물밑 싸움이었는데, 이곳은 무슨 원시인 뗀석기 전투하듯 직구와 직구가 난무했다.
보통 직구에 당해 낼 방어가 거의 없긴 한데…….
“이 여자가 더 멀리서 왔어.”
칼시온의 철통 직구가 더 강했다. 그야 더 멀리서 오긴 했지……. 차원을 건너왔으니.
“그, 그렇다고 피오넬이 안 힘들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
이번에는 칼시온의 말문이 막혔다. 직구로 던진 어리광은 시원하게 날려 버릴지라도 맞는 말은 걷어차기 쉽지 않은 모양이다.
“저도 마차 오래 타서 엉덩이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서 있는 거 너무 힘들고…….”
칭얼칭얼하는 목소리가 애교스럽다. 타고난 아름다움에 순진해 보이는 귀여움, 거기에 솔직한 표현이 더해지면 최강의 파괴력이 생긴다.
본인의 매력과 강점을 알고 쓰는 최선의 전략이다. 피오넬 단순 무식설은 폐기다. 저 정도로 자신을 알고 상대가 어떻게 하면 넘어오는지 아는 사람이 멍청할 리가 없다. 멍청한 척하는 거겠지.
“피오넬도 각하 팔 잡고 기대고 싶다…….”
순진무구하게 상대방의 입장까지 고려할 뇌가 없는 척 이기적으로 눕는 방식. 백치미는 고전적이지만 의외로 잘 먹힌다.
“이 여자는 지금까지 계속 옆에 있었으니까 이제 놓고, 피오넬 껴 주시면 안 돼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갸륵한 눈썹을 만든다. 그래, 솔직히 귀엽긴 귀여웠다.
“안 돼.”
다행히 칼시온에게 먹히는 귀여움은 아니었다.
“으응, 왜 안 돼요?”
거기서 ’왜’가 왜 나와? 싫다, 안 된다 하면 꼭 이유를 물어보는 애가 있다. 그게 쟤고.
칼시온도 이유까지 물어볼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멈칫했다.
지금까지는 가지고 태어난 철벽으로 막았지만, 핑계는 다른 영역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로 핑계를 댈 일이 태어나 거의 없었던 것이다.
“각하? 그럼 피오넬, 반대쪽 팔 잡으면 안 돼요?”
칼시온이 더 미적거리게 둘 수 없었다. 예상보다 이르지만, 출동의 시간이었다. 셀리나는 파묻고 있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겁먹은 척 피오넬을 훔쳐보았다. 눈이 마주친 피오넬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너, 당장 떨어져.
겉으로는 귀여운 척, 속으로는 살벌한 경고. 셀리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세상에 그런 수는 너만 쓸 줄 아니?’
사람이 싸울 때 가장 황당하고 열 받는 건, 자기가 쓰던 수법으로 당했을 때다.
“힝.”
셀리나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몸을 굴려 칼시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무려 기싱꿍꼬또의 나라에서 살아왔다. 찡찡은 자신도 쓸 수 있는 스킬이었다. 남자한테 모자란 척 어린 척 아기 짓 하는 건 극도로 혐오하지만, 너를 이기기 위해서는 내 3세 이하로도 내려가리라.
“……!”
같은 스킬의 출현에 피오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왜, 놀랍냐.
‘애교는 너만 피울 줄 알았어?’
셀리나는 한술 더 떠 고양이처럼 목을 울리며 칼시온의 품에 뺨을 비볐다.
“쎌리나, 배고파요. 언능 가서 앉아서 쉬고시포요. 셀리나, 마니 서 이쓰면 힝든데.”
“!”
피오넬의 두 주먹이 드레스 위에서 부르르 떨렸다. 셀리나는 파리해진 피오넬의 얼굴을 훔쳐보며 보일 듯 말 듯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그러나, 이 자리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깨에 꾸우우욱 하는 압박이 느껴졌다.
‘……아.’
셀리나는 순간적으로 전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잊고 있던 칼시온의 존재를 떠올렸다.
바로 옆에서 힝, 헹, 흥, 짧은 혀들이 벌이는 전투를 라이브로 들어야만 하는 북부 공작.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래도 좀만 참아요. 일단 이기고 봐야지.’
셀리나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고개를 쳐들었다. 자고로 미친 인간과 싸워 이기려면 본인도 미쳐야 한다 했다. 기왕 싸우는 거, 이긴 미친 인간이 되는 쪽이 나았다.
“으으응, 빨리 가아요오. 셀리나, 누꼬 시포.”
셀리나는 다시 한번 칼시온의 가슴에 얼굴을 붙였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하마터면 어깨가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한마디만 더 하면 이 손이 모가지를 틀어쥘 줄 알아.
이런 협박이 손아귀에서 느껴졌다.
그래도 물러설 수 없다. 셀리나는 피오넬의 대처를 기다리며 전의를 다졌다.
“각하아앙.”
피오넬은 타깃을 바꿨다. 차라리 무심한 칼시온이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셀리나보다는 낫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칼시온이 피곤을 가리지 않은 얼굴로 피오넬을 돌아보았다.
“왜.”
“피오넬도…….”
다리 아프다는 듯 몸을 통통거린다. 아기가 떼쓰는 것처럼. 동그란 눈에 통통하고 흰 뺨, 앵두 같은 입술로 그러니 웬만해선 귀여웠다.
“흠, 큼…….”
주변 하인들이 슬그머니 얼굴을 붉히는 것만 보아도 먹힌다는 건 확실했다.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그게 씨알도 안 먹히는 두 사람 앞이라는 것.
“…….”
칼시온의 눈이 말했다.
어쩌라고.
철벽같은 무심함이 빛을 발했다. 피오넬의 뻔뻔함도 같이 빛을 발했다.
“아. 피오넬, 너무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아요…….”
“침대까지는 가서 쓰러지기를 기도하지.”
이쪽도 전쟁이로다.
“쓰러져서 못 일어나면 오또케요…….”
“이후에 저녁 많이 먹도록. 저녁 식사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지시하겠다.”
칼시온은 전쟁을 길게 끄는 편이 아니었다.
“그럼, 있는 동안 편하게 지내도록. 저녁에 보지. 방으로 안내해.”
더 이상의 반격은 불허한다.
칼시온은 일방적인 통보를 남긴 채 피오넬이 따라올 수도 없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하인들에게 안내하라는 명령까지 했으니 더 이상 따라붙지는 못했나 보다.
“그치만, 각하!”
걸음 대신 애절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공작이 애 하나 버리고 도망갔다고 생각할 만큼 애절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셀리나는 보았다. 칼시온과 자신의 뒷모습을 살벌하게 쏘아보는 피오넬의 눈빛을.
“후…….”
“하.”
피오넬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강하네요.”
밟고 밟히는 연예계에서도 이 정도는 결코 약한 수준이 아니다.
“사교계 여자들이 다 이런 건 아니겠죠?”
“다는 아닐 거야.”
얽혀 보지를 않았으니 알 수도 없다.
“시작부터 화려하게 한판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칼시온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피오넬의 난입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이쪽 영애들 성격이 다 이런 건 아니죠?”
“내 기준 피오넬 백작 영애가 가장 성가시고 귀찮다.”
칼시온이 가장 먼저 꼽은 사람이기도 했다.
‘확실히 격조고 뭐고 몸통으로 박치기하는 타입이 제일 피곤하긴 하지.’
“그럼 쟤가 사교계에서 제일 세요?”
“그건 아닐걸.”
“등수로 치면 몇 등 정도……?”
그걸 칼시온이 알면 조사도 직접 했을 것이다.
피오넬이 최강이 아니라면 타입의 차이가 있을 뿐 수도의 사교계에는 저 정도 공격력의 영애들이 바글거릴 것이란 예상이 갔다.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수준이라면, 보수 협상 다시 해요.”
“얼마든지.”
애초에 칼시온에게는 금액이 문제가 아니었다. 셀리나로서는 너무 쉽게 오케이가 나오니 악착같이 뜯어낼 의지도 사라졌다.
“그렇게 귀찮은데 저녁에 보잔 말은 왜 하셨어요?”
전투의 여파로 입맛도 떨어졌다. 셀리나는 식사를 물리고 과일 하나를 입에 넣었다.
“영지에 찾아온 손님의 첫 저녁 식사는 영주가 대접하는 것이 예의야. 다섯 살짜리 영주라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본 중 기본이지.”
놀라운 발견이었다.
“의외로 지킬 건 지키고 사시네요.”
“지킬 걸 지키는데 의외일 건 뭐지?”
“아뇨, 뭐. 내가 곧 법이다, 하면서 귀찮은 건 싹 무시하고 사실 줄 알았는데.”
의외의 상식인이랄까. 이미지만 봤을 땐 상식을 알아도 무시할 것 같았는데. 수틀리면 사람 목 무처럼 썰고, 왕한테도 반말 찍찍 하고, 그런 식으로.
“사소한 규칙을 일일이 어기며 뒤처리하며 사는 게 더 귀찮아.”
“그렇긴 하네요.”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제아무리 공작이고 변방이라 간섭할 사람도 없다지만 왕국 안에 소속된 영지다.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 있을 것이다. 그 선이 가끔 이렇게 귀찮을 뿐.
‘하지만, 난 앞으로 많이 귀찮아지겠지.’
변방의 공작마저 자유롭지 못한 규칙들이 있는 곳이니 수도는 숨 막히게 빡빡할 가능성이 컸다.
칼시온이야 적당히 무시하고 살았으니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셀리나는 입장이 달랐다. 최약체로 사방의 눈치란 눈치는 다 보며 그 와중에 밟은 건 밟아 가며 입지를 다져야 했다.
‘하……, 신인 때 했던 짓 그대로 반복이네.’
신인 때는 실력으로 올라가면 된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지, 여긴 범인 잡기라는 목표뿐이다. 올라가고 말고의 목표도 없이 그저 버티기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과일 입맛마저 떨어졌다. 셀리나는 과일을 던지듯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
“그게 단가?”
칼시온은 두둑한 고기 한 점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맛이 뚝 떨어져서요.”
잘 익힌 고기가 포크에 찍혀 칼시온의 단정한 입가로 다가갔다. 겉은 살짝 그을린 듯 거무스름하지만, 단면에서는 육즙이 배어나고 있었다. 주방장이 고기 좀 구워 본 사람이 분명했다.
“저, 한 입만.”
칼시온은 포크로 밀어 놓은 셀리나 분의 고기를 가리켰다. 분명 같은 부위에서 잘라 내서 똑같이 요리한 걸 텐데 손이 안 갔다.
“아니에요. 그게 더 맛있어 보여요.”
“무슨 차이지.”
칼시온이 어이없어 웃었다.
“원래 한 입만 얻어먹는 게 제일 맛있는 거랬어요. 한 입만요.”
의자 옆까지 가서 달라고 졸라 대는 셀리나를 보고 칼시온은 다시 한번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없어서 굶는 처지도 아니고, 못 줄 건 없었다.
“자.”
접시를 내밀었다.
알아서 잘라 먹어라.
“이게 뭐예요. 잘라 줘요. 포크 가지러 가기 멀어요.”
그래 봤자 세 발짝, 왕복해도 여섯 발짝이다. 어처구니없는 떼였다. 그래도 직접 가져다 먹으라 말하는 것보다 그냥 잘라 주는 게 편할 것 같아서 한입 크기로 잘라 주었다.
“자.”
“손으로 먹어요? 찍어 주세요.”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칼시온의 인내심이 살짝 흔들리려 했다.
“에잉, 그냥 찍어 주세용.”
셀리나가 배시시 웃으며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웃으며 애교까지 피우고 있지만, 칼시온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식당 안에는 둘 말고도 시중 대기를 하는 하인의 눈이 있었다. 칼시온은 저도 모르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둘만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어려운 일 아니잖아.
그래,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소에 안 하던 일일 뿐. 뭐가 뭔지 모르는 기분으로 칼시온은 먹던 포크로 고기를 찍어 셀리나의 입에 대 주었다.
“음!”
셀리나가 포크를 덥석 물었다.
칼시온의 입안으로 들어갔던 포크 끝이 셀리나의 분홍빛 입술 안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뜨끈한 기운이 귓불부터 퍼져 나갔다.
“아, 맛있네!”
셀리나는 한 점으로 만족했는지 포만감 그득한 표정으로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것으로 식욕이 돌아왔는지 디저트를 이것저것 주문하는 셀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시온은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그 포크를 입으로 가져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