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너무 빨리 왔다. 다급히 저택으로 돌아간 셀리나는 심기 불편한 칼시온과 현관에서 마주쳤다.
“아프신 분이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어차피 핑계라는 건 서로 알고 있는데 뭐하러.”
“아무리 핑계여도 아픈 척이라도 좀 해야 서로 간에 덜 민망하지 않겠어요?”
“거절했는데도 부득불 문병을 오겠다고 고집을 부린 시점에 이미 서로 민망할 수밖에 없어.”
셀리나는 침실에 들어가지 않으려 버티는 칼시온을 째려보며 등을 밀었다.
들어가 누워 있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아픈 척하는 게 뻔한 핑계 대는 것보다 아픈 척 하는 것이 더 민망해서 그런 것이었다.
칼시온의 내부 외부 동일성은 굉장했다. 속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어 마음을 다 터뜨리며 사는 것도 있긴 했지만 원래 이중적인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사교계에도 안 끼고 수도에 와서 살지도 않았던 거겠지.’
싫은 건 이해한다만, 지금은 싫어도 해야 했다.
“옷도 빨리 벗고.”
셀리나는 침실에 칼시온의 등을 밀어 넣고는 직접 그의 겉옷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칼시온이 기겁해서 물러났다.
“뭐, 하는 거지, 지금?”
“아니, 옷 입고 누우시게요?”
“내가 벗어, 내가.”
그제야 셀리나는 대낮부터 남자 옷을 벗기려 들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이 와중에 다른 뜻이 있으면 큰일이지.”
칼시온은 스스로 겉옷을 벗고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셀리나는 한 발 뒤에서 칼시온의 누운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좀 더 베개에 등을 기대고. 지금은 너무 정자세로 누워 있어요.”
칼시온은 셀리나의 지시대로 베개를 등에 대고 반쯤 누운 자세로 바꾸었다.
“됐나?”
“으음…….”
셀리나는 무대를 체크하는 감독처럼 예리한 눈으로 칼시온과 침대를 지켜보았다. 여전히 기대치에 충족하지 않았다.
“자세가 문제가 아니라 너무 심하게 건강해 보이는 게 문제네요.”
당연한 일이지만 옷 좀 풀어 헤치고 누워 있는다 한들 아파 보일 리가 없었다.
셀리나는 칼시온의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셔츠 단추도 하나 더 풀어 할랑하게 만드는 등, 병색을 만들어 주려 노력했다.
그래 봤자 칼시온의 건강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뭘 해도 부질없단 생각이 들기 시작하네요.”
포기가 늦은 셀리나를 향해 칼시온이 조소했다.
그러게 왜 헛짓을 시키나 모르겠다. 왕비나 자신이나 서로 사정 뻔히 아는데, 이런 연기는 그냥 우스운 짓거리였다.
하지만 셀리나의 열의를 굳이 꺾을 필요도 느끼지 않아, 칼시온은 적당히 어울려 주었다.
“물 받은 대야랑 젖어도 되는 수건이랑 미음 한 대접, 사과랑……, 직접 깎을 과도랑 접시도.”
셀리나는 하녀를 불러 이것저것을 부탁했다.
칼시온의 눈에는 그것이 신이 난 건지 긴장한 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연기에 힘줄 필요 없어. 아프다는 말은 그냥 다들 쓰는 핑계일 뿐이니까.”
실제로 아프든 말든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상대도 그 말을 들으면 적당히 안부나 전하고 물러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음……. 그래도 살인 용의자 중 하나잖아요. 앞서 만난 피오넬이나 로젤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났으니 어찌어찌 되었다지만, 명색이 왕비잖아요. 방심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건 그렇지. 겉으로는 허술해 보이지만 그래 봬도 아무것도 없는 집안에서 왕비 자리까지 올라가고, 여태 잘 버티고 있으니까.”
“쉬운 상대가 없네요.”
셀리나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지만 자신 없는 모습은 아니었다.
“오늘은 괜히 나서지 마세요. 웬만한 건 그냥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제가 타깃이 되든 편이 되든 해야 그쪽 세상에 들어갈 수 있는 거, 잊지 않으셨죠?”
“……그러지.”
둔펠에서 쓸데없이 나섰다가 욕만 먹은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연기에 있어서 할 말이 없는 죄인은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 올 때까지 멍하니 있을 수도 없으니, 소꿉놀이라도 할까요.”
“소꿉놀이?”
“아이고, 우리 공작님, 이 식은땀 흘리시는 것 좀 봐. 이렇게 몸이 허하셔서 어떡해.”
셀리나는 능청스럽게 젖은 수건으로 칼시온의 이마와 콧등을 톡톡 찍어 누르며 연기했다.
“뭐? 아하하.”
칼시온은 평생 들어보지 못한 말에 큰 웃음을 터뜨렸다.
“어려서도 받아 본 적 없는 간호를, 이렇게 다 커서 받아 보는군.”
“설마 한 번도 안 아프고 자란 거예요?”
“아픈 적은 있지. 하지만, 아프다고 병석에 누워서 시간을 보낸 적은 없어. 못 일어나는 것이 아니면 일어났어야 하니까.”
저 ‘못 일어나는’ 일이란 두 다리가 몽땅 부러졌다든가 너무 아파서 쓰러진 것을 말했다.
“애한테 그러는 건 너무했다.”
“공작 후계자의 운명이지.”
칼시온은 그런 자신의 과거를 딱히 비극적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한 자신의 삶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귀하신 분 싸매서 곱게 키우는 게 아니라 더 험하게 굴려 키우기도 하는구나…….”
“그런 가문도 많지.”
“그럼 공작님은 태어나서 어리광도 한 번 안 부려 봤어요?”
“부릴 필요가 없었지. 곱게 자라진 않았지만 귀하게 자라지 않은 건 아니니.”
“아…….”
원하는 것은 뭐든 당연히 손에 들려지는 귀공자는 누군가에게 떼를 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놀고 싶다, 공부하기 싫다 이런 건 있었을 거잖아요.”
“글쎄, 그때도 해야 하는 거니까 그냥 했던 것 같아.”
“그 어린 나이에요?”
“어렸으니 더. 그 외의 선택지가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
칼시온은 이미 성인 남성이었지만 얼핏 웃음기 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어린애가 너무 점잖은 것도 딱한데.”
셀리나는 어린아이 대하듯 칼시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칼시온이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셀리나의 손을 쳐 내거나 피하지는 않았다.
“이건 뭐지?”
“어릴 때의 찌오니에게 보내는 마음?”
칼시온은 싱겁게 웃었다.
“그래, 세계도 뛰어넘어 왔으니 그대라면 시간도 뛰어넘을 수 있겠지.”
어쩐지 셀리나의 따뜻한 손길이 어린 시절에 닿은 느낌이었다.
셀리나는 베시시 웃으며 쓰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손길 덕분에 몸이 노곤노곤하게 풀어졌다.
“좀 졸리지 않아요?”
하품이 전염되는 것처럼 노곤함도 전염되는 모양이다. 셀리나는 기지개를 켜며 졸음기를 쫓으려 애썼다.
이 세계에 온 이후 늘 강행군이었다. 칼시온이야 늘 그렇게 살아왔다지만 셀리나의 가는 몸에는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을 것이다.
“피곤하면 잠깐 눈 붙여도 돼.”
“그래도 되려나.”
버티고는 있었지만 셀리나의 눈은 이미 무겁게 꿈뻑거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일어나 소란을 피운 데다 옷 가게에서 신경전까지. 체력이 달릴 만도 했다.
“왕비가 제 손으로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오진 않을 테니까.”
재차 이어진 안심시키는 말에 셀리나는 홀랑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럼 진짜 잠깐만 쉴게요.”
기왕 쉬는 거, 제대로 쉬는 게 나았다. 셀리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칼시온의 곁에 누웠다. 드레스 차림이어도 누우니 살 것 같았다.
“딱 오 분만 있다가…….”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하고 셀리나의 머리가 칼시온의 어깨에 툭 떨어졌다. 언제 봐도 이 잠드는 속도는 신기했다.
칼시온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깨를 누르는 무게가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눈을 감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왕비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노크 소리를 듣지도 못했는지 셀리나는 곤히 눈을 감은 채 쌕쌕 숨을 내쉬기만 했다.
흔들어 깨워야 하는데 손이 가지 않았다. 왕비도 어차피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 힘들지 않을 거다. 그래, 딱 오 분만.
왕비가 칼시온의 방에 들어올 수 있던 것은 정확히 한 시간 이십오 분 후의 일이었다.
그나마도 잠을 끊어 자는 것에 숙달된 셀리나가 알아서 눈을 뜬 덕분이었다.
“미쳤나 봐!”
눈을 뜬 셀리나는 정황을 파악하자마자 소리쳤다.
“환자 집에 다짜고짜 쳐들어왔으니 환자가 눈뜰 때까지 기다리는 미덕은 보여야지.”
“아니, 진짜 환자도 아니면서 뭐 이리 뻔뻔하세요?”
“연기력이야.”
“와.”
셀리나는 어이없어하며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을 보며 허둥지둥 매무새를 다듬었지만, 대충 손으로 가다듬는다고 될 상태가 아니었다.
“으으, 어떡해. 너무 푹 자서 부었어. 머리 이거 어쩌지, 머리. 꺄악! 드레스도 다 구겨졌네.”
“평소와 똑같아, 괜찮아.”
“세상에. 이게 어떻게 괜찮죠? 아니지, 제가 물어볼 상대를 착각했네요.”
다시 봐도 상태는 심각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단장을 다시 할 여유는 없었다. 이제까지만도 충분히 왕비를 기다리게 했다.
어쩔 수 없이 삐져나온 머리에 물을 발라 대충 정리하고 침대 옆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준비됐어요.”
“들여.”
칼시온의 명령에 하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두 여인이 들어섰다.
“?!”
셀리나는 놀랐다.
‘왕비랑 공주라며?!’
들어온 것은 한 여인과 한 애였다.
왕세자가 칼시온과 비슷한 연배라 했으니 왕비는 당연히 어머니뻘, 공주는 그보다 살짝 어릴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왕비는 아무리 보아도 자신보다 몇 살은 어려 보였고, 왕비 뒤에 머뭇거리며 뒤따른 공주는 아무리 많게 쳐 줘도 10대 중반이 안 되어 보였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었는지 공주의 이마와 뺨에는 여드름 자국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십 대 문턱을 막 넘은 모습이었다.
‘쟤가 칼시온과 결혼시키려는 그 공주 맞아? 다른 공주 데리고 온 거 아니지?’
아무리 봐도 저 공주와 칼시온과 매칭이 안 됐다. 삼촌과 조카뻘, 좀 일찍 낳았으면 아빠와 딸뻘이었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설마, 설마.’
이 세계의 상식이 거기까지 바닥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청초한 붉은 입술을 한 머라일 왕비는 반짝이를 바른 눈가를 곱게 접어 웃으며 다가왔다.
“공작. 몸이 안 좋다는 말에 이렇게 달려와 버렸지 뭐예요. ……그런데, 별로 안 아파 보이네?”
셀리나는 여러모로 다시 한번 놀랐다.
‘뭐예요’ 다음 말은 생각으로 전환하셨어야 할 것 같은데요. 생각까지 같이 말을 해 버리시네, 이 사람은?
어려 보이는 외모에 발랄한 말투까지 더해지니 더욱 그 어리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후처라고 듣기는 했는데……, 그냥 후처가 아니라 후후후후처쯤 되는 거였나!’
왕과의 나이 차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이 젊은 것도 납득이 잘 안 되는데, 이제 사춘기인 십 대 딸을 낳은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무리 많게 봐 줘도 셀리나보다 한두 살 많을 것 같은데 이제 사춘기인 십 대 딸이 있다면 애가 애를 낳은 꼴 아닌가.
‘왕은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갑작스럽게 마주한 이 세계의 혼란스러운 도덕 관념에 어질어질해진 셀리나의 머리가 잠시 파업을 선언했다.
“아, 같이 온 여자가 있어서 껄끄러워 피하신 거구나?”
그러나, 쉴 틈이 어디 있냐는 듯 왕비의 해맑은 지적이 직선으로 꽂혔다.
셀리나는 멍하게 왕비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쳐도 왕비는 생긋 웃을 뿐 감정을 비치지 않았다. 아니. 숨기는 게 아니라, 없는 것 같았다.
“왕비 전하,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제대로 맞이하지 못함을 용서하시지요.”
책 읽듯 무성의한 칼시온의 인사에도 왕비는 언짢은 내색이 없었다.
“용서합니다. 아프다는데 초대도 없이 찾아온 내 죄지요. 생전 아프다는 핑계를 대신 적은 없어서 혹시나 진짜 어디가 아픈가 걱정이 되어 달려왔습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네요.”
기가 막히게 솔직한 말로 대답했을 뿐이다.
이걸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속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솔직하다기엔 찌르는 곳이 없지 않았고, 속이 보이지 않는다기에는 숨겨진 뜻이 보이지 않았다.
쉽게 상대하면 쉽고, 어렵게 상대하면 어려워지는, 복잡한 사람이었다.
“셀리나라고 합니다. 왕비 전하를 뵙습니다.”
셀리나는 일단 인사부터 했다.
다가온 왕비는 셀리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빙긋 웃었다.
“과연 공작이 렌버드에서부터 싸 들고 올 만한 미색이네. 대단해. 태어나서 너 만한 미인은 처음 봤어.”
“감사합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방침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우선은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왕비는 눈을 접으며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그렇게 얼지는 마. 너 정도 미인이면 결혼하기 전에 어울리기 딱 적당하지. 내가 널 죽일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예……?”
왕비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하나가 셀리나의 머리 뚜껑을 열고 뇌를 두들겨 팼다.
아니 그보다, 왕비에게서도 죽인다는 말이 나왔다. 등장하자마자 살해를 언급하는 게 이 동네 예의는 아닐 테고.
‘왕비도 아이렐의 일에 뭔가 있나.’
셀리나는 황급히 정신을 붙잡았다.
“결혼요? 무슨 결혼이요?”
똑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공작도 언젠가는 결혼하지 않겠니? 우리 제리엘이랑 하면 가장 좋겠고.”
왕비의 말에 제리엘 공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저 나이엔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말만 퍼져도 부끄러워 못 견디는 때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결혼 얘기가 본인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니 얼마나 부끄러울까.
그러거나 말거나 왕비는 기정사실처럼 당당했다. 셀리나도 슬슬 시동을 걸었다.
“저는 공작님이랑 평생 같이 살 건데요.”
“그래, 지금은 불타는 사랑이니 그럴 수 있지. 공작도 같은 생각이신가?”
갑자기 공이 칼시온에게 날아갔다.
“지내 봐야 알겠지요. 당장 내보내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백 점짜리 대답은 아니었으나, 50점 정도는 줄 수 있겠다. 있는 그대로의 진심이니 빈틈을 찔릴 염려도 없었다.
“사람 마음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지금 마음은 확실합니다.”
칼시온의 확답에 왕비는 까르르, 맑게 웃었다.
“세상일이 다 마음만으로 되는 건 아니니까. 셀리나라고 했나? 너도 너무 마음 하나만 믿지는 말렴.”
“안 믿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매달리고 있잖아요.”
왕비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정작 왕비 본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대놓고 말해 편한 얼굴이었다.
“사랑과 결혼은 다른 거니까. 결혼은 조금 더 어른의 일이거든.”
“그렇게 치면 공주님은 너무 어려 보이는데요.”
“어려도 어른은 될 수 있지. 나도 그랬거든.”
“공주님 생각은요?”
“공주도 좋아해. 제리엘, 공작이랑 결혼하고 싶지?”
세 어른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제리엘 공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물어보면 좋아해도 싫다고 하겠다.’
셀리나는 왕비의 막무가내에 속으로 웃었다.
하지만, 달아오른 와중에도 제리엘 공주의 고개는 위아래로 움직였다.
“……네.”
“……네?”
셀리나는 얼떨떨하게 공주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공주는 정략결혼을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이것도 편견이었나!
“공주님, 잘 생각해 보세요. 공주님 나이가 몇인지는 모르지만 공작님은 거의 두 배는 나이가 많은 아저씨라고요. 그게 괜찮아요?”
“나는……, 그래도 괜찮아.”
공주는 소심해 보이면서도 의사 표현은 분명했다. 셀리나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정말 좋으시다고요? 뭐가요?”
셀리나는 이 모녀가 너무 충격적이라 칼시온 본인 앞인 것도 잊고 질문을 난사했다.
“나이도 공주님보다 두 배는 많고, 말도 무뚝뚝하게 하고, 성질 뻗치면 무슨 짓 할지 모르는, 저 무서운 아저씨가요? 게다가 사랑이 뭔지도 몰라요. 분명히 결혼해도 늙어 죽을 때까지 방에 처박아 놓고 방치할 걸요?”
발끈한 것은 칼시온이 아니라 공주였다.
“그치만……, 잘생기셨잖아.”
“…….”
“그리고 공작이 나이 많은 것이 아니라 내가 어린 거야. 공작은 아직 혼기를 넘기지도 않았어.”
공주는 이미 칼시온에게 꽂혀 있었다. 십 대가 꽂히면 그것이 얼마나 강렬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셀리나였다. 십 대 팬의 열렬한 응원과 기행을 누구보다 똑똑히 지켜볼 수 있는 연예인이었으니까.
나이 지긋한 왕비와 표독스러운 공주였다면 차라리 편했을 것을, 독초로 가득한 꽃밭에서 살아남은 왕비와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십 대 공주는 버거웠다.
“공작님은 공주님 좋대요?”
“윽……. 곧 좋아하게 될 거야.”
목소리에 확신은 없었다. 말의 뉘앙스를 보아하니 이미 많이 차인 모양이다.
“공작님은 절 좋아하셔서 곧 그렇게 될 일 없을 거예요.”
“내가 자라면 너보다 더 예뻐질 거야. 돈도 너보다 많고! 지위도 높잖아.”
어린애다운 기준이었다. 물론, 그 기준이 웬만한 세상 사람들에게도 다 적용이 되는 것이 슬픈 일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칼시온에게 통용되는 기준은 아니었다.
“공작님은 그런 것 때문에 절 좋아하시는 게 아닐걸요.”
“……뭐? 그럼 뭐 때문에 널 좋아하시는데? 예쁜 거 말고 뭐가 더 있어?”
“본 순간 ’너다!’라고 생각하셨다던데.”
“그게 예쁜 거잖아.”
“아뇨……, 예쁜 거 말고도 느낌이란 거 있잖아요. 한눈에 딱 느껴지는. 운명 같은. 그런 거.”
“……정말이에요, 공작?”
공주는 충격 받은 얼굴로 칼시온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갑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돌아오자, 칼시온은 얼굴을 굳히고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말로 하세요. 정말 이 여자를 본 순간 ’너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셀리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칼시온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그냥 그렇다고 해!’
둔펠에서의 실수를 반복할 셈입니까?
눈에 힘을 꽉 주고 쳐다보는 셀리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칼시온은 입을 열었다.
“……예.”
“거짓말!”
공주는 빽 소리를 지르고 방에서 뛰쳐나가 버렸다. 그 모습에 칼시온이 뭐라 더 말을 붙이려 입을 여는 걸 보며 셀리나가 다급히 입술을 꽉 다무는 시늉을 했다.
‘그만!’
칼시온은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고 말을 덧붙이면 조금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사실이어도 자신의 연기력은 믿을 것이 못 되었다. 그냥 셀리나의 지시에 따르는 편이 나았다.
“우리 공주가 부끄러움이 좀 많아. 그래도 솔직한 애니까 같이 살다 보면 귀여울 거야. 누구와도 잘 어울릴 거고.”
공주가 퇴장했어도 왕비는 까딱없었다. 정말 흔들림 없이 올곧았다.
“그럼 저보다 나은 다른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요.”
“라센이 즉위한 다음에도 그쪽에 붙어 우리 모녀를 팔아먹지 않거나 지켜줄 수 있는 가문이 흔한 줄 알아?”
왕비는 적당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북부로 도망을 오시면 손님으로 보호해 드리기는 하겠습니다. 목숨 부지는 하시겠지요.”
칼시온은 차근차근 거절했다.
“왜 그렇게 거절해? 공작이 손해 볼 건 없잖아. 내가 후후후후후실이기는 하지만, 공주는 제대로 된 왕족이야.”
“원래 왕세자 전하의 눈이 닿지 않을 만큼 멀고, 적당한 권력을 가진, 미혼을 찾다가 걸린 게 저였지 않습니까.”
“그랬지.”
왕비는 부정하지도 않고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데, 이제는 광산이 터져 버린 바람에 온 세상이 저를 주목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왕세자 전하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같은 조건의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까도 생각했는데, 공주가 그대에게 마음이 생겨 버린 걸 어쩌겠나.”
“말려 보시지요.”
“공작의 거절을 말리면 안 될까? 노는 건 적당히 하고 제대로 된 부인을 앉힐 때가 되긴 했잖아.”
슬슬 끼어들 때가 된 것 같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결국 왕비는 끝내 밀어붙이고 칼시온은 그에 못 이겨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럴 것 같았다.
셀리나가 막 할 말을 짜내 입을 열려는데, 칼시온이 앞섰다.
“필요에 의한 결혼은 안 하려 합니다.”
“……?”
셀리나와 왕비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인가 고민에 빠진 셀리나와 달리 왕비는 즉시 물었다.
“혹시 인생을 막살고 싶어졌어, 공작? 뒤늦은 사춘기야?”
“반대로 더 신중해졌다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에 왕비는 칼시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대의 입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 같은 말이 나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번에는 셀리나가 놀랐다.
‘공주랑 결혼시킬 생각하지 말아라.’
‘조건 보고 한 결혼 때문에 이 난리가 났으니 당분간은 결혼 생각 안 하련다.’
‘결혼 안 해도 난 잘났다.’
까지가 칼시온의 말에서 유추해 낼 수 있던 최대치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아니고 ‘사랑’.
‘사랑이라니!’
저 북부 공작님이?
셀리나는 비죽비죽 솟는 웃음을 참지 못해 입술을 떨었다. 그런데, 그것이 왕비의 눈에는 좋아 웃는 걸로 보였나 보다.
“너무 그렇게 좋아하지 마. 사랑은 한철이다?”
“예? 저게 저 보고 하는 소리……, 맞죠?”
칼시온과 사랑이 너무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 현재 그의 연인을 연기하는 대상이 자신이란 것도 순간 까먹었다.
“평소엔 저런 소리 안 해?”
남들 앞에서는 깨가 쏟아지는 커플 연기로 일관하려 했는데, 그만 본 모습이 나와 버렸다.
아차 싶긴 했지만 차라리 자연스럽고 잘됐다. 무뚝뚝한 칼시온이 사랑 타령한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나중에 수습하는 것보단 원래 그런 말 안 하는 사람임을 인지시키는 편이 앞뒤가 맞다.
“아시다시피 그런 분이라서요……. 행동과 말이 같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안 보이는 곳에서 행동으로는 곧잘 표현한다는 과시는 잊지 않았다.
왕비는 그 말에도 그저 해맑게 웃어주었다.
“당돌하고 귀엽네. 공작, 이번 파티 동반자가 이 아가씨 맞지?”
“맞습니다.”
“사교계에서까지 그러면 안 돼. 그러다 진짜 칼 맞아.”
웃으며 한 얘기였지만, 셀리나의 입가에서는 반대로 미소가 무너져 내렸다.
“저 죽여 버리시게요?”
“나는 그렇게까지는 안 해.”
셀리나의 입안이 바싹 말라 들었다.
“그럼, 누가 그렇게까지 하는데요?”
왕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입술은 올라간 상태지만 눈빛은 섬뜩하리만큼 무서웠다.
“글쎄, 그럴 사람이 한둘이겠어?”
“…….”
얼어붙은 셀리나를 쳐다보던 왕비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픈 사람 붙잡고 너무 오래 괴롭힌 것 같네. 나았다는 소식 들리면 또 찾아올게.”
“살펴 가십시오.”
왕비는 폭풍처럼 들이닥쳤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신없이 오간 대화가 현실이었나 의심이 갈 정도로 얼떨떨했다.
“마지막 말……, 뭔가 아는 것 같죠?”
“음.”
“왕비가 범인인 것 같지는 않아요. 저런 성격이면 그냥 차라리 너, 비켜 주면 안 되겠니? 얘기하고 말았을 것 같네요.”
“그렇지.”
상상해 보니 그럴싸했다. 칼시온의 곁에서 주눅 들어 있는 아이렐과 내가 더 좋은 조건 남자 연결해 줄 테니 비키는 게 어떻겠냐 제시하는 왕비.
“……어?”
왜 그걸 상상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실제로도 말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확인할 방법은 없다. 아이렐과 왕비가 이야기를 나눴다면 사교계의 어느 파티에서였을 테고, 당연히 칼시온은 몰랐을 테니까.
안 그래도 사랑 없이 거래하듯 맺게 된 약혼이었다. 사방에서는 아이렐의 보잘것없는 조건을 비웃고, 따돌리고……. 그것이 렌버드의 공작, 칼시온의 옆자리이기 때문이라고까지 생각이 닿았을지는 미지수다.
‘만약에 그랬다 치고, 그 상태에서 왕비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면?’
자존심이 상해 울었을까, 혹해서 눈이 반짝였을까. 아이렐이라는 사람을 직접 아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도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왕비의 존재가 아이렐에게 적잖은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
네가 있든 말든 공작을 공주와 결혼시킬 거란 선전 포고 같은 말을 듣고서 과연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을까? 아이렐의 사인이 자살이라면, 왕비도 가해자다.
“아이렐이은 분명히 타살이죠?”
“처음부터 말했을 텐데. 상흔 자체가 타인이 내지 않았을 리 없을 만큼 예리했다고.”
그래도 탐탁지 않았다.
“아직 사교계에 제대로 뛰어든 건 아니지만 느낌이 그래요. 누군가가 거슬려서 치워 버리기 위해 죽여 버린, 단순한 사건이 아닐 것 같아요.”
“자살 가능성이 높다는 말인가?”
“그냥 계속 마음에 걸리네요.”
칼시온은 셀리나의 말을 무작정 부정하는 대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직접 아이렐의 방을 보고 이야기하지. 직접 보면 더 생각나는 것이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요?”
“지금.”
칼시온은 팔을 내밀었다. 셀리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그 팔에 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