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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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은 그의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한 남자가 나오고, 그 남자의 일상을 조명하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 영화라기엔 몹시 길고 때로는 심의 규정 위반에 걸릴 만한 장면도 나오긴 했지만,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꿈은 불시에 찾아왔고 한솔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제3자의 관점에서 남자를 구경하는 게 전부였을 뿐이다.
한솔은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게 동화되지는 않았다. 알파와 오메가가 없는 세계의 이야기는 흥미롭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세계의 관점에서 한솔이 살아가는 이 세계의 오메가 인권 의식이 나락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지만 불행히도 남자가 속한 세계의 말론 ‘슬레이브’ 성향인 한솔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이 안락한 새장을 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지극히 불필요한 일이라는 걸 깨달은 탓이다.
한솔은 ‘오메가’였고, 그의 세계에선 발정기라 불리는 히트 사이클을 가진 오메가를 먹이 사슬의 최하위층으로, 혹은 알파의 씨받이이자 소유물로 여겼다. 알파 또한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과 비슷한 러트 사이클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히트와 달리 약으로 조정 가능한 러트는 흠이 되지 못했다. 한솔은 그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알파는 오메가를 통제하는 대신, 오메가를 책임지고 보호한다. 꿈속 남자가 그렇게나 바라 왔던,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한 관계였다.
똑똑-.
유모에게 몸을 맡긴 채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한솔은 갑작스레 들린 정중한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한솔은 이경원 의원의 세 자식 중, 하나뿐인 고명 오메가이자 막내였다. 첫째 누나와 둘째 형은 알파이고,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알파는 성인이 되지 못한 오메가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건 현재 한솔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이 의원에 대한 도전이었다.
‘솔아.’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이 의원과 막역한 친구 사이이자 대기업 ‘천성’을 이끄는 유진철 회장의 외동아들, 유신우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리자 한솔을 품에 안고 경계하던 유모가 긴장을 풀었다.
이 의원이 한솔의 방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한 알파는 세상에 유신우뿐이고, 그건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라 놀랄 것도 없었다. 하지만 한솔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귀하게 자란 오메가라면 분명 갑작스러운 방문에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놀라 벌벌 떨고 있을 거라는 이 세계의 편견을 의식해 숨을 참고 풍성한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런 한솔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유모가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달랬다.
“괜찮으세요, 도련님? 신우 도련님이셔요.”
“으응, 괜찮아….”
정·재계의 유서 깊은 가문들이 으레 그렇듯, 이 의원은 한솔이 오메가 판정을 받자마자 곧장 유 회장에게 혼담을 넣었고 둘은 그렇게 세 살 무렵에 약혼이 예정된 사이가 되었다.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이상 둘은 성인이 되면 약혼식을 올리고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식을 올린 순간부터 이한솔의 소유권은 유신우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가 평생 차고 다닐 초커에 이 의원의 이름자 대신 유신우가 새겨지게 될 거란 뜻이다.
이 의원은 자신의 하나뿐인 오메가 아들을 꽁꽁 감추기보다는 어릴 때부터 유신우와 자연스럽게 친해져 자신의 손을 떠난 미래에도 한솔이 편안하기를 바랐다. 이 의원의 체면을 봐서라도 유신우가 정부를 두거나 하지는 않겠지만-사실, 그 대쪽 같은 성격을 생각하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오메가의 처지는 알파의 대우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 이 의원 나름의 노림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게 너무 잘 통해서 문제라구요, 아버지.’
한솔은 유모가 신우를 맞이하러 나간 잠깐의 시간 동안 이 의원을 원망하며 한숨을 삼켰다. 이 의원의 노림수가 너무나 잘 통한 나머지 유신우는 요즘 알파답지 않게 오메가인 한솔을 업신여기거나 통제하려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걸 보면 알파 특유의 통제 성향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신우는 유독 한솔에게 물렀다. 하나하나 간섭당하고 꽉 잡혀 살고 싶은 한솔에게는 무척이나 불행한 일이었다.
집안끼리의 약속이니 미래의 남편이 유신우가 아닐 확률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테고, 사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저 얼굴을 보고 살았던 탓에 다른 알파들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인터넷에서 모 배우 부부의 알파 아들에 대한 기사를 본 적 있는데 객관적으론 잘생겼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지만 유신우를 가져다 대니 오징어가 따로 없었다.
한솔의 심미안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지 오래였다. 전부 유신우 탓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깜박-. 그는 갑작스레 제 앞에 드리워진 신우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확 붉혔다. 이런 반응은 굳이 꾸미지 않아도 저절로 나온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17년째 내성이 생기지 않아 고생하는 심장에게 연민을 느끼며 한솔은 부끄럽다는 듯 주춤주춤 뒤로 얼굴을 물렸다. 이렇게 하면 보통 알파들은 쫓아와서 더 괴롭히지 않나? 그런데 한솔을 빤히 들여다보던 신우는 가볍게 한솔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 간만에 먼저 거리를 좁힌 게 무색하게도 산뜻하게 떨어져 나갔다. 굽혔던 허리를 편 신우가 정적인 얼굴로 한솔의 방을 휘 둘러봤다. 한솔은 신우가 자신을 보지 않는 사이 입술을 비죽였다.
‘차라리 좀 더 일찍 들어오지.’
이왕이면 샤워할 때나, 머리를 말릴 때 말이다. 그때는 알몸이었으니까… 그래야 약혼 예정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해서 가운밖에 챙겨 입지 못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저 수도승 같은 소꿉친구도 반응을 좀 보일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아쉬워졌다. ……혹시, 그것도 고려해서 이때 노크한 건가? 갑자기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셔츠의 단추를 잠그는 과정만 남았기 때문인지 유모는 한솔에게 다시 오는 대신 드라이 맡겨 놓은 교복 재킷을 가져오겠다며 방 밖으로 나갔다. 본래라면 미성년의 알파와 오메가를 단둘이 방 안에 있게 하진 않겠지만 이게 전부 다 유신우가 너-무 믿음직스러운 탓이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을 잡는 것 외에는 스킨십을 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굴거나 말로 희롱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게 몇 달도 아닌 몇 년이나 이어지다 보니 유모도 마음을 놓은 게 틀림없었다.
“별로, 바뀐 건 없네.”
“일 년밖에 안 지났으니까.”
그렇다. 이 의원이 유신우에게 프리패스권을 쥐여 준 게 무색하게도 유신우가 한솔의 방을 처음 방문한 것은 무려 일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도 한솔이 아파서 온 거였지, 아니었으면 평소처럼 사방이 트인 응접실에서 아주 건전한 만남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방까진 무슨 일이야…? 그렇게 빤히 보면 민망한데….”
정말 바뀐 걸 찾아내기라도 할 셈인지 방 안을 구석구석 훑어보는 신우의 모습에 한솔은 그의 새끼손가락을 살그머니 움켜쥐고 흔들었다. 다른 곳에 가 있던 유신우의 시선이 단번에 그의 머리 위로 꽂혀 들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던 터라 신우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시선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약혼이 얘기된 관계라지만 외간 오메가의 방 안을 그렇게 살펴보는 건 실례라는 걸 어필하며 부끄럽다는 듯이 말하자 유신우의 손끝이 움찔 튄다. 그가 난감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미안, 나도 모르게.”
한솔의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갔다. 이거 그린 라이트인가? 그린 라이트 맞지?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은데.”
“…아-.”
“안 보여 줄 거야?”
동갑인 소년의 손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손바닥이 한솔의 턱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하나하나가 전부 섬세하고 길쭉하게 생긴 손가락이 귓불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왕이면 머리채를 잡거나 강제로 턱을 붙잡아 들어 올리도록 하는 게 더 취향이었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며 한솔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입술을 오물거렸다. 신우의 시선이 자신의 입술에 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한 행동이었다.
“……작네.”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무엇이 작다는 걸까. 입술, 키? 아니면 몸?
한솔은 통상 오메가의 특징이라고 꼽히는 작은 키와 몸, 쏙 들어간 허리, 상대적으로 통통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전부 타고난 체형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붙지 않는 대신, 근육도 붙지 않았다. 아직 덜 자란 것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던 탓도 있을 거라고 주치의가 말했다. 항상 붙어 다니는 알파의 신장이 벌써 성인 못지 않기 때문에 더 작아 보이는 것도 있는데 한솔은 그 차이가 꽤 마음에 들었지만, 신우의 눈에는 못마땅해 보이는 모양이다.
“언제 크냐.”
신우가 손을 거둬들이며 자신의 얼굴을 크게 한 번 쓸어내렸다. 한솔은 신우의 시선에서 벗어난 틈을 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한솔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빨리 자라고 싶은 건 자신이라고. 그래야 합법적으로 신혼집에 감금을 당할 수 있을 텐데 설익은 시간은 너무 더디게 흘러갔다.
“왜 왔냐고 했지. 어제,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길래 와 봤어.”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를 띄우던 한솔은 진지해 보이는 신우의 눈빛에 일단 본능적으로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신우가 한솔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어제라면 첫 등교 날인데… 그전까진 가정 교육으로 대체해 왔기 때문에 조르고 졸라서 겨우 허락받은 학교는 글자 그대로 신세계였다. 일단 또래 애들이 굉장히 많았고 선생님들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천 명 가까이 생활하는 공간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건물에도 감탄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이 전부 베타라는 게 가장 놀라웠지. 전체 인구로 따지면 형질인은 10%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주변 인물의 대부분이 알파, 아니면 오메가였던 한솔에게는 꽤 동떨어진 세계였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베타들은 초커를 차고 있는 자신을 보곤 하나같이 눈을 떼지 못했다. 왕성한 호기심과 약간의 멸시가 담긴 시선들 속에서 무섭다는 듯이 신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즐긴 기억밖에 없는 한솔은 쓰다듬을 받으면서도 조금 아리송해졌다. 지금 그게 힘들었냐고 묻는 거 맞겠지?
“아냐, 이제 괜찮아. 어제는 첫날이라 조금 긴장해서 그래.”
“그래도 계속 이럴 텐데 지금이라도 오메가 전용 학교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어?”
신우의 걱정은 타당했지만, 한솔은 그 걱정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도 쭈욱 자신을 희귀 동물 구경하듯이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운 스쿨 라이프를 즐길 예정이었으니까.
한솔이 오메가 전용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 들어간 계기는 이렇다. ‘학교는 가 보고 싶은데 혼자서는 무섭다.’, ‘신우랑 같은 데 다니고 싶다.’라며 아버지인 이 의원을 몇 날 며칠 조른 결과물이었다. 이 의원은 오메가인 데다가 금쪽같은 막내아들을 아무리 오메가 전용 학교라지만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폐쇄적인 공간에 보내도 괜찮은지 고민하던 차에 유신우라는 믿음직한 예비 사위라는 존재가 등장하자 홀라당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유신우까지 명문가 자녀들만 다닌다는 알파 전용 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하게 되었지만 그 정도 친목은 대학교에 올라가서 해도 늦지 않는다며 재계 1위 기업을 이끄는 유 회장의 너그러운 허락 하에 둘은 일반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지금까지 집 안에 거의 갇혀 살았던 걸 생각해 보면 성인이 되기 전에 베타들과 부대낄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한솔의 심지는 굳건했다.
“너랑 같은데 다니고 싶은데….”
축 처진 눈꼬리를 하고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하자 한솔을 설득하던 신우가 멈칫한다. 역시나 그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만약 유신우가 강건하게 지금이라도 전학을 가라며 밀어붙였다면 한솔은 군말 없이 학교를 옮겼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보다 신우의 명령이 더 절대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한솔 한정으로 물러 터진 유신우는 한솔의 작은 애교 하나만으로도 금세 난감해하는 인간이었다. 한솔은 그가 만약 조선 시대의 왕이었다면 요사스러운 중전한테 홀려서 홀라당 나라를 말아먹었을 게 분명하다고 장담했다. 물론 그 중전의 이름은 이한솔이었다.
“…알았어. 그럼 힘들면 바로 말해야 해.”
“응!”
이것도 통제라고, 작은 부탁마저 소중하게 받아들이고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자신을 보며 한솔은 속으로 피눈물을 삼켰다. 아, 대체 언제쯤 유신우한테 집착 당해 보나- 저렇게 완벽한 피지컬을 두고, 얼굴은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인상인 주제에, 하는 짓은 물러 터졌다. 한솔은 마음속으로나마 가슴을 퍽퍽 쳤다. 아예 그런 성향이 없다면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면서 왜 나한테만 이러는지 모르겠다. 한솔은 진심으로 억울해졌다.
“도련님-.”
그때, 타이밍 좋게 유모가 돌아왔다. 안 그랬으면 억울함에 열이 뻗친 한솔이 차라리 집에 가둬 달라고 신우에게 징징댔을지도 모른다. 교복 재킷과 더불어 오늘 차야 할 초커를 들고 온 유모가 신우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유신우도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를 한다. 이렇게만 보면 마냥 가정 교육을 잘 받은 잘생긴 청년 같아 보이지만 한솔로서는 유신우가 통제 성향이 있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는 태도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제가 할게요.”
“하지만, 이런 일을 신우 도련님께 맡길 수는….”
“이모님.”
신우가 지긋이 유모를 바라봤다.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 앞에 놓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얼어붙고는 했다. 사람들은 유신우에게 호감을 사고 싶어 했다. 유신우도 굳이 그런 사람들을 일일이 쳐 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신우를 어려워했다.
“직접 빨래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옷 입혀서 같이 등교하겠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네.”
“이모님은 그렇지 않아도 바쁘신 분이니 시간이 빈 김에 조금 쉬시든가 아니면 다른 일을 하셔도 괜찮겠네요.”
알파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한 얼굴의 중년 여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정적인 얼굴이던 알파는, 서늘한 표정을 지우며 그제야 부드럽게 웃었다. 어느새 중년의 여인이 들고 있던 가죽 목걸이와 겉옷은 알파의 손에 들려 있었다.
“혹시 제가 이경원 의원님께 무례를 끼친 거라면 지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중하게 사과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도련님 방에 신우 도련님의 출입을 허락하신 건 주인님이신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유신우는 다시 예의 바른 청년의 얼굴로 돌아와 유모의 무릎 건강을 염려하며 쉬기를 강권했다. 이미 유신우의 페이스에 말려든 유모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학교 조심히 다녀오세요, 도련님.’ 하고 방을 나갔다. 다시 한번, 폐쇄된 공간에는 미성년의 알파와 오메가만 남게 되었다. …역시 유신우가 너무 믿음직스러운 게 문제였다.
한솔이 눈만 껌벅이는 사이 대화 한 번으로 단둘이 있을 공간을 확보해 낸 신우가 검은색의 가죽 초커를 들어 올렸다. 달칵. 초커의 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곧이어 목걸이를 쥔 커다란 손이 한솔에게 다가왔다. 한솔은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신우는 묵묵히 한솔의 목에 초커를 채우고는 끈을 단단히 조였다. 읏, 목을 옥죄는 느낌에 한솔이 작게 신음했지만 유신우는 한솔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볼 뿐, 조임의 강도를 풀어 주거나 느슨하게 만들어 주진 않았다. 그저 상처가 나지 않을 정도인지 목걸이와 목 사이의 공간을 확인하고 옆쪽의 가죽을 진득하게 문지를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경원 의원의 이름 석 자가 새겨져 있을 그곳을.
“학교, 갈까?”
한솔에게 재킷을 입혀 주고 단추를 채워 준 신우가 말했다. 어쩐지 멍한 머리로 얌전히 신우가 하라는 대로 따르고 있던 한솔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유모를 압박하던 그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솔은 서서히 뺨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는 마음속으로 성질을 낸 게 언제냐는 듯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신우야, 그… 담임 쌤이 부르시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수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하지만 어쩐지 어제만큼 흥이 나진 않아서 한솔은 자신보다 한 발짝 앞서 걸어가는 유신우의 반듯한 뒷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그와 자신이 교실에 도착했고 임시 반장을 맡은 아이가 신우에게 말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간을 살짝 찡그린 신우가 자신보다 시선이 한참 아래 있는 임시 반장을 내려다보더니 곧 한솔에게 고개를 돌렸다. 신우는 한솔의 머리를 버릇처럼 슥슥 쓰다듬은 다음 허리를 굽혀 한솔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 있어.”
한솔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유신우가 임시 반장을 따라 걸음을 돌렸다.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멀거니 서 있던 한솔은 그제야 터덜터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오자마자 담임에게 불려 간 탓에 옆자리인 신우의 책걸상은 깨끗했다. 다시 봐도 작은 크기의 책상에 참고서나 올려놓을 수 있을지 의심하며 1교시 수업 교과서를 꺼내 놓던 한솔은 옆자리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듣고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인 양아치 하나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임자가 있는 자리를 허락도 없이 차지하고 앉아서는 껄렁하게 다리를 까딱이며 기분 나쁘게 실실 웃는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걸 간신히 참으며 몸을 뒤로 물리는데 한솔의 뒤로 웬 가자미 하나가 턱 막아섰다. 제 딴에는 꾸민다고 꾸민 것 같은데 한솔의 망가진 심미안에는 그저 가자미처럼 보일 뿐이었다. 앞에는 양아치, 뒤에는 가자미. 진퇴양난에 빠진 한솔이 우뚝 멈추자 양아치가 껌을 짝짝 씹으며 말했다.
“너 오메가라며?”
눈만 멀쩡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을 왜 굳이 말하는 거지.
심드렁하게 생각하던 한솔의 머릿속에서 문득 노란 전구 하나가 반짝 켜졌다.
이게… 그건가? 집단 내 성희롱? 오메가라면 한 번쯤 꼭 당한다는 그것?
요즘에는 오메가를 위한 전용 학교나 시설들이 꽤 많이 생겼다지만 그럼에도 오메가를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알파의 씨받이나 오나홀 정도로 여기는 사회 풍조는 여전했다. 꿈속의 남자가 사는 세상이라면 당장에라도 인권 단체가 들고 일어설 만한 일들이 하루에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으나 피라미드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베타나 실제로 오메가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알파들은 그 모든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베타들이야 우수한 형질인에 대한 열등의식을 형질인이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오메가한테 풀었고 알파들은 기본적으로 ‘제 것’이 아닌 오메가에게 관심이 적었다. ‘내 오메가’의 경우엔 철저히 보호하고 관리하지만 남의 것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보호해 주지 못한 알파의 잘못이란 거다. 그래서 종종 알파끼리도 상대 알파를 욕보이기 위해 오메가를 괴롭히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뒷일 생각 안 하는 멍청이들이겠지만….’
일단은 멀쩡히 초커까지 차고 다니는 오메가를 건든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그런 의미로 통한다는 뜻이다.
초커를 차지 않는 ‘주인 없는 오메가’는 법적으로도 아무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범죄 대상이 되기 더 쉬웠다. 물론, 한솔에게는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인 이 의원의 소유였고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면 멀쩡하다 못해 잘난 알파의 소유가 될 예정이었다.
‘뭐야… 좋잖아?’
한솔은 생각했다. 생각보다 이맘때의 아이들은 더 대책 없고… 멍청하다고. 
학교 내 유일한 오메가가 되어 관심을 빙자한 수군거림 좀 듣고 차별도 받으며 가끔씩 힘들다고 엉엉 울면서 하나뿐인 약혼 예정자에게 달려갈 생각뿐이던 한솔의 눈이 번쩍 뜨이게 된 순간이었다. 이거라면 이용해 먹을 수 있겠는데? 대책 없다고 생각한 어린애들보다 더 대책 없는 열일곱 소년 이한솔은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 일단 나를 괴롭히게 만든 다음 신우가 보게 하자. 그럼 빡쳐서라도 반응을 보이겠지. 자신의 알파가 들었으면 뒷목을 잡고 넘어갔을 생각을 하며 한솔은 희희낙락했다.
‘…뭐, 겸사겸사 욕구도 채우고. 얼마나 좋아.’
윈윈이지. 윈윈-.
한솔은 속으로 히히 웃으며 겉으로는 겁을 먹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한솔의 울망울망한 눈동자가 양아치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자 자신의 노림수가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양아치가 더욱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옆에서 가자미도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야, 얘 완전 오메가처럼 생겼어.”
“뭐래. 오메가 맞다잖아.”
“아니 얼굴 보라고. 사내새끼 주제에 엄청 예쁘게 생겼잖아. 우리 형이 그랬는데 이렇게 생긴 애들은 다 오메가랬어.”
이 시대의 참된 오메가 상이란 건 조신하고 알파 말 잘 듣는 오메가를 말한다. 거기에 어리고 예쁜 건 기본 옵션이다.
한솔은 가끔씩 집에서 술자리를 갖는 아버지께 불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술잔에 술을 채운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참한 며느릿감이라고, 유 회장네에 주기 아깝다면서 한솔의 양손 두둑이 용돈을 쥐여 주었다. 한솔은 누가 봐도 사회가 생각하는 오메가의 표본 같은 아이였고 그 자신도 그렇게 보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말이다.
서화를 배우고 수를 놓고 걸음걸이는 사뿐사뿐하게. 어른들 말씀에 토 한 번 달아 본 적 없으며 쓸데없는 반항은 일절 하지 않았다. 또 생김새는 어떤가. 그는 외모는 타고나는 게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가꾸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운이 좋아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으니 더욱 열심히 가꾸고 관리했다. 뽀얀 피부에 생기 있는 붉은 입술을 가지기 위해. 쌍꺼풀이 짙고 애교 살 있는 눈을 가지기 위해. 근육이 잘 붙지 않는 몸과 만지기 좋은 몸은 다르다. 그는 보기에는 적당히 말라 보이면서도 만지면 말랑말랑한 몸을 만들기 위해 먹을 거 하나 허투루 먹지 않았다.
심지어 젖꼭지랑 거기도 예쁜 색깔을 유지하겠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칼 한 번 대지 않고 한솔이 지금의 얼굴과 몸을 가지게 된 것은 반은 천운이었고 반은 시간과 돈을 쏟아부은 결과물이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적성에 맞는다는 게 한솔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양갓집 오메가들은 종아리가 부르트도록 매를 맞으면서 배운다는데 한솔은 심한 훈육 한 번 받아 본 적 없었다. …물론, 그게 좀 아쉬울 때가 있긴 했지만, 그는 미래를 기약하며 꾹 참았다. 그러니까 저리 간단하게 ‘오메가’ 카테고리에 그를 묶어 버리는 건 상당히 억울한 일이란 뜻이다.
“너 유신우 이거라매?”
가자미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깔짝인다. 한솔이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멀뚱거리자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소리쳤다.
“유신우 애인이냐고!”
“멍청아, 아무리 이뻐도 같은 거 달린 사내놈이랬어. 징그럽게.”
“뭐? 그럼 아니래?”
“애인은 맞을걸?”
오메가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박혀 있지 않은 멍청한 베타 놈들의 대화에 한솔은 문득 현기증을 느꼈다. 아, 빨리 좀 괴롭히지. 이러다가 본전도 못 뽑고 신우가 돌아오게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도움을 주기로 결정하며 한솔은 숨을 곳을 찾는 소동물처럼 바지런히 주변을 둘러봤다. 대놓고, 혹은 아닌 척하며 한솔의 일을 구경하던 다른 아이들이 한솔이 보내는 구원의 눈빛을-물론, 진심은 아니다.- 슬그머니 외면한다. 물론, 그러길 바랐기 때문에 한솔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겉으로나마 울상을 짓자 관심이 고픈 어린애 둘은 도망가려던 한솔을 씩씩거리며 붙잡았다.
“윽, 아파….”
정말 무식하게 손목을 붙잡는 바람에 손목이 뻐근하게 아파 오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피부가 여린 편인데 멍이 들게 생겼다. 한솔이 속으로 혀를 차며 애원하는 척 손목을 붙잡은 양아치를 올려다보자 양아치가 흠칫 놀라더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야, 안 되겠다. 얘 벗겨 보자. 사내놈 아닌 거 아냐?”
“어엉…? 아, 그럴까? 야야, 바지 벗어.”
처음에는 급발진하는 양아치를 따라가지 못하고 버벅거리던 가자미가 돌연 신나서는 한솔의 교복 재킷부터 벗기려 들었다. 한솔이 단정하게 입고 있던 재킷이 순식간에 벗겨진 채 교실 바닥을 뒹굴었다. 부러 재킷을 손쉽게 내어 준 한솔은 당황한 얼굴로 작은 몸을 옹송그린 채 고개를 마구 저었다. 바지를 벗긴다는 놈들이 한솔이 상체부터 가리려 들자 본능적으로 셔츠를 벗기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여간 멍청한 놈들이라니까.
어떻게 알파가 근처에 있는 걸 알고도 오메가의 옷을 벗기려 드는 거지? 속으로 한심하게 바라보던 한솔은 상황을 마무리하기 위해 열심히 슬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음… 이번 해에는 신우가 입맞춤 정돈 해 줬으면 좋겠다. 이제는 좀 포옹 단계에서 넘어가고픈 한솔은 17년째 건전한 스킨십만 해 대는 소꿉친구이자 예비 약혼자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 처량하고 슬픈 생각이 아닐 수가 없다.
좋아. 이제 한쪽만 딱 흘려 주면…!
“뭘, 벗는데.”
돌연 교실에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묻잖아.”
저벅저벅.
“뭘 벗냐고.”
알파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쩡 하니 얼어붙은 교실 한가운데 파문을 일으켰다. 특유의 곧고 반듯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자리로 걸어온 그가 우월한 키를 이용해 교실 안을 느리게 둘러봤다. 방관자들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이윽고 사건이 벌어진 곳을 내려다보자 자신이 아침에 입혀 줬던 재킷이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커다란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본다. 반듯하게 잘 다려 입었던 셔츠는 엉망으로 구겨진 채였고 넥타이는 거의 풀린 채 힘없이 매달려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에 소년의 왼쪽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추락했다. 마침내, 알파의 서늘한 표정에 금이 갔다.
우당탕탕!
곧, 알파가 자리를 무단 점거한 불청객의 어깨를 짚자 험한 소리가 나며 의자와 함께 불청객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희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불청객을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알파가 슥, 소년의 팔을 붙잡고 있는 다른 불청객을 바라본다. ‘히익.’ 소리를 내며 또 다른 불청객이 황급히 떨어져 나갔다.
“시, 신우야….”
한솔이 훌쩍이며 신우를 불렀다. 하필 이때 코가 막힐 게 뭐람. 너무 놀라서 그런지 딸꾹질도 나왔다. 흣, 읏… 딸꾹질을 참으려 하니 꼭 울음을 참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유신우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가 망설임 없이 다가와 한솔을 품 안 가득 안았다.
“미안, 늦었지.”
그가 절절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것을 내리누른 목소리였다. 신우는 화가 나면 참는 스타일이구나…. 그렇지 않아도 서늘한 얼굴이 빙점에 가깝게 굳은 것을 보고 한솔은 신우의 눈치를 봤다. 아까는 정말 쟤들을 죽이는 줄 알았다. 유신우도 그런 눈을 할 수 있다는 걸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날이었다.
“…병원 가자.”
신우는 자신의 어깨를 짚고 있는 한솔의 붉게 달아오른 손목을 보더니 이를 아득 갈았다. 한솔은 조금 난감해졌다. 이런 일로 주치의의 얼굴을 보기엔 양심에 좀 찔린달까. 자신이 유도해서 다친 거나 마찬가진데… 사실 다쳤다고 하기도 뭐 했다. 그냥 피부가 좀 무른 편일 뿐이니까.
한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신우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린다. 한솔은 내적 비명을 지르며 신우의 미간을 마구 문질렀다. 주름! 주름 생기잖아! 아무리 재생력 좋은 알파의 탱탱한 피부라고 해도 주름은 미모의 천적이다. 그는 이 얼굴을 앞으로 팔십 년은 더 끼고 살 생각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꾸준히 관리해 줄 필요가 있었다.
꼬꼬마 시절부터 소꿉친구의 기행을 겪어 온 신우는 금세 인상을 폈다. 그는 자신이 화를 내는 게 무서워서 한솔이 그러는 줄 알았기 때문에 한솔의 앞에선 되도록 얼굴을 굳히지 않도록 노력했다. 한솔로서는 주름이 싫었던 거지 엄숙한 분위기가 주는 긴장감과 설렘이 싫었던 게 아닌데…. 하나는 알고 아직 둘은 모르는 미숙한 소년은 제 발로 제 복을 걷어찬 줄도 몰랐다.
“그럼 양호실이라도 가.”
“곧 1교시 시작하는데….”
힐긋힐긋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자 신우가 문가에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임시 반장을 돌아본다.
“반장.”
“…어?”
“솔이 양호실 데려다줘야겠는데.”
아니, 누가 이 정도로 양호실을 간다고?!
“어어… 내가 선생님한테 말씀드릴게.”
“고마워.”
이미 유신우가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고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반 문턱을 가로지를 때부터 반쯤 쫄아 있던 임시 반장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첫 수업 정돈 째고 양호실을 갈 수 있지. 비록 이게 1학년 1학기 첫 수업이지만… 아무렴.
“가자.”
신우는 한솔을 익숙하게 안아 들었다. 주변의 아이들이 놀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우월한 유전자를 이용해 1학년 2반을 나왔다. 한솔은 부쩍 높아진 시야와 부유감을 느끼며 신우의 목을 답삭 끌어안았다. 복도에 있던 다른 학생들마저 그들을 보고는 당황한 얼굴이 되어 길을 터 줬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이면 유신우 애인이라고 전교에 소문 다 퍼지겠네.’
한솔은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학교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솔의 엉망인 차림새를 보더니, 양호실 선생은 한껏 호들갑을 떨며 파스를 붙여 줬다. 하필 한솔은 오메가였고 오메가는 누구나 인정하는 사회적 약자였다. 비록 베타들이 99%인 학교라지만 심리 상담 프로그램은 존재했기 때문에 한솔은 그걸 듣느라 1교시를 통째로 째게 됐다.
신우는 그의 보호자는 아니었지만 학교 내에서 문제가 발생할 시에 이 의원 대신 일차적으로 책임을 지는 한솔의 보호 대리인이었다. 덕분에 신우 또한 한솔의 옆에서 같이 심리 상담을 받느라 1교시를 날려 버렸고 학생으로서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사교육의 힘을 믿으며 한솔은 신우와 함께 노닥거렸다. 말이 심리 상담이지 전문 기관이 아니다 보니 설문지 몇 개 작성하고 교육용 동영상을 시청하는 게 다였다. 만족스러운 첫 땡땡이였다.
“이한솔. 담임 쌤이 너 불러오래.”
1교시 쉬는 시간. 이제 막 자리에 앉으려던 한솔에게 모르는 여자애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너 혼자 오라 하셨어. 툭 던지듯 말을 전하고 나선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이 쌩하니 가 버린다. 자리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다시 일어서는 한솔을 교실 뒤편의 사물함에서 2교시 수업 교과서를 꺼내 온 신우가 발견하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가.”
“담임 쌤이 부르신대.”
말도 없이 다시 교과서를 집어넣으려는 신우를 한솔이 다급히 붙잡았다.
“나 혼자 갔다 올게!”
“…걱정되는데.”
“나 때문에 1교시도 날렸잖아. 응? 선생님 뵈러 가는 거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너한테 자꾸 방해되면 내가 유 회장님 얼굴을 어떻게 봐….”
조금 시무룩하게 말하자 신우가 한숨을 내쉰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아버지는 상관없어. 그리고 너는 나한테 방해가 아니야. …기다릴 테니까 조심히 갔다 와.”
신우는 먼지가 묻은 한솔의 재킷 대신 자신의 카디건을 한솔에게 걸쳐 줬다. 역시나 많이 컸지만, 한솔은 방긋 웃으며 앞섶을 여몄다.
철저하게 페로몬을 감추고 다니는 신우의 카디건에선 은은한 우디 계열의 머스크 향 대신 비교적 옅게 느껴지는 향수 냄새가 맡아졌다. 한솔은 꽤 아쉽다고 생각하며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교무실로 향했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달라붙었기 때문에 한솔은 부러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보고 걸었다. 이러면 더 초커가 잘 보이겠지?
“쟤가 그….”
“…오메가….”
“유신우랑 같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한솔은 교무실 문을 달칵 열었다. 지나가던 선생이 다람쥐처럼 문 사이로 얼굴만 빼꼼 내놓은 한솔을 발견하더니 담임인 남우현 선생을 부른다.
“남 선생! 이 친구 자네 반 학생 아닌가? 왜 그 유명한-.”
“아, 감사합니다. 최 선생님. 한솔아, 이리 오렴.”
남 선생은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남자 선생이었다.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시력 보호용 안경을 벗으며 한솔을 맞이했다.
“잠깐 걸을까?”
남 선생은 자리에 있던 수학 교과서와 유인물 뭉치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솔은 냉큼 선생으로부터 유인물 뭉치를 받아 들었다. 한솔은 유인물 첫 장에 크게 적힌 ‘1-2’라는 숫자를 보고 나서야 2교시가 담임인 수학인 걸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복도를 따라 쭉 걸으면 되는 걸 마다하고 인적이 적은 빙 둘러 가는 길을 택했다. 한솔은 남 선생의 뒤를 졸졸 쫓아가며 눈을 굴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지? 담임이라 해 봐야 만난 지 겨우 이틀 된 사람이다. 아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한솔아. 남 선생이 그를 불렀다.
“아침에 재우랑 희찬이하고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
“…….”
한솔은 침묵했다. 재우랑 희찬이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대충 양아치와 가자미라는 건 알겠다. 가만히 앉아 있던 오메가의 옷을 벗기려 드는 게 ‘조금’ 안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솔이는 오메가잖아. 오메가가 사회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건… 상당히 보기 좋지 않아.”
“…….”
“선생님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4선 의원인 이경원 의원은 여전히 대외적 활동을 활발히 이어 가고 있는 정치인이다. 지금이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있을 총선 준비까지…. 이럴 때 어린 오메가 자식과 관련해서 구설수가 터지면 상당히 좋지 않다-고 남우현 선생은 말하고 있었다.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냥 제가 맡은 반에 일 터지는 게 싫은 거면서.’
꼭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좋은 선생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니꼬웠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한솔에 대한 멸시를 감추려 들지도 않으면서 꼭 저렇게 우위를 점하려는 인간들이 있다. 한솔은 속으로나마 입술을 비죽였다. 확 꼰질러 버릴까. 아버지는… 말마따나 중요한 시기니까 조금 그렇고. 곧 있을 신우네와의 저녁 식사 때 참다가 울어 버리면 되겠다. 그럼 자신을 꽤 예뻐하는 유진철 회장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한솔은 속으로 상큼하게 웃었다.
“그리고 신우 말인데. 후… 한솔아 그러면 안 돼. 말렸어야지. 알파는 신체 조건부터 다르잖아. 같은 반 친구를 그렇게 밀치면 되겠어? 재우는 다리 삐었다더라.”
한솔은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쌤, 그럼 같은 반 친구가 옷을 벗기려 드는 건 괜찮아요?’
물론, 그러면 선생은 이리 답할 것이다.
‘넌 오메가잖니.’
은근슬쩍 신우를 한솔과 묶어 나무라는 태도에서 알파에 대한 자격지심마저 보였다. 알파인 신우를 불러다가 말할 용기는 없고 그냥 넘어가자니 체면이 서지 않는다. 따라서 만만한 한솔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니, 다 큰 어른이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애들 두고 뭐 하는 짓이람. 남 선생은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알파 앞에서 그의 울타리 안에 있는 오메가를 건드리고도 어디 한 군데 부러진 곳 없이 멀쩡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다른 알파들이 알았다면 모자란 놈이라고 비웃을 만한 일이다. 신우는 그때 살인을 두 번 참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솔이 하다못해 유신우와 약혼 관계기만 했어도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걷고 있지는 못했을 테니까. 아마, 누구 하난 병원에 실려 가서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약혼 예정자’라는 이도 저도 아닌 관계였기 때문에 알파는 오메가를 보호할 권리가 없었다.
제대로 된 보호자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 일은, 결국 가장 약자인 오메가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곤 하는 게 현실이다. 신우는 그걸 막기 위해 결국 ‘보호 대리인’으로서의 애매한 조치밖에 취할 수 없었다. 내심은 정말 죽여 버리고 싶었을 텐데. 그때 신우의 싸늘하게 가라앉은 두 눈을 떠올리며 한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우는 아무래도 보살이 맞는 것 같았다.
“알아들었지, 이한솔.”
“…네에.”
별로 무섭지도 않으면서 분위기만 잡는 모습에 한솔은 속으로 흥, 코웃음을 쳤다. 복종도 좀 근사한 사람이어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기준 라인이 유신우가 되어 버린 한솔에게 남 선생은 입에 넣어 줘도 씹다 뱉어 버릴 떡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한솔은 이미지 관리라는 걸 하는 사람이었고, 남에게 어리고 유약해 보이는 건 그의 셀링 포인트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한솔은 온순하게 대답했다. 기왕이면 그가 자신을 더욱 업신여길 수 있도록 의기소침한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두 손을 꼬옥 맞잡았다. 속눈썹도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듯 팔랑팔랑 깜박였다. 남 선생의 두 눈에 그림자처럼 시커먼 감정이 서렸다.
“그럼….”
그 순간,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
“한솔이는 여기 있을까?”
“……네?”
한솔은 무심코 주변을 둘러봤다. 언제 교실 앞까지 온 건지 두 사람은 1-2반 앞에 서 있었다. 수업 종이 치고 난 뒤의 복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옆 반에서 다른 선생이 판서하는 소리만이 어렴풋이 들려올 뿐이다. 깜박깜박. 한솔은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남 선생을 올려다봤다.
“선생님은 분란을 일으키는 친구를 아주 싫어해.”
한솔에게서 유인물을 받아 든 남 선생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속에서 한솔은 어느새 피해자가 아니라 첫날부터 반 친구와 쓸데없이 다툰 불량 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런 친구는 수업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거든.”
“…….”
“그러니까-.”
남 선생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한솔인 여기서 반성하도록 하자.”
텅 빈 복도. 하지만 언제든지 누군가가 지나갈 수 있는 탁 트인 공간.
“뭐 해, 한솔아. 손들어야지.”
한솔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눈꺼풀을 파르르 떤 한솔이 엉거주춤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선생이 한솔의 두 팔을 쫙 펴게 만들었다. 등을 바르게 펴라는 듯 유인물 뭉치로 툭툭 두들기고는 신발장 앞을 힐긋 눈짓한다. 한솔은 눈치껏 신발장 앞으로 가 섰다. 입술을 앙다물고선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뜨자 고요한 복도에선 한솔의 훌쩍이는 소리만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종 칠 때까지 반성하도록 해. 알겠어?”
“흑… 네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탓에 남 선생의 얼굴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한솔을 홀로 두고 교실로 들어가 버리는 남자에게선 잔인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한솔은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꼰지르는 건 좀 나중에 할까?
푹 숙이고 있었던 덕에 잘 티가 나진 않았지만, 한솔의 두 뺨은 어느새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들 수업 듣는 시간에 혼자 복도에서 벌서고 있는 학생이라니. 엄청나게 수치스러웠다. 그런데 심지어 그게 자신이란다.
‘너무 좋아…….’
한솔은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걸 꾹 참고 어떻게 하면 더 처량하게 보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왕이면 누군가 지나갔으면 좋겠고 또, 그 사람이 자신을 알아봤으면 좋겠다. 아, 근데 신우 귀엔 들어가면 안 되는데…. 남이 소곤거리는 소리엔 일절 관심이 없는 애라지만 그게 이한솔과 관련된 일이라면 또 모르는 일이다. 남 선생의 적의를 봐서는 앞으로 이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날 게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즐거운 이벤트를 사양할 생각이 전혀 없던 한솔은 속으로 끙끙 앓았다.
‘어쩔 수 없지. 담임을 잘 구슬려 보자.’
복도에서 벌서기는 너무 위험 부담이 큰 것 같으니까 이왕이면 다른 걸로-.
알파 몰래 위험한 유희를 즐길 생각을 하는 오메가가 속으로 히히 웃었다.
확실히… 누구보다도 그 나이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솔이었다.
***
‘아으… 팔 저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잠시 딴청을 부릴 만도 하건만 한솔의 성향은 그걸 가만두지 못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도 꿋꿋이 벌을 서고 있던 한솔의 몸에서 미약하게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같이 가볍고 달달한 플로러 계열 향이 한솔의 주변을 은은하게 배회한다. 아직은 설익고 풋풋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소담하게 부푼 꽃봉오리가 금방이라도 톡 터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느껴졌다. 소년이라는 나이가 주는 미성숙함과 반대로 태를 잡아 가는 어여쁜 몸은 그사이의 달큼한 젖과 꿀을 기대케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혹여나 지나가는 알파라도 있었다면 큰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드르륵.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꿋꿋하게 벌을 서고 있던 한솔은 고요한 복도에 울려 퍼지는 낡은 문이 문턱과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에 꼬리뼈를 타고 쭈뼛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슥, 스윽. 실내화를 끄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한솔의 머릿속이 팽팽하게 돌아갔다. 누구지? 심부름 가는 학생? 아니면 일찍 수업을 마친 선생님? 긴장감에 주먹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폭신한 실내화 속의 발가락이 곱아 들어 갔다. 탁.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이 멈추는 소리가 들리자 한솔은 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도 전에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럼에도 자신을 관찰하는 집요한 시선만큼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뭐야, 이건 또.”
지극히 흥미롭다는 목소리이다.
저벅.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등 뒤로 신발장의 모서리가 툭 닿는 것이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머리 위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팔부터 시작해 정수리에서 귓불로, 다시 늘씬한 상체로 이어져 내려온 시선이 가슴 한쪽을 빤히 바라본다. 카디건에 반쯤 가려져 있던 하얀 명찰을 구멍이라도 낼 듯이 노려보는 시선에 한솔은 조용히 침을 삼켰다. 그는 자신이 벌을 서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재밌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뇌까지 직행하는 짜릿한 쾌감에 잠식당했다.
“이한솔… 어디서 들어봤는데.”
목소리의 주인이 느릿하게 말을 흘렸다.
“너, 고개 들어 봐.”
머리 바로 위에서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사람이 내뿜는 열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는 전시된 상품을 구경하는 관객이었고 한솔 자신은 박제된 피사체였다. 결국 한솔이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눈을 번쩍 뜨는 순간, 머리채가 붙잡혀 고개가 위로 홱 꺾였다.
“흣…!”
“아하.”
반동으로 인해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륵 흘러내린다. 눈물방울이 턱 끝에 매달려 위태롭게 흔들렸다. 한솔은 푹 젖은 속눈썹을 깜박이며 눈앞의 무례한 존재를 바라봤다. 키는 한솔보다 훨씬 컸고 신우보다는… 조금 작아 보였다. 아무튼 평범한 또래의 키는 절대 아니었다. 한솔의 망가진 심미안이 보기엔 적당히 생긴 놈이었지만 세간에서는 이런 애들을 보고 잘생겼다고 한다는 것 정돈 안다. 인성은 얼굴값을 하려는지 무례하기 짝이 없었지만.
무례한 놈의 가슴에 달린 흰 명찰에는 ‘권정우’가 날린 듯 적혀 있었다. 한솔과 같은 1학년이란 뜻이다. 넥타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셔츠 단추는 두어 개 풀린 상태. 아까 반에 있는 놈한테 양아치라고 한 게 내심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진짜 양아치는 여기 있었다. 머리를 물들이진 않았지만, 날 티 나게 생긴 인상과 귓불에 화려하게 달아 논 피어싱의 존재가 무시무시했다. …여기 학교 교칙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염색에 피어싱에… 두발 자유를 선도하는 학교 문화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여기 있었다.
“그 알파 놈 암캐였네?”
권정우가 피식 웃는다. 한솔은 두 귀를 의심하며 눈을 치켜떴다. 언젠가 상스러운 말을 들으며 매도당하고 싶다고 기대하긴 했지만, 한솔은 일단 유서 깊은 정치인 집안의 고명 오메가였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산 몸으론 한평생 그런 단어는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것도 면전에다 대고 난생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뭐, 그렇다고 싫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볼 안쪽을 꾹 깨문 한솔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이 눈물 젖은 속눈썹을 파르르 떤다. 수치스러워하는 얼굴로 두 뺨을 발그레 물들인 채 입술을 앙다물자 권정우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한솔이 반항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슬쩍 뒤로 빼자마자 곧장 머리채가 잡혀 바짝 당겨졌다. 으읏…. 예상하긴 했지만 진짜 아팠다. 새로 눈물이 핑 돈 얼굴을 권정우가 흥미로워하는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목줄까지 찬 개새끼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여기 이러고 있을까.”
한솔을 완전히 암캐로 매도하는 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에게는 수치스러워서 그런 걸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너무 좋아서 그랬다. 저런 말까진 아직 면역이 없어서 몸이 컨트롤이 안 됐다.
부디 뒤가 젖지만 않기를 바라며 한솔은 반쯤 촉촉해진 것 같은 구멍을 꽉 조였다. 춘추복 바지는 꽤 얇았고 뒤가 젖는 순간 회색 천이 까맣게 물이 들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든 가려 보겠다고 겉옷을 허리에 묶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녀야겠지. 교복이라는 옷이 주는 단정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더 음탕하고 음란해 보였다. 구미가 꽤 당기는 선택지긴 했지만, 한솔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신우라면 페로몬 때문에라도 단박에 알아차릴 게 분명한데 변명할 방법이 없어서였다. 뭐,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나중에 신우 꼬셔서 꼭 해 봐야지.
“이봐, 암캐.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권정우가 한솔의 초커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애초에 초커와 목 사이가 넉넉했던 것도 아니라서 권정우의 손가락이 그 사이를 파고들자 저절로 호흡이 가빠졌다. 뭐야, 나 지금 브컨 당하고 있는 거야? 심지어 여긴 학굔데…? 난생처음으로 당해 보는 브레스 컨트롤에 한솔은 입꼬리를 씰룩이지 않기 위해 혼심의 힘을 다해야 했다. 오히려 그는 숨을 색색 내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거, 이거 놔 주세요…. 흐윽….”
“내가 왜?”
뻔뻔스러울 정도로 매정한 얼굴이다. 결국 한솔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졌다. 권정우는 그런 한솔을 구경하며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가끔씩 초커를 잡아당겨 한솔이 괴로워하는 걸 방관하기도 했다. 한솔은 그 모든 취급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결국 권정우가 이한솔을 놔 준 것은 족히 수 분이 지난 후였다. 이한솔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며 눈앞의 남자가 무섭다는 듯이 신발장으로 바짝 붙어 섰다. 그 겁먹은 개새끼 같은 모양새에 권정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무려 우성 알파라는 소문이 있는 유신우의 암캐라기에 어떤 놈인가 구경이나 하자 싶었더니.
그냥 평범한 오메가였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화 한번 내지 못하고 할 줄 아는 건 우는 것밖에 없는-.
빠르게 흥이 식은 권정우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렸다. 예민한 감각이 등 뒤에서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을 감지한다. 난데없이 봉변을 맞아 작게 훌쩍이는 소리. 몸을 추스르는지 부스럭거리는 움직임은 소동물의 그것을 닮았다. 애초에 복도 끝에서 살랑이던 봄바람의 내음만 아니었어도 권정우는 이한솔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이사 벌을 받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느리게 복도를 걷던 권정우는 문득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발걸음을 멈췄다. 작은 발이 총총총 걸어온다.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하얀 손이 그의 셔츠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았다. 권정우의 짙은 눈썹이 즉시 삐딱선을 그렸다.
“저기….”
역시 이한솔이 맞았다. 그거 조금 울었다고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 도톰한 입술이 우물우물거리며 그의 눈치를 본다.
이놈은 뇌가 없나? 권정우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그렇게 당했으면 욕이나 실컷 하고 피해 갈 궁리를 할 것이지. 굳이 쫓아와서 그를 붙잡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뭐.”
그래도 들어나 보자 싶어서 짧게 대답하자 이한솔은 작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그를 울먹이는 눈으로 올려다본다. …어지간히도 겁이 많네. 쯧, 혀를 찬 권정우가 등을 돌리기 위해 발목을 비틀자 마음이 다급해졌는지 이한솔이 그의 셔츠 자락을 꾹 잡아당기며 외쳤다.
“시, 신우한테!”
“……?”
“신우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곤 고개를 푹 수그린다. 끝이 곱슬거리는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불이 수줍게 물들어 있었다.
“하….”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더니.
그냥 제 주인한테 꼴사납게 벌을 서던 걸 들키고 싶지 않았나 보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짓던 권정우는 발을 돌리려던 걸 관두고 이한솔을 마주 봤다. 한 손으로도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은 둥근 두상을 내려다보다가 매끈한 턱을 붙잡고 강제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갈색을 띠는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왜 있지 않은가. 기분 나쁠 정도로 깨끗하고 맑은 눈동자. 마치 사냥당하기 직전의 사향노루의 눈망울 같은-.
이한솔의 눈은 그런 눈을 닮았다. 권정우는 제 더러운 속이 급격히 꼬이는 걸 느끼며 입술을 비틀었다. 하여간 운도 지지리도 없지. 애초에 그 알파 놈과는 말을 섞을 생각조차 없었는데 굶주린 이리 새끼의 입 안에 제 발로 찾아오다니.
“내가 그러면 넌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이한솔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이런 개소리를 듣고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걸 보니 이제는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다. 한 입 거리도 안 될 초식 동물이 데굴데굴 굴러와 ‘제발 저를 잡아먹어 주세요!’ 하는 기분이랄까. 조금 착잡해진 권정우가 됐으니까 그만 가 보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뭐든지… 다 해 드릴게요…!”
이한솔이 최악의 패를 뒤집었다.
흐흥. 한솔은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슬리퍼를 바닥에 슥슥 문질렀다. 권정우가 갑자기 등을 돌려 가 버릴 때만 해도 이 즐거운 이벤트가 벌써 끝이 나 버린 건가 싶었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 했던가. 기지를 발휘해 권정우를 쫓아가서 ‘뭐든지 할게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권정우는 어쩐지 한솔을 한심하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선 돌아가 버렸다. 마지막 반응이 시원찮긴 했지만, 자고로 사내놈 중에서 저 카드를 안 쓰는 놈은 세상에서 유신우밖에 없다. 아무리 남발하고 다녀도 ‘옷 한 겹 더 껴입기’, ‘밥 한 숟가락 더 먹기’밖에 쓰지를 못하는 소꿉친구를 떠올리며 한솔은 아련한 눈빛을 해 보인다. 그때는 그랬지… 응….
띵- 동- 댕- 동-.
종소리가 울리자 가장 먼저 1-2반의 앞문이 열렸다. 남 선생은 한솔을 한 번 힐긋 바라보더니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게 다였다. 벌은 잘 서고 있었는지 검사라도 할 줄 알았던 한솔은 입술을 비죽 내민 채 투덜거렸다. 이 집은 애프터 서비스가 영 별로인걸. 한솔은 다른 아이들이 나오기 전에 냉큼 팔을 내리고선 후들거리는 두 팔을 주무르며 뒷문으로 들어갔다. …만약 팔짱을 끼고 버티고 서 있는 유신우를 만날 줄 알았다면 복도에서 조금 더 뻐기고 있었을 것이다.
“이한솔.”
솔아, 도 아니고 한솔, 도 아니고 무려 이한솔이다.
한솔의 등을 타고 삐죽 식은땀이 흘렀다.
“으응….”
“따라와.”
신우가 밖을 눈짓한다. 한솔은 신우의 기에 눌린 채 쭈뼛쭈뼛 그를 따라갔다. 설마 봤을까? 한솔은 몇 분 전까지 대책 없이 좋아하던 자신을 쥐어박고 싶어졌다. 바보야! 그래도 변명은 생각해 놨어야지! 마음속으로 머리를 싸매며 끙끙거리는데 달칵, 갑자기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
한솔은 그제야 자신과 신우가 화장실 칸에 같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상담받고 왔다며.”
“어어…? 누가 그래?”
“담임이.”
…언제부터 손 들고 벌선 게 상담이 된 건가요, 남우현 선생님?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신우의 묵묵한 시선은 가실 줄 몰랐다.
“그건 그렇고.”
“…….”
“상담을 받고 왔다는데 왜 페로몬이 밖에 나와 있을까.”
한솔은 흠칫 놀랐다. 다급하게 제 손목 안쪽을 킁킁거려 보았지만 아무 냄새도 맡아지지 않았다. 굳이 고르자면 약간의 비누 향 정도…? 본래 형질인은 자신의 페로몬을 잘 느끼지 못한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솔은 지금 자신의 페로몬 샘이 잘 닫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베타 학교라지만 형질인이 한 명도 없는 건 아냐. 오메가는 없지만 실제로 알파는 나 말고도 두엇 더 있다고 들었어.”
오메가가 페로몬을 개방하고 다니는 것은 ‘나를 얼마든지 범해도 좋다.’는 사인이나 마찬가지이다. 발정기인 히트 사이클이 멸시받는 만큼 유혹적인 오메가의 페로몬은 그런 의미를 지녔다.
반대로 대부분의 알파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페로몬을 개방하고 다니는데 언제나처럼 예외는 있었다. 당장에 그의 앞에 있는 유신우조차도 철저히 페로몬을 감추고 사는 알파였다. 그런 알파는 육안으로밖에 구별할 방법이 없어 오메가가 미리 알고 피해 다니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실제로 그런 점을 이용해 페로몬을 감추고 있다가 오메가를 덮치는 알파도 있었다.
“조심해야지, 솔아.”
“…미안해. 잘못했어.”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얼마나… 하….”
신우가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려는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교복 속에 감춰진 단단한 근육이 느리게 기지개를 켰다가 가라앉는다. 감정 조절에 뛰어난 편인 만큼 신우는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본래라면 근 한 달간 겪었을 감정 기복을 어째 자신 때문에 하루 만에 몰아 겪는 듯했다.
한솔은 한 발짝 다가가 신우의 검지를 살그머니 움켜쥐었다. 좁은 화장실 안인 만큼 한 발자국 만으로도 거리는 쉽게 좁혀졌다. 아래에서 위로 눈을 힐긋 들어 올리며 한 번만 봐 달라고 눈을 깜박이자 신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쉰다. 자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 손길이 좋아서 한솔은 부러 신우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아예 조절이 안 되는 거야?”
“응… 나 지금 닫은 건데. 그래도 많이 나?”
“조금. 아주 멀리서부터 맡을 정돈 아냐.”
반대로 근처라면 맡아진다는 소리다.
“정말 상담 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지.”
“…으응.”
“너한테 무례하게 군 사람은.”
“아냐, 없어….”
양심이 따끔따끔거렸다.
“그럼 첫 히트는?”
신우가 낮게 물었다. 한솔은 움찔했다. 두 볼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한솔은 신우와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속삭이듯이 작게 말했다.
“진단으론 세 달 정도… 남았어.”
벌써부터 페로몬 샘에 영향을 줄 만큼은 아니라는 뜻을 알고 신우가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모레엔 병원부터 가 보자. 강 원장님 예약해 둘게.”
신우의 단호한 말에 한솔은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결국엔 주치의를 만나게 되는구나… 근데 왜 오늘이나 내일 안 가고? 궁금한 것을 묻자 신우가 대답해 준다.
“지금부터 너한테 페로몬 샤워를 할 거니까.”
한솔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당장 조절이 안 된다고 내버려 둘 순 없어. 네가 선택해. 조퇴하고 문제 해결될 때까지 집에 있든가, 아니면 나한테 페로몬 샤워를 받든가.”
만약 이곳에 이 의원이 있었다면 당장에 조퇴를 시켜 집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그리고 히트가 세 달밖에 남지 않은 만큼, 페로몬 샘 문제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금방 병결을 내야 할 가능성이 컸다. 학기가 시작한 지 겨우 이틀째이고 한솔이 학교에 가고 싶다든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이 의원이 결정한 이상 한솔의 의견은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게 오메가를 소유한 알파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우의 말은 만약 한솔이 원한다면 일종의 방패가 되어 주겠다는 뜻이다.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면 이 의원도 크게 성을 내진 못할 테니까.
그러나 그 모든 걸 제치고도 가장 큰 문제점이 남았다.
‘처음인데….’
한솔은 페로몬 샤워가 처음이었다.
“결정했어?”
묵묵히 한솔이 생각할 시간을 주던 신우가 물었다. 한솔은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부끄럽다는 듯이 답했다.
“…그게, 나 처음인데.”
“…….”
유신우가 멈칫했다. 정말 당황했는지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처음?”
“응….”
“의원님이나 누님, 형님한테는…?”
“안 받아 봤지.”
한솔은 이제 어깨를 펴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너한테 받으려고 아껴 놨단 말이야.
“……하아.”
신우가 한숨을 내쉰다. 한솔이 왜 그러냐는 듯 올려다보자 신우는 심란한 눈을 한 채 한솔을 내려다봤다.
“이걸 확 잡아먹어 버릴 수도 없고.”
“응? 뭐라구?”
빠르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한솔이 못 들었다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신우가 ‘후….’ 아까보다 더 심란해 보이는 얼굴로 한숨을 내쉰다.
“빨리 좀 커 봐.”
한솔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자기도 나랑 동갑이면서. 맨날 나보고만 크래.
“게다가 하필 처음을 이런 곳에서….”
신우가 낮게 욕설을 내뱉자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 한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뺨을 붉히며 그를 힐긋힐긋 바라본다. 욕할 때는 목소리가 더 낮아지는구나. 나중에 침대에서 해 주면 엄청 좋겠다. 그 권정우가 말한 그것도….
“일단 처음이면… 증상이 꽤 셀 거야. 히트 사이클도 앞당겨질 거고.”
“증상이 뭔데?”
“…….”
오늘따라 신우가 말이 막히는 모습을 자주 보는 듯한 기분이다. 꽤 신기한 일이었다.
“…해 보면 알아.”
그러면서 유신우가 이한솔을 폭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한솔의 유연한 등허리 라인을 타고 양손을 미끄러지듯 내리더니 한솔의 교복 바지 안으로 손끝을 집어넣었다. 한솔의 가는 허리가 신우의 양손에 넉넉히 붙잡혔다.
“자, 잠깐 신우야…? 우리 아직은 이러면 안 되는데…!”
한솔은 포옹 다음이면 키스일 줄 알았지 갑작스레 훅 나가는 진도에 당황해서 신우의 팔을 붙잡았다.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발랑 까져서는.”
너, 다 크기 전엔 안 해. 신우가 한솔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한솔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아니, 그건 좀 곤란한데… 난 그냥 여기는 콘돔이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거라구….
신우의 검지가 허리 라인을 슬쩍슬쩍 매만질 때마다 등허리를 타고 쭈뼛 소름이 돋았다. 어쩐지 발가락 사이사이가 간지러운 것 같고 허벅지 안쪽이 찌르르 달아올랐다. 한솔은 소변을 참는 것처럼 다리를 꼬아 허벅지를 비비며 낑낑거렸다. 한솔의 등을 느리게 토닥인 신우가 말했다.
“쉬이… 긴장 풀어.”
한솔이 얕게 숨을 헐떡이자 잠시 쓰다듬는 것을 멈춘 신우가 배 쪽으로 손을 옮겼다. 따뜻한 아랫배에 차가운 손길이 닿자 한솔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신우가 미안하다는 듯이 가만가만 그곳을 달래고선 한솔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커다란 손안에서 한솔의 교복 바지가 손쉽게 벗겨져 나간다. 다리를 타고 뻣뻣한 천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리는 느낌에 귓가가 화르륵 달아올랐다.
콘돔 없인 안 되겠지…? 유신우가 그런 대형 사고를 쳐 줄 리 없겠지…?
…그래, 눈앞의 알파는 유신우였다. 한솔은 내심 기대하면서도 이른 체념을 받아들였다.
“속옷은 네가 벗을래?”
“속, 옷까지 벗어야 돼…?”
“밑에 젖을 거야. 갈아입을 게 없어서 그래.”
아. 그제야 유신우의 행동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 한솔은 실망하면서도 어쩐지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내심 긴장한 듯싶었다. 코끝을 훌쩍이며 한솔은 신우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대로 브리프를 끌어 내리자 맨다리에 차가운 공기가 닿으며 자연스럽게 몸이 바르르 떨렸다.
“추워?”
“조금….”
신우가 한솔의 몸을 더 바투 끌어안았다. 허벅지 사이가 벌어지고, 발목이 엇갈린다. 화장실 바닥과 실내화가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와 함께 네 다리가 얽혀 들어갔다. 그 순간, 한 겹 너머로 느껴지던 뜨거운 열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묵직한 양감과 두툼한 모양새. 명백하게 부풀어 오른 신우의 바지 앞섶이 한솔의 복부에 닿았다. 한솔은 숨을 흡, 하고 들이켜며 신우의 팔을 와락 움켜쥐었다. 엄청나게 크고, 심지어 무겁기까지 했다… 예상만 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그러나 제 앞섶이 부풀어도 여전히 침착한 얼굴인 신우는 휴지를 풀어 차곡차곡 접었다. 한솔이 자신의 아랫도리에 관심이 쏠린 사이 봉긋하게 올라붙은 엉덩이 사이를 벌리고 벌써부터 촉촉하게 젖어 있던 구멍 입구에 준비해 놓은 휴지 뭉치를 가져다 대었다. 한솔이 그제야 파드득 놀라 몸을 떨었다. 복숭앗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이 한껏 당황해서는 울망울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책감이 신우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혹시, 묻을까 봐.”
결국, 신우는 변명을 하고 말았다. 한솔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선 신우의 가슴에 콩 하고 이마를 기댔다. 나는 지금 부끄러운 오메가다… 절대, 저얼대 기분이 좋아서 이런 게 아냐…. 속으로 중얼중얼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다독였다. 신우가 내 맨몸에 손을 댔던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전의 일인 것 같다. ‘성’을 나누기도 애매한 꼬꼬마 시절에나 한솔의 옷을 갈아입혀 주겠다고 나섰지 어느 순간부터는 그마저도 선을 그었다. 한솔은 흥분하지 않기 위해 아니, 흥분한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흐, 읍…!”
하지만 그것도 신우가 페로몬을 푸는 순간, 전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단단한 나무 냄새. 천년을 버텨 온 고목의 습한 향기. 그리고 거기에 덧대진, 거대한 짐승이 흉곽을 부풀리며 내뱉는 짙은 날숨 한 줌.
한솔은 그의 페로몬을 종종 맡을 때면, 끝도 없이 펼쳐진 고목의 그늘 아래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린 검은 짐승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날 선 독기가 빠져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언제든지 숨죽이고 있는 짐승이 몸을 일으켜 자신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들게 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끌리면서도 신우의 앞에 서면 긴장감을 감출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그의 본질과 가장 닮아 있는 페로몬 탓일지도 모른다. 신우도 그걸 아는지 철저하게 페로몬을 감추고 다녔지만 그렇다고 몸에 배인 분위기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날 때부터 재벌 가문의 삼대독자로 태어나 아주 어릴 때 알파로 발현했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이 짧든 길든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유신우라는 존재를 이루는 근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한솔의 누나이자 이 씨 가문의 첫째, 이세린은 한솔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놈은 상냥한 독재자지.
언제든지 상대의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부러 강압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자만이 아닌 자신감에서 나올 수 있는 여유라고 말이다. 저놈이 아무리 다정해 보인다 하더라도 절대 만만하게 생각하지 말라며 세린은 한솔에게 툭하면 잔소리를 하곤 했다.
“힘 빼야지, 솔아.”
신우가 속삭였다. 한솔의 숨이 점차 가빠져 갔다. 그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가벼운 꽃향기가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놀라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그건 마치 몰이사냥과도 같았다. 알파의 기세에 눌린 오메가의 페로몬이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위를 알파의 것이 대신했다. 점차 비워져 가는 한솔의 주변을 신우의 페로몬이 굶주린 짐승처럼 갈급하게 먹어 치웠다. 한솔은 짐승의 품에 갇혀 환희에 떨었다.
“흐읏…! 그만, 그만해 줘… 아…!”
한솔은 뒤에서 애액이 왈칵 터지는 것을 느끼며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그의 구멍을 꾹 누르고 있는 신우의 손이 질척한 액체로 젖어 들어간다. 신우가 멈추지 않을 걸 알기에 더 마음껏 어리광을 피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가 더 쏟아 줬으면. 조금 더. 더. 더 많이-. 유신우로 흠뻑 젖어 들고 싶었다. 한솔은 입으로는 그만해 달라고 빌고, 몸은 부끄럽다는 듯이 자꾸 도망을 칠 것처럼 꼼지락거리면서도 뒤로는 울컥울컥 애액을 쏟아 냈다. 그리고 그 괴리감에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신우에게 매달렸다.
“신우야… 신우야….”
“쉬, 쉬이… 괜찮아. 이상한 거 아니야, 응?”
유신우는 한솔을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면서도 절대 허리에 감은 팔이나 페로몬을 갈무리해 주진 않았다. 모순적인 독재자는 상냥한 얼굴을 하면서도 한솔의 청을 조용히 묵살했다. 한솔의 아랫배에 묵직하게 달라붙은 열기가 이제 숫제 데일 것처럼 뜨거워졌다. 눈앞에 여러 색깔의 필름이 어지러이 덧대지고 머릿속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처럼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이제는 그가 서 있는 게 아니라 신우의 팔에 걸쳐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한솔은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름 돋는 낙하감과 함께 그대로 기억이 끊겼다.
“흑, 아아!”
몇 초, 혹은 몇 분. 눈앞에서 폭죽이 터지는 느낌과 함께 까맣게 물들었던 시야가 반전했다. 한솔은 물속에서 갓 잡혀 끌어 올려진 물고기처럼 몸을 파득파득 떨었다. 구멍은 신우의 손가락을 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뻐끔뻐끔 개폐를 반복하고 신우의 허벅지에 들러붙어 있던 설익은 음경은 선액도 정액도 아닌 묽고 투명한 액체를 줄줄 흘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은 완전한 절정(絶頂)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한솔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분명 제가 겪은 일인데 남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은 절정, 해방감, 충족감….
그리고 완전한 무력감-.
한솔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꽤 이상한 존재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남자’의 꿈을 꿔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본질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일지도 모른다. 한솔은 누군가에게 매도당하고, 억압당하고, 통제당하는 게 좋았다. 타인이 자신을 어리고 유약하게, 순종적이고 온순한 존재로 여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꽤 만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항상 채워지지 않는 빈 조각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어리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신우를 보며 행복하다가도 발목에 족쇄를 채우지 않고 인내하는 그를 보면 심술이 났다. 이한솔이 유신우의 것이냐고 한다면 그렇다고 하겠지만, 유신우가 이한솔의 것이냐고 한다면… 글쎄….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를 떠나서도 한솔은 항상 자신이 가지지 못한 신우의 나머지 부분을 떠올리곤 했다. 한솔의 신우는 반쪽짜리였다.
그러나 방금은, 분명 ‘온전한’ 유신우였다.
억압당하는 삶을 꿈꾸면서도 항상 상황을 유도하고 만들어 갔던 한솔은 처음으로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다. 절정의 순간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력한 존재로서 가진 모든 것을 갈취당하고 남은 해방감. 그렇기에 마음속 깊이 차오르는 충족감이 전부였을 뿐이다. 그는 신우의 손짓 한 번에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소속감을 느꼈다. 그 순간의 신우는, 더 이상 반쪽짜리가 아니었다.
‘가지고 싶다.’
한솔은 생각했다. 그를 가지고 싶다. 유신우를 가지고 싶다. 자신에게 이런 무력감을 선사할 수 있는 유신우를 온전히 가지고 싶다.
그동안은 정해진 삶에 대한 순종과 바꿀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체념, 어릴 때부터 함께해 온 익숙함,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이에 대한 애정이었다면-.
지금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욕망을 느꼈다.
이한솔은 유신우가 가지고 싶어졌다.
‘만약.’
방금 전의 일이 신우가 아닌 다른 사람, 예컨대 남 선생 같은 인물에 의해 일어났다면 한솔은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아니.’
한솔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노예를 자칭하는 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인을 고르는 노예였다. 잠깐의 유희 정도는 즐길 수 있어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줄 주인은 까다로워야만 했다.
초점이 사라졌던 한솔의 눈동자에 반짝반짝 빛이 돌아왔다. 목표가 생기자 의지가 샘솟았다. 금방이라도 신우를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솔 대신 뒤처리를 하고 있던 신우는 갑작스럽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솔의 눈빛에 멈칫했다. 굉장히 놀란 듯 보여서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찍이 정신을 차렸다. 신우는 한솔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점심시간에 패드 사다 줄 테니까, 지금은 그걸로 버텨 봐. 세 장 깔아 놨는데 부족하면 더 줄까?”
…일단, 저 다정함 좀 어떻게 해 봐야겠다고 한솔은 침울하게 생각했다.
***
한 층 위의 교사용 화장실에서 일어난 일은 두 사람만의 비밀이 되어 묻혔다.
한솔은 그렇게나 원하던-비록, 신우의 철저한 관리하에 교복 바지가 젖는 일은 없었지만.- 불편한 몸으로 어기적어기적 걷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오히려 난리가 난 건 신우의 바지였다.
“…….”
“…음.”
한솔이 토정한 액체로 인해 신우의 허벅지 한쪽이 젖어 완전히 시커먼 색으로 변해 있었다. 뒤늦게 그걸 확인한 한솔은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은 격렬한 수치심을 느꼈다. 신우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자신이 입고 있던 그의 카디건을 벗어 얼른 가리라고 내밀었다. 신우는 거북이 목을 하고 부끄러워하는 한솔을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가 카디건을 받아 들어 허리춤에 느슨히 묶는다. 얼룩 자국이 얼추 가려진 모양새가 되자 한솔은 자신이 엄청나게 음란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굉장히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날아갈 것같이 가벼운 마음의 목소리와 정반대로 ‘정숙한 약혼 예정자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해 의기소침한’ 모습을 내보이며 한솔은 신우의 달램과 토닥임을 받아먹었다. 신우가 ‘이 정도는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라며 한솔을 다섯 번쯤 달랬을 때 그들은 교실에 도착했다. 체육 교구와 관련해서 문제가 생겨 일찍이 체육 선생이 자습을 줬던 게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한솔은 수업 첫날부터 1, 2, 3교시를 전부 땡땡이친 불량 학생이 될 뻔했다. 한솔과 신우가 교실에 들어섰을 때 왁자지껄하던 교실 안이 일순간 조용해지긴 했지만 두 사람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곧 조심스럽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자리에 앉은 신우는 한솔에게 재킷을 덮어 주며 한숨 자라고 말했다. 한솔은 꾸물꾸물 책상에 엎드렸다.
‘좋다….’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까슬한 감촉과 자신의 주변을 철옹성처럼 둘러싼 신우의 페로몬을 느끼며 한솔은 속으로 실없이 웃었다. 가끔씩 뒤에서 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는 순전히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재킷을 꾹꾹 눌러썼다. 학문을 배우고 정진하는 장소에서 정숙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과 물이나 흘려 대는 음란한 구멍을 막기 위해 사용한 싸구려 화장지의 존재.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신우를 생각하며 한솔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그건 신우가 점심시간을 이용해 패드를 사다 쥐여 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 얼른 갔다 와.”
알파의 페로몬에 둘러싸인 오메가는 짙은 고양감과 흥분, 그리고 안정감을 느낀다. 틈만 나면 존재감을 과시하는 신우의 페로몬 덕택에 한솔은 4교시 내내 뒤에서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애액을 느껴야만 했다. 당연히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판서를 받아 적다가도 한 번씩 불편하게 몸을 뒤척이는 한솔을 신우가 조용히 바라본다. 물론, 한솔은 신우를 의식해서 그런 것이었다.
“고마워….”
한솔은 수줍게 웃어 보이며 신우가 내미는 검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봉투를 품에 꼬옥 안고서 등 뒤에 따라붙는 신우의 시선을 느끼며 부러 어기적어기적 걸었다. 한솔은 반을 나와 아까처럼 교사용 화장실에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자신을 힐긋거리는 수많은 학생들의 시선을 의식해 학생용 화장실로 쏙 들어갔다. 그러자 화장실에서 낄낄거리던 몇몇 아이들이 한솔을 알아보더니 흠칫 놀라 한다.
“야, 오메가가 남자 화장실 써도 되냐?”
“나도 모름. 근데 알파도 여기 쓰는데 그럼 안 되는 거 아닌가.”
원래는 전용 화장실이 따로 있거든….
한솔은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온몸으로 민망함을 표출하며 쭈뼛쭈뼛 좌변기가 있는 칸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오메가는 앉아서 싸는 거냐며, 대화를 빙자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한솔은 부디 편견과 멍청함으로 가득 찬 베타들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 주기를 바라며 부스럭부스럭 검은 봉투의 날개를 풀었다. 안에는 히트 사이클 용의 패드 열 장이 들어 있었다.
‘많이도 사 왔네….’
그 얼굴로 약국에 가서 이걸 사 왔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아랫배가 찌르르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약사는 뭐라고 생각했을까. 오메가 패드 심부름도 해 주는 별난 알파라고? …뭐, 어지간히 아끼는가 보다고 생각했겠지. 한솔은 입꼬리를 주체 못 하고 씰룩거리며 패드 한 장을 열었다. 바지를 조심조심 벗고 브리프를 내리자 축축하게 젖은 휴지 뭉치가 보인다. 한솔은 뺨을 붉히며 휴지 뭉치를 떼어 내 변기 속으로 휙 집어 던졌다. 대신 그 자리에 패드를 꼼꼼하게 붙였다. 변기도 두 번이나 내리고 패드 포장지는 잘 접어 다시 봉투 속에 넣은 다음 누가 보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었다. 집에 가면 널린 게 맞춤용 고급 패드였지만 어찌 됐든 신우가 처음으로 사 준 패드니 잘 보관해 둘 생각이었다.
“밥 먹으러 가자.”
한솔이 교실로 돌아오자 책을 보고 있던 신우가 자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유명한 독일인 경제학자의 저서가 책상 서랍 안으로 사라진다. 번역조차 되지 않은 신간이었다. 독일어로는 일상 대화나 조금 하는 한솔과 달리 신우는 복잡한 경제 언어가 나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얼마 전엔 불어였던 것 같은데…. 눈을 끔벅이며 과거를 회상하던 한솔은 신우를 따라 종종걸음을 옮겼다. 이 학교의 급식실은 동관에 있었다.
“와….”
진짜 들어가기 싫다….
부실한 컨테이너형 건물에 학생과 선생들이 바글바글한 모습을 보며 한솔은 침음을 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모가 도시락을 싸 준다고 할 때 얌전히 알겠다고 할걸. 다른 학년들한테도 시선 좀 받아 보겠다고 급식을 신청한 자신이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위생 상태는 괜찮은 거겠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단시간에 한 공간 속으로 구겨 넣는 방식을 보고 충격 먹은 한솔은 건물의 청결도와 식자재의 신선함을 걱정하며 신우를 따라 급식실로 발을 들였다.
“불편하면, 그냥 매점 갈까.”
사방에서 꽂혀 드는 따가운 시선들. 단정한 자세로 국을 떠먹던 신우가 한솔에게 말했다. 밥을 깨작이던 한솔은 입 안을 굴러다니던 밥 알갱이를 꼭꼭 씹어 삼키고선 입을 열었다.
“아냐… 괜찮아.”
거절할 때는 조금 머뭇거리는 것이 포인트이다. 한솔을 지그시 바라보던 신우가 주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을 힐긋힐긋 구경하던 대다수의 무리들이 황급히 테이블로 고개를 처박았다. 신우가 검지로 테이블 위를 느리게 두들긴다. 그가 무언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결국 한솔은 다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이 입맛에 맞지 않아서는 아니고, 이래야 신우가 그에게 더 관심을 쏟을 테니까 하는 짓이다. 역시나 멈칫한 신우는 마찬가지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안 들어가?”
“응….”
“…그래, 그럼 나가자.”
그는 망설임 없이 식판을 정리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에겐 턱없이 부족한 식사량이었을 테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솔은 신우가 자신을 우선시해 주는 게 짜릿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남은 음식물을 버리고 개수대에 식판을 넣은 다음 급식실을 나오는데 등 뒤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저놈이 그놈인가? 유신우?”
“1학년 안 같은데?”
“알파라잖아. 어련하시겠어.”
“존나 가오 잡네. 재수 없게. 한번 밟아 줄까.”
한솔이 들었을 정도면 감각이 훨씬 발달한 신우가 못 들었을 리 없는데 힐긋 바라본 신우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한솔은 속으로 혀를 찼다. 베타들은 원래 이렇게 멍청한 걸까. 아니면 이 학교가 유난히 터가 안 좋은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알파한테 몸으로 덤빌 생각을 할 수 있지… 혹시, 뼈 부러지는 게 취미인가?
이맘때쯤의 아이들이 뒤도 안 돌아보고 사고 치는 게 종종 있는 일이라곤 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홉 살 때부터 천성 그룹의 후계자로서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유신우는 거짓말 좀 보태서 티비 좀 본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정도의 유명인이었다. 일반 학교로 진학한다는 기사가 터질 정도면 말 다 했지. 반면에 다른 오메가들처럼 집 안에서만 조용히 살았던 한솔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입학하고 나서야 이경원 의원의 막내 아들인 게 소문이 퍼졌고 그마저도 오메가란 이유로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전교생이 다 알 정도인데, 유신우가 알파에 재벌가 외동아들인 걸 모를 리가 없다.
‘허세겠지.’
설마 진짜 그러겠어. 아무리 오늘만 사는 사람이라 해도 유신우를 건드는 건 제 인생을 다이렉트로 지중해 저 밑에 꽂아 넣는 짓이라는 걸 알 텐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한솔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신우를 따라잡았다. 신우의 유난히 느린 걸음은 한솔을 위한 배려였다. 매점으로 가겠느냐는 물음에 한솔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칼로리 폭탄일 유해 음식들을 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한솔은 저 때문에 밥을 거의 먹지 못한 신우를 책임질 필요가 있었다. 두 사람은 본관 지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한창 식사 시간에 나와서 그런지 매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매대에 있던 빵의 절반을 쓸어 담은 신우가 한솔에게 물었다. 아이스크림 판매대를 빤히 들여다보며 고민하던 한솔은 망설임 끝에 초코 맛과 바닐라 맛의 콘 두 개를 꺼냈다. 당연하게도 지갑을 꺼내려는 신우를 만류하며 직접 계산을 마쳤다. 초코 맛을 신우에게 건네자 서늘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다.
“고마워.”
“으응.”
수줍게 대답하며 껍질을 깐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와삭. 과자 부분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달달한 바닐라 맛이 입 안을 맴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해 온 만큼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취향을 아주 잘 알았다.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해서 먹게 생긴 신우가 의외로 쓴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든지. 누구보다도 서양식 디저트에 진심일 것 같은 한솔이 쓰디쓴 차나, 떡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도 이왕이면 목이 막히는 퍽퍽한 종류로. 유모는 막내 도련님의 취향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건가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건 한솔의 성향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런 류의 아이스크림을 싫어한다는 건 아니다. 그냥 굳이 찾아서 먹지는 않는다는 거지. 먹는다고 하면 주로 바닐라나 하얀 크림류를 골랐다. 그래야 이렇게-.
“…….”
신우의 시선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부러 입가에 아이스크림을 묻히며 냠냠 핥아 먹던 한솔은 신우의 시선을 느끼며 속으로 방긋 웃었다. 결국, 참다못한 신우가 손수건을 꺼내 직접 한솔의 입가를 닦아 준다. 한솔은 희희낙락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와삭와삭 베어 먹었다.
음, 좋다!
겨우 하루의 반이 지나갔을 뿐이지만 한솔은 지극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도 이런 생활이 쭈욱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솔은 자신을 가둔 신우의 페로몬 속에서 환하게 웃었다. 신우는 이게 그렇게 맛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스크림의 상표를 내려다본다.
머지않아 상표의 업체가 천성 식품의 투자를 받게 되리라는 건 한솔로서는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심심해애….”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던 한솔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가 푸우- 하고 공기를 내뺐다. 신우는 직접 이 의원님을 찾아뵙고 설명을 드리겠다고 말했지만, 신우가 방과 후에 더 바빠진다는 건 한솔도 알고 이경원 의원도 잘 아는 사실이다. 먼저 비서진을 통해 간략한 사실을 전달받은 이 의원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신우를 만류했다. 이 의원 자신도 바쁘고 안 그래도 바쁜 사람들끼리 시간을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탓도 있었다. 결국, 한솔에게 당분간 자중하라는 경고가 내려지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되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난 일이다.
근신은 아니었던 덕에 학교는 멀쩡히 다닐 수 있었지만, 문제는 하교를 하고 나서부터였다. 한솔은 방 안에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반 아이들의 은근한 따돌림과 담임의 소소한 차별을 받으며 즐거운 스쿨 라이프를 즐기던 한솔은 집에만 오면 방 안에 갇혀 있으려니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차라리 이게 감금이었다면 즐기기라도 했을 텐데…. 스스로 반성하는 오메가 아들을 연기하느라 자발적으로 갇힌 탓에 이렇게 심심함에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신우는 뭐 하지.’
한솔은 까만 화면을 들여다보다 핸드폰을 툭 건드렸다. 가장 상단에 있는 신우와의 톡 방을 들어가니 벌써 30분 전쯤에 멈춰 있는 대화가 보였다.
거기 사람 많아??
♡시누♡
응 많네.
♡시누♡
밥은 먹었어?
응!
(한식 사진)
♡시누♡
잘했어
1
헤헤
1
(뛰어다니는 강아지 이모티콘)
많이 바쁜가… 마지막에 보낸 메시지의 1이 사라질 기미가 안 보였다. 신우는 지금 어떤 회사의 창립 40주년 기념행사에 가 있는 중이다. 페로몬을 과시하려 드는 알파들 때문에 불쾌하다며 잠시 테라스에 나왔다고 말한 그는 어느새 유 회장님에게 붙잡혀 끌려 나간 모양인지 대답이 없었다.
‘다른 오메가들도 많겠지.’
그것도 다 연상으로만. 한솔은 입술을 비죽였다. 오메가는 최소한 2차 발현을 마치고 나서야 저런 곳에 얼굴을 들이밀 자격이 생긴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정도 나이는 되어야 결혼 시장의 매물로서 가치가 생기기 때문이다. 베타, 알파, 오메가. 그중 알파와 오메가, 제2 성별이라 불리는 형질은 빠르면 다섯 살 직후에 1차 발현이 나타난다. 그리고 우성과 열성을 가르는 제2차 발현이 나타나는 시기가 바로 18세였다.
형질인이 2차 발현에 목을 매는 이유는 2차 발현을 하고 나면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술을 마시거나 각종 공식적인 행사에 참여할 수 있고 코드가 등록된 ‘형질인 등록증’이 나온다.
신우와 한솔처럼 약혼이 예정된 많은 정제계 커플들이 이때 깨지거나 갈라지곤 했다. 물론, 두 사람에게 해당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축하드립니다, 의원님. 아드님의 페로몬 수치가 아주 높습니다. 이대로만 유지된다면 높은 확률로 우성으로 발현하실 겁니다.
-허허, 그런가.
나란히 3살 때 1차 발현을 한 두 사람은 신우는 9살에, 한솔은 10살에 우성 판정서를 받았다. 물론, 확진서가 아닌 만큼 100%로 장담할 순 없는 일이지만 판정서를 받은 대부분이 우성으로 확진된 것을 보아 신뢰할 만한 수치라고 여겨지곤 했다.
지이잉-.
딴생각에 잠겨 있던 한솔은 갑작스레 손안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깜짝 놀라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시누♡」
신우의 전화였다. 한솔은 한 번 정돈 튕겨 줘야 한다는 것도 잊고 다급히 초록색 연결 버튼을 터치했다.
[솔아.]
“신우야!”
두 사람은 동시에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핸드폰을 통해 들리는 낮은 신우의 웃음소리에 한솔의 두 뺨이 발그스레하게 달아오른다. 한솔은 신우의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 발밑에 있던 이불을 꾸물꾸물 뒤집어썼다. 이불 안에서 신우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부르셔서 답장을 못 했어.]
“그랬구나….”
예상했던 일이지만 한솔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걱정스러워하는 음색에 한솔은 상대가 보지 못한다는 것도 잊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아차, 하며 뒤늦게 대답했다.
“아냐, 30분밖에 안 지났는걸….”
그럼에도 그 짧은 사이의 간격을 속상해서라고 생각했는지 신우가 ‘음….’ 하고 고민하는 목소리를 낸다.
[솔아.]
“응?”
[밖에 나올래?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한솔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장에라도 ‘응!!’ 하고 대답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우물쭈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치만 아빠가 자중하라고 하셨는걸….”
[벌써 한 달이나 지났어. 그 정도면 이 의원님도 화 푸셨을 거야.]
“그럴까…?”
[어. 게다가 두 달 뒤면 히트라며. 그때 되면 나오고 싶어도 못 나와.]
신우는 역시 옳은 말만 했다. 한솔이 솔깃한 목소리로 ‘그럼… 아빠한테 허락받고….’ 하고 말하자 알겠다며, 허락 맡고 연락 주라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한솔은 베개에 얼굴을 폭 파묻은 채 숨을 크게 들이켰다.
데이트다, 데이트!
발을 동동 굴렀다. 한솔은 이불을 한가득 품에 안은 채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일단 허락부터 맡고 목욕도 다시 해야지. 그런데 입을 옷이 있나…? 얼마 전에 퍼스널 쇼퍼를 통해 들여온 신상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한솔은 바삐 움직였다. 한솔이 가장 원하는 것은 집 안에 강제로 감금당하는 것이었지만 아직은 그런 일이 요원해 보이니 차선책이라도 택해야 했다. 예컨대, 이제는 가만히만 서 있어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지 못해 안달인 유신우 단속하기라든지. 누가 봐도 잘난 알파 옆에 이건 내 자리라고 땅땅 못을 박아 주지 않으면 꼭 분기별로 한 번씩은 신우의 옆자리를 탐내는 인간이 나타나고는 했다.
‘미인이 쟁취하는 것이라면 미남은 사수하는 거지.’
오늘도 유구한 격언을 떠올리며 한솔은 다짐했다. 옆에 딱 붙어 앉아서 감시해야지.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러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지 사뭇 기대되는 한솔이었다. 그쯤 되면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한솔은 아니었다. 즐기면 즐겼지, 부담은 무슨. 사람들이 시기와 질투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되레 콧대가 2cm는 높아지는 게 이한솔이라는 인간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아닌 척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선 먼저 아버지인 이경원 의원의 외출 허락이 필요했다.
“아빠….”
[한솔이니?]
속으로는 아버지라고 잘만 부르면서도 막상 다른 사람에게나 이 의원에게는 애교 섞인 부름을 사용하는 한솔이 눈치를 보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이 의원을 불렀다. 바쁜 와중에도 막내아들의 전화라고 냉큼 받았던 이 의원은 밖에 나가고 싶다는 한솔의 말에 처음엔 난색을 보였다. 하지만 신우와 있기로 했다는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허락을 내려 주었다. 속으로 만세를 외친 한솔이 다급히 욕실의 문을 열었다.
“도련님 혼자 하실 수 있겠어요?”
“응, 유모! 유모 할 일 해!”
유모가 걱정스러운 듯 한솔을 따라 들어왔지만 결국 한솔의 떠밂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곧 있으면 이 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인 이재경의 생일이었던 탓에 사용인들은 전부 그걸 준비하느라 바빴다. 한솔의 유모였지만, 세린과 재경의 유모기도 한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한솔은 유모를 보내고 신우에게 허락을 맡았다는 연락을 보냈다. 그러고는 쭈루룩 늘어서 있는 입욕제들을 심각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페로몬이랑 비슷한 게 나으려나? 아니면 평소에 못 맡아 본 게 좋나?’
한솔의 페로몬 샘이 문제를 일으켰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몸이 점차 우성 오메가로써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탓이다. 농축된 페로몬을 감당하지 못한 페로몬 샘이 강제로 열렸고 미성숙한 몸으론 조절이 불가능했던 게 원인이었다.
한솔은 이 의원의 결정 하에 약물을 이용해 페로몬 샘을 강제로 묶었다. 그래 봤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는 미약한 처방이었지만 현대 의학으로는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오메가의 몸에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만큼 비싸기도 하고.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시술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아직 약물 효과가 남은 한솔의 몸은 베타나 다름이 없었는데, 살갗에 미약하게 배어 나오는 약한 잔향조차 싹 사라져 버린 몸이 한솔은 내심 신경이 쓰였다.
‘다른 거로 하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매일 먹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란 게 한솔의 평소 지론이다. 한솔은 자신의 달달한 페로몬과 정반대인 상큼한 시트러스 계열의 입욕제를 골랐다.
지이잉-.
♡시누♡
역시 데리러 가는 게 낫지 않겠어?
나갈 준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던 도중, 아직도 걱정을 버리지 못한 신우의 연락에 한솔은 준비해 놨던 답변을 공들여 적었다. 태어나서 지하철 처음 타 본다, 꼭 한번 타 보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타 보냐 등등…. 그리고 마지막이 결정타였다.
다른 사람 감시 없이 혼자 다녀보고 싶어….
♡시누♡
…알겠어
♡시누♡
대신 오메가석에만 있어야 해
♡시누♡
궁금하다고 다른데 움직이지 말고
♡시누♡
무슨 일 생기면 소리 크게 지르고
♡시누♡
내 단축번호 알지?
응! 1번
오메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안 좋은 만큼 오메가는 범죄의 대상이 되기 쉽다. 특히 지하철 같은 폐쇄적인 교통수단은 오메가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가장 자주 일어나는 장소 중 하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악명이 있었던 덕에 가장 먼저 오메가 보호법이 발의되기도 한 곳인데 이제 지하철은 3칸당 한 곳에 반드시 ‘오메가 지정석’이 존재한다. 또, 통상 오메가석이라 불리는 이곳은 일반 승객 칸과 분리를 위해 칸막이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칸막이가 유리라 했지.’
한솔은 꿍꿍이를 감추고서 핸드폰 화면을 꾹꾹 눌렀다.
1
조심히 갈게!
1
좀 이따 봐!
1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햄스터 이모티콘)
한솔은 신우가 보기 전에 얼른 핸드폰 화면을 껐다. 또 어떤 잔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차라리 얌전히 있으라 하지. 애매하게 풀어 주는 신우가 얄미워서 한솔은 입술을 비죽였다.
“다녀오겠습니다!”
한솔은 힘차게 문을 열었다. 바야흐로 파란만장한 데이트의 시작이었다.
“2호선… 2호선… XX방향… 앗, 찾았다.”
핸드폰으로 지하철 노선표를 확인하고 가는 방향이 맞는지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한 한솔은 긴장한 얼굴로 개표구 앞에 섰다. 그러자 한솔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역무원이 다가와 말을 건다.
“손님.”
“네?”
“오메가시면 이리로 오세요.”
바쁘게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긋거리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오메간가 봐…’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솔은 당황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서 역무원을 쭈뼛쭈뼛 따라갔다. 사무적인 얼굴로 한솔을 훑어본 역무원이 오메가 코드 리더기를 들고 와 한솔의 초커에 가져다 댄다. 곧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리더기가 떨어져 나갔다.
“코드 확인되셨고요. 오메가석 이외의 공간에서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역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아시겠죠.”
“…네.”
그만 가 보라는 말에 한솔은 꾸벅 인사하고 도망치듯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메가가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걸쳐야 하는 절차라는 걸 머릿속으론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겪어 본 것은 처음인지라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왜 이 좋은 걸 이제 안 거지? 한솔은 비죽 솟으려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지하 계단을 밟았다. 손님 대우를 하는 척하면서도 눈으로는 골칫덩어리를 맡은 것처럼 귀찮아하던 역무원의 눈빛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시설 직원들이 다 이런 거면 한번 순회를 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제일 대우가 안 좋은 곳은 당연하게도 교도소겠지만 안타깝게도 한솔이 갈 만한 곳은 아니니까…. 역시 오메가 훈련소가 나으려나? 자신의 다음 이형질 센터 방문일이 언제인지 계산해 보던 한솔은 어깨를 살포시 붙잡는 손길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 죄송합니다.”
오메가다. 눈앞의 역무원 복장을 한 남자의 목에는 초커가 걸려 있었다. 아무리 페로몬을 꼭꼭 닫아 놓고 다녀도 동일 형질인끼리는 상대를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는데 베타에 가까운 몸 상태 때문인지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초커를 확인한 한솔이 슬금슬금 경계를 푸는 것처럼 행동하자 마찬가지로 한솔을 유심히 관찰하던 역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스어신가요?”
“네?”
이게 당최 무슨 소린가 싶어 한솔이 눈만 깜박이고 있자 역무원이 다 이해한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6번 칸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오메가석을 안내해 주는 역할이었던 모양이다.
안내역이 꼭 필요한가 싶지만, 반대로 자리가 없는 만석 칸에 멋도 모르고 오메가가 탑승하면 별로 좋은 꼴은 못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스스로 납득하며 한솔은 6번 칸에 탑승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빠앙-.
때마침 지하철이 들어오며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금요일 오후의 인파를 예상치 못한 한솔은 곧장 인간 파도에 휩쓸렸다. 오메가석의 입구가 분리되어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저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 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겨우겨우 유리 칸막이로 분리된 공간에 들어오자 칸막이 옆에 기대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한솔은 흥미로워하는 시선을 피해 겨우 넷 있는 자리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6번 칸의 오메가석에 있는 사람은 한솔이 유일했다.
동물원 우리 안의 희귀동물 구경하듯 힐긋힐긋거리는 사람들. 어떤 이는 대놓고 한솔을 쳐다보기도 했다. 한솔은 의기소침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봄맞이 한정 신상으로 나온 모 브랜드의 미니 크로스 백을 두 손으로 꾹 움켜쥐었다. 가죽을 움켜쥔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마치, 사람들의 과한 관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한솔을 음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작고 미성숙한 몸. 보들보들해 보이는 연갈색 머리카락. 뽀얀 우윳빛의 피부. 마지막으로, 겁먹은 소동물 같은 여린 반응-.
지금도 충분히 어리고 예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아름답게 만개할 것이 자명한 소년이었다. 다만, 누구에게나 서투르고 미숙한 시간은 존재하는 법이고 그 풋풋한 시간만이 가지는 싱그러운 반짝임이 있었다.
소년은 막 싹을 틔운 새싹처럼 순하고 보드라워 보였다. 촉촉한 눈망울은 겁을 먹어 울망울망 흔들렸고 또래보다 작은 몸은 구석에 콕 박힌 채 지하철이 덜컹거릴 때마다 움찔움찔 떨렸다.
그리고 한솔은 누구보다도 그런 자신의 외적인 모습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얼굴 뚫어지겠네.’
뱀 같은 시선들이 자신의 몸을 샅샅이 훑는 것을 느끼며 한솔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반대로 몸은 움츠린 모양새로 구석에 딱 달라붙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만만한 상대라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금방 깔보는 시선으로 바뀌는 게 보였다. 하여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다를 게 없다.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한솔은 그런 시선들을 마음껏 즐겼다. 다음에 꼭 한 번 신우를 데리고 와서 칸막이 밖에 서 있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덤이었다.
[다음 역은 XXX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그렇게 몇 정거장을 지나치니 금방 신우와 만나기로 약속한 정거장에 도착했다. 한솔이 내릴 준비를 마치고 문 앞에 서자 몇몇 남자들이 눈짓을 교환하며 몸을 일으킨다. 지이잉-. 오메가 전용 출입구가 한 박자 먼저 문이 열렸다. 한솔이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출입구를 타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는 눈짓을 교환하던 남자 둘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누♡
도착했어?
응!
♡시누♡
나오지 말고 안에 있어.
데리러 갈게
그럼 나 화장실 갔다 와도 돼?
♡시누♡
그래, 그럼
♡시누♡
오메가 전용이지? 그쪽으로 갈 테니까 거기 있으면 되겠다
차림새 점검도 할 겸 한솔은 신우와 카톡을 주고받으며 화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메가 전용 화장실은 다른 편의 시설과 조금 동떨어진 데 마련되어 있었던 탓에 한솔은 조금씩 인파와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자신의 뒤를 밟는 낯선 인기척을 알아차렸다.
‘…스토커?’
등 뒤를 타고 쭈뼛 소름이 돋는다. 공공시설이지만 사람의 발걸음이 드문 외진 곳. 발소리가 여럿인 걸 보아 상대는 최소 둘에 자신은 어리고 약한 오메가였다. 오메가 범죄가 일어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알파일까? 내가 오메가라서 쫓아온 건가? 아니 일단 나를 쫓아온 게 맞긴 해? 한솔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사람들 시선이나 받으며 소소하게 욕구나 챙길 생각이었지 정말로 범죄 대상이 될 생각은 없었다. 한솔이 알기로 이쪽 지하철은 오메가 범죄 방범률이 유독 높은 곳이었다. 순찰도 자주 돌고 해서 근 몇 달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는데….
세상일에 100%라는 확률은 없는 법이고 범죄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특히 그와 같은 어리고 예쁜 오메가라면 더더욱 대상 범주에 들기 쉬웠다.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 예쁨만 받고 큰 탓에 무심코 그 안에 자신도 포함될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 같다. 한솔은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했다.
1
많이 늦어?
하지만 인정한다고 해서 넋 놓고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일단 침착하게 신우에게 카톡을 보냈다. 알아차렸다는 걸 들키면 안 돼. 한솔은 끈적해진 손끝을 말아 쥐며 티가 나지 않게 이전처럼 걸음을 옮겼다. 조금 굳은 얼굴은 어쩔 수 없지만, 그간 한솔이 해 온 연기가 빛을 발했다. 뒷모습만큼은 여전히 태연한 덕에 스토커들은 한솔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누♡
역이야. 곧 내려갈게
신우의 답변에 턱 끝까지 차올랐던 불안감이 한순간 사르르 녹아내렸다.
‘신우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돼.’
오메가 화장실은 지하 1층. 계단과 조금 먼 곳에 존재하지만, 신우의 평소 걸음걸이면 최대 15분 안엔 도착할 것이다.
그쯤 되자 한솔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겼다. 너무 당황해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거 딱… 신우를 자극하기 좋은 상황이 아닌가? 한 달 전에 페로몬 샤워 사건이 있을 때만 해도 금방이라도 신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유신우는 상상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강적이었다. 옷에 물을 엎질러도 보고 부러 샤워를 할 시간에 방에 초대해 보기도 했는데 신우의 평정심을 깨기는커녕 감기 걸린다는 걱정만 받았다. 나중에는 드라이어마저 빼앗긴 채로 강제로 보송보송해질 때까지 말림 당하기도 했었다.
‘위기는 곧 기회라 했지.’
그랬다. 그런 눈물겨운 과거를 생각해 보면 이건 아주 좋은 기회였다. 눈앞에 슬슬 오메가 화장실의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솔은 이제 선택해야만 했다.
첫 번째, 지금 당장 신우에게 전화하기.
사람이라곤 한솔과 스토커들 외에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는 외진 곳이었지만 스토커들은 CCTV의 존재를 의식하는지 아직까지 한솔을 강제로 어떻게 해 보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 소심함이면 신우에게 전화하려는 순간 도망가 버릴지도 모른다. 범죄 피해자(예정)로서는 가장 나이스한 선택지일지도 모르지만, 한솔은 일단 이 선택지를 보류했다. 그는 아까의 반성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다시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부은 초식 동물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어떻게 자알 저 범죄자(예정)들을 구슬려서 적당히 추행당하는 장면을 신우에게 보여 주기.
처음은 전부 신우에게 줘야 되니까 진짜로는 안 된다.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했다. 손장난 정돈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신우한테 걸리면 뽀각 당할 텐데 그 정도 만지는 것 정돈 너그럽게 이해해 줘도 될 것 같았다. 이를테면, 마지막 만찬인 거지.
물론, 한솔은 저 스토커들이 스토커가 아니라 선량한 시민일 경우도 생각했다. 거의 5분에 가까운 거리를 한솔이 멈추면 멈추고 움직이면 따라오는 게 선량한 시민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우연찮게도 가는 길이 같을 뿐이라면 아쉽긴 해도 어쩔 수 없지, 뭐. 그러면 그냥 원래 계획대로 신우와의 데이트를 즐기면 되는 일이다.
“이봐.”
하지만 이 범죄자들은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한솔이 자연스럽게 화장실 문을 열고 거울 앞에 서서 차림새 정돈을 시작했을 때 등 뒤에서 다시 한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반대편에 있던 거울을 통해 드러난 침입객들의 모습은 한솔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나 알파들의 평균 신장을 생각하면 상당히 작은 편이었다. 다만, 무슨 일을 하는지 몸통만큼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남자들이었다.
뒤늦게 확인한 남자들의 목에 초커는 없었다.
오메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네?”
한솔은 설마 자신에게 하는 말이냐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남자를 올려다봤다. 앞으로 10분. 한솔이 버텨야 하는 시간이었다. 한솔은 키패드의 1번을 꾹 누르고선 그제야 상대가 오메가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사람처럼 흠칫 놀란 척 뒤로 물러섰다. 자연스럽게 놓친 핸드폰이 세면대 위를 구른다. 위기를 감지한 초식 동물처럼 한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한솔에게 말을 걸었던 범죄자1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피차 다 아는 사람들끼리 얼른 하고 끝내지?”
…이게 뭔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세요….”
“거 엄청 튕기네. 설마하니 이런 데까지 와 놓고서 모르는 척할 건 아니지? 어린놈이 가짜 오메가 흉내나 낼 정도면 까져도 단단히 까졌다는 거 아냐.”
“그래, 김 씨 말대로 6번 칸까지 들어온 거 보면 말 다 했지.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 가지고 레몬 냄새나 폴폴 풍기면서, 응?”
“장소도 아주 용의주도하게 골라 놓고선 이제 와서 튕기면 아저씨들이 섭하지.”
범죄자1과 2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솔의 말을 잘라 냈다.
가짜 오메가…? 6번 칸…? 레몬…?
한솔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의 향연에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레몬은 입욕제 향긴데?
그때, 문득 아까 만났던 오메가 역무원과의 대화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코스어신가요?
-6번 칸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설마 지금 나보고 오메가 흉내 내는 베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
한솔은 잠시 침묵했다. 너무 어이가 없으려니까 말이 안 나오는 건 또 처음이었다.
“저기, 사람 잘못 보셨어요.”
한솔은 일단 대화를 시도했다. 오메가 코드를 도용하는 일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지하철 내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심지어 오메가인 역무원이 한 번 더 확인까지 해 주는 스케일이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무래도 한솔의 몸 상태가 정상적이진 않다 보니 열성에 가까운 역무원은 한솔을 베타라고 인식했던 모양이다. 페로몬 샘을 엮는 시술이야 일반인들은 알기 어려울 테니까 영락없이 베타로 보였겠지.
한솔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누가 봐도 미자인 한솔을 건드리려고 하는 것부터가 이 사람들이 양심을 팔아먹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피차 오해가 있었으니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은 해 줘야 했다. 안 그랬다간 경찰서가 아니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알파한테 다 큰 어른이 쥐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한솔은 자신이 고의로 핸드폰을 놓친 세면대를 힐긋거렸다. 지금 세면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한솔의 핸드폰에는 파란색 불이 들어온 상태였다.
신우가, 지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
“무슨 오해를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 오메가구요. 튕…긴다는 그런 건 한 적 없어요…!”
“뭐? 네가 진짜 오메가라고?”
“…네에.”
한솔은 뒤늦게 자신의 형질을 밝혀 부끄러운 것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우한텐 다 들렸겠지? 한솔은 슬쩍 세면대를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려는 것처럼 두 손을 앙증맞게 움켜쥐고선 남자들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여긴 오메가 전용 화장실이라 두 분은 들어오시면 안 되는…! 흡?!”
한솔은 갑작스럽게 어깨를 움켜쥐는 손길에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숨을 짧게 들이켰다. 수염이 우둘투둘 난 남자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맛, 맛이 간 것 같은데? 남자의 눈알이 어둑한 전등 아래 번들번들하게 빛났다. 꼭 광기에 젖은 모양새였다. 한솔은 본능적으로 오들오들 떠는 척을 하며 고개를 움츠렸다.
“어쩐지… 베타라기엔 묘하게… 이것이 묘하게 말랑말랑하게 생겼다 했더니-.”
남자가 누런 이를 씩 들어 보이며 웃는다.
“진짜 오메가라고.”
“어이, 박 씨. 그걸 믿어?
“못 믿을게 무언가. 가짜면 코드를 도용한 거니 알아서 입 다물 테고, 진짜면… 횡재한 거지. 우리 같은 놈들이 어디 가서 오메가 뒷구멍 맛을 보겠어? 게다가 이런 어린놈을.”
“큼, 그건 그렇다만….”
한솔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들 베타구나.’
긴가민가했는데 이제 알겠다. 페로몬을 숨기고 있는 알파인 줄 알았더니 그냥 오메가 한 번 따먹어 보겠다고 설치는 베타들이었다. 세상에는 한솔 같은 사람들도 있는 법이니, 오메가 흉내 내는 베타나 진짜 오메가는 건들지도 못하고 가짜 오메가들이나 사냥하고 다니는 인간말종도 있을 법했다.
‘조금 한심하긴 하지만.’
한솔은 속으로 혀를 차며 겉으로는 겁을 먹은 것처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솔의 얄쌍한 눈꼬리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투명한 물빛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남자가 콧김을 훅 내쉬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겁먹은 소년의 얼굴을 훑는 두 눈이 음험한 색으로 빛났다. 확실히… 지금까지 먹어 본 ‘가짜’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의 소년이 더더욱 ‘진짜’라고 여겨졌다.
“뭐…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오메가는 뒷구멍으로 젖는다고 하니까.”
범죄자1이 비열한 얼굴로 말했다. 못생긴 얼굴이 불쑥 내밀어지는 모습에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걸 겁을 먹었다고 해석한 건지 범죄자1이 킬킬거리며 웃는다.
‘우와, 대박.’
한솔은 난생처음 겪어 보는 추행에 속으로 감탄을 흘리고 있었을 뿐이지만. 때로는 진실을 모르는 게 약이었다. 한솔은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뚝뚝 떨궜다. 나름의 서비스였는데 반응이 참 좋았다. 남자들의 눈에 짙은 가학심이 서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괜찮겠지? 이놈 초커 찬 거 보니 거 뭐냐, 주인이란 게 있다는 거잖아.”
“어린놈이잖나. 분명 뒤 동정도 못 뗀 아다겠지. 이런 놈들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바로 구멍 순결이야. 아다 떼였다고 하면 바로 버림받을 텐데 그걸 지 입으로 곧이곧대로 말하겠어?”
범죄자1의 말에 솔깃한 범죄자2가 슬금슬금 한솔에게 다가온다. 한솔은 3월 한 달을 무채색의 교복밖에 입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화사한 비비드 컬러의 아이템으로 무장한 채였다. 거기다 조금 보태서 신우의 무쇠 같은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해 상의는 양어깨가 조금 트인 보트넥 형태의 병아리색 니트였고 하의는 발목이 드러나는 스키니형 청바지였다.
니트를 청바지 안에 살짝 집어넣어 허리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패션은 보기에는 예뻤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남이 만지기에 딱 좋은 형태였다. 한솔은 범죄자들의 음흉한 시선을 보고 이쯤에서 한 번 제동을 걸어 주기로 했다.
“흐윽… 하지 마세요… 제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남자들은 그래서야 들리기나 하겠냐고 끌끌거린다. 한솔은 속으로 ‘그러게요.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긴 한데, 히히.’거리며 범죄자1의 돌덩이같이 단단한 몸을 연약한 손길로 밀쳤다. 물론, 범죄자1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알파보다 못한 이들이긴 했지만, 몸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진심을 다해 밀쳐도 물러나지 않는다는 게 특히 마음에 들었다. 마음껏 반항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한솔이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남자들을 때리고 밀쳐도 남자들은 뚝심 있게 한솔을 희롱했다. 혹시 있을 주인을 대비한 건지 아직 말뿐이었지만 드디어 귀를 만지작거리는 남자도 생겼다. 한솔은 까치발을 들고서 끙끙거리며 남자들의 손길을 피했다.
“앗! 흡! 그마안….”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귓불의 여린 부분을 빙글빙글 매만졌다. 동시에 움푹 파인 구멍 안을 뭉툭한 손톱이 콕콕 쑤셨다. 한솔이 제발 그만해 달라고 울먹이며 애원하는 와중에도 남자들은 그런 한솔의 행동을 어린아이 재롱 구경하듯 느긋하게 감상했다. 아, 너무 좋아…. 한솔은 자신이 무력하게 희롱당하는 순간을 신우가 생중계 라이브로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랫배가 욱씬욱씬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만족감이 더 컸다.
그가 그 감각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선 부러 침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곳은 안전한 신우의 품이 아니었고 한솔이 마음껏 무너져도 괜찮을 둘만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남자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지?
한솔이 몽롱한 머리로 다음 수를 생각할 때였다.
똑똑-.
문 너머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조용히 해!”
낮게 일갈한 범죄자1이 그 즉시 한솔의 입을 막았다. 두툼한 손바닥에 의해 입이 막힌 한솔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으읍!”
“얌전히 있어, 아가야. 밖에 있는 사람 앞에서 박히고 싶은 건 아니겠지?”
범죄자1의 말에 한솔은 눈물을 흘리는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얌전히 있겠다는 듯이 조용히 훌쩍이고만 있자 한솔을 얕보고 있던 남자들의 신경은 금세 문 너머로 향했다. 한솔은 그들의 주의가 돌아간 틈을 타 힐긋 세면대를 바라봤다. 한솔의 핸드폰은 여전히 통화 중을 나타내는 푸른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똑똑-.
나직한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쩌저적-.
경첩이 달린 문손잡이 주변으로 나무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들이 소리 없이 기함하는 것이 느껴졌다. 금속 손잡이를 중심으로 작은 실금이 퍼지더니 거미가 줄을 치듯 조금씩,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쾅-! 그들이 서 있는 곳까지 바닥이 울릴 정도로 거친 굉음이 들렸다.
철컥- 하고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끼이익-. 볼품없이 열리는 문. 그 영향을 받은 것처럼 천장에 달려 있던 전등이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껌벅인다. 두세 번의 깜박임 끝에 역광을 받고 서 있던 그림자가 빛에 서서히 물드는 것처럼 조금씩 걷혔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창백한 피부. 감정 없이 가라앉은 새까만 눈동자. 마치, 모델 같이 비율 좋은 몸.
너덜너덜해진 손잡이를 통째로 뜯어낸 알파가 감흥 없는 얼굴로 들고 있던 손잡이를 내던진다. 툭- 데구루루…. 금속 도금이 유난히 어둑해 보이는 빛을 받아 잿빛으로 빛났다. 문턱 너머에 선 세미 정장 차림의 알파가 귓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차분히 내렸다.
“한솔아.”
그의 알파가 왔다.
***
유신우가 이한솔을 처음 인지한 건 만 9개월 때의 일이다.
“꺄르르-.”
다른 알파들도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어릴 때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기 분 냄새가 나는 요람의 기억.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색색의 모빌을 무료하게 바라보고 있던 신우에게 난생처음 보는 존재가 다가왔다. 아주 작고 보송보송한 냄새가 나는 아기였다.
“꺄아- 꺄!”
지금에서야 그게 알파의 영역 본능이란 걸 알지만, 생각은 트였어도 깊은 사고는 불가능했던 그때의 신우에겐 그 존재는 마냥 경계의 대상이었다. 자꾸만 자신 쪽으로 배밀이를 하며 다가오는 아기에게 손발을 휘저으며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아기는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꺄르륵! 뭐가 그리도 좋은지 해맑게 웃으며 엉금엉금 기어 올 뿐이다. 그러곤 기어코 누워 있던 신우의 옆자리를 꿰차더니 포동포동하게 살이 찐 양 볼을 우물거리며 신우를 빤히 내려다봤다. 뭔가 홀린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야.”
신우가 짧은 말을 옹알거리며 아기를 살살 밀어 냈다. 같은 년도에 태어났어도 만 한 살 이하의 2개월은 차이가 꽤 컸다. 자신보다도 작아 보이는 아기를 세게 밀칠 수는 없어서 신우는 아기를 밀어 내는 걸 포기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어쩐지 움직이기엔 매우 귀찮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아기가 신우의 옆구리-라기엔 상하체의 구분이 거의 가지 않는 몸이었지만-를 파고든다. 작은 몸은 그마저도 이기지 못하고 기우뚱 기울었다. 결국, 영역도 지키지 못하고 제 몸마저 아기에게 내어 준 신우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시근덕거렸다.
“저, 리, 가!”
아기가 신우의 눈앞에 고사리 같은 손을 쫙 펼쳤다.
잼잼-.
꺄아-! 하고 소리치며 방긋방긋 웃는 얼굴에 신우는 그만 기가 막히고 코도 막혔다. 머릿속이 앵앵 울렸다. 화도 나고 짜증도 나는데 어떻게 풀어야 될지 모르겠어서 신우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쩐지 얘 앞에서 우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신우는 씩씩거리다가 의도치 않게 몸을 홀랑 뒤집었다. 덕분에 분 내 나는 몸이 툭 넘어간다. 아기는 꽤 놀랐는지 그 상태로 눈을 땡그랗게 떴다. 이제는 반대로 아기의 위를 차지한 신우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때, 너도 당해 보니까 짜증 나지?
“흐앙-.”
그런데 애가 울기 시작했다.
항상 주위에 자신을 돌보는 어른들뿐이던 그때의 신우는 남이 우는 걸 난생처음 봤다. 그것도 제 또래의, 자신보다도 작아 보이는 아기가 제 눈 반만 한 눈물방울을 방울방울 떨구며 우는 모습에 신우는 한껏 당황하고 말았다. 고사리보다는 조금 큰, 단풍잎 같은 두 손으로 뽀얗고 통통한 뺨을 야무지게 가린다. 이러면 저 눈물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우우….”
엄마, 아빠보다도 ‘아니야’와 ‘저리 가’를 먼저 배운 매우 독립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만 9개월의 아기, 유신우는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다가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는 아기 옆을 기웃거리던 신우는 문득, 자신이 화가 나서 울 때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신우 도련님, 뚝 하셔야죠. 뚝!
신우는 뭐든지 빨리 배우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는 배운 것을 실천하기 위해 하얀 뺨 사이에 갇힌 앵두같이 도톰한 입술을 바라봤다.
“뚜욱-.”
쵹-.
만 9개월, 유신우가 기억하는 이한솔과의 첫 뽀뽀였다.
“엉아야….”
아기 때부터 신우보다 훨씬 작았던 한솔은 3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작았다. 형이 아니라 해도 저보다 크다는 이유로 형이 되어 버린 신우는 지금 한솔과 놀이터에 나와 있는 중이다. 동네 아이들의 만남의 장터인 흙먼지 이는 놀이터는 아니고 아직은 천성 전자 사장 자리에 머물러 있던 유진철 사장이 정원 한쪽을 갈아엎어 버리고 만든 프리미엄 전용 놀이터였다.
“엉아야… 무셔….”
“할 수 있어.”
“아냐, 모태…!”
“할 수 있다니까. 이렇게 슝- 하면 돼. 슈웅-.”
신우가 미끄럼틀 위에 올라간 걸 보고 아장아장 따라 올라갔던 한솔은 정작 내려오질 못해서 울상을 지었다. 신우는 미끄럼틀 옆에 바짝 서서 한솔을 다독였다. 결국 ‘흐에엥’ 하고 울음을 터뜨려 버린 한솔을 놀이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모가 다가와 내려 준다. 한솔은 한 손에는 유모가 쥐여 준 작달막한 분홍색 유과를 꾹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신우의 손을 꼭 움켜쥔 채 훌쩍훌쩍 울었다. 신우는 한솔의 손을 잡은 채 어른들이 모여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네가 한솔이를 잘 지켜 줘야 한다.”
유 사장이 신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알파 판정을 받은 신우는 유 사장이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그 뜻을 이해했다.
“네.”
그래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신우는 이한솔을 지켜야만 한다. 신우가 처음으로 한솔을 ‘내 것’이라고 인식한 날이었다.
신우와 한솔은 망가진 볼펜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잘못했어….
한솔이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사과를 건넨다. 온순한 눈꼬리는 미안함에 축 처진 채였다.
바다까지 건너온 이 볼펜은 20XX년 한정판 스페셜 에디션이었다. 국내에선 몇 자루 되지도 않는, 사무 용품치고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가격의 소장품. 신우는 그런 덴 관심이 없고 단순히 쓰기 편하다는 이유 하나로 아끼던 볼펜이었지만 말이다.
구하려면 충분히 다시 구할 수 있었다. 그다지 품이 드는 것도 아니다. 신우의 전반적인 생활을 관리해 주는 집사에게 한마디 건네면 다인 일일 테니까. 하지만 아끼던 것이 망가졌다는 사실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신우는 곰곰이 생각했다.
‘얘가 사춘기가 일찍 왔나.’
열 살. 조금 이르긴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
벌써 여덟 번째였다. 어느 날부턴가 덤벙댐이 심해진 한솔은 자주 넘어지고 다치는 탓에 신우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신우가 온 세상을 잠재적 위험군으로 분류하기 전에 다행히도 그런 일은 차차 줄어들었지만, 그 후론 이상하게 물건을 잘 망가뜨렸다. 책, 머그 컵, 메모지, 볼펜…. 작다면 작고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들. 문제는 ‘내 것’에 대한 애착이 심하고 그 경계선이 분명한 신우로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거다. 그중에서 1순위인 한솔은 항상 뭔가를 망가뜨린 다음 그걸 들고 쭈뼛쭈뼛 찾아와 ‘잘못했다.’거나 ‘화 안 내…?’라고 하며 신우를 시험에 들게 했다.
‘참아야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상대가 이한솔인 이상은.
그의 울타리 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존재.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서 기꺼이 안주하는 존재.
세상의 어떤 귀물을 가지고 와도 이한솔이 유신우의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이상 그의 앞에선 빛을 잃을 것이다.
그것이 신우의 세상이었으므로.
-…다음부턴 조심히 써.
그는 결국 하나 마나 한 경고를 건넸다. 어쩐지 자수를 하러 올 때마다 무언가를 기대하듯 반짝이는 눈을 하는 한솔이 이상하게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한솔은 여러 차례 물건을 망가뜨렸지만, 신우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 이것도 여러 번 당해 보니 요령이 생긴 덕이다.
신우는 이제 무언가 마음에 들었다 싶으면 한솔이 망가뜨릴 것까지 계산해서 최소한 두 개 이상을 준비했다. 그의 책장엔 같은 제목의 책이 세 권, 필통은 구성이 아예 똑같은 것으로 하나 더 존재했으며 컵이나 장식품 같이 깨지기 쉬운 것은 박스째 주문해 놓기도 했다.
희소성이 사라지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신우는 해가 지날수록 인내심이 깊어졌다. 자신보다 작고 예민한 아이를 위해 화가 나도 언성을 높이지 않는 습관이 생기기까지 했다. 차분한 데다가 매사에 준비성이 철저한 신우를 두고 주변에선 철이 일찍 들었다며 치켜세웠다. 그는 그냥 ‘이한솔 재난’을 피하려 했을 뿐인데 말이다.
지금의 유신우를 만든 것은 그의 천성이 그런 것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 절반은 한솔이 이뤄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우는 진지하게 그리 생각했다.
-오랜만이다?
테라스의 하늘은 어두웠다. 화려하고 반짝이고, 또 시끄러운-. 유유자적 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상대적으로 어둡게 보이도록 만드는 곳에서 도망쳐 나온 게 불과 몇 분 전이다. 홀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신우에게 불청객이 찾아온 건 한솔에게서 세 번째 메시지가 왔을 때였다. 신우는 상대가 보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핸드폰 화면을 덮고선 한 박자 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낯이 익은 불청객, 한성민이 붉은 음료가 든 와인 잔 하나를 신우에게 건넨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한성민이 양아치스러운 얼굴로 실실 웃으며 음료를 쭉 들이켠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와인 잔을 바라보던 신우는 가볍게 입술만 축였다. …색만 이렇지 그냥 포도 맛 나는 주스였다.
-너 베타들 다니는 학교 들어갔다며.
-어.
-웬일? 천성 도련님께서 무려 서민 학교에 가셨다고 아주 소문이 파다해.
이놈은 다 좋은데 입이 영-.
대형 미디어 그룹의 장손답게 정보에 밝고 인맥도 넓으나 신우는 성민이 영 마땅치 않았다. 도련님이니, 뭐니, 자다가도 소름이 돋아서 벌떡 일어날 것 같은 오글거리는 소문의 절반 이상이 한성민의 짓일 게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입이 아주 가벼운 것은 아니고 정말 중요한 일에 한해서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입을 다무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어른들은 생각보다 이런 놈을 좋아했다. 배짱이 있다나, 뭐라나.
신우는 이런 걸 몇 안 되는 친구라고 내버려 두는 자신이 한탄스러울 지경이었지만 지천에 널린 게 돈과 권력의 찌꺼기를 탐내는 하이에나들이었던 탓에 한성민만 한 놈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집안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아주 틀어지지 않는 이상 평생을 볼 얼굴이었다. 신우는 무감한 얼굴로 성민의 관심을 잘라 냈다.
-그렇게 됐다.
흐음…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늘인 성민이 와인 잔의 가느다란 스템을 빙그르 돌리며 씩 웃는다.
-맞춰 볼까?
컵에 담겨 있던 붉은 액체가 출렁 흔들렸다.
-본인이 세워 둔 계획에서 벗어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유신우가 기꺼이 궤도를 비트는 이유가 뭐겠어.
마치 노랫말을 하는 것처럼 성민이 경쾌하게 뒤를 이었다.
-미래의 사모님께서 관여하신 거지.
…진짜 한 대만 때릴까.
신우가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자 성민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래서 이놈을 만나기 싫었는데- 하여튼 양아치스러운 놈이다. 놈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중후한 분이신데 이놈은 도대체 왜 이렇게 생겨 먹은 건지 모르겠다. 신우는 나지막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말 도는 건.
-아직은? 이 의원님이 워낙 싸고도니까 기자들도 얼씬 안 하지. 의원님 성격 화끈하시잖냐. 가서 무슨 호통을 들으려고.
-언론 말고, …애들 사이에선?
학교에 다니게 된 이상 이한솔은 집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만 받을 수 없게 됐다. 불과 한 달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떠올리자 신우의 미간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학교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평생 보살핌만 받고 자란 철없는 어린애들이 끼어들면 그야말로 생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신우는 와인 잔의 보울을 툭, 툭 건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뭐, 한창 오메가에 관심 가질 나이긴 한데… 아무래도 뒤탈이 없는 쪽을 더 선호하지. 연예계라든가.
이쪽은 가성비가 영… 그렇잖아? 한성민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속삭인다. 어린놈들이 벌써 스폰 잡고 있단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런데 솔직히 난 아직 이해가 안 된다. 신우야.
신우를 휙 스치고 간 성민이 테라스 난간에 껄렁하게 몸을 걸치며 말했다.
-뭘 그렇게 애지중지하냐?
-…….
-신경이 쓰이면 집 안에 가둬 두든지. 의원님도 네 말이면 진지하게 고려하실 텐데.
하여튼 별난 놈이라며, 성민이 피식 웃었다. 바람이 불자 두 사람의 셔츠 칼라가 팔락이는 소리를 낸다. 물끄러미 성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우가 입을 열었다.
-글쎄….
그는 언뜻 평온해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착각하는 게 있는데.
-으음?
-나는 그 아이를 특별히 애지중지해서 풀어 주는 게 아냐.
-…뭐?
-오히려 반대지. 그냥 그 아이의 일상을 남김없이 씹어 먹고 싶었을 뿐이니까.
이런 걸 다정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천하의 유신우도 다년간 결론을 내리지 못한 문제였다.
다른 평범한 오메가들처럼 집 안에 가둬 둔다고 치자.
그럼 그 집 안에서 일어나는 한솔의 일상을 그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신우는 그 질문에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소식 정도는 가능하겠지. 하지만 지금처럼 온전한 이야기를 그리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함께 등교하고 수업을 듣고 같이 밥을 먹고- 때로는 하교 후의 일상마저 함께하는 삶.
한솔은 본인이 졸라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신우가 아주 오랜 시간 양가의 부모님을 설득해 얻은 전리품이었다.
오직, 그의 허기짐을 달래기 위해서.
-…야, 갑자기 걔가 막 불쌍해지려고 그러는데.
-네가 왜.
신우가 성민을 지그시 바라보자 성민이 몸을 부르르 떤다.
-관심 아니니까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마라, 좀! 너 얼굴 굳히면 주변 온도가 5도는 내려가는 거 같다고.
-애초에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든가.
-에이 씨. 말도 못 하냐.
이건 독재라느니, 넌 커서 악덕 폭군이 될 거라느니. 또 한참 동안 실없는 소리를 궁시렁대는 성민을 가볍게 무시하자 때마침 검은 핸드폰 화면에 반짝 빛이 들어왔다. ‘아버지’라고 적힌 단출한 글자. 신우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그는 한성민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따로 인사를 건네지는 않는다. 또 어디선가 불쑥 만나게 될 사이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대신,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유 회장의 목소리 사이로 어렴풋이 이런 말이 들렸다.
-저러다가 저놈, 나중에 의처증 걸려서 발목에 족쇄 채워 두고 가두는 거 아냐?
신우는 테라스를 나서며 충분히 그럴 듯하다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1
도착했어?
한솔을 마중하러 가는 길.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있던 신우는 거대 해양 생물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메시지를 보내자 실시간으로 1이 사라진다. 곧 새로운 답장이 떴다.
솔이
응!
나오지 말고 안에 있어.
데리러 갈게
솔이
그럼 나 화장실 갔다 와도 돼?
그래, 그럼
오메가 전용이지? 그쪽으로 갈 테니까 거기 있으면 되겠다
자신이 봐도 구구절절했다. 그런데 상대가 이 아이면 그게 마음처럼 조절이 안 됐다.
‘내가 너를 너무 어리게 보는 걸까.’
어릴 때부터 봐 왔고 한때는 형 노릇을 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둘은 동갑이었다. 신우가 자란 만큼 한솔도 자랐다. 이제는 어느 정도 성숙한 태를 물씬 풍기기까지 한다. 그는 얼마 전에 맡았던 아찔한 꽃향기와 제 품 안에서 흐트러졌던 매혹적인 육체를 떠올렸다.
‘미쳤군.’
즉각적으로 하체가 뻐근해지는 느낌에 신우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리다, 어리다 하면서도 몸만큼은 솔직한 자신이 우스웠다. 신우는 짙게 선팅 된 창문을 내렸다. 이 상태로 한솔을 만나러 갈 수는 없을 테니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차가 부드럽게 정차하자 신우와 정 비서가 동시에 차에서 내린다. 대외적으론 천성 그룹 회장 비서실 막내였지만 신우가 성인이 되면 그의 수행 비서가 될 사람이었다. 스물하나, 베타에 사적으로는 친한 형 포지션이다. 지금은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짓기 위해 따라왔고 기사와 함께 돌아갈 예정이었다. 태블릿을 들고 다가오는 그를 잠시 손짓으로 물린 다음 신우는 새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솔이
많이이 늦어?
역이야. 곧 내려갈게
지루한가 보네. 되도록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정 비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은 신우에게도 얼마 없는 쉬는 날이나 마찬가지다. 다음 주 스케줄을 조정하고 마무리를 짓는데 손안에서 핸드폰이 웅웅- 울렸다. 메시지 음이 아니라 전화음이었다. 개인 핸드폰이라 연락 올 곳이 몇 군데 없는데… 의아해하며 내려다보자 ‘솔이’라고 저장된 전화번호가 보였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네, 고생하셨어요. 정 비서님. …솔아?”
신우가 예외적으로 정 비서가 뒤도 돌아보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공적인 업무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정 비서는 예비 상사의 적응 안 되는 간지러운 애칭에 황급히 뒤를 도는 대신 웃음을 삼켰다. 누구라도 저 서리 내리는 냉미남의 표본 같은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지는 모습을 보면 웃음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업무로 만나는 신우가 덜 자란 소년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어른스럽다면 오메가를 대하는 알파의 얼굴은 꼭 마법처럼 그 나이대로 돌아가곤 했다. 베타인 정 비서는 알 수 없는 세계였지만 신기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
그런데 평소와 달리 오메가의 전화를 받은 알파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었다.
“…도련님?”
“……하.”
불안한 마음에 정 비서가 신우를 부르자 알파가 이를 아득 갈았다. 흠칫-. 유신우가 이렇게 대놓고 위협 신호를 보인 것은 처음이었던 정 비서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어릴 때부터 천성 그룹 후계자의 비서로 낙점되어 훈련을 받았던 그였지만 신우의 이런 모습은 정말 처음이었다. 정 비서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위험한 기세를 내뿜는 알파에게 다시 말을 걸려 할 때, 신우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형.”
“어?”
“내가 혹시 이성을 잃은 것 같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말려요.”
폭행으로 기사 나면 아버지 뒤로 넘어가실지도 모르니까.
“뭐? 아니, 잠깐 신우야! 신우야?!”
기절초풍할 것 같은 말 한마디를 남기고 역 안으로 무서운 속도로 뛰어가 버리는 신우의 모습에 정 비서는 검은 세단을 한 번, 지하철역을 한 번 바라본 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신우를 따라 뛰었다. 아니, 쟤는 정장 입고 무슨 속도가 저렇게 빨라?! 헉헉거리면서도 비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정 비서는 다급히 퇴근 직전인 경호 2팀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XX역! 안으로 들어오세요! 도련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때, 신우의 핸드폰에선 이런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오해를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 오메가구요. 튕…긴다는 그런 건 한 적 없어요…!]
[뭐? 네가 진짜 오메가라고?]
[…네에.]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한솔의 목소리와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의 목소리. 신우는 너무나 쉽게 자신을 오메가라고 밝혀 버린 한솔의 목소리에 심장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하, 이한솔 너 진짜-. 한솔은 어릴 때부터 오메가치곤 경계심이 옅고 모두에게 순한 아이였다. 그건 명백히 미성년자로 보이는 이를 두고 작업을 치려는 놈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데려오면 혼을 낼 것이다. 다시는, 다시는 저런 놈들 앞에서 함부로 형질을 밝힐 수 없게-.
신우는 계단 6칸을 한 번에 뛰어내렸다. 끼익-. 구두 굽과 대리석 바닥이 거친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은 한솔을 무사히 데려오는 게 먼저였다. 신우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긴 오메가 전용 화장실이라 두 분은 들어오시면 안 되는…! 흡?!]
귓가에서 들리는 선명한 비명 소리. 신우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던 것도 잊고 우뚝 멈추어 섰다.
“씨발….”
[뭐…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오메가는 뒷구멍으로 젖는다고 하니까.]
“미친놈들이 진짜!”
생각이란 게 깡그리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분노뿐이었다.
[어린놈이잖나. 분명 뒤 동정도 못 뗀 아다겠지. 이런 놈들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바로 구멍 순결이야. 아다 떼였다고 하면 바로 버림받을 텐데 그걸 지 입으로 곧이곧대로 말하겠어?]
전파를 타고 흘러들어 오는 저질스러운 목소리에 신우는 자신도 모르게 하하-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알파의 이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흉포한 짐승을 제어할 수 없다는 뜻을 일컫는다.
친절, 배려, 인내… 그 모든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진 알파는 멀리서만 봐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흐윽… 하지 마세요… 제발….]
하지만 그는 움직여야 했다.
그의 오메가가 울고 있으니까.
한솔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이를 악문 신우가 다시 역 안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메가 화장실을 뜻하는 형광등 표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따뜻한 파스텔 톤의 문 위로 알파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몇 번 숨을 고르는 것으로 호흡을 진정시킨 그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젖힐 것처럼 손잡이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알파의 뛰어난 머리는 과거의 어떤 기억을 끄집어냈다.
-으음, 신우는 키가 크잖아.
갑작스레 커 버린 짝을 어려워하던 아이.
-그래서 조금 놀랐나 봐….
쑥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얼굴이 지금보다 훨씬 더 앳되어 보인다.
신우는 마지막 숨을 고른다. 마침내 평소와 같은, 적어도 겉으로는 무심해 보이는 얼굴을 되찾은 알파는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뻗어 눈앞의 문을 일정한 속도로 두들겼다. 똑똑-. 그 언젠가처럼, 한솔이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놀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쩌저적- 그의 인내심은 금방 한계에 도달했다.
배려의 뜻이 담긴 노크와는 모순적이게도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는 금방이라도 문을 부숴 버릴 것처럼 억센 힘이 들어갔다. 손등에 푸른 핏줄이 툭 불거져 나오자 손잡이를 중심으로 덫 같은 균열이 일파만파 퍼져 나간다.
신우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리고 손목을 힘주어 비틀어 소리 없는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철컥-. 승자가 정해짐과 동시에 잠긴 문은 손쉽게 아가리를 벌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는 쓸모없어진 문의 부품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쨍그랑! 금속 부품이 볼품없이 널브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시야를 가리고 있던 어둑한 그림자가 걷혔다.
“한솔아.”
그의 오메가를 되찾을 시간이었다.
화장실 안에 적막함이 감돌았다. 이따금 작게 헐떡이는 소리만이 들릴 뿐, 누구 하나 숨소리마저 허투루 내쉬지 않았다. 알파는 고운 단화가 감싼 발끝부터 시작해 늘씬한 몸을 타고 느릿느릿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물로 흠뻑 젖은 여린 얼굴까지 말이다.
“이한솔, 이리 와.”
낮게 가라앉다 못해 거친 금속성이 섞인 목소리가 그의 오메가를 부른다.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던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이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놔 주세요…. 싫어… 신우야…. 흐읏….”
겉으론 침착함을 가정하고 있지만 속은 들끓다 못해 새까맣게 재가 휘날리고 있던 신우의 속이 다시 한번 엉망으로 뒤엉켰다. 만약, 그가 쉽게 폭발하는 이였다면 문을 여는 순간부터 저 무뢰배들과 주먹다짐을 했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가 그리하지 않은 것은 화가 덜 나서가 아니라 실낱같은 이성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폭력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알파인 신우도 저 베타 무리도 아닌, 약자인 한솔이었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두고 볼 수 없었던 신우는 문드러지는 속을 다스리며 화장실 안으로 성큼 걸음을 들였다.
“-오, 오지마!!”
“아윽….”
“이놈, 다치는 꼴 보고 싶어?!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신우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짙게 가라앉았던 검은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오른다. 검은 머리, 검은 정장. 꼭 저승에서 강림한 차사 같은 모양새에 꼴사납게 한솔의 뒤에 반쯤 숨어 있던 무뢰배 하나가 히익, 거리며 물러났다. 우두머리 행세를 하던 앞쪽의 무뢰배는 한솔의 몸을 생명줄처럼 움켜쥔 채 꿀꺽 침을 삼켰다. 솥뚜껑 같은 손에 의해 인질처럼 붙잡혀 있던 한솔은 두려움에 젖어 오들오들 떨었다. 간절한 눈망울이 그를 올려다본다. 신우야… 환청처럼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 지 말라 했…!”
저벅-.
“네노옴…! 새파랗게 어린놈 주제에…! 허억?!”
“보잘것없는 인생, 이대로 나락까지 떨어지고 싶으시면 어디 더 지껄여 보시죠.”
탁. 멀지 않은 거리를 단숨에 좁힌 신우가 웃기지도 않는 인질극을 벌이는 이들 앞에 멈추어 섰다. 한 걸음 반 정도 되는 거리. 알파는 고개를 툭 기울이더니 감정 없는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봤다.
“사실, 난 부디 당신들이 그래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야… 내게 명분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쓰레기를 짓밟는 것에 이보다 더한 명분이 필요하다니 짜증 나는 세상이다.
“법대로 노는 건 조금, 지겹지 않나요?”
신우가 입꼬리를 움직여 보기 좋게 웃었다.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인데 싸늘하게 가라앉은 두 눈 때문인지 분위기는 오히려 얼어붙었다.
알파는 손을 뻗어 떨고 있는 오메가의 어깨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입만 살아서 떠들어 대던 것과 달리 두 무뢰배 중 누구도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나긋한 몸을 붙잡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이 선마저 넘어 버리면 세상 빛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던 탓이다. 결국, 무사히 알파의 품으로 돌아온 오메가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것처럼 축 늘어졌다. 추행을 당한 여파로 아직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몸을 한 팔로 끌어안은 신우가 한솔의 귓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북풍한설보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도련님!!”
때마침 기적적으로 신우를 쫓아오는 데 성공한 정 비서가 다급히 신우의 팔을 붙잡았다.
“놔.”
“안 됩니다! 일단, 진정을-!”
“놓으라고 했습니다.”
주먹 쥔 손등 위로 새파랗게 힘줄이 돋은 모습을 덩달아 희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던 정 비서가 필사적으로 신우의 앞을 막아섰다. 아무리 미성년자라지만 알파, 그것도 우성으로 발현할 게 거의 확실시 되는 알파인 데다가 꾸준히 운동으로 단련해 온 몸을 가진 신우였다.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걸 알기에 온몸으로 막아서야 했다.
“신, 우야….”
그러나 정 비서의 필사적인 움직임이 무색하게도 신우를 멈추게 한 건 들릴 듯 말듯 작고 가녀린 목소리였다.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였지만 신우는 이 난장판 속에서도 그 목소리를 정확하게 구분해 냈다. 신우가 움직임을 멈추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안고 있던 한솔을 내려다보자 한솔이 여태 눈물 맺힌 얼굴을 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 나가면… 안 돼…? 나 무서워….”
한솔의 뺨을 타고 가는 실선 한 줄기가 선명한 추락을 그렸다.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띄엄띄엄 속삭이는 미성은 신우의 혼탁해진 정신을 단번에 일깨우기 충분했다. 그제야 그는 좁은 공간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같이 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움켜쥐었던 주먹에 스르르 힘을 풀었다. 정 비서가 남몰래 한숨을 삼키며 안도한다.
한솔을 안아 든 채 신우는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그가 그 공간을 떠나기 직전, 정 비서를 향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 비서님.”
“아, 네.”
“미안합니다. 정식 사과는 돌아가서 드리겠습니다. 장소가 영 별로네요.”
“…아닙니다. 그럴 만하셨는걸요.”
“그리고 뒤처리 말인데-.”
알파는 나직이 입술을 비틀었다.
“깔끔하게, 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정 비서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먼저 가 보죠.”
신우가 화장실을 나오자 뒤늦게 도착해 입구에 몰려 있던 경호원들이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형질인이 드물다곤 하지만 천성 그룹 후계자 경호팀 정도 되면 최소한 열성 알파 이상이 모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황포하게 날뛰는 신우의 페로몬을 느끼고선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페로몬 수치가 낮은 알파들은 얼굴이 희게 질릴 정도로 굳은 모양새였다. 그만큼 완전히 개방된 신우의 페로몬은 위압감이 대단했다.
신우는 경호 2팀 팀장에게 자연스럽게 눈짓을 건네고선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그들과 멀어졌다. 따라오지 말라는 뜻을 알아차린 팀장은 얼이 빠진 경호팀을 추슬러 사건이 일어난 오메가 화장실로 들이닥쳤다. 지금부터 고용주의 아들이 지시한 문제의 그 ‘뒤처리’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테니 목격자는 적을수록 좋았다.
역내에서도 외진 곳에 있던 지하 1층 오메가 화장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한동안은 다시 열릴 일이 요원해 보였다.
한솔은 솔직히 말해 조금 죽을 맛이었다.
‘아으… 또 나왔어….’
형질인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질겁해서 멀어지든 말든 흉흉한 기세인 신우에게선 거의 마왕의 아우라 같은 거친 페로몬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페로몬은 형질인의 기분을 반영하는 만큼 지금 그의 페로몬에선 평소의 울창한 숲과 여유로운 짐승의 느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금방이라도 세상을 찢어발길 것처럼 원한 서린 귀신의 숲과 한 달은 굶주린 짐승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갇힌 한솔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뒤에서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애액 때문에 무척 곤란해졌다. 아무리 신우의 팔이 가리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속옷과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느낌이 달가울 리 없다. 아니, 없는 거 맞나…? 솔직히 공공장소에서 이러는 게 좋긴 한데….
분명 한솔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신우도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한솔의 주변을 꽉 틀어막고 있는 페로몬의 양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씩이지만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쯤 되면 간이 페로몬 샤워나 마찬가지였다. 한솔은 신우에게 음란하고 채신머리없는 자신의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많이 부끄러웠다. 그는 낑낑거리며 신우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페로몬 샘을 묶어 놔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필시 꽃향기를 질질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만큼 한솔은 지금 굉장히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법대로 노는 건 조금, 지겹지 않나요?
아까의 신우의 목소리가 돌림 노래 하듯 한솔의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만약 한솔이 혼자였고 이곳이 한솔의 방이었다면 그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것도 모자라서 깃털 베개를 팡팡 내리쳤을 것이다. 그만큼 그때의 신우는 오싹할 정도로 목소리가 낮았고 또 싸늘했으며 오만하기까지 했다. 한솔이 바라다 못해 염원하던 그 모습이었다.
탕-.
신우는 한솔을 내려 주는 대신 안은 그 상태로 정차해 있던 세단 뒷좌석에 올라탔다. 문이 넘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거친 소리를 내며 닫힌다. 그 설레는 소음에 한솔은 역을 빠져나와 신우가 타고 왔던 것으로 추정되는 차에 타게 됐음을 눈치챘다. 연락을 받은 건진 모르겠지만 뒷좌석과 앞 좌석 사이에는 눈치껏 검은색 가림막이 처져 있었다. 분명 방음 처리도 돼 있겠지. 그러라고 만들어 둔 공간이니까.
이제 한솔은 아무리 소리쳐도 다른 사람은 알아차릴 수 없는 폐쇄된 공간에 성난 알파와 단둘이 갇히게 되었다. 아주 바람직한 상황이다. 한솔은 신우의 몸에 올라타듯 앉아 있었고 신우는 한솔의 몸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맞붙은 가슴이 느리게 부풀었다 가라앉는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몸에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이한솔.”
“…으응.”
오늘만 벌써 이한솔이 몇 번인지. 신우가 한솔을 찾아낸 이후로 단 한 번도 ‘솔아’ 하고 불러 준 적이 없었다. 신우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솔이 눈치를 보는 것처럼 한 박자 늦게 대답하자 한솔의 허리를 끌어안은 신우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하체가 바투 맞붙는다. 신우의 어깨에 파묻혀 있던 한솔의 두 뺨이 남몰래 발긋한 빛을 띠었다.
“괜찮아?”
담백한 물음이었다. 분명 그의 속에서 곪고 있을 수많은 질문들을 내리누른 물음이었다. 멈칫한 한솔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신우가 남은 한 손으로 한솔의 뒤통수를 눌러 지그시 끌어안는다. 한솔은 순종적으로 신우의 품에 더 깊숙이 파묻혔다.
“지금은, 무섭지 않고.”
끄덕.
“…….”
“…….”
“…그래.”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솔이 조금 바르작거리자 신우는 그러지 못하도록 한솔을 단호하게 제지했다. 한동안 둘은 색색 숨만 내쉬었다. 그 정적을 깨뜨린 건 신우의 끓는 것 같은 한숨이었다.
“널 혼자 오게 두면 안 됐었는데.”
그가 깊이 한탄했다.
“내 불찰이야.”
으르렁거리는 숨소리. 한솔은 신우의 셔츠 자락을 움켜쥔 손으로 꼼지락꼼지락거리며 그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면 왠지 신우가 자신을 바라봐 줄 것 같아서 그랬는데 예상대로 앞만 노려보던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 한솔은 슬쩍 신우의 상체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허리를 옥죄던 그의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한솔이 떨어지려는 게 아니라는 듯 신우의 가슴을 느리게 토닥여 주자 마지못해 팔에 힘이 풀렸다. 그러나 결코 풀어 주지는 않았다.
한솔이 맑은 눈으로 신우를 바라봤다. 그의 몸에 올라타 있어서인지 드물게도 시선이 맞았다.
“그건 내가, 혼자 오고 싶다고 해서 그런 거잖아.”
“…….”
“내가 잘못한 거야.”
한솔은 ‘나’를 강조했다.
그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날려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이 씩씩한 얼굴로 상황을 분명히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얼렁뚱땅 신우의 페이스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신빙성 있는 생각이었다.
“…….”
신우가 감정이 거세된 눈으로 한솔을 지그시 바라본다. 한솔은 속으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일단 지르긴 했는데, 솔직히 좀 무서웠다. 꼭 배곯은 짐승의 입 안에 자진해서 머리를 들이민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엄청나게 짜릿한 느낌이란 뜻이다.
“솔아.”
신우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그가 느리게 얼굴을 숙여 한솔의 귓가에 속삭인다.
“네가 그러면….”
비단 같은 감촉의 입술이 귓불 위로 가벼운 소리를 내며 맞닿았다. 한솔은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기어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내가 널 혼내 주고 싶잖아.”
단언컨대, 귓가의 짐승은 웃고 있었다.
***
“…읏!”
별장의 대문을 넘어서자마자 페로몬 샘이 있는 목 언저리를 아프게 물렸다. 당연하게도 그 상대는 신우였다.
-후회하지 않겠어?
차 안에서 신우는 이렇게 물었고,
-응.
한솔은 그리 대답했었다. 그러니까 이건 경솔한 대답의 대가나 마찬가지였다.
“아, 아파… 신우야….”
신우는 한솔의 목덜미를 느리게 쓰다듬을 뿐, 한솔의 어리광을 받아 주지는 않았다. 그 낯선 외면에 한솔은 서러운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신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날 봐 줘. 예뻐해 줘-. 소리 없는 애원이 계속됐지만, 신우는 힐긋 한 번 바라보는 걸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솔이 헐떡여도 더 이상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
무시당했다. 신우에게.
한솔은 발끝에서부터 짜릿하게 퍼지는 쾌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발가락이 곱아 들고 목 안에선 앓는 소리가 고인다. 그 이면에는 예쁨받지 못했다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그랬다. 신우에게 매도당하고 싶은 마음과 예쁨받고 싶은 마음. 전혀 동떨어져 보이는 양가적인 감정은 진득한 실타래처럼 얼기설기 얽혀 한솔을 괴롭힌다. 결국 끙끙거리며 혼자 삭혀야만 했다.
그렇게 옮겨지길 몇 분. 눈앞에 익숙한 방문의 모습이 보였다. 한솔이 신우네 별장에 놀러 올 때마다 항상 사용하곤 했던 방이었다.
-의원님께 전화해. 주말 동안 동해 별장 다녀오겠다고.
그 숨 막히던 분위기와 목소리. 냉정한 눈빛. 한솔이 주말 동안은 온전히 신우의 통제 안에 갇히게 될 거라는 오만한 선언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때 한솔은 설레는 마음을 감추고 신우의 명령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여곡절 끝에 이 의원의 허락을 맡고 나자 장장 세 시간이 넘는 이동 시간 동안 차 안은 새까만 적막에 갇혔다. 가끔씩 신우의 페로몬에 짓눌린 한솔의 앓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릴 뿐이다. 그렇게 도착한 별장은 사용인이 없어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솔은 신우에게 안긴 채 별장 안으로 옮겨졌다. 바로, 지금처럼.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상념이 깨졌다. 방 안은 그동안 꾸준히 관리해 왔는지 흔한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불을 켠 신우는 한솔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다음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걸치고 있던 옷가지를 하나씩 벗었다. 가장 먼저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고선 넥타이를 대충 끌러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무심한 손짓으로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신우는 베스트의 단추를 툭, 툭- 풀었다. 매끄러운 손목에 채워진 은색의 클래식한 시계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착-.
꽤 아끼던 시계마저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신우가 손목을 한번 가볍게 돌리고선 방치해 뒀던 한솔에게 다가왔다. 어쩐지 육식 동물이 사냥을 위해 다가오는 모습 같아 한솔은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물리고 말았다.
“……!”
알파가 웃었다. 한 뼘 멀어지기도 전에 목이 덜컥 붙잡혔다. 찌익. 그대로 초커가 뜯겨져 나간다. 한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런, 실수.”
서늘한 빛을 띠는 얼굴은 절대 실수 같은 걸 한 거로 보이지 않았지만, 한솔은 의심 없이 수긍해야만 했다. 지금 이곳의 주인은… 신우였으니까. 단지, 무슨 변명을 대야 아버지께 초커를 망가뜨린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스러울 뿐이다.
전체적으로 그를 한 번 훑는 시선에 한솔은 몸을 움츠리는 척하며 신우의 시선을 달게 받아먹었다. 발목까지 들어 올려 상처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신우는 한솔과 제대로 눈을 마주쳐 주었다. 흔들림 없는 새까만 눈동자. 불과 한두 시간 전에 홀로 자책하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단단하고 흔들림 없었다. 한솔은 몇 초 마주치지도 못하고 얌전히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집에 왔으면 옷을 벗어야지, 솔아.”
솔아- 하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말도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법이다.
항상 그를 한 겹이라도 더 입히려고 들었던 알파가 무려 옷을 벗으라고 한다. 움찔, 몸을 떤 한솔은 갈팡질팡하는 눈으로 신우를 올려다봤다.
“여, 기서…?”
쓰리 피스 슈트를 전부 갖춰 입었던 신우와 달리 한솔은 위아래로 한 겹씩 걸친 게 전부였다. 한 장이라도 벗는 순간 그냥 맨살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신우의 얼굴에서 단호한 진심을 읽은 한솔은 침을 꼴깍 삼켰다. 세상에, 유신우가 이러는 날도 오는구나… 어쩐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진짜 벗어…?”
“어.”
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기 때문에 그는 쩔쩔매는 것처럼 신우에게 매달렸다. 나 안에 입은 거 없는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신우의 서늘한 손끝이 어깨에 닿았다. 그가 맨살이 드러난 한솔의 어깨를 느리게 쓸어내린다. 그 가벼운 접촉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벗으라는 거잖아.”
쇄골 언저리를 톡톡 건드린 알파가 자신이 남긴 흔적 위를 집요하게 헤집는다.
“내가 꼭 두 번 말해야 할까, 솔아?”
흡-. 그 순간, 호흡이 덜컥 막혔다. 붉게 부푼 잇자국이 새겨진 곳에 사람의 손길이 닿으니 속절없이 앓는 소리가 터졌다. 알싸하게 퍼지는 통증을 꾹 참으며 한솔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 어떡해! 너무 좋아…! 까딱했다간 신우한테 달려들어 더 해 달라고 대책 없이 조를 것 같았기 때문에 한솔은 권유를 빙자한 명령에 집중하기로 했다.
두세 번 머뭇거리며 니트의 끝자락을 붙잡아 들어 올리자 단추가 풀려 헤프게 입을 벌린 청바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고 보니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잠그는 것도 잊고 있었다. 뽀얗게 드러난 아랫배를 보며 신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한솔은 그런 따가운 시선 속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
한솔이 자꾸만 뜸을 들여도 신우는 그가 ‘스스로’ 옷을 벗도록 말 한마디 없이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린 한솔은 골반에 걸쳐져 있던 바지까지 단번에 끌어 내렸다. 옷을 입고 있을 땐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공기가 단 한 장 차이로 매서운 칼바람으로 변모한 기분이었다. 한솔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발목에 걸린 바지를 벗었다. 옷가지를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니트와 함께 가지런히 접어 품에 안는다. 마음 같아선 당당하게 그동안 가꾼 몸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라는 게 한솔의 생각이었다. 한솔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냥감이었다.
“아직 안 벗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이건…….”
그런데 신우가 거기서 한술 더 뜰 줄 몰랐다.
아니, 정말? 정말 속옷까지 벗으라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헤- 하고 벌렸던 한솔은 황급히 표정을 고치고 입꼬리를 단속했다. 그러면… 나야 정말 땡큐지. 속으로 히힛 하고 웃은 한솔은 겉으로는 울상을 지으며 속옷 밴드를 만지작거렸다. 신우에게 ‘정말 벗어?’ 하는 눈빛을 마구 보내자 신우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더니 한솔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꼭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이를 바라보는 권태로운 표정이다. 귀 옆에서 자동으로 ‘내가 꼭 두 번 말해야 할까, 솔아?’ 하는 목소리가 재생되는 듯했다.
“벗을게….”
이쯤 되면 ‘마음 여린 이한솔’은 좀 서러워해도 될 것 같았다.
한솔은 코를 훌쩍이며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속옷을 벗었다. 잘 개켜 옷 사이에 밀어 넣자 더 이상 한솔을 가려 줄 수 있는 방패막이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에게 있어 옷은 하나의 무기고 수단이다. 남을 욕보이고 싶다면, 괜히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 없이 옷을 벗기면 된다.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알몸은 ‘부끄러운 것’이 되었고 그건 형질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슥-.
신우가 침대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는 한솔에게 손을 뻗었다. 항상 서늘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손이 펄펄 끓는 열탕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단정한 손끝이 탄력 있는 피부 위를 두드리고 수치심에 붉게 물이든 허벅지 쪽으로 가볍게 스며든다. 흠칫-. 가장 여리고 연약한 부분이 타인의 손길에 범해지는 느낌에 한솔의 캐러멜 빛 눈에도 옅은 파란이 일었다.
“솔아.”
“으응… 흣….”
알파의 목소리가 바닥을 긁는 것처럼 낮아졌다. 한솔은 포식자에게 급소를 내어 준 피식자처럼 작게 헐떡였다.
“그 새끼들이 어디 만졌어?”
“흐윽!”
신우가 거친 손길로 한솔을 밀어 침대 위에 눕혔다. 예상치 못했던 거친 손길에 한솔은 파드득 놀라서 다급히 신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대답해야지.”
“흡… 그냥 귀만…….”
착실하게 대답했지만 신우는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한솔의 몸을 지그시 누른 채 마른 어깨에 입을 묻었다. 물지 못하는 목덜미 대신이라는 듯, 이전의 부드러웠던 키스와는 달리 자국을 남길 것처럼 오래 입술을 붙이며 한솔을 맛봤고 다른 한 손은 한솔의 배꼽을 매만지고 있었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오싹오싹한 느낌에 한솔은 어깨를 둥글게 만 채 신우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도리질을 쳤다.
온몸의 신경 세포가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직접적인 성적 자극이라곤 얼마 전에 한 번 경험한 게 전부인 순결한 몸이다. 자위도 해 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명백히 의도를 가진 행위에 내던져졌을 리 만무하다. 주먹 쥔 손으로 신우의 어깨를 콩콩 때려 보지만, 그의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내리누른 커다란 등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또, 다음은.”
“없어….”
한솔은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신우가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은 한솔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생각해 봐. 또 있을 텐데?”
눈물 젖은 속눈썹을 깜박이던 한솔은 설마…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신우의 눈을 쳐다봤다. 여전히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다. 중상모략과는 백억 광년 떨어져 있을 법한 인상. 한솔은 우물쭈물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미끼 한 조각을 드리웠다.
“없…… 흐읏!”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한솔이 ‘없다.’는 말을 완성하기도 전에 신우가 배를 만지던 손에 힘을 주었다. 아, 아…! 단어가 되지 못해 토막 난 신음이 잇새로 줄줄 흘러나온다. 한솔은 그대로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벼락처럼 내리꽂힌 깨달음이 그를 잠식했다.
신우는 지금 무언으로 말하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벌이 받고 싶다니 스스로 받을 벌을 늘려 보라고.
신우가 자신의 과실로 인정한 일을 한솔이 직접 나서서 뒤집어썼다. 이제 한솔은 ‘고의는 아니지만 정절을 지키지 못한 잘못이 있는’ 피해자가 되었다. 그냥 피해자와 전자의 피해자는 결이 다르다. 알파에겐 오메가를 단속할 권리가 있고 육체의 순결은 그중 늘 상위에 랭크된 화두였으니까.
본래, 지금 이 권리를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유신우가 아니라 이 의원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암묵적으로 이 일을 묻기로 동의했기 때문에 지금 이 별장에 있는 것이다. 이 의원은 여러 사람을 거쳐 축소되고 은폐된 사건만을 알게 될 테고 이제 진실은 오로지 두 사람만의 몫이 되었다.
“여기….”
결국, 한솔은 그 권위에 굴복했다.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성기를 가리키고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거짓 자백을 실토한다. 한솔의 자백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한 신우는 한솔의 어깨에 제 이마를 붙여 표정을 숨긴 채 피식 웃었다. 한솔이 꽤 억울한 얼굴을 해 보인 탓이다.
“그러니까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해.”
설마하니 이한솔이 넝쿨째 굴러 들어올지 그라고 알았을까. 아무리 신우라 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한 번 제대로 혼이 나 봐야 앞으로 그런 생각을 못 하겠지.”
“어?”
“‘잘못’이란 건 함부로 인정하는 게 아니야, 솔아. 특히 너는 오메가니까 더 조심해야지.”
“신, 신우야…!”
“다른 사람이 널 어떻게, 이용해 먹을 줄 알고-.”
신우가 한솔의 쇄골과 어깨가 맞닿는 지점에 이를 세웠다.
“흐윽!”
갑작스러운 자극에 한솔이 놀라 신음을 뱉자 신우가 달래듯이 볼을 쓰다듬다가 손을 올려 귓바퀴를 따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떼지 않았다.
“흐으, 아파…….”
결국 진심으로 아파 한솔이 울먹거릴 때가 되어서야 신우가 고개를 들어 한솔의 눈을 마주 보았다.
“왜 그렇게 순진하게 굴어, 응?”
아닌데… 나 그렇게 안 순진한데….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턱에 호두를 만들 정도로 입을 앙다문 한솔을 본 신우가 웃음을 참으며 한솔의 어깨에 입술을 내렸다.
다시금 자근자근 물어 오는 이에 한솔의 몸이 또다시 움찔거리고 제멋대로 바들바들 떨렸다. 한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오는 짜릿함이 몸속에서 충돌하는 기분이었다. 배에 움푹 힘이 들어가고 등허리에 얕은 홈이 파인다.
자신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통제가 되질 않는다.
신우가 한솔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내리누르던 신우가 떠났지만, 몸 안쪽이 끊임없이 떨리는 것과 달리 팔다리의 힘이 다 빠져 버린 한솔은 그대로 누워 있었다.
신우는 그런 한솔의 목뒤와 무릎 뒤에 손을 넣어, 안아 올렸다. 한솔이 아양 부리듯 신우의 목덜미에 이마를 댔다. 신우는 자신이 먼저 침대에 앉고 제 무릎에 한솔을 앉혔다.
“한솔아, 저거 봐.”
고개를 살짝 움직여 본 방향에는 거울이 있었다. 옷을 차려입은 신우와 맨살 위에 걸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먼저 보였다. 그리고 목덜미와 가까운 쇄골 윗부분에 짙게 나 있는 잇자국까지.
그 순간 한솔은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고양감을 느꼈다. 오메가로서의 영혼이 환희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절정이었다.
그대로 팟!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하더니 울컥울컥…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지만 막상 눈으로는 처음 보는 맑은 액체가 엉덩이 사이로 줄줄 흘러나왔다. 어떻게든 참아 보려 했으나 참으려고 할수록 한계는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왔다. 허리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아득한 부유감이 그를 덮쳤다. 한솔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어쩐지 관조자의 기분이 되어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완전히 힘을 소진하고 신우의 품 안에 축 늘어진 한솔의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맴돈다.
“허락도 없이 싸면 어떡해, 한솔아.”
부드럽지만 질책이 담긴 목소리였다.
“흑, 아아…!”
“반성하라고 남긴 자국에 느껴 버리고. 음란해.”
신우가 질척하게 젖은 제 바지를 가리키며 한솔이를 탓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 말에 웃음기가 배어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한솔은 괜스레 속으로 ‘오메가니까 어쩔 수 없잖아.’ 하고 툴툴거리며 신우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선 울창한 숲처럼 군락을 이룬 진한 나무 냄새가 났다. 한솔은 원 없이 신우의 페로몬을 들이키며 아쉬움을 삼켰다. 페로몬 샘이 묶여 있지 않았더라면 페로몬 교감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신우는 한솔이 자신을 마주 보도록 돌려 안았다. 제가 싼 액체의 축축함을 적나라하게 느낀 한솔이 ‘저 바지 어떻게 빨지?’ 하고 고민하는 동안, 신우는 빠르게 눈으로 한솔의 몸을 스캔해 혹시 이상이 없는지 찾았다. 어깨 부분의 상처에는 특히 길게 눈길이 머물렀다. 후회보다는 허기를 닮은 시선이었다. 신우가 한솔을 다시금 들어 올려 침대에 홀로 앉히고 멀어졌다. 사슴의 눈망울같이 또롱또롱한 두 눈동자가 ‘왜?’, ‘왜, 밀어 내?’ 하고 서운해했다. 방을 나가지 않은 신우가 서랍에서 방수 밴드를 찾아 금방 돌아왔다. 한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신우는 아쉬운 듯 웃으며 밴드로 한솔의 어깨에 선명히 패인 제 잇자국을 가려 덮었다.
“고마워, 신우야.”
한솔이 배시시 웃었다. 신우가 괜히 콧등을 톡 치자 어린 강아지처럼 끙끙거린다. 그런 한솔을 품에 안고서 신우가 몸을 일으켰다. 허공에 달랑달랑 매달리게 된 한솔이 떨어질 것 같은지 신우에게 바투 붙었다. 신우는 한솔을 데리고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쏴아아-.
적당히 따뜻한 온도에 맞춰 물을 받자 청량한 소음이 욕실 안을 가득 울린다. 욕조 턱에 한솔을 앉히고 신우는 발바닥부터 시작해 조금씩 물을 끼얹었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 꾹꾹 지압하는 것처럼 주물렀다. 볼 거 다 본 사이에 뭐가 그리도 부끄러운지 자꾸만 몸을 움츠리는 게 보였다.
발목, 종아리, 허벅지 순으로 타고 올라간 손은 수줍게 들어간 배꼽 앞에서 멈춰 섰다. 그쯤 되자 소매를 걷어 올린 보람도 없이 한솔이 젖은 만큼 신우도 푹 젖어 버리고 말았다. 물을 먹어 살색이 비치는 젖은 셔츠를 힐긋힐긋거리던 한솔은 나중에 가서는 아예 넋을 놓고 신우를 감상했다. 그런 한솔이 익숙한 신우는 아랑곳 않고 샤워 볼을 꺼내 거품을 냈다.
“앗…!”
갑작스럽게 차가운 거품이 복부를 뭉근하게 문지르는 느낌에 한솔이 짧게 숨을 들이켠다. 거품은 부드러웠고 타월은 까슬하다. 까끌까끌한 감촉이 지나간 자리 위론 신우의 유려한 손가락이 닿는다.
“신, 우야… 잠깐…!”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한솔은 신우의 머리에 두 손을 얹고선 끙끙거렸다.
“갑자기 왜 그래….”
“더러운 걸 묻히고 왔잖아.”
“무슨….”
그게 무슨 뜻이냐고 하려던 한솔은 불과 몇 분 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멈칫했다.
-그 새끼들이 어디 만졌어?
설마 지금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야? 아연함에 한솔의 입술이 빠끔 벌어진다. 그러나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여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한솔도 긴장감과 당혹감이 노곤노곤 풀려 나가자 신음을 흘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한솔의 성기가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이는 주인인 한솔이 아니라 신우였다.
“섰네.”
담담하게 사실을 읊는 목소리. 오히려 신우가 아무렇지 않아 했기 때문에 한솔은 들끓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정말 신우가 작정을 한 것 같다. 한솔은 마음속 행복 지수에 만점을 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으으… 신우야…?”
“어.”
연기를 따로 할 필요도 없이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며 맺힌다. 모호한 감각에 속절없이 몸이 달아오르기만 했다. 그렇게 서러우면 먼저 몸을 가져다 대면 될 텐데 한솔은 조르기만 할 뿐 그 이상을 행동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것도 다 한솔이 즐기는 방식의 일부였던 것이다. 상대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모를까. 자신이 잘하거나 예뻐서 상을 받는 게 좋았지 직접 행동해서 얻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왜 이렇게 몸이 달았어.”
“으흣, 흡… 하으….”
“어떻게 해 줄까.”
자신을 완전히 가지고 노는 신우가 좋았다. 한솔은 이 상황에 푹 빠져서는 진심으로 몰입했다. 평소보다 더 공을 들여 목소리를 가다듬고 애가 탄 얼굴을 연기한다. 사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한솔이 실제로 애가 탄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조금 더 순진하고 어리숙한 모습을 더할 뿐이다.
정숙해야 되는 몸으로 발정이 나서는 알파를 조르는 게 부끄럽다는 듯이. 하지만 그럼에도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울먹이며 매달린다. 한솔은 내면 속의 자신과는 조금 다르면서, 그럼에도 그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모습을 내보이며 짙은 만족감을 느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똑바로 말해야지.”
한솔의 울먹임이 뚝 멈춘다. 풍성한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같이 파르르 떨렸다. 두 뺨을 장밋빛으로 곱게 물들인 오메가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뒤늦게 바라는 것을 실토했다.
“뽀뽀해 줘….”
알파의 입꼬리가 짙은 호선을 그린다. 그는 말 잘 들은 아이에게 칭찬 스티커를 주는 것처럼 그의 오메가에게 기꺼이 상을 내렸다.
침이 길게 이어졌다. 신우가 알파의 페로몬을 짙게 드리우며 말했다.
“참아.”
한솔이 비명을 지르며 울먹였지만 정에 이끌려 봐주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사정감이 올라오는 게 지나치게 빨랐기 때문이다. 체력 분배를 위해서라도 조금 조절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신우가 한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면 한솔은 오메가였고 오메가에게 있어 흔적 기관과 마찬가지인 성기는 부차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거대한 파도가 몰려왔다가 방파제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지기를 반복하자 그 파편이 층층이 쌓여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낸다. 한솔은 구멍이 멋대로 조여 드는 걸 느끼며 덜컥 몸을 굳혔다. 그대로 방파제가 부서지며 환희와 같은 쾌락이 쏟아져 내렸다.
“……!”
“흐, 아앙!”
찰나, 그리고 영겁 같은 눈 맞춤-.
꽃이 피었다. 긴 시간 웅크리고 있던 봉우리가 움트며 탐스러운 빛깔의 홍매화가 활짝 피어난다. 정적이던 푸르른 숲에 꽃바람의 물결이 일며 온통 붉고,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 차올랐다. 페로몬의 교감. 자극을 이기지 못한 페로몬 샘이 완전히 개방됨으로써 두 사람의 페로몬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간다. 덩달아 페로몬이 불러일으키는 형상의 모습도 달라졌다.
그간 억눌려 있다가 폭발하듯이 쏟아져 나오는 한솔의 페로몬에 신우가 놀란 얼굴을 해 보인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휘청이는 한솔을 받아 들자 촤악- 두 사람분의 무게만큼 욕조의 물이 넘쳐흘렀다.
“사고 쳤네.”
신우는 달달 떨리는 한솔의 몸을 끌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지하철 사건 수습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묶어 놨던 페로몬 샘이 난데없이 풀려 버린 걸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신우는 한솔의 귓가에 진득하니 입을 맞추며 웃는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 책임을 지면 그만인 일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교감도 알았으니 지극히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짐승은 매화 잎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서 그릉그릉 목을 울린다. 만개한 매화 가지 하나를 입에 물고 잠이 드는 모습이 지극히 평화로워 보였다. 조금은 늦은 봄을 알리는 매화 향기가 온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욕실 한쪽에 커다랗게 난 창에서 색색의 꽃잎이 찬란하게 휘날렸다.
***
‘여기는 천국인가 봐…….’
침대 위에 퍼져 있던 한솔은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삼키느라 힘이 부쳤다. 잠시 변호사를 만나고 오겠다던 신우는 한솔에게 엄하게 말했다.
-금방 올 테니까,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마.
페로몬이 제어가 안 되는 한솔에게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걱정하는 마음에 하는 말이었겠지만 처음으로 신우에게 세미 감금을 당한 한솔은 뭐 어때 싶었다. 감금은 감금이지!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이럴 때 참 도움이 된다. 작은 거 하나만으로도 금방 기분이 좋아지니까.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지. 다음 작전을 짜야 해.’
한솔은 풀어지려는 자신을 바짝 조였다. 갑자기 페로몬 샘이 풀려 버린 탓에 조금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신우가 언제 이렇게 또 고삐가 풀릴지 모르는 일이니 이럴 때 많이 즐겨 둬야 한다. 한솔은 신우가 화난 지점이 어디였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까 분명 그 범죄자들이 어딜 만졌냐고 했었지. 배꼽은 실컷 만졌으니까 남은 건….
달칵-.
상념을 방해하는 소리에 한솔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꾸물꾸물 내리자 매화 향이 은은하게 묻어나는 신우의 등이 보였다.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자신의 흔적을 발견한 한솔은 하마터면 입이 귀에 걸릴 뻔했다. 재빨리 단속하고 침대에 앉자 손을 씻고 돌아온 신우가 눈썹을 까딱인다.
“깨어 있었어?”
“으응. 방금 일어났어.”
침대에 있으라는 게 자라는 뜻인 건 알았지만 한솔은 이렇게 뜻깊은 날에 속없이 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신우가 다가오자 눈치를 보며 그를 올려다봤다.
“신우야… 나 이제 침대 밖으로 나가도 돼?”
첫 번째 작전. 눈치 말아 먹은 척하기.
진짜로 가둬 두려고 한 게 아니었어도 사람이란 게 이렇게 눈치 없이 물어보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마련이었다. 기대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 신우를 올려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한다. 분명,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급제동한 모습이었다.
“안 돼…?”
실망한 눈빛으로 신우를 바라보자 신우는 답을 주는 대신 침묵했다. 얼른 안 된다 해! 얼른! 한솔은 머릿속으로 강력하게 텔레파시를 보내며 간절히 염원했다. 그러자 천지신명께서 도우셨는지 신우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침대는 나와도 돼. 대신 방 밖으론 나가지 마. 나갈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하고.”
빙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결국 자신한테 허락을 맡으라는 의미다. 한솔의 마음속에서 자축의 팡파르가 터졌다.
“알았어….”
하지만 겉으로는 시무룩한 척했다.
“변호사님은 왜 만난 거야?”
그래도 곧 의욕을 되찾은 것처럼 행동한다. 아무래도 그 지하철 범죄자들 때문인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신우가 테이블 의자를 빼며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한솔은 냉큼 일어나 신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들어 봐.”
삑-. 신우는 네모난 검은색 기계의 빨간색 버튼을 눌렀다.
[피차 다 아는 사람들끼리 얼른 하고 끝내지?]
[그게 무슨 소리세요….]
[거 엄청 튕기네. 설마하니 이런 데까지 와 놓고서 모르는 척할 건 아니지? 어린놈이 가짜 오메가 흉내나 낼 정도면 까져도 단단히 까졌다는 거 아냐.]
[그래, 김 씨 말대로 6번 칸까지 들어온 거 보면 말 다 했지.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 가지고 레몬 냄새나 폴폴 풍기면서, 응?]
…이건 나랑 그 범죄자들 목소리잖아?
“비형질인이 형질인 코드를 도용하는 건 범죄야. 그것도 꽤 심각한. 그런데 여기에 성매매 사건까지 겹치면 생각보다 일이 커지지.”
신우가 밖에서 들고 왔던 종이봉투의 입구를 열었다. 파란색 도장으로 ‘Secret’ 마크가 찍혀 있는 문서. 대외비 문서다. 한솔은 신우가 가리키는 곳을 조용히 읽었다.
「‘6번 칸 홍등가’와 외딴섬 ‘오메가 화장실’의 비밀….」
「충격, 또 한 번 터진 지하철 성매매 사건. 6번 칸의 진실은?」
「‘가짜 오메가?’ 오메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
앞으로 네 시간 뒤면 터질 기사들의 제목이었다.
신우는 한솔이 적당히 알아야 할 것과 알 필요 없는 것들을 구분해서 알려 줬다.
예를 들어, 이 사건에서 피해자인 한솔의 존재는 은폐된다는 것과 가해자들의 처분은 한솔이 알아야 될 내용이지만 ‘가짜 오메가’는 생각보다 흔하다는 것과 이들 대부분이 화류계에 종사한다는 것. 특히 화류계 쪽은 조직 폭력배와 연관성이 높다는 사실은 한솔이 몰라도 될 내용이다.
서류를 하나하나씩 짚어 가며 설명해 주자 한솔이 신기해하는 얼굴로 열심히 듣는다. 그리고 드디어 신우가 벼르고 별렀던 부분이 나왔다.
[무슨 오해를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 오메가구요. 튕…긴다는 그런 건 한 적 없어요…!]
신우가 뭐라 설명할 때마다 작은 얼굴을 끄덕이던 한솔이 멈칫한다. 신우는 조용히 한솔을 불렀다.
“이한솔.”
“…잘못했어.”
본인이 잘못한 건 아는지 재깍 대답이 튀어나왔다.
“형질 함부로 밝히면 돼, 안 돼.”
“안 돼….”
“그러면 왜 그랬어.”
일부러…라고 했다간 진짜 큰일 나겠지.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나왔나 봐….”
한솔은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은 주먹을 딱 쥔 채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나 반성하고 있어요.’ 자세로 말하자 신우가 후-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쉰다. 한솔의 다년간의 연기 경력으로 판단하기를 일부러 내쉰 거라는 감이 왔다. 한솔은 신우의 의도대로 움찔거리는 척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잘못했어?”
“응… 아니, 네에….”
한솔은 시기적절하게 두 번째 작전을 펼쳤다.
두 번째 작전. 존댓말 하기!
원래 말이라는 건 사용하는 어휘에 따라 또 억양과 어조에 따라 상대는 구중궁궐의 왕이 되거나 길가의 비렁뱅이가 될 수도 있다.
한솔과 신우에겐 한 가지 특이한 이력이 있는데 바로 두 사람이 3살에서 7살이 되기까지 한솔이 신우를 ‘형아’라고 부르고 다녔다는 점이다. 당연하게도 혀 짧은 존댓말이 패키지처럼 포함된 시간이었고 ‘형아’였던 신우는 한솔에게 좀 더 엄격한 편이었다. 기억이란 건 참 신기해서 단순히 존댓말을 하는 것 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를 10년 전의 그때로 되돌려 놨다. 한솔이 밤에 몰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가 배탈이 나서 신우에게 혼쭐이 났던 그때로 말이다.
“…….”
신우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입술을 비틀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좀 더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고선 한솔을 지그시 바라본다. 덕분에 한솔만 속이 바짝바짝 탔다. 혼나기 직전의 그 엄중한 분위기. 홀로 반성할 시간을 주는 게 신우의 특징이었고 한솔은 애가 타면서도 그 시간을 사랑했다.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
“어릴 때처럼 말로만 타이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솔아.”
응, 당연하지. 절대! 말로만 타이르면 안 돼.
한솔은 속으로 열심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겁을 먹은 것처럼 주먹 쥔 손을 바르르 떨어 주는 게 포인트다. 한솔의 손을 잠깐 바라본 신우가 테이블 위를 느리게 두들기기 시작한다. 신우가 고민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한솔은 지금이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밀어붙여야 할 때였다.
“…감정은 미루는 거 아니랬어.”
딱-. 신우의 손가락이 멈췄다.
“미루면 미루는 대로 감정이 곪고 곪은 감정은 악취를 풍긴대. 사람의 관계는 거기서부터 어그러지는 거라고 했어.”
작지만 또박또박 목소리로 말하던 한솔은 머뭇거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빠가.”
세 번째 작전. 질투심 유발하기.
한솔은 언제부턴가 신우가 이 의원을 부단히도 신경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신우는 한솔이 이 의원의 이름이 새겨진 초커를 차는 걸 특히 못마땅해했는데 말은 하진 않지만 아마, 알파 특유의 소유욕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신우의 표정엔 변화가 없지만 그의 손가락은 더 이상 테이블 위를 두들기지 않는다. 그의 고민이 끝났다는 뜻이고 한솔은 그 방향이 자신이 원하는 쪽이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응?”
“관계가 어그러지면?”
나무 향기가 무겁게 펼쳐졌다. 한솔은 자신을 압박하듯 둘러싼 페로몬 속에 갇혀 숨을 헐떡였다.
“으읏… 나는 신우랑 잘 살고 싶은데 그럼… 혼날 건 빨리 혼나야 되는걸….”
황당해하는 신우의 얼굴을 힐긋거리며 속사포로 말을 덧붙인다.
“그으… 매 맞아도 괜찮아! 나 참는 거 잘해.”
조금 뿌듯한 얼굴을 해 보이자 신우는 이제 숫제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너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응…? 이거… 소모임에서 다른 오메가들한테 들은 건데….”
회초리 드는 집도 있다더라- 하자 신우는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문질렀다.
“이한솔. 밖에선 그런 말 하지 마. 얕잡아 보이니까.”
“네에….”
그럼 집 안에선 해도 된다는 뜻인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신우를 바라보자 신우가 하,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웃는다.
“이리 와.”
한솔은 신우에게로 쪼르르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긴장한 얼굴로 신우의 앞에 서자 커다란 손에 보습크림을 쓱쓱 바른 신우가 명령했다.
“뭐 해? 바지 벗어. 매 맞고 싶다며.”
단언컨대, 올해 들은 말 중에 최고로 설레는 말이었다.
한솔은 품이 넉넉하고 하늘하늘한 하늘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상하 분리형이었던 탓에 바지를 벗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시간을 빼앗기기 싫어서 바지와 함께 속옷도 훌러덩 벗어 버리자 다리 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스친다. 다행히도 상의가 긴 편이었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엉덩이와 성기가 가려졌다.
“탁자 잡고 허리 숙여.”
하지만 허리를 숙여 버린다면 겨우 가려졌던 음부가 보이고 말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한솔은 머뭇거리는 척하다가 엄한 신우의 얼굴을 보고 체념한 것처럼 탁자를 잡고 섰다. 가슴을 탁자에 붙이고 엉덩이를 뒤로 쭉 빼자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땀이 배어난 손끝을 탁자 끝에 문지르고 금방이라도 꺾일 것같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세를 잡았다. 슥-. 신우가 살갗에 소름이 돋은 한솔의 엉덩이를 가볍게 쓸어 올렸다.
“흡…!”
찌르르- 목덜미가 떨린다. 한솔은 꼴깍꼴깍 침을 삼켰다. 크림인지 로션인지 모를 것을 그의 엉덩이에 듬뿍 짜낸 손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보습 제품을 펴 발랐다. 그러다 그 손이 한솔의 엉덩이 골 사이를 갈랐을 땐 한솔은 거의 눈뜨고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여기까지 오기 전엔 단연코 설레는 마음뿐이었던 한솔은 막상 실전에 돌입하니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안 들었다. 오로지 신우만 의식됐다.
“무릎 똑바로 펴. 하나하나 지적해 줘야 돼?”
“흐윽… 네에… 죄송해요….”
“잘할 수 있다며. 이러면 실망스러운데.”
당연히 상상만 해 봤지 경험이 없는 한솔이 처음부터 자세가 바를 순 없다. 신우도 가르치지 않은 걸 가지고 진실로 혼을 내려는 건 아니고 단지, 아까의 그 맹랑한 자신감은 어디 갔는지 겁을 너무 먹고 있길래 주변을 환기시키려 했을 뿐이다.
다만, 신우는 모르는 한솔만의 비밀이 하나 있다면 한솔은 어렸을 때부터 ‘남자’의 사생활을 꾸준히 관찰해 온 이력이 있었다. 처음부터 홀로서기를 하라고 한다면 무리였겠지만 가르쳐 주면 나름의 관찰 짬밥으로 커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비밀은 신우가 툭툭 손등으로 가볍게 몸을 건드리며 자세를 교정해 줄 때 빛을 발했다. 몇 분을 붙잡고 가르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따라오는 모습에 신우가 눈썹을 들썩인다.
“흐으….”
그래도 초보는 초보였다. 자세는 비슷하게 맞췄지만 몸에 힘을 너무 줘서 눈에 띌 정도로 엉덩이 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탄력 있게 둥그런 모양새가 꼭 탐스러운 과실 같다. 손을 쫙 폈다가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힘있게 움켜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파라면 누구나 하나씩은 사교 클럽에 가입해야 한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학교’가 지위를 막론하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폭넓게 만나는 곳이라면 ‘클럽’은 훗날 그들이 거머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철저하게 그 등급이 달라지는 곳이다. 신우로 치면 S. 최상급이다.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인맥도 당연히 사회의 각 고위층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만큼 성격이 괴팍하고 독선적이었다. 클럽은 매달 주제를 선정해 클럽원끼리 함께 즐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대부분의 주제가 하나의 목표를 관통하고는 했다.
‘오메가 길들이기.’
신우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그 짓거리들이 오늘에 와서야 빛을 발하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한솔. 엉덩이 제대로 들어.”
신우는 냉정한 목소리로 무장한 채 말랑말랑한 엉덩이를 힘주어 뭉갰다. 탄력 있는 피부가 크림처럼 보드랍게 손안에 감기는 느낌이 말초 신경을 자극한다. 근육의 긴장도 풀어 줄 겸 봐주지 않고 꽉꽉 주무르자 한솔이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며 마구잡이로 탁자에 이마를 비볐다. 이 애는 본인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는 있는 걸까. 혼탁한 감정이 짙게 가라앉은 눈을 한 신우가 탁자와 한솔의 이마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한솔의 자해 아닌 자해를 막는다. 그리고 시간 차를 두지 않고 커다란 손바닥으로 한솔의 코와 입을 동시에 틀어막았다.
“읍…!”
짜악-!
예고 없이 첫 매를 때렸다. 한솔의 마른 등이 파드득 떨렸다. 잠시 충격을 수용할 만한 시간을 주며 옅은 분홍색으로 물이 들기 시작한 곳을 살살 뭉그러뜨린다.
“흐윽… 흐으….”
산소가 부족한 탓인지 한솔의 색색이는 숨소리가 점차 밭게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지나면 못 참고 손목을 잡아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솔은 착실하게 탁자 끝을 붙잡은 채 눈물만 방울방울 떨구고 있었다.
‘제법-.’
속으로 피식 웃은 신우는 팔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귀로는 감미로운 울음소리를 감상하고 손끝으로는 공기의 저항을 즐긴다. 그대로 매섭게 팔을 휘두르자 짜아악! 살 떨리는 소리와 함께 한솔의 엉덩이가 푸딩처럼 뭉개졌다.
“…학! 흐읏, 우으으….”
한솔이 버티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을 그대로 붙잡아 세 대를 더 때렸다. ‘자세 제대로 안 잡아?’ 싸늘한 목소리에 한솔이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힘겹게 다시 일어서자 기어코 열 대를 채웠다. 뒤로 갈수록 처벌의 강도는 거세지고 적응 시간은 반 토막 났기 때문에 한솔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갔다. 부족한 호흡에 울음기까지 겹치자 얼굴에 열이 몰려 따끈해진 것을 느꼈다. 신우는 아직 한솔의 한계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호흡을 완전히 틀어막는 것보단 중간중간 틈을 주어 숨을 쉬게 해 주었다. 알파로서는 자비로운 처사였으나 오히려 희망 고문을 느낀 오메가는 더 진이 빠져 버린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자세 제대로 못 잡은 건 혼이 나야겠지만.”
신우는 코와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떼어 내 한솔의 뒤엉킨 속눈썹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런 뒤, 손끝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며 간절하게 탁자 끝을 붙잡고 있는 손가락을 가볍게 토닥인다.
“잘했어.”
손끝이 찌릿, 달아올랐다. 귓가에 달콤한 칭찬이 내려앉자 한솔은 수치심과 아픈 것도 잊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을 느꼈다.
‘세상에….’
중독될 것 같은 달콤함에 빠져 한솔은 허우적거렸다. 너무 달아서 목이 타는 것처럼 갈증이 일었다. 더 듣고 싶다. 이 충족감을, 주인을 만족시켰다는 성취감을 더,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한솔은 하염없이 고양된 기분으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만약 신우가 한솔을 훌쩍 들어 올려 침대 위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그 상태로 한참은 더 넋을 놓고 있었을 것이다.
딱! 신우가 한솔의 눈앞에 손가락을 튕겼다. 한솔의 몽롱하게 풀려 있던 두 눈에 빛이 돌아온다. 지그시 눈을 마주쳐 오던 신우는 한솔을 자신의 허벅지 위로 엎어트리더니 붉은 손자국을 어설프게 가리고 있던 잠옷을 들추어 냈다.
숨을 죽인 채 또르르 눈만 굴리던 한솔은 매를 맞아 뜨끈뜨끈해진 엉덩이에 차가운 크림이 닿자 자신도 모르게 짧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신우는 들썩이는 허리를 간단하게 한 손으로 눌러 제압하고선 예쁘게 올라붙은 엉덩이에 크림을 듬뿍 올린다. 피가 몰려 잘 익은 복숭앗빛을 띠는 둔부와 탑처럼 쌓인 하얀 크림. 꽤 예쁜 모양새였다.
“얌전히 있어야지, 솔아.”
짝! 신우가 한솔의 왼쪽 허벅지를 가볍게 내리쳤다. 달래는 말투와 달리 손은 엄하기 그지없었다. 눈물이 찔끔 난 한솔은 양 발가락에 힘을 꾹 주고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박자 늦긴 했지만 대답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흡, 네….”
“대답 안 하면 혼내려 했더니.”
이제 신우의 ‘혼낸다’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한솔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짜릿한 설렘과 축축한 공포로 버무려진 감정이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다시 혼나고 싶다는 마음과 예쁨만 받고 싶다는 마음이 거칠게 충돌했다. 한솔은 끙끙거리는 속을 감추고 신우를 불렀다.
“형아….”
“뭐?”
정말 놀랐는지 드물게 말꼬리를 높인 신우가 한 박자 늦게 크게 웃었다.
“응, 그래. 한솔아.”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한 목소리. 과거의 신우가 한솔을 부를 때의 그 모습이었다.
한솔은 우물쭈물한 얼굴을 하고 뒤를 힐긋거렸다. 조금 더 뜸을 들이는 척하자 벌을 받아 의기소침해진 아이를 달래려는 것처럼 신우가 한솔을 일으켜 품에 안는다.
“왜? 뭐 해 줘?”
아무래도 체벌 직후라 그런지 신우가 좀 더 너그러워 보였다. 이걸 과연 신우가 들어줄 확률이 몇이나 될지 셈해 보던 한솔은 나름의 계산을 마치고서 울상을 짓는 것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형아, 이제 화 다 풀렸어요…?”
“다 풀린 것 같아?”
“으응… 아니요….”
처음엔 자기 바람대로 대답했다가 눈치를 보고 재빨리 바꾼 것처럼 꾸며 낸다. 신우는 픽 웃으며 한솔의 콧등을 가볍게 꼬집었다. 아! 괜히 아픈 것처럼 두 손으로 코를 가리자 신우가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엄살이 심하네, 우리 한솔이. 한솔은 그제야 손을 떼고 배시시 웃었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웬만하면 들어줄 테니까.”
신우가 백지 수표를 내밀자 한솔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솔은 신우의 품에 더 바짝 안긴 채 속삭였다.
“그럼… 오늘 같이 자면 안 돼요?”
신우의 인상이 얼핏 찡그려지려는 걸 발견한 한솔은 다급히 덧붙였다.
“그 아저씨들! 꿈에 나올까 봐 무서운데….”
“…….”
“혼자 자기 싫은데….”
신우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잘못했어요.”
결국 침묵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어깨를 시무룩하게 늘어뜨리자 신우가 곤란한 듯 왼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일곱 살까지는 나름 침대도 공유한 사이였건만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스킨십 강도가 옅어지는 게 불만인 한솔이었다. 오늘은 기필코 옆자리를 사수하고 말리라. 한솔은 속으로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에게는 신우의 아침 생리 현상을 반드시 보고 말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이전에 한 번 목격한 거대한 실루엣을 떠올리며 한솔은 김칫국을 사발째 들이켰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신우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쉰다.
“의원님껜 말씀드리지 마. 알겠지.”
“응!”
너무 기뻐서 자신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한솔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자 신우가 짧게 웃으며 한솔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마법처럼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신우는 한솔을 품에서 내리게 한 다음 침대를 향해 눈짓했다.
“엎드려 봐. 찜질해 줄 테니까.”
알파와 오메가가 오랜 시간 페로몬 교감을 나누게 되면 뇌 신경에 교란이 일어나 러트 사이클과 히트 사이클의 주기가 겹치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 현상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경우를 ‘각인’이라 부른다. 대표적인 증상은 상대의 페로몬밖에 느끼지 못하는 ‘후천적 페로몬 불감증’.
형질인의 뇌가 렘수면 상태에 진입하게 되면 의식적으로 내리눌렀던 페로몬 샘이 개방되기 때문에 알파와 오메가는 부부 관계가 아닌 이상 한 침대를 쓰지 않는다. 물론, 한두 번 같이 잤다고 각인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 어른들의 머릿속에선 미성년의 알파와 오메가가 한 침대를 쓰는 건 그야말로 천지가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신우가 한솔의 엉덩이에 수건으로 감싼 얼음 팩을 올린 뒤, 내일이면 근육통이 올 게 분명한 종아리와 허벅지를 힘주어 주무르자 한솔이 비명을 지르며 파닥거렸다. 고막을 즐겁게 하는 비명 소리에 입꼬리를 슬쩍 올린 신우는 봐주지 않고 주무르며 한솔의 몸을 스캔했다. 다른 상처가 없다는 걸 한 번 확인하긴 했지만 안심이 되질 않는다. 이러다가 하나 남은 윗도리마저 홀딱 벗겨서 침대에 가둬 두게 생겼다. 신우는 속으로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잘 자, 신우야.”
“너도.”
달칵-. 노란빛의 전등이 꺼지며 방 안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는다. 색색… 옆자리에 한솔이 있다는 또렷한 증거가 신우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결국 내리감았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 올린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옆을 내려다봤다. 어둠은 알파의 방해가 되지 못했고 팔뚝에 닿는 따끈하고 포근한 체온은 온통 그의 신경을 빼앗아 갔다. 결국 우려했던 대로 신우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한솔의 원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이 한 조각의 인과는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또 다른 폭풍을 몰고 올 것이다.

কটন কেণ্ডি ৰোমাঞ্চ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