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Cotton Candy Romanc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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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짝짝짝-!
로열 발레단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이 막을 내렸다.
한솔의 데뷔 공연이자 첫 솔로 캐스팅을 함께한 공연.
4개월간의 무수한 오디션과 트레이닝 끝에 한솔은 ‘파랑새’ 배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거대한 홀에서 끊임없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쭈뼛- 소름이 돋는다. 주역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저 이 자리에서, 내가 이렇게 춤출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무대 위에서만 누릴 수 있는 아찔한 고양감이 그를 가득 채웠다. 그건 기쁨이기도 했고 성취감이기도 했다. 한솔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데뷔 축하해.”
공연이 끝난 무대 뒤.
새하얀 라넌큘러스 꽃다발이 한솔의 품에 안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냥 들떠 있던 한솔은 신우와 기념사진을 찍자마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 순간의 모든 게 감격스럽도록 벅차서 눈물이 나왔다. 신우는 그런 한솔을 그저 조용히 안아 주었다.
◯ petit_cotton
(파랑새 무대 의상을 입은 한솔이 흰 라넌큘러스 꽃다발을 들고 웃고 있는 사진.)
❤     ????
petit_cotton 20XX.05.05. 앞으로도 여러분의 파랑새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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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켜켜이 쌓여 간다.
필름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평범하지만 인생에 단 하루뿐인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로열 발레단은 약 2주가 조금 넘는 일정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성황리에 마치고 나서도 모던과 네오클래식, 드라마 등 다양한 레퍼토리의 작품을 선보였다. 세계 유수의 발레단답게 로열에는 로열만의 고유 레퍼토리들이 다양하게 존재했는데 한솔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통해 자신이 꽤 괜찮은 무용수라는 걸 제대로 어필한 덕에 그 뒤로도 꾸준히 좋은 배역을 받았다. 처음에는 한솔의 성별이 오메가라는 게 알려진 탓에 혹여 발레단 내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던 팬들은 한솔이 첫 배역을 잘 소화해 내자 그제야 ‘신선하다’, ‘로열 스타일은 아니지만 독특한 매력이 있다’며 햇병아리 무용수를 받아 주는 눈치였다. 무용이라는 업계가 상대적으로 다른 분야보다 오메가들이 꽤 많이 진출해 있는 데다가 실력이면 구설수가 있어도 쉬쉬해 주는 분위기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6월 말. 올해 초에 입단했던 발레단에 거의 익숙해졌을 때쯤, 첫 여름휴가가 다가왔다.
발레단 전체의 휴가 일정인 만큼 기간도 넉넉하고 여유로웠다. 한솔은 설레는 마음에 캐리어를 꽉꽉 채웠다. 이번 여름휴가는 아주 특별할 예정이라 무척 기대가 되었다.
“솜아, 가자!”
한솔은 여름만 됐다 하면 히키 강아지를 꿈꾸는 솜이를 끌어안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솜이가 짧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에어컨이 있는 건물 안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한솔의 철통 방어에 막혀 미수에 그쳤다. 신우가 미리 빼 놓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쿨 매트가 깔린 이동장 안에 콕 박혀 버리는 솜이를 뒤로하고 한솔은 조수석에 앉았다. 드디어, 두 사람과 한 마리의 강아지가 탄 차가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하와이까지 가는 길은 예상은 했지만 더 만만치 않았다.
일단, 비행기야 영국에 올 때처럼 전용기를 타고 가니 솜이도 탑승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 전까지의 준비 과정이 꽤 험난했던 것이다.
예방 접종부터 시작해서 검역까지-.
정작 솜이는 에어컨 빵빵하고 넓은 객실에 만족해했지만 어째 매번 욕심 때문에 솜이를 괴롭히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래도 견생에 한 번쯤은 하와이에 가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너무 인간 관점이니….
“솜아, 이것 봐. 바다다? 응? 너 바다 처음 보잖아.”
비행 피로를 풀기 위해 한숨 자고 일어난 시간. 털 뭉치인 솜이에겐 조금 더운 날씨일 수 있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서 그런지 솜이는 런던에 있을 때보다 훨씬 활발해졌다. 깨끗한 창 너머로 보이는 사파이어 빛깔의 바다를 보고 솜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푸른 색채와 흰 강아지. 그것만으로도 무척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띵동-.
잠깐 동안 그렇게 바다를 구경하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제수씨, 준비 다 했어요?”
“아, 네! 신우만 옷 갈아입으면 돼요.”
“오케이. 그럼 그 자식 나오면 천천히 내려와요!”
알겠다고 대답하려는데 발목 사이로 솜이가 쏙 얼굴울 내밀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한성민이 ‘히익!’ 하고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을 쳤다. 한솔은 볼을 긁적이며 문을 닫았다. 대형견만 아니면 괜찮다고 호언장담하더니….
“누구 왔어?”
“응, 성민 씨가 준비됐으면 내려오래.”
이번 여행은 두 사람만 온 게 아니다. 몇 년 전에 성민과 약속했던 클럽 파티. 그 파티의 일환으로 온 여행이었다. 몇 년 동안 클럽 멤버들과 친해지기도 했고 신우도 한솔도 안정이 되었기 때문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고 갈 거야?”
일행 중에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으니 솜이를 안아 올리는데 신우가 말했다. 한솔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물놀이용 짧은 반바지와 민소매. 지금은 슬리퍼지만 해변에 나가 신을 쪼리까지. 여름휴가와 바다라는 키워드를 생각해 봤을 때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것만 입자.”
신우의 생각은 좀 다른지 그가 한솔의 어깨에 해변용 얇은 카디건을 걸쳐 준다. 시스루라 살갗이 언뜻언뜻 비치긴 했지만 길이도 허벅지까지 오고 적당했다. 한솔은 왠지 신우가 자신의 살결이 비치는 걸 못마땅해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카디건을 입고 적당히 팔목만 보이게 접어 올린 뒤 다시 솜이를 안아 올렸다.
“솜이 챙겼고, 솜이 간식 챙겼고, 선크림 발랐고… 음, 아! 모자!”
한솔은 깜박할 뻔했던 밀짚모자를 썼다. 리본이 달려 있어서 그런지 솜이의 시선이 쭈욱 따라붙었다. 커플 템으로 샀지만 모자를 쓰진 않고 목뒤로 걸친 신우는 흔한 비치웨어도 흔해 보이지 않는 재주가 있었다. 얼굴 때문인가? 아니면 키? 몸? 선글라스를 껴서 얼굴의 절반은 보이지 않는데도 막 잘생김이 흘러넘치는 것 같다. 한솔은 그런 애인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자신도 선글라스를 꼈다.
“헤이, 거기 커플. 일행 없으면 같이 놀죠?”
호텔 앞의 해변으로 나와 일행이 미리 맡아 놨다는 자리를 찾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성민이었다. 캡 모자에 래시 가드를 풀장착하고 서핑 보드까지 들고 있는 게 아주 본격적이었다. 한솔이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열심히 파도를 타고 왕창 체력 소비를 한 뒤에 선베드로 돌아와 솜이 옆에서 낮잠을 청했던 한솔은 뭔가가 얼굴을 간질이는 느낌에 부스스 눈을 떴다. 당연히 솜이겠구나 했는데 눈을 떠 보니 보이는 것은 알파의 유려한 손가락이었다. 신우의 무릎에서 간식을 받아먹고 있던 솜이가 자기는 왜 부르냐며 한솔 쪽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하얀 털에 반짝이 같은 모래를 잔뜩 묻힌 모습이다. 한솔은 작게 웃으며 솜이의 턱 아래를 긁어 주었다.
“솜이도 한번 들어가 보면 시원하고 좋을 텐데.”
“아직은 무서워하더라고.”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가 낯선지 솜이는 물에 들어가는 걸 거부했다. 대신 멀찍이 떨어진 곳만 배회했다. 조금 적응이 된 후에는 모래사장을 신나게 뛰어다녔는데 아주 그냥 물 만난 물고기, 아니, 모래 만난 강아지였다. 뭐, 바다에 왔다고 꼭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물에서 놀고 싶으면 놀게 해 주고 물이 싫으면 밖에서 놀게 해 주면 되는 것이다.
“슬슬 시간 됐다. 갈까?”
신우가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 한솔의 뺨을 만져 주며 말했다. 눈을 느리게 끔벅이던 한솔이 정신이 확 드는 신우의 목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솜…이는…? 어떡해…?”
“케어 서비스 알아 놨어. 가서 맡기기만 하면 돼.”
그렇게 말한 신우가 솜이를 품에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한솔은 홀린 듯 신우를 따라 일어났다. 먼저, 두 사람은 호텔에 솜이를 맡긴 뒤 옷을 갈아입고 어딘가로 향했다. 하와이의 시내에 존재하는, 수상쩍…지는 않고 그냥 번쩍번쩍한 신식 빌딩이었다.
『환영합니다, 손님. 파트너님은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한솔이 신우를 홱- 돌아보며 ‘어떡해…?’ 하는 눈빛을 보내자 신우가 먼저 들어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이 남은 얼굴로 자꾸 신우를 돌아보던 한솔이 친절한 직원의 안내를 따라 어둑어둑한 내부로 들어왔다. 직원은 한솔을 내부 어딘가의 방으로 안내하고선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이번 파티의 컨셉은 ‘가면무도회’입니다. 원하시는 의상이 있다면 착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한솔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4면의 벽을 빼곡히 채운 가지각색의 가면들. 한솔은 눈을 반짝이며 방 안을 구경하다가 여우를 닮은 가면을 발견하고선 냉큼 그걸 집어 들었다.
『이걸로 할게요!』
『해당 가면과 어울리는 옷으로는 흰색 슈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걸로 결정하시겠습니까?』
『네!』
한솔은 직원이 꺼내 주는 가면을 받았다. 그리고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와아-.’
환락의 파티였다. 퇴폐와 사치가 뒤섞인 곳. 한솔이 처음 ‘알파 클럽’을 떠올렸을 때 상상하곤 했던 그런 모습이었다. 이재경의 클럽 파티처럼 몹시 문란하거나 그런 모습은 아니었지만,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각기 다른 가면들을 쓴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고 손끝을 얽었다. 와인 잔을 부딪치면 가면 아래 붉은 입술이 미소 짓는다. 그는 두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부를 훑었다. 자신의 알파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설레는 기분이었다.
『규칙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곳에서는 ‘바깥’의 신상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향기와 목소리만으로 상대를 탐색하셔야 하며 파티가 끝나기 전까지는 가면을 벗으시면 안 됩니다. 룸의 이용이 필요하실 때는 직원을 호출해 주시면 됩니다. 더 궁금한 사항이 있으십니까?』
한솔은 없다고 답했다. 비즈니스 미소를 지은 직원이 그럼 필요한 일이 있다면 불러 달라며 인사하고 한솔의 곁을 떠났다.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가면 아래의 얼굴이 조금 상기된 한솔이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스쳐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이 한솔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그는 고개를 젓고 자신의 알파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직원은 신상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한솔에겐 누구보다 강력히 자신의 알파를 찾을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그건 바로-.
“저기, 늑대 가면 님.”
각인한 상대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이었다.
한솔은 구석진 벽에 몸을 기댄 채, 온 더 락을 즐기고 있는 커다란 알파에게 다가갔다. 그가 늑대 가면을 쓴 알파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자 상대가 한솔을 내려다보더니 나른히 웃었다. 가면 아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오늘 하루는 저랑 놀지 않으실래요?”
한솔이 알파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속삭였다. 두근, 두근-. 심장이 부드럽게 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울림이 한솔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순간 넋을 놓았을 정도로, 검은 연미복을 입은 신우는 너무 멋져 보여서 심장 아래가 간질간질거렸다. 알파의 커다란 손이 한솔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흠… 약혼자가 있는데.”
괜히 장난치는 목소리가 짓궂다. 한솔은 키득거렸다.
“하룻밤의 유희 정도는 괜찮잖아요?”
한솔이 손을 뻗어 가면 아래에 드러난 알파의 매끄러운 하관을 만지작거렸다. 목덜미에서 어깨로, 다시 등허리를 타고 내려온 손이 오메가의 둔부를 움켜쥐었다. 남자는 고개 숙여 오메가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이렇게 자연스러워.”
“읏… 으응….”
“응?”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룸으로 갈까요?”
다시 신사의 가면을 착용한 알파가 물었다. 오메가는 벌써부터 몸이 달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을 불러 키를 받은 알파가 오메가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두 사람은 환락의 파티로부터 등을 돌려 룸으로 향했다.
“아!”
방에 들어오자 벽으로 몸이 밀쳐졌다. 가면을 쓴 남자가 한솔의 몸을 벽과 자신 사이에 가뒀다. 한솔은 자신의 알파를 닮았지만, 마치 또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느낌에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주르륵… 한솔의 몸이 조금씩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한솔의 앞에 앉은 남자가 물었다.
“여우 님은 연인이 있나요?”
진득한 속삭임이 들렸다.
“…네.”
한솔은 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이 있으면, 세상에서 더는 무서울 것이 없노라고 한솔은 속삭였다. 가면 뒤에 숨고 나서야 전할 수 있는 진심이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늑대 가면이 한솔을 한동안 바라본다. 여우 가면 아래로 드러난 한솔의 뺨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입술로 옮겨 가 붉은빛이 도는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입술이 말려 들어가며 은밀한 공간에 숨겨져 있던 도톰한 혀가 드러났다. 츕- 가볍게 그것을 빨아 맛을 본 남자는 숨길 수 없이 짙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말했다.
“아마, 그 사람도-.”
“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
“세상에 나와, 당신을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
가면 아래에서 일렁이는 눈을 한 한솔이 신우를 올려다본다. 그가 웃었다.
“하지만 오늘은, 나를 만났으니-.”
“앗!”
“다른 남자 얘긴 금지.”
한솔의 몸을 들어 올린 신우가 오메가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 신우의 어깨를 꼭 움켜쥔 한솔이 달콤쌉싸름한 신우의 페로몬을 맡는다. 네가 너무 좋아- 전하지 못한 진심이 목 아래를 맴돌았다. 너무 좋아, 신우야….
그날 밤은, 가면 아래 흘러나온 서로의 진심을 들었다.
한 뼘,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배고파….”
밤과 새벽을 불태우고 파티에서 돌아와 죽은 듯이 잠을 청했던 한솔이 느지막한 오후가 돼서야 일어나 말했다. 한솔의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신우가 답했다.
“안 그래도 슬슬 나오래. 바비큐 그릴 요청해 놨다는데.”
“바비큐!”
밤과 새벽을 불태우고 파티에서 돌아와 죽은 듯이 잠을 청했던 한솔이 느지막한 오후가 돼서야 일어나 말했다. 한솔의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신우가 답했다.
“안 그래도 슬슬 나오래. 바비큐 그릴 요청해 놨다는데.”
“바비큐!”
바비큐란 말에 한솔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제 그렇게 먹었는데도 배가 고팠다. 배 속에 아귀가 든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버섯 꼬치 해 먹자고 해야지. 벌써부터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에 신이 난 한솔이 얼른 가자고 신우를 재촉했다. 신우는 작게 웃으며 솜이를 품에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호텔에서 먹어?”
“아니, 장소 대여했어. 바다 보면서 먹는 게 좋잖아.”
“와아!”
물론, 호텔뷰도 충분히 좋지만, 이왕이면 가까이서 바닷 냄새를 맡으며 먹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다. 돈은 충분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이런 곳에 자주 못 오는 사람들인 만큼 한 번 놀 때는 제대로 놀아 줘야 직성이 풀렸다. 솜이를 위한 특식도 준비돼 있다는 말에 앙증맞은 귀가 쫑긋 솟는다. 두 사람과 한 마리의 강아지는 호텔을 나와 선선하게 바람이 부는 해변가를 따라 약속 장소로 향했다.
“헤이, 거기 커플!”
박스에서 수박을 꺼내던 성민이 말했다. 그릴에 고기를 올리고 있는 성현과 채소를 썰고 있는 곰도 보인다. 아직 약속 시간까진 30분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에 벌써부터 모여 있을 줄은 몰라서 한솔은 얼른 곰의 곁으로 뛰어갔다.
“테디 씨, 뭐 도와드릴 거 없나요?”
“아, 한솔 씨! 그럼 이거 꼬치에 좀 끼워 주세요!”
호텔 측에선 출장 직원까지 보내 준다 했지만, 그들은 그냥 직접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런 게 다 추억이니까. 눈 앞에 펼쳐진 사파이어 빛의 바다와 하와이 느낌이 물씬 나는 인테리어만으로도 충분했다. 한솔은 신우가 입혀 준 카디건을 벗고 곰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성민의 요청에 수박을 자르고 있던 신우가 물었다.
“칵테일 서비스는?”
“원하는 때에 서빙해 준다는데?”
“우와, 여기 술도 돼요?”
“당연하죠! 하와이안 칵테일 한 잔은 마셔 줘야지 여름휴가 온 기분이 나는 거 아니겠어요.”
원하는 게 있으면 거기 팸플릿 보고 시키라는 말에 한솔이 관심을 가지자 신우가 과도를 든 상태로 지그시 한솔을 바라봤다. 한솔은 찔끔해서 검지를 펴고 ‘딱, 한 잔만. 응? 딱, 한 잔만!’ 한다. 피식 웃은 신우가 놀러 왔으니까 속 쓰리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라며 너그럽게 풀어 주었다. 한솔은 신이 나서 팸플릿을 펼쳤다.
“와, 너무 예쁘다-.”
하나같이 색도 예쁘고 이름도 독특했다. 꼬치를 끼우면서도 열심히 팸플릿을 살피던 한솔이 신우를 힐긋 바라봤다. 한 잔으론… 간에 기별도 안 찰 것 같은데….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만 마시긴 좀….
그리고 생각한다.
신우도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라 했잖아?
한솔은 당당하게 콜을 눌렀다.
『네, 케이터링 서비스 팀입니다.』
『칵테일 주문 좀 하려고요.』
한솔은 팸플릿 속 메뉴들을 하나하나 말했다.
『모히또랑 블루 하와이, 코스모폴리탄 각각 한 잔씩 주세요!』
신우의 시선이 대번 꽂혀 들었다.
“풋….”
“크큭… 아, 진짜 제수씨 골 때린다니까-.”
커다란 그릴 위에서 고기와 양파, 생새우와 해산물, 두툼한 통 소시지, 한솔이 열심히 완성한 꼬치들이 지글지글 익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접시 위에선 먹음직스러운 콘치즈가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고 곰이 쏟아부은 각종 채소와 알록달록한 파프리카 등이 그릴 위에 더해졌다.
저 앞에선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일행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머지않아 일행의 테이블로 알록달록한 칵테일이 서빙되자 신우는 입가에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한솔은 그저 해맑게 웃었다.
양고기가 익어 가는 냄새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솜이가 한솔의 허벅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탁자에 턱을 괸 채 불판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조금만 있으면 불판이 뚫릴 지경이었다.
“자, 이건 솜이 꺼.”
한솔은 양고기를 작게 잘라 후후 분 뒤 솜이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솜이는 고기 냄새를 한 번 맡고는 게 눈 감추듯 고기를 먹어 버렸다.
“내가 먹일게. 이리 줘.”
“괜찮은데….”
“얼른. 별로 못 먹고 있잖아.”
한솔이 솜이를 먹이느라 식사를 잘못하고 있자 신우는 솜이와 접시를 받아 갔다. 한솔은 고맙다고 웃으며 가장 먼저 대왕 버섯 꼬치를 집었다. 음, 맛있어! 야무지게 버섯을 하나 더 빼 먹고는 시켜 놨던 칵테일을 들었다. 첫 타자는 블루 하와이였다.
“곧 해 지려나 본대.”
“그러게. 하늘이 주홍빛이네.”
다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도 더 시키고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음악을 틀어 놓고 춤도 췄다. 정말이지 이럴 때만큼 한성민의 ‘내일 없음’ 식 가치관이 반가울 때가 없었다. 그렇게 즐겁게 노는데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걸쳐지는 장관이 펼쳐졌다. 일몰이었다. 한솔은 때마침 배경 음악 용으로 틀어 놨던 셔플에서 집시 여인 배리에이션 ‘에스메랄다’의 전주가 나오는 것을 보고 머리 위로 느낌표를 띄웠다.
한솔이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고선 인테리어로 되어 있던 소품들을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반짝이 같은 게 붙어 있는 데다가 망사처럼 얇고 화려한 붉은색 천, 꽃다발 옆에 장식되어 있던 나무 탬버린,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개 동상 장식에 걸려 있는 붉은색의 생화관 ‘레이’를 썼다.
La Esmeralda.
Grand Pas de Deux : Tambourine Solo Variation.
떠돌이 집시의 아름다운 생과 열정을 표현한 파드되.
포인트 슈즈도 없고 공간도 협소했지만 춤을 추는 데는 이 순간을 완성하는 즐거움 하나면 충분했다. 한솔은 신고 있던 쪼리를 벗어 버리곤 맨발로 나무 바닥 위에 섰다. 노트르담의 집시, 에스메랄다처럼 말이다.
꼿꼿한 발등과 우아한 손동작. 에샤페로 시작한 춤은 3번의 피루엣으로 이어지는 동작을 따라 어깨에 걸쳐져 있던 붉은색 천이 하늘하늘 춤을 췄다. 한솔은 빙그르 돌아 신우가 앉아 있는 자리로 향했다. 굳이 모든 동작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 이곳은 어떤 집시의 즉흥 무대였으니 말이다.
신우의 어깨선을 슥 훑고 그가 돌아보면 새침하게 그를 외면했다.
아라베스크- 발끝으로 탬버린을 두들기는 우아한 템포 뒤 다시 피루엣을 돌아 이번엔 신우의 반대쪽 어깨를 톡, 두들기고 도망간다. 자유로운 집시처럼 말이다.
관객들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이번에는 유혹을 하듯이 발끝으로 탬버린을 톡톡 두들겼다. 내가 당신을 외면하더라도 당신은 나를 봐 주라는 것처럼-.
원래는 마지막이 그랑 쥬떼로 마무리되는 춤이지만 공간이 협소한 관계로 한솔은 가볍게 돌아 신우의 목을 등 뒤에서 껴안았다. 하늘거리던 붉은 천이 얌전히 내려앉는다. 어깨 너머로 신우의 손에 들린 칵테일 잔이 보였다. 아까 그에게 빼앗긴 코스모폴리탄이었다.
잘 익은 크랜베리의 붉고 오묘한 색깔과 환상적인 하늘의 조화-.
한솔은 칵테일 잔의 얇고 가는 허리 부분을 붙잡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입술을 적시는 향긋함. 붉은 크랜베리 칵테일에선 달콤한 맛이 났다.
“신사님? 제 춤은 어떠셨나요?”
한솔이 속삭이자 알파는 한솔의 손에서 칵테일 잔을 가져가더니 가볍게 입술로 머금었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고는 반대쪽 손으로 한솔의 뒷머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글쎄. 더 봐야 알겠는데.”
“짓궂어- 흣…!”
입술이 겹쳤다. 신우의 입술은 달콤새콤한 크랜베리 맛이 났다.
***
따르릉-.
알람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뜬 한솔이 커다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목이 늘어진 잠옷은 붉은 자국이 쪼듯이 남은 흰 피부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용수라는 직업의 특성상 맨살을 그대로 내보이는 경우가 많다 보니 흔적을 남기지 못하게 했는데 그 반작용이 어제 작용한 듯싶었다. 끙… 이럴 거면 스팽킹이라도 해 주지. 은근슬쩍 그런 분위기를 잡아 보려 해도 신우는 맨날 키스를 찐하게 하는 것으로 한솔을 달랬다. 그렇게 매번 신우에게 홀라당 홀려 버리는 한솔이었다. 한솔은 작게 투덜거리며 늘어진 잠옷을 끌어 올리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넓은 방을 가로질러 나오자 탁 트인 오션뷰가 그를 반겼다.
“벌써 일어났어?”
막 한솔을 깨울 참이었는지 신우가 트레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단호박 수프와 작은 감자빵 두 개, 에그 베네딕트, 옥수수 조금에 새우 요리 약간, 그리고 메인은 참치 포케였다. 한솔은 식탁에서 먹겠다고 말하고 신우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알파는 밤새 고생한 오메가의 허리를 마사지하듯 쓸어내려 준 뒤 한솔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후식은 스무디 위에 바나나와 블루베리를 넣고 꿀을 뿌린 아사이볼이었다. 많이 먹지는 못하고 적당히 입가심하는 정도로만 먹은 뒤 숟가락을 내려놨다. 아침밥도 한 그릇 가득 먹었다는데 솜이가 남은 바나나를 자꾸 탐을 내서 결국 작게 잘라서 한 입 먹였다. 챱챱챱-.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솜이만 보면 없는 식욕도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일정은 어떻게 할래.”
“오늘은 다들 개인 활동하는 거지?”
“응.”
잠깐 고민하던 한솔은 바다에 다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신우가 서핑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묻자 고개를 젓고는 솜이를 안은 팔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솜이랑 놀아야지.”
어제 너무 혼자만 있게 한 것 같다고 미안한 표정으로 솜이를 내려다본다. 정작 배부르고 등 따뜻한 상태로 돌봐 주는 사람들에게 간식을 잔뜩 얻어먹었던 솜이는 모르는 척 해맑게 웃었다.
“어때, 오늘은 좀 괜찮아?”
어제와 달리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는 곳까지 들어온 솜이를 보고 한솔이 물었다. 괜찮다는 건지 안 괜찮다는 건지, 솜이는 바다와 한솔을 번갈아 볼 뿐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어제처럼 많이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아서 한솔은 솜이를 들어 올려 바다 거품 위로 살포시 내려놓았다. 조금 움찔거린 솜뭉치가 물기에 젖은 발을 들어 올리더니 파드득 떨었다.
“솜아, 이리 와!”
한솔이 바다 안으로 들어가 솜이를 부르자 고민하던 솜뭉치가 조금씩 물속으로 들어왔다. 짧은 신장 탓에 금방 물에 둥둥 떠 버리는 솜이를 보며 한솔이 웃음을 터트렸다. 도와 달라는 것 같아서 솜이를 안고 물에서 나오자 그새 녹아 버린 솜사탕이 부르르 몸을 털었다. 다행히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자아, 오늘 운전해 주실 기사님을 소개합니다!”
왕!
튜브에 바람을 넣어 오느라 조금 늦었던 신우가 잘 노는 둘을 보며 작게 웃었다. 튜브를 가로지르듯 몸을 눕힌 한솔이 가슴에 솜이를 얹어 놓고 꼭 안았다. 파도가 크게 치는 곳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너울거리긴 했기 때문에 솜이에게 물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날씨 좋다-.”
신우가 튜브를 끌어 주고 한솔과 솜이는 튜브를 타고 동동 떠다니며 놀았다. 허리 옆으로 차는 물을 조금씩 솜이에게 뿌리자 솜이가 발바닥으로 하지 말라며 한솔의 볼을 꾸욱 눌렀다. 한솔은 솜이의 발바닥을 앙 무는 척을 하면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발끝으로 괜히 신우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가 예민한 발바닥을 간지럼 당해 하마터면 그대로 바다에 빠질 뻔하기도 했다.
“짠. 완성.”
“…음… 피라미드야?”
“아냐! 성이잖아! 잘 봐 봐!”
물에서 조금 놀다가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구경하며 모래 쌓기를 했는데 신우가 이상한 소리를 해 댔다. 입술을 비죽 내민 한솔이 이게 어떻게 피라미드냐고 투덜거리다가 모래를 털고 일어났다. 슬슬 피곤한지 솜이가 작게 하품을 했다. 하긴, 지금 시간이면 그럴 만도 하지.
한숨 자기로 하고 선베드로 돌아와 신우는 책을 읽고 한솔과 솜이는 나란히 낮잠을 잤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기분 좋아서 눈을 뜨자 신우가 둘을 향해 부채질을 해 주고 있었다. 알로하-. 한솔이 여전히 잠기운이 묻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잘 잤어?”
“응.”
아직 꿈나라인 솜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신우의 선베드로 넘어갔다. 아침에 사 온 생과일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예쁜 바다를 구경하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면 잘생긴 알파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약간 쑥스러운 기분에 얼굴을 붉힌 한솔이 입 모양으로 작게 ‘왜?’ 한다. 신우가 물기가 덜 말라 구불구불한 한솔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머리 옆에 꽃송이를 꽂아 주었다. 아침에 솜이와 공원을 산책하다가 주웠던 하와이의 꽃, 하얀 플루메리아였다.
“뭐야….”
한솔은 간질간질한 기분에 괜히 툴툴거리고선 막 잠에서 깬 솜이가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 후다닥 도망을 갔다. 그러면서 절대로 꽃을 빼지는 않았다. 체력 충전을 완료한 솜이가 입에 공을 물고 어서 놀자며 꼬리를 홱홱 흔든다. 한솔은 따라나서려는 신우를 말리곤 멀리 안 가고 이 앞에서 놀 거라고 말하며 줄행랑을 쳤다. 아직 저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부끄러워….
『강아지가 굉장히 귀엽네요.』
그렇게 솜이랑 놀고 있는데 어떤 태닝남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산책을 하거나 놀고 있으면 종종 솜이를 만져 봐도 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한솔에겐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인 줄 알고 전지적 팔불출 시점으로 솜이 자랑을 하던 한솔은 태닝남이 슬쩍 거리를 좁혀 오자 잠시 멈칫했다.
『같이 놀지 않을래요? 우리 일행에 알파도 있어요.』
태닝남이 한솔의 어깨를 살포시 잡아 온다. 순간, 한솔은 한기를 느끼고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 저는 일행이….』
『무슨 일이시죠?』
뒤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솔은 .익숙한 페로몬이 달콤하게 몸을 감싸 오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큰일 났다….
신우의 손이 자연스럽게 한솔의 허리를 붙잡아 오자 태닝남은 깜짝 놀라며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연신 사과하더니 줄행랑을 친다. 난데없이 헌팅을 당한 한솔만 난감해진 상황이었다. 한솔은 신우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신우야…?”
“…….”
“그, 그… 페로몬… 흐읏….”
한솔이 바르작거리자 허리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준 신우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오메가를 내려다봤다. 무슨 일인가, 하고 두 사람 곁에 다가온 솜이가 멀뚱멀뚱 신우를 올려다본다. 그제야 겨우 손에서 힘을 푼 신우가 한솔에게 말했다.
“…갈까.”
“으응….”
신우가 돌아서자 한솔은 얼른 솜이를 품에 안고 그를 따라갔다. 항상 한솔의 보폭에 발걸음을 맞춰 주던 신우의 걸음이 오늘따라 유독 빨랐다. 한솔이 따라가려면 반쯤 뛰어야 했을 정도였다. 호텔 VIP 전담 프론트 앞에 다다라서야 멈춰 선 신우 탓에 한솔은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는데 그의 앞에서 이런 대화가 들렸다.
『펫 케어링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습니다.』
『네, 고객님. 담당자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한솔이 ‘어라…?’ 하는 순간에 친절한 직원이 다가와 솜이를 데려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이미 신우에게 손목이 붙잡혀 끌려가는 중이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한솔은 방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상의부터 끌어 올리는 신우를 보고 한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자, 잠깐! 신우야…! 읍…!”
입술이 겹친다. 익숙한 손끝이 한솔의 척추를 타고 올라가 양 날개뼈를 움켜쥐었다. 뜨거운 몸이 맞붙었다.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하던 한솔은 이내 벽에 부딪히고는 벽을 타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입술을 떼어 내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은 짐승이 그런 한솔을 더, 더 거칠게 몰아붙인다.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흐으… 한솔이 짧게 신음을 흘렸다.
“…짜증 나.”
어른스러웠던 남자가 한순간에 질투의 화신이 돼서는 이를 갈았다. 한솔은 심장이 무섭게 뛰는 느낌에 침을 삼켰다. 혀끝이 달았다.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다.
두 사람은 다시 키스했다. 한솔의 목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초커를 풀어 바닥에 내팽개친 신우가 한솔의 몸을 단번에 끌어 올렸다. 그는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려다가 뒷목이 붙잡혀 다시 입 안 깊숙이 침투해 오는 혀를 받아야 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신우의 목과 허리에 팔다리를 감자 그대로 침실로 연행되었다. 하얗고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이 엉킨 두 사람이 풀썩 넘어졌다.
“화났어?”
잠시 그렇게 가쁜 숨을 내쉬며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는데 한솔이 붙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가만히 신우의 뺨을 감싸 왔다. 멈칫한 신우가 두 눈을 내리뜬다. 그가 답했다.
“…아니.”
“…….”
“그냥… 그렇게 고대하던 어른이 됐는데도 여전히 네가 멀리 있는 것 같아서….”
알파가 툭, 한솔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 왔다.
“조바심이 나.”
심장이 쿵쿵 가쁘게 뛰었다.
잠시 손등으로 입을 가린 한솔이 신우의 뒷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평소와는 다른 포지션에 조금 당황한 신우가 한솔을 바라본다. 한솔은 티의 목 부분을 끌어 내려 어제의 집요한 흔적이 남아 있는 모습을 내보이며 말했다.
“…할까?”
“…….”
“싫으면 말… 흡!”
덜커덩-. 고급 침대가 덜컹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곧장 한쪽 다리가 가슴까지 밀어 올려진다. 편하게 입었던 바지는 다 벗겨지지도 못한 채 반대쪽 발목에 걸린 상태로 달랑거렸다. 속옷이 끌어 내려지고 한솔은 익숙한 반나체가 되었다. 익숙하다 해서 그게 부끄럽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한솔이 슬쩍 무릎을 모았다. 물론, 금방 알파의 손에 붙잡혀 활짝 벌리게 될 운명이었다.
신우가 옆 탁자의 서랍을 뒤져 젤과 콘돔을 꺼냈다. 지이익-. 지퍼가 끌어 내려진다. 한솔은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무시무시한 위용에 침을 꼴깍 삼켰다. 어, 어제 했으니까 괜찮겠지…?
“미안-.”
응…?
“자제, 못 할 것 같아.”
한솔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검지와 중지에 콘돔을 끼운 신우가 익숙하게 오메가의 구멍을 찾아 회음부를 더듬었다. 젤을 뿌린 뒤, 어제 그렇게 해 댔는데도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는 구멍을 꿰뚫었다. 푸욱-!! 허벅지가 파드득 떨리고 조신하게 닫혀 있던 구멍이 빠끔 입구를 벌렸다. 손가락에 쫀득하게 달라붙어 오는 내벽을 더듬다 보면 어느 순간 수줍게 부풀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 이제는 몇 번 만지지 않아도 능숙하게 찾을 수 있는 그곳을 신우는 신중하게 덧그렸다.
“아, 아….”
“…….”
“신우야…! 히잇…!”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공략당하자 몸을 부들부들 떨던 한솔이 고개를 홱 뒤로 꺾었다. 구멍에서 애액이 왈칵- 터져 나온다. 스폿을 집요하게 꾸욱- 눌렀던 신우는 마치 달래는 것처럼 그 주변을 살짝살짝 문질렀다. 그래 봤자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내벽은 그 작은 자극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
“왜 이렇게, 좁아.”
“읏, 응… 흐…! 아응!”
최선을 다해 풀었다고 생각했지만 한솔의 안은 여전히 좁았다. 굳건했던 인내심이 어느 순간 심지까지 타들어 간 신우가 거칠게 목을 울린다. 결국 그는 자제하지 못하고 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던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한솔의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자세를 잡았다.
쯔으읏….
자글자글했던 구멍 주름이 일순간 쫙 펴진다. 정복당하는 느낌. 그 아찔함이 좋았다. 거대한 것이 장기를 밀어붙이는 느낌에 한솔이 앓는 소리를 내며 신우의 가슴을 퍽퍽 쳤다. 물론 알파는 밀려나지 않았고 신우는 한솔의 손목을 한데 모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거칠게 허리를 쳐올린다.
퍽-!!
“아…!”
짧게 비명을 지른 한솔이 자지러졌다. 정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이때만 되면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 먼저 인내하는 알파를 건드리는 것도 자신이지만, 또 조금만 천천히 해 달라고 엉엉 울면서 비는 것도 자신 같다고-.
한솔은 후배위로 깊숙이 들어오는 성기에 본능적으로 앞으로 기어가려다가 뒤쪽으로 붙잡힌 손목과 허리를 잡아당기는 힘 때문에 주르륵 신우 쪽으로 끌려갔다. 읏, 흑… 이 자세를 좋아하긴 하지만… 너, 무 깊…어…! 신우가 한솔의 등허리에 복부를 붙이고 예쁘게 도드라진 날개뼈에 쪽,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차근차근 어깨와 목덜미 순으로 올라와 마지막으로 열이 올라 붉어진 귓바퀴를 잘근 씹는다. 한솔이 ‘힉…!’ 하고 짧은 비명을 흘렸다.
“신, 우야… 흐….”
“…….”
“나, 나아… 싸도… 으응!”
“…….”
“흐잇…, 흣… 돼…? 싸고 싶… 아응!”
푸욱-! 찔걱… 푹…!
어쩐지 말을 하려 할 때마다 추삽질의 박자감이 더 빨라지는 것 같은 건 착각인 걸까. 한솔의 허리를 더 바짝 끌어당긴 신우가 한솔의 몸 아래로 손을 넣어 선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성기를 붙잡았다. 그리고 자비 없이 앞쪽을 막아 버린다.
“참을 수 있지?”
말의 형태는 질문인데 그 뜻은 아니었다. 결국 참으라는 소리에 한솔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층 다정해진 손짓으로 오메가의 눈물을 닦아 준 알파가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더니 강하게 허리를 박아 넣었다. 엉덩이만 불쑥 솟은 꼴로 흔들리던 한솔은 그래도 같이 하는 건데 너무 자기만 느끼는 것 같아서 낑낑거리며 구멍을 조였다. 알파가 알았더라면 이 오메가의 사랑스러움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지금보다 더 거칠게 박아 버렸을 것이다.
“후으… 읏! 너,무! 아! 빨라…!”
“하… 빨리, 박는 거….”
“아으으응!!”
“좋아, 하잖아- 너.”
신우는 그리 말하고선 무자비하게 추삽질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뒤로 하다가 한솔이 너무 힘들어해서 그런지 다시 앞으로 자세를 바꾸고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몸을 들쳐 업고 박아 댔다.
한솔은 신우의 ‘자제 못 함’이 무슨 뜻인지 몸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흡사 폭주하는 기관차 같았다. 쉬는 시간도 없이 쉴 새 없이 박아 대는데…. 아니, 물론 좋긴 하지만! 이건 너무, 너무 짐승같…….
“흐아앙!!”
참고 참고 또 참았던 첫 사정-. 한솔이 이제 진짜 안 된다고 더 참으면 병원 가야 된다고 울고불고 빈 덕에 허락받은 사정이었다. 꿀렁이며 정액을 뱉어 내는 성기 표면을 매만지던 신우가 입구를 살살 쓰다듬으며 한솔을 괴롭혔다. 한솔은 너무 힘들어서 하지 말라고도 못 하고 그냥 얌전히 신우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자, 잠깐만….”
그런데 그새 묵직해진 콘돔을 묶어 버리고 새 콘돔을 꺼내는 신우의 모습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한솔이 알파의 손등을 간절하게 붙잡았다.
“입으로, 입으로 해 줄게….”
“…….”
“응…? 나 이제 잘할 수 있어-.”
너무 간절한 마음에 본인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뜬 알파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뭘 잘할 수 있는데.”
눈을 깜박이던 한솔의 얼굴이 한순간에 확 붉어지는 것이 보인다.
“그으… 그게 그러니까….”
“모르겠으면 그냥 할까.”
“아 아냐! 나 이제 펠라… 잘할 수 있어….”
신우가 콘돔의 포장지를 뜯었다.
“그게 아니잖아, 솔아.”
“…흑….”
“가르쳐 준 대로 해야지.”
한솔은 매끈한 실리콘 덩어리가 포장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입으로….”
“…….”
“…좆… 잘, 물 수 있어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일부러 ‘펠라’라고 돌려서 말했는데도 그걸 놓치지 않고 지적해 주는 것도 너무 좋았다.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신우의 눈치를 살피는데 알파가 한솔의 턱을 붙잡더니 한껏 들어 올리게 만들었다.
“입으로는 부족한데.”
“읏….”
“여기까지 먹을 수 있겠어?”
신우가 한솔의 목젖 부근을 검지로 툭 치며 말했다.
“…으응… 할 수 있어요….”
“좋아.”
신우가 한솔의 턱을 놓아주자 괜히 앞으로 혹사당할 예정인 목을 만지작거리던 한솔이 신우의 앞에 무릎 꿇은 상태로 엎드렸다. 그 자세로 알파의 좆을 물려고 하는데 신우가 ‘잠깐.’ 하고 한솔을 멈춰 세웠다.
“이리 와.”
왜 부르나 싶었지만 일단 오라 하니 갔다.
“앗?!”
그런데 순식간에 시야가 빙글 돌면서 눈앞에 거대한 좆 기둥이 위치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위치가 반대인 상태로. 신우의 앞에 엎드린 게 아니라 신우의 몸 위에 엎드린 자세에 한솔이 침을 꼴깍 삼켰다.
“뭐 해.”
“…….”
“물어야지.”
자신의 성기를 잡아 오는 손길에 동공 지진을 일으키던 한솔이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
성기가 축축한 점막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강하게 흡입 당했다.
“흐윽…!”
솜털까지 쭈뼛 설 것 같은 강렬한 감각에 한솔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두 사람의 신체조건 탓에 신우는 침대 헤드에 기댄 자세로 앉아 있었고 한솔은 그런 신우 위에 엎드린 자세였다. 하체가 위로 솟아 있었는데 타고나기를 유연한 데다가 극도로 단련된 덕에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알파의 눈앞에 음부를 들이대는 것은 결이 다른 이야기였다. 한솔은 츕- 하고 성기가 빨리는 소리, 찔꺽‐ 하고 동시에 구멍이 애무 당하는 소리에 숨고 싶은 것처럼 신우의 복부에 얼굴을 묻었다. 물론, 그런 음란한 소리뿐만 아니라 몸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쾌감이 제일 큰 문제였기 때문에 수줍게 물이 든 한솔의 귓바퀴는 본래의 제 색을 되찾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역시, 뒤로 먹는 게 더 좋지?”
“아,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구멍 위로 후- 불어지는 입김에 화들짝 놀란 한솔이 허겁지겁 신우의 성기를 삼켰다. 그동안 열심히 배운 대로 단단하게 핏줄이 불거진 기둥을 쪽쪽 빨고 부드러운 혓바닥으로 요도 입구를 살살 문지른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조심스럽게 목구멍 입구에 귀두를 밀어 넣는데,
“…으으읍!”
아래가 강하게 흡입 당하며 한솔이 놀라 움직이는 바람에 입 안의 성기가 목 안쪽을 쿡 쑤셨다. 한솔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남은 기둥을 꾸역꾸역 삼켰다.
‘너무 커….’
코를 훌쩍인 한솔이 이번엔 조심스럽게 기둥을 뱉어 냈다. 그리고 입 안에서 기둥이 전부 빠져나가기 전에 다시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기를 반복한다. 처음에는 침입을 거부하던 목구멍이 점점 유연하게 풀어지면서 거대한 성기를 빠듯하게 삼키기 시작했다. 점차 속도가 붙자 한솔의 눈에선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무리 익숙해진다 하더라도 딥쓰롯은 필연적으로 목구멍이 긁히기 마련이라 한 번 하고 나면 목이 쉬는 것은 예사였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인데 끝나고 나면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주인과 그 상대를 기쁘게 했다는 충족감에 하는 행위였다. 물론, 이런 목 막힘이 좋기도 하고….
분명 그랬는데-.
“…후우.”
자신의 성기에 직접적으로 닿는 애끓는 한숨에 한솔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자 목구멍이 확 조여들며 신우의 성기를 우물우물 삼켰다.
“윽….”
한솔은 평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신우의 미묘한 시그널, 예를 들어, 지금 그가 허벅지를 꽈악 움켜쥐는 손이라든지 좀 더 거칠어진 숨이라든지 하는 것에 등줄기를 타고 기분 좋은 소름이 쫙 끼쳤다. 내 애무에 상대가 반응하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아니, 물론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한솔은 아니었다.
아드레날린이 퐁퐁 솟은 한솔이 더 열정적으로 펠라티오를 하자 잠시 호흡을 고른 신우는 한솔의 성기를 뱉어 내고 오메가의 구멍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쿨쩍- 한 손으론 성기를 애무하고 다른 손으론 구멍을 만져 주자 한솔의 페이스는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아무래도 공략 포인트가 두 곳이나 되다 보니 시작부터 불리한 싸움이기는 했다. 한솔은 결국 성기를 뱉어 내고 자지러지듯 신음을 흘렸다. 힉, 아, 아! 나도, 신우… 느끼게 해 줄 수, 있는데….
“…무, 슨… 신우야…?”
“…….”
“…! 아, 안 돼!! 하지 마! 안, 돼…! 싫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신우가 자신의 둔부를 양옆으로 벌려 오는 느낌에 의아해한 한솔이 뒤를 돌아봤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거기 더, 러워… 하지 마아….”
분명, 얼굴을 묻으려 했다. 거, 거, 거기에 혀가 닿을 뻔… 내적 소름이 쫙 끼친 한솔이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울먹이며 말하자 신우가 조금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에 씻었잖아.”
“그건 아침이구 다시 밖에 나갔다 왔잖아…!”
“물놀이 한 건데, 어때. 응?”
이런 고집불통 신우는 처음이었다. 한솔은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래도 안 돼!”
본래의 신우라면 한솔이 싫다는 즉시 하지 않았을 텐데 오늘의 신우는 조금 달랐다. 아직 그 ‘자제 못 함’ 디버프가 걸려 있는 것인지, 아니면 리밍에 대한 순수한 집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을 내주기에는 한솔도 너무 수치스러웠기 때문에 두 사람은 팽팽하게 맞붙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귀여운 연인 같아 보였다.
“너도 해 줬잖아. 같이 해야 공평하지.”
“흐윽… 내가 뭐얼….”
신우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펠라’ 하고 말하니 한솔이 그거랑 이거랑 같냐며 도리질을 쳤다. 알파는 공을 들여 오메가를 설득했다. 둘 다 성기를 애무하는 건데 뭐가 다르냐, 나도 너 기분 좋게 해 주고 싶다- 하는데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해서 한솔은 조금 혹하고 말았다.
“그러엄… 조, 금만….”
신우의 복부에 엉덩이를 꼭 붙인 채 뒤를 사수하고 있던 한솔이 엉덩이를 엉거주춤 들어 올렸다. 그런데 막상 그러고 나니 뭔가 이건 아닌 것 같다 싶은 거다. 그래서 황급히 내리려는데 크림처럼 보드랍고 하얀 찹쌀떡 같은 엉덩이를 두 손 가득 붙잡은 신우가 어제오늘 혹사당해 붉게 부푼 구멍을 츕, 빨아 들였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뭐, 뭐야…? 뭐야, 이거…?’
너무 강렬한 감각에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그리고 두 번째 흡입을 당했을 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힉, 히이…’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물컹하고 두꺼운 것이 한솔의 입구를 지분거리다가 놀라서 쭈글쭈글해진 내벽 안으로 쏙 미끄러진다. 이번엔 숨도 쉬지 못한 한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상태였다.
“아으, 흐… 으응! 힉… 아아앙!”
츄웁- 할짝….
“흐으윽… 흣… 아, 안… 흐잇… 안 돼… 앙…! 거기인….”
뭐가 자꾸 안 된다는 건지 ‘안 돼’만 외치던 한솔이 신우의 탄탄한 복부에 얼굴을 비볐다.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간 얼굴이 펑 하고 터져 버릴지도 몰라. 그대로 살기 위해 도망을 가려던 한솔은 내벽을 쯉쯉 빨아 들이는 느낌에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한솔이 하체만 들어 올린 채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리자 강제로 얼굴을 떼어 내게 된 신우가 축축하게 젖은 구멍 입구에 쪽, 입을 맞췄다. 울컥-. 마치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구멍에서 말간 액체가 새어 나온다. 애액이 엉덩이 골을 타고 주륵 미끌어지는 느낌에 한솔이 ‘흐이익…’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마안… 내가, 내가 잘못했… 흡….”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리려던 한솔은 자신의 얼굴을 퉁- 하고 때리는 단단한 살 기둥에 ‘흐으…?’ 하고 눈을 깜박였다. 거기서 진한 나무 냄새가 났다. 홀린 듯 기둥을 붙잡은 오메가가 선홍색 혀를 내밀어 기둥을 싹, 핥자 오메가의 둔부를 붙잡고 있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하얀 엉덩이에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알파는 잇새로 신음을 흘리고선 오메가의 하체를 불쑥 들어 올려 양 찹쌀떡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홍매화처럼 붉고 아담한 구멍이 그를 반겼다. 거기서 진한 매화 향이 꽃을 피웠다.
마치 경쟁이라 하듯 앞다투어 서로의 성기를 빨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애초에 이 싸움은 한솔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다. 페로몬에 홀려 열심히 성기를 빨고 있던 한솔은 어느새 자신이 앙앙거리며 신음만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조금 억울해졌다. 자신도 애인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데 자기 몸이 너무 예민하니까 집중을 하려 해도 자꾸만 발정이 났다.
“신, 우야… 흐읏… 이제 넣어 줘어… 응!”
녹진하게 풀리다 못해 흐물흐물해진 구멍을 느끼고 결국 한솔이 항복을 선언했다. 이제 제발 그만하고 넣어 달라며 그가 엉엉 울며 말하자 신우가 한 박자 늦게 골 사이에서 얼굴을 떼어 냈다. 붉은 입술이 애액과 침으로 젖어 번들번들거린다. 안달이 난 오메가가 아래로 손을 가져가 볼기 살을 잡아 벌리자 쯔즛… 묽은 액체가 달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알파가 한솔의 회음부를 간지럽히며 말했다.
“정말 후회 안 하겠어?”
“흐힛… 안, 해애… 빨리…!”
신우는 한솔의 한쪽 엉덩이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웃었다. 오메가의 살에선 특유의 달달한 냄새가 났다. 그건 매혹적인 꽃향기보다는 달큰한 과실 향에 가까운 향이었다.
한솔이 몸을 제대로 누이자 자세를 잡은 알파가 전조 없이 단번에 거대한 성기를 쑤셔 넣었다. 알파가 정성 들여 빨아 준 덕인지 구멍은 무리 없이 남근을 삼켰다. 쯔읍… 아니 오히려 더 달라는 듯 빠끔거리며 재촉을 하는 듯했다.
“흐앙! 앙! 좋,아! 아! 아앙!”
“읏… 좋아, 솔아?”
“히잇, 흐… 으응! 좋아…!”
퍽, 퍼억! 퍽-!
그건 광란의 정사였다. 아니, 인간의 정사라기보다는 짐승끼리의 교미라 해야 옳았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떠 보면 여전히 허리가 붙잡힌 채로 정신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신우의 ‘후회하지 않겠냐’는 말을 좀 더 새겨들었어야 했다고 한솔은 뒤늦게 후회했다.
분명 낮에 시작했던 일이 밤이 늦도록 끝나질 않았다. 기절만 세 차례. 한솔은 이건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하루에 12시간 이상 춤을 추고 단련하는 건 자신인데 왜 이 일은 매번 자신이 기절해야 끝이 나는 걸까? 나름 신우에게 맞춰 보겠다고 체력 단련도 하고 몸에 좋다는 건 다 챙겨 먹은 한솔이었지만…. 그는 몰랐다. 한솔이 강해질수록 신우의 리미트가 풀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뭐, 다른 사람이랑 한 번이라도 해 봐야 평범의 기준을 알지 범인의 기준으로 보면 사실 한솔의 체력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한솔이 이 사실을 깨달을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예정이었다.
“끝, 났어…?”
마지막으로 정상위로 한 번 한 뒤, 까무룩 기절했다가 신우가 잠옷을 입혀 줄 때쯤 깬 한솔이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신우가 한솔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떼어 낸 뒤 눈 위로 호- 입김을 분다. 한솔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탁자 위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1시였다. 시계 옆에는 아까 그 플루메리아꽃이 놓여 있었다. 스탠드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아늑한 어둠 속에서 각인한 알파의 숨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은 꽤나 환상적인 일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신우의 가슴에 등을 기댄 자세로 반쯤 방만하게 누워 있던 한솔이 물었다.
“솜이는…?”
“친구들이랑 많이 놀았는지 피곤해하길래 바로 재웠어.”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한솔은 솜이가 잘 자고 있다는 말에 안심하고선 신우의 손을 가지고 꼼지락 꼼지락거렸다.
“오늘 있잖아….”
“응.”
“그으… 흠흠…, 좋, 았어….”
한솔의 귓바퀴가 수줍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안전어 사건의 이후로 두 사람은 이렇게 침대에 앉아 그날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한솔이 기절해 버리는 날은 하지 못하지만-. 정사 후의 이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좋아서 한솔은 꽤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신우가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거나 마사지를 해 주기도 하니까.
“흣….”
후희는 언제나 달다. 자극이 세지 않은 부드러운 터치에 한솔이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더 이상 설 힘도 없어서 그런지 밑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도 좋았다. 그럼 진짜 곤란해….
작게 웅얼거리는 한솔의 뺨에 쵹- 입술을 맞춘 신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좋았어?”
“…으응.”
“나도.”
뭐가 좋았다는 건지 생각해 보면 잠깐 아찔해지긴 하지만….
어찌 됐든 지금 무사히 살아 있으니 된 거다.
“사실, 걱정이 되긴 했거든. 네가 싫었다 하면….”
“…….”
“어떻게 설득하지, 하고.”
어?
“뭘 설득해…?”
“그야, 다음에-.”
“…….”
“또 먹게 해 달라고?”
1초.
2초.
3초-.
…….
….
“…!!”
버퍼링이 풀린 한솔이 신우를 홱 돌아봤다.
“뭐, 뭐….”
한솔이 어버버거렸다. 신우가 짓궂은 눈빛을 했다.
“약간….”
“…….”
“무른 과육 같은 느낌이랄까.”
“…-!”
맛도 그렇고 냄새도 그렇고-.
얼굴이 확 달아오른 한솔이 신우에게 달려들었다. 저항하지 않은 알파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넘어진다.
“이, 이 나쁜 입!”
신우의 가슴 위에 주저앉은 한솔이 알파의 입을 두 손으로 단단히 틀어막고 외쳤다. 손바닥 아래에서 간지러운 웃음이 느껴졌다. 예쁘게 휜 눈꼬리를 보고 모든 의지를 상실한 한솔이 ‘신우는 변태야!’, ‘이 악독한 사디스트!’라면서 그를 매도했지만, 모두 사실이었으므로 알파에겐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그 변태랑 놀아 난 게 누군데.”
“꺄핫! 간지러…!”
얌전히 깔려 주고 있던 알파가 몸을 홱 뒤집고 오메가의 위를 점령하더니 한솔의 몸을 마구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한솔은 숨넘어가게 웃으며 눈가에 눈물까지 매단 채 항복을 외쳤다. 오렌지빛 불빛이 침대 주변을 따스하게 밝히는 방 안에서 한동안 두 사람의 웃음소리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
따르릉- 탁자 시계에서 알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이불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손이 시계를 눌러 껐다. 드물게도 알람이 한 번 울린 것만으로도 잠에서 깬 한솔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본다. 시선이 처음 닿는 곳은 당연하게도 신우가 있는 옆자리였다.
“…….”
반듯한 정자세로 누워 입조차 벌리지 않고 ‘숙면의 정석’ 같은 모습으로 자고 있는 신우를 보고 한솔이 입술을 작게 벌렸다. 항상 한솔보다 먼저 일어나는 신우였기에 어릴 때를 통틀어 이렇게 자고 있는 신우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있다 해도 차 안에서 잠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거나 바쁜 일정 속에서 잠시 한솔의 어깨에 기대어 쪽잠을 자는 모습이 다였다. 이렇게 제대로 자고 있는 신우의 모습을 보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꼴깍, 침이 넘어갔다.
여름휴가를 갔다 온 지도 벌써 나흘. 아직 발레단 휴가는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지만, 한솔의 휴가 일정과는 달리 신우는 매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MBA 수료가 거의 막바지에 달한 데다가 학위 수료를 마치면 바로 천성 런던지사로의 입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차근차근 후계 구도의 길을 밟고 있는 신우였다.
그런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한솔을 위해 시간을 짜내서 휴가도 갔다 오고 꼬박꼬박 한솔의 점심 식사를 체크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면 저녁도 같이 먹어 주려 한다. 정말이지 엄청난 애정이었다. 한솔도 그걸 알기에 지금까지 보채지 않고 꾹 참아 왔지만….
‘이제는 안 되겠어.’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한솔은 결심을 마치고 신우가 곤히 자고 있는 이불 밑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갔다.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간 한솔은 조심스럽게 포근한 어둠 속을 더듬었다. 그리고 천 너머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멈칫한다.
‘신우는 건강하구나.’
한솔은 흐뭇하게 웃곤 신우의 잠옷 바지를 살살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 음흉한 일을 저지르기 위해 꼼지락거리던 와중 얌전히 있던 신우의 손이 쓱- 움직였다.
‘깼, 나…?’
한솔은 들키는 줄 알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움직인 손은 한솔의 뒤통수를 가만가만 쓰다듬더니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
들키는 줄 알았네….
한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신우의 바지와 브리프를 벗겨 내리는 일에 집중했다. 인고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바지를 벗기는 데 성공하자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성기가 밖으로 퉁- 튕겨져 나온다. 좁은 공간 탓에 그 과정에서 한솔의 얼굴을 때리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던 한솔은 슬그머니 한쪽 눈을 뜨고 상황을 살폈다. 이불을 빼꼼히 들어 올리자 여전히 곤히 자고 있는 신우가 보인다. 한솔은 작게 키득거렸다.
‘아기 같아.’
그리고 다시 꾸물꾸물 이불 밑으로 들어와 빳빳하게 서 있는 신우의 성기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어두워서 그런지 훨씬 더 크게 느껴지는 좆을 보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려 기둥을 한입에 삼킨다. 합-.
“으응….”
페로몬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이라 그런지 절로 손끝이 떨렸다.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린 한솔이 본격적으로 성기를 쪽쪽 빨기 시작하자 원래도 컸던 성기가 무시무시하게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그는 무리하게 목구멍으로 집어넣는 대신 적당히 즐길 수 있을 정도만 빨고 핥았다. 그렇게 열중해서 좆을 빠는데 자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
이번에도 그냥 지나가는 손인 줄 알았더니 머리를 쓰윽 쓰다듬은 손이 목으로 내려가서 엄지로 목젖 부근을 꾸욱 눌렀다. 흣… 갑자기 가해지는 압박에 한솔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적절하게 템포를 조절해 가며 세미 브컨을 해 주던 손이 뒤통수로 다시 옮겨 갔다. 부스럭. 신우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진다. 한솔이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좆을 더 깊숙이 물자 머리 위로 방패막이 되어 주었던 이불이 걷혔다. 갑작스럽게 밝아지는 시야에 그는 눈을 꼭 감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막 잠에 깨서 그런지 유독 낮게 잠겨 있는 목소리에 콩닥콩닥거리던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한솔은 좆을 문 채로 신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람 대옹….”
‘알람 대용’이라 말하며 그렇게 올려다보는데 참을 수 있는 알파가 있을 리 없다. 천하의 유신우조차 말이다.
물론, 한솔은 다 계산하고 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신우가 뒤통수를 눌러 올 때도 놀라지 않고 성기를 삼켰다.
츕, 쮸웁….
열심히 빨다 보니 점차 끝이 다가왔다. 낮게 신음한 신우가 한솔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뒤통수를 눌러 오자 한솔은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곧, 한계치까지 부풀었던 성기가 용암같이 뜨거운 액체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한솔은 뜨겁고 끈적한 액체가 목구멍을 때리는 느낌에 켁켁거리다가 힘겹게 정액을 꿀꺽꿀꺽 삼켜 나갔다. 다만 워낙에 양이 많고 분출되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좁은 입술 틈새 사이로 정액이 주르륵 흘러넘쳤다.
“흐응….”
입에서 좆을 빼내는 걸 겨우 허락받은 뒤 기둥에 묻은 걸 싹싹 핥아 먹었다. 신우의 시선이 느껴진다. 알파가 이런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가벼운 절정감이 아랫배를 달궜다. 뒤늦게 손등에 묻은 정액을 발견하고선 혀를 내밀어 할짝이자 신우가 솜이에게 하듯 한솔의 뺨을 간지럽혔다. 우유 대신 정액이 묻은 얼굴이 무척 야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런 이벤트를 준비했어?”
뜨끔-.
한솔이 정액이 묻은 혀를 삐죽 내밀고선 무해하게 헤헤 웃었다.
“신우야-.”
“응.”
“나 지금 휴간데….”
“…….”
“…그거 해 주면 안 돼? 응?”
신우의 나른했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한솔이 최대한 간절해 보이는 눈빛으로 신우를 올려다봤다.
두 사람의 아침 루틴이었던 메인터넌스 스팽킹이 일시 중단된 지 약 반년. 한솔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그냥 해 달라고 하면 안 해 줄 게 뻔하기 때문에 휴가 기간을 노린 역습이었다.
물론 연습은 계속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공연은 안 하잖아!! 해 줘!! 한솔이 투지에 불타는 눈으로 반짝반짝 눈빛 공격을 보내자 신우가 곤란한 웃음을 흘린다. 그라고 참는 게 쉬울까. 다만, 걱정이 되니까 인내하는 것뿐이다.
한솔이 얼마나 노력을 해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 알기에-.
“이리 와.”
신우가 한솔을 부르자 한솔이 반색을 하며 신우에게 다가가 안겼다.
“오랜만이라 조절이 잘 안될 것 같은데.”
알파의 손이 오메가의 엉덩이를 가볍게 주무른다. 한솔의 얼굴이 기대감에 발긋해졌다.
“다섯 대만 더 때려도 될까?”
“더…?”
“응. 만지니까 욕심이 나네.”
아니,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당연히 된다 하지….’
한솔은 신우의 목을 꼬옥 끌어안고 부끄러운 것처럼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신우가 한솔의 귓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혼자 몸을 일으켰다. 한솔이 열심히 내려놓은 바지춤도 추스르고-솔직히 조금 아쉬웠다. 제 몸에 넣기 무서워서 그렇지, 좋은 눈요깃거리였는데- 화장대에 있던 크림과 물티슈를 가져온다. 물티슈로 한솔의 얼굴부터 닦아 준 다음, 엎드리도록 하는데 기대감에 심장이 콩콩 뛰었다.
“숫자는 안 세도 되니까 너무 아프면 말해.”
“응.”
하얀 엉덩이에 차가운 크림을 묻히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한솔이 자꾸 뒤를 돌아보려 했다. 크림을 펴 바르던 신우가 그런 한솔을 잘 달래 다시 눕힌다. 잠옷 상의 아래로 통통하게 도드라진 둔부는 귀엽기까지 하다. 유일하게 한솔의 몸에서 근육보다 살집이 더 많은 부위였다. 음, 유일은 아닌가. 가슴도 좀… 그런 편이지. 아무래도.
아무튼 손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착 달라붙는 고운 피부를 어루만지며 한솔의 긴장을 푸는 데 집중했다. 손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해 자신의 손은 물티슈로 닦아 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피는 것으로 근육을 달군다. 한솔이 괜스레 신우의 허벅지를 앙 깨물었다. 그가 낮게 웃었다.
“오랜만이라 긴장했어?”
“으응… 흣!”
짝-!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매가 떨어졌다. 깜짝 놀라서 다시 얼굴을 숨기니 신우의 손이 한솔의 얼굴을 다정히 어루만져 주었다. 한솔이 아프다고 손바닥에 얼굴을 부비며 어리광을 피우자 엄지로 가만가만 눈가를 쓸어 주며 한솔을 달랬다. 그리고 다시,
짜악!
“읏!”
이번에는 반대쪽에 짜릿한 충격이 번졌다.
‘불나는 것 같아….’
확실히 예전보다 강도가 세진 듯한 느낌이 든다. 층층이 쌓여 가는 아픔에 한솔이 몽롱한 눈빛을 했다. 잠깐 멈춰서 달래 주는 느낌도 좋고 한 번에 세대를 연속으로 때리는 무자비함도 좋았다. 한솔은 열 번째로 떨어지는 매에 자신도 모르게 참았던 호흡을 터트리며 숨을 헐떡였다. 신우가 한솔의 몸을 일으켜 안는다.
“잘 참았네. 예쁘다-.”
으응… 너무 좋아….
한솔이 더해 달라는 의미로 몸을 들썩이자 신우가 작게 웃으며 한솔의 등을 토닥였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을 시작했다. 아예 신우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한솔 탓에 바쁜 아침 시간을 거의 욕실에서 쓰기까지 했다.
그리고 간악한 대학원에 신우를 뺏기고 오전 연습 겸 온 발레 아카데미.
『헤이, 한솔! 한솔 엄청 유명해졌더라!』
『네?』
입단하기 전에 한솔에게 코르드로서 자신을 만드는 법을 알려 준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한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것 봐! 한솔 맞지?』
학원 쌤이 보여 주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니 거기엔 익숙한 인스타 피드가 보였다. 바로, 한솔 자신이 올린 피드였다.
윤건이 휴가 동안 브이로그 촬영을 부탁해서 한솔은 틈틈이 촬영을 했었다. 그걸 런던으로 돌아와 확인을 해 보니 꽤 재밌는 사진들이 많았다.
그래서 윤건에게 보내는 김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스티커 처리하고 인스타에 올렸었는데….
‘이게 그렇게 인기가 많을 줄은-.’
며칠 사이에 또 뻥튀기가 되어 있는 좋아요 수를 보며 한솔이 볼을 긁적였다. 덩달아 팔로우 수도 좀 무섭게 뛰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평소보다 반응이 격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한솔은 내심 ‘요주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댓글들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발레 팬도 솜이 팬도 아닌 ‘그래서 종종 등장하는 저 하관 미남의 정체는 무엇인가’에 심취해 있는 자칭 탐정들이었다.
‘일상이랑 분리해야 되나….’
고민을 하던 한솔은 바 동작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다음 작품으로 예정되어 있는 캐스팅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감독에게 ‘이 역할을 주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네오클래식 작품 ‘주얼스’의 ‘루비’ 역이었다.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얼을 탈 뻔했던 것이 솜이가 화분을 와장창 깨는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좋아하는 화분을 하나 잃었지만 감독에게 어버버한 놈으로 찍히는 것보단 낫지, 응.
이번에도 지옥의 오디션 일정이 있겠지만, 그냥 뭐든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발레단 규모가 큰 만큼 레퍼토리도 다양하고 기회도 많았다. 한솔은 충분히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비록, 아직 팬들에게 완벽히 인정받은 것은 아니지만 무사히 새 시즌 첫 공연으로 ‘루비’ 역을 소화해 내고 또 다른 공연을 준비하던 와중 다가온 겨울-.
한솔은 가장 친한 친구의 부상 소식을 들었다. 그의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다.
“솜아 갔다 올게.”
결국, 솜이를 애견호텔에 맡기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약 1년 반만의 귀국이었다.
“뭘 그렇게 죽상을 쓰고 있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기사님에게 짐을 맡기고 달려온 병원.
한솔은 눈물 한 바가지를 예약하고 달려왔는데 절친이란 애는 호화로운 침대에 방만하게 누운 자세로 빨간딱지가 붙은 영화를 보며 감자칩을 요란하게 씹고 있었다.
와그작!
기가 찼다.
주인공들의 베드 신이 나오는 장면에서 ‘오-’ 하는 은혜를 보다 못해 티비를 가리고 선 한솔이 은혜의 손에서 감자칩을 홱 뺏어 들었다. 은혜가 새로 사 줄 것도 아니면서 왜 뺏어 가냐고 구시렁거린다. 한솔은 전부 무시한 채로 병문안용으로 사 온 과일 바구니와 감자칩 봉지를 탁자에 쿵, 내려놨다. 항상 깔끔하게 살던 애답지 않게 방 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한솔은 한숨을 삼키고 의자를 끌고 와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뭐래?”
“뭐… 매번 그랬듯이 염증 폭발. 발목 염좌. 기타 등등?”
“수술…해야 되는 거야?”
한솔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묻자 은혜는 어쩐지 본인 일이면서 마치 남 일인 것처럼 무료한 얼굴로 말했다.
“최악의 상황이면? 일단 지켜보자던데. 의사들은 항상 그렇잖아.”
그 말을 듣고 한솔은 밖에서 만난 은혜의 알파, 어느덧 성큼 어른이 돼 버린 손아영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번아웃인 것 같아요.
은혜는 말했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어.”
한솔은 깁스를 하고 있는 은혜의 발을 보다가 친구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나도 그냥 너처럼 해외나 나갈 걸 그랬나?”
그녀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귓가에서 그 목소리들이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집안에 돈이 많대.
-하긴, 안 그러면 어떻게 벌써 솔리스트를 달겠어?
-오메가 주제에. 쟤가 리프트 하면 불안해 죽겠어. 저러다 한번 크게 떨어트리는 건 아닌가 몰라.
조금씩 지쳐 가던 나날이었다.
현실을 잊기 위해 연습에 더 매진했다. 더 높이 뛰기 위해, 더 높이 들기 위해 그렇게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발목 부상.
기약 없는 치료와 재활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발레와 무대를 사랑했던 마음에 금이 갔다. 찬란했던 열정이 잿빛으로 물들어 간다. 모든 게 다 부질없이 휘날렸다….
한솔은 은혜의 손을 꽉 잡았다.
“해외도 비슷해.”
“…뭐?”
“대체 그놈의 성별이 뭐라고, 다들 난리라니까. 오메가라고 숙덕거리고. 그럴 시간에 연습이라도 한 시간 더하지.”
최은혜는 입술을 비죽이는 이한솔을 돌아본다. 항상, 해맑게 웃고 있어서 몰랐다. 누구보다 단단하게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 같은 한솔이라서, 그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솔이 은혜의 떨리는 눈을 마주하며 활짝 웃었다.
“그래도 그냥 하는 거지, 뭐. 좋아하니까!”
그 미소가, 눈부시게 빛났다.
“네가 예전에 나한테 했던 말 생각나?”
“…무슨 말?”
“이걸 이렇게 오래 한 건 내 덕분이라 했잖아. 설마 벌써 까먹었어?”
“내가 그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했다고?”
“그랬다니까!”
은혜가 질색을 하자 한솔이 확실히 기억한다면서 침대를 팡팡 내리쳤다.
“나도 그래.”
“…….”
“나도 이거 이렇게 오래 할 수 있었던 거, 발레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거 다 네 덕분이야.”
그리고 한솔은 한 박자 늦게 비밀을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그런데 은혜야. 그거 알아? 너 지금 엄청 분해 보여.”
어른이 된 소년이 다정하게 웃었다.
“사실, 아직 하고 싶은 거지? 발레.”
최은혜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한솔 나가.”
“앗, 폭력 반대! 베개는 잘못이 없어!”
“나가. 나 환자거든? 지금 환자의 심신을 어지럽히고 있어, 너.”
은혜는 등받이로 쓰고 있던 베개를 들어 한솔에게 던졌다. 한솔은 날아오는 베개를 받아 품에 안고는 자신은 평화주의자라며 말했다.
“아오, 진짜. 너 유신우가 여기 오는데 뭐라 안 하디?”
“응? 신우가 왜?”
“그 자식 예전에 나한테 네 허리 그만 주무르라고 한 거 못 들었냐? 어? 내가 니 허리를 주무르긴 뭘 주물러! 피루엣 서포트하는 것만 해도 바빠 죽겠는데, 하….”
한솔이 마구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신우가…?”
“그래!”
“진짜 신우가 그랬어…?”
“그랬다니… 야, 너 얼굴은 왜 붉혀-?”
한솔이 상상의 나래에 빠져서 베개에 얼굴을 폭 파묻자 은혜가 ‘망할 커퀴 놈들’이라며 질색을 했다.
“됐으니까, 나가!”
한솔은 결국 방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방문을 닫기 전에 문 틈새 사이로 얼굴을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선 말했다.
“차이콥스키 발레 모음집 가져다줄까?”
퍽-!
베개가 날아왔다. 한솔은 벽에 부딪힌 베개를 피해 ‘이크’ 하고선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그는 병실 이름표에 새겨진 ‘최은혜’ 석 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어쩐지 그 등이 유난히 힘이 없어 보였다.
“만나고 왔어?”
병원 근처에 있는 작은 놀이터. 노는 아이들이 없어 쓸쓸한 그곳에서 그네 하나가 끼익 끼익 소리를 낸다. 그네에 앉아 발로 모래를 밀며 장난을 치던 한솔은 머리 위로 그늘이 지는 모습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응….”
“심각하대?”
“아직 모르겠나 봐. 근데 진짜 당장 엇나간 거면 바로 수술했을 것 같아.”
“…그래.”
찬 공기를 맞아 홍조가 생긴 한솔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싼 신우가 말했다.
“가자. 한식집 잡아 놨어.”
오메가 전용 병실이다 보니 신우는 면회가 안 돼서 다른 일을 보고 있기로 했다. 말로는 본사에 가 봐야 할 일이 있다곤 하지만, 한창 런던지사에서 새 일에 적응하고 있을 때인데 따라와 준 게 고마워서 한솔은 신우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두 사람은 곧 차에 탔다.
자주 오던 한식집에 도착하자 이미 상이 준비돼 있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알파가 조금 식어도 좋으니 되도록 한 상에 준비해 달라고 요청한 까닭이었다.
“입맛 없어도 조금만 먹자.”
“응….”
따뜻한 푸딩처럼 탱글탱글하고 부드러운 계란찜이 한솔의 앞에 놓였다. 한솔이 배가 아프거나 식욕이 없을 때마다 유모가 해 주던 것을 그대로 보고 배운 신우는 본인이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한솔이 입맛 없어 할 때마다 꼭 이곳에 데려와 밥을 먹였다. 그는 이제 후식으로 뭐가 나올지도 예상이 갔다. 살짝 얼린 홍시와 매실차.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후식 메뉴에 한솔이 소리 없이 웃었다. 조금 침울했던 기분이 많이 나아진 느낌이다.
“해선형 잘 지낸대?”
“3년 안에 안 돌아오면 확 퇴사해 버릴 거라던데.”
“헉….”
잘 못 지내나 보다… 하긴 신우가 본사에서 맡던 일을 혼자 처리하고 있으니까. 사실 5년이나 시간을 주는 것도 해선형이 능력 있는 대인배라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한솔이 숙연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자 신우가 자신의 몫으로 나온 홍시를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한솔은 얼린 홍시를 한 입 떠먹었다. 달고 맛있었다.
“솔아.”
그래서 알파가 그를 불렀을 때 한솔은 작은 스푼을 입에 문 상태였다. 더 먹으면 배탈이 날 것 같은데… 한 입만 더 먹을까? 고민하던 한솔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신우가 말했다.
“청남동 개발 건은 말해 줬지.”
“응? 응.”
“거기에 아트 센터가 건립될 예정이야.”
한솔은 잠시 버퍼링이 걸렸다.
“아트, 센터…?”
“응. 지상 5층, 지하 1층 규모. 전문예술 특화 공연장을 갖춘 복합 문화 공연 시설을 목표로 하고 있어. 완공은 3년 정도 더 걸릴 예정이고.”
그제야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한솔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무슨 사업해? 공연장 짓는데 3년밖에 안 걸려?”
본인과 연관되어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모습에 신우가 난감한 얼굴로 ‘음…’ 한다.
나름 서프라이즈였는데.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처음 건의했던 건 6년 전이었어. 설계 공모받고 지자체랑 협의해서 총사업비 승인받은 건 몇 년 안 됐고….”
착공도 2년 전이라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신우 탓에 한솔은 더욱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다.
‘6년…? 6년 전이면 우리 고2 때인데…?’
자신이 술 마시고 사고치고 다닐 때 이 알파는 대체 무얼 하고 다녔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이러니까 양가 어른들이 우릴 동갑으로 안 보지….
매번 신우의 행보도 놀라웠는데 이번엔 뭘 새로 지었다 하니까 그냥 현실감이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장난감 블록 쌓기도 아니고… 한솔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머리 위로 미니 전구를 반짝 켰다.
“그럼 거기서 공연 볼 수 있는 거네?”
“그렇지.”
“와아! 발레도 가능해? 했으면 좋겠다….”
한솔이 박수를 짝, 치고 말하자 신우가 답했다.
“물론, 가능해. 네가 할 수도 있고.”
…응?
“…?!”
한솔이 입술을 헤, 벌린 채 넋을 놓자 신우가 숟가락으로 홍시를 작게 잘라 한솔의 입 속에 쏙 넣어 준다. 우물우물- 본능적으로 입 안에 든 것을 씹던 한솔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래는 네가 필요할 때 쓰거나 아니면 대여로 내놓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건데 바꾼 거야. 그러면서 덩달아 규모도 커진 거고.”
“…….”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
“사람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무대가.”
비록 한솔은 연영과 선배들과 같은 진로를 밟지는 않았지만 워크숍이나 방학 기간의 짧은 견학을 통해 공연계를 보는 시야가 많이 넓어졌다. 그래서 후원도 시작하고 재능 기부 활동도 열심히 다니면서 그때의 소감을 종종 신우에게 말하고는 했다. 그러나 정작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야 자신은 일개 개인일 뿐이니까… 한솔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솔아, 언제까지 그 발레단에만 있을 수 없는 건 알지.”
“…응.”
“한계선이 있는 곳이잖아. 그리고 우리-.”
신우가 잠시 말을 끊고는 드물게 한 박자 쉬고선 말했다.
“…결혼 준비도 해야 하고.”
진지하게 신우의 말을 듣고 있던 한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신우가 멋쩍게 시선을 피한다. 그의 눈가에 열이 오른 모습이 보였다. 왜, 왜 이렇게 덥지? 덩달아 얼굴이 빨개진 한솔이 반대쪽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알파가 헛기침을 하고선 말했다.
“아무튼… 외국에 오래 있을 상황은 아니니까 내후년 정도엔 국내 발레단으로 이적을 했으면 좋겠어.”
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원하는 거 있으면 생각해 두라고 하셨으니까 한번 생각해 보고.”
“괜찮은데….”
“이거 아버지 표 백지 수표야. 자주 오는 기회 아니니까 잘 생각해 봐.”
한 번 물꼬를 터서 그런지 그날의 대화는 대부분 그렇게 흘러갔다. 아주 어릴 때부터 ‘커서 결혼은 신우랑 하겠지.’ 하고 생각하고는 했지만 막상 그때가 다가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설레면서도 막막하달까. 약간은 두려운 기분도 든다. 그건 어쩌면 지금의 일상이 너무나 소중해서 아주 만약에 이게 어긋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서 오는 두려움일지도 몰랐다.
우리가 행복할 거라 믿지만 그게 찰나가 아닌 영원이길 바란다.
한솔은 찻물의 표면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어쩐지 그 모습에서 파도치는 절벽의 뒷면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
“학원이나 차릴까?”
없는 손재주로 열심히 사과를 깎던 한솔이 ‘이건 또 뭔 소리야?’ 하는 얼굴로 은혜를 바라봤다. 은혜는 포크를 내려놓더니 손바닥에 턱을 괴고선 말했다.
“요즘 전공 아니어도 취미 발레 많이들 한대. 분기별로 작품 하나씩 올리면….”
“발란스 못 잡고 피루엣 돌다가 넘어지고 발 포지션도 틀릴 텐데?”
“…역시, 안 되겠지?”
“응. 네 성격엔 분명 그거 가만 못 둬. 클레임 왕창 받다가 때려치울걸.”
한솔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은혜가 앓는 소리를 냈다.
“수술 안 해도 된다고 했다며. 재활 무서워서 그래?”
“뭐… 그런 것도 있고. 그냥….”
“…….”
“…돌아가기가 싫네.”
흠칫 놀라 은혜를 돌아본다. 이렇게 자신감 없는 최은혜는 처음이었다.
“너랑 학원 다니면서 할 때는 조금 분하기는 했어도 재밌었는데.”
포크를 빙빙 돌린 은혜가 본래보다 반절은 작아진 것 같은 사과를 콕 찍었다. 아삭- 과육을 한 입 베어 문 그녀는 과거를 회상했다. 크리스마스의 호두까기. 환상적이었지.
“아, 맞다. 너 곧 이형질 센터 검진 있다며.”
“응. 출국하기 전에 방문하라고 해서 내일 오후쯤 가 보려고.”
“유신우 꼭 데려가라. 거기가 워낙 쫌….”
은혜는 이마를 찌푸리더니 말했다.
“그렇잖아. 훑어보는 시선도 기분 나쁘고.”
…그래, 은혜 말대로 원래 이런 곳이긴 했지만-.
“미혼이시라고요.”
“네.”
“관계 중이신 알파분은 계시고요.”
“…네.”
한솔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더니 박사가 차트에 뭔가를 기록했다.
“각인을 하셨다고 했는데 해당 알파 분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음… 사이는 좋은데요….”
“아뇨, 그게 아니라-.”
투명한 렌즈 알 너머로 뭔가 불쾌한 빛이 서린 눈동자가 반짝였다.
“잠자리는 어떠냐고 묻는 겁니다. 횟수는 어떤지, 자주 하는지, 오래 머무는지- 기타 등등이요.”
“…….”
한솔은 침묵했다. 원래도 이런 걸 물었던가…?
이형질 센터. 이형질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전문의 이상만 근무할 수 있는 곳으로 정부 기관 중 하나.
형질인이라면 무조건 3년에 한 번씩 이곳을 방문해서 검진을 받아야 했는데 여기엔 알파도 오메가도 전부 포함된다.
유달리 오메가 취급이 안 좋은 기관이란 건 한솔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뭔가 이 박사는 그중에서도 특히 질이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한솔을 담당해 주던 이가 아버지의 입김이 닿아서 그런지 평범하게 유능했기 때문일까.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필 담당의가 이번에 휴가를 간 탓에 임시로 배정받은 이이긴 하지만-.
한솔은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조금 어울려 주기로 했다.
“그런 건… 대답하기 곤란한데요….”
여기서 너무 단호하게 부정해 버리면 안 건들 것 같으니까 조금 머뭇거려 주는 게 포인트였다.
사생활까지 다 불어 버리는 건 한솔이 원하는 바도 아닌 데다가 지금 캐릭터성이랑 맞지도 않으니 배제했다. 교육 잘 받은 명문가 집안 오메가라고 소개받았을 텐데 그런 거까지 다 불어 버리면 너무 멍청해 보이잖아.
한솔이 명품 백을 꾸우욱 누르며 시선을 내리자 박사가 한 걸음 물러났다. 꽤 뱀 같은 자였다.
“아, 오해 마세요. 검진을 위해 필요한 절차였을 뿐입니다. 저는 오늘 한솔 님을 처음 뵌 탓에 아직 자료가 부족하거든요.”
“네에….”
전담자가 인수인계를 못 해 줬다 하더라도 한솔의 기본 진료 기록 정도는 다 서버에 저장돼 있을 텐데. 말은 번지르르한데 참 실속이 없는 대화였다.
“그럼, 아직 상담이 부담스러우시다면 기본 검사부터 진행하도록 할게요.”
앗… 이런. 이대로 도망치는 건가?!
한솔이 아쉬운 마음에 애초에 이럴 거면 건들질 말라고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날은 평범하게 기본 검사만 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그다음 날 방문 센터를 방문했을 때도 한솔은 특별히 담당의의 교체를 요청하지 않았다.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한솔 님.”
“네, 안녕하세요.”
“어제는 관계 잘하셨을까요?”
“네?”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삐끗하면서 되물었다.
“담당의로서 환자의 상태를 아는 건 가장 중요한 사항이거든요. 앞으로 있을 검사들에 있어 꼭 필요한 부분이니 너무 부끄러워 마시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검진의 일부니깐요.”
박사가 의사로서의 역할과 전문 지식을 내세우며 빙긋 웃었다. 한솔은 또르르, 눈을 굴리다가 ‘네에….’ 하고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많이 부끄러워하는 모습과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대가 한솔이 덫에 걸렸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전부 연기였기 때문에 한솔의 머릿속은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인간이 어떻게 아직도 의사 면허를 유지하고 있는 거지?’
한솔은 순수하게 그게 가장 궁금했다.
“다음 주면 출국을 하셔야 한다고 들어서, 검진 일정이 좀 빽빽하게 잡혔어요. 하지만, 한솔 님이라면 잘 따라오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네에.”
저번에 한솔이 한 번 빠져나간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박사는 묘하게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를 사용했다. 상대에게 믿음을 주는 것처럼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실망할 것이라는 예고.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의 예시였다.
“좋아요. 그럼 먼저 교육 영상부터 시청하실게요.”
“교육 영상이요?”
“오메가시잖아요. 오메가분들은 항상 본인이 어떤 검진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하시는 경우가 많아서 직접 안내해 드리고 있어요.”
한솔은 슬슬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이 사람, 가관이었다. 성인인 한솔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의 사생활은 어찌나 궁금해하는지… 며칠간 한솔이 박사와 상담을 가진 뒤에 파악한 사실은 이 박사는 관음증 환자라는 것이다.
「변태 : 한솔 님, 잘 주무셨을까요?」
「변태 : 오늘 아침은 무얼 드셨을까요? 식사 불균형은 몸에 좋지 않으니 제가 보내 드린 성분표에 맞춰 드세요.」
한솔이 며칠간 고분고분 그의 개소리를 계속 들어 주니 이 정도면 완전히 넘어왔다고 생각했는지 개인 번호로 문자까지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공익을 위해 쓰레기는 치워야 되겠지?’
한솔은 어떻게 이 쓰레기를 치울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오늘은 대망의 본 검진이 있는 날이다. 치우려면 오늘 치워야 된다는 건데….
상담을 마친 한솔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박사가 회선을 통해 누군가를 호출했다. 똑똑- 곧,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페로몬 긴장도를 낮추는 데 도움 주실 분입니다. 열성 오메가라 부담도 안 되실 거예요. 20분 뒤에 호출해 드릴 테니 잠시 같이 이야기라도 나누고 계세요.”
박사가 뭐라고 얘기를 하는데 하나도 안 들렸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지 바닥에 시선을 두고 들어오던 이도 쩡 하니 굳어 버린다.
정하윤. 근 3년 만의 만남이었다.
“…….”
“…….”
침묵의 휴게실.
약으로 페로몬 조정이 쉽지 않은 오메가는 어떤 검사를 하더라도 항상 그 페로몬 탓에 값이 뚜렷하게 나오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페로몬 수치가 낮은 일반이나 열성인 경우라면 어느 정도 자체 보정이 가능하지만 우성인 경우에는 아예 값 차체가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타입의 형질인이면서 페로몬 수치가 낮은 열성 오메가의 도움을 받고는 했다.
“…흠.”
그런데 거기서 아는 얼굴을 만날 줄은….
‘오메가 같긴 했는데 거의 티가 안 난 건 열성이어서였구나….’
그제야 풀린 수수께끼에 한솔은 납득했다.
‘그럼 왜 초커가 없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시 골몰하던 한솔은 종료 5분 전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파 반대편에 앉아 있던 하윤도 몸을 움찔 떤다. 잠시 그런 동기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20분은 채우는 게 좋긴 하지만… 5분 정도야 괜찮겠지. 피차 서로 불편하기만 하니까.
그래서 그대로 몸을 돌리려는데 그런 한솔을 붙잡는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담당의 바꾸는 게 어때…요….”
자신에게 말을 걸 거라곤 예상하지 못해서 그는 꽤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 사람… 꽤 유명한 대학 병원에 있다가 거의 방출 당한 거라는 말이 있어…요. VIP 후원받는 우성 오메가를 건드리는 바람에…요.”
“…….”
“소, 문이긴 하지만… 평소 행실도 그렇고 클레임도 제일 많이 들어오거든, 요.”
“…….”
“그…런데 빽이 있는지 잘리지는 않아서… 그, 아무튼….”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쭈물거리는 하윤을 잠시 내려다보던 한솔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소한 몸이 흠칫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오랜만이네.”
“…….”
“거의, 3년 만인가?”
…머뭇거리던 하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나한테 할 말 없어?”
한솔이 하윤을 빤히 바라보며 묻자 하윤이 몹시 초조하게 손톱 밑 거스러미를 뜯었다. 그러고는 이내 체념한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해.”
“…….”
“잘못했어….”
진짜 고양이 같네.
한솔은 상대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권정우가 야생 삵에 가까운 고양잇과 맹수 같은 느낌이라면 정하윤은 집고양이… 그것도 버림받아서 사람한테 경계심이 높은 집고양이 같은 기분이랄까.
“너한테 사과 한 번 받기 진짜 힘들다.”
한솔이 부러 툭, 내뱉듯이 말하자 하윤이 경직된 모습으로 미안하다고 웅얼거렸다. 얘는 2년 사이에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졌어? 분명 사과받을 사람은 자신인데 뭔가 되려 자신이 괴롭히는 느낌이 든다. 흠… 나중에 신우한테 한 번 써 볼까. 신우는 괴롭히는 걸 좋아하니까 분명 좋아할 것 같다.
“그래서-.”
“…….”
“왜 못 나왔던 건데?”
내가 원래 이렇게 뒤끝 긴 사람이 아닌데- 한솔은 신우가 들었다면 한동안 말없이 지그시 바라봤을 생각을 하며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한참 전에 다 끝난 일이지만, 교정에 심어진 벚꽃나무만 봐도 설레던 새내기 때라 그런지 그때의 선뜩했던 기분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이유나 들어보자 싶었던 건데-.
“그날, 갑자기 히, 트가 와서….”
아-.
“…보다시피 열성이거든. 주기도 없고… 그때도 3년 만에 온 거라 예상을 못 했어….”
“…….”
“변명인 거 알아… 그런데 거짓말은 아니야. 그 뒤로 한 달은 밖에 못 나가서 학고까지 맞았는걸….”
오메가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주제에 한솔은 조금 난감해져 버렸다. 파트너가 있다면 교합이나 페로몬 샤워를 통해 길어도 일주일이면 벗어날 수 있지만 초커가 없는 걸 보아 정하윤은 파트너도 없는 것 같았다.
“…유일하게 잘하는 건데 나도 생각 없이 회피할 정도로 진심이 없지는 않아.”
마지막은 그래도 자존심인지 좀 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가 하윤은 한솔과 눈을 마주치고는 후다닥 시선을 피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나? 왜 이렇게 눈을 못 마주치지.
“너-.”
“…….”
“나 싫어했지.”
그래서 한솔은 심술궂은 마음에 옛날 일을 들추며 말했다. 하윤이 펄쩍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 내가 언제?!”
“…음? 싫어하지 않았어?”
너무 예전 일이라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한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하윤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건 그냥 부…!”
“부…?”
“부…….”
“…?”
“…부러워서….”
하윤은 끝내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에?”
한솔도 덩달아 얼빠진 얼굴이 되고 만다.
“나도 너처럼… 상냥하고 잘 웃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뭐든 열정적으로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
“…연기가 아니면 잘 모르겠어. 그냥… 사람들은 내 빈 껍데기만 보는 것 같고.”
흠칫-.
그는 이따금 우울이 자신을 파고들 때면 종종 하던 생각을 남도 하고 있다는 말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
“…….”
분위기는 다시 급속도로 어색해졌다. 이유도 들었고 수수께끼도 전부 풀린 마당에 서로 더할 말이 없긴 했지만, 어쩐지 삶의 방식이 비슷해 보이는 상대에게 막연한 궁금증이 생겼다. 아직 호감이라고 하기엔 무리지만 적어도 손을 내밀어 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궁금증.
“여기는 알바로 있는 거야?”
그래서 휴학을 아무리 오래 했더라도 제적을 안 당하려면 지금쯤 졸업은 했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물었던 건데- 한솔은 급속도로 어두워진 하윤의 얼굴을 보고 입을 합 다물었다.
“…미안. 내가 혹시 뭐 잘못 물었어?”
“아니… 음, 나 사실 여기서 살거든.”
뭐…?
-띠리링!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타이밍에 알람이 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시계로 향했다.
똑똑,
“이한솔 님, 검사실로 이동하실게요.”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얼굴이 된 하윤이 한솔을 휙 돌아본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담당의 교체하는 게 어때…? 너는 우성이니까 바꿔 달라 하면 바꿔 줄 거야.”
“잠깐, 진정해 봐. 단순히 소문 때문에 그래?”
“…….”
똑똑,
“이한솔 님?”
“네, 잠시만요.”
원래도 소각해 버릴 쓰레기긴 했지만, 하윤의 불편한 기색에서 뭔가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한솔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하자.”
“…….”
“내가 곧 출국해야 하는 상황이라 오늘 아니면 시간이 없어. 원래 담당의는 저분이 아닌데 임시로 배정받은 거거든. 계속 상담을 진행하기도 했고, 지금 센터에 다른 선생님들 일정이 꽉 차서 저분밖에 없다 들었어.”
“…아.”
“그러니까 일단 들어갈게. 대신 네가 데려와 줬으면 좋겠어.”
“누굴…?”
“내 알파.”
“…….”
“본 적 있지? 우리 MT 갔을 때.”
하윤이 홀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대기실에 있을 거야. 거기 있겠다 했으니까. 여긴 오메가 구역이라 원래는 못 들어오지만 우린 각인 되어 있어서 요청하면 들어올 수 있을 거라 했거든. 나 검사해야 되니까 페로몬 수치 들쭉날쭉할까 봐 안 오긴 했는데….”
한솔은 문 쪽을 힐긋거리며 말했다.
“…뭔 일이 난다면 아마 기본 검사 끝나고 나서부터겠지.”
평범한 진료의 일부분일 뿐이지만 아무래도 이런 부류의 검사의 경우 오메가인 한솔은 뒤쪽에 기기를 넣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그냥 검진의 일부분일 뿐이니 특별히 신경이 쓰이거나 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손버릇이 나쁜 사람이면 이야기가 달랐다. ‘정당한’ 절차를 밟고 보호자가 오는 것뿐이잖아? 아무 일 없으면 그냥 검진 잘 받고 끝내면 되는 거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부탁해도 될까?”
한솔은 하윤을 다시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커리어뿐만 아니라 인생을 걸어야 할지도.
***
“이한솔 님, 채혈 마치고 수면실로 이동하실게요.”
피를 뽑기 위해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한솔이 물었다.
“간호사님, 보호자가 오기로 했는데 수면실에 같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각인 상대이신 거죠?”
“네.”
“네, 그럼 가능하시긴 한데 이 구역이 워낙 복잡해서 찾으시는 데 꽤 걸리실 거예요.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한 타임 늦춰 드릴까요?”
친절한 물음에 한솔이 웃는 얼굴로 정중히 거절했다.
“아니요, 그건 괜찮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각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로맨틱한 불치병’쯤 되지만, 형질인에게 있어 각인이란 일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삶의 중대한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보통 정략결혼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에는 서로 각인이 되지 않기 위해 무척 조심하고는 했다. 한 번 각인이 돼 버리면 중절 수술을 하지 않는 이상 끊는 게 불가능한데 이 중절 수술이 매우 위험한 수술이기도 했고 필연적으로 페로몬적 불구가 되기 때문에 애초에 불치병이란 인식이 강했다.
물론, 두 사람에겐 전혀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각인 후, 자신의 수면 페로몬 패턴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솔은 제 발로 수면실로 향했다. 소지품을 보관하기 전에 신우에게 문자는 보내 놨지만 그 뒤로 줄곧 검사를 받느라 확인할 새가 없었다. 한솔은 암막 커튼이 꼼꼼하게 쳐진 수면실 내부와 환한 복도를 번갈아 바라봤다.
문이 닫히기 전, 사람들로 복잡다단한 복도에는 장신의 알파로 추정되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
긴 복도. 알싸한 소독약 냄새.
알파는 조금 전과 달리 사람의 흔적이 없는 낯선 장소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춘다. 분명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움직인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곳에 서 있었다. …이런. 잠시 곤란함에 혀를 찬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답장이 없는 연인이 남긴 문자를 다시 읽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저기요…!”
시선을 한참 아래로 내려야 보이는 이가 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더니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낯선 이의 시선을 받는 일은 흔하지만 제대로 눈을 마주쳐 오거나 직접 말을 거는 일은 드물었던 탓에 신우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시죠.”
일단 그를 부른 것은 확실해 보여 그렇게 되묻자 하얀 탈색 머리가 움찔 떨렸다.
“그… 한솔이가 부탁해서 왔는데요….”
아-.
솔이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쪽이 길이 많이 복잡해서 길 안내 좀 부탁했어!
계속 기다려도 오지 않길래 먼저 일어났는데 아무래도 서로 길이 엇갈린 듯싶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저도 이쪽 구역으로 오는 건 처음이라….”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안내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알파인 신우가 오메가 구역으로 가기 위해선 확인 절차가 필요했기 때문에 먼저 데스크로 향했다. 그런데 일이 바쁜 건지, 아니면 직원들 휴식 시간인 건지 일 처리가 매우, 매우 늦어졌다.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초조한 낯으로 서 있던 하윤은 안쪽에서 데스크 직원이 나오자 안색을 밝혔다.
“죄송합니다. 좀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네요.”
…피곤에 찌든 얼굴의 직원이 그대로 돌아가 버리자 하윤은 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어쩌지…? 흰 가운과 은테 안경의 존재를 떠올린 하윤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때, 가운을 입은 다른 노의사가 데스크 뒤쪽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하윤의 눈빛에 작은 반짝임이 돌았다.
“저기, 선생님-.”
“음?”
조심스럽게 노의사에게 다가간 하윤이 눈꼬리를 최대한 추욱 늘어뜨리고 정중하지만 머뭇거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노의사를 불렀다. 그리고 곤란함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노의사를 바라본다.
“갑자기 죄송합니다… 저어, 그… 환자분 보호자께서 오셨는데 각인 상대시거든요. 우성이라 변동 폭이 커서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이 있을까요?”
“아아, 그거라면 김 선생이 처리해 주지 않나? 잠시만 기다려 봐요.”
노의사가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아까 그 다크서클 직원이 아닌 다른 직원이 나와 두 사람을 응대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직원이 돌려준 등록증을 챙기고 돌아서자 평소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지금 가면 수면 검사 시간에는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윤이 발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이쪽에서 부탁을 하긴 했지만 상대가 정도 이상으로 서두르는 기색에 알파의 감이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는 평소와 달리 빠른 보폭으로 하윤을 따랐다.
“잠시만요- 수면실은 담당 간호사님이 계셔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하윤은 차트를 들고 있는 간호사를 발견하더니 그쪽으로 다가갔다.
“김 간호사님…!”
“어, 하윤 씨. 오후 타임 끝났어요?”
“아뇨, 아직… 아, 이게 아니라-. 아까 검진하러 오신 분 알파분께서 오셨는데요.”
“음? 아-, 그 3번 수면실 그분이구나.”
누가 봐도 알파로 보이는 신우를 확인한 간호사가 의아한 얼굴을 해 보이다가 차트를 뒤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솔 님 보호자분 맞으시죠?”
“네.”
“잠시 확인 좀 할게요.”
다시 신우의 등록증을 받아 간 간호사가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하더니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래서 얼떨결에 하윤까지 간호사를 따라갔다. 수면실은 그 목적 탓인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외딴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비어 있는 방들은 커튼이 걷혀 있고 사용 중인 방들만 두꺼운 암막 커튼이 꼼꼼히 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장치는 건드시면 안 되고요. 되도록이면 페로몬 방출도 자제해 주세요. 결과값이 큰 폭으로 낙차가 생기면 재검사를 해야 할 수도 있거든요.”
주의점을 말해 준 간호사가 ‘3번 수면실’이라고 적힌 방의 키패드에 카드를 가져다 댄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내친김에 페로몬 농도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던 간호사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던 하윤도 간호사보다 한 발자국 늦게 방 안에 들어갔던 신우도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을 굳혔다.
“헉, 헉… 뭐….”
곤히 잠들어 있는 오메가.
그리고 원래는 발목까지 와야 했을 검진용 바지가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진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서 성기를 내놓은 채 헉헉거리며 자위를 하고 있던 남자가 깜짝 놀라 문 쪽을 돌아보는 모습이 보인다. 그 순간, 간호사의 조언을 되새길 새도 없이 우성 알파의 몸에서 강렬하게 페로몬이 터져 나왔다.
베타인 간호사는 느끼지 못했지만 오메가인 하윤은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알파가 표정이 전부 지워진 얼굴로 남자에게 다가가자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던 남자는 제 바지에 걸려 우당탕 뒤로 넘어졌다. 사람이 아니라 벌레, 아니 그 이하의 무생물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여기, CCTV 없습니까.”
그 꼴사나운 모습을 싸늘한 얼굴로 훑어본 신우가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세상 모르게 잠이 든 한솔의 옷차림을 정리해 주고 자신의 겉옷을 덮어 준 그는 오메가의 몸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 과정에서 팔과 목 근처에 연결되어 있던 의료 기기 선이 떨어져 나갔다. 잠시 한솔의 이마에 이마를 맞댄 알파가 심호흡을 한다. 화를 삭이는지 넓은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간호사님.”
“네? 아, 네. 있어요! 그런데… 그… 담당의만 확인할 수 있게 돼 있어서….”
알파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담당의.”
난방이 돌아가는 수면실 안에 쌩하니 찬 바람이 부는 듯했다.
“요청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까.”
“윗선에서 허가 나오면… 제가 지금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쪽에서 변호사가 올 테니 최대한 빠른 속도로 처리 부탁드립니다.”
그가 한솔의 몸을 조심스럽게 수면실 밖 의자에 앉혀 두고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천성 Chunsung
사업지원 본부장 유 신 우
tell. 010-XXXX-XXXX」
명함을 확인한 간호사가 사색이 돼서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미안해요. 혹시 잠깐만 한솔이 곁에 있어 줄 수 있을까요.”
어쩌다 보니 모든 상황을 지켜보게 된 하윤은 고개를 끄덕이곤 여전히 꿈나라 삼매경에 빠져 있는 한솔의 옆자리에 앉았다. 신우가 한 손으로 한솔의 눈가를 어루만지자 악몽을 꾸는지 설핏 찌푸려져 있던 이마가 곱게 퍼졌다.
“으응… 신우야….”
꿈속의 오메가도 무사히 알파를 만난 듯싶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기 어린 한숨을 흘렸다.
“…정말이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사람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뭐라 뭐라 굽신거리며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는 변호사와 하라고 선을 그은 그는 냉정한 얼굴로 선처는 없음을 통보했다. 그리고 또 몇 분 지나지 않아 정해선과 변호사가 도착했다. 그제야 신우는 한솔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눈을 뜬 한솔이 바쁘게 통화를 하고 있는 알파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어, 신우다-.”
신우는 더 자라며 한솔의 어깨를 토닥였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냉기가 뚝뚝 흐르는 알파의 조각 같은 얼굴을 감상하던 한솔은 평소보다 훨씬 진하게 흘러나오는 신우의 페로몬에 취해 웃다가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둑한 방 안이었다.
“흐암….”
한솔은 찌뿌둥한 몸을 길게 기지개를 켜며 풀었다. 웬 징그럽게 생긴 뱀이 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꿈을 꿨는데 미끌거리는 게 너무 기분 나빠서 어떻게 떼어 낼까 고민하던 찰나에 엄청 엄청 커다란 회색 늑대가 나타나 한 방에 뱀을 짜부라트렸다. 분명 한솔보다 훨씬 큰 맹수인데 무섭다는 생각은 안 들고 든든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겁도 없이 늑대의 잘생긴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커다란 몸에 폭삭 안기자 짐승이 그르릉거리며 웃었다. 웃는 게 꼭 신우를 닮았다. 너무 신기한 꿈이었다.
달칵-.
방문을 열고 나오자 여러 가지 서류들이 복잡하게 쌓인 거실 탁상만이 쓸쓸하게 한솔을 반기고 있었다. 한솔은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흔적을 보고 신우가 어디 갔나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어둑하게 불이 꺼진 복도의 끝 방-. 서재에서 어렴풋이 불이 새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그곳으로 향했다.
『글쎄요, 법만으로는 ‘처벌’이 조금 아쉽지 않을까 싶군요.』
작게 벌어진 틈새 사이로 간단한 일상 용어는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하는 독일어가 빠르게 흘러나왔다.
『그 의사 부친이, 대학 병원 원장이라 했던가요.』
낮고 부드러운 억양이었다.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는….
『의료 사고가 꽤 있었는데… 돈으로 덮었네요. 면허 없는 사람에게 메스 쥐여 주고 수술시키고. 이정도면 국민들도 충분히 분노하리라 생각하는데-.』
끼익-.
신우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문만 닫고 돌아가려던 한솔은 문에서 들리는 소리에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자, 도시의 야경을 발밑에 두고 통화를 하고 있던 남자가 멈칫한다.
“솔아?”
한솔은 자신을 귀신같이 눈치챈 신우 탓에 멋쩍게 웃었다. 방해 안 하려 했는데….
“일어났어?”
“응. 완전 꿀잠 잤어.”
그러면서 끼이익- 이번엔 문을 열고 들어가 신우의 품에 안긴다. 신우는 말없이 전화를 끊고 의자에 앉았다. 한솔이 자연스럽게 신우의 허벅지에 걸터앉고는 신기한 꿈을 꿨다며 조잘조잘거렸다. 한솔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던 알파가 멈칫했다.
“솔아.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응?”
그는 오늘 이형질 센터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말해 주었다. 마음 같아선 불과 일 년 전에 그런 일을 당했던 한솔에게 이런 소식을 알리고 싶진 않지만… 당사자인 본인이 모르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했다.
“헉… 뭐야. 그럼 소문이 다 진짜였나.”
한솔은 속으로 ‘쓰레기가 쓰레기 짓 했네’ 하고 생각하면서도 신우의 눈치를 보며 진짜 악질이라며 분통해 했다. 그리고 잠옷을 입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쓰레기 소각의 대가가 너무 크다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렇게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자신의 뺨을 꼬집어 오는 손길을 느꼈다. 한솔은 ‘으에?’ 하고 신우를 올려다봤다.
“이한솔.”
어, 어라…?
이거… 혼나는 분위기…?
한솔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분하고 걱정스러웠던 기색이 엄해진 걸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소문이라니.”
…앗….
“그게에….”
“…….”
“동기한테 들은 건데에….”
한솔은 눈치를 보며 진료실에서 있었던 박사의 태도와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냈던 일, 하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말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간호사가 한 타임 늦춰 준다는 걸 빨리 끝내고 싶어서 거절했다는 것까지 말했더니 신우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
“…잘못했어요….”
한솔은 주섬주섬 반성 모드를 취했다.
“솔아, 세상 모든 사람을 의심하라는 건 아니야. 그건 너한테도 무척 피곤한 일이잖아. 그리고 소문이란 게 항상 옳지도 않고. 대부분 과장되고 허황된 얘기니까.”
“응….”
“하지만, 분명 너에게 위험 신호가 있다고 느꼈으면 내게 말해 줬어야지. 이런 일이 일어난 건 결코 네 잘못이 아니지만, 나는 그냥… 네가 이런 일을 겪어야 했던 게 속상해. 물론, 당사자인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러니 되도록 앞으로는 그런 저급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피하라며 신우가 한솔의 뺨을 쓸어내렸다. 한솔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말한 신우가 한솔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동기가 그분이야? 나한테 메시지 보냈던.”
“아, 응! 대학 동기야. 어쩌다가 만났어.”
“그분 덕분에 절차도 빨리 밟았는데 상황이 복잡해서 그냥 인사만 드리고 나왔네.”
“그럼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가 내일 연락할게. 그런데… 혹시 오늘 일 때문에 출국 일정에 차질 생길까?”
“고소는 변호사 쪽에서 진행할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그 이상도….
한솔이 듣지 못할 말을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 안에 가둔 남자가 오메가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것도 모르고 한솔은 신우의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솜이도 걱정되고 맡은 역할도 있으니 얼른 돌아가 봐야 되는데 일정이 꼬이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혹시 미뤄야 되나 했어.”
한솔이 웃으며 신우를 바라본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뭔가 화학적 교류가 일어난 그런 느낌-.
자연스럽게 입술이 겹쳤다. 가볍게 입술이 빨리는 느낌에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린 한솔이 신우의 목에 팔을 감았다. 혀를 내밀어 살짝 살짝씩 신우의 혀를 간지럽히다가 아예 알파의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작게 입술 사이가 벌어지자 한솔이 속닥거렸다.
“일, 많은 거 아냐?”
“…조금 쉬지 뭐.”
드물게도 신우가 할 일을 미루는 모습에 한솔이 작게 키득거렸다. 응…! 곧장 입술이 삼켜졌다. 입술이 비벼지며 나는 질척한 느낌에 등줄기를 타고 짜릿한 소름이 돋았다. 얇은 실크 바지 너머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신우가 한 손으로 한솔의 엉덩이를 받쳤다.
“침실로 갈까?”
“흐응… 그러면 조금 쉬는 걸로… 안 돼….”
피식 웃은 신우가 입술을 깊게 맞추며 말했다.
“그러게. 아무래도 밤새야겠는걸.”
한솔이 변태라고 웅얼거리는 걸 키스로 막아 버린 신우가 오메가를 품에 안고 몸을 일으켰다. 달칵- 문이 닫힌다. 탁자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이 주인을 기다리며 애처롭게 남았다.
***
“엇… 내가 늦은 거 아니지?”
약속 시간보다 20분 일찍 카페에 도착한 한솔은 먼저 자리에 앉아 있는 하윤을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아, 아냐. 나도 방금 왔어.”
그는 얼음이 거의 다 녹은 하윤의 컵을 보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했지만 곧 아무 말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케이크 먹을래? 여기 케이크 맛있어.”
한솔이 평범한 친구에게 하듯 말하자 눈을 깜박이던 하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솔은 여기서 타르트랑 치즈케이크가 제일 좋았다며 추천했다. 진열장 앞에서 한참을 고심하던 하윤은 레몬 타르트를 골랐다. 치즈케이크와 허브티를 주문한 한솔이 트레이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어제는 고마웠어.”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하윤이 민망한 얼굴을 하자 한솔이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자르고선 말했다.
“아냐, 정말이야. 내가 너무 안일했어. 직접 그렇게까지 말해 주는 이유가 있을 텐데… 괜히 너랑 신우만 놀라게 했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던 하윤은 무심코 나온 말인지 자기가 다 놀라 흠칫거렸다.
“맞아. 그래서 고소하려고.”
“…….”
“나쁜 짓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한솔이 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콕 쑤셨다.
“그 사람… 오늘 안 나왔어.”
“정말? 벌써 해고됐나?”
“그건 잘 모르겠는데… 징계 위원회 열릴 거라고 다들 쉬쉬해.”
이미 그 정도로 퍼진 거면 일단 사회생활은 망한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한솔은 케이크 조각을 냠 삼키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있잖아, 이건 그냥 하는 말이니까 불편하면 흘려들어.”
타르트를 한입 베어 물고 조금 놀란 얼굴을 하던 하윤이 한솔을 바라봤다.
“내가 예전에 재능 기부 봉사하던 곳이 있거든.”
“…….”
“음, 연기는 아니고 무용이었지만. 아무튼 거기서 내년부터 연기반 모집을 한대. 그래서 연기 전공 선생님을 구하는데… 페이가 그렇게 세지는 않아. 최저보다 쪼금 높은 정도…?”
한솔은 하윤의 안색을 슬쩍 살피고선 말했다.
“내가 전공이 이쪽인 걸 아니까 추천할 사람 있냐고 그러더라고. 기간제 비정규직이긴 한데… 혹시 할 생각 있어?”
눈을 깜박거리던 하윤이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말해 줘서 고마워. 나도 하고 싶은데… 아마 안 될 거야.”
“…시간이 안 되는 거야?”
“그건 아니고… 음….”
그는 텅 비어 있는 자신의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오메가 코드가 없거든….”
“…….”
“그래서 아마 안 될 거야.”
한솔은 할 말을 잃었다.
코드가 없는 존재, 즉 ‘주인 없는 오메가’.
보통의 경우라면 최소한 부모가 그 역할을 대신해 주기 마련이지만….
보호자가 없거나 혹은 보호자가 거부하는 경우에는 오메가는 사회에서 신원을 보증할 방법이 없었다. 살아 있지만 같은 ‘인간’으로 봐주지 않는다. 그래서 범죄 대상이 되기 더 쉽고 피해를 입증하기란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센터는 정부 기관이니까 코드가 없어도 받아 주거든. 어릴 때부터 거기서 살았어. 열성이라서 쓸모도 있고….”
덕분에 정부 보증받아서 대학까지 갔다며 하윤은 부러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빨대를 만지작거린다. 어쩌다 여기까지 말하게 됐는지 본인도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으… 나 잠깐 통화 좀 해도 될까.”
“어, 응….”
하윤은 능숙하게 감추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동공 지진을 일으키던 한솔의 눈을 떠올리며 자책을 했다. 왜, 왜 이런 말까지 해 버린 거야… 유리창에 머리를 콩 박고선 사회성 부족한 자신을 탓하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나갈 때보다 훨씬 환해진 얼굴로 돌아온 한솔이 말했다.
“하윤아!”
“…어?”
“형한테… 아니, 음… 그 재단 관계자분한테 물어봤는데 생각 있으면 면접 한 번 보러 오래. 그, 여기가 꽤 큰 기업 재단이거든. 재단 측에 채용되면 신원 보증용으로도 쓸 수 있고….”
하윤이 눈을 슴벅슴벅 떴다.
“…진짜?”
“응. 이것 봐. 모집 공고인데….”
한참을 재잘거리는 한솔을 빤히 바라보던 하윤이 불쑥 이렇게 물었다.
“왜…, 잘해 줘?”
“응?”
“난 너한테 피해도 끼쳤는데….”
눈을 깜박이던 한솔은 음… 하더니 볼을 긁적인다. 그리고 괜스레 주변을 살피고선 아주 중대한 비밀을 말하려는 것처럼 몸을 숙여 왔다. 하윤도 덩달아 긴장해서 몸을 낮췄다.
“실은….”
꼴깍-.
“우리 좀 닮은 것 같아.”
…어?
“사실, 예전부터 생각했거든. 약간… 뭐라 하지. 동족 혐오…?”
“…….”
“그래서 괜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 밀어 내려 했어. 미안해.”
한솔은 고해 성사를 하듯 말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마냥 밝은 사람은 아니지만….”
“…….”
“그래도 괜찮으면 친, 구… 할래?”
대답이 없었다. 민망해진 한솔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하윤이 보였다. 당황한 마음에 한솔이 ‘싫어…?’ 하자 하윤이 고개를 홱홱 젓는다.
“그럼 하는 거다…?”
끄덕-.
얼굴은 주먹만 하고 이목구비는 오밀조밀한데 머리는 또 탈색 때문인지 보들보들해 보여서 저렇게 움직이면 꼭 인형 같았다. 고양이 머리띠 씌어 보고 싶다. 하윤이 알았다면 숨도 못 쉬고 굳어 버렸을 생각을 하며 한솔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됐지? 친구잖아.”
그러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린 한솔이 이것 좀 보라며 얼이 빠진 상태인 하윤을 구슬렸다. 뭐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분명, 대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 어느새 또래 친구가 생긴 건 물론이고 한솔과 함께 면접 예상 질문지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응원하러 가고 싶은데 내가 내일 출국이라서. 아쉽다.”
“아… 어디, 가는 거야?”
“영국! 영국 로열 발레단에서 무용수로 일하고 있어.”
영화계에 배우로 데뷔했을 것 같았던 한솔이 해외에서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는 말에 하윤이 입술을 작게 벌렸다.
“대단하다-.”
“나도 아직 얼떨떨해. 그렇게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춤춘다는 것도 안 믿기고… 그치만 좋아하니까, 열심히 하고 있어.”
이번에 승급하면서 막내도 탈출했다며 한솔이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다. 그동안 길게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서로 관심사도 잘 맞고 취미도 비슷해서 굳이 이야깃거리를 짜내지 않아도 대화가 잘 이어졌다. 과거에 먼저 다가가 보려 하지 않았다는 게 정말 아쉬워질 정도로. 그래서 한솔이 출국을 하고 하윤이 면접에 합격한 뒤에도 종종 통화를 하며 지냈는데 한솔은 어느 날 걸려 온 전화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뭐라고 하긴… 대답 못 했어. 그냥 유명한 영화들 보고 감정 잡으라고 했는데… 얘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겠지?]
주제는 어떤 당돌한 중학생 친구가 ‘선생님, 사랑이 뭐예요? 그냥 키스하는 거예요? 사랑을 어떻게 연기해요?’ 하고 물어온 탓에 하윤을 당황시킨 사건이었다.
“그럼 사귀어 본 사람도 없어? 아예?”
[…응….]
“아니, 너 좋다던 애들 많았는데?! 고백을 한 번도 안 받아 봤다구?!”
[그…건 아니지만… 오메가인 거 들키기 싫어서….]
“아-.”
우성 오메가인 한솔도 종종 말도 안 되는 차별을 받는데 열성에 주인 없는 오메가인 하윤에게 형질은 족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솔은 으음… 하고 침음했다.
[너는… 어때?]
“나?”
[응… 이런 거 물으면 실례인가…?]
전화 너머로 당황한 마음에 얼굴이 붉어졌을 하윤이 그려지는 듯했다. 멀리서만 봤을 땐 몰랐는데 하윤은 꽤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다. 전화도 그렇지만 특히 채팅에서 두드러져서 그는 정말, 정말 당황해 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채팅창을 나가 버린다고 고백해 오기도 했다. 고치고 싶은데 잘 안된다나-. 그래서 한솔은 갑자기 하윤이 나가 버려도 너그럽게 이해하겠노라고 키득거리며 말했다.
“글쎄, 나는 살면서 좋아해 본 사람이 한 명뿐이라 비교가 안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한솔의 입가에 살그머니 미소가 감돌았다.
“나한테 사랑은… 안정감? 내가 어떤 풍랑 속에 있어도 버틸 수 있게 도와주는 단단한 고목… 같은 존재랄까.”
[…아-.]
“이건 비밀인데-. 사실 고등학교 막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신우를 이성으로서 좋아한다고는 생각 안 했던 것 같아. 그냥 내 일상의 일부분이었던 든든한 형? 같은 느낌?”
한솔이 비밀을 속닥거렸다.
“그런데 이제 그런 거지.”
[…….]
“아- 이 사람을 빼면 내 일상이 완성이 안 되는구나.”
[…….]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너무 그 사람이 차지한 부피가 커져서 그 사람을 빼 버리면 내 마음이 공허해지는 거야. 사랑은 그런 거 아닐까?”
말하고 나니 불현듯 부끄러워진 기분에 한솔이 볼을 긁적였다.
왜 사랑은 말을 하면 할수록 깊어지는 걸까.
그는 아직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베개를 가져와 품에 안았다. 이 향기의 주인이 무척 보고 싶었다.
삑삑삑삑-.
“어?”
한솔은 갑자기 들리는 키패드 누르는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오늘은 일찍 올까 싶어서 방문을 열어 두긴 했지만….
[왜 그래?]
“신우 왔나 봐!”
[아, 그럼 나중에 통화할까?]
“응, 내가 전화할게. 메리 크리스마스!”
[너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
하윤과의 통화를 끊자마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한솔이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신우야!”
구두를 벗고 있던 남자가 한솔을 바라본다. 바닥에는 탐스러운 포인세티아 꽃다발과 케이크 상자가 보였다. 먼저 마중 나와 있던 솜이가 복실복실한 꼬리를 살랑이며 왕왕거렸다.
“안녕. 메리 크리스마스.”
“응, 메리 크리스마스!”
품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오메가를 받아 낸 알파가 낮게 웃었다. 마천루에서 내려다보는 화려한 도시의 야경과 함께 거실의 미니 트리에 달린 전구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눈송이가 하나둘, 불야성의 도시 위를 휘날리기 시작한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
『네?』
정말 오래간만의 단장과의 독대 시간이었다. 혹시 아까 있었던 리허설에서 뭔가 큰 실수를 했나 싶어 긴장했던 한솔은 눈을 크게 떴다.
『말한 대로야, 한솔. 너에게 ‘백조의 호수’ 주역을 주고 싶어.』
한솔의 숨이 덜컥 멎었다.
『수석 무용수 중 한 명인 레이나는 이번 공연으로 은퇴할 거야. 그녀는 다년간 정말 훌륭하게 무대를 빛내 주었지. 그리고 우리에게 어쩌다 이런 시련이 닥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다쳤어- 한솔.』
이번 시즌 초에 드디어 드미 솔리스트로 승급한 한솔이었지만 아직 주역을 맡아 본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로열 발레단은 굉장히 큰 발레단이다. 다수의 수석 무용수들과 그보다 많은 솔리스트들이 있고 그 아래가 바로 드미 솔리스트였다. 이번 년을 마지막으로 프리가 되기로 상담을 마친 한솔에게, 남은 시간 동안 주역이 돌아올 것이라곤 예상치 못했다.
『우리는 안전하게 갈 수 있어. 객원 프리마를 초대할 수도 있고,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안 돼 걱정이 되긴 하지만 연주를 주역으로 세울 수도 있지.』
그러나 기회는-.
『하지만, 그래서야 세계 최고 중 하나라는 자부심이 아깝지 않겠어? 좋은 공연을 선보이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지만, 또 좋은 무용수를 발굴해 내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감이니까.』
예상치 못한 순간에서,
『한솔은 그간 정말 많은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잖아.』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한솔도 알겠지만 가을 공연은 굉장히 중요해. 새로운 시즌의 스타트를 끊는 공연이니까. 더불어 백조의 호수는… 한 명의 무용수적인 관점에서 굉장히 고되고 어려운 작품이지.』
“…….”
『그럼에도- 도전할 준비가 됐어?』
눈이 마주쳤다. 단장의 푸른 눈동자가 깊고 아름다운 마성의 호수처럼 보였다. 순백의 백조와 칠흑의 흑조들이 사는… 고전 속의 신비의 호수-.
그곳에 빠져들기로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솔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
『말도 안 돼! 얘가 주역이라고?』
백조의 호수 배역 캐스팅 보드가 나온 뒤 첫 클래스가 있는 날이었다.
한솔은 스튜디오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다가 단체 클래스가 있는 곳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솔의 걸음이 뚝 멈췄다.
『이것 봐!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않아?! 로열에서 이렇게 빨리 드미가 된 사람 있냐고!』
『…없지.』
『그런데 이제 하다못해 백조를 한다고? 오메가가? 제인은 부상으로 열외에 레이나가 은퇴를 한다지만 솔리스트가 이렇게 많은데! 그 많고 많은 무용수 중에 동양인 오메가가 백조를 하는 게 말이 되냐고!』
『맞아. 백조는 순수함이 상징인데… 오메가가 백조라니. 좀 그래….』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주역 무용수들의 클래스가 있는 스튜디오로 가기 위해선 저 앞을 지나가야 했던 한솔은 주눅이라곤 하나도 들지 않는 얼굴로 뺨을 긁적이더니 ‘늦기 전엔 도착할 수 있겠지?’ 하는 태평한 생각을 하며 벽에 등을 기댔다. 위에서는 둑이 터지듯 불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솔은 그중에서 ‘쟤 부모가 졸부래.’ 하는 말을 듣고 완전히 뒤죽박죽 섞인 이야기에 조금 웃고 말았다. 음, 아버지가 졸부는 아니지만… 평생 빈둥거리며 먹고살 정도긴 하지. 애인은 한 10년 뒤면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부자가 될 예정이고.
『그 빗치가 단장이랑 잔 거 아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을 넘은 이야기가 들리자 한솔은 여기서 어떻게 등장해야 저 뚫린 입들을 다물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그런데 한솔이 그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대단하네.』
나연주였다. 한솔은 멈칫했다.
『오메가, 오메가, 오메가. 아주 노이로제 걸리겠네. 너희는 오메가밖에 할 말이 없니? 그렇게 대단하셔서 단장이랑 한솔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고 이러고 있고?』
그 뒤론 말 그대로 고성이 오갔다. 한솔은 회의가 끝나고 돌아온 감독들이 무용수들을 뜯어말릴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골몰히 생각에 잠긴 한솔의 얼굴이 한층 성숙해 보였다.
『아, 미안.』
무대 대기실. 한솔을 툭 친 무용수 한 명이 하나도 미안한 표정이 아닌 얼굴로 사과를 하고선 지나갔다. 리허설 무대라 혼자서 분장을 하고 있던 한솔은 볼 위로 쭈욱- 길을 내고 지나간 립스틱에 눈을 깜박인다. 풋-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루루-.
무용수들은 많게는 하루에 서너 번, 적으면 한두 번 정도 포인트 슈즈를 갈았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아무리 좋은 브랜드의 슈즈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종일 꼿꼿이 서고 점프하다 보니 생기는 현상인데 무용수에게 있어 포인트 슈즈는 소모품이었다. 그래서 로열 발레단의 경우 이 슈즈를 무용수에 대한 지원으로 생각하고 무한정으로 공급해 주었다. 무용수들은 각자 그걸 받아다가 자신의 사물함에 쌓아 두고 쓰고는 했다.
한솔은 사물함 문을 열었다가 얼마 전에 쌓아 두었던 새 슈즈 대신 이미 앞창이 다 닳아 헌것들이 쏟아져 나오자 느리게 입술을 감춰 물었다. 지나가던 무용수 한 명이 ‘어머-’ 하고 말했다.
『역시 주역은 달라? 연습 엄청 했나 보다, 너-.』
단체 클래스에서 가장 먼저 나서서 한솔을 험담했던 목소리이자, 리허설 전 무대 대기실에서 한솔을 치고 갔던 무용수였다. 한솔은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 좀 살살해 주라? 너 혼자 공연하는 것도 아니고…!』
『너.』
빙글-. 가볍게 턴을 돈 한솔이 무용수를 벽으로 압박하며 말했다. 툭- 팔을 무용수의 얼굴 옆에 짚은 채 무심하게 눈을 깜박이며 내려다본다. 그 얼굴이 몹시, 차가워 보였다. 평소엔 캐러멜 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한솔의 눈동자가 어두운 토파즈 색을 띠었다.
『뭐, 뭐야…! 이거 안 비켜?!』
『적당히 해.』
『뭐…? 내가 뭘 했.』
『내가 신경 끌 정도로만 적당히 하라고.』
누군가는 한솔을 오메가라 얕보겠지만,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도련님’이라고 떠받들어 자라 온 존재였다. 그는 충분히 오만해지려면 오만해질 수 있었다. 단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안 그럴 뿐이지.
언젠가 한솔의 첫째 누나인 세린이 신우를 두고 이렇게 평한 적이 있었다.
-그놈은 상냥한 독재자지.
사랑하면 닮는다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닮았다. 옆에서 보고 들으면서 자란 게 있는데 이정도 흉내도 못 낸다면 연기 인생을 반납해야 한다. 한솔은 완전히 얼어 버린 무용수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지며 입을 열었다.
『너 한 명 상대해 줄 정도로 내 인생이 한가하진 않거든.』
『…….』
『그러니까 너무 내 눈에 띄지 마. 그렇지 않으면 네가 그렇게나 말하고 다녔던 ‘졸부’에게 혼쭐이 날 테니까.』
나보고 빽 있는 낙하산이라며? 그 빽이 무섭지도 않나 봐?
한솔이 한껏 눈꼬리를 휘며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무용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가 봐.』
그리고 복도를 향해 눈짓하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무용수가 뒤를 돌아 달려 나간다. 한솔은 눈에 팍 힘을 주느라 눈물이 찔끔 맺힌 눈가를 비비며 생각했다.
‘신우 연기는 아직 어렵네.’
그러곤 철없던 시절처럼 히힛- 하고 웃어 버렸다.
***
파도, 절벽, 달빛, 부서지는 하얀 포말, 사나운 바람 소리가 갈길 잃은 여행자를 위협한다.
아찔한 높이-.
매서운 겨울바람이 남자의 옷가지를 거칠게 펄럭였다. 상처가 난 맨발. 자신의 두 발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남자는 습윤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달빛 한 점 없는 세상이 깊게 가라앉았다.
“겨울 바다 구경을 하기에는 자리가 많이 나쁜 것 같지 않습니까.”
“…!”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려오는 타인의 목소리에 남자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한솔은 눈을 크게 떴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언제나 흐릿하게 지워져 알아볼 수 없었던 남자의 얼굴에 환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보는 이의 얼굴은-.
“헉….”
이른 새벽.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난 한솔은 가슴 언저리를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무섭도록 쿵쿵- 뛰었다. 분명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아주 생생하고 무서운 꿈이었는데-. 차올랐던 바닷물이 한순간에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선명했던 꿈의 기억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텅 비어 버렸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침대 위로 털썩 누었다. 침대가 이토록 크고 넓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나. 비어 있는 옆자리를 바라보는 한솔의 눈가에 조금 습기가 돌았다.
오늘은 ‘백조의 호수’ 첫 공연 날이다.
“정신 차리자, 이한솔.”
뺨을 가볍게 짝짝 친 한솔이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합작을 진행하던 독일 지사에서 큰 건이 터지는 바람에 신우가 새벽 비행기로 독일에 가야 했던 게 바로 어제였다. 조금, 속상하긴 하지만… 스물다섯이나 먹어 놓고 마냥 속상해하고만 있을 순 없는 일이다. 이제 어른이니까. 그에겐 맡은 바 일이 있고, 잠시 서로가 부재하더라도 씩씩하게 일상을 이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상대에 대한 믿음이자 배려라는 것을 안다. 한솔은 침대 옆 탁자 위에 있는 ‘미니 신우’에게 쪽- 뽀뽀를 하고선 방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얌전히 눈을 감고 있던 솜이가 한쪽 눈을 슬그머니 뜨더니 탁자 위에 있던 미니 신우와 미니 한솔을 물고 와 담요 안에 꽁꽁 숨겼다.
『안녕, 한솔! 오늘 컨디션 어때?』
『너무 긴장했나 봐… 악몽을 꾼 것 같긴 한데 지금은 괜찮아.』
『아하하, 첫 주역은 정말 엄청나게 떨리지. 그래도 한솔은 무대 체질이니까 막상 올라가면 괜찮아질 거야. 우리 연습도 많이 했잖아? 너를 믿어 봐.』
『응. 고마워.』
오늘 한솔의 파트너를 맡아 줄 발레리노가 그를 반겼다. 조금 눈치가 없는 것 빼고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 덕에 한솔을 둘러싼 발레단의 불온한 분위기에도 혼자서 해맑은 편이니 나름 장점이라면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은혜????????
나 1층 2열이다
은혜????????
훗✌️✌️✌
공연 전 마지막 쉬는 시간. 신우에게 온 연락이 있을까 싶어 핸드폰을 켰던 한솔은 가장 먼저 보이는 은혜의 메시지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활이 많이 지루한지 그렇게 오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어떻게 티켓팅에 성공은 했나 보다. 은혜에게 멋지다며 엄지척 답장을 보내주고선 방을 나간 한솔은 가장 상단에 고정돼 있는 채팅의 미리 보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시누♡
지금 비행기 탔어. 최대한 빨리 갈게.
약 세 시간 전쯤에 온 메시지였다. 한솔은 순간 울컥했다.
‘으아아- 좋은 생각! 좋은 생각!’
메이크업까지 빡세게 받았는데 여기서 번지기라도 하면 매우 곤란했다. 한솔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선 얼른 핸드폰을 껐다. 오늘 하루 프로답게 행동하긴 했지만 가슴 깊숙이 남은 쓸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는데 신우의 메시지를 보고 나니 정말 마법 같이 기분이 나아졌다. 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솔은 바깥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기합을 넣고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20XX/XX 시즌 가을 공연.
오데트/오딜 역 이한솔, 지그프리드 왕자 역 노아 셰퍼드.
공연이 막을 올렸다.
***
Tchaikovsky.
The Swan Lake - Suite Op.20a : Scene.
이것은 어떤 푸른 달밤의 호수에 잠든, 흰 날개깃과 검은 날개깃을 가진 존재의 이야기다.
***
“이한솔!”
한솔은 영어가 디폴트인 곳에서 들리는 한국어에 뒤를 홱 돌아봤다.
“은혜야!”
오래간만에 보는 절친의 모습에 안 그래도 밝았던 한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씩 웃으며 들어온 은혜는 일단 꽃다발부터 한솔의 품에 안겼다.
“역시 로열은 로열이네. 대기실 때깔부터 다르다?”
“헤헤….”
“어쭈, 아주 꽃다발 수집가 납셨네. 뭘 이렇게 많이 받았어?”
“다들 하나씩 주셔서… 아, 맞다! 엄청 먼데 와 줘서 고마워-. 다리는 괜찮아?”
“일상생활이야 이제 문제없지. 이렇게 가끔씩 환기도 시켜 줘야 빨리 낫든가 말든가 하니까, 뭐.”
발레단 내 무용수들과의 불화가 있긴 했지만 한솔은 아주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쳤다. 일 년에 단 한 번, 그런 날이 찾아오고는 한다. 내가 해냈구나- 싶은 날이. 항상 커튼콜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기 직전이 되면 무대 위에서 했던 작은 실수들과 더불어 더 잘할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하고는 하지만… 외적으로도 내적으로 이 무대를 내가 더 할 수 없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없이 충만해지고는 하는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그건 한솔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많은 팬들이 ‘오메가’라는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던 한솔에게 오늘만큼은 찬란한 찬사를 보냈다. 그만큼 실력으로 모든 걸 증명한 무대였다. 이 많은 꽃다발은 그 증거였고-.
여기 온 김에 일주일은 놀다 갈 거라며 은혜는 거들먹거렸다. 한솔이 맛집 리스트를 보내 주겠다고 말하곤 웃었다.
“아직 분장 안 지운 김에 사진 찍자.”
“아니, 무슨 사진을 찍어?”
“이럴 때 아님 언제 찍어? 빨리-.”
“아이씨… 나 지금 완전 폐인 꼴인데?”
은혜가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선 백에서 파우치를 꺼내 초스피드로 얼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역시 현직 발레리나의 분장 같은 화장 솜씨는 예술에 가깝다. 옆에서 오… 하며 은혜를 구경하던 한솔이 셀프 카메라 모드를 켰다.
“찍는다?”
“야야, 잠깐!”
“하나, 둘, 셋!”
찰칵-.
“사진 보내 줄까?”
“엉, 보내 줘. 악! 뭐야, 부었어!”
은혜에게 찍은 사진을 전송하고 인스타에 그 사진으로 첫 백조 기념 피드를 작성하는데 스태프 중 한 명이 누군가 한솔을 찾는다며 알려 왔다. 누구지? 신우는 아직까지 연락이 없으니까 아닐 텐데…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던 한솔은 대기실 밖으로 향하면서도 괜스레 신우와의 채팅방을 들락거리기를 반복했다. 기상 상황이 많이 안 좋나…. 슬슬 걱정이 돼 가는 와중.
“솔아.”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
한솔의 동공에 정장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만난, 보고 싶었던 이의 등장에 한솔의 숨이 덜컥 막혔다. 신우가 말했다.
“…원래는 100송이 주고 싶었는데 부피가 너무 커서 반입이 안 된대.”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든 남자가 쑥스럽다는 듯이 웃는다. 일상에서 보기 드문 미남이 화려한 꽃다발까지 들고 있는 모습에 주변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엔 한솔의 백조 의상도 한몫했을 것이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와 봤던 은혜는 오늘도 어김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선사하고 있는 커퀴들을 보며 인상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야, 너네. 지지고 볶든 뭘 하든 안에 들어가서 해!”
결국 그녀의 성화에 두 사람은 주역 전용 대기실 안에 밀어 넣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떴던 스태프들도 뭔가를 눈치챈 듯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선 총총총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은혜는 팔짱을 낀 상태로 신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쭈욱 한 번 스캔하더니 코웃음을 치고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얼떨결에 넓은 대기실에 둘만 남겨진 상황에 한솔이 눈을 깜박였다.
“어, 언제 왔어?”
아니, 왜 떨리지…?!
자신의 목소리가 왜 떨리는지도 모르고 긴장해 버린 한솔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또각. 신우의 구두코가 한솔을 향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온다. 어쩐지, 몹시 도망을 가고 싶다는 생각에 몸을 움찔거린 한솔은 오기로 제자리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알파의 커다란 손이 한솔의 뺨을 어루만졌다.
“1막 끝나고 인터 미션 때.”
두근두근… 심장이 기분 좋은 울림을 알렸다.
“원래는… 호텔에 가서 하고 싶었는데.”
“…….”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네.”
신우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무언가를 직감한 듯 목덜미를 타고 쭈뼛 소름이 돋는다.
“솔아-.”
“…….”
“세상 모든 풍파를 막아 주겠다고 확신은 못 하더라도, 봄이 지나고 겨울이 오더라도 네가 다시 꽃피울 수 있도록 곁을 지켜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가 등지고 있던 손을 내민다. 고급스러운 반지 케이스가 열렸다.
“…나랑 결혼해 줄래?”
왜일까, 프러포즈를 받았는데-.
“…….”
눈물이 나는 이유는….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신우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알파가 낮게 웃었다.
“대답 안 해 줄 거야?”
“할래…, 할 거야.”
한솔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꾹꾹 누르며 답하자 이슬처럼 영롱한 눈물이 맺힌 한솔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훔친 신우가 케이스 안에서 반지를 꺼냈다. 지금 의상과도 무척 잘 어울리는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알파는 한솔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준 다음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가 말했다.
“오늘 네가 너무 멋있고 예뻐서….”
“…….”
“참을 수가 없었어. 그냥 두면 네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 버릴 것 같았거든.”
마치 고전 속의 백조처럼-.
“이거라도 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어.”
소유욕도 참 그답게 표현하는 신우를 보며 한솔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풍성한 속눈썹을 내리깔며 속상한 투로 말한다.
“미안… 나는 아직 준비 못 했는데….”
신우가 프러포즈를 받아 주지 않았느냐고 하자 한솔은 밉지 않게 흘겨보며 말했다. ‘솔직히 차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잖아’ 알파는 부정하지 않으며 한솔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연인은 열정적으로 키스했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호흡을 전부 갈취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사나운 키스를 퍼붓는 알파 탓에 한솔이 숨을 헐떡였다. 우아하게 도드라진 목선에 마킹이라도 할 것같이 이를 세웠던 알파는 장소를 떠올리고선 다음을 기약하며 겨우 자신을 달랬다.
“흐으… 뭔데…?”
“도와줄 거야?”
무슨 일인지 정확히 설명을 안 해 주는 신우는 또 처음이었다. 눈을 깜박이던 한솔이 신우의 입술에 쪽- 뽀뽀를 했다.
“응.”
알파의 눈가에 다정한 웃음기가 서렸다.
이 주간 이어졌던 백조의 호수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마지막 공연을 마친 뒤, 한솔은 예정되었던 대로 로열 발레단을 그만두었다. 뒤늦게 한솔의 진가를 알아본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지만 한솔이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춤출 수 있기를 바라며 그의 앞길을 축복해 주었다. 그리고 곧 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여기저기 퍼진 탓인지 이곳에서 만난 지인들은 하나같이 짓궂은 얼굴로 한솔을 일별했다. 영원한 헤어짐은 아닐 것이다. 조금 멀지만 같은 하늘 아래에서 춤출 테니까, 언젠간 또 만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 두 사람은 마침내 영국 생활을 완전히 접고 귀국하게 된다.
약 3년 만이었다.
“파트너님, 의상 갈아입으실게요.”
정말 오래간만에 방문한 신우네 알파 클럽 ‘세렌디피티’.
여기서 못난 꼴을 한 번 보인 기억이 있어서 클럽만 오면 한솔은 조금 쑥스러운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솔은 준비된 흑조 의상으로 갈아입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메이크업을 마쳤다. 티아라 무게며, 의상에 박힌 보석 개수며… 절대 공연용은 아니었지만 입고 나니 몇 달 전의 백조의 호수가 새록새록 생각났다. 아, 참고로 오늘 건 그냥 이날을 위해 제작된 개인용 의상이다. 그것도 어머님이 손수 보내 주신…. 여기서 어머님은 신우네 어머니인 문 대표님을 말한다.
결혼식 날짜는 내년 봄으로 잡혔기 때문에 그 전에 부지런히 집도 알아보고 웨딩 촬영도 해야 했다. 이 컨셉을 사진첩에 꼭 넣고 싶다는 신우의 부탁 탓에 한솔은 오랜만에 흑조로 변신하게 되었다. 약간 어색하게 토슈즈로 바닥을 톡톡 두들기고 있는데 중세풍의 무도회장처럼 꾸며진 홀에 검은 턱시도를 입은 신우가 나타났다. 한솔의 양 볼이 살그머니 상기되었다.
“촬영 시작할게요!”
흑조 컨셉의 웨딩 촬영. 사진 작가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대부분이 발레 동작을 응용한 포즈가 많아서 과연 신우가 장시간 리프트 동작을 유지할 수 있을까 걱정이 컸었는데 사랑의 힘인지 아니면 원래의 체력 덕분인지 신우는 크게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솔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신우의 가슴에 슬쩍 얼굴을 기댄다. 작가의 요구에 따라 찰떡같이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요염한 흑조가 되고, 새침하게 외면하다가도 알파의 턱을 쓸어내리며 유혹하는 한솔을 보며 사진 작가는 연신 브라보를 외쳤다. 촬영은 즐거운 분위기로 막을 내렸다.
“윤건아 다 찍었어?”
촬영팀이 철수하고 구석에서 조용히 촬영만 하고 있던 윤건에게 한솔이 다가간다. 렌즈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윤건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응! 그런데, 혹시 여기 더 쓸 수 있는 거야?”
“응, 그건 상관없는데.”
“그럼….”
윤건은 말문을 떼어 놓고도 확신이 안 드는지 몇 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혹시 춤… 같은 거 출 수 없을까…? 아, 두 사람이서…!”
“춤…?”
몇 년이란 시간 동안 정말 묵묵히 촬영만 했던 윤건에게서 나온 첫 디렉팅이었다.
“…네가 발레 하는 모습 보다 보니 느낀 건데-.”
“…….”
“인위적인 게 꼭 ‘부자연스러운’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거기에도 분명 희로애락이 있고… 수많은 진심이 담긴, 하, 하나의 작품인 셈이니까.”
윤건이 우물쭈물거렸다. 한솔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꼭… 완성하고 싶은 장면이 있는데, 안 될까?….”
한솔의 등 뒤로 신우가 다가왔다. 한솔이 비스듬히 신우를 올려다보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신사님, 한 곡 추시겠어요?
“한 곡 추실까요, 신사님.”
그의 앞에 커다란 손이 내밀어졌다. 한솔이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꺼이.”
흑조를 품에 안은 알파가 빙그르르 무도회장을 누볐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구경하던 윤건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다급하게 카메라를 잡는다. 카메라 렌즈 안에 아름다운 한 쌍이 기록되었다….
“…읏!”
그리고 모두가 돌아가고 불이 꺼진 무도회장.
“아, 아파… 신우야-.”
“하아… 싫어?”
오메가의 매끄러운 목선을 잘근잘근 씹은 알파가 묻는다. 한솔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아니… 좋아….”
“…난 네가 좋다고 할 때마다 미칠 것 같아.”
그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하더니 다시 한솔의 목에 마킹 흔적을 남겼다. 목선과 어깨선이 훤히 드러나는 의상 탓에 흰 피부에 새겨진 발긋한 흔적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한솔이 신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제 해 줘, 응…?”
굳이 스튜디오가 아닌 클럽을 촬영 장소로 삼은 이유가 뭐겠는가. 다 이런 음흉한 짓을 하기 위해서였다. 한솔이 다리를 뻗어 토슈즈로 신우의 그곳을 꾹 누르자 그가 낮게 신음했다. 섹시해…. 귓가에 내려앉는 신우의 신음이 좋아서 더 꾹꾹 누르자 알파의 동공이 짙게 가라앉는 것이 보인다. 앗… 뭔가 위험한 느낌인데….
“…!”
갑자기 시야가 빙글 돌면서 한솔은 신우의 하체 위로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당황한 마음에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데 타이즈를 신은 아래에 뜨거운 것이 문질러졌다. 으응… 한솔이 작게 신음했다. 뜨겁고 까슬거리는 느낌… 좋아…. 한솔이 몽롱한 눈빛을 하고서 몸을 들썩거리자 신우가 허벅지 안쪽 부분의 천을 잡아 늘렸다. 투둑- 작은 구멍이 생겼다.
지이익-.
회음부와 엉덩이 쪽으로 구멍을 넓힌 알파는 익숙하게 침입할 입구를 찾아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한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찔걱… 처음은 마르고 비좁았지만 물이 많은 몸은 금방 애액을 내보내며 음란한 소리를 내보였다. 신우가 입구를 늘리는 사이 한솔은 튜튜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신우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뜨거워….’
오늘도 위용 넘치는 것이 한솔의 두 손안에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러니까 꼭 진짜 알을 품은 흑조라도 된 기분이 들어 한솔은 속으로 작게 키득거린다. 그는 조심조심 기둥을 어루만졌다. 시각적, 촉각적 자극과 뒤로 오는 직접적인 자극에 한솔의 숨이 점차 가빠졌다. 흐윽! 애끓는 신음이 터졌다.
“아으…흐….”
한 손으론 신우의 복부를 짚고 다른 손으론 우람한 기둥을 붙잡고 있던 한솔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기승위의 장점은 신우를 내려다볼 수 있다는 거고-.
단점은….
“응…!”
너무 깊다는 거다.
“…넣기 힘들면 누워서 할까?”
두꺼운 귀두가 좁은 입구를 꾸역꾸역 파고드는 느낌에 한솔이 몸서리를 쳤다. 그 뒤로 쑤욱-까진 아니고 온 내벽을 득득 긁어 대며 들어오는 기둥에 숨이 턱, 막혔다가 너무 깊은 데까지 파고드는 좆을 느끼며 한솔의 눈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알파가 예의상 한 번 물어 오는 것을 고갯짓으로 물리친 한솔이 조심조심 신우의 하체에 앉았다. 내 거야… 흑…. 이상한 데서 객기를 부리는 한솔을 보며 신우가 무척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사실, 몸 위에 올라타고 앉은 흑조 이한솔은 객관적으로 봐도 미친 듯이 사랑스러웠다.
“…아흑!”
갑자기 팽창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래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두꺼운 기둥에 한솔의 밸런스가 순간 무너졌다. 푸욱-! 신우의 위에 풀썩 주저앉게 된 한솔은 파들파들 떨리는 팔로 신우의 복부를 짚고선 너무하다는 듯 알파를 바라봤다. 알파가 반짝이가 얹어진 한솔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예뻐.”
꼬리뼈를 타고 정신적 쾌감이 찌르르 치솟았다.
“움직일 수 있겠어?”
신우가 한솔을 살살 달래며 말했다. 솔직한 마음 같아선 그냥 주저앉아 있고 싶었지만… 밑에서 신음하는 신우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한솔은 신우의 복부에 손을 얹고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알파가 긴장감이 도는 한솔의 등허리를 느릿하게 어루만진다. 쯔읏… 내벽에 밀착되어 있던 기둥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에 한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막상 일어나긴 했는데 이걸 다시 넣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자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흣….”
까만 동공에 담긴 자신의 모습… 그는 홀린 듯 몸을 내렸다. 꾸역꾸역 기둥을 삼키자 알파가 잘했다는 듯 한솔의 입술에 키스했다. 쪽…. 한솔은 달콤한 보상에 용기가 생겼다. 처음엔 달팽이가 기어가듯 아주 느리게 몸을 움직였지만 점차 긴장이 풀리자 근육이 이완되면서 속도가 붙었다.
“아! 응… 흐앙! 흐….”
“읏….”
철퍽! 쯔읏- 철퍽!
한솔의 날개뼈를 한 손으로 붙잡고 있던 신우가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낮게 신음한다. 분홍색 혀가 보이도록 입을 벌린 채 헐떡거리던 한솔이 그 소리를 듣고 몸을 파드득 떨었다. 아, 좋아! 성기 위에 깊게 주저앉으며 몸서리를 친 한솔이 신우의 입술을 찾아 키스했다. 으응, 후으… 기분 좋은 고양감이 몸을 달궜다. 신우가 한솔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잠시 실례.”
다시 몸이 뒤로 넘어가면서 정상위가 되었다. 쯔으읏- 두꺼운 귀두가 걸리는 부분까지 좆을 빼낸 알파가 깊게 허리를 박아 넣는다. 퍽! 찔걱… 푸욱-! 몸이 덜컹거릴 정도로 거친 추삽질에 한솔이 자지러지듯 비명을 질렀다.
“아응! 힉! 흐으응… 아! 흐앙!”
“하아… 윽….”
남자의 턱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한솔의 얼굴 옆을 짚고 있던 알파의 손등에 퍼런 핏줄이 돋는다. 사납게 목을 울린 그는 몇 번 더 매섭게 허리를 놀리고선 구멍 깊숙이 짜부라트릴 것처럼 밀어 넣었던 성기를 단숨에 빼냈다. 흐, 아앙! 내벽이 거칠게 긁히는 느낌에 한솔이 허리를 휘며 절정에 달했다. 꿀렁꿀렁-. 동시에 알파의 성기에서 터져 나온 진한 백탁액이 검은색 튜튜를 적신다.
“흐응….”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한솔이 신우를 올려다봤다. 거칠게 다뤄져 엉망이 된 흑조를 내려다보던 알파가 경건히 고개를 숙였다. 쪽…. 먼저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쇄골, 배꼽, 손등으로 이어진 입맞춤이 타이즈가 엉망으로 헤집어져 속살이 보이는 허벅지 위에, 반듯한 무릎 위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아한 발등 위에 닿는다. 살짝 들어 올려진 한솔의 다리를 내려놓은 알파가 색색거리는 작은 숨을 삼켰다.
츕…. 입술이 떨어지며 은실이 길게 이어졌다.
“사랑해, 솔아.”
몽롱했던 한솔의 캐러멜 빛 눈동자에 켜켜이 아롱진 빛무리가 쌓였다. 이마를 맞대고 포개는 숨. 긴 속눈썹을 팔랑이던 한솔이 간질간질한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사랑해, 신우야.”
***
“근데 너 키 컸다?”
오랜만에 은혜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약속 장소인 카페에 왔다.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신 은혜가 말했다. 콧대가 1cm는 높아진 한솔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나 이제 170이다!”
“어쭈, 반올림은 아니고?”
“아냐! 진짜 딱, 170이라 했다니까?”
재작년에 받았던 건강 검진은 담당의의 징계 건과 고소 등등… 좋지 않은 이슈가 많았던 데다가 검사 도중에 나오기까지 해서 결국 한솔은 귀국 후에 다시 건강 검진을 받았다. 물론, 이번에는 기존 담당의가 검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우가 곁에 있기도 했고… 그 결과, 받아 든 검사지에는 무려 170cm라는 기적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한솔은 싱글벙글 웃었다.
“맞다. 다리 다 나았다 했잖아. 바로 6월부터 복귀하는 거야?”
“아니, 관뒀는데.”
응…?
“푸웁…! 콜록, 콜록….”
에이드를 마시고 있던 한솔이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은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티슈를 뽑아 한솔에게 건넸다.
“관, 관뒀어…? 언제…?”
“이 주 전? 그래도 배운 게 이것뿐이라 마음잡고 하려 했는데 기량 더 올라올 때까지 지켜보자면서 예비로 내리길래 때려치웠지.”
한솔이 입술을 작게 벌렸다. 은혜의 재활이 길어지면서 팬들 사이에서도 불안한 말들이 많이 오갔지만 한솔은 믿었다. 그 최은혜가 여기서 무너질 리 없었다. 예상대로 은혜는 긴 재활 끝에 예전 기량을 완벽히 회복했고 이제 복귀만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자리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더라고.”
“…….”
“…설령 수석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빛나는 에뚜왈이 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허탈하더라.”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응…?”
“너, 이적할 곳은 정했어?”
한솔은 고개를 저었다.
“신우랑 얘기해 봤는데 결혼하고 바로 사이클 맞추기로 했거든… 그, 임신하면 아무래도 무대 올라가긴 무리니까.”
한솔이 빨대를 만지작거렸다. 친구랑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
“몇 개월 남지 않았다 보니까 조건 맞는 곳 찾기가 어려워서, 아직….”
‘조건 맞는 곳’이라 표현하긴 했지만, 한솔은 마지막 백조 준비 과정에서 무용수끼리의 유치한 정치질에 질린 나머지 ‘심신 안정’이라는 이유로 마냥 빈둥대는 중이었다. 게다가 곧 결혼해야 하는걸. 한솔은 속으로 히죽 웃었다. 보통 이쯤이면 경력이 끊길까 봐 불안해한다는데 아직 백조의 여운이 안 가셔서 그런지, 아니면 인생의 봄날이 코앞이어서 그런지 한솔의 마음은 무사태평인 상태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느낌이랄까.
“그럼, 이한솔.”
“응?”
“너, 나랑 일하자.”
…에?
“뭐, 공으로 도와 달라는 건 아니고. 몸값은 제대로 쳐 줄 테니까 파트너 좀 해 줘.”
“어… 어? 아니, 나 지금 이야기 흐름을 못 따라가겠는데…? 방금 발레단 그만뒀다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그럼…?”
“내가 만들려고.”
한솔이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네가?!”
“어. 뭐, 처음부터 프로 꿈꾸는 건 아니고… 취미로 몇 년 굴리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여기 무사태평한 성격이 한 분 더 계셨다.
“어차피 지금 쉬고 있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클래스라도 보러 와. 그래도 다들 무용과 출신이라 기본은 돼 있으니까 나쁘지 않을 거야.”
그러면서 연습실은 어디 있고, 무슨 작품을 생각하고 있고, 의상 대여는 어떻고… 뭔가를 끊임없이 설명해 주는데 듣던 한솔의 귀도 솔깃했다. 특히 인성 면접을 빡세게 해서 성별 편견 있는 놈들은 싹 걸러 냈다는 말이 참 와닿았다. 들어보니까 멤버도 꽤 되는 것 같고…. 본격적인 무대로 가게 되면 개인 자산으론 어림도 없겠지만 소규모 정도라면… 음….
“그럴…까…?”
은혜가 씩 웃었다.
“내일도 되는데 내일 올래?”
“그래도 돼? 연습 방해되는 거 아냐…?”
천상 무용수라 그런지 오랜만에 클래스 구경할 생각에 설레서 얼굴이 발긋해진 한솔을 보며 은혜는 자애롭게 웃었다.
“너는 언제나 환영이지.”
흡사 그물망에 걸린 대어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하기로 했어?”
“응….”
한솔은 신우의 겉옷을 받아 주며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직접 보니까 재밌어 보여서….”
자신이 봐도 스스로가 너무 팔랑귀인 것 같아 민망해하는데 신우가 한솔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네가 하고 싶은 거면 된 거야.”
신우라면 그렇게 말해 줄 것 같았다. 한솔은 활짝 웃었다.
“그런데 신우야.”
“응.”
“너 은혜한테 나 만지지 말라 그랬어?”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고 있던 신우의 손이 멈칫한다.
“응? 그랬어?”
“…….”
“막 쪼물딱거리지 말라구 협박했… 으앗!”
알파는 옆에서 쫑알쫑알거리는 오메가를 단숨에 품에 안더니 욕실로 향했다. 달칵, 욕실 문이 닫힌다.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욕실 안에서 한솔의 즐거운 비명이 들렸다.
“어쩌지….”
가벼운 취미 발레단이지만 하나같이 이력은 평범치 않은 라라 발레 단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인천 문전도 꽉 찼대요?”
“네… 그래도 소극장은 회전율이 빠르니까 기다리면 나오지 않을까요.”
모두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최소한 한 번 이상은 무대에 서 본 사람들은 안다. 무대라는 게 얼마나 마력 있는 공간인지. 아주 작은 단상 위라도 좋다. 단 한 명의 관객만 있다면 그들은 영원히 춤출 수 있다. 바로 그곳이, 무대였다. 자리가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발레단이 소규모인 만큼 대극장을 빌릴 순 없었다. 예산 낭비도 낭비지만, 일단 이 인원으로는 그런 큰 공간을 빈자리 없이 채울 수 없었다. 완성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들 씨름하여 머리를 짚는데 혼자서 눈을 굴리고 있던 한솔이 삐죽 손을 들어 올렸다.
“저어….”
열네 쌍의 시선이 한솔에게 집중됐다.
“청남에 아트 센터가 곧 오픈 예정이던데, 거긴 어떠세요?”
“청남…? 아, 그 천성 아트 센터요? 거기 엄청 크던데… 될까요?”
“맞아. 소극장은 이미 예약 꽉 찼을 것 같은데… 신설이라.”
다들 새로운 주제로 웅성거리는데 최은혜가 눈을 번쩍이더니 한솔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아 왔다.
“믿는다, 이한솔.”
한솔은 볼을 긁적였다.
“공짜는 안 돼….”
“자존심이 있지, 바라지도 않아. 자리만 있으면 돼.”
“한 번 물어볼게.”
다들 어리둥절해하는데 이미 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시원한 얼굴이 된 은혜가, 아니 단장님이 손뼉을 짝짝 쳤다.
“자, 바 다시 시작합니다.”
취미라는 이름을 달고 있긴 하지만, 다들 오래 발레를 해 왔기 때문인지 연습은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분명, 현직만큼 기량이 안 올라오는 이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런 이들도 최은혜와 이한솔처럼 무대에 오래 섰던 경험자들을 보고 배우며 빠르게 늘었다. 이곳은 일종의 도피처인 셈이다. 발레가 너무 좋지만, 가느다란 바늘구멍을 뚫지 못한 사람들- 혹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또 다른 하루가 저물고, 한솔은 단원들이 떠난 연습실에서 마지막까지 연습하다가 단장실을 찾았다. 단장실이라 부르긴 하지만 다 같이 여기서 밥도 먹고 피드백도 나누는 그런 개방된 곳이다. 그래도 단장이라고 특별히 마련된 개인 책상에 앉아 오늘도 열심히 머리를 쥐어 잡은 채 서류를 파고 있는 은혜에게 한솔이 다가갔다.
“뭐 해?”
“공연 날 스텝 뽑으려는데… 하나같이 다 마음에 안 들어.”
은혜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때려치울까?!’ 한다. 한솔은 은혜의 어깨를 토닥토닥거렸다. 저래 봬도 누구보다 이 발레단에 진심인 사람이 은혜라는 걸 알고 있다.
“이것 좀 봐 봐. 이 사람 어때? 그래도 극장 스텝 경력이 있긴 한데… 근데 왜 죄다 한 달을 못 넘어?”
은혜가 한 사람의 이력서를 보여 줬다.
「김재원」
“그러고 보니 네 동문 아냐? 연영과네?”
한솔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어… 이 선배….”
“선배야? 아는 사람?”
“응… 그, 성추행범인데.”
“…….”
“조별 과제도 같이 했었는데 탈주했었어….”
은혜는 조용히 그 이력서를 한 곳에 넣었다. 탈락한 이력서들을 모아 둔 곳이다.
“아, 모르겠다! 내일 생각할래. 집에나 가자. 뇌 썼더니 배고파.”
“몸을 써서 배고픈 건 아니고?”
두 사람은 키득거리며 연습실을 나왔다. 연습실 문을 잠그고 건물을 나오자 벌써 달이 환하게 뜬 늦은 밤이었다. 동그란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문득, 최은혜가 말했다.
“이한솔.”
“응?”
“고맙다.”
한솔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은혜의 손을 꾹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보름달이 환하게 두 사람의 앞길을 밝혔다. 밤길을 불빛과 서로에 의지한 채 걸어가는 두 친구의 모습이 정다워 보였다.
짝짝짝짝!!
예상보다 늦게 올리게 된 창단 기념 공연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작품 제목은 ‘신데렐라’. 원래는 모던 쪽으로 계획했던 것이, 극장도 잡히고 입소문을 타면서 단원들이 늘었다. 그래서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해 보자며 소극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작품인 신데렐라로 다시 준비하게 되었다.
지인들만 초청해 올린 작은 공연이었지만 커튼콜에서 인사를 하는 단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고 상기되어 있었다. 기분 좋은 고양감. 근 두 달 사이, 연습실 불이 꺼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서로가 최선을 다했음을 알고 있었다. 주역 둘을 제외하곤 아직 솔리스트 쪽은 무대에서 불안정한 면이 많았지만 군무 하나만큼은 프로에 뒤지지 않는다고 한솔은 내심 생각했다. 단체가 하나가 되어 상승세에 탔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기분. 이미 완성되어 체계가 잡힌 큰 발레단에서만 있다가 이렇게 막 커 가는 단체에 있으니 느낌이 이상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예나, 고생했어! 조심히 돌아가.”
“네! 안녕히 계세요, 쌤!”
신데렐라에는 어린이 무용수도 필요했기 때문에 천성 재단에서 후원하고 있는 아이들 몇 명을 오디션을 통해 뽑았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예나였다. 어느새 훌쩍 커 버린 꼬마 숙녀님을 배웅하고 한솔은 대기실로 향했다. 작품을 준비하며 점차 이곳에 진심이 된 한솔은 고민 끝에 유 회장님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후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전에 신우가 말했던 백지 수표가 진심이셨는지 회장님은 흔쾌히 후원을 약속해 주셨다. 정말 배포가 남다르신 분이다.
덕분에 천성 아트 센터 소속이 되어 재단에서 후원하는 아이들을 만나 볼 수도 있고, 돈이 많다는 소문이 나서 단원들도 늘었다. 극장 걱정을 덜어도 된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거기에 예비 새아가가 맨땅에서 삽질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우셨는지 굉장히 큰 패션 업체를 운영하는 문 대표님이 의상을 지원해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남는 예산을 무용수들의 레슨과 연습실, 부상 방지 등에 투자할 수 있었다. 단원들의 실력은 나날이 성장했다. 좋은 선순환의 예시라 할 수 있었다.
똑똑-.
가족들의 지지, 신우의 응원, 친구들의 축하가 담긴 말-.
너무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나니 약한 탄력감이 들었다. 잠시 구석진 분장실로 도망쳐 체력을 충전하고 있던 한솔은 문을 일정한 박자로 두들기는 소리에 눈을 반짝 떴다. 누구지? 잠깐 쉰다 말했는데….
“누구세요?”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한솔이 문 쪽으로 다가갔다. 달칵- 분장실 문을 열자, 어둑한 바깥쪽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윤아?”
바깥 복도에 수줍게 서 있는 이를 알아본 한솔이 반가운 얼굴로 소리쳤다. 정 윤. 목소리를 잃은 천사. 한솔이 아직까지 후원하고 있는 아이기도 했다. 열 살의 왜소했던 소년이, 열여덟 살의 다부진 체격의 소년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한솔보다 키도 컸다.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한솔의 나이가 된 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한솔이 와- 하고 감탄했다.
“윤이 너 정말 많이 컸다.”
몸은 크긴 했어도 여전히 순박한 얼굴을 한 소년이 눈을 굴리며 민망해한다. 한솔은 작게 웃으며 어서 들어오라며 분장실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윤이 또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조심스럽게 분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나 싶어서 초대장을 보내긴 했는데… 정말로 와 줄 줄은 몰랐다. 한솔이 기분 좋게 웃었다.
“나 기억해? 까먹은 거 아니야?”
한솔이 짓궂게 묻자 얼음이 된 윤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선 등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작은 수첩이었다.
「기억해요.」
덩치에 안 맞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글씨에 한솔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형이」
「저 후원해주신 것도 알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한솔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이거」
「열심히 만들긴 했는데」
「그」
「마음에 안 드시면 버리셔도 돼요.」
윤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큼지막한 선물 상자를 꺼내더니 한솔에게 수줍게 내밀었다. 당황한 한솔이 눈을 깜박이며 윤과 선물 상자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러자 윤이 커다란 손으로 또 꼼질꼼질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결혼하신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마지막 다섯 글자는 어쩐지 꾹꾹 눌러쓴 것처럼 잉크가 번져 있었다. 한솔은 수첩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고마워, 지금 열어 봐도 돼?”
…끄덕.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의 포장을 열었다.
“우와….”
그건 유리로 만든 토슈즈였다. 아랫부분은 별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같이 검푸르게 반짝반짝 빛났다. 꼭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 같네. 한솔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솔이 말했다.
“사진 찍을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커다란 덩치의 소년이 엉거주춤 한솔의 곁에 섰다. 찰칵- 한솔은 눈꼬리를 휘며 윤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돌려주었다. 그러자 한참 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던 윤이 한솔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소년은 이제 마음만큼 가벼워진 가방을 멨다. 조금 후련해진 얼굴이 된 윤이 작별을 고했다.
「행복하세요.」
“응, 고마워. 윤아. 잘 가.”
윤이 돌아가고, 적막이 내려앉은 분장실에 또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신우였다. 한솔이 웃으며 알파를 반기자 남자가 고개 숙여 한솔의 아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반지가 소용이 없네.”
“아직 애잖아, 응?”
한솔이 한 번만 봐 달라고 애교 있게 말하자 웃음기 어린 한숨을 내쉰 알파가 유리 구두를 집는다. 그리고 한솔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선 오메가의 발에 반짝이는 유리 구두를 가져다 댔다.
“안 맞아.”
“장식품이니까.”
이로써 유리 구두는 무사히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솔의 소중한 수집품 모음에 별하늘 유리구두가 추가된 날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으이구, 얘가 언제 이렇게 커서 결혼을 한데. 축하한다, 이한솔.”
“응! 고마워! 헤헤-.”
직접 청첩장을 은혜에게 전달하자 은혜가 한솔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한솔은 행복하게 웃었다.
[시간 왜 이렇게 빠름? 우리가 벌써 결혼할 나이라고?]
막 졸업을 하고 취준의 굴레에 빠져 있는 수연에게는 온라인 청접장과 전화로 청첩장 전달을 대신했다. 한솔은 맛있는 거 많이 있으니까 시간 되면 오라고 말했다. 수연은 진지하게 꼭 가겠다고 답했다.
“…아직, 못 정했어?”
“으응….”
“어, 어떡하지? 그럼… 편집본을 나눠서….”
윤건이 긴 시간 촬영한 ‘이야기’의 제목은 한솔이 짓기로 했다. 비록, 아직까지도 결정을 하지 못해서 윤건을 곤란하게 만들긴 했지만… 한솔은 머리를 싸매고 있는 윤건의 앞에 하얀 청첩장을 내밀었다. 윤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고마워, 윤건아. 너 덕분에 좋은 추억 많이 남길 수 있었어. 이거 청첩장인데, 시간 되면 꼭 와 줘!”
윤건은 청첩장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내가 정말 가도 돼…?”
“응, 당연하지.”
센터를 다니다가 거기로 봉사를 온 유명 배우의 눈에 띄어 신인 배우로서 필모를 쌓고 있는 하윤이 수줍게 물었다. 한솔은 미리 사인 받아 놔야 되니까 꼭 오라고 손가락 약속을 내밀었다. 두 새끼손가락이 정답게 얽혔다.
그 외에도 세렌디피티 멤버들, 한솔을 지금까지 이끌어 준 감사한 은사님들, 영국에서 만난 인연, 현 발레단의 동료들-.
한솔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범진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걸 자신에게 주는 게 맞냐고 물었을 때, 한솔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우가 있는지 물었지만 해외 투어를 나간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한솔은 범진에게 꼭 전해 주라며 청첩장을 건네고 아쉽게 등을 돌렸다. 밤하늘의 뭇별 위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별빛이 되어 얽혔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온 봄. 3월.
매화가 활짝 만개한다. 천연한 아름다움. 그리고 매화 향기를 가진 신부는 화려한 부케를 안고 만개한 매화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잘 먹고 잘살아라, 이한솔. 밖에서 커퀴 짓은 그만하고. 이제 집에서 해.”
“응! 헤헤.”
은혜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 새하얀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는 한솔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드레스 어디서 했어? 백조 의상이랑 닮았다?”
“아, 이거 어머님이… 웨딩 촬영한 거 보시고 이러면 좋을 것 같다 하셔서….”
한솔이 쑥스럽게 웃었다. 원래는 편하게 정장으로 할까 했는데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이럴 때야말로 힘을 팍 줘야 된다면서 어머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친정 쪽은 아무래도 이런 쪽으론 섬세함이 부족한 사람들이라… 어릴 때부터 정말 친자식 대하듯 대해 주신 게 감사할 따름이다.
“은혜야, 사진 찍자.”
“아, 잠깐만. 나 옷 튀진 않지? 들러리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는데.”
은혜가 옷차림을 점검하고선 한솔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련된 의자에 두 사람이 앉자 도우미가 한솔의 드레스와 소품을 정리해 준다. 촬영 기사가 말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찰칵!
찬란하도록 빛나는 순간이 사진 속에 담겼다. 그 뒤로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또 다른 방문객들이 몰려오자 은혜는 먼저 들어가 있겠다며 쿨하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한솔은 정신이 없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한솔의 앞날을 축복해 주기 위해 와 주었다. 아마 지금쯤, 신우도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회장님 쪽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한솔아.”
“하윤아!”
중간에 하윤이 들렀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며 조금 머뭇거리던 하윤이 그에게 결혼 축하한다고 말했다. 한솔은 웃으며 감사 인사로 화답했다.
“있잖아, 저번에 네가 말한 거.”
“응?”
사진을 찍고 촬영 기사가 카메라를 확인하는 사이 하윤이 비밀스럽게 운을 뗐다. 한솔이 눈을 깜박이자, 하윤이 ‘그제… 통화한 거 말야’ 한다.
“아!”
한솔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설마 메리지 블루인가?
여느 때처럼 평범한 얘기를 나누다가 나온 이야기였다. 한솔은 분명 행복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연인이 아닌 ‘부부’가 된다 하더라도 분명 변치 않을 거라는 사실을 믿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불안감이 한솔의 밤잠을 괴롭힌 것은 사실이다. 아마, 신우가 옆자리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식과 그 후 일정 때문에 일을 정리하느라 밤늦게까지 귀가하지 못하는 알파를 떠올리며 한솔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하는 게 무서워서 그래? 아니면 시댁 문제…?]
-그건 아냐. 지금 너무너무 행복한데… 시부모님들도 잘해 주시는데…. 그냥 내가 나를 너무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솔이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정말로 서로를 책임지는 관계가 될 텐데… 이러면, 신우를 기만하는 걸까…?
특별한 상황에서 친구가 돼서 그런지 두 사람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빨리 친해진 걸지도 모른다.
한솔이 그날의 대화를 떠올리며 어리둥절해하는데 하윤이 두 주먹을 꼭 움켜쥐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라고 명쾌하게 답변을 줄 순 없지만….”
“…….”
“그분은… 네가 말하든 하지 않든 널 사랑할 거야.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한솔의 눈망울이 옅게 흔들렸다.
“응, 고마워!”
진심으로 환하게 웃은 한솔이 팔을 벌려 하윤을 안았다. 배우님의 사인을 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따뜻한 포옹을 마친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웃는다. 곧 식이 시작하기 때문에 하윤이 먼저 대기실을 나갔다. 촬영팀이 자리를 옮기고 도우미분들이 드레스를 정리해 주는 사이 두근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던 한솔은 대기실 입구에 기대서 있는 검은 인영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권, 정우…?”
한솔이 놀라 소리치자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던 검은 정장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항상 교복을 삐뚤게 입고, 툭하면 넥타이도 빼놓고 다니던 소년. 그 소년이 자라 이제는 번듯한 정장을 차려입고 유명 콘서트의 솔리스트로 서거나 리사이틀을 다니는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일정 때문에 못 올 줄 알았는데! 한솔이 환하게 웃으며 언제 왔냐고 묻자, 순백의 백조 같은 한솔을 바라본 정우가 짧게 답했다.
“방금.”
“어쩌지… 촬영 기사님 좀 전에 가셨는데….”
한솔이 아쉬워하자 정우는 됐다고 말했다. 물론, 거기서 물러설 한솔이 아니어서 한솔은 기어코 핸드폰 사진이라도 찍길 원했다. 귀찮아하던 정우는 한솔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한솔의 곁에 섰다.
“좀 웃어 봐!”
눈꼬리를 접고 환하게 웃었던 한솔은 무표정한 얼굴로 비스듬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진 속의 권정우를 보더니 볼멘소리를 했다. 정우는 이게 원래 내 표정인데 어쩌라는 식이다. 저러니까 팬들이 사실 권정우란 인간은 따로 있고 콘서트에 있는 건 로봇 아니냐고 그러지…. 소름 끼치도록 절묘한 박자 감각과 완벽한 기교, 그리고 무표정한 팬 서비스가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한솔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신부님, 이제 입장 준비하실게요.”
“앗, 네!”
한솔은 정우를 돌아보며 ‘갈게, 안에서 봐.’ 하고 웃었다. 정우는 돌아서는 하얀 뒤태를 긴 시간 바라보다가 마지막 베일 끝자락까지 사라져 보이지 않자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말했다.
“잘 살아라.”
피식 웃는 남자의 얼굴은 미련 없이 후련해 보였다.
[자 그럼, 오늘의 주인공- 신랑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신랑! 입장!]
정교한 반주가 깔렸다.
누가 봐도 훤칠하고 잘생긴 알파가 양쪽을 향해 번듯하게 인사를 하며 버진로드를 걸었다. 사회를 맡은 성민이 짓궂은 목소리로 ‘아, 이렇게 또 한 명이 가게 되나요!’ 한 탓에 와르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신우는 단 위에 도착하자 뒤를 돌아 하객들을 향해 인사했다. 어디선가 ‘잘생겼다!’ 하는 소리가 들린 탓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네, 그럼 이제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을 만나 봐야죠. 제가 아까 사알짝 봤는데, 신랑 주기가 조금 아까운 것 같습니다. 네, 신랑이 노려보네요.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니 신부 입장하겠습니다. 신부! 입장!]
버진로드 끝자락에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천천히 드러나는 신부의 실루엣.
비극의 종말을 딛고 일어선 찬연한 백조가 결말 없는 이야기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신우야! …! 으앙!
-…솔아!!
놀이터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던 어린 한솔이 데리러 온 신우를 발견하고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덜 여문 발로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달려가다가 꽈당- 하고 넘어지고 만다. 흐잉…. 커다란 눈망울에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덩달아 깜짝 놀란 신우가 한달음에 한솔에게 다가왔다.
-어디 봐, 많이 아파?
양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작은 몸을 일으킨 신우가 무릎을 접고 앉아 살이 까져 붉게 물이 든 한솔의 무릎을 후후- 불었다. 어린 날의 기억 위로 분홍빛 꽃잎이 휘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훌쩍….
신우가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이다.
신우가 없으니 뭘 해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기다리다 지친 한솔은 유모 몰래 집을 나왔다. 그리고 정처 없이 신우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혼자서 밖에 나온 게 처음인 한솔이 이름도 모르는 초등학교를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결국 다리가 아파진 한솔은 어느 꽃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담벼락 앞에 주저앉은 채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투둑, 투둑….
그런데 그날은 일진이 사나운 날인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흐리던 하늘에서 하나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쏴아아-.
곧 소나기가 되었다.
-신우야….
한솔은 지금 당장 보고 싶은 이의 이름을 불렀다. 보고 싶어… 찬비를 맞아 오들오들 떨리는 몸이 느껴진다. 따뜻한 체온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그 위로,
-하아, 하아… 이한솔.
투명한 우산 하나가 드리워졌다.
-…! 신우…?
깜짝 놀란 한솔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신우의 몸이 무너지듯 한솔을 안았다. 툭, 데구루루… 옆으로 굴러떨어진 우산. 무거운 빗방울을 매달고 있던 분홍색 꽃잎 한 장이 팔랑이며 물웅덩이 위로 내려앉았다
-물이….
열넷의 소년이 바위 결이 보일 정도로 말라 버린 적막한 계곡 위에 서 있다. 그렇게 오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항상 안 된다는 말 한마디에 포기해야 했던 곳. 점차 말라 가던 계곡을 뒤로하고 떠났던 장소에 5년 만에 돌아온 한솔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다 말랐네….
-…….
-아쉽다….
그런 한솔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신우가 한솔의 손을 꼭 잡아 왔다.
-다시,
-…….
-흐를 거야.
반드시.
손을 맞잡고 마른 계곡을 바라보는 소년들의 모습 위로 분홍색 꽃잎이 흩날렸다-.
작은 연못과 돌담으로 꾸며진 곳. 머리 위에선 하얀 눈이 펑펑 내렸고 투명한 유리 벽이 새하얗게 변한 세상을 비췄다. 고요한 정적 속에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저기- 언뜻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이는 듯했다. 바깥 구경을 하라고 돌출된 형태로 만들어둔 부근에선 높다란 꽃나무가 눈이 쌓인 채로 무거워진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곳에 신우가 있었다.
-하아, 하아….
의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꽃다발. 유리 벽 앞에 서서 일찍이 핀 꽃봉오리를 구경하고 있던 신우가 느리게 뒤를 돌았다. 구김 없는 정장 차림이 미치도록 잘 어울리는 남자. 두 손으로 무릎을 잡고 잠시 숨을 고르던 한솔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몸을 바로 했다.
-…….
-…….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잠깐의 고요함. 그리고 그 정적을 깨고 한솔이 신우에게 달려들었다. 타닥, 탁-.
-나빠.
-응, 미안해.
-나쁘다고!
-미안.
신우는 달려드는 한솔을 안정적으로 받쳤다. 색색- 가쁜 숨을 몰아쉬던 한솔이 어느 순간 입술을 앙, 다물더니 주먹 쥔 손으로 신우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그리고 한참을 씩씩대다가 신우의 목을 와락 끌어안는다.
-그래도 좋아해.
-…….
-내가 많이 좋아해, 신우야.
한솔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신우가 답했다.
-나도.
-…….
-…좋아해, 솔아.
입술이 가볍게 맞부딪혔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섣달도 되지 못해 봉오리를 피운 꽃 한 송이가 두 사람의 뒤에서 살랑살랑 눈을 맞았다.
신우야… 보고 싶어….
불이 번지고 있었다.
탁,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세상이 흑백으로 물들어 간다.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올올이 풀려 나가는 색과 향기. 무색무취의 세상 속에서 단 하나, 달콤한 매화 향기만이 그의 후각을 간지럽혔다. 쉼 없이 달리던 알파는 거대한 분수대와 그 끝자락에 걸쳐져 있는 새하얀 팔을 보고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하아, 하아….
쓰러지듯 분수대 앞에 주저앉은 알파가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오메가의 몸을 물속에서 끌어 올렸다. 촤아악-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심장 박동이 맞닿은 가슴을 통해 느껴졌다. 차갑게 식어 있는 몸을 소중히 보듬은 알파는 정반대로 열이 펄펄 끓는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 위로 후두둑 물기가 떨어졌다.
-…이번에도….
-…….
-들켰네….
그러자, 마치 기적처럼-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한솔이 신우를 올려다봤다.
옅게 떨리는 손끝으로 신우의 눈가를 가만가만 쓰다듬던 한솔이 포근히 웃었다. 차가운 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눈물이 희게 질려 있던 손끝을 덥혔다. 알파는 눈을 내리감는다. 한솔의 입술에 경건하게 입을 맞춘 신우가 느리게 입술을 떼어 내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
-…집에 가자, 솔아.
한솔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감으며 말했다.
-응….
예식장에 장식된 매화나무가 풍성한 꽃가지를 드리운다. 버진로드를 걸어가는 내내 반짝이는 과거의 기억들이 앞길을 밝혔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잘 부탁하네.”
“네, 아버님.”
네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한솔의 손을 붙잡고 있던 이 의원이 천천히 신우의 손 위에 한솔의 손을 올려놓았다.
마침내, 긴 길의 끝에서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
“이, 이거 꼭 해야 돼?”
서로 맞절도 하고 혼인 서약도 끝냈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하는데 어쩌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한솔은 순간 눈물이 나와 버렸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던 순간에 갑자기 나온 눈물이라 한솔도 당황하고 신우도 당황했다. 그리고 한솔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마치고 남은 절차는 약 20년간 써 왔던 아버지의 초커를 벗고 신우의 이름이 새겨진 초커를 쓰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이 절차는 신부 쪽 친구들이 준비하는 것이 관례였다. 신랑은 신부를 얻기 위해선 신부 쪽 친구들이 준비한 시련을 통과해야만 한다. 한솔은 예식장 내에 있는 장식용 작은 연못 앞에 서서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이 드레스가 얼마짜린데…!
“아, 빨리빨리 하쇼.”
은혜가 짝다리를 짚고선 몹시 양아치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솔은 울상을 지었고 신우는 덤덤했다. 옆에서 성민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첫날밤 보내기도 전에 신부한테 물 묻히게 생겼네, 어쩌냐?”
실내 연못 반대쪽에 있는 매화나무 가지에는 예식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초커 목걸이가 걸려 있다. 장식용이니 겨우 무릎 밑까지 오는 깊이였지만 신우가 한솔을 안아 올리고 초커를 가져와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한솔이 이건 아니라며 뒷걸음질을 쳤으나 곧 신우에게 들쳐 업힌 상태로 풀로 들어가게 되었다.
첨벙!
신우의 비싼 예식용 정장 바지가 짙게 물들어 간다. 연못에는 친구들이 덕담을 적어 접어 준 형형색색의 종이학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과 종이학들을 보며 한솔이 눈을 크게 떴다. 꼭 고전 속의 신비의 호수를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신우가 가지를 향해 팔을 뻗자 한솔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신우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친구들이 야유 섞인 환호를 보냈다. 다시 연못을 가로질러 돌아온 신우가 한솔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 준다. 대놓고 들으라는 듯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이한솔 자유도 안녕이다.”
“내가 보기엔 유신우가 잡혀 살 것 같은데, 백퍼.”
“오, 새로운 해석인데? 근데 일리 있어.”
달칵, 신우가 목걸이의 후크를 풀었다. 중앙에는 진주가 박힌 나비 모양 장식이 달려 있고 끈은 사슬 형태로 돼 있는 초커 목걸이였다. 신우의 손이 자신의 목 쪽으로 다가오자 한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짤랑- 사슴같이 우아한 목에 초커가 채워졌다.
“키스해!”
“키스해! 짝! 키스해! 짝!”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사람들이 주책없이 구는 걸 보고 괜스레 부끄러워진 한솔이 손부채질을 했다. 힐긋, 한솔은 신우를 올려다봤다. 그대로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홀린 듯 까치발을 들었다. 신우의 팔이 한솔의 허리에 감기고 고개가 숙어진다. 친구들이 뿌려 주는 꽃잎을 맞으며 한솔은 눈을 내리감았다.
그렇게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그래, 서로 의지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라. 신우가 원래 좀 무뚝뚝하고 섬세함이 없으니 새아가가 잘 챙기고.”
“네!”
마지막 폐백. 화사한 꽃분홍색 한복으로 갈아입은 한솔이 다소 곤히 자리에 앉아 시부모님의 덕담을 들었다. 댕기까지 한 모습이 오늘의 새신부답게 곱고 예뻤다. 덕담까지 마치자 두 사람은 절수건을 잡아 펼쳤다. 두 분께서 밤과 대추를 던져 주셨는데 어쩐 일인지 밤(딸)은 전부 굴러떨어지고 대추(아들)만 야무지게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솔이 당황해서 어어, 하는 사이 방석에 얌전히 엎드려 있던 솜이가 걸어와 굴러떨어진 밤 하나를 주워 절수건 위에 올려놓는다.
“이이가 손녀 보고 싶어 하는 건 어찌 알고 그랬대?”
“크흠….”
어머님이 호호 웃으며 말하자 아버님이 헛기침을 하셨다. 폐백실 안이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한솔아, 이거.”
신혼여행지인 지중해의 개인 섬으로 이동하기 위해 공항으로 온 길이다. 마지막까지 배웅을 나와 준 친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데 윤건이 한솔에게 작은 USB를 건넸다. 한솔이 환하게 웃었다.
“윤건아 너무 고마웠어.”
“나야말로. 덕분에 좋은 경험했는걸.”
이제 정말로 제대로 시작해 볼 마음이 들었다면서 윤건이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한솔은 윤건에게 받은 USB를 조심스럽게 케이스에 넣었다. 케이스를 넣은 가방을 품에 꼭 안고서 전용기에 탔는데 신우가 물었다.
“그래서 제목은 뭐로 했어?”
“그건 비밀! 직접 봐.”
신우가 이러기냐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영상의 제목을 뭐로 하고 싶냐는 윤건의 물음에 한솔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혼식 전날에서야 결정할 수 있었다. 예식에서 쓰인 영상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던데 아마 여기에만 담겨 있는 모양이다. 한솔이 기분 좋게 웃었다.
“신우야, 얼른!”
지중해 별장에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한솔은 신우를 재촉했다. 신우가 한솔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온다. 알파가 자리에 앉자 오메가는 듬직한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영상을 인식한 빔 프로젝트가 위잉-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체온과 기분 좋은 향기. 평화롭고 안온한 시간에 문득, 어떤 용기가 한솔을 파고들었다. 한솔이 물었다.
“있잖아.”
“응.”
“신우는… 만약, 내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어땠을 것 같아…? 그러니까… 신우가 좋아하는 그런 모습….”
알파가 한솔을 지그시 바라봤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 뭔데?”
“응…? 음… 뭐든 열심히 하고… 잘 웃고… 말도 잘 듣고…?”
마지막은 좀 양심에 찔렸다. 솔직히… 말을 잘 듣진 않았지.
“글쎄… 내가 좋아하는 건.”
“…….”
“그냥, 이한솔인데.”
조금 의기소침해 있던 한솔이 홱, 신우를 돌아봤다.
“지금의 이한솔은 부지런하고 자기 할 일에 열심히고 잘 웃고 다니지만.”
“…….”
“어릴 땐 또 아니었잖아, 기억 안 나? 늦잠꾸러기에 완전 울보였는데.”
한솔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그, 그건… 어릴 때잖아.”
“그러게. 그 울보가 언제 이렇게 커서-.”
신우가 한솔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런 것도 하게 됐지.”
난데없이 입술을 도둑맞은 한솔이 눈을 크게 떴다. 이제 자기 꺼라고 마음대로 하는 거 봐…!
“그으… 그런 거 말구… 이제 계속 쭈욱 살게 될 텐데… 내가 감춰 왔던 어떤 면이 신우를 실망시키게 될까 봐 무서워….”
한솔이 주눅 들어 말하자 신우의 눈썹이 쓱 들어 올려졌다.
“다 그런 거 아닌가.”
“응?….”
“너는 내가 너를 대할 때와 다른 사람을 대할 때가 같다고 생각해?”
눈을 깜박이던 한솔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연하잖아,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잘 보이고 싶고.”
“…….”
“잘해 주고 싶은 건.”
“…….”
“그런데 이제 결혼까지 했으니까… 아무래도 뭔가 달라지긴 하겠지. 서로 보여 주지 않았던 면을 보게 될 수도 있을 거고. 그런데 그건 자연스러운 거잖아. 내가 못 본 면이라 해서, 그게 너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한솔은 작게 숨을 삼켰다.
“내가 사랑하는 건, 그냥 이한솔이거든.”
남자는 소년처럼 짓궂게 웃었다.
“늦잠꾸러기라 해도 괜찮아. 그럼 좀 더 오래 같이 아침을 침대에서 보낼 수 있겠지. 네가 눈물이 좀 많아도, 닦아 줄 손수건이 많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래도 되도록이면,
“네가 웃었으면 좋겠어. 너는 웃는 게 제일 잘 어울리니까.”
그게 신우의 대답이었다.
한솔은 아주 느리게 날숨을 내뱉었다. 숨이 달아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다. 뭔가가 아주 충만하게 꽉 찬 느낌인데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솔이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그때.
팟-!
색색의 빛이 화면을 통해 나오기 시작했다.
「Tchaikovsky.
The Swan Lake - Suite Op.20a : Scene.」
그리고 백조의 호수를 대표하는 곡, ‘정경’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앞으로 향했다. 어둑한 빛 아래에서 인간과 흑조가 춤을 춘다. 예식장 용 영상에선 사용되지 않았던 신. 그리고 춤의 막바지가 되자 플래시가 여러 번 터지면서 흑조였던 한솔의 의상이 자연스럽게 백조 컨셉의 예식장 옷으로 바뀌었다.
클로즈업되는 화면.
서로를 애틋하게 붙잡은 이들의 모습에서 초점이 엇나가며 그 위로 하나 둘씩 글자가 떠올랐다.
이건, 솜사탕같이 달콤한,
우리들의 이야기.
코튼 캔디 로맨스 완결

কটন কেণ্ডি ৰোমাঞ্চTahanan ng mga kuwento. Tumuklas nga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