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한 남자가 걸어간다. 정장 차림에 걸맞은 반듯한 걸음걸이. 남자는 무채색의 빌딩 숲 사이를 걷고, 때로는 그중 하나에 들어가 일을 했다. 정신없이 전화를 받고 자판을 두드리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건물을 나와 지하철로 향했다. 자차는 없었기 때문에 남자는 항상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 죽은 듯이 잠을 청하는 것이 하루의 끝이었다. 세간이 몇 없는 것을 보아 배우자나 동거인은 없는 듯했다. 남자는 가족을 만나지도 친구와 약속을 잡지도 않았다. 집, 지하철, 그리고 회사. 쳇바퀴처럼 단조로운 일상이 지겨울 만도 한데 남자는 꿋꿋이 그런 일상을 고집했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도,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을 때가 있다…….
쏴아아-.
파도가 치는 절벽, 달빛에 부서지는 하얀 포말, 사나운 바람 소리가 갈길 잃은 여행자를 위협한다.
아찔한 높이-.
매서운 겨울바람이 남자의 옷가지를 거칠게 펄럭였다. 남자는 익숙한 걸음으로 절벽 위에 섰다. 상처가 난 맨발. 자신의 두 발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남자는 습윤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달빛 한 점 없는 세상이 깊게 가라앉았다.
“겨울 바다 구경을 하기에는 자리가 많이 나쁜 것 같지 않습니까.”
“…!”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려오는 타인의 목소리에 남자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남자의 얼굴에도 환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당황한 그가 무심코 한 걸음 물러서자, 투두둑- 돌 부스러기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가만히 침을 삼켰다. 손끝에 식은땀이 맺히고 움켜쥔 손바닥이 축축한 느낌이 든다. 기분 나쁜 촉감이었다.
도망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회색 코트와 머플러를 한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요.”
“…….”
“발에서 피가 나지 않습니까.”
정확한 발음과 듣기 좋은 저음. 그가 만났던 어떤 사내들보다도 손이 큰 남자였다. 남자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달빛을 등지고 선 사내의 얼굴은 음영이 내려 보이지 않았지만, 사내의 키와 체격이 무척 크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
“…….”
그 뒤로 조용히 자신을 기다리는 사내를 보며 남자는 갈등했다. 긴 고민 끝에 눈을 질끈 감은 남자가 떨리는 손을 내밀자 손끝이 닿는 느낌과 함께, 몸이 훅- 끌려갔다. 풀썩…. 난데없이 모르는 사내의 품에 안기게 된 남자는 당황한 마음에 숨을 삼킨다.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밀스러운 회원제 바에서,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돌아가던 이.
키는 크고 얼굴은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데다가 자세가 곧고 바르기 때문인지 특유의 분위기 같은 게 풍겼다. 바의 손님들은 항상 이 사내를 주시했지만 누구도 말을 걸어 볼 용기를 내진 못했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습관처럼 금요일 저녁만 되면 바를 찾아가곤 했지만 그 이상을 어찌해 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자신과 너무 비교되는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달칵-.
사내의 외관처럼 서늘하고 무거운 검은 세단의 조수석 문이 열렸다. 그가 지금 나가야 하는 걸까, 고민하는 사이 사내가 운전석에 앉았다. 나갈 타이밍을 놓친 남자는 체념하고 만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안전벨트 매세요.”
손끝이 움찔 튀었다. 남자는 조금 고민하다가 안전벨트를 맸다. 생긴 것만큼 비싼 차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모텔가 혹은 이 사내라면 호텔로 갈 수도 있겠다 싶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어둑한 풍경에 의미 없이 시선을 두던 남자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상을 눈치챘다. 빠르게 도로를 달린 세단은 부촌으로 유명한 동네에 들어서더니 깎아지를 듯 높이 솟은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저기…!”
뭔가를 물어보려던 남자는 다시 몸이 붕 뜨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의 하얀 뺨에 복숭앗빛 물이 든다. 아까는 인적없는 바닷가라 치지만, 여긴…. 결국 사내가 사는 곳으로 추정되는 공간에 들어와서야 살그머니 눈을 뜬 남자는 모던하고 심플하게 꾸며진 공간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씻어도 될까요?”
“이쪽 복도로 가서 두 번째 문이 욕실입니다. 편하게 쓰세요.”
“네… 감사합니다….”
뭔가 이상하게 마음이 헛헛했다. 뭘, 기대한 걸까. 상념을 지워 낸 남자는 사내가 알려 준 곳으로 가 물을 틀었다.
쏴아아-. 흩뿌려지는 물방울을 맞은 갈색 곱슬머리가 축 늘어진다. 조금 멍하니 물을 맞던 남자는 가만히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 상처투성이 발. 남자는 결국 조금 험하다 싶을 정도로 힘을 주어 발을 닦아 낸다. 익숙하게 안을 비워 내고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본인도 방금 씻은 건지 유독 짙어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사내가 식탁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녁 안 들었을 텐데 와서 먹어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하룻밤 달래는 게 목적이 아닌가?
입술을 꾹 깨물었던 남자는 한식 위주로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과 바깥의 겨울바람은 생각조차 안 날 정도로 훈훈한 집 안, 그리고 사내와 무척 닮은 모던하고 세련한 느낌이지만 곳곳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작은 초록 잎 화분과 다양한 액자에 걸린 사진들을 보며 뒷걸음치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정에 굶주려 있었고 이곳은 그만큼 환상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걸음 한 걸음 식탁으로 다가간 남자는 의자에 앉았다. 그의 앞에 윤기 흐르는 밥 한 공기가 내어졌다.
“…저기….”
그 혼자만 어색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도우려다가 부엌에서 내쫓긴 남자는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사내가 뒤늦게 부엌에서 나왔다. 반색을 하던 남자는 자신의 앞에 내어지는 달콤한 냄새가 나는 머그잔에 멈칫한다. 새하얀 크림이 듬뿍 올려진 코코아였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들자 자신은 커피가 든 컵을 들고 소파로 향한 사내가 탁자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남자는 원래 자리를 서성이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안 하세요?”
서류를 들여다보던 사내가 남자를 돌아봤다.
“그렇게 혼나고 싶습니까?”
“…!!”
남자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혼내는 취미는 없습니다.”
“…….”
“저쪽 방이 게스트 룸입니다. 피곤하면 먼저 쉬세요.”
그렇게 남자는 방으로 들어왔다…. 쫓겨났다는 게 맞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지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으나 포근한 침대에 누워 눈만 깜박이고 있으니 어쩐지 안심이 됐다.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남자는 그렇게 꿈조차 꾸지 않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이상한 동거 7일 차.
정확히는, 사내의 집에 얼렁뚱땅 얹혀살기 시작한 지 일주일째였다.
첫날 그렇게 잠이 들고 근래에 이렇게 개운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가벼운 기분으로 눈을 떠 보니 만 하루가 지나 있었다. …남의 집에서 염치도 없이 24시간을 자 버렸다는 뜻이다. 당황한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오자 이제 막 퇴근을 했는지 넥타이를 풀고 있던 사내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 점심도 걸렀다고 하던데 입맛 없어도 한 끼는 들도록 해요. 그러다 몸 상합니다.”
슬슬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또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저녁을 얻어먹고 양치까지 하고 방으로 돌아오자 남자는 자괴감에 빠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이놈의 침대에는 수면제라도 발라져 있는 건지 불면증이 심했던 남자는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꿈나라로 끌려가 밝아 버린 셋째 날-,
다행히 이번엔 아침 일찍 일어나긴 했지만 또 멋대로 신세 져 버렸다는 생각에 남자는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젠 첫날의 긴장감도 다 잊고 그냥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달칵-. 남자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오자 시침이 7을 가리키지도 않는 시간인데도 벌써 준비를 끝내고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원나잇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대로 초대받은 입장도 아닌 남자로서는 몹시 어색한 인사였다.
“네, 잘 잤습니까.”
물론, 그걸 받아 주는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남자가 이제 어쩌지… 하는 얼굴로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사내가 정장 재킷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당황해서 사내를 올려다보자 상대가 말했다.
“1층에 개인 병원 예약해 놨으니까 6시 전에 갔다 와요.”
그러니까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데…?
천성적으로 거절을 잘 못 하는 데다가 상대가 돔이나 마스터같이 굴면 더더욱 거절을 못 하는 게 그라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만만치 않게 가스라이팅도 당했고 상처도 받았지만…. 남자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서 사내가 출근을 하고 거실에 덩그러니 남은 남자는 몇 번 제자리를 서성이다가 밖으로 나왔다. 신발도 없이 사내의 집에 온 탓에 현관 앞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마치 그런 그를 위해 준비해 두었다는 듯이 가지런히 정리된 새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어딜 봐도 그 사내의 사이즈로는 보이지 않는… 발에 꼭 맞는 신발이었다. 남자는 꽤 오랜 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내가 언급한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신이 지갑도 없고 핸드폰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1201호 예약자분이시죠?”
“네?”
뭘 해야 될지 모르겠는 상황에서 그를 구제해 준 이는 어떤 친절한 간호사였다. 그녀에게 끌려가 진료를 받고 나오니 오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남자는 붕대가 감긴 자신의 발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기분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아직 안 들어갔습니까.”
“…!”
남자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던 세계에서 갑작스럽게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사내가 유명 일식집 초밥이 들어 있는 봉지를 들어 올렸다.
“생각해 보니, 키 번호를 안 알려 준 것 같더군요.”
“…….”
“점심, 같이 하겠습니까.”
검은 세계가 지워진다. 사내의 존재감에 물 밀리듯 깨끗하게 지워진 세계가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현실이 채웠다. 남자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따라오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12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기억해 둬요.”
삑삑삑-. 사내가 거리낌 없이 키패드를 눌렀다. 남자가 멀뚱거리는 얼굴로 사내를 올려다보자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가 ‘한 번 더?’ 하고 물었다.
대체, 이 사람은 뭘까.
여전히 말이 없는 식사 시간을 보내고 다시 사내를 배웅한 남자는 침대에 털썩 누우며 생각했다. 그다음 날도, 그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날은 날이 좋다며 산책을 권했고 또 어떤 날은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키 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른 날-.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사내와의 말 없는 저녁 식사를 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똑똑.
이 이상한 동거에는 자연스럽게 성립된 규칙이 하나 있다. 어느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남자는 절대 사내의 개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이를 테면 그의 방이라든지. 그래서 처음으로 그의 방문을 두드리게 되었을 때, 남자의 심장은 쿵쿵쿵 미친 듯이 뛰었다. 밤 열시. 누가 봐도 민폐일 게 분명한 시각이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숨이 안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면서 사내의 체향이 훅 밀려왔다. 몸을 긴장시키는 향기에 남자의 고개가 더더욱 숙어진다. 머리 위로 나른한 시선이 떨어졌다. 시야 바로 앞에 보이는 상대의 슬리퍼. 바닥을 짚은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잘….”
“…….”
“…못했어요… 혼내 주세요….”
목소리가 여리게 떨렸다. 사내의 시선이 동그란 뒤통수에서 떨리는 팔로 향하는 것이 느껴진다. 남자는 손끝을 꾹 말아 쥐었다. 사내가 말했다.
“봐줄 생각은 없는데-.”
“…….”
“진심입니까.”
침이 꼴깍 넘어갔다.
“…네.”
무심한 시선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한 걸음 옆으로 돌아 방 안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 준 사내가 말했다.
“들어와요.”
그렇게 허락이 떨어졌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기분으로 떨리는 몸을 일으키려던 남자는 곧장 종아리가 지그시 밟히는 느낌에 흠칫 놀라 다시 주저앉았다. 발이 떨어져 나갔다. 위에서 나직한 저음이 들렸다.
“일어나라곤 안 했을 텐데.”
남자의 뺨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결국 엉금엉금 기어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깔끔하고 단정한 방이다. 탁자에는 방금 전까지 살피고 있었을 거라 추정되는 서류 더미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모든 가구와 생활용품이 제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침대 위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방. 그럼에도 이곳이 그의 보금자리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한 사람이 오랜 생활을 해야만 맡아지는 특유의 체향 같은 게 맡아졌기 때문이다. 사람을 손끝 발끝까지 긴장시키면서도 한없이 무르게 만드는 그런 향기-.
“초보가 버틸 수 있을 만한 게 없는데.”
“…초보 아니에요.”
사내가 케인을 고르며 말하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욱해서 대답했다. 서브의 말대답에 사내의 눈썹이 가파르게 치솟는 것이 보인다. 움찔한 남자가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거리자 단 몇 걸음 만에 거리를 좁힌 사내가 케인의 뭉툭한 뒷부분으로 남자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럼.”
“…….”
“초보도 아니면서 지금까지 도망 안 치고 뭐 했어?”
…남자는 억울해졌다. 본인이 호구 잡힐 걸 더 걱정해야 되는 거 아니야? 자신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어서 비싼 걸 훔쳐 가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 생각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투명한 얼굴을 보고 사내는 피식 웃었다.
“말 잘 듣는 서브는 아니죠?”
“…….”
“속 좀 썩였겠는데-.”
남자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말 잘 들어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꽤 억울한 표정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사내가 그의 앞에 무릎을 접고 앉더니 자신의 허벅지를 검지로 툭툭 두들겼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럼 말해 봐요.”
“…….”
“뭘 잘못한 것 같아.”
남자는 침묵했다.
-그렇게 혼나고 싶습니까?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혼내는 취미는 없습니다.
결국 원점이었다. 남자는 깊게 심호흡했다.
“위험한… 곳에 갔어요. 그치만… 그치만 정말 뛰어내릴 생각은 없었어요… 그럴 용기도 없고….”
“…….”
“그냥… 거길 가면….”
“…….”
“조금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어서….”
남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곧, 떨어질 질책을 기다리는데-.
“개인적으로 삶을 책임지는 건 본인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
“시작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던 만큼 마지막 정돈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다고 봐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결국 그 모든 부담과 짐은 개인이 져야 하는 것인데 타인의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다만, 인간이란 동물은 많은 인연에 묶여 사는 만큼 그 실타래의 끝을 붙잡고 절벽 끝에서 돌아오느냐 그대로 뛰어내리느냐의 차이겠죠.”
그러나, 그 모든 상황에서도
“당신은 좀 더 당신을 사랑했어야 합니다.”
“…….”
“아무 의미 없는 누군가가 어떤 비정한 말을 한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오직 당신만큼은.”
사내는 손을 뻗어 남자의 발목을 감쌌다.
“애꿎은 발은 대체 왜 혹사시킵니까?”
그게 사내의 질책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만, 지지 마세요…! 못생겼….”
“당신의 뿌리나 마찬가지인 곳인데 너무 가혹한 평가 아닙니까.”
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절…, 아세요…?”
그러자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럼 생판 모르는 남을 납치까지 해서 가둬 두겠습니까?”
남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납치…는 맞는 것 같지만 가둬 두지는 않았는데….
그는 열심히 기억의 저장고를 뒤졌다. 과거에 저런 미남을 만났더라면 잊을 리 없는데-. 다만, 너무 오래 쓰지 않아서인지 기억 저편은 먼지만 풀풀 날리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 씹었다.
“무대에서 별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
사고, 그날의 악몽.
“아마, 그곳에 있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된 초라한 무용수의 이야기였다.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자 사내는 커다란 손을 들어 축축한 뺨을 쓸어내렸다. 깨지기 직전의 유리 공예품처럼 연약하고 섬세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별빛처럼 반짝이고 보석보다 아름다운 광채를 흩뿌린다. 자기주장도 강하고 바짝 엎드리는 것 같으면서도 저 작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으나- 그는 웃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번거로움이 즐거웠다. 원래 자신 같은 족속들은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을 애정하는 법이니까.
“어쩔 수 없네.”
그가 남자를 들어 올리자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을 깜박이던 남자가 깜짝 놀라 사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사내는 상대적으로 가녀린 몸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 주자 붉은 입술이 ‘왜…?’ 하고 달싹였다.
“분위기 다 깨 놓은 게 누군데.”
“…그치만….”
“자요. 한숨 자면 훨씬 나을 테니까.”
그러자 이번엔 또 갖고 싶은 걸 가지지 못한 어린애처럼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다.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기자 상대가 두 눈을 꼭 감았다. 이런 것도 귀여워 보이다니 조금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또 멈출 마음은 들지 않는다는 게 진정 문제겠지만-.
“있잖아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두 눈을 꼭 감고 있던 남자가 꿈결에 달싹이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이에요.”
“…….”
“그쪽은요…?”
갑자기 웬 자기소개 시간인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는 상대를 알아도 상대는 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내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가 남자를 돌아봤다.
“나는-.”
“…….”
“유신우입니다, 이한솔 씨.”
그게 두 사람의 첫인사였다.
깜박-.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였다 눈을 뜬 한솔이 흐리게 번진 눈앞을 바라봤다. 머리맡에는 솜이가 몸을 둥글게 만 채 잠들어 있고 눈앞에는 조각상처럼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한솔은 자신을 품에 안고 잠이 든 신우를 보며 조금 헷갈리는 기분이 들었다. 꿈속의 존재와 너무 닮은 탓에 현실과 꿈이 구별이 안 된 탓이다. 그렇게 아리송한 마음에 알파를 빤히 바라보는데-.
“…왜?”
신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잠결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솔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더 자-.”
그는 한솔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선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 한솔은 그제야 이곳이 현실임을 자각한다. 그야, 신우가 뽀뽀를 해 줬으니까. 꿈속의 그 사람은 뽀뽀는커녕 아무것도 안 해 줬지 않은가.
한솔은 안도 된 마음에 헤실헤실 웃고는 다시 눈을 꼭 감았다.
그 뒤로 다시는 ‘남자’에 대한 꿈을 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