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에게????
안녕, 신우야.
드디어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돼서 기뻐. 그런데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뭐라 써야될지 모르겠어… 한 번에 열 장씩 보내면 선임분들이 싫어할까? 답장을 보낼 때 꼭 알려줬으면 좋겠어.
벌써 11월이야. 네가 밥 잘 먹으라 했는데… 사실 잘 넘어가진 않아. 그래도 혼내면 안 돼! 다 신우가 없어서 그래ㅠ-ㅠ
별장 근처는 단풍이 이르게 물든 편인가 봐. 캠퍼스는 이제 절정인 편이야. 걷고 있으면 너랑 갔던 계곡이 떠올라서 기분이 싱숭생숭해. 다시 가보고 싶은데 혼자 가긴 싫어서 꾹 참고 있어. 나중에 나랑 같이 가줘야 해, 약속!
나는 어제도, 오늘도 신우 생각을 아주아주 많이 하는데 신우는 어때?
네가 그래 줬으면 좋겠어. 내 생각 많이 하라고 저번에 주운 단풍잎 중에 제일 예쁜 걸 같이 보내.
나 없이 너무 행복하진 말고 조금만 행복한 하루 보내도록 해. 알겠지?
-신우가 너무너무 보고 싶은 한솔이가-
P.S. 답장 안 해주면 삐질 거야.
한솔아.
밥이 잘 안 넘어가? 강원장님은 만나 봤고? 입맛이 없다면 유모님에게 네가 좋아하는 버섯전골 해달라고 부탁드려 봐.
입맛이 없더라도 두 끼 이상은 꼭 챙겨 먹고. 아픈 거면 원장님께 얘기 드려. 내가 옆에서 챙겨줄 수 없으니까 네가 네 몸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해. 혹시 히트 증상일 수도 있으니 정기검진은 반드시 받도록 하고. 나중에 기록 확인할 거니까, 잊지 마.
여기는 단풍과의 나무가 없어서 보내줄 수 있는 게 없네. 별장은 휴가 나오면 같이 가자. 그때면 단풍은 지겠지만 겨울 계곡도 꽤 운치가 있을 거야.
물론, 네 생각은 많이 하고 있어. 누가 널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야. 혹시 모르니 붙여준 경호원은 불편하더라도 항상 데리고 다니도록 하고.
네가 없어서 그런가, 그렇게 하루가 즐겁지만은 않아.
그래도 너는 매일이 웃음이 가득하길.
안녕. 좋은 꿈 꿔.
From. 유신우
추신. 열 장은 너무 많은 것 같아.
잔소리가 무지하게 많은 신우에게????
안녕, 신우야!
네가 말한 대로 전골도 해 먹고 검진도 받았어. 아, 물론 경호원분이랑도 많이 친해졌어. 오메가시길래 깜짝 놀랐지 뭐야. 너한테 말 들었을 땐 베타실 줄 알았거든.
오늘은 하늘이 아주 예뻐. 신우도 같은 하늘을 보고 있으면 좋겠어. 네 답장을 받고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건 이른 아침인데, 너는 밤에 쓴 모양이야. 좋은 꿈 꾸라는 말에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지.
그런데 열 장이 많다니! 난 마음만으론 백 장도 쓸 수 있는데.
맞다. 오피스텔 근처에서 두부를 닮은 강아지를 봤어. 주인을 잃어버린 걸까? 엄청 어려 보이던데 며칠째 골목에 앉아 있더라고. 우리 학교 가는 길에 있는 골목, 거기 거든. 지나갈 때마다 내 뒤를 졸졸 쫓아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있잖아, 조금만 행복하란 건 취소야.
신우도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군대라는 곳이 마냥 즐겁진 않겠지만… 많이 힘들지? 크리스마스부터 면회 가능하다는데 시간이 너무 안 가는 것 같아.
보고 싶다.
-시계가 고장 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한솔이가-
P.S. 특별히 저번에 신우가 입양해준 작은 친구를 하나 보내. 얘 이름은 ‘미니 한솔’이야. 매일매일 잘 잤냐고 인사도 해주고 칭찬도 해주고 뽀뽀도 해줘야 해! 꼭이야!
솔아.
네가 보내준 사막여우 인형은 잘 도착했어. 음, 어떻게 이 친구를 돌봐야 되는 건지 조금 난감하긴 하지만. 최대한 노력해볼게.
너는 아침의 하늘을 보고 있구나. 여기는 지금 노을이 지고 있어. 네가 생각나는 하늘이야. 굉장히 예뻐.
그리고 강아지 말인데. 며칠이나 밖을 나돌아다니는 거라면 주인을 잃었거나 유기된 걸 수도 있어. 예민해져 있을 테니 너무 가까이 다가가진 말고. 해선형한테 연락해서 보호소 연결해 달라고 해.
열 장은 네 손목 건강을 위해 참으라는 뜻이었어. 너에게 받는 편지도 좋지만 무엇보다 네 얼굴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들이 무척 많아.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 떨어져 있을 때, 비로소 그 깊이를 알 수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요즘 절절하게 실감하고 있거든. 보고 있을 때도 보고 싶었는데, 볼 수 없으니 더 보고 싶네. 우리가 만날 그때를 위해, 조금만 참아줄래?
안녕. 내 작은 여우.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신우로부터.
추신. 안타깝지만 시계는 정상이야. 곧 성탄절이니까 조금만 참아. 나도 고대하고 있어.
신우가 없는 하루들이 지나간다.
처음에는 잠도 설치고 밥도 잘 못 먹었던 한솔이었지만 신우의 답장을 받고 나서부턴 나름 일상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옆 탁자 위에 앉아 있는 ‘미니 신우’에게 잘 잤냐고 인사를 하고 텅 빈 식탁에 혼자 앉아 밥을 먹긴 싫어서 한참 공연 연습할 때 마시던 것처럼 야채 주스를 만들어 마셨다.
학교에 오면 좀 나았다. 온기가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래도 신우의 빈자리가 아주 조금은, 조금은 가려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한솔은 일부러 2학기 시간표를 꽉꽉 채워 들었다. 학교에서 정말 살 생각이냐며 친구들은 놀려 댔지만 한솔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텅 빈 집 안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필연적으로 신우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이한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또 혼자 생각에 빠져 있던 한솔은 갑작스레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 이렇게 영혼 빼고 다니는데 혼자 둬도 괜찮겠나 모르겠네.”
“응…? 수연이 너 어디 가?”
“어. 나도 이번 학기 끝나면 빨리 갔다 와야지. 군대.”
물론, 이 녀석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윤건을 눈짓한 수연이 남의 접시에서 문어 모양 소시지를 홀라당 집어 먹어 버린다. 물을 마시다가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윤건이 사례가 걸려 콜록거렸다.
“그러니까 이 누님이 돌아올 때까지 학교 잘 지키고 있어라.”
“너희 복학하면 내가 선배거든?”
“얼씨구. 쪼끄만 게 까불어.”
“…나 이번에 건강검진 받았는데 키 컸어.”
“그으래? 그럼, 얼마나 컸나 볼까?”
옛날에 비하면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 워낙 장신들만 있어서 그런지 티도 안 났다. 심지어 저 맹해 보이는 박윤건까지 170 후반이니까…. 한솔은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도 167이면 평균은 되지 않나? …아닌가?
신우가 마지막으로 쟀던 키가 185니까 여전히 18cm 차이였다. 으으… 3cm만 더 컸으면 좋겠는데. 앞자리만 바뀌어도 어디 가서 키 작다고 놀림은 안 받을 것 같은데 집안의 키 유전자는 전부 첫째하고 둘째가 가져갔는지 170의 벽은 쉽지 않았다.
“너 다음 교양이지? 뭐 무슨 마케팅 수업이랬나.”
“응. 맞아 미디어 마케팅.”
“대단하다, 대단해. 대체 다른 과 교양은 왜 듣는 거야.”
“재밌어 보여서…?”
“어휴, 말을 말자.”
결국 점심을 먹고 나서 바로 다음 수업이 있는 한솔만 두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다. 캠퍼스 내에서 두 번째로 익숙한 상경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강의가 있는 건물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나같이 밝은 얼굴인 게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싶었다.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므로 한솔은 강의실에 들어와 적당한 구석에 책을 펼치고 앉았다. 오늘따라 사람이 없네- 태평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던 한솔이 이상을 눈치챈 건 강의 시간이 15분을 훌쩍 넘었을 때였다.
‘…왜 아무도 없지?’
교수님이 늦으시는 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아무도 없는 건… 뭔가 이상했다. 그야말로 강의실을 전세 낸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 엉덩이를 들썩이며 이걸 어쩌지… 싶었던 한솔은 드르륵, 강의실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커다란 박스를 들고 강의실로 들어오려던 남자도 한솔을 발견하고선 멈칫했다.
정적이 흘렀다.
“…재경이 동생?”
놀랍게도 몇 년 전 스치듯 만났던 존재가 거기 있었다.
-애기야, 아무래도 네 형이 좀 회까닥한 것 같거든? 일단 약속을 했으니 데리고는 가는데 나는 좀 빼 줘. 알겠지?
“세상에. 애기야, 너 진짜 많이 컸다.”
“…아니거든요?!”
다시는 들어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호칭의 재등장에 한솔은 그만 소름이 오소소 돋고 말았다. 본인 스스로도 많이 컸다고 생각하는 한솔이었지만, 불과 몇 분 전에도 이 정도면 꽤 크지 않았느냐고 자화자찬하던 그였지만- 저 사람한테까지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빽 소리치고는 남자가 낮게 웃자 당황해서 얼른 연기 상태에 들어갔다. 고개를 푹 숙였다. 저벅저벅- 책상 위에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놓은 남자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이제 그 애도 꼬마는 아니니까.”
어쩐지 씁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펼쳐 놓은 책만 내려다보며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던 한솔은 사제 책상 위를 똑똑- 두들기는 남자의 손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경계하는 소동물 같은 모습에 남자가 웃었다.
“맛있는 거 사 줄 테니까, 잠깐 얘기 좀 할까?”
사탕을 흔들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꼬시는 것같이 능글맞게 웃는 얼굴이었다.
“정말 이걸로 되겠어?”
한지훈. 남자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지훈을 경계한 한솔이 캠퍼스 내에 사람 많기로 유명한 카페로 안내하자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안에는 자리가 없어서 결국 바깥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예대 근처라 그런지 한솔을 알아본 사람들이 한 번씩 두 사람을 훑어보고 지나갔다. 한솔은 순간적으로 괜히 여기로 왔나 생각했지만 그래도 적막한 곳에 단둘이 있는 것보단 조금 얼굴이 팔리더라도 시끌벅적한 곳에 있는 게 나은 것 같다.
“하필 수업 직전에 휴강이 떠서 타과생에겐 안내를 못 했어. 미안해.”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아까 희희낙락하며 나가던 사람들이 그래서였구나. 한솔은 그제야 강의실 전세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이 남자가 광홍과 조교라는 것이다. 한솔은 문득 생각난 호적 메이트 둘째를 떠올리며 지훈에게 물었다.
“그런데 재경이 형…은 독일로 다시 나갔는데요-.”
형 놈이랑 어울리는 것 같은 사람이 여기엔 왜 있는 걸까?
그것도 조교라니. 뭔가 어울릴 듯 안 어울렸다.
“음… 도망 중?”
“…네?”
“뭐, 그냥 악덕 꼬마로부터 탈출 시도 중이라 하자.”
“??”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 그것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재경이가 집에 뭐… 이상한 말 하진 않았어? 특히 아버님께….”
“이상한… 말이요?”
“응… 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거나?”
“…네?”
벌써 두 번째, 멍청한 얼굴로 되물은 한솔은 ‘이재경’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두 단어의 미친 듯한 언밸런스함에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이재경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세상이 말세였다. 둘째 형 놈의 성격을 떠올려 보면 그 사람은 정말… 얼마나 피곤할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형이 그런 걸 집에 말할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지? 역시 그냥 제멋대로 행동하는 거겠지?”
“…….”
남자가 활짝 웃었다. 얼굴에 그늘이 걷히며 세상 안도하는 표정에 빛이 깃든다. 왜 저렇게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용건은 해결된 것 같아 보였으므로 한솔도 조금은 긴장을 풀었다. 남자는 기분이 좋아진 건지 한솔에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더 시키라며 다정하게 말했다. 조교면 이 학교를 졸업한 졸업자 출신이란 건데 어쩐지 교회에 다닐 것만 같은 온화한 인상의 남자는 화석이란 느낌보다는 그냥 타과 선배 같은 느낌이 컸다. 그 변태 성희롱 조별 과제 빌런인 4학년 선배하고 비교해 봐도 훨씬 젊어 보이는 인상이다.
“애기가 지금 1학년인가?”
“…이한솔이에요.”
“하하- 그렇게 애기란 소리가 듣기 싫어?”
“당연하죠! 곧 스물한 살인데… 누가 들었다간 욕해요.”
지훈이 사회적 스킬 중 하나인 친목을 도킹하자 잠시 경계하던 한솔은 애기란 소리에 발끈해서 말했다.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되게 밝아 보이네. 예전엔 좀 감추는 느낌이 컸는데-.”
그리고 문득 지나가는 투의 남자의 말이 한솔의 마음속에 깊은 파장을 일으켰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며 지훈이 번호를 주고 떠난 자리에서도 한참 동안 그 말을 곱씹을 정도로.
깊은 파장을 말이다.
***
세린이 현역일 때는 너무 어려서 오지 못했고 재경이 있을 적엔 고3이라는 핑계로 오지 않아 한솔에겐 마냥 생소한 장소가 있다.
바로 군대.
평소에는 오메가 금지 구역이지만 유일하게 한솔에게 방문이 허락된 장소를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자 다른 장병의 가족으로 보이는 이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한순간 술렁이는 면회실 내 공기도 모르고 한솔은 숨겨 둔 먹이를 찾는 다람쥐처럼 신우를 찾기 바빴다. 그리고 마침내-.
“…!”
다 같은 군복에 군화임에도 혼자서 다른 프레임인 마냥 선명하게 보이는 이를 발견했다. 분명 아무리 잘생긴 배우라 해도 군복만 입으면 군인 아저씨로 보인다는 게 그간 무수히 찾아본 군대 면회 후기의 골자였는데 역시 내 님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한솔은 전투모를 삐딱하게 쓴 채 앉아 있는 알파를 보며 심장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나중에 저거 입고 혼내 달라 하면… 진짜 혼나려나?
“…….”
한솔이 상상의 나래에 빠져 있는 사이 면회실 내 시선을 온통 빼앗고 있는 한솔을 발견한 신우가 설핏 미간을 구겼다. 나이를 한 살씩 먹어 갈수록 싱그럽게 영글어 피어나는 오메가를 보고 있노라면 내면의 짐승이 이를 드러내며 목을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선으로 함부로 그의 것을 탐하는 이들을 전부 치워 버리라고-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입매를 굳힌 신우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마침 정신을 차린 한솔이 해맑게 웃으며 다가왔다.
“신우야!”
그리고 다른 시선들은 보지도 못한 것처럼 신우에게 폭삭 다가가 안겼다.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표하는 애정에 어두워지던 신우의 눈동자가 멈칫했다. 물론, 한솔이 주변 시선을 몰라서 그런 건 아니고 단지 보고 싶었던 신우가 1순위인 이유 반, 보란 듯이 이 알파가 내 거라는 마음을 자랑하고 싶은 이유가 반이었다.
“오는데 길은 안 잃어버렸어?”
“응! 앞까진 기사님이 데려다주셨는데 뭘.”
그런데 여기 너무 멀다고 툴툴거리던 한솔이 신우의 가슴에서 빼꼼히 눈을 들어 올리고 말하자 결국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으르렁거리던 짐승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잠들었다. 한솔은 자신이 무슨 안타까운 짓을 저질러 버린 줄도 모르고 신우에게 내 거라는 도장을 쾅쾅 찍는 데 성공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아냐, 산 건 이거랑 이것밖에 안 돼. 신우 면회 간다니까 유모가 새벽부터 엄청 만들어 줬다?”
그리고 한솔은 수줍어하는 얼굴로 깔끔한 5단 도시락통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만들었어.”
신우가 진심으로 놀란 얼굴로 도시락 통과 한솔을 번갈아 바라본다. 분명 이번 연도 초만 해도 전자레인지와 함께 집까지 날려 먹을 뻔했던 도련님이 바로 한솔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요리라면 신우도 그다지 자신 있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언젠가 한번 장난식으로 ‘날치알을 생으로 사용해도 되나?’ 따위를 정 비서가 물어봤을 때 신우는 답하지 못했다. 정해선은 너도 모르는 게 있긴 있구나 하면서 빵 터져 했었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 본 신우는 속으로 조용히 감탄했다. 동글동글하게 생긴 주먹밥 위에 검은깨로 콕콕콕 눈코입이 박힌 모습이 참 한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색감의 아기자기한 도시락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신우가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들어 귀여운 주먹밥을 들어 올리자 한솔이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어때?”
반짝반짝 기대가 서린 눈동자를 보니 괜히 장난기가 돌은 신우가 부러 ‘음…’ 하고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애가 탄 한솔이 발을 동동 굴렀다.
“맛…없어…?”
머리 위로 있지도 않은 세, 네 번째가 귀가 축 처지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다. 한솔이 시무룩한 얼굴이자 결국 입꼬리를 허물며 웃은 신우가 고개를 저었다.
“맛있어. 이런 건 언제 배웠어?”
“시간 날 때 유모한테 특훈 받았지. 그런데 거기 있는 반찬밖에 못 해… 진짜 딱 그것만 계속 연습해서.”
신우의 호평에 다시 기운을 차린 한솔이 자신도 젓가락을 들어 깨가 솔솔 뿌려진 불고기를 얌하고 삼켰다. 음, 합격! 다행히 조금 식었지만 맛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요리에 꽤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뿌듯해하던 한솔은 눈앞에 불쑥 내밀어지는 신우의 손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손 줘 봐.”
“응…? 왜…?”
되물으면서도 일단 본능적으로 착실하게 손부터 내민 한솔은 신우가 자신의 손끝을 붙잡고 이리저리 훑어보며 확인하는 모습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다른 손.”
결국 양손 다 검사를 받게 되었다. 한솔은 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을 놔주는 모습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그래?”
“다쳤을까 봐.”
덤덤한 목소리에 한솔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성은 고맙지만.”
“…….”
“그게 네 몸을 상하게 하는 거면 못하게 하려 했지.”
한솔의 귀 끝이 발긋해졌다.
“아냐… 나 이제 프라이팬도 안 태워 먹어.”
“그런 건 얼마든지 태워도 되는데 네 몸만 상하게 하지 마.”
“으응….”
아마 신우는 집을 태워 먹어도 한솔만 무사하다면 그러려니 할 것이다.
두 사람은 한솔이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그간의 근황을 공유했다. 신우의 말이 맞았다. 글로는 담을 수 없었던 넘치는 마음들이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니까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삐꺽이는 나무 탁자와 오래된 면회실 특유의 어둑한 분위기 속에서도 연인들의 간지러운 속삭임은 멈출 줄 몰랐다. 한솔은 신우의 첫 휴가 소식에 본인보다 더 좋아라 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1월에는 휴가 나올 수 있어?”
“응. 신병 휴가라 3박 4일 정도.”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
한솔은 하나둘 다른 장병들의 가족들이 돌아갈 때까지도 신우와 한 손을 꼭 붙잡고 앉아 있다가 결국 면회가 허락된 시간까지 꽉꽉 채워 면회실을 나왔다. 아쉬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한솔의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신우는 눈이 올 것처럼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바쁜 삶을 살아온 만큼 한 번도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는 생각을 해 보진 못했는데 군대에서의 시간만큼은 유독 느리게 흘러갔다. 그는 더 이상 한솔의 실루엣이 보이지 않는 통로를 오랜 시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
“아, 짜증 나 죽겠어. 그 선배. 하는 것도 없이 자꾸 꼽사리 낀다니까.”
종강 총회 뒤풀이.
한솔의 다사다난 했던 대학교 1학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신우가 있었다면 데이트를 즐기느라 오지 않았을 자리지만 딱히 할 일이 없던 한솔은 그간 벼르고 있던 선배들에게 붙잡혀 뒤풀이 장소로 끌려갔다. 술자리에서 보기 힘든 얼굴의 등장에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선배들이 환호하며 한솔에게 마구 술을 부어 주었다. 그는 신우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몰래몰래 소주를 물 잔에 버렸는데 그 덕분인지 의도치 않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인원 중 한 명이 되었다.
“한솔아, 내가 너 봐서라도… 엉? 그 선배 안 받으려 했거든? 근데 아는 조교까지 끌고 와서 난리를 치잖냐. 아,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덕분에 혀가 꽈배기처럼 꼬인 선배의 한탄에서 화두로 떠오른 빌런 선배가 또다시 버스 탑승을 노린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취직을 할 생각은 있는 모양인지 연영과 동아리 ‘라온’의 정기 공연에 한 자리 차지하겠다고 난동을 부린 모양이다. 하긴 그 나이에… 그 학번에 채울 수 있는 마지막 이력이긴 했다.
연영과 동아리 ‘라온’은 일 년에 총 네 번 정기 공연을 올린다. 학기 중에 열리는 봄, 가을 정기 공연과 여름, 겨울 워크숍 기간 동안 열리는 정기 공연까지 해서 총 네 번이었다.
워크숍에선 특히 한국대 연영과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선배들이 참석해 후배들을 이끌어 주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이 정기 공연에 한 줄이라도 이름을 올리고 싶어 했다.
1학년 새내기인 한솔과는 아직 거리가 먼 이야기긴 했지만. 그래도 내년이면 배우 오디션을 볼 수 있을 테니 한솔도 나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앗, 선배 그건…!”
어차피 내년이면 안 볼 얼굴인데 뭐 어때, 싶었던 한솔은 소주를 쫌쫌따리 모아 놨던 물 잔을 선배가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다급하게 선배를 말려 보지만 이미 반쯤 눈이 풀려 있던 선배는 캬- 하고 감탄사까지 흘리더니….
“어으… 물이 왤케… 쓰지…?”
쿵- 소리와 함께 마치 유언처럼 그 말을 남기고 탁상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드르릉…쿨….”
“으음, 교수님… 제발 C만은….”
“조별 과제 이 좆같은 새끼….”
한솔은 어느새 패잔병들이 가득한 주변을 보며 끙, 하고 앓는 표정을 지었다.
“도와드릴까요?”
혼자 살아남은 한솔이 난감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평범한 손님처럼 위장해 술집 구석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다가와 물었다. 한솔은 구원의 손길에 화색이 돌아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지 알 수 없는 총대의 옷에서 각자의 귀가 주소가 적혀 있는 종이를 꺼내-워낙 뒤 없이 부어라 마셔라 하는 과 특성 때문에 항상 미리 받아 놓는다고 들었다.- 사람들을 한 명씩 깨워 택시에 태웠다. 사실, 깨웠다기엔 어폐가 있고 그냥 기절해 있는 사람들을 구역별로 묶어 2~3명씩 택시에 실어 날랐을 뿐이지만. 거기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경호원이었다. 한솔은 찍어 놓은 택시 번호를 단톡방에 올리다가 저기 앞에서 택시 기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경호원을 보고 얼른 화면을 껐다. 그대로 다가가려는데,
턱-.
투박한 손길이 어깨를 붙잡았다.
“어이, 이쁜이! 엉아들이랑 같이 놀래?”
한솔은 잠시 버퍼링이 돼서 눈만 깜박였다. 그 순진해 보이는 얼굴에 한솔의 주변을 둘러싼 불량배들이 실실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명은 못생긴 얼굴을 들이댄 채 한솔의 엉덩이에 손을 대기까지 했다. 한솔은 잠시 기가 차서 ‘밑을 차 버리면 합의금을 얼마나 줘야 할까?’ 따위를 생각하다가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동굴 같은 저음에 눈을 크게 떴다.
“여전하네, 도련님. 좆같이 나쁜 새끼들만 꼬이는 건.”
저벅저벅-. 압도적인 키와 덩치를 가진 남자가 묵직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진심으로 세 보인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 입은 건지 알 수 없는 거적때기와 금목걸이 차림의 불량배와는 질적으로 다른 남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검은 정장 차림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후-, 하고 피우고 있던 담배를 뱉어 내며 피식 웃었다.
한솔은 남자, 권범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저씨도 포함인가요?”
그러자 남자가 낮게 웃었다.
“물론.”
장난스러운 웃음이지만 눈빛만큼은 싸늘한 맹수가 불량배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인다. 좋게 봐줄 때 꺼지라는 표시였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떤 불량배들은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인지 곱게 꺼지는 대신 한솔을 자신들 쪽으로 끌어당겼다. 한솔은 이 무례한 사람들의 무릎을 차 버릴까 고민하다가 지금 이 상황이 꽤 흥미진진했으므로 참기로 했다.
‘아, 이럴 때 신우가 있어야 되는데-.’
딱, 이 타이밍에 범진 대신 신우가 있었다면 완벽했으리라. 아직도 감금 엔딩의 꿈을 버리지 못한 한솔은 아쉬운 마음에 속으로 혀를 찼다. 뭐, 아쉽긴 하지만… 평화로웠던 나날에 등장한 오래간만의 무대다. 한솔은 흥미로 반짝이는 눈을 감추고 무서워하는 얼굴로 살짝 살짝씩 반항을 했다. 그러자 경계하는 피식자처럼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불량배들이 짜증을 내며 한솔의 팔을 움켜쥐었다. 이미 다 잡은 먹잇감이 반항을 하는 건 못 참겠는 모양이다. 한솔은 속으로 적당한 숫자를 세다가, 촉촉한 눈동자로 범진을 올려다봤다.
“아저씨….”
호랑이는 여우를 보고 흠, 하고 웃었다.
“도련님 알파가 애 좀 먹겠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던 한솔은 갑작스러운 해방감을 느끼고 멈칫했다. 쿵-! 아아악…!! 묵직한 것이 쓰러지는 소리와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한솔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연기를 하던 것도 잊고 입술을 작게 벌렸다. 신우가 붙여 준 경호원이 불량배를 슥- 훑어보더니 한솔에게 말했다.
“한솔 님 이쪽으로 오세요.”
“너, 너 이 자식… 크아악!”
“아, 실수.”
불량배 우두머리를 깔끔하게 엎어 치기 해 놓고 몸을 일으키던 남자는 꿈틀거리는 불량배의 팔을 지그시 밟더니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제가 도와 달라고 부탁드린 건데요.”
“그래도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한솔은 깍듯이 인사하는 경호원에게 작게 웃으며 말했다.
“산재는 걱정하지 마세요.”
“예?”
“저 사람들….”
바닥에서 팔을 부여잡고 꿈틀거리는 우두머리와 우두머리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불량배들을 눈짓했다.
“유능한 변호사들이 아주 많거든요. 합의금이 나와도 산재 처리될 거예요.”
“좋은 직장이네요.”
경호원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한솔도 싱긋 따라 웃었다. 불량배 우두머리는 그런 두 사람의 하하호호 웃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너! 내가 고소할 거야!! 퉤엣- 씨발…. 니네 경찰서 가면 다 깜방이야 알아?!”
그리고 땅바닥을 굴러 더 못생겨진 얼굴로 악악거리는 불량배에게 고양잇과 맹수 특유의 조용한 걸음걸이로 다가간 남자가 있었다.
잊히기엔 그 존재감이 너무 압도적인 남자-.
남자가 구둣발로 불량배의 다친 팔을 무심히 밟았다.
우두둑-.
“이봐.”
“어윽… 컥….”
“궁금하긴 하군. 법이 빠를지-.”
“흐억…!”
“아니면 네 목이 꺾이는 게 빠를지.”
후…. 권범진이 불량배의 팔을 밟은 채 담배를 마저 피우더니 불량배가 후들후들 떨리는 눈을 한 바로 앞 길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선 한솔의 앞을 가로막고 선 채 경계하는 눈빛을 한 경호원을 보며 흥미가 돋은 얼굴을 해 보인다.
“꺼져. 마음 바뀌기 전에.”
그 말에 남은 불량배 멤버들이 불량배 우두머리를 수거해서 줄행랑을 쳤다. 권범진이 ‘쓰레기도 주워 가야지?’ 하는 말에 우두머리와 담배꽁초를 함께 주워 간 게 포인트였다.
“…한솔 님. 제가 신호드리면 큰 길가로 뛰세요. 절대 사람 없는 곳으로 가지 마시고 사람 많은 카페 같은 곳에 들어가셔서 기사님 부르시면 됩니다. 이해하셨죠?”
한솔은 경호원이 이렇게 긴장한 모습을 처음 봤다. 계속 범진이 있는 곳을 경계하며 한솔에게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이 무서울 거 하나 없어 보이던 경호원도 저 범 같은 남자를 얼마나 경계하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하는군. 나름 도련님이랑 아는 사이다만.”
그리고 권범진도 그걸 눈치챈 듯싶었다. 남자는 오히려 사람 긴장시키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을 골려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한솔은 한숨을 삼켰다.
“괜찮아요, 아는 사람이니까.”
“…정말입니까?”
경호원은 믿을 수 없는지 한솔과 범진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굳은 표정을 해 보였다.
“그래도 저 남자는 위험합니다. 이만 귀가하시죠.”
남자의 단호한 목소리에 조금 곤란해진 한솔은 결국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얼굴을 해 보이기로 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올망졸망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자 약자를 보호하는 직업을 가진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거리고 말았다. 한솔은 범진에게 볼일이 있었다.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우연히 만나지 않는 이상 얼굴을 볼 길이 묘연했다.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곤란했다.
“잠깐만 대화하면 안 될까요?”
“…….”
“정말 잠깐이면 되는데….”
한솔이 긴 속눈썹을 깜박이며 조르자 경호원은 난감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막내에, 사랑받고 자란 도련님에, 고용주 애인이라는 설정은 과연 누가 와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이 철벽같은 경호원이 결국 뜻을 물린 것이다. 한솔이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무뚝뚝한 남자가 작은 여우에게 홀라당 홀려 버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범진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피식 웃었다. 역시 저 도련님의 알파는… 애 좀 먹겠다고 생각하며.
“그래, 나에게 볼일이 있다고.”
허락을 받은 한솔은 당당하게 범진 앞에 섰다. 권범진이 이렇게 위에서 지그시 내려다봐도 쫄지 않는 유일한 인간이 바로 한솔이었다. 종종 사업상으로 부딪히고는 하는, 이제는 완전한 맹수로 자라난 이 도련님의 알파조차도 최소한의 경계를 하는데 한솔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상대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으로 똘똘 뭉쳐진 저 자신감이 자못 신기하기까지 하다. 한솔은 범진의 얼굴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정우 잘 있어요?”
권범진의 날카로운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남의 집 막내는 왜 찾지?”
“제 친구인데요.”
그 말에 범진이 큭, 하고 웃었다.
“막내 녀석 울겠군.”
“…?”
워낙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지나가서 한솔은 범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입술을 비죽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졸업하고 연락을 한 번도 안 해요? 톡 보내도 다 씹고….”
심지어 안읽씹도 아니고 읽씹이었다며 한솔은 분통을 터트렸다. 이게 지금 연을 끊자는 건지 어쩌라는 건지 헷갈린다면서.
그런 한솔을 약간 신기한 생물을 보듯이 내려다본 범진은 흠… 하고 목을 울리더니 입을 열었다.
“도련님은 도련님의 세계가 있지.”
“네?”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음지 식물을 양지에 내어 놓아 봐야 좋을 것 없다는 말이지.”
한솔은 침묵했다. 범진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이해했나?”
찾지 말라는 뜻이다. 두 사람이 만나 봐야 좋을 일은 없으니. 서로의 환경이 빛과 그림자처럼 극명하기 다르기 때문에 섞여 들려 해도 섞여 들기 힘들다.
범진은 그리 말했고, 한솔은-.
“그거 편식이에요.”
“뭐?”
“한 가지만 먹는 건 편식이라구요. 그리고 음지, 양지 나눠 봐야….”
수긍하지 않았다.
“햇빛 싫어하는 식물이 어딨어요.”
그 당당한 어조에 어이가 없어진 범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본인 기준에서 생각하는 건 아닌가?”
“…물론… 정우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의견은 존중할게요…. 아니, 그럼 차단을 하던가 읽씹은 왜 하는데…!”
생각할수록 어중간한 태도에 짜증이 났는지 한솔이 두 손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범진은 빛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해바라기 같은 한솔과 더는 어머니의 피아노에 앉지 않는 막내를 떠올리며 잠시 침묵했다.
그래, 너희는… 이 연쇄를 끊을 때가 됐지.
그는 결국 한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5년만 기다려라.”
“5년…이요?”
“그래. 그 빛을 쐬려면 일단 그늘부터 치워야 하지 않겠나.”
알쏭달쏭한 범진의 말에 눈을 깜박이던 한솔은 범진이 휙- 등을 돌려 가 버리는 모습에 앗, 했다. 붙잡아야 하나, 한솔이 고민하는 사이 슬쩍 고개를 돌린 범진은 한솔과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의 경호원을 훑어보고선 이렇게 말했다.
“도련님.”
“네?”
“조심하는 게 좋아. 요즘 이쪽에서 질 나쁜 놈들이 판치거든. 오메가만 납치해 가는 놈들이 많으니 조심하도록.”
그러곤 씩 웃은 남자는 다시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한솔은 결국 남자를 붙잡지 못한 채 투덜거리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워크숍 출발 당일. 캐리어를 돌돌 끌며 출발 장소로 향하던 한솔은 타고 갈 버스 앞에서 실랑이 중인 두 사람을 발견했다.
“선배! 2번 버스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고작 버스 자리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 깐깐하게 구냐? 어? 1학년 하나 내보내. 그럼 되잖아.”
그리고 그대로 버스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모습에 김재원을 상대하고 있던 다른 선배가 아악! 하고 소리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필이면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한솔은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선배에게 다가갔다.
“선배.”
“……어, 한솔이 왔니….”
흐물흐물 죽어 가는 모습이 꼭 숨 죽은 배추 같다.
“제가 연출 쪽 버스로 갈까요?”
“아, 다 들었어?”
선배가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저 선배랑 같은 버스 타기도 껄끄러우니까 제가 옮길게요.”
“미안해, 진짜.”
“아녜요. 말마따나 그냥 버스 자리인데요.”
“어휴, 한솔이는 얘가 너무 착해서 어떡해. 응? 독하게 살아야지. 그래야 밥그릇 안 뺏겨.”
이미 제 밥그릇을 야무지게 챙기고 사는 한솔은 어색하게 웃었다. 안 세 본 지 오래지만… 내 통장 잔고가 몇이더라?
편의상 1번, 2번으로 나눈 버스는 연기 전공과 연출 전공으로 나누어져 있다. 공연에 참여하지 않는 1학년 새내기들은 희망 전공에 따라 배치되었는데, 1학년 중에선 워크숍까지 오는 학생들이 많지는 않은 데다 대부분이 연기 쪽인 탓에 연출 버스는 선배들로 우글우글했다. 거기에 다 썩은 화석 대신 파릇한 새내기가 들어오자 연출 전공 선배들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폈다.
“한솔이도 내년엔 배우 오디션 보려고?”
“네, 2학년부터 가능하다 들어서….”
“아쉽다. 한솔이 같은 똘똘한 애가 연출로 와야 되는데.”
“너는 저런 마스크를 궁상맞은 네 밑에서 굴리고 싶냐? 카메라에 담는 게 훨 낫지.”
“아이씨,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뼈를 때려요.”
“크큭. 내년엔 컵라면 신세 좀 벗어나고 싶다-.”
“그러니까. 돈 안 모여서 죽겠어. 힘들어.”
12월 31일에 출발해서 새해를 같이 보내는 일정인 만큼 워크숍을 한 번 갔다 오면 선후배 동기간 정도 돈독해지는 편이다. 마냥 특훈만 하는 것도 아니고 현장에서 일하는 선배들의 경험담도 듣고 어디 TO가 나는지 등과 같은 꿀 정보도 많이 공유된다. 마냥 놀고 싶은 1학년들에겐 인기가 별로 없기는 하지만.
일단 끼어 타는 만큼 남은 자리에 적당히 앉을 생각이던 한솔은 버스 안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정하윤. 거의 유일하게 주변에서 한솔보다 몸집도 작고 키도 작은 미소년 상의 동기였다. …엄청 아팠다고 소문이 파다하더니. 그때의 조별 과제 일 이후로 본 적도 없고 워낙 소문만 무성한 터라 직접 얼굴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로 아프긴 했는지 모자를 푹 눌러쓴 얼굴에 병색이 완연했다. 원래도 작았던 얼굴이 반쪽이 되기도 했고. 그래도 그때의 일이 용서가 되는 건 아니지만.
한참 동안 하윤을 빤히 내려다보던 한솔은 하나둘 선배들이 자리에 앉고 나자 남은 자리가 이곳밖에 없는 탓에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삼키고 하윤의 옆에 앉았다. 하윤이 움찔 몸을 떨며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두 사람이 앉은 공간에서 정적이 흘렀다. 각자 이어폰을 끼고 상대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누구도 대화를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은 탓에 워크숍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두 사람 사이에선 침묵만 흘렀다. 한솔은 입대하기 전 마지막 자유라며 워크숍에 가는 대신 신나게 밖을 쏘다니고 있는 수연과 윤건-윤건인 수연이에게 거의 반강제로 끌려다니는 듯했다.-의 자랑 겸 맛집 인증 샷을 보다가 멀거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 핏기 없는 얼굴을 힐긋 하고선 속으로 혀를 찼다.
분명 피해자는 자신인데 왜 이렇게 못된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아파서 그런가.
“다 왔으니까 내려라 좀비들아!”
“으으, 뻐근해-.”
“밥, 밥이 고프다아.”
“이번에도 선배님들이랑 족구 하나? 했으면 좋겠는데.”
와글와글 무리 지어 내리는 선배들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착각인가 싶었는데 연출 버스에서 내린 1학년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
“…….”
거기다 하필이면 배정된 방도 같은 곳이다. 선배들과 좀 친해지라며 섞어 놓은 모양인데 한솔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선배들이 나가 버리자 단둘이 남은 상황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대체 왜 이런 시련이 계속되는지 알 수 없었다….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그냥 가만히 스쳐 지나가도 된다. 오래 볼 사이도 아니고 친해질 생각도 없으니까.
하지만 한솔의 성격상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계속 눈치를 보기는 싫었다. 그가 물끄러미 하윤을 바라보며 묻자 모자 쓴 작은 얼굴이 흠칫거렸다. 꼭 고양이 같다. 아무래도 자신보다 큰 사람들만 보다가 드물게 덩치도 작고 그런 사람을 보니까 신경이 쓰이는 듯싶었다. 묘한 동질감이랄까.
“…….”
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동기를 빤히 몇 초간 더 바라보던 한솔은 등을 돌리고 앉았다. 맘대로 하라지. 불편한 건 본인이지 난가 뭐.
“얘들아 밥 먹자!”
문밖에서 한 선배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옆방에서 하나둘 사람들이 나오는지 금세 바깥이 시끌시끌해지는 게 느껴진다. 한솔은 먼저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왔다. 넉살 좋게 선배들 사이에 껴서 밥을 먹은 뒤엔 워크숍 일정을 차례로 소화했다. 발레 학원 캠프가 생각나서 나름 신기하고 재밌었다.
배워 보고 싶어서 이 학과를 지망하기는 했지만 정작 현장에서 뛸 생각은 없었던 한솔에게 현역 선배들의 강연은 어떤 의미론 신세계라고 할 수 있었다. 업계의 고충, 막막한 현실, 그럼에도 이 무대에서 살아간다는 자부심 같은 것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졸업한 학교를 잊지 않고 찾아와 후배 양성에 힘쓴다는 것 자체부터 학과에 대한 애정이 보였다. 그리고 한솔은 워크숍을 통해 생각보다 이 업계의 현실이 보이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많은 이들이 연기에 대한 꿈을 안고 문을 두드리지만 그중 대부분은 빛 한 줌 받지 못하고 사라진다. 보조 출연자조차 되지 못하는 단역들의 열악한 환경과 대우… 꿈나무들이 싹을 틔우기엔 기회의 문은 너무나 좁았다. 문득, 한솔은 발레 공연을 마친 뒤의 무대의 적막함을 떠올렸다. 그 좁은 공간에서 단 한 번의 쥬테를 펼치기 위해 발에 피가 나도록 연습하던 어린 소년 소녀들의 한숨이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다 비슷하구나….’
원하는 것을 움켜쥘 수 있는 충분한 재능과 이를 뒷받침해 줄 배경마저 갖추고 있던 한솔에겐 어쩌면 생소할지도 모르는 세계였다.
워크숍에서 돌아온 후, 한솔은 책상 앞에 앉아 편지지와 펜을 꺼내 들었다. 그는 ‘신우에게’라는 말머리를 작성한 뒤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그대로 엎어졌다. 편지지에 뺨을 붙인 자세로 눈을 깜박이던 한솔은 책상 위에 장식된 하얀 조개껍데기를 보곤 손가락을 뻗어 반질반질한 껍데기를 톡 두들겼다. 거기서 조금 더 시선을 위로 올리면 두 사람의 모습이 담긴 액자와 가지각색의 편지들이 보였다. 한솔은 자세를 바로 하고 발레 슈즈 사이에서 유독 모서리가 헤진 편지 봉투를 하나 꺼냈다.
「예쁜 왕자님에게 보내는 편지」
아이 특유의 삐뚤빼뚤한 글씨는 주변에 가득한 별 무더기에 파묻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설핏 미소를 지은 한솔은 너무 많이 봐서 접힌 부분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인 편지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예나도 마니마니 연습해서 예쁜 공주님이 될 거예요!」
18살, 겨울에 만난 아이가 천성 재단 재능 꿈나무에 선정되어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심오한 언어로 탈바꿈되어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짧은 편지를 읽고 또 읽은 한솔은 결심을 굳힌 듯 편지 봉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펜을 드는 대신 핸드폰을 들었다.
연락처 위에서 고심하던 손가락이 한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정해선. 신우의 수행 비서이자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이의 이름이었다.
***
‘읏… 흐으… 응! 신우야…!’
‘하아, 하아… 윽- 이한솔….’
‘으응…! 좋아…! 좋, 아아…! 더어…! 더, 해 줘… 아!’
그의 오메가가 그를 졸랐다.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철퍽, 철퍽 소리가 나도록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마치 더 달라는 것처럼 아래를 조여 온다. 읏… 낮게 신음한 알파가 목을 울리며 한솔을 붙잡으려 했다. 그대로 그 아이를 자신의 품에 가둔 채, 정신없이 좆을 박아 넣고 싶었다. 탐하고 싶었다. 너를,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아늑한 공간 속에 가둬 두고 나만을 바라보라며 소리치고 싶었다.
‘아응! 힛… 더어….’
하지만 몸이 돌로 변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철퍽! 쯔읏… 퍽!
그를 타고 앉은 오메가가 정신없이 허리를 놀렸다. 초점이 풀린 캐러멜색 눈동자 허공을 헤매고 달콤한 신음을 흘리는 입술 사이로 할딱할딱거리는 분홍색 혀가 보였다. 그는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아으응…! 유연한 허리가 부드럽게 휘고 아래가 끊어질 것처럼 조여 온다. 알파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황홀한 광경에 이를 아득 갈았다.
‘더, 주면 안 돼?’
할짝-. 그리고 시야가 반전됐다.
그는 한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끈한 손가락으로 알파의 성기를 붙잡은 오메가가 그를 올려다보며 샐쭉 웃었다. 눈꼬리 아래에 박힌 눈물점이 유독 눈에 띄었다. 오메가는 알파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두꺼운 성기를 한입에 삼켰다. 축축한 점막과 성기를 빨아 들이는 힘, 마치 이래도 가만둘 거냐는 듯 장난스럽게 깨물어 오는 느낌에 알파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머릿속의 짐승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낮게 신음했다.
‘신우야-.’
그러나, 여전히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메가가 얼굴을 가까이 붙여 오며 그를 불렀다. 한 뼘 벌어진 거리에서 붉은 입술이 움직인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나 보러 안 와?’
“…!”
가슴이 크게 오르락거렸다. 생활관에서 눈을 뜬 신우는 텁텁한 공기를 느끼고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꿈, 이었구나…. 한솔의 환상이 아스라이 흩어졌다. 그는 크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보초를 서는 병사가 아니라면 대부분이 잠들어 있을 시간. 그는 약간의 뻐근함이 느껴지는 아래에 나직이 욕설을 삼켰다. 한솔의 생각을 안 하는 날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꿈에까지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몽정이라니. 첫 러트가 왔을 때 빼고는 겪어 본 적 없는 일에 천하의 유신우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새끼.’
그는 야하다 못해 요염했던 꿈속의 한솔을 떠올리며 자신을 타박했다. 첫 몽정이라 해 봤자, 그때는 아주 어렸을 때라 그 아이와 키스를 하는 상상을 했던 것이 다였다. 이런… 구체적이고 어딜 내놔도 심의에 걸릴 만한 꿈을 꿔 본 건 처음이란 뜻이다. 그것만으로도 한동안 그 아이의 통통한 입술을 바라보기 매우 곤란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대체 무슨 얼굴로 한솔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 신우는 한숨을 삼켰다.
-아응! 힛… 더어….
-더, 주면 안 돼?
…꿈속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여졌다. 입술을 잘근 씹은 알파가 결국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오니 반쯤 졸면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어, 그래- 규칙 알지? 빨리 다녀와라.”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말년 병장은 귀찮은 얼굴로 손을 휘적거렸다.
끼이익-.
텅 빈 화장실의 가장 안쪽 칸 문을 굳게 닫으며 신우는 다시 한번 얼굴을 쓸어내렸다. 보초를 서고 있던 이가 말년 병장이라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는 쓰게 웃었다. 바지춤을 풀어 이미 물을 질질 흘리고 있는 것을 꺼내 손안에 쥐었다. 장소 구분 못 하고 하늘 높이 서 있는 것을 힘주어 잡은 알파는 탁- 탁탁-! 거칠게 손을 놀렸다.
“…이한솔.”
낮게 신음을 삼킨 신우가 끓어 넘치는 이름 하나를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후… 숨이 점차 거칠어지자 두꺼운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한다. 넓은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순간, 쾅! 화장실 벽을 사납게 내리친 알파가 핏줄이 잔뜩 선 팔로 벽을 짚은 채 탁탁탁! 손을 움직였다. 유려한 목선에 시퍼런 핏줄이 돋고 붉은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피 맛이 돌았다. 하지만 신우는 그를 돌아보며 활짝 웃는 오메가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위를 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
그리고 어느 순간-.
온몸에 긴 탈력감이 듦과 동시에 후회가 그를 덮쳤다. 사정 후 찾아오는 현자 타임에 알파는 머리를 화장실 벽에 툭, 기댔다. 미친놈이 진짜-. 눈을 질끈 감은 채 자괴감에 빠졌다. 그것 하나 참지 못해서 화장실에 숨어들어 자위를 한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왜 나 보러 안 와?
지금 당장, 그 아이를 찾아가 오물거리는 입술을 삼키고 그보다 한참은 작은 몸을 파고들고 싶었다. 신우는 한동안 그를 덮친 후회와 자괴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
[깜짝 놀랐어. 한솔이한테 전화가 올 줄은 몰랐는데.]
한솔의 전화를 받은 해선은 그렇게 첫마디를 끊었다.
[후원을 하고 싶다고?]
“네… 그런데 방법을 잘 모르겠어서요.”
[음… 비영리 법인은 그냥 개인 이름으로 후원 회원 신청하면 돼. 천성 재단으로 신청할 거면 내가 도와줄게.]
해선이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아!’ 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때 신우가 프로젝트 건의한 게 있던 것 같은데.”
재능 꿈나무였나? 기억을 더듬는 해선의 말에 한솔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재능 꿈나무 후원 대상 프로필
이름 : 박예나
나이 : 만 5세
항목 : 발레
내용 : 주 3회 이상 강습(보육 교사 포함), 용품(원피스, 타이즈, 슈즈), 연습실 지원, 어린이집 및 기타 생필품…….
.
이름 : 정 윤
나이 : 만 11세
항목 : 공예(유리)
내용 : 1 대 1 지도 교사(수어 가능), 용품(강습 및 학교 수업 준비물 포함), 공방 지원, 자격증 취득 관련…….」
기본적인 생필품 지원부터 시작해 대규모 장학 제도까지-. 신우의 할아버지 대부터 시작해 유 씨 일가가 꾸준히 사재를 기부하여 유지되고 있는 천성 재단의 후원 프로그램에는 사회 공헌을 위해 마련된 여러 가지 제도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신설된, 약 2년 전부터 문화 예술과 관련하여 시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재능 꿈나무’라는 것이 있다.
‘재능 꿈나무’는 말 그대로 만 18세 미만의 재능 있는 아이들을 한 명의 문화 예술인으로 육성해 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재단 측에서 기본적인 강습과 강습 용품까지 전부 빠짐없이 지원해 주는 제도였다. 현재 약 30여 명의 아이들이 이 제도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후원을 원한다면 후원인이 따로 후원도 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었다.
-엄마랑 선생님 빼고 수어를 ‘말’이라고 해 주는 형은 처음 봤어요.
「예나도 마니마니 연습해서 예쁜 공주님이 될 거예요!」
그리고 그 목록에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아이들의 이름을 발견한 한솔은 후원을 결정했다. 아이들이 수락하면 직접 만나 볼 수도 있다는데 딱히 그러진 않았다. 다만, 바람이 휑하니 부는 난간 앞에 쪼그려 앉은 채 후원 아이들의 프로필을 보고 또 볼 뿐이다. 한솔의 목에 칭칭 감겨 있던 하얀 목도리가 나풀거리며 휘날렸다.
우연은… 아니겠지.
하필이면 딱 2년 전쯤에 신설된 프로그램에서 그를 스쳐 간 인연들이 있을 확률을 계산하는 것보단 그냥 누군가의 섬세한 손길이 닿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빨랐다.
한솔은 차가운 난간에 콩- 하고 이마를 기댔다.
캄캄한 미로 속에서 누군가 자신이 걸어가야 할 앞길에 다정하게 빛을 비추어 주는 기분이었다. 길을 잃어버리지도 또 방황하지도 않도록-. 그저 발밑의 발자국을 따라 사박사박 걸어가다 보면, 금방이라도 환한 등불을 들고 있는 누군가의 단단한 등이 보일 것만 같았다.
한솔은 푹신한 목도리에 폭, 얼굴을 파묻었다. 한기에 차갑게 굳어 있던 뺨 위로 뜨거운 물기가 일렁이며 떨어진다. 그리움이, 사무치도록 깊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
“아니, 자네. 이한솔 군 아닌가.”
아무래도 후원 관계가 마냥 수평적이진 않다 보니 아이들을 직접 만나 볼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애들이 사용한다는 시설 정돈 확인해 보고 싶었다. 먼저 윤이 다닌다는 공방에 들렀다가 교외에 위치한 문화 센터로 온 참이던 한솔은 강사님이 아직 수업 중이시란 말에 굳이 밖까지 나갔다가 들어왔다. 발그레하게 언 뺨을 채 녹이지도 못하고 연습실 유리창 너머로 안쪽을 기웃거리던 한솔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한솔은 놀란 얼굴로 옆을 돌아봤다.
“교수님…?”
1학기에 기초 발레 수업을 맡았던 장원철 교수가 거기 있었다. 한솔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의 우연한 만남에 놀라 눈을 깜박였다.
“밖이 많이 추운가 보네. 잠깐 들어오겠나?”
허허, 웃은 노교수가 한솔을 연습실 안으로 초대했다. 한솔은 차마 노교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서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한 기분이었다. 어느새 홀린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한솔은 시선의 한참 아래에 있는 앙증맞은 발레 바를 잡아 보며 살그머니 웃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황금빛 햇살과 구석에 차곡차곡 쌓인 아기자기한 매트들- 전문 학원만큼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는 않지만 뭔가 아늑하고 포근한 그런 느낌이었다.
“자아, 따뜻한 율무차일세. 젊은이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네만.”
연습실에 딸려 있던 작은 다용도실로 사라졌던 노교수가 그런 한솔에게 다가오더니 무언가를 건넸다. 귀여운 아기 토끼가 그려진 머그잔이었다. 뭔가 어른이 돼서 어린아이 거를 염치없이 빼앗은 기분이라 멋쩍은 기분이 든다. 한솔은 감사 인사를 하며 컵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인가. 수업을 받는 가족이라도 있나?”
고소한 율무차를 홀짝이던 한솔은 노교수의 질문에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이걸 말해도 되나 싶어서 머뭇거리던 한솔에게 오히려 노교수가 무언가를 짐작한 듯 물었다.
“혹시, 후원하는 아이가 있는 겐가?”
“네에…, 어떻게 아셨어요?”
“가족이 아니라면, 여기까지 찾아올 손님이 많지 않거든-.”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좋은 인연을 가꾸고 돌볼 생각을 하다니 기특하다며 노교수는 인자한 눈빛으로 한솔을 바라봤다. 겨우 이제야 한 발자국을 떼기 시작한 한솔로서는 쑥스러울 따름이었다.
“교수님은 혹시 여기서 강의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네. 나이가 나이인지라 간간이 이론이나 조금 알려 주는 형편이네만.”
시범을 보여 주는 선생은 따로 있고 자신은 아이들 낮잠 시간으로 아주 유용한 것 같다며 노교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발레를 꽤 해 온 눈치이던데.”
노교수의 말에 한솔은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네… 10년 좀 넘게 했어요.”
“…장래로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혹여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있을까 봐 걱정이 되는지 아주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음….”
한솔은 한평생 단 한 분야에 정진하며 살아온 이에게 하기엔 조금 부끄러운 말인지라 한 박자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저는 욕심이 아주 많아요.”
“…….”
“발레의 끝을 봤다, 이런 건 절대 아니구요. 다만… 저는 제가 목표하던 바를 이뤘기 때문에 더 다양한 것들을 배워 보고 싶어요. 교수님이 보시기엔 이제 걸음마 떼 놓고 뭘 하나 싶으시겠지만….”
한솔이 말꼬리를 흐리자 노교수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나.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을.”
“…그게 친한 친구 중에 무용과를 간 친구가 있는데 흘러가듯이 한 번씩 아쉬워하더라고요. 너도 여기 왔으면 좋았을 거라고. 그래서 저도 가끔, 내가 한 선택이 맞는 걸까? 싶기도 해요… 아, 물론! 지금 전공이 싫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요.”
어릴 때는 그게 무조건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발레에 실증이 난 것은 아니지만, 문득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튀어나와 새로운 선택을 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다. 항상 자신의 세계를 견고하게 뒷받침하고 있던 이와의 균열이 생기고부터 시작된 불안감이 이를 부추겼으며 한솔은 결국 지금 이 현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나 궁금해지곤 했다.
“세상만사 모든 일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순 없다네. 특히 사람의 생이란 그저 이 길이 있으면 또 다른 길이 있을 뿐이지. 그것에 대고 무엇이 옳았나, 틀렸나를 판가름할 순 없는 법이지 않겠나.”
“아….”
“그리고 배울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것도 좋겠지. 대부분의 이들이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아 한가지 길을 선택하곤 하지만 자네가 그럴 의지가 있고 여력이 된다면 그게 자네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아니겠나.”
그 순간,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보고 싶은 거 전부 망설이지 마.
한솔의 눈망울이 옅게 흔들렸다.
“지금은 1년 1년이 커 보이기에 한때의 선택이 인생을 좌지우지할 것 같지만 이 나이가 되어 돌아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아. 자네가 이것을 다시 배워 보고 싶을 때가 오면, 또 하면 되지 않나. 배움에 늦음은 없음이니.”
노교수는 빙그레 웃었다.
“그저 자네의 소중한 친우는 아쉬워서 그런 것이네. 춤을 출 때의 자네는, 정말 즐거워 보였거든.”
***
“얘는 왜 또 죽어 가고 있어?”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술을 마시자며 징징대는 한솔 탓에 은혜는 간만에 집에서 쉬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운 침대와 이별하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친구가 웬수지, 웬수야. 한파가 몰아치는 1월인지라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올 수도 없어서 더 귀찮았다. 결국 억울한 마음에 풀 치장을 하고-이한솔에게도 제대로 차려입고 나오라며 엄포를 놨다.- 정말 웬만해선 신지 않는 하이힐까지 신고 나자 좀 직성이 풀렸다.
이한솔과 만나기로 했던 오메가 전용 와인 바로 가자 벽에 얼굴을 기댄 채 축 늘어져 있는 한솔이 보였다. 은혜는 2년 쉬었다고 벌써 자세 무너진 거 보라며 나직이 혀를 찼다. 그녀가 한솔의 등을 찰싹 치자 한솔이 느리게 눈을 끔벅이며 은혜를 올려다봤다.
“왔어?”
“옷 예쁘게 입고 왜 죽상이야. 허리 펴.”
“잔소리쟁이….”
한솔이 투덜거리며 허리를 펴자 한솔의 착장을 쓱 스캔한 은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음, 얼죽코 합격. 곧은 자세와 몸 실루엣이 잘 드러나는 타이트한 터틀넥 니트, 얇은 머플러, 바지 라인을 깔끔하게 잡아 주는 패션용 숏 부츠에 분위기 있는 롱코트가 더해지자 아주 마음에 들었다.
“너 그 경호원은 어디다 두고?”
“아… 그분은 내가 돌아가라 했어. 영 이런 분위기를 불편해하시길래.”
“그래도 돼?”
“어차피 너랑 만나는 건데, 뭐.”
세상 어색한 얼굴로 꼿꼿이 서 있는 경호원에게 오메가 전용 바라 괜찮다, 친구 만나는 거다, 다른 사람들도 불편해한다-며 부단히도 설득한 끝에 그를 돌려보낼 수 있었다. 결국, 혼자 남겨지는 데 성공한 한솔은 바 구석에 앉아 은혜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이셔. 이한솔이 술을 다 마시자 하고.”
은혜가 착석하자 미리 주문해 놨던 와인을 직원이 오픈해 주었다. 향긋한 와인 향을 음미하며 입술을 적신 다음, 포크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새우를 콕 찍어 한입 베어 문다. 오물오물거리며 쫄깃하고 탱탱한 새우 살을 씹던 한솔이 입 안의 것을 꿀꺽 삼키고 와인으로 입가심을 했다.
“그냥… 혼자 있으니까 외로워서.”
“얼씨구. 고무신 신더니 이제야 친구가 좀 보이냐?”
피식 웃은 은혜가 한솔의 잔에 와인을 더 따라 주었다. 한솔은 그런 친구를 턱을 괸 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은혜야. 하루 종일 연습하면 안 질려?”
“당연히 질리지.”
뭔가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었던 터라 한솔은 슴벅슴벅 눈을 떴다.
“나 고딩 때 슬럼프 왔던 거 기억 안 나? 진짜 완전 심각했었는데.”
“그때도 금방 털고 일어났지 않아?”
“그야, 그건 해결책을 빨리 찾아서 그런거고. 운이 좋았지.”
그녀는 가느다란 스템을 잡고 와인 잔을 가볍게 돌렸다. 붉은빛의 액체가 옅게 출렁이며 빛과 그림자를 뒤섞었다.
“사람인데, 맨날 같은 거 하고 지적받고 하는 게 왜 안 질리겠어.”
무대, 그게 뭐라고. 그녀는 그 좁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세계를 사랑해 버리고 말았다. 머리맡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한 번을 받기 위해 수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기나긴 시간들까지 사랑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지난하고 고통스럽다. 자신의 두 발을 떼어 내 혼자 춤추게 둘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그날따라 잘되지 않는 동작에 화를 내고, 울고, 주저앉았던 적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그냥, 좋아하니까 하는 거지.”
말 안 듣는 사랑스러운 말괄량이를 보듯 혹은, 아주 오래된 연인을 보듯 은혜는 그렇게 말했다.
때로는 지루하고 지치고 힘들지만, 결국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왜, 이제야 후회가 좀 돼?”
재수 고? 윙크까지 하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는 은혜에게 한솔이 질색을 하며 말했다.
“아, 됐거든!”
“칫-.”
그녀는 낚을 수 있었는데 아쉽다며 심술궂게 웃고는 포크로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았다. 탄수화물 덩어리의 한 입 칼로리를 계산해 보다가 이미 와인에서 글러 먹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그녀는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를 실천하며 면을 흡입했다. 음, 와인은 괜찮은데 안주는 별로네. 워낙 인구수가 적다 보니 괜찮은 오메가 전용 바가 드문 게 현실이다. 어쩔 수 없이 온 곳이지만 다음부턴 그냥 호텔을 가야겠다며 머릿속에 체크하고선 냅킨을 뽑아 입을 닦는다. 그녀는 대체 저 작은 머리통으로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세상 시무룩한 얼굴의 한솔을 슥 보더니 말했다.
“그럼, 뭐가 문제길래 그래?”
“내가 이상한 건가 싶어서. 너도 그렇고… 다들 하나만 전문적으로 배우는데 나는 그냥 이것도 해 보고 싶고 저것도 해 보고 싶고 갈피를 못 잡겠어.”
“흐음?”
“내가 인내심이 없는 걸까…?”
“하나 10년 했으면 충분하지. 무슨 인내심 타령이야. 그것도 네 인생의 절반이거든? 그냥 정말로 해 보고 싶은 걸 못 찾은 거겠지. 뭐, 내가 저번에 재능 아깝다 해서 그래?”
“…으응, 조금.”
“나 참, 그건 아직 너처럼 가볍게 뛰는 애를 못 찾아서 그래. 진짜 어디 이한솔만 한 사이즈에 점프 잘하는 애 어디 없나-.”
그녀는 뭐라고 한참 동안 푸념을 늘어놓더니 짠, 하고 다시 잔을 부딪쳤다. 한솔은 어쩐지 벌써부터 취해 버린 듯한 은혜를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러다가 나중에 아영이한테 또 경고 문자 받는 거 아냐…? 6살 차이 나는 은혜의 귀여운 알파에게 장문의 안부 인사 겸 경고를 받은 기억이 있는 한솔은 아무래도 은혜의 상태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리프트가 또 쉬운 게 아니에요. 여리여리하게 생긴 것들이 무겁기는 왜 그렇게 무거운지 모르겠다.”
“또 마셔?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이, 이거 놔 봐- 한참 달달하니 좋구만. 그러고 보니 이한솔은 좀 가벼웠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렇게 잘 날아다니나.”
은혜의 와인 잔을 뺏어 보려다가 결국 실패한 한솔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눈빛이 게슴츠레해진 은혜가 자신의 팔을 조물조물거리는 모습에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나도 저랬었나? 곰곰이 과오를 되짚어 보지만 아무래도 훨씬 엉겨 붙고 난리가 아니었던 장면만 떠올랐다. 한솔은 급 얌전해지고 만다. 그래, 술은… 조금만 마셔야지. 몸에도 안 좋은데. 그는 잘 마시고 있던 와인 잔을 옆으로 슥 밀었다. 둘밖에 없는데 자신까지 취하면 답이 없을 것 같았다.
“근육이 있긴 한 거야? 왜 이렇게 말랑거려? 이한솔- 듣고 있어?”
“네에, 최은혜 님 물 여기 있습니다. 마시고 정신 좀 차리세요.”
한솔이 냉수를 가득 따라 주자 은혜는 한솔의 팔을 놓아주고 대신 물 잔을 붙잡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탁자에 탁, 내려놓고선 거친 움직임에 얼굴 앞으로 쏠렸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설마 몸 관리도 안 하는 건 아니지? 하면서 또 폭풍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한솔은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말이 많아진 것 같은 은혜를 보며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앞으로 최은혜랑 와인 바는 절대 오지 말아야지. 맥주랑 소주는 괜찮더니 와인에 약한 타입은 또 처음이었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그 잔까지만 마시고 최은혜를 데리고 와인 바를 나왔다. 와인 바가 2층에 자리한 탓에 휘청거리는 애를 데리고 나오느라 애 좀 먹었다. 아예 걷지도 못했으면 퇴근시킨 경호원을 다시 불렀어야 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솔은 끙끙거리며 은혜의 한쪽 팔을 받치고선 속으로 구시렁댄다. 친구가 웬수지, 웬수야….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하는 생각도 똑같았다.
바가 워낙 좁은 골목에 있기 때문에 차가 들어올 수가 없어서 기사님과는 저 앞 도로변에서 만나기로 했다. 은혜를 반쯤 업은 채 시끌벅적한 반대편과 달리 유난히 조용하게 느껴지는 골목길을 저벅저벅 걸었다. 환한 달빛과 어슴푸레한 가로등 빛이 공존하는 공간-. 어둠은 담담하고 아늑했다. 하얀 입김이 몽실몽실 뭉쳤다가 아스라이 흩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어쩐지 현실과 아득히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
그렇게 한참을 걷던 한솔은 길을 절반쯤 왔을 때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서더니 힘이 빠진 사람처럼 제자리에 무릎을 접고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예고 없는 낙하감에 정신을 차린 은혜가 고개를 들어 올리곤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이게 무슨 상황?’이란 표정을 짓다가 옆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연갈색 머리를 발견하고선 눈을 깜빡 떴다.
“…이한솔?”
“…….”
“한솔아, 야-.”
“…….”
“너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조심스럽게 한솔의 어깨를 흔들던 은혜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한솔의 모습에 당황해선 자세를 틀어 친구의 모습을 살폈다. 혹시 어디 아픈가 싶어 손바닥으로 이마의 열을 재 보려던 그녀는 한솔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물기를 발견하고선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작게 벌렸다.
“너, 너… 우, 울어?”
“…….”
“잠깐, 잠깐…! 왜 그래…? 내가 너무 무거웠어? 어, 시발… 역시 파스타는 먹지 말았어야….”
“…….”
“으아악- 뚝! 뚝 해! 내가 미안해, 응? 앞으로 파스타는 안 먹겠습니다! 맹세!”
그녀가 갖은 호들갑을 다 떨어도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최은혜가 그렇게 약한 멘붕이 와 있는 사이,
“……보고 싶어.”
처연하게 내리뜬 눈 아래로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내는 소리에 그녀는 조용히 탄식하고 말았다. 항상 밝고 씩씩해 보이던 모습도 결국 내면의 연약한 모습을 가리기 위한 연기일 뿐. 터져 버린 둑 아래에선 모든 가면이 거센 물살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친구의 민낯을 가려 주려는 것처럼 작은 머리를 끌어와 가만히 품 안에 안았다.
“유신우 나쁜 새끼. 너 놔두고 어딜 그렇게 멀리 가 버렸대.”
그렇게 환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거리를 앞에 두고 어둠이 내린 골목길에선 한동안 들썩이는 등을 토닥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
「보고 싶은 신우에게」
또박또박, 그리움을 펜촉에 녹여 편지지를 가득 채운 한솔은 곱게 편지 봉투에 담은 뒤, 향수 뚜껑을 열었다. 칙칙-. 그는 매번 그랬던 대로 편지 봉투 위에 페로몬 향수를 두어 번 뿌렸다. 정말 페로몬을 담아 놓은 것은 아니고 정확히는 한솔의 페로몬을 흉내 내 만든 향수였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흔적이 그 애의 옆에 닿기를 바라며 뭉툭한 모서리를 쓰다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지를 부치러 나갈 생각이었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한솔은 습관적으로 우편물 보관함을 확인하며 지나치다가 702호 칸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흰 봉투를 발견하고선 다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분명, 신우한테 답장이 올 시기가 아닌데…? 그러면서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들고 있던 편지 봉투를 꾹 품에 안은 채 보관함에 들어있는 편지 봉투를 꺼냈다. 뒷면을 돌려 보자 익숙한 글씨체가 보인다. ‘유신우’. 한솔은 보낸 이의 이름을 보고선 잠시 넋을 놨다가 크리스마스 날 산타 할아버지에게 받고 싶었던 선물이라도 받은 어린아이처럼 상기된 얼굴로 조심조심 편지 봉투를 뜯었다.
「……그래서 휴가가 좀 앞당겨졌어. 다음 주 토요일에 나가게 될 것 같은데 시간 괜찮아?」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한솔은 지나가던 입주민이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군 우편은 특수 지역이기 때문에 도착하는 텀이 제법 걸리는 편이다. 한솔은 날짜를 셈해 보다가 오늘이 신우가 말한 주차의 수요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옷, 옷부터 사야… 아니, 일단 숍부터… 아니….”
뭐부터 해야 될지 몰라 우왕좌왕거리던 한솔은 마음 급한 대로 경호원부터 호출했다. 톤 자체는 밝지만 할 말은 똑 부러지게 하던 평소의 목소리와 달리 뭔가 다급해 보이고 정신없어 보이는 한솔의 목소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심각한 얼굴로 달려왔던 경호원은 인생 최대의 난제에 부딪히게 된다.
“앞머리를 까는 게 나을까요? 연습할 때 사과 머리하면 신우가 이마 귀엽다고 그랬는데…. 아니면, 역시 쉼표 머리? 데이트할 때 가끔씩 했는데 신우가 막 여기를 이렇게 만지작거리더라고요. 자기는 만지는지도 모르는 것 같던데, 귀여워….”
고용주와 보호 대상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렵다…. 심지어 상대가 데이트 코디를 물어온다면 어려운 것을 넘어 괴롭기까지 하다. 인생에서 패션이라곤 군복과 정장, 편한 트레이닝복밖에 없던 경호원은 동공 지진을 일으키다가 간신히 한솔의 마수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한솔의 퍼스널 쇼퍼에게서 답장이 날아온 덕택이었다.
“앗, 오늘 시간 되신다고 하시네요. 음음, 그럼 옷은 오늘 사고 머리는 내일 하고…. 장은 금요일에 보는 게 좋겠죠? 재료가 싱싱해야 또 맛있으니까.”
근래에 들어 가장 밝아 보이는 한솔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작게 미소 지었던 남자는 업계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월급을 받는 대가로 난생처음 제대로 된 ‘쇼핑’이란 게 뭔지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한솔이 옷걸이에 걸린 수십 벌의 옷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또 거기에 맞는 신발, 모자, 액세서리까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그렇다고 옷을 또 한 벌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상의는 상의대로 하의는 하의대로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옷 쇼핑이라 해 봐야 같은 색의 트레이닝복과 정장을 여러 벌 구입하는 게 다였던 남자에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고된 하루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경호원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 위로 다이빙을 한다. 그리고 잠시 동안 푹신한 베개를 끌어안은 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핸드폰을 꺼내 잠금이 걸려 있는 갤러리로 들어가선 ‘❤’ 라고 저장되어 있는 앨범을 열었다. 가장 최근에 면회를 가서 찍은 사진부터 아주 어릴 적에 두 사람이 눈밭에서 뒹굴고 있는 사진까지-. 몇천 장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며 살포시 미소 짓던 한솔은 앨범의 끝에 도달하자 입매를 굳히고선 턱 아래에 있던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시간, 진짜 안 간다-.”
한솔은 한숨을 폭 내쉬며 투덜거렸다. 다 똑같이 주어진 하루일 텐데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모르겠다. 결국 투덜거리며 침구를 와락 끌어안고선 이른 잠을 청했다. 시간이 갈수록 수면에 드는 시간이 길어지고 자다가도 이유 없이 깨는 경우가 많아지는 탓에 숙면을 취할 수 없어 이른 시간에 침대에 눕는 버릇이 생겼다. 한솔은 손안의 이불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그래도 3일만 참으면 돼….’
오늘도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은 하루였다.
“아, 치즈…!”
유모에게 도움을 받아 불고기를 양념에 재워 두고 남은 재료들을 차곡차곡 냉장고에 정리하던 한솔은 퍼뜩 든 생각에 작게 탄식했다. 치즈는 신우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거리다. 물론, 같이 살던 집인 만큼 남은 것들이 있지만 유독 신우가 마음에 들어 하던 까망베르치즈는 입대할 때 전부 챙겨 주고 남은 게 없었다. 일반적인 마트에선 취급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천성 호텔에 가서 사 온다는 걸 깜박하고 말았다. 으으, 그래도 까먹을 게 따로 있지 하필이면….
어쩌지 싶었던 한솔은 노을이 느릿느릿하게 지기 시작한 밖을 보고 결심을 굳혔다. 이미 분위기 낼 와인까지 다 준비해 놨는데 이왕이면 신우가 좋아하는 걸 먹게 해 주고 싶었다. 장보기를 도와주던 유모가 돌아가고 오늘은 더 이상 외출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경호원도 함께 퇴근시켰기 때문에 한솔은 지금 혼자였다. 가는 데만 해도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호텔 베이커리가 일찍 닫는 편이다. 거기에 굳이 퇴근까지 한 경호원을 다시 부르기엔 너무 미안했다. 급하게 외투와 지갑을 들고 혼자서 밖으로 나가려던 한솔은 문손잡이를 잡고 잠시 멈칫한다.
-위험하니까 절대 혼자 다니지 마. 특히 청남구 쪽은, 알겠지?
청남은 신우가 입대할 쯤부터 떠들썩했던 재개발 구역이었다. 한솔이 가려는 천성 호텔이 있는 곳과는 완전히 반대인 곳으로 사람들이 떠나 텅 비어 버린 폐가 같은 모습 탓에 연출 쪽 선배들이 배경으로 딱이라며 답사를 가겠다고 시끌벅적했던 기억이 있었다. 워낙 교통이 불편해서 금방 포기했지만. 반면, 그와 달리 천성 호텔은 5성급 호텔인 만큼 주변에 유동 인구도 많고 접근성도 좋았다.
신우가 위험하니 경호원과 꼭 붙어 다니라 했지만 그간 착실하게 경호원과 같이 다녔어도 특별히 위험한 일은 없었다. 아, 그 불량배들은 빼고. 사실 그런 사람들은 신우가 가기 전에도 충분히 많았으니까…. 그리고 얼마 전에 은혜하고 둘이서 놀았을 때도 경호원이 없었지만 아무 일 없었다. 한솔은 신우가 으레 하는 자신에 대한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약속이야, 솔아.
신우의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했지만, 한솔은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열었다. 삐리릭-. 도어 록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우야, 미안. 금방 갔다 올게.’
끼익, 쿵. 뒤로 무거운 문이 닫혔다.
“안녕하세요, 혹시 XX브랜드 까망베르치즈 있을까요?”
“네, 몇 개 필요하세요?”
“2개… 아니, 3개 주세요.”
다행히 모종의 불안감과 달리 한솔은 무사히 마감 직전의 호텔 베이커리에 도착해 원하던 것을 득템했다. 그는 값을 지불한 뒤 직원이 건네주는 묵직한 쇼핑백을 받아 들고 호텔을 나왔다. 그사이 해가 졌는지 바깥은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도시의 밤이 찾아와 있었다. 쇼핑백을 품에 안은 채 인파 사이에서 한숨 돌리던 한솔은 조금은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지자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님 말을 잘 듣고 싶은데 어겨서 생긴 반작용이랄까. 이제 얼른 돌아가기만 하면 완전 범죄 성공이었다. 한솔은 아까보다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지하철을 탔다.
뚜벅뚜벅-.
오피스텔이 학교와 가까워서 그런지 집으로 가는 길을 걷다 보면 저 멀리 대학로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장갑도 목도리도 챙기지 못한 탓에 한솔은 겨울바람에 오들오들 떨며 골목길을 걸었다. 그러다 손목에 걸린 쇼핑백이 무겁다 싶으면 손을 바꿔 들었다. 두툼한 치즈 3개의 하중을 견디느라 손목 부근이 조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입김을 호호 불며 차가운 손끝으로 손목을 매만지고는 파카 주머니에 쑥 집어넣는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내일 신우 올 텐데 배스밤 넣고 목욕해야겠다- 한솔은 그렇게 생각했다.
뚜벅….
“…….”
무언가, 자신의 발소리라기엔 이질적인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입주민인가?’
이쪽이 학교에서 오는 방향이긴 하지만, 학교 근처의 오피스텔이니 학생들도 꽤 살았다. 파카 주머니 안에서 두 손을 꾹 움켜쥔 한솔은 좀 더 빨리 걷기 시작했다. 뚜벅뚜벅뚜벅! 뒤의 발걸음 소리도 점차 빨라지기 시작한다. 심장이 무섭게 쿵쿵, 뛰었다.
‘…따라오고 있어.’
그런 결론이 나는 순간, 한솔은 다리 근육에 바짝 긴장을 줬다. 뛰어야 된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에 앞으로 빠르게 튀어 나갔다. 뒤에서 당황한 건지 잠시 멈칫-한 스토커가 무섭게 쫓아오기 시작했다. 한솔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모퉁이만 돌면…!’
며칠 전부터 가로등이 나가 어두운 길목과 달리 모퉁이 뒤쪽에선 환한 불빛이 보였다. 숨을 헐떡이며 달리던 한솔은 긴장감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쿵, 쿵거리며 자신을 쫓아오는 어느 한 남성의 모습에 솜털이 삐죽 솟았다. 그래서일까,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한솔은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작은 돌멩이를 밟고 발목을 삐끗하고 말았다.
“아윽!”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고 갑자기 달린 탓에 놀란 근육이 강하게 수축한다. 그대로 휘청이던 한솔의 파카 모자를 누군가 강한 힘으로 잡아당겼다. 뒤로 훅- 끌려가는 아찔한 부유감, 깜짝 놀란 얼굴이던 한솔은 본능적으로 몸 균형을 잡고 가볍게 피루엣 턴을 도는 것처럼 몸을 회전시켰다.
퍼억-!!
그리고 무언가를 강하게 걷어찼다. 정말 본능적인 동작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악!! 이 새끼가…!”
하필이면 제대로 힘을 못 준 상태의 턴이었던 지라 발차기가 완벽하게 들어가진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타격은 있는지 상대가 주춤하는 것이 느껴진다. 한솔은 이때다 싶어 파카 지퍼를 열고 마치 탈피를 하는 나비처럼 스르륵 몸을 빼냈다. 만약에, 한솔이 한 손목에 묵직한 쇼핑백을 걸어 두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손쉽게 의문의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흣…!”
그대로 파카에 한쪽 팔이 턱, 걸리며 머리채가 붙잡혔다.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끌려가는 느낌에 한솔이 이거 놓으라며 발버둥을 쳤다. 남자는 주변의 눈치를 보는지 한솔의 입부터 틀어막았다. 읍읍…. 난생처음 보는 사람한테 붙잡혔다는 사실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했지만 벽에 밀쳐지자 춥고 긴장한 탓인지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갔다. 한솔의 몸이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진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허억, 허억… 미친, 미친년이….”
자꾸 좌우로 미친 듯이 돌아가는 동공, 한겨울의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남자-. 그리고 비정상적인 강한 페로몬…. 러트가 온 알파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 증상을 제치고도 남자는 이상했다. 덩치에 비해 과하게 홀쭉한 볼과 앙상한 광대뼈, 짙은 다크서클, 핏발이 선 퀭한 눈동자-. 입에선 담배 냄새와 비슷한 쿰쿰한 냄새가 났고 수전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한솔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자신의 옷을 들추려다가 잘되지 않자 신경질을 부리는 모습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알파는 간단한 약으로도 손쉽게 러트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살면서 러트가 온 알파를 볼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하물며 가족이나 신우도 그런 적을 본 기억이 없는데 낯선 타인이라니. 무서운 것이 당연했다. 한솔의 얄쌍한 턱선을 타고 식은땀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이걸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예전에 클럽 사건이 있었을 때처럼 온몸이 무력할 정도로 완벽하게 제압당하진 않은 상태였다. 그때는 상대가 전문가인 데다가 앞도 보이지 않은 상태라서 정말 무서웠다. 어떻게든 상대를 살살 구슬려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한솔은 소름 끼치는 손이 자신의 상의를 찢듯이 올리고 쏙 들어간 배와 허리를 만지작거리는 느낌에 결심을 굳혔다.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든 자력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헉, 헉, 헉…. 귓가에 낯선 알파의 더운 숨이 쏟아질 때마다 입 안에 마른침이 고였다. 그는 쥐가 났는지 뻣뻣한 손끝을 조금씩 움직이며 근육을 달궜다.
“이, 러지 마세요….”
상대가 최대한 자신을 얕볼 수 있도록, 그래서 방심하도록 만들기 위해 한솔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만들어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제는 완전히 성숙하게 개화한 미인의 젖은 얼굴과 겁에 질린 목소리는 언제나 효과가 좋았다. 거칠게 한솔의 몸을 밀어붙이던 남자의 손에 조금 힘이 빠졌다. 한솔은 젖은 속눈썹을 깜박이며 조금 반항하는 것처럼 상체를 뒤틀었다. 그러자 상체를 짓누른 힘이 더 세지면서 대신 하체 사이에 좀 더 공간이 생겼다. 한솔은 그 틈을 타 슬쩍 발목을 옆으로 세웠다.
러트가 온 알파는 이제 박을 구멍을 찾는지 혈안이 된 얼굴로 한솔의 엉덩이를 마구 주무르고 있었다. 한솔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짐승이 되었으면 싶은 사람은 아직도 신사의 탈을 벗질 못하는데 왜 엉뚱한 인간들만 이렇게 하반신에 머리가 달린 것처럼 사는지 모르겠다. 물론, 한솔도 만만치 않게 신우를 자빠트릴 생각만 하고 있지만 그래도 된다고 허락받은 사람한테 나 좀 봐 달라고 엉큼한 짓을 하는 것과 생판 모르는 남을 붙잡고 헉헉거리며 하반신을 비벼 대는 건 완전히 달랐다. 후자는 엄연히 범죄였다.
“흑, 아- 안 돼… 싫어…!”
“허억… 허억….”
한솔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는 남자를 울상인 척하는 얼굴로 힐긋 이다가 그가 반항하지 않자 전과 달리 조금 느슨해진 거리감을 쟀다.
‘조금 짧은데….’
한 번에 빠져나가려면 하반신을 제대로 걷어차서 무력화시켜야 한다. 늘씬해 보이지만 실상 파괴력은 남다른 한솔의 다리로 거길 차 버리면 어떤 결과가 날지 1차 성별이 같은 남성으로서 조금… 한 개미 티끌만큼 미안하긴 하지만-.
‘아저씨, 원래 나쁜 짓을 하면 벌 받아요.’
작든 크든 매번 사고치고 혼나는 게 일상인 한솔은 속으로 흥, 코웃음을 쳤다. 그는 겁에 질려서 눈물로 흠뻑 젖은 겉모습과 달리 사뭇 냉철한 매의 눈으로 기회를 살폈다. 조금, 조금만 더….
왕왕-!!
그때였다.
용맹…하다기엔 뭔가 귀여운 소리와 함께 하얀 솜뭉치가 맹렬하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부…?’
한솔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어렸을 적에 꼬꼬마 이한솔을 무척 좋아했던 사모예드 두부의 모습이 환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아르르… 꺙! 하지만 현실은 두부의 1/10도 되지 않는 주먹만 한 솜뭉치가 이를 드러내며 꺙꺙거리는 것이 다였다. 한솔이 잠시 현실과 동기화가 되지 않아 멈칫거리는 사이 솜뭉치가 작은 이빨로 남자의 손을 콰득 물었다.
“악, 씨발…!”
끼잉…!
남자는 본능적으로 솜뭉치를 강하게 쳐 냈다. 작은 솜뭉치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처럼 휙 날아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한솔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두부야!”
어린 두 사람의 품에서 마치 편안하게 잠이 드는 것처럼 조용히 강아지별로 떠났던 두부와는 명백히 다르지만, 거친 땅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작은 강아지를 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한솔은 그만 작전도 잊고 발버둥을 치며 강아지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을 전보다 더 강하게 옥죄어 오는 남자의 올가미에 이를 악물었다.
“이거… 놔아…!”
한솔이 진심으로 소리쳤다. 아까부터 눈가에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방울이 기어코 한 방울 흘러넘쳤다. 짜증 나고, 화나고, 선을 넘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멍청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건지…. 세상에 순간 환멸이 나려 하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한솔아, 눈 감아.”
질척하게 엉겨 붙던 더러운 페로몬을 깨끗하게 씻겨 내리는 청량한 숲 내음이 맡아진다. 심장이 두근, 두근 뛰었다. 말도, 안 돼… 신우는 분명… 내일, 온다고….
하지만 한솔의 두 눈은 이미 이성이 부정을 하기도 전에 곱게 감기고 있었다.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던 덩치가 일순 가벼워진다. 그리고-.
퍽-!!
바로 옆 벽에서 수박 터지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잘했어.”
신우가 손을 뻗어 한솔의 뺨에 한 방울 튄 붉은 액체를 슥 닦았다.
“주, 죽었어?”
“아니.”
신우는 축 늘어진 덩치를 밀어 치우고 그 아래 깔려 있던 한솔의 몸을 일으켜 안았다. 한솔은 신우가 눈을 떠도 좋다고 하지 않은 탓에 여전히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추위와 긴장감에 덜덜 떨고 있는 연인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자 달달한 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몸이 착 감겨 왔다. 그가 평소에 잠을 못 자는 한솔을 재우던 것처럼 등을 느리게 토닥이기 시작한다. 한솔은 너무나 보고 싶었던 이의 향기에 입술을 꾹 다물고선 신우의 목을 힘껏 껴안았다.
“아쉽게도, 죽진 않았네.”
낮게 잠긴 목소리를 내리깐 신우는 아주 천천히 등을 벽에 기댔다. 그제야 알았다. 신우의 심장이 무섭도록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한두 시간 조깅을 하는 것 정도론 숨도 안 차던 알파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그를 품에 안은 몸이 그제야 긴장을 푸는 것처럼 느리게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한솔은 그제야 알았다.
“…아! 강아지…!”
뭉클한 마음에 신우의 어깨에 턱을 얹은 채 훌쩍이던 한솔은 한 박자 늦게 생각난 솜뭉치 탓에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돌리려 했다. 움직이려는 한솔의 뒤통수를 꾸욱 눌러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만든 신우가 한솔의 몸 위로 겉옷을 덮어 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몸을 움찔- 떤 한솔이 숨을 색색 내쉬며 신우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알파는 그제야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 형. 갑자기 미안한데 여기 위치가….”
그리고 신우의 전화 상대는 생각보다 빨리 만나 볼 수 있었다.
“화려하게도 한 건 하셨네. 아, 저 애기야?”
전화 상대는 신우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쓰러져 있는 강아지한테 다가갔다.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신우가 여전히 한솔의 머리를 누르고 있는 탓에 힐긋힐긋 눈치만 보던 한솔은 상대가 스치듯 지나갈 때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만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히 겉으로는 크게 문제없어 보이는데, 혹시 모르니까 데려가서 검사해 볼게.”
“고마워.”
“그래, 여유 생기면 찾아와.”
그리고 신우는 몇몇 다른 사람들과 또 통화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정해선에게 남자의 뒤처리를 맡기고선 한솔을 안은 채 두 사람의 집으로 돌아왔다. 삐리릭-.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한솔은 바깥과 다른 따뜻한 공기를 느끼고 그제야 안전한 두 사람만의 공간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풀려 온몸이 축 늘어졌다.
“이한솔.”
그런데 심리적으로 가장 큰 안정감을 주던 이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한솔은 흠칫 놀라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혼자 나와 있었어.”
신우가 한솔의 머리를 누르던 손을 뗐다. 깊게 가라앉은 신우의 눈동자를 본 한솔은 침을 꼴깍 삼켰다.
“경호원은.”
“…그게… 내가 장, 장 보러 갔는데 빠뜨린 게 뒤늦게, 생각나서… 이미 퇴근하셨는데 다시 부르기가 죄송해 가지구….”
“그게 왜 죄송해. 너를 지켜야 하는 게 그 사람의 업무인 거 몰라?”
“그으….”
“…….”
“잘, 못했어… 내가 멋대로 나간 거니까 그분한텐 뭐라 하지 마….”
“…하….”
신우가 한숨을 내쉬며 한솔의 어깨에 잠시 이마를 기댔다. 한솔은 정말 지쳐 보이는 신우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신우의 군복을 꾹 움켜쥐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랜만의 재회인데… 행복하게 웃으면서 만나고 싶었는데….
“어, 어디 가…!”
한솔을 소파에 가만히 내려놓은 신우가 등을 돌렸다. 곧장 현관으로 향하는 모습에 눈을 크게 뜬 한솔이 소리쳤다.
“잠깐 있어. 머리 좀 식히고 올 테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신우가 말했다. 한솔은 정말 나갈 기세인 신우의 모습에 다급해져선 거의 날듯이 달려가 신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지 마, 응…?”
“…….”
“잘못했어… 흐윽… 가지 마….”
차라리 혼내 달라며, 신우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은 한솔이 울먹이며 말했다. 잠시 동안 그 상태로 숨을 고르던 신우는 자신의 배에 팔을 두르고 절박하게 끌어안고 있는 한솔의 손등을 잡았다.
“…!”
그대로 천천히 떼어내자 한솔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뚝- 하고 추락한다.
“모든 걸.”
“…….”
“상과 벌로만 나눌 수는 없어, 솔아.”
그렇게 가 버릴 줄 알았던 신우는 잠시간 한솔의 손을 붙잡고 있더니 결국 스르륵 등을 돌렸다. 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고 있는 처연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신우가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끝이 긴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린 물기를 부드럽게 훔친다. 기다란 검지가 눈가에 닿은 탓에 한쪽 눈을 살짝 감고 있던 한솔은 신우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끙끙거리는 얼굴로 하염없이 신우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결국-.
삐리릭
신우는 집을 나가 버렸다.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있던 한솔은 스르르 현관 앞에 주저앉았다.
‘CCTV… 봐 줄까…?’
여기에 계속 있으면 신우가 현관 CCTV로라도 봐 줄까 싶어 고개를 푹 숙였던 한솔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싫어할 거야….’
아무리 집 안이라지만 냉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문 앞에 있으면 신우가 싫어할 것 같았다. 한솔의 건강을 항상 우선시하던 신우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의 몸은 그의 것이기도 했지만 또 신우의 것이기도 했다. 신우가 예뻐하고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에 결국 한솔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자신의 알파가 조금이라도 확인할 수단이 있는, 또 그가 돌아오면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는 공간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한솔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러면 되겠지.’
방에서 푹신한 이불을 짊어지고 나온 한솔이 이불을 머리 위에 푹 뒤집어쓰고는 현관 턱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 위에 턱을 얹고 굳게 닫힌 현관문을 시무룩하게 바라본다. 신우 보고 싶다. 신우 언제 오지… 신우…….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 보니 오늘 하루 추운 곳에서 워낙 긴장하기도 했고 안 좋은 일을 당할 뻔하기도 해서 그런지 잠이 쏟아졌다. 현관 턱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한솔은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 뚜벅뚜벅- 대리석을 울리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띠, 띠, 띠, 띠-.
그리고 도어 록을 푸는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솔은 어깨 위에서 이불이 스르륵 미끄러지는 것도 모른 채 미어캣처럼 현관문을 바라보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마치 총알처럼 뛰쳐나갔다. 상대가 다른 사람일 거라곤 단 한 줌의 생각도 안 하는 모양새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묻히고 돌아온 알파를 와락- 끌어안은 한솔이 엉엉 울며 말했다.
“흐어엉… 잘못했어요… 가지 마아… 형아, 가지 마….”
상대적으로 작은 몸을 단단하게 받친 신우는 일단 문부터 닫았다. 그리고 너무 울어 열이 오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마를 톡, 쳤다.
“누가 현관에 앉아 있으래.”
그러자 속에 할 말이 가득이던 한솔은 현관 앞에 널브러져 있는 이불 더미를 마구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흐윽… 저거 쓰고 있었는데….”
“그거 쓴다고 보온이 돼?”
신우가 한솔이에겐 보이지 않게 작게 웃고는 따끈한 몸을 안아 올렸다. 그가 또 자신을 두고 나가 버릴까 봐 무서워진 한솔은 신우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한솔은 그대로 방의 욕실까지 배달되어선 욕조 턱에 앉혔다.
“옷 벗어.”
신우의 말투가 묘하게 위압적일 땐 평소의 신우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신우는 ‘형아’인 신우였다.
한솔은 다소 안심이 되어선 신우를 힐긋힐긋하며 옷을 벗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을 평소처럼 잘 개키는데 신우가 그런 한솔에게서 옷가지를 슥 뺏어 갔다. 원래라면, 이것도 일종의 전환점을 인식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옷을 잘 접어서 넣어 두는 건 한솔의 역할이었다. 신우는 뺏어 든 한솔의 옷을 빨래 통에 넣는 대신 세면대에 집어넣고는 이렇게 말했다.
“똑같은 걸로 새로 사 줄게.”
그리고 온수를 틀어 버렸다.
한솔이 오늘 입은 옷은 니트 재질이라 고온의 물에 담가 버리면 사이즈가 줄어들 게 된다. 저건 회생 불가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딱히 옷이 아까운 건 아니었지만 신우가 왜 저러는 건지 몰라 눈치만 보던 한솔은 그가 샤워기를 들고 적당한 온수로 씻겨 줄 때 원인을 알게 되었다.
“흐읏…!”
폭포수처럼 흘러나온 신우의 페로몬이 한솔을 꽁꽁 감싸 안았다. 완전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우의 페로몬으로 푹 젖어 버린 한솔은 아까의 그 불쾌했던 러트 페로몬이고 뭐고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렸다. 한솔이 숨을 헐떡였다. 흐으, 읏, 으응…! 네가 내 것이라는 마킹. 페로몬 샤워에 아래가 후끈후끈 달아오르자 한솔이 갸르릉거리며 다리를 꼬았다. 결국 뒤가 벌름거리는 느낌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자 몸을 안아 든 신우가 자신의 옷이 젖든 말든 아랑곳 않고 한솔을 씻기기 시작했다.
“다친 곳은.”
“없, 흣, 없어요… 아!”
차가운 손이 구석구석 한솔의 몸을 훑었다. 매끈한 회음부를 살살 쓰다듬자 품 안의 몸이 파드득 떠는 것이 느껴진다. 신우는 특히 예민한 한솔의 귓바퀴를 츕- 하고 물었다.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물기 어린 소리에 한솔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미끈한 살덩이가 솜털이 미세하게 난 귓바퀴 안쪽의 여린 살을 삭 핥고 뾰족한 송곳니로 말랑한 귓바퀴를 꾹 누른다. 속마음으론 귀를 가리고 싶은 건지 귓바퀴를 깨물 때마다 한솔의 손끝이 움찔움찔 떨렸다. 그는 속으로 조금 웃고 말았다.
이게 물로 씻은 건지, 페로몬으로 씻은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신우의 향기를 가득 품은 채 목욕을 마쳤다. 욕실을 나온 한솔은 곧 커다란 수건에 폭 감싸였다. 그 상태로 물기를 가볍게 턴 다음 신우가 말려 주는 대로 따뜻한 바람에 머리를 맡겼다. 큼지막한 손으로 고슬고슬 머리카락을 만져 주는 게 좋았다. 너무 좋았지만- 아까의 그 아슬아슬했던 분위기를 잊을 수 없기 때문에 한솔은 자꾸 신우의 눈치를 봤다.
“솔아.”
“…으응….”
“그냥 잘까?”
한솔이 놀란 얼굴로 뒤쪽에서 머리를 말려 주던 신우를 올려다봤다.
“너도 오늘 무섭고 힘들었잖아.”
수건 째로 한솔을 들어 올린 신우가 자신의 허벅지 위에 한솔을 올려놓고 느리게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골목길에서 있었던 일은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막상 위기 상황에서도 어떻게 잘 빠져나갈까 궁리뿐이었던 한솔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 괜찮았음에도, 씩씩했음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달래 주니까 괜스레 속이 울컥했다. 한솔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건 조금쯤 남아 있었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고 혹은,
“…미안해. 사실, 너한테 그렇게 윽박지르면 안 됐는데.”
‘나 이렇게 힘들었어.’, ‘그러니까 얼른 예뻐해 줘.’ 하고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순간… 너무 두려웠어. 네가,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잖아.”
“…….”
“너는 그냥 피해자였을 뿐인데.”
“…….”
“미안해, 그런 말 해서.”
신우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크게 한 번 쓸어내리더니 ‘했던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어 괴롭다.’며 자조했다. 한솔은 항상 논리정연하고 냉철하던 신우가 이렇게 말과 관련해서 괴로워하는 걸 처음 본 탓에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사실, 사과를 받을 줄은 몰랐다. 한솔도 자신이 부주의했다고 생각한 참이었기에 더더욱….
어떤 대답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머뭇거리는데 한솔의 어깨에 이마를 콩- 하고 박은 신우가 낮게 잠겨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
“힘들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분명, 입대 전에도 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겪어 보지 못했을 때 들은 말과 겪고 나서 느끼는 말의 무게는 달랐다. 한솔은 그간 무척 힘들었다. 신우가 없어서, 인생을 함께해 온 반쪽이 옆에 없어서 그렇게 힘들었다.
결국 눈가에 습기가 차오른 한솔은 어떻게든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신우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타인에 의해 터지는 울음은 마음껏 울 수 있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울컥 나오는 눈물은 당황스럽다. 마치 내밀한 속이 전부 까발려진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한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잘까?”
한솔이 마음속 소란을 어찌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문드러진 속을 정리한 신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신우는 고목 같은 사람이다. 상처가 파여도 그걸 담담히 수용하고 더 나아가 인정할 줄 아는 사람. 그렇기에 높고 푸르다. 그의 나이테는 수많은 성장의 기록이었다.
신우는 한솔이 고개만 한 번 끄덕이면 그가 말한 대로 오늘의 일은 여기서 정리할 것이다. 더 이상 추궁도 하지 않을 테고 그냥 한솔이 원하는 대로 배려해 주고 양보해 주겠지…. 그건, 싫었다.
“신우가 아까… 모든 일을 상과 벌로 나눌 순, 없다 했잖아.”
고개를 한 번 젓고, 그것도 부족하다는 느낌에 다시 저었다. 확실한 의사 표현이 되도록. 한솔이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자 신우는 더 말하라는 것처럼 한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긴 속눈썹을 얌전히 내리떴다가 용기를 내서 신우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나는… 나는 잘 모르겠어. 내가 뭔가 잘못을 해서 신우가 아주 많이 화가 나면…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라면… 그땐 어떡해?”
벌을 받을 수 없다면, 용서도 받을 수 없다. 그건 두 사람만의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어떤 잘못을 저지르든 간에 용서받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고 화해의 제스처이기도 했다. 한솔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신우가 인상을 누그러트리며 설핏 웃었다. 신우는 두 손으로 한솔의 양 뺨을 붙잡더니 슬쩍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이마가 살포시 맞닿았다.
“모르긴 왜 몰라.”
“…….”
“너는 이렇게 매번,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걸.”
쵹, 가볍게 입을 맞추자 파르르 떨리던 한솔의 속눈썹이 곱게 감겼다. 두 혀가 질척하게 엉키면서 물기 젖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두 손에 폭 감싸진 작은 얼굴의 각도를 달리하며 혀끝을 비볐다가 입천장을 핥고 다시 잇몸을 간지럽힌다. 학…! 으응! 한솔은 두툼한 혀가 자신의 목구멍을 쑤시기라도 할 듯이 꿈틀거리는 느낌에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혀뿌리부터 시작된 간질거림이 발가락까지 쫙 퍼졌다. 동시에 등허리가 찌르르 떨린다.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느낌- 한솔은 신우가 입은 샤워 가운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헐렁하게 묶여 있던 끈이 풀리며 신우의 앞섶이 벌어진다. 짙은 숲 내음이 훅 풍겨 왔다.
“그렇게 혼나고 싶다면-.”
쪽- 신우가 발갛게 부푼 한솔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혼나야지.”
한솔은 입술을 작게 벌린 채 숨을 헐떡이며 신우를 올려다봤다.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고 눈의 초점은 흐리다. 입술은 먹음직스러울 정도로 통통하게 부푼 것이 정말 야한 표정이었다. 신우는 검지를 들어 입술 사이로 할딱할딱 숨 쉬는 한솔의 혓바닥을 꾹 눌렀다. 잠시 멈칫거리던 한솔은 이내 입 안에 침입한 것을 순종적으로 츕츕 빨았다. 당장에라도 침대에 엎어 놓고 박아 넣고 싶게 만드는 요망한 모습이었다. 그는 혀 아래까지 차오른 욕망을 능숙하게 삼켰다.
“기다려.”
신우가 몸을 일으키자 어지간히도 오늘의 일이 충격이 컸는지 한솔이 불안한 얼굴로 몸을 들썩였다. 하지만 신우가 단호하게 한마디 하자 얌전히 엉덩이를 내리눌렀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오늘의 벌을 확정 지었다. 신우가 기다리라 하니 기다리지만 그래도 혼자 있긴 싫어서 끙끙거리는데 방을 나갔던 신우가 뭔가를 들고 돌아왔다. 아까 그가 들고 갔던 한솔의 가죽 초커였다.
정확히는, 거기에 얇은 끈을 묶어 놓은-.
한솔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는데 신우가 한솔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렇게 말했다.
“한솔이, 산책 갈까?”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쭈뼛 돋았다. 다정한 목소리지만 사람이 아닌, 그래, 마치 강아지를 돌보는 듯한 손짓과 말투- 한솔은 지금 개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래도 항상 사람 취급은 받았는데 이번엔 그 지위까지 박탈당했다. 한솔의 귓불이 붉게 물들었다. 신우가 초커 끈을 풀고 ‘갈까?’ 하고 묻자 한솔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대답했다.
“…멍.”
그러자 신우는 정답이라는 듯 한솔의 앞에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툭-. 한솔이 좋아하는 아몬드였다. 이제 완전히 얼굴까지 새빨갛게 물든 한솔은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숙였다. 눈앞에 떨어진 아몬드를 손이 아닌 입술로 집자 신우는 잘했다는 듯이 한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굴욕적이었다…. 접힌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래서 좋은 것이기도 했다.
신우가 한솔의 목에 초커를 채워 주었다. 집 안에선 보통 빼고 생활하기 때문에 무언가 어색했다. 한솔이 자신도 모르게 초커를 만지작거리려 하자 신우가 단호한 목소리로 ‘안 돼’ 한다. 한솔은 얼른 팔을 내렸다.
“자, 가자.”
커다란 손이 한솔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겼다. 한솔은 입 안의 볼살을 잘근 씹었다. 그는 지금 초커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마치, 진짜 강아지처럼…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한솔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한솔은 머뭇거렸다.
짝-!
“솔아, 지금 벌써 두 번 말했어.”
하지만 진짜 강아지일 린 없다. 진짜 강아지라면 이런 수치스러운 벌을 받을 리 없으니까. 한솔은 엉덩이에 찰지게 내려앉는 매에 힉…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인간 말을 한 벌을 내리는 것처럼 신우가 빠른 속도로 세 대의 매를 더 때렸다. 짝, 짝! 짜악-!
“끼잉… 멍, 멍…!”
수치스럽고 아프다. 아프고 굴욕적이다. 하지만 달다-.
혀를 내밀며 숨을 헐떡이던 한솔은 꼴깍 침을 삼키며 쿵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맨몸인 상태로 네 발로 엎드리면 꺼떡이는 아래가 보일까 봐 머뭇거렸으나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로 옆에 무서운 주인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한솔이 최대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밀자 신우가 한솔의 초커에 걸려 있던 줄을 잡아당겼다. 조금은 팽팽할 정도로 목줄을 짧게 잡는 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 강아지에겐 필수였다. 한솔은 어쩔 수 없이 바닥만 보던 시야를 들어 올려야만 했다. 조금… 많이 부끄러웠다.
달칵-.
신우가 방문을 열어 주자 어쩐지 뭔가 많이 달라진 듯한 거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맨몸인 한솔이 따뜻하다 느낄 정도로 공기가 후끈거렸고 바닥에 러그가 깔린 길이 생겼다. 한솔은 첫눈 위에 첫발자국을 찍는 강아지처럼 새하얀 러그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꾸욱-. 그렇게 거실을 한 바퀴 돌고 나자 기분이 이상했다. 마냥 부끄럽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 것이다. 한솔이 다시 손을 뻗으려 하는데 그 앞에 신우의 발이 나타났다. 한솔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얼른 손을 제자리로 가져왔다.
“잘했어.”
그러자 신우가 아까처럼 칭찬해 주며 아몬드를 떨어트려 주었다. 부끄러움을 참고 그걸 집어먹으면 신우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칭찬을 해 준다. 자신의 행동에 즉각적으로 날아오는 피드백과 달콤한 칭찬-. 한솔은 ‘어쩌면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을지도…?’ 하는 망상을 했다. 신우와 빤히 아이 컨택을 하며 얼굴을 만져 주는 손에 행복해하는데 갑자기 신우가 소파에 앉았다. 한솔은 리드하는 줄을 따라 신우를 쫄쫄 쫓아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흣…!”
갑자기 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으로 다리 사이를 사정없이 밟아 오는 통에 자신도 모르게 짧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뒤늦게 두 손으로 입을 막은 한솔은 주춤주춤거리며 신우를 올려다봤다. 심해처럼 새까맣고 깊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개가 사람 말을 하네.”
“…! 으읍…!”
이미 물을 흘리고 있던 한솔의 성기를 발로 꽉꽉 짓눌러 주자 한솔이 질끈 눈을 감고 몸을 떨었다. 싸면 안 되는데… 싸면 진짜 혼날 것 같은데…. 한솔은 필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참을성이 없는 한솔의 성기는 마음이 다른 듯했다. 신우가 겉면을 살살 쓸어 줄 때면 금방이라도 파정을 할 것처럼 기둥 자체가 통통 튀었다. 어떻게든 참아 보려는 한솔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홀쭉한 배와 예쁜 모양으로 근육이 잡힌 허벅지가 짱짱하게 당겨졌다. 신우는 여전히 한솔의 성기를 지그시 밟은 채 바들바들 떨리는 허벅지 안쪽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낑… 끼잉….”
한솔은 금방이라도 신우가 허벅지 안쪽의 가장 여린 살을 쓰다듬을까 봐 무서워서 낑낑거렸다. 정확히는 거길 붙잡아 바로 안쪽에 숨겨진 회음부를 만질까 봐, 그래서 참지 못하고 사정을 해 버리면 또다시 혼이 날까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심리를 꿰뚫고 있을 신우가 제일 무서웠다.
허벅지가 접히는 부분의 선을 따라 신우가 손끝을 스윽 긋자 한솔은 목 아래까지 차오른 간질거림에 혀를 내밀고 숨을 헐떡였다. 이 긴장감이 좋았다. 한솔의 몸에서 가장 열이 많을 법한 부분 중 하나인 허벅지 안쪽 살을 툭툭 두들기며 적응할 시간을 주던 신우는 그러나 예고치 않게 짧은 손톱으로 회음부를 긁으며 한솔을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한껏 긴장하고 있던 성기가 크게 꺼떡였다.
“우읏… 흡!”
한솔은 신우의 팔을 붙잡은 상태로 몸을 바르르 떨다가 물기로 촉촉해진 눈을 힘겹게 떴다. 젖은 속눈썹이 엉겨 붙어 시야가 흐릿했다. 몇 번 눈을 깜박이며 원래의 시야를 되찾은 다음 한솔은 황급히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미 질펀하게 싸지른 줄 알고 울상이던 얼굴이 진실을 접하고 점차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착하네, 한솔이.”
놀랍게도 한솔은 싸지르지 않았다. 신우가 막거나 더 이상 사정할 힘도 없어서 드라이로 간 적은 꽤 많았지만, 이렇게 첫판부터 자의로 참아 낸 것은 처음이었다. 신우는 아직 완전히 가지 못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한솔의 등허리를 스윽 매만졌다. 한솔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만, 여전히 사정은 하지 않았다.
“산책 열심히 했으니까 밥 먹을까?”
“멍…!”
한솔은 원하는 만큼 마음껏 쓰다듬을 받은 다음 다시 거실을 한 바퀴 돌고 신우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 아직 사정을 허락받지 못한 터라 움직일 때마다 공중에서 꺼떡이는 성기가 굉장히 신경 쓰였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밑을 힐긋거리면 신우가 목줄을 잡아당겨 주위를 환기시켰다. 사정도 안 시켜 주다니 정말 나쁜 주인이었다.
‘사실, 좋긴 하지만….’
속으로 흐물흐물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낑낑 앓던 한솔은 신우의 길쭉한 다리가 진로를 막자 찰떡같이 알아듣고 그 자리에 얌전히 엉덩이를 내렸다. 신우는 의자 팔걸이에 한솔의 초커와 연결된 줄을 묶고 부엌 안쪽으로 들어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스락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무언가를 쫄쫄쫄 따르는 소리. 신우의 뒷모습만을 빤히 바라보던 한솔은 그의 나쁜 주인님이 한 손에 적당한 크기의 그릇을 들고 오는 걸 보고 눈을 반짝였다. 진짜 강아지였다면 꼬리라도 붕붕 흔들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달칵-.
신우가 들고 있던 그릇을 앞에 내려 주자 한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거기에는 한솔이 아침에 종종 먹던 시리얼과 유기농 우유가 듬뿍 들어가 있었다. 언뜻 보기엔 정말 개 사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여서 한솔은 잠시 ‘진짜는 아니겠지…?’ 하는 고민을 했다.
“먹어도 돼.”
바로 옆의 의자에 앉은 신우는 허락을 내려 주고는 더 이상 한솔에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패드를 켜 일을 보기 시작한다. 그의 손에는 한솔의 것과 달리 고소한 커피 향이 나는 머그잔이 들려 있었다. 정말로 진지해진 신우의 표정에 눈치를 보며 시리얼 두 개를 까득까득 씹어 먹던 한솔은 나 좀 봐 달라는 뜻으로 신우의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어떻게든 주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낑낑거리며 신우의 다리를 손등으로 툭, 툭 쳤다.
“안 돼. 가만히 있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신우가 그렇게 말하자 정말 동물 귀라도 있었으면 추욱 늘어트렸을 것 같은 얼굴로 울상을 지은 한솔이 얌전히 밥그릇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인님 나빠… 원래 강아지들은 자주 놀아 줘야 된단 말야. 그렇게 시리얼을 전투적으로 씹어 먹자 손을 쓸 수 없는 도그 플레이의 특성상 입으로만 시리얼을 먹던 한솔의 입술 주변엔 하얗게 우유가 묻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혀로 날름 우유를 핥아 먹다가 갑자기 떠오른 좋은 생각에 한솔은 눈을 반짝였다.
‘강아지들도 막 간식 먹던데.’
예를 들어, 통통한 소시지 같은 거-.
모올래 신우의 옆모습을 힐긋힐긋 훔쳐보던 한솔이 슬금슬금 탁자 아래로 기어가 사라졌다. 역시 이 정도론 인내심 Max인 주인님의 평정심을 깰 수는 없는지 신우는 조금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웬만해선 들어올 일이 없는, 그림자가 진 탁자 아래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신우의 상체를 훔쳐보던 한솔이 알파의 탄탄한 허벅지 사이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가운에 가려져 보일락 말락 한 은밀한 어둠 속 틈새는 아주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
슥, 하고 신우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 한솔이 의자 위로 턱을 괴며 신우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바쁜 주인님은 한솔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잠시 입술을 비죽인 한솔은 좀 더 몸을 숙여 사타구니 사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한솔의 기척에 신우도 순간 긴장을 했는지 허벅지 근육이 짱짱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솔은 속으로 히히 웃었다.
‘신우 냄새다-.’
샤워 가운을 뚫고 맡아지는 은은한 페로몬 냄새에 발끝이 간질간질거렸다. 덤으로 조금 평정심을 되찾았던 성기도 다시 힘을 받아 팽팽하게 당겨졌다. 유일하게 신우가 컨트롤하기 힘든 부분을 찾아 비비적거리며 행복해하던 한솔은 자신의 뒤통수에 닿는 신우의 커다란 손바닥에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신우가 떼어 내려 하면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목에 힘을 주는데-.
“…!!”
머리통을 누르는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거리며 방바닥을 짚고 있던 손끝을 떼어 냈다.
“손.”
“…….”
“발목 잡아.”
힘겹게 색색거리던 한솔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숨 쉴 산소가 부족해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한솔은 반항하는 대신 순종적으로 몸 뒤로 손을 가져가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스스로 자신을 속박한 자세. 그러자 신우의 손에 조금 힘이 풀리며 약간의 산소가 공급됐다.
“흐으….”
허겁지겁 다디단 산소를 들이켜자마자 곧장 다시 머리가 짓눌렸다. 학… 부드러운 옷감에 얼굴이 뭉개지며 짧은 비명이 샜다. 한솔은 숨을 헐떡이며 잘못했다고, 봐 달라는 의미로 낑낑거리며 울었다. 물론, 여기서 정말 봐주는 것은 한솔도 신우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한솔은 능숙하게 자신의 호흡을 조절하는 손길에 푹 빠져서 양 발가락에 꾸욱 힘을 줬다. 잔뜩 긴장한 허리와 복부,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떨렸다. 오래 참은 앞도 문제였지만 이미 젖을 대로 젖어 있던 뒤는 더 문제였다. 엉덩이 아래가 흥건하게 젖어 미끌거리는 느낌에 한솔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대로 고개가 거칠게 젖혀지며 커다란 손에 턱 전체가 붙잡혔다.
“……!”
굵고 길쭉한 것이 끝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느낌-. 턱이 아프도록 입술이 벌어지며 굵직한 성기가 무자비하게 한솔의 입 안을 침략한다. 본능적으로 이부터 감춰 물었던 그는 뭉툭한 귀두가 목구멍 입구를 쿡, 찌르는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솔은 이 순간이 좋았다. 헛구역질을 하려는 몸을 힘겹게 내리누르고 입 안에서 가장 날카로운 무기를 감추며 순종할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나’라는 존재를 깨끗하게 지우고 나면 온전하게 상대의 것이 될 수 있다. 그 딜레마가 좋았다. 나를 내려놓고 나서야 닿을 수 있는 상대의 어둠은, 이다지도 흉악하고 사랑스럽다.
곱게 감긴 눈에서 투명한 눈물방울이 뚝, 떨어지자 한솔이 움직이지 못하게 뒤통수를 고정시키고 있던 손이 다정하게 눈가를 훑어 주었다. 한솔이 유일하게 겪을 수 있는 신우 표 악어의 눈물이다. 그는 나름대로 그간 배운 걸 착실히 실천하며 입 안의 것을 최대한 싹싹 핥고 빨았다. 그렇게 애교를 부렸지만 나쁜 주인님은 고작 그런 걸로 만족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 주더니 한솔의 목젖 윗부분을 지그시 누른다.
“여기까지 넣을 거야.”
한솔의 어깨가 움칠 튀었다. 매번 조금씩 깊이를 달리하긴 했지만 신우가 정말로 넣겠다고 선언한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자 성기의 표피에 쫀쫀하게 달라붙어 있던 입 안 점막이 수축하며 안 그래도 감당이 안 되던 성기가 더 커지는 느낌이 든다. 한솔은 찔끔하고 말았다. 할 수, 있겠지…? 마음은 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가득한데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워낙 크니까….
신우의 손이 자신의 목덜미를 단단히 감싸듯 받쳐 오자 한솔은 마음의 준비와 함께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
“옳지, 착하다.”
마치 반려견이 싫어하는 약이라도 먹이는 것처럼 신우는 한솔의 턱 아래를 슬쩍슬쩍 간질여 주며 잔뜩 긴장해 있는 몸을 달랬다.
그런데 쓰다듬는 손길과 그 목소리는 꿀을 바른 것처럼 달콤한 것에 비해 엄청난 두께와 길이를 과시하며 밀고 들어오는 성기는 폭력적일 정도로 사나웠다.
“흣….”
긴장감에 잔뜩 수축해 있는 목구멍 입구를 툭툭 올려 치던 성기는 귀두를 내벽에 비비며 프리컴을 잔뜩 묻혔다. 입 안 깊숙한 곳에 끈적하고 질척한 액체가 묻자 한솔은 자연스럽게 침을 삼켰다. 꿀렁- 목 안이 요동치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좆 기둥이 좁은 입구를 팽팽하게 팽창시키며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또르르… 턱선을 타고 굴러떨어진 눈물이 턱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큽, 흑…! 학…!”
“쉬… 거의 다 됐어.”
“으흑… 흡….”
난생처음 느껴 보는 엄청난 이물감에 한솔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행위 자체가 막 엄청 즐겁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계까지 벌어진 턱은 빠질 것 같고 산소가 부족해서 눈앞은 어질어질하다. 다만, 펠라티오 자체가 원래부터 약간의 목 막힘, 눈앞의 상대에게 봉사한다는 기분, 그리고 직접적으로 쏟아지는 페로몬의 향연에 즐거워하는 것인 만큼 딥쓰롯도 비슷했다. 목 멤의 정도를 넘어 호흡을 강탈당하고 봉사한다는 기분 대신 상대에게 오나홀 취급을 받는 기분이 든다는 것만 빼면- 사실, 그래서 더 찌릿거리는 것도 있었다. 한솔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발목을 힘주어 잡았다. 안 그러면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 신우에게 애원을 할 것 같았다.
툭툭-.
그런데 어느 순간, 힘주어 감고 있던 눈가를 가볍게 두들겨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오직 버티는 데만 온 정신을 쏟고 있던 한솔은 파르르, 힘겹게 눈을 떴다. 눈물에 젖어 엉겨 붙은 속눈썹 탓에 여러 번 눈을 깜박이고 나서야 한솔은 자신을 조용히 내려다보는 알파의 하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날카로운 턱선과 서늘한 느낌의 입매-. 그의 완고한 주인님은 한솔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려 주더니 의자에 묶인 목줄 위를 느리게 훑는다. 종내에는 한솔의 목에 걸린 초커 위를 가볍게 두들기다가 한 손으로 감싸듯 가녀린 목을 움켜쥐었다.
“흐…!”
목에서 가해지는 압박감에 가볍게 헛구역질을 하는 목 안과 요동치는 내부를 음미한다. 눈물 흘리는 가여운 얼굴과 그럼에도 여전히 자세를 놓치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알파를 웃음 짓게 만든다. 사랑스러웠다. 입술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 젠틀하게 웃었다.
“잘 어울리네.”
입으로는 무엇보다 상스러운 말을 내뱉으면서.
“우읍…!!”
커다란 손이 뒷목을 단단히 받치는 것과 동시에 목구멍 깊숙이 두툼한 살덩이가 퍽-!! 하고 박혀 들었다. 목구멍에서 불이라도 난 것 같은 쓰라림에 생리적인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쯔읏- 퍽…! 처음에는 이물감을 버티느라, 조금 진정이 되고선 정신없이 박히느라 한솔은 눈물만 흘렸다. 혀를 쓰기는커녕 말도 안 되는 크기에 입술을 최대한 벌리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 덕분인지 입술이고 턱이고 할 것 없이 침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열심히 빨아 보려고 용기 내서 기둥을 츕- 빨자 두꺼운 귀두가 들어찬 좁은 틈새가 콱 조여들면서 머리 위에서 낮게 깔린 신음이 들렸다. 한솔은 발끝이 찌르르거리는 성취감에 숨을 헐떡였다.
“흐으….”
좁은 구멍에 귀두를 쑤셔 넣듯 밀어 넣은 신우가 한솔의 뒤통수를 힘주어 잡아당겼다. 아까부터 한솔이 염탐하던 가운 사이가 은밀하게 벌어지며 탄탄한 허벅지 위로 얼굴을 폭 묻게 되었다. 그 순간, 한솔은 어떠한 예감에 두 눈을 꾹 감았다. 입 안의 살덩이가 한껏 부풀어 오르더니 목구멍에 때려 붓듯이 정액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꿀렁꿀렁-.
몸 안에 직접적으로 쏟아지는 엄청난 페로몬 덩어리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손끝도, 몸 전체도 약이라도 한 것처럼 흐물흐물 풀어졌다. 흐리멍덩하게 흐려진 눈을 깜박이던 한솔이 코가 매운지 훌쩍거리다가 입 안에 든 것을 힘겹게 꿀꺽꿀꺽 삼켰다. 다 삼키지 못한 정액이 입술 사이로 쿨럭이며 넘쳤다. 그럼에도 정말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것처럼 열중해서 좆 기둥을 쪽쪽 빠는 모습이 정말 야했다. 슬슬 좆이 빠지려 하면 얼굴을 더 내밀며 칭얼거렸다. 결국 강제로 뒷목이 붙잡히고 나서야 긴 좆 기둥이 입 안을 긁어내리며 빠져나오는 느낌에 콜록이며 기침을 내뱉는다. 그럴 때마다 침과 정액이 뒤섞인 액체가 의자와 신우의 허벅지 위로 후두둑거리며 떨어졌다.
“끼잉….”
결국 성기를 완전 뱉게 된 한솔이 신우의 눈치를 살살 보다가 한껏 불쌍한 척을 하며 낑낑거렸다.
신우는 눈물과 정액, 침으로 아주 엉망이 된 한솔의 얼굴을 자신의 가운으로 깨끗이 닦아 준 다음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돌아.”
“낑….”
“또 두 번 말하게 할 거야?”
엄한 목소리에 찔끔한 한솔이 후다닥 뒤를 돌아 상체를 바닥에 붙였다. 그가 뒤돌아 엎드린 바닥에는 홍수라도 난 것처럼 진득한 액체가 흥건한 상태였다. 한솔은 가슴에 착 달라붙는 질척한 느낌에 얼굴을 붉혔다. 코가 맹맹할 정도로 대량의 페로몬을 흡수한 뒤라 직접적으로 향이 맡아지진 않았지만 아마 신우는 진작부터 만개한 매화 향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원래부터 물이 많은 몸인 걸 어떡하냐며 한솔은 조금 억울했지만 결국 착실하게 신우 쪽으로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가 지금은 손을 써도 되는 건가 알쏭당쏭한 마음에 조금 머뭇거리는데 엉덩이 위로 찰싹! 하고 가벼운 매가 떨어졌다. 짧지만 강렬한 경고에 한솔은 다급하게 뒤로 손을 뻗어 양 볼기를 양옆으로 잡아당겼다. 곧장 손가락 두 개가 푹, 박히는 느낌에 짧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아직도 배변 실수나 하고.”
“낑, 낑… 멍…!”
“혼나야겠네.”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한솔이 애타게 끙끙거렸지만 신우의 핑거링은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원하는 곳은 만져 주지도 않고 애먼 곳만 집요하게 문지르며 애태우는 탓에 한솔은 분홍빛 혀를 헥헥 내밀며 안절부절못했다. 어떻게든 성감대를 만져 줬으면 하는 마음에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어 봤지만 얌전하지 못하다면서 손바닥 매를 맞았다. 끼이잉…. 한솔은 금방이라도 진짜 소변을 볼 것 같은 오싹한 기분에 몸을 떨었다. 사정을 너무 오래 참은 탓인지 밑은 탱탱하게 부어 있는데 신우는 자꾸만 뒤를 괴롭힌다. 한솔은 한계점에 달한 느낌에 덜덜덜 떨리는 허벅지를 맞비비며 어떻게든 뒤를 꽈악 조였다. 뒤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으흑… 사디스트 주인님… 진짜 나빠…….
“읏…!”
“소리.”
지금까지 한 번도 가지 못해 애처롭게 부풀어 있는 곳을 꽉 쥐여 지자 한솔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가 어김없이 혼이 났다. 더 이상 자제가 안 될 정도로 파르르 떨리는 몸을 안아 올린 신우가 거실의 베란다 앞으로 향했다. 한솔은 익숙한 방바닥이 아니라 약간은 폭신한 느낌이 드는 하얀색 천 같은 것 위에 내려지게 되자 마음속으로 ‘설마…?’ 했다. 그리고 곧 신우의 말을 듣고 그 생각은 느낌표 백만 개로 바뀌었다.
“한솔이는 강아지니까 볼일은 여기서 봐야지.”
진짜, 진짜 배변 패드야…?
한순간에 얼굴이 확 붉어진 한솔이 울망울망한 얼굴로 패드와 신우를 번갈아 바라보는데 신우가 한솔의 내벽 한쪽을 꾹 눌렀다. 찌릿-! 손끝 발끝까지 전기가 확 퍼지는 느낌에 한솔이 신우의 팔을 붙잡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쉬이- 싸도 돼.”
힘겹게 눈을 떠 보니 창밖으로 화려하게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도심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보는 사람도 없고 밤이라지만… 너무 수치스러운 마음에 신우의 옷자락을 꾹 움켜쥔 채 그에게 안겨 있던 한솔이 숨을 헐떡이다가 신우가 성기 표피를 살살 쓰다듬어 주자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을 놓았다.
쪼르르….
정액이 나오다가도 약간 노란 빛이 도는 액체가 하얀 패드를 동그랗게 물들이는 모습에 한솔의 머릿속이 하얗게 휘발됐다. 신우와 자신을 제외하면 온 세계가 순백으로 탈색되는 기분은 아주 강렬했다.
“으, 흐… 으읏….”
“잘했어, 응. 예쁘다-.”
과호흡이 오려 하는 한솔을 차분히 진정시키고 너무 긴장해서 하얗게 변한 손끝을 마사지해 주며 다독이던 신우는 배출이 끝나자 준비되어 있던 휴지로 깔끔히 뒷정리를 하고선 한솔을 품에 안아 올렸다. 가늘게 떨리는 우아한 날개뼈를 가만히 쓸어내려 주며 욕실로 간 그는 여전히 한솔을 품에 안은 채 묵묵히 거품을 냈다. 한솔이 부드러운 손길에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오랜 시간 공들여 씻긴 후엔 으레 그렇듯 그가 좋아하는 커다란 수건으로 감싸서 물기를 말린다. 맨몸에 온몸이 폭 감싸일 정도로 큰 수건만 걸친 채 좋아하는 사람의 품에서 적당히 따뜻한 바람에 고슬고슬 머리가 말려지는 것- 한솔이 가장 사랑하는 애프터 케어였다.
“벌써 열 시네. 오늘은 일단 자자.”
“멍-.”
오늘 혹사당한 목이 너무 아파서 한솔은 힘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신우가 작게 웃으며 한솔을 들어 침대로 배달시켰다. 한솔은 당연히 신우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굿나잇 키스를 해 줄 줄 알았는데-.
“…?”
신우가 이불만 꼼꼼히 덮어 준 뒤 그냥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왜, 왜 안 해 줘…?”
혹시 아직 화가 덜 풀렸나 싶어 긴장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한솔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신우가 볼록하게 예쁜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강아지랑 키스하는 사람이 어딨어.”
덤덤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한솔의 눈동자가 더 크게 흔들렸다.
-어, 어디가…!
-잠깐 있어. 머리 좀 식히고 올 테니까.
등을 돌리는 신우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영원 같은 찰나의 시간 동안 굳어 있던 한솔은 정말 그대로 가 버리려는 것처럼 몸을 돌리는 신우를 보고 이불도 걷지 못한 상태로 조급하게 신우의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 무서웠다. 또, 또 그렇게 가 버릴까 봐- 그 무서웠던 시간이 되풀이될까 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신우의 팔을 꼬옥 끌어안은 한솔이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
“……!”
“사랑해, 신우야….”
한솔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간절하게 말했다.
“사랑해…….”
그건, 두 사람만의 안전어였다.
신우가 입대하기 전날, 한솔은 밤의 어둠을 틈타 신우의 방에 침입해 이전에 테디에게 들었던 말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는 혹시 신우가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오히려 신우는 그런 한솔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언제 이렇게 컸지.
그건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혹은 대견해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그만큼 한솔에게 안전어는 많이 어렵고 아무리 신우가 편하게 하라고 해도 선뜻 열기 힘든, 아니… 열기 싫은 소중한 보물상자 같은 것이다.
“…솔아? 장난, 장난친 거야- 응? 네가 강아지 소리 내길래 장난으로-. 아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한참을 올려다봐야 했던 시선이 확 낮아졌다. 정말로 당황해 보이는 얼굴의 신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한솔의 얼굴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수평으로 맞춰진 시선-. 아무리 아프고 육체적으로 힘든 벌을 받아도 단 한 번도 안전어를 말해 본 적 없는 한솔의 ‘사랑해’에 신우는 입술을 아프게 씹었다. 한솔은 참지 못했다는 자괴감, 겨우 이런 것도 버티지 못했다는 자책, 그리고-.
-그런데 왜 ‘사랑해’야?
-네가 안전어를 조금이라도 더 쉽게 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여전한 그의 사랑에 대한 안도감에 눈물을 뚝, 흘렸다.
-그리고 너한테 듣고 싶거든. 그 말- 평소에는 하기 어렵잖아.
“흐어어엉….”
“…미안. 놀랐어?”
“그러지 마아… 그런 거 싫어….”
신우의 가슴을 힘없는 솜방망이 주먹으로 툭, 툭 치던 한솔이 갑자기 신우의 멱살을 잡고는 눈물범벅인 얼굴을 한 채 입술을 저돌적으로 부딪혀 왔다. 이가 부딪힐 정도로 격렬한 키스에 잠시 멈칫한 신우는 평소처럼 주도권을 잡는 대신 한 손으로 한솔의 머리를 받치고 가만히 입을 열어 주었다. 츄웁- 혀가 얽히고 젖은 입술이 부딪히는 소리. 그믐이 걸린 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침실에는 한동안 연인이 서로를 달래는 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왔다.
“많이 무서웠어?”
끄덕끄덕-.
입술을 살짝 떼어 낸 상태로 묻자 한솔이 너무 울어서 열이 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우는 소매 끝으로 발갛게 부은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다가 예고 없이 와락 안겨 드는 몸을 다독이며 말했다.
“얼굴 붓겠다. 세수해야겠는데.”
“같이 가 줘….”
한솔이 혼자 가기 싫다고 코를 훌쩍이며 말하자 결국 신우는 잠자리를 봐 준 것이 무색하게도 한솔의 이불을 다시 걷어 주어야 했다. 일단 먼저 부엌으로 가 머그잔 두 잔을 꺼낸다. 한곳에는 우유를 따르고 다른 한곳에는 커피를 내리자 고소한 커피 향이 퍼졌고 레인지가 우유를 데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사이에 한솔을 욕실로 데려가 세수를 시키고 난 뒤, 식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패드와 적당히 식은 컵 두 잔을 들고 거실 소파로 향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신우는 커피가 담긴 잔을, 한솔은 우유가 담긴 잔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하얀 표면을 빤히 바라보던 한솔이 조심스럽게 머그잔을 입에 가져다 대곤 우유를 홀짝였다. 고소하고 따뜻한 맛이 났다.
“오늘 뭐가 제일 힘들었어.”
신우는 한솔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며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일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하고 무던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던 한솔은 신우의 느긋한 태도에 감화되어 머그잔을 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도그 플레이는 싫어?”
살그머니 볼을 붉힌 한솔이 그건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신우가 그런 한솔을 보더니 귀엽다는 듯이 슬쩍 웃었다. 한솔은 신우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서 아드레날린이 퐁퐁 솟는 기분을 느꼈다. 이번에야말로 만나게 되면 자신도 이만큼이나 컸다며 몸도 마음도 많이 자랐다는 걸 피력하고 싶었는데.… 습관이란 건 어쩔 수 없는지 신우 앞에만 서면 자신도 모르게 작은 어린애가 되고 만다. 한솔은 신우의 팔뚝에 얼굴을 툭 기댔다.
“싫진 않고. 그럼 무섭거나 그래?”
“싫은 거랑… 무서운 거랑 다른 거야?”
“다르지. 하고 싶다, 하기 싫다는 호불호의 영역이지만 무서운 건 또 예외니까. 예를 들어 개를 좋아하지만, 물리거나 다칠까 봐 무서워할 수 있는 것처럼.”
신우가 차분하게 설명해 주곤 패드에 뭔가를 체크하거나 적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솔은 어느 순간 신우가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닫고 말았다. 저건 작년에 클럽에 가서 한솔이 작성한 플레이 호감도 설문 조사였다. 거기에 있는 ‘도그 플레이’ 항목에 과거의 자신이 ‘경험은 없지만 해 보고 싶다.’라고 당당하게 적어 놓은 것을 보자 갑자기 쥐구멍이 몹시 간절해졌다. 아니, 저걸… 저걸 신우가 보는 거였어…? 테디라고 불리던 건실한 청년이 ‘회원 데이터 조사에 필요한 거니까 솔직하게만 작성해 주시면 돼요.’라고 말한 탓에 정말 아무 의심도 없이 아주 솔직하게 빈칸을 채웠던 한솔이다. 왜냐면… 그 청년은 정말 건실하고 착해 보였으니까.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상이랄까-.
“그…건 안 무서운데….”
자신이 저기에 대체 무슨 말을 적어 놓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속으로 끙끙 앓던 한솔은 도그 플레이 항목 아래 언뜻 ‘방치 플레이’라는 글자가 보이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 두고 가는 건 싫어-.”
“…….”
“화나도 그냥…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한솔도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신우처럼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할 때까지 거리를 두는 게 훨씬 더 ‘어른스러운’ 방법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신우가 등을 돌려 가 버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한솔의 풀죽은 목소리에 패드 위에 펜을 내려놓은 신우가 한솔의 몸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가 다시 시선을 맞췄다.
“그래, 알았어. 미안해.”
“꼭 보이는 데에 있어야 돼.”
“응. 약속.”
결국 신우가 확답을 주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된 한솔은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확실히 하자 싶어 신우의 까만 먹물 같은 눈동자를 힐긋힐긋 바라봤다.
“그리고….”
“응.”
“주인이랑 뽀뽀하는 개도 많던데….”
“…….”
잠깐 멈칫한 신우가 버퍼링이 걸린 사이 한솔은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신우를 올려다봤다.
“응?”
이한솔 전매특허 반짝반짝 눈빛 공격을 발사하자 덕분에 반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신우가 결국 입매를 허물어트리며 웃고 말았다. 신우의 드문 긴장감 없는 미소에 한솔이 입술을 헤, 벌리며 제 알파를 올려다본다.
“음, 뽀뽀를 하긴 하지. 키스는 아니지만.”
“…아냐, 키스도 해.”
“그래?”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는데-.
딱 봐도 놀리는 어투였다. 알파가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이 너무 잘생긴 탓에 조금 넋을 놓고 말았던 한솔은 신우의 큰 손이 자신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것을 보고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래턱을 쓰다듬듯 가로지른 길쭉한 엄지가 붉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꾹 짓누른다. 소년이라 부르기엔 물씬 성숙해진 남자가 웃으며 물었다.
“키스할까, 한솔아.”
한솔의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멍!”
그러니까 이건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키스 놀이였다.
***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두 시에 상담 예약하신 보호자님들이시죠? 원장님 지금 계시니까 바로 들어가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앗, 네- 감사합니다.”
난생처음 동물 병원이란 곳을 와 봤다. 일반 병원이랑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분위기에 그들만의 작은 입원실에 누워 있는 가지각색의 동물 친구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이방인이 된 기분이랄까.
두 사람은 간호사의 안내로 원장실로 향했다. 한솔이 거기서 알 수 있었던 건 어제 미수에 그쳤던 사건 현장에 나타났던 흰 가운의 주인이 이 아기자기한 동물 병원의 원장이자-.
“생각보다 일찍 왔네. 좀 걸릴 줄 알았더니.”
“맡아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약 일 년 전쯤에 클럽에서 만났던, 테디라 불린 청년의 주인인 알파라는 것이다. 봄바람처럼 온화하게 생긴 미인이었는데 거기 있던 알파들 중에서도 가장 손이 매서웠던 사람인지라 한솔도 기억했다.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테디의 맨들맨들한 성기를 콱콱 자비 없이 짓밟아 버리던 기억이 떠올라 한솔은 온유한 수의사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 본능적으로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윤성현이 싱긋 마주 웃었다.
“우리 구면이죠?”
“네에…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앉으실까요?”
한솔이 책상으로 다가가자 책상 위에 있던 이동장 안에서 하얀 물체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분홍색 혀를 헥헥 내밀며 이동장 입구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한솔은 걱정스러운 마음 90%와 약간 신기한 마음 10%로 강아지를 바라봤다.
“친구가 한솔 씨를 많이 좋아하네요.”
“어디 다친 데는 없나요?”
“폼피츠라 슬개골 탈구를 좀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히도 건강에 문제는 없고요. 인식 칩은 확인되지 않았고 개월 수는 5~ 6개월 정도, 중성화는 아직 안 돼 있네요.”
한솔이 폼피츠가 무슨 종이냐고 묻자 수의사는 포메라니안과 스피츠가 믹스된 종이며 이 친구는 생김새 상 아마 포메라니안 피가 많이 섞인 3세대나 4세대 정도 돼 보인다고 말했다.
“보면 주둥이가 더 뾰족하고 귀가 크죠. 눈도 크고. 포메는 이 정도로 귀가 크지 않아요. 딱 보면 여우 같다는 느낌을 훨씬 더 많이 받는데 체급도 비교적 더 큰 편이라 중 소형견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이 친구는 많이 크면 4kg까진 클 것 같네요.”
수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이동장 안의 강아지가 왕! 하고 짖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한솔이 자신도 모르게 까맣고 촉촉해 보이는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강아지는 킁킁 냄새를 맡더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했다. 자리에 배를 깔고 엎드린 강아지가 분홍색 혀로 한솔의 손가락을 할짝할짝 핥았다.
“아….”
솔직히 너무 귀여웠다….
“폼피츠는 사실 협회에는 등록되지 않은 견종이에요. 포메라니안이 인기 견종이다 보니 생겨 나게된 믹스견인데 어릴 때는 전문가들조차도 포메와 폼피츠의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라서 이를 악용하는 펫 숍 같은 곳이 많아요. 포메라니안 분양가가 비싸다 보니 아주 어릴 때 생김새가 비슷한 폼피츠를 포메라고 속여서 파는 거죠.”
그래서 그만큼 개체수도 많고-.
“유기가 많이 돼요. 4개월쯤 되면 털이 빠지면서 티가 확 나기 때문에 보호자도 알아차리게 되거든요.”
한솔은 예상했지만 화나고 안타까운 상황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너는 유기된 거였구나…. 단순히 내가 원하는 품종이 아니었다고 몇 개월을 함께한 반려동물을 유기하다니-. 속이 답답하고 메스꺼웠다.
“처음 상태로 봐선 이 친구도 2개월 정도 길에서 맴돈 것 같거든요. 구조를 하려 했지만 놓쳤다고 들었는데 어제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된 건가요?”
“네. 전문가분들이 오셔서 구조하려 했는데 경계심이 심해서 놓쳤다고 들었어요. 그 뒤로 쭉 못 봤다가 어제….”
다 크면 중소형 견 정도 되는 크기라 하지만 그래 봤자 인간에게는 한참 작은 생물체였다. 그런 아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자에게 달려들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앞에서 힘없이 내팽개쳐지던 모습이 떠오르자 한솔의 어깨가 침울하게 축 처졌다. 그런 한솔을 가만히 지켜보던 신우가 조용히 손깍지를 해 온다. 하얀 강아지도 마치 나는 괜찮다는 것처럼 왕왕 짖었다.
“그… 저희가 어제 많이 얘기해 봤는데요.”
한솔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잘 키울 수 있을까요…?”
덩달아 조마조마한 얼굴로 한솔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던 성현이 환하게 웃었다.
“걱정되나요?”
“네에…, 직접 키워 보는 건 처음이구요. 또, 신우 제대하면 조기 졸업할 거라 한국에는 길어야 2년 있을 텐데… 해외에 데리고 나가면 힘들어하지 않을까요…. 거기서도 신우 MBA 다 밟을 때까지 있는다 치면 한 2년 있을 텐데 너무 자주 왔다 갔다 하니까 스트레스받을까 봐….”
게다가 지금 집은 임시고, 귀국하면 새로 집도 찾아야 되고, 결혼도 해야 되고 아무튼 한솔이 걱정되는 마음에 온갖 tmi를 남발하며 말하자 성현은 한솔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다가 흠흠, 헛기침을 하고선 말했다.
“반려동물 키우기가 쉽지 않죠. 결정도 어려운데, 과연 내가 이 아이를 잘 책임지고 돌볼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스스로를 못 미더워하는 보호자들이 은근 좋은 보호자가 된다는 거예요.”
“…네?”
“그런 분들은 안주하지 않거든요. 내가 부족한 점이 있어? Okay, 그럼 공부해야지. 공부해서 이 아이를 더 행복하게 해 줘야지.”
“…….”
“이게 모토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도 처음 만난 상대면 삐꺽거리고 어색한 게 당연하잖아요. 동물도 마찬가지니깐요. 강아지도 행복해지기 위한 주인의 노력은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거예요.”
마음을 안정시키는 부드러운 말투에 긴장해 있던 한솔의 얼굴도 조용히 풀어졌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이동장 안을 빤히 바라보자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줄곧 한솔만 바라보고 있던 까만 눈동자가 기쁨을 담아 반짝반짝 빛났다. 앞으로 자신이 살 곳이 정해졌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눈은 꼭 우주가 담긴 것같이 새까맣고 아름다웠다.
“이름은 정하셨나요?”
성현의 물음에 한솔은 신우를 휙 돌아본다. 그리고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네. 솜이요.”
겨울바람이 몹시 춥던 날, 소복이 쌓인 눈 속에 폭 파묻혀 있는 솜뭉치 같던 모습이 떠올라 붙인 이름이었다.
이름 솜. 나이 5~ 6개월로 추정. 성별 수컷…이나 곧 중성이 될 예정.
신우의 휴가가 끝나고 그가 나라에 대한 의무를 다하러 돌아갔을 때에도 한솔은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상의 끝에 솜이를 중성화시키기로 결정했는데 일단 입양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조금 더 안정을 취하고 진행하기로 윤성현과 상담을 마쳤다.
새 식구가 생긴 뒤로 한솔의 세상은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일단 먼저, 아이의 슬개골 탈구 방지를 위해 집 안 곳곳에 카펫과 알록달록한 쿠션 계단을 깔았다.
두 번째론 그날부로 검은색 옷과 작별을 고하게 되었는데, 장모종에 이중모인 솜이의 털이 정말 상상 이상으로 많이 빠진 탓이다. 빗질을 아침저녁으로 해 주고 청소기를 밤낮없이 돌려도 공중에 하얀 털 몇 가닥이 두둥실 떠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겨울이라 잘 안 쓰던 공기청정기가 재취직을 했다나 뭐라나….
“솜아, 가자!”
왕!
마지막으론 신우와 떨어져 있다는 우울감에 잠식되어 집콕만 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통해 스피츠라는 종의 피를 타고난 솜이가 얼마나 활동적인 아이인지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한솔은 솜이의 산책 시간을 위해 하루에 최소 두 번 이상은 밖을 나가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나름 자신 있었던 체력에 위기감을 느낀 탓에 자의 반, 강제 반으로 다시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산책 시간의 경우 아침, 저녁은 고정이고 장소는 대부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변두리의 조용한 산책길이었다. 산책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에게 도심은 너무 번잡한 곳일 수 있다는 말에 선택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솜이가 다른 사람만 보면 심하게 경계를 하고 짖는 탓이 컸다. 아, 정확히는 알파…? 들만 보면 그러는 것 같았다. 이게 확실하지 않은 이유는 신우와 주치의인 윤성현 씨에게만큼은 전혀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데 오히려 신우에겐 배를 발라당 까서 보여 주거나 안아 달라고 막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기도 했다. 흠흠, 거 누굴 닮았는지- 참….
아직까진 그런 일은 없었지만 혹시나 좁은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서 경계심을 느낄 만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을 솜이도 문제지만 위협을 당하는 상대는 더 문제였다. 아무리 작은 강아지라지만 상대의 입장에선 솜이는 작은 맹수나 다름없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규칙을 배워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기에 방문 훈련을 받아 보기로 했다.
한솔이 잠시 다른데 정신이 팔린 사이 어디선가 가슴 줄을 입에 물고 온 솜이가 한솔의 발 옆에 툭 내려놓는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한솔이 솜이의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헥헥헥…. 까맣고 촉촉한 코에 검지 마디를 가져다 대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솜이는 쓰다듬어 달라는 듯 한솔의 손등에 머리를 비볐다.
“우리 같이 열심히 훈련받자. 알겠지?”
한솔은 전문 훈련사의 도움을 받아 솜이의 행동 교정 훈련에 열심히 임했다. 느린 속도긴 했지만 확실히 전문적인 도움을 받으니 점차 나아지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훈련 도중 알파 페로몬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던 솜이가 신우의 페로몬-신우가 자주 사용하는 담요를 이용했다.-에는 진정되는 모습을 보이자 그게 꼭, 한솔 자신을 닮은 것 같아서 한솔은 불과 얼마 전에 신우와 함께 했던 플레이를 떠올렸다.
-한솔이는 강아지니까 볼일은 여기서 봐야지.
으아아! 생각 금지! 상상 금지!
한솔은 혼자서 파드득 떨고 난리를 치다가 솜이의 ‘왜 저래…?’ 하는 눈빛을 받고 얌전해졌다.
훈련을 한 달쯤 반복하자 솜이는 이제 도심 산책도 크게 문제없는 수준이 되었다. 여전히 덩치가 크거나 페로몬을 방출하고 다니는 알파를 보면 조금 경계하긴 하지만 심하게 짖는 행위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한솔은 그걸 신우에게 마구 자랑했다.
[그래?]
“응! 솜이 아무래도 천잰가 봐.”
신우가 입대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서 핸드폰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물론, 하루 종일 연락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솔은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여전히 신우가 없는 하루는 힘들었지만, 목소리를 듣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한솔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솔.]
“으, 응?”
갑자기 확 낮아진 신우의 목소리에 눈을 끔벅인 한솔이 되물었다.
[왜 자꾸 솜이 얘기만 해.]
“…응?”
[물론, 솜이 얘기도 궁금하긴 하지만, 난 네 일상을 듣고 싶은 건데.]
한솔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가 부끄러운 마음에 침대 위를 팡팡 내리치자, 옆에서 둥글게 몸을 만 상태로 자고 있던 솜이가 화들짝 놀라 깨고 말았다. 솜뭉치 녀석이 ‘또, 저러네.’ 하는 얼굴로 한솔을 힐긋 바라보고선 다시 몸을 말았다. 꽤 익숙한 눈치였다.
“신우야….”
[응.]
“또 언제 나와…?”
365일 24시간 그러긴 했지만, 신우가 군대에 간 이후로 유독 보고 싶은 마음이 커진 한솔이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나… 하고 싶은데.”
[…….]
“혼자 위로도 못 하게 하구… 형아 나빠요.”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핸드폰 너머로 진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솔은 고개를 갸웃하고선 물었다.
“여보세요?”
[이한솔.]
움찔-.
[하아, 오늘 본가에서 잔다고 했나?]
“응….”
[잠깐 기다려.]
핸드폰 너머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솜이 인사도 시킬 겸 간만에 본가에 놀러 온 참이었던 한솔이 설마 끊기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달칵-. 한동안 신호가 불안정했던 화면이 다시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잠잠했던 건너편에서 무언가 기척이 들리더니 ‘젠장, 여길 또….’ 하는 신우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신우야…?”
어리둥절해하던 한솔이 알파를 불렀다. 신우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바지.]
“응?”
[벗어 봐.]
흠칫!
[얼른.]
얼굴이 발그레해진 한솔이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주변을 홱홱- 돌아보고선 조심스럽게 잠옷 바지를 끌어 내렸다.
“벗, 었어….”
그가 한껏 부끄러운 것처럼 말하자 핸드폰 너머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솔은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아, 신우 목소리 너무 좋아…!
[그럼 손 내려서 한솔이 구멍 만져 볼까?]
“…!!”
속으로 어떡해, 어떡해!만 연발하던 한솔이 다시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 그곳을 만지작거렸다. 아주 작은 틈새 같은 곳. 입구는 단단하면서도 매끄러웠다. 한솔은 신우가 말한 대로 착실하게 자신의 구멍을 만졌다.
“만졌…어….”
[기분 좋아?]
“으응… 흐아….”
신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부드러운 과육처럼 몰캉하고 따뜻한 곳을 꾹꾹 누르자 발가락 끝부터 간질간질한 느낌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아… 좋아……. 한솔이 한껏 풀어진 목소리로 말하자 핸드폰 너머로도 나직한 신음이 들렸다. 그 짐승이 목을 울리는 것 같은 소리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구멍 벌리고.]
“힛….”
[손가락 넣어 볼까?]
“으으응… 읏, 넣었….”
찔걱-.
금세 물을 흘리기 시작한 구멍 사이로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한솔은 양다리를 활짝 벌린 채 자신의 그곳에 검지를 넣고 흔들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따뜻하고, 의외로 단단한 곳이 만져졌다. 멍하니 풀린 눈으로 아래를 만지작거리던 한솔이 얼굴 바로 옆에 내려놓았던 핸드폰 너머로 단단한 것을 빠르게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눈을 깜박였다.
[하아, 하아… 솔아….]
“…! 흣, 으응…!”
[…그렇게 작은 걸로도 만족이 돼?]
한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니….”
[읏, 하…]
“더 큰 거 먹고 싶어… 응…! 신우 꺼….”
가감 없이 원하는 것을 말하자 탁, 탁, 탁! 폰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더 강해졌다. 신우는 한솔의 대답에 만족스러워하기보다는 더 굶주린 것처럼 보였다. 뒤늦게서야 이 둔탁한 소리가 신우가 자위를 하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린 한솔의 얼굴이 발긋하게 달아오른다. 한솔은 발끝을 꾹 웅크린 채 내벽 안의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만지며 말했다.
“형아, 큰 거 넣어 주세요….”
그러자 핸드폰 너머로 나직한 욕설이 들렸다. 흐읏…! 몸에 열이 오른 한솔이 발정 난 새끼 짐승처럼 침대 시트에 뒤통수를 비비다가 앓는 소리를 낸다. 뒤를 만지느라 덩달아 바짝 일어난 성기가 허공에서 꺼덕였다. 흐응… 앞에도 만지고 싶다…. 신우에게 말하면 들어줄까? 하고 한솔이 생각하던 와중-.
똑똑….
“도련님, 아까 배 아프다 하셨죠? 매실차 가져왔어요.”
입맛이 없는 탓에 저녁을 깨작거리던 한솔이 둘러대던 말을 듣고 기어코 걱정이 되어 찾아온 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난데없는 돌발상황에 한솔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유, 유모…! 나 지금 화장실 급해서…! 거기다 둬!”
“그렇게 많이 아프세요? 주치의를 부를까요?”
“아냐!! 그 정도는 아냐… 나 화장실 갈게!”
“네, 그럼 여기다 둘 테니까 꼭 드세요!
유모가 발걸음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모님이셔?]
“으응….”
[…….]
핸드폰 너머로 난감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솔은 눈을 굴리다가 핸드폰만 든 상태로 후다닥 어딘가로 향했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좁은 옷장 안에 숨어든 한솔이 색색 숨을 내쉬었다. 좁은 공간이라 그런지 소리가 더 울렸다.
“응….”
찔걱- 쯔읏….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한솔이 밑을 만지작거리자 물이 질퍽이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처럼 크게 울렸다. 뺨을 붉힌 오메가가 작게 속닥였다.
“나, 옷장 안에 들어왔어.”
[…….]
“흐으… 신우가 만져 줬으면 좋겠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질척거리는 소리에 알파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와, 진짜 다시 봐도 똑같이 생겼다.”
“응? 뭐가?”
“너랑 얘- 완전 판박인데?”
솜이가 중성화 수술을 받고 거의 다 회복되었을 즈음,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한솔은 다시 취미반으로 발레 학원에 나가는 중이었고 종종 은혜를 만나 연습 상대로 끌려가는 불운을 겪었다. 다이어트 때문에 다른 건 다 참아도 커피는 못 참는 최은혜 덕에 솜이의 산책 시간이 끝나면 종종 강아지를 동반할 수 있는 애견 카페에 가 차와 커피를 마시곤 했다. 이한솔 피셜, 진짜 누굴 닮은 건지 얼굴을 엄청나게 밝히는 얼빠 강아지 솜이는 은혜하고도 금방 친해졌다. 참고로, 중간에 신우가 한 번 더 휴가를 나왔는데 솜이의 반응이 무슨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고…. 너란 강아지, 취향 참 확고하구나.
“그렇게 닮았어?”
“엉. 진짜 존똑인데.”
솜이는 70%의 흰털과 30%의 밝은 캐러멜색의 모색을 가졌다. 얼굴과 배는 희고 눈 바깥쪽부터 시작해 귀, 등, 꼬리 겉면 등은 캐러멜색인 아주 예쁜 미모견이다. 처음에 집에 왔을 땐 털 관리도 안 돼 있고 꼬질꼬질했던 녀석이 두 달 동안 돈 걱정 없는 보호자에게 열심히 관리받은 덕택인지 이제 보기만 해도 털에서 윤기가 흘렀다.
“왜 친구들이랑 안 놀고 여기 있어, 솜아.”
왕-.
“가끔 보면 쟤는 네 말 알아듣는 것 같단 말야?”
“에이, 설마.”
물론, 솜이가 안 논다 해서 다른 친구들이 그걸 그냥 놔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솜이는 이름하여 인싸견이었다. 솜이가 좀 쉴라치면-.
멍멍!!
이렇게 우다다 달려온 친구들이 솜이 옆에서 꼬리를 살랑이며 놀자고 보챘다. 이제 ‘앉아’는 기본이고 여러 개인기까지 섭렵한 솜이가 한솔을 한 번 슥 올려다보더니 주인이 말리지 않자 어쩐지 몹시 귀찮은 기색으로 몸을 일으켜 친구들과 함께 달려갔다.
“와, 방금 쟤 표정 봤어? ‘아, 그래그래- 놀아 준다-.’ 이랬다니까?”
그리고 그런 인싸의 고달픈 삶을 보며 최은혜는 웃겨 죽으려 했다.
“그러고 보니 너 솜뭉치 사진 많이 찍냐?”
“엄청 찍지. 솜이 완전 프로 모델이야. 자기 찍는다는 거 아나 봐. 갑자기 막 포즈를 취한다니까.”
“어디 봐 봐. 와, 진짜 이한솔네 멍멍이답다.”
“내가 뭐?”
“너랑 똑 닮으셨다고요.”
한솔이 보여 준 솜이의 사진을 확인한 은혜가 피식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두 사람이 강아지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 대표님, 즉 신우네 어머니가 마치, 어릴 적에 두 사람에게 그랬던 것처럼 온갖 귀염뽀짝한 강아지 옷들을 잔뜩 보내 주셨는데 사진 속의 솜이는 그중에서 가장 귀여웠던 방울 달린 케이프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솔은 이 착장으로 인증샷을 찍어 보냈는데 어머님이 엄청 좋아하셨다.
“이거 촬영 비하인드 있다.”
“뭔데?”
“솜이가 포즈 취한다 했잖아. 내가 딱 찍을라 하니까 혀 이렇게 쏙 내밀고 웃는 얼굴 있지, 그 표정 지으면서 카메라를 보더니-.”
“더니-?”
“카메라 꺼지니까 대자로 뻗어 버림.”
“푸흐- 아, 인정. 화보 촬영 때 척추 펴고 있기 힘들지. 프로 모델 맞네.”
그러면서 은혜는 아주 자연스럽게 솜이 사진을 강탈해 가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도 일기 형식으로 SNS나 만들어 보지 그래.”
“으음… 그건 좀….”
“아니, 왜? 유신우가 못 하게 해? 난 이한솔이 SNS 없는 게 제일 신기해. 진작에 만들었을 줄 알았더니.”
“그냥 아빠 일도 있고 하니까… 근데, 은혜 너. 솜이 사진 올리라고 하려 그러지.”
“어, 들킴.”
은혜네는 어렸을 때부터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다. 확실히 학교에 발레단 활동까지 하면서도 틈틈이 자기 인스타에 고양이 자랑까지 하는 걸 보니 덕후의 열정은 대단한 듯싶었다.
“한번 해 볼까….”
결국 은혜의 꼬심을 이기지 못하고 인스타 계정을 만든 한솔은 솜이 사진을 한 장 올리고 은혜와 맞팔까지 했다. 그리고 그대로 잊어버리고 마는데….
이때 한솔은 몰랐다. 최은혜가 이쪽에서 알아 주는 인플루언서고 한창 뜨기 시작한 발레계의 샛별이며 이한솔 본인이 그런 그녀의 절친이자 과거의 파트너, 몇 년 전이지만 한 때 각종 SNS를 뜨겁게 달궜던 포스터의 주인공이란 것을.
◯ gracerina
(부드러운 분위기의 카페를 배경으로 솜이를 품에 안고 있는 한솔과 은혜의 사진)
❤ ????
gracerina 오랜 친구랑, 커피 한 잔의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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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가 조용히 끓기 시작했다.
***
가을, 또다시 단풍이 알록달록 물들어가기 시작할 즈음 신우가 제대를 했다.
한솔은 부대 앞까지 마중을 나가 신우를 만나자마자 울고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도 울었다. 그리고 결국 집에 와서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주인이 우니까 솜이가 당황해서 왕왕! 짖는다. 이제는 한 명이 아니라 한 마리까지 더 돌봐야 되는 신우는 피식 웃었다.
“눈이 완전 붕어네.”
“흐으… 붕어 아니야….”
“아니야?”
왕!
“음, 솜이가 맞다는데.”
한솔이 솜이 배신자라며 꿍얼거렸다. 솜이는 마치 내가 뭘 잘못했냐며 왕왕거린다. 왼손으론 한솔을 다독이고 오른손으론 간간이 솜이의 등을 쓰다듬던 신우가 기분이 좋아 꼬리를 마구 흔드는 강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솜이, 혼자 잘 수 있지.”
내가…?
마치, 그렇게 묻는 듯한 솜이의 얼굴을 차분히 간질여 주곤 신우는 한솔의 몸을 품에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상황 파악을 하느라 멀뚱멀뚱 눈만 뜨고 있던 솜이가 후다닥 쿠션 계단을 밟고 소파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두 보호자가 문까지 닫고 한솔의 방 안으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왕…?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솜이가 앞발을 들어 방문을 꾹 눌렀다. 열리지 않는다. 왕왕! 이거 열라며 몇 번 문을 긁던 솜이는 그래도 문이 열리지 않자 켕- 하고 기침을 하더니 털레털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솜이는 몰랐다.
두 보호자가 아침이 되어도 그 방에서 나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밥그릇을 물고 한솔의 방 앞까지 갔던 솜이는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들이 나오지 않자 제 밥그릇을 툭 던져 놓고는 그 자리에 엎드렸다. 외로운 시간이었다.
“솜아 미안해. 진짜 미안. 응?”
무려, 솜이의 아침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늦은 오전 11시에 일어나 방에서 나온 한솔은 토라져 있는 솜이의 옆에 쭈그려 앉은 채 사과를 무한 반복했다. 아침은 이미 9시 10분쯤에 나온 신우가 챙긴 뒤였고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나온 한솔만 죄인이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분명 운동도 다시 시작했고 매일 두 시간 이상 솜이랑 산책도 하는데 왜 정작 신우가 지치는 꼴은 보질 못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조금 달라지긴 했나…? 원래는 한 다섯 번 정도 사정하면 한솔이 먼저 지쳐 잠드는데 어제는 새벽까지 하다 기절했으니까….
“솔아, 밥 먹어.”
부엌에서 들리는 신우의 목소리에 무심코 헤실헤실 웃어 버린 한솔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런 한솔보다 먼저 번개같이 몸을 일으킨 솜뭉치가 복실복실한 꼬리를 흔들며 신나게 신우에게 달려갔다.
왕!
나 불렀어?
솜이가 자그마한 혓바닥을 헥헥거리며 신우의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무려 강아지에게 선수를 빼앗긴 한솔이 충격에 빠져 입술을 작게 벌렸다.
“솜아! 너 말고 나!”
왕?
“너는 솜이고! 나는 솔! 이!한!솔!”
왕왕!
한솔이 솜이 옆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와 그보단 크지만, 군대에 가서 기어코 188cm를 찍고 돌아온 유신우가 보기엔 여전히 작은 인간이 유치하게 아웅다웅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키가 좀 컸나? 대충 눈대중으로 한솔의 키를 가늠해 보던 신우는 멀찍하게 보이는 거실 창의 새파란 하늘과 눈앞에서 귀엽게 투닥이는 똑 닮은 생물체들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했다.
“솜아-.”
인간과 강아지가 동시에 신우를 돌아봤다. 결국, 신우는 크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너무해.”
“그래, 알았어. 미안해, 응?”
“내가 먼저 태어났는데… 난 21년이나 썼는데….”
한솔이 밥 한 숟가락을 삼키고 꿍얼거리고, 신우가 밥공기에 올려 준 깻잎 한 장을 꿀꺽 삼키고 다시 꿍얼거린다. 고등어 가시를 발라 주던 신우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가시질 않는 상태였다. 저 저, 사디즘 미소! 분명 놀리면서 즐기는 게 분명했다.
“힘들면 집에서 쉴래? 내가 갔다 올까?”
“아냐. 같이 갈래.”
비록, 허리가 좀 끊어질 것 같지만 몇 개월 만에 온 데이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방석 위에서 조금 토라져 있던 솜이도 한솔이 가슴 줄을 꺼내자 산책 시간인 걸 눈치채고 금방 신나게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조금 늦은 만큼 특별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여름에는 24시간 동안 에어컨을 틀어 줘도 산책만 나오면 더워서 낑낑거리던 솜이다. 그렇다고 산책을 안 할 수는 없어 한솔은 특단의 조치를 강구했다. 바로 솜이 같은 강아지를 위해 만들어진 강아지용 실내 산책로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적정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인데-비록, 돈은 무시무시하게 들지만.- 솜이가 꽤 만족스러워했다. 두 사람은 거길 가기로 했다.
“벨트 맸어?”
“응!”
그 덕에 생긴 한가지 특이점이란, 실내 산책로까지 가는 거리가 있다 보니 한솔의 명의로 차를 하나 샀다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 신우보다 먼저 자가용이 생겨 버린 한솔이었다. 대학에 너무 튀는 게 돌아다니면 말이 나올까 봐 한솔은 딜러의 추천을 받아 적당히 유명한 차를 구입했다. 외관이 세련돼서 한솔이 마음에 들어 했던 놈이었다.
물론, 수많은 업그레이드와 옵션 추가로 가격은 안 적당해진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지만 말이다.
“…….”
한솔이 대답했음에도 점검차 한솔의 벨트를 한 번 더 확인한 신우가 거울을 통해 뒷좌석의 이동장 안에 얌전히 엎드려 있는 솜이를 확인하고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신우가 운전하는 모습은 과연 어떨까 내심 궁금했던 한솔은 마침내 오늘 그 궁금증을 풀게 되었다. 신우의 운전 실력은 정석이라 할 정도로 모범적이고-.
‘멋있어….’
멋있기까지 했다. 어른 남자 특유의 여유 같은 게 있다고 해야 하나. 원래도 멋있는 남자가 더 멋있어지는 순간이 일할 때랑 운전할 때라더니 백번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다 왔다, 솜아. 내리자-.”
한솔은 뒷좌석에서 이동장을 꺼내 들며 말했다. 정말 다행히도 솜이는 조금 긴장은 할지언정 차멀미는 안 하는 편이었다. 두 사람의 체취가 묻은 손수건이나 담요를 이동장 안에 넣어 주면 긴장도 금방 풀었다. 차랑 비행기는 또 다르겠지만, 그래도 약간 희망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부디 비행기도 잘 타 줬으면 좋겠는데….
“1시 반까지 체험 학습장에 솜이 데려다주시면 되고요. 체험 학습 끝나기 10분 전에 보호자님께 연락드릴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매표소를 지나 산책로 안으로 발을 들였다.
“걷는 건 차분하게 시키고 저기 공터 있거든? 거기서 공놀이시킬까?”
“솜이 교육은 한솔이 담당이니까, 솔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말이 꼭 솜이 담당은 너지만 솔이 담당은 자신이란 뜻으로 들렸다. 한솔은 입 안 살점을 살짝 깨물고는 약간 붉어진 귓바퀴를 문지르며 다시 걸었다. 솜이도 각종 나무 냄새, 풀냄새가 마음에 드는지 꼬리를 실룩 실룩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카메라를 들면 대체 어떻게 아는지 솜이가 귀신같이 렌즈를 보며 웃었다. 누가 보면 24시간 웃고 있는 줄 알겠어, 아주.
한솔은 솜이와 산책하면서 찍은 사진들이 마음에 든 탓에 어디 자랑할 데 없을까 고민하다가 자신이 몇 달 전에 SNS에 가입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뒤로 한 번도 안 들어가 봤네.
결국 앱을 눌러 본 한솔. 동시에 업데이트가 진행되며 무수히 많은 알람들이 쏟아졌다.
띠링, 띠링, 띠링-.
‘…이게 뭐지?’
하지만 사용법이라곤 피드를 올리는 법밖에 모르는 한솔이 이 인터넷 세상 속 규칙을 잘 알 리 만무했다. 대다수가 누가 자신을 팔로우했다거나 내 게시글을 좋아한다거나 댓글이 달렸다거나 하는 알림들이었다.
slsimm 한솔님 호두 이후론 무대 안 서시는 건가요????
가장 최근에 등록된 댓글을 확인한 한솔은 소름이 쫙 끼쳤다. 곧장 은혜에게 연락을 했다. 웬일로 은혜에게선 금방 답장이 왔다.
최은혜!! 이거 뭐야???
나 신상 털린 거야?
은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혜????
이제 확인함?
은혜????
이한솔 스타 다 됐네ㅋ
이거 뭐냐구ㅠㅠ
은혜????
그냥 나 타고 너 발견한 사람들임
은혜????
걱정ㄴㄴ
은혜????
이대로 복귀작ㄱ?
한솔은 그대로 은혜의 톡을 씹어 버렸다.
“왜 그래?”
솜이에게 간식이랑 물을 챙겨 주던 신우가 물었다. 한솔이 자초지종 설명하자 한솔의 핸드폰을 받아 가 알림들을 쭉 확인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악플 달거나 성희롱하는 사람들 있으면 말해.”
“이거 계속해도 돼?”
“솔이가 하고 싶으면.”
쳇… 은근히 강제로 못하게 해 줬으면 싶었던 한솔은 속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그런데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궁금해서 묻자,
“고소해야지.”
고소가 취미인 건 아닌지 의심되는 남자가 말했다.
결국 찜찜해하면서도 방금 찍은 사진을 올린 한솔은 사람들의 ‘귀여워ㅠㅠㅠ’, ‘완전 미모견이네요???? 모델 해도 되겠어요’, ‘단풍 꼬까옷 너무 잘 어울려요!’, ‘한솔님 너무 예뻐요’, ‘그런데 뒤에 분은 누구신가요?’ 등의 반응을 구경하다가 너무 알림이 많이 울리자 그냥 이 앱의 알림을 꺼 버리는 것으로 평화를 얻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바로바로 반응하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솜이 보호자님 끝나기 10분 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프로그램 도우미분에게 솜이를 맡기고 두 사람은 잠시 허기도 때울 겸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시설 안에선 강아지 간식을 제외하곤 음식물 섭취가 안 되기 때문에 뭔갈 먹기 위해선 건물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어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한솔이 눕고 싶어 한 탓에 간단히 빵이랑 커피를 사서 차에서 먹기로 했다. 베이글과 크림치즈, 약간의 딸기잼과 음료를 들고 지하 주차장에 있는 차로 향했다.
“솜이 친구들이랑 안 싸우고 잘 있겠지?”
“대장 먹고 놀고 있지 않을까.”
음, 그건 그랬다. 보통 몸집이 작으면 소심한 성향이 많다던데 솜이는 아니었다. 강한 척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강했다. 다른 말로 깡다구가 있다고 해야 하나…. 언젠가 한번 얘는 엄마 아빠 중에 누굴 닮은 걸까 하고 말했다가 은혜한테 ‘널 닮은 거임’이라는 반응을 들었다. 자기 예쁜 줄 알고, 예뻐하는 사람한테만 애교 부리고, 한 번 꽂히면 성공할 때까지 해야 되는 고집쟁이라면서. …씁, 최은혜 날 너무 잘 아는데- 이러면 곤란한데.
툭-.
솜이 생각을 하던 한솔은 테이크아웃을 해 온 유자에이드를 잡으려다가 신우와 손등을 부딪쳤다. 앞 좌석의 음료 칸엔 각각 커피와 에이드가 놓인 상태였고 두 사람이 동시에 그걸 잡으려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무심코 서로를 돌아본 둘 사이에 찌릿-한 기류가 흐른다. 한솔은 이 분위기를 알았다. 이건 보통… 키스하기 직전에-.
“묻었네.”
크림치즈를 듬뿍 바른 베이글을 베어 물었다가 입꼬리에 하얀 크림을 묻힌 한솔을 보고 신우가 말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신우의 팔이 한솔의 좌석 옆을 짚는다. 어깨가 돌려지고 얼굴이 가까워졌다. 커다란 손이 한솔의 턱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입꼬리에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한솔의 손안에서 베이글이 든 봉투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뒷목이 붙잡혔다. 그대로 입술이 집어삼켜졌다.
“흣, 흐으….”
한솔의 좌석을 뒤로 밀고 운전석에서 넘어온 신우가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미 손안에 있던 베이글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 상태다. 날씨가 조금 추워져 목 폴라 니트를 입고 있던 한솔의 상의는 가슴까지 말려 올라간 모습이었다.
“신우야… 읏…! 여기 밖, 인데….”
입술이 살짝 떨어지자 한솔은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이성을 챙겨 보았다. 물론, 그만하라는 뜻은 아니고 신우를 조금 더 자극해 보자는 심보였다. 이제 이 정도로는 신우가 멈추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한솔은 마치 솜이처럼 혀를 살짝 내밀고 숨을 몰아쉬었다.
새까만 눈으로 그런 한솔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신우가 젖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짧은 손톱으로 볼록 튀어나온 젖꼭지를 꾹 눌렀다. 흐, 좋아…. 작은 살점이 간질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한솔은 신우의 목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고는 자신의 가슴 쪽으로 신우의 머리를 유도했다. 알파의 입꼬리가 슬쩍 호선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으응…, 거기… 아냐….”
분명 원하는 것을 알 텐데도 자꾸만 다른 곳에 마크를 남기는 신우 탓에 한솔은 발을 동동 굴렀다. 진짜 짓궂어-. 물론 그런 게 좋은 거긴 하지만 지금은 그저 신우가 여길 꼭꼭 씹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한솔은 어떻게 해야 이 알파를 움직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려 냈다. 신우에게 반쯤 깔린 상태로 힘겹게 팔을 뻗은 한솔이 무언가를 집어 올린다. 그 정체는 바로 베이글을 파는 곳에서 같이 파는 짜서 먹는 딸기잼이었다.
찌익-.
한솔이 딸기잼을 자신의 유륜 위에 꾹 눌러 짜자 배꼽 윗부분에 키스 마크를 남기고 있던 신우가 한솔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준다. 알파의 동공이 깊은 심해처럼 가라앉았다.
“아…!”
그대로 가슴이 물렸다. 날카로운 이빨에 보들보들한 살점이 잘근거리며 씹힌다. 씹고 꼬집히고 그러다 마치 달래는 것처럼 다정하게 혓바닥으로 핥아 주면 손끝 발끝 할 것 없이 쭈뼛 소름이 돋았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이한솔.”
“안, 안 배웠… 힉….”
퉁퉁 부어 버린 가슴을 꼬집는 느낌에 한솔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읏, 아파… 등받이에 뒤통수를 비비며 헐떡이자 신우가 꼬집은 곳을 정성 들여 핥아 주고는 다른 쪽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한솔은 신우의 머리를 꼭 끌어안은 채로 가엽게 몸을 떨었다. 가슴은 다 좋은데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게 너무 괴로웠다.
“흐으… 신우야…, 넣어 줘….”
한솔은 신우의 덩치에 밀려 완전히 깔린 자세로 힘겹게 말했다. 자리를 신우에게 거의 내어 주다시피 하다 보니 오른쪽 다리는 신우의 어깨에 올려진 상태고 왼쪽 다리는 활짝 벌어진 채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드러난 음부에 알파의 묵직한 것이 닿았다.
“응…? 얼르은-.”
자꾸만 안달이 났다.
한솔이 어서 넣어 달라며 보채자 신우가 목을 울리며 신음한다. 그는 한솔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더니 펄펄 끓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콘돔이 없어.”
…….
….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없, 어…?”
“…응.”
“왜…?”
“…….”
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이 없었다. 그 누가 솜이를 산책시키러 왔다가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을까.
“흐윽… 왜 없어….”
결국 한솔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신우의 어깨를 콩콩 때렸다. 워낙 사이즈가 남다르신 분이라 시중에 파는 건 맞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럼, 그럼… 허벅지에라도 해 줘….”
“…….”
“읏, 잘 조일 테니까….”
과연 이렇게 조르는 오메가를 거부할 수 있는 알파가 있을까. 좌석 등받이를 짚고 있는 신우의 손등에 퍼런 핏줄이 돋았다.
찌이익-.
거의 찢듯이 바지가 벗겨져 내려간다. 뽀얗게 맨 허벅지가 드러나는 것과 동시에 몸이 반으로 접히듯 다리가 가슴까지 붙여졌다. 유연한 몸은 무리 없이 그 자세를 소화해 냈다. 속옷은 벗겨지다 말아서 한쪽 발목에 걸린 채 달랑거렸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거기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푸욱-!
얼추 준비가 되자마자 허벅지 사이로 뜨거운 좆 기둥이 사납게 틀어박혔다. 한솔은 단단한 귀두가 배꼽을 파고들 듯이 쑤시는 느낌에 짧게 신음했다. 거친 움직임에 마찰이 일어나면서 뽀얀 살결이 점차 수줍은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퍽, 퍽-, 퍼억! 너무 힘을 줘서 파들파들 떨리는 허벅지 사이를 가로지른 좆이 배꼽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한솔의 성기에 깊게 키스했다.
“잘 조이겠다면서. 힘줘야지.”
신우가 한 번 허리 짓을 할 때마다 차 전체가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지하 주차장이라지만, 이렇게 요란해서야 누가 봐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만 같았다. 짝-! 그런 생각을 일축하려는 것처럼 허벅지 뒤쪽에 가벼운 매가 떨어졌다. 찔끔한 한솔은 힘이 빠졌던 근육에 다시 힘을 줬다. 신우는 허벅지에 힘이 풀릴 때마다 한 곳에 집중적으로 매를 때렸다. 뒤에서 본다면 한솔의 허벅지는 한쪽만 붉게 물든 모습일 것이다.
“흣…! 아, 아파….”
“입으로는 아프다면서-.”
“아응!”
“여기는 물을 흘리잖아, 솔아.”
신우가 허벅지 사이에 좆 기둥을 거칠게 박아넣더니 자신의 성기와 한솔의 성기를 동시에 잡아 비볐다. 뚝- 뚜욱, 두 기둥에서 새어 나온 프리컴이 오목하게 들어간 한솔의 배꼽에 고여 작은 호수를 이룬다. 핸드잡과 동시에 신우는 밑을 만져 주었다. 정말 어딜 만져야 한솔이 사정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한솔의 스폿만 귀신같이 찾아 꽉꽉 눌러 버린 탓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앙, 응! 흐, 으응! 신우, 흣! 신우야… 쌀 것 같…!”
한솔이 벌벌 떨리는 몸을 어쩔 줄 몰라 하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파는 아무 말 없이 그런 오메가의 눈물을 핥아 삼킨다. 그리고 구멍 안에 검지와 중지를 쑤셔 넣으며 거칠게 피스톤질을 했다.
읏, 흐… 아! 흐앙…! 결국 한솔이 참지 못하고 사정하자 귀두 끝을 쓰다듬듯이 문질러 준 신우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한솔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절정의 감각에 취해 숨을 헐떡였다. 초점이 풀린 눈, 붉게 상기된 얼굴, 뜨거운 입김. 모두 사정 직후의 한솔을 이루는 요소다.
짝-!
“해 달라고 조르더니 벌써 지쳤어?”
“흐읏… 아, 냐… 더 할 수 있어….”
한솔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프니까 허벅지를 만져 달라고 졸랐다. 신우는 가늘게 눈을 뜨며 웃고는 오히려 붉게 물이 든 허벅지 뒤를 꽉꽉 주물렀다. 한솔은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 찔끔 난 얼굴로 너무하다며 칭얼거리자 신우가 한솔의 발목을 붙잡아 도드라진 연분홍빛의 복사뼈에 입을 맞춘다.
“흣, 아, 응! 새, 새 찬데….”
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창문이고 시트고 할 것 없이 정액이 튀고 난리였다. 신우는 아까 베이글을 사 오면서 받아온 휴지로 한솔의 몸만 닦아 주고는 다시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허벅지 사이는 불이라도 난 것처럼 뜨겁고, 비록 직접 넣는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두꺼운 성기가 회음부를 거칠게 긁어내릴 때마다 발끝이 곱아 들 정도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하아… 읏, 한솔아- 좋아?”
“으응! 조, 좋아… 아!”
자신의 허벅지와 신우의 허벅지가 맞부딪힐 때마다 팡팡! 거리는 가죽 때리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좌석 등받이와 신우의 사이에 끼여 정신없이 흔들리던 한솔은 목이 너무 말라서 혀를 내민 채 헐떡였다. 그런 한솔은 눈치챈 신우가 한솔의 유자에이드를 한 모금 머금더니 고개를 숙였다.
‘달아….’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 온 액체가 미친 듯이 달았다. 그건 한솔이 목이 말라서도 아니고 액체가 유자에이드여서도 아니다. 단지 에이드와 함께 섞여 들어오는 신우의 타액, 농밀한 페로몬 덩어리에 달아오른 몸이 반응할 뿐이다. 아마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느껴질 만한 액체가 아닐까. 한솔은 신우가 손수 넘겨 주는 것을 받아 마시며 갈증을 해소했다.
“아… 읏! 흐앙! 천,천히…! 신우야…! 아응!”
그렇게 한참을 흔들리는데 어디선가 ‘지이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음료 옆에 놔둔 자신의 핸드폰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한솔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신우는 한솔의 턱을 붙잡더니 자신을 보라는 듯 사나운 눈빛을 했다.
퍽! 퍼억! 퍽-.
점점 빨라지는 추삽질. 가파르게 치솟는 호흡- 왼손으론 한솔의 다리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든 신우가 발신인을 확인한다.
「퍼피즈 체험센터」
잠시 화면을 바라보던 신우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한솔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통화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댔다.
“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체험센터입니다. 솜이 보호자님 맞으신가요?]
한솔은 핸드폰에서 새어 나오는 직원의 목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서 그러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알파는-.
“…!!”
“네, 맞습니다.”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한솔의 허벅지 사이로 허리 짓을 크게 하며 말했다.
한솔은 구명줄처럼 붙잡은 조수석 벨트를 주르륵 잡아당기며 어떻게든 신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아 보려고 애썼다.
[보호자님, 10분 뒤에 체험 프로그램이 끝날 예정이라 연락드렸습니다.]
정말 여기서 비명을 지르지 않는 한 저쪽에까지 들리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그래도 사람 심리라는 게 있다. 고작 저 작은 전자 기기 하나로 두 사람 사이의 은밀한 일에 타인이 끼어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치심과 약간의 공포, 그리고 기이한 짜릿함에 손끝이 벌벌 떨린다. 힐긋- 신우는 그런 한솔을 내려다보더니 커다란 손바닥으로 한솔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알겠습니다. 네, 곧 데리러 가겠습니다.”
퍽-! 퍼억!
신우는 허리 짓을 하면서도 끝까지 그 목소리만큼은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하지만 한솔은 안다. 그의 알파는 사정 직전에 목소리 톤이 극도로 낮아지는데, 한솔만 아는 이 비밀을 다른 사람이 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질투심에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탁-.
전화를 끊은 신우가 한솔의 핸드폰을 내려놓고 미친 듯이 허리를 박아 넣기 시작했다. 덜컹덜컹-. 승차감 하나는 끝내 줬던 차가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한솔은 신우가 키스를 하기 위해 얼굴을 숙여 오자 잔뜩 뿔이 나서는 매끄러운 입술을 앙- 하고 물어 버렸다. 잠시 멈칫한 신우가 눈꼬리를 휘며 팡팡! 소리가 나도록 추삽질을 이어 갔다.
그러다가-.
“…큭….”
복부에 뜨거운 것이 끼쳐지는 느낌에 참고 있던 한솔도 자신을 놔 버렸다.
“하아, 하… 왜, 화났어.”
“그 목소리 다른 사람한테 들려주지 마.”
한솔이 잔뜩 뿔난 얼굴로 말하자 눈을 느리게 깜박인 신우가 한솔의 손끝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알았어, 미안해. 네가 부끄러워하는 게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
“…….”
“앞으로 안 그럴게. 미안. 응?”
…유신우는 가만 보면 자신보다 더 자신을 다루는 데 익숙한 것 같다.
결국 화가 사르르 풀려 버린 한솔이 신우의 목에 팔을 감아 왔다. 한솔의 콧등에 가만히 입을 맞춘 신우는 차 포켓에서 물티슈를 꺼내 더러워진 한솔의 몸을 닦아 준다. 한솔은 누가 봐도 섹스 중에 상대가 쥐어뜯은 것 같은 신우의 옷을 보고 끙, 하고 앓았다. 어떻게든 펴 보려고 주름이 진 부분을 문질러 보지만 한 번 구겨진 셔츠가 원상 복귀될 리 만무했다.
“…코트 입으면 괜찮을 거야.”
한솔은 민망해하며 신우의 옷에 탈취제를 마구 뿌렸다. 페로몬에 예민한 솜이 탓에 가지고 다니는 건데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신우가 솜이를 데리러 간 사이 정액에 옷까지 젖어 버린 한솔은 대신 차 안을 정리하기로 했다. 창문에 튄 정액을 박박 긁어 닦고 시트에 굳어 버린 하얀 가루들을 털어 낸다. 나름 누군가에겐 워너비인 차인데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이 많았다. 지하라 공기 질이 좀 그렇긴 하지만 일단 환기가 중요하니 차 문을 전부 열어 냄새를 뺐다. 그것도 모자라서 가지고 온 탈취제를 전부 쓰기까지 했는데-.
왕왕!
신우의 품에 안겨 해맑은 표정으로 다가오던 솜이가 갑자기 움직임을 뚝 멈췄다.
킁킁킁….
그리고 차 냄새를 맡는다. 뒷좌석에 타면 바로 이동장으로 들어가곤 했던 평소하곤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한참 동안 냄새를 맡던 솜이는 두 사람을 굉장히 아련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더니 켕켕, 하고 기침을 했다. 그 표정이 마치 자기가 소풍 간 사이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솜아 집에 가야지.”
한솔은 솜이를 다독여 겨우겨우 이동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솜이는 가장 좋아하는 담요에 얼굴을 파묻고는 얼굴을 보여 줄 생각을 안 했다. 그에겐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개코인 솜이에겐 또 다른가 보다… 한솔은 다짐했다.
‘앞으로 차에선… 솜이 없을 때만 해야지.’
절대 안 하겠다곤 하지 않는 한솔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조기 졸업 조건을 맞추기 위해 신우는 이례적으로 대외 활동을 접고 거의 학교에 살다시피 했다. 졸업 후에 MBA 과정을 어디서 밟을 것인가도 굉장히 중요했기에 지도 교수를 비롯해 여러 전문가들과 상담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바쁜 나날 속에서 한솔은 홀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난 뭘 해야 하지?’
자신의 미래를 확실하게 정해 놓고 그 길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신우와 달리 한솔은 그런 게 없었다. 한솔은 어떤 의미론 자유로웠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배우고 싶은 건 무엇이든지 배울 수 있었다. 갑자기 대학 진로를 바꾼다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큰소리 한 번 없이 허락해 주셨다. 한솔은 분명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그는 언젠가 어린 신우에게 이리 물은 적이 있었다.
-신우는 왜 선수 반에 안 들어가?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기까지 했던 신우. 코치들도 분명 아쉬워하는 게 보였는데 신우는 매번 취미반을 고집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절대 오래 하지 않았다. 한솔은 항상 그 이유가 궁금했다.
-솔아, 나는….
그리고 그때 신우가 한 말이,
-선수가 아니라 후원자가 되어야 한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누구보다 정로만 걷는 것 같은 신우도 사실 주변에서 쥐여 준 책임과 짐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신우가 마지막으로 수영을 선택한 건, 그게 그에게 가장 미련이 덜 남은 종목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한솔은 참 자유롭다고 할 수 있었다.
“…….”
하지만 그는 이제 안다.
자유란 이름은, 책임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걸.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또 아무도 제시해 주지 않는 나의 길-.
그건 스스로 개척해야만 하는 길이었다.
한솔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이런, 한솔 군 아닌가.”
그리고 한 목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젊은이의 사색 시간을 방해한 겐가?”
노교수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사과했다. 한솔은 여기가 어딘가 싶어 눈을 깜박이다가 장원철 교수를 발견하고선 눈을 크게 떴다.
“교수님…?”
같은 예대다 보니 연영과가 쓰는 건물 바로 뒤에 무용과가 쓰는 건물이 있었다. 아무래도 생각에 잠겨 있느라 산책로를 잘못 들어왔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한솔이 민망해하며 꾸벅 인사를 하자 장원철 교수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잠깐 시간 있으면 늙은이와 대화나 해 주겠나?”
존경하는 이의 제안을 거절하기란 무척 어려운 법이다. 오늘 치 강의가 전부 끝나고 신우와 만날 시간만 기다리고 있던 한솔은 결국 장 교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슈즈를 신고 통통 튀는 발, 우아한 애티튜드. 호흡 하나에 얽히는 수많은 손짓과 눈빛-.
잊었다 생각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세계.
무용과 학생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는 한솔을 지켜보던 장 교수가 빙긋 웃으며 교수실 문을 열었다. 한솔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실례합니다.’ 하고 교수실에 들어갔다.
“자, 여기 앉게. 커피가 좋나, 차가 좋나?”
“앗, 교수님 제가-.”
“손님은 손님 대접을 받아야지. 그래서 어느 게 좋나?”
“그럼… 차로 부탁드립니다.”
“이 늙은이랑 취향이 비슷하구만.”
허허 웃은 장 교수가 다기에 물을 채웠다. 한솔은 황송하게도 한때 전설적인 무용수였던 이가 내려 주는 차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찻물 내리는 소리, 다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조용히 차를 마시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래, 한솔 군. 일전에 고민했던 질문의 답은 찾았는가.”
한솔은 장 교수의 물음에 눈꺼풀을 사붓이 내리뜨며 찻잔의 둥근 모서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찾지 못한 것 같아요.”
그 대답에 장 교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나는 서른둘에 이 길에 뛰어들었지. 한솔 군, 서른둘이란 나이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하나?”
한솔은 그 말을 듣고 신중히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게 무엇이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발레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솔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답했다.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장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맞네. 늦었네.”
“…네?”
내심 혼나지 않을까 생각했던 한솔은 깜짝 놀라서 장 교수를 바라봤다.
“뭐든지 때가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발레는 스포츠네. 근육을 쓰는 운동이고 인간의 근육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화하는 게 사실이지.”
“…….”
“하지만 말일세-.”
“…….”
“내가 서른둘에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그 뒤는 더 늦은 시간만이 남을 뿐이지 않겠나.”
한솔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모순적이지만 그래서 나는 배움에 늦음은 없다고 생각하네. 그것을 배우고자 할 때가 그 사람의 생에 가장 적기이기 때문이야. 과거를 탓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그 과거에는 분명 그러지 못한 이유가 있을 테니.”
연한 빛의 동공이 깊게 흔들렸다.
“어떤가, 답변이 도움이 되었는가?”
한솔은 턱밑까지 차오른 어떤 감정을 내리누르고 대답했다
“…네!”
장 교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한솔의 찻잔에 새로운 차를 따라 주었다.
“그럼 이제 내 볼일을 말해야겠군.”
그는 장 교수의 말에 조금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깜박인다.
“한솔 군, 재능 기부를 해 볼 생각 없나?”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
끄덕끄덕-.
한솔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우가 작게 웃었다.
“선배님이 너무 바쁘셔서 곤란한데.”
“…자기는 더 바쁘면서.”
“지금 해 놔야 나중이 편하니까.”
한솔은 현재 3학년, 신우는 2학년이다. 그래서 신우가 종종 저렇게 ‘선배님’ 하고 부를 때면 기분이 이상했다. 좋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연영과 이한솔 아냐?”
빨대로 음료를 쪽 빨아들이며 핑크빛 감성을 누리고 있던 한솔은 뒤쪽에서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귀를 쫑긋했다.
“옆에… 경영대 남신 맞지? 대박.”
“둘이 사귄다는 소문 진짠가 보네.”
“눈 호강이란 게 이런 걸까- 아아, 부럽다.”
한솔은 입꼬리를 실룩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신우가 복학하고 나서부터 신우의 1초 1초가 소중해진 한솔이 경영대를 들락거리면서 온 학교에 소문이 쫙 퍼졌다. 그전에도 재벌 후계자랑 전 국대 사이에서 저울질한다는 저급한 소문으로 유명했으니…. 신우가 학교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고 데이트가 궁해진 한솔이 캠퍼스 데이트를 즐기기 시작하면서 아주 일파만파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솔로서는 장단점이 있는 일이다. 장점은 임자가 뻔히 있어 보이는 알파에게 고백을 해 오는 사람들이 줄었다는 것이고-오메가인 한솔이 만만해 보였는지 절대 없어지지는 않았다.- 또, 이렇게 카페 같은 곳에 앉아 있으면 이야깃거리가 쏙쏙 들어온다는 점이 있다.
단점은-.
“재수 없어. 여우 새끼.”
잘난 남자를 차지한 후폭풍을 겪고 있달까, 아아-.
아니, 그런데 이 남자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내 거였다니까?!
한솔은 이빨로 빨대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할 거면 차라리 앞에서 하지. 속상한 연기도 못하고 너무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여우 예전에 여기서 다른 남자 만나더니 이젠 유신우를 여기 데려오네. 간도 커, 진짜.”
“뭐야, 진짜? 국대 말고 또 있어? 그게 누군데?”
“아마 조교였을 걸. 그 조교도 그 과에서 인기 엄청 많더라. 완전 트로피 취급하는 거야, 이한솔 쟤는.”
…으음? 이건 또 무슨 새로운 레퍼토리지.
인생에 남자라곤 유신우 뿐이던 일편단심 이한솔은 조금 억울해졌다. 내가 무슨 조교를 만났다고- 아니, 잠깐. 조교…? 조교라고?
드르륵-.
언제나 사람이 많아 시끌벅적한 카페 내에서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리 튈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짧지만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생길 정도로 데시벨 높던 카페 안이 조용해진 것이 느껴진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눈앞의 알파에게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주변이 시끄러워도 집중력이 깨지지 않는 남자가 드물게 하던 일을 멈추고 우월한 키를 자랑하며 한 곳을 바라본다. 한솔은 신우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들었어?!’
워낙 작은 목소리였고, 주변이 시끄러웠기에 공부에 집중하고 있던 신우가 들었을 줄은 몰랐다. 알파가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아까 한솔을 험담했던 그 무리였다.
저벅-.
신우가 망설임 없이 그 무리로 향했다. 카페 안의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리도 신우의 목적지가 자신들이란 걸 아는지 우왕좌왕하며 당황해하는 눈치다. 알파의 그림자가 오후의 햇빛을 받아 테이블 쪽으로 길게 쏟아졌다.
똑똑-.
신우가 그 무리가 있는 자리의 벽을 두들긴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어깨를 흠칫 떨었다.
“우리가 구면입니까.”
한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짜증 한 톨 드러나지 않은 완벽한 무표정과 서늘한 목소리. 신우가 무엇보다 화가 났을 때 하는 얼굴이란 걸 한솔은 잘 알았다.
“네? 네? …아니요….”
“그런데 왜 자꾸 이름을 부르시지.”
“…….”
“아무리 봐도, 초면-.”
딱-.
“-일 텐데요.”
상대가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시선을 피하자 알파는 다시 벽을 두드렸다. 아마, 맹수한테 몰이 사냥을 당하는 기분이지 않을까. 내가 잘 알거든…. 물론, 한솔은 저것처럼 살벌하게 당해 본 적은 없지만 매번 혼이 날 때마다 신우 앞에 서면 손바닥에 땀부터 났다.
“저기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는데 저희는 그냥 그쪽이 어장을 당하니까 걱정이 돼서…!”
“어장.”
“…그, 그냥 친구들이랑 얘기를 했을… 뿐….”
“걱정이요.”
온도가 20도는 뚝 떨어진 것 같다.
“버젓이 사람이 앞에 있는데 이야깃거리로 삼는 걸 요즘은 대화라고 부릅니까?”
한솔은 주섬주섬 신우의 짐을 대신 싸기 시작했다. 음, 아무래도 여긴 다신 못 올 것 같다. 주인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그래도 그동안 매출 많이 올려 드렸으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이봐, 너 뭔데 자꾸 이렇게 위협질이야?”
그런데 일이 커졌다. 무리 중 가장 체격이 있어 보이고 더불어 나이까지 있어 보이는 남자가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아… 한솔은 속으로 탄식하고 말았다.
“살다 보면 내 이야기도 주변에서 들리고 하는 거지. 그만큼- 어? 본인들의 행색이 안 좋았다는 거 아냐?! 말 안 나오게 지가 조심할 것이지-.”
그러면서 마지막엔 신우는 보지 않고 한솔 쪽을 돌아본다. 험담하다가 걸리니까 적반하장에 그 행동의 진위가 너무 투명했다. 신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지고 말았다.
“하….”
알파가 무표정을 지우고 실소를 내뱉는다. 한솔의 머리 위로 적색경보 등이 켜졌다. 잠깐, 저건 진짜 위험한데…!
“내가 내 약혼자를 기만하는 것까지 봐줘야 된다 이 말입니까?”
….
…….
한순간에 카페 내에 정적이 흘렀다.
한솔은 신우의 소지품을 전부 쑤셔 넣은 가방을 들어 올리려다 말고 그만 휘청거리고 말았다.
약, 혼자…?
모두의 시선이 한솔에게로 꽂혔다. 여전히 신우만 그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우야…!”
한솔은 자신의 크로스 백과 신우의 무거운 슬링 백을 들고 황급히 신우에게로 달려갔다. 진짜 이대로 놔뒀다간 내일 신문 1면에 나올지도 모른다. 요즘 신우는 옛날 신우처럼 인내심이 하해와 같지 않다는 걸 사람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물론, 그렇게 만든 사람은 한솔 자신이지만-. 한솔은 속으로 조금 뿌듯해하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급히 신우의 한쪽 팔을 자신의 두 팔로 끌어안았다.
“가자, 응? 가자….”
신우는 검게 일렁이는 눈으로 한솔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어? 그리고 순식간에 한솔이 들고 있던 가방들이 사라졌다. 어깨에 가방을 멘 신우는 묵묵히 한솔을 내려다보더니 어느 순간 그의 몸을 어깨에 들쳐 업었다.
‘엣…?!’
한솔은 당황해서 눈만 깜박였다. 상황 파악이 덜 된 상태에서 험담 무리 중 한 명의 경악한 얼굴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자신이 신우에게 안긴 상태란 걸 깨달았다.
‘아니, 잠깐…!’
신우가 그 상태로 카페를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한솔은 귓바퀴가 붉어진 채로 신우의 어깨에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왜… 안 물어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두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한솔은 그 정도 시선이야 아무렇지 않지만 그보다 조용한 신우가 더 신경 쓰였다. 신우의 어깨에서 꼼질거리며 눈치를 보던 한솔이 용기를 내서 물었다. 예대 건물 뒤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산책로를 걷던 신우가 우뚝 멈추어 섰다.
“네가 말해 줄 거라-.”
“…….”
“믿으니까.”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울창한 나무 그늘 사이로 몸을 숨겼던 오후의 햇볕이 환하게 쏟아져 내렸다. 한솔은 결국 조금 웃고 말았다.
“교양 수업 들었던 강의의 조교님인데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냐고 하셔서 커피 한 잔 마신 거뿐이야. 잘 모르는 사람이랑 단둘이 있기는 부담스러워서 저 카페로 갔었어. 저긴 항상 사람이 많으니까.”
한솔이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인 신우가 또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한 아름드리나무의 그늘 아래로 가 바닥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마킹해도 돼?”
순간 한솔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여, 기서…?”
마킹이란 페로몬 샘이 있는 곳, 주로 목덜미를 강하게 물어서 일시적으로 상대의 페로몬 분비를 묶는 것을 뜻한다. 상대가 자신의 것이라는 강한 소유욕의 표시였고 그렇기에 짐승이 제 영역을 주장하는 행위와 닮았다 하여 마킹이라 불렸다.
한솔은 신우가 자신의 손끝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그가 아까의 일에 생각보다 골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너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
“너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게 싫어.”
그는 제멋대로 굴어서 미안하다고, 자제하지 못했다면서 사과했다. 한솔은 순수하게 자신만 두고 생각해 봤을 때 신우가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고 좋았는데, 이 고지식한 알파는 그마저도 괴로운 모양이다.
끙, 갈 길이 머네.
한솔은 속으로 조금 웃고는 뒤를 돌며 입고 있던 라운드 티의 목 부분을 잡아 늘렸다.
“해 줘, 마킹.”
조금 헐렁한 티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솔이 자진해서 속살을 내보이자 멈칫한 신우가 눈을 크게 뜬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긴 팔을 뻗어 한솔의 몸을 끌어안았다. 목 앞을 가로지른 손이 왼쪽 어깨를 단단히 붙잡는다. 다른 팔이 허리에 감기고 오메가의 몸은 알파의 품에 완전히 갇혀 버리고 말았다.
“읏….”
살갗에 닿는 날카로운 이빨의 감촉-. 한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우면서도 기대되는 달콤쌉싸름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파도쳤다. 그리고… 키스-.
“…! 흐….”
송곳니가 피부를 파고드는 느낌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본능적으로 도망가려는 몸을 꽉 껴안은 신우가 한솔의 목덜미를 물었다. 바들바들 몸을 떨던 한솔은 송곳니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자 긴장이 풀려서 신우의 품 안에 축 늘어졌다. 잇자국이 남은 한솔의 목을 빤히 바라보던 알파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남긴 흔적에 쪽- 입을 맞췄다.
“가려야겠네.”
“응….”
“…데려다줄게. 가자.”
결국 한솔은 신우가 도서관에서 쓴다는 카디건을 빌려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할 일이 많은 신우가 학교로 돌아간 뒤 어쩐지 눈치를 보는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전신 거울 앞에 선 한솔이 카디건의 단추를 하나둘 풀었다. 스르륵- 얇은 가디건이 흘러내리면서 목 언저리가 붉게 물든 모습이 보인다.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목뒤로 손을 가져다 댔다.
“아….”
또렷하게 만져지는 마킹 자국. 거울 속의 자신이 얼굴을 붉혔다. 무너지는 것처럼 자리에 주저앉은 한솔의 곁으로 솜이가 다가왔다. 왜 그러냐는 듯 꼬리를 흔드는 솜이를 두 팔로 들어 올린 한솔이 한탄했다.
“솜아, 나 어떡하지….”
왕?
“진짜 어떡하지….”
한솔은 따끈한 몸에 얼굴을 묻고는 ‘어떡하지-’만 반복했다. 한솔의 심정을 눈치챈 걸까? 그날따라 솜이는 꽤 오랜 시간 한솔에게 안겨 있어 주었다.
***
“어서 오게, 한솔 군.”
“안녕하세요, 교수님-.”
한솔은 조심스럽게 연습실 안으로 들어섰다. 장 교수가 한솔을 환영하며 인자하게 웃었다.
이곳은 희망 문화 센터.
형편이 어렵거나 돌볼 가족이 없는 아이들이 예술에 대한 꿈을 키워 가는 곳.
한솔은 오늘부터 이곳에서 세 달간 발레 수업을 보조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원래 시범을 보여 주시던 선생님이 다리를 다치신 탓에 대타로 들어가는 것인데 전공자가 구해지지 않아 아이들은 소중한 한 달을 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마,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지 않을까.
“와아, 오빠가 새로운 선생님이에요?”
이 아이를 만나게 될 걸 알아서이기 때문이다.
“응, 안녕. 이름이 뭐예요?”
“저는 예나요! 박예나.”
예나는 한솔을 기억하지 못했다. 한솔은 그게 서운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그렇게 작았던 아이가 벌써 이만큼이나 컸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한솔이 무릎을 접고 아이와 시선을 맞추자 예나가 신이 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조잘대기 시작했다.
“예나는 발레가 좋아요?”
“네에, 좋아요!”
“…왜, 좋아요? 힘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아이의 대답은-.
“음, 쪼오금 힘들긴 하지만 예나는 되고 싶은 발레리나가 있어요.”
“되고 싶은 발레리나?”
“네! 예나는요, 아빠한테 하나뿐인 공주님이거든요. 그러니까 예나는 공주님 같은 발레리나가 될 거예요!”
한솔의 가슴 깊숙이 어떤 파동을 만들어 냈다.
처음, 백조의 호수 공연을 보고 무작정 아버지를 졸라 학원을 등록했던 일.
난생처음 신어 보는 토슈즈에 발이 아프다면서 엉엉 울던 한솔의 발을 신우가 주물러 줬던 기억-.
첫 공연, 첫 주역, 첫 파드되.
한솔의 22년을 이루는 것은 그런 작은 기억들이었다.
아주 거창한 사명감이나 무언가를 해내야겠다는 신념 따위가 아니라-.
그저 즐거웠던 추억, 행복했던 기억, 그리고 땀방울 흘렸던 시간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이 아이가 다른 많은 걸 잊어도 그와 나눴던 대화, 그 한마디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한솔 군-.”
“아, 네!”
한솔은 접었던 무릎을 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인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그를 올려다본다. 한솔은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한솔입니다.”
“자, 제군들. 이렇게 허리가 곧은 게 아주 중요하네. 그래야 여기서 이렇게 다리를 들어 올렸을 때 선이 아주 아름답지.”
한솔은 뭐라 해야 할까.
자신이 구체 관절 인형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장 교수가 명령하는 대로 자세를 취하면 노교수는 인자한 목소리로 설명을 한다. 거기까진 딱히 문제가 될 게 없어 보이지만 한솔이 보기엔 이게 영….
“거기서 턴-.”
빙그르-.
“아상블레”
가볍게 점프 후 착지
“다리 2번. 아라베스크”
애들이 할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솔이 중심 다리를 턴 아웃하고 반대쪽 다리를 높게 들어 올리자 장 교수가 흡족하게 웃었다. 한솔은 아이들이 보고 있으니 겉으로는 밝게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상을 지었다.
‘교수님… 교수님 이거 가볍게 보조만 하는 거라 하셨잖아요….’
그것도 그럴게 아이들도 이건 자신들이 할 게 아니라는 걸 아는지 한솔이 동작을 취할 때마다 ‘우아아아’ 하거나 다시 점프를 하면 ‘우오오오’ 하며 구경할 뿐이었다. 오히려, 장 교수가 몸 선을 하나하나 짚어 주며 이런 코어 근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이 자세를 취할 땐 어디에 힘을 주어야 하는지 기-일게 아주 길게 설명할 때마다 그 자세를 유지해야만 했던 한솔만 연습복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
“흐어어….”
아이들이 귀염뽀짝하게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간 연습실.
한솔은 거의 탈진 직전의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한솔을 바라보며 장 교수가 흐뭇하게 웃는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점프를 굉장히 가볍게 하는 게 한솔 군의 특징인 것 같네. 마치 무게에 구애받지 않는 느낌이야. 라 실피드의 요정들이 사뿐사뿐하게 걷는 발걸음이 이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지.”
존경하는 이에게 받은 뜻하지 않은 칭찬이었다. 한솔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변했다.
“가벼운 무용수는 많으나 가볍게 뛸 수 있는 무용수는 흔치 않아. 발레라는 예술이 가장 사랑하는 가치이자 영원한 탐미이지. 좋은 재능을 가졌네, 한솔 군.”
“…감, 사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그만큼 중심축을 잘 잡아야 할 게야.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탄력적이고 우아한 곡선의 미라는 것을 기억하게. 단지 가볍기만 해서는 안 돼. 보다 폭발적인 근육의 힘, 손끝과 발끝이 그려 내는 궤적, 그리고 연기이지. 한솔 군은 확실히 마지막만큼은 현역들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아 보이네만. 한번, 지젤을 연기해 보지 않겠나?”
장 교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한솔은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노교수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 이게 정말 드문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설적인 인물에게 개인적으로 지도받을 만한 기회가 쉬이 올 리 없다. 그것도 비전공자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또 권력이 있어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한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느리고, 우아하게 손을 뻗었다.
지젤은 낭만적이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표현한 작품이다. 특히, 2막의 푸른 달빛 아래에서 순백의 월리들이 추는 몽환적인 군무는 이 작품을 대표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끝이 정해져 있는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숭고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절정-.
하지만, 한솔이 지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조금 달랐다. 1막의 끝, 지젤이 연인의 배신을 알게 되고 미쳐 가는 장면- 일명 매드 신.
“…….”
손끝에 담긴 미련과 가냘픈 몸부림이 비극의 시작을 알렸다.
화려한 기술보다는 무용수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장면.
지젤이 미쳐 간다. 죽음이 끝내 다가와 입을 맞췄다.
그건, 한없이 격정적이고 고요하며 비련하고 창백한 죽음이었다.
“…훌륭하군.”
장 교수는 전공을 아주 잘 살려 냈다며 농담처럼 말했으나 내심 마음속으론 대견해하는 중이었다. 단순히 ‘웃는 얼굴’, ‘슬픈 얼굴’, ‘화난 얼굴’을 연기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거기에 ‘이야기’를 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아주 찰나에 드러난 지젤의 고뇌와 슬픔, 그리고 체념적인 감정이 노교수의 노쇠한 심장을 두드렸다. 목소리 없는 세계 속 지젤은 소리 없는 절규와 함께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네. 조심히 들어가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한 달이 지났다.
한솔은 주에 세 번, 문화 센터에 가 수업 보조 일을 하고 수업이 끝나면 그날의 피드백과 함께 장 교수에게 개인 교습을 받고 있었다. 딱히 교수님의 입에서 ‘너를 가르치겠다’ 하는 말을 들은 건 아니었지만, 수업 시간에 시범 보였던 것들의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피드백 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다음을 배우게 된 형국이었다. 어쩔 때는 교습 시간이 수업 시간보다 배는 길어지기도 했다. 한솔은 장 교수가 왜 무용과에선 ‘스파르타 교수님’이라고 불리는지 몸소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솔이 발레 바를 붙잡고 연습하는 모습과 그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솜이가 알고리즘을 타면서 팔로우 수가 미친 듯이 늘어났다. 초커를 차고 다니는 탓에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캠퍼스 내 유명인이었던 한솔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전보다 더 늘어났다. 약간 뭐랄까… 일상을 관음당하는 기분이랄까. 최은혜가 왜 SNS가 너한테 딱이라고 말한 건지 알 것 같았다. 한솔이 특히 즐겨 보는 반응은 어쩌다가 한 번씩 사진에 신우의 손이라든지 팔이라든지 하는 게 등장했을 때 자꾸 저 잘생긴 손은 뭐냐며 얼굴을 보여 달라는 반응이었다. 한솔은 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그 반응을 즐겼다.
“이 수업 자체는 한 학기로 한정되지만 과제 제출은 졸업 작품으로도 인정된다는 걸 명심하도록 하고. 그럼, 오늘도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일상이 흘러갔다.
한솔이 7학기 졸업을 목표로 하다 보니 졸업 학점을 채우기 위해 원래는 듣지 않아도 될 영화 연출 쪽 4학년 수업도 같이 듣고 있었다. 더불어 원래도 이쪽으로 진로가 확실했던 윤건은 ‘영화 제작’이라는 과제에 머리를 싸맸다. 영화 연출부인 그는 아마 골머리 좀 앓을 것이다. 연영과 연극부 동아리인 ‘라온’에서 진행하는 가을 공연으로 졸업 작품을 대체한 한솔만 강 건너 불구경 중인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전부 떠난 빈 강의실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한솔은 원래도 조용한 성격이지만 요즘 들어 유달리 말이 없는 윤건을 보며 어찌할지 고민하다가 가만히 내버려 두면 내핵까지 파고드는 그의 특성을 고려해 조심스럽게 묻기로 했다.
“왜 그래? 무슨 고민 있어?”
윤건이 흠칫 놀라더니 한솔을 바라봤다.
“…….”
박윤건에게 있어 이한솔은 참 이상한 사람이다.
이상하고 멋진 사람.
밝고 에너지 넘치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면서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엔 한없이 진지해지는-.
한솔이 신우를 보고 하는 생각을 다른 누군가는 한솔을 보고 하곤 했다.
그는 그런 한솔에게만큼은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건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나 자퇴할까 봐.”
한솔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원래는 다큐 PD가 되고 싶어서 여기 왔거든. 자연이나 동물 같은…, 인위적이지 않고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게 좋아. 그런 걸 찍어 보고 싶었어.”
“…….”
“입학할 당시에만 해도, 다큐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여기서 배우면 배울수록 회의감만 들어. 뭐랄까.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기 위해선, 그 한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연출해야만 하는 것 같아. …맞아. 그런 걸 잘해야 감독이 되고 PD가 되는 거겠지. 그런데 난 잘 모르겠어….”
“…….”
“…미안. 내가 너무 이상한 얘기만 했지?”
윤건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한솔은 그런 윤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엔 뭘 찍어 보고 싶은 거야?”
“어?”
“저번에 대본 있다 했잖아. 이 수업, 시나리오는 써 둔 거 같은데 아니야?”
윤건이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있긴… 한데….”
“줘 봐.”
한솔의 박력에 눌린 윤건이 어어, 하다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대본을 꺼내 건넸다.
「가제 : ‘리얼리티Reality’」
한솔은 윤건의 대본을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넘기며 살폈다. 윤건이 긴장된 얼굴로 그런 한솔을 바라봤다.
“대사가 없네.”
“…….”
“그런데 이 주인공, 나랑 닮았어.”
윤건의 대본은, 그래 대본이라기보단 하나의 소설 같았다. 한솔이 그렇게 말하며 윤건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너 보고 쓴 거야.”
“나?”
“응… 너는 정말, 내 주변에서 가장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한번 써 보고 싶었어. 연출된 상황이 아니라, 그냥 열심히 사는 한 사람의 일상을 찍어 보면 어떨까 싶어서.”
허락도 없이 써서 미안하다며 윤건이 우물쭈물 말했다. 한솔은 대본을 다시 바라본다. 윤건이 볼 수 있는 한솔의 일상은 학교 안까지였다. 그래서 대본 속의 주인공은 학교 안에서만 공부하고 움직이고 연애를 한다. 한솔은 적힌 글자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남자는 ‘나’에게서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는다. 그 눈빛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보듬듯 다정했다.」
「(손을 맞잡으며 행복하게 웃는 두 사람)」
“이건 언제야?”
“그때… 라온 봄 공연 끝나고 그분이 너 데리러 오셨을 때….”
“아.”
기억났다. 그 ‘약혼자’ 사건이 학교에 쫙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다. 두 사람에 대한 관심도가 너무 높아서 밖에 나가지 못하고 무대 뒤에서 얘기를 나눴었다. 그때 윤건이 조명 정리하러 들어왔다가 들켰었지.
“미안… 역시 이런 건 좀 그렇지?”
만들어진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온전한 ‘내 이야기’ 속의 나. 그건 한솔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윤건이 이건 버리겠다며 안절부절못하며 대본을 가져가려는 걸 막은 한솔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말 나 찍을 생각 있어?”
“어? 으응. 당연히 있으니까 적었지….”
“정확히 뭘 찍고 싶은 건데?”
“네 일상…? 밥 먹고 수업 듣고 과제하고… 또, 연애도 하고… 그냥, 자연스러운 네 모습 같은 거….”
갈수록 윤건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하지만, ‘연애’라는 단어 하나에 꽂힌 한솔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본을 탁! 덮었다.
“이거 찍자.”
“어? 이걸…?”
“응. 대신 좀 길게 될까? 좀 많이-. 보수는 줄게.”
“보, 보수? 아니 얼마나 길게 찍으려고….”
한솔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결혼할 때까지!”
쾅-!
강의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뭐, 결호온?”
결국, 밥을 같이 먹기 위해 두 사람을 찾으러 온 수연에게까지 들킨 상황이 되자 한솔은 손을 내저으며 지금은 아니고 아주 나중이라며 설명해야 했다. 수연은 그 알파 놈이 아무리 잘해 줘도 알파다, 알파란 놈은 다 속이 시꺼머니 조심해야 한다. 잘해 줘도 세 번 생각하고 결혼하라면서 훈수를 뒀다. 그러는 자신도 알파면서. 한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배고파 뒤지겠다. 빨리 가자.”
“가만 보면 수연이는 먹는 거에 진심이란 말이지.”
“원래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거야.”
윤건은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 강의실 문을 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빛이 쏟아진다. 그와 동시에 한솔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뭐 해, 얼른 와.”
“…응!”
윤건은 결국 따라 웃으며 친구들 곁으로 달려갔다. 끼이익-. 느리게 닫히는 강의실 문 틈새 사이로 수연이 왜 이렇게 굼뜨냐며 윤건을 타박하는 소리, 윤건이 소심하게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각각 성별도 사는 모습도 다른 친구들이지만 그렇기에 짝이 맞는 퍼즐처럼 정다워 보였다.
***
또각, 또각-.
느긋하고 확신에 찬 구두 굽 소리.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가 걸어간 자리에는 독한 시가 향과 함께 강한 페로몬 냄새가 남아 있었다.
알파였다.
항시 뿌연 연기와 고약한 냄새에 절여 사는 인간들도 그녀가 지나가는 자리만큼은 결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이곳에서 저 여자가 얼마나 잔혹하고 무자비한 사냥꾼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또각….
여자가 어느 한 곳에서 멈추어 선다. 겨우 한 평이나 될까 싶은 크기의 판잣집. 집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그저 썩은 나무판자로 구역을 나눠 놓은 판자촌의 모습이다.
오물과 쓰레기 더미에 묻혀 있는 삐쩍 마른 남자 하나가 감옥과도 같은 판잣집 안에 널브러져 있다. 머리는 산발이고 웅크린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쓰레기보다 못한 낡아 빠진 이불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손은 해골처럼 앙상했다. 덜덜덜-. 그리고 그 손은 눈에 띌 정도로 심하게 떨리는 듯 보였다.
후-.
『깨워.』
여자가 연기를 짙게 뱉어 내며 말하자 수행원처럼 조용히 따라붙었던 검은 정장 차림의 여자들 중 한 명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퍼억-!
“컥…!!”
남자를 걷어찬다. 강한 충격에 바닥을 반 바퀴 구르며 컥컥, 피를 뱉어 낸 남자가 결막이 뿌옇게 흐려진 눈을 떴다.
남자의 이름은 남우현이었다.
한때, 남우현에게도 그럴듯한 인생이 있었다.
번듯한 직장과 주변의 좋은 평판.
괜찮은 학벌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만들어 줬고 선생이란 직업은 꽤 적성에 잘 맞는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 아직 가치관이 덜 잡힌 어린애들을 조종해 반을 자신이 군림하는 하나의 왕국으로 만드는 것은 지루한 일상을 꽤 즐겁게 만들어 줬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인생은 급격하게 커브 길을 돌아 꼬이기 시작했다.
수년 전에 묻혔던 일이 대대적으로 뉴스를 탔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일개 교사의 일이 전국적인 이슈로 퍼지는 데 걸린 시간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다. 누군가, 그를, 음해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징계 위원회가 열렸고 교사 자리에서 해임되며 그는 ‘실패자’가 되었다.
‘실패자’는 사회에서 살 가치가 없다….
그렇게 그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약에 손을 댔다.
『이봐.』
누군가 말했다. 이걸 들이켜면 현실을 잊을 수 있다고.
그걸 처음으로 알려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이제 잘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남우현은 약을 들이켜고 깨달았다. 그는 실패자라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약에 손을 댔고 그 뒤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남우현이 있던 곳은 사회의 실패자들이 모여 사는 ‘골방’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쓸 만한 것이라곤 노동력밖에 없는 놈들이 스무 명씩 다닥다닥 붙어 지내는 곳이다. 냄새는 지독했고 각종 오물과 소음으로 쪽잠조차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강박이 있던 남우현에게 현실은 점차 지옥보다 고통스러운 곳으로 변했다.
그 하얀 가루를 흡입하고 나면 남우현은 순종적이고 아름다운 오메가를 휘두르던 그때로 되돌아간다. 그에게는 권력이 있었고 그 권력에 순종하는 아름다운 짐승이 있던 그 시간으로. 오메가란 존재는 정말 지독해서, 그는 그 시절을 절 때 잊을 수 없었다. 인생의 많은 날들 중에 굳이 그 한 자락의 시간이 반복되는 이유라 하면 전부 그 사특한 존재 때문일 것이다. 행복했다. 한 줌의 시간이라 해도 좋아. 약만 있으면 반복할 수 있어.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약과 이한솔의 존재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남우현은 점차 약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에게 현실은 점점 잊어야 하는 곳이, 가루를 흡입해야 보이는 세상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살아 숨 쉬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종종 공짜로 약을 주던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면서 약을 구할 방법이 사라졌다. 이미 약에 중독되어 있던 남우현은 쉽게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약을 구해 보려고 수소문한 끝에 골방 사람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약이 거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약은 비쌌지만, 돈을 내면 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버는 족족 약을 샀다. 모아 둔 돈도, 한 줌이던 소지품도 전부 팔아 치워 탕진했을 때 남우현은 더 좁은 골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사회의 ‘실패자’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돈을 벌어 약을 사야만 한다는 생각만이, 아름답고 순종적인 짐승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하게 되었다.
『폐급이군. 말은 할 수 있나?』
『일을 마치고 오면 약쟁이들에게 자신의 오메가에 대해 자랑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베타가?』
『약쟁이니까요.』
여자는 시가를 빨며 피식 웃었다.
『그래, 약쟁이는 약쟁이답게 대우를 해 줘야지.』
한국이란 나라에서 대량으로 사들인 값싼 노동력들은 시세보다 배는 비싸게 약을 공급해도 기꺼이 구매할 정도로 길이 잘 들어 있었다. 약만 공급하면 나자빠질 때까지 써먹을 수 있는 데다가 이렇게 때로 대어를 물고 오는 놈도 있으니 꽤 수지에 맞는 장사다. 여자는 폐급인 약쟁이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아 때가 탄 물건이 든 비닐을 흔들었다.
『약쟁이, 이게 뭔지 기억하나? 네놈이 그렇게 자랑을 하고 다니던 ‘오메가’의 물건이라던데.』
‘오메가’라는 말에 남우현의 흐리멍덩한 눈에 순간 빛이 돌아왔다.
여자는 낡은 페로몬 테스트기가 들어있는 비닐을 흔들었다. 내장 탐지 칩이 망가져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테스트기에 기록된 페로몬 수치만큼은 남아 있었다. ‘우성’의 범주에 드는 오메가의 페로몬이다.
범죄 조직에게 있어 오메가는 아주 중요한 존재다. 그 자체만으로도 ‘손님’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아름다운 꽃이지만, 수가 매우 적기 때문에 항상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혈안이 되어 있었다. 수를 부풀려 보이기 위해 베타들로 만든 ‘가짜’들을 운영하기도 하고 납치도 서슴지 않았다. 그 대상은 주로 연고도 찾을 사람도 없는 ‘주인 없는’ 오메가들이지만 ‘우성’ 오메가라면 말이 달랐다.
비록, 극히 예외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사회 고위층의 자녀로 태어나거나 입양이 되는 만큼 위험도가 매우 크긴 하지만 우성 오메가란 존재를 얻을 수만 있다면 조커에 비견할 만했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 네 정보가 가치가 있다면-.』
약쟁이 앞에 테스트기를 툭 던진 여자가 연기를 뿌옇게 뱉어 내며 말했다.
『일 년 치 약을 주마.』
“…!!”
남우현의 입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 시각, 희망 문화 센터
“유학을 가 보는 건 어떻겠나?”
석 달간의 봉사가 끝난 날이었다. 센터 안에 작게 자리한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장 교수와 차를 나눠 마시고 있던 한솔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네는 재능이 있어. 갈고 닦으면 무대의 가장 빛나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반짝일 재능이지.”
“…….”
“자네가 이 일을 싫어했다면 내 어찌 이리 말하겠나. 단지, 자네의 눈빛엔 아직 발레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니 한 번 도전해 보는 게 어떤가 싶어서 말이네.”
한솔은 입술을 달싹였다. 스물둘. 누가 봐도 꽃다운 청춘의 나이이지만, 한 번 놓았던 것을 다시 시작하기는 두려운 나이기도 했다. 장 교수는 한솔이 원한다면 해외에서 활동하는 제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노교수가 얼마나 한솔을 각별히 신경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여기에 진심을 다할 수 있을까?’
한솔은 매번 발레가 ‘취미’임을 강조해 왔다. 왜일까. 아마, 진심이 되는 게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진심이 되면 잘해야 하니까. 더 높이 올라가야 하니까.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너는 정말, 내 주변에서 가장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이거든.
-알아. 네가 엄청 열심히 했다는 거. 여기로 옮기고 나서 납득할 수밖에 없었지. 그만큼 넌 열심히 했으니까.
주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어쩌면… 이미 진심이었던 게 아닐까?
“고민해… 볼게요.”
한솔이 어렵사리 꺼낸 말에 장 교수는 그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솔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1년 뒤,
◯ petit_cotton
(런던 히드로 공항을 배경으로 한솔이 솜이를 안고 있는 사진.)
❤ ????
petit_cotton 런던 도착!! 솜이 픽업 완료! 솜아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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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한 오메가가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을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검은 정장의 여자에게 말했다.
『동일인이 맞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
『예. 약쟁이는 어떻게 할까요.』
여자는 붉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처리해.』
***
“에치!”
“한솔, 감기 걸린 거 아냐?”
장 교수의 제자이자, 로열 발레단의 솔리스트인 나연주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한솔은 연주의 걱정에 볼을 긁적이며 ‘누가 제 얘기 하나 봐요.’ 하고 배시시 웃는다. 연주는 한솔의 넉살에 부드럽게 따라 웃었다.
“자, 다시 해 보자. 아까 느낌 정말 좋았어. 한솔의 푸에테 턴은 정말이지 나도 감탄이 나올 정도야.”
“끙…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후후, 시작할까?”
장 교수가 채찍과 당근을 적절하게 섞은 스타일이라면 나연주는 당근을 마구 퍼부어 용기를 북돋는 스타일이었다. 안주하는 사람이라면 잘 맞지 않겠으나 한솔과 같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들 때까지 해내는 사람과는 꽤 상성이 좋았다. 한솔은 다시 연주의 지도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상으로 휴식기를 가지던 나연주의 삶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인연.
한솔의 배경을 처음 들었을 땐 연주는 부잣집 도련님의 취미 생활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이런 도련님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걱정이 컸는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한솔은 무척 성실했고 수업에 잘 따라왔다. 연주는 스승이 이 아이에게서 무얼 본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작은 알갱이같이 끊임없이 빛을 내는 반짝거림-.
한솔에게는 사람의 시선을 무섭도록 끌어당기는 힘 같은 것이 있었다. 가벼운 손짓 하나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끌리게 되는 태양 같은 에너지를 가졌다. 순하고 밝고 아름다우며, 조금은 천진난만한 아이.
‘사랑받고 자란 아이구나.’
연주는 한솔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다음 주에 보자. Happy new year.”
“Happy new year!”
한솔이 밝게 인사를 하자 두 사람이 넓은 연습실을 누비고 다닐 때 조용히 구석에 박혀서 촬영을 하던 윤건이 쭈뼛거리며 인사를 했다. 나연주는 독특한 조합의 두 사람에게 조심히 들어가라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말 한마디 안 하고 있으면 안 힘들어?”
“별로…? 그냥 내가 사람이 아니라 카메라가 된다고 생각하면 되거든.”
“…원래는 그게 힘든 거 아냐?”
“어, 그런가… 잘 모르겠어. 난 이게 적성에 맞아서 좋아.”
“감독님이 좋다면 된 거지만.”
“그,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윤건은 휴학을 했다. 원래는 자퇴를 하려는 것을 한솔의 만류에 설득당해 휴학으로 노선을 튼 것이다. 한솔이 영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하자 밀착 촬영을 하고 싶다면서 따라오기까지 했는데 그 과정에서 신우와의 1대1 상담을 거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았다. 평소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다. 역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이 있는 사람들은 초인이 되는 것 같다.
신우가 제대를 하면서 경호원과의 계약은 만료되었기 때문에 아마 신우는 자신이 없을 시간에 혼자 있어야 할 한솔을 생각해 윤건의 스토킹을 허락해 준 듯싶었다. 런던에서 옥스퍼드까지만 해도 약 1시간 거리고 아침 8시에 나가 오후 9시에 들어오는 일정이다 보니 한솔은 줄곧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침 운동 후에는 나연주와의 1:1 발레 수업, 오후에 솔이 산책을 갔다 온 뒤엔 머무는 호텔 근처에 있는 꽤 유명한 발레 아카데미에 가 저녁까지 수업을 들었다. 학원 규모라지만 매번 솔리스트 자리에 섰던 한솔은 코르드 무용수로서 감각을 익히는 게 무척 새롭고 즐거웠다.
‘혼은 많이 났지만….’
한솔은 혀를 살짝 빼내고 웃었다. 군무의 한 부품으로서 춤을 춘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오디션도 콩쿠르도 항상 내가 제일 돋보여야 했고 어떻게든 튀고 잘나 보여야 했기에…. 살아남는 게 경쟁이고 실력인 곳에서 나를 죽인다는 것은 뼈를 깎는 것처럼 어색하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덕에 한솔은 힘을 뺄 때는 빼고 확실히 줄 때는 주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연주 쌤은 이걸 보고 춤에 유연함이 생겼다고 말했다.
“아, 잠깐만 검사한다.”
영국 지하철도 탑승을 위해선 초커에 등록된 번호를 검사하기 때문에 한솔은 검사소로 향했다. 띡- 한솔의 목에 스캐너를 가져다 댄 역무원이 모니터를 확인하더니 슥 한솔을 훑어본다. 그는 평소보다 좀 오래 걸리는 검사 시간에 고개를 갸웃했다.
『등록증을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네?』
『근래 오메가 코드 도용 사례가 많아져서 검사 기준이 강화됐습니다.』
『아… 잠시만요. 여기요.』
검사소에서 약간 실랑이가 있는 것 같아 보이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솔에게 모여드는 것이 느껴진다. 그는 얼굴을 살짝 붉히곤 서둘러 지갑에서 등록증을 꺼내 역무원에게 건넸다.
‘그런데 원래 등록증을 검사하나…?’
뒤늦게 신우가 형질인 등록증은 함부로 타인에게 보여 주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지만 잘 모르는 타국이기도 했고 공공 기관이었기에 한솔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D-Ω101405」
한솔의 코드를 확인한 역무원은 등록증을 돌려주더니 ‘들어가도 좋다.’고 말했다. 왠지 모르게 역무원이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찝찝하고 불쾌했지만 대부분의 공공 기관 종사자들이 오메가를 보는 시선에 약간의 우월감이 서려 있다는 걸 알기에 한솔은 그 시선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역 안쪽으로 향했다.
“맞다. 나 내일은 숙소에서 편집해야 될 것 같아.”
“솜이가 아쉬워하겠네. 자기 찍는 거 엄청 좋아하는데. 그럼 신년은 각자 보내는 거야?”
“그, 그분이랑 같이 보내야지 너는… 혹시 어디 갈 생각이면 기념 사진 같은 거 찍어서 보내 주면 좋고….”
“Okay. 접수 완료!”
한솔은 윤건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호텔로 돌아왔다. 후다닥 마중 나온 솜이랑 잠깐 놀아 주고 룸서비스를 시켜 점심을 먹었다.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춤만 추다 보니 끼니를 거르면 신우한테 정말 크게 혼이 난다. 한솔은 정말 가벼운 족쇄였지만 신우에게 식사 보고를 하는 것도 좋아했다. 점심 인증 샷을 찍어 신우한테 보내자 30분쯤 뒤에 ‘맛있게 먹어.’ 하는 답장이 돌아왔다. 오늘도 신우는 엄청 바쁜 듯싶었다.
“솜아, 가자.”
왕!
하루 중 솜이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 시간. 코벤트 가든 역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보면 산책하는 강아지들을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영국인들이 얼마나 개를 사랑하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인데 문제는….
멍! 멍멍!
솜이만 떴다 하면 얘들이 갑자기 미쳐 날뛴다는 것이다. 끼익, 갑자기 멈추어 선 솜이가 애절한 눈으로 한솔을 올려다봤다. 그 눈빛이 꼭 ‘나 저기 가기 싫어…’ 하는 것 같았다. 인기견의 삶은 오늘도 피곤하다.
“알았어, 알았어. 저기 뒤로 가자.”
그래서 한솔은 그런 솜이를 위해 항상 공원을 빙 둘러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길을 찾아 산책했다. 아직 크리스마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거리의 모습. 12월의 런던은 정말이지 휘황찬란하고 반짝반짝거린다. 멀리서 거대한 시계탑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빅벤이다. 주변으로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은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 타국이란 점을 여실히 느끼게 만들었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구경하며 한솔은 입김을 호- 불었다. 몽글몽글한 연기가 하얗게 피어올라 사라졌다.
“내일은 밖에서 저녁 먹자고 할까….”
여기에 놀자고 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말인데 기분을 내고 싶었다. 솜이가 킁킁거리며 허공에서 냄새를 맡는다. 좋아하는 눈 냄새라도 맡은 걸까? 한솔은 솜이의 부드러운 털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집에 갈까?”
왕!
풍성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한솔은 눈꼬리를 휘며 작게 웃었다.
“내일?”
신우가 호텔로 돌아온 시간 9시 10분. 좋아하는 체향이 은은하게 묻어나는 코트를 품에 꼭 안으며 한솔이 내일 일정을 물었다. 신우는 잠시 침묵했다.
“7시 정도면 시간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응.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한솔이 환하게 웃었다.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예약이 될까 싶었는데 퍼스널 룸 고객들에게만 개방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한솔은 자본주의 사회 만세를 외쳤다.
“내일은 뭐 할 거야?”
“주말이니까… 운동 갔다가 마사지 받고 솜이 산책?”
가운을 걸친 신우가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냉동실 문을 열어 얼음통을 꺼낸 신우는 하루 동안 열심히 얼려 놓은 얼음들을 버킷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욕실로 향하는 신우의 뒤를 한솔은 졸졸 쫓아갔다.
“읏, 차가….”
와르르-. 발 위로 쏟아지는 얼음들에 한솔은 움찔 몸을 떨었다. 하루 종일 발끝으로 서고 돌고 점프하고-. 발이 안 상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관리는 필수였다. 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솔이 30분 정도 얼음물 찜질을 하는 동안 신우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욕실을 나와 발 마사지를 해 준다. 알파의 커다란 손바닥이 발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윽고 적당히 탄력 있는 손끝이 발바닥을 꾹꾹 누르는 느낌에 한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많이 뭉쳤네.”
“…….”
“속상하게.”
침대에 반쯤 누워 신우의 허벅지에 발을 올리고 있던 한솔은 자신의 허리 부근에서 엎드려 있는 솜이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나, 너무 제멋대로지….”
“…….”
“안 한다 했다가 한다 하구….”
그러자 발바닥을 적당히 힘주어 주무르던 손길이 멈칫했다.
“이럴 때 혼내야 되는데.”
폭신폭신한 솜이의 등을 느리게 쓰다듬던 한솔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러자 자신을 만지는 손길을 즐기고 있던 솜이가 무슨 일이냐는 듯 한솔을 돌아본다. 한솔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솜이를 다시 쓰다듬었다.
“말했잖아.”
“…….”
“나 나쁜 놈이라고.”
“…!”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니까-.”
한솔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동시에 발바닥의 오목한 부분이 꾸우욱- 짓눌렸다. …흣! 한솔이 작게 앓는 소리를 낸다. 신우는 그 부분을 달래듯 느릿하게 문질렀다.
“이해했지?”
“…으응.”
한솔은 붉게 달아오른 뺨을 가리기 위해 솜이를 들어 올려 꼭 안았다. 그리고 마사지를 받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한솔의 몸을 침대에 가지런히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준 신우는 한솔의 이마에 쪽- 느리게 입술을 맞춘다. 주인의 옆자리를 차지한 채 눈을 감고 있던 솜이가 눈을 뜨자 신우는 솜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뒤 불을 껐다. 끼이익, 방문이 닫혔다. 커튼 사이로 어슴푸레 비치던 달빛이 새벽의 어둠 속에 잠겼다.
그리고 마침내,
12월 31일. 스물셋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Jung woo Kwon, Piano Recital in London」
한솔은 자신의 SNS에 흘러들어 온 포스터 한 장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권정우우ㅜ우!!!
이거 뭐야!
(리사이틀 포스터 사진)
너 런던까지 와 놓고 말을 안 해?!
진짜 이번에도 답장 안 하면 차단한다!!!
/messsage*i/
한솔이 아침부터 씩씩거리며 핸드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 뒤늦게 정우에게서 답장이 왔다.
/messsage*you/
권막내
그렇게 됐다.
/messsage*you/
“그렇게 되기는 뭘 그렇게 돼!”
한솔은 시리얼을 우적우적 씹으며 열심히 정우를 몰아세웠다. 정우는 몹시 귀찮은 듯 느리게 답장을 했지만, 일단 답장이 온 것만으로도 한솔은 만족했다.
/messsage*you/
일정 끝난 거야? 또 안 해?
권막내
어
(펑펑 우는 강아지 이모티콘)
비행기 언젠데
권막내
모레
다른 일정 있는 거 아니지??
그럼 오늘 만나
꼭!! 꼭이야!!!
/messsage*you/
한솔은 정우에게서 마지못해 수락을 받아 놓고 뿌듯하게 웃었다. 아차, 신우한테 말해야지. 한솔은 다시 경쾌하게 톡톡- 핸드폰을 두들기고선 오늘 일정을 확인했다. 음… 솜이 산책 시간이랑 겹치네. 솜이 데려가도 되겠지? 정우에게 솜이의 얼짱 사진을 보내며 물어보니 ‘맘대로 해라’ 하는 답장이 돌아왔다. 얘, 귀찮아서 대충 보내는 것 같은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던 한솔이 신우에게 새로운 답장이 오자 다시 히히거리며 핸드폰을 만졌다. 솜이는 하루에도 열 번은 기분이 변하는 것 같은 주인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비가 오려나.”
솜이를 데리고 막 호텔을 나섰던 한솔은 우중충한 런던의 하늘을 보고 끙, 앓았다. 원래도 맑은 날이 적은 도시긴 하지만… 목욕을 싫어하는 솜이의 특성상 비가 오는 날엔 될 수 있으면 실외 산책을 피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얼마나 난리를 치는지 한번 목욕을 하려면 기본 두 시간은 잡아야 한다. 게다가 그 끝은 항상 워터 파크 엔딩이었으니….
어찌할까-. 고민하던 한솔은 산책이 고파 헥헥거리는 얼굴로 한솔을 올려다보는 솜이를 보며 결국 같이 나가기로 결정했다. 신년이니까 목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솜이가 들었다면 절대 아니라고 왕왕 짖었을 생각을 하며 한솔은 솜이의 보폭에 걸음을 맞췄다.
“사람 진짜 많다.”
원래도 유동 인구가 많은 도시지만 12월 31일의 런던은 정말이지 어디를 가도 사람이 있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결국 솜이를 품에 안고 이동하기 시작한 한솔은 ‘이럴 거면 그냥 호텔에서 만날 걸 그랬나…’ 하고 잠시 후회했다. 솜이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한솔의 품에 꼭 안겨 있으려 들었다. 톡톡 튀는 연말 분위기와 거리의 악사들이 들려주는 노래들은 정말 즐거웠지만, 그냥 잠시라도 빨리 권정우와의 약속 장소로 가는 것이 나을 듯했다. 한솔은 낯선 페로몬이 유혹하듯 질척하게 달라붙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 버리곤 자리를 떠났다.
‘이런 길이 있었나…?’
그런데 자꾸만 달라붙는 무례한 페로몬-보통, 저런 식의 페로몬은 자기 파트너를 두고 하룻밤 자자는 뜻이다.-을 피해 걷다 보니 조금 생뚱맞은 장소로 와 버렸다. 마치 슬럼가의 일부분처럼 을씨년스럽고 텅 빈 골목. 그 유명한 런던의 동쪽, 이스트 런던으로 와 버린 건가 싶어 한솔은 당혹스러웠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권정우와의 약속 장소가 근처긴 했다. 아무래도 골목을 잘못 들어온 듯싶어서 한솔은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뒤를 돌았다. 그리고 품 안에 있던 솜이가 드물게 이를 드러냈다.
으릉….
“왜 그래, 솜아?”
한솔이 눈을 깜박이며 솜이를 불렀다. 솜이의 흥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긴 왜 이렇게 조용하지? 솜이를 부르던 한솔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퍼레이드로 시끌벅적한 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쉬… 괜찮아… 착하지.”
어떻게든 솜이를 달래며 한솔은 무작정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제자리에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갈수록 점차 많아지는 뜻을 알 수 없는 벽의 낙서들. 붉은 페인트로 마구 갈겨 그려진 그라피티-. 심장이 쿵, 쿵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나타난 갈림길-.
한솔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느긋한 걸음을 흉내 내며 걷다가 갈림길이 나타나자 한순간에 튀어 나갔다. ……!!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자재 더미가 보이자 그 밑으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평범한 성인이라면 안 될 것 같은 크기의 홈이었으나 다행히도 유연한 몸이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혼자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조용했던 거리에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한 명이 아니야.’
뚝-. 회색 바닥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솔은 흥분감을 감추지 못해 자꾸 으르렁거리려는 솜이와, 비가 오기 시작한 상황-, 상대가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결단을 내렸다.
근처에 권정우와의 약속 장소가 있다. 한솔이 직접 그곳까지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저는….
-…….
-온다에 걸게요.
그 아이가 자신을 찾으러 올 거라고 믿었다.
-정우는 착한 애거든요.
한솔은 어렸을 적 체육관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떨리는 손을 꿈 움켜쥐었다.
“솜아, 형이랑 숨바꼭질할까?”
…….
“형이 먼저 술래할게. 알겠지? 잘 숨어 있어야 해.”
그렇게 속삭인 한솔은 조심스럽게 자재 더미에서 빠져나왔다. 다행히도 추격자들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한솔은 솜이가 들키지 않도록 자재 더미로 잘 가린 다음 골목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곧, 추격자들이 한솔의 존재를 눈치채고 따라붙기 시작했다.
낑….
쏴아아-. 런던의 회색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한솔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자재 속에서 엎드리고 있던 솜이의 인내심도 거기서 끝이 났다. 비 냄새를 타고 솜이가 가장 좋아하는 향기가 진하게 맡아졌기 때문이다. 킁킁-. 젖은 바닥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던 솜이가 자재 밑에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 향기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외롭게 걷기 시작했다.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벌써, 5번째. 권정우는 약속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상대방 탓에 와락 미간을 구겼다. 설마, 지금 이 시간까지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애초에 비가 아무리 와도 우산 같은 걸 쓸 생각이 없는 이 알파는 건물 아래에 들어와서야 눌러썼던 모자를 벗었다. 물방울이 맺힌 은색 피어싱이 반짝인다. 그는 젖은 머리를 가볍게 털고선 어찌할까 고민했다.
“…?”
그런데 반대편 골목에서 비에 쫄딱 젖은 볼품없는 개 한 마리가 비틀비틀 걷다가 바닥에 풀썩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인상을 설핏 찌푸린 권정우가 손목의 시계와 주변을 한 번 보며 짧게 혀를 찬다. 여전히 엎드려 있는 짐승. 그는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감촉을 만지작거리며 개에게 다가갔다.
“야, 이거나 먹어라.”
어차피 원래 주려 했던 개새끼는 오지 않을 모양이니… 다른 놈에게 줘도 되겠지. 그는 다소 심술궂은 생각을 하다가 멈칫했다. 권정우의 눈에 볼품없는 개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던 탓이다.
/messsage*i/
이상한 놈
우리 솜이!
엄청 귀엽지? 응? 얼른 귀엽다 해
/messsage*i/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상당히 볼품없고 비에 쫄딱 젖어 원형을 찾기 힘들었지만… 그 목에 걸린 인식표만큼은 익숙했다.
「솜???? 연락처 : 010-XXXX-XXXX」
권정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messsage*i/
이상한 놈
솜이 인식표도 바꿨다? 예쁘지
절대 안 잃어버릴 거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잃어버리면 누구라도 꼭 연락줬으면 좋겠어
/messsage*i/
‘절대 안 잃어버리겠다더니.’
아무리 연락을 씹어도 꿋꿋이 소식을 전해 오는 이상한 놈. 권정우는 이렇게 집요한 놈을 인생에서 처음 만나 봤다. 그리고… 이렇게 안 잊히는 놈도 처음이었다.
“너는 주인을 어디다 잃어버리고 여기 있냐.”
그는 엎드려 있는 개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아르릉거리며 꼭 제 주인같이 성질을 내던 놈이 귀를 쫑긋하더니 다시 몸을 일으켰다. 비척비척-.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퍼붓고 있는데도 마치 어디로 가야 할지 알겠다는 것처럼 줄곧 시선이 앞을 향해 있는 놈. 그는 개의 목덜미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기다려. 다시 전화해 볼 테니까.”
뚜르르- 신호음이 간다.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이한솔이, 그렇게 자랑을 해 대던 제 개새끼를 길바닥에 두고 그냥 갈 성격이던가?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같은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그 무미건조한 음률을 듣는 권정우의 생각은 180도로 달라졌다.
“하….”
그는 결국 개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투둑- 툭…. 빗방울이 뚜렷한 이목구비를 타고 흘러내렸다. 어느새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개의 모습을 바라보던 권정우는 결국 성큼성큼 개에게 다가갔다. 이번엔 두 손으로 개를 들어 올리자 놈은 왜 자꾸 방해하냐는 듯 정우의 손가락을 앙앙 물어 댔다. 그는 츳, 하고 혀를 찼다.
“남의 밥줄 물지 말고 안내나 해.”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며 말했다. 어둑한 음영 아래에 남자의 눈이 번뜩였다.
깜박-.
뿌옇게 안개가 꼈던 머릿속이 일순간 환해졌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한솔은 힘겹게 눈을 떴다.
“…….”
엄청 화려하게 생긴 방이네….
눈을 뜨면 낡은 창고 같은 데에 있을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다.
적어도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어디 외딴섬 같은데 팔아먹을 건 아닌가 보다고 한솔은 애써 생각했다. 손발이 묶여 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프로의 솜씨다.
‘신우야….’
손끝이 차갑다. 어렸을 때부터 납치 교육을 받긴 했지만 살면서 진짜 납치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딨을까. 공포감 때문인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심호흡을 해 보지만 몸의 떨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달칵-.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한솔은 얼른 눈을 감고 기절한 척을 했으나 평소와 달리 몸을 컨트롤하는 게 마냥 쉽지는 않았다. 끼이익-. 무언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털썩-. 그리고 한솔의 앞에 누군가 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결국 흐느낌을 참지 못하고 작게 몸을 떨었다.
『귀여운 아이야. 그렇지?』
낯선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는 게 싫어서 몸을 움츠리자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독한 냄새… 싫어….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솜이를 폭 끌어안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알파한테 안겨서 위로받고 싶었다. 쌉싸름한 천년 나무의 향을 맡고 싶었다. 한솔의 눈꼬리에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솜이는 괜찮을까, 여기는 길도 잘 모를 텐데… 아직도 밖을 떠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이야, 중동에서 오신 귀하신 분이 널 사 가기로 했단다.』
“…….”
『마침, 마른 동양인 오메가를 찾고 계셨거든. 너는 13번째 첩이 될 예정이지.』
…소름이 쫙 끼쳤다.
『데려가서 씻기고 준비시켜.』
『예.』
누군가 자신을 들어 올리려 하자 한솔은 눈을 뜨고 거칠게 반항했다. 하지만 상대는 프로였고 몸이 묶여 있는 한솔의 반항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침실-. 엔틱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 끝을 잘근거리던 여자가 부하에게 묻는다.
『내일 비행기라고.』
『네, 아무래도 날씨 탓에 움직이길 꺼리는 것 같습니다.』
『쯧, 세탁도 안 된 상품을 내놓으라고 아주 지랄을… 흔적은 제대로 지운 게 맞겠지?』
부하는 상대가 인간인 이상 찾지 못할 거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여자는 피식 웃는다. 상품을 옮기는 과정에서 하필이면 망나니 아랍 왕자에게 들킨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상품들을 험하게 다루고 자주 갈아 치운다는 것만 빼면 괜찮은 거래 상대긴 했다. 뭐, 어떤 의미에선 최고의 손님이긴 하지. 그만큼 회전율도 높고 배포도 큰 손님이니 특상품을 먼저 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이번 거래의 대가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과 공화당 윗선과의 연줄을 챙겼으니 나름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상품이 반항이 심한 것 같습니다. 어찌할까요.』
여자는 한솔이 끌려간 욕실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까칠한 게 왕자의 취향이니 너무 기죽이지 말고 발정기 약을 맞추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무심한 목소리였다.
“으읍…!!”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한솔을 억지로 침대에 눕히고 수상한 주사기를 팔뚝에 꽂아 넣었다. 제압당한 한솔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한테…, 뭘 놓는 거야….’
발목을 묶었던 줄은 풀렸지만 재갈과 손목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목에 초커가 채워졌다. 한솔이 쓰던 게 아닌 건 분명한데 뻣뻣한 가죽의 감촉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촤르륵-. 초커에 연결된 얇은 은색 사슬이 침대 기둥에 묶이는 모습을 보며 한솔은 슬금슬금 침대 구석으로 가 몸을 숨겼다. 검은 정장들이 강제로 입힌 이상한 원피스 같은 옷 탓에 무릎을 모으지 않으면 밑이 휑했다.
‘신우 보고 싶다….’
침대 주변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화려한 촛대에 불을 붙인 정장이 방을 나가자 한솔은 넓은 방 안에 혼자 남게 되었다. 가족도 솜이도 너무 보고 싶었지만 그중에서도 신우가 가장 보고 싶었다. 가지런히 모은 무릎에 얼굴을 기댄 상태이던 한솔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가고 싶어… 너무, 너무 무서워… 신우야….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지고 싶지 않았기에 당당했으나 그건, 결국 자신을 보호해 주는 울타리가 있기에 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흐….”
시간이 흐를수록 한솔의 몸은 점차 비이상적으로 뜨거워져 갔다. 재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더운 숨-.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이 후두둑 침대 위로 떨어진다. 일그러진 시야의 틈새로 여러 물건의 잔상이 뒤섞여 보였다. 기둥이 두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나고 촛대의 초가 세 개인지 여섯 개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사치스러운 샹들리에의 빛이 흐릿하게 번지는 것과 동시에 세상의 경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뭉개지는 세계- 수채화 물감이 흩뿌려진 세상에 빗물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
한솔은 직감적으로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웅크린 몸으로부터 폭발적으로 퍼져 나가는 매화 향기-.
사치의 향락 속에서 고아한 향기가 만발했다.
히트 사이클의 시작이었다.
탁 탁 탁, 탁-!
쾅!!
“하아, 하아….”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전화를 받고 달려온 신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케이지 속에서 시무룩하게 귀를 접고 있던 솜이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벌떡 몸을 일으킨다. 신우는 권 이사의 수족인 한 실장과 그 부하들, 그리고 홀로 소파에 앉아 있는 권정우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권정우가 솜이를 발견한 시각은 오후 다섯 시 반.
그리고 권정우의 연락을 받은 권범진이 사람을 풀어 한솔의 흔적을 추적한 뒤, 신우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 한 시간 전의 일이다. 신우가 물었다.
“한솔이는-.”
“몰라.”
문간을 짚고 있던 신우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으로선 흔적도 없어. 마치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린 것처럼.”
12월 31일. 런던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디를 가도 인파가 들끓었고 그 상태에서 특정 인물을 기억해 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다행히도 특유의 비주얼 탓인지 하얀 강아지를 품에 안고 돌아다니던 연갈색 머리의 동양인을 기억하는 목격자가 몇 있긴 했지만… 그게 한솔인지는 확신할 수 없을뿐더러 그 인물은 이스트 런던 쪽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연기가 증발해 버린 것처럼. 아주 깨끗하게 말이다.
“너무 흔적이 없으니까 수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확인할 방법은 없지.”
“…….”
“…시간도 없고.”
납치 추정 시각은 한솔이 호텔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오후 3시 반에서 권정우가 솜이를 발견한 오후 5시 반 사이.
현재 시각은 오후 6시 반. …어쩌면 늦었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범인 쪽에서 연락 오거나 한 건?”
“…없어.”
“단순 납치가 아니란 건데.”
답답함에 거칠게 넥타이를 잡아당긴 신우가 정우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솜이가 붕대를 감은 발로 철장을 툭툭 치며 낑낑거린다. 신우는 케이지 문을 열어 솜이를 꺼냈다. 솜이는 신우의 소매를 입으로 물더니 자꾸만 어딜 가자는 것처럼 잡아당겼다.
“…솜이가 카지노 쪽에 자꾸 관심을 보였다고.”
“어.”
“얘가 왜 거길 가려 한 거지?”
“내가 알아? 개가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두 알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한솔이라는 매개체가 있기에 어울렸던 관계인 만큼 그 존재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졌다. 신우는 깍지 낀 손에 이마를 기댄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게 한솔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인내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 조용히 들어온 부하에게 무언가를 전달받은 한 실장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현재 그 카지노에 두바이의 5번째 왕자가 귀빈으로 있다고 합니다.”
“…5번째라면 두바이 왕의 골칫거리라는 그 왕자 말입니까?”
“예. 영국에 오면 항상 들렀던 곳이라고 하는데 그 왕자가 조금 수상쩍은 말을 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서늘한 빛의 눈동자가 스르르- 반개했다.
“‘…마치, 어린 왕자라도 된 기분이야. 설렘을 감출 수가 없군. 아주 귀여운 여우를 찾았거든-.’이라고 했다는군요.”
팔짱을 낀 상태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정우가 눈을 떴다. 동시에 굽어 있던 신우의 등이 곧게 펴진다.
“일전에 제안했던 리조트 사업,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죠.”
“검토로는 부족한데. 나는 확신 없이는 일을 안 하거든.”
대답한 상대는,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권범진이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천성의 이미지를 망치는 건 곤란합니다. 리스크가 너무 커요.”
“알아. 그러니까 도박 이미지는 해연이 뒤집어쓰겠다는 거 아닌가. 하늘 높으신 분들은 투자 좀 하고 돈놀이나 하라 이거지. 국내 카지노 법을 바꿀 수만 있다면 같이 돈방석에 앉는 거고. 윈윈 아니겠어.”
“…대놓고 돈세탁을 하겠다는 걸 정부가 봐줄 것 같습니까.”
“이쪽 힘으로 안 되지만, 흠… 유 회장님 정계 인맥이 꽤 대단하신 걸로 아는데.”
권범진이 권정우가 앉아 있던 소파 쪽에 털썩 앉자 정우의 얼굴이 대놓고 찌푸려졌다. 협상은 계속됐다.
“또, 사랑하는 막내 아드님을 위해서라면 5선 의원님께서도 나서 주시겠지. 안 그런가?”
결국, 상대적으로 마음이 급한 신우는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확답은 못 드립니다.”
“…….”
“하지만 약속은 드리죠. 제가 일선에 있는 이상.”
“…….”
“천성은 이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비로소, 권 이사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좋아, 파트너. 왕자는 아직까지 블랙잭을 즐기고 있다고 하는군. 무려, 7시간째지. 감시자의 말론 당장은 테이블을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다만, 그리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겠지.”
“…한솔이가 그쪽에 있는 게 확실합니까.”
“글쎄. 이쪽 정보원으론 ‘동양인 상품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부라고 말해 두지.”
“…….”
“한 번 믿어 보는 게 어때. 때로는 인간보다 짐승의 감각이 더 예리할 때가 있거든.”
신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솜이에게로 향했다. 까만 눈동자가 호소하는 눈빛으로 신우를 올려다본다.
“…카지노 내부 도면입니다.”
결국 판단을 마친 신우가 눈짓하자 소파 뒤쪽에 자연스럽게 서 있던 정 비서가 들고 있던 패드를 권 씨 형제 쪽에게 잘 보이도록 놓아주었다.
“해커가 실력이 좋은데.”
권범진에게 대략적으로 상황을 들은 순간부터 신우는 정해선에게 연락해 한솔의 위치 추적과 카지노에 대한 정보를 구하도록 지시했다. 한솔의 핸드폰과 초커에 부착된 위치 추적기는 방해 장치가 있는지 신호가 잡히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신호가 끊긴 지점과 이동 경로를 보아 그 카지노와 연관성이 꽤 높다는 전문가의 분석이 나왔다.
문제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교차 검증은 필수였고 더불어 조력자를 구할 필요성도 생겼다.
“시간이 부족해서 완벽한 도면은 아닙니다. 해킹한 CCTV 화면을 토대로 대략적으로 그려진 거고 여기서 비어 있는 부분이 수상한 장소일 확률이 높죠.”
“일리 있군.”
범죄 조직을 상대할 때는 같은 범죄 조직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 법.
두 사람이 어느 루트로 침입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정우가 몸을 일으켰다.
“도련님…?!”
권정우는 한 실장의 허리춤에서 자연스럽게 권총을 뽑아 들더니 곧장 방을 나가 버렸다. 그 모습에 신우는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안 말립니까.”
“실전 한 번은 겪어 봐야지.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전부터 생각했지만 꽤 이상한 형제 관계였다. 권범진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하자 유신우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솜이가 든 케이지를 든 비서가 뒤를 따랐다. 남자가 물었다.
“직접 갈 건가.”
그는 헐겁게 풀어졌던 넥타이를 꽉 조이곤 말했다.
“그 아이를 찾는 건 내 일입니다.”
그건 어쩌면 다짐과 같노라고- 남자는 생각하며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본업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루트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거라면 곤란한데.”
막 닫히려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입을 열자 정우는 대놓고 성가시다는 얼굴을 했다. 신우는 아랑곳 않고 등을 돌린 채 엘리베이터에 탔다.
“…….”
“…….”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리베이터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서 있던 정우는 우성의 표본 같은 알파의 뒷모습을 힐긋 바라보곤 모자를 눌러썼다.
띵-.
“권정우.”
문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상대가 갑자기 왜 자신을 부르는지 알 수 없어 인상을 찌푸리자 알파가 말했다.
“도와줘서 고맙다.”
…정말 쌍으로 이상한 놈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무슨 소란이지?』
『죄송합니다. 위층에서 손님 한 명이 난동을-.』
인생을 건 도박이 오가는 카지노에선 매일같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렇기에 가드들이 있는 것이고 분명 관리자가 신경 쓸 필요는 없는 사소한 일일 텐데-.
『진정이 안 되는군.』
예상외로 소란은 오래갔다. 여자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검은 정장은 위층에서 내려온 정보원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달받고 다시 여자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자살 소동이라 합니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어 제압이 쉽게 되지 않는 듯합니다.』
『…짭새들이 눈치채진 않았겠지.』
『예. 통제는 잘 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도박만 하는 평범한 카지노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자는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다. 여자는 좀 더 인원을 추가해 확실하게 제압해서 쫓아낼 것을 명령하곤 지금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손님에 대해 물었다.
『왕자는 어떻게 됐나.』
『꽤 취한 상태라 판에서 좀 더 굴리고 방으로 보내질 듯합니다.』
『딜러들에게 중요한 손님이니 적당히 빼먹으라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와인을 따르려는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 급하게 노크를 하고 들어온 다른 검은 정장이 여자에게 말했다.
『언더 보스…! 습격입니다!』
『…어느 패밀리지?』
『살레아노 패밀리로 추정됩니다!』
『하… 쥐새끼 같은 놈들이…』
쨍그랑…! 여자가 와인 잔과 병을 밀쳐 버리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녀가 방을 나서자 따라붙은 검은 정장들 중에서 가장 앞에 있던 여자가 말했다.
『소란을 눈치챈 노숙자들이 안으로 침입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 틈을 타 살레아노가-.』
『그 돈도 없이 도박에만 미친 것들이 무슨 생각이 있어 그랬을까. 분명 살레아노가 뒤에서 일을 꾸몄을 가능성이 커. 가드들 모아서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부터 막으라 해!』
“미끼를 물었나?”
“네. 다행히 살레아노가 시간 내에 움직여 줬습니다.”
“좋아. 어차피 그쪽도 진짜로 믿는 건 아닐 거다. 워낙 알아주는 앙숙이니 자존심 때문에라도 움직인 거겠지…. 정찰용 말단들일 테니 너무 빨리 후퇴하지 않도록 중간에 애들 넣어서 적당히 깽판 치도록 해.”
남자는 담배를 바닥에 떨구곤 구둣발로 짓이기며 말했다.
“‘금고 털이’ 쪽은.”
“문제없습니다.”
“깊숙이 들어가진 말고 CCTV 앞에서 흔적만 남기고 빠져나오라고 전해. 어차피 가드만 움직이면 되는 거니.”
“예.”
탁-.
소란스러운 바깥과 달리 기계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쓰레기 처리장.
[CCTV 해킹 완료. 움직이시면 됩니다.]
그곳에 두 알파가 나타났다.
“…….”
상주 인원이 거의 없는 쓰레기 처리장을 수월하게 통과한 둘은 미리 봐 둔 통로를 통해 카지노 내부로 들어왔다. 구조 팀은 총 5팀으로 각자 다른 통로로 내부에 침입해 한솔이 있을 장소를 찾는 것이 목표였다.
카지노 직원들을 피해 벽에 기대 숨어 있던 신우는 어쩐지 한솔의 목소리를 들은 듯한 기분에 잠시 멈칫한다. 정우가 ‘안 가고 뭐 하냐’ 하는 시큰둥한 눈빛을 보내고 나서야 그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침입자….』
『…금고 쪽으로 이동….』
운이 좋게도 작전이 잘 통했는지 가드들의 수가 많이 줄어든 것이 보였다. 그러나 장소가 장소인 만큼 그들이 있는 지하 2층에는 여전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사람들이 좀 더 많이 모여 있는 테이블 구역을 지나쳐 한산한 휴게실이 있는 구역으로 와서야 두 사람은 한숨을 돌렸다. 대체 이 넓은 곳에서 어딜 가야 한솔을 찾을 수 있을지 조금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들…리, 십니까…!]
그런데 갑자기 각각의 귀걸이와 피어싱으로 위장한 무전기에서 뚝뚝 끊기는 상태의 음성이 들렸다. 다급한 음성에 이상을 알아차린 신우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그때-.
콰앙-!!
『꺄아아악!』
『뭐야? 무슨 일이야?!』
폭발음과 함께 지상과 달리 차분했던 VIP층에도 소란이 일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무장 강도들입니다! 지하 1층에서 화재 발생!]
엎친 데 덮친 격인 상황에 두 알파의 시선이 마주쳤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정우는 일진 한번 끝내준다며 혀를 찼다.
카지노가 소란스러운 틈을 타 ‘진짜’ 강도들이 침입했다는 소식에 작전이 긴급 변경됐다. 타 패밀리와의 분쟁 소식에도 움직이지 않던 가드들마저 폭발음과 총소리에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것이 느껴진다. 영국은 총기 소지가 금지된 국가다. 한 마디로 정말 제대로 준비된 ‘한탕’이었다.
“…일단은, 좋은 것 같군.”
두 알파는 혼란을 틈타 몸을 움직였다.
본래라면 가드가 막고 있어야 할 지하 3층으로 가는 계단이 뻥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해커의 말을 빌리자면 CCTV조차 존재하지 않는 ‘암흑 구역’이었다. 한솔이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 원래 작전대로라면 다른 팀이 혼란을 일으킨 틈을 타 침입하는 것이었지만 그럴 이유가 없어졌으니 두 사람은 곧장 계단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
핑-!
등 뒤에서 날아온 총알에 신우의 뺨에 붉은 생채기가 났다.
***
『왕자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잠자리를… 꺅…!』
『아…… 시끄러워… 그만 꺼져-.』
5왕자를 부축해서 들어오던 여자와 남자는 장식용 도자기를 붙잡고 휘두르는 왕자 탓에 비명을 지르며 방을 나갔다. 왕자는 귀찮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도자기를 던져 버린다. 두꺼운 카펫이 깔린 바닥에 부딪힌 도자기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체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휘적휘적 침대로 향하던 왕자의 눈에 기둥에 묶인 은색 사슬이 들어왔다. 술에 취해 게슴츠레해진 눈을 하던 왕자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여우를 하나 샀지, 참.』
왕자는 침대 밖으로 이어지는 사슬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내 귀여운 여우가 여기 있나?』
사슬이 닿는 길이까지 최대한 피신해 있던 한솔이 몸을 웅크리며 떨었다. 상대는 베타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방 안을 꽉 채우고 있는 페로몬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탁-.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멈춘 한솔이 떨리는 눈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흡…!”
거칠게 머리채가 붙잡혀 강제로 침대로 끌려갔다. 한솔은 내던져지듯 침대 위로 쓰러지게 되었다.
“으으읍, 읏…!”
이러지 말아 달라고 펑펑 울며 고개를 젓는 한솔의 턱을 붙잡은 왕자가 마치 상품을 품평하듯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오메가의 얼굴을 요목조목 살핀다. 그리고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오메가는 그의 취향에 쏙 맞았다. 정성 들여 보살핌을 받은 것처럼 잘 가꿔진 아름다운 외모와 꾸준한 관리와 노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완벽한 라인의 몸.
사람의 음심을 본능적으로 자극하는 구석이 있는 존재다.
무엇보다 우는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 왕자의 눈에 검붉은 빛의 가학심이 깃들었다.
“흐, 읏….”
오메가의 사슴같이 가녀린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쥔 왕자가 마치 으스러트릴 것처럼 힘을 가했다. 그건 정말 상대 따윈 안중에도 없는 폭력적인 손길이었다. 브컨은 물론이고 위험 요소가 극히 적은 플레이를 할 때도 끊임없이 한솔을 살피고 지켜보던 신우와는 명백히 다른 손길이었다. 한솔은 울음을 삼켰다. 알 수밖에 없었다. 이 손은 한솔을 철저히 ‘물건’으로만 대하고 있었다. 그는 목에 가해지는 압박에 꺼질 듯 연약한 신음을 흘리며 보고 싶은 이의 이름을 불렀다.
‘신우야….’
눈가에 고여 있던 물기가 뺨을 타고 또르르, 굴러떨어진다.
눈을 질끈 감은 한솔은 자신을 억압하려는 베타를 피해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건 한솔에게는 지극히 익숙한 동작이면서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형태였다.
무릎을 살짝 구부리는 가벼운 플리에에서 발끝을 하늘 높이 차 오르는 바뜨망….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연계
그리고-.
퍽…!!
살벌한 소리와 함께 한솔을 위에서 짓누르고 있던 왕자의 몸이 그의 위로 풀썩 쓰러졌다.
***
“좋기는 씨발!”
저 자식들 왜 이쪽으로 오냐고 욕지거리를 뱉은 정우가 기둥 뒤에 숨더니 망설임 없이 총을 꺼내 복면을 쓴 검은 괴한의 다리를 향해 쐈다.
“큭!”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격이었다.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당황한 괴한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 대기 시작한 것을 보고 두 사람은 다시 엄폐한다. 저쪽도 총알이 날아올 줄은 몰랐는지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정우가 물었다.
“야, 너. 총은 쏠 줄 아냐?”
신우가 권총을 장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잉! 핑! 그들이 숨어 있던 곳에 있는 넓은 금속 장신구에 총알이 부딪치는 것을 보고 정우는 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없었다. 지금 지체하는 1분 1초가 구출의 골든 타임이 된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저 자식 저쪽으로 유인할 테니까, 구하든 말든 알아서 해.”
“너, 잠깐….”
“미친놈아 한 가지만 해. 네 그 이상한 양심인지 윤리인지는 알 바 없으니까 이한솔만 생각하라고. 둘 다 뒈지고 싶냐?!”
정우는 기둥 뒤에서 뒤쪽 상황을 살피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 결국 멈칫한 신우는 입술을 짓씹고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우가 작게 보이는 틈새로 바닥을 향해 총을 탕- 갈기자 놀란 괴한이 그쪽으로 돌아보며 총을 쏜다. 정우는 그사이에 엄폐물을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한 박자 늦게 정우를 발견한 괴한이 총을 쐈다. 핑-! 팔을 스치고 지나간 총알에 이를 악문 정우가 코너를 돌았다. 괴한이 그를 쫓아 사라졌다.
“…….”
결국 홀로 남은 신우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신우야….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유신우는 맡아지지 않는 그리운 이의 향기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
여전히 가녀린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을 꼭- 감고 있던 한솔은 수 분이 지나도 반응이 없는 왕자에 이상함을 느끼고 살며시 눈을 떴다.
“…?”
왕자는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한솔은 너무 당황해서 눈을 깜박깜박거렸다.
‘뭐, 뭐지…?’
일단 자신의 맨 엉덩이를 움켜쥐고 있는 손이 너무 징그럽고 싫어서 한솔은 왕자를 발로 밀치고 몸을 뒤로 물렸다. 몰랐는데 왕자의 몸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피가 묻은 자신의 발등과 왕자를 번갈아 보던 한솔은 고운 미간을 찌푸리곤 하얀 시트에 발등을 마구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눈치를 보다가 기절한 왕자를 피해 침대에서 후다닥 내려왔다.
‘더워….’
목뒤에서 식은땀이 뚝, 떨어져 내렸다. 자연스럽게 온 히트 사이클이 아니라 그런지 당장에라도 알파의 정액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성이 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만큼은 차근차근 준비를 위해 달아오르고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던 한솔은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과 기둥에 연결된 사슬을 어떻게 풀지 궁리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도자기 조각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문제는 사슬의 길이에 비해 조각과의 거리가 꽤 멀다는 것에 있었다. 도자기 조각이 있는 자리와 최대한 가까이 기어간 한솔은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풀 때처럼 다리를 수직으로 펼쳤다. 그리고 발레의 포인 동작을 하듯이 발끝을 한껏 구부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아…!
마침내, 안간힘을 쓴 끝에 겨우겨우 조각 하나를 가져온 한솔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과정에서 발끝에 생채기가 났지만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한솔은 뒤로 묶여 있는 손으로 도자기 조각을 쥐고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갈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렸을 때 납치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때는 한참 본디지의 미학에 빠져 열심히 배웠던 것인데 그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날카로운 조각을 쥔 손에서 피가 났지만 한솔은 밧줄을 가는 걸 멈추지 못했다. 중간중간 왕자가 언제 깰지 몰라 조급해하며 눈치를 살피던 와중, 툭- 작은 소리와 함께 손목을 옥죄고 있던 힘이 풀어졌다. 한솔은 다급히 밧줄을 풀었다. 장시간 혹사당하느라 여린 피부에는 밧줄 모양으로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는데 자유를 되찾은 두 손을 보니 눈물이 핑 났다. 한솔은 울음을 꾹꾹 참으며 입의 재갈과 목에 걸려 있던 초커도 시원하게 벗어 던져 버렸다.
‘집에 갈래….’
그리고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올 때는 지옥 같았던 그곳을 잠시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슥- 스윽….
한솔은 걸었다. 그는 자신이 제법 잘 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걷고 있는 상태였다. 맨발에 원피스 달랑 한 장을 걸치고, 화려하게 치장돼 있지만 정작 사람은 없는 기이한 길 위를 말이다. 그 방을 나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초인적인 힘으로 버텨 냈으나 긴장이 확 풀려서 그런지 몸을 잠식하던 열기에 가속이 붙었다. 한솔은 색색 가쁜 숨을 내쉬었다.
“흐으….”
더워, 더워, 더워….
결국 한솔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어지러움에 어딘지도 모를 장소에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열기는 점점 몸집을 키워 한솔을 집어삼킨다. 그는 가여운 제물일 뿐이었다. 발정의 숙주가 되어 알파의 좆 물을 원하게 될 뿐인 제물….
‘그런 건 싫어-.’
번뜩, 감겼던 눈이 뜨였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씨를 받기는 싫었다. 가지고 싶은 건 단 한 사람뿐인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한솔은 몸의 본능이 속삭이는 말들을 거부하며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열기를 식히고자 하는 이성의 발악 끝에 손끝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는 것이 느껴진다. 물기가 느껴지는 대리석, 그리고 한솔은 그대로 인위적으로 조성해 놓은 분수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신우야… 보고 싶어….
몸은 추워서 덜덜 떨리는데 얼굴엔 열이 올라 홍조가 생긴 한솔이 사부작사부작 눈꺼풀을 느리게 닫았다 올렸다. 어떻게든 버텨 보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느릿하게 눈을 감는다.
암전이었다.
-솔아?
깜박….
-숨바꼭질하는데 졸면 어떡해.
갑작스럽게 눈을 뜬 한솔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그런 한솔을 보며 어린 신우가 다정하게 웃는다.
어린…? 그래… 맞다. 두 사람은 고작 12살이었으니까. 충분히 어린 나이였다.
한솔은 어쩐지 매우 신기한 상황을 보는 것처럼 신우를 바라본다. 태생적으로 또래보다 훨씬 날카롭게 생긴 신우였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그런 신우의 통통한 젖살이라든지, 자신과 한 뼘밖에 차이가 안 나는 앙증맞은 키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분명 훨씬 형 같은 느낌이었는데. 왜 이렇게 작고 어려 보이지?
한솔이 어리둥절한 마음에 맹하니 눈만 끔벅이고 있자 신우는 한솔의 볼을 살짝 꼬집더니 말했다.
-졸려?
-으응….
-그럼 쉴까.
12살의 이한솔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숨바꼭질 더 할래.
-…더?
신우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두 사람만의 숨바꼭질은 조금 특이한 규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술래는 무조건 신우가 한다는 것이다. 사실 언제부터 이 룰이 정해졌는지는 모른다. 그냥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곳저곳 자신의 비밀 공간을 정해 꽁하니 박혀 있기를 좋아했던 한솔을 신우가 찾아다니며 시작된 놀이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알았어, 그럼 얼른 숨어. 열 센다. 열, 아홉-.
신우가 뒤를 돌아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한솔은 뒤에서 신우를 꼭 한 번 안았다가 어린 알파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것을 보고 히히 웃으며 후다닥 달려 나갔다. 어디에 숨을까- 넓은 신우네 저택을 두리번거리던 한솔은 햇살이 환하게 드리워진 창문 밖으로 분홍빛 꽃잎이 살랑이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잠시 멈춰 섰다.
-예쁘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 멀리서 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는다?
-자, 잠깐만…!
한솔은 냅다 소리치고 다시 달렸다. 그리고 그 꽃 무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 정원이 바로 보이는 1층 응접실로 달려갔다. 환기를 위해서인지 응접실 창문은 모두 활짝 열려 있는 상태였는데 봄이 만발한 모습을 보고 한솔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밖에서 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솔이가 어딨지.
입을 합 다문 한솔이 엉금엉금 의자 뒤로 가 숨었다. 곧 응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한솔은 두 손으로 입을 꼭 막은 채 또르르 눈을 굴렸다. 못 찾겠지…?
-음….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한솔이가….
-…….
-여깄나?
의자 위에 무릎을 올린 신우가 등받이 위에 두 팔을 괸 채 한솔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것도 모르고 한솔은 신우가 어디까지 왔나 전전긍긍하다가 정수리를 톡톡 두들기는 손길에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찾았다.
깜짝 놀란 한솔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자 웃음을 터트리던 신우는 한솔이 다름 아닌 창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솔아, 잠깐…!
그가 다급하게 뛰어가 한솔의 허리를 붙잡는 것과 동시에 술래에게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뿐이던 한솔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
-…!!
두 사람은 함께 우당탕탕 밖으로 넘어지게 되었다.
-윽….
몸이 붕 뜨는 순간 본능적으로 한솔을 감싸듯 안은 신우는 몸에 닿는 충격에 작게 신음을 흘렸다. 신우가 받쳐 준 덕에 놀라긴 했으나 다친 데는 없던 한솔이 자신이 깔고 앉은 알파를 보며 눈을 왕방울만 하게 떴다.
-신, 우야…?
천만다행으로 둘이 떨어진 곳은 폭신하게 깔아 둔 잔디였지만 오히려 거기에 쓸려 벌겋게 까진 신우의 손등을 보고 한솔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신우, 피… 피이… 피 나….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안 아파?
-응….
한솔이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소매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한솔의 눈가를 닦아 준 신우가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솔.
-…히끅….
-창틀에 올라가면 돼, 안 돼.
-안 돼요….
-위험하잖아. 앞으로 그러면 안 돼. 나도 갑자기 놀라게 해서 미안해.
신우가 한솔을 안고 등을 토닥이자 끄덕끄덕- 한솔은 앞으로 절대 안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우의 다친 손등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발을 동동 굴렀다. 어서 의사 선생님한테 가자며 재촉하는데 그 모습에서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결국 대낮부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두 도련님 탓에 집안은 발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나란히 앉아 집사에게 걱정 겸 잔소리를 듣다가 주치의인 강 원장이 달려오고 나서야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흙이 묻은 손등을 흐르는 물로 깨끗이 닦는 와중, 상처가 쓰라린지 설핏 미간을 찌푸리는 신우의 이마를 살살 펴 준 한솔이 울상인 얼굴로 상처가 난 손등에 ‘호오-’ 입김을 불었다.
-많이 아파…?
괜찮다며 담담하게 말한 신우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 뒤로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데 장본인인 신우보다 옆에 있던 한솔이 오히려 더 좌불안석이었다. 붉은색 약을 바를 때는 자기가 다 아픈 것처럼 움찔움찔 몸을 떨었고 밴드를 다 붙이고 나자 시무룩해져선 신우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내가 할게!
그리고 결국 신우가 물 한 잔 마시려는데도 졸졸 따라와서 시중을 자처한다. 그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려 하는 건 아무래도 좀 곤란했다.
할 수 없이 한솔을 옆에 앉히고 잘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내야 했던 그다음 날-.
-신우야!
기사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차에서 뛰쳐나온 한솔이 마중 나온 신우의 품에 폭삭 안겼다.
-안녕. 왜 이렇게 들떴어.
-히힛- 이것 봐!
짠! 하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든 한솔이 눈꼬리를 한껏 휘며 웃었다.
그건 하얀 손수건이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한솔이 ‘빨리빨리! 손 줘 봐!’ 하는 말에 얼떨결에 한솔에게 손을 내민 신우는 반창고를 붙인 자신의 손등을 하얀 손수건이 조심스럽게 감싸는 모습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한솔은 조심조심 손수건의 매듭을 짓더니 뿌듯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
너무, 눈이 부시도록 예뻐서-.
그는 꽤 오랜 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다쳤어?
어제는 없던 반창고들이 한솔의 엄지와 검지에 붙여진 모습을 보고 신우가 입매를 굳히며 묻자 ‘어?’ 하며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본 한솔이 슬금슬금 손을 등 뒤로 가져가 숨겼다. 그리고 혼이 날까 봐 헤헤, 무해한 얼굴로 웃는데 신우도 결국 입매를 허물어트리며 따라 웃고 말았다.
-손 줘 봐.
-이거 그냥 유모가 붙여 준 건데….
자기가 한 거 아니라며 작게 변명하던 한솔은 빤히 바라보는 신우의 시선에 결국 숨겼던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신우는 말없이 반창고가 붙은 부분을 가만가만 쓰다듬더니 조마조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솔을 향해 말했다.
-숨바꼭질할까?
한솔의 두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응!
하얀 손수건으로 감싸진 손과 반창고가 붙은 손이 다정하게 서로를 맞잡는다. 맞잡은 부분을 통해 전해지는 상대의 온기는 따뜻하고 상냥했다. 어린 한솔이 물었다.
-신우는 어떻게 그렇게 나를 잘 찾는 거야?
그러자 12살의 신우는 이렇게 답했다.
-너한테서 항상 좋은 냄새가 나거든. 그 향기를 따라가면 언제나 네가 있었어.
그 말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팔등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리던 한솔이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신우는 한솔을 보며 그런 게 있다면서 웃었다. 한솔이 그럼 얼른 시험해 보자며 눈을 반짝였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곧 천진난만한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봄의 저택을 가득 메웠다.
“…!”
화재경보가 울리자 사람들이 급하게 떠나고 텅 비어 버린 지하 3층의 복도. 한솔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일이 방문을 열어 보며 검사하던 신우가 다급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어디선가, 끊어질 듯 희미한 페로몬이 맡아졌다.
그의 날카로운 턱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봄빛을 닮은 매화 향이었다.
***
불이 번지고 있었다.
무전기에서 상황을 알리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우는 후퇴를 알리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본능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쉼 없이 달렸다. 띠리리링-. 화재경보기가 급박한 상황을 대신 알렸다. 매캐한 냄새와 검은 연기… 천장에 설치된 스프링클러가 사방으로 물을 흩뿌린다. 아무리 페로몬에 민감한 우성 알파라 해도 이런 상황이라면 특정 페로몬을 찾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처음부터 길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움직였다.
탁,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세상이 흑백으로 물들어 간다.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올올이 풀려 나가는 색과 향기. 무색무취의 세상 속에서 단 하나, 달콤한 매화 향기만이 그의 후각을 간지럽혔다. 쉼 없이 달리던 알파는 거대한 분수대와 그 끝자락에 걸쳐져 있는 새하얀 팔을 보고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하아, 하아….”
쓰러지듯 분수대 앞에 주저앉은 알파가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오메가의 몸을 물속에서 끌어 올렸다. 촤아악-.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심장 박동이 맞닿은 가슴을 통해 느껴졌다. 차갑게 식어 있는 몸을 소중히 보듬은 알파는 정반대로 열이 펄펄 끓는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 위로 후두둑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
“들켰네….”
그러자, 마치 기적처럼-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한솔이 신우를 올려다봤다.
옅게 떨리는 손끝으로 신우의 눈가를 가만가만 쓰다듬던 한솔이 포근히 웃었다. 차가운 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눈물이 희게 질려 있던 손끝을 덥혔다. 알파는 눈을 내리감는다. 한솔의 입술에 경건하게 입을 맞춘 신우가 느리게 입술을 떼어 내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
“…집에 가자, 솔아.”
한솔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감으며 말했다.
“응….”
그렇게 다시 의식을 잃은 오메가의 몸을 안아 올린 신우가 무전기에 한솔을 구출했음을 알렸다. 상황을 통솔하던 사령탑에선 새 탈출구를 알려 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을 적신 후 한솔의 코와 입을 덮었다.
[앞쪽은 경찰이 너무 많습니다! 최대한 뒤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자 앞을 가로막는 유리 벽을 향해 총을 겨눈 알파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 시각,
런던.
대앵-.
거대한 시계탑이 새해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
『아, 역시 그런가요.』
『네, 교류하신 지도 오래되셨다 하고 사실 증상이 너무 명확하시거든요.』
『네에….』
한솔이 부끄럽다는 듯이 웃자 VIP실 전담 주치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당분간은 입맛이 없으실 수도 있어요. 그래도 향이 자극적이지 않은 식단을 짜 드릴 테니 잘 챙겨 드시고요. 안정을 위해선 보호자님과 자주 스킨십을 해 주시면 좋습니다.』
그러면서 ‘점막 접촉은 되도록 피해 주세요. 너무 자극이 강하면 좋지 않아요.’ 하는 덕에 한솔의 귀 끝이 활활 타올랐다. 저게 키스가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짓도 하지 말라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한창 타오를 나이의 연인에겐 가혹한 처방이었다. 그렇게 의사의 권고로 새해부터 강제 수절을 하게 생긴 한솔이 간절한 눈망울로 물었다.
『그, 얼마나…?』
주치의는 상냥한 얼굴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달은 자제해 주세요.』
『넵….』
한솔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
주치의가 나가자 이불 밑에 숨어 있던 솜이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솜이를 들어 올려 쪽- 뽀뽀를 했다. 풍성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안 돼. 답답해도 조금만 참자, 응?”
깨어나자마자 한솔을 펑펑 울게 만들었던 솜이의 다친 발도 이제 거의 다 아물어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기도 아프다는 걸 아는지 얌전히 붕대를 매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틈만 나면 잡아당기거나 이로 깨물려 했다. 한솔은 오늘도 폭신한 솜이의 등을 차분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솔의 무릎 위에서 쓰다듬을 즐기던 솜이가 약 냄새가 싫은지 앞발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똑똑-.
정말 귀신같은 타이밍이었다. 한솔은 긴장해서 귀가 바짝 서 있는 솜이를 달래며 ‘네-’ 하고 답했다.
달칵.
한솔은 용건이 있는 간호사가 왔겠거니,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방문객은 아는 얼굴이었다.
예전의 얼굴이 남아 있음에도 확연히 ‘어른이 됐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얼굴-.
팔 깁스를 한 권정우가 솜이를 힐긋 보더니 말했다.
“꼬질이.”
왕!!
솜이가 아르릉거리며 정우를 경계했다.
“아니, 왜 얘를 그렇게 불러-.”
한솔은 정우를 타박하며 솜이에게 ‘예쁘다, 예쁘다’ 주문을 걸었다. 솜이는 한솔의 진심 어린 아부를 받고 나서야 겨우 화를 풀었다. 그 뒤론 둥글게 몸을 만 상태로 누가 봐도 ‘나 쟤 싫어!!’ 하고 삐졌다는 것을 어필했는데 간식으로 유혹도 해 보고 좋아하는 장난감도 눈앞에 흔들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정우가 나가지 않는 이상 계속 이 상태일 듯싶었다.
어쩔 수 없네.
난감한 얼굴로 볼을 긁적인 한솔이 정우를 돌아봤다.
“솜이 구해 줬다는 말 들었어.”
“…….”
“고마워, 정우야.”
한솔이 ‘솜아, 인사해야지’ 했지만 솜이는 컁- 하고 헛기침을 하고선 고개를 돌려 버린다. 누굴 닮았는지 고집이 정말 장난 아니었다.
“…그런데 팔 다친 거야?”
한솔이 깁스를 한 왼팔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자신의 팔을 힐긋 내려다본 정우는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삔 거야.”
“그래도…, 손은 괜찮은 거지?”
“어.”
무심코 ‘다행이다…’ 한 한솔은 헉, 하더니
“다쳤다는 게 다행이란 건 아니구…! 그, 연주하려면 손 다치면 안 되니까….”
허둥지둥한다.
정우는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반짝이는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키가 크고 성숙해진 티가 났지만 그럼에도 저 눈동자는 여전히 말갛고 초롱초롱했다.
‘변한 게 없네.’
그는 어쩐지 그리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나 병문안 와 준 거야?”
기대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한솔을 힐긋한 정우가 ‘…겸사겸사’ 하고 말하고선 오른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툭 던졌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든 한솔이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그건 솜이의 이름이 새겨진 인식표였다. 정신없는 와중에 잃어버린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정우가 가지고 있었구나.
“와아, 나 이거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솜이 한 살 생일 선물이라 되게 아꼈던 거거든. 다행이다.”
한솔이 찾아 줘서 고맙다며 싱글벙글하자 그런 고난을 겪고도 여전히 밝고 순수한 빛을 잃지 않은 오메가를 조금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정우가 등을 돌렸다.
“벌써 가?”
“비행기 시간 다 됐어.”
“앗… 그러면 어쩔 수 없네… 한국 도착하면 연락해! 이번에도 읽씹하면 너희 집 찾아가 버린다!!”
한솔이 되지도 않는 협박을 하는 것을 들으며 걸음을 옮기던 정우는 문득 문 앞에 다다라서야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이한솔.”
“응?”
“너, 나한테 소원 들어주겠다고 했던 거 기억나냐.”
그리고 물었다.
“소원…? …헉!”
이게 무슨 소리지, 하던 한솔의 머리 위로 대왕 느낌표가 띄워졌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복도에서 두 손을 들고 벌을 섰던 날, 권정우와의 첫 만남.
철도 없고 생각은 더 없던 시절-.
한솔은 권정우가 왜 갑자기 그 시절 얘기를 꺼내는가 싶어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건 왜…?”
“그 소원권 지금 쓸게.”
한솔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권정우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행복해라.”
“…….”
“너는 그게 제일 잘 어울리니까.”
그리고 그는 ‘간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권정우가 닫고 나가 버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솔은 천적이 나가자 슬금슬금 다시 그의 무릎 위로 올라온 솜이를 꽉 껴안았다. 켕!! 솜이가 이게 무슨 짓이냐며 짧은 앞다리로 바둥바둥거렸다.
“솜아, 저것 봐-.”
…….
“예쁘다.”
많은 런던의 병원들 중에서 굳이 이 병원을 선택한 이유는 의료진의 뛰어난 실력도 있지만 아예 따로 세워져 있는 프라이빗 VIP 병동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과실수 탓이라고 신우가 말했다.
한솔은 이 엄동설한에도 예쁜 분홍색 꽃을 피운 나뭇가지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3층에 있는 한솔의 병실은 정말 코앞에 있는 꽃나무를 구경하기 딱 좋은 위치여서 이따금 바람이 불 때면 분홍색 꽃가지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솔은 한 손으론 솜이를 품에 안고 다른 한 손으론 링거를 잡은 채 창문 가까이 다가가 봄이 오기 전, 가장 먼저 피어나는 꽃의 향취를 맡았다.
그리고 어떠한 예감과 함께-.
한솔은 창문에 기댄 채 밖을 내려다봤다.
“…!”
꽃나무 아래 서 있던 알파와 눈이 마주쳤다. 줄곧 이곳을 올려다보고 있던 알파는 잠깐 놀란 눈빛을 하더니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아-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색과 향기가 지워졌다. 팔랑이며 내려앉는 꽃잎 한 장. 그리고 마치 마법처럼, 흑백으로 지워졌던 세상에 남자는 색과 향기를 되돌려 주었다.
누군가의 삶에 각인된다는 것. 그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지 않을까.
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