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카지노 화재 사건으로 인해 5명의 사상자가… 수사 당국은 불을 지른 50대 남성이 카지노에서 거액을 잃은 뒤 앙심을 품은 것으로….』
한 달 전, 화재 사건으로 인해 두바이 5 왕자가 사망했다.
술에 취해 객실에서 자고 있다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수사는 종결됐으나, 어찌 됐든 타국의 왕자가 사망한 사건이기에 당국에는 비상이 걸렸다.
물론, 한솔이 알 필요는 없는 이야기이다.
신우는 문밖에서 살랑이는 꽃향기를 느끼며 TV를 껐다. 달칵-. 아주 조심스럽게 열린 문틈 사이로 한솔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지만 신우는 슬쩍 미소 짓고는 탁자에 쌓여 있는 논문 더미를 살피는 척했다. 한솔은 신우가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자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는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다가왔다.
“누구게.”
그리고 두 손으로 신우의 눈을 가렸다. 알파의 미소가 짙어졌다.
“글쎄, 누굴까.”
한솔의 손목을 붙잡은 신우는 한솔이 어서 맞춰 보라며 투덜거리는 순간, 손목을 가볍게 끌어당겨 놀란 표정의 한솔을 품에 안았다.
“잘 잤어?”
쪽- 입술과 입술이 부딪쳤다.
“응-.”
한솔은 눈을 깜박이다가 순하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기분이 좋을 때마다 퐁퐁 솟아나는 것 같은 한솔의 페로몬이 알파의 신경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각인을 한 뒤로 굳이 상대가 페로몬을 내뿜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상대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 반작용이랄지, 이런 평범한 순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아래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조금 곤란한 일이다.
알파의 커다란 손이 한솔의 잠옷 사이로 파고들었다. 예민한 등허리 부근을 간질이듯 훑고 내려간 손이 자연스럽게 통통한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한솔은 기대감에 움찔거리는 구멍에 힘을 주고는 은근슬쩍 하체를 띄웠다. 응… 넣는 건 안 되겠지만 잠깐 정도는….
왕!
조금 열려 있던 문 틈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솜뭉치 하나가 지금 뭐 하는 거냐며 까만 눈동자로 두 사람을 올려다봤다. 신우와 한솔은 동시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분홍색 혀를 헥헥 내밀며 순진무구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모습이 과거의 한솔과 쏙 빼닮아 있었다. 어쩐지 몹시 머쓱해진 분위기에 신우는 조용히 손을 거뒀고 한솔은 속으로 애꿎은 베개를 뜯었다….
“…오후에 단장님 뵙기로 했다며. 준비하자.”
“…….”
쪼금, 아아주 쪼오금 억울했으나…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한솔은 신우가 단정하게 옷차림을 정리해 준 상태로 거실로 쫓겨났다. 어쩐지 슬슬 도망갈 각을 재는 솜이를 발견하곤 냉큼 붙잡아 꾸우욱 안았다. 솜이, 너어…! 일부러 그랬지!!
그렇게 아웅다웅하던 둘은 결국 사이좋게 밥까지 챙겨 먹고 신우를 배웅한 뒤에 기합을 다졌다.
오늘은 한솔의 프라이빗 입단 오디션의 마지막 면접이 있는 날이다.
나연주를 만난 뒤, 한솔은 아주 우연한 기회로 로열 발레단 단장의 눈에 띄어 입단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중간에 경력이 끊긴 게 흠이긴 했으나 어찌 됐든 한솔이 과거에 쌓아 온 입상 실적은 거짓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한솔을 한 번 훑더니 ‘한번 구경하러 올래요?’ 하고 무슨 차 한잔 마시러 오라는 듯 생긋 웃었다. 나중에서야 나연주에게 들어 알게 된 것이지만, 단장은 외적 요소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타입이라고 한다. 특히, 무용수로서 적합한 몸을 보면 수집 광적인 병이 도진다고…. 어차피 로열까지 올 인간이라면 실력은 기본으로 깔려 있을 테니 가장 중요한 외관을 챙기자는 게 그의 마인드라고 했다.
“후우-.”
오만하지만, 그에 걸맞은 자신감이다.
한솔은 그걸 로열 발레단의 오전 클래스에 참관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전통 있는 극장을 소유하고 있고 무용수들이 발레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도록 모든 편의 시설을 제공하며, 가장 무엇보다 그들이 극상의 춤을 선보일 수 있도록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한솔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사립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규모에 압도당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장원철 교수 같은 수많은 전설적인 무용수들의 활약으로 한국은 겨우 발레의 불모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여전히 발레단의 규모나 지원 면에선 타국에 비해 열세인 게 사실이다. 국립 발레단을 제외하면 정기적으로 작품을 올리는 발레단도 거의 없고 국립 발레단만큼의 인지도도 없었다. 사립은… 뭐, 말할 것도 없고.
발레는 축구나 야구 같은 대중적인 스포츠가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큰 시장도 아니었다. 많은 무용수들이 자신의 역할 하나를 지키기 위해, 무대 한 번을 서 보기 위해 열정을 불사르고 몸을 버렸다. 그마저도 자리가 없어서 꿈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한솔은 지금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있지만 처음, 오디션에 떨어져서 국립 발레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학에 진학해야 했던 은혜와 눈물로 지새웠던 밤을 떠올렸다. 그 ‘최은혜’도 설 자리가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해요?』
『…!』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고상하지만 화려한 외관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한솔은 미려한 남자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남이 한솔을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로열 발레단의 단장이다.
『들어가죠. 오늘, 한솔에게 묻고 싶은 말이 아주 많답니다.』
『…네.』
한솔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어때요, 한솔이 보기에는. 클래식 발레 중 ‘백조의 호수’를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했었는데 로열의 백조는 마음에 드나요?』
오전 일정이 끝난 후, 단장실로 돌아와 찻잔을 들어 올리며 그가 말했다.
정말 짓궂은 사람이다. 그런 리허설을 보고 ‘감히’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클래스를 듣고도 이번에는 바로 집에 가지 않고 단장의 배려에 리허설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한솔은 아직도 넋이 나가 있었다. 기분 좋은 소름이 온몸을 내달렸다. 이게 바로 세계적인 수준의 발레단의 무대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사실, 연주가 재밌는 친구가 있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믿지 않았는데.』
『…….』
『확실히 재밌네요, 한솔은.』
그는 발레에 한해선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가녀리고 낭창한 몸, 우아한 곡선, 그리고 가벼운 점프야말로 발레가 가지는 가장 절대적인 가치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에게 가장 돋보이는 솔로 캐스팅엔 무조건 여자 무용수를 내세웠고 덕분에 그런 얼굴을 하고도 시대에 뒤떨어진 꼰대라는 욕을 얻어먹기도 했지만… 그런 그가 이끄는 발레단이 여전히 세계 정상에 머물고 있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력’이라는 이유가.
『발레리노들의 경우, 근육의 힘이 좋아 확실히 점프가 강하고 날카로운 경우가 많죠. 다른 말로, ‘높이’ 뛸 순 있지만 ‘둔하고 무겁다’….』
『…….』
『…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는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꼬마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한솔을 바라봤다.
『당신은 놀랍도록 가볍더군요. 내 오랜 신념에 금이 갔는데도, 전혀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흥미로워요-. 한솔은 두 손을 꾹 움켜잡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지요.』
『…!』
『하지만, 미리 말하도록 할게요. 한솔, 당신은 로열에선 드미 솔리스트가 한계일 겁니다.』
좋은 소식 뒤에 순식간에 먹구름을 불러일으키는 말에 한솔이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남자여서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정확히는 지금의 로열이 가진 시스템상의 문제 때문이겠죠.』
『……』
『솔직히 말할까요. 지금의 당신은 서툴러요. 하지만 미래의 당신은… 절대 그렇지 않겠죠. 당신이 가진 우월한 점프, 역동적인 힘, 당장은 신선하겠지만 우리에겐 그걸 뒷받침할 대체제가 없습니다. 당신이 인간인 이상 365일 모든 공연에 나갈 순 없고, 그래서도 안 되죠. 결국 우리에게 그건 ‘이미지의 손실’로 이어지게 됩니다.』
단장은 빠르고 정확한 어조로 말했다.
『한 명의 흑조를 빛내기 위해 다른 모든 백조를 죽일 수는 없어요, 한솔.』
『아….』
『로열이 시대에 걸쳐서 쌓아 온 이미지는 가녀리고 우아한 백조입니다. 강렬하고 매혹적인 흑조가 아니라-.』
그는 탁자 한편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한솔의 앞에 내밀었다.
『이런 건, 여전히 아날로그 취향인지라.』
한솔이 눈을 깜박이자 그는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흠… 그런데 조금은 놀라는 척이라도 해 주면 안 될까요? 내가 적어도 당신을 드미까진 올릴 생각이 있다는 건데. 코르드만 150여 명에 달하는 이 로열에서 말이죠.』
『그게… 실감이 잘 안 나서요. 오늘 리허설을 보니까 저는 그냥… 우주의 먼지가 된 것 같고….』
『하핫! 시작도 전에 기가 죽어 버리면 어떡해요? 내 안목을 믿어 봐요. 미래의 당신은, 정말 매혹적인 프리마가 되어있을 테니까.』
주연 자리는 꿈도 꾸지 말라고 못을 박아 놓고는 이번엔 또 자신을 믿어 보란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키워 줄게요. 여기서부터 시작해 봐요. 당신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 될 것 같거든요.』
그렇게 한솔은 로열 발레단의 일원이 되었다.
물론, 세계적인 발레단의 단원이 된 것은 굉장히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지만….
세상엔 기쁜 일이 있으면 그 반작용도 있는 법.
한솔이 발레단 첫 출근을 하게 된 날. 출근은 열 시까지지만 이제 몸에 밴 대로 오전 6시쯤에 일어난 한솔은 잠기운이 대롱대롱 매달린 눈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침실이 여러 개인 스위트 룸인 게 무색하게도 이제 두 사람은 한 침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다 보면 방 안에 연결된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신우가 한솔에게 굿모닝 키스를 해 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신우의 허벅지 위에 엎드린 한솔의 바지를 까고 스팽킹을 하는데 한솔은 그 일과를 굉장히 사랑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어도 이어지는 일이라는 것이 좋다. 꼭 키스를 하고 예뻐해 주는 것 만이 사랑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다. 그는 그 순간에 사랑받는다 느낀다.
하지만….
당장 어제만 해도 키스 후에 엉덩이를 다섯 대나 때려 줬던 신우가 오늘도 다정하게 굿모닝 키스를 해 주고선 이렇게 말했다.
“당분간 스팽킹은 하지 말자.”
…뭐?!
쿠궁- 첫 번째 하늘이 무너졌다.
“왜, 왜…?”
너무 놀란 나머지 한솔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알파는 오메가의 옆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몸 쓰는 일을 하잖아. 조심해야지.”
“그렇게 아프지는 않은데….”
“그래도 안 돼. 이제 프로니까 컨디션 조절해야지, 솔아.”
단호한 목소리에 식은땀이 난 한솔이 간절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럼 저녁엔…? 끝나고 나서 하면….”
“근육 놀라게 할 일 있어? 안 돼.”
쿠궁-.
두 번째 하늘이 무너졌다.
“…어, 언제까지?”
설마, 평생은 아니지…?
한솔이 울망울망한 눈동자로 묻자 평생은 본인도 곤란한지 알파가 ‘음…’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최소한 1년 정도. 네가 그 일에 익숙해지고 나서 생각해 보자.”
쿠구궁… 세 번째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벌써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으아… 덥다….”
한 차례 연습 후, 바닥에 벌러덩 누운 한솔은 하얗게 빛나는 조명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누운 지 채 1분이 되지 않아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는 구석에 던져두었던 가방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간다. 한솔은 포인트 슈즈를 꿰매기 위해 파우치에서 바늘이랑 실을 꺼냈다. 연습을 하다 보면 슈즈가 계속 닳기 때문에 하루의 일부분은 꼭 바느질에 할애해야 한다. 한솔은 못 쓰게 된 포인트 슈즈 대신 새 신에 바느질을 했다.
잘하고 싶었다.
첫 배역이기도 하고… 오디션을 보긴 했지만 처음부터 솔로 캐스팅을 주실 줄은 몰랐기 때문에 더 잘하고 싶었다.
3차 캐스팅인 탓에 작품까진 두 달이 더 남았더라도 배역을 따내는 건 결국 무용수 본인의 역량이다 보니 쉬는 날이라 해서 마냥 쉴 수는 없었다. 한솔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배역은 그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파랑새 배리에이션이었다. 통통 튕기는 것 같은 움직임이 무척 사랑스러운 배역. 처음 캐스팅 보드가 떴을 때도 믿기지 않아서 신우한테 아침마다 ‘이거 꿈 아니지?’ 하고 묻고는 했을 정도였다.
똑똑-.
연습실 문을 누군가 일정한 속도로 두들기는 소리에 한솔이 고개를 홱 돌렸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상대의 존재감에 말간 얼굴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바느질하던 슈즈를 내려놓고 벌떡 몸을 일으킨 한솔이 문을 향해 달려간다.
“신우야!”
달칵, 문이 열리면서 한 뼘씩 푸르스름한 조명 빛에 젖어 가던 알파의 얼굴에 켜켜이 다정한 빛이 서렸다. 와락 안겨 드는 몸을 받아 낸 신우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며 작게 웃었다.
“배고프지. 밥 먹자.”
“와아, 뭐야? 뭐 사 왔어?”
신우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던 한솔이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 모습에서 그는 문득 하얗고 복실복실한 강아지를 떠올렸다. 그가 한솔의 머리를 쓰다듬자 응? 하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면서도 더 쓰다듬으라며 머리를 내미는 모습마저 똑 닮아 있었다. 그는 티 나지 않게 웃으며 한솔을 데리고 연습실 안쪽에 붙어 있는 다용도실로 향했다.
“떡볶이!”
플레이트 접시를 꺼내던 한솔이 왁 소리쳤다.
“쌀떡이야? 쌀떡?”
“응. 저번에 먹고 싶다 했잖아.”
한솔이 감격한 얼굴로 신우를 올려다봤다. 신우는 어서 먹자며 포장 용기를 열었다. 두 사람은 떡볶이와 주먹밥을 각자의 접시에 덜고 ‘잘 먹겠습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빨간 소스와 두툼한 쌀떡을 보고 한솔은 얼른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용감하게도 제일 큰 떡을 하나 집어 입 안에 넣었다.
‘흑… 맛있어….’
입 안에서 씹히는 쫄깃한 떡의 식감과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고추장 소스. 한쪽 볼이 볼록 튀어나오도록 열심히 떡볶이를 먹던 한솔은 이번에는 새빨간 옷을 입은 어묵을 집었다. 그리고 그걸 빨간 국물에 퐁당 빠져 있는 삶은 계란 반쪽 위에 올려놓고는 와앙, 하고 한입에 삼켰다. 저 작은 입에 저렇게 큰 게 한 번에 들어가는지 약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신우도 모르고 한솔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옛날 생각난다-.”
씹을 때마다 계란 노른자의 퍽퍽한 맛과 흰자의 탱글탱글한 식감, 짭조름하게 배어 나오는 매콤달콤한 소스에 한솔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타국 생활도 반년이 넘다 보니 슬슬 고국 음식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였다. 프리미엄 호텔에 묵는 만큼 불고기나 김치 같은, 잘 알려진 한식은 부족함 없이 먹었지만 이런 길거리 분식의 경우 오히려 접하기 쉽지 않았다. 한솔이 먹고 싶은 것은 일류 쉐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궁중떡볶이가 아니라 하교하는 길에 한 번씩 사 먹었던 낡은 분식집의 떡볶이였다.
“그러게. 여기에 묻히고 먹는 것도 똑같고.”
그리 말하며 신우가 손을 뻗었다.
-한솔아.
-…응?
완전히 성장한 남자의 모습 위로 교복을 입고 있는 신우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한솔은 작지만 세련된 다용도실이 한순간에 오래된 분식집으로 변해 버린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맴맴-. 매미가 우렁차게 울었다. 털털털,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짧은 반팔의 하복을 입고 있는 소년이 동글동글한 주먹밥을 들어 올리다 말고 한솔을 바라보며 웃었다. 희고 길쭉한 손이 한솔의 입가를 훑었다.
“솔아?”
“…어? 어?”
“왜 먹다 말고 넋을 놓고 있어.”
“으응… 잠깐 딴생각하느라.”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휴지로 닦은 남자가 자신의 접시에서 계란 반쪽을 들어 한솔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 그 모습 또한 과거와 다를 바 없었다.
한솔은 종종 이렇게 서로가 많이 변했으면서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면 심장이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 한결같음에 감사하고 그 변하지 않은 애정에 안도한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몫으로 있는 주먹밥을 하나 들어 신우에게 내밀었다.
“아-.”
부끄러움에 젓가락을 잡은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을 살짝 붉힌 한솔이 얼른 먹으라고 하니 잠시 멈칫했던 신우가 입을 벌렸다.
“…맛있어?”
“응.”
…이상하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이렇게 커다란 알파인데. 자신보다 덩치도 크고 훨씬 어른스러운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 보여도 되는 걸까-.
눈을 깜박이던 한솔은 어쩐지 쑥스러워진 기분에 볼을 쓱 문지르고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 뒤로 식사를 마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서 따로 대화는 없었지만 그게 어색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두 사람이 함께해 온 시간이 무척 길었고 그 침묵도, 그저 편안한 일상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5월에 공연이라고 했지.”
“응. 그런데 아직 오디션 남아서 캐스팅 취소될 수도 있어….”
한솔이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신우는 한솔의 이마를 검지로 톡, 쳤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그걸로 네가 행복한 거면 된 거야.”
더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지. 사람인데, 왜 높은 곳을 향한 갈망이 없을까.
하지만 알파에겐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화려하게 반짝이는 별보단 품 안의 소박하고 아담한 꽃송이 하나가 더 소중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아.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 네가 빛나고 있을 때마다 종종 그런 욕망을 느끼곤 하니까. 너를, 가두고 싶다는 욕망, 나만이 너를 보고 싶다는 추악한 욕심.
‘하지만….’
조금 씁쓸하게 웃은 신우가 한솔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파트너들이랑 춤을 출 때마다 질투가 나.”
줄기를 꺾어 잿빛으로 시든 꽃을 어여삐 여기는 것보단 온실 속에서 향기롭게 피어난 화원을 보는 게 옳겠지.
비록, 아주 가끔은 채우지 못한 욕망에 허덕이더라도.
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뻗은 알파가 한솔의 입꼬리를 매만졌다.
“최은혜 하나만 참고 버티면 되겠다고 생각했더니.”
“신우야, 그건….”
순식간에 볼이 홍당무처럼 물든 한솔이 우물쭈물했다. 한솔은 기뻐서 그랬던 거지만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한솔의 페로몬과 달리 신우의 것은 무겁고 축축했다.
그는 말했다.
“네가 날 너무 좋게 봐 주는데.”
“…….”
“내가 알파라는 걸 잊지 마.”
그러니, 솔아. 더 넓은 들판으로 너를 보내 주지 못하는 내 이기심을 이해해 주도록 해.-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