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겨울에 피어나는 꽃

0 0 0
                                    

시린 하늘을 간지럽히는 순백의 결정.
녹슨 대지에 작은 눈송이가 하나둘 흔적을 남긴다. 소복소복-. 하얗게 탈색된 세상을 배경으로 짙은 눈발이 휘날렸다. 푸르르던 숲도, 생명이 움트던 대지도 조용히 잠들어 간다. 시간의 그림자 위로 하얀 그물이 겹겹이 쌓이고 고요는 새벽을, 별이 성긴 밤하늘은 다시 침묵을 불렀다.
‘…….’
가는 휘파람 소리를 닮은 누군가 속삭였다. 여기는 춥고 외로워. 하지만, 그 어딘가에는 분명 한 뼘 이른 봄이 찾아오겠지. 쏴아아-. 바람이 손을 흔들자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완전한 암전을 닮은 어둠이 그를 덮쳤다.
뒤늦게 깜박, 눈을 뜬 한솔은 탁 트인 유리창 너머로 하얗게 눈이 쌓인 바깥세상의 풍경을 보았다. 2월. 모든 게 휘발되고 남은 새하얀 잿더미의 계절. 바깥 풍경이 유독 창백하게 보이는 순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한솔은 설레는 마음으로 막 센터 밖으로 나오는 신우의 옆을 기웃거렸다.
“봐 봐. 응? 얼른.”
신우의 손안에서 은색 카드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폴짝폴짝 뛰며 어서 보여 달라고 조르자 신우가 손을 내려 원하는 것을 보여 줬다. 반질반질하게 코팅된 은색의 카드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신우의 모습과 알파임을 증명하는 코드가 인쇄돼 있었다. D-Α(우성 알파)로 시작되는 신우의 코드와 D-Ω(우성 오메가)로 시작되는 자신의 코드를 비교해 보며 한솔은 히히 웃었다. 오늘 막 나온 따끈따끈한 ‘형질인 등록증’이었다.
“솔이 너, 이거 아무한테나 보여 주면 안 돼.”
“치… 자기도 보여 줘 놓구….”
“나는 너니까 보여 준 거고.”
무심한 어조와 그렇지 않은 내용에 한솔의 양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다. 한솔이 만족한 마음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리자 신우가 검지를 구부려 한솔의 뺨을 툭 건드렸다. 그대로 가 버릴 줄 알았던 신우는 한솔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더니 조금 헐거워진 목도리를 끌어 올려 돌돌 감아 줬다. 얼굴이 반쯤 털목도리에 잠기게 된 한솔이 눈만 빼꼼히 내민 채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얼굴이 더 작아 보이는 탓인지 신우의 기준으로 오른쪽 눈꼬리 아래에 있는 눈물점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응? 뭐 묻었어?”
“…아니야. 가자.”
한솔은 느리게 발걸음을 맞춰 주는 신우의 옆에서 신나게 조잘대며 말했다. 이거 나왔으니 이제 술 마셔도 되는 거야? 한껏 설레발을 치는 한솔의 모습에 신우가 피식 웃는다. 실제로 가능은 하지만 이런 쪽으론 영 보수적인 이 의원이다 보니 한솔에게 음주를 허락해 줄 리 만무하다. 뭐, 신년이나 구정이었으면 집안 어르신들 모인 데서 한 잔 받아 마실 수도 있었겠으나 아쉽게도 둘 모두 이미 지난 후였다. 한솔도 그걸 아니 신우에게 조르는 것이다. 몰래 마시자고.
“그게 그렇게 마시고 싶어?”
“으응… 그냥 궁금해서. 어른들만 마시는 거였잖아. 이제 우리도 어른이니까, 응?”
자신도 이제 다 컸다며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드는 한솔을 신우가 귀엽다는 듯이 바라봤다. 한솔은 물론, 단순히 그 맛이 궁금하기도 했으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다. 신우가 술을 잘 마실지도 궁금하고-유 씨 집안 내력과 생김새만 봐선 말술일 것 같지만.- 술주정하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막 취해서 다른 사람한테 엉겨 붙는 술주정도 있다던데…. 그러면 절대, 저얼대 밖에서 술 못 마시게 해야지. 한솔은 속으로 주먹을 꾹 움켜쥐고 다짐했다.
“그럼 사 갈까.”
“정말?”
한솔이 환하게 웃으며 되묻자 신우가 한솔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역시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한솔은 신우의 코트 주머니 속에 자신의 손을 쏙 집어넣었다. 잠시 멈칫한 신우는 곧 아무렇지 않게 밖에 내놓았던 자신의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손등에 닿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타인의 손에 부르르 몸을 떤 한솔이 꼼지락거리며 신우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꼈다. 다른 사람은 못 알아차려도 자신만은 알아차릴 수 있는 비법으로 신우의 입꼬리가 3mm 정도 솟은 걸 확인하고선 키득거리며 손장난을 쳤다.
기사님이 운전해 주시는 차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가 잠시 내려서 편의점에 들렀다. 두 사람이 사는 동네는 카페나 와인 바는 있어도 이런 편의점은 없었기 때문에 시내에 나온 김에 사가기로 한 것이다.
딸랑이며 유리문이 열리자 본능적으로 “어서 오세….” 까지 말한 알바생이 눈을 크게 떴다. ‘이 날씨에 웬 얼죽코?’라는 생각보다 ‘아, 저런 얼굴이면 당연히 코트지. 패딩 절대 네버!’라는 생각이 드는 미남이 미친 기럭지를 뽐내며 문가에 서 있었던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바람 다 들어오게 문 잡고 있지 말라고 속으로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텐데 눈이 정화돼서 그런지 마음까지 깨끗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알바생은 서비스 정신 투철하게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을 수 있었다.
“앗, 죄송합니다.”
“…….”
카드를 바닥에 떨어뜨린 탓에 한 박자 늦게 건물 안에 들어온 한솔이 미안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계산대를 스쳐 지나가던 신우도 묵묵히 묵례를 한다. 드물게도 1층 전체를 쓰고 있을 정도로 내부가 커다란 매장인 탓에 두 사람의 모습은 금방 판매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아, 아녜요….” 하던 알바생만큼은 여전히 두 사람이 사라진 쪽에서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속으로 ‘미친, 미친….’만 반복했다.
‘미친… 존나 귀여워…!’
마음이 정화된 것과 별개로 미친 듯이 귀여운 걸 보게 되면 사람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건 만국의 공통이 아닌가. 알바생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건물과 지구를 마음껏 부수다가 사라졌던 두 사람이 계산대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입꼬리를 단속했다.
탁-. 네 캔에 만 원 하는 맥주들이 계산대 위로 놓인다. 맥주 캔을 타고 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한솔의 두 눈은 아까부터 거기서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다시 지구 하나를 마음속으로 보내 버린 알바생이 세상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묶음으로 만원이고요. 주류라 신분증 보여 주셔야 해요.”
“내가, 내가 낼래.”
당연하게도 키가 큰 쪽이 낼 줄 알았던 알바생은 연갈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검은 머리 청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속으로 헉 소리를 삼켰다. 아니, 저 얼굴로 벌써 성인이야? 본인도 동양인이면서 동양인 얼굴의 신비를 느끼고 있던 알바생은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진 한솔이 형질인 등록증을 수줍게 내밀자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들었다.
아, 오메가였구나.
목도리에 가려진 탓에 초커가 보이지 않아 베타인 줄 알았다. 어쩐지 안심이 된 알바생이 한솔에게 등록증을 돌려주고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완전 애기네.
“감사합니다.”
계산을 마치고 맥주 묶음을 슬그머니 밀어 주자 소년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신줏단지 모시듯 그걸 소중히 품에 안았다. 이번에도 역시 먼저 문을 잡고 서 있던 검은 머리 청년이 알바생과 눈을 마주치고선 가볍게 묵례한다. 총총 소리가 날 것 같은 가벼운 걸음으로 한솔이 밖으로 나가자 곧 딸랑이는 소리를 내며 유리문이 닫혔다. 알바생은 아무도 없는 편의점 안에서 잠시 심호흡하다가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다급하게 계산대 아래에서 핸드폰을 타다닥 두드리며 톡방에 두 사람을 목격한 격한 감상평을 남겼다.
친구들이 드디어 알바 때문에 맛이 가 버렸냐며 호들갑을 떠는 걸 흐뭇하게 지켜보던 알바생은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냉정하게 읽씹을 했다.
자신이 그만두기 전에 언젠가 한 번쯤, 잘생긴 그 둘이 다시 방문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
신우의 길쭉한 손가락이 가볍게 캔 뚜껑 사이를 파고든다. 도톰한 엄지가 뚜껑의 윗부분을 지그시 누르고 다른 손이 알루미늄 캔의 몸통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대로 힘을 주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입구 부분이 우그러졌다. 그리고 거품이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칙-.
오렌지와 황금빛 중간쯤의 색을 띤 액체가 꼴꼴꼴 소리를 내며 잔을 채웠다.
“자.”
한솔은 신우가 건네주는 잔을 얼른 받아 들었다. 거품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쌓여 있는 모습이 신기해서 이리저리 돌려 보며 구경하다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뭔가 구수하면서도 묵직한 냄새가 맡아졌다. 아버지가 종종 마시던 양주의 독한 냄새를 생각하고 있던 한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뭐라 했어.”
“어지러우면 그만 마셔야 해.”
“마시고 싶으면 나중에 또 마시면 되니까 무리하지 마. 알겠지.”
“응!”
조명을 하나만 켠 다이닝 룸은 은은한 색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렌지빛 불빛이 신우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운다. 한솔이 씩씩하게 대답하자 신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입꼬리가 매끈하게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그윽한 분위기와 어쩐지 평소보다 다정해 보이는 모습에 한솔은 두 눈을 또르르 굴리며 화끈해진 볼을 조금 문질렀다.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취한 기분이었다.
“짠 할까.”
신우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을 들자 마찬가지로 잔을 들어 올린 신우의 손이 다가온다. 이윽고, 챙!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두 잔이 부딪쳤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짠.”
“짠!”
한솔은 일단 호기롭게 한 모금 들이켰다.
“으엑….”
처음에는 보글보글한 거품 맛만 나서 물음표만 띄우던 한솔은 어느 순간 차가운 액체가 혀끝을 적시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완전 처음 마셔 보는 맛…까진 아니었지만, 그냥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맛이었다. 어른들은 왜 이런 걸 마시는 걸까. 세상에는 훨씬 맛있는 음료가 많은데 이걸 굳이? 하는 표정으로 한솔이 잔을 내려놓자 이미 맥주를 반이나 비운 신우가 생새우에 버터와 다진 마늘을 발라 구운 안주를 입에 넣어 준다.
“맛없어?”
“그건 아닌데… 보리차에 탄산 탄 것 같아.”
그 비유에 신우가 못 말린다는 듯 작게 웃었다. 노릇노릇 익은 새우 살이 입 안에 들어오자 본능적으로 우물거리던 한솔은 새우의 짭조름한 바다 맛과 맥주의 시원한 맛이 뒤섞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 생각보다 맛있네.
신우네 주방 아주머니의 솜씨가 듬뿍 들어간 덕인지, 아니면 둘의 궁합이 애초에 좋은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맛있으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한솔은 헤실헤실 웃으며 수제 크래커 위에 크림치즈를 듬뿍 올리고 거기에 다시 빛깔이 반지르르한 겨울 딸기를 올렸다. 금방 완성한 크림치즈 카나페를 신우의 입술 앞에 대어 주니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받아먹었다. 이런 커퀴 짓은 사람 많은 데서 해야 하는데… 만족스러움 반, 아쉬움 반으로 한솔은 맥주를 홀짝였다. 그다지 엄청나게 맛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기분이 좋으니까 이상하게 술술 들어갔다.
“얼굴에 열 오른다.”
“나?”
“응.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
흔히 어른들이 말하는 ‘취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던 한솔은 신우의 말을 듣고 자신의 뺨을 슥 문질렀다. 확실히 평소보다 훨씬 따끈따끈한 느낌이었다. 화면이 꺼진 핸드폰에 얼굴을 비춰 보자 조금 붉은 기가 도는 것도 같다. 아니, 근데 진짜 멀쩡한데…? 어리둥절해하던 한솔은 신우에게 물 흐르듯이 잔을 뺏기고 나서야 손안에서 잔이 사라진 걸 눈치챘다. 너무 자연스럽게 뺏긴 탓에 조금 억울해졌지만 또 이렇게 관리받는 건 좋았기 때문에 신우가 새로 쥐여 준 잔을 움켜쥐고 얌전히 물만 홀짝였다. 그러다 달달한 게 먹고 싶어서 사이다를 깠는데 그때까지도 열은 내리지 않았다.
“머리 아프면 약 먹을래?”
걱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려던 한솔은 머릿속에서 번쩍! 하고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잠깐… 신우 혹시 나 취했다고 생각하나?
‘그럼… 술주정 부려도 오케이?’
한솔은 히죽히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내리누르고 일부러 잠이 오는 것처럼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자신의 진짜 술주정이 뭔지도 모르지만,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무수히도 봤던 취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연기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냐… 나 안 아파….”
평소보다 조금 느린 어조로 말하며 한쪽 눈을 손등으로 비비자 곧장 손목이 붙잡혀서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초점이 풀려 맹한 얼굴을 흉내 내며 신우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조금 곤란해 보이는 얼굴로 옅게 눈가를 찡그린다. 커다란 손이 열이 오른 한솔의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한솔은 신우의 시원한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상체를 조금 휘청였다. 예상했던 대로 신우가 그의 허리를 붙잡아 지탱해 줬다.
“솔아.”
“으응… 시원해….”
자연스럽게 너른 품 쪽으로 스르르 무너진 한솔은 신우의 목 언저리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신우가 조금 곤란해 보이는 웃음을 흘린다. 취한 것도 아니면서 한솔은 술기운을 방패 삼아 실컷 어리광을 피웠다. 아… 이건 좀 좋은데? 의도치 않게 음주의 순기능을 발견한 한솔은 속으로 헤실헤실 웃으며 생각했다. 좀 더 닿고 싶은 것처럼 몸을 비비고 목마름이 가시지 않는 사람처럼 달라붙자 길쭉한 스툴 위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의 다리가 서로 얽혀 들어간다. 머리 위에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힘입어 한솔은 양 허벅지 사이에 신우의 다리를 끼우고 꽈악- 힘주어 조였다.
“…이한솔.”
무릎 끝으로 근육질인 허벅지를 누르고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로 신우의 다리를 스윽 문지르자 귓가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솔은 흠칫 놀라긴 했지만 이건 술주정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펼치며 애써 신우의 가는 눈초리를 외면했다. 혼자서 탄탄한 허벅지 근육을 손으로 주물러 본다거나 슬쩍슬쩍 신우의 다리를 조였다 풀며 가지고 노는데 머리맡에서 한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심했나 싶어 한솔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등 뒤로 딱딱한 대리석 재질의 바 테이블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손목이 차가운 대리석 위로 짓눌리는 감촉에 한솔은 눈을 깜박깜박 떴다. 어느새 바 테이블과 신우의 사이에 바짝 끼인 모양을 하게 된 한솔이 색색 긴장된 숨소리를 내뱉는다.
“앞으로-.”
끼익-. 스툴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주홍색 조명을 등진 신우는 역광을 받아 평소보다 훨씬 더 커다랗게 보였다.
“밖에서 술 마시는 건 금지야.”
“흐읏-!”
한솔의 것보다 훨씬 단단하게 느껴지는 무릎이 은밀한 곳을 거침없이 파고든다. 태생적 키 차이 탓에 한솔은 닿지 못했던 곳을 신우는 아주 가뿐하게 파헤쳤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천 위를 단단한 무릎뼈가 진득하게 문지르는 느낌에 한솔이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자연스럽게 다리가 들어 올려지고 평범한 자세로는 결코 드러날 일 없는 회음부가 문질러졌다. 작은 스툴과 바 사이에 불편한 자세로 구겨질 수밖에 없었던 한솔은 떨어질까 무서운 마음에 무심코 신우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로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뜨거운 무언가에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알겠어?”
고개를 숙여 한솔의 귓바퀴에 입술이 스칠 듯 말 듯 가까이 댄 신우가 피식거리며 웃더니 물었다. 한솔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뭘 해 줄까 기대감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데 신우는 상체를 슬쩍 물리는 것과 동시에 한치의 미련도 없이 그대로 몸을 떼어 내 버렸다. 한솔은 덕분에 순식간에 솜사탕을 씻어 먹은 너구리가 되어 버렸다.
“왜.”
한솔이 허망한 눈으로 신우를 바라보자 작은 몸을 허리째 붙잡아 들어 올린 신우가 스툴에 제대로 앉게 만든 다음 무심하게 물었다. 한솔은 억울함에 양손을 꾹 움켜쥐었다. 방금 분위기 좋았는데…! 왜, 왜 여기서 멈추는 거야!-라고 말할 순 없었기 때문에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한다. 한솔은 여기서 물러날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더 치대 볼지 고민하다가 억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울컥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멈춰….”
치익-. 새 맥주 캔을 딴 신우가 캔째로 맥주를 원샷 했다. 그 거친 움직임에 굴러떨어진 물방울이 조명의 불빛을 받아 반짝 빛난다. 턱 아래 맺힌 물기를 손등으로 가볍게 훔쳐 닦아 내는 모습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조금 설레고 만 한솔은 아까보다 약간 더 짙어진 것 같은 신우의 두 눈과 마주치자 후다닥 고개를 숙였다.
“우리 이제 성인인데….”
“…….”
“술도 마실 수 있는… 앗!”
“발랑 까져서는.”
신우가 한솔의 콧등을 가볍게 튕겼다. 한솔은 다급히 두 손으로 코를 가리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서 싫어?”
한솔도 당장에 여기서 일을 치를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재미만 좀 보자는 거지. 2차 발현을 하기 전에야 기약 없는 날짜 때문에라도 마음이 급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는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늦은 장마가 시작됐던 그 날의 창고의 습하고 무거운 냄새를 잊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그새 반년이 지나 한 살을 더 먹게 된 지금의 한솔은 그때 그렇게 휩쓸리듯 일을 치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전히 각인 부작용의 후유증을 걱정하는 신우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렇게 계획 없이 중요한 일을 해치우듯 저질러 버려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
“아니.”
신우가 손을 뻗는다. 길쭉한 손가락이 한솔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살살 떼어 냈다.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귀 뒤로 넘겨 주고 귓바퀴를 은밀하게 쓰다듬는 손길에 열이 조금 가라앉았던 한솔의 얼굴이 다시 화르륵 타올랐다. 조금 새침하게 변했던 한솔의 눈매가 전처럼 순하게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고 신우의 손길을 즐기고 있던 한솔의 귀에 직격탄이 내리꽂힌 건 그 순간이었다.
“귀여워.”
“…….”
“그래서 참기 힘드니까 너도 협조 좀 해.”
…무슨 대답을 한 건지 모르겠다. 뭐라 했지? 아무 말도 안 했나? 설마 이상한 말 같은 거 한 건 아니겠지? 심장이 금방이라도 펑- 하고 터져 버릴 것같이 소란스러운 탓에 한솔은 생각을 오래 이어 갈 틈이 없었다. 그저 더듬거리며 테이블 위를 훑다가 가장 먼저 잡힌 사이다 캔을 기울여 비어 있던 잔에 가득 채울 뿐이다. 덤으로 처음 따랐던 맥주가 반쯤 남아 있던 신우의 잔에도 사이다를 부어 버렸다. 아무튼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했다.
“짠, 짠 해- 얼른…!”
얼른 이 위기를 모면하고자 한솔이 신우를 마구 닦달했다. 신우는 얘가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맥주와 사이다가 섞인 오묘한 액체가 든 잔을 들어 올렸다. 챙! 두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진다. 곧장 잔을 기울이자 짜릿한 탄산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에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한솔은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유서 깊은 정치인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오냐오냐 예쁨만 받고 자랐던 한솔에게 ‘귀엽다’라는 한마디는 사실 그렇게 심금을 울릴 만한 단어는 아니었다. 상대가 유신우라서? 그건 이 다정한 예비 약혼자를 너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신우는 물론, 자신이 직접 말하는 것보단 한솔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걸 더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본인이 표현하고자 할 때는 둘러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분류였다. 귀엽다는 말도 고작 한두 번 들어 본 게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한솔은-.
‘유신우 유죄. 아무튼 유죄!’
마음 한편에 언제나 자신이 표면적으로 내보이는 모습이 아니어도 신우가 나를 지금만큼 좋아해 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솔은 그 대답의 일부를 엿들은 기분이었다. 쿵쿵쿵-. 알코올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세차게 뛰는 가슴을 들킬까 봐 한솔은 속으로 끙끙거리며 앓았다. 그래서 신우가 유독 조용하다는 것도, 그의 상태가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다는 점도 눈치채지 못했다.
“…?”
한솔은 테이블 위로 짙은 그림자가 지는 것을 보고 의아함에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손등에 핏줄이 단단히 일어선 채 테이블 위를 짚고 있는 유려한 손이 보였다. 조금 더 시선을 위로 하자 일전에 한솔이 선물한 커프스 링크가 단정하게 잠긴 소매 끝에서 반짝이는 모습이 보인다. 주홍빛 조명을 받아 고급스러운 원단에 휘감긴 팔에 서서히 음영이 지고 그에 움찔 몸을 떤 한솔이 몸을 바로 하려는 순간, 등 뒤로 툭- 하고 탄탄한 가슴이 닿았다.
“시, 신우… 으앗!”
“…….”
부름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그대로 와락 끌어안겼다. 힘세고 커다란 개한테 덮침 당한 기분이었다. 한솔은 폐가 짜부라지는 느낌에 신우의 품 안에서 파닥파닥 팔을 흔들었다. 물론, 그럴수록 몸을 구속하는 손길은 강해졌기 때문에 그가 벗어날 방법은 요원해 보였다.
목덜미에 훅, 하고 뜨거운 숨결이 닿는다. 흡… 한솔이 어떠한 예감을 느끼고 짧게 숨을 들이켜는 순간, 페로몬 샘이 있는 부분을 콰득- 깨물렸다.
“흐, 읏….”
굳게 닫혀 있던 샘은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깨물린 곳을 할짝할짝 정성 들여 핥아 주자 조금씩 조금씩 녹녹하게 풀어졌다. 덩달아 흐물흐물해진 한솔이 완전히 신우의 품 안에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어둑한 다이닝 룸 안에 숲 내음과 매화 향기가 활짝 만개했다. 날카로운 콧대를 한솔의 목덜미에 비비적거린 신우가 폐부 가득 향기를 담아 가려는 것처럼 한껏 숨을 들이켠다. 바짝 긴장한 한솔이 몸을 굳히며 앓는 소리를 냈다.
‘…설마, 취했나?’
한솔은 문득 자신이 신우의 맥주잔에 사이다를 부어 버린 걸 떠올리며 울상을 지었다. 아까까진 분명 멀쩡해 보였으니 그사이에 사달이 날 일은 분명 그것밖에 없었다. 신우는 한솔을 품에 가두려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파고들려는 건지 모르게 자꾸만 몸을 붙여 왔다. 안겨 있는 것 자체는 좋았지만 예민한 곳을 간지럽히는 숨결 탓에 자꾸만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한솔이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있자 신우도 그를 옥죄려 하지 않고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그 상태로 몇 분, 혹은 몇십 분은 안겨 있었던 것 같다.
스르르-.
어느 순간 몸을 구속하던 단단한 팔에서 힘이 풀렸다. 한솔은 무거운 몸이 자신의 뒤로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고 화들짝 놀라 신우의 팔을 붙잡았다. 물론, 본래도 한솔의 힘으로 덩치가 배는 차이 나는 신우를 지탱하기란 무리였겠지만 수면 상태에 들어간 몸은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다. 결국 같이 스툴에서 미끄러지고만 두 사람이 바닥 위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한솔은 긴 속눈썹을 곱게 내리고 색색거리며 잠들어 버린 신우를 보며 황당함에 입술을 달싹였다.
“진짜 자…?”
“…….”
“진짜??”
“…….”
“거짓말이지…?”
평소에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신우의 가슴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느리게 부풀었다 가라앉는 모습이 영락없이 꿈나라행이었다. 한솔은 울상을 지었다. 신우의 어머니인 문 여사는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패션 브랜드의 대표인 탓에 한국에 있는 날보다 외국에 나가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아버지인 유 회장은 해외 협력 업체와의 일로 출국했다는 보도가 난 게 벌써 이틀 전이다. 한마디로 이 커다란 저택에 있는 사람이라곤 사용인을 제외하면 두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이 의원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자고 가는 건 무리여도 최대한 늦게까지 뻐겨 보려 했던 한솔의 계획이 와장창 되는 순간이었다.
“씨이… 신우 너도 밖에서 술 마시는 거 금지야….”
신우가 이렇게 아무한테나 치댄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치대기만 했던가? 아주 목덜미를 잘근잘근…. 전생에 개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씹고 깨물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한솔은 씩씩거리며 평화롭게 잠이 든 신우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그리고 누가 봐도 섰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볼록해진 자신의 앞섶을 내려다보며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이미 바지 뒤는 흠뻑 젖은 뒤였다.
‘진짜 내일 일어나기만 해 봐….’
결국 때아닌 정신 수련을 하며 앞섶이 가라앉을 때까지 버틴 한솔은 월 패드로 집사님을 호출해 신우를 방으로 옮겼다. 당연히 혼자 남은 한솔을 그대로 둘 집사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사님은 그를 집으로 데려다줄 기사님을 불러 줬다. 그렇게 강제 귀가 조치된 한솔은 내일의 복수를 기약하며 잠에 들었다.
***
지이잉-.
“이한솔, 너 핸드폰 울리는데?”
스트레칭을 위해 사이드 스플릿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한솔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프론트 스플릿)으로 자세를 바꿨다. 부드럽게 돌아가는 상체에 최은혜가 ‘와우!’ 하며 짝짝짝 박수를 친다.
“왜 그래, 민망하게… 너도 쉽게 되는 거잖아.”
“야, 나야 이걸 몇 년 했는데! 넌 일 년이나 쉬어 놓고 그게 또 된다?”
“겨우 일 년 쉬었다고 안 되면 억울하지.”
“예에, 예에. 전 일주일만 쉬어도 뻣뻣해지는데 참 부럽습니다-.”
한솔은 벼르고 별렀던 대로 다시 발레를 시작했다. 애초에 계획은 여름 방학 땡 치면 바로 시작하는 것이었지만 갑작스럽게 첫 히트 사이클을 겪기도 했고 그로 인해 페로몬 안정이 필요하니 외출을 최소화하라는 강 원장의 조언에 따라 형질인 등록증이 나오고 난 뒤로 미루었던 것이다.
한솔이 다니는 학원은 학원이라기보단 교습소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으로 한때 발레리나로 유명세를 치렀던 원장님 혼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물론, 정식으로 가르치는 게 원장님 한 명뿐이라는 거지 조교에 도우미까지 보조 인원만 해도 수십 명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학원이었다. 당연히 교습비는 업계 탑 수준이고 오메가 전용이기 때문에 여기서 만나는 얼굴은 대부분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최은혜도 그런 이들 중 한 명으로 꽤 건실한 제약 회사의 자녀이자 한솔의 몇 안 되는 ‘진짜’ 친구 중 하나였다.
“누구야, 아까부터?”
아무래도 10분 간격으로 끈질기게 진동이 울리니 궁금했던 모양이다. 한솔은 엎어 놨던 핸드폰을 뒤집어 툭툭 화면을 건드리며 말했다.
“신우.”
“유신우? 걔가 왜…… 너 설마 여기 온 거 말 안 하고 왔어?”
“응.”
그녀가 아는 유신우라면 한솔이 교습 중일 땐 연락을 하지 않을 텐데 그게 이상해서 물어봤더니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은혜가 뜨악한 얼굴로 한솔을 바라봤다. 서로 죽고 못 살던 애들이 웬일이래… 최은혜는 얘들도 발현했다고 내외를 하나 싶어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한솔과 신우의 2차 발현은 이미 그녀 또래 사이에선 소문으로 쫙 퍼졌기 때문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솔은 눈꼬리가 바짝 올라가서는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키패드를 툭툭툭 건드렸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신우네로 달려갔던 한솔은 유신우가 숙취 하나 없는 얼굴로 헬스를 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난데없는 한솔의 이른 방문에 신우는 1차로 당황했고 한솔이 열이 올라서 다다다 쏟아 내는 말에 2차로 당황하고 말았다.
-신우, 너! 어떻게 그러고 그냥 자 버릴 수가 있어!
-…솔아? 잠깐만, 왜 이렇게 일찍-.
-뭐가 일찍이야!! 일어나 있으면서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
-너 원래 이 시간에 자니까….
한솔은 잠귀가 매우 밝은 편이었다. 그런 한솔이 신우의 모닝콜을 받기 위해 아침엔 진동도 마다하고 벨 소리를 해 놓는다는 걸 신우도 알기 때문에 그는 웬만해서는 7시 이전엔 연락을 보내지 않는다. 나름의 배려였고 십수 년을 그러고 살았으니 두 사람 모두에게 익숙한 루틴이었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한솔에게는 안중에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면 보냈어야지!!
그러자 신우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단언컨대, 이한솔 인생에서 유신우가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건 여태껏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미안. 그,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내가 중간부터 기억이 없어서….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작게 벌렸다. 기억이 끊겼다니. 술을 마시는 것도 신우의 술주정을 본 것도 난생처음인 한솔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한솔은 잠시 신우가 어제 일을 없는 셈 치고 싶어서 저러나 의심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그 유신우가 이한솔에게 한 일을 가지고 무책임하게 굴 리 없다. 그래서 그 생각은 곧바로 폐기됐다. 무엇보다, 신우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정말 당황스러워 보였으니까.
차마 그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손끝만 움찔거리는 모습에 허탈함을 느낀 한솔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신우가 깜짝 놀라 한솔에게 다가온다. 무릎에 얼굴을 묻어 버리곤 눈도 안 마주쳐 주는 한솔의 모습에 신우는 애가 탔다. 기억이 뚝 잘린 것도 처음이라 무척 당황스러운데 한솔이 이렇게 속상해하니 자신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게 분명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신우는 이성이 없는 알파가 상대적으로 힘도 약하고 덩치도 작은 오메가에게 할 수 있는 온갖 부정적인 상상을 다 하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체기가 있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미안해….
-…….
-솔아, 얼굴 좀 보여 줘… 응?
한솔은 사실 신우가 어르고 달랠 때부터 마음이 풀렸지만 꼴사납게 혼자 세워서는 축축한 바지를 갈아입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창피함과 서러움이 생각나 부러 더 꽁꽁 얼굴을 숨겼다. 물론, 그게 아주 나빴다는 건 아닌데… 아, 아냐… 이번엔 쉽게 안 보여 줄 거야. 한솔은 내심 좋아라 했던 진실은 마음속에 꼭꼭 감춰 둔 채 이래도 싫어, 저래도 싫어하며 신우를 애태웠다. 그럴수록 신우의 머릿속에서 어떤 어마무시한 착각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어제… 내가, 무슨… 짓, 했어?
신우는 정말이지 태어나서 가장 긴장한 순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극도로 긴장해서 그런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한솔이 봤다면 ‘신우도 긴장이란 걸 하는구나.’ 하고 신기해했겠지만, 하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외면하고 있던 한솔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태평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진짜 기억 안 나?
-응… 미안….
-막… 나 붙잡고 안 놓아줬잖아.
-…….
-깨물고, 아프게 했으면서….
한솔은 조용해진 신우의 눈치를 힐긋힐긋 보며 덧붙였다.
-진짜 아프고 서러웠는데… 신우 네가 혼자 잠들어서 그대로 집에 와야 했단 말야.
특별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솔은 신우가 어제의 기억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 부러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그러면 좀 더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애정을 바라고 상대의 관심을 끄는 건 굳이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하필이면 판단력을 잃은 상태인 신우에겐 한솔의 말이 굉장히 안 좋은 쪽으로 들렸다는 게 문제다.
그저 귀여운 헤프닝으로 끝나기엔 두 사람이 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발생한 오해였다. 신우는 그렇게 교양 있는 척 다했던 주제에 아프다는 애를 데리고 끝까지 간 줄 알았고-심지어 뒤처리도 안 해 주고 그냥 보냈단다. 이런 개쓰레기 새끼….- 한솔은 그냥 좀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어제 그렇게 속상했노라고. 그러니까 얼른 달래 주라는 게 요지였는데 문제는 한솔이 연기를 잘해도 너무 잘했다는 것이다.
서러운 연기가 그냥 좀 서러운 정도가 아니라 정말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그게 결정적이었다.
-……미안해.
-…….
-…그, 많이….
몇 번이나 달싹이던 입술은 끝내 끝맺음을 맺지 못하고 굳게 닫힌다. 한솔은 좀 더 어르고 달래 줄 줄 알았던 신우가 안 좋은 안색으로 연거푸 얼굴만 쓸어내리자 ‘어디 아픈가?’ 싶으면서도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심술이 돋아 자신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덕분에 주변 공기만 더욱 삭막해져 버렸다. 많이 아프고 힘들었냐고 묻고 싶었던 신우는 참담한 심정에 차마 입술을 떼어 낼 수 없었다. 첫 번째로, 뭐가 됐든 한솔에겐 기만이 될 상황이었고 두 번째로, 한솔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자신이 뭘 말해도 변명이 되겠구나 싶어 말 한마디 덧붙이기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평소처럼 끌어안거나 쓰다듬지도 못한 채 멀찍이 떨어져서 사과만 건넸다.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 자신이 만지면 싫어할 것 같아서였다.
-아냐, 미안해….
그리고 한솔은 오히려 그 태도에 정말로 토라져 버렸다.
언제 끝나는데?
♡시누♡
8시쯤 끝날 것 같아
그럼 나 데리러 와줘
발레 학원이야
예전에 다녔던데 기억하지?
♡시누♡
거긴 6시면 끝났던 것 같은데
기사님 보내줄게. 편하게 가
싫어
신우가 꼭 와야 돼
알겠지?? 꼭!!
다만, 은혜가 착각하고 있는 점이 있다면 10분 간격으로 진동이 울리는 것이 신우가 한솔을 찾느라 그러는 게 아니라 한솔이 신우를 닦달하면 신우가 마지못해 답장하는 간격이 그 정도였다. 신우는 당분간 자신의 반성을 위해 떨어져 있을 생각이었는데 토라지면 평범하게 토라지는 게 아니라 평소의 성향과는 정반대로 상대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편인 한솔은 자아 성찰의 기회도 주지 않고 신우를 굉장히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정신적인 자괴감과 더불어 죄책감의 근원인 한솔이 자꾸만 뭘 해 달라 하니 신우는 거리를 두지도 못하고 고대 주술에 걸린 것처럼 꼼짝없이 끌려다니는 중이었다.
알았어
어쩐지 ‘……알았어.’라고 체념한 듯한 목소리가 들리는 대답이었다. 답장이 올 때까지 뚫어져라 대화 창만 보고 있던 한솔은 일단 원하는 대답을 얻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두 사람 사이의 오해는 순조롭게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솔이 너 작품반 들어갈 거야?”
“작품반? 아니, 무슨 콩쿠르 나갈 것도 아닌데. 왜?’
“콩쿠르 안 나간다고? 입시 때문에 다시 시작한 거 아니었어?’
스트레칭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동작을 연습해 보기 위해 바를 붙잡았던 한솔이 은혜의 착각을 알아차리고 풋 하고 웃었다.
“아냐, 나 그냥 운동하려고 다시 시작한 거야.”
아무것도 안 하니까 체력도 달리고 너무 몸이 굳어서 힘들었다고 징징대는 한솔의 말을 듣고 은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랑 바뜨망을 반복하는 한솔을 바라봤다. 발레핑크 타이즈가 촘촘하게 감싼 다리는 군살 하나 없이 매끄럽고 유연했으며 쉬폰 스커트가 감싼 하체는 완벽한 라인을 자랑했다. 상체는 곧고 허리는 쏙 들어가 무슨 자세를 해도 작품이 되는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엄살도 저런 엄살이 없었다. 몸이 굳은 인간이 저렇게 완벽한 각도의 바뜨망이 될 리가 있나.
심지어 기본 동작을 한 번씩 거쳐 가더니 가볍게 피케 턴을 도는 모습에 은혜는 혀를 내둘렀다. 코랄핑크색의 토슈즈가 감싼 발끝이 우아하게 통통 튄다. 나긋하고 활력 있게 턴을 돌 때마다 짧은 스커트가 허벅지 위를 살랑인다. 굳기는 무슨 아주 펄펄 날아다니는구만. 은혜는 재능 있는 친구가 취미반인 것에 대해 공익적인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같은 대회를 준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미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결국 한숨을 삼킨 그녀는 한솔에게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에 저장된 대회용 연습곡을 틀었다. 친구를 본받아 연습할 시간이었다.
“그럼 대학은 일반 전형 쓰게?”
한 타임을 온전히 자율 연습에 쓰고 몸이 풀린 후 개인 교습을 받았다. 상냥한 얼굴의 원장 쌤은 사실 스파르타 군대의 일원이었던 게 분명하다. ‘아, 원투- 좋아요. 원투 톡톡톡! 옳지!’ 하며 끊임없이 추임새를 넣어 굴리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발가락이 부서져라 턴을 돈 뒤였다.
개인 교습이 끝난 뒤 연습실에서 다시 만난 은혜와 한솔은 다 완전히 지쳐서는 벽면 한쪽을 전부 차지하는 거울 앞에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사실 많은 오메가 전용 학원들이 이런 용도로 쓰였기 때문에 교습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편이다. 알파에게 클럽이 있다면 학교를 가지 않고 사교적인 활동도 거의 불가능한 어린 오메가 자녀들에겐 소규모 아카데미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 개학하기 전에 상담받아 봐야지. 안 그래도 아빠가 불러 주신다 했거든.”
“하긴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낫지. 근데 난 네가 완전히 이쪽으로 진로 잡을 줄 알았거든? 좀 의외다.”
어릴 때 네가 좀 열심히 했냐고 웃으면서 하는 말에 한솔은 민망함을 느끼고 볼을 긁적였다. 발레 학원에 오는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한솔도 ‘백조의 호수’를 본 뒤 무용수들의 화려하고 압도적인 군무에 반해서 발레를 시작한 편이었다. 그때의 한솔이 발레에 얼마나 진심이었냐면 학원 자체 공연으로 초, 중등반을 모아 백조의 호수를 공연한다 했을 때 초등반이었던 한솔이 오직 실력만으로 중등반 학생들을 꺾고 오디션에 합격해 ‘오데트 공주’ 역을 맡을 정도였다.
한솔이 ‘남자’의 꿈을 꾸기 시작한 뒤로 이쪽 세계에서 태어나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던 게 저 때부터였던 것 같다. 한솔이 사는 세계는 2차 성별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서 그런지 오히려 1차 성별에 대한 차별과 차등은 없다시피 했다. 1차 성별이 남성인 한솔도 ‘공주’ 역을 맡을 수 있고 밋밋한 화이트 타이즈가 아니라 무대 조명 아래 서면 눈부시게 반짝이는 화려한 ‘백조’ 의상도 입어볼 수 있다.
‘그때 신우 되게 귀여웠는데.’
공연을 마치고 의상을 입은 채 신우와 기념사진을 찍었었는데 평소의 단정한 옷차림이 아닌 화려한 모습이 어색해서 그런지 신우는 유독 한솔과 눈을 못 마주쳤다. 덕분에 사진 한 장 찍는데 한참이 걸렸던 기억이 있었다.
한솔은 자신의 책상 한쪽을 장식하고 있는 액자를 떠올리며 방긋 웃었다.
“오늘 몇 시까지 있어?”
“닫을 때까지 있으려고.”
“6시까지? 누가 데리러 온대?”
“응. 신우가.”
그러자 은혜가 ‘걔도 참… 극성맞다.’ 하는 얼굴로 한솔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현실은 한솔이 자신의 귀가권을 소매 넣기 한 것에 가까웠지만 냉전 기간이 아니었다면 신우도 자진해서 데리러 가겠다고 했을 테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신우가 자신을 가둘수록 행복한 한솔과 달리 자유의 영혼인 최은혜는 이런 문제로 자신의 알파와 참 많이도 싸운 거로 기억한다. 한솔은 최은혜의 4살 연하 애인…이라기엔 처음 만났을 때가 겨우 6살이었던 꼬마 숙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영이는 많이 컸어?”
“말도 마, 진짜.”
언니가 학원에 가는 걸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 극혐했던 꼬마 숙녀는 벌써 중학생이 된 모양이다. 그러면 은혜가 저리 학을 떼는 것도 이해는 갔다. 신우도 열셋에서 열넷 사이에 키가 확 컸었으니까. 성장통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아팠다는데 한솔은 그것도 모르고 매일 같이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며 학교에 갔다 온 신우에게 놀아 달라고 졸랐었다. 술래잡기는 기본이고 온갖 뛰어노는 놀이는 다 한 것 같은데 주변에서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을뿐더러 신우조차 티를 내지 않은 탓에 한솔은 한참이 지나서야 신우의 통증을 알게 됐다. 무슨 놀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갑자기 주저앉은 신우가 한참 동안 일어서지 못했던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아픈 건 티 좀 내지… 신우는 바보야. 그때 얼마나 속상하고 미안했는지. 발갛게 부은 무릎에 따뜻한 수건을 올려 주며 훌쩍훌쩍 우는 한솔을 달래 주던 신우의 손길은 그때도 다정하고 애틋했다.
“…….”
그래서일까. 반대급부로 한솔은 또다시 아침의 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만질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주변을 하염없이 맴돌던 손끝. 그리고 끝내 닿지 못하고 주먹을 굳게 움켜쥐던 신우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원래도 신우 생각을 많이 하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무슨 얘기만 해도 다 아침의 일로 귀결되고 있었다. 한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냥 좀 참을걸. 답답한 마음에 슈즈를 신은 발끝을 붙잡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냐… 그냥 안에만 있으니까 답답해서.”
“그럼 밖에 좀 나갔다 와. 1층에 카페 새로 생겼는데 괜찮더라.”
“그럴까….”
한솔은 잠시 고민하다가 리본을 풀고 토슈즈를 벗었다. 오랜만에 신었다고 내외하는지 생각보다 발이 얼얼했다. 절뚝거리며 로커 룸에 들어간 한솔을 반기는 건 텅텅 빈 널찍한 공간이었다. 자신의 사물함을 연 한솔이 소지품을 구겨 넣고 바지를 챙겨 든다. 갈아입기 귀찮아서 타이즈를 신은 채 그대로 쑥 다리를 집어넣었다.
“올 때 뭐 사다 줄까?”
“아, 그럼 바닐라라테 한 잔만.”
“알겠어. 근데 나 좀 늦을 수도 있어.”
“사다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조심히 갔다 오라며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은혜를 뒤로 하고 연습실을 나왔다. 중심가에 위치한 커다란 건물의 4, 5층을 전부 쓰는 곳이라 그런지 복도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바로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3층’. 3층에 멈춰 있는 패널을 보며 버튼을 꾹 누른다. 한솔은 패널의 숫자가 금방 바뀌기 시작하는 것을 멍하게 지켜보다가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여기 3층에 뭐가 있더라.’
한솔에게 그런 궁금증을 심어 준 건 각 층의 가게를 알려 주는 아기자기한 스티커가 붙은 버튼 때문이었다. 1, 2층의 층 버튼 아래에는 각기 다른 폰트로 스티커가 붙어 있었지만 3, 4, 5층은 텅 비어 있었다. 은혜의 말대로 1층은 카페였고 2층은 한솔이 발레 학원을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피아노 학원이었다. 한솔이 다니는 학원이야 소개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 그렇다 치고, 여긴 그냥 개인 오피스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한솔은 띵- 하고 문이 열리자 곧 그런 궁금증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괜히 나왔다….’
정면에서 아주 강한 칼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나온 지 3분도 안 돼서 후회한 한솔은 지퍼를 끝까지 올린 두꺼운 롱패딩에 파묻힌 채 뒤뚱뒤뚱 걸음을 옮겼다. 기분 전환 겸 잠깐 산책이라도 하려던 생각은 싹 사라지고 얼른 음료나 사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어서 오세요!”
딸랑-. 귀여운 종소리가 울리자 카페 점원들이 하나같이 하던 일도 멈추고 새로 온 손님을 향해 밝게 인사한다.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꾸벅 마주 인사하다가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계산대 뒤로 줄을 섰다. 밖이 워낙 추워서 그런지 카페는 거의 만석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커플들로만. 젊은 연인들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누가 봐도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대화하는 모습에 한솔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도, 나도 카페 데이트… 솔로도 아니건만 이 추운 겨울에 솔로 느낌을 팍팍 받은 한솔은 차마 카페 점원이 보는데 울상을 짓진 못하고 입술만 꼭꼭 씹을 뿐이었다.
“바닐라라테랑… 음, 캐모마일차 한 잔 주세요. 둘 다 라지로요.”
“드시고 가실 건가요?”
“아니요… 테이크아웃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12,500원입니다.”
계산을 마치고 잠시 근처에서 뻘쭘하게 서 있다가 음료가 나오자 낚아채듯 들고 카페를 나왔다. 더 이상 저 커퀴 소굴에 있고 싶지 않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커퀴 짓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었던 주제에 한솔은 역지사지를 통감하며 쓸쓸한 옆구리를 문질렀다.
아, 5층….
어느새 다시 5층으로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잠시 올려보다가 등 뒤에서 쌩- 하니 바람이 부는 느낌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냥 걸어서 올라가자. 한솔은 계단을 향해 몸을 틀고 터벅터벅 올라가기 시작했다. 2층 비상구 문은 굳게 닫힌 채 머리 위로 전등 센서만 깜박이고 있었다. 당연히 3층도 그럴 줄 알고 계단을 올라가던 한솔은 희미하게 틈새가 벌어진 문 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잠시 의아했을 뿐이다. 한솔은 곧장 계단을 올라가려 했다. 만약, 그 틈새 사이로 아름다운 선율이 들리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피아노 소리?’
또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한솔도 어릴 때 교양 삼아 피아노를 배우긴 했다. 커 가면서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었는지 시들해지긴 했지만. 신우네 집에는 연주자용인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데 특별한 날이면 천성 재단에서 후원하는 연주자를 초청해 연주를 듣곤 했다. 두 사람이 어릴 때는 피아노 의자에 함께 앉아 뚱땅거리는 용도로 사용되느라 장인이 만든 비싼 몸이 수난을 겪긴 했지만 말이다.
‘좋다.’
그래도 덕분인지 듣는 귀 하나는 트여서 훌륭한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한솔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비록 계획했던 산책은 하지 못했지만 신우와 삐걱거리는 관계로 속상했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따뜻한 선율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본전은 건진 셈이라고 생각하며 한솔은 오래된 추억을 떠올렸다. 햇살이 내리쬐던 방 안에서 작은 손을 가지고 하얀 건반을 통통 튕기던 어린 날의 두 사람이 떠오르는… 아주 섬세하고 아름다운 연주가 텅 빈 어둑한 공간을 환하게 비췄다.
문득, 이런 연주를 하는 사람은 과연 누굴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분명 신우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겠지. 한솔은 추운 것도 잊고 그렇게 오래오래 서 있었다. 그가 기껏 밑에까지 내려가서 사 온 캐모마일차가 완전히 식어 버린 걸 발견한 건 세 번째 곡의 연주가 끝났을 무렵이었다.
***
“이한솔.”
“네-.”
개학을 했다.
한솔은 2학년이 되었고,
“유신우.”
“네.”
신우와는 여전히 화해하지 못했다.
한솔은 학교의 유일한 오메가 학생이라 그런지 보호 겸 특혜를 받아 이번에도 신우와 같은 반이 되었지만 1학년 때와 달리 짝이 되지는 못했다. 2학년 담임은 자신이 나서서 한솔을 고립시켰던 남우현과는 전혀 반대되는 성향의 선생님으로 남우현 선생 사건 때 한솔이 반성문을 일부러 잘못 제출했던 그 문학 선생님이었다. 학폭위가 열리자 가장 먼저 나서서 한솔을 보호했고 남선생의 해임을 주장했던 그녀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렇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다시 연을 맺게 되었다.
그녀는 학기 초 상담에서 ‘신우와 붙어 있는 게 한솔이도 안심이 되겠지만, 선생님은 한솔이의 교우 관계가 좀 더 넓어졌으면 좋겠어.’라며 자리 배치의 이유를 밝혔다. 그런 선생이 이끌어 가는 반이라 그런지 한솔은 1학년 때 자신을 따돌렸던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면 무난하게 2학년 5반에 섞여 들어갔다. 그렇게 처음 입학을 결정했을 때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베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라 그런지 다른 친구들과 붙어 있을수록 신우와의 사이는 어색해져만 갔다. 예전에는 자신의 기준대로 안 되는 건 안 된다며 단호하게 한솔을 제지했던 신우는 요즘 들어 무조건 예스맨이 되어 버렸다. 조금만 세게 만져도 깨지는 유리 공예품 다루듯이 한솔을 대해 한솔은 속으로 ‘형아가 재미없어졌어…’라며 상심하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
한솔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짝꿍을 얻게 되었다.
바로, 권정우였다.
권정우는 뭐라 할까….
“이놈아! 수업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됐다. 일어나!”
학교를 왜 다니는지 모르겠는 아이였다.
한국지리 선생님이 유인물로 권정우의 너른 등을 팡팡 내리치자 권정우가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주변 애들이 권정우의 보기 드문 덩치에 흠칫흠칫거리든 말든 그는 오로지 사명감 하나로 선생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얼굴에 덕지덕지 짜증이 묻어나긴 했지만 권정우는 의외로 쓸데없는 반항은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게 신기하달까.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기도 하고… 물론, 수업 시작부터 엎어지는 게 제일 문제지만. 체육 창고 정리하던 때를 생각해 보면 땡땡이도 자주 치는 것 같던데 아주 양아치는 아니었나 보다.
“뭐.”
한솔이 신기한 마음에 정우를 빤히 바라보자 권정우가 삐딱한 얼굴로 말했다. 한솔은 후다닥 시선을 교과서로 내렸다. 양아치 아니라는 거 취소. 눈빛만으로 사람 갈구는 게 아주 양아치 저리 가라였다.
한솔은 종이 치자마자 도망치듯 다른 아이 자리로 피신했다. 두 알파의 시선이 교실 안의 유일한 오메가에게로 향한다. 자연스럽게 시작된 알파들의 신경전에 주변의 애꿎은 베타 아이들만 죽어 나가고 있었는데 정작 시선을 받는 한솔만 몰랐다. 정확히는… 모르는 척했다. 신우의 시선이 등 뒤에 닿을 때마다 손끝이 찌릿거리며 이상 신호를 알려 왔지만 한솔은 부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척하며 주변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한솔이 너, 오늘도 학교 끝나면 바로 발레 가?”
“응.”
“아, 나도 어릴 때 엄마가 발레시켰을 때 좀 진득하게 할걸.”
“난 바이올린… 공부하기 진짜 싫어.”
새로 사귄 친구들은 은혜와 마찬가지로 한솔이 예체능 특기생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진짜 예체능 특기생들은 또 자신만의 괴로움이 있을 텐데 마냥 공부가 하기 싫은 이맘때의 아이들은 철없이 투덜거리기 바빴다. 진짜 예체능 특기생도 아니고 아직은 진로를 확실히 정하지 못해 방황 중인 한솔로서는 그냥 방긋 예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솔은 개학하기 직전에 만난 진로 상담 선생님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과요? 으음….
-역시, 힘들까요?
-아무래도 이쪽은 실기 비율이 워낙 높아서 오래 준비할수록 유리하기도 하고요. 물론 성적도 어느 정도 중요합니다. 이쪽 준비하는 친구들이 착각하기 쉬운 게 실기가 절대적인 것은 맞지만 결국 최상위권의 합격을 가르는 건 컴퓨터가 하는 거거든요. 한솔 학생은… 일 학년 성적이 꽤 괜찮네요?
진로 상담 선생님은 종이 뭉치를 뒤적거리더니 한솔의 일 학년 성적표를 찾아내고선 ‘6’이라고 적힌 전교 석차에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참고로 1등은 신우다. 분명 일 학년 내내 같이 붙어 다녔고 대외 활동이다 뭐다 해서 공부할 시간은 신우가 훨씬 적었을 텐데도 신우는 일 년 내내 탑을 놓치지 않았다. 누군가는 분하지 않냐고 하겠지만, 공부엔 그닥 흥미가 없는 한솔로선 미래의 약혼자가 아주 잘 크고 있는 것 같아서 뿌듯한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사실, 출석 일수가 달랑달랑할 정도로 다사다난한 일 년을 보냈던 한솔의 성적이 탑텐에 들 수 있었던 건 사교육의 힘 30%, 나머진 전부 신우 덕택이었다. 전문가들이 학교 선생님 성향을 파악해 예상 문제 리스트를 뽑아 주면 거기서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해서 신우가 요약본 족집게 리스트를 만든다. 거기서 끝인가? 하면 절대 아니었다. 요약본은 요약본이고 그걸 머리에 전부 집어넣는 건 한솔의 몫이었다. 그리고 신우는 이한솔 맞춤형 방식으로 그걸 전부 한솔의 머릿속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얼른 중간고사 기간 왔으면 좋겠다….’
한솔은 다른 학생들이 들었다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아무리 신우랑 요즘 내외를 하고 있다지만 한솔의 성적이 달렸다 하면 신우도 다시 엄한 선생님으로 돌변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는 한솔이었다.
-그런데 한솔 학생.
-네?
진로 상담 선생님은 이쪽을 준비할 거면 아무래도 여기에 특화된 선생님과 만나 보는 게 좋겠다며 다른 선생님의 명함을 건네줬다. 그리고 진지하게 이쪽을 생각하고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학원을 다니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남기고선 그 명함을 만지작거리는 한솔에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버님은… 이쪽 생각하는 거 알아요?
-…….
물론, 한솔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진… 허락 안 해 주시겠지.’
좋게 말하면 막내아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거고, 좀 안 좋게 말하면 보수적… 아니, 꼰대 같은 이 의원을 떠올리며 한솔은 한숨을 삼켰다. 진로를 이쪽으로 한다고 해서 직업으로까지 삼겠다는 게 아니다. 한솔은 그냥 조금 더 배워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언제나 한솔의 1순위 꿈은 신혼집에 감금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직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어릴 때부터 충분히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자기 주체성이 부족한 건지 모르겠지만 한솔에겐 남에게 경제적으로 소속되기 싫다는 욕구가 없었다. 지금도 증여받은 재산으로 평생 놀고먹어도 충분할 정도였지만 한솔은 신우가 사 주는 떡볶이가 더 좋았고 신우가 사 준 목도리가 더, 더 좋았으며 이왕이면 신우가 사 준 이불속에서 평생 동안 뒹굴고 싶었다.
그래도 백수는 좀 남 보기 안 좋으니까 갤러리 하나 열어서 바지 사장 노릇이나 하면 되지 않을까.
한솔은 제 것으로 되어 있는 고가의 그림 몇 점을 떠올리며 벌써 인생을 날로 먹을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 시간 뭐지?”
“담임 쌤일걸.”
“악… 망했다! 오늘 발표 내 차례부턴데!”
“힘내라.”
“화이티잉.”
친구들이 옆에서 떠드는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한솔은 어떻게 하면 이 의원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했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곰곰이 생각하던 한솔의 귀에 7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한솔이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오니 권정우는 벌써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정말이지 웬만하면 이 알파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 시간이 담임 쌤인 걸 떠올리며 잠자는 사자를 건드리는 기분으로 권정우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저기이….”
“…….”
“이번 시간 담임 선생님이신데….”
물론, 권정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저기….”
“…….”
“…저어….”
“…….”
“정우야…?”
“…….”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자 권정우의 너른 어깨가 움찔 떨린다. 한솔은 마치 1미터 80짜리 조각상이 몸을 일으키는 듯한 느낌에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눌린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린 정우가 한껏 짜증이 난 얼굴로 한솔을 휙 돌아봤다. 이러다 한 대 맞는 거 아냐…?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권정우의 얼굴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에 한솔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야.”
“…….”
“뭐 하냐.”
“……?”
머리 위에서 들리는 황당하다는 목소리에 한솔은 한쪽 눈을 살그머니 들어 올렸다. 교복 바지에 두 손을 푹 쑤셔 넣은 정우가 어이없다는 듯 한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솔은 그 순간 진심으로 이놈한테 쫄았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움 반, 짜증 반으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담임 쌤이 들어오시고 반장이 인사를 했지만 다 같이 ‘잘 배우겠습니다!’ 할 때까지도 한솔은 꿋꿋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직각으로 고개가 굳어 있어서 누가 봐도 어색하다는 게 티가 났으나 정작 한솔만 몰랐다. 다만, 옆얼굴을 태워 버릴 것처럼 노려보는 시선에 옆을 돌아볼 수 없었을 뿐이다.
정우는 지나가던 개한테 물어봐도 자신을 대놓고 피하는 이한솔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차라리 한결같이 무서워하거나 한결같이 피하기만 했다면 그도 신경을 껐을 텐데 이놈은 무서워하면서도 꼭 한 번씩 그를 건드렸다. 용감한 건지 아니면 그냥 멍청한 건지. 하긴, 이놈은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 그는 일 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솔의 분단보다 뒷줄에 앉아 있던 신우의 두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는다. 그는 담임이 주의를 줄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라나는 봄. 갈등이 무르익고 있었다.
‘닫혀 있네….’
한솔에겐 그간 없던 버릇이 하나 생겼다.
발레 학원이 있는 건물에 도착하면 먼저 1층 카페에 들려서 음료를 하나 산다. 음료를 쪽쪽 빨아 마시며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비상구 계단으로 향하는 루틴이었다. 그러면 이제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심장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로 만났던 봄의 연주-. 그 인상 깊었던 연주를 다시 들어보길 기대하며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그게 요즘 들어 한솔에게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복권을 긁는 심정이랄까. 하지만 아직 그날을 제외하면 문이 열려 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연주를 다시 들어 볼 기회는 없었다.
아쉬움에 머뭇거리던 한솔은 두어 번 뒤를 돌아보다가 결국 남은 계단을 올랐다. 지금까진 등원할 때만 잠깐 살펴보는 게 다였는데 오늘따라 미련이 남는 기분이다. 너무 일찍 왔나? 집에 갈 때 한 번 더 들러 볼까…. 고민하며 한솔은 5층 비상구 문을 열었다. 평소에는 취미반인 만큼 4층 연습실에서 혼자 연습하거나 가끔 놀러 오는 은혜와 노닥거리는 게 다였지만 오늘은 상담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원장실이 있는 5층부터 들렀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인 4층과 달리 5층은 작품반 아이들이 상주하는 곳이라 그런지 유독 서늘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돈이 아낌없이 투자된 만큼 방음 또한 끝내 줬지만 한솔은 괜히 분위기를 해치지 않게 사뿐사뿐 걸어 원장실 앞에 섰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부드럽게 열리는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자 한솔을 발견한 원장 선생님이 환하게 웃는다.
“한솔이구나, 어서 오렴.”
“안녕하세요, 원장님.”
“그래. 올 때 춥진 않았고?”
“요즘 날씨 많이 따뜻해졌어요.”
원장은 한솔의 취향을 고려해 고급스러운 잔에 히비스커스차를 따라 줬다. 다소곳한 자세로 차를 마시는 한솔을 보며 그녀는 옛 기억을 떠올린다. 마냥 예쁜 인형처럼 생겼던 아이가 벌써 열여덟이라니. 성숙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아이의 성장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공연을 올리며 몇 번 마주쳤던 아이의 알파가 문득 떠올랐다. 이렇게 예쁜 아이니 그 알파 아이도 참 마음고생이 심하겠구나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참 주책이다 싶어 호호 웃었다.
“이번에도 작품반은 안 들어올 거니?”
“네에….”
“아쉽긴 하지만 한솔이 결정이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연말 공연은 생각해 보는 게 어떠니. 내년이면 한솔이도 고등학교 3학년이니까 지금처럼 다니기는 힘들 테고. 10대의 마지막이란 게 생각보다 미련이 남거든.”
학원에서는 분기마다 다양한 작품을 공연으로 올리지만, 그중에서도 정기적으로 올리는 작품이 딱 두 개 있다. 7월 넷째 주에 올리는 ‘백조의 호수’와 12월 넷째 주에 올리는 ‘호두까기 인형’이다. 원장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연말 공연은 이 중에서도 후자에 해당하는 호두까기 인형으로 성탄절의 전령사라고 불리는 작품답게 크리스마스이브에 공연하는 게 특징이었다.
“한솔이도 호두까기 인형은 안 해 봤지?”
한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다 보니 어릴 때는 가족이랑 보내느라 바빴고 조금 커서는 신우랑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발레도 좋아하는 취미였지만 아무래도 신우랑 우선순위를 비교하면 밀릴 수밖에 없으니까. 목표하던 백조의 호수를 이미 해 봐서 그런지 미련이 적었던 것도 있어서 한솔은 6살에 시작한 것 치곤 발레 3대 명작이라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중 단 한 가지밖에 해 본 게 없었다.
“공연은 본 적 있고?”
“네, 러시아 걸로….”
“어머, 제대로 봤네.”
그 뒤로 두 사람은 호두까기 인형에 대한 여러 감상을 나눴다. 직접 공연을 본 것은 열여섯이 마지막이었지만 블루레이를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엊그제 본 것처럼 생생했다.
한솔이 신나 하는 걸 눈치챈 원장이 직접 해 보면 더 재밌을 거라며 한솔을 꼬드겼다. 원장의 설득 아닌 설득에 한솔은 마음이 흔들렸다. 딱히 거창한 이유가 있어 거절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결국 한솔은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며 원장실을 나왔다.
“하자.”
그리고 그걸 고민이랍시고 말했다가 은혜에게 들은 말이란 게 이거였다.
“친구야, 너에게서 클라라가 보이는구나.”
“아니, 뭐라는 거야. 클라라 경쟁률이 얼마나 빡쎈데…. 잠깐, 저기요 아직 한다고 하지도 않았거든요?”
“너는 무조건 클라라야. 알겠지. 클.라.라.”
“그럼 너는!”
초등반일 때는 어린 클라라 역을, 중등반부터는 꾸준히 성인 클라라 역을 맡아 왔던 게 바로 최은혜였다. 본인의 배역이라고 해도 좋을 자리를 두고 하는 소리에 한솔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자 은혜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라 좋지. 그런데 그건 너무 오래 했단 말야.”
“…너 그러다 다른 애들한테 뺨 맞는다.”
“아이, 좀 들어 봐. 나 요즘 슬럼프 온 것 같거든.”
슬럼프란 말에 한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혜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최은혜가 발레 바를 놓고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예전엔 분명 재밌어서 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냥 잘하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마지못해하는 기분이고.”
“…….”
“엄마 아빤 당장 관두고 랩이나 들어가라는데… 그건 또 싫더라.”
자신의 진심이 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는 은혜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던 한솔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은혜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작지만 따뜻한 손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씩 웃으며 한솔의 손을 맞잡는다. 9년 지기 친구는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원장님이랑 상의했거든. 레퍼토리를 바꿔 보자고 하시더라고.”
“레퍼토리라면… 배역을?”
“응. 나 백조의 호수에선 지그프리드 왕자 오디션 볼 거야.”
그 말에 한솔이 입을 작게 벌렸다.
“호두까기도 왕자 역 도전할 거고.”
마지못해 하는 기분이라던 친구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배역에 도전할 거라며 말할 땐 정말 반짝반짝 빛났다. 176cm에 한솔보다도 키가 크고 쭉쭉 뻗은 팔다리를 가진 그녀가 연기할 왕자를 떠올려 본다.
“너한테 잘 어울려.”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최은혜라면 당당하게 배역을 따내서 멋진 무대를 선보일 것이다.
“그치?”
“응.”
“그러니까 클라라는 한솔이가 하는 거로. 땅땅!”
“??”
중간 과정을 전부 생략한 결론에 한솔이 어이없어하며 손을 홱 빼내자 최은혜가 한솔에게 팔짱을 끼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아아! 해 줘!!”
“네가 왕자역 하는 거랑 내가 클라라 하는 게 무슨 상관인데?!”
“파드되 추는데 이왕이면 합 잘 맞는 애랑 추는 게 좋잖아….”
“네에, 지금부터 그 합 잘 맞는 파트너 구하시면 되겠네요.”
“아, 안 돼… 제발….”
“…내가 하고 싶다 해서 그걸 시켜 주냐구… 쟁쟁한 애들 다 하겠다고 달려들 텐데. 일 년이나 쉬어서 폼 다 무너졌단 말야.”
“아냐 아냐, 진짜 아님. 노릴 만한 사람들 전부 고3 올라가서 콩쿠르 준비하느라 바빠. 그리고 네 폼이 어때서, 완벽하기만 하구만. 지금 기만하냐?!”
한솔을 살살 달래던 은혜가 마지막에 가서는 그라데이션 분노를 표출했다. 내심 일 년 쉰 거치고는 몸이 잘 돌아가길래 만족하고 있던 한솔은 찔끔해서 눈을 피했다. 그걸 눈치챈 은혜가 한솔의 팔을 붙잡곤 짤짤 흔들었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무조건 된다. 너 이길 사람 없다. 있어도 백조 먼저 준비하느라 호두까지 신경 쓸 여력 없다-며 꼬시는데… 한솔은 최은혜가 귀찮기도 했고 취미반인 자신이 한다고 되겠어?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흔들어.”
“예에스! 너, 약속한 거다? 이제 못 물러.”
“…오디션 준비만 할 거야. 떨어지면 나도 몰라.”
“오케이, 오케이-.”
“듣고 있는 거 맞아? 아무튼 너도 준비 열심히 해. 두 개나 노리려면 진짜 죽었다고 생각하고 해야겠네.”
초중등 공연과 달리 고등반 공연은 다른 학원과 합동 형식으로 이뤄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고등반으로 올라갈수록 학생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탓에 우리 학원만으론 작품에 필요한 최소 인원수를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한솔이 안심한 것도 있었다. 우리 학원의 인재들이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도 설마 다른 학원까지 그럴까 싶어서.
“좋아! 연습하자, 연습! 얼른 일어나세요, 이한솔 씨.”
“하아….”
그리고 한솔은 훗날 이 안일한 생각을 후회하게 된다.
“아으으… 죽겠다….”
최은혜의 꼬심에 넘어간 지 약 일주일. 한솔은 며칠째 은혜의 닦달에 마구 굴려지는 중이었다. 오디션까지 몇 달은 남았다고 말해 봐도 일 년 쉬었으니 더 열심히 해야 된다는 은혜에게 딱 자신이 대던 핑계라 반박도 하지 못하고 연습실로 질질 끌려갔다.
차라리 호두까기 인형만 했다면 좀 나았을까. 하지만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호흡을 맞춰 주는 친구가 있는데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엔 기본자세만 며칠 돌린 다음 몸이 완전히 적응됐다 싶을 때부터 백조의 호수 상대역을 해 주게 되었다. 그러니까, 오데트 공주역을.
“한솔이 너, 내가 왜 백조의 호수는 그간 오디션 안 본 줄 알아?”
물을 먹어 흐느적거리는 천처럼 연습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한솔이 무거운 눈꺼풀을 끔벅이며 말했다.
“아니… 호두까기 준비하느라 그런 거 아냐?”
“틀렸어.”
“큼, 그럼 뭔데-.”
물어봐 주길 바라는 눈치라 깔깔한 목을 붙잡고 묻자 은혜가 물이 가득 든 물병을 한솔에게 건넸다. 한솔은 까딱 눈인사를 하고선 몸을 일으켰다. 꼴깍꼴깍… 마른 목을 축이며 왜 말 안 하냐는 뜻으로 눈을 깜박이자 그녀가 한쪽 무릎을 세운 다리에 턱을 괴고선 무언가 생각에 빠진 눈으로 답했다.
“열 살 때였지, 아마. 네가 백조의 호수 초연했을 때.”
“…….”
“그때 엄청 충격받았거든. ‘쟤가 나랑 같은 나이라고?’ 심지어 배우는 건 내가 일 년 더 먼저 배웠는데 비교가 너무 되잖아.”
한솔은 난데없는 친구의 내밀한 속마음에 난감함을 느끼고 눈을 또르르 굴렸다.
“그건….”
“알아. 네가 엄청 열심히 했다는 거. 여기로 옮기고 나서 납득할 수밖에 없었지. 그만큼 넌 열심히 했으니까.”
두 사람은 열 살 때 처음 만났다. 은혜는 원래 다른 학원에 있다가 옮겨 온 케이스로 한솔보다 한 살 어린 5살에 발레를 시작했다고 한다. 학원에서 자체 공연을 올리면 학부모뿐만 아니라 주니어 발레단의 스카우터나 원장님과 친분이 있는 다른 학원의 학생들이 구경을 오기도 했는데 최은혜는 그 케이스였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오기가 생겼던 것 같아. 더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됐기도 했고.”
“…….”
“그러니까… 고맙다고. 다 너 덕분이야. 이걸 이렇게 오래 한 건.”
“…은혜야.”
“그때, 그 공연을 보지 않았다면 여기로 올 생각도 안 했을 거고 이렇게 오래 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녀는 이한솔이 주역이었던 백조의 호수를 아직도 기억한다.
당연히 전문 발레단보다 연출력도, 무용수의 연기력도 떨어졌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아니었다.
최은혜는 그 백조가 자신이랑 똑같은 ‘어린애’라는 걸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어서 학원까지 옮겼다. 그리고 끝내 인정했다. 나는 저 공연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겠구나. 설령, 이한솔 본인이 성인이 되어 재연한다고 하더라도 그때 느꼈던 그 충격과 소름을 압도하진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갑자기 분위기 왜 이러지? 소름 돋게.”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아하, 쏘리. 쏘리.”
그녀는 부러 가볍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한 번쯤 말해 보고 싶었던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으응.”
“그럼, 다시 연습할까?”
“아! 최은혜…!”
한솔이 질색팔색하자 은혜가 흐흐거리며 웃었다.
“날 백조를 못 하는 몸으로 만들었으니 책임을 져라! 왕자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그게 왜 내 책임인데!”
“네 오딜이 너무 완벽했잖아. 아니 무슨 어린애가 1인 2역을 그렇게 잘할 수 있지? 솔직히 아직도 미스테리야. 다들 오데트가 순둥순둥해서 너랑 잘 어울린다 했는데 난 오히려 오딜이 더 잘 어울린다 생각했거든. 눈꼬리가 뾰족해서 그런가-.”
은혜가 한솔의 눈꼬리를 꾹 누르더니 위쪽으로 쭉 밀어 올렸다. 내심 속으로 뜨끔 하고 있던 한솔은 몸을 데구루루 굴려 은혜의 손길을 피했다. 최은혜가 그렇게 느낀 건… 한솔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백조 오데트는 한솔이 연기하는 겉모습을, 흑조 오딜은 그의 본연의 모습을.
그래서 한솔이 백조의 호수를 유독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중성에 혼란함을 느끼고 있던 어린 한솔에게 그 공연은 일종의 전환점이 되어 주었으니까.
‘그래도 대학에서는… 다른 걸 배워 보고 싶어.’
주변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니 내심 기분도 좋고 더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한솔은 발레에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서 더 잘하고 싶은 마음과 어릴 때부터 정해진 길을 탈피해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 지금은 두 마음 중에 후자에 좀 더 기울어 있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잘하는데 아깝지 않아?’라고 할 것이다. 원장님도 은혜도 말은 하진 않지만 종종 그런 눈치였다.
하지만 한솔은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다. 발레를 ‘덜’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지 세상을 좀 더 경험해 보고 싶을 뿐이라고.
‘물론… 일단 그러기 위해선 아버지라는 산을 넘긴 해야겠지만-.’
그리 생각하며 한솔은 곰곰이 사색에 잠겼다.
‘근데… 솔직히 이것도 못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시원한 바닥 위에 누워서 흐응- 하고 목을 울린다. 한솔의 얼굴은 자신만만한 미소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학원을 하나 더 늘렸다.
성인이 되기 전까진 여전히 아버지 소유인 한솔로서는 몰래 다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당연히 이경원 의원의 허락을 맡아야 했다. …뭐, 평범하게 허락 맡은 건 아니지만. 한솔은 ‘연말 공연 오디션을 준비하려고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라는 이유로 이 의원을 설득했고 당연히 한솔이 무용 쪽으로 진학할 거라 생각하고 있던 이 의원은 흔쾌히 그 바닥에서 화려한 이력과 그만큼 비싼 수강비로 유명한 학원에 한솔을 보내 주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넨 한솔은 그만큼 의욕적으로 학원에 다녔다. 자연스럽게 바빠지면서 신우와 붙어 있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어색하게 굳어 버린 사이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새 학원에 다니고 스파르타식 오디션 준비를 하는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한솔은 종종 우울해졌다. 그러면 그 우울감을 지우기 위해 더 무리해서 몸을 움직이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너, 가라.”
한창 자율 연습을 하던 도중 최은혜가 말했다. 당황한 한솔이 벽에 걸린 시계를 힐긋 올려다본다. 5시 50분. 정규 레슨은 끝났지만 연습하는 학생들을 위해 평일에는 밤늦게까지 연습실이 열려 있기 때문에 6시도 안 된 시각은 집에 가기엔 매우 이른 시간이었다.
“응? 왜…?”
“왜긴 왜야. 얼굴에 아주 그냥 ‘쉬고 싶어요’가 대문짝만하게 써져 있구만.”
“…내가?”
“어. 그러니까 얼른 집에 가서 푹 쉬고 내일은 밝은 얼굴로 봅시다, 이한솔 군. 오케이?”
은혜가 한솔의 등을 쭈우욱 밀었다. 물론, 슈즈 덕택에 실제로 밀리지는 않았지만 순전히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한솔은 걸음을 옮겨야 했다. 탁. 뒤에서 로커 룸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그렇게 티를 냈나? 그럴 리 없는데…. 얼떨결에 강제 귀가 조치를 당한 한솔은 한쪽 볼을 쓸어내리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본래라면 다음 학원이 있는 8시까지 버티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가라고 등을 떠밀어 주니 문득 꽤 넓은 연습실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한솔은 결국 옷을 갈아입었다. 겉옷을 입기 전에 옷걸이에 걸어 놓은 털목도리를 꺼내 들었다가 양손을 힘없이 내린다. 손안에 들려 있는 복슬복슬한 흰색 목도리가 괜스레 무겁게 느껴졌다.
-이번 겨울은 많이 추웠으니까, 초봄에도 쌀쌀할 거야.
-그때 하고 다녀.
신우의 말이 옳았다. 이번 봄은 유난히 추웠다. 3월인데도 눈이 내릴 정도였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혹독한 봄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봄을 알리는 이들이 있다. 붉고 노랗고 하얀 꽃잎들이 봄을 전경으로 색색이 휘날린다. 곧 있으면 4월이겠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기대감에 화사해지고 가벼워질 것이다. 여전히 이 목도리를 놓지 못하는 것은 한솔 자신뿐인 것 같았다.
한솔은 로커 룸 바닥에 주저앉은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폭신한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웅크린 몸이 가늘게 떨렸다. 너른 창을 통해 따뜻한 노을빛이 다정하게 내려앉았다.
작은 등이 유난히도 작아 보이는 순간이었다.
“…어?”
습관처럼 계단으로 내려오던 한솔은 빼꼼히 문이 열린 3층 비상구 문을 발견했다. 한 달이 넘게 이곳을 지나치면서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건 그날을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비록, 피아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한솔은 미련이 남은 마음에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런 한솔의 목에는 더 이상 흰색 목도리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안 치나….’
아쉬운 마음에 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는 걸 멈추진 못했다. 한솔은 꿀꺽- 침을 삼킨다. 작은 손안에 은색 손잡이가 살그머니 잡혔다.
‘딱… 한 번만 보는 거야. 알겠지? 한 번만.’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도 모르고 자기 최면을 걸며 한솔은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그러면서 하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아는지 눈을 질끈 감는다. 안쪽을 염탐하겠다는 사람이 눈을 감아서 어쩌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한솔은 아무튼 그랬다. 눈을 꼭 감고 손잡이를 꾹 움켜쥔다. 끼이익-. 조금 녹슨 듯한 철제문이 조금씩 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벌컥-!
“…!”
갑작스럽게 자신 쪽으로 밀리는 무거운 문에 얼떨결에 떠밀린 한솔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문제는 한솔이 아직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균형 감각이 무뎌진 순간, 비틀거리던 한솔이 바닥에 버려져 있던 명함 하나를 밟고 주욱 미끄러졌다. 무릎이 꺾이며 그대로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
몸이 붕 떴다. 등 뒤가 아찔할 정도로 휑했다.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뜬 한솔은 문을 열고 나오려던 존재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너, 이 미친!”
항상 뚱하던 권정우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앞쪽으로 손을 뻗고 있던 한솔의 손목을 우악스러운 힘이 덜컥 붙잡는다. 몸이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 기적적으로 끌어당겨진 한솔은 앞으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권정우의 몸 위로 말이다. 당연하게도 권정우는 한솔을 끌어당긴 반작용으로 뒤로 넘어졌고 두 사람은 한데 뒤엉켜 두꺼운 철제문에 부딪히며 쓰러졌다. 우당탕-!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철제문이 몸살을 앓으며 덜컹거렸다.
‘어… 무슨 일이….’
워낙에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한솔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숨을 헐떡였다. 인지는 늦어졌지만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감지한 몸은 한껏 경직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한솔의 목덜미에도 타인의 거친 숨이 내려앉는다.
하….
잠깐의 정적- 그 끝에는 밑바닥부터 끌어 올린 듯한 노성이 귀를 강타했다.
“너 미쳤냐?”
한솔은 몸을 움찔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억울함 반, 황망함 반인 마음이 들었으나 눈앞의 이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결국 얌전히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한솔을 정우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본다. 동그란 뒤통수와 늘씬한 상체로 이어지던 시선이 사슴같이 희고 매끄러운 목선을 가리고 있던 초커에 멈춰 섰다. 그가 언제나 ‘개 목걸이’라고 칭하는 그것을 보고 눈살을 설핏 찌푸렸다.
“야.”
“…으응.”
“떨어져.”
그 말에 이 양아치미가 낭낭한 짝꿍이 또 무슨 욕을 할지 몰라 조마조마해하던 한솔은 헉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후다닥 멀어지는 한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외간 알파의 품에, 그것도 꽤 오랜 시간 안겨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한솔은 더듬더듬거리며 변명을 뱉었다.
“이, 건 사고야….”
그러자 권정우가 특유의 시큰둥한 얼굴로 ‘뭐, 어쩌라고’ 하는 눈빛을 보낸다.
“신우한테 말하면 안 돼, 알겠지…?”
“…하. 내가 그 자식이랑 대화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아니.”
한솔은 부러 측은지심을 자극하기 위해 눈꼬리를 추욱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권정우에게 측은지심이란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밑져야 본전이니까. 아니지- 잠깐, 나도 구해 줬잖아?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애일지도.
한솔의 기준으론 꽤 괜찮은 만남이었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양아치한테 괴롭힘당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솔의 내면에선 권정우는 항상 양아치 1호였다. 아마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졸업할 때까지도 그 평가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변한 게 없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건 한솔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조용히 홀로 읊조리는 목소리에 한솔이 눈을 끔벅이며 정우를 바라봤다. 그러자 정우가 또 ‘뭘 봐’ 하는 눈빛으로 한솔을 바라본다. 아니다, 정정. 저건 노려보는 거다. 한솔은 절대 쫄은 게 아니라며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변명을 삼키고선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너.”
“응…?”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흠칫, 한솔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분명 밖에서 문이 먼저 열렸는데.”
권정우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한솔을 바라본다…. 큰일 났다.
한솔은 양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끙끙 앓았다. 뭐, 뭐라 하지? 그냥 한 번 열어 봤다고…? 누가 봐도 변명이잖아… 아니, 물론 변명이 맞지만. 그런데 권정우가 저기서 왜 나와?
“…그럼 너는….”
“뭐?”
“넌 왜 거기서 나오는데….”
한솔은 어떻게든 그럴싸한 변명을 생각해 내기 위해 일단 시간 끌기용 물음을 던졌다. 그때까진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왜 하필 그 많은 사람 중에 권정우를 만난 거야? 하는 정도. 권정우의 미간이 무시무시하게 꿈틀거리지만 않았어도 굳이 뒷말까지 덧붙이진 않았을 것이다.
“난 그냥… 문이 열려 있길래….”
“…….”
“그으… 예전에 정말 예쁜 피아노 연주를 들어서… 다시 듣고 싶어 가지구….”
“…….”
“…잘못했습니다….”
결국 이실직고한 한솔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잘못을 시인했다.
내가 왜 그랬지… 아무래도 그 피아노 소리에 홀렸던 게 분명하다. 그 와중에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 권정우가 아니라 유신우였다면 눈물이 찔끔 날 때까지 혼이 났을까, 하는 생각이나 하는 자신은 정말 구제 불능이 틀림없다.
‘그럼 다 혼나고 나서 잘했다고 토닥토닥해 주겠지.’
서로 간의 관계도 이렇게 상과 벌이 명확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솔은 내면의 음란 마귀를 꾸욱 눌러 치워 버리곤 얌전히 반성하는 자세를 취했다.
“……좋았다고?”
“……?”
“좋았냐고.”
경건하게 반성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권정우가 의미 모를 소리를 했다. 워낙 낮은 목소리라 첫 번째는 거의 듣지 못했고 두 번째 말만 겨우 알아들었다. 한솔이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눈꺼풀을 슬쩍 들어 올려 권정우를 힐긋거리자 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날카로운 옆선이 돋보이는 권정우의 옆태에 한솔이 입을 헤- 하고 작게 벌렸다. 쟤가… 시선을 피했…네? 한솔은 자신의 잘못 본 게 아닌지 눈을 의심하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응… 그야 엄청 좋았으니까 다시 듣고 싶어 했지….”
“…….”
“그런데 그걸 왜….”
물어보냐고, 하려던 한솔은 문득 드는 위화감에 멈칫했다. 내가 얘랑 왜 이런 대화를 하고 있지? 그리고 그 위화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기억의 테이프를 되감는다.
첫 번째, 한솔은 발레 학원이 끝난 뒤 계단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왜 멀쩡한 엘리베이터를 두고 계단으로 다니느냐, 하면 그건 언젠가 한 번 들었던 피아노 소리에 대한 이유 모를 그리움 때문이었다. 요즘 한솔의 컨디션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기분이 안 좋을수록 그 연주에 대한 그리움은 짙어져 갔다. 한솔 자신도 왜 그렇게 그 연주에 집착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단지, 사람들이 마음이 힘들면 왜 신에게 의탁하거나 음악을 찾게 되는지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을 뿐이다.
두 번째, 약 한 달여 만에 3층 비상구 문이 열려 있는 걸 발견하게 된 게 화근이었다.
그냥 지나치면 될 걸 한솔은 방앗간을 기웃거리는 참새처럼 그 앞을 떠나지 못하고 기어코 판도라의 상자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판도라의 상자는 알아서 좋을 게 하등 없는 비밀을 뜻한다. 비밀이 굳이 비밀인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한솔이 열어 버린 비밀은-.
세 번째, 그런데 그 안에서 나온 게 하필 권정우였다…?
‘…그러고 보니 권정우가 왜 저기서 나오지?’
이제는 ‘하필 권정우일 게 뭐람’이 아니라 ‘왜… 왜 저기서 쟤가…?’로 초점이 옮겨진 물음이 두둥실 떠오른다. 한솔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파르르 떨렸다.
“어… 음… 그러니까 혹시….”
“…….”
“그거 네가 쳤어…?”
한솔은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에이, 설마…’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권정우가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으로 바뀌고 말았다.
“말도 안… 아니, 그렇게 섬세하고 예쁜 소리가….”
한솔이 자신의 편파적인 생각을 마음껏 드러내고 만 순간, 권정우의 귓불이 붉게 달아오르더니-한솔은 분명 자신이 잘못 본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검은 후드 티에 달려 있던 모자를 푹 뒤집어쓰곤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한솔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신화 속에 나오는 검은 거인 같은 권정우의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올려다봤다. 그렇게 한솔이 멍을 때리는 틈을 타 정우가 철제문을 닫아 버리려는 듯 몸을 움직인다. 한솔이 화들짝 놀라선 허둥지둥 정우를 붙잡았다. 자신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이거 안 놔?”
권정우가 으르렁거렸다. 한솔은 쩔쩔대면서도 정우의 후드 티 밑단을 놓지 못했다.
“나, 나… 한 번만….”
“뭐라는-.”
“한 번만 들려주면 안 돼?”
“뭐?”
권정우가 특유의 눈빛 공격으로 ‘이게 미쳤나’ 한다.
“미쳤냐?”
아무래도 그걸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입으로도 말했다.
한솔은 이걸 맞췄다고 좋아해야 하는지 아니면 오늘만 벌써 미쳤냐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들어 슬퍼해야 하는지 잠시 헷갈렸지만 반드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겼으므로 턱을 바짝 들어 올리고 꿋꿋하게 정우를 올려다봤다. 정우로서는 한주먹 거리도 안 돼 보이는 하룻강아지가 꺙꺙거리는 걸로밖에 안 보였지만. 그가 잠시 어이없어 보이는 얼굴을 하다가 한솔의 손등을 탁- 하고 내쳤다. 앗, 하는 순간 정우의 옷 끝을 놓친 눈앞에서 철제문이 휙- 하고 닫혔다.
쾅!!
“…….”
한솔은 눈앞에서 먹이를 놓친 갯과 동물처럼 미련이 철철 넘치는 얼굴로 굳게 닫힌 철제문을 바라봤다.
“…여기 있을 거야.”
“…….”
“열어 줄 때까지 여기 있는다…?”
“…….”
“진짠데….”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며 코를 훌쩍였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늘진 비상구 계단에 오래 있을 정도는 아니었던 탓이다. 한솔은 민감한 피부가 붉게 변한 것을 보고 손등에 호오- 하고 입김을 불었다. 두 손을 슥슥 맞비비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철제문이 거칠게 열렸다.
“시발… 진짜 가지가지….”
권정우였다.
한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최대한 무해해 보이는 얼굴로 헤헤 하고 웃었다.
“실, 례하겠습니다…?”
한솔을 보는 정우의 얼굴은 이미 온갖 실례는 다 저지른 골칫덩어리를 보는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정우의 눈치를 보며 입구의 2/3를 가린 덩치를 피해 요령 좋게 문을 통과했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을 하고 복도를 힐긋거리는 한솔의 뒤에서 정우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다. 그 자신도 그 순간 왜 문을 열어 줬는지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그는 모자 안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터벅터벅 한솔의 뒤를 따랐다. 어차피 넓은 공간 속에서 열 만한 방문은 단 한 곳뿐이기 때문에 굳이 안내해 줄 필요는 없었다.
‘저건….’
문을 열자마자 약간 서늘하게 느껴지는 공기가 두 사람을 반겼다. 보이는 것은 검은색의 육중한 몸체를 자랑하는 그랜드 피아노 한 대. 그 외는 책장과 탁자, 그리고 소파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불필요한 것이라곤 일절 보이지 않는, 넓고 외로운 공간이었다. 학원에선 몇 개나 되는 연습실이 들어갈 정도의 면적을 가진 공간이니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연주만 하는 곳인가. 엄청… 썰렁하네.’
하지만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면적에 비해 가구의 수가 단출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블랙 앤 그레이 톤의 몰딩이 없는 모던한 하우스 느낌이 나는 공간은 차갑고 무정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한솔이 현관 비스름한 곳에 서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권정우가 실내화 하나를 눈짓하고선 저벅저벅 안으로 먼저 들어가 버린다. 한솔은 신발을 벗고 정우가 가리킨 실내화에 발을 쏙 집어넣었다. …역시 크잖아.
발끝을 흔들면 실내화가 덜렁거릴 정도로 컸다. 결국 신발의 역할을 포기한 한솔은 실내화를 신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움직일 때마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실내화가 슥슥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역시 직선으로 날카롭게 떨어지는 한점의 빛처럼 시선을 확 끄는 거대한 건반 악기에 눈길을 빼앗겼다. 하지만 점차 시야가 넓어지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한쪽 벽면을 꽉 채우는 높다란 책장들이라든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간 한솔은 고개가 꺾이도록 멀거니 위를 올려다봤다.
그건 전부 클래식 음반이었다.
한둘 정돈 영화 블루레이 같은 게 섞여 있지 않을까 싶지만 적어도 한솔이 살펴볼 수 있는 눈높이에 있는 건 음반뿐이었다. 한솔도 가끔 마음에 드는 발레 공연을 발견하면 블루레이를 수집하고는 하지만 이 정도 규모로 무언가를 수집하고 모아 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열정, 이상의 그 무언가가 느껴지는 기분이다.
책장의 고급스러운 원목을 쓰다듬던 한솔은 거기에 ‘집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명문가 집안의 자녀로 살다 보면 ‘감상’이라는 고상한 취미를 뽐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저 좋은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 것이라면 한솔도 자신 있는 분야였다. 하지만 이걸 보니 단순히 감상하는 것과 ‘수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신우도 같은 걸 한 박스씩 사 두기는 하는데….’
이거랑은 좀 다르겠지? …라고 물어보면 두 명 다 기분 나빠할 것 같았으므로 한솔은 조용히 궁금증을 삼키기로 한다.
♬♪-.
그리고 아주 느리게, 악보 속의 달빛이 다가왔다.
날카로운 칼날 같은 음표들이 한없이 차분하고 엄숙한 춤을 췄다. 과거의 한 위대한 작곡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달빛이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비장하게 어떤 비극의 서사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건, 월광이었다. 한솔은 하나의 달이 종말에 이를 때까지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그림자가 그리는 궤적을 지켜봤다. 그래서 정작 악보 속의 검은 음표들이 오선지의 끝에 이르렀을 때도 달빛의 몽환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야, 뭐 하냐.”
“응…? 아? 끝났, 끝났어?”
아직도 꿈결에 잠긴 듯한 얼굴로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뜨는 한솔을 피아노 의자에 앉은 상태로 돌아본 정우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가.”
단호하게 떨어진 말에 한솔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왜…?!”
“…왜는 무슨. 한 곡이면 된다며.”
“아니이… 그건, 그러니까… 그냥 한 소리지.”
한솔이 우물쭈물한 목소리로 답하자 정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돌아본다. 변명하자면, 한솔도 이런 멋없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야 처음에는 한 곡이면 될 줄 알았지….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권정우가 연주하는 월광은 훨씬 더-.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다른 말로 한솔과 코드가 맞았다. 그가 연주하는 다른 곡을 더 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건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탐미에 대한 욕망이었다.
한솔이 정우의 눈치를 슬슬 보며 피아노의 뒤쪽에 자리해 있는 소파에 가 앉는다. 그리고 여기에 얌전히 있겠다는 듯이 쿠션 하나를 꼬옥 끌어안는다. 아주 이곳에 눌어붙겠다는 의지가 명백해 보였다. 하… 낮게 한숨을 내쉰 정우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끼익- 피아노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단번에 시야가 높아진 소년이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다가올 것까진 몰랐던 한솔은 차마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쿠션만 더 세게 끌어안았다.
슥- 슥, 팔이 한솔의 옆을 짚는다. 무게의 추가 기울어진 소파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날카로운 선을 가진 얼굴이 가깝게 다가오자 한솔은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춰선 알파가 설핏 인상을 찌푸리곤 입을 열었다.
“야.”
“…으응.”
“넌 겁이 없는 거야, 자각이 안 되는 거야?”
한솔의 짧은 손톱이 쿠션을 뽀득, 하고 긁었다.
“내가 뭐얼….”
한솔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정답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다.’ 였다. 알파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드물게도 페로몬을 감추고 다니는 데다가 요즘 워낙 심란한 탓에 깊게는 생각을 못 했다. 명백히 한솔의 실책이었다.
조금 더 변명해 보자면… 한솔에게 있어 성적 대상으로 느껴지는 알파는 신우뿐이었던 탓도 있었다. 상대가 알파라는 건 아는데 알기만 할 뿐, 실감은 안 난달까. 한솔이 또르르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하자 정우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그가 츳, 하고 혀를 찼다.
“너 이러는 거 그놈은 아냐?”
“신우…? 신우는….”
정우와 소파 사이에 갇혀서 압박을 받고 있던 한솔이 서둘러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쿠션을 구깃구깃 움켜쥐었다.
“신우는 요즘 나한테 관심 없어….”
“…뭐?”
“나한테 질렸나 봐….”
속상한 마음에 목소리에 울음기가 묻어났다. 한솔을 겁줘서 내쫓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정우는 잠시 당황한 마음에 멈칫한다. 겁을 주려 했지, 이 죽고 못 사는 커플의 내밀한 속사정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가 문득 떠오르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이 관심이 없다고?’
그의 뒤통수를 뚫어 버릴 것같이 노려보는 시선에 자다가 깬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관심이 없기는커녕 아주 많아 보이던 또래 알파 놈을 떠올리며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한솔을 바라봤다. 이 겁 없는 오메가가 설마 거짓말을 하나 싶어 의심스럽게 바라보는데 한솔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권정우의 얼굴이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야, 너….”
설마….
“우냐?”
“흐어어엉….”
지극히 사실을 적시했을 뿐인 정우는 한솔이 쿠션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자 당황해서 손끝을 움찔거린다. 건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어색하게 머리만 쓸어 올리는데 한솔이 훌쩍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파들은… 흑… 원래 다 그래…?”
“…뭘….”
“들이대면 싫어해?”
아니, 시발…. 그는 정말이지 이 오메가와 이런 대화를 하고 싶진 않았다.
“막 문란해 보이구….”
“야… 하, 좀….”
“그치만 좋은 걸 어떻… 읍….”
결국 그는 커다란 손을 들어 한솔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오메가고 뭐고 일단 그의 귀를 보호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한솔은 한솔 나름대로 속상함이 넘쳤다. 권정우가 유신우를 언급했을 때부터 한솔의 머릿속에는 그간 신우가 자신을 방치했던 기억들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혼자 간다고 해도 보내 주고, 스킨십은 일절 없는 데다가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깍듯하게 거리를 지켰다. 마치 학교를 다니기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니지, 그때도 손은 잡아 줬단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뚝뚝 떨구는 한솔에 정우는 자신의 손등 위로 투명한 눈물방울이 도르르 굴러떨어질 때마다 거의 환장할 것 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삼켰다.
“알았으니까, 일단 좀. 제발-.”
“흐으윽….”
“뚝 해.”
그러자 한솔이 ‘흐윽…?’ 하면서 정우를 올려다본다. 그제야 자신이 이 오메가를 애 다루듯이 달랬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덕분인지 뭔지 한솔이 눈물을 그치기는 했지만. 그의 자존심은 약간의 타격을 받았다.
“…원하는 게 뭐야.”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한솔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난 몰라요.’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권정우는 확신했다. 애든 어른이든 눈물을 보이는 이유는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끊어 내는 것이 일 순위였으나 그는 이미 이 오메가에게 휩쓸리고 말았다.
정우는 눈물로 흠뻑 젖은 손을 떼어 내고 탁자에 있던 갑 티슈를 들어 통째로 한솔의 품에 안겨 주었다. 두 눈을 끔벅이던 한솔이 더듬더듬 휴지를 뽑아내더니 코를 흥, 하고 풀었다. 권정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푹 쑤셔 넣었다. 그러기를 한참, 드디어 한솔이 부르튼 입술을 달싹였다.
“나 가끔 여기 오면 안 돼…?”
***
뚜르르-.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뚝. 긴 연결음 끝에 결국 전화를 끊은 신우는 높다란 건물의 외벽을 올려다봤다.
1층은 카페, 2층은 피아노 학원, 3층부터 5층까진 간판이 걸려 있지 않은 회백색의 건물.
그는 요즘 너무 바빴다. 형질인 등록증이 나온 뒤부턴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야 될 정도로 스케줄이 꽉꽉 차 있었고, 정확히는 그렇게 바빠야만 했다. 그래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선한 얼굴을 볼 시간이 줄어드니까.
“…….”
하지만 그것도 결국 한계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어느 날은 미친 듯이 보고 싶은 마음에 한솔이 다니는 학원 앞까지 쫓아왔다가 핸드폰에 입력된 11자리 숫자를 보고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꽤 빈번하게. 오늘처럼 직접 전화를 걸어 본 건 처음이었지만…. 이마저도 아직 그에겐 허락되지 않는지 한솔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씁쓸하게 웃은 신우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차의 뒷문을 열려던 그가 문득 뒤를 다시 돌아봤다. 이상하게도 블라인드가 쳐진 어둑한 4, 5층이 아닌 환하게 불이 켜진 3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 불이 켜진 건물을 올려다보다 자리를 떠났다.
한솔의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 한 통만을 남기고서.
1교시, 미적분.
「그래서 어쩌겠다고.」
한솔은 거의 해독에 가까운 날려 쓴 글씨를 보고 경악했다가 누가 보지는 않는지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선 찢어진 종이를 가져와 볼펜으로 꾹꾹 눌러썼다.
「질투작전을 하자는 거지!」
정우는 글자 끝에 ‘:)’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보고 종이 쪼가리를 사정없이 구겼다. 자신이 왜 이딴 일에 휘말린 건지 고민하는 사이 한솔이 노트를 북 찢더니 다시 쪽지를 보냈다.
「왜 구겨ㅠㅠ」
아주 지랄을…까지 생각한 그는 기분 나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대머리… 그러니까 미적분 선생이 그들을 보고 아주 불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우의 놀랍도록 발달한 날카로운 직감이 속삭였다.
‘좆 됐네.’
권정우가 그렇게 해탈하는 사이 도토리를 몰래 까먹는 다람쥐처럼 온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선 종잇조각에 뭔가를 끄적이던 한솔은 미적분 선생이 칠판을 쾅쾅 때려 대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우는 그게 꼭 폭격에 놀라 굴속에서 허겁지겁 달려 나온 토끼 같다고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데. 저번부터 자꾸 이 오메가를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소동물로 생각하는 게 영 수상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정우가 찝찝한 기분을 마저 털어 내기도 전, 미적분 선생이 먼저 선수를 쳤다.
“거기- 3분단 맨 뒤 둘. 그만 속닥거리고 나와서 풀어라.”
그러자 한솔이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정우를 돌아보며 입 모양으로 ‘미안’ 하고 말했다. 작은 키의 소년이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가 교단 위에 서는 것을 지켜보던 정우가 뒤늦게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알파 놈의 집요하도록 싸늘한 시선과 마주쳤지만 무시했다. 권정우가 교단 위에 서자 그렇지 않아도 큰 키가 천장을 뚫을 것처럼 불쑥 솟아오르는 모습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한솔의 분필이 느릿하게 바뀐다. 한솔이 힐긋 눈짓으로 물어 왔다.
‘그런데 풀 수 있어…?’
그는 미간을 찌푸리는 것으로 답했다.
‘있겠냐.’
칠판 한쪽을 하얀 글씨로 가득 채운 한솔과 다리 정우가 느릿하게 분필을 집어 올려 쓴 답은 커다란 ‘0’ 하나였다. 풀이 과정은 죄 생략하고 아주 당당하게 오답을 적는 모습에 미적분 선생이 ‘이놈아, 공부 좀 해라!’ 하고 교과서로 정우의 등을 팡팡 내리쳤다. 이 커다란 알파가 교단에 설 때까지만 해도 교탁을 엎어 버리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해하던 반 아이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덕분에 한솔은 홀로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지었고 정우는 그냥 샌드백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조금, 지루한 표정을 하고서.
그리고 그 모든 걸 지켜보던 한 소년의 까만 눈동자는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도 유일하게 깊이 가라앉았다.
“나, 나! 신청 있어!”
“안 받아.”
“앗….”
한솔이 번쩍 들어 올렸던 팔을 시무룩하게 내리자 괜스레 신경이 쓰인 정우가 이를 갈듯이 말했다.
“뭔데.”
그러자 금세 활기를 되찾은 한솔이 종알댔다.
“쇼팽 녹턴!”
“몇 번.”
“2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아.”
…이렇게 휘둘릴 때마다 그는 이 영악한 오메가가 전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지만.
결국 휘둘리기로 결정한 것은 자신이었으므로 그는 한숨과 함께 자세를 바로 한다. 눈앞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거대한 짐승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절대로 자신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자존심 강한 악기. 그는 결투를 신청하는 검투사였고, 지금까진 이 승부에서 단 한 번도 패해 본 적 없었다.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정우는 건반을 누르기 직전, 세상이 침묵에 잠기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는 순간. 어쩌면 그래서 피아노를 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고요만큼은 제 것이기에.
“…….”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은 어느 순간부터 저 이상한 오메가에게 침범당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 위층의 학원을 다닌다는 오메가. 가끔 학원을 마치면 계단을 총총총 내려와 그가 있는 곳의 문을 두드리곤 한다. 그 유치하고도 어이없는 ‘질투 유발 작전’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작은 발걸음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리 없는데도 그는 요즘 들어 6시가 되면 조용히 귀 기울이는 습관이 생겼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딩-.
첫 음이 울렸다. 그리고 새하얀 건반 위로 길고 짧은 음표들이 휘몰아쳤다.
때로는 회백색 건물의 3층에서. 때로는 학교 4층 구석의 음악실에서.
항상 외롭고 고독한 싸움을 이어 가던 정우가 점차 관객의 존재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 시간은 계속됐다. 무채색의 공간 한쪽에 희고 복슬복슬한 슬리퍼 하나가 놓이고 점심시간이 되면 음악실에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연갈색 머리를 발견하는 일이 잦아진다. 정우는 이제 의미 없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수업 시간에 잠을 자거나 학교 안을 어슬렁거리는 대신 옆자리의 짝꿍을 구경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대부분 활기찬 강아지 같다가 아주 가끔, 축 처지는 어깨를 발견하는 날이면 조금 더 부드러운 음표를 골라내 흘려보내는 시간이 반복됐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어-.”
점심시간이 막 끝나가는 시간. 자리에 앉아 책상을 정리하던 한솔은 유인물을 끼워 놓은 노트를 정리하다가 그 사이에서 툭 떨어진 수상한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쪽지를 주워 들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딱히 그를 지켜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한솔은 으음, 하며 곤란한 얼굴을 하고 발신인 없는 쪽지를 내려다봤다.
어릴 때는 같은 오메가 친구들한테도 각종 러브레터와 선물들을 받아 와 신우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한솔이었지만 오히려 커 가면서 그런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옆에 유신우라는 강력한 수문장이 지키고 있는 탓이 컸다.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며 한솔이 오메가란 이유 하나로 음흉한 눈을 하던 동급생들도 많았지만 한솔이 신우 옆에 찰싹 붙어 있는 통에 말 한마디 걸어 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근래엔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해지지 않았는가. 신우가 워낙 바쁜 것도 있으니 누군가는 지금 이 틈이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든 말이지.’
한솔은 겉보기와 다르게 그렇게 순진하지만은 않기 때문에 곧바로 이 쪽지가 자신에게 건네는 러브레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대신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쪽지를 반으로 싹둑 잘라 버렸다. 음, 칼날은 안 들어 있네. 음모론 하나를 가뿐히 삭제한 한솔은 혹시 이상하게 묻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한 다음 반으로 잘린 쪽지를 펼쳤다. 내용을 확인하는 한솔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안녕, 한솔아.
나는 3학년의 김재진이야.
그간 나는 너를 아주 오랜 시간 지켜봐 왔어.
너는 정말 착하고 귀여운 아이야….
(중략)… 그래서 그런데 너랑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괜찮으면 학교 끝나고 체육관 뒤쪽으로 나오지 않을래?
기다릴게.」
일단,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기를 오랜 시간 지켜봐 왔다는데 그걸 진심으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한솔은 순수한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3학년이라 해 봐야 겨우 한 살 차이가 아닌가. 한솔은 자신을 애 취급하는 건 신우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놈의 체육관은 왜 이렇게 우려먹는 거지.’
고백을 하든 뭘 하든 좀 화사하고 밝은 장소에서 할 수는 없는 걸까. 아, 물론 임자 있는 사람을 중간에 가로채려면 뭐든 당당하진 못하겠지만.
결국 이 쪽지를 ‘당당하지 못한 사람의 비겁한 수법’이라고 결론 내린 한솔은 쪽지였던 종이 쪼가리를 가방 깊숙이 털어놓고 잊어버렸다. 며칠 뒤에 새로운 쪽지를 발견하기 전까지.
「안녕하세요, 신우 선배.
저는 1학년의 이은지라고 해요….
(중략)… 어제 구운 쿠키가 있는데 직접 전해드리고 싶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하교 후에 체육관 화단 앞으로 나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를 더 알고 싶은 후배로부터-」
한솔이 그 쪽지를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때는 점심시간, 일찍이 도시락을 비운-한솔은 결국 급식소의 위생을 견디지 못하고 2학년이 되자 신우와 함께 점심을 도시락으로 전환했다.- 한솔은 양치를 위해 화장실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베타 학교에는 오메가 전용 화장실이 없는 탓에 항상 사람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야 했고 썰렁한 복도를 걷던 한솔은 정말 우연찮게도 신발장에 꽂혀 있는 흰색 쪽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 쪽지를 보니 저번에 받았던 이상한 쪽지가 떠올랐다. 그때와 변함없는 접는 방식이라든지 크기를 보아 그때의 그 당당하지 못한 사람인가 싶어 쪽지를 펼쳤던 한솔은 황당하게도 쪽지 상단에 신우의 이름이 적힌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게 왜 자신의 신발장 자리에 있는 것인가 어처구니가 없었고 두 번째론 황당했으며 세 번째론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아무리 서먹해 보여도 그렇지 멀쩡히 임자 있다고 소문난 사람에게 들이대는 게 얼마나 매너 없는 일인지 이 후배님은 모르는 것일까.
‘모르면 알려 줘야지.’
결국 씩씩대던 한솔은 잘못 전달된 쪽지를 엉망으로 구겨 버리곤 보이지 않게 주머니 속에 꾹꾹 집어넣어 버린다. 결전의 시간까진 앞으로 약 4시간. 교실로 들어서는 한솔의 발걸음이 자못 성나 보였다.
한솔은 처음엔 쪽지의 존재를 신우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던 지난 쪽지에 대해서 말하고 오늘 발견한 새 쪽지를 보여 준 뒤, 신우와 함께 그 쿠키를 구운 후배님께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은 3교시가 흘러갈수록 한솔은 점차 자신이 없어졌다.
자신이 처음 받은 쪽지를 바로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신우가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한솔이 그 후배님을 만나 보고 싶다 할 때 어떠한 이유로 신우가 그걸 부드럽게 거절한다면-.
혹시라도 그 둘 중에 하나라도 일어난다면….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겠지만, 한솔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단 한 순간에 결정되는 충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간 켜켜이 쌓여 온 서운함이자 불안감이었다.
결국 청소 시간이 끝날 때까지 결정을 하지 못한 한솔이 우울한 얼굴을 하고 가방을 멘다. 그런 한솔을 정우가 아주 오랜 시간 지켜봤다는 것도 모르고 한솔은 터덜터덜 걸어 신우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은 서먹해진 이후로 늘 그랬듯이 어떠한 대화도 없이 학교를 빠져나왔다. 누구 하나 먼저 가는 것 없이 서로의 보폭에 맞추어 걸음을 옮긴다는 것 자체가 드러나지 않는 다정이었으나 오해의 늪 속에 빠져 있는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다.
데리러 온 차가 매번 주차되어 있는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구석진 공간에 도착하고 나서도 고민을 끝내지 못했던 한솔이 머뭇거림 끝에 탁,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신우야, 나… 뭐 놓고 온 것 같아.”
한솔은 결국 말하지 않기로 한다.
“교실, 갔다 올 테니까 급하면 먼저 가.”
“…….”
“…갔다 와도 돼?”
혹시나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하면서도 신우가 흔쾌히 보내 주면 어떡하지, 하고 미리 겁을 먹는-.
작은 머리통이 회색 바닥을 향해 푹 숙여진다. 한솔은 이건 자학이나 마찬가지라고 자조하면서도 홀로 멈추는 방법을 알 수 없어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어느 길로 가도 상처투성이일 뿐이지만 결국 상대에게 떠밀듯이 결정권을 맡겨 버리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우유부단하기 때문에 한솔 자신의 성향이 반주체적이고 수동적인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그리고 사실, 한솔은 반쯤 신우가 그냥 보내 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야, 요 몇 달간 신우의 패턴이 그랬으니까. 그도 한솔의 이 말이 핑계에 불가하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만… 결국 보내 주고 말겠지. 이게 회피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신우는 한솔이 뭔가를 말하면 이유를 설명하고 안 된다고 하기보단 일단 알겠다고 말하곤 했으니까.
미리 상처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한솔은, 그러나 신우가 꽤 오랜 시간 대답을 들려주지 않자 당황해서 숙였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꼭… 가야 해?”
그리고 두근- 한솔의 심장이 크게 널을 뛰었다.
“아, 그게….”
신우가 이렇게 되물으리라곤 정말 생각지도 못해서 한솔은 상기된 얼굴을 하고 두근두근거리는 심장 부근의 옷을 꼬옥 움켜쥐었다. 어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엉망으로 뒤엉켜 버린 머릿속으로 우왕좌왕하는데 신우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안.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정말로 괴로워 보이는 신우의 얼굴에 한솔은 심장이 뚝 떨어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왜 이렇게 돼 버린 거지….’
어디서부터 꼬여 버린 걸까.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었던 건 아닌데-.
이젠 이 일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간 켜켜이 쌓여 온 외로움이 너무 버거워서 마냥 덮어놓고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 얼마큼 좋아해?
-하고.
한솔도 이제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안다. 같이 있으면 마냥 편안하고 좋은 소꿉친구의 감정부터 가장 내밀하고 부끄러운 부분까지 원하게 되는 연인의 감정까지.
그는 자신의 감정이 후자에 해당한다고 꽤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은 아직 한솔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으니 또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신우도 같은 깊이의 감정인지는 알 수 없고….
‘오히려 손 많이 가는 동생 같은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한솔은 신우를 더 알고 싶었다.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열여덟 살의 신우뿐만 아니라 스물여덟의 신우, 또 서른여덟의 신우가 궁금했다.
누군가는 지금까지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지긋지긋하지 않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솔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신우를 더 알고 싶고 또 그만큼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싶었다.
“나는….”
“…….”
“신우가 왜 참는 건지 모르겠어.”
한솔은 그간 꾹꾹 눌러놨던 진심을 아주 조금 내보였다.
“그야 당연히 내가….”
신우가 얼굴을 가렸던 팔을 주춤 내리며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자 한솔은 이번에도 신우의 대답을 들었다가 납득해 버릴까 무서워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달려들었다. 갑작스럽게 폭삭 안겨 오는 몸을 받치고서도 단단하게 서 있던 신우의 눈동자가 옅게 떨린다. 그는 엉거주춤 팔을 벌렸다가 손을 여러 번 접었다 펴며 고뇌하더니 뒤늦게 한솔의 등 뒤로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 온기를 알아차린 한솔이 더 꾸욱 신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서 있었다. 그리고 신우가 두 손을 떼어 내 한솔의 허리를 붙잡아 밀어 내려 했을 때 한솔은 갖은 힘을 다해 붙어 있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결국 단호한 ‘솔아.’라는 목소리에 두 팔에서 스르륵 힘이 빠지고 만다.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서게 된 한솔이 속상한 얼굴로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리자 그런 한솔을 잠시 내려다본 신우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어금니를 악물었다.
“갔다 와.”
한솔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도 우리, 오늘은 조금이지만 통하지 않았느냐고- 울망울망 흔들리는 눈을 한 한솔이 그렇게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그때,
신우가 고개를 숙여 한솔과 시선을 진득하게 맞췄다. 작은 얼굴을 집요할 정도로 꼼꼼히 살핀 그는 손을 들어 한솔의 눈꺼풀 위를 느리게 훑었다.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고 만 한솔은 뒤늦게 깜박깜박 눈을 떴을 때 신우가 연한 색의 속눈썹을 떼어 내는 것을 보고 조금 부끄러운 기분을 느꼈다.
“대신… 갔다 와서.”
“…….”
“내가 변명할 시간을 줘.”
그리고 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건 부탁이니까… 네가 싫다면 거절해도 돼.”
한솔은 사실 신우의 말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무슨 변명을 해야 한다는 걸까. 그간 피한 것? 그것이라면 한솔은 대답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서로가 피하지 않고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기뻐 무작정 고개를 끄덕인다. 신우가 한솔의 몸을 조심스럽게 놓아주자 한솔은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아주 느리게 신우를 올려다봤다. 한 자리에서 서서 한솔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다릴게.”
이상하게 목이 메어 대답을 하지 못한 한솔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선 뒤돌아 뛰어갔다. 점차 작아지는 한솔의 뒷모습을 아주 오랜 시간 지켜보던 신우는 온기가 사라진 한 손을 꾹 움켜쥐었다. 작은 점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뒤로도 쭈욱 한솔이 사라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다. 기다림.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으므로.
***
그리고 하늘의 색이 불그스름하게 변했을 때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솔이」
쨍그랑! 단단한 바닥과 부딪힌 액정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하지만 그 주인은 이미 서늘한 바람만을 남기고 다급하게 그 자리를 떠난 뒤였다.
주인 잃은 텅 빈 자리에 불온한 그림자만이 진득하게 녹아내렸다.
‘여기 맞는 것 같은데….’
본관하고 꽤 떨어진 장소. 3~4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1층의 낮은 높이를 가진 건물엔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른 높은 건물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햇빛이 잘 들지 않고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이곳의 정확한 명칭은 (구)체육관이다. 한때는 운동부가 사용했다고는 하는데 폭력 사건이 일어나 학교의 운동부가 폐지되면서 이 건물은 무거운 쇠 자물쇠로 잠겨진 채 오랜 시간 방치되고 있었다. 칠이 벗겨진 외벽이나 관리가 되지 않아 무성하게 자라난 화단이 미풍을 헤친다는 이유로 아예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지만 여러 금전상의 이유로 건물의 수명은 간간이 유지되고 있었다.
평범한 학생들에게 있어 이곳은 가끔 핑크빛 고백이 일어나는 장소, 비가 올 때 잠시 쉬어 가는 곳, 학생 주임 선생에게 있어선 몰래 숨어서 담배 피우는 놈들을 잡아내기 위한 순찰 장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언제부턴가 몇몇 불량 학생들이 열쇠를 훔쳐 이곳을 드나든다는 은밀한 소문이 돌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들은 관심도 없는 소문이었기 때문에 한솔 또한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 하더라도 이곳에 오는 걸 그만두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혼자 오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곳은 바쁘게 굴러가는 일상 속에서 잊힌 공간이고 워낙에 음지라 그런지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위험한 공간이란 뜻이다. 한솔은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왜 없지? 먼저 가 버린 거 아냐?’
오늘은 학교가 일찍이 파하는 날이다. 교원 연수니 교직원 회의니 하는 이유로 정규 수업까지만 이행하고 본래 보충 수업과 야간 자율 학습을 하는 아이들도 일찍이 하교를 했기 때문에 학교는 서늘하리만치 조용했다. 너무 늦게 와서 그 후배님이 먼저 가 버렸나 싶어 혀를 차던 한솔은 마지막 모퉁이를 돌기 직전, 건물의 모퉁이 뒤로 둥근 그림자가 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예리한 눈치를 가진 머리가 이상 신호를 감지했다. 주춤, 뒤로 물러서려던 한솔은 그러나 다른 건물의 짙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으읍-!”
“아, 시발. 들키는 줄 알았네. 야, 잡았냐?”
“엉, 아- 썅. 얌전히 좀 있어 미친년아.”
한솔이 발버둥을 치자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손수건 같은 것으로 한솔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납치범이 화를 냈다. 한솔은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는 마음에 납치범들 몰래 눈에 쌍심지를 켰다가 뒤늦게 모퉁이를 돌아 나온 납치범2가 한솔을 돌아보는 통에 본능적으로 겁을 먹은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물론,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한솔은 약자고 상대의 목적을 알 수 없으니 좀 더 얕잡아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한솔의 판단이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좀 을씨년스럽긴 해도 멀쩡한 학교 부지 내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는 것에 어이가 없어진 한솔이었다. 납치범들에게 붙잡힌 손을 흔들어 보지만 한솔 한 명이서 또래의 남자 베타 둘을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약간의 반항 끝에 납치범들에 의해 두 손목이 붙잡힌 한솔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앙칼진 눈으로 두 납치범들을 올려다봤다.
납치범2가 사슬이 칭칭 감겨 있던 체육관의 문을 땄다. 한솔은 폐쇄된 공간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납치범들 탓에 약간 낭패 어린 얼굴을 해 보였다. 물론, 납치범들은 그걸 겁을 집어먹은 모습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저희끼리 낄낄 웃으면서 말로써 한솔을 희롱했다.
“형님! 저희 왔슴다-.”
무거운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낡아 다 해진 매트나 소파 등이 널려 있는 공간. 체육관 안은 생각 외로 환했다. 그 덕에 주변 사물을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다리 길이가 맞지 않는 탁자 위에는 치킨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고 뚜껑이 따진 초록색 소주병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거기에 드문드문 보이는 각목과 야구방망이까지. 매캐한 냄새와 함께 흰 연기가 뿌옇게 시야를 흐리자 마치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조폭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이곳이 폐관되긴 했어도 학교 건물 중 일부라는 점만 빼면.
“읏…!”
거의 질질 끌려가듯이 끌려간 한솔은 매트 위에 험하게 밀려 넘어졌다. 털썩-. 무릎으로 주저앉은 한솔이 뻐근한 손목을 문지르며 만지작거렸다. 사람 수는 대략 여덟에서 아홉. 교복을 입고 있는 게 2/3, 안 입은 사람이 그 나머지인 듯했다. 명찰 색은 세 가지로 다양했는데 1~3학년이 전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솔이 몰래몰래 눈치를 살피며 정보를 수집하는 사이 가장 큰 소파에 앉아 있던 야구 모자를 쓴 덩치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손끝에 걸린 하얀 담배의 끝에서 검은 담뱃재가 툭 떨어진다. 지지직-. 매캐한 잿더미는 이미 여러 개의 구멍이 나 있는 낡은 소파 위를 다시 한번 지졌다. 한솔은 아무래도 이 불량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 사람을 야구 모자라고 칭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놈은?”
“안 보이는 것 같은데요, 형님.”
한솔을 가장 먼저 붙잡았던 납치범1이 말했다. 야구 모자가 다시 한번 후- 하고 흰 연기를 내뱉었다. 연기를 내뱉고, 재를 털고, 담배를 쥐지 않은 손을 느릿하게 들어 올린다. 크고, 상처가 가득한 손. 한순간에 이질적인 정보를 포착한 한솔은 선뜩한 결론을 내렸다. 상대는 ‘학생이 아니다.’라고. 저건 아무리 행실이 불량한 학생이라 해도 평범하게 가질 수 있는 손이 아니었다. 저건 ‘전문가’의 손이다.
퍼억-!
“내가 그런 쓸데없는 정보나 듣자고 여기 있는 것 같나.”
“윽, 큿… 죄, 죄송합니다….”
망설임 없이 흉기와 같은 손을 휘둘러 납치범1의 머리를 후려친 야구 모자가 말했다. 한솔은 둔탁한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동시에 우악스러운 솔길이 한솔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읏… 고개가 바짝 들어 올려진 한솔은 낡은 형광등의 누렇게 뜬 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뜨길 종용하는 거친 손길에 결국 파르르 눈꺼풀을 들어올려야 했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돼, 오메가 도련님.”
그 순간, 야구 모자 아래의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이 한솔을 관통할 것처럼 꿰뚫었다.
“의원 집의 소중한 자산을 쉬이 망가뜨리면 쓰나.”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을 확인한 한솔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훨씬 더 각이 진 남자다운 얼굴이긴 했지만 군데군데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긴 어렵지 않았다.
남자는… 놀랍도록-.
“그래, 우리 막내하고 친구라고.”
권정우와 닮아 있었으니까.
한솔이 당황해하는 사이 흰 연기를 후- 하고 내뱉은 야구 모자가 유리가 깨진 탁자 위에 담배를 비벼 껐다. 한솔은 자신의 앞에 내뱉어진 매캐한 담배 연기에 콜록콜록거리며 기침을 내뱉었다. 그런 한솔을 바라보는 약간 투명할 정도로 밝은 황갈색의 눈은 살기 어린 맹수의 눈과 닮아 있었다. 한솔은 어렵지 않게 그 맹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호랑이…?’
남자는 산군의 눈을 하고 있었다.
“핸드폰.”
한솔의 머리카락을 놓아준 야구 모자가 납치범1을 후려쳤던 그 커다란 손바닥을 한솔에게 내밀었다. 한솔은 너무나도 당당한 그 태도에 당황해서 힐긋 야구 모자를 올려다봤다. 흠칫-. 곧바로 범 같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고선 고개를 푹 숙여 버렸지만. 쪼, 쫀 거 아냐…. 괜스레 누구한테 하는지도 모를 변명을 주워 삼키며 한솔은 울상인 얼굴을 하고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야구 모자의 손바닥 위로 살며시 올려놓았다.
“…….”
커다란 손바닥에 비해 한솔의 핸드폰이 너무나 작아 보인다. 이제 자신의 저 작고 소중한 핸드폰의 운명이 어찌 될지 몰라 조마조마해하던 한솔은 야구 모자가 그의 핸드폰을 가져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힐긋힐긋 눈치를 봤다. …아으…. 한솔은 자신의 눈치가 조금만 덜했으면, 하고 생각했다. 결국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주섬주섬 핸드폰을 도로 가져간 한솔은 잠금을 풀고 원위치에 돌려놓았다.
“그놈한테 전화 걸어.”
“앗, 넵! 알겠습니다, 형님. 감사합니다!”
지극히 저자세인 3학년 하나가 야구 모자에게서 한솔의 핸드폰을 받아 갔다. 한솔은 못생긴 오징어가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구석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서글픈 눈을 해 보였다. 내 핸드폰이 오염됐어…. 신우랑 신년맞이로 같이 맞춘 커플 핸드폰이다. 내심 애지중지했던 탓에 더 상심이 컸다.
“이봐, 도련님.”
“…네?”
3학년이 사라진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한솔은 낮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두꺼운 허벅지 위에 두 팔을 올린 자세로 한솔을 내려다보던 야구 모자가 양손을 깍지 끼며 입술을 비틀었다.
“내기를 할까.”
“…….”
“과연 막내가 너를 구하러 올지.”
“…….”
“궁금하군.”
한솔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야구 모자가 말하는 존재가 신우가 아니라는 걸. ‘막내’라는 단어와 ‘친구’. 한솔은 자신의 이번 학기 짝꿍에 대해 많은 걸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유전자의 신비를 부정하지는 못했다.
남자가 말하는 것은 권정우였다.
“내기, 대가는요?”
한솔은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대가.”
“그으… 내기라 하셨으니까… 이기면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솔이 눈치를 보면서도 꿋꿋이 말하자 야구 모자가 더 가까이 몸을 숙여 왔다.
“이길 것 같나 보지.”
한솔은 솔직하게 말해서 그때 조금 쫄았지만 그럴수록 더 꼿꼿하게 턱을 치켜들고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눈을 피하는 순간, 연기는 들통난다. 물론 연기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아니었다. 그건 한솔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직감이었다. 그림자 진 모자 아래에서 유독 샛노랗게 보이는 눈이 빛났다. 범이, 사냥을 준비하고 있었다.
얕보이면 잡아먹힐 것이다.
“좋아. 어느 쪽에 걸 테지.”
흐어… 한솔은 속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릴 뻔한 걸 다잡고 입을 열었다.
“저는….”
“…….”
“온다에 걸게요.”
남자의 입꼬리가 슬쩍 곡선을 그렸다.
“올 것 같나.”
“…네.”
“왜?”
야구 모자가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자 한솔은 이번만큼은 당당하게 말했다.
“정우는 착한 애거든요.”
그리고 폭소하는 야구 모자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두 사람은 의외로 많은 얘길 나누었다.
“사… 형제요…?”
“그래.”
그리고 한솔은 상상외의 곳에서 찾은 막내 동지에 어색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영락없이 첫째이거나 신우처럼 외동일 줄 알았던 권정우가 무려 아들만 넷인 사형제의 막내이자 ‘큰형’이라는 야구 모자와의 나이 차이가 9살이 난다는 것에 솔직한 마음으로 조금 기함하기도 했다.
한솔이 이 의외의 정보를 알게 된 것은 전부 야구 모자 탓이었다. 그는 마치 학교에 처음 가는 막내아들의 학교생활을 꼬치꼬치 캐묻는 학부모처럼 한솔을 들쑤셨는데 차마 친구의 자유…로운 스쿨 라이프를 꼰지를 수 없었던 한솔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정우를 커버 쳐야 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우연찮게 권정우의 신상 정보를 알게 된 것이지 결코 그가 밝히고 싶지 않았던 정보를 한솔이 캐낸 것은 아니다.
들으면서 좀 흥미진진하긴 했지만….
“그런데 왜 저한테 그러세요….”
한솔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들어 울컥하자 남자가 깊게 눌러쓴 모자를 슬쩍 들어 올리더니 피식 웃었다.
“막내 녀석은 생각보다 낯을 심하게 가리거든.”
“네…?”
“그 녀석이 제 옆에 사람을 두는 걸 처음 봐서, 겸사겸사 확인도 할 겸.”
그러니까 위험 분자였으면 치워 버리려 했다는 거지?
한솔은 등 뒤로 소름이 쭈뼛 돋는 걸 느꼈다.
“게다가 사람을 붙여 놔도 워낙 잘 피해 다닌단 말이지. 잡으려면 미끼가 필요했을 뿐이다.”
한솔은 야구 모자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 봤다. 이 큰형님의 말씀을 종합해 보자면 집안 가업을 잇기 싫어 반항하고 도망쳐 나온 것을 지금까지 오냐오냐 봐줬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잡으러 온 거라는 거다.
그리고 한솔이 눈치껏 알아낸 사실에 따르면 권정우네 ‘가업’은 분명 ‘3대가 이어 가는 백 년 전통의 떡집…’ 같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그야, 종종 조직이 어떠니 구역이 어떠니 하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나…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어느 상황이든 마음속만큼은 당당한 한솔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목뒤로 식은땀이 삐질 흐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한솔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이 일의 전말이 복잡해 보였기 때문이다. 온갖 불법적인 일로 먹고사는 ‘전문가’가 그 밑에서 관리하는 불량 서클을 움직여 덫을 쳤다. 거기에 한솔이 보기 좋게 걸려들었고 말이다. 그 쪽지들이 설마 자신을 외딴곳으로 불러내기 위한 덫일 줄 상상이나 했을까. 한솔은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오나 보군.”
그리고 그런 불안은 깍두기처럼 서 있던 불량 학생들이 하나둘 각목과 야구 방망이를 집어 들었을 때 정점에 이르렀다.
“애새끼들 싸움 구경하는 취미는 없다만.”
한솔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쿵-. 굳게 닫혀 있었던 입구가 한 차례 거칠게 흔들렸다.
“이건 ‘거래’니 어쩔 수 없지.”
남자가 말했다.
과연, 이쪽이 빨랐나.
끼이익-. 마침내, 체육관 문이 사나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
[여, 재수 없는 후배님. 오랜만이다?]
처음 느낀 것은 불쾌감이었다. 제 손아귀 안에서 정교하게 움직이던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을 때 느끼는 격렬한 혐오감.
신우는 불빛이 반짝이는 핸드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솔이」
그가 가장 애틋하게 생각하는 이름 너머로 불쾌한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신우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말했지. 그렇게 재수 없게 굴다가는 언젠가 한 번 큰코다칠 거라고.]
화면 너머의 자칭 선배라는 놈이 실실거리며 웃었다. 그는 머릿속을 빠르게 뒤져 목소리의 주인을 가려냈다. 알파의 뛰어난 머리는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잊지 않았고 곧바로 후보로 짐작되는 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저놈이 그놈인가? 유신우.
가장 처음은 학교 급식실에서.
-너도 학교생활 편하게 하려면 빽은 필요할 아니냐, 끼워 줄 테니까 이것만 내라.
물주를 원하는 탐욕스러운 눈이 그 뒤를 따른다.
나이, 키, 힘 그리고 돈. 모든 게 서열의 밑거름이 되는 학교 내 정글에서 새로 난입한 유신우라는 존재는 위협 그 자체였다. 기존의 강자들은 어떻게든 신우의 기를 꺾어 제 아래에 두려 했고 떨어질 콩고물을 원하는 이들은 벌떼같이 그의 주변으로 달려들었다. 신우의 기억이 맞다면, 이 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정글에서 살아남아 좁은 피라미드 위에 섰다는 것, 그리고 매번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던 그에게 앙심이 남았을 거라는 것. 그뿐.
학교라는 장소는 어찌 보면 사회의 그 어느 곳보다 원초적인 모습의 콜로세움이나 마찬가지다. 그곳에는 수많은 유혹이 산재해 있으며 자유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일탈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신우야.
그중 어느 것 하나 신우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함부로 동정하지도 자만하지도 말거라.
9살이다. 그가 첫 파멸을 지켜본 것이.
도산한 업체의 사장이었던 자가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신우에게 유진철 회장은 그리 말했다. 함부로 동정하지도 자만하지도 말아야 한다. 피라미드의 정상에 서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이제 추락만이 남겨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거슬리는 게 있다면.
-…….
-확실히 밟아라.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그 무정하고 단호한 목소리는 신우의 기억 속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학교 내의 서열 싸움이 아무리 치열하다 할지언정 유신우가 그간 봐 온 세상은 숫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전쟁터였다. 그곳에선 수십억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고 누군가는 절망하며 몇 장의 종이 쪼가리 탓에 인간의 존엄이 박살 나는 곳이다. 그 어느 시대의 전쟁보다 무미건조하고 치열한 전쟁터를 보고 자라온 신우에게 고작 학교 내의 서열 싸움은 어쩐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원초적이다는 것은 다른 말로 아직 발전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자만했나.’
신우는 겸허하게 긍정했다. 어찌 보면 그랬던 것 같다. 그는 고민 많은 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제 오메가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를 장기짝으로 두고 휘두르고 싶어 하는 몸만 큰 어린애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가만두면 신경 끌 줄 알았고 그건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아무튼, 네 오메가. 우리가 데리고 있거든?]
그 자만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는가.
[되게 예쁘게 생겼더라? 어? 크큭. 한번 따먹어도 되냐?]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 거슬릴 때, 밟아 뒀어야 했다.
[구하고 싶으면 체육관으로 와라. 물론, 너 혼자 와야 하는 건 알겠지?]
상대의 불쾌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짙은 흉터를 남긴다. 그 순간, 그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이를 아득 간 신우는 사람이 없어 적막한 학교 부지를 다급하게 가로질렀다. 체육관이라 불리는 곳은 후문 쪽에 붙어 있기 때문에 본관 건물을 빙 둘러 달려가야 했다. 그 짧은 시간이 못내 초조했고 그래서 그가 오랜 시간 관리받지 못해 녹이 슨 철문 앞에 도착했을 땐 자신도 모르게 쾅-! 하고 화풀이하듯 철문을 내리치고 말았다.
“하아, 하….”
거친 숨을 몰아쉬던 신우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후회-, 는 부질 없는 짓이다. 아마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은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잡념을 털어 낸 신우는 두꺼운 문을 밀쳐 열었다. 무거운 문이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입구가 열렸다.
끼이익, 쾅-.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사이로 자연광보다 쨍한 색깔의 빛이 폭발하듯 쏟아져 내렸다. 그 사이를 터벅터벅, 건조한 발걸음으로 가로지른 신우가 곧 탁-, 하고 여러 쌍의 시선 한가운데에 멈추어 섰다. 뒤로 쿵, 소리가 나며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는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는 뒤를 돌아보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그저 느리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대립한 존재들 사이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공기가 곧 터질 것같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했다.
“솔아.”
그러나 마침내 알파가 입을 열었을 때, 그 균형은 산산조각이 나 부서져 내렸다.
“신우야…! 읏-!”
온갖 둔기를 들고 살기등등하게 서 있는 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이를 발견한 알파의 시선은 줄곧 한 곳에만 머물러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얼굴을 해 보이던 한솔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다가 커다란 손에 의해 초커가 붙잡혀 털썩 주저앉는다. 모자를 써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신우는 직감했다. 저자가 이곳의 우두머리였다.
“놔…! 이거, 놔주세요….”
뒤쪽에서 잡아당기는 초커에 의해 목이 조인 한솔이 앞부분의 가죽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1년 사이에 훨씬 성숙해진 얼굴은 굳이 알파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돌아보고 싶게 만드는 호소력이 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는 이들이 그렇다. 신우는 마음 깊숙이 정제되지 않는 살심이 치솟는 걸 느끼며 깊게 심호흡했다.
“흠… 그래, 이게 내 역할이란 말이지.”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듯한 목소리로 운을 뗀 우두머리 남자가 피식 웃는다. 한솔이 겁이 났는지 티가 나게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신우가 당장에라도 달려갈 것처럼 한 발자국 걸음을 떼자 각목과 방망이를 들고 서 있던 이들이 다급하게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짧은 시간, 치열한 신경전이 오갔다.
“좋아. 어울려 주지.”
남자가 웃었다. 두꺼운 손이 한솔의 목을 감싸 쥐듯 움켜쥐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끌어안는다. 전형적인 인질을 대하는 자세였다. 또르르, 하얀 뺨을 가로질러 굴러떨어진 눈물방울이 아슬아슬하게 턱 끝에 매달렸다가 곧 툭, 투둑- 허공을 향해 추락했다. 한솔이 물기에 젖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흐윽, 신우야….”
그러자 우두머리 남자가 되받아쳤다.
“자, 이제 어쩔 거지.”
“…….”
신우는 침묵했다. 그제야 마치 허락이 내려진 것처럼 눈치를 보며 슬슬 거리를 좁혀 오는 졸병들을 힐긋 바라본 신우가 미간을 슬쩍 찌푸린다. 그는 각목이 바닥을 거칠게 긁는 소리를 들었고, 긴장에 달아오른 근육이 느리게 부푸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한솔의 눈물 젖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달칵-.
손목을 들어 시계의 가죽끈을 푼 알파는 기합과 함께 다수의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곧바로 뱀의 허물이 벗겨지듯 손목을 스르르 스쳐 흘러내린 시가 1억짜리 물건이 챙-!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휙-! 크게 휘둘러진 각목을 가볍게 고개를 비트는 것으로 피한 알파가 빈틈이 생긴 상대의 멱살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그 상태로 날려 버리는 대신 뒤쪽에서 접근하던 야구 방망이를 향해 움켜쥐고 있던 멱살을 들어 올려 몸을 방패처럼 휘둘렀다.
“컥!!”
“이, 비겁한 자식…!”
무게가 더해진 반동력에 두 사람이 우당탕 밀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상대해야 할 수가 많다는 것은 분명 불리한 일이나 다수가 한 사람을 상대할 때도 곤란한 점은 있었다. 총을 쓰지 않는 육탄전은 행동반경이 명확하기 때문에 다수가 달려들더라도 실제로 상대할 수 있는 이의 한계는 명확해진다. 둘 내지 셋. 여기서 무기가 더해지면 더욱 복잡해지며 사거리는 길어지는 대신 상대에게 닿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적은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씨발….”
자신들이 들고 있던 무기가 오히려 아군을 해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이들이 이를 갈며 들고 있던 것을 내던졌다. 그 뒤부턴 글자 그대로 개싸움이 되었다.
퍼억-!!
“큭….”
허리로 치고 들어오는 주먹을 막고 자세가 무너진 상대의 팔을 잡아당긴 다음, 무릎으로 찍어 올려 무력화시킨다. 신우는 옆쪽에서 달려드는 이에게 붙잡고 있던 몸을 내던져 시야를 가렸다. 그 상태로 뒤를 덮치려던 자의 주먹을 붙잡고 팔꿈치로 찍어 올린 뒤 그대로 엎어 쳤다. 쿵! 무거운 소리와 함께 재색의 먼지가 흩날렸다.
하지만 상대는 여덟.
아무리 피지컬적으로 압도적이라 해도 언제까지고 유리한 고점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둔탁한 주먹에 오른쪽 뺨을 얻어맞은 신우가 손등으로 찢어진 입가를 스윽- 닦았다. 어쩐지 처음으로 유효한 타격을 입혔음에도 쉬이 움직일 수 없었던 이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정적이던 새까만 눈동자가 살기에 젖어 번뜩거린다. 컥…! 그대로 목이 붙잡힌 한 명이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싸움이 재개되는 신호탄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신우야…!!”
신우가 다른 사람의 주먹에 맞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키려던 한솔은 커다란 손에 붙잡혀 다시 매트 위로 끌어 내려졌다.
“그건 네 역할이 아닐 텐데, 도련님.”
한솔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나쁜 악당에게 붙잡힌 가련한 인질’이 도련님의 역할이 아닌가.”
한솔은 속으로 생각했다.
‘망했다.’
신우가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한솔은 본능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이건 기회야. 신우가 날 구하러 왔다고! 한솔은 분명 겁을 먹긴 했지만, 겁을 먹은 것과 자신의 컨셉을 잡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이한솔이라는 인간은 누군가 납치당한 자신을 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여긴 위험하니 오지 마세요!!’ 하는 영화 속 주인공 같은 분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련함과 눈물로 무장하고 구하러 온 사람에게 분노와 성취감 버프를 주면 모를까.
한솔은 기꺼이 자신을 전리품으로 포장해 신우에게 안겨 줄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화해를 하겠다는 노림수가 있긴 했지만… 뭐, 어때. 인질로 잡힌 건 사실인데.
이 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안전 불감증에 걸린 건 사실이지만 아마 거기서도 한솔은 상위 0.1%에 속할 것이다. 그건 한솔이 좋은 집안에서 좋은 대접만 받고 자란 온 온실 속 화초인 탓도 있지만 대부분은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나 구해 주는 신우 탓이 컸다.
그러니까 한솔이 이렇게 자란 것은 전부 신우 탓이다. 그러니 신우는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 한솔은 아주 뻔뻔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역할’이 아니라 ‘사실’이 아닐까요…?”
한솔이 뻔뻔함을 잃지 않고 말하자 야구 모자는 넓은 어깨가 전부 들썩일 정도로 낮게 웃었다. 덩달아 붙잡혀 있던 한솔의 몸도 작게 흔들린다. 한솔은 생각보다 웃음이 많은 아저씨라고 몰래 생각했다.
“골 때리는 도련님이군.”
야구 모자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한솔의 ‘연극’에 뛰어들었을 때 솔직히 들켰다는 예감이 들기는 했는데 정말로 알아차렸을 줄은 몰랐다. 한솔은 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포장하는 데 능숙했기 때문에 이런 간파가 당혹스러우면서도 신선했다. 심지어 장단까지 맞춰 주지 않았는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였다. 말했듯이 이 연극은 전부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니까. 사람들은 ‘악당’의 말보다는 ‘인질’의 말을 더 신빙성 있게 듣는 법이다. 야구 모자가 한솔을 좀 더 흥미 있게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만 빼면 아무 문제도 없었다.
“저거… 말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현실 상황은 꽤 심각했다.
피까지 튀는 살벌한 싸움의 현장에 아직은 비교적 여유로워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 수적으로 열세인 신우에게 불리한 순간이 올 것이다. 지금도 조금씩 상처가 늘어나는 신우의 모습에 초조해하는 한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야구 모자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걱정스러워하는 이유를 알겠군.”
“…?”
“넌 너무 순진하다는 뜻이다, 도련님.”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입술을 비죽이는 한솔에게서 전황으로 눈을 돌린 남자가 흠, 하고 낮게 목을 울린다.
“저건 맞은 게 아냐, 맞아 준 거지.”
그리고 눈을 깜박이는 한솔에게 다시 물었다.
“몸놀림이 꽤… 본격적인데. 따로 배우는 운동이 있나 보지?”
“신우요? 지금은 수영만 할 텐데….”
“‘지금은’ 이라. 과거에는?”
“…어, 복싱, 유도, 검도 또… 태권도도 했었구 펜싱도 잠깐….”
“그만.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붙였군.”
그가 낮게 혀를 찼다. 생각 외로 타깃의 전력이 강했다. 어쩌면 정말이지 ‘부탁’ 하나에 몸을 써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끝인가.”
그리고 그 생각은 아무래도 현실이 될 모양이었다.
“네가 이겼다는 뜻이다.”
한솔은 보지 못한 것을 포착한 남자가 말했다. 사납게 덜컹거리던 입구가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소년들이 잠시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새로 난입한 침입자를 돌아본다. 침입자, 권정우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씨발, 권범진!!”
누가 봐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듯한 얼굴로 등장한 권정우는 곧장 체육관을 가로지르려다가 얼떨결에 앞을 막아선 3학년 하나한테 가로막혔다.
“씨발, 안 비켜?”
“이 새끼가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나.”
권정우가 교복을 입고 있었던 탓에 뒤늦게 2학년인 걸 알아차린 3학년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분위기가 이미 한껏 험악해져 있었던 덕에 곧바로 주먹이 날라왔다. 권정우는 황당한 얼굴로 그걸 피하더니 상대가 끈질기게 달라붙자 확 짜증이 난 표정으로 곧장 돌려 차기를 날렸다. 뻐억-!! 한솔은 정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얼굴이 홱 꺾여서 날아가는 3학년을 보고 입을 작게 벌렸다.
“여전히 발 하나는 쓸 만하군.”
어쩐지 뿌듯해 보이는 야구 모자가 말했다.
“손을 안 쓰니 반쪽짜리인 게 문제다만.”
얼떨결에 이 개싸움의 일원이 된 권정우가 꺼지라는 말을 반복하며 덤벼드는 이들을 다리로 뻥뻥 차 대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보였다. 야구 모자가 굳이 설명을 해 주지 않더라도 한솔은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피아노 때문이구나.’
섬세하게 손을 쓰는 일이니 권정우로서는 손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한솔은 권정우가 왜 권 씨 집안의 ‘가업’을 잇기 싫어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야.”
“…….”
그리고 머지않아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뭔데?”
“그건 내가 물어야 할 소리 같은데.”
“뭐? 아, 젠장. 존나 끈질기네.”
상대가 한 명이었을 때도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게 두 명으로 늘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불량 양아치들이 두 사람을 한쪽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그게 유신우와 권정우가 등을 맞대게 된 이유였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대와 일시적 동맹을 맺게 된 두 알파는 그다지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쓸데없이 상대를 긁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열여덟. 어찌 보면 한없이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나이였지만, 이제는 확실히 1보다는 2에 가까운 숫자가 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지금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진 잘 알고 있었다.
“오든가 꺼지든가.”
그리고 한껏 짜증이 난 권정우가 말했다. 마침내, 좁지도 넓지도 않은 공간 속에서 열 명의 소년들이 격돌했다.
털썩-.
마지막으로 기절한 한 명을 바닥으로 밀쳐 떨어뜨린 신우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한솔을 데리고 뒤쪽의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그들을 관망하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열일곱에 이미 180을 찍고 여전히 자라는 중인 신우가 보기에도 남자는 거인이었다. 대략, 한 뼘 정도의 키 차이. 그는 먼저 한솔의 상태를 확인하고 특별한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한 뒤 다시 시선을 옮겼다.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 남자가 두 사람의 시야 한가운데서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탁.
‘빈틈이 없군.’
온몸의 신경 세포가 날카롭게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상대했던 이들이 숫자만 많은 잔챙이라면 남자는 생태계의 피라미드를 지배하는 존재다. 서늘한 침묵이 두 명의 소년과 한 명의 남자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고요함 속에서, 놀랍게도 먼저 입을 연 것은 두 명의 소년 중 한 명이었다.
“권범진, 미쳤냐?”
아주 화끈하게.
“…….”
신우가 이제라도 저 일시적 동맹군을 걷어차서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권정우는 이미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네가 말단도 아니고 피라미를 왜 움직여? 그것도 상관도 없는 애를 납치해? 드디어 좌천이라도 된 거-.”
“형.”
“…….”
“형이라고 해야지, 막내야.”
권정우가 입술을 딱 다물었다. 한껏 구겨진 미간이 불만이 아주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본가로 들어와.”
“…….”
“3년이면 많이 봐준 거 알지. 들어와서 지점 관리부터 시작해.”
고저 없는 목소리가 끝을 읊는다.
“아버지 명령이다.”
그러자 소년이 짧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놈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씨발. 할 줄 아는 게 씨 뿌리는 것밖에 없는 꼰대 새끼… 앞잡이 노릇하는 게 그렇게 좋아?”
그는 조금 억울해 보였고, 어쩐지 많이 속상해 보이기도 했다.
형제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신우가 봐도 그건 묘한 구석이 있는 말투였다. 마냥 미워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모습. 이해하기 싫은, 소년의 얼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낌새가 보이자 우두머리 남자를 힐긋 살펴보던 신우는 멈칫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남자의 하관은 언뜻 웃는 것처럼 보였다.
“글쎄.”
“…….”
“마음대로 생각해.”
그 말이 소년의 어디를 그렇게 건드린 건지 땅바닥만 노려보고 있던 권정우가 자리를 박차더니 곧장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잔챙이들을 상대할 때는 물론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주먹부터 날리면서. 물론 결과는 예상했다시피,
탁-.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남자는 소년의 어설픈 주먹질을 손쉽게 붙잡았다.
“이래서 네가 아직 애송이라는 거다.”
그리고
“큭…!!”
권정우의 등을 끌어안을 것처럼 하고선 무릎으로 복부를 찍어 올렸다. 헛숨을 삼킨 권정우가 복부 위를 움켜쥐더니 주륵, 바닥으로 미끌어져 내렸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동생의 팔을 잡아 올리는 남자를 보며 남의 집안싸움에 끼어드는 것이 과연 옳은지 고민하던 찰나에 남자의 단단한 몸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안 돼요!!”
옆쪽에서 후다닥 달려 나온 연갈색 머리가 남자의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신우는 어쩐지 커다란 범에게 뭣도 모르고 달려드는 작은 강아지를 보는듯한 기분에 목뒤가 서늘해졌다. 서둘러 달려가 한솔의 허리를 끌어안는데 신우에게 안긴 채로도 한솔은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내기! 내기 제가 이겼잖아요!”
“…….”
“학교… 정도는,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해 주세요….”
남자의 차가운 시선이 권정우에게서 한솔에게로 옮겨진다. 신우는 여기서 잠시 고민해야 했다. 한솔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겨 위험한 자의 시선을 차단할지, 아니면….
“권 이사님.”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한솔의 의견을 지지해 줄지 말이다.
그리고 신우는 답을 내리기 전부터 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이쯤 하시죠.”
그가 한숨과 함께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한솔에게로 향했던 시선이 조금 빗겨 나가며 그 뒤로 향했다. 권정우로부터 이름을 듣고도 너무나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확신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남자는 그 ‘권 이사’가 맞았다.
직접 얼굴을 맞댄 것은 처음이었지만 빛과 그림자가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이면의 동반자이듯 정·재계와 암흑가 또한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테면 천성과 해연파는 협력 관계, 이른바 사업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제는 어둠 속에서만 웅크리고 있기에는 그 몸집이 너무나 거대해져 ‘해연’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양지 사업을 시작한 총책임자가 바로 권범진 이사였다.
“애들 싸움에 끼기에는 바쁜 몸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
“아직 청남 일대가 많이 시끄러운 편이죠. 그걸로 주주들이 꽤 반발이 심합니다. 해연과의 신사업을 재고해 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아까의 그 용감한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복잡한 사업 얘기가 나오자 눈치를 보는 듯한 한솔의 손등 위로 신우는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포갰다. 움찔 떤 작은 손가락이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꼼지락거리며 살그머니 신우의 손을 맞잡아 왔다. 어쩔 수 없지. 그는 정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 한솔의 주변을 맴도는 알파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한솔이 권정우를 ‘친구’로 여기는 이상 그는 한 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있었으니까. 한솔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참고 넘어가야만 하는 일이었다. 신우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협박인가.”
“그렇게 들리신다면, 그런 거겠죠.”
“협박이군.”
모자의 그림자에 가려진 어둠 속에서 살기를 갈무리한 눈이 삐뚜름하게 웃는다. 신우는 티 나지 않게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가 곧바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신우는 컨트롤이 어려운 이를 선호하지 않는다. 오늘만 봐도 권 이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였기 때문에 빠르면 몇 년 뒤에 이 자와 같은 일선에 서게 될 신우로서는 조금 곤란한 일이었다.
“꽤 재밌는 친구들을 뒀어.”
잠시간 침묵하던 권범진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친구’란 말에 두 알파가 순간적으로 눈살을 확 찌푸렸지만 눈치챈 이는 없었다. 그는 세 명의 소년들을 차례로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뭐, 좋아. …2년 정도는 어떻게든 되겠지.”
뒷말은 워낙 낮은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허락의 의미라는 건 분명했다. 권범진이 권정우의 팔을 놓아주었던 것이다. 약간 비틀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권정우가 묘한 얼굴로 뻐근한 팔을 주물렀다. 한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신우마저도 이 일은 여기서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퍼억-!!
“…!”
“…….”
“…하-.”
거센 충격에 날아간 검정색 야구 모자가 툭, 데구루루… 체육관의 바닥을 굴렀다. 권범진이 반대쪽으로 꺾인 고개를 바로 하더니 탄식 같은 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드러난 황갈색 눈동자가 빛 아래에서 번뜩인다. 남자를 친 범인, 권정우가 주먹 쥔 손을 내리더니 한껏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끝까지 방심하지 말라고 가르친 건 당신이었어.”
신우는 조용히 한솔의 눈 앞을 가렸다. 아무래도 형제간의 싸움은 쉬이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결국 권정우는 입가가 완전히 터지도록 얻어맞고 말았다. 한솔은 신우의 손바닥으로 시야가 가려져 있었던 탓에 그 과정은 알 수 없었지만 결과만 보더라도 얼마나 살벌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야구 모자가 ‘기어오르지 마라, 막내야.’라는 말만 남기고 체육관에서 사라진 지금,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던 권정우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퉤. 구경났냐? 꺼져.”
신우와 권정우에게 두들겨 맞고 뻗어 있던 불량 양아치들이 죽은 척하던 것도 잊고 화들짝 놀라선 뿔뿔이 흩어졌다. 처음의 기세등등한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처량한 뒷모습이었다. 결국 체육관에 남아 있는 사람은 같은 반인 세 사람뿐이었는데 이번에도 꺼지라는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리던 권정우가 윽, 소리를 내며 자신의 턱을 움켜쥐었다. 한솔은 그제야 이 두 사람이 환자라는 것을 깨닫고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냐…?!”
“미쳤냐? 뭐, 쟤하고 싸워서 이렇게 됐다고 말해?”
권정우는 여전히 분이 가시질 않는 얼굴이었고 신우도 난감한 듯 고개를 젓는다. 확실히 저 두 사람이 이 상태로 병원에 갔다가는 ‘천성 vs 해연, 갈등의 시작…?’ 같은 기사가 뜰 판이었다.
“그럼 어떡해….”
한솔이 발을 동동 굴리며 말하자 자신이 상처를 만져 놓곤 욕설을 내뱉은 권정우와 신우의 까진 손등 주변을 만지작거리며 속상해하는 한솔을 차례로 바라보던 신우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따라와.”
“…….”
“…….”
“너도.”
겨우 상체만 일으켜 앉아 있던 정우가 눈썹을 쓱 들어 올린다. 신우는 권정우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해 보이든 말든 한솔을 데리고 체육관을 나왔다. 얌전히 따라 나왔던 한솔이 뒤늦게 ‘어디가?’ 하고 묻는 것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양호실.”
“행정실 열쇠라도 훔쳤냐?”
신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잠겨 있던 본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정우가 가장 먼저 한 소리가 이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들과 직원들이 전부 퇴근했는지 불이 꺼져 어둑한 본관은 문이 단단히 닫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난생처음 신우에게 제대로 체벌다운 체벌을 받았던 날, 일요일이라 잠겨 있던 교문을 신우가 손쉽게 열어 버렸던 기억이 있었다. 한솔도 내심 궁금한 마음에 신우를 힐긋힐긋 바라보다가 자신을 내려다보던 신우와 눈이 마주치고선 뻣뻣하게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어쩐지 옆에서 신우가 웃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지, 거래를 했을 뿐이야.”
멀찍이 등 뒤에서 따라오던 권정우가 ‘그러다 시험지도 사겠네.’라고 중얼거린다. 신우는 ‘그런 쓸모없는 짓은 하지 않아.’ 하고 답했다. 한솔은 은근히 대화가 잘되는 두 사람을 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실사판 개와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랄까.
드르륵-.
마찬가지로 잠겨 있던 양호실 문도 아주 손쉽게 열어 버리고선 신우는 자연스럽게 양호실 안을 오갔다. 분명 여기를 와 본 경험이라 해 봤자 1학년 초에 한솔과 왔던 기억 한 번뿐이었을 텐데도 양호 선생님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소독솜을 꺼내고 약과 반창고, 핀셋을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놓는 모습이 아주 능숙해 보였다.
뭘 도와주려고 해도 아는 게 없어 멀뚱히 서 있던 한솔과 문지방에 서서 측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정우가 눈을 마주친다.
“쟤는 양호실 붙박이냐?”
“신우는 그냥 뭐든 잘하는 거야.”
권정우가 질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신우가 한솔을 불렀다.
“솔아.”
“어? 응?”
“여기에 물 좀 떠다 줄래?”
“앗, 알았어!”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한 한솔이 신우가 건네는 2L짜리 물병을 받아 들고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2층에 급수대 있는 거 알지? 거기서 떠 오면 돼.”
“응, 갔다 올게!”
의심도 없이 총총 걸어 양호실을 나가 버리는 한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우가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유신우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제 오메가를 애지중지하던 놈이 아무 이유 없이 이한솔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킬 리 없었다. 아주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게다가….
정우는 양호실 한쪽에 작게 마련되어 있는 급수대를 보며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왜, 쟤 몰래 할 말이라도 있나 보지.”
유신우가 고개를 까딱인다.
“피아노, 친다던데.”
권정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3층.”
“?”
“한솔이가 꽤 자주 오갔더군. 네 연습실.”
“…뒷조사했단 말을 꽤 당당히 한다?”
“사실이니까.”
“하, 미친놈.”
권정우는 깨달았다. 이놈은 또라이다. 꽤 건실한 얼굴로 포장하고 있지만 내면은 음흉하다 못해 아주 시커먼 놈이었다. 지금도 보라. 자기 오메가가 다른 알파 놈이 있는 곳을 오갔다는 걸 알고도 제 오메가 앞에서는 눈 한 번 깜박 안 하더니 자신만 추궁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분명히 돌아가라고 말했어.”
“…….”
“남은 건 네 오메가고.”
놈의 서늘한 인상에 작은 금이 갔다. 그것만으로도 한 방 먹인 기분이었다.
“그리고, 너.”
정우는 잠시 침묵했다. 이대로 이놈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지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우성 알파’라는 존재에게 꽤 앙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꼰대, 권범진, 그리고 눈앞의 이놈까지.
하지만-.
-신우는 요즘 나한테 관심 없어….
-…뭐?
-나한테 질렸나 봐….
…마냥 그렇기엔 그는 작은 소년의 눈물을 너무 많이 봤다.
난생처음 가져 본 관객. 반짝반짝 빛나던 찬사의 목소리-. 항상 도피처로만 삼았던 피아노라는 공간을, 무대라는 곳을 처음으로 순수하게 갈망하게 만들었던 존재.
처음이란 것은 이다지도 난해하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정말 아끼면 표현을 해.”
“…….”
“저렇게 네 말이면 다 좋아하는 애는 안 보이냐?”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유신우가 상당히 놀란 얼굴을 해 보인다. 권정우는 ‘아이, 씨.’ 하며 자신의 뒷머리를 마구 털었다. 제 코가 석 자면서 오지랖은, 씨발.
“그러다 후회한다고, 멍청아.”
하지만 결국 말하고 말았다. 그는 말하면서도 선명해지는 확신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결국 오지랖이란 건 두 가지 경우가 아니겠는가. 자신이 그렇지 못했기에 후회하는 말, 혹은 그랬기에 후회하는 말- 말이다. 그리고 권정우는 명백히 전자의 경우에 해당됐다.
“…충고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도 자신이 이런 멍청한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당장에라도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해외로 나갈 생각은?”
아무래도 다 들통나 버린 집안 사정 때문에 하는 소리 같은데, 문턱을 발끝으로 툭 찬 권정우가 대답했다.
“왜, 아예 나라 밖으로 치워 버리고 싶나 보지.”
“부정은 하지 않겠지만 꼬아 듣지 마.”
결국 그런 생각이 있긴 하다는 거 아니야, 이거?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유신우가 명함 한 장을 빼내 휙, 던졌다. 가볍게 날아온 명함을 낚아챈 권정우가 작은 종이 쪼가리를 뒤집어 본다. XX캐피탈. 미간을 구기며 유신우를 바라보자 그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브로커. 웬만해선 해연의 손도 닿지 않을 거다.”
“…….”
“자금 사정이 안 좋아 보이진 않는데, 원한다면 빌려주지.”
“됐거든. 누굴 거지 취급하나.”
그는 명함을 와락 구겼다. 하지만 구겨진 종이 쪼가리를 바닥에 버리지는 못한다. 결국 머뭇거림 끝에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자 현타가 왔다. 놈의 눈은 정확했다. 그는 자진해 집안 권력 싸움에서 떨어져 나온 이단아였기 때문에 이러한 인맥이나 정보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장 시기적절하게 손을 내민 것이다. 권정우는 역시 장사치네 아들답다고 생각하며 쯧, 혀를 찼다.
“내가 이걸 영원히 안 쓰면 어쩔 건데.”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 물은 것은 심술에 가까웠다. 무슨 일이든 가볍게 해낼 것 같은 놈이 자신의 계획대로 풀리지 않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가벼운 궁금증.
하지만, 대답으로 들려온 말은-.
“고맙다고 하겠지.”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놀란 정우의 눈이 크게 뜨인다. 신우는 시선을 돌려 벽에 걸려 있던 시계를 확인하고선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힘들어할 때.”
“…….”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웠다, 권정우.”
그리고 그 순간 깨닫고 만다.
“솔직히 말해서 하필이면 알파인 거, 마음에 안 들어.”
“…….”
“하지만 너로 인해 한솔이의 세계가 한 번 더 단단해지고 넓어진다면, 나로선 고마워해야지.”
“…….”
“그런 이유로 이곳에 남아 준다면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어떤 시련이 와도 결코 깨질 것 같지 않은 저 견고한 신뢰가.
그가 진정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을.
“다녀왔… 둘이 뭐 해?”
2L짜리 물병에 물을 가득 채워서 뒤뚱뒤뚱 들고 걸어오던 한솔은 양호실 내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두 알파의 시선이 갑작스럽게 꽂혀 든다. 한솔은 움찔 놀라며 뽀드득, 물병을 움켜쥐었다.
“무거울 텐데 이리 줘.”
“응.”
“고마워.”
“아냐….”
신우에게 미션 완수한 물병을 건네며 뿌듯하게 웃는데 권정우가 언뜻 문 측에 기대고 서 있던 몸을 바로 하는 것이 보였다. 한솔은 신우가 뭔가를 준비하는 사이 뒤를 돌아봤다가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가 버리는 정우의 모습에 엇, 소리를 흘린다. 그는 서둘러 양호실 문밖으로 상체를 반쯤 내밀고 소리쳤다.
“정우야 어디가!”
그러자 권정우가 걸음을 느리게 멈추어 서더니, 착각인 양 다시 걸어가 버렸다. 하지만 분명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그가 분명 가볍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한테 이런 비유를 하면 안 되지만, 한솔은 어쩐지 매번 간식만 받아먹고 쌩하니 사라져 버렸던 길고양이가 처음으로 다가와서 손끝에 콧등을 비비는 기분을 받았다. 실상 권정우는 다가오기는커녕 도망가 버렸지만.
“많이 다쳤는데….”
“알아서 잘하겠지.”
한솔이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하는 사이 부드럽게 끌어당겨진 몸이 양호실 경계선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게 되었다. 드르륵, 탁-. 눈앞에서 단호하게 닫히는 나무 문의 모습에 한솔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신우의 눈치를 살폈다. 이상하게 아까부터 신우가 좀 변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예스맨이던 요즘의 신우가 아니라 작년 말쯤 되는 신우 같달까…? 한솔은 귀 바로 옆에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느낌에 작게 벌어졌던 입을 합 다물었다.
그리고 그런 한솔을 신우가 허리를 잡고 쑥 들어 올렸다. 역시나 사람한테 이런 비유를 하면 안 되지만, 한솔은 어쩐지 자신이 배를 까 보이며 들려 옮겨지는 작은 강아지나 고양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착, 하고 양호 선생님 의자에 앉게 된 한솔은 신우가 근처에 있던 스툴형 의자를 끌고 와 자신의 앞에 앉는 모습에 꿀꺽, 침을 삼켰다.
“솔아.”
신우가 눈을 곱게 접고 웃었다. …한솔은 신우에게 ‘곱게’라는 말을 열 살 이후로 쓸 수 있을 거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탓에 그만 벙찌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진심이다. 긴 눈꼬리가 샐쭉하게 접히고 부채꼴 모양의 속눈썹이 사르륵 감긴다. 평소에는 워낙 남자다운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에 한솔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이건… 정말 작정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치료 안 해 줘?”
“어, 어? 어?”
“한쪽만 그렇게 챙기면.”
“…흡!.”
신우가 한솔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한솔은 등받이가 푹신한 의자에 구겨진 채 위에서 쏟아지는 신우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느리게 다가온 붉은 입술이 귓가에 속삭였다.
“질투 나는데.”
한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쿵쿵쿵- 거세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응?”
“해, 해 줄게….”
한솔이 간신히 더듬거리며 입을 열자 신우가 스윽, 자리를 비켜 줬다.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 한솔이 황급히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양호 선생님이 업무를 보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소독‧치료 도구를 발견하고서 신우가 정말 작정을 했음을 알아차렸다. 놓인 순서대로 하라는 듯 세심하게 정리되어 있는 도구에 떨리는 손을 가져간 한솔은 가장 먼저 소독용 알코올에 담겨 있던 핀셋을 들어 올렸다.
꼴깍-.
핀셋으로 소독솜을 집어 올리고 식염수를 묻힌 뒤 신우를 바라보자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유난히 새까만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던 한솔이 약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신우의 찢어진 입가에 소독솜을 가져다 댔다. 움찔-. 평온했던 신우의 미간에 미세하게 금이 간다. 그걸 보고 멈칫하자 신우가 계속하라는 듯 가만히 속눈썹을 내렸다. 한솔은 항상 보살핌받는 입장이던 자신이 신우를 돌보고 있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이상하게도 기분이 들뜨는 느낌이었다. 결국 소독을 끝내고,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일 때까지 양호실 안은 서로가 숨죽인 채 탐색하는 긴장된 고요로 가득 차 있었다.
“다했, 어….”
마지막으로 신우의 손등 위까지 밴드를 붙이고 나자 한솔은 문득 신우와의 거리가 무척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한 마음에 무심코 몸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커다란 손바닥에 의해 퇴로가 가로막히고 말았다. 한동안 한솔의 뒤통수를 가만히 받치고 있던 신우는 엄지로 작은 얼굴을 쓰다듬듯 매만지더니 조금씩, 조금씩 손을 밑으로 내렸다. 최후에 이른 곳은 한솔의 목에 걸려 있던 초커. 버릇대로 남의 이름이 새겨진 자리를 까득, 긁어내린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달칵.
금속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 시간 만에 해방된 목을 자기도 모르게 만져 보려던 한솔은 그대로 신우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한솔은 몰랐지만 그의 목에는 가죽에 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식염수로 닦아 낸 자리에 연고를 발라 주던 신우가 어쩐지 그사이에 낮게 잠겨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솔아.”
신우가 다시 한번 한솔을 불렀다. 한솔은 숨을 죽이며 신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파혼할 거야?”
“…….”
“…….”
“…!”
잠시 신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버퍼링이 걸렸던 한솔이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파, 파혼?! 왜… 왜, 그런 걸 물어…?”
“잠…깐, 솔아, 진정하고….”
“이걸 어떻게 진정을 해!!”
한솔이 완전히 흥분해서는 주먹 쥔 손으로 신우의 어깨를 마구 때리며 말하자 신우가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한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한솔은 신우가 웃었다는 것에 더 분개했다. 어떻게 웃을 수 있어…. 난, 난… 이렇게 심각한데….
“왜 그런 나쁜… 흑… 나쁜 말 해….”
한솔이 결국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자 신우가 새까만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더니 한솔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대 왔다.
“네 의사를 물어본 거야. …네가 나한테 실망해서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말해 주니까 기쁜 걸 보면, 역시 난 성격 나쁜 게 맞나 봐.
약간 자조하는 어조로 말하는 신우를 보며 한솔은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펴 신우의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좀 진정이 된 것 같자 신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떼어 내고선 그동안 꾹꾹 눌러 왔던 궁금증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왜 자꾸 내가 신우를 미워하는 것처럼 말하는 거야.”
“그야…….”
두 사람은 깜박깜박 시선을 맞췄다.
“내가, 널… 강제로 안았으니까…?”
한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안았다’가 그 ‘포옹’의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남은 건….
“어, 언제?”
“그…, 술 처음 마신 날 그랬다고 하지 않았어?”
“술?! 술 마신 날엔… 얌전히 집에 간 기억밖에 없는데…?”
“…….”
두 사람은 혼란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내가 널 아프게 했다고….”
그러자 서서히 부풀어 올랐던 풍선이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지는 것처럼 신우가 어떤 오해를 해 버린 건지 아주 느리게 알아차린 한솔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소리쳤다.
“아니야!”
“…….”
“신우, 신우 너 안 그랬어… 그냥… 내 목 물고 잠들어 버린 것밖에 없는데….”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신우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아….”
그가 탄식과도 같은 한마디를 흘렸다.
“내가 널, 강제로… 대한 게 아니야?”
“아냐!”
“…아, 진짜….”
그가 손바닥을 들어 자신의 눈 위를 가렸다. 덜 가려진 채 드러난 알파 소년의 두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행이다….”
그가 정말 안도하는 것처럼 말해서 한솔은 속으로 울컥하고 말았다. 그간 황당한 오해를 한 탓에 데면데면했다는 사실이 억울했고 이제라도 풀려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아까 참았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만 한솔이 신우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얼굴을 보여 달라는 뜻이다. 결국 한솔의 바람대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린 신우가 한솔의 얼굴을 꼼꼼히 눈에 새기듯 바라봤다. 물기에 젖어 일렁이는 눈과 붉어진 눈가. 똑 닮은 얼굴을 한 두 사람은 아주 오랜 시간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 따뜻한 품으로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해.”
“응….”
“많이 아팠어?”
“아냐, 조금… 조금 아팠어.”
신우가 자신이 물었던 곳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초커가 없어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런데, 있잖아….”
한솔은 불안한 듯 신우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입을 열었다.
“진짜 그랬으면… 파혼했을 거야?”
“…….”
“만약에, 응… 아주아주 만약에 내가 하겠다고 했으면-.”
한솔은 불안했다. 신우는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들었을 당시, 한솔에게는 그저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만 들렸다. 신우가 거기까지 생각해 봤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고 이번 일을 통해 아주 오래된 사이라고 해도 서로가 마주 보지 않으면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듯 틀어질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한솔을 덮쳤다. 자신이 우성 오메가로 발현만 한다면 더 이상 그들 사이를 방해할 것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의 관계라는 건 아주 튼튼해 보이면서도 예쁜 설탕 과자처럼 연약하기 그지없어서 꾸준히 관심을 주고 보듬어 줘야만 일그러지지 않고 본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게, 한솔이 깨달은 사랑에 대한 정의였다.
“…….”
신우는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솔은 가만히 그 답변을 듣는다. 그리고 그의 답을 들었을 때, 아주 커다래진 눈을 하고 신우를 바라봤다.
“말했잖아.”
“…….”
“나, 나쁜 놈이라고.”
신우의 답변은 ‘내가 왜 이런 외진 곳에서 고백했겠어, 솔아. 너 도망 못 가게 하려고 했던 거지.’였다.
“나쁜 놈이라 실망했어?”
신우가 그렇게 묻는 데 원래도 좀 나쁜 남자가 취향이었던 한솔로서는 물으나 마나 한 소리였다.
“아니….”
그래도 조금 떨면서 말했다. 그래야 신우가 좀 더 집착해 주지 않을까, 하는 사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응. 또 궁금한 거 있어?”
한솔의 ‘그런데-.’가 또 나오자 신우가 한솔의 옆 머리카락을 살살 넘겨 주며 물었다. 한솔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도망을 못 가게 했을 건데?”
이걸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신우가 조금 놀란 얼굴을 해 보인다. 하지만 한솔로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신우가 거의 처음으로 자신에게 직접적인 소유욕을 드러냈다. 꼭 알고 넘어가야 했다. 그런 의지로 반짝반짝한 눈을 해 보이는 한솔을 바라보며 신우가 난감한 듯 웃었다.
“일단, 설득을 했겠지.”
“응.”
“그걸로 안 되면 너희 집안과 우리 집안의 유착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음, 하긴 두 사람의 부모님들은 원래도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아주 이성적인 대답에 한솔이 조금 삼삼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한 톤 낮아진 신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리고 그걸로도 안 되면….”
꿀꺽-.
“아마, 유혹?”
…응?
“봐 줄 때까지 계속 매달렸지 않았을까. 별장을 갈까 했는데… 아무래도 내 개인 소유가 아니니까 방해꾼이 오기 쉬운 곳이라서. 학교라면 당장 키가 없는 이상 찾기도 어려울 테고 한솔이 네가 걸어서 집에 바로 가기도 힘들 테니까-.”
아주 여상한 얼굴로 감금을 하겠다고 말하는 신우를 보며 한솔은 얼굴이 조금 발그레해졌다.
‘그건… 좀 끌리는데….’
날아간 선택지가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파혼’이라는 선택지를 밟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거야말로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예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궁금한 거 끝났어?”
“응.”
“사과는, 더 안 받아도 돼?”
“아냐… 그때도 사실 계속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냥 좀 심술이 나서….”
한솔이 자기도 미안하다며 쑥스러운 얼굴로 사과하자 신우가 한솔의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작은 숨소리를 나눴다. 따뜻한 품, 안온한 존재. 비 온 뒤에 땅이 한층 단단하게 굳듯 시련을 이겨 낸 연인은 이제 서로를 더욱 애틋하게 느끼기 마련이었다. 살갗에 배어 있는 옅은 페로몬으로도 서로의 존재를 느꼈고 안심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속에 작은 행복감이 몽실몽실 차올랐다.
“그럼….”
이렇게 마음 놓고 신우의 품에 안겨 있는 게 몇 달 만인지. 어쩐지 노곤노곤해진 마음에 졸린 눈을 하고 신우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던 한솔은 뒤늦게 들려오는 신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혼나도 되겠다, 그치?”
어…?
“솔아.”
“…으, 응?”
“권정우네 연습실은 왜 갔어?”
“…….”
“그것도 혼자. 위험하게. 몇 번 보지도 않은 알파가 있는 공간에.”
한솔은 쭈뼛쭈뼛 신우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하게 ‘반성해요.’ 자세를 취했다.
“잘못했어요….”
한솔은 힐긋 신우를 올려다봤다가 여전히 은은하게 웃고 있는 하관을 보고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어, 어떡해…. 진짜 화났나 봐….
“이한솔.”
낮게 깔린 목소리에 한솔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친구를 무조건 오메가나 베타로만 사귀라는 건 아냐.”
신우의 가슴 위를 배회하던 시선이 우뚝 멈춘다.
“그건… 그래. 내가 간섭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네가 어떤 친구를 사귀든 네게 해가 되지만 않는다면… 응원해 줘야 되는 게 내 역할이니까.”
한솔은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이며 내심 생각했다.
‘간섭해 줬음 좋겠는데…. 이왕이면 아주 타이트하게.’
물론, 그렇게 말할 순 없었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다, 생각만….
“그래도, 솔아.”
“응….”
“만난 지 겨우 이 개월 됐어. 학교는 개방된 공간이지만 거긴 폐쇄된 공간이잖아. 그것도 그놈의 영역인. 최소한 그런 곳을 가려면 어딜 갔다 오겠다고 말을 했어야지. 나한테 말 못 하겠으면 유모님한테라도. 그래야 네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잖아.”
신우는 차분한 목소리로 한솔이 잘못한 점을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 무작정 자신이 오메가라, 알파인 권정우의 아지트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한솔의 생각을 뛰어넘는 근본적인 걱정이었다. 신우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이유를 설명해 주고 한솔이 납득하게 만든다. 그는 한솔의 가장 가까운 이해자였고 한솔은 신우가 이끌어 주는 길을 맨발로 사박사박 밟는 걸 좋아했다.
“응… 잘못했어요….”
한솔이 진심으로 반성하는 마음으로 대답하자 신우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급격하게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힐긋힐긋 바라보며 몰래 울상을 짓던 한솔은 머리카락을 크게 한 번 쓸어 올린 신우가 자신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기까지-가 이성적인 유신우고.”
마침내, 두 사람의 시선이 진득하게 맞물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앗-! 으응…!”
“다른 알파 놈이랑 안 놀았으면 좋겠어. 되도록이면 베타 놈들도. 오메가, 오메가도 싫은데… 젠장….”
한솔은 자신의 엉덩이를 터트릴 것처럼 움켜쥐는 신우의 행동에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어쩐지 굶주린 눈을 한 신우가 아득, 이를 갈았다.
“기억나? 어릴 때, 무슨 기념일만 되면.”
“신우, 신우야…! 흣…!”
“사탕에 초콜릿에 빼빼로에. 아주 너한테 못 전달해 줘서 안달이었지. 넌 화과자나 떡을 제일 좋아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솔은 조금 억울해졌다. 그 친구들은 전부 같은 학원을 다니는 오메가 꼬맹이들이었다! 한솔이 많아 봤자 열 살인 어린애들에게 사랑받은 반면, 신우는 기념일을 가리지 않고 일 년 365일 키 크고 예쁜 누나, 형들에게 수도 없이 러브레터를 받곤 했었다. 물론… 전부다 ‘안 받아요.’ 하고 정중하게 되돌려 주긴 했지만. 자신도 일단 받은 것들은 전부 신우한테 줬다는 사실을 어필하니-.
“그러게. 하필 네가 준 거라 버리지도 못하고.”
처치 곤란이었다며 삐뚤게 웃는 신우의 모습에 한솔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설마, 그래서 그때 난감하게 웃은 거였어?!
“솔아.”
한솔은 이제 신우의 저 ‘솔아.’라는 부름이 무서워졌다. 너무 달콤쌉싸름한 탓이다. 저 뒤에 과연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감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침대로 갈까.”
그리고 어김없이 직격타가 꽂혔다.
“잘못한 한솔이한테 벌을 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미묘하게 신우의 어투가 바뀌었다. 그걸 알아차린 한솔은 목덜미를 타고 쭈뻣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벌벌 떨리는 손끝으로 신우의 교복 칼라를 구깃 움켜쥐는데 곧장 의뭉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응?”
물론, 한솔의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벌, 흣! 벌 주세요, 형아…! 아!”
다리에서 힘이 풀린 한솔이 신우의 품으로 풀썩 무너져 내렸다. 만족스럽게 웃은 신우가 한솔의 몸을 가볍게 안아 올린다. 신우는 자신이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던 귓가에 입술을 맞췄다.
곧, 두 사람의 뒷모습이 하얀 커튼이 쳐진 안쪽 공간으로 사라졌다.
한솔은 결벽적으로 하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흔히 병원 응급실에 가면 보이는 그런 침대. 머리맡 탁자에는 잘 개켜진 남색 하복 바지가 있고 자세히 보면 가랑이 사이가 조금 짙어 보이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부끄럽게도 신우가 ‘침대로 갈까?’라는 직격타를 꽂았을 때 약간이지만 뒤를 적셔 버린 한솔이었다.
촤악-.
입구를 가리고 있던 하얀 커튼이 걷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머그잔을 들고 온 신우가 한솔에게 잔을 건넸다. 한솔은 호호 불어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마시며 급한 갈증을 달랬다. 한솔의 앞에는 1.5L짜리 커피포트를 들고 있는 신우가 있었는데 한솔이 물을 다 마시자 다시 컵을 가져가 새로 물을 따라 준다. 맹하니 신우를 올려다본 한솔이 ‘이걸 왜 또 줘…?’ 하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어서 마시라는 고갯짓에 할 수 없이 다시 컵을 비워 내야 했다. 평소에도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연속 두 잔은 한솔도 조금 버거운 편이었다. 거의 500ml를 마신 한솔이 부른 배를 토닥이는 사이 잔과 커피포트를 가져간 신우가 탁자 위에 물건들을 올려놓았다.
달칵.
이제 신우가 무얼 할까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한솔은 비스듬히 등을 돌린 상태에서 곧장 팔을 교차해 자신의 상의 밑단을 붙잡는 신우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상의를 훌러덩 벗어 버리는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며 두 눈을 가렸다. 물론, 손가락 틈새 사이로 살금살금 신우의 몸을 훔쳐보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뚜렷하게 성을 내는 것같이 각인된 광배근의 모습과 그렇게 부담스럽지도 않으면서 마치 예술 작품 같은 등 근육. 넓은 어깨에서 날개뼈를 지나 빗살같이 떨어지는 뒤 라인에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말았다. 만약, 바지가 걸쳐져 있는 골반 근처에 푸른 멍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그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형아, 이거….”
차마 만지지는 못하고 그 주변을 배회하는 손을 가만히 잡아 온 신우가 슬쩍 상체를 뒤튼 상태로 한솔을 내려다봤다.
“각목에 조금 스친 거지 별거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아파 보이는데….
속으로 울컥했으나 한솔은 턱밑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지 못하고 가만히 삼켰다. 신우와의 이 기묘한 ‘놀이’는 일종의 ‘롤 플레이’다. 한솔에겐 천진난만한 동생의 역을 훌륭하게 완수해야 하는 소임이 있었다. 이 시기의 ‘동생’은 ‘형’에게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에 형이 하라 하면 순진무구하게 쫄쫄 따라가는 것이 한솔이 맡은 역할이었다. 한솔은 그 룰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속상함 정도는 표현해도 될 것 같아서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리까는데 은은한 나무 냄새가 훅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앗, 하는 사이 신우의 맨몸에 상체를 밀착하게 된 한솔이 속으로 ‘어떡해, 어떡해.’를 남발하는 동안 신우는 자연스럽게 한솔의 속옷을 끌어 내리고 양말까지 벗겨 냈다. 교복 상의 하나만 달랑 입게 된 한솔이 얼굴을 붉히며 두 다리를 꼬듯이 가렸다. 물론, 신우의 손길 한 번이면 자연스럽게 해제될 것을 알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
“여긴 왜 벌써 세웠어.”
“응…! 아, 아파….”
자신의 허벅지 위에 한솔을 앉혀 둔 신우가 교복 상의를 들추어 내더니 허공에 반쯤 서 있는 성기를 보고 피식 웃었다. 긴 손가락이 분홍색 귀두를 가볍게 튕겼다. 한솔이 앓는 소리를 내며 성기를 가리려 들자 신우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버릇없네.”
짝-!
아픔보다 커다란 소리에 화들짝 놀란 한솔이 서둘러 손을 떼어 냈다. 뜨끈한 허벅지 안쪽에 빨갛고 커다란 손자국이 남은 모습이 보인다. 신우가 힘 조절을 한 덕인지 많이 아프진 않았지만 알싸한 통증이 허벅지 전체를 징징-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솔은 매를 맞은 피부 안쪽에서부터 열기가 바글바글 끓는 느낌에 끙끙 앓았다.
‘더… 더 세게 혼내 줬으면 좋겠다….’
이것도 충분히 설렜지만 너무 오랜만에 이런 분위기가 잡힌 탓인지 신우가 자신을 끝까지 휘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솔이 마음속에서 은밀한 욕망을 피워 내는 사이 한솔의 교복 단추를 아래서부터 툭, 툭 푼 신우가 품이 넉넉해진 교복 상의 밑단을 한솔의 손안에 가만히 쥐여 주었다.
“한솔인 아직 어려서 혼나는 법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으니까 도와주는 거야.”
꼭 5살 꼬꼬마를 대하는 듯한 말투에 한솔의 귓불이 수줍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괜히 눈치를 보는 것처럼 머뭇거리는 척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신우가 한솔의 팔을 조금씩 조금씩 들어 올리도록 만들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손으로 가슴 위까지 교복을 끌어 올린 모양을 하게 된 한솔이 손안의 옷감을 구깃구깃 움켜쥐었다.
“가슴 내밀어.”
“그치만….”
“어서.”
오목하게 파인 한솔의 등골을 툭툭 치면서 신우가 말했다. 한솔은 마음 같아선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역할의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처럼 한참을 머뭇거린 뒤에야 조심스럽게 가슴을 내밀었다. 남성 오메가는 유선이 크게 발달하지 않기 때문에 유방이라 불릴 것은 없지만 대신 다른 성별보다 유독 젖꼭지가 예민한 편이었다. 이런 걸 한솔이 알고 있는 이유는 무려 성교육 책에도 명시가 되어 있는 말이기 때문인데 그는 비로소 오늘이 되어서야 그 한 줄의 위력을 몸소 깨닫게 되었다.
“흣…!”
차가운 공기가 스치자 유륜 속에 숨어 있던 젖꼭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옷감에 수없이 스쳤던 것인데 왜일까, 신우의 손가락이 작고 연한 살덩이에 톡, 닿자 발끝이 찌릿거리며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진 아무런 느낌도 감촉도 없다고 생각했던 몸의 일부분에 불과했던 곳이 갑자기 엄청나게 의식되는 기분이었다. 긴장감으로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신우가 엄지를 이용해 뭉툭한 정점을 지그시 눌렀을 땐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입술을 꾹 깨물어야 했다.
“좋아?”
신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뻔히 대답을 알면서도 하는 물음에 한솔은 수치심을 느꼈다. 정점을 누르고 꼬집으며 한참 동안 한솔을 괴롭히던 신우가 손톱 끝을 이용해 작은 살덩이를 한껏 비틀었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부끄러우라고 하는 거잖아, 한솔아.”
“흐앙! 죄송, 죄송해요! 아응…!”
장난을 치는 것처럼 젖꼭지를 빙글빙글 돌리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 넣은 살덩이를 마구 비비는 탓에 한솔은 온몸에 전기가 찌릿거리며 퍼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감전이 된 것처럼 몸이 제멋대로 파드득 떨리고 자신도 모르게 앞뒤로 몸을 움직이며 신우의 허벅지에 비비는 것처럼 행동했을 때, 촉촉하게 젖어 있던 구멍이 울컥 애액을 뱉어 내며 신우의 얇은 하복 바지를 적셨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흐응, 응….”
한솔이 자신의 허벅지로 신우의 허벅지를 꼬옥 조이고 입 안 볼살을 못살게 굴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그의 턱 아래로 향긋한 샴푸 냄새가 훅 풍겨 왔다. 먹물처럼 찐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턱밑을 간질거리고 따뜻한 숨결이 맨가슴을 적신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한솔이 어떠한 예감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그대로 유륜과 함께 젖꼭지가 통째로 집어삼켜졌다.
“읏!”
츕- 하고 빨린 통통한 살덩이가 잘근잘근 씹히는 느낌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유독 날카로운 알파의 송곳니가 그중에서도 톡 튀어나온 정점을 깨물었을 때, 한솔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움켜쥐고 있던 교복 자락을 놓치고 말았다. 나폴나폴 내려앉은 하얀 교복이 신우의 까만 머리카락을 뒤덮는다. 한솔은 헐떡이며 신우의 뒤통수를 꼬옥 끌어안았다. 어떻게든 멈추고 싶은 마음 반과 이대로 계속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이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충돌했다. 한솔이 전전긍긍하며 다리를 떨 때마다 하얀 시트가 부스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각종 전자 제품이 웅웅거리는 소리, 신우의 옅은 숨소리. 자신의 쿵쿵거리는 심장박동-. 그 모든 게 선명하고 또렷했으며 마치 초능력이라도 생긴 것만 같았다. 그만큼 긴장을 한 상태에서 단편적인 기억만이 드문드문한 가운데 따뜻한 손바닥이 아랫배에 가만히 닿았다. 한솔은 문득 든 불길한 생각에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신우, 신우야… 잠깐만…! 잠깐…!”
신우가 한솔의 아랫배를 가만히 눌러 오기 시작했다. 덜컥, 호흡을 멈춘 한솔은 지금까지 어떻게 못 느꼈나 싶을 정도로 강렬한 요의를 느꼈다. 그리고 그대로-.
쪼르르….
성기에서 얇은 물줄기가 가늘게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 이게, 왜… 흐….”
한솔은 파정과는 명백히 다른, 완벽한 배뇨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신우의 어깨를 밀어 내려 했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은 단단한 뼈대 위를 자꾸만 미끄러졌고 한솔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벅지를 맞비비면서 배뇨감을 참아 보려 했다. 졸졸 새어 나오던 물줄기가 언뜻 멈추는 듯했으나 그 양이 줄었을 뿐이지 귀두 끝에 방울방울 맺혀 있던 물방울이 똑, 또옥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만큼은 멈추지 않는다. 분명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어가 되질 않았다. 머릿속은 엉망이지, 숨소리는 100m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칠고 온갖 기억이 뒤죽박죽 뒤섞였다. 한솔은 처음 이곳에 와서 자신이 떠 왔던 물통을 떠올렸다. 그다음으론 자신에게 물을 먹였던 신우를 떠올렸으며 마지막으론 상의를 벗어 버렸던 알파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
그제야 깨닫는다.
지금 한솔이 실금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신우의 복부였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아득한 수치심과 더불어 아찔한 고양감을 느낀 한솔의 눈가에 투명한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싫어, 흐윽… 싫… 흐아앙!”
쾌감이 부지불식간에 치솟았다. 부끄러움과 동시에 지옥불 같은 열기가 한솔을 덮쳤다. 츕- 하고 신우가 한솔의 가슴 한쪽을 입술 사이로 뱉어 내자 한솔의 몸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요도 구멍 사이로 쪼르륵, 조금 거센 물줄기가 새어 나왔다. 마신 게 물밖에 없는 탓에 액체는 대부분 투명하고 맑았지만 언뜻 약간의 노란기가 섞여 있는 듯도 했다.
한쪽만 열심히 씹고 괴롭힌 탓인지 왼쪽 가슴만 발갛게 부푼 채로 넋을 놓고 있던 한솔이 계속해서 이상한 액체를 조금씩 내보내는 자신의 성기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리고 밀착된 신우의 복부와 두 사람 사이의 공간에서 찰랑이는 액체를 보며 곧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 나 이제 장가 못가….”
“…….”
“흐어엉!! 장가 못 간다고!! 책임져!! 책임지란 말야!!”
찰싹!! 롤 플레이도 잊어버린 한솔이 신우의 맨가슴을 솜방망이 주먹으로 때렸다가 밀치기를 반복하며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장가를 왜 못가.”
커다란 손바닥이 한솔의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알 두 개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가 기둥을 상냥하게 주무르더니 곧 요도 구멍 입구를 무자비하게 틀어막는 모습에 한솔이 ‘히끅…’거리며 새된 소리를 흘렸다. 신우가 한솔의 귓바퀴를 가만히 물었다 놓으며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오면 되지.”
“힉… 흐읏….”
“안 오려 했어?”
어쩐지 유난히 낮아진 듯한 신우의 목소리에 딸꾹질을 한 한솔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신우를 올려다봤다.
“아니이….”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면 되겠네.”
한 손으론 자꾸만 물을 흘리는 성기를 빈틈없이 틀어막은 상태로 다른 손으론 한솔의 눈가를 다정하게 닦아 준 신우가 말했다. 그 이중성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 혼란함을 사랑하는 한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붉혔다.
“놓아주면 싸는 거야.”
“그치만…!”
“이한솔. 이거 벌이야. 네가 네 입으로 잘못했다고 말했어. 그래도 계속 토 달 거야?”
여전히 한솔은 신우를 마주 보고 앉은 자세였다. 이대로 싸면 당연히 신우의 몸에 싸게 되는 거고 그건… 웬만한 부끄러운 일에도 철판을 깔 수 있는 한솔에게도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그래서 더 좋긴 하지만-. 앗, 이게 아니라…!
“아니요….”
엄하게 변한 신우의 목소리에 단번에 꼬리를 내린 한솔이 훌쩍이며 대답했다. 신우가 잘했다는 듯이 한솔의 눈가를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신우는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냈고 점차 한계에 달하는 것은 한솔이었다. 허벅지를 비비고 온몸을 꼬며 한참을 그렇게 괴로워하던 한솔은 결국 자신을 속박한 신우의 목을 와락 끌어안은 채로 주륵주륵 눈물을 흘렸다. 신우는 자유로운 한 손으로 한솔의 뒷목을 끌어당긴 채 조금씩- 아주 느리게, 덜 여문 성기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찌릿-! 갑자기 온몸에 통하지 않던 전기가 통하는 느낌에 쭈뼛 소름이 돋았던 한솔은 신우가 손을 놔줬음에도 나오지 않는 소변에 당황해서 몸을 움찔거렸다.
‘나, 이대로 영원히 소변 못 보는 거야…?’
그러자 덜컥 겁이 나선 우왕좌왕하는 한솔의 뒤통수를 느리게 쓰다듬어 주던 신우가 한솔의 머리를 자신 쪽으로 지그시 누르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싸도 좋아.”
그 순간,
정말 마법 같게도 온몸을 경직시켰던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쪼르르….
그리고 덩달아 막혀 있던 길이 풀린 것처럼 한솔의 성기에서 투명한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다.
“쉬이-.”
“흐으, 흑….”
“괜찮아, 천천히 싸.”
오랫동안 참아서인지 성기에선 꽤 오랜 시간 물이 나왔다. 그리고 참은 만큼 배뇨의 쾌감도 대단해서 한솔은 앞으로도 물을 싸면서 뒤로도 물을 내뱉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오늘 치 수치심을 다 써 버린 한솔은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었지만 어릴 때와 달리 온갖 보양식이란 보양식은 다 챙겨 먹고 자란 몸은 의외로 튼튼해서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걸 다 놔 버린 한솔은 신우의 품을 더 파고든 채로 배뇨가 끝난 성기가 묽은 정액을 전부 뱉어 낼 때까지 훌쩍훌쩍 울며 달라붙어 있었다.
“잘했어.”
마침내, 긴장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두 사람의 롤 플레이의 끝을 알리는 마법과도 같은 단어에 온몸에서 힘이 풀려 버린 한솔이 신우의 품에 안긴 상태로 결국 수치심에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몸을 찰싹찰싹 때렸다가 콩콩 두들겼다가 아주 난리도 아닌 한솔을 끌어안은 채로 신우가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에 도끼눈을 뜬 한솔이 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한테도 흑, 말하면 안 돼…!”
신우가 알겠다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니 한솔이 이번엔 발을 동동거리더니 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얼른!”
결국,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나서야 한솔은 만족했다. 신우는 그제야 뒤처리를 할 여유가 생겼는지 먼저, 젖은 옷을 입고 있던 한솔을 전부 벗기고 커피포트에 데워 놨던 물을 수건에 적셔 몸을 닦아 준다. 곧 여름이라지만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 양호실에 딱 두 개 있는 베드 중 다른 쪽에 이불로 돌돌 말아 얹어 둔 다음에야 자신의 뒤처리를 시작했다. 이미 짙은 남색이 원래 색깔인 것처럼 변해 버린 바지는 못 쓰게 된 게 확실해 보였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한솔이 민망한 얼굴로 ‘내가 새로 사 줄게…’ 하는 것을 보고 조금 웃었다.
자신의 바지와 신우의 셔츠를 주섬주섬 주워 입은 한솔은 거의 아버지 옷을 훔쳐 입은 것 같은 모양새에 목뒤를 긁적이다가 소매를 네 번쯤 접어 올린 끝에야 옷과의 긴 사투를 끝낼 수 있었다. 신우가 베드 시트를 벗기고 가지고 간 탓에 남은 건 자신의 셔츠와 사용한 수건들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거라도 한 아름 품에 안고 남자 화장실에 들어간 한솔은 세면대 한쪽을 차지한 신우의 옆모습을 발견했다. 거울을 통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옷은 어떡해?”
여전히 맨 상체인 신우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힌 한솔이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하며 물었다. 물론, 쇄골에 고여 있다가 탄탄한 가슴 근육을 타고 주륵 미끄러져 내리는 물방울을 훔쳐보며 안타까워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는데, 셔츠를 입었다기보단 셔츠에 잡아먹힌 것 같은 한솔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신우가 입을 열었다.
“사물함에 체육복 있어.”
“아, 체육복 입으면 되겠구나.”
신우의 집요한 시선에 비누칠을 하다가 손목을 삐끗한 한솔이었지만 안 그런 척 태연하게 수건을 짜다 결국 신우에게 들켜서 파스 처방을 받았다. 한솔은 뻐근한 손목을 만지작거리면서 양호실 안에 설치된 간이 빨랫줄을 바라봤다. 재료는 대체 어디서 찾은 건지 알 수 없는 흔한 줄넘기 줄이었다.
내심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2학년 5반에 들러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온 신우가 가자며 한솔을 불렀다. 두 사람은 나란히 학교 주차장으로 들어갔다가 입구 쪽에서 완전히 박살 나 버린 핸드폰이었던 것을 발견하고 잠시 묵념했다. 마침 자신의 오염된 핸드폰을 떠올린 한솔이 깔끔하게 새로 맞추자고 하는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기사의 차를 타고 마치 서먹해지기 이전의 둘처럼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며 한솔의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사이좋게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거의 두 달 만에 집을 방문한 신우를 보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던 유모가 자리를 비켜 주는 것으로 한솔의 방에 단둘이 남게 되었다.
“솔아.”
각자 다른 화장실에서 씻고 나온 뒤, 한솔의 머리카락을 말려 주던 신우가 그를 불렀다. 바람은 따뜻하고 머리를 만져 주는 손길은 다정하기만 해서-, 오늘 하루간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한솔이 눈도 다 뜨지 못하고 ‘으응…?’ 하고 답했다. 신우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그래서 그 사과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어쩌면 평생토록. 한솔은 이 사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쨍그랑-!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고 고개를 뒤로한 채로 눈을 감고 있던 여자가 눈을 떴다. 느리게 몸을 바로 하는 모습은, 마치 잠에서 막 깬 듯한 재규어처럼 우아하고 날렵했다. 여자는 여전히 빈틈이 없었고, 조금은 나른한 눈으로 와인 잔을 들어 올리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위스키라. 벌써 그런 걸 마실 나이가 됐어?”
“애는 빨리 크는 법이니깐요.”
“푸핫. 애라니. 난 한 번도 널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여자는 시선을 느리게 돌려 저 멀리 있는 존재를 바라본다. 이미 ‘소년’의 경계를 훌쩍 넘어선 남자가 거기 있었다.
“재밌는 발언인걸.”
두 우성 알파의 시선이 싸늘하게 맞부딪혔다. 여자의 와인 잔에는 붉은 포도주가 출렁이고 남자의 위스키 잔에선 하얀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얇고 가는 스템을 가볍게 돌리며 적포도주의 진한 향기를 맡던 여자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화가 꽤 많이 나 보이네.”
“누님.”
“‘누나’라고 불렀을 때가 참 귀여웠는데. 그래. 그때는 꽤 작고 귀여웠지. 너도, 한솔이도.”
신우는 한숨을 삼키며 아이스 바스켓에 집게를 집어넣었다. 탕. 맑고 진한 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신우는 지금 막 한솔이를 재우고 지상에서 내려오던 참이다. 이곳은 저택의 지하 1층이자 이세린의 공간이며 그가 오늘 이 저택을 방문해야만 했던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권 이사는 어떻게 움직이신 거예요.”
신우가 계단을 마저 내려와 맞은편의 소파에 등을 기대며 묻자 이세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오히려 신우에게 되물었다.
“어른들의 침대 사정이 그렇게 궁금했니?”
“…….”
“이런, 여전히 놀리는 재미가 없다니까.”
조금 상심한 듯 세린은 와인 잔을 소리가 나도록 탁자 위에 내려놓고 깍지를 꼈다.
“뭐, 말하자면 과거의 인연이지.”
“권 이사가 그런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은 아실 테고요.”
“…재미없는 놈.”
그녀는 크더니 애가 점점 빈틈이 없어진다고 혀를 찼다. 신우는 그녀에게 사람은 사냥 놀이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다시 일깨워 주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청남.”
꽤 오래 침묵을 지키던 세린이 입을 열자 신우의 시선이 비스듬히 돌아갔다.
“개발 허가 관련해서 딜이 들어오던데.”
“…….”
“유 회장님께서 꽤 재밌는 사업을 시작하실 건가 봐?”
매끈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내려다보며 신우는 피로해진 눈을 가볍게 감았다 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로 떠보지 마세요.”
“흐흥. 뭐야, 반응 보니까 진짠가 보네.”
“누님.”
“역시 회장님이 아니라 네가 주축이구나?”
정말 눈치 하나는 따라올 자가 없는 사람이었다. 신우는 세린의 옆모습에서 날렵한 눈꼬리를 가진 한솔의 모습을 발견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항상 짓는 순둥한 표정과 달리 한솔의 얼굴은 꽤 날카로운 선을 품고 있는 편이었다. 놀아 달라고 보채는 작은 강아지 같은 얼굴이 평소의 모습이라면 화가 났을 땐 남매의 얼굴을 닮게 된달까. 갯과 동물이긴 한데 굳이 분류하자면-.
‘여우.’
그것도 사막여우를 닮았다. 신우는 종종 성격도 취향도 제각각인 세 사람이 그래도 남매는 남매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다른 둘에게서 한솔의 얼굴을 발견하면 어쩔 수 없이 멈칫하고는 했으니까.
어찌 됐든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얼굴을 봐 온 사이였기 때문에 아무리 단단한 가면을 써도 서로가 서로를 쉽게 간파하는 편이었다. 이 때문에 사적으로는 괜찮지만 역시 사업적으로는 얽히고 싶지 않은 이라고 생각하며 신우는 위스키 잔을 가볍게 툭, 툭 건드렸다.
“정식으로 후원하실 겁니까?”
그는 결국 말투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세린은 아무래도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미끼까지 던지며 그를 이곳으로 불렀던 모양이니까. 청남은 마약굴이다. 해연이 가지고 있는 최대 넓이의 범죄 온상지이며 이제는 양지로 나오기 위해 가장 먼저 털어 버려야 할 회색 과거이기도 했다. 쉬이 감출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권 이사는 양날의 검을 붙잡고 있는 대신 부러뜨리기로 결정했고 이 사업의 최대 투자자가 바로 천성이었다. 재개발은 큰 사업이다.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이 나라에서 돈줄을 하나라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권 이사가 청남 정리를 마치는 순간부터 온갖 아귀들이 파이 하나라도 더 물어뜯기 위해 혈안이 되어 몰려들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겉으로는 청렴해 보이는 정치인도 마찬가지였다.
“회장님이 널 엄청 믿긴 하나 봐. 시작부터 큰 건을 넘겨주시고.”
“전 아직 일선에 서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누가 귀한 자식을 처음부터 총알받이로 세워? 시작부터 애송이가 나서 봤자 뭘 하겠어. 휘둘리기만 하지. 아마, 좀 주무르시다가 넘겨주겠지.”
“그걸 아시면 아버지가 왜 이 의원님을 배제하신 건지도 아실 텐데요.”
“…….”
“이 의원님이 왜 침묵하고 계시는지도.”
청남 재개발이 수면 위에 드러날 때쯤이면 유신우와 이한솔은 약혼을 하게 될 것이다. 이 판에서 결혼만큼 강력한 동맹은 없었다. 언론부터 시작해 온갖 곳에서 한솔에게 잣대를 들이밀 것이고 그 줄기를 타고 올라가 이 의원에게까지 미치게 될 게 분명했다. 유 회장과 이 의원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의원이, 나아가 이세린까지 이 판에 껴서는 안 되는 이유였다.
그걸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신우가 눈살을 찌푸리자 세린이 흐응,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 적어도 회장님도 너도 그 아이를 한 번 쓰고 버릴 패로 생각하진 않나 보네.”
“…이세린 씨.”
신우가 확 낮아진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하자 세린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신우는 아주 오래전부터 했던, ‘이 사람의 정신세계를 도통 이해할 수 없다’라는 생각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꼬맹이였던 주제에 벌써 이렇게 컸단 말이지.”
“…….”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노려보지 말렴? 방금 했던 말은 사과할게. 이해해 줘, 이제 일 년 반밖에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문득 걱정이 될 수밖에 없잖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애를 발톱을 숨기고 있는 늑대 놈한테 보내야 된다니.”
그는 언젠가 세린이 보여 줬던 자신의 핸드폰 저장명이 ‘늑대 새끼’에서 ‘늑대 놈’으로 승격된 것을 기뻐해야 하는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개발 쪽은 당연히 거절했고. 그리고 이제 막 입문한 새끼 정치인이 뭘 하겠어? 결국 아버지 손 빌릴 수밖에 없을 텐데 애초에 시작부터 그를 일이었어.”
“…그럼 대체 왜 물어보신 거죠.”
“그거야… 당연히 시험?”
“…….”
“네가 한솔이를 시험한 것처럼, 나도 널 시험했을 뿐이야.”
세린은 가볍게 웃었고 신우는 침묵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유신우가 이번 일의 시작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 이 일을 문제 삼지 못할 것이라는걸.
그리고 신우 또한 세린의 그 생각을 읽어 냈다.
모든 일의 시작은 결국 한솔과의 관계에서 금을 보았던 순간부터였다. 그는 초조해졌다. 비록 오해에서 시작된 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게 진실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한솔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건.
어느 후원 파티 후정에서 이세린을 만났을 때,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에게 한솔의 근황을 묻고 말았다. 어느 정도 두 사람 사이의 불화를 감지하고 있었을 세린에게 결국 문제가 있음을 자수하는 꼴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멈출 수 없었다.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었고 그녀가 한솔의 마음을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냐 말했을 때 멈춰야 했지만 그는 결국 학생 둘을 매수했다.
한솔이 첫 번째 남학생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 때, 그의 내면의 짐승은 기뻐했다.
두 번째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 귀여운 핑계를 대는 한솔에게 ‘가야겠냐’고 물은 것은 위선에 불과했다. 결국 한솔을 보내 준 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와야 할 한솔 대신 다른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무언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시험했고 시험당했다.’
누군가의 손안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분은 상당히 불쾌했다. 그러나 티를 내진 않는다. 결국 가벼운 수를 읽힌 건 자신이었고 그는 한솔을 시험한 일을 후회했으나 동시에 후회하지 않았다. 유신우는 자신의 내면에 사는 알파라는 짐승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혹은 그 아이에게 한 번이라도 밀어 내졌다면 그는 쪽지 같은 소꿉놀이 장난이 아닌….
-나쁜 놈이라 실망했어?
납치를 했을 것이다.
한솔은 모르겠지만 그때의 자신이 고해성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권정우에게 건넸던 해외 브로커의 연락처는 그가 매번 고민했던 흔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권 이사는요.”
“권 이사가 청남에 있는 것들을 해외로 팔아 버릴 생각인 것 같길래 그냥 거기에 살짝 도움을 주기로 했지. 국내에 둬 봤자 하나도 도움 안 되는 것들이잖아?”
“하아….”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세린의 손안에서 놀아난 것이다. 신우가 얼음이 살짝 녹은 위스키를 가만히 노려보는 사이, 신나게 웃던 세린이 눈꼬리에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입을 열었다.
“신우야, 제일 완벽한 사냥이 뭔지 아니?”
“…….”
“상대가 아픈지도 모르게 집어삼켜 버리는 거지. 짐승의 배 속이면 뭐 어떠니. 행복하면 그만인데.”
수작을 부리려면 한솔이 몰래 하라는 뜻이다. 신우는 그만 어이가 없어져서 결국 한소리 되받아치고 말았다.
“참 좋은 거 가르치시네요.”
그러자 그녀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어. 알파라는 놈들은, 특히 우성 알파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소유욕에 미쳐 있는 짐승들이거든. 그건 참는다고 되는 게 아냐.”
그런 그녀도 우성 알파였다. 세린이 신우를 잘 알듯이 마찬가지로 세린을 잘 알고 있는 신우는 그 말이 그녀의 이야기란 걸 눈치챘지만 굳이 입을 열진 않았다. 그걸 알아챈 세린이 한솔과 닮은 눈꼬리를 한껏 휘며 말했다.
“그러니까, 한솔이 울리지 마. 그거면 돼. 그거면… 아버지도 나도 그 아이를 볼 면목이 생기니까….”
어쩌면 다짐 같은 그 말은 신우의 기억 속에 꽤 짙은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훗날, ‘한예화’라 적힌 정갈한 묘비 앞에 선 그는 이날의 기억을 문득 떠올리게 된다.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체육관에서의 일은 조용히 묻혔고 한솔은 신우와 함께 새 핸드폰을 맞췄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베개를 팡팡 내리치며 볼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다가 결국 입 안에 상처가 난 것을 신우한테 들켜 혼이 났다. 한솔은 내심 행복해했다.
5월. 중간고사가 조용히 지나가고 한솔은 여전히 점심시간이면 음악실에 갔다. 두 개의 학원에 다녔고 학원 시간 사이에 정우의 연습실에 들르는 일은 사라졌지만 주말에는 종종 놀러 가고는 했다. 신우와 함께 말이다.
“미친놈들아, 여기가 너네 놀이턴 줄 아냐?!”
권정우는 팔팔 뛰었지만 한솔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자신의 지정석인 소파로 달려가 앉았다. 신우는 들고 있던 간식 봉지를 정우의 품에 무심히 안겨 주고선 마찬가지로 한솔의 옆에 가 앉았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 모습이 꽤 피로해 보였다. 정우는 커플의 만행에 짜증을 냈지만 매번 문을 열어 준 건 자신이라는 사실은 생각지 못했다. 결국 짜증 난 만큼 휘몰아치듯 연주를 하고 나면 한솔은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꼬박꼬박 박수를 쳤다. 그 와중에 신우도 조용히 눈을 뜨고 감상을 했다. 쇼팽의 녹턴을 배경으로 한솔이 신우의 귓가에 조용히 속닥였다.
‘잘 치지?’
‘어.’
굳이 해연 일 안 맡아도 알아서 밥 벌어 먹고살겠는데.
집중한 정우는 듣지 못한 최고의 찬사였다.
6월. 학원에서 백조의 호수 오디션이 치러졌다. 은혜는 원하던 대로 ‘지그프리드 왕자’ 배역을 따냈다.
7월. 기말고사를 봤다. 중간고사에서 조금 떨어졌던 성적을 복구했다. 이게 다 신우의 스파르타식 과외 덕분이었다.
8월. 짧은 방학 기간. 한솔은 신우랑 같이 백조의 호수 공연을 보러 갔다. 은혜의 턴이 훨씬 힘차고 밝아 보인다, 라고 한솔은 생각했다.
9월. 한솔은 처음으로 신우를 따라 자선 행사 파티에 갔다. 한솔의 예상대로 신우를 노리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한솔은 신우 옆에 딱 붙어서 매의 눈으로 감시했다. 항상 듣기만 했던 신우의 친구 ‘한성민’을 만나기도 했는데 한솔은 그가 잘 웃고, 친화적이고 조금… 이상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개구쟁이처럼 보이는 성민과 신우가 친구인 게 꽤 의외인 조합이라고 잠시 생각한 한솔은 신우가 귀찮아하면서도 받아 주는 모습을 보며 그래도 친구가 맞나 보다고 수긍했다.
“한솔 씨.”
“네?”
신우가 잠시 제 아버지뻘 돼 보이는 사람한테 붙잡힌 사이 혼자 놀고 있던 한솔은 성민이 불쑥 나타나자 조금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성민이 ‘워, 워. 이상한 짓 하려 한 거 아니에요!’ 하며 두 손을 들곤 씩 웃어 보였다. 말을 좀 이상하게… 하는 편이긴 했지만 밝고 에너지 넘치는 게 눈으로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우 친구니까…. 그거 하나로 경계를 푼 한솔이 무슨 일이냐며 묻자 성민이 작은 USB 하나를 건넸다.
“이게 무슨….”
“신우랑 단둘이 있을 때 봐요! 꼭! 단둘이 있을 때예요!”
외국에 나가 있느라 생일 선물을 못 챙겨 줬다며 그거 대신이니 꼭 부탁한다며 눈을 찡긋한 성민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깜짝 선물처럼 나타나더니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성민에 한솔이 눈을 깜박이는 사이 신우가 돌아왔다. 왜 그러냐는 신우의 물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어 버린 한솔은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내 손안의 USB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결국 그를 내려 주고 집에 가려는 신우를 저녁 먹고 가라며 붙잡고 말았다. 정작 저녁을 먹고 나선 조금만 더 있다 가라며 빈약한 이유로 다시 붙잡아야 했지만.
“무슨 고민 있어?”
그걸 신우가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이제는 ‘단둘이’가 기본이 된 덕에 두 사람은 유모 없이도 한솔의 방에 올라올 수 있었다. 손쉽게 조건을 충족한 한솔은 그제야 성민을 만난 것과 그에게서 USB를 받은 것을 신우에게 털어놓았다. 신우가 가만히 손바닥을 내밀자 한솔은 한참을 만지작거렸던 작은 물건을 신우의 손바닥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신우의 손바닥이 커다란 탓인지 USB가 유독 작게만 보였다.
“내가 먼저 볼까?”
“아니… 같이 볼래. 보고 싶어.”
“그래.”
두 사람은 침대에 등을 기댄 자세로 나란히 바닥에 앉았다. 쭉 다리를 펴자 길쭉한 신우의 다리가 한참은 더 뻗어 있는 모양이 되었다. 그간 키가 꽤 크긴 했지만 한솔이 큰 만큼 함께 자라 버린 신우 탓에 두 사람은 여전히 15cm의 키 차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우가 182cm, 한솔이 167cm이었다. 한솔은 속으로 3cm만이라도 더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한솔의 발이 신우의 다리를 툭툭 건들 때마다 노트북 화면에 언뜻 비치던 신우의 입꼬리가 조금씩 조금씩 호선을 그렸다.
“이건가?”
“그런가 봐.”
USB 폴더에는 ‘즐거운 시간 되길 바람ㅋㅋ’이라는 매우 수상해 보이는 제목의 동영상 하나만 달랑 들어 있었다.
서로 시선을 맞추던 두 사람은 동시에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트북은 신우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 있었고 신우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한솔이 엔터 키 위에 가만히 검지손가락을 얹었다.
“누를게.”
“응.”
달칵. 동영상이 켜졌다.
[흐아앙! 더! 더 세게…! 아아앗…!]
뚝.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엔터 키를 한 번 더 누르고 말았다.
“…….”
“…….”
두 사람 사이에는 충격적인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솔의 순결한 하얀색 노트북 화면에는 빨간딱지가 붙은 살색 화면이 그득그득한 상태였다. 나신의 남자 둘이 엉켜 있는… 작은 USB를 가져갔던 신우의 커다란 손바닥이 슥 다가와 한솔의 두 눈을 가렸다.
탁. 노트북이 그대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 잠깐 통화 좀 할게.”
“으응.”
신우가 핸드폰을 들고 방에 있는 화장실로 사라졌다. 괜히 신우가 바닥에 내려놓고 사라진 노트북을 힐긋거리던 한솔은 방음이 완벽하지 않은 화장실 문 너머로 신우의 살벌한 욕설이 들리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바로 했다. 와… 진짜 친구 맞구나…. 한솔은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했다. 언뜻 낄낄거리는 성민의 웃음소리도 들리는 것도 같아 한솔은 너무너무 궁금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살금살금 걸어가 화장실 문에 귀를 댔다. 엿들으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그렇지만 너무 궁금한걸.
[제수씨랑 좋은 시간 보내라! 어? 제수씨한테 대딸도 좀 쳐 달라 해! 짜식.]
그 뒤로 타자로 치면 ‘ㅋㅋㅋㅋㅋㅋ’의 연속일 것 같은 웃음소리 덕분에 성민의 말은 불분명했지만 신우가 짜증이 난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대로 뚝 끊겨 버렸으니까. 신우의 친구는 말을 좀 이상하게 하긴 했지만 이번의 ‘제수씨’라는 호칭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내심 흐뭇해하던 한솔은 신우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서 허둥지둥 자리로 돌아왔다. 벌컥. 타이밍 좋게 화장실 문이 열렸다.
“솔아.”
“어어? 응?”
“미안. 많이 놀랐지.”
한솔은 여기서 괜찮은 척을 해야 할지 아니면 놀란 척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놀란 척을 하면 성민이 말했던 ‘좋은 시간’을 못 보낼 것 같았다… 괜찮은 척해도 되겠지? 이제 신우랑 그렇고 그런 짓도 꽤 했는데 너무 순진한 것도 이상하잖아.
내심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유리하게 이유를 덧붙여 고민을 마친 한솔이 수줍은 것처럼 머뭇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냐… 괜찮아.”
그러자 신우가 한솔의 곁에 다시 앉아 한솔을 꼬옥 안아 줬다. 아, 아니… 이럼 안 되는데. 나 괜찮은데… 너무 수줍은 척했나…?
“그렇게 이상한 애는….”
나름 친구를 두둔해 주려는지 아니라고 말문을 트려던 신우가 멈칫- 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 신우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애가 맞구나. 한솔은 마음속에서 성민에 대한 평가를 ‘이상하지만 좋은 애’로 상향 조정했다. 오늘 좋은 시간만 보낼 수 있다면 ‘이상하지만 정말 좋은 애’로 올려 줄 생각도 있었다.
“…아니야. 좀 장난을 치고 싶었나 봐.”
“으응….”
다시 정적. 유신우의 18년 차 소꿉친구인 이한솔은 지금 이 순간, 신우가 내심 난감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품에서 놓으려 할 때, 냉큼 신우의 목을 끌어안으며 신우를 올려다봤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순수한 눈빛을 해 보이며. 초롱초롱, 반짝반짝. 아무튼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순진무구한 수식이 다 붙은 눈으로 말이다.
“그런데 있잖아.”
“…응.”
“신우도 저런 거 봐 봤어?”
“…….”
“남자 베타나, 알파들은 저런 거 많이 본다는데 진짜야?”
신우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한솔은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목을 더 꼭 끌어안았다.
“응?”
신우의 시선이 한솔을 살짝 빗겨 나갔다. 그리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어.”
“반 여자애들이 그랬어.”
그 말에 신우가 낮게 혀를 찼다. 내심 ‘그놈의 학교-’ 하고 생각하는 게 보였다. 하긴, 한솔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뒤로 온갖 일을 다 겪었으니 신우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도 아니었다.
“응? 봐 봤어?”
한솔이 다시 눈빛 공격을 가하자 신우가 난감해하며 한솔을 내려다봤다.
“조금….”
“진짜?!”
그리고 마지못해 대답하는 신우의 답변에 한솔이 펄쩍 뛰었다. 자신도 몰래 봐 놓고선 그런 적 없다는 듯이 시무룩해하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신우도 야동 보는구나….”
“…….”
“그렇구나….”
일부러 ‘야.동’ 이라고 단어에 힘주어 말할 때마다 신우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신우 취향은 뭐야?”
“…….”
“머리 긴 게 좋아? 짧은 게 좋아? 눈은? 쌍꺼풀 있는 게 좋지? 키는? 너무 크면 불편하지 않을까?”
“…….”
“응? 응?”
취향이 뭐냐고 물어보는데 아주 대놓고 자신의 특징을 나열하며 이걸 고르라는 귀여운 눈치를 주기에 어느 순간부터 신우의 입꼬리가 슬쩍 호선을 그렸다.
“일단….”
“응!”
“머리는 연갈색이어야 돼.”
한솔의 뺨이 옅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길이는 상관없지만 지금은 짧은 게 좋아. 눈은 커야 하고 연한 색이었으면 좋겠어. 쌍꺼풀은 있어야 되고, 키는….”
“…….”
“이렇게 안을 때 편한 사람?”
신우가 한솔을 폭 감싸 안자 한솔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으며 신우에게 얌전히 안겼다. 옆에 베개가 있다면 깃털이 날릴 정도로 펑펑 쥐어뜯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꾹 참고 얌전히 안겨 있으니 커다란 손이 칭찬하는 것처럼 한솔의 동그란 뒤통수를 슥슥 쓰다듬었다.
“본 적 있는 건 맞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
“야동을?”
“…그래, 그거.”
한솔은 자신이 그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신우가 당황해하는 게 재밌어서 작게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럼 왜 봤어?”
한솔이 묻자 신우가 예상했다는 듯이 한솔의 귓가에 조용히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응? 무슨 말을 하려고…. 의아해하면서도 신우가 말하기 좋게 같이 고개를 기울였던 한솔은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흠칫 몸을 굳혔다.
한솔이 안은… 좁잖아.
한 박자 늦게 신우의 말뜻을 이해한 한솔의 귓불이 꽃물이 든 것처럼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약속한 거 지키려면-.”
“…흣…!”
“공부해야지.”
다리 사이를 파고든 손이 은밀한 곳을 쿡 찔렀다. 깜짝 놀란 한솔이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리려 들자 길쭉한 손가락이 달래려는 것처럼 구멍 주위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게 오히려 풀숲에 몸을 숨긴 맹수가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때를 기다리며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결국 한솔은 신우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흠칫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낮은 수위의 파도가 지속적으로 발목 주위에서 찰랑이는 느낌. 발바닥을 간질이는 포말에 결국 작게 신음하고 만 한솔이 신우의 한쪽 소매를 붙잡아 온다. 달달한 꽃향기를 흘리기 시작한 한솔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린 신우가 반듯하게 덮어져 있던 이불을 걷고 한솔을 내려놓았다.
지이익-.
침대 위에 눕혀진 한솔은 신우가 바지 지퍼를 내려 성기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작게 헐떡이는 숨소리를 내며 긴장감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응…!”
그대로 바지가 벗겨졌다. 속옷까지 끌어 내려진 상태로 자신의 성기와 제 것을 동시에 붙잡아 오는 신우의 커다란 손바닥에 한솔은 속절없이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쿵, 쿵, 쿵. 뜨거운 살덩이 둘이 맞비벼지는 곳을 통해 진한 심장 소리가 맥박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한솔은 극적인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질을 쳤다. 어느새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또르르 굴러떨어진다. 흣, 아! 으응… 신우의 손바닥 안에서 기둥이 엇갈릴 때마다 입술 사이로 짧게 비명이 터졌다. 한솔은 이곳이 자신의 방인 것과 동시에 밑층엔 세린과 유모, 심지어 아버지까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라 다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 신우야… 흡….”
“가리지 마.”
신우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두 성기를 꽈악 압박하며 한솔에게 명령했다. 한솔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결국 떨리는 손을 들어 가슴 위로 얌전히 내려야 했다. 고개를 내린 신우가 한솔의 눈가를 가볍게 빨아 들이더니 한솔의 두 손목을 한 번에 움켜쥐었다. 머리 위로 단단히 고정하자 사냥당한 가련한 먹잇감처럼 포박된 한솔은 축축한 살덩이가 곧 다시 한번 자신의 눈가를 할짝이는 느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신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밑에, 아빠, 있… 흣! 있, 어….”
물론, 이건 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괜히 한 번씩 튕겨 보는 거랄까. 진짜로 신우가 관두길 바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말해도 넌 더 해 줘야 돼.’ 하는 무언의 신호였다. 마음속으론 좋아 죽는 중이었지만 이런 말도 몇 번 해 주어야 분위기가 살아난다. 좀 더 강압적으로 당하는 기분도 들고. 한 번 어색해졌던 이후로 다정해진 만큼 알게 모르게 집착이 심해진 것 같은 신우였지만 아직 한솔이 원하는 수위까진 멀었다. 신우는 더 성장해야 된다.
“유모랑 세린이 누나도…, 읍…?!”
“왜 자꾸 다른 사람을 찾아.”
신우가 성기를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 한솔의 시폰 블라우스를 끌어 올려 입에 물려 주었다. 부드러운 재질의 리본과 함께 하얀 천이 한솔의 입을 조용히 틀어막았다. 신우랑 처음 나가 보는 공식 자리라고 아끼던 옷을 꺼내 입었던 한솔은 하늘하늘한 얇은 천의 생사가 문득 걱정스러워졌으나 곧 가슴을 꾹 눌러 오는 손길과 서로 성기를 맞댄 상태로 살살 허리 짓을 해 오는 신우 탓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비록 유명 디자이너의 한정판 컬렉션이었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다시 사면 되지, 응.
한솔은 신우가 모으라는 대로 다리를 모으고 허벅지 사이로 신우의 성기가 쿵, 쿵 들이박아질 때마다 머리가 곧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길게 빠져나갔던 성기는 거세게 쾅-! 하는 느낌으로 무자비하게 한솔의 다리 사이를 관통했다. 어쩔 땐 정확히 아랫배에 붙은 그의 성기를 찔렀고 액체가 새어 나와 미끌미끌해진 길을 잘못 들면 배꼽을 쿡 찌르기도 했다. 다시 한번, 프리컴에 축축해진 알파의 성기가 허벅지 사이를 쓱, 빠져나가자 오소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곧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한솔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선명히 들리는 똑똑- 소리를 듣고 놀라 몸을 굳혔다.
똑똑-.
“도련님. 계세요?”
신우의 턱선을 타고 차갑게 식은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유모 목소리에 얼어붙었던 한솔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거렸다. 유모가 왜 이 시간에 왔지…?! 신우랑 올라온 거 알 텐데… 아버지한테까지 들키면…!
“어떡, 어떡해- 신우야 일단 옷부터 입고…!”
“솔아, 잠깐-.”
“도련님?”
“안 돼, 유모란 말야! 어, 얼른… 우리 이거 들키면 최소 한 달은 못 만나….”
한솔이 패닉에 빠져서 안달을 내자 신우는 눈을 가늘게 뜨곤 자신의 품 안에서 도망치려는 한솔을 내려다봤다. 한솔이 신우를 홱- 밀쳤다. 밀쳐졌다기보단 밀려나 줬다는 게 옳은 신우가 무릎으로 서고선 말했다.
“이것만 빨면 그만해 줄게.”
“흐으…?”
한솔이 깜박깜박 눈을 뜨며 신우를 올려다봤다. 붉게 물이든 눈매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아니면… 이대로 유모님한테 들킬 거야?”
그러자 퍼뜩 신우를 올려다본 한솔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결심을 굳힌 듯 발기한 성기의 귀두 부분을 합, 하고 물었다.
읏-. 머리 위에서 나직한 신음이 들렸다. 솔직히 머릿속으로 상상했었을 땐 한입에 기둥까지 삼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입에 넣자마자 오만이고 만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파의 성기는 상상 이상으로… 크고 두꺼웠기 때문이다. 거의 자신의 손목만 한 것을 준비도 없이 그냥 삼키는 건 무리였기 때문에 결국 귀두만 쪽쪽 빨아야 했다. 그리고 동시에 선액이 입 안에 치덕치덕 발라질 때마다 한솔은 발끝이 찌릿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맛은 없었는데… 신우의 페로몬이 좋았던 탓이 컸다. 한 번 빨 때마다 프리컴에서 느껴지는 농축된 나무 진액 같은 향기에 한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응… 정액도 먹어 보고 싶다… 시간만 더 있었어도-.’
정리를 위한 행위였기 때문에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한솔이 입 안에서 신우의 성기를 뱉어 내려 할 때, 어둑한 눈을 하고 있던 신우가 뒤로 빠지려던 한솔의 작은 머리를 붙잡았다.
어…?
“흐읍?!”
그대로 목구멍 입구를 짧게 치듯이 비비고 빠져나가는 긴 성기에 한솔은 콜록, 콜록 밭은 기침을 내뱉으며 자신의 목을 붙잡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신우를 올려다보자 신우가 자신의 성기를 한솔의 뺨에 가져다 대고 뭉근하게 비볐다. 쿵, 쿵. 맥박 뛰는 심장 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뜨거운 기둥을 통해 느껴지는 신우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 짙어 보이는 순간이었다.
“15개월 남았네.”
“읏….”
“……페로몬 탈취제 어딨어?”
성기를 갈무리하고 바지를 추스른 신우가 한솔의 얼굴과 몸에 묻은 액체를 닦아 주었다. 유모는 오메가였기 때문에 이곳에 신우의 페로몬이 남아 있어서는 곤란했다. 탈취제가 페로몬을 완벽하게 지워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통을 거의 쏟아붓듯이 하자 얼추 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솔은 거기에 자신의 페로몬을 슬쩍슬쩍 풀어 신우의 남은 흔적을 지웠다. 한솔이 주인인 방이니까 방 안에 매화 향기가 배어 있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는 점에서 착안한 생각이었다. 사정까지 했으면 빼도 박도 못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정작 제대로 사정하지 못한 두 사람은 괴로워했지만 말이다.
달칵-.
“앗, 유모- 미안. 못 들었어.”
“머리 말리고 계셨어요?”
“응.”
“유모님.”
“아, 신우 도련님. 이것 좀 같이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또 도련님 머리 말려 주신 거죠? 아휴, 그러지 마시라니까….”
재빠르게 잠옷으로 갈아입고 목에 수건을 건 한솔이 방문을 열었다. 태연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는 상태에서 평소처럼 반듯한 차림새로 다가온 신우가 유모에게서 다과 접시를 받아 들었다. 색색의 한지에 곱게 쌓인 한과와 수정과였다. 너무 어리광을 받아 주면 안 된다고 유모가 말하면 신우는 그저 웃었다. 거기에 한솔이 투덜거리는 평소의 무난한 대화가 이어진다. 그럼, 맛있게 먹으라고 말한 유모가 돌아가자 두 사람은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 다과 접시를 내려놓고 바닥에 나란히 주저앉은 두 사람은 오랫동안 눈을 맞췄다. 결국 후- 하고 한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다행이다….”
“…그러게.”
그리고 또 오랜 시간 눈맞춤이 이어진다.
잠깐의 여백 동안 정확히 신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딸랑-. 환기를 위해 열어 놓은 창문에서 여름이 막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풍경이 울고 깜깜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별빛 대신 도시의 야경이 어둠을 밝혔다. 조용히 다가온 신우의 손이 한솔의 손등 위를 살포시 덮었다. 옆자리의 존재.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여름이었다. 더운 날씨가, 약간의 땀 냄새가,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 오는 나무 냄새에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비가 오는 게 아님에도 장맛비의 거친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이따금 내리치던 뇌성과 한 박자 빠르게 어둠을 환하게 밝히던 빛줄기가 떠올랐다.
잊을 리 없었다. 그건, 최초로 서로를 오롯하게 붙들었던 여름의 기억이었다.
10월에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뭘까?
그건 바로-.
“수학여행!!”
인생에 딱 한 번 있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이다.
“그렇게 좋아?”
“응! 나 이렇게 단체로 같이 가는 거 처음이야.”
실은, 한솔의 경우 까딱 잘못했다간 수학여행을 가지 못할 뻔했다. 선생님까지 99% 베타인 학교에서 달랑 혼자 있는 오메가- 그것도 남성 오메가인 탓에 잠자리 문제가 컸고 이경원 의원도 안정상의 문제로 내키지 않아 했던 탓이다. 하지만 한솔이 누구인가. 자칭 눈물 연기의 달인이었다. 엉엉 울면서 보내 달라고 몇 날 며칠을 떼를 쓴 덕에 한솔은 당당하게 수학여행 티켓을 사수해 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난색을 표하는 학교 측에 통 크게 기부금을 낸 덕에 갑작스레 수학여행 장소가 제주도에서 유럽으로 바뀌는 작은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데 갑자기 왜 바뀐 거래?”
“아, 그거- 울 학교 교장 쌤이랑 옆 학교 교장 쌤이랑 라이벌이잖아. 옆 학교에서 일본으로 간다고 자랑을 엄청 했대. 그러니까 우리 교장 쌤도 열 받아서 지른 거 아냐?”
“아하.”
반 애들한테 듣기론 옆 학교의 염장질에 ‘우리 학교가 더 돈이 많아요!’라는 걸 자랑하기 위해 바뀐 거라고 한다. 그 돈, 우리 아버지한테서 나온 건데…….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한솔은 히히 웃으며 캐리어 손잡이를 앞뒤로 신나게 흔들었다. 옆에서 걷고 있던 신우가 신난 한솔을 조용히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는다. 산책 나온 강아지 같네-. 한솔은 듣지 못한 혼잣말이었다.
“졸려….”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오전 내내 과한 에너지 소비로 인해 정작 바다를 건너서는 푹 퍼져 버린 한솔은 비행기를 타는 동안 고롱고롱거리며 졸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공항에서 막 나왔을 땐 눈도 다 뜨지 못한 상태였다. 휘청거리는 걸 신우가 옆에서 붙잡고 걷길 몇 분, 설렘이 묻은 공기를 느끼고 한솔이 눈을 반짝 뜬다. 어느덧 희끄무레한 안개가 걷힌 곳에는 복잡한 이국의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다들 여권 잘 챙겼니?”
“네에-.”
“좋아. 출발하자.”
우리는 4박 5일 일정으로 파리에 머물 예정이었다. 여러 나라를 고루 둘러보기엔 인솔자 한 명이 챙겨야 하는 학생 수가 너무 많았고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경비 탓이었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몇 시간을 기차에서 허비하며 스치듯 구경하는 것보다는 한 곳을 제대로 둘러보는 것이 나았다. 여행의 설렘이 가득한 표정의 학생들이 잠시 학업을 잊고 즐겁게 재잘거린다. 디지털카메라를 목에 건 친구도 있었고 기다란 셀프 카메라 봉에 핸드폰을 연결하고 길을 걸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 대는 친구도 있었다. 한솔은 후자에 해당했다.
“신우야 김치-! 아, 좀 웃어 봐!”
한솔이 찍힌 사진을 확인하고선 신우에게 한껏 투정을 부렸다. 나름 최선을 다해 장단을 맞춰 주고 있던 신우는 한솔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여행 온 게 아니라, 뉴스 인터뷰하는 것 같다.’는 말에는 더더욱. 신우에게 있어 ‘카메라맨 = 기자’라는 공식이 강했기 때문에 일어난 참사였지만 오랜만의 해외여행에 들떠 있던 한솔이 이해해 줄 리 만무했다. 결국 뾰루퉁한 표정이 된 한솔이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들을 휙휙 넘겨 보다가 사진 끄트머리에 포착된 어떤 존재에 ‘어!’ 하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정우야! 너 찍혔다. 이것 봐 봐.”
한솔이 뒤를 홱 돌아보며 말하자 무리의 끄트머리에서 어슬렁거리며 따라오고 있던 권정우가 움찔거린다. 한솔이 멈추어 서자 덩달아 멈추어 선 신우도 정우를 돌아봤다. 난데없는 커플의 관심에 권정우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보내 줄까?”
“…됐거든.”
그러고는 후드를 뒤집어쓰더니 두 사람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 버린다. 파리까지 와서 저기압인 이유를 알 수 없어 한솔이 멀뚱멀뚱 멀어지는 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점심이 맛없었나?”
“글쎄.”
신우가 한솔의 손목을 가만히 붙잡아 왔다. 일행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두 사람은 다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다음은 노트르담 대성당이란다.”
“아아, 쌤…!”
다음 목적지가 공개되자 학생들이 단체로 탄식을 흘렸다. 유럽 특유의 오래된 성당 건축물을 구경할 생각에 신났던 한솔만 조용히 눈치를 봤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의욕을 잃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는데 담임은 그런 아이들을 달래곤 곧장 길을 출발했다. 구경할 생각을 하는 것은 오직 한솔과 신우뿐인 것 같았다.
“…….”
대성당의 화려하고 웅장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올려다본다. 푸르고 아름다운 색색의 빛이 머리 위로 찬란하게 쏟아졌다. 기억나? 한솔이 조용히 옆을 지키고 있던 신우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성당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신우가 한솔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어렸을 때, 나 성당에서 길 잃은 적 있었잖아.”
“…….”
“그때 엄청 무서웠는데-.”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두 사람만이 간직한 과거를 속삭였다.
“신우가 찾아와 줄 것 같았어.”
어린 날의 진심. 그래서 그 뒤론 무섭지 않았다고 한솔이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신우는 그런 한솔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한솔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앗!”
아프진 않았지만 조금 놀란 얼굴의 한솔이 이마를 한 손으로 가리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신우를 올려다봤다.
“나는 무서웠어.”
“…….”
“너 잃어버렸을까 봐.”
담담한 목소리에 많은 감정이 눌어붙어 있었다.
“앞으론 길 잃어버리지 않게 내가 네 옆에 있을 테니까-.”
“…….”
“어디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그 떨림을, 한솔은 아주 오랜 시간 기억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둘째 날은 아침부터 몽마르트 언덕으로 향했다.
사크레쾨르 성당을 둘러보고 전 세계의 수많은 언어로 적힌 사랑의 벽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한글로 적힌 ‘사랑해’를 찾아본 뒤, 불어의 ‘Je t'aime’ 위에 손가락 글씨를 써 봤다. 그러다 거꾸로 쓰던 신우와 손끝을 부딪치고는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테르트르 광장에선 수많은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파리 느낌의 초상화를 가지고 싶었는데 집합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고민을 하던 와중, 어떤 화가 한 명이 ‘Hé !’ 하고 경쾌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싸게 해 줄 테니 자신에게 당신들의 초상을 맡겨 보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Je suis désolé. 다음 만남의 약속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힘들 것 같다, 하자 그는 앞니를 환히 드러내며 웃었다.
『그것참 내게 딱 맞는 조건이군요! 이곳에서 나보다 빠르게 당신들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때요? 내게 한 번 맡겨 보는 것이.』
그 자신감에 매료된 한솔은 결국 화가의 모델이 되었다. 워낙 빠르게 화가의 손이 움직인 탓에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긴 할까 조마조마했는데 정작 화가에게서 캔버스를 받아 들었을 땐 자신도 모르게 빵 터지고 말았다. 하얀 캔버스 속에는 분명히 신우와 한솔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주 잘생긴 회색 늑대 한 마리와 겁도 없이 늑대의 등을 차지하고 앉은 황금색 털의 사막여우가 말이다.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물론이죠. 내가 지금껏 받아 본 것 중 최고의 초상화예요.』
한솔은 그림이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15유로를 말하는 화가에게 30유로를 지불했다. 만족스럽게 화가와 헤어지고 액자를 사 그림을 넣은 뒤 집합 장소인 언덕 아래의 물랑 루즈로 향했다. 새빨간 색의 풍차가 아주 인상적인 곳이다. 당연히 사진을 찍고 인원 체크를 마치고 나자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한솔은 신우와 함께 예약해 두었던 발레 공연을 보기 위해 오페라 가르니에로 향했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옛 귀족의 사치’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같은 압도적인 화려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분명 그곳에는 그만큼의 우아한 위압감이 존재했다. 현대의 사치를 보고 자란 한솔의 눈에도 옛 유럽식 건축의 섬세함과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 웅장하게 펼쳐진 대계단, 화려한 홀이 내뿜는 낭만의 기운은 눈을 어디다 두어야 좋을지 고민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좋아?”
“응… 한국에는 이런 옛 방식을 고수하는 곳은 없으니까….”
공연을 보고 나온 뒤, 가르니에에 홀딱 빠진 한솔이 아쉬움을 토로하자 신우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지을까.”
한솔이 기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붙잡고 있던 신우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신우가 옅게 웃곤 한솔의 손에 깍지를 꼈다.
두 사람은 둘째 날의 마지막 일정인 파리가 자랑하는 명소 ‘La Dame de Fer’ 에펠탑으로 향했다.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한 시간인 터라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바라보는 에펠탑은 붉은 태양을 등진 신화에 나오는 철의 거인 같았다.
감격스러운 웅장함.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엔 그저 흉물로 여겨졌던 거대한 골조물을 올려다보던 한솔은 그런 감상을 느꼈다. 미리 전망대 2층을 예약해 둔 덕에 곧장 엘리베이터 티켓을 끊고 전망대로 올라가자 300m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파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늘에 붉은 수채화 물감을 흩뿌리듯 주변을 거침없이 물들이며 도시 속으로 사라지는 석양과 하나둘씩 어둠을 삼키며 떠오르는 색색의 불빛. 별과 반짝임, 사랑 시와 포도주의 향기로 가득 찬 낭만의 도시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귓가에 연인의 말을 속삭였다.
꼭 맞잡은 손깍지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미래를 약속하는 말을-.
마지막 날.
“다 모였니?”
“옙!”
“쌤, 빨리요!!”
“아이고- 그래, 그래. 9시까지 여기로 모이는 거 잊지 말고. 그럼 재밌게들 놀아라.”
“네에!”
하루가 통째로 주어진 자유 시간. 꿈과 환상의 공간, 디즈니랜드에 방목당한 아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다양한 테마파크와 놀이 기구가 어서 오라며 두 사람을 유혹했지만 신우와 한솔이 가장 먼저 방문한 장소는 단연코 기념품 숍이었다. 물론, 전적으로 한솔의 의견이었다.
“…….”
“써 주면 안 돼? 응?”
큼지막한 빨간 리본이 달린 생쥐 캐릭터 머리띠를 쓴 한솔이 디자인은 같고 리본 색만 다른 머리띠를 들고 신우를 졸랐다. 웬만해선 한솔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는 신우였지만 이번만큼은 선뜻 허락의 말이 나오지 않는지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지. 한솔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집에 가면….”
“…….”
“레오타드랑 타이즈만 입은 거 보여 줄게.”
까치발을 들고 신우의 귓가에 한솔이 속닥거리자 신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솔을 내려다봤다. 아무리 이국이라지만 엄연히 밖이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잘도 발랑 까진 소리를 하는 귀여운 연인을 내려다보며 알파가 낮게 웃는다. 한솔의 감대로라면 당장에라도 무릎에 엎어 놓고 엉덩이를 때려 주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오싹해진 한솔이 헤헤… 하고 무해한 웃음을 흘리자 신우가 한솔의 볼을 가볍게 꼬집듯 놓았다.
“약속, 잊지 마.”
신우가 한솔의 손에서 머리띠를 가져가 머리에 썼다. 서양인이 아무리 동양인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지만 미남, 미인은 만국 공통 희귀종인 법이다. 기념품 숍 안에는 알게 모르게 두 사람을 지켜보던 눈이 많았다. 내적 비명, 혹은 실제로 작게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두 사람은 기념품 숍 안을 활보하다가 사라졌다.
디즈니 작품들을 모티브로 한 각종 테마파크. 여기저기 비명 지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어트랙션. 그리고, 성-.
어제 가 보지 못해 아쉬웠던 몽생미셸을 모티브로 한, 알록달록한 색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오로라의 성이 눈을 즐겁게 한다. 마치 정말 동화 속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하나, 둘, 셋!”
찰칵-.
성 위에서 마치 동화 속 인물이 된 것처럼 사진 한 장을 찍고-신우는 생쥐 캐릭터 머리띠를 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흠칫했다.- 어트랙션 몇 개를 탔다. 솔직히 테마파크를 구경하는 게 더 재밌었기 때문에 놀이 기구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는 않았지만 유원지 필수 데이트 코스인 회전목마와 롤러코스터, 그리고 대관람차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동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백마 모양의 말에 앉은 신우를 보고 한참 동안 웃기도 하고 진짜 신데렐라 호박 마차 같은 마차를 타기도 했다. 인공 바다에서 배를 타고 인어 공주 성안으로 들어가 바닷속 세상을 구경하다가 산호와 조개가 반짝반짝 빛나는 게 너무 예뻐서 결국 성안에 있는 기념품 숍에서 또 무언가를 잔뜩 사고 말았다.
롤러코스터를 타러 왔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이런 놀이 기구는 재밌어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무서워하는 편이라 연기가 더 리얼하게 나온다는 장점이 있었다.
“꺄아아아악!!”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비명을 질렀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한솔은 마찬가지로 비명을 마구 지르며 옆자리에 앉은 신우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신우가 한솔의 머리를 토닥이며 ‘괜찮아, 곧 끝나.’ 하고 말하면 한솔은 횡설수설하며 무섭다고 칭얼거리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흐어… 어지러….”
“좀 쉴까?”
“응….”
신우는 한솔을 치즈 모양의 벤치에 앉힌 다음 바로 앞에 있는 음료수 가판대로 가 주스를 사 왔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나서는 두 사람은 마침 10월이라 할로윈 특별 기간으로 열린 헌티드 맨션을 가 보기로 했다. 디즈니 판 귀신의 집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소복 입은 긴 머리 귀신이 아니라 하얀 천을 뒤집어쓴 아기자기한 유령들이 날아다니며 홈 파티를 열고 그런 저택을 구경하는 어트랙션이었다. 부제는 크리스마스의 악몽. 솔직히 말해서 무섭기 보단 귀여운 편이었지만 한솔은 신우와 손깍지를 끼고 조각상이 드르륵, 드르륵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손을 움찔거렸다.
“무서워?”
신우가 속삭이듯 물어 오는 걸 한솔은 절대 아니라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물론, 전부 연기였다. 신우가 작게 웃으며 한솔의 손등을 토닥토닥한다. 그렇게 한 바퀴를 다 돌고 헌티드 맨션을 나오고 나선 한솔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후-하.’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곧 퍼레이드 하나 보다.”
“진짜?”
신우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정말로 다양한 디즈니 캐릭터들이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석양이 지는 거리를 몰려드는 인파를 따라 걸으며 두 사람은 서로를 놓지 않기 위해 이번 파리 여행 내내 그랬듯 손을 꼭 맞잡았다. 그렇게 퍼레이드 행렬과 함께 걸으며 웃음을 나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인파에 밀려 뒤쪽으로 빠져나온 두 사람의 시야에 높게 솟은 대관람차가 보인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이 없네요. 운영을 안 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곧, 일루미네이션이 시작될 텐데 이곳에선 맨 꼭대기가 아니면 건물에 가려 쇼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이 되면 인기가 없지요.』
평소라면 긴 줄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의아함에 직원에게 묻자 직원이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해 준다.
『타시겠습니까?』
직원의 물음에 신우와 한솔이 서로를 동시에 돌아봤다. 연인은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앗, 출발한다.”
휘이익- 펑!
대관람차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오로라 성에서 불꽃 쇼가 시작되었다. 직원의 말대로 대관람차 위에서는 쇼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편이었지만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의 환상만 보아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빛의 폭발을 지켜봤다. 굳이 말이 필요 있을까. 서로를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두근거림 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순간,
휘이익-!
“아.”
펑-!!
대관람차가 절정에 닿은 찰나에-.
이곳의 어느 누구보다도 저 불꽃에 가까운 두 사람의 눈앞에서 색색의 빛이 폭발했다.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남은 찬란한 빛의 잔재가 아른거렸다.
***
“은혜야, 혹시 내가 눈뜨고 기절하면 꼭 신우한테… 아니 119에 신고해 줘야 해.”
“아, 알았다니까. 얼른 옷 갈아입기나 해. 얼른!”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 걸까. 한솔은 은혜의 손길에 떠밀려 로커 룸에 밀어 넣어진 뒤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분명 은혜의 성화에 못 이겨 시작한 일이었는데… 막상 공들여 연습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욕심이 생겼다. 잘하고 싶었다. 동시에, 누가 뭐라 해도 너는 클라라라고 인정받고 싶었다.
“할 수 있다, 이한솔.”
두 주먹을 불끈 쥔 한솔이 마침내 파들파들 떨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발레복을 찾아 입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자 유연한 몸이 탄력 있게 늘어난다. 스읍. 한솔은 마지막으로 깊게 심호흡을 했다. 준비를 마친 몸으로 로커 룸의 문을 열자 원래 은혜뿐이던 소파의 맞은편에 학원에선 보기 드문 장신의 존재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신우야-!”
“솔아.”
본래 학원은 알파 출입 금지 구역이었지만, 오디션이나 공연이 있는 날만큼은 예외였다. 오메가의 긴장을 풀어 줄 수 있는 건 결국 짝인 알파였기 때문에 이날만큼은 학생들의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알파들의 출입이 허락된다.
한솔은 날듯이 달려가 신우의 품에 안겼다. 은혜는 ‘어휴, 저 커퀴.’ 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자긴 먼저 가 보겠다며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신우가 한솔의 뒤통수를 가만가만 쓰다듬자 긴장으로 꽁꽁 굳어 있던 몸이 사르르 녹는 느낌이 든다. 한솔은 신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은은하게 맡아지는 체향에 몸을 맡겼다.
그랬다. 오늘은, 대망의 오디션 날.
11월의 어느 날. 학원은 ‘호두까기 인형’의 오디션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복작복작했다.
“크리스마스?”
“응.”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호호 분 한솔이 뜨거운 매실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삼켰다. 아- 좋다…. 어쩐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뼈마디가 몰랑몰랑해지는 기분에 한솔은 흐물흐물 녹아내려 신우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신우가 탁자 위에 내려놓았던 텀블러의 뚜껑을 열어 매실차를 따라 준다. 쫄쫄쫄, 달큼한 매실 향이 맡아졌다. 왜 늦었나 했더니 유모한테까지 가서 이걸 받아 온 모양이다. 이 완벽한 비율은 유모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맛이었다.
“일정 안 돼…?”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한 신우의 얼굴에 한솔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묻자 신우가 담담한 얼굴로 한솔을 내려다봤다.
“조정하면 되니까. 괜찮아.”
저건 ‘무지하게 바쁘지만 비서실을 갈아 넣어서라도 맞춰 보겠다.’는 뜻이다. 물론, 가장 먼저 갈려 나갈 건 신우의 휴식 시간이겠지만….
한솔은 약간의 죄책감과 기쁨, 그리고 미안함에 신우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양심이 조금 따끔따끔하긴 했지만 여기서 ‘나는 괜찮으니까 네 일 봐.’ 하고 말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건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하고 싶지 않았다. 신우도 정말로 안 될 일이었음 안 된다고 말했을 거라고 한솔은 스스로를 달랬다.
‘호두까기 인형’은 성탄절 특설 공연인 만큼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공연이 잡히곤 한다. 본래라면 오디션도 한 달은 더 일찍 열렸어야 했는데 같이 공연을 올리는 자매 학원에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11월 초에 열리게 되었다. 아마 배역이 정해지고 나면 50일은 죽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한솔은 강행군이 될 일정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뽑히면 좋겠다… 잘할 수 있는데.
“이번에 배역도 엄청 많이 뽑고 공연장도 큰 데 빌린다 하니까 볼만할 거야- 흣….”
한솔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 죄책감에 혼자 재잘재잘 떠들다가 갑작스럽게 쉬폰 스커트 아래로 슥 들어온 손을 느끼고 깜짝 놀라 굳어 버렸다. 타이즈 위를 느리게 쓰다듬는 은밀한 손길은 마치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한솔이 신우에게 생쥐 캐릭터 머리띠를 씌우겠다고 딜을 걸었다가 신우에게 되레 혼쭐이 났던-.
-밖에서 그런 말 하면 돼, 안 돼.
-아, 안 돼요… 아흑!
-여긴 왜 이렇게 젖었어. 응? 내일 이렇게 축축한 거 입고 학원 가려고?
레오타드는 몸에 착 달라붙는 연습복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둔부도 꽉 끼게 된다. 신우는 그걸 알면서도 회음부와 구멍 위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결국 한솔은 자연스럽게 뒤를 적시고 말았다. 물론, 이 모든 건 한솔의 자업자득이었다. 한 번 적시고 나서는 신우의 허벅지 위에 엎드려서 엄하게 혼이 났는데 엉덩이를 맞을 때마다 앞이 조여 와서 한솔은 끙끙 앓아야 했다.
결국 앞도 적시고 뒤도 적시고 잘못했다고 펑펑 울 때까지 혼이 나다가 신우가 돌아가고 나선 가족들 몰래 빨래를 하느라 첩보 작전까지 찍어야 했었다. 한솔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면서도 또 좋아 침대로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이불 위를 뒹구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 우야… 여기 학원인데….”
“알아.”
“그으… 흡….”
한솔은 이러다가 또 뒤를 적셔 버리면 어떡하지… 하고 고민하면서도 신우를 적극적으로 말리진 않았다. 이렇게 좋은데 이걸 왜 말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만 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나자 한솔은 무척 행복해졌다. 아드레날린이 펑펑 솟으며 이대로라면 오디션 정돈 문제없을 것 같다는 자신감마저 생긴다. 설마 그래서 만져 주는 건가? 한솔은 자신이 정답에 가깝게 추측해 냈다는 사실도 모르고 좋아서 끙끙거리기 바빴다. 신우는 그런 한솔이 사정하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몸이 달아올라 근육이 풀어질 때까지 한솔의 몸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제 가야지.”
신우의 말에 한솔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디션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곧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나, 나 만약 오디션 떨어지면….”
“…….”
“나무 역할 맡아도 보러 와 줄 거지…?”
유치원 학예회도 아닌데 깍두기처럼 나무 역할이 있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군무가 중요한 호두까기 인형에선 배역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한 존재였으니 한솔의 말은 괜한 투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불안하니까 소중한 이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거다. 그리고 신우는 단 한 번도 이럴 때 한솔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장미 100송이 꽃다발 사 갈까?”
한솔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괜히 신우의 시선을 피하며 얼굴에 손부채질하던 한솔이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그건 나중에 줘….”
그러자 신우가 낮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신우의 배웅을 받으며 4층을 떠났던 한솔은 겨우 한 층 떨어지는 것뿐인데 온갖 염병은 다 떤다고 은혜한테 한 소리를 들었다. 물론, 한솔은 당당했다. 옆에 있어도 자꾸만 보고 싶은데 어쩌겠는가.
그리고 약 5시간 뒤-.
“붙어 놓고 왜 울어.”
토끼처럼 눈이 새빨개진 한솔의 눈가를 닦아 주며 신우가 피식 웃었다. 한솔은 나 안 울었다고, 이거 먼지 들어간 거라고 박박 우기면서 누가 봐도 운 얼굴로 코를 훌쩍거렸다. 신우는 작고 귀여운 걸 보는 눈으로 한솔을 한참 바라보더니 들썩이는 작은 등을 토닥거렸다.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고생했어. 기대할게.”
D-52. 크리스마스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
“좌석 예매가 오늘부터라 했나….”
크리스마스 당일 공연. 그것도 딱 한 번 있는 공연이다 보니 티켓을 팔진 않고 성탄절 기부 행사와 맞물려 문화 소외 계층을 위한 공연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당연히 전 좌석이 무료지만 공연 이주 전까진 문화 카드를 소지한 이만이 좌석 예매가 가능하고 이주 뒤부턴 제한이 풀리는 형식이었다.
원하던 것을 찾았는지 은혜가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돌려 신우와 한솔에게 보여 준다. 거기에는 ‘좌석 현황표’가 있었다.
“뭐, 첫날인 거 감안해도.”
“…한 명도 없네.”
“아냐, 잘 봐. 여기 한 명 있다?”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냐고 한솔이 은혜를 찌릿 노려보자 은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천성 문화 재단 마케팅 부서는 유능하니까 어떻게든 좌석은 다 차겠지. 하지만-.”
“정작 그 관객 중에 소외 계층이 몇 퍼센트나 될지는 모른다는 거군.”
“빙고.”
손가락을 딱 튕긴 은혜가 말을 이었다.
“재단 입장에선 할 일 다 했지. 돈 풀었고, 지원 다 했고, 홍보 방법도 제시했어. 문제는 우리 관객분들이라는 거야. 삶의 현장에서 피땀 흘리시느라 바쁜 분들이 어디 이런데 관심이나 가겠어. 포스터 아무리 크게 붙여 봤자 눈길 주는 건 극히 소수일 텐데.”
분위기가 급 숙연해졌다.
무대에 서는 무용수를 꿈꾸던 열 살의 꼬마 숙녀는 어느덧 자신이 서는 무대를 넘어서 그 아래, 어둠 속에 잠긴 관객들의 사정까지 헤아리는 열여덟 소녀가 된 모양이었다.
한솔은 손안의 과자 포장지를 구깃구깃 구겼다. 안온한 온실 속에서 예쁘고 귀한 것들만 보고 자란 한솔은 칼바람 부는 추위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들꽃의 존재를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음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는 시야였다.
“이왕 좋은 명목으로 쓸 돈이면 그 명목에 맞게 쓰는 게 좋지 않겠냐는 뜻이었어.”
“그럼 어쩌지… 아예 문화 카드 소지하신 분만 예매 가능하게 바꿔 달라고 해 볼까?”
“그건 힘들어. 애초에 700석을 전부 채우기 힘들 걸 아니까 이런 식으로 만든 거라서.”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요점은 그게 아니라 소외 계층의 접근성이 낮다는 거니까….”
은혜가 대화의 운을 뗐을 때부터 수첩에 뭔가를 계속 기록 중이던 신우의 펜이 멈칫한다.
“…미안. 네 의견을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어.”
“응? 아냐 아냐. 신우 말이 맞는걸. 좌석이 문제가 아니라 무료로 공연한다는 것도 그분들은 모른다는 거니까.”
한솔이 시무룩하게 답하자 신우가 곤란한 듯 ‘음….’ 하고 침음을 흘렸다. 애초에 사회가 가진 수많은 문제점 중 하나였고 그걸 단시간에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이, 그리고 자본의 투자가 이뤄져야만 조금은 바뀔까 말까 하는 일이었으니까.
어쩌면 먹고살기도 바쁜 이들에겐 책 한 권 읽는 시간이, 영화 한 편 보는 시간이, 공연 하나 관람하는 시간이 전부 사치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한솔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삶이었기 때문에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포근한 이불속에 누웠을 때도 줄곧 그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을 꿨다.
***
지긋지긋해……. 이제 그만할까.
***
막 연습용 레오타드를 갈아입고 나왔던 은혜는 한 열흘은 잠을 못 잔 것 같은, 퀭한 한솔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병원 갈래?”
“아냐, 괜찮아….”
그냥 조금, 잠을 설쳤을 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드문드문해지던 ‘남자’의 꿈을 열흘 넘게 연속으로 꾼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한솔은 뻐근해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 꿈을 꿀 때부터, 남자는 언제나 혼자였다. 직장 동료와는 같은 공간에서 일하지만 사적인 대화는 일절 나누지 않는다. 퇴근을 하고 나서도, 일을 나가지 않는 공휴일에도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의 ‘파트너’와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언제나 혼자였다. 육체는 길들여진 대로 쾌락을 추구했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외따로 떨어져 나온 섬처럼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표류했다. 한솔은 어디까지나 ‘관찰자’였기 때문에 그런 남자에게 동화되지는 않았지만 종종 흘러넘친 남자의 감정을 넘겨받을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사무치는 ‘외로움’ 같은….
어두컴컴한 밤바다를 보고 선 남자가 조용히 눈을 감는다. 발밑에서 막연하고 아득한 감정이 넘실거리며 파도쳤다.
언제나 다음을 이야기하던 꿈은, 그러나 이게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라는 듯 며칠간 같은 장면만을 반복해서 보여 주고 있었다.
한솔은 조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
아무래도 홍보 기간이 짧은 탓인지 예매가 생각보다 더 안 됐다.
“직접 가서 권해 봐야겠어.”
한솔의 눈망울이 짧게 흔들렸다.
“나도….”
“응?”
“나도 가고 싶어.”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에 한솔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던 신우가 조금 놀란 얼굴을 해 보인다.
“연습실 안 가 봐도 되겠어?”
“어차피 오늘은 혼자 하는 거니까, 괜찮아.”
매일 밤, 악몽 아닌 악몽을 꾸느라 나날이 안색이 안 좋아지는 한솔 탓에 오늘은 집에 얌전히 박혀 쉬라는 은혜의 전언이 있었다. 물론, 그 말을 듣지 않고 기어코 나가려 했던 한솔이었지만 이렇게 된 것, 신우와 함께 홍보 발품을 팔기로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직접 홍보 활동을 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만난 인연은 첫 홍보하는 곳에서 만난 아이였다. 아이의 이름은 윤. 목소리를 잃은 천사였다.
청각은 문제가 없다는 윤이 어머님의 말에 한솔은 일단 조심스럽게 아이의 앞에 무릎을 굽혔다. 항상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하던 신우에게 옮은 습관이었으나 정작 한솔은 눈치채지 못했다.
“안녕, 윤아. 나는 이한솔이라고 해. 그… 미안해. 내가 수어를 못해서 네 말을 조금 늦게 알아들을 것 같아.”
그러자 윤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엄마랑 선생님 빼고 수어를 ‘말’이라고 해 주는 형은 처음 봤어요.’
그리고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오래오래 있다 갔으면 좋겠다.’
한솔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그, 혹시… 윤이는 발레 공연 같은 거 안 좋아해?”
두 번째 아이는 아버지와 둘이 사는 예나라는 꼬마 숙녀였다.
한솔을 비비 인형 같은 왕자님이라고 부르던 예나에게, 한솔이는 예나 역시 공주님이라고 해 주었다. 그 말에 예나는 눈을 반짝였다.
“드레스가 없어도 예나가 아빠의 하나뿐인 공주님인걸.”
피곤에 지친 예나 아버지는 초대에 몹시 기쁘게 응했다. 예나를 품에 안고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남자를 보며, 한솔은 문득 꿈속의 남자를 떠올렸다.
사람은 이 정도의 대화에도 위안을 느낄 수 있는데. 당신이 그 위태로운 절벽 위에 서기 전까지도, 분명, 당신을 구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던 걸까.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
D-day.
마침내, 공연 날이 밝았다.
“와, 사람 짱 많아.”
“어디부터 갈까, 카페?”
“아니, 기념품 숍 먼저 들리자. 공연 보고 나면 사람들 때문에 들리지도 못할 듯.”
“뭐야, 여기 기념품도 팔아?”
“어, 수익은 전부 결식아동 후원으로 들어간대. 가자, 가자.”
문화의 전당 본관 앞, 색색의 전구가 화려하게 반짝이는 거대한 트리 주위로 수많은 사람이 즐거움을 나누며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밤새 내린 눈 탓에 트리는 물론이고 길거리마저 온통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지만 반짝이는 설렘과 부푼 기대가 뒤섞인 공기는 추운 겨울 날씨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듯했다. 검은 세단의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던 신우가 지이잉- 손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솔이
절대절대 오지 마!!
무대 끝나기 전까진!!!!
(격하게 고개를 젓는 강아지 이모티콘)
보고 싶은데
솔이
(부끄러워하는 햄스터 이모티콘)
그래두 안돼…
솔이
끝나고 봐ㅠㅠ
어릴 때부터 공연 날만 되면 무대에 오르기 전까진 손끝 하나 보여 주지 않으려 했던 한솔이었다. 특히 첫 공연이었던 ‘백조의 호수’ 초연 때는 항상 순하고 어리게만 보였던 아이의 파격적인 변신에 넋을 놓기도 했었다. 새하얀 깃털 머리 장식과 순백의 백조 의상을 입은 한솔이 순수함의 결정체였다면 어린 신우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건 매혹적인 모습의 검은 흑조였다. 겨우 열 살의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고난이도의 32회전 푸에테. 그 순간 엿보았던 어린 흑조의 처연하고도 처절한 욕망의 감정이 신우의 내면에서 무언가를 아주 크게 비틀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신우가 한솔을 어린 동생 같은 소꿉친구가 아니라 페로몬을 교감할 수 있는 이성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
“오늘 일정은 전부 스킵해 두었습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앞자리에서 건네 오는 말에 무심히 대답한 신우는 차가 부드럽게 정차하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열고 내렸다. 순식간에 자신이 할 일을 빼앗긴 정 비서가 당황해하며 뒤따라 내리자 흰색과 보라색이 섞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한 아름 품에 안은 신우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비서진 전원 보너스 입금해 놓았으니 확인해 보시고, 오늘은 이만 퇴근하시면 됩니다.”
신우의 존댓말은 더 이상 사적인 영역에 손대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 비서가 한걸음 물러서자 곧 특유의 곧은 자세로 돌아간 신우가 뚜벅뚜벅 인파에 뒤섞여 사라진다. 화사한 꽃다발을 품에 안은 미남자는 어디에서든 눈에 띄었다. 수군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꼿꼿하게 건물 내부를 가로지른 신우는 유독 사람들로 북적이는 입구를 발견했다.
“입장 전, 예매 좌석 확인 부탁드립니다!”
신우는 한창 바빠 보이는 직원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시작 20분 전. 꽃다발 보관을 맡기려면 조금 빠듯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와중, 전체적인 관객 입장 상황을 살피러 온 하우스 매니저가 신우를 발견하고선 눈치껏 빠르게 다가와 물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혹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실까요?”
신우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관계자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빠를 거라는 판단하에 자신의 티켓을 보여 주었다.
‘후원자 초대석.’
그 후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꽃다발을 맡기고 자리를 찾아가 앉자 시작 5분 전이었다. 굳게 닫혀 있는 붉은색 무대 커튼 뒤로 그의 연인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소란스러워졌다. 신우는 가장 먼저 핸드폰을 매너 모드로 바꾼 뒤, 답답하게 조여 오는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그가 등받이에 느리게 등을 기대는 순간, 하나, 둘 머리 위의 조명이 꺼지기 시작한다. 곧 오페라 하우스 내부에 완벽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웅성거리던 소리도 일제히 음소거라도 된 듯 잦아들었고 고요한 침묵이 어둠을 감싸 안았다.
Tchaikovsky.
The Nutcracker, Overture miniature.
그리고 한편의 동화 같은 작은 서곡을 시작으로 마침내 무대의 막이 올랐다.
***
“윤아!”
한솔이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서 환한 얼굴로 소리치자 윤이 조금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한솔에게 다가왔다. 소년은 한 발자국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서더니 한솔의 얼굴을 특유의 또랑한 눈으로 빤히 올려다봤다.
‘오늘 너무 멋있었어요.’
조금 쑥스러워 보이는 손짓인데 그의 착각인 걸까. 귀 끝이 묘하게 붉어진 걸 보니 옳게 본 게 맞는 듯했다. 한솔이 눈매를 곱게 접으며 웃자 소년의 양쪽 볼까지 붉은 기가 침범했다. 결국 윤은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손안에 꼭 쥐고 있던 종이 꽃다발을 한솔의 품에 불쑥 내밀고 말았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끄덕-.
“와… 진짜 윤이 손재주 좋구나. 고마워. 잘 간직할게-.”
향기 없는 꽃이 한솔의 품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한솔이 정말 기쁜 얼굴로 웃자 그제야 긴장해 있던 소년의 얼굴도 편안하게 바뀌었다.
“아차, 사진 찍어야지?”
‘네. 좋아요.’
윤이 어색하게 한솔의 옆에 서자 한솔이 무릎을 굽히며 윤과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이제는 소년기를 탈피해 가는 성숙해진 얼굴과 여전히 어린 소년의 모습이 한 화면에 담겼다.
“자, 찍을게요-.”
윤이 어머님은 어정쩡한 자세의 아들과 요정 차림의 한솔을 보며 작게 웃었다. 한솔이 윤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소년의 어깨가 보이지 않게 움찔 튀었다. 어쩐지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은 아들의 심정도 모르고 그녀는 밝은 얼굴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찰칵!
훗날, 윤이 다시 이한솔을 만날 그날까지도 이 사진은 그의 마음속에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축복의 포인세티아가 화면 안에서 환하게 만개했다.
한솔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단체 사진을 찍고 은혜가 4살 연하의 알파에게 못 이긴 척 끌려갈 때까지도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신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단 바쁜 연말 일정에도 공연을 보러 와 준 가족과 먼저 사진을 찍었다. 물론, 이재경은 없었지만. 그놈은 딱히 없어도 되니까….
“유신우 안 왔어?”
“어? 아냐! 왔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는 세린의 말에 속으로 흠칫 놀란 한솔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것 보라며, 소지품을 넣어 둔 함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고선 아침의 카톡 대화 내용을 보여 주기까지 한다. 한솔은 당황한 탓에 본인의 그 행동이 더 수상스럽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지만. 흐응-. 어린 동생들의 풋풋한 대화를 슬쩍 훔쳐본 그녀는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피식 웃었다. 뭐,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알아서 하겠지.
데려다줄까, 묻는 아버지의 말씀에 친구와 더 있다 가겠다는 대답으로 가족들을 돌려보냈다. 하나, 둘 공연을 마친 원생들이 가족과 함께 돌아가고 폭탄을 맞은 것처럼 난리였던 무대 뒤가 얼추 정리될 때까지도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바쁜 일 생겨서 돌아갔나…?’
그렇게 시무룩하게 의자에 앉아서 토슈즈로 바닥을 툭툭 차던 한솔에게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한 사람-.
“저-.”
아니, 두 사람이 있었다.
의아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던 한솔은 또 다른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 ‘엇!’ 한다. 한솔의 눈빛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공연 보러 오셨네요?”
귀엽게 양 갈래 삐삐 머리를 한 예나와 예나 아버님이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한솔이 다른 의자를 가지고 와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사람이 대부분 빠져나가서인지 대화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한솔이 불쾌한 기색이 아닌 것 같자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지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예나는 아빠의 옷깃을 꼭 잡고 새침하게 뒤통수만 보여 주고 있었다.
“조금 더 일찍 오셨으면 다른 애들이랑도 사진 많이 찍었을 텐데….”
“아, 아닙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 들어가도 되는지 싶었거든요. 그냥 집에 가자고 해도 예나가 너무 보고 싶어 해서….”
아무래도 형식상 붙여 놓은 그 표지판 때문인 듯했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려도 한솔이 나오지 않자 결국 스태프에게까지 물어 찾아왔다는 말에 한솔은 입을 작게 벌렸다. 예나의 고집은 사실 아빠의 집념을 닮은 게 아닐까…?
“그런데 예나는 제가 보기 싫나 봐요.”
자기 이름이 들리자 예나가 힐긋 한솔을 돌아보더니 다시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솔이 우는 척, 흑흑거리자 오히려 남자가 더 당황한 얼굴을 해 보인다.
“예나야 왜 그래. 오빠 보고 싶다고 했잖아.”
“왕자님 아냐아… 왕자님 없어….”
“응? 무슨….”
예나가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저 오빠는 공주님이잖아.”
두 사람이 멈칫, 했다. 그러다 한솔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고 남자는 여전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반짝이가 묻어나는 눈물을 슥 닦은 한솔이 딸아이를 달래는 데 여념이 없는 남자에게 말했다.
“제가 예나 안아 봐도 될까요?”
“아, 그럼요.”
남자가 한솔에게 예나를 건네자 또 안기는 건 싫지 않은지 여전히 오리 입술인 예나가 한솔에게 얌전히 안겼다. 읏차-. 어쩐지 이주 만에 조금 더 큰 것은 예나를 한솔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예나 공주님, 이제 왕자님이라고 안 불러 줄 거예요?”
“…왕자님 아니에여….”
“왕자님 아니에요?”
“웅… 공주님이에여.”
아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꽤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럼, 공주님이어서 싫어요?”
여전히 미소가 걸린 얼굴로 한솔이 다정하게 묻자 ‘우음…’ 하고 고민하던 예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안 싫으면, 좋아?”
“…네에.”
“좋으면 예쁜 얼굴 보여 주면 좋겠다. 예나 공주님 얼굴 보고 싶은데-.”
차근차근 아이 식대로 논리를 밟아 가자 ‘좋으면 얼굴을 보여 줘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예나가 드디어 한솔과 시선을 마주쳐 주었다. 한솔이 싱긋 웃었다.
“와, 우리 예나 공주님 그새 더 예뻐졌네.”
예나의 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다.
“오늘 어땠어? 재밌었어요?”
“웅… 네에! 반짝반짝하구… 또, 또… 예뻤어여.”
“그래? 얼마만큼?”
“이이이만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낯가림이 풀렸는지 예나가 조잘대기 시작했다. 한솔은 꽤 오랜 시간 예나와 대화를 나눴다. 신우가 오지 않아 헛헛했던 마음이 아이의 사랑스러운 조잘거림에 사르륵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고마워했지만, 오히려 감사해야 할 건 한솔이었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한솔은 또 한참 동안 땅굴을 파고 있었을 테니까-.
“우리 예나, 아빠 말 잘 듣고 착하게 공연 봤다니까 선물 줘야겠다.”
“진짜여?”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제가 주고 싶어서 그래요.”
당황해하는 남자를 역으로 말리며 한솔은 아까 꺼내 놓았던 함을 열었다. 결식아동 후원을 위해 제작된 호두까기 인형과 사탕 요정 피규어 세트가 얌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연 기념으로 원생들에게도 전부 하나씩 배부되었던 것인데 일전에 비비 인형이 가지고 싶다고 칭얼거리던 예나의 목소리에 문득 떠올랐다. 한솔은 투명한 유리 돔으로 포장된 피규어 세트를 꺼내 예나의 고사리 같은 손안에 가만히 쥐여 주었다.
“우와아-.”
한솔이 유리 돔 아래의 버튼을 누르자 캐럴이 흘러나오며 호두까기 인형과 사탕 요정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흩날리는 것처럼 작은 스티로폼 조각과 반짝이들이 돔 안을 휘몰아친다. 유리 돔에 비친 아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마음에 들어?’ 한솔이 묻자 예나가 고개를 두 번, 세 번, 네 번 끄덕였다. 정말 좋아하는 예나의 모습에 한솔의 마음도 뿌듯해졌다.
“잘 가, 예나야.”
“오늘 감사했습니다. 공연도 정말 잘 봤어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지금 눈 많이 온다는데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한솔이 손을 흔들자 선물 받은 유리 돔을 품 안에 꼬옥 안고 있던 예나가 내려 달라며 아빠를 보챘다. 폴짝-. 남자가 예나를 바닥에 내려 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빠의 품속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예나가 도도도 달려와 한솔의 다리를 붙잡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에 한솔이 가만히 무릎을 굽혀 주었다.
예나가 까치발을 들고 한솔의 귓가에 속닥였다.
“있자나여, 비비보다 오빠가 더 예뻐여.”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였다.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벌써 다섯 번째. 신우에게 전화를 걸었던 한솔은 응답이 오지 않는 무미건조한 메시지에 핸드폰을 든 손을 축 늘어트렸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걱정 반, 속상함 반에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는 화면을 끈 한솔은 다시 한번 통화 버튼을 터치하려던 손끝을 머뭇거린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눈을 질끈 감은 한솔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이전과 같이 1분 넘게 연결되는 통화음에 그만 포기를 하려던 찰나-.
뚝.
상대가 전화를 받는소리가 들렸다. 한솔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신우야…!”
[…….]
“신우야… 어디야? 응…?”
[…….]
“…혹시, 많이… 바빠…?”
그래서… 먼저 간 거야?
잘 참고 있던 한솔이 끝에 가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타인에게는, 특히 자신보다 어린아이들에겐 의젓한 형, 오빠의 모습을 보이는 한솔이었지만 여전히 신우에게는 마냥 어리광 부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조금 더 예쁨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한솔은 점차 초조해졌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한솔이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만졌다. 결심한 듯, 긴 시간 머뭇거리던 손끝이 한 앱을 꾸욱 누른다. 그간 여러 사건이 있었던 후로 한솔의 핸드폰엔 새로운 앱이 추가됐다. 바로, 등록된 상대방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앱이었다. 한솔은 물론이고 신우의 위치까지도 나오기 때문에 한솔은 가끔 앱을 들여다보며 신우가 무얼 하나 상상해 보는 것이 새로 생긴 하루 일과였다.
「Link On - 유신우님
현재 위치 : 문화의 전당 B홀 Zc1-49」
한솔의 동공이 옅게 흔들렸다.
“아직… 공연장이네….”
설마- 했던 일이다. 혹여나 이런 일이 있을까 봐 한솔은 끝까지 신우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으려 했다. 만약에 신우가 어떠한 이유로 한솔을 보지 않으려 했던 거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무슨 핑계라도 좋으니까 멀리 떨어져 있었음 했다.
그런데 기어코 열어 버린 판도라의 상자에 한솔은 허망해졌다. 허무하고, 허탈하고, 슬펐다. 누군가 가슴을 꽉 틀어막은 것처럼 답답했다. 일렁이는 시야에 천장을 올려다보며 울음을 삭히던 한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있어… 내가 갈게-.”
[…….]
“꼭 거기 있어야 해.”
그러자 처음으로 신우가 답했다.
[…그래.]
통화를 끊고 빨개진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던 한솔은 코를 훌쩍이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실내라지만 12월의 끝자락이었다. 그것도 눈이 펑펑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몸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얇은 무대 의상만 입고 다니기엔 무척이나 추운 날씨였지만 한솔은 그런 것 따윈 느끼지 못한다는 듯 겉옷 한 장도 걸치지 않은 채로 대기실을 뛰쳐나왔다.
모든 공연이 마무리된 문화의 전당은 고요했다. 긴 복도는 깨끗하리만치 아무도 없었고 한솔은 딱딱한 토슈즈를 신고 얇은 잠자리 날개처럼 겹겹이 쌓인 연분홍색 튜튜를 하늘거리며 복도를 뛰었다. 한솔의 그림자가 불투명한 대리석 바닥 위로 검게 일렁였다.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곳은 A홀이다. 그리고 소극장이 있는 B홀은 A홀과 달리 전면 유리로 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선 물레방아가 있는 다리를 지나야 했다.
쏴-아-아.
작은 연못과 돌담으로 꾸며진 곳. 머리 위에선 하얀 눈이 펑펑 내렸고 투명한 유리 벽이 새하얗게 변한 세상을 비췄다. 고요한 정적 속에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저기- 언뜻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이는 듯했다. 바깥 구경을 하라고 돌출된 형태로 만들어진 부근에선 높다란 꽃나무가 눈이 쌓인 채로 무거워진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곳에 신우가 있었다.
“하아, 하아….”
의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꽃다발. 유리 벽 앞에 서서 일찍이 핀 꽃봉오리를 구경하고 있던 신우가 느리게 뒤를 돌았다. 구김 없는 정장 차림이 미치도록 잘 어울리는 남자. 두 손으로 무릎을 잡고 잠시 숨을 고르던 한솔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몸을 바로 했다.
“…….”
“…….”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잠깐의 고요함. 그리고 그 정적을 깨고 한솔이 신우에게 달려들었다. 탁-. 넓은 무대를 장악하던 발레리노의 점프는 굉장했지만 오래 단련한 몸을 가진 남자는 단지 한 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한솔을 가볍게 받아 냈다. 신우는 한 손으로 한솔의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한 손은 살포시 맨살이 드러난 마른 날개뼈 위에 올려놓은 채로 한솔을 올려다봤다. 드물게도 신우를 내려다보게 된 한솔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말했다.
“왜, 왜 안 왔어….”
“…….”
“내가 그렇게 못, 했어…?”
축하하러 와 주지도 못할 만큼…?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신우가 가만히 긴 속눈썹을 내리떴다. 그 잠깐의 시간마저 미치도록 애달파서 먹물에 담갔다 뺀 것 같은 짙은 눈썹 한 올 한 올을 전부 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솔이 신우의 어깨를 꾹 움켜쥐었다. 그러자 한 박자 늦게 입을 연 신우가 말했다.
“아니.”
“…그럼, 왜-.”
“내가 한심해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한솔이 흠칫 놀랐다. 신우가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런 그를 올려다본다.
“환한 조명 아래에 있는 너를 보는데.”
“…….”
“기분이 이상했어.”
가장 빛나는 찬사 속에 있는 너.
내 품을 떠나 자유롭게 비상하는 너에게 마땅히 축하를 해 줬어야 옳음에도-.
“문득, 보여 주기 싫다는 생각을 했어.”
“…….”
“…평소엔 널 존중한다고 그렇게 말해 놓고 다닌 주제에.”
“…….”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나만 볼 수 있는 작은 보석함에, 너를 소중히 넣어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우가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두 눈을 커다랗게 뜬 한솔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 한줄기가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그런 병신 같은 생각을, 잠깐.”
그러고 나니, 한솔을 볼 자신이 없어졌다. 이렇게 어두운 마음으로 보았다간 찬란하게 빛나는 그 아이까지도 물들어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앎에도 그대로 도망을 쳐 버린 이유가.
한솔이 눈을 깜빡깜빡 감았다 떴다. 그럴 때마다 속눈썹에 묻어나던 작은 반짝이 가루가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에 섞여 들었다. 색색-. 가쁜 숨을 몰아쉬던 한솔이 어느 순간 입술을 앙, 다물더니 주먹 쥔 손으로 신우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나빠.”
“응, 미안해.”
“나쁘다고!”
“미안.”
그리고 한참을 씩씩대던 한솔이 신우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도 좋아해.”
“…….”
“내가 많이 좋아해, 신우야.”
그렇게 문득, 그는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천상의 소리 같았던 첼레스타의 황홀한 음색 보다도 훨씬 더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마치 그제야 첫 숨을 허락받은 것처럼 그가 느린 날숨을 내뱉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어깨도 느른하게 풀린다. 신우가 한솔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대답했다.
“나도.”
“…….”
“…좋아해, 솔아.”
달큼한 살냄새가 났다. 떨어지기 싫을 만큼, 침샘을 돋우는 냄새였다.
한솔의 떨리는 어깨를 붙잡고 신우는 그의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안았다. 그는 욕심껏 한솔의 향기를 탐했다. 잔향만 남은 살냄새에서 흐드러지게 핀 꽃향기를 찾으려 드는 것처럼-. 그리고 한솔도 그런 신우의 머리를 힘주어 껴안았다.
“나는, 사실… 신우가 왜 그런 고민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
“신우가 그러고 싶으면 그러면 되는 거 아냐…? 아빠가 신경 쓰이면… 응, 먼저 식 올릴까? 나는 다 좋은데.”
언젠가 오랜 친구도 그런 말을 했었다.
-뭘 그렇게 애지중지하냐?
-신경이 쓰이면 집 안에 가둬 두든지.
알파가 오메가를 소유하는 세상. 신우도 자신이 조금은 별나다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솔아, 나는-.”
“…응.”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털터리라 겨우 절박하게 선택한 것이 나인 것 보단, 네가 풍족하게 모든 걸 누리고서도 날 선택해 줬으면 좋겠어.”
“…….”
“선택지가 하나 있을 때 선택받는 것보단, 여럿 있을 때 유일한 선택이 되는 게 훨씬 기쁘잖아.”
“…….”
“이래도 내가 다른 알파 놈들이랑 다르게 보여?”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 흑요석같이 요요히 빛나는 눈동자로 한솔을 올려다봤다.
“내가 보기엔 나는 훨씬 더 못된 놈인 것 같은데.”
한솔은 문득 할 말을 잃었다. 그 눈이 너무 예뻐서, 신우의 말이 굉장히 기뻐서-. 아주 복합적인 감정이 한솔의 내면에서 거칠게 휘몰아쳤다. 심장이 쿵쿵쿵, 가쁘게 뛰었다. 신우는 손을 들어 한솔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을 닦아 줬다. 그의 손끝에 작은 반짝임이 묻어났다.
“많은 걸 누리도록 해, 솔아.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보고 싶은 거 전부 망설이지 마.”
신우가 웃었다. 그가 문득,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연영과 갈 거야?”
한솔은 움찔 몸을 떨었다. 언젠간 들키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응… 어떻게 알았어?”
“네 학원, 처음에는 무용과 입시 때문에 배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기부 동아리에 무용 대신 연극 동아리가 있길래.”
“아.”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후련해 보였어.”
“…내가?”
“응. 오늘. 할 만큼 다했다는 느낌이었달까.”
신우가 한솔의 몸을 바닥에 천천히 내려 주었다. 허공에 붕 떠 있던 몸을 중력이 무겁게 잡아당기는 느낌에 한솔이 슈즈 신은 발을 바닥에 툭툭 털었다. 내가 그랬던가…. 오늘 유독 컨디션도 좋고 몸도 가볍다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어쩌면 그게 홀가분함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놓겠다는 건 아니고….”
한솔이 머뭇거리며 운을 떼자 신우가 듣고 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내가 여기서 해 보고 싶었던 건 전부 해 봤다는 생각이 들어서-.”
“응.”
“그래서 다른 걸 해 보고 싶었어.”
그러자 신우가 한솔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음, 내가 또 나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응…? 뭔데?”
신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긴장이 풀리는 것처럼 몸이 나른해졌다. 신우의 ‘나쁜 생각.’ 그러니까 한층 업그레이드된 신우의 집착이 그저 기쁘기만 한 한솔은 굉장히 궁금해하는 얼굴로 신우를 올려다봤다.
“네가 최은혜랑 또 하루 종일 몸 붙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
“…….”
한솔은 입술을 작게 벌렸다.
“무, 무슨 소리야… 은혜랑 나는 그냥 친구…!”
“그래, 친구지. 그것도 임자도 있는.”
“그러니까 그건 그냥 연습일 뿐인데….”
“알아.”
그리고 신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질투를 상대 봐 가면서 하는 건 아니잖아.”
덤덤하게 질투했노라고 인정하는 신우의 모습에 한솔의 얼굴이 귀 끝부터 붉게 물들었다. 신우가 질투를… 했다고? 심지어 내가 은혜랑 붙어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자 공연이 끝나고 신우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받지 못해 조금 꽁하게 남아 있던 감정도 사르르 풀렸다. 한솔은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럼… 나 연습하러 갈 때마다 질투했어?”
“어.”
“…어떻게?”
신우가 한솔을 지긋이 바라봤다.
“최은혜 대신 내가 그 자리에 있고 싶다-.”
“…아….”
굉장히 간단하고 명료한 소원에 한솔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소극장의 일정이 전부 끝난 탓인지 B홀은 굉장히 한산했다. 신우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부터 다른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다시 한번 주변을 휘휘 둘러본 한솔은 헛기침을 하고선 신우에게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신우가 못마땅한 눈빛을 해 보이는데 그게 굉장히 설레는 기분이었다.
한솔은 환하게 웃으며 신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사님, 한 곡 추시겠어요?”
눈을 크게 뜬 신우가 낮게 웃었다. 그가 한솔의 손 위에 가볍게 자신의 손을 얹었다.
“기꺼이.”
그는 발레는 하지 못해도 왈츠는 출 수 있었다. 그건 교양이었으니까. 홀에서 잔잔히 울리는 클래식 음악을 배경 삼아 두 사람은 춤을 췄다. 가끔 흘러들어 오는 물레방아 소리가 미소를 더 한다. 한솔은 이따금 변형된 박자에 맞춰 발레 동작을 끼워 넣기도 했는데 장난스럽게 더해진 밸런스 덕에 왈츠는 더 느리고 끈적해졌다. 한솔은 아예 신우의 구두 위에 살포시 선 상태로 춤을 추었다. 어느 순간 전적으로 신우의 팔 힘에 의존하고 있었던 탓에 갑작스럽게 뒤로 훅 넘어가는 몸을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앗…!”
유연한 허리는 그대로 부드럽게 휘었다. 신우가 다른 팔로 한솔의 허리를 다급하게 받치자 겨우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휜 한솔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맞부딪혔다. 날숨을 조금만 크게 내뱉어도 곧바로 상대의 입술에 닿을 거리-. 유리 벽 바깥의 세상은 온통 새하얬고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신우가 한솔의 허리를 받친 팔에 조금 더 힘을 준다. 한솔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쵹-.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섣달이 되지 않았는데도 봉오리를 피운 홍매화가 두 사람의 뒤에서 살랑살랑 눈을 맞았다. 입술이 가볍게 맞부딪혔다.
첫 키스였다.

কটন কেণ্ডি ৰোমাঞ্চ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