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한 남자가 걸어간다. 정장 차림에 걸맞은 반듯한 걸음걸이. 남자는 무채색의 빌딩 숲 사이를 걷고, 때로는 그 건물 중 하나에 들어가 일을 했다. 정신없이 전화를 받고 자판을 두들기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건물을 나와 지하철로 향했다. 자차가 없었기 때문에 남자는 항상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 죽은 듯이 잠을 청하는 것이 하루의 끝이었다. 세간이 몇 없는 것을 보아 배우자나 동거인은 없는 듯했다. 남자는 가족을 만나지도 친구와 약속을 잡지도 않았다. 집, 지하철, 그리고 회사. 쳇바퀴처럼 단조로운 일상이 지겨울 만도 한데 남자는 꿋꿋이 그런 일상을 고집했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도,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을 때가 있다.
그 길은 간판도 없이 존재하는 지하의 비밀스러운 회원제 바이거나 아니면 매번 이름이 바뀌는 남자의 ‘파트너’를 만나는 장소일 때도 있었다.
남자는 그런 ‘비일상’의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단조로운 가면을 벗어던졌다.
파트너의 앞에 무릎을 꿇고 발등에 입을 맞춘다. 남자는 눈앞의 다른 사내에게 ‘매를 졸랐다.’ 자신을 가장 비참한 곳으로 떨어트리고 매도해 주기를 바랐다. 남자의 단조로운 가면 뒤에는 그렇게나 다채로운 색이 존재했다.
한솔이 처음으로 비일상의 밤을 엿본 날, 그의 서랍에 있던 플라스틱 자 한 자루가 부러졌다. 가정 교사는 잠깐 의문을 표하긴 했지만, 곧 다른 자를 꺼내 썼다. 부러진 자는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의 일이다.
“이한솔.”
“네.”
첫 등교, 첫 교복. 열일곱, 불안정하고 싱그러운 나이.
담임이 한솔의 이름을 부르자 반 아이들이 아닌 척 힐긋힐긋 그를 돌아봤다. 대놓고 등을 돌려 그를 구경하는 아이도 있었다. 한솔은 다소곳이 대답하고는 조용히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그의 목을 죄고 있는 고급스러운 가죽 초커의 감촉이 턱밑을 아슬아슬하게 간지럽혔다. 그는 조임이 주는 약간의 불편함과 흥미가 서린 다수의 시선 아래 놓였다. ‘진짜 오메가래?’, ‘봐, 초커 차고 있잖아.’ 소곤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한솔은 티가 나지 않게 볼 안쪽을 씹었다. 그가 남몰래 흥분을 가라앉힐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유신우.”
“…….”
“유신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한솔은 당황한 눈으로 옆자리의, 그의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돌아봤다. 열일곱이라는 불안정한 나이와 달리 그의 소꿉친구는 그저 완전무결해 보였다. 곱슬기가 있는 한솔의 연갈색 머리카락과 달리 신우의 머리카락은 물에 담그면 먹물이 배어날 것같이 검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과 똑 닮은 색의 두 눈이 한솔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신우야?’
한솔이 입술을 뻐금거리며 신우를 부르자 유신우는 서늘한 인상을 누그러뜨리며 옅게 웃었다. 표정을 굳히면 알파 특유의 위압감 탓인지 다가가기 쉽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지만 한솔에겐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다. 다 자란 것처럼 보여도 흰 뺨에 나 있는 솜털을 보면 영락없는 그 나이 때의 소년이었다. 그리고 한솔은 그가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부터 함께 옆에서 굴러다닌 전적이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네-.”
유신우가 대답했다. 툭, 한솔의 어깨에 자신이 입고 있던 카디건을 걸쳐 주면서.
그와 잘 어울리는 남색 카디건이 교복 차림과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초커를 가린다. 한솔은 카디건을 여미며 고맙다고 말했다. 신우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한솔은 방긋방긋 웃고 있는 낯빛과 달리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큰일 났다.’
매도당하고 싶은 미래의 약혼자의 속도 모르고 그의 소꿉친구가 너무 신사적이다. 물론, 아닌 척 둘을 구경하고 있는 아이들을 의식해 얼굴만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