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유실의 이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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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르릉-.
반짝- 눈을 뜬 한솔이 잠기운이 남은 얼굴로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너무 일어나기 싫었다. 침대가 최고야…. 이불 밖은 위험하다며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 다시 눈을 감으려던 한솔은-.
1초.
2초.
3초 뒤-.
“아.”
이불을 홱 걷고선 눈을 떴다. 으으… 졸려… 졸음이 대롱대롱 매달린 눈꺼풀을 비비며 한솔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전형적인 잠꾸러기 스타일인 그는 본래부터 아침잠이 많았다. 본가에 살 때는 알림을 네다섯 개씩 맞춰 놔도 일어나질 못해서 매번 유모가 깨워 줘야 했을 정도니까. 동거를 시작한 뒤부턴 아침 수영을 마치고 온 신우가 한솔을 깨워 주곤 했는데 그런 한솔이 아침 6시부터 몸을 일으킨 이유가 있었다.
“신우야아….”
“잘 잤어?”
“나 졸려…….”
달칵, 신우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 한솔은 자신에겐 꼭두새벽인 이때, 이미 간단한 샤워까지 마치고 오늘 일정을 확인 중인 신우에게 비척비척 다가가 폭 안겼다.
그러면 신우가 밤사이에 까치집을 지은 한솔의 뒷머리를 쓱쓱 매만져 준다. 그리고 이미 반쯤 졸고 있는 것 같은 한솔을 쑥 들어 올려 자신의 침대로 데려갔다. 허벅지에 엎드리게 만든 다음 잠옷과 속옷을 한꺼번에 내리고 하얀 알 궁둥이를 까게 만드는 흐름이 무척 자연스럽다.
“아!”
찰싹! 하고 비교적 가벼운 첫 매가 떨어졌다. 그날 뒤로 두 사람의 일과에 추가된 메인터넌스 스팽킹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3대, 밤에 자기 전에 3대로, 무려 20년간 고쳐지지 않았던 한솔의 아침잠을 스스로 고치게 만든 순기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신우가 일상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강도를 조절해 준다지만 3대를 다 맞고 나면 자연스럽게 정신이 말똥해지기 때문에 잠을 깨우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던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깔끔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아침부터 이렇게 편하게 어리광도 부릴 수 있고-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랄까. 자기 전에는 신우가 자연스럽게 잠자리를 봐 주는 패턴까지 추가되었기 때문에 한솔로서는 거부할 게 없는 일이었다.
‘단점은 하루 종일 이 생각만 난다는 건데….’
핸드 스팽에 강도 조절까지 해 준 덕인지 맞을 때도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는 게 아니라 ‘흐으응….’ 하고 기분 좋은 콧소리만 나왔다. 3대를 다 맞고 나서도 약간 따끈한 정도였기 때문에 그때마다 신우가 차가운 손바닥으로 만져 주면 좋아서 골골거릴 정도였다. 언젠가 한 번은 신우가 ‘강아지인 줄 알았는데 고양이였네.’ 하면서 웃기도 했다. 그렇게 일찍 일어난 김에 신우를 따라가 수영장 산책도 하고, 같이 돌아와서 다시 씻고, 밥을 먹고, 학교에 간다. 그때쯤이면 이미 엉덩이의 붓기는 다 가라앉은 뒤였기 때문에 한솔은 또 밤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좋아….’
분명 커플치고도 오래 붙어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이하는 일이 단지 하나가 늘었을 뿐인데도 하루가 훨씬 풍성해졌다. 서로의 영역 안으로 한 발 더 들어간 느낌이랄까. 그게 좋았다. 타인은 침범할 수 없는 시간의 그물로 서로만의 견고한 성벽을 쌓는 기분이었다. 이 안은 필히 두 사람만의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와아, 날씨 좋다!”
그래서인지 요즘 한솔의 기분은 무척 좋았다. 얼마 전에 나온 중간고사 성적이 매우 만족스러운 것도 한몫했다. 여름이 성큼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주변인들의 입에서 ‘여름 방학’과 ‘여름휴가’가 나올 때면 조금 어두워지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일상을 이어 간다. 명문대답게 강의의 질은 매우 높았고 배울 것과 즐길 것은 넘쳐났다. 한솔은 강의동에서 나오며 기지개를 쭉 켰다.
“한솔아! 같이 가!”
“자리 맡아 놓을게- 천천히 와!”
윤건이 숨을 헐떡이며 뒤에서 애처롭게 한솔을 불렀다. 수연은 헤드폰을 목에 건 채 긴 다리로 휘적휘적 두 사람을 따라온다. 경영대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신우와는 어쩔 수 없이 점심을 먹거나 같은 교양 수업을 들을 때만 만날 수 있었다. 물론, 틈틈이 서로의 구역으로 찾아가 비밀 연애를 하는 맛이 있긴 했지만. 덕분인지 경영대와 예대에선 두 유명인의 애인에 대해서 무수한 카더라가 생성되고 있었다. 한솔을 가장 어이없게 만들었던 소문은 수연과 자신이 사귄다는 소문이었는데 이걸 수연에게 말했더니 ‘인간들 정말 할 짓 없네.’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한솔도 동감하는 바이다. 오직, MT 때 신우를 봤던 극소수의 술고래 선배들만이 ‘연애 사업은 잘되고 있냐.’, ‘그 잘생긴 친구 과방에 한 번 데려와라.’라면서 한솔을 음흉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수연은 알파고 윤건은 베타다. 어쩌다가 알파, 베타, 오메가가 전부 있는 기묘한 무리가 형성된 것인진 모르겠지만 본래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신우에게 요즘 같이 다니는 무리 중에 알파가 있다고 이실직고했다가 페로몬 샤워를 당해서 다음날 수연이 질색을 하며 한솔과 2m 거리 두기를 실천하기도 했다. 정작 한솔은 알파의 이런 집착이 뭘 뜻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익숙한 냄새에 좋아했던 터라 어리둥절했지만. 수연이 느끼기엔 한솔이 알파로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신우가 드문 경우일 뿐이지 서로 간의 미묘한 기 싸움 탓에 페로몬을 과시용으로 사용하는 캠퍼스의 알파들은 그날 하루 한솔을 슬슬 피해 빙 둘러 다녔다.
그리고 그날부터 캠퍼스엔 한솔이 두 알파를 두고 저울질 중이라는 소문이 은밀하게 돌아다녔다.
“너희 조별 과제 팀 발표 났냐.”
“아니….”
“나도 아직.”
세 사람 중에 가장 늦게 도착한 윤건이 헉헉거리며 자리에 앉더니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솔도 부정을 표하며 빨대로 유자에이드를 쬽- 빨았다. 체력이 그게 뭐냐며 혀를 찬 수연이 윤건 쪽으로 음료를 밀어 준다. 각각 유도와 발레 10년 이상의 경력자들 사이에 낀 평범한 베타 인간 박윤건은 조금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소심한 성격답게 금세 수긍했다. 내 체력은 쓰레기야… 하는 표정으로 시원찮게 음료를 마시는 윤건과 그런 윤건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는 수연. 흐응… 한솔은 여전히 빨대를 입에 문 채 에이드를 마시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내 수긍한 표정을 짓는다. 왜 이런 무리가 형성됐는지 오늘에서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어… 발표 문자 왔다.”
윤건의 말에 한솔과 수연도 각자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송혜주 교수님 <연극과 희곡> 6조 조원
-강세현
-김재원
-박윤건
-이한솔
-정하윤」
한솔의 눈썹이 쓱 대각선을 그렸다.
“오! 한솔이랑 같은 조다!”
“봐 봐.”
윤건이 눈치 없이 좋아라 하는 사이 그의 핸드폰을 뺏어 확인한 수연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이 사람, 그 사람이네.”
“응. 맞아.”
“어? 누구? 누구 말하는 거야?”
“화석. 이한솔 성추행했던 놈.”
“헉…! 그, 내가 꼰질러 버린 사람?”
윤건이 불안해하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김재원. 복학과 휴학을 밥 먹듯이 하다가 4학년…을 넘어 졸업 조건이 안 돼서 몇 학기를 더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살아 있는 화석이자 후배들의 기피 대상 1호.
이런 인간이 어떻게 지옥의 입시를 뚫고 이곳에 합격했는지 아이러니다 싶은 노래방 성추행범이 바로 그였다.
대체 1학년 강의에 4학년이 왜 있나 싶지만… 뻔하지, 뭐. 재수강이거나 강제 입력이거나. 그 인간이 학점을 신경 쓸 것 같진 않기 때문에 강제 입력 쪽으로 심증이 기울었다. 졸업 필수 과목인 터라 D라도 받으러 설렁설렁 들어온 듯싶었다. 팀플 조원으로선 최악이란 뜻이고.
하지만 무엇보다-.
“정하윤….”
“어? 뭐라고?”
“아- 아냐. 그냥 혼잣말이었어.”
MT에서의 미묘했던 신경전 이후로 부딪힌 일이 없었던 미소년을 떠올린다. 소수 인원 과임에도 불구하고 한솔이 그간 정하윤을 본 곳은 ‘기초 발레’ 과목 단 한 곳뿐이었다. 기초 발레가 아니었다면 자퇴라도 한 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있었다면 그냥 엎어 치기 해 버렸을 텐데.”
“…그건 범죄야 수연아.”
“어… 어쩌지… 나 때문에 한솔이한테 불이익 가는 거 아냐…?”
“또 쓸데없는 생각한다.”
수연이 윤건을 쥐어박는 동안 한솔은 쬬롭, 하고 음료를 빨아 마시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조별 과제를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본인들 학점을 위해서라도 참여를 하는 유형이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넘겨 왔었다. 그래서 조별 과제의 악명을 실감할 기회가 없었는데….
‘뭐… 제대로 참여 안 하면 이름 빼 버리면 되겠지.’
한솔은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불과 며칠 후에 일어날 난장판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송혜주 교수님 <연극과 희곡> 6조 톡방**
조원님들 내일 학관 3층 연습실 빌려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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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어도 내일까진 저희 주제 정해야 하니까 잊지 마세요
연영과 박윤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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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3
안 오시나요?
3
세분이나 안 오셔서 주제 제출이 오늘까지라 임의로 정했습니다
3
교수님께서 제시해주신 것 중 <자각>으로 골랐으니까 각자 예시 폼에 맞게 대사 작성해서 보내주세요
**공지가 등록되었습니다.**
연영과 박윤건
3
넵! 알겠습니다!
김재원
3
아니후배님이건아니지
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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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견도안듣고멋대로 정하면어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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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분명 직접 만나서 결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건 선배님 아니셨나요?
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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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거야
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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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면이런저런사정이 생길수도있는거지
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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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선배한테훈수두는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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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아니고요. 이미 제출 끝나서 못 바꾸는 거 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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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찍 정해야 한다고 한 건대 꼭 직접 만나 서해야 된다고 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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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제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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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제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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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제출해주세요 오늘까지만 받겠습니다
강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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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아 왜 내 분량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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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현씨 제출 기한까지 대사 제출 안 하셔서 뺐습니다
강세현
1
그딴게 어딧음?
김재원
1
후배님그러면안되지다같이 하는건데공평하게해야할거아냐
김재원
1
그리고나막학기인거알지? 선배가취직준비로바쁘면
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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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케어해줘야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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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공지하신 건데요?
김재원
2
신입생이왜이렇게빡빡하냐
김재원
2
좀느긋하게살아야선배들한테 예쁨받고그러는거야
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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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때는…….
**정하윤님이 나갔습니다.**
**이한솔님이 정하윤님을 초대했습니다.**
**정하윤님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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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현씨 분량 가져가는 대신 음악 편집해 오시겠다고 하셨잖아요
강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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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ㅈㅅ 레이드 잇어서 바빳음
강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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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해드림
연영과 박윤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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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제출 어제까진데…
총체적 난국이란 게 이런 걸까-.
뭐든지 대충대충 하자는 주의의 열의 없는 타과생과 하는 거 없이 결과만 가져가고 싶어 하는 화석. 팀플엔 참여하지 않고 개인 성과만 중요시하는 껄끄러운 동기, 능력 있고 시키는 건 열심히 하지만 멘탈이 개복치라 문제인 친구-.
“하아….”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대본 자체는 괜찮구나.
-그런데….
-나는 분명 조별 과제를 해 오라 했던 것 같은데 이건 개인이 도맡아서 한 것 같네.
한솔은 푹신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비수처럼 꽂히던 송혜주 교수의 비평을 떠올렸다.
-너희는 연극을 혼자 할 거니?
느긋하면서도 매서운 목소리에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한껏 힘을 준 손아귀 안에서 부드러운 이불자락이 구깃구깃 뭉개졌다.
-너희 개인 한 명이 잘한다 해서….
-극은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길 바라마.
그렇게 한솔의 손안에 들어오게 된 건 ‘50점’이라는 점수였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점수. 고등학생 때 가장 애를 먹었던 수학도 이런 점수를 받아 보진 못했다. 한솔은 깊게 호흡하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푸릇한 잔향이 복잡한 머릿속을 맑게 만들었다.
달칵-.
등 뒤에서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벅저벅-. 방의 주인이 점차 다가오는 소리에 침입자는 몸을 움찔 떨며 어깨를 옹송그렸다. 자신의 베개도 아니고 신우의 베개를 생명줄처럼 꼭 끌어안고 있던 한솔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짚어 오는 손길에 ‘힉…’ 하고 새된 소리를 냈다.
“왜 여기 있어.”
침대 시트가 약간 기우는 느낌이 났다. 한솔의 곁에 앉은 신우가 부스스한 연갈색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헝클어트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솔은 기분이 썩 괜찮았다. 연영과 강의는 토론과 크리틱이 넘쳐 나는 수업들이 많았고 선배들로부터 송 교수가 ‘멘탈 탈곡기’라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가진 이라는 걸 진작부터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뭐, 못했으면 비평을 받아야지 매번 칭찬만 받을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한솔은 괜찮았다. 분명 괜찮았던 것 같다.
“…….”
“솔아?”
하지만, 기분이란 게 아무리 나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해도 주변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 괜스레 이상해지는 법이다.
평소에는 다 큰 어른인 척해도 한솔은 이제 겨우 스무 살. 누구 한 사람만 보면 자꾸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그런 나이였다.
‘꼭… 나이 때문은 아닌 것 같지만.’
아마 10년 뒤에도 이러고 있지 않을까. 속상한 일만 생기면 쪼르르 신우에게 달려가던 꼬꼬마 이한솔의 버릇은 아무래도 쉬이 고쳐지지 않을 모양이다. 신우가 징그럽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따위의 전혀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던 한솔은 자신의 이마를 시원한 손바닥이 가만히 짚어 오는 느낌에 흠칫 놀랐다.
“요즘 안색이 안 좋더니.”
“…….”
“무슨 일 있어?”
신우가 팔을 뻗어 한솔의 몸을 안아 올리자 한솔은 자연스럽게 신우의 몸에 코알라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목 언저리에 얼굴을 비비자 셔츠 깃에서 은은하게 남아 있는 페로몬이 맡아진다. 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그 존재에 복잡하게 뒤엉켜 있던 감정의 실타래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한솔은 자신도 모르게 첫 운을 떼고 말았다.
“그게….”
토닥, 토닥-. 느리게 등을 두들겨 오는 손길. 한솔은 이 순간 엉뚱하게도 신우는 아기도 잘 돌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조별 과제를 하는데….”
“응.”
“……막 그러면서 왜 자기 분량은 안 주냐고 하는 거야. 애초에 내가 자기 가족도 아니고. 대학까지 와서 다 떠먹여 줘야 되냐구.”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 하는데.”
“응! 그러니까! 그래도 조별 과제라서 일단 분량은 주는 대신 영상 편집이라도 하라고 맡겼거든? 근데 무슨 게임한다고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그래서 그것도 내가 다 했는데 어떤 선배 한 명은 거기다 대고 맨날 자기 취준하느라 바쁘다 뭐다…. 아니 내가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막학기인지 어떻게 알아?”
신우가 호응을 해 주니 자신도 모르게 숨 가쁘게 말을 내뱉던 한솔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신우한텐 좋은 얘기만 해 주고 싶었는데….’
어느새 투정만 잔뜩 부리고 말았다. 한솔이 조금 반성하는 마음에 우물쭈물하는데 연한 빛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익숙하게 만지작거리던 신우가 입술을 열었다.
“당장 대학이라는 작은 사회에서도 제 몫을 못 하는데 사회에 나가서 그 성질이 변할 수 있을까.”
“…….”
“글쎄, 내가 인사권자라면 그런 사람은-.”
대기업 오너가의 일원이 말했다.
“안 뽑을 것 같은데.”
충분히 실현 가능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저러니까 절대 빈말로 안 들렸다.
“어… 그으… 신우도 조별 과제 해 봤어?”
“해 봤지.”
“…어땠어?”
“음, 딱히 게으름 피운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당연히 그렇겠지…? 배경은 그렇다 치고 일단 저런 피지컬의 알파가 조장이라면-신우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매번 자신에게 조장 자리가 넘어온다고 의아해했다.- 누구라도 최선을 다해 과제에 임할 것이다.
“그럼, 신우가 만약 내 상황이었다면-.”
“…….”
“어떻게 했을 것 같아…?”
한솔이 묻자 신우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너처럼 너그럽지 못해서 아마 그렇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나도?”
“…….”
“…….”
“큭-.”
신우가 한솔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몸을 떨었다. 한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건…. 어버버거리며 당황해하던 한솔은 점차 목소리가 쥐꼬리만 하게 기어들어 갔다. 그가 속으로 몇 초 전의 자신을 구박하며 수치스러워하는데 신우가 한솔의 뺨을 살짝 아릿하도록 꼬집었다. 한솔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응. 안 돼.”
그게 맞는 대답이란 걸 알면서도 한솔은 연인의 관점에서 조금 삐뚤어지고 말았다. 치… 그냥 그렇다고 해 주면 안 되나-. 그렇게 투덜투덜하는데 신우가 한솔의 옆 머리카락을 살살 넘겨 주며 한솔을 불렀다.
솔아-.
“대신, 과제를 할 때 네 옆에 앉아 있어 줄 수는 있어. 도움은 안 되겠지만.”
한솔의 동공이 짧게 흔들렸다. 그래, 너는 이런 사람이었지. 눈을 깜박이던 한솔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며 ‘옆에 말고 앞에 앉아 줘.’ 했다. 신우가 왜냐고 물으니 당당하게 얼굴을 감상해야 힘이 난다고 말한다. 암, 기왕이면 얼굴 버프를 받아야지. 드물게도 신우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한솔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고작 대화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우중충했던 마음이 맑게 개는 기분이다.
“그런데, 솔아.”
“응?”
“문득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한솔이 눈을 끔벅끔벅 뜨며 신우를 올려다보자 알파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대기업 후계자랑 전 국가 대표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소문.”
응…?
“대중은 입이 참 가벼워. 그렇지?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데 말이야.”
“그…, 신우야 그건….”
“아쉽게도 너무 불특정 다수라 고소는 안 된다고 하네.”
알파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같이 다니는 친구 중에 알파가 있다 했었나?”
“진짜! 진짜 친구야! 응? 맹세…!”
“알아.”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신우가 한숨처럼 말했다. 그가 한솔의 몸을 꽉 껴안았다.
“네가 잘 적응하고 다니면 기뻐해야 하는데-.”
“…!”
“불안해… 이기적인 거 아는데, 네가 나하고만 있으면 좋겠어.”
신우의 품에 안겨 있던 한솔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입 안이 달았다. 귓가에 꿀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신우의 목소리가 달게 느껴졌다.
‘어떡해…! 너무 좋아….’
한솔이 마음속으로 깃털 베개를 퍽퍽 치며 좋아라 하는 사이 오메가를 품에 안고 있던 알파의 눈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정말… 차라리 학생일 때가….”
하루의 대부분을 같이 보낼 수 있었던 학생일 때가 더 좋았다는 진심은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한 사람은 심란해하고 한 사람은 좋아하던 순간, 알파의 진심을 엿본 오메가가 결연하게 눈을 반짝이며 신우의 어깨를 휙 밀쳤다.
“나 잠깐만!”
난데없이 오메가에게 밀침을 당한 알파가 허전해진 품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가 방 밖으로 사라진 한솔을 찾으러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을 때,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 솔아…?”
신우가 달라진 한솔의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너… 교복은 어디서 났어.”
“오늘 성년의 날이잖아- 그래서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
그래서 특별히 준비했노라고 한솔이 수줍게 말했다.
“원래는 밤에 서프라이즈하려 했는데… 헤헤.”
“…….”
“그런데 신우도 향수가 좋아? 페로몬 때문에 잘 안 맡아질 것 같은데… 가서 하고 올까?”
한솔이 본가에서 가져온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채로 손목을 킁킁거렸다. 당연하게도 자신의 페로몬은 맡아지지 않았다. 한 손에는 큼지막한 리본이 달린 소담한 장미 꽃다발을 들고, 마치 미성숙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소년의 모습에 신우의 눈동자가 옅게 떨렸다.
“아니.”
그가 한 발, 한 발 한솔에게 다가갔다.
“나는 네 향기가 제일 좋아.”
한솔의 뺨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오메가의 앞에 멈춰선 알파의 고개가 단정히 기울어진다.
“으응-.”
입술이 겹쳤다. 방 안에 울창한 숲과 매화 군락이 만개했다. 툭-. 알파의 덩치에 밀려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던 오메가의 몸이 벽에 부딪혔다. 동시에, 한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한솔은 결국 신우의 목에 팔을 감은 채 열정적으로 키스에 응했다. 혀가 얽히고 젖은 입술이 비벼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벽과 자신의 품에 완전히 한솔을 가둔 채 키스를 퍼붓던 신우가 오메가의 몸을 들어 올렸다.
“이러니까 꼭….”
“…하으-.”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데.”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한솔은 목덜미를 타고 쭈뼛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부끄럽다는 듯이 답했다.
“해 주세요… 나쁜 짓-.”
그러자 한솔의 고막이 황홀할 정도로 신우가 짙게 웃었다.
“무슨 나쁜 짓을 해 줄까?”
“…….”
“…침대로 갈까?”
한솔의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차마 대답은 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마구 끄덕이자 신우가 붉은 단풍처럼 곱게 물이 든 한솔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신우랑 이런 대화를 하게 되다니 불과 몇 년 전을 생각하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솔은 설레발을 치려는 마음을 꾹 참았다. 아직은 애피타이저일 뿐이다. 메인 디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신우의 침대로 향했다. 본래라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할 곳이 주인 아닌 자가 마구 헝클어 놓은 탓에 엉망이었다. 알파는 이불을 치우고 그곳에 한솔을 눕혔다. 교복을 입은 소년이 말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정말 과거의 한솔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우는 목이 메는 기분에 셔츠의 윗 단추를 거칠게 풀고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런 알파를 올려다보던 한솔은 생각한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 숨을 고르는 것 같다고.
“…엎드리자.”
어른이 된 후 보는 ‘교복을 입은 한솔’의 효과는 심히 강력했다. 입술을 꾹 깨문 신우가 한솔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말했다. 그 효과를 확인한 한솔은 신우 몰래 만족스럽게 웃은 뒤 몸을 돌렸다. 아쉽다. 정상위도 좋은데-.
하지만 후배위도 좋으니까.
속으로 키득거린 한솔이 부러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몸을 돌리기만 하고 ‘한솔이는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눈으로 신우를 돌아보자 알파가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그리고 피식 웃는다. 오메가의 속을 간파한 탓이다.
“오늘만 자세 교정해 주는 거야. 앞으로 엎드리라 할 땐 이렇게 해.”
신우는 아까 한솔이 끌어안고 뒹굴거리던 푹신한 베개를 가져와 한솔의 배 아래에 밀어 넣었다. 자연스럽게 하체가 볼록 솟아오른다. 무릎을 세우게 하고 다리를 적당히 벌리도록 만들자 한솔은 어느새 엉덩이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들어 올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이거 너무….”
부끄러워요….
한솔이 부러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신우가 아기를 토닥거리듯이 한솔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긴다. 그 취급이 좋아서 한솔은 속으로 끙끙 앓았다. 스륵-. 자연스럽게 교복 바지가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다음은 당연히도 속옷이었다. 그는 시트를 꾹 움켜쥔 채 맨살에 닿는 신우의 손길을 즐겼다.
“잘 안 보이는데.”
당연하다 해야 할지. 페로몬에 흠뻑 취한 채 알파의 손길을 받으니 금방 뒤가 젖는 게 느껴졌다. 볼기 사이의 은밀한 구멍에서 새어 나온 물이 피부에 쩍쩍 달라붙는 소리가 들린다. 한솔은 옅은 수치심을 느꼈다. 시트에 얼굴을 비비며 그 감각을 즐기는데 신우가, 아니, 한솔의 하나뿐인 선생님이 말했다.
“한솔아, 선생님한테 잘 보이게 구멍을 벌려야지. 응?”
물기에 젖은 피부 위로 따뜻한 숨이 후- 하고 불어왔다. 힉…! 한솔이 짧게 비명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낫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오늘의 신우는 장난기 모드가 가동된 것 같다. 자꾸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하니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한솔이 머뭇거리는 척을 하자 흐음… 뒤에서 고민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네. 그럼 계속 그대로 있을까?”
“…! 아으, 안 돼… 하, 할게요…!”
깜짝 놀란 얼굴을 연기하며 한솔이 손을 뒤로 가져갔다. 손끝에 땀이 고여서 그런지 탄력 있는 피부가 손끝을 밀어내는 저항이 느껴졌다. 결국, 좀 더 힘을 주어 구멍을 벌리니 입구에 고여 있던 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흐으읏…’ 작게 몸서리를 친 한솔은 엉덩이를 양쪽으로 한껏 잡아 벌린다. 뽀득거리며 피부 위로 여덟 개의 손자국이 남고 차가운 공기가 다소곳이 입을 다문 곳을 스친다. 짧게 자른 손톱을 박아 넣은 피부 위엔 붉은 손톱자국이 생겼다. 바들바들- 한껏 힘을 준 손끝이 힘겹게 떨렸다.
“뭘 했길래-.”
“…흐익!”
“여기가 부었을까.”
적나라하게 자신의 구멍을 두고 품평하는 말에 한솔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한솔이 엉덩이를 슬슬 앞으로 빼는 척하자 신우가 볼기를 꽈악- 터뜨릴 것처럼 쥐어 온다. 한솔은 그 즉시 움직임을 멈추고 납작 엎드렸다. 한솔이 포식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피식자처럼 행동하고 나서야 신우는 손아귀의 힘을 풀어 주었다. 자극에 약한 피부는 분명히 벌건 손자국이 났을 것이다. 한솔은 자신의 둔부를 상상해 보며 시트에 얼굴을 비볐다. 몸이 너무 달아서 신우가 얼른 뭐라도 해 줬음 하는 바람이었다.
“가만히.”
그렇게 말한 신우는 한솔의 몸에서 손을 떼더니 침대맡의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힐긋힐긋 신우를 훔쳐보던 한솔은 라텍스 장갑과 검은색 상자를 발견하고선 눈을 끔벅끔벅 떴다. 신우가 뭘 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질 않은 탓이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신우가 수술 직전의 의사처럼 장갑을 착착 착용하는 모습을 한솔은 넋을 놓고 구경했다. 칙, 치익- 분말 스프레이 같은 것을 뿌리는 소리와 함께 알싸한 알코올 향이 맡아진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한솔은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평소보다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신우가 말했다.
“한솔아.”
“흣… 네에….”
알파가 다정하게 한솔을 불렀다. 둔부 사이를 움켜쥐고 있던 한솔의 바짝 긴장해 있는 몸에 소독을 마친 손이 다가왔다. 착-. 장갑을 낀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자 한솔은 차가움에 어깨를 움츠렸다. 맨손과 전혀 다른 느낌의 인공적이고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미끈하고 차가운… 인간의 손이라기보단 어떤 외계 생명체의 촉수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둔부만 주무르던 손이 골 사이를 부드럽게 가르고 들어오자 한솔은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신우의 손이란 걸 앎에도 익숙함보단 낯섦이 주는 생소함이 더 컸다. 생소하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고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곧 새로움을 의미한다. 한솔은 꼭 낯선 침입자에게 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배덕감과 수치스러움. 그리고 약간의 공포가 주는 두려움을 만끽하며 한솔은 숨을 헐떡였다. 신우는 한솔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엉덩이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말했다.
“장난감 가지고 노니까 좋았어?”
한솔의 숨이 덜컥 멈췄다.
“선생님 좆보다 장난감이 더 좋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아! 으응! 그게…! 힉…!”
신우는 한솔이 숨을 내쉴 때마다 빠끔빠끔 개폐를 반복하는 작은 구멍을 장갑 낀 손으로 괴롭히며 말했다. 발긋해져 도톰하게 부푼 구멍은 지상에선 맛볼 수 없는 어떤 천상의 진미처럼 보였다.
‘큰일 났다….’
그리고 한솔은 자신만의 비밀을 신우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조별 과제는 총체적 난국이지, 신우는 바빠서 매일 늦게 들어오지.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 자꾸만 야한 짓이 생각나서 저지른 일이었다. 그냥 호기심에 딱 한 번, 딱 한 번만 넣어 본 거뿐인데…! 맹세코 성인 용품이란 것도 처음 사 봤다. 한솔은 울상을 지었다.
“그래, 이건 한솔이 거니까 한솔이가 장남감을 가지고 놀 순 있지.”
“흣! 아응! 서, 선생님…!”
“하지만 선생님은 조금 속상해. 응?”
아무래도 진작 눈치채고 있었는데 말할 명분이 없다가 지금 플레이를 빌미로 괴롭히는 것 같았다.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한솔은 속으로 탄식했다.
신우는 끙끙 앓는 한솔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선 장갑을 낀 손으로 입구를 조금씩 잡아당겼다. 성인이 성인용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는 데 뭐라고 하겠는가. 그냥 조금, 아주 조금 심술이 났을 뿐이다. 잠시 고집스럽게 버티던 구멍이 순수하게 붉은 내벽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마른 입구와 달리 촉촉하게 젖은 내벽의 모습은 마치 과즙이 꽉 찬 과육을 연상케 했다. 혹은, 은밀하게 감춰진 꽃봉오리의 내밀한 속살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늘은 한솔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 볼까?”
흑, 아아…!
신우가 구멍을 만지는 것과 동시에 한솔의 회음부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자 한솔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구멍 입구를 꾹 눌렀다. 알파가 회음부를 쓰다듬기 훨씬 전부터 젖어 있던 입구에서 주륵- 반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온다. 이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던 한솔은 그것만으로도 앓는 소리를 내며 도리질을 쳤다. 결국, 오메가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흐으윽… 네, 선생니임….”
알파가 칭찬하는 것처럼 구멍에서 손을 빼고 한솔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자세 유지하고 기다려. 흐트러지면 혼날 거야.”
“흡… 네에….”
엄한 목소리에 바짝 긴장해서 대답했던 그는 신우의 손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자 흐물흐물해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장난감으로…?’
그리고 그런 한솔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려는 듯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신우가 자세를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우등생을 다정하게 칭찬해 주었다.
“흐읏?!”
바로 행동으로 말이다.
드물게 눈꼬리까지 휘며 웃은 신우가 검은 상자에서 꺼낸 젤을 손끝에 듬뿍 짜낸다. 그대로 구멍을 크게 벌려 검지를 푹! 하고 박아 넣자 한솔의 마른 몸이 파드득 떨렸다.
“뭘 샀나 했더니.”
끈적한 크림형 젤을 달아오른 내벽에 치덕치덕 바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한솔의 손가락으론 닿지 않던 길이까지 침범한 신우의 손가락이 오밀조밀한 주름을 살살 문지르며 한솔을 괴롭혔다. 쿨쩍, 쿨쩍-. 젤과 애액이 섞인 불투명한 액체가 라텍스 장갑과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한솔은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요란한 빛무리가 터져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작은 걸로-.”
“아! 흣! 으응…!”
“한솔이가 만족이 될까 모르겠네.”
알파는 타원형의 에그를 오메가의 작은 구멍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차갑고 단단한 무생물이 내벽을 밀어내며 들어오는 느낌에 한솔이 진저리를 쳤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세를 유지하라는 신우의 명령은 아직까지 반듯하게 한솔을 묶고 있었다. 결국, 에그가 전부 들어와 구멍 안에 자리 잡을 때까지 한솔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신음을 흘리는 일뿐이었다.
“…!”
그리고, 달칵-.
알파가 스위치를 누르는 것과 동시에
“흐이익! 응! 아,아앙!”
우우웅- 소리를 내며 내벽 안에서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작은 에그를 느끼며 한솔이 자지러졌다.
“선, 선생니임…! 흐앙! 잘, 못했… 아아앗!”
한솔이 시트에 얼굴을 마구 비비며 잘못을 빌었지만, 알파는 반듯하게 웃으며 한솔의 등허리를 쓸어내릴 뿐이었다. 오싹, 척추를 타고 소름이 흘렀다.
“한솔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이잖아?”
“안, 안 좋아, 흐잇…! 해요…!”
“이제 싫어? 흐음….”
고민하는 듯한 목소리에 한솔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정답이었는지 귓가에 신우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럼 이 장난감은 버려도 되겠다. 그치?”
“네에, 네…!!”
사냥감을 꾀듯 다정한 목소리에 정신없이 대답하던 한솔은 구멍 안에서 사정없이 진동하던 에그가 내벽을 거칠게 긁으며 빠져나가는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흐아앙…!”
그대로 화려한 절정에 닿았다. 투둑- 툭…. 뒤에서도 앞에서도 물이 흘렀다. 에그에 연결된 줄을 단번에 잡아당긴 알파는 거의 넋이 나간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오메가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성년의 날 축하해, 한솔아.”
한솔이 그 장난감을 압수당했다는 걸 눈치챈 것은 조금 후의 일이다.
***
**송혜주 교수님 <연극과 희곡> 6조 톡방**
김재원
1
내가충고하나하는데
김재원
1
선배들한테예쁨받아야되
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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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학점도따고취직도하는거야
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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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말대꾸하면누가예뻐해주겠어?
**김재원님이 나갔습니다.**
윤건은 탁자에 얼굴을 박은 채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한솔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한솔아 괜찮아…?”
한솔의 손끝이 꿈틀- 움직였다. 다행이다, 살아는 있구나- 하고 윤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한솔이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윤건은 곰 같은 덩치로 흠칫 놀랐다.
“윤건아.”
“어? 어어…?”
“조명 만질 수 있다 했지.”
그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한솔이 해사하게 웃었다. 원래부터 얼굴에 좀, 아니 많이 약한 윤건은 그대로 홀린 듯 연출 자리를 승낙하고 말았다. 과제 평가 때도 너무 떨어서 대사를 다 씹어 버린 탓에 ‘나는 쓰레기야…’라며 한동안 자책하던 그였다. 그는 오히려 한솔이 자신을 배려해 준다며 고마워했다.
“그 민폐 선배는 어차피 안 올 것 같으니까 제외… 이 사람은 왜 계속 안읽씹 상태야?”
스트레스의 주범인 연극과 희곡 톡방을 내려다보던 한솔이 한숨을 삼켰다. 민폐 선배는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게임 중독 타과생은 중간 과제 이후로 계속 안읽씹 상태고… 정하윤은 저번 과제부터 톡방을 나가 버렸으니까-.
진짜 난장판이네.
드디어 조별 과제의 무서움을 알게 된 새내기 이한솔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연락처를 꾹꾹 눌렀다. 상단에 하윤의 번호와 함께 메시지가 떴다.
정하윤
글쎄, 주인공이 아니면 굳이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게 한솔과 하윤의 마지막 톡이었다.
‘대체 얘는 왜 나를 싫어하는 거야?’
그건 누구나 나를 좋아해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상대가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는 뜻이다. 애초에 접점이란 게 있어야 악의도 생기지. 한솔은 바보가 아니다. 미묘하게 자신을 밀어 내는 그 벽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도 굳이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하필이면 중요한 과목의 같은 조가 되어 버린 게 문제였다. 심지어 두 명은 거의 탈주가 확실시되는 상황. 한솔은 입술을 꾹 깨물고서 핸드폰 자판을 쳤다.
주연 자리 줄게
그게 한솔의 선택이었다.
연극과 희곡 기말 평가
제목 <미지의 세계>
대본 : 이한솔
연출 : 강세현 / 박윤건
촬영 : 김재원
연기 : 정하윤
기말 평가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약 한 달. 한솔의 학점 사수를 위한 눈물 나는 노력기의 시작이었다.
***
“왜, 왜 안 오지? 차가 막히나…?”
윤건이 옆에서 손톱을 뜯으며 다리를 달달달 떨었다. 한솔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이미 조원의 절반이 불참인 상황에서 시작된 연습은 생각 외로 순조로웠다. 윤건은 원래부터 연출에 관심이 있는 편이었고 어거지로 적어 낸 두 이름의 빈틈을 훌륭히 채워 주었다. 걱정한 것은 하윤과의 불화였는데 하윤도 연습에서만큼은 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기를 꽤 했다. 아니, 잘했다. 한솔이 누군가를 평가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관객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자연스러운 편이었다. …대본 작가로선 해석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 기말 평가 당일인 오늘.
일찍부터 나와 한 번 더 연습을 하고 들어가자는 약속은 그들의 차례가 될 때까지도 유일한 배우가 도착하지 않는 탓에 무산이 되고 말았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하는 음성 안내가 귓가를 파고든다. 핸드폰을 든 손이 힘없이 추락했다. 아침에 청심환까지 먹었다는 윤건은 이제 옆에서 온갖 신을 찾으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달칵-.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윤건이 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앞 조가 문을 열고 우르르 몰려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는 하윤이 뛰어온다 해도 가망이 없었다.
“와, 진짜 떨려 죽는 줄.”
“나 발음 씹었어 어떡해….”
“으아… 교수님 포스 진짜 개무섭다.”
그리고 그 조에 속해 있던 수연이 마지막으로 터벅터벅 강의실을 나오고선 두 사람에게 물었다.
“너흰 왜 두 명밖에 없냐.”
그리고 하얗게 질린 윤건과 굳은 얼굴의 한솔을 번갈아 보고선 사정을 눈치챈 것인지 한숨을 내쉰다.
“완전 또라이 새끼들이네? 재수강을 할 거면 혼자 할 것이지.”
“다음 조, 안 들어오나요?”
사면초가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덜 닫힌 문 사이로 송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세 사람 사이엔 잠시 정적이 내렸다. 유일하게 제3 자인 수연만 냉정하게 상황을 살폈다. 그녀는 두 사람의 등을 강의실 쪽으로 밀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 가서 교수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려. 안 가는 것보단 일단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결국 그녀의 떠밂에 강의실로 들어온 두 사람은 송 교수가 앉아 있는 탁자에서 좀 떨어진 공간에 섰다. 카메라가 두 사람을 비추고 송 교수는 평가지에 무언가를 기록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렇게 어색하게 서 있길 몇 초, 송 교수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한솔은 안경알 너머 노련한 교수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무겁게 침을 삼켰다.
“조는 다섯으로 짜 준 것 같은데.”
“…….”
“여긴 둘밖에 없네?”
첫 타부터 치명타였다. 한솔과 윤건은 고개를 푹 숙였다.
“6조. 모노극이네요. 흠, 배우가 정하윤… 배우가 없는 조는 또 처음인데.”
교수는 여전히 무덤덤한 어조였다. 이 정도는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한솔의 성적표에 가차 없이 낙제점을 그을 준비가 된 듯했다. 한솔은 두 손을 꾹 움켜쥐었다.
“형평성의 문제기 때문에 재시험은 볼 수 없습니다. 당연히 결시자는 최하점이고.”
“…….”
“자, 6조. 어떡할 거죠?”
선택이 주어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한솔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자신의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속에서 갑자기 울컥, 하고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간의 기억들. 학점 하나 잘 받아 보겠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고, 밤을 새서 썼던 대본은 남의 주역이 되었다.
파르르 떨리던 한솔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진다. 한솔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송 교수를 바라봤다. 확고한 빛이 서린 캐러멜 빛 눈동자. 송 교수의 눈에 작은 이채가 띠었다.
“교수님.”
“…….”
“배우, 교체하겠습니다.”
그게 한솔의 선택이었다.
시간은 유유히 흘렀다. 휘몰아치던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러 학사 일정까지 마무리된 6월 중순. 마침내-.
“종강이다아아아!!”
“학교 놈아 더러웠고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보지 말자!”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의 단어가 도래했다.
「기초 발레 / 100 / A+」
「연극과 희곡 / 95 / A+」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을 웃고 울게 만든 1학기 최종 성적이 나왔다. 한솔은 중간과제를 워낙 죽을 쒀서 기대하지 않았던 연극과 희곡에서 턱걸이로 A+을 받았다. 고생을 너무 해서 그런지 솔직히 말해 만점을 받은 기초 발레보다 훨씬 기뻤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으면 나쁜 소식도 있다 했던가.
종강을 맞아 집 안에서 하릴없이 뒹굴거리던 두 사람에게 절대 오지 말았으면 했던 소식이 전달됐다.
「입영 통지서」
정확히는 한솔이 아닌 신우에게만 온 국방부의 초대장이었다.
10월 중순이면 신우가 입대를 한다. 베타 여성과 오메가와 달리 알파는 1차 성별에 관계없이 의무 복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 나라의 법이었다. 국가는 알파의 특출한 신체 능력을 이용하고 싶어 했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신우가 신체검사에 불합격 통지를 받는 일은 없었다. 사실, 알파들이야 수술 이력이나 러트약이 듣지 않는 특이 체질이 아닌 이상 군대에 반드시 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긴 시간을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한솔은 마음이 급해졌다. 신우가 입대를 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신우야, 빨리!”
한솔은 신우의 손목을 꼭 움켜쥐고 급하게 오피스텔을 뛰쳐나왔다. 물론, 신우의 근력을 생각해 보았을 때 한솔이 신우를 끌고 간 것보단 신우가 한솔에게 끌려가 줬다는 사실이 옳을 것이다.
이 나이 때의 연인들이 늘 그렇듯 두 사람은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카페도 갔다. 단지 돈이 넘쳐 나는 도련님들의 방식으로 그 장소가 프리미엄 호텔이라거나 퍼스널 쇼퍼를 대동한 백화점 쇼핑이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그렇게 며칠 동안 열심히 돈지랄을 한 덕에 급한 마음이 어느 정도 사그라든 한솔은 이제 정말 ‘평범한’ 대학생다운 데이트를 즐기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늘도 점심부터 신우를 끌고 나와 대학로로 향했다.
“우와, 사람 많다.”
“그러게.”
영화관이나 백화점도 사람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바글바글하진 않았다. 특히 그들이 가려던 수플레집은… 무슨 줄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었다. 신우는 반대편에서 오던 사람들이 한솔을 치고 가기 전에 어깨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갑작스럽게 신우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게 된 한솔이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켰다. 표정 관리, 표정 관리-.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머리 위에서 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겠어? 많이 긴 것 같은데.”
“그래도 먹어 보고 싶어. 여기 다음 주부터 리모델링 들어가서 문 닫는데.”
“그래, 그럼.”
한솔이 눈을 빼꼼히 들어 올리며 대답하자 신우가 한솔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젖살 많이 빠진 것 같은데, 아닌가…? 한솔은 자신의 뺨이 그렇게 통통한가 싶어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요즘 들어 신우가 자신의 뺨을 자주 만지는 것 같다. 신우 자신도 모르는 이한솔 전용 버릇이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한솔은 혼자서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줄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결국, 두 사람은 1시간 가까이 되는 웨이팅 끝에 수플레 맛집이라 소문난 가게에 들어올 수 있었다.
“수플레만 파는 게 아닌가 봐.”
와플, 파르페, 크레페 등 예쁘고 맛있어 보이는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하긴 수플레 맛집이랬지 그것만 판다고는 안 했다. 한솔은 고민하다가 딸기 수플레, 바닐라 아이스크림 와플과 인절미 초코파르페를 시켰다. 누가 다 먹을지 의심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시럽은 뿌리지 말까? 신우한텐 엄청 달 것 같은데….”
“괜찮으니까 네가 먹고 싶은 대로 해.”
결국, 고민하던 한솔은 정확히 수플레의 절반에만 시럽을 뿌렸다. 뿌듯하게 웃어 보이며 신우를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는 얼굴로 수플레 접시를 한솔 쪽으로 밀어 준다. 한솔은 푹신푹신하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빵 덩어리를 조심스럽게 잘라 입 안에 넣었다. 얌-. 분명 다 똑같은 계란이랑 밀가루로 만든 것일 텐데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느낌에 한솔이 눈을 크게 떴다.
“와, 이 집 왜 맛집인지 알겠다.”
“맛있어?”
“응. 식감이 되게 신기해. 난 좀 더 퍽퍽한 게 좋긴 하지만….”
한솔은 다시 시럽을 뿌린 수플레를 잘라 생크림을 듬뿍 묻혔다. 거의 한솔의 입만 해진 것을 삼키자 입 주위로 하얀 생크림이 묻어난다. 한솔은 또 그걸 모른 척하고선 와플을 한 입 크기로 잘랐다. 즐거운 마음으로 포크를 들어 올리는데 신우가 한솔의 손목을 가만히 잡아 왔다.
슥-.
그는 손수건 5호를 이용해 한솔의 입 주변을 꼼꼼히 닦아 줬다. 내심 손으로 닦아 주고 입술로 할짝이는 그런 드라마 같은 전개를 원했던 한솔이었지만 주변에 즐비해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긋거리는 모습에 등을 꼿꼿하게 폈다. 역시, 데이트는 이런 맛이지. 속으로 히히거리던 한솔은 결국 시킨 것의 반도 먹지 못하고 수플레 집을 나와야 했다. 점심을 먹기도 했고 아무래도 신우한텐 너무 단 느낌이 강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소화도 시킬 겸 걷기로 하고 밖을 돌아다녔다. 여름이 다가와 푸릇해진 대학로를 걷다가 커다란 기계들만 잔뜩 있는 이상한 가게를 발견하고선 호기심에 들어와 봤다. 가게 내부에는 크고 작은 인형들이 들어 있는 기계가 잔뜩 있었다.
‘인형 뽑기’
아주 단순하고 직관적인 이름에 한솔의 눈이 크게 반짝였다.
“뽑을 수 있을까?”
“입구 크기부터 확률적으로 굉장히 상술 같은데.”
한솔이 신우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이런 건 그냥 ‘재미’로 하는 거야!”
삐리리-.
그렇게 말한 한솔은 배춧잎을 다섯 장 잃어버릴 동안 인형을 하나도 뽑지 못했다.
“힝… 이건 주작이야….”
“돈 더 바꿔 올까?”
“…그냥 안 할래. 그래, 다 상술이겠지. 쉽게 뽑힐 리가 없잖아.”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키던 한솔은 씩씩거리며 인형 뽑기 가게를 나가려다가 급하게 백 스텝을 했다.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 한 장이 단박에 한솔의 눈을 사로잡았다.
「미니미 시리즈 New 신상 출시!
귀여운 아기 사막여우와 늠름한 아기 회색늑대를 만나 보세요~
*오직 미니미 머신에서만 ‘한정판 미니’를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하, 한 번만 더 해 볼까…?”
이미 홀린 눈을 하고 있는 한솔을 내려다보던 신우는 조용히 현금 기계로 가 오만 원권을 만 원권으로 바꿨다. 결국, 든든하게 지폐를 챙긴 한솔과 신우는 포스터에 적혀 있는 대로 인형 뽑기 건물의 2층으로 올라왔다.
“헉….”
그리고 보았다. 넓은 2층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사격’ 머신을.
미니미 뽑기는 사격 뽑기 게임이었던 것이다.
“신우야….”
한솔은 신우의 소매를 꼬옥 붙잡았다. 한껏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서 신우를 올려다보자 그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었다. 흔히 돈 많은 사람들의 취미라 불리는 게 세 가지 있는데 바로 골프, 승마, 사격이다. 신우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시작했다가 취미로 정착한 케이스였다. 어렸을 때 종종 신우를 따라 유가가 관리하는 사격장에 놀러 가곤 했던 한솔도 유 회장님 권유에 배워 보려다가 너무 진득하게 한 자리에서 집중해야 하는 종목이라 포기했던 기억이 있었다. 한참 발레에 공을 들이던 시기라 더 그랬다. 아무래도 자신은 정적인 스포츠보단 동적인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다.
“뭐 가지고 싶어?”
“나 얘랑, 얘.”
“되게 뒤쪽에 있네. 앞에 걸 다 떨어트려야 시야각이 보이는 구조인 것 같은데.”
“…역시 상술이야….”
“일단, 해 보자.”
양쪽 눈 모두 1.8인 한솔이 보기에도 인형은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거기다 포스터에 나와 있던 ‘한정판’ 인형은 비겁하게도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인형 친위대에 둘러싸인 채 잘 보이지도 않았다. 신우가 기계에 지폐를 연달아 넣고 불이 들어온 전동 총을 들어 올린다. 한솔은 그가 사격 자세를 잡는 것을 보고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탕-!
진짜 총에서 나는 소리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깜짝 놀랄 정도로 사운드가 리얼했다. 가장 앞쪽에 있던 인형의 줄이 툭 끊기며 기계 입구로 떨어진다. 그리고 숨 한 번 돌릴 틈도 없이 효과음이 들리며 다를 인형 하나가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원래 이렇게 퍼 주는 건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백발백중이었다. 한솔은 멍한 얼굴로 진지한 표정을 한 신우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달칵, 탕-.
사격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무언가에 열중한 모습의 알파는 멋있는 법이다. 그게 설령 애인에게 손바닥만 한 인형을 안겨 주려고 그런 것이라 해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멋있는 거 아닌가? 군복 입은 신우가 사격을 하는 모습이 오버랩되며 가슴이 울렁거리다가도 지금 이 순간이 좋아서, 너무 좋아서 한솔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순식간에 열 발을 전부 쏜 신우가 전동 총을 내리며 한솔을 돌아봤다.
“쏴 볼래?”
“나 사격 못 하는 거 알잖아.”
“그냥 재미로 하는 거니까. 자세는 배우지 않았어? 너무 오래전인가.”
“그 정도는 기억하거든.”
신우가 짓궂게 웃자 한솔은 입술을 비죽이며 신우에게 다가갔다. 신우에게서 전동 총을 넘겨받는데 생각 이상으로 무거웠다. 얕봤다가 순간 휘청이는 한솔의 허리를 신우의 팔이 단단하게 떠받혔다. 한솔이 놀란 얼굴로 가까운 거리의 신우를 올려다봤다.
“무거우니까 조심하고.”
고개를 끄덕인 한솔이 가물가물한 기억대로 어설프게 사격 자세를 잡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좀 많이 어설퍼서 귀 끝을 붉히는데 뒤로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신우가 한솔의 손등 위로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겹쳤다. 무거웠던 총의 무게가 절반으로 줄었다.
“앞에 보고.”
귓가에 내려앉는 나직한 목소리에 한솔은 침을 꼴깍 삼켰다. 달칵-. 총이 장전되는 소리. 끼리릭-. 손끝에 힘이 들어갈수록 총 내부의 장치에 힘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쿵쿵,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한솔은 홀린 듯 목표물에 집중했다.
“쏴.”
탕-!
어느새 친위대를 전부 잃어버린 사막여우 인형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좋아?”
“응!”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솔은 한.정.판. 아기 사막여우 인형과 아기 회색늑대 인형을 모두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걸 얻기 위해 다른 인형들을 전부 떨어트리는 데 쓴 돈만 10만 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대체 어디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뛰어 들어온 인형 뽑기 가게 사장님이 울면서 애원을 한 덕에 산더미 같이 쌓인 다른 인형들을 돌려드리고 이 인형의 회사에서 판매된다는 정품 인형 옷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장님이 안도하시는 걸 보니 이쪽이 더 손해인 모양이지만 뭐 어때. 한솔은 발품을 팔지 않고 마음에 쏙 드는 걸 얻어서 좋고 사장님은 적자를 (아마) 면해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앙증맞은 인형들을 더 앙증맞게 만들어 주는 보들보들한 후드 잠옷 세트.
그렇게 한솔은 만족스럽게 그날의 데이트를 마쳤다.
“진짜? 오늘 일찍 들어와?”
[응, 지금 가는 길이야. 뭐 사 갈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얼른 오라구.”
[그래, 알았어.]
신우와 통화를 끊고 한솔은 빈둥거리던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기회!’
한동안 신우와 행복한 데이트 라이프를 즐긴 한솔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연인은 방학이라고 해서 마음 편하게 빈둥거릴 수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었다. 입대를 두 달 앞두고서도, 아니 두 달밖에 안 남았기에 더 바빠진 신우는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올 정도로 스케줄이 빽빽했다. 거기다 두고 나 좀 봐 달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응. 피곤한 애인을 홀라당 잡아먹을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은 한솔은 꿋꿋이 독수공방의 생활을 감내하는 중이었다. 그 인내도 오늘로 끝인 듯하지만.
“30분밖에 안 남았잖아?!”
앱으로 신우의 위치를 가늠해 보던 한솔이 내적 비명을 지르며 욕실로 달려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긴 했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공들인 ‘작업’이 필요했다. 그 엄청난 걸 먹으려면… 흠흠, 아무튼 신우가 오기 전에 그 준비를 마칠 필요가 있었다. 달칵-. 한솔이 들어간 욕실 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한동안 욕실 안에선 물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이 열리고 신우가 귀가했다. 구두를 벗은 신우는 가장 먼저 신발장에서 한솔의 신발을 확인한 뒤 슬리퍼에 발을 넣고 중문을 열었다. 드르륵-. 중문이 열리자 적막한 실내의 모습이 드러난다. 평소 한솔이 애용하는 자리를 확인한 신우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의아한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한솔의 방으로 향하고선 방문을 느릿하게 두들겼다.
똑똑-.
“솔아, 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고선 핸드폰을 꺼내 특이할 것 없이 평범하게 생긴 앱 하나를 클릭했다. 지문을 입력하라는 창이 뜨고 신우가 엄지를 가져다 대자 록이 풀린다. 곧 익숙한 광경이 작은 화면 안에 담겼다.
두 사람이 사는 오피스텔 현관의 모습이다.
창을 조작해 오늘 하루 자신이 나간 것을 제외하면 들어온 사람도 나간 사람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신우는 핸드폰 화면을 껐다. 클럽 사건이 있었던 후에 달아 놓은 CCTV였다. 숨길 생각도 없이 대놓고 달아 놓았기 때문에 한솔도 CCTV의 존재를 알았다. 결국, 자는 건가 보다고 결론을 내린 신우는 한솔의 방문과 밖에서 막 들어온 자신의 몸을 번갈아 보곤 혀를 찼다.
알파가 오메가의 방 안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무척 실례라는 불문율 때문은 아니다. 그런 파렴치한이 된 것은 이미 한참 전인 학생 때였다. 그것과 상관없이 그저 외부에서 과시하듯 뿌려 대는 다른 알파들의 페로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몸으로 한솔의 방 안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을 뿐이다. 결국, 뒤돌아선 신우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먼저 씻을 생각이었다.
달칵-.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와 불을 켠 신우는 평소에 가면처럼 쓰고 있던 무표정한 얼굴을 잠시 거두고 피곤한 표정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장 재킷을 벗어 탁자 의자에 걸친 뒤 무심하게 소매 단추부터 풀던 남자는 멈칫한다. 뒤늦게 수상할 정도로 볼록 솟아 있는 자신의 침대를 발견한 것이다.
1초, 2초, 3초-.
“하….”
결국 바람 빠지듯 웃어 버린 남자가 저벅저벅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도톰하게 솟은 이불. 자꾸만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침대 시트. 그리고 무엇보다-.
이불 상단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연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것보다 더한 증거는 없었다.
“솔아, 여기서 뭐 해.”
신우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한솔을 부르자 오늘도 멋대로 남의 방에 숨어 있던 침입자가 빼꼼히 이불을 내렸다. 그리고 눈꼬리를 샐쭉하게 휘며 웃었다. 아주 작정하고 상대를 유혹하려는 모양새였다.
살금살금 이불을 내린 한솔이 팔을 뻗어 신우의 소매를 가만히 움켜쥐어 온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는데 그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하의는 어디로 갔는지 실종된 채였고 상의도 사이즈가 전혀 맞지 않아 헐렁거리는 남의 셔츠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한솔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훑어본 신우가 겨우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가리고 있는 셔츠 말단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래도 부끄러움은 있는지 한솔이 다리를 모으며 셔츠를 잡아 내렸다.
“보고만 있을 거야?”
그는 일부러 당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속으로 뻔뻔하게 나가는 게 승률이 좋을지 여리디여린 목소리로 묻는 게 더 좋을지 치밀하게 계산한 뒤에 나온 목소리였다. 결론적으로 신우도 많이 굶었을 테니까 얌전히 먹이 흉내를 내는 것보단 좀 더 도발적인 게 좋겠다는 계산이 섰다. 한솔은 턱을 치켜들고 ‘얼른 마음껏 잡수시오.’ 하는 눈빛을 보냈다. 신우가 피식 웃었다.
“내 셔츠는 왜 입었어.”
“입어 보니까, 역시 전문 테일러가 만든 거라 좋….”
“-혼나려고.”
흠칫-. 오래간만에 뻔뻔한 컨셉을 연기하고 있던 한솔은 금방 쭈그러들어선 신우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 화났나…? 하고 살펴보는데 잘생긴 눈매에 장난기가 드글드글한 것이 그냥 자신이 그동안 잘 억눌러 왔던 사디스트의 눈썹을 건드려 버린 듯싶었다.
금방 뻗대도 된다는 계산을 마친 한솔이 다시 등을 곧게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한솔의 매끄러운 턱 아래를 검지로 톡톡 두들겨 준 신우가 등을 돌렸다. 어…? 이게 아닌데? 한솔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선 욕실로 향하는 신우의 뒤를 쪼르르 쫓아갔다. 그리고 소리친다.
“어디가!”
“씻어야지, 집에 왔으니까.”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버리는 신우. 바로 눈앞에서 드러나는 조각 같은 몸매에 한솔은 입을 합, 다물었다. 우, 우리가 비록 동거하는 사이긴 하지만 그렇게 아무 데서나 옷을 벗어 버리면-.
‘완전 탱큐지.’
속으로 히히거리던 한솔은 점차 닫히는 욕실 문에 화들짝 놀라선 달려갔다.
“나도! 나도 갈래.”
“어딜 오겠다는 거야.”
“신우 씻는 거 도와주러…?”
알파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오메가를 내려다봤다.
“밖에서 사람들 만나느라 힘들었을 거 아냐. 내가 도와줄게, 응?”
한솔은 이거다! 싶어 얼른 살을 덧붙였다. 덤으로 신우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선 올려다봤다. 개소리도 이런 참신한 개소리가 없었지만 한솔은 신우를, 아니 자신을 믿었다. 마구마구 눈빛 공격을 보내며 올려다보는데 신우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알았으니까. 잠깐 떨어져 봐. 다른 알파들 페로몬 남아 있을 수도 있어.”
“신우 냄새밖에 안 나는데.”
사심 가득한 얼굴로 신우의 팔뚝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리던 한솔은 곧장 뒷덜미를 붙잡혀 떨어지게 되었다. 한솔은 내심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신우가 돌아보자 ‘난 몰라요.’ 하는 순수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알파가 오메가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앗!”
한솔이 엄살을 피우며 두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대체 뭘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말릴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한솔은 욕실로 들어간 신우가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는 모습에 얼른 다가가 옷가지를 받아 들었다. 신우가 내려다보자 마치 이렇게 도와줄 거라는 듯이 예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결국 희대의 레전드 템인 신우의 속옷까지 챙기는 데 성공한 한솔은 잠시 고민했다.
‘이걸… 금고에 숨겨 말아…?’
물론, 매우 양심적이고 떳떳한 준법 시민답게 한솔은 약간의 눈물을 머금고 옷가지를 분류해 빨래통에 넣었다. 그렇게 무사히 양심을 지킨 뒤 돌아와 보니 신우가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구불구불하게 축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과 곱게 감긴 속눈썹, 높은 콧대에 튕겨 비산하는 물방울, 물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과 우아하게 뻗은 목선-. 이제 맨몸이 그렇게 신기한 사이도 아닌데도 물줄기 아래 가만히 서 있는 대리석 석상 같은 몸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꼭 신화 속의 한 장면을 훔쳐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찰박-.
물기를 밟으며 신우에게로 향하니 곱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긴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모습. 그걸 보고 있자니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팔이 뻗어지고 물의 영역에 몸이 침범한다. 까치발이 들어 올려졌다. 손끝이, 신우의 눈에 닿았다.
“아!”
그 순간, 그대로 허리가 잡히며 물줄기 아래로 몸이 끌려갔다. 두 입술이 완벽히 포개졌다.
“흐읏!”
등줄기를 타고 찌릿- 소름이 돋았다. 고막을 때리는 물소리 아래에서 훨씬 질척하고 습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혀를 얽고, 미끈한 살덩이가 서로 비벼지면서 두 사람의 몸에선 약속이라도 한 듯 은근한 페로몬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을 가파르게 치솟게 만들고 속절없이 상대에게 빠지게 만드는 유혹의 속삭임. 덕분에 한솔은 점차 궁지에 몰렸다. 덩치가 두 배 가까이 차이 나는 알파의 몸이 자신에게 쏟아지듯 기울어지자 파들파들… 간신히 까치발을 들고 있던 한솔의 발끝이 휘청이며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결국, 탁-. 등이 욕실 벽에 부딪히게 되며 점차 거세지는 신우의 공세에 한솔은 질끈 눈을 감았다. 소낙비에 젖은 나뭇가지 사이로 매화가 한 송이, 두 송이 피기 시작한다. 결국, 참지 못한 한솔이 헐떡이며 입술을 벌리자 입술 간의 작은 틈새 사이로 달큼한 숨이 샜다.
“하아….”
“하응…! 조, 금만 천천히…!”
그는 도톰한 혀끝이 입천장을 싹, 핥아 올리는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다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허리에 감긴 신우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발끝이 붕- 뜨는 기분에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착각이 아니었다. 몸이 허공에 들어 올려진 것이다. 벽과 신우의 몸 사이에 끼게 된 한솔은 내려 달라는 의미로 두 다리를 바둥거리다가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급하게 신우의 목에 팔을 감았다. 한솔이 떨리는 목소리로 신우를 불렀다.
“신우, 신우야 내려 줘…!”
“…….”
“떨어지면… 힉…?!”
물기에 젖은 손가락이 한솔의 둔부에 착 달라붙어 있던 신우의 셔츠 자락을 헤치고 은밀하게 숨어 있던 구멍 입구를 갉작였다. 신우가 한솔의 몸을 벽으로 더 몰아붙이자 자연스럽게 두 다리를 들어 올리게 된 한솔이 가장 예민한 곳을 뭉근하게 덧그리는 느낌에 자꾸만 불안하다는 듯이 밑을 힐긋거렸다. 물론, 그런 오메가의 이탈을 알파가 용납할 리 만무하다. 오메가의 등을 크게 가로지르듯이 해서 목덜미를 붙잡은 알파가 집중하라는 듯 맹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점차 한솔의 두 눈에서 멍하니 초점이 풀어졌다.
쏴아아-!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허공에 떠 있다는 불안감에 신우의 목을 절박하게 끌어안고 있던 한솔이 손가락하곤 부피부터 다른 것이 아래에 비벼지는 느낌에 흠칫 몸을 떨었다. 뜨겁고 묵직하다. 한솔이 팔에 힘을 주는 순간, 은근슬쩍 사타구니에 비벼지던 성기가 빠듯하게 구멍을 벌리며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좁은 입구를 무자비하게 뚫고 들어오는 좆 기둥과 내장이 통째로 밀어 올려지는 느낌. 숨이 턱턱 막혔다. 심지어 콘돔도 없었다. 거친 마찰 때문에 화끈하게 달아오른 내벽이 오물오물 입질을 할 때마다 아무것도 씌워지지 않은 생좆의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한솔은 울퉁불퉁한 핏줄이 그대로 느껴지는 성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마치, 그제야 ‘진짜’를 가진 것같이 포만감이 들었다. 기분 좋은 고양감이었다.
“아, 아으….”
퍽-! 기둥이 크게 한 번 치고 들어오자 엉덩이에 불알이 잠깐 닿았다 떨어진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크기에 앓는 소리를 낸 한솔은 그럴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세웠다. 덕분에 매번 신우의 등과 목에는 붉은 생채기가 났지만 한솔이 알 방법은 없었다. 알파의 재생력이 워낙 뛰어나기도 했고 신우가 한솔에게 굳이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깊, 어… 신우야….”
“후….”
“조, 금만 빼 주면- 흣…!”
한솔의 요청대로 신우는 슬쩍 허리를 물렸다. 하지만 한솔이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한 이유는 첫째로 예민한 내벽을 득득 긁으며 빠져나가는 기둥 때문이요, 두 번째로 이게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솔이 절박하게 신우의 목을 끌어안자 푸욱-! 두꺼운 귀두가 구멍을 파헤치며 결장 입구에 처박혔다. 한솔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짤막한 신음만 흘렸다.
“아, 안… 흐앙…!”
푹- 찔걱… 쯔읏….
기댈 곳이라곤 신우의 몸밖에 없는 허공. 신우가 허리를 퍽퍽 박아 댈 때마다 한솔의 다리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중력의 법칙에 의해 평소보다 훨씬 깊게 박힌 것 같은 기둥을 느끼며 한솔은 어떻게든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단단한 나무 기둥 같은 신우의 몸에 팔과 다리를 얽으면 퍼억, 퍽! 신우는 그런 한솔의 등을 받치고 격렬하게 추삽질을 이어 갔다. 한솔은 속절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솔아.”
쏴아아-.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피부를 두드리는 물방울의 감촉. 얽히는 숨-. 맞닿은 가슴에선 쿵쿵거리며 뛰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리고 물의 한기로부터 감싸 주는 뜨거운 체온이 있었다. 잔뜩 긁힌 것 같은 낮은 목소리로 한솔을 부른 신우가 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좁은 구멍 안에 두툼한 성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흐익…! 한솔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마치 그것마저 집어삼키고 싶다는 듯 한솔의 입술을 단번에 감춰 물은 신우가 한솔의 어깨를 끌어안고 조금씩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신우의 품 안에 갇힌 채 아래에는 두꺼운 성기를 품고 있던 한솔은 귀두가 은밀한 곳을 꾹꾹 누르는 느낌에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안 돼… 안, 안 들어가… 응? 신우야, 안 들어가아…!”
워낙 좆의 크기가 커서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히트라면 모를까, 아무리 발랑까진 한솔이라도 맨정신으로 그런 짓을 했다간 백 퍼센트 응급실행이었다. 결장 입구에서 지분거리는 좆 대가리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한솔이 엉엉 울며 한 번만 봐 달라고, 이건 진짜 안 된다고 빌자 신우가 이를 악물고선 겨우 성기를 뒤로 물렸다.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한솔이 파들파들 떨며 훌쩍이는데 신우가 심술을 부리듯 성기를 박은 채 기둥을 빙그르 돌렸다. 쯔으읏-. 수축해 있던 내벽이 마구 늘어나며 지진을 일으키는 느낌에 한솔은 그만 팔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푹-! 당연한 수순으로, 아찔하게 몸이 추락하는 느낌과 함께 구멍에 꽂혀 있던 성기가 내벽 한쪽을 무자비하게 쑤셨다. 도톰하게 부풀어 있던 한솔의 성감대였다. 눈앞이 아득하게 변하면서 축 늘어지는 몸을 붙잡은 신우가 한솔의 몸을 추슬러 올렸다. 두 사람의 복부 사이로 희멀건 정액이 질척하게 늘어졌다.
“……아… 흐으…?”
잠깐의 정적 후, 깜박이며 눈을 뜬 한솔의 입술 위로 가벼운 입맞춤이 내렸다. 쵹-. 떨어지나 싶었더니 매끄러운 혀가 이내 한솔의 입술을 핥았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던 한솔은 입술을 벌려 요망한 살덩이를 앙- 하고 물었다. 마치 젖병을 문 아기처럼 한솔이 눈앞의 혀를 빠는 것에 열중하자 멈칫했던 혀의 주인이 한솔의 잇몸을 살살 핥았다. 으응… 달콤한 신음이 샜다.
“좋다고 말해 봐.”
퍽-! 허리를 거칠게 박아 넣자 키스에 열중하던 한솔이 파드득 몸을 떨며 입술을 떨어트렸다. 신우는 그런 한솔의 입술에 쪼듯이 입을 맞췄다. 그가 작게 헐떡이는 분홍빛 살덩이를 가볍게 깨물며 속삭였다.
“응…! 신우, 야…!”
“얼른-.”
“흑! 응! 흐으…! 아앙!”
이미 한 번의 사정으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던 내벽에 무자비하게 좆질이 이어지자 한솔이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쏴아아-.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샤워기의 물방울이 대리석 바닥으로 추락하며 잘게 비산했다. 반짝이는 물빛이 수없이 튕겨 나와 두 사람을 적셨다. 한솔의 눈가에 입술을 맞추던 그가 문득, 이를 갈며 말했다.
“난 네가 좋다고 말할 때마다 미칠 것 같으니까.”
초점이 풀린 눈으로 헐떡이던 한솔이 마치 그 말에 반응한 것처럼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해….”
“…….”
“좋아…! 으응! 아! 좋아, 더… 더 해 줘… 흣!”
신우가 깊게 목을 울리며 신음했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퍼억-! 귀두를 짓뭉개듯 박아 넣자 한솔이 고개를 홱 꺾으며 몸을 떨었다. 가벼운 절정이었다.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폭주 기관차처럼 무자비하게 좆을 박던 신우는 입술을 짓씹으며 벽을 짚고 있던 팔에 힘을 줬다. 섬세한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푸른 핏줄이 곤두선다. 그는 낮게 신음하더니 한솔의 구멍에서 좆을 거칠게 빼냈다. 두꺼운 것이 내벽을 진탕 긁어내리며 빠져나가는 느낌에 한솔이 비명을 질렀다.
“흐아앙! 힉! 좋, 아…! 좋아, 신우야…!”
꺼떡이는 두 성기를 붙잡고 거칠게 비벼 대자 한솔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입과 행동이 따로 노는 상황이었다. 결국 초 단위로 찾아오는 절정의 감각을 이기지 못한 한솔이 먼저 파정하자 신우는 축 늘어지는 몸을 붙잡고 한솔의 복부에 성기를 비벼 댔다. 숨만 색색 내쉬며 반쯤 신우의 몸에 걸쳐져 있던 한솔은 뜨거운 액체가 복부에 끼얹어지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이제 한 번. 신우의 무시무시한 체력을 떠올려 보던 한솔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어쩐지 매번 시작은 자신이 하는데 먼저 나가떨어지는 것도 자신인 것 같다. 이런 게 바로 자업자득인 걸까…?
한솔은 아래를 파고드는 신우의 손가락에 침을 꼴깍 삼키며 신우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일 오랜만에 데이트하자고 하려 했는데 걸을 수만 있음 좋겠다…. 한솔의 소박한 소원이었다.
“흣, 응… 거기 더어… 흡!”
신우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첨벙이는 물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다 욕조 안에 들어온 상태로 한솔은 여전히 신우에게 안겨 있는 자세였다. 신우의 어깨를 짚고 무릎으로 서 있던 한솔은 아래로 꿀렁이며 물이 들어오는 느낌에 짧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신우가 구멍 안에 숨겨져 있던 볼록하게 부푼 곳을 꾹 누르자 비명을 지르며 눈앞의 알파의 얼굴을 다급하게 끌어안는다. 좋은 냄새가 나는 몸이 알아서 안겨 오자 가볍게 웃은 신우가 매끄러운 피부 위에 홀로 봉긋하게 솟아 있는 정점을 찾아 입술로 물었다. 갑자기 살점이 깨물리는 느낌에 깜짝 놀란 한솔이 뒤를 힘껏 조였다.
“아파?”
“으응… 아니… 그냥 조금….”
자신의 가슴 언저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발긋하게 얼굴을 물들인 한솔이 속닥거리듯 말하자 신우가 자신이 깨문 젖꼭지를 살살 핥아 주었다. 한쪽에서만 올라오는 찌릿거리는 느낌에 한솔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기왕이면 다른 쪽도 만져 줬으면 좋겠는데 신우가 거기에만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행동하니까 괜스레 초조해진 것이다. 결국 한솔은 입술을 꾹 깨물고서 자신의 떨리는 손으로 남은 한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신우는 그런 한솔을 보더니 낮게 웃으며 머리를 물렸다. 당황한 한솔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왜… 안 해 줘…?”
그렇게 울망이는 얼굴로 바라보면 괜히 괴롭히고 싶어진다는 걸 너는 알까.
신우는 놀고 있는 한솔의 손을 잡아 본인의 가슴에 올리도록 만들었다. 한쪽은 이미 한껏 예쁨받은 뒤라 붉게 피가 몰려서 정점만 도드라진 모양새였고 다른 한쪽은 아직 태가 완전히 잡히지 않아 부드럽고 몰캉해 보였다. 그 대비가 무척이나 야했다.
무언의 명령에 한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힐긋힐긋 눈치를 보며 정말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 눈빛에 신우는 고개를 까딱였다. 한솔이 얼굴을 푹 숙이고선 양 젖꼭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읏… 흐응….”
물에 젖은 셔츠를 입고 위쪽만 단추가 전부 풀어 헤쳐진 채 자신의 유두를 만지는 모습. 오랜 시간 발레를 해 온 덕에 유려한 선을 간직한 몸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즐겁게 만들곤 했다.
신우는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한솔의 복부 위로 혀를 미끄러트렸다. 힛, 한솔이 작게 떨었다. 집요하게 배꼽을 문지르고 쏙 들어간 구멍에 소리 나게 입술을 맞추었다.
“흐윽?!”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어도 설마하니 배꼽이 그대로 빨릴 줄은 몰랐던 탓에 한솔의 얼굴에 짙은 당혹감이 서렸다.
하지만 곧 자신의 복부에 파묻은 동그란 뒤통수 아래에서 나는 청각적인 자극과, 미끌미끌한 혀가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작은 구멍을 핥고 빠는 느낌에 서서히 얼굴에 열이 몰렸다. 젖꼭지를 만지던 한솔의 손길이 천천히 느려졌다. 배꼽 안쪽의 단단한 심지 같은 것을 신우의 혀가 꾹꾹 눌러 온 탓이었다.
“흐앙, 응!”
“섰네.”
자신의 턱 밑을 간질거리는 분홍빛 기둥을 붙잡은 신우가 피식 웃었다. 그가 한솔에게 바짝 붙을수록 한솔의 성기는 신우의 목젖 옆에 구겨진 채 애처롭게 부르르 떨었다. 아까처럼 만져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원하게 해방시켜 주지도 않는 모습에 한솔은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두 번이나 맛보게 해 놓고 외면하다니…. 야속했지만 좋았고 서러웠지만 행복했다. 한솔은 신우의 머리를 꼬옥 붙잡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흣, 신우야…!”
배꼽 주위에 쪽, 쪽- 입술을 쪼면서도 전처럼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로 빨아 주지는 않았다. 오매불망 신우가 빨아 주기를 기대했지만 신우는 이제 구멍 근처로도 오지 않았다. 한솔은 애가 탔다. 빨아 달라는 의미로 은근슬쩍 아랫배를 내밀었으나 되려 외면만 당했다. 결국, 애가 탄 오메가는 직접 입을 열었다.
“여기, 여기 해 줘….”
“뭘 해 줘?”
“여기… 흑… 신우야… 응?”
배꼽을 콕콕 가리키면서도 차마 뒷말을 내뱉지는 못하는 모습에 알파는 짓궂은 눈으로 그 모습을 감상하다가 선심을 쓰듯 입을 맞춰주었다.
“아응! 아! 흣!”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구멍을 맹렬히 빨리자 한솔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행위자와 피행위자. 구멍을 들락날락하는 뜨거운 살덩이. 어딘가 성교와 유사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한솔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목젖 옆에서 치대는 성기에 신우가 잠시 입을 뗐다. 알파는 쏙 들어간 구멍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손, 움직여야지. 솔아.”
그 다정한 명령에, 한솔은 흠칫- 놀라며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단하게 일어서 있던 성기가 한솔의 허벅지를 쿡 쑤시자 젖꼭지를 만지는 손길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지 신우를 자꾸 힐긋거리며 침을 꼴깍 삼킨다.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만찬을 둔 그는 보란 듯이 자신의 성기를 붙잡고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한솔의 두 눈이 옅게 흔들렸다.
“유륜도 예뻐해 줘야지.”
“…흐으….”
“손톱으로 눌러 봐.”
탁탁탁-! 자위를 하는 신우의 손길이 점차 거세졌다. 신우의 지시대로 하나하나 따르고 있던 한솔이 발끝이 찌릿거리는 느낌에 숨을 헐떡였다. 점차 달아오르는 몸에 발가락을 꾹 움츠렸다 펴기를 반복하며 어떻게든 사정감을 참아 내 보려 하는데 갑자기 몸이 뒤로 휙 당겨지더니 셔츠가 반쯤 벗겨졌다. 거친 손길에 남은 단추가 투둑- 튕겨 나간다. 한솔은 뒤로 팔이 잡아당겨진 채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셔츠로 팔이 묶였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아흑…!”
그대로 자연스럽게 내밀어진 가슴을 깨물렸다. 이번에는 양쪽 다 공평하게 괴롭힘당한 덕에 열이 잔뜩 올라 어찌할 줄 모르는 한솔이 이것 좀 풀어 달라고 간청했지만 신우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결국 젖꼭지만으로 가 버린 다음에야 자유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맑았던 물이 뿌옇게 변할 때까지 정력을 소진하던 한솔은 축 늘어진 상태로 신우에게 안겨 욕실을 나왔다. 몸이 뽀송해진 걸 보면 씻긴 씻은 것 같은데 4번째 사정 뒤부턴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생각이 안 났다.
‘또 신우가 씻겨 줬나 보네….’
멍한 눈으로 신우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한솔은 커다란 손바닥이 눈앞을 슥 가리는 느낌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아까는 그렇게 짓궂게 괴롭히던 목소리의 주인이 다정하게 속삭이는 말에 스르르 눈을 감았다.
“잘 자, 솔아.”
***
-힝… 왜 가야 돼? 학교 안 가면 안 돼?
그날은 신우가 처음으로 등교를 하는 날이었다. 거의 하루 종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붙어 있던 이와의 떨어짐을 어린 한솔은 이해하지 못했다. 학교라는 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하루에 한 번씩 오던 가정 교사를 떠올리며 차라리 학교를 사 오면 안 되냐고 땡깡을 부리다가 아버지한테 혼이 나기도 했었다. 신우는 곤란해하며 정말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한솔을 보더니 무릎을 접고 앉아 연한 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금방 올게.
-싫어어… 형아 가지 마아….
결국 흐어엉- 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한솔 탓에 곤란해하던 사람들이 어디 한두 명이었던가…. 한솔은 흐릿하게 번지는 꿈속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날의 서러움과 슬픔,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어른들과 신우에 대한 약간의 미움, 그리고 그 모든 걸 뒤덮는 자신의 반쪽에 대한 그리움이 남았다.
어느새 자신의 방 천장으로 바뀌어 있는 모습에 눈을 비비며 일어난 한솔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9시. 신우가 이미 아침 수영을 마쳤을 시간이었다.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난 한솔은 잠시 휘청이긴 했지만, 기력이 너무 딸리는 것 빼곤 그래도 걸을 만했다.
화장실에 들러 뽀송해진 얼굴로 방에서 나온 한솔이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조용하네. 결국 신우의 방으로 향했다. 한솔은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가 장난기가 돌아서 방 손잡이를 조용히 돌렸다. 놀래 줘야지! 그런 생각으로 방문을 몰래 여는데 틈새 사이로 침대에 기대 바닥에 앉아 있는 신우의 모습이 보였다. 언뜻 무언가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끼익-.
조금 더 살짝 문을 열어 본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무언가의 정체가 드러났다. 액자-. 그건 손바닥만 한 작은 탁상용 액자였다. 어린 시절의 두 사람의 모습이 담긴….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이런 매개체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추억의 일부분이었다.
갑자기 오늘 꿨던 꿈이 생각나면서 울컥한 한솔이 문을 활짝 열고 신우에게 달려갔다. 한솔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던 신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와락-. 한솔이 덮치듯 안겨 오자 특유의 반사 신경으로 얼떨결에 따끈한 몸을 받아 내는 데 성공한 신우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아?”
“…안 가면 안 돼?”
그간 꾹꾹 눌러 왔던 말이 조용히 터져 나왔다. 그도 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생떼라는 것을.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 년이나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해졌다가 신우한테 부담이 될까 봐 억지로 밝은 척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거기에 가면 당분간은 핸드폰도 할 수 없다는데 사용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편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버틸 수 있을까…. 한솔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가만히 한솔을 내려다보던 신우가 손을 뻗어 한솔의 볼을 감싸 안았다. 볼 위로 흘러넘친 속상함에 그는 씁쓸히 웃었다. 신우가 팔을 뻗어 한솔의 몸을 자신의 품으로 이끌었다.
“미안해.”
군대를 가야 해서 하는 사과는 아니었다. 그건 사회가 그에게 부여한 책무였고 그가 사과해야 할 일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러니까 상황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일 년 동안 한솔이 이번처럼 속상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 바로 달려와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속죄이자 미안함-.
신우는 금세 어깨가 축축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멀리 옮겼다. 그리고 한솔의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두 사람은 체온과 심장 소리로 상대방을 조용히 위로했다. 서로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걱정과 서글픈 감정이 전부 녹아내릴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서로를 껴안았다.
***
“입맛에 안 맞아?”
“응? 아냐- 맛있는데… 음… 좀, 배가 부르네….”
늦은 오후. 기분도 풀 겸 나온 밖.
좋아하는 한정식집에 왔는데도 입맛이 없는지 반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는 한솔을 보며 신우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한솔은 아니라며, 특유의 눈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더 안 들어가면 계산할까?”
“…으응. 사실, 더 못 먹을 것 같아.”
“그럼 후식은 포장해 달라고 할게. 홍시 좋아하잖아.”
한솔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솔이 화장실에 간 사이 방에 들어온 중년의 여주인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맛에 맞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오랜 단골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어머니 쪽으로도 아는 사이다 보니 걱정이 된 듯싶었다. 신우는 다음 일정이 바빠서 그렇다, 오늘은 특히 가자미구이가 담백하고 맛있었다며 여주인을 안심시켰다.
“아, 아주머님. 후식 포장 가능할까요.”
“살짝 얼린 거라 금방 녹을 텐데… 밖에 오래 계실 예정이면 본가로 보내 드릴까요?”
“네, 그래 주심 감사하죠. 지금은 자취 중이라 이쪽으로 보내 주세요.”
신우는 잠시 여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한식집 밖으로 나왔다. 복잡하고 차가운 회색 도시의 모습 대신 작은 숲속 공간 같은 모습이 보인다. 고풍스러운 한옥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작은 연못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신우는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리는 느낌에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인 : J 한성민」
누군가 했더니-. 개인 전화라 번호를 아는 이도 몇 없는데 이 시간에 전화 걸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긴 했다. 가볍게 혀를 찬 신우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이! 군인 아저씨!]
“끊는다.”
[아야야! 잠깐만! 미안, 미안하다니깐?!]
한참 동안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트려 놓던 신우는 좀 잠잠해졌다 싶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좀 정성 들여서 대답해 주면 안 되겠냐?]
제수씨한테 하는 거에 반의반만 해 보라면서 구시렁대는 목소리를 가뿐히 무시하고선 캘린더를 열어 입대를 하기 전까지 남은 일정을 확인했다. 10월, 한솔의 생일. 그보다 상단에 기록되어 있는 일정을 확인하고선 얼굴을 굳혔던 신우는 이제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기로 했는지 본래 텐션으로 돌아온 목소리에 겨우 표정을 풀었다.
[아, 그런데.]
“어.”
[지금 뭐 하냐?]
정정한다. 여전히 쓸데없었다.
[너, 너 또 끊으려 했지?!]
“잘 아네.”
나쁜 새끼, 차가운 새끼, 한겨울에 냉수로 샤워할 새끼라며 온갖 하찮은 욕을 다 하던 성민이 불쑥 말했다.
[그런데 뭔 일 있음?]
“…….”
[목소리가 영 별론데? 한 2도쯤 더 차가운 것 같다.]
…참 이상한 부분에서 예리한 놈이었다.
[자, 이 엉아한테 말해 봐라. 내가 또 한 상담하잖냐.]
“…네가?”
[지금 집안 어르신들의 푸념 및 잔소리를 21년 동안 겪고 살아남은 이 몸의 경력을 무시하시는 건지?]
당연하다 해야 할지. 신우가 성민에게 한솔과의 일을 털어놓을 일은 없었다. 일단, 두 사람 사이의 일이었고 무엇보다 이 엉터리 상담사를 믿을 수 없다는 점이 컸다. 성민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기보단 기분이라도 풀어 주려는 건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역시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인간이다.
대신 신우는 이 시간에 둘이서 갈 만한 곳이 있는지 물었다. 집안에서도 골머리를 앓을 정도로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놈이니 데이트 코스 정돈 줄줄 꿰고 있을 거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온갖 부티 나는 장소를 말하던 성민은 갑자기 ‘아!’ 하고 소리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서민 코스는 가 봤냐?]
“…그건 또 뭔데.”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어? 이거, 꽤 색다르고 좋다? 돈 없는 애들 데리고 가면 욕 처먹지만… 제수씨는 한 번도 안 가 봤을 거 아냐. 한 번 가 봐.]
그러면서 말하는 장소에 신우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정말 이런 데를? 하는 얼굴이었다. 결국 장소를 조언받은 대가로 한참 동안 성민의 뻘 수다를 들어 주던 신우는 한솔이 한정식집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진짜 끊어. 가 봐야 돼.”
[오냐-. 입대하기 전에 한번 보자.]
“그래.”
신우가 통화를 끊는 모습을 멀뚱히 올려다보던 한솔은 신우가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이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솔아-.”
“응?”
“…여기 가 볼래?”
신우한테 들을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 한솔의 눈이 동그래졌다.
“악! 씨발!!”
…그리고 그곳에 발을 들였을 때 가장 먼저 들은 소리는 현란한 욕설이었다. 한솔은 저녁도 아닌데 벌써부터 컴컴한 조명과 마치 한 칸씩 나눠진 독방 같은 자리에서 환하게 새어 나오는 모니터 불빛을 신기한 얼굴로 바라봤다. XX PC방. 성민의 예상대로 두 사람 모두 와 보기는커녕 왜 오는지 이해할 수 없는 장소였다. 집에 훨씬 사양 좋은 컴퓨터가 있는데 굳이 이런 곳에…? 눈을 아프게 하는 발광 다이오드 뺨치는 키보드부터 시작해 분명히 금연 구역임에도 찐하게 나는 담배 냄새에 어색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신기하긴 한데… 한솔은 다크서클이 어마무시하게 내려온 퀭한 얼굴의 여자가 두 사람을 슥 바라보는 것에 조금 긴장하고 말았다. 보통 이렇게 눈이 마주치면 다가와서 번호를 주고 가던데….
“…….”
…그냥 지나치네. 한솔은 사람의 외관에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이들의 천국에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앉으면 되나…?”
“일단… 그런 것 같은데.”
뻘쭘하게 안을 둘러보던 둘은 가장 담배 냄새가 덜 나 보이는 구역으로 갔다. 마침 구석에 두 자리에 자리가 있길래 컴퓨터 전원을 켰다. 이용을 하려면 시간 충전해야 한다는 안내를 보고 신우가 두 사람 자리에 시간을 넣기 위해 자리를 뜬 사이 한솔은 괜히 신우의 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달칵였다.
‘그런데 뭘 해야 되지?’
게임이라고 해 봐야 어릴 때 신우랑 했던 땅따먹기 보드게임이 다였던 한솔로선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것도 매번 신우가 세계 제패를 하고 끝났었는데…. 아무리 신우가 주요 도시를 양도해 주고 랜드마크를 한솔의 명의로 해 줘도 결국 끝은 그의 파산 엔딩이었다. 그걸 보고 한솔은 나중에 크더라도 절대로 부동산은 만지지 말아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곤 했다.
“아오, 샹! 존나 못 하는 새끼들이 지랄이야.”
쾅-!! 심각한 얼굴로 인기 게임 리스트를 보며 군대가 생각나는 총 게임은 치워 버리고 귀농 게임처럼 보이는 버섯 아이콘과 새싹 아이콘을 두고 고민하던 한솔은 옆자리에서 키보드를 부술 듯 내리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들이 바로 옆자리에 모여서 화면을 보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키보드를 내리친 이는 자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소년으로 ‘얼마나 다양한 욕설을 쓸 수 있나’ 같은 대회에 나가면 1등을 할 것같이 입이 험했다. 그걸 굳이 사람 많은 곳에서 티를 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솔의 신기해하는 눈빛을 눈치챈 걸까 소년이 험악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리더니 소리쳤다.
“뭘 꼬라 봐. 씨발, 구경났냐?”
음… 자의식이 대단한 친구였다. 단지, 한솔은 ‘저러다가 키보드 부서지면 변상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한솔이 쫀 기색이 아니자 자기애에 살고 자기애에 죽는 나이의 소년은 화가 부글부글 끓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무리로 보이는 다른 소년들의 어그로까지 끌렸다.
“뭐야, 아는 형임?”
“저렇게 연옌같이 생긴 형을 알겠냐.”
“형 맞음? 존나 어려 보여.”
하나같이 목소리 볼륨 줄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지 다른 줄에 있던 사람들까지 하나둘 인상을 쓰며 돌아보기 시작했다. 한솔은 일이 왜 이렇게 된 건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신경을 끄기로 했다. 왜 보냐고 뭐라 했으니 간단하게 안 보면 되겠지- 하는 생각의 흐름이었으나 자의식 과잉의 고딩들이 그걸 이해해 줄 리 만무했다.
“왜 봤냐고, 미친년아. 재수 없게-.”
언뜻 숙덕거리는 소리 사이에 ‘오메가’라는 단어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비웃음 소리와 한솔의 몸을 훑어보는 더러운 눈길이 이어졌다. 그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냥 속으로 조용히 감탄했다. 왜냐면 저 멸치를 닮은 고딩들 뒤로 신우가 싸늘한 얼굴을 한 채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솔로선 그냥 자연스럽게 불안한 눈빛 좀 해 주고 고딩 친구들이 원하는 대로 어깨 좀 움츠려 주면 되었다. 기세등등해진 고딩 놈들이 별로 크지도 않는 키와 어깨로 유세를 떨 듯 한솔을 위협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도 안 무서웠다….
미성년자들이 학교, 집, 학원만 오가는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을 산다고 하지만 아무리 패턴이 익숙하다 해도 그렇지 이렇게 괴롭히는 방식까지 비슷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여전히 창의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방식에 속으로 혀를 차던 한솔은 신우가 가까워지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신우의 얼굴엔 관심이 일절 없던 미의식이 이상한 인간들도 신우의 키와 덩치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는지 저절로 길을 틔워 주고 있었다.
그걸 철없는 미성년자들만 몰랐다.
“야, 대답해. 대답- 윽! 씨발, 뭐야?!”
신우가 앞에서 가장 나대던 키보드 폭행범의 어깨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키보드 폭행범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짜증을 내며 뒤를 돌아봤다가 움찔 몸을 떨었다. 옆모습만 봐도 100% 쫀 것이 보였다. 그때부터 한솔은 속으로 팝콘을 뜯었다. 하긴 저 북극 빙하보다 차가워 보이는 표정을 보면 안 쫄기가 힘들지. 가끔 대형 사고를 쳤을 때, 한솔도 저 표정의 열화판을 보곤 했기 때문에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궁금한데.”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옴짝달싹할 수 없는 어깨와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 있는 가운데 쫄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키보드 폭행범이 얼굴을 더 험악하게 구겼다. 그리고 거칠게 몸을 털며 이거 놓으라고 소리치더니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
“아저씨가 알게 뭔데요, 씨발.”
우와, 존댓말이네.
“일행이라면?”
신우가 무심히 고개를 까딱이자 소년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마, 그들이 생각하던 최악의 시나리오였던 모양이다.
열심히 속으로 팝콘을 뜯던 한솔은 신우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얼른 가상의 팝콘을 집어 던지고 최대한 가련해 보이도록 표정을 바꿨다. 이런 취급을 당해서 서럽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울지는 못하는 것처럼-. 입술을 꾹 깨물고서 신우의 시선을 피하면 미션 클리어였다. 이때, 넘치지는 않고 약간 일렁여 보일 정도로 촉촉한 눈동자가 포인트다. 신우의 얼굴이 전보다 더 굳어지는 것을 보고 너무 열연을 펼쳤나 싶어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던 한솔은 키보드 폭행범이 소리치는 걸 듣고 기함하고 말았다.
“아저씨, 미자 폭행으로 경찰서 가고 싶어요?”
이런 짓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 키보드 폭행범은 여전히 의기양양했다. 물론, 한솔이 생각하기엔 자폭을 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살다 살다 신우한테 저런 협박을 하는 사람도 보는구나 싶어 여러모로 놀랐다. 신우도 황당했는지 눈썹이 2mm 정도 삐딱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딱 봐도 멀쩡한데 어깨가 빠졌다느니 하면서 발 연기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연영과 재학생은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 한솔은 자신이 교수였다면 가차 없이 D를 줬을 것 같은 연기를 보며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인가.’ 하는 고뇌에 빠졌다. 이제는 사과를 하라며 아니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배짱을 부리는데 신우도 이제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어졌는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이 쉽나 보네.”
“…….”
“그럼 좀 어렵게 바꿔도 되겠지.”
나불거리던 키보드 폭행범의 입이 한순간에 다물려 버리는 순간이었다.
“고소당해 봤어요?”
신우가 아주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씨발, 허세 부리지 마요. 이딴 걸로 무슨 고소야. 그거 돈 존나 깨지는 거 나도 알거든요?”
“그럼 다행이고.”
“…….”
“내가 돈은 ‘존나게’ 많고 시간은 없어서 차라리 나 대신 ‘이딴 걸’ 처리해 줄 전문가들을 고용하는 편이거든.”
“…….”
“그렇게 원한다니 법정까지 가서 한 번 가려 보죠.”
그러면서 신우는 고딩 무리를 슥 훑었다. 하필이면 그중 절반이 교복을 입은 상태였다. 그걸 뒤늦게 눈치챘는지 고딩들이 교복 마크를 가린다고 난리를 쳤다. 그럼 뭐 해, 한솔이 이미 명찰 이름까지 다 외운 상탠데.
“내가 살면서 가장 공감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법정 싸움만큼 사람 인생 피곤하게 하는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쪽도 기억해 뒀으면 좋겠네요.”
신우는 그렇게 말하곤 한솔에게 다가와 방금 전과 180도 다른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기가 너무 안 좋네. 나갈까?”
“으응….”
당연히 한솔은 약간 머뭇거리는 척하면서 냉큼 몸을 일으켰다. 아닌 척 두 사람을 힐긋거리던 사람들이 그들을 스캔하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 시계에 관심이 많던 누군가는 신우나 한솔이 착용한 시계의 브랜드를 알아보고 헛숨을 삼켰고 패션에 관심이 있던 이는 걸친 옷을, 신발 애호가는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모 브랜드의 한정판 컬렉션을 발견하고선 침을 흘렸다. 그리고 그런 시선은 어떤 의미의 ‘선망’과 ‘우월감’을 형성한다. 한솔은 나름 조심히 잡는다고 잡은 것 같은데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신우의 손에 손목이 잡힌 채 PC방을 나왔다.
그리고 신우와 한솔이 PC방을 나간 그때,
PC방 내부.
“야, 어떡함?”
“진짜 고소할까?”
“미쳤냐. 딱 봐도 허세잖아.”
철없는 미자들은 알 수 없는 공포에 떨다가 욕설을 내뱉으며 흩어졌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귀가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야 대박사건ㅋㅋㅋㅋ」
미친 진상 고딩 패거리 때문에 매일매일을 고통받다가 이러다 위경련이 오지 않을까 싶었던 알바생은 패거리가 사라진 자리를 치우다가 마스크 안에서 실실 웃기를 반복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이 기쁜 소식을 친구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그 고딩 새끼들 오늘 인실좆 당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구? 그 키보드 부수고 튄 새끼들?」
「패드립 소음공해범들 아니었음?」
「저번에 손님 한 명 쳤다며」
놀랍게도 다 같은 놈들이었다. 알바생은 라면을 시켜 놓고 키보드 샷 건을 치다가 엎질러서 못 먹었으니 환불해 달라던 개새끼들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결국, 그 라면값은 제 사비로 채워 넣었다. 아주 미친놈들이 따로 없었다.
알바생은 그런 울분을 담아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아주 상세하게, 또 약간의 양념을 쳐서 친구들에게 전했다. 지루한 일상 속 드문 MSG에 친구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했다. 알바생도 사이다 한 병을 원샷 한 것처럼 흐흐 웃었다. 지잉, 때마침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런데 뻥카 아냐?」
이윽고 우르르 톡이 달린다.
「뻥카면 어때ㅋ 그런 애들이 은근 쫄보라 오늘은 잠도 잘 못 잘걸」
「ㅇㅇㅋㅋㅋ 그거면 됐지」
하지만 알바생만큼은 알았다. 그 어두컴컴한 마귀 소굴에 내려온 한 줄기의 빛 같던 존잘남들이 낀 시계가 롤X스와 까르X에라는 것을. 어쩌면 그 존잘남의 말엔 약간의 진실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만, 이건 자신만 알기로 한다. 원래 가장 재밌는 부분은 혼자만 아는 게 국룰이니까.
그렇게 묵은 체증이 싹 내린 것 같은 표정으로 알바생은 콧노래를 부르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그런데 실은 이 사건에는 알바생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알바생이 보고 놀랐던 시계가 두 사람에게는 적당히 바깥 활동을 하기 위해 착용하는, 적당한 시계라는 사실-.
세상에는 롤X스와 까르X에 위의 부도 존재하는 법이고,
때로는 변호사 선임이 전화 한 번 하는 것만큼 쉬운 이들도 존재했다.
인생은 언제나 실전인 법이다.
“배고파….”
PC방을 나온 뒤, 두 사람은 볼거리가 많은 대학로를 거닐었다. 여러 가지 아기자기한 장신구를 내놓고 파는 가판대도 구경하고 어딜 봐도 상술일 것 같은 타로점 가게에 들어가 점도 봤다. 들어올 때부터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연인에겐 ‘천생연분’이라는 기분 좋은 립서비스가 돌아왔다. 한솔은 이 상술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벌써 여름이라 그런지 낮이 길었다. 6시가 넘어서도 비교적 환한 거리에선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젊은 청춘의 노래를 감상하다가 한솔의 허기진 목소리에 두 사람은 좀 더 한적한 술집이 있는 거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날, 버스킹 팁 박스엔 큰손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괜찮았어?”
꽤 넓게 자리를 차지한 주홍색 포장마차를 보더니 신기해한 한솔이 여길 가자고 조르는 통에 들어온 자리. 대부분이 벌써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이었고 목소리 볼륨이 매우 컸다. 아무리 봐도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감성 레스토랑에나 어울릴 것 같은 매끈한 얼굴들이 못 미더웠는지 포장마차 아주머니는 이것저것 추천해 주며 ‘근데 먹을 순 있는 거여?’ 하며 의심스러워했다.
결국 너스레를 떨며 아주머니가 추천해 주시는 대로 안주를 시켰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뚱한 얼굴이셨지만 한솔을 슬쩍 보더니 지방에 있는 제 딸이 생각난다는 둥 그릇에 오이랑 당근 조각을 담아 먼저 가져다주셨다. 한솔은 감사하다고 예쁘게 웃으며 포장마차식 전채를 먹었다. 아삭아삭하니 맛있었다.
“응? 뭐가?”
“오늘.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잖아.”
한솔은 PC방을 나온 직후에 신우가 한성민을 쥐 잡듯이 잡는 걸 보고 여길 추천해 준 게 누구인지 단박에 알게 되었다. 서민 체험 데이트 코스라니. 하긴, 신우보단 한성민 머릿속에나 나올 법한 곳이긴 했다. 한솔은 속으로 재밌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성민에겐 아직 클럽 일에 대한 앙금이 사알짝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신우한테 쥐어 잡히는 걸 슬쩍 모른 척했다. 그리고 신우가 한숨과 함께 전화를 끊었을 때, 한번 해 보면 안 되냐고 초롱초롱 눈빛 공격을 보냈다. 아까 일로 평소보다 훨씬 물렁해져 있던 신우는 결국 승낙했고, 두 사람은 PC방에서의 일은 잊은 것처럼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 그래서 신우가 먼저 그 일을 언급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거기서 매듭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재밌었어! 음… 그리고 그건 이제 괜찮아.”
“…그래, 재밌었으면 됐어.”
“응. 나중에 또 오자.”
한솔이 당근 조각을 휙휙 휘두르며 웃자 신우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한솔은 신우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아 문득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진짜 고소할 거야?”
“그 고딩들?”
“응. 아직 미성년자잖아.”
“글쎄… 미성년자라고 자꾸 봐주니까 그렇게 제멋대로 구는 것 같은데. 한번 제대로 데어 보면 정신 차리지 않을까. 최소한 바깥에서 입조심해야 된다는 사실 정도는 깨닫겠지.”
한솔은 신우의 싸늘한 어조에 오이를 오독오독 씹다가 멈칫했다. …신우, 진짜 화났구나. 못 들은 줄 알았는데 아까 고딩들이 섹드립을 친 것도 들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랑 붙어먹을 년이니 뭐니, 벌써 20년째, 재혼도 안 하고 세 자식을 키우고 있는 이 의원이 들었다간 대로할 만한 막말이었다.
그냥 교육청에 저 고등학교 학생들 행실에 대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작문 실력으로 가볍게 민원이나 넣을 생각이었던 한솔은 잠시 반성했다. 음, 그렇지… 그런 건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지. 내 권리는 내가 챙겼어야 했는데.
한솔이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이자 신우가 소주 뚜껑을 따 잔에 따라 줬다. 맥주까진 그래도 그림이 그려졌는데 신우가 소주를 까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루브르 박물관 조각상이 양반다리를 하고 자작을 하는 느낌이랄까…?
“아마 긁어모아 봐야 벌금형이겠지만-.”
쫄쫄쫄-. 맑은 액체가 작은 잔을 채웠다.
“그래도 최대한 물고 늘어지라고 하면 되겠지.”
작은 소주잔 두 개가 부딪히며 맑은소리가 울렸다. 낡은 포장마차 안의 불빛이 쨍하게 반짝이며 두 사람의 손목에 걸린 시곗줄이 반짝 빛났다.
신우는 아까 그 대화로는 증거가 불충분하여 모욕죄 성립이 어려울 거라 말했다. 한솔이 ‘나 녹음 파일 있는데 줄까?’ 하자 잠깐 놀라 하더니 기특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행실이 거칠다 보니 파다 보면 두세 개쯤은 더 쉽게 ‘고소각’이 나올 거라며 무심히 덧붙이기도 했다.
“어묵탕이요.”
첫 잔을 비우고 나서부터 먹음직스러운 안주들이 줄을 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탕이 끓는 소리. 알싸한 알코올 냄새와 진한 국물의 어묵탕, 채소와 고기가 번갈아 꽂혀 있는 꼬치에서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한발 늦게 나온 해물파전은 끝은 바삭하고 안은 쫄깃했다. 한솔이 좋아하는 애호박과 새송이버섯을 골뱅이와 함께 맛깔나게 무쳐 놓은 안주와 서비스로 나온 오동통한 계란말이까지-. 한솔은 술 때문에 신우와 내외했던 기억이 있어서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분위기엔 마셔 줘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짠.”
챙! 잔이 부딪친다. 잔 안의 투명한 액체가 찰랑이며 반짝였다. 반사되는 빛, 고막을 파고드는 낮은 웃음소리-. 낮에 먹은 한정식집처럼 정갈하고 깔끔한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이런 포장마차 음식들은 그 만의 매력이 있었다. 한솔은 낮에 입맛이 없던 건 착각이었는지 쭉쭉 들어가는 술과 안주에 헤실헤실 웃었다. 신우는 그런 한솔이 예뻐서, 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도 잘 놀아 준 게 고마워서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한솔을 말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말리지 못했다. 쓰다고 혀를 비죽 내밀면서도 잔을 탈탈 털며 웃는데 그게 너무 반짝거려 보인 탓이다. 눈이 즐거우니 술이 달았다. 두 사람 다 어지간한 말술보다 센 터라 방심하고 있었던 탓도 컸다.
그러니까 신우가 한솔이 취했다는 사실을 자각한 건 둘이서 소주 일곱 병을 해치우고 난 뒤였다.
“형아 달려!”
몸을 가누지 못해 휘청거리는 한솔을 등에 업은 신우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게 놀이 기구라도 되는지 아는지 신우의 단단한 등을 팡팡 내리치고 두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한솔이 헛소리를 해 댔다.
“기사니임? 저 집에 가야 되어…. 집에… 늑대 같은 애인이 있어여…. 늦게 들어가면 호온나아….”
“…나 참.”
“시누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져어? 화나면 막… 막… 머리에 이이렇게 뿔이 두 개 생긴단 말야….”
…취한 거 맞아? 흐물흐물 늘어지는 한솔의 몸을 다시 추슬러 올리던 신우가 잠시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
“으응… 그래도 이건 비밀인데…. 시누가… 그렇게 혼내 주는 거 좋아여…. 솔찍히이 그냥 방치하면 슬프잖아… 웅… 나한테 관심도 없다는 거구….”
“…….”
“그래서 좋아여! 히히… 시누… 좋아아….”
마지막에 가선 거의 옹알거리는 수준의 목소리였지만 그는 묵묵히 옮기던 걸음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서 들리는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사랑스럽다. 남은 심장이 무섭게 뛰어서 어지러울 지경인데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는 형편이었다.
“너, 누구한테 하는 소린지는 아는 거야.”
화려한 네온사인이 어둠을 밝히는 밤거리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신우는 피식 웃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피스텔까지 별로 멀지 않은 탓에 도보를 택했는데 달이 밝아서 꽤 운치가 있었다.
“음냐… 신우야아… 나 배불러….”
신우는 한솔의 잠꼬대를 배경음 삼아 달 밝은 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현관에 한솔을 앉힌 뒤 신발을 벗겼다. 키는 꽤 큰 것 같은데 여전히 발 사이즈는 그대로라 신우는 한참 동안 말없이 한솔의 신발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자신의 것 옆에 반듯하게 내려놓는다. 큰 것과 작은 것이 나란히 몸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 마치 두 사람 같았다.
신우는 여전히 꾸벅꾸벅 조는 몸을 흔들며 말했다.
“솔아, 씻고 자.”
몇 번 뒤척이던 한솔은 느리게 눈을 끔벅이더니 눈을 떴다. 약간 멍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걸음걸이도 멀쩡하고 아까보단 비교적 괜찮아 보여 욕실 안까지 데려가 칫솔을 쥐여 주고 나왔다. 금방 물소리가 들리길래 그래도 정신이 든 것 같아 안심했는데 그도 씻기 위해 셔츠를 막 벗었을 때 한솔이 들어간 욕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우당탕-!
“솔아?!”
급하게 욕실의 문을 연 신우는 난장판이 된 상황에 잠시 침묵했다. 다행히 한솔이 넘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바닥에서 뒹구는 샤워기와 물도 안 받은 욕조 안에 들어가 웅크린 자세로 잠든 한솔의 모습이 보였다. 결국 머리를 짚은 신우는 남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왔다. 달칵, 욕실 문이 닫혔다.
위이잉-.
익숙하게 머리를 말려 주고 한솔의 잠옷을 찾아와 입혔다. 그리고 가슴까지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 잠시 욕실 뒷정리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는데 돌아와 보니 얌전히 본인의 방 침대에서 자고 있어야 할 한솔이 자신의 침대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모습에 신우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
그는 일단 한솔을 깨웠다. 안 일어난다. 이번엔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 그래도 안 일어난다.
그래서 그냥 자고 있는 몸을 들어 올려 다시 본인의 침대로 배달시켰다. 이번에야말로 이불도 잘 덮어 주고 한솔이 평소에 쓰는 수면 안대까지 꼼꼼하게 씌워 주었다. 그리고 한솔의 방에서 나와 패드를 들고 거실에서 밀린 일을 확인하는데 분명히 조용해야 할 집 안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스윽, 스윽….
달칵-.
끼이익….
설마 했던 신우는 한솔의 방문이 느리게 열리며 익숙한 몸이 휘청휘청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조용히 패드를 내려놨다. 얼굴엔 안대를 쓰고 손에는 베개를 들고 있던 한솔이 벽을 더듬으며 신우의 방을 찾는다. 신우는 한솔의 이상한 귀소 본능을 목격하고선 잠시 침묵했다. 그사이 기어코 신우의 방까지 오는 데 성공한 한솔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우는 한솔의 뒤를 쫓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색색….
예상대로 한솔은 그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결국, 허탈한 한숨을 내쉰 신우가 자신의 침대에서 한솔의 잠자리를 봐줬다. 혹여나 잔여 페로몬이 공기 중에 남아 있을까 탈취제를 뿌리고 환기를 시킬 동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자꾸만 이불을 끌어 내리는 것을 다시 올려 준다. 그날, 신우는 멀쩡한 자신의 침대를 두고 불편한 소파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반성문
1. 다시는 소주를 혼자서 세 병 이상 마시지 않겠습니다.
2. 언제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음주를 즐기도록 하겠습니다.
3. 잘 모르는 사람한테 업히거나 개인적인 사생활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신우는 구석에 있는 동글동글한 글씨를 힐긋했다.
「잘못했어요 ㅠ-ㅠ」
신우의 침대에서 아침을 맞은 한솔은 차라리 소설이나 영화처럼 기억이라도 날아갔으면 싶었지만 너무나 생생한 자신의 진상 짓거리를 떠올리며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 와중에도 신우의 침대에선 특유의 체향이 맡아져서 이불 위에서 조금 더 뭉그적거린 건 비밀이다. 결국, 소파에 앉아 있던 신우 앞에 자진 출두한 한솔이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선 넙죽 죄를 고했다. 피식 웃은 신우가 불러 주는 대로 반성문을 써서 바친 다음엔 당연하게도-.
“흣…!”
아침 매를 맞았다. 어쩐지 평소보다 강도가 센 것 같다.
“잘 모르는… 흑… 사람한테 업히거나 개인적인 사생활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한솔이 훌쩍이는 목소리로 말하자 바지를 올려 준 신우가 눈꼬리에 대롱대롱 맺힌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대체 누군 줄 알았던 거야.”
“몰라….”
“다음부턴 그러면 안 돼.”
“으응. 잘못했어….”
그렇게 한솔의 취중 진상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10월이 다가왔다. 가로수 곳곳이 노랗고 빨간 단풍이 들기 시작하며 세상이 알록달록하게 변했다. 높고 푸른 하늘과 청명한 바람이 부는 계절,
가을이었다.
창문 밖으로 단풍이 절정에 오르기 시작한 가을의 모습을 구경하던 한솔은 조용히 가리개를 내리고 품에서 부스럭거리는 하얀 꽃다발을 내려다봤다.
흰 국화와 생전에 어머니… 한예화가 좋아했다고 하는 보라색 수국, 그리고 안개꽃이 담긴 엮은 꽃다발이었다.
한솔은 평소에 주로 밝은 색상의 옷을 주로 입는다. 그래서 이날만큼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아버지의 굳은 옆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의 기일이자-.
한솔의 생일이었다.
***
“생각보다 일찍 왔다? 좀 늦는다더니.”
세린은 꽃다발을 안고 세단에서 내리는 신우를 향해 말했다. 국화, 장미, 수국, 안개꽃-. 누가 연인 아니랄까 봐 고른 꽃다발도 비슷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중간에 나왔습니다.”
“허락해 주시디?”
“흔쾌히.”
소년은 불과 몇 년 만에 완전한 남자로 성장해 있었다.
원래부터 정장이 그림처럼 잘 어울리기는 했으나 이 아이가 이 정도로 컸었나, 그녀는 잠시 고민해 본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럽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아이는 어느새 한층 날카롭게 정제된 야성을 지니고 있었다. 머리를 반 정도 넘긴 스타일을 하고 있는 탓일까, 이제는 어딜 봐도 ‘미성숙’ 하다는 느낌은 남아 있지 않았다. 세린은 묘소가 있는 쪽을 눈짓했다.
“세 사람은 묘소에 있는데 바로 인사하러 갈 거니?”
신우는 잠시 침묵했다. 두 집안은 어릴 때부터 왕래가 잦았고 이제는 약혼 관계이기까지 했지만 한예화의 기일은 엄연히 이 씨가 일이었다. 언제나 두 사람의 일에 너그럽던 이 의원도 신우의 헌화만큼은 거절하곤 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오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신우는 즉시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달려온 참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가족분들끼리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누님도 가 보시죠.”
“흠, 너도 이제 가족이지 뭐. 그래서 아버지가 오라 한 거 아냐.”
“…말씀은 감사하지만, 동행은 식 이후에 하겠습니다.”
“뭐, 좋아. 네 선택이 그렇다면야.”
그리 말한 세린은 뒤를 돌았다. 한차례 바람이 불어와 한솔보다 훨씬 짙은 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그녀는 잠시 그렇게 가만히 서 있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한솔이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
“…….”
“한 5일 정도- 아버지랑 나는 면회도 안 갔어. 엄마 장례 절차로 바빴다지만… 다 핑계였지.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을 텐데.”
후… 그녀가 한숨을 쉬는 것처럼 웃었다.
“내심 아버지가 안 가시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핑계가 될 수 있잖아? 내가 안 가는 게 아니고, 그냥 아버지 곁에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자위했지.”
“…….”
“그런데 어느 날, 여길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던 건진 몰라도 병원으로 차를 돌리셨어. 신생아 중환자실에 가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더라. 나는 그때 그 아이를… 엄마를 내 곁에서 떨어트린 괴물처럼 생각했거든.”
재경이 그놈이 철없는 게 다 아버지랑 날 보고 배워서 그런 거라며 그녀는 혀를 찼다.
“그런데 막상 그 아이를 보니까-.”
“…….”
“너무 작더라.”
“…….”
“너무 작아서…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어. 그 작은 몸에 기계 장치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데….”
“…….”
“엄마를 해친 괴물이라기엔 너무 작고 약해 보였어.”
잔잔한 가을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린은 끝이 흔들리는 목소리를 가다듬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봤다.”
“…….”
“엄마 입관할 때도 안 우셨는데.”
결국, 세린은 그 말을 끝으로 휘적휘적 손을 흔들며 묘소로 가 버렸다. 신우는 조용히 세단에 기댄 채 꽃다발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 사람은 떠나고, 다른 한 사람은 태어난 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맑았다.
“그래… 와 줘서 고맙네. 이야기는 밑에 가서 나누도록 하지. 막내는 아직 안쪽에 있으니 천천히 내려오게.”
덤덤한 표정의 이 의원과 악수를 나누고 신우는 점차 멀어져 가는 일행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를 보자마자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고 지나가는 이재경부터 완전히 평소의 당당한 기색을 회복한 이세린. 조금 지쳐 보이는 이 의원까지 차례로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는 이들의 뒷모습을 뒤로하고 그는 고개를 돌려 남은 한 사람이 있는 곳을 바라본다.
“…….”
신우는 반듯한 걸음으로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한솔의 곁에 섰다. 허리를 숙여 이미 주인을 찾아간 색색의 꽃들 위에 자신의 것을 더한다. 한솔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그런 알파의 모습을 느리게 훑었다. 다시 허리를 편 알파가 그런 한솔의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일전에… 고2 때였나. 누님한테 혼난 적이 있었어.”
정오의 찬란한 햇빛을 받아 언뜻 금색으로 보이는 옅은 색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너 울리지 말라고 하던데.”
신우가 무릎을 굽혔다. 정장 바지에 주름이 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풀썩, 들풀이 눕는 소리와 함께 시린 손끝이 한솔의 눈가에 닿았다.
“그런데 이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이면 나는 어떡하지.”
차라리 우는 것이라면, 그러면 눈물이라도 닦아 줄 수 있을 텐데-.
이날의 한솔은 그에게 그런 작은 도움조차 허락해 주지 않는다. 그 허무에 찬 눈망울이 주변을 얼마나 애타게 만드는지 본인은 알까.
씁쓸히 웃은 신우가 메말라 있는 한솔의 눈가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동안 가만히 침묵하던 한솔이 입술을 열었다.
“여기 오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들어.”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엄마는 왜 나를 낳은 걸까.”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속삭인다.
“…나라면 안 그랬을 텐데. 얼굴을 본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그러지…?”
한솔은 마치 고해 성사를 하듯 말했다.
이렇게 못된 말을 했으니 혼을 내 달라는 것처럼 애타는 얼굴로 신우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신우는 그런 한솔의 얼굴을 조용히 쓰다듬을 뿐,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자 결국 입술을 앙다문 한솔이 분한 것처럼 두 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는 자신을 잘 알았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이런 부채 의식을 느끼는 자신이 싫을 뿐이라는 걸. 평소에는 잘 갈무리하고 있다가도 이날만 되면 마치 잊지 말라는 듯 온 세상이 그 사실을 상기시키곤 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생명을 거름 삼아 피어났다는 것. 그게 싫었다. 묘비에 적힌 ‘한예화’라는 이름을 보고 세 사람은 기억 속의 어떤 이를 추억하겠지만 그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
“이따 같이 가 줄래.”
쏴-아-아-.
신우의 말에 화답하듯 바람이 불며 소담히 쌓인 꽃무덤에서 하늘하늘 날아오른 꽃잎 한 장이 부드러운 궤적을 그리며 파란 하늘 위를 유영한다.
한솔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째깍-. 시간의 태엽이 감기는 소리가 들린다. 신우의 곧은 등을 따라 묘소를 내려오고 풍경이 아름다운 정자에 앉아 차와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빠르게 감겼다.
바람이 불었다.
색색의 꽃잎이 휘날리는 풍경 속에서 서 있던 한솔은 무심코 손을 뻗자 손바닥 위에 팔랑이며 내려앉는 붉은 단풍잎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 주변을 살펴보니 졸졸 흐르는 계곡물과 주변에 펼쳐진 야생화 군락의 모습이 보인다.
-와아!
그 위를 익숙한 추억들이 환상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앗… 나 새 신발인데 어쩌지….
-이 꽃은 이름이 뭘까?
-나도! 나도 만들래!
-예쁘다아-.
여름 별장이 있던 곳. 그리고 어른들의 잔소리가 지겨워진 두 사람이 종종 숨어들고는 했던 두 사람만의 비밀 공간이었다.
어딜 봐도 어린 두 사람이 있었다. 한솔을 등에 업고 계곡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신우의 모습과 마냥 신이 나서 이름 모를 꽃가지를 들고 휙휙 흔드는 한솔의 모습. 물이 얕은 곳에서 온몸이 젖도록 신나게 물장난을 치는 두 사람부터 꽃밭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모습까지 다양했다.
그 모든 기억 속의 얼굴들이 조금씩 달랐다.
젖살이 뽀얀 멜빵바지 꼬마의 옆엔 비슷하지만 꽤 다른, 조금은 성숙한 얼굴의 소년이 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화관을 만들겠다고 설치다가 아직 손이 여물지 못해 대차게 실패하고 입술을 비죽이던 꼬마는 어느새 몇 년 더 자란 모습이 되어 능숙하게 꽃줄기를 엮어 화관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옆의 검은 머리 아이에게 화관을 씌어 주며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모습도 십 대 초반이 마지막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계곡의 수위가 점차 낮아지더니 바위 결이 보일 정도로 말랐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 아래쪽 캠핑장에서 화재 사고가 나면서 이곳은 더 이상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 되었다.
한솔은 오고 싶어 했지만 흐르는 물소리 대신 적막함과 고요함만이 남은 곳에서 시무룩하게 발걸음을 돌렸던 기억이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전문가의 말론 복원이 굉장히 빨리 된 편이라고 해. 수원이 마른 건 아닌데 인근에 대규모로 공장 지대를 짓고 있어서 지하수를 끌어다 쓰면서 물이 부족해진 거라 들었어.”
자금을 마련하고, 공장주와 협상하고, 지대 마련 및 이전과 산림 복원까지 걸린 시간이 대략 10년이었다.
완전히 하나의 사업이라고 봐도 무방한 일. 신우가 9살부터 매스컴에 노출되면서 미친 듯이 바빠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타고난 사업가인 유 회장은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뭐든 공짜로 해 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초기 자금을 빚으로 달아 두고 그걸 갚기 위해 그는 매 순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여기 있었다.
저벅저벅-. 한솔의 등 뒤에서 다가온 신우가 그의 곁에 선 채 같은 곳을 향해 시선을 둔다. 바위틈과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정답게 들렸다. 한솔의 팔이 느리게 떨어지면서 팔랑- 지지대를 잃은 단풍잎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빠르게 흐르는 물결과 함께 유실되어 사라졌다. 한솔은 어쩐지 그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쿵쿵-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한솔아.”
어느 한 사람을 잃은 슬픔이 너무나 커서, 어느 한 사람은 웃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웃음이 많았던 아이가 최초로 한 연기는 슬퍼하는 사람들 옆에서 웃지 않고 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한솔은 눈물 연기가 제일 쉬웠다. 자신만 보면 어머니를 떠올리는 사람들 앞에서 그나마 울 수 있어야 한솔은 ‘경박한’ 아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록달록한 새 옷 대신 검은 정장을 입고 케이크와 촛불 대신 때 묻지 않은 헌화를 바친다. 가족들이 조용히 챙겨 주는 선물을 받고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한솔은 ‘착한’ 아이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솔의 생일은 등불 아래 그림자처럼 조용히 지나갔다. 어른들은 한솔이 때를 가릴 줄 안다며 칭찬했다. 한솔은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하지만 언제나 한솔의 세상에선 예외를 만들어 내는 존재가 있었다.
누군가를 잃은 슬픔보단, 누군가의 탄생을 기뻐하는 말을 해 주는 사람. 세상 무뚝뚝한 얼굴로 다가올 겨울을 위해 작년에 얼려 둔 눈사람에 목도리를 둘러 선물하는 이상한 기행을 벌이는 사람. 그럼으로써 기어코 한솔이 웃는 얼굴을 보고야 마는 사람-.
신우가 말했다.
“스무 살 생일에는 보여 주고 싶었는데, 다행이다.”
숲을 닮은 향기를 가진 남자가 숲을 선물하며 웃었다.
***
“있잖아-.”
한솔의 스무 번째 생일 선물은 아쉽게도 실패로 돌아갔다. 한솔이 웃는 대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어 버린 까닭이었다. 잠시 멈칫한 신우가 세심하게 눈가를 닦아 줬지만 대체 어디서 그렇게 눈물이 샘솟는지 금방 원상 복귀가 되고 마는 모습에 신우는 난감한 얼굴을 해 보였다. 결국,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 버릴 때까지 울어 버린 한솔은 한결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난 거기 가기 싫어….”
아까는 대놓고 혼이 나고 싶다는 얼굴로 그러더니 이번에는 혼이 날까 봐 무서워하는 아이처럼 한솔이 힐긋힐긋 눈치를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지금 신발과 양말을 벗고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앉아 있는 중이었다. 팔랑- 주홍색 단풍잎 한 장이 물결 위로 작은 파문을 그리며 내려앉는다. 한솔은 둥둥 떠내려가는 단풍잎을 보며 차가운 계곡물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풀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할머니도 안 계시는데 외가 쪽 어른들 만나기도 싫고….”
“가기 싫은데 가는 거야? 누가 뭐라 할까 봐?”
“그것도 있지만… 그냥….”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침묵하던 한솔이 신우의 팔뚝에 툭, 얼굴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보여 주고 싶어서.”
생을 바쳐 헌신한 사람에게
“당신이 이렇게 힘들게 낳은 아들, 그래도 잘 크고 있다고 보여 주고 싶었어.”
안 그럼 너무 억울하잖아-.
부러 툴툴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소리 없이 웃은 신우가 한솔의 등 뒤로 팔을 둘러 자신에게 기댄 작은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는 싫으면 가지 말라거나 그래도 어머니 묘소인데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결국, 한솔이 결정해야 할 일임을 알기 때문에 그저 조용히 기댈 어깨를 빌려줄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두 사람은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어떤 화폭과도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감상했다. 한솔은 머리 위에서 하늘하늘 떨어지는 단풍잎들이 계곡을 따라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더니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엄마, 두부, 외할머니, 신우네 할아버지….”
젖은 단풍잎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하는 말에 신우가 한솔을 내려다본다. 전부, 지금은 두 사람의 곁에 없는 이들의 이름이었다.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어머니부터, 두 사람이 다섯 살 때 강아지별로 떠나 버린 사모예드 두부. 어릴 때 유독 한솔에게 쌀쌀맞던 외가 쪽에서 유일하게 한솔을 챙겨 주던 외할머니와 젊었을 적엔 재계의 역사를 써 내려가다가 한적한 한옥 마을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던 신우네 할아버지까지. 처마가 보이는 고즈넉한 한옥의 평상 위에서 다과상을 꺼내 놓고 양반다리 위에 어린 두 사람을 올려놓은 채 껄껄 웃던 풍채 좋은 신우네 할아버지는 폐암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한솔이 좋아하는 한과를 고사리 같은 손에 쥐여 주며 ‘많이 먹거라.’ 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솔이 생에 처음으로 보게 된 죽음의 주인이었다.
커다란 장례식장. 끝도 없이 밀려들어 오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검은 옷의 무리들. 하얀 국화꽃이 빼곡히 들어선 모습에 한솔은 그대로 압도당하고 말았다. 고막을 찌르는 울음소리와 곡소리, 한이 맺힌 목소리가 어린 심장을 쿵쿵쿵, 무섭게 뛰도록 만들었다. 외할머니 때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외가 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한솔을 일찍 돌아가게 했다. 그래서 장례 절차를 끝까지 지켜본 것은 신우네 할아버지가 처음이었다.
더 이상 외할머니를, 그리고 신우네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한솔이 처음으로 그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인 때이기도 했다. 강아지별로 돌아갔다는 두부처럼 어딘가 멀리 여행을 떠난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사실은 이제 영영 볼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거대한 상실감처럼. 한솔은 울었다. 슬픔에 잠식된 공간 속에서도 다다음 대의 천성을 이끌어 갈 어린 소년을 재단하려는 시선 탓에 울지도 못하고 의젓해야만 했던 신우를 대신해 펑펑 울어 버렸다.
“무서워. 앞으로도 잃어버릴 이름이 많다는 게.”
“…….”
“너무 무서워, 신우야…….”
계곡 위로 드리워진 단풍나무들이 색색의 물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 위로 수많은 유실의 이름들이 하염없이 떠내려가 사라진다.
누군가의 죽음을 본다는 것은 반대로 내 소중한 이와의 이별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솔은 그게 무서웠다. 내가 자라날수록 내 옆의 빈자리는 많아지겠지. 어머니의 묘비를 보며, 한솔은 그게 꼭 먼 미래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의 연속이고,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니-.
그렇기에 가장 무서운 것은.
“그러니까 신우는 나보다 딱 1분만 더 살았으면 좋겠어.”
내 옆자리의 사람과 이별하게 될 순간일 것이다.
“왜 하필 1분이야?”
“시간 지나면 사후 경직 일어나잖아. 그건 싫어.”
“…구체적이네.”
허탈하게 웃은 신우가 한솔의 목뒤를 받치자 자연스럽게 신우를 향해 고개를 돌린 한솔이 그를 올려다본다. 서로의 시선이 길게 맞부딪혔다. 그림자가 지면서 사락사락- 머리 위로 알록달록한 단풍 비가 내렸다. 두 눈이 곱게 감겼다. 곧, 입술이 포개어졌다.
틈새 사이로 새어 나온 오후의 햇살이 찬란하게 빛났다.

-4권에서 계속-

কটন কেণ্ডি ৰোমাঞ্চ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