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아악!”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전선이 끊길 듯 아슬아슬하다. 형광등이 깜박이며 점멸할 때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마치 스틸 사진처럼 뚝뚝 끊겼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사내는 여유로웠다. 서두르지도 않고 숨소리도 차분했다. 반대편에서 그와 마주 선 무리는 긴장한 눈으로 견제하듯 무기를 든 팔을 앞으로 뻗고 있다. 그들의 팔뚝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눈에는 두려움마저 비쳤다.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지 이따금 괴성을 지른다.
그들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로 남자는 쥐고 있던 장도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미세한 움직임에도 예민해진 상대는 움켜쥔 쇠 파이프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선제공격했다.
형광등 불빛이 들어온 순간 공중에서 은빛이 반짝이며 곧게 날았다.
푹! 가가각!
소름 끼치는 소리에 움찔거리던 놈들이 숨죽였다. 예리하게 반사되던 은빛 칼날의 궤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둠에 묻혔던 복도에 다시 빛이 들어오자 기이하게 기울어진 몸이 보였다. 등 뒤로는 삐쭉 튀어나온 칼날을 타고 아래로 검붉은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늘어진 전선에서 불꽃이 튈 때마다 바닥에 고인 붉은 핏물에 빛이 반사되었다.
단말마의 숨을 토한 몸뚱이가 경련하다 늘어지자 칼날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동시에 고깃덩이가 된 시체가 구석으로 처박혔다.
복도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하다. 구석까지 몰린 놈들이 손에 쥔 무기를 휘저어 다가서는 자를 위협했다. 의미 불명의 기합을 내지르는 놈들일수록 꼬리를 만 개처럼 공포가 서렸다.
백류파와 오용파. 강남 지역을 주 무대로 움직이는 두 조직은 처음에는 제법 팽팽히 맞붙었다.
순식간에 대세가 기울고 이렇게 무력하게 뒷걸음질만 치게 된 건 한 남자가 나타나면서부터였다.
야쿠자 놈들이 쓴다는 장도를 든 남자가 칼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동료들이 통나무처럼 쓸려 나갔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앞을 가로막는 것이 설사 제 편이라도 단호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 길이 생겼다.
백류파의 류신로.
소문으로 그는 백류파의 후계자가 아니라고 했다.
조직의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대학 전공을 살려 취업할 예정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떠도는 말이라 신빙성이 없다고 해도, 백류파의 보스인 류동하가 여전히 건재하니 아들의 존재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책상물림인 류신로가 조직에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같은 편조차도 말이다.
어느덧 백류파는 그의 뒤로 빠져 낙오한 놈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넘치는 살기에 눌린 오용파는 그가 내딛는 걸음마다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며 위협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앞에 서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귀신처럼 느껴졌다.
그의 뒤를 묵묵히 따르는 백류파의 그림자가 한 덩어리로 얽혀 거대하게 느껴졌다. 덮쳐 오는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오용파에서 이탈자가 생겼다. 한 명이 뒤돌아 도망치자 따르듯 욕설을 내지르며 나머지도 냅다 튀었다.
“으아아! 씨발! 씨이이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쪽으로 도망치는 오용파의 떨거지들을 본 박덕수가 안도하며 앞에 선 류신로를 바라봤다.
사실 의외였다.
백류파의 보스이자 아버지인 류동하가 함정에 빠진 것 같다고 보고하자 그는 곧바로 움직였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일말의 인간적인 애정이 존재하는가 기대했던 박덕수는 곧 생각을 접었다.
가볍게 손목을 움직여 검을 무디게 하는 피를 예사롭게 떨어내는 그를 지배하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흥분도 분노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는 무감각했다.
복도 끝 방에 도달한 박덕수는 눈앞의 광경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멈춰 선 류신로를 지나쳐 류동하에게로 달려간 백류파는 비통하게 보스를 불렀다.
“보스!”
“보스!”
도축된 고기처럼 갈고리에 꿰여 공중에 매달린 류동하에게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의식이 없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보스! 보스! 정신 차리십쇼! 보스!”
고깃덩이 같은 모습의 아버지를 보고도 류신로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백류파가 전부 허둥거리며 류동하를 내리려고 안달해도 그는 무심한 눈으로 내부를 훑었다.
비밀 통로라도 있었는지 최오용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류신로에게서 차분한 목소리가 새었다.
“쫓아.”
흥분한 기색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몇몇이 명령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눈시울을 훔쳤다.
조직 사이에서 갈고리는 오로지 고통을 주고자 쓰는 도구였다. 갈고리에 꿰뚫린 류동하의 어깨는 다시 쓸 수 없다. 그것을 모르는 백류파는 아무도 없다. 게다가 이미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류신로는 침착하게 아버지의 목덜미에 손을 얹어 생사를 확인했다. 목숨은 붙어 있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었다.
백류파는 보스가 살아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혼란에 빠져 울부짖었다. 류신로만이 다른 장소에 있는 것처럼 홀로 냉철했다.
“경찰이군.”
오용파의 시체들과 그에서 흐른 핏물로 물든 복도 너머를 돌아보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든 박덕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하를 울리는 군화 소리, 차분하게 절제된 기운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식혔다.
“개새끼들!”
분기를 가득 품은 격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경찰에 정면으로 맞서려고 무기를 다잡은 백류파가 류신로와 류동하를 보호하듯 둘러쌌다.
경찰과 맞서는 일은 쓸모없는 소모전이다. 이 상황이 백류파에 유리하게 돌아갈 리 없다. 차분하게 결론을 내린 류신로가 명령하려 입술을 벌렸다.
“물러나,”
류동하의 손이 신로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신로.”
“아버지.”
“신…로구나.”
“네, 접니다.”
“……온하는…?”
“이곳에 없습니다. 애초에 최오용은 차온하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하고 웃으며 류동하는 다행이라고 속삭였다.
“내가 없을…… 줄 알고, 있었지, 하여튼 그 새끼, 쿨럭… 컥!”
격한 기침에 피가 울컥울컥 튄다.
“아버지, 왜-.”
류신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없을 거라 짐작했으면서도 왜 함정에 빠졌는지 묻는 눈이다. 류신로를 가만히 바라보던 류동하는 힘들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말해 봤자 알아들을, 아니 류신로는 이해 못 할 것이다.
류동하는 알고 있었다.
어딘가 고장 난 아들을.
그나마 제 말이라면 퍽 따르는 아들에게 분명하게 마지막이 될 명령을 남겼다.
“류신로, 동생을 챙기거라.”
……예쁜 아이더구나.
류신로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타당한 이유를 묻는 것도 같았지만 의식이 점차 흐릿해졌다.
깡패는 싫다고 매몰차게 곁을 떠난 여인을 떠올렸다. 그녀를 꼭 빼닮은 딸같이 어여쁜 아이를 끝내 보지 못하고 여기서 숨이 다할 것을 류동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아이를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