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한 줄무늬로 된 천막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한산한 포장마차 안에는 손님이 하나였다.
주인은 포장마차를 열자마자 손이 미끄러워 소주 컵도 두 개나 깻박치고, 달걀도 한 판째 홀라당 뒤집어엎었다. 오늘 일진이 사나울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강렬하게 뇌리를 스쳤다.
오픈하고 속절없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포장마차에는 손님 하나 없었다. 파리조차 날리지 않았기에 막 장사를 접고 들어가려던 무렵 손님이 들어왔다. 이왕 들어왔는데 내쫓기도 뭐해서 주인은 주문한 대로 내주었다.
손님은 소주와 어묵탕을 시켜 놓고 입도 대지 않았다. 내일 쓸 재료를 미리 손질하면서 간혹 술잔이 채워졌는지 확인했지만, 아무래도 마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힐끔 눈알을 굴리다 재수 없게도 눈이 딱 마주쳤다.
부지불식간이라 표정 관리에 실패한 주인은 손님과 서로 빤히 바라봤다. 주인은 파를 썰고 있던 식칼을 꽉 움켜쥐었다.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근육이 긴장으로 오그라들 무렵 포장마차 안으로 또 한 명의 손님이 들어왔다.
“일찍 왔네? 류신로.”
요사이 자주 들락날락하며 이만하면 단골이 아니냐고 웃으며 이죽거리던 남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소속의 검사였다.
주인은 무뚝뚝하게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 밑으로 손을 쓱 닦았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내가 늦은 거구나. 미안, 미안. 야근하느라 내가 늦었다, 야. ……사장님, 여기 잔 하나 더 주세요.”
류신로에게서 조금 떨어진 모퉁이에 천연덕스럽게 앉은 서민구는 주인에게 사람 좋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오늘은 손님이 없네요.”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고 목을 늘여 신로의 앞에 놓인 음식을 확인했다. 소박한 차림에 서민구는 쯧쯧 혀를 찼다.
“돈도 많으면서 겨우 고거 시키고 그러냐? 류 검, 서민 경제 살리기에 좀 앞장서 주지. 여기 양념 장어 맛있어. 양념에 꿀 발랐나 봐. 그죠, 사장님? 오늘도 맛있게 구워 주세요.”
서민구가 이죽거리며 말을 해도 류신로는 반응하지 않았다. 젓가락을 들 생각도 없는지 서민구를 조용히 바라보다 주인이 수저와 소주잔을 내밀자 그제야 시선을 뗐다. 뗐다기보다 주인 쪽으로 관심이 바뀌었다.
몰라봤기를 바라며 주인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장어가 헤엄치는 수조 쪽으로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도 류신로의 관심도 떨어졌다.
“일이 많은가 보군.”
“나야 뭐. 며칠 전에도 웃기는 일 있었잖아. 조폭 새끼들이 이제 병원서도 패싸움하고 씨발, 좀 파고들려고 하니까 변호사가 지랑 얘기하재. 무슨 증거가 있어서 이러냐고, 와-. 요즘 조폭들은 변호사 대동하고 다니나 봐. 내가 법을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잘 아는 조폭 새끼가 있는지, 짜증이 확-…. 어쨌든, 좀 바쁘네. 아주 보란 듯이 계속 일이 터져서 말이야. ……너는 좀 괜찮냐?”
서민구는 길게 투덜거리며 담배를 하나 빼 물었다. 팔을 뻗어 듣고만 있는 류신로의 잔에 소주를 따라 준다. 뒤이어 본인의 잔도 채우고 류신로 잔에 톡 부딪히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셔-.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제사 지내냐, 음식 놓고 멍 때리게? 마셔, 마셔.”
캬-, 입소리를 내며 한 잔을 마신 서민구는 신로가 손도 대지 않은 오뎅탕을 끌어갔다.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 후루룩 마시고 몸을 부르르 떤다.
“아우, 살 것 같다.”
양념 장어가 연탄불에 구워지는 냄새가 솔솔 나며 포장마차 안을 가득 채울 때까지 서민구는 혼자 잔을 기울였다.
“이런 데서 만나자고 해서 좀 그러냐? 왜, 난 좋은데. 별로야? 좀처럼 먹지도 않고. 아, 입이 고급이라 안 맞나?”
“장소가 의외긴 하지만 조용하니까 상관없어.”
“왜 만나자고 했어?”
빈 잔에 소주를 채운 서민구가 픽 웃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신로는 대답 대신 서민구가 채워 준 소주를 단번에 마셨다.
“연수원 동기끼리 한잔하자고.”
면도칼 하나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는 냉랭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고 지갑을 꺼낸다. 아무렇지도 않게 수표 한 장을 내려놓은 신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근으로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지 그래.”
정말 가려는 움직임에 서민구는 기막힌 헛웃음을 지었다.
“야-, 류 검!”
휭하니 돌아서 포장마차를 나가는 류신로에게서 칼바람이 이는 착각이 느껴졌다. 황급히 따라 나갔을 때는 류신로를 태운 차가 이미 출발한 뒤였다.
“아, 뭐야-? 저 개새끼가. 사람 똥개 훈련시키나! 니가 만나자며! 씨이바아알! 아우, 썅!”
잠복하고 있던 차량에서 슬며시 내린 형사가 펄펄 날뛰는 서민구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진짜 간 거예요, 서 검사님?”
“예! 갔잖아요! 저 또라이가! 아-, 나!”
주머니에 넣어 둔 녹음기를 끈 서민구가 흙바닥에 마구 발길질하며 발광한다.
먼저 만나자고 연락한 쪽은 류신로였다.
요즘 오용파의 보스인 최오용이 궁지에 몰렸다. 백류파로서는 같은 구역을 차지하고 아웅다웅하는 놈들을 치워 버릴 기회였다. 본능적으로 뭔가 있다고 판단한 서민구가 단단히 준비하고 나왔건만, 결과는 이 모양이다.
포장마차도 일부러 고른 곳이었다.
이 포장마차의 주인은 예전에 백류파였다가 손을 씻고 잠적한 놈이었다. 십여 년 전이기는 하나 류동하의 여자와 도망간 뒤 행방이 묘연한 놈이니 서로 알아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류신로는 잠시 쳐다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는 놈이 아니니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가 더 중요했기에 대수롭잖게 여겼는데 그냥 가 버렸다.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려 놓고 얼굴 보자마자 볼일 끝났다는 양 돌아갔다.
“그러니까 좀 더 일찍 들어가시라고 했잖아요. 류신로하고 밀당 하십니까? 그러게 왜 버티다 들어가서.”
“밀당이라니요! 내가 쟤랑 연애합니까? 늦었다고 삐쳐서 가 버리게! 에이 씨-!”
“어, 맛있는 냄새 나네요.”
코를 킁킁거리며 형사가 포장마차 쪽으로 홀린 듯이 시선을 돌렸다. 잠복하느라 빵 쪼가리나 먹으면서 저녁을 대충 때웠으니 배고플 만했다. 어차피 일은 틀어졌다.
“다 나오라고 해요. 소주나 한잔합시다!”
형사가 활짝 웃으며 잠복 차량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두엇의 형사가 느릿느릿 포장마차로 다가오자 서민구는 한숨을 쉬며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우와- 맛있는 냄새!”
“이 새끼, 놓고 갈 거면 백만 원짜리로 놓고 가지, 치사하게 십만 원짜리를 두고 가,”
투덜거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빳빳한 수표를 들어 올리던 서민구의 표정이 굳었다.
수표 밑에 겹쳐져 있던 종이쪽지가 테이블로 팔랑팔랑 떨어졌다.
따라 들어오며 회식할 생각에 들떠 있던 형사들도 서민구가 바라보는 종이쪽지를 보며 표정이 굳었다.
“이거-… 뭘까요?”
“지하철 코인 로커 번호 같은데요?”
서로 눈치를 보며 눈을 굴리던 형사들과 함께 서민구는 작은 종이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왕십리-016]
“확인해 볼까요?”
“아, 이 개새끼…, 겉멋 소름, 씨발. 겁나 진짜 폼, 씨발. 아, 씨발.”
욕설을 중얼거리던 서민구가 쪽지를 들어 품에 쑤셔 넣고 한숨을 팍 내쉬며 손을 흔들었다.
“일단 뭐부터 먹고 움직입시다!”
류신로는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고, 쪽지를 놈이 남겼다는 증거도 없었다. 몰래 찍은 영상을 봐 봐야 놈이 수표를 꺼내 놓는 장면이나 찍혔을 것이다. 정말 짜증 나는 동기 새끼가 아닐 수 없다.
한 시간 후 확인한 코인 로커 안에는 대용건설 탈세와 민자 사업에서 얻은 부당 이익에 대한 내역이 연도별로 정리된 USB가 들어 있었다.
대용건설은 오용파의 보스인 최오용의 가장 큰 사업 중 하나였다. 오용파를 일거에 해치울 기회를 놓칠 리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자료를 보아하니 급히 준비한 목록이 아니었다.
문득 서민구는 연수원 시절 류신로가 제출한 리포트가 떠올랐다.
헐, 이 개새끼-. 욕이 절로 나왔다.
류신로가 제출해 연수원 과장에게 두루 칭찬받았던 리포트의 제목은 기업형 조직의 비리 현황이었다. 그때는 앞서 고발된 사례의 연구였지만, 서민구는 확신했다. 류신로는 그때부터 이미 대용건설의 비리 자료를 모았을 터다. 앞으로 활용하려고 천연덕스럽게 연구한 것이 틀림없었다.
빌어먹게도 류신로가 넘긴 이 자료가 오용파라는 폭력 조직을 뿌리 뽑을 자료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게 더 화가 났다. 놈에게 이용당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나 탐나는 무기라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류신로 너는 정말 개새끼다. 씨발, 고마워 뒈지겠네.”
이를 뿌득뿌득 갈며 서민구는 압수 수색 영장을 들고 대용건설로 기세 좋게 쳐들어갔다.
∞ ∞ ∞
검찰에서 대용건설의 비리를 조사하자 최오용은 소환에 불응하고 그대로 잠적했다.
밤사이 속보로 나온 기사를 확인한 신로는 들고 있던 태블릿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흑사회에 도움을 청할 줄 알았는데 그쪽에도 전혀 연락이 없다고 했다. 드디어 함정에 빠져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흑사회에 분실한 약값을 메우고자 회사 공금을 무리하게 끌어 쓴 것도 사실이고, 대용건설의 채권을 발행해 대호파에서 100억을 대출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용건설의 비리 수사로 채권은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대호파에서는 당연히 원금을 회수하고자 움직였다. 실력이라곤 모두 녹슬어 쓰레기로 전락한 줄 알았더니, 도주 실력만은 썩지 않았나 보다.
검찰이야 그렇다 치고 원금을 회수하려는 대호파도 최오용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어차피 오래 숨을 수는 없겠지만, 길게 끌 이유가 없으니 끌어내야 할 텐데.
“……응.”
옆구리에 뭉쳐져 있던 이불 뭉치가 꼬물꼬물 꿈틀거렸다. 애벌레처럼 뭉쳐진 사이로 머리카락이 삐져나오고 이어 볼이 발간 차온하가 얼굴을 내놓았다.
“일어났어?”
끄덕끄덕. 말없이 고개만 까닥인 차온하가 바들바들 떠는 모양으로 기지개를 켜고 몸을 일으켰다.
휘몰아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차분하게 가라앉힌 차온하가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이 일어나도 아무런 의구심도 없는 말간 얼굴을 쓸어 주고 신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어.”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고분고분하게 욕실로 향하는 온하를 보며 신로는 눈가를 설핏 일그러뜨렸다.
약점……. 최오용은 신로가 애틋하게 아끼는 듯이 보였을 차온하를 이용하려고 움직일 확률이 높았다.
다만, 최오용이 같은 수를 두 번이나 쓸 만큼 어리석은가, 라는 문제가 있었다.
류신로와 류동하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최오용은 바보가 아니니 당연히 허술한 유인이 통한다고 여기진 않을 터다. 그렇다고 해도 궁지에 몰린 최오용이 국외로 도주하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방법은 많지 않다.
최오용이 무리하게 움직이게 두느니 차라리 손쉽게 내주는 편이 덜 번거로울지도 모른다.
내어 줄까……. 상황을 꾸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노크도 없이 욕실 문을 열자 세수를 막 끝내고 고개를 든 온하가 물을 똑똑 흘리며 거울로 신로를 마주 봤다. 손으로 물이 모이는 매끄러운 턱 끝을 훔치고 뽀송뽀송한 수건에 얼굴을 묻는다.
“……왜요?”
신로의 시선이 계속 닿아 있자 온하는 수건 밖으로 반쯤 얼굴을 내놓고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단단해졌어?”
보고를 들어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묻자, 온하는 남몰래 한숨을 쉰다. 새초롬히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했다.
차온하는 아직도 스피드 8에 다다르지 못했다. 스피드 5로 삼십 분만 걸어도 온몸이 땀투성이가 된다고 했다. 예상한 대로 심각한 저체중에, 근육도 표준 이하. 차온하는 전혀 단단하지 않았다.
“아직 8은…… 하지 못해요.”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온하가 웅얼거렸다. 볼이 은은하게 붉어졌다. 동그란 눈을 제법 모나게 뜨고 원망스레 흘겨본다. 조금 낮춰 주면 안 되냐고 조르는 눈을 보며 신로는 피식 웃었다.
“약해, 넌.”
“단단한데…….”
차온하라는 덫은 역시 너무도 허약했다.
제대로 걷기나 하나, 슬쩍 당겨도 휘청휘청 넘어지고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콧물이나 훌쩍거리는 덜떨어진 차온하.
그나마 최오용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분산시킨 것으로 충분히 제 몫을 했다고 봐야 했다.
뭐가 이렇게 약한 거지.
세수하느라 젖은 머리를 잡아당겨 풀 죽은 차온하의 코를 물었다. 뚱한 눈동자와 마주쳤지만 밀어내지 않는 아이의 도톰한 입술에도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평생 봉투나 접어.”
그렁그렁한 까만 눈동자가 홉떠져 충격이 어린다. 신로는 나른하게 입술을 휘었다.
“그래도 되니까.”
안 돼요, 하고 웅얼거리는 차온하의 입술을 가로막으며 신로는 입속으로 웃었다.
안 되긴. 괜찮아. 내가 그래도 된다 하잖아.
속으로만 삼킨 말을 알지 못하면서도 차온하의 가는 팔이 목으로 휘감겼다. 매달려 오는 차온하는 여전히 입맞춤할 때 숨 쉴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어설프기만 해 허리를 안은 팔을 꽉 조여 주었다.
아-…. 한숨 같은 탄성이 귓바퀴에 달콤하게 감겼다.
“대호파가 움직이고 있답니다.”
“이문, 아니면 광명?”
보고하기도 전에 지역을 짚어 내는 신로의 말에 박덕수는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둘, 다 집중해서 뒤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바보들은 아니었군.”
신로의 시선이 무심하게 결재 문서로 되돌아갔다.
두 지역 모두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었고 거주 중인 주민이나 상인들이 소수 남아 있는 곳이었다. 박덕수는 지역을 듣고서야 놈들이 숨을 건물이 많겠다고 짐작했는데, 신로는 당연히 알고 있다는 투였다.
“이미……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응.”
알려 줬으면 대호파든 검찰 쪽이든 정보를 흘려 더 빨리 놈을 옥죌 수 있었을 텐데. 류신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오용파는 작은 조직이 아니었다. 최오용 하나만 어떻게 해 본들 세력이 조금 약해질지라도 이름을 바꿔서 유지되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조직을 유지하는 금전적인 근원에 제대로 타격을 받았다. 그 큰 조직이 하루아침에 와해되기 직전이었다. 유지하기는커녕 숨느라 급급했다.
류동하의 원수를 갚기를 원했지만, 모든 원망은 보스인 최오용에게 쏠려 있었다. 이렇게 조직 전체를 완전히 망가트릴 줄 예상하지 못한 박덕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남자가 조금 소름 끼쳤다.
단순한 이분법이 유치한 건 알지만, 류신로가 백류파 보스여서 다행이었다. 절로 솟는 안도감에 묵직한 숨을 내뱉을 때 인이어를 통해 보고가 들어왔다.
―김인희 여사님의 비서가 왔습니다, 형님.
전화도 없이? 의아한 탓에 박덕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보고했다.
“김인희 여사님의 비서가 도착했답니다, 사장님.”
서류에서 눈을 뗀 신로의 미간에 그늘이 졌다 이내 사라졌다. 김인희의 비서는 전화도 없이 방문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비서는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틈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댄 채 비서를 지그시 바라보던 신로는 더 묻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묵직한 몸이 세워지는데도 의자는 흔들림 없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신로가 일어서자 박덕수는 재킷을 꺼내 재빨리 걸쳐 주었다.
“……차온하도 데리고 가야 합니다.”
앞장서라는 듯 바라보던 신로의 눈동자가 낮게 일렁이며 가라앉았다.
“김, 여사님이 온하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까?”
“네.”
“댁으로 말입니까?”
“아닙니다. 장소는 지금 말씀해 드릴 수 없고, 제가 모시고 갈 겁니다.”
무표정하게 선 비서는 서늘하게 닿는 신로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깔았다. 고개 숙인 비서는 침착함을 가장했지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사방을 얼릴 기운의 눈동자가 곁에 선 박덕수에게로 향했다.
전부 대기시켜.
소리 없는 명령에 박덕수는 꾸벅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비서는 류신로가 점점 가까이 오자 눈을 질끈 감았다.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수 없다.
“가시죠.”
류신로는 비서의 기색을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다. 숨 막히는 존재감에 억눌린 비서는 그가 지나가고도 얼마간은 움직이지 못했다. 비서는 가빠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턱을 조이며 신로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에서도 비서는 계속 온몸이 조이는 압박감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혹시 류신로가 이상하게 여길까 봐 눈도 돌리지 못하고 땀도 닦지 못했다.
주차장에 다다라 비서는 얼른 운전석 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노대식에게 가로막혔다.
“아따-, 비서님은 옆에서 지시만 해 주시면 됩니다. 조수석으로 가시죠? 운전은 지가 헐 테니께.”
“아니, 제가-.”
“이라 봬도 지가 운전은 좀 잘허니께 맡겨 보랑게요. 나가 불안하면 저으기 덕수 형님네 차 타도 되고?”
“역시 운전은 제가,”
“김 비서님-. 손을 그렇게 후덜거리는데 운전이 돼요? 엄한 디 가서 처박기라도 하믄 큰일나? 조수석으로 가시죠? 아님, 뒤차로 가든가?”
히죽히죽 웃는 노대식의 말이 반쯤은 협박조였다. 절대로 운전대를 넘기지 않으려는 기색이었다. 비서는 설득을 포기하고 조수석으로 걸어갔다.
뒤차에서 대기 중인 박덕수를 돌아본 비서는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류신로를 스쳐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온하도 슬쩍 살폈다. 비서의 자식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비서는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오용에게 하나뿐인 자식이 인질로 잡혀 있는데 무슨 짓인들 못 할까.
더욱이 비서는 도청 장치를 달고 있었다. 류신로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아니, 도움을 요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최오용이나 류신로나 똑같이 쓰레기 같은 조폭들이었다.
김인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찰에 신고하라는 무심한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최오용은 류신로와 차온하를 밖으로 유인해 교통사고로 가장만 하면 아이를 무사히 풀어 준다고 했다.
경고의 의미로 최오용은 아이의 피 묻은 교복 셔츠를 보냈다. 머릿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일이 잘못되면? 이미 잘못되었다. 제 아이를 도울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니 멈출 수 없었다.
직접 운전하지 못한다면 조수석에라도 타야 했다. 그래야 핸들이라도-….
“어느 쪽으로 갈까요?”
타이밍을 재며 핸들만 노려보던 비서는 화들짝 놀란 탓에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다리 위, 다리 위면 될까? 속도가 좀 더 높아야 하지 않나? 어디로 가면 되지?
“일단, 양평 쪽으로.”
“양평, 좋지요-.”
사나운 얼굴이 도무지 웃는 듯 보이지 않는 노대식이 이를 드러냈다. 그는 백미러로 뒷좌석을 살폈다.
다행인지, 차온하는 차 안에 흐르는 날카로운 긴장을 읽지 못했다. 무구한 눈으로 창밖 풍경을 한가롭게 보고 있었다.
“왜?”
온하의 몸이 슬쩍 창가로 바싹 당겨지자 신로는 바로 물었다. 온하의 시선 끝을 따라 사거리 건너편을 확인하는 눈매가 날카롭다.
“아니에요.”
“왜.”
노대식도 온하의 시선을 좇아 건널목 쪽을 바라봤지만, 수상한 점은 없었다. 그저 한 무리의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신호등 앞에서 서로 밀치며 아슬아슬하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아-, 온하야, 저거 너희 학교 교복 아니냐?”
아이들의 교복이 눈에 익었다. 노대식은 온하의 행적을 조사하느라 학교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
정말이냐고 묻는 신로의 눈을 말끄러미 보던 온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이고, 쟈들은 여기서 뭣 하는 겨, 학생이 학교에 안 있고.”
뒷좌석의 온하도 학생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한 노대식이 쯧쯧 혀를 찼다.
“학교 가고 싶어?”
신로의 물음에 온하는 고개를 저었다.
“돈 벌어야죠.”
“가고 싶으면 보내 줄까?”
“별로요. 배울 것도 없고-…. 돈 벌고 싶어요.”
핸들을 노리고 있던 비서는 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다 같이 죽을 생각으로 독하게 마음먹었지만 온하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무너졌다. 학교니, 교복이니 단어 하나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어흐흑-. 참지 못한 비서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오열을 삼키자 때맞춰 노대식이 라디오를 틀더니 흘러나오는 트로트를 따라 흥얼거렸다.
어깨를 떨며 갑자기 통곡하는 남자를 당황한 눈으로 보던 온하는 신로의 눈치를 살폈다.
저 사람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하고 눈으로 묻는데 신로는 그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는 울고, 노대식은 점점 더 크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당황한 온하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흔들거렸다. 신로는 그저 열이 솟는 온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김 비서님-, 양평으로 갈까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노래를 흥얼거리던 노대식이 한 번 더 묻자 비서는 이를 꽉 물었다. 어깨를 떨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 비서님-?”
“가야, 가야만-…!”
“예, 그려요. 양평이요?”
좌회전 점멸등을 켜며 사거리의 좌측 차선으로 이동한 노대식이 신호에 맞춰 막 핸들을 꺾으려 할 때였다.
끼이익-! 돌연 급발진으로 튀어나온 택시가 앞을 가로막았다.
“이런-, 씹…! 운전을 뭐 이따위로, 어라, 저 새끼가…?”
택시의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널목을 따라 허둥지둥 도망쳤다. 앞은 택시로 가로막히고 뒤는 줄줄이 따라 선 차들 탓에 후진도 못 한다. 가도 오도 못하고 노대식은 기가 막힌 눈으로 사라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택시를 치우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다. 노대식은 혀를 차며 몸을 똑바로 했다. 그 순간 헉, 숨을 들이쉬었다.
정면에서 커다란 화물 트럭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택시와 함께 다 같이 밀어 버리려는 기세였다. 돌진하는 대형 트럭에 욕을 짓씹으며 노대식은 황급히 안전띠를 풀었다.
“사장님!”
노대식이 뒤를 돌아보자 신로는 이미 안전띠를 푼 뒤였다. 그는 넋을 놓은 채 멍하니 앞만 쳐다보는 온하의 안전띠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비서는 허둥거리다 안전띠를 미처 풀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비서를 구할 시간은 없었다. 노대식이 차 문을 열고 몸을 던진 순간 트럭이 덮쳐 왔다.
“온하야! 사장님!”
혼자 피했으면 충분히 피했을 신로가 온하의 몸을 와락 감쌀 때, 사거리에 굉음이 터져 나왔다.
쿠아아앙!
브레이크 따위 밟지 않은 대형 트럭이 충돌했다.
택시는 휴지처럼 구겨지고 온하와 신로가 탄 차가 일그러졌다. 뒤로도 트럭의 힘에 밀린 차들이 이리저리 밀려 나갔다. 뒤로 줄줄이 서 있던 백류파의 차량까지 서로 충돌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황급히 신로의 차 앞으로 돌아온 노대식이 구겨진 문틈으로 온하와 신로를 불렀다.
“사장님! 온하야!”
차 밑으로 흘러나오는 피가 누구의 피인지 알 길이 없었다.
“저 새끼 잡아!”
사납게 소리친 김지원이 트럭에서 내려 잽싸게 인파로 파고들어 도망치는 놈을 가리켰다.
“사장님은!”
문짝을 뜯어내려고 힘을 쓰다 손톱이 다 뜯긴 노대식과 함께 박덕수는 안을 살피며 신로를 불렀다.
“사장님! 사장님!”
“온하야-!”
차들은 모두 멈춰 서 버렸다. 끔찍한 사고 현장에 넋을 뺀 것이다. 인도에 선 사람들은 핸드폰을 들고 벌떼처럼 몰려 저마다 웅성댔다. 마치 전쟁 같은 상황에 어디선가 여러 대의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울렸다.
부아아앙! 부아아아앙! 부아아아아앙!
교차로 네 군데에서 오토바이들이 굉음을 일으키며 몰려왔다. 검은 헬멧을 써 머리를 보호한 놈들이 저마다 쇠 파이프나 금속 야구 배트를 들고 있다.
백류파는 신로의 차를 보호하려 사방을 감쌌다.
“뭐야, 이 새끼들! 죽여, 씨발!”
앞바퀴를 들고 거리를 메운 차량 사이로 난입한 오토바이들이 원을 그리며 백류파를 뿔뿔이 흩어 냈다. 위협하며 무기를 휘둘렀다. 불시에 당한 공격에 침착함을 잃은 백류파도 품에서 무기를 꺼냈다.
사거리는 순식간에 폭력 조직 간의 개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 ∞ ∞
지잉-, 지잉-. 울리던 귓가의 소음이 줄어들고 서서히 청각이 되돌아왔다. 엄청난 충격에 경직되어 있던 몸에도 감각이 돌아왔다. 겨우 숨을 터트린 온하는 헐떡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몸이 뭔가에 꽉 눌려 옴짝달싹하기 힘들고 사방은 어두웠다.
온하는 기억을 천천히 되살렸다. 사고가 났었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던 트럭을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먼 곳에서 노대식이 부르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는 나직한 호흡 소리가 들렸다. 온하를 폭 감싼 사람은 신로다.
“가만히, 있어.”
얼굴 위로 뜨거운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주유소의 석유 냄새 같은 비릿한 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괜찮아……?”
몸의 모든 감각이 둔했지만, 특별히 고통이 느껴지는 곳은 없어 온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거 같아요. 류신로 씨는요?”
“괜찮아.”
믿음직한 낮은 목소리에 온하는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다.
밖은 여전히 소란했다.
위이이잉! 윙! 위이이잉!
점점 나아지던 청각이 쇳덩이를 잘라 내는 요란한 기계 소리에 도로 멍해지고 있었다.
“시끄러워-….”
나직이 웅얼거리는 신로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지친 것처럼 느껴져 온하는 잡은 옷을 꼭 쥐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누굴 달래-려는 거야, 약해, 빠진 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도 온하는 땀이 밴 손을 꼬물거리며 신로를 격려했다. 신로는 숨이 찬 듯 느릿하니 호흡을 가다듬었다. 온하는 어쩐지 그가 걱정되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정말이지요?”
“그래.”
쩌어억. 뒤에서 뭔가 벌어지는 소리와 함께 빛이 새어 들어왔다.
“제 말 들립니까? 곧 꺼내 드릴 겁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네…….”
온하는 눈이 부신 탓에 눈을 찡긋거리며 고개를 젖혔다. 뒤집힌 시야에 하염없이 온하의 이름을 부르는 노대식이 보였다.
피로 흠뻑 젖어 엉망진창인 노대식이 경찰들에게 끌려가며 발광하고 있었다.
“온하야! 아따, 이것 좀 놔 보라니까! 아-가, 보잖어! 괜찮어? 괜찮어, 온하야?!”
네. 하고 대답해도 노대식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사이 시야에서 벗어난 채 목소리만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대식 님이 잡혀갔어요.”
고개를 돌린 온하에게 여전히 신로는 보이지 않았다. 신로가 보호하듯 몸을 푹 덮은 탓에 온하의 눈에는 찌그러진 차 천장만 보였다.
“멍청이-….”
귓가로 신로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온하는 웃었다. 천장이 뜯겨 나가고 몸을 누르던 시트가 치워지고 나서야 신로는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감싸인 채 눌려 누워 있던 온하는 드디어 제대로 시야에 들어찬 모습에 온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대로 계세요!”
신로는 부축하려 다가오는 주홍색 옷의 구급대원을 아랑곳하지 않고 뒤를 돌았다. 그는 차분하게 온하의 몸을 살폈다. 온하는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똑바로 일어나 봐. 정말 괜찮은지 보여 줘.”
신로의 말에 온하는 발딱 몸을 일으켰다. 근육이 긴장으로 말을 안 듣긴 했지만, 역시 아픈 곳은 없었다.
“류-, 신로-….”
온하는 손이 덜덜 떨렸다. 움직이지 않으려는 다리를 억지로 떼어 그에게 다가갔다. 신로의 허리를 끌어안자 그가 머리를 가만히 쓸어 주었다.
“괜찮아.”
아니었다.
한쪽 팔이 이상하게 뒤틀려 있었고 옆구리와 머리가 피범벅이었다. 숨소리도 이상했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괜찮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울지 마. 괜찮아.”
그나마 멀쩡한 팔로 온하를 감싸 안은 신로가 시선을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박덕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덕수가 다가오자 신로는 온하를 그쪽으로 툭 밀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말하다가 말고 입을 다문 신로가 인상을 살며시 찌푸렸다.
“차온하, ……눈 감아.”
창백한 신로의 입술 새로 핏물이 비쳤다.
심장이 터질 듯 두방망이질해도 온하는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을 꽉 사리물고 눈을 감았다. 눈두덩 위에 박덕수의 손이 덮여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조금도 뜨지 않았다.
구급대원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로 신로가 결국 쓰러졌음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서럽게 얼굴을 흠뻑 적셨을망정 온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온하가 눈을 감자마자 왈칵 피를 토해 낸 신로는 골절된 갈비뼈에 폐가 뚫린 상태였다. 그는 쓰러지기 전까지 멀쩡한 사람처럼 서 있었다. 큰 부상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신로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온하는 중환자실에서 나온 신로의 곁을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신로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웅크린 모습이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애처로워 박덕수는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완벽하게 감쌌는지 온하는 약간의 타박상 외에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교차로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박덕수도 정신없이 바빴다.
류신로가 의식이 없어 부재중이니 누군가는 대신해야 했다. 덕분에 검찰의 취조 받으랴, 호텔과 카지노를 비롯한 기타 등등을 관리하랴, 아직도 미꾸라지처럼 도망 중인 최오용을 찾느라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게다가 교차로에서 벌인 패싸움 탓에 꽤 많은 백류파가 구치소에 묶여 있었다.
노대식도 그중 하나였다.
변호사를 보내 최대한 빨리 빼내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어려울 성싶었다. 현장에는 수많은 일반인이 있었다. 그들이 촬영한 영상이 일파만파 인터넷에 퍼져 나갔고, 노대식도 찍혔다.
나름대로는 정당방위였으나……. 정당방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노대식은 맨주먹으로 상대의 헬멧이 부서질 정도로 후려쳐 뼈를 부러트렸다.
노대식의 눈은 당연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기름이 쏟아지는 류신로의 차에 불붙은 지포 라이터를 던지려고만 안 했어도 노대식이 그렇게 흥분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쨌든 일찍 빼내 주기는 글렀다.
“온하야, 너도 좀 쉬어야 할 텐데. 사장님은 곧 일어나실 테니.”
분명히 들었으면서도 온하는 어깨를 옹송그리며 신로의 옆구리에 얼굴을 감추었다.
온하는 내내 울었다. 흐느낌이 계속되다가 겨우 멈추면 잠든 것이었다. 좀 편히 자라고 눕혀 주려고 건드리면 바로 깼다. 그리고 또 울고, 울고 울었다. 당연히 식사는 거르기 일쑤고 약간 살이 올랐던 얼굴이 급속도로 수척해졌다.
“……자꾸 밥 안 먹으면 사장님이 일어나셨을 때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밥은 먹자.”
노대식이 여기 있었어야 했는데. 퉁명스러워 항상 본심을 오해받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 온하를 가장 살갑게 챙길 사람은 노대식이었다. 박덕수는 대외적인 일 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김지원은 최오용을 쫓는 중이다.
하여튼 살살 좀 패지, 그걸 눈이 돌아서 대가리를 뽀개 놔, 썩을 노빠따 새끼. 쓸모없는 놈!
인원도 많이 빠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팔자 좋게 경찰서에 묶여 있는 노대식이 박덕수는 대단히 불만이다. 물론 몸이 묶인 노대식도 몹시 발광하고 있지만 말이다.
“온하야. 사장님은 네가 무사하길 바라고 감싸신 거야. 네가 그렇게 몸이 축나도록 버티면 안 되지.”
모진 말을 담고 마음이 퍽 좋지 않았다. 박덕수는 차라리 몸으로 하는 대화가 편했다. 화나면 패고, 배신하면 죽인다. 퍽 간단하지 않은가. 협박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사실 이게 협박 축에나 끼나……, 사소한 의문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어설픈 공갈이 통했는지 온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흰 토끼처럼 빨갰다. 흰자위에 실핏줄이 도드라져 충혈되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눈 주변만 온통 붉었다. 게다가 눈물로 세수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젖어 있었다.
박덕수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긁었다. 화장실에서 찬물에 적신 수건을 꼭 짜 무뚝뚝하게 온하에게 내밀었다.
“얼굴 좀 닦고, 밥도 좀 먹고.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는 온하를 보며 박덕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부어도 큰 눈에서 둥글둥글한 눈물이 끝도 없이 뚝뚝 떨어지니 무디기만 한 박덕수도 가슴 속이 찌릿찌릿했다.
“요기할 만한 거 가지고 오라고 할 테니까 거기 사과라도 깎아 먹어. 사과는 깎을 수 있어?”
끄덕끄덕. 상황이 이래도 낯가리는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온하에게 미안한 탓에 기분을 달래 주고 싶었지만,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냥 병실을 나섰다.
억지로 협박까지 해 온하의 배를 채운 박덕수는 결과적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체질에 맞지 않는 짓으로 본인 속도 더부룩할뿐더러 온하는 저녁 내내 토했다.
볼일도 못 보고 온하의 등을 두들겨 주고 약을 처방받아 먹이고 안절부절못하며 속을 졸였더니 온몸에서 진이 빠졌다.
지쳐서 잠든 온하를 보며 박덕수는 보모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 ∞ ∞
새우처럼 몸을 말고 설핏 잠들었던 온하는 새벽녘에 잠이 깨었다.
고요하기만 한 병실 안에 마스크를 쓴 의사가 우두커니 서서 신로를 보고 있었다.
쯧-. 하고 혀를 차며 온하가 누운 쪽을 힐끔 살핀다. 온하는 저도 모르게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의사들이 입는 하얀 가운을 입었으니 분명히 의사일 텐데. 온하는 이상하게 그를 병원이 아닌 곳에서 본 것 같았다.
의사는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내 신로의 손등에 연결된 링거 줄에 액체를 주입했다.
웃는 듯 입술 위를 덮은 마스크가 펄럭거렸다. 하얀 흰자위가 무섭게 번들거렸다.
안 돼. 이상해.
불길한 예감에 온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눈을 크게 홉뜨고 이쪽을 보는 의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태어나 지금처럼 빨리 움직인 적은 없었다. 온하는 혼신을 다해 링거 줄을 잡으러 달려들었다.
빡-!
눈앞에서 불이 번쩍였다.
뭐에 후려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온하는 무력하게 침대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링거 거치대가 쓰러지며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바닥에 구른 채로도 온하는 신로의 손등에 연결되었던 링거 줄을 꽉 잡고 있었다. 대롱거리는 바늘을 보니 제대로 뽑힌 모양이다. 온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씨발!”
온하는 위협적으로 달려오는 의사를 피하려 팔다리를 바르작댔지만 아무 소용없이 순식간에 따라잡혔다. 그에게 거세게 걷어차인 몸이 하릴없이 벽에 처박혔다.
쾅쾅쾅!
병실 문이 잠긴 모양이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란이 일었다.
“씨발! 씨발!”
의사가 연달아 욕설을 내뱉으며 초조하게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가 바닥에 쓰러진 링거 거치대를 두 손으로 잡았다. 류신로의 머리통으로 내리찍으려던 시도는 어느새 달려와 온몸으로 부딪친 온하 탓에 실패했다. 균형을 잃고 머리 대신 바로 옆 베개만 찍었다.
온하는 그가 다시 링거 거치대를 들어 올리기 전에 그의 팔뚝을 물었다.
“으아아악! 이 개새끼가!”
머리채가 잡혀 당겨졌다. 머리 거죽이 뜯겨 나갈 고통에도 온하는 물고 있는 팔뚝을 놓지 않았다. 남자가 들고 있던 걸 놓칠 때까지 악바리처럼 매달렸다. 휘청휘청 흔들리면서도 온하는 죽을힘을 다해 이를 악물었다.
결국 남자가 거치대를 놓쳤다. 욕설을 퍼부으며 온하를 털어 내려 옆구리에 발길질한다.
찌이익-. 기어코 팔뚝의 옷감이 뜯어지고서야 온하가 벽에 처박혔다.
“별, 씨발, 이게 무슨 좆같은 경우야? 하여튼 혜리 쌍년이나 자식새끼나 하나같이 날 엿 먹여, 아주?”
다가온 남자가 온하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고개를 젖혔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의사의 얼굴이 낯익다.
아, 역시 이 사람을 본 적 있었다.
낯선 이름의 누군가를 아느냐고 물으며 류신로에게 화내던 사람.
퉤, 온하는 입 안에 있던 천과 살점을 뱉어 냈다. 남자의 면상이 짐승보다 사납게 구겨졌다.
퍽-! 퍽-! 남자가 온하의 머리를 잡아 벽에 연신 찧어 댔다. 온하가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힘없이 늘어지자 바닥에 패대기치고 돌아섰다.
혼곤한 시야에 돌아서는 남자의 다리가 보였다. 온하는 눈앞이 깜박깜박 점멸했지만, 어지러운 머릿속에는 온통 그가 류신로를 다시 공격하지 못하게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안 놔?! 안 놔! 이 병신 같은 게!”
퍽! 온하는 머리채를 잡힌 채 등허리를 걷어차였다. 숨 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온하는 악착같이 남자의 다리에 매달려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온몸으로 엄청난 타격이 쏟아졌다.
“우욱.”
악문 잇새로 신물이 삐져나와도 온하는 사력을 다했다. 뿌리쳐져 벽 끝까지 굴렀다가도 어떻게든 버둥대며 되돌아와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쾅쾅쾅! 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온하야! 사장님! 부숴! 당장 부수라고!”
문밖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안도하면서도 온하는 더욱더 남자의 다리를 칭칭 휘감았다.
언젠가 류신로가 알려 줬던 급소는 가지도 못했다. 온하가 잡을 수 있는 것은 다리뿐이었지만, 필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무섭지 않아.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이 독한 년!”
와장창! 굴러다니던 음료수병이 머리 위에서 산산이 깨졌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병으로 머리를 얻어맞자 소란스러웠던 사방이 고요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징-, 귀울음만이 울리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쾅쾅쾅-!
문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벌어진 새로 들어온 연장들이 우지직우지직 지렛대가 되어 문을 벌렸다.
끝내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온하를 떨치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자 초조해진 최오용은 욕을 짓씹었다.
“이, 씹.”
결국 악착같이 다리에 붙어 있는 차온하를 일으켰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차온하의 팔을 뒤틀어 억지로 세웠다.
병의 주둥이 부분을 손으로 움켜잡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끝을 온하의 목 밑에 들이댔다. 목덜미에 끝이 닿는 순간 더는 방어막이 되지 못한 문짝이 요란하게 부서졌다.
“최오용!”
“어이-, 오랜만?”
최오용이 입매를 일그러뜨리고 온하를 방패처럼 앞세웠다. 가느다란 목에 유리병을 바싹 들이대자 달려들던 박덕수가 우뚝 멈췄다.
“네가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 같아? 이 개새끼야!”
“비켜-, 애새끼 멱 하나 따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 씨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온하는 온몸이 만신창이었다. 환자복이 몸에 찰싹 붙을 정도로 땀으로 젖어 있었다.
코피로 얼굴도 엉망이었다. 무엇보다 뇌진탕이 의심스러운 흐릿한 눈빛이 마음에 걸려 박덕수는 속이 바싹바싹 탔다.
“온하는 건드리지 마, 미친 새끼야!”
“그러니까, 비켜 이 새끼들아. 온하, 온하, 좆나 이 애새끼가 뭔데? 확-.”
유리의 끝이 스쳐 기어코 상처가 생겼다. 온하의 하얀 목덜미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자 박덕수는 황급히 부하들을 뒤로 물렸다.
“물러날 테니까, 애 목에서 그것 좀 떼어 내. 온하 다치면 너도 여기 탈출 못 해. 보내 줄게, 보내 줄 테니까.”
“크크크큭. 이제 말이 좀 통하네, 씨발 놈들아. 이제 박덕수가 오야붕이냐? 류신로 뒈졌는데.”
최오용은 낄낄 웃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허옇게 질려서 긴장한 면상들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니야…….”
들릴 듯 말 듯 어렴풋한 목소리가 스쳤다. 앞으로 나아가다 미약하게 저항하는 힘에 멈칫한 최오용이 품에 안긴 온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하…….”
나직하게 숨을 내쉰 차온하가 온몸으로 버티고 섰다. 흐릿하던 눈에 독기가 차 벌겋게 타올랐다. 밀려나지 않으려는 창백한 발끝에 힘이 몰렸다.
뒤틀린 어깨가 빠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가지 않는다.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 내가 있을 곳은 류신로의 곁이다. 그가 없으면, 다시 어둠이다.
묵직한 공기, 적막한 공간, 멈춘 시간.
아무것도 아닌 차온하.
“안 가-.”
“뭐야?!”
일어나, 류신로.
“류신로 안 죽었어…!”
일어나-!
“안 죽었어! 안 죽었어!”
제발-! 일어나, 나에게 다시 속삭여 줘, 류신로.
너를,
“안 죽었어!”
차온하를, 오랫동안, 기억할 거라고.
나를-.
“류신로는 안-, 죽을- 거-야아아아!”
세상에 혼자 남겨 두지 않을 거라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온하의 몸부림에 깨진 유리병의 끝이 몇 번이나 목덜미를 스쳤다. 연약한 살은 그때마다 찢어졌다. 흥분해서인지 출혈이 많았다.
“씨발-, 미친년이 시끄럽게 지랄,”
행여라도 아이가 잘못되면 정말 도망칠 구석이 없다. 어떻게든 애를 고정하며 긴장을 놓지 않던 최오용이 별안간 몸을 굳혔다.
문을 막고 서 있던 박덕수의 시선이 최오용의 어깨 너머로 향한다. 아니, 숨을 멈춘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흐른다.
덮쳐 오는 살기에 뒤를 돌아보는 찰나 최오용의 눈앞에 은색 섬광이 스쳤다.
최오용의 관자놀이에 칼날이 파고들었다. 그것은 손잡이만 남을 때까지 망설임도 없이 냉혹하게 꽂혔다.
최오용의 팔이 푸르르 경련하자 온하의 목을 겨누던 날카로운 병 조각이 멋대로 춤을 추었다. 허공을 휘젓다 아슬아슬하게 온하의 이마를 스칠 뻔하자 감싸듯 앞으로 뻗어 나온 손이 제 손이 베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움켜잡아 먼 곳으로 치워 버렸다.
숨을 헐떡거리며 최오용을 돌아보려던 온하의 시야는 곧 막혔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을 보라는 듯 감싸는 손에 온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류신로의 검은 눈동자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온하의 흔들리는 동공, 눈물로 범벅이 된 발긋한 볼, 소리 없이 떨리는 입술을 담아냈다. 톡톡 볼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흐르는 코피를 닦아 주고 부은 입술을 매만졌다.
머리에 감겨 있던 붕대가 풀어져 흘러내린 류신로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내가, 또 늦었어?”
창백한 얼굴을 올려다보던 온하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신로의 목을 끌어안았다. 기울어지는 몸을 버티며 힘겹게 벽을 짚은 류신로는 왼팔에도 빼곡하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깨진 병을 잡았던 손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다.
“사, 사장님.”
신로의 몸이 걱정스러워 다가가던 박덕수는 서늘하게 노려보는 눈동자에 그대로 멈춰 섰다.
상처 입은 짐승의 눈이다. 다가가면 박덕수라고 해도 공격할 살기가 느껴졌다. 그가 허락한 사람은 품에 안은 온하뿐이다. 박덕수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밖은 소란스러웠다.
도착한 경찰들이 안으로 진입하려고 호통을 치고 백류파는 병실 앞을 막아선 채 버텼다. 서로의 아우성이 병원 복도가 꽉 매웠다.
“미안해.”
아프게 해서, 울게 해서, 혼자 무섭게 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안했다.
온하는 어느새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신로는 멀쩡한 다른 손으로 온하의 등을 끝도 없이 쓸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