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 자슥아! 처먹으라고! 말 안 듣냐! 죽을래?!”
노대식은 분통이 터졌다. 그가 길길이 날뛰어도 온하는 커다란 쿠션에 얼굴을 묻고 몸을 새우처럼 만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노대식은 꼼짝도 않는 차온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협박하다 종국에는 성질에 못 이겨 음식이 놓인 트레이를 엎어 버렸다.
“으어-! 씹! 썅! 주둥이에 억지로 처넣을 수도 없고, 진짜!”
바닥을 치우며 가사 도우미는 어깨를 움칠거렸다. 발광하며 소파를 걷어차고 발을 쾅쾅 구르는 노대식이 시비를 걸까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높은 시급에 만족하며 별생각 없이 일해 오던 그녀로서는 날벼락 같은 재앙이었다.
작고 마른 아이를 안쓰러워할 여유 따위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먹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고집부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원흉이라 두렵고 원망스러웠다.
노대식이 담배를 물고 베란다로 나가자 가사 도우미는 벌벌 떨면서 애원을 했다.
“저, 학생. 나 너무 무서워서 그러는데, 밥 좀 먹으면 안 돼? 혹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내가 다 해 줄 테니, 한 입만 먹으면 안 될까?”
애원이 통했는지 차온하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었다기보다 꿈틀거림에 가까웠지만, 가사 도우미는 그제야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그녀는 차마 더는 부탁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눈가는 시커멓게 죽었고 볼은 푹 파여 입술은 하얗게 갈라진 아이는 딱 보기에도 영양실조였다.
절로 솟는 측은지심에 가사 도우미는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는 차온하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할, 머니…….”
오십을 조금 넘어 아직 할머니라고 불릴 만한 나이는 아니었지만, 처연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응, 그래.”
“할머니……. 할머니…….”
가사 도우미가 달래듯 손을 잡아 주자, 아이는 그녀의 손등에 기대 슬피 울었다.
마침 베란다에서 노대식이 돌아왔다. 연달아 몇 개비나 피우고 왔는지 온몸에서 담배 냄새가 풍겼다.
“이, 씨펄. 울고 지랄이여. 죽은 할머니는 왜 찾아! 찾을 거면 밥 처먹고 찾아, 새끼야! 사내새끼가 처울고 그라는 거 아니여!”
반은 욕설이어도 노대식의 사나운 기운은 한결 푹 꺾여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고 버릇처럼 욕설을 중얼거리며 아예 현관 밖으로 나가 버렸다.
높은 시급이고 뭐고 도망치고 싶었던 가사 도우미도 마음이 약해졌다. 아이의 눈물이 손을 계속 따뜻하게 적신 탓이다. 간절하게 매달리는 손을 차마 매정하게 뿌리치기 어려웠다. 뼈가 툭툭 불거진 등을 연신 쓰다듬으며 다 울고 나면 제발 식사를 해 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바람이 통했는지 차온하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었다.
한식 요리사 자격증을 지니고 내로라하는 부잣집에서만 일해 온 그녀에게 차온하가 원한 메뉴는 김빠질 정도로 소박했다.
김, 분홍 소시지, 고추장, 흰밥.
먹고 싶은 음식을 거듭 묻고서야 겨우 답을 얻었다. 요리 솜씨를 발휘할 기회는 없었지만, 먹는다고 한 것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차온하가 원하는 음식을 전해 들은 노대식은 바람같이 달려가 구해 왔다. 이것저것 한껏 담은 봉지를 들고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욕을 퍼부으며 도로 나갔다. 간신히 진정한 듯하던 차온하가 또다시 고개를 쿠션에 파묻고 숨도 쉬지 않은 까닭이다.
“맛있어……?”
반쯤 먹었을 때 조심스럽게 묻자 고개를 끄덕이는 차온하의 눈에서 또 눈물이 흘렀다. 수건으로 닦아 주어도 소용없이 눈물을 반찬 삼아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는 모습에 가사 도우미는 괜한 한숨을 지었다.
기력이 다했는지 아이는 밥을 먹고서 기절하듯 잠들었다. 퇴근할 시간이 되어 아이가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소시지는 미리 구워서 반찬통에 따로 넣고 밥도 새로 지어 놓았다. 집을 무너뜨릴 기세로 펄펄 날뛰는 노대식 때문에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은 어느새 희미해졌다. 두고 가야 하는 마음이 편치 않아 그녀는 몇 번이고 잠든 아이를 돌아보았다.
끼리릭-.
현관이 자동으로 잠기고 어둠 속으로 스민 신로가 거실을 가로질렀다. 마치 사냥하는 고양잇과 동물처럼 고요한 움직임이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익숙해져 잠든 차온하의 얼굴이 제대로 보일 때까지 서서 지켜보다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숨을 확인했다.
죽지 않았다. 아직 죽게 둘 생각도 없었다.
아버지가 왜 이것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 있어야 했다. 샤워하고 돌아와서 죽은 듯이 자는 차온하의 호흡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옆에 누웠다.
후끈한 열이 느껴져 슬며시 눈을 뜬 신로는 옆구리에 얼굴을 처박고 자고 있는 차온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잠버릇인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양팔은 헐렁한 티셔츠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차온하는 아주 작았다.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도 작지 않나? 그 무렵 이미 지금과 비슷한 체구였던 류신로에 비하면 차온하는 마치 초등학생처럼도 보였다.
아버지 류동하도 기골이 장대했으니 차온하는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낯이 화려한 미인이었던 이혜리를 떠올리곤 미간을 찌푸렸다. 다람쥐도 아니고 동그랗게 몸을 만 차온하는 아무리 봐도 미인은 아니었다.
마르고 하찮다. 열성인자란 열성인자는 모조리 가지고 태어난 모양이다.
시간을 확인하니 잠든 지 채 삼십 분도 넘지 않았다.
선잠이 깨자 머리가 맑았다. 더 잠이 올 성싶지도 않아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노트북으로 매출 보고서를 열었다. 몸을 일으키며 생긴 공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온기를 찾아 파고드는 온하 때문에 없어졌지만, 밀어내지 않고 두었다. 헛짓거리를 반복하며 눈을 치켜뜨고 나불거리는 것보다 차라리 나았다.
“왜.”
빛에 반사된 신로의 눈동자는 여전히 노트북을 보고 있는데 어떻게 깼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모르겠다. 온하는 몸을 움찔거렸다.
“깼으면 일어나. 날 밝았어.”
옆구리에 바짝 붙은 몸을 어떻게 떼야 하나 고민하던 온하는 꾸물꾸물 몸을 물리고 미끄러지듯 침대 아래로 내려가 고개를 숙였다.
“……몰랐어요…….”
침대 아래로 내려서던 신로가 뒤를 돌아 무릎을 꿇은 채 벌 받는 듯 고개를 숙인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뭘?”
“침대……. 류, 신로 씨, 거인지 몰라서. 미, 안해요.”
“내 침대 아니야.”
그저 자리를 옮겨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뿐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온하의 곁을 스쳐 욕실로 향하자 시선이 따라붙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은 욕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떨어졌다.
가사 도우미가 준비한 식사는 신로의 몫뿐이었다.
“하나 더 있어.”
“예? 아.”
신로가 말을 건네는 일은 처음이었다. 놀란 가사 도우미는 그가 한 말을 되새기다 곧 깨달았다. 그녀는 펄떡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학생 것은 따로 준비했는데, 여기 차릴까요?”
류신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긍정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손을 빠르게 움직여 식탁 반대쪽에 상을 차렸다. 신로는 서늘한 얼굴로 내려놓는 찬을 하나하나 훑었다.
“하, 학생이 이걸 좋아한다기에.”
지그시 머물던 시선이 떨어지자 가사 도우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온하를 데리러 종종걸음으로 침실을 향했다. 머뭇거리면서도 부름에 천천히 밖으로 나오는 온하의 얼굴은 여전히 말라서 안쓰럽기만 했다.
순순히 나오던 온하는 식탁에 앉은 신로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가사 도우미가 눈짓으로 와서 앉으라고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앉아서 먹어.”
신로의 명령이 떨어지고서야 자리에 앉은 온하는 느릿하니 식사를 시작했다.
“좋아해?”
신로의 시선이 분홍 소시지에 닿아 있자 온하는 젓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고기, 니까.”
“그건 고기가 아니야. 밀가루와 여러 가지 부산물로 이루어진 합성 식품이지.”
차분하게 듣고만 있던 온하는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양이 되는 걸 먹어.”
끄덕끄덕. 차온하는 젓가락으로 바지런히 소시지를 집어 입으로 나른다. 그게 가장 영양가가 높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신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집요하게 온하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온하의 젓가락질이 점점 빨라졌다.
씹지도 않고 입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더니 기어코 사레가 들려 거세게 기침을 했다. 가사 도우미가 황급히 물잔을 내밀어도 차온하는 고개를 저으며 뱉지도 삼키지도 못했다.
신로의 눈은 점차 가늘어졌다.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식단.”
온하의 등을 쓸어 주던 가사 도우미가 신로의 눈치를 살폈다.
“제대로 짜서 먹여.”
“예, 예.”
먹어야 말이지요. 그만두고 싶다고 말을 꺼내기도 무서워 가사 도우미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온하.”
이름을 부르자 새빨개진 차온하가 겨우 시선을 들었다. 식은땀 배인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신로가 차분하게 선언했다.
“한 끼라도 거르면 담보를 불태울 거야.”
차온하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진다. 안구가 빛으로 번들거렸다. 신로는 한쪽 입술을 슬며시 당겼다.
제 몸 하나 버거워하는 주제에 더러운 상자를 퍽 아꼈다. 치기 어린 살기는 간지럽지도 않았다.
“일하러 가게 해 주세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싫다고 해도 시킬 거야.”
“할 수 있어요.”
“조금만 더 혹사하면 자살에 성공할 것 같나?”
“…….”
“멋대로 허락 없이 굴리지 마. 빚이 있는 한 네 몸뚱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한 건 너야. 나는 네게 받을 것이 있고, 만족할 때까지 받아 낼 거야. 그러니, 일할 시기도 내가 정해.”
입술을 슬며시 깨무는 차온하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죽은 이혜리와 딱히 닮은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분위기가 닮은 것도 같았다. 언뜻 보면 꼭 섹스의 절정을 겪고 난 후처럼 땀이 흐르는 얼굴이 선정적이었다. 곤두선 밥알이 목구멍을 찌른 탓에 사레들린 얼굴이 선정적이라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그게 언제인데요?”
“아무리 혹사시켜도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지면.”
“지금도 아픈 곳은 없어요. 일하러 간다잖아요.”
차온하는 삐쩍 마른 꼴로 꼬박꼬박 말대꾸했다. 신로의 지긋한 시선에도 전혀 기가 꺾이지 않았다.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차온하보다 곁에 선 가사 도우미가 더 안절부절못하고 숨죽였다.
박덕수조차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데 신기하게 차온하는 시선을 피한 적이 없었다.
꼬질꼬질한 넝마 인형 같은 게. 영양실조라는 의사의 진단이 없어도 상태를 알아챌 정도로 보잘것없는 주제에.
비루먹은 꼴이라 피부색 또한 고르지 않다. 볼은 푹 꺼지고 머리카락에 윤기라고는 하나도 없다. 뼈만 남은 몸으로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맞선다.
쥐뿔도 없어 천지 분간도 못 하는지.
“거짓말 마.”
“거짓말,”
“담보를 태우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차온하는 보물이 잘못될까 노심초사였다. 마음대로 해 보라고 툭 내뱉고 돌아서자 몇 걸음 걷기도 전에 가사 도우미의 비명과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느긋하게 돌아보니 넘어간 식탁 의자 앞에 차온하가 바닥을 짚고 엎어져 있다. 급하게 일어서다가 넘어진 모양이었다.
“일하러 간다고?”
이를 악물고 노려보는 차온하의 울분이 선명하게 닿았다. 가늘고 힘없는 다리로 일어서며 막 태어난 사슴처럼 휘청거렸다.
“걸음마 연습부터 해.”
∞ ∞ ∞
어디인지 알지 못하지만 깨어났을 때부터 낯선 곳이었다.
류신로가 당연하다는 듯 들어와 잠까지 잤으니, 그의 집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첫날은 저를 대식 ‘님’이라고 부르라 강요하는 사나운 남자가 끌어다 놓은 곳에서 멋모르고 잠들었다가 기겁했다.
누군가의 맨살에 이마를 처박은 일도, 그게 류신로라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는 자신의 침대가 아니라고 했지만, 또다시 그 침대에서 잠들고 싶지 않아 커다란 집을 방황했다. 결국 베란다로 나가는 문 쪽에 웅크려 잠들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깨어나니 침대 위다. 이번에도 거의 안기다시피 류신로의 옆구리로 파고든 채였다.
혹시 추워서 엉겁결에 방에 들어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나 잠시 고민도 했지만, 곧 그럴 리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류신로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온하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잠들고 눈을 떠 보면 반드시 그의 옆이었다. 왜? 라는 의문은 더는 갖지 않기로 했다. 왜 류신로가 잠든 저를 옮겨 놓는가에 대한 의문도 갖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아침 식사도 계속 함께했다. 달그락거리며 젓가락이 부딪치는 작은 소음이 넓은 식탁의 반대편에 사람이 있다고 알린다. 우습게도 온하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이 고요한 시간이 하루에서 가장 안심이 되었다.
“아따, 아줌마 오늘도 안녕하신가? 우리 아는 어딨어?”
“아, 예……. 거실에 있어요.”
류신로가 출근하면 노대식이 들어온다. 불편한 시간이다. 온하는 소파에서 웅크리고 고개를 두 팔로 꽉 끌어안은 무릎에 묻었다.
“으른이 오면 인사하는 거라고 안 배웠냐!”
노대식은 들어오면서부터 큰소리를 내었다. 온하가 대꾸도 하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아도 아랑곳없었다. 노대식 눈치를 보느라 청소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가사 도우미는 며칠 만에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청소기를 켜고 지나가면 슬쩍 자리를 비켜 주기도 하고 일에 전혀 방해되지 않는 탓이다.
노대식의 시선은 소파 위에 쿠션처럼 웅크린 온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안 심심하냐, 친구 없냐 묻다가 노대식은 살벌한 본인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목소리가 하도 커 가사 도우미는 궁금하지도 않은 조폭 생활을 강제로 들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온하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러니까 키가 안 크는 거라고 짜증도 냈다. 가사 도우미는 노대식도 노대식이지만 온하도 어지간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자는 게 아닌데, 어쩜 저렇게 꼼짝도 안 할까. 신기할 지경이다.
고집스러운 자세를 고수하다가 노대식이 슬쩍 일어나 나가면 곧 점심시간이다. 말은 거칠거칠해도 아이가 밥 먹을 시간에는 칼같이 일어나 자리를 비킨다.
“나는 쪼까 나갔다 올랑게? 찬찬히 식사하더라고? 온하 니는 쌀알 하나라도 냄기기만 혀 봐? 아주 그냥, 손모가지를.”
좋게 말해도 아이가 눈길 한번 줄까 말까 한 판국에 노대식은 안 해도 될 말을 꼭 덧붙였다. 가사 도우미는 남모르게 한숨 쉬며 온하의 밥을 차렸다.
식단에 신경 쓰라는 고용주의 주문에 가사 도우미는 중학생 남자애에게 필요한 고단백 반찬으로 준비했다.
“온하 학생, 점심 먹어야지.”
어느새 몸을 바르게 하고 기다리던 온하가 천천히 일어난다. 가사 도우미는 노대식이 목소리 크기를 반 정도만 줄여도 아이가 따르지 않을까 짐작했다.
온하는 울고불고한 첫날을 제외하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다. 차려 준 반찬도 남기는 법 없이 깨끗하게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먹고 나면 작은 목소리로 인사도 했다. 가사 도우미가 빈 식기를 치우면 머뭇머뭇하다가 소파로 돌아갔다.
식사를 챙겨 주는 가사 도우미는 점심이 지나면 돌아갔다.
넓은 집의 거실에서 온하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시간이 느리다. 대체 여기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여깄는지도 모르겠다.
류신로는 받을 빚이 있으니 쓸모를 정해 주겠다고 했다. 혹사시켜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지면 일을 시킨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할머니의 상자를 찾아야 하는데, 계속 쓸모없다고 하면 어떡하지…….
상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 온하는 말 못 하는 짐승처럼 울었다.
[피료하면 쓰거라 할머니가]
한 자 한 자 쓴 맞춤법도 다 틀린 편지. 종이가 누렇게 바랬다. 언제 써 놓은 것일까. 할머니는 손자를 두고 먼저 떠날 미래를 일찌감치 예견했을 것이다.
그 꼬깃꼬깃한 지폐 뭉치, 달그락거리는 동전들이 온하에게는 평생 간직할 기억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차온하도 사랑받았다는 증거다. 그러니, 숨이 다할 때까지 놓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열심히 하면 다 괜찮다고 할머니가 말했으니까. 열심히,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면 된다. 후회하지 않도록, 생각할 틈도 없이 돈을 벌어서.
“…….”
온하는 어둠에 잠긴 창밖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고요하고 적막했다. 숨만 쉬며 낮과 밤을 보내던 고독이 엄습했다. 쉬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한기가 사무치던 때처럼 춥고 소름이 돋는다.
어둠을 밀어내려 현관 근처로 가면 센서 등이 자동으로 들어왔다. 꺼지면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빛이 들어온다.
은은한 빛에 안도하면서도 온하는 슬며시 손으로 배를 매만졌다. 어쩐지 울렁거리고 속이 불편했다.
∞ ∞ ∞
며칠 전부터 온하는 배가 슬슬 아팠다. 배꼽 근처가 끊어지는 통증이 이어졌다. 화장실에 가도 나오는 건 없었다. 이틀쯤 지나자 먹기만 하면 설사를 했다. 물만 먹어도 장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온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체력이 엉망진창이긴 해도 오늘처럼 아찔한 적은 없었다. 눈앞이 노랗고 몸에서 열이 치솟는가 하면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식은땀으로 앞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가도 오도 못했다.
차온하는 화장실 앞에서 배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온하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소리 없이 나타난 신로가 늘어져 있는 온하를 들어 올리려다 우뚝 멈췄다.
온하의 얼굴이 창백하고 온통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저, 아…. 아…….”
신로의 팔을 잡은 온하가 말을 잇지 못하고 배를 감싸자 시선이 따라붙었다.
“아파?”
“……배,”
배가 아파요. 제대로 소리도 못 내고 헐떡거리자 볼에 손등이 닿았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피부에 차가운 손이 닿자 소름 끼치는 오한이 든다.
“아, 흐.”
내장이 꼬이는 듯한 고통에 신로를 밀어내며 몸을 웅크린 온하에게서 끊임없이 앓는 소리가 새었다.
“언제부터 이랬어?”
대답을 기다리는지 잠시 기다리던 신로가 온하를 그대로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힘겹게 뜬 눈으로 올려다봐도 역광으로 어둡게 그림자 진 그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누군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춥고 외로웠다.
갑작스레 찾아온 고통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해서 너무나 두려웠다.
이렇게 죽는 거 싫어, 너무 아파. 아파. 아파.
“……할머니…….”
살려 줘요……!
온하는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다.
침대 옆 의자에는 머리에 피가 배어 나온 붕대를 감은 대식 ‘님’이 코를 골며 졸고 있었다. 온하는 팔에 연결된 링거를 멍하니 보다가 문득 배가 아프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살려 준 건가?
멍한 머리로 짐작해 봤지만 눈꺼풀이 무거워 그만 눈을 감았다. 잠시 감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자 대식 ‘님’이 앉아 있던 자리에 류신로가 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신로는 말없이 바라만 봤다. 온하도 마찬가지였다. 눈꺼풀을 느리게 껌벅거리다 한참 만에 겨우 입술을 열었다.
“빚이, 또 늘었겠네요…….”
“얼마인지는 알아?”
희미하게 입술을 올린 온하의 눈이 멍하니 허공을 헤맸다.
“빚은, 꼭…….”
갚을게요. 병원비가 추가되면 빚은 또 눈덩이처럼 늘었을 테지. 빚을 갚으면 받는 영수증을 들여다봐도 이게 대체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는 숫자여서 꿈같이 멀었다.
그냥 계속 갚으면 된다. 그도 그러라고 했으니.
“나으면…….”
일해서 꼭 갚을게요.
할머니는 절대로 빚지지 말라고 했다. 누가 부탁한다 해도 보증 같은 것은 절대 서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입에 풀칠만 하고 살면 된다고 그렇게 말했다.
병원비가 없어서 병원에도 제대로 못 가 봤으면서도, 할머니는 그저 고장 날 때가 되어서, 라고 했다.
빚을 지면 갚으면 되는데. 열심히 살아서, 죽을 만큼 열심히 살아서 갚으면 되는데…….
눈물이 눈꼬리에 고였다가 흘러 귓가를 적셨다.
“왜 울어? 아직도 아픈 건가?”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죽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죽을 만큼 힘드니까 자연스럽게 고장 나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무섭지도 아프지도 않게,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고 안심했다.
다 거짓말이다.
고작 배가 아파서 울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외롭게 죽어 버릴까 봐 무서웠다.
죽고 싶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리워서, 할머니가 그리워서-……. 그립고도,
“……미안해서.”
한심하지만, 누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숨죽여 울었다.
∞ ∞ ∞
차온하가 집 안에서 온종일 무엇을 하는지는 설치된 감시 카메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겨우 복통으로 입원까지 한 차온하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한 노대식의 제안이었다.
「보스, 아니 사장님. 저 아가요, 지가 옆에 있으면 밥도 안 먹고 벽에 머리를 콕 처박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도 밖에 있었던 건디. 배가 아프면 아프다고 헐 것이지, 하여튼 지가 하고 싶은 말은요, 그, 요즘에는 카메라가 좋아져서, 화각도 이렇게 넓고 말입니다. 고것을 설치해서 지켜보면 어떻겠나…….」
억울한 음색으로 구시렁대던 노대식이 말미를 흐렸다. 눈을 부릅뜬 박덕수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닥치라고 노려봤지만, 의외로 신로에게서는 순순히 허락이 떨어졌다.
오전에만 일하는 가사 도우미가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면 차온하는 넓은 거실을 서성이다가 현관 앞에서 몸을 웅크렸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차온하는 이곳에 온 첫날을 제외하고 침대에서 잠드는 법이 없었다. 류신로는 대부분 자정이 넘어서 귀가했다. 들어오면 차온하를 찾아 움직였다. 차온하가 잠든 위치는 매번 달라 꼭 숨바꼭질 같았다.
처음에는 어쩌다가 곁에서 잤고, 그다음에는 반응이 궁금해서 곁으로 옮겼다. 깰 때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하더니 며칠이 지나자 여전히 화들짝 놀라기는 해도 금방 무덤덤해졌다.
침대를 두고 왜 엉뚱한 곳에서 잠드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하지 않으니 묻지 않았다.
차온하는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았고 옷소매를 빼고 자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옆에 두면 열기를 찾아 옆구리로 파고든다.
누군가 옆에 두고 잠든 적이 없어서 사람의 체온이 꽤 높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아니면, 차온하가 유난히 열이 높든가.
감시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류신로는 미동도 없는 차온하가 이번에는 현관에 자리 잡고 잔다고만 짐작했다.
퇴근해서 현관에 들어선 신로에게 까만 눈동자가 곧바로 닿는다.
차온하는 인사말도 없이 입을 꼭 다물고 슬그머니 일어섰다.
현관에서 졸았다면 들어오는 인기척에 깼다고 해도 잠기운이 남아 있어야 한다. 차온하는 잠든 게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눈빛을 하고.
신로는 시선을 내려 온하의 꼼질거리는 손가락을 바라보다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온하는 신로를 피해 살며시 옆으로 비켜섰다.
신로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들어와 어딘가 잠들었을 차온하를 찾아 옮기고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업무 체크를 했다.
차온하를 찾을 필요가 없으니 류신로는 평소대로 한창 영업 중일 업장을 체크했다. 모든 곳의 실시간 상황을 확인하고도 어쩐지 일을 마무리하지 않은 듯 개운치 않았다.
놓친 일이 있나.
신로는 관자놀이를 누른 채 일어섰다. 몸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균형이 깨진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감각을 누르며 샤워하고 머리에 수건을 느슨하게 걸치고 나온 류신로가 멈춰 섰다.
침실 문가에 삐죽 튀어나온 머리칼이 보인다.
다가가 보니 차온하가 문틀에 기대 졸고 있다. 침실로 들어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복도도 아닌 경계선에 앉아서.
신로는 무릎을 굽혀 온하의 옆에 앉았다. 고개를 기울이고 한참을 관찰하니 고개를 까닥대던 온하가 스르륵 기울어졌다.
바닥으로 툭 쓰러진 온하가 입술을 새물거리며 꾸물꾸물 움직인다. 소매에서 양쪽 팔을 빼더니 이윽고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신로의 발치에서 새액새액 고른 숨을 뱉는다. 신로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신로는 무심코 손을 내밀어 물방울이 온하의 볼에 닿기 전에 받아 냈다. 손에 떨어진 물방울을 내려다보던 신로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손바닥에 고인 물방울을 털어 내고 이번에는 온하를 안아 들었다.
한번 잠들면 깨는 법이 없는 차온하가 유연하게 팔에 감겼다. 아이를 침대로 옮기고 나서 신로도 옆에 누웠다. 차온하는 버릇처럼 옆구리로 파고든다. 옆구리에 느껴지는 숨이 히터라도 틀어놓은 듯 뜨끈하다.
그제야 신로는 눈을 감았다. 문득 원인 모를 개운치 않은 감각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일과를 쭉 떠올리고 정리한 신로는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역시 놓친 일은 없었다.
차온하가 복통으로 실려 간 이유는 단순했다.
소화 불량.
고열량 음식이 부담스러워 소화를 못 시킨 장이 염증을 일으켰다는 말에 노대식은 어이없어했다. 왜 좋은 걸 먹고 배탈이 나냐는 것이다. 의사의 설명을 같이 들은 박덕수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흉포하게 생긴 건달 둘의 인상이 붉으락푸르락 일변하자 의사는 손을 덜덜 떨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열심히 설명했다.
차온하의 장은 현재 약해질 대로 약해져 기름진 음식을 소화할 정도가 아니라며, 갑작스러운 식습관 변화는 오히려 염증을 유발하므로 천천히 적응해야 탈이 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급성 장염이 위험한 병이 아니지만, 차온하는 위험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영양실조에 심각한 탈수가 겹친 탓이다.
한 끼라도 거르면 담보를 태우겠다는 협박에 차온하는 소화도 안 되는 음식을 꼬박꼬박 미련하게 욱여넣고 탈이 났다.
가사 도우미는 온하가 속이 불편한 티를 내지 않았다고 당황했다. 주면 주는 대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든 그릇을 비웠다며, 놀란 듯 횡설수설했다. 해고할까 생각했지만 한 번은 넘어가기로 했다.
스트레스 역시 민감한 장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편안한 환경이 중요하다는 의사의 말을 떠올린 까닭이다.
박덕수나 노대식에게는 심하게 낯을 가리는 차온하가 우습게도 가사 도우미에게는 느슨했다. 무엇 때문인지 신로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감시 카메라에 비친 차온하는 일하는 가사 도우미를 성가시지 않을 정도로만 따라다녔다. 먹잇감 노리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였다. 일을 돕지도 않으면서 미련하게 굴다가 그녀가 퇴근하면 현관에서 웅크렸다.
확실한 사실은 차온하는 현관에서 퇴근하고 돌아올 류신로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까맣고 반들거리는 눈을 하고 말이다.
신뢰를 담은 눈동자가 기묘하다. 아무리 되짚어 봐도 복통으로 병원에 실려 간 날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차온하가 병원에 실려 간 일이 처음도 아니고, 노대식에게는 여전히 날을 세우는데. 어째서 신로에게는 빗장을 풀고 맹목적인 눈으로 기다리는지 알 수 없다.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개 같았다.
류신로는 종종 감시 카메라 화면에 비친 차온하를 지켜봤다. 현관에 오도카니 앉은 등을 보고 있으면 기묘한 열이 목덜미에 어렸다.
벌레가 몸 위를 기어가듯 간지러운 착각에 매번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가느다란 목덜미를 움켜쥐고 싶기도 하고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도 싶었다. 느껴 보지 못한 감각이라 생소했다.
아침에 신로가 운동하고 돌아오면 차온하는 일어난다. 아침 식사를 차린 가사 도우미가 깨우기 전에 스스로 일어나 식사하러 온다. 머뭇거리다가 신로가 시선을 주면 그제야 온하는 자리에 앉았다.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신로의 말에 숟가락을 들던 차온하가 눈을 마주쳐 온다. 깜박깜박.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이다가 입을 열었다.
“……남의 집이니까.”
“허락했으니까 같이 먹는 거잖아.”
류신로가 애초에 허락하지 않았다면 같이 식사하는 일은 없다. 차온하는 손님도 아니고, 부하도 아니다. 키우는 개도 아니다.
그렇다면 차온하가 뭐지.
미간을 찌푸리는데 눈을 모로 굴린 차온하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어른이 먼저,”
“알았으니까 먹어.”
예의범절을 들먹이는 목소리를 끊어 내며 신로는 식사를 시작했다.
고요한 식사 시간이 흘렀다. 온하는 소화하기 쉽도록 조리한 유동식을 느릿하게 먹었다. 원래도 빠른 편은 아니었는데, 병원에 다녀온 후로 깨달은 바가 있는지 씹을 것도 없는 미음을 꼼꼼하게 씹어 삼켰다.
입술을 다물어 숟가락에 담긴 형태가 뭉그러진 쌀알을 보드랍게 쓸어 가는 차온하를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
“맛있어?”
끄덕끄덕. 차온하는 머리가 덜렁거리는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신로는 오물오물하는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다 일어났다. 온하는 따라 일어서고 싶은지 꼼질댔다. 그릇에 남은 미음과 신로 쪽을 번갈아 보다 빨리 먹자고 결심했는지 숟가락질이 바빠졌다.
“천천히-.”
바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느려졌다. 신로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목덜미부터 얼굴까지 차츰 붉어졌다. 속내를 들켰다고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차온하의 머리가 점점 수그러들어 그릇에 코를 박기 직전에야 신로는 시선을 떼었다.
차온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의문 덩어리일 뿐.
아버지가 차온하를 위해 죽은 이유도 여전히 알 수 없고,
차온하가 갑자기 알에서 깨어난 오리처럼 저를 각인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이해되지 않는 미지의 존재를 본 듯 사위스러웠다. 불쾌한 감각과 닮았지만 정확하게 그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류신로는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외워서 뜻은 알고 적절한 때 단어를 끌어다 쓰긴 해도 희로애락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미소조차도 의식적으로 사용할 뿐이다.
아버지 류동하는 신로에게 마지막으로 명령했다. 타당한 설명은 없었지만, 이해는 신로의 몫이었다.
어렵고 또한 거슬렸다.
“저, 사장님…….”
여간해선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는 가사 도우미가 드레스 룸 앞에 서 있다. 손을 꽉 맞잡은 그녀가 어렵게 미소 지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넥타이를 매며 바라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할 말이 있는 듯 보내는 신호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만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짐작할 뿐이었다. 노대식보다 외양이 단정한 신로 쪽이 그나마 덜 무섭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왜-.”
“그, 온하 학생이.”
“왜.”
“옷이…… 없다고.”
두서없는 그녀의 말은 이랬다.
빨아 주겠다고 했더니 제가 빨면 된다고 했다. 착한 학생이다. 아무리 봐도 학생 옷으로 보이는 빨랫감이 나오지 않아서 지금까지 빨아 입었느냐 물었더니 그렇다고 답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바구니에 넣어 두면 빨아 주겠다고 하자 그러겠다고 답했다. 지금 빨래할 거니까 달라고 하자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었는데 내도록 벌거벗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묻자 빨래가 다 되면 입으려고 기다린다고 했다. 혹시나 해 여분의 옷이 없냐고 묻자 없다고 답했다. 속옷도, 겉옷도 지금 입은 것뿐이라 했다. 사장님 옷을 맘대로 입으라고 권할 수는 없어서 건조해서 줬는데, 그동안은 젖은 빨래를 입은 채 말렸던 것 같다.
“허락만 하시면, 제가 아들이 입던 옷이라도 가져다주고 싶어서, 헉, 에구머니! 죄송합니다, 사장님!”
갑자기 다가서는 신로를 피해 뒤로 물러서던 가사 도우미가 제풀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신로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으려 다급히 옆으로 피했다. 가사 도우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신로는 드레스 룸을 나섰다.
“차온하.”
겨우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던 차온하가 뒤를 돌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차온하를 굴 같은 작은 방에서 끌어내 왔을 때도 저 옷이었다. 빚을 갚으러 사무실에 왔을 때는 점퍼를 입어서 안에 뭘 입었는지 모르겠지만, 집에 처박은 날부터 같은 옷이긴 했다.
구멍이 뚫린 곳도 있는 해진 티셔츠는 사이즈도 맞지 않아 움직일 때마다 펄럭거렸다.
이름을 불러 놓고 말없이 보고 있자 기다리던 차온하가 천천히 다가왔다.
“따라와.”
드레스 룸으로 들어서는 차온하에게 다짜고짜 벗으라고 명령하자 멍하니 입술이 벌어졌지만 순순히 옷을 벗었다.
벗으니 더 가관이었다.
볼품없고 색깔도 바랜 트렁크는 밴드 부분이 늘어나 툭 불거진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얼마나 자주 빨았는지 너덜너덜한 걸레 같았다. 나서는 법이 없던 가사 도우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만했다.
차온하는 옷을 벗으라고 한 영문을 모르겠는지 벗은 옷을 들고 눈만 껌벅였다. 신로는 옷걸이에 걸린 셔츠와 바지를 잡히는 대로 당겨 차온하에게 집어 던졌다. 차온하는 바닥에 떨어진 하얀 셔츠를 굽어보다 주워 도로 내밀었다.
“입어.”
“왜요?”
“옷이 없잖아.”
“……있어요.”
손에 든 옷을 내밀며 말하는 차온하의 얼굴이 무구했다.
“버려.”
“……왜요?”
“걸레로도 못 써.”
이해가 안 되는 듯 눈을 깜박이는 온하의 손에서 옷을 낚아채 드레스 룸 밖으로 던졌다.
“마저 벗어.”
차온하는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머뭇거렸다. 느림보 같은 몸짓에 신로는 그에게 다가섰다. 온하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번쩍 들어 올렸다. 온하는 갑작스럽게 들어 올려진 자세가 거북한지 버둥버둥했다.
신로는 그러거나 말거나 바르작거리는 몸을 위아래로 툭 털었다. 이미 기능을 다 해 겨우 걸쳐져 있던 트렁크가 허벅지까지 뚝 떨어졌다.
“아!”
차온하는 단숨에 벌겋게 익었다. 부끄러운지 미끄러지는 트렁크를 잡으려다가 여의치 않자 다리를 옴짝거리며 걷어 올려 보려고 애썼다.
“놔요!”
제법 앙칼지고 반항적인 항의에도 신로는 들은 척하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막힘없이 진행했다.
신로는 온하의 무릎에 손을 끼워 당겨 안았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당황한 온하의 허벅지에 걸린 트렁크를 손쉽게 벗겨 내 그것마저 드레스 룸 밖으로 던져 버렸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차온하를 내려놓자 부끄러운지 아래를 가리고 드레스 룸을 뛰쳐나가려 들었다.
신로가 잡아 돌려세우자 몸을 비틀고 요동치며 반항한다. 하찮은 몸부림을 대수롭지 않게 제압하고 얼굴을 후려갈겼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차온하의 가느다란 몸이 옷걸이 사이로 단번에 꼬꾸라졌다. 온하의 발목은 신로의 팔목보다 가늘었다. 옷 사이에 파묻혀 삐죽 나온 온하의 발목을 잡아당기니 처박힌 몸이 힘없이 주르륵 딸려 나왔다. 몸뚱이 위로 셔츠를 던지자 작은 몸을 한 번에 덮어 버렸다.
“입어.”
차온하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고 떨리는 손을 꼬물거리며 셔츠에 팔을 꿰었다. 그러나 손을 덜덜 떠느라 단추를 채우지 못하고 겉돌다가 고개를 숙였다.
지켜보던 신로가 벌어진 깃을 움켜잡았다. 끌어당기자 차온하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신로는 차온하의 허리를 잡아 들고 시계나 커프스를 담아 두는 장식장 위에 앉혔다.
“단추도 못 채워?”
타박하며 마주한 눈동자가 새카맣다. 화를 가득 품고 번들거렸다. 간지럽지도 않았다. 뚫기라도 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노려봐도 신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추를 채워 주었다.
턱을 잡아 올리자 부어오른 뺨에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다. 그렁그렁한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입술을 깨물고서도 차온하는 왜 이러냐고 묻지 않았다.
“다 버려. 알아들었지?”
조용하게 타이르는 목소리에 온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이해하는 눈은 아니었다. 그러라고 하니까 따르는 듯했다.
“난 두 번 말하는 거 좋아하지 않아.”
끄덕이는 온하의 손자국 난 볼 위에 그대로 손을 올리자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한참을 올곧게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하다 몸을 뗐다.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꺼내 내밀자 온하는 물끄러미 보기만 한다.
“오늘 나가서 옷 사. 부족하면 노대식이 알아서 할 테니, 필요한 만큼 사.”
수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온하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뭔데요…?”
“뭐?”
갸우뚱 기울어지는 얼굴이 정말 이게 뭔지 모르는 눈치였다.
“수표 몰라?”
“수표가 뭐예요?”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신로는 수표를 지갑에 넣었다.
“노대식에게 줄 테니 그가 알아서 계산하게 둬. 넌 고르면 돼.”
고개를 끄덕이는 차온하를 찬찬히 훑었다. 아무래도 체격이 다르다 보니 걸쳐진 셔츠가 원피스 같았다.
“근데요…….”
털도 없는 앙상한 다리를 내려다보던 신로의 시선이 올라오자 온하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물었다.
“이거 다 빚에 추가돼요?”
“그건 왜 물어?”
“공짜로 받는 거 아니랬어요.”
“누가.”
“할머니가.”
“…….”
기가 막혀서 입술이 삐뚤어졌다. 수표가 뭔지도 모르고 살 만큼 가난했으면서 거지와 다를 게 뭐가 있다고 동냥을 거절하는지 이해 못 한 탓이다.
“아픈 값이라 치자.”
차온하는 또 알아듣지 못하고 무구한 눈으로 바라봤다. 손가락으로 부은 뺨 위를 튕겨 주자 앗,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앞으로는 한 번에 말 들어.”
나릿하니 고개를 끄덕인 온하는 알몸에 셔츠만 걸친 채로 출근하는 신로를 배웅했다.
어쩐지 묘한 모습이었다.
집을 나선 류신로는 주차장에서 마주친 노대식에게 블랙카드를 내밀었다.
“오늘 차온하 데리고 나가. 따라다니면서 고른 것들을 계산해.”
“예?”
“옷을 사라고 했어.”
“어, 얼마나 말입니까요?”
구부정하게 몸을 내리고 공손하게 카드를 받아 든 노대식을 돌아본 류신로가 그답지 않게 생각에 잠겼다.
“……뺨 한 대 값이면 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류신로는 차에 올라탔다.
노대식은 블랙카드를 든 채 멍청하게 턱을 빼고 있었다. 박덕수가 어깨를 두드려 격려하고 류신로를 따라 출근해 버렸다.
노대식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서고서야 어찌 된 영문인지 대강 눈치챘다.
차온하의 볼에 커다란 손자국이 찍혀 퉁퉁 부어 있었다. 문제는 뺨 한 대의 적정가가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야아, 니 볼탱이가 을매여?”
차온하 역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눈만 깜박이는 모습에 노대식은 한탄했다.
“아니-. 뜬금없이 옷을 사라고 하시더니 뺨 한 대 값이라는디, 니는 이게 무슨 소린지 왜 모르냐? 니가 알아야지! 니가 맞았는디! 아줌마!”
“예에?”
“이게 뭔 일이다요? 뭐, 아는 거 있소?”
가사 도우미의 설명을 들은 노대식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눈썹을 팔자로 모았다. 그게 얼마나 흉악해 보이는지, 가사 도우미는 괜한 짓을 했다고 지금껏 백 번 넘게 후회했다.
“그니께, 아줌마 말인즉슨, 쟈가 옷 꼴이 그지 같아서 혀, 보, 스아장님, 에이 씨펄, 입에 더럽게 안 붙네. 하여튼 사장님이 쟈 옷 꼴이 거지 같다고 팼다고?”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아니 그게 맞는 건가?
“예에, 그게 마, 맞는 거 같아요. ……아마도요.”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가사 도우미를 보다 노대식이 기막혀하며 차온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차온하조차 맞은 이유를 지금에야 이해한 얼굴이다.
“쟈가 걸친 게 뭐였당가?”
차온하가 뭐 얼마나 거지 같은 옷을 입었길래 흥분하는 일이 없는 류신로가 뺨까지 때렸는지 궁금했다.
노대식의 말에 가사 도우미가 구석에 뭉쳐져 있던 걸레를 들고 왔다.
“뭐여, 이건. 나보고 청소하라는 거여, 뭐여!”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거 제 옷이에요.”
조용히 있던 차온하가 말했다.
“이게?”
계속 봐 왔으면서 마치 처음 본다는 듯한 노대식을 지나친 차온하가 가사 도우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할머니.”
차온하는 여전히 셔츠 차림이었다. 류신로가 입혀 놓은 그대로 있던 차온하가 거적 같은 뭉치 사이에서 트렁크를 찾아냈다.
“야-, 그기 뭐여! 슬마 고것이 빤스여?!”
가늘어서 똑 부러질 것 같은 다리 하나를 트렁크에 꿴 차온하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노대식 앞에서 쭉 당겨 입었다.
아슬아슬하게 하얀 엉덩이가 보이는 듯하다 커다란 셔츠에 가려졌다.
“야, 빤스가 고것밖에 없냐?!”
고개를 끄덕거리는 차온하가 도톰한 입술을 불룩 내놓았다.
“깨끗한데.”
더러워서 이런 반응이라고 생각하는지 억울한 얼굴이었다.
“허미, 씨펄.”
욕을 읊조리는 노대식이 기가 막힌 듯 가사 도우미를 바라보았다. 자리를 떠도 되는지 이대로 있어야 하는지 눈치를 살피던 도우미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저는 이만 일 하러…….”
“아줌마-.”
“예에?”
“애 옷하고 빤스 사려면 어디 가야 혀?”
“시장에 가시면 되지 않을까요?”
“시장? 시장 어디? 어디 시장?”
같은 말을 반복하는 노대식을 보며 가사 도우미는 그가 비꼰다고 착각했다. 노대식은 단순히 어디에 있는 시장에, 어느 가게에 가야 하느냐고 물은 것일 뿐 다른 의도가 없었지만, 지나치게 험악한 얼굴이 오해를 불렀다.
“배, 배, 백화점을 가시면!”
“아… 나, 그만 좀 떨어, 나가 잡아먹어? 뭘 혔다고 겁은 먹어쌌고, 진짜. 뭐 그렇다 치고, 그럼 어느 백화점?”
“여, 여기서 개, 갤러리아 백화점이 가까우니까.”
“로데오 사거리에 있는 거?”
“예, 예!”
“그렇구먼. 알았소, 고마워?”
노대식은 나름대로 후덕하게 미소를 지었다. 가사 도우미가 툭하면 놀라니 최대한 감사를 담은 눈빛을 쏘았다. 가사 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받아 주었다. 노대식은 역시,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흐뭇해졌다. 이래도 저래도 본인의 얼굴이 얼마나 흉악해 보이는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야, 아가야, 준비해라. 형님, 사장님이 니를 데리고 나가서 옷 사 입히라고 하셨으니까. 너도 들었쟈?”
고개를 끄덕거리는 차온하를 돌아보고 노대식은 담배를 물었다. 베란다로 나와 한 대를 다 피우고서야 핸드폰을 들었다.
“사장님, 저 노대식입니다요.”
―왜?
“지가 잘 모르겠어서 그라는디 말입니다. 뺨 한 대가 얼마인지 말씀해 주시면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요.”
―…….
“죄송합니다. 고깃값하고 같다고 생각허자니…… 빤스 한 장값도 안 될 거 같고. 왜냐면 아시다시피 차온하 뺨이 몇 그람이나 허겠습니까? 살도 없지 말입니다. 카드는 주셨고, 당최 쟈가 을매인지,
―그 카드, 한도 없어.
전화는 그대로 끊어졌다.
잠시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던 노대식은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깊이 생각하는 일은 체질에 맞지도 않고, 한도가 없다는 뜻은 한도를 정하지 않는다는 소리라고 속 편한 결론을 내렸다.
∞ ∞ ∞
노대식은 남는 시간에 틈틈이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 남자 주인공을 지켜보며 그는 나름의 로망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여짝부터 요까지 다 야한테 입혀 봐.”
신사복 매장의 직원은 소파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노대식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분께 말씀이십니까?”
“그려, 몽땅 입혀 보드라고?”
조폭이 행패를 부리러 왔다고 신고해야 하나 직원은 고민에 빠졌다.
맞지도 않는 커다란 셔츠와 바지를 입은 아이는 초등학생이거나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지나치게 마른 탓에 기성복 매장인 이곳에는 사이즈도 없거니와, 정작 본인은 옷에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게다가 뺨에 멍도 들었다. 얼굴 반쪽이 거의 죽은 보랏빛이다.
납치. 학대. 깡패.
머릿속을 슥슥 스쳐 지나가는 단어들에 어지러웠다. 애를 앞세워 옷이 뭐 이따위냐고 트집을 잡고 주차료라도 받으려는 수작인가 싶어 직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간혹 사소한 이득을 챙기려고 매장에서 생떼를 부리는 진상 고객 얘기를 듣기만 했지 제가 걸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저어,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경호원을 호출하는 비상벨을 누르고 직원은 상냥한 미소의 가면을 썼다. 성의를 보이고자 제일 작은 사이즈의 슈트를 들고 피팅 룸으로 아이를 안내했다.
“이곳에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고객님.”
“이∼쁘게 입고 나와 봐!”
기분 좋은지 히죽 웃으며 노대식이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차온하가 옷을 걸치고 나오는 적절한 시간에 보안팀도 매장 근처에 도착했다. 검은 슈트를 입은 그들을 본 직원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볼 것도 없이 아이는 볼품없었다. 어깨는 한참 남아서 각이 흐트러졌고 바짓단의 길이는 맞지만 다리가 지나치게 가늘어서 펄럭거렸다. 이제 저 깡패가 야료를 부릴 차례라고 생각했다.
“오오오오!”
응……?
어색하게 선 차온하를 보며 노대식은 박수를 쳤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라 직원은 당황해 눈을 굴렸다.
“이봐! 옷이 날개잖아! 인물이 확 사네! 보소, 당신이 봐도 딱! 쥑이지! 역시 남자 하면 이렇게 쫙-, 양복을 입어 줘야, 어? 어?”
정작 아이는 그러냐는 듯 무심한 얼굴이었다.
“나가 쟈 옷 갈아입는 동안 눈여겨봤는디, 이거! 이거 마네킹이 입은 거, 요것도 벗겨 줘. 멋있게, 쫙!”
“이, 이 제품 말씀이십니까?”
“어, 당장 벗겨 봐.”
“사이즈가.”
“사이즈? 아, 그려, 그르네. 내가 또 흥분해 가지고, 어, 그럼 사이즈 맞는 걸로다가 입혀 줘.”
허둥거리며 직원은 마네킹이 입은 슈트를 찾아 바삐 움직였다.
“저, 고객님, 저 상품의 제일 작은 사이즈가 매장에는 없고 창고에 있는데, 가지러 갔다 오겠습니다.”
“뭐여, 창고에 있으면 더러울 거 아녀! 됐어! 우리 아한티 그런 거 안 입혀! 다른 거, 이거 어떠냐?”
창고에 있는 상품도 새 상품이라고 할 틈도 없이 노대식은 다른 옷을 온하에게 내밀었다. 옷을 물끄러미 보던 온하가 시선을 들었다.
“이거면 돼요.”
“맘에 안 들어?”
“한 벌이면 돼요.”
“그럼 내일은 뭐 입어?”
“이 옷이요.”
“모레는?”
“이 옷이요.”
“글피는? 아니, 계속 그것만 입어? 니는 드럽게스리 옷 안 갈아입냐!”
“빨면 돼요.”
“빠는 동안에는 뭐 입게!”
“빨래는 금방 해요. 잘 짜서 입고 있으면 말라요.”
직원은 지금 입은 옷은 물빨래하면 안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대화가 기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매장 직원뿐이 아니었다.
노대식의 목소리가 워낙 크고 요란해서 주변 매장 직원들 시선도 모두 이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보안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 안 돼, 안 돼! 궁상맞아! 가오 안 살아!”
그렇다! 궁상맞다!
백화점 직원들은 모두 노대식과 한마음이 되었다.
“다 형편에 맞게 사는 거예요. 궁상맞지 않아요.”
“싫다! 형님이-, 사장님이 시방 모처럼 한도 없는 블랙카드 줬는디 딸랑 그거 하나 사고 들어가자고?! 그렇게는 못 헌다!”
철없는 아이처럼 고집부리는 노대식이 이해가 안 되는지 차온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낭비는 하지 않는 거예요.”
결코 싸다고 할 수 없는 브랜드 매장에서 산 고급 슈트를 물빨래해서 입겠다고 대찬 헛소리를 하는 온하나, 답답하다는 양 가슴을 치며 돈지랄을 해 보고자 안달이 난 노대식 둘 중 누구도 태그에 붙은 가격에는 관심이 없었다.
맞지도 않는 슈트를 멋있다고 구매하겠다는 노대식이나,
쉽게 손상되는 고급 원단의 옷을 물빨래하겠다는 차온하나.
거기서 거기로 이상했다. 직원은 둘 다 괴상한 사치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프로답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 야가 말이 안 통허네. 쪼매만 기다려 봐잉?”
핸드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한 노대식이 몇 마디를 속닥거리다 내밀었다.
“사장님이 바꾸랴.”
눈을 동그랗게 뜬 차온하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받아 쥐었다.
“여보세요?”
―차온하.
“네.”
―노대식이 하자는 대로 해.
“……네.”
여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온하는 마지못해 답했다. 류신로가 한번 말하면 들으라고 말한 까닭이다.
―…….
“…….”
둘 다 말없이 통화 시간이 길어지자 노대식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아가, 끊었어? 사장님이 뭐라셔? 막 사도 된대지, 엉?”
노대식의 독촉에도 차온하는 여전히 핸드폰을 귀에 대고만 있었다.
―차온하.
“예.”
―아픈 값이라고 했잖아.
“……알겠어요.”
―…….
“끊을까요?”
―그래.
“안녕히, 계세요.”
온하의 어설픈 인사에 수화기 너머에서 희미하게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그대로 전화가 끊어졌다.
“다 사도 된다고 하시지?”
온하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자 노대식이 거 보라며 의기양양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후 온하는 노대식이 요구하는 대로 정신없이 피팅 룸을 들락거렸다.
온하는 그야말로 녹초가 되고 말았다.
카드를 긁는 순간 노대식은 희열로 껄껄 웃었다. 대기하던 보안 요원들은 순식간에 짐꾼이 되어 노대식과 차온하를 속옷 매장까지 안내했다.
류신로가 한밤에 퇴근해 돌아오자 차온하는 쭈그리고 있다가 어색하게 일어섰다. 구김이 간 옷을 아래로 잡아당겨 편다.
현관 마중을 하며 한 번도 입을 열지 않더니 입술을 깨물고 웅얼거린다.
“옷. 샀어요.”
고개를 숙인 온하의 벌건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신로의 시선이 차츰차츰 아래로 흘렀다. 한눈에도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 어깨선이 애매하게 처진 셔츠를 바지 안으로 넣었다. 허리가 맞지 않는지 허리춤도 두어 번 접었다.
옷은 깔끔하게, 계절에 맞게, 상황에 맞춰서 입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신로가 봐도 괴상한 차림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 낸 신로의 시선이 온하의 퉁퉁 부은 뺨에 멈춘다.
온하는 슬며시 손으로 뺨을 가렸다.
뺨 한 대 값. 종일 생각해 봤다.
할머니를 잃고 온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많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물건을 던지거나, 툭툭 밀치거나. 사소하고 하찮은 화풀이였다. 어떤 관심도 하다못해 미움도 없는, 지나가는 돌멩이를 걷어차는 무심한 행위에 불과했다.
류신로는 다르다. 그는 온하에게 신경이 닿아 있다. 온하 역시 그렇다.
할머니의 상자를 담보로 가진 남자. 온하는 그에게 빚이 있다. 주고받는 관계다. 서로 연결 고리가 있다.
“오래 입을게요.”
값을 치른 것에 대해 인사했다. 노대식이 고맙다고 하라고 신신당부한 강요 때문이 아니라, 류신로와 온하는 주고받는 관계니까.
“마음에 들어?”
새 옷이다. 천도 부드럽고, 가볍다. 사이즈도 적당하다. 곧 클 테니까.
온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마음에 들어?”
류신로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고개만 끄덕여서 그런지 또 한 번 묻는다.
“마음에 들어요.”
이번에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신로는 한동안 조용히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움직이자마자 온하는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옆을 스치던 신로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또 맞을 줄 알았던 온하는 입술을 감쳐물고 슬며시 그의 뒤를 따랐다.
류신로는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에 온하를 돌아보았다.
“침대에서 자. 집 없는 개처럼 아무 데서나 자지 말고.”
개는 아니지만 집은 없는데.
온하가 물끄러미 봐도 신로는 설명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오도카니 서서 코를 찡긋거린 온하는 침실로 들어가 매번 깨면 잠들어 있는 침대 앞에 섰다.
집은 없어도 잘 곳이 생겼다. 어색하기만 했던 침대가 아늑하게 느껴졌다.
∞ ∞ ∞
“저, 일하면 안 돼요?”
드레스 룸 앞에 차온하가 조심스럽게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왜?”
“돈을 벌어야 빚을 갚을 수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자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이 얼만지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일을 하겠다는 소리에 신로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차온하는 시간이 흘러 이전보다 살이 올랐다고 해도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심각한 저체중이었다. 여전히 죽이나 먹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
“돈 안 되는 일, 하지 말라고 했어.”
억울한 듯 눈을 내리깐 온하가 네, 하고 작게 대답하고 돌아서 문밖으로 사라졌다. 재킷을 걸치던 신로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까닭이다.
“차온하.”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온하가 고개를 들자 신로가 드레스 룸 앞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않고 바라보는 그에게 다가서자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골라 봐.”
넥타이가 진열된 유리장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신로를 향해 눈을 깜박이던 온하가 안으로 들어섰다. 봐도 다 비슷해 보였지만 온하는 열심히 제일 좋아 보이는 넥타이를 골라 그에게 내밀었다. 나름대로는 그의 푸른 셔츠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골랐는데 신로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고를까요?”
시선이 장 안으로 향하자 손에서 넥타이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묵묵히 넥타이를 매는 신로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짧게 넥타이핀, 커프스, 라고 말했다.
“그게 뭐예요……?”
화내는 일 없이 신로는 넥타이가 진열된 아래 칸에 있는 긴 핀들을 가리키며,
“이게 넥타이핀, 넥타이를 고정하는 장식.”
제 소매에 원래 있던 커프스를 떼어 원래 있던 위치로 넣으며,
“이게 커프스, 소매에 단추 대신 쓰는 거야. 대체로 넥타이, 넥타이핀, 커프스는 세트로 통일해.”
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아리송한 온하는 어쨌든 각각 하나씩 고르면 된다는 말로 이해했다.
이번에도 그는 온하가 고른 것을 말없이 착용했다.
“물어봐도 돼요……?”
“응.”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돈이 되는 일이에요?”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 신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미성년자다 보니 호텔에서 일하게 할 수도 없었고, 불법적인 일은 내키지 않았다.
“꼭 하고 싶어?”
빚이 늘어나도 신경 쓰지 않잖아. 사실을 짚어 주지 않고 신로는 입을 다물었다.
“……밥값이라도 하고 싶어요.”
“아침마다 넥타이 골라 주는 건 어때?”
“그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할게요.”
묘한 데서 깐깐한 구석이 있는 차온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어쩐지 눈을 가린 앞머리를 치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단단해질 때까지는 안 된다고 했지.”
“이제 어지럽지 않아요. 배도 안 아프고, 정말 괜찮아요.”
“회복 중이라는 말은 회복되었다는 뜻과 같지 않아.”
“…….”
말도 없이 올려다보는 차온하의 눈이 보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고 앞머리를 걷었다. 눈가가 붉어져 있다. 안구도 습기에 반들거리며 빛났다.
“왜.”
울어.
“몰라요.”
눈꼬리에 머문 수분을 엄지로 찍어 맛봤다.
“할머니가, 기뻐서 흘리는 눈물은 달대요. 제 눈물은 언제나 짰어요. ……짜요, 달아요?”
“어떨 것 같아?”
“달았으면 좋겠어요.”
눈가를 문질러 수분을 걷어 온하의 입술 앞으로 가져왔다. 맛보라는 태도에 붉은 혀가 엄지를 스쳤다.
“……짜네요.”
어쩐지 시무룩하게 웅얼거리는 온하를 내려다보며 그대로 엄지의 맛을 보았다.
달게도 느껴지는데.
속삭이는 말에 온하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출근을 하러 신로가 곁을 스쳐 지나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