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덕수는 신로가 고개를 들기만을 묵묵하게 기다렸다. 그가 대외적으로 건네는 명함의 직함에는 비서실장이라고 찍혀 있다. 실체는 ‘백류’파의 오른팔이다.
번지르르한 호텔과 카지노, 몇몇 클럽과 요정을 운영하는 보스, 류신로의 충직한 개였다. 현장에서 별명마저 미친 불도그인 그이나 백류파의 보스가 류동하에서 아들인 류신로로 바뀌자 존재를 드러낼 일 없이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버렸다. 정말 비서실장처럼 말이다.
조직 전체를 일반 회사처럼 바꿔 버린 사람은 류신로였다. 다른 조직에서는 백류파가 한물갔다며 조폭 주제에 책상물림 하는 샌님 밑에서 일하느라 힘이 다 빠졌다고 빈정댔다.
다른 조직으로 이탈하는 놈도 왕왕 생겼다.
명문 법대를 졸업하고 연수원도 수료한 류신로를 두고 뭘 모르는 놈들은 그가 공부만 한 샌님인 줄 알지만, 측근들은 진면모를 알고 있었다. 막 발령 난 검사직도 미련 없이 털어 버리고 백류파를 이은 류신로는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류동하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의리와 신의를 지키는 보스였다면 류신로는 완전히 반대였다.
어떤 면에서는 류신로가 좀 더 범죄자에 가깝달까, 가차 없이 잔인하고 냉정했다.
그를 우습게 보고 이탈한 조직원들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류신로가 두고 넘어가지 않아서였다. 피라미의 피라미까지, 모두 처리됐다. 설득도 경고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부 사정을 모르는 놈들이 깐죽거리며 비웃어도 더는 이탈하는 조직원이 없었다. 그저 시키는 일만 조용히 처리했다.
류신로는 섬뜩했다. 그는 조직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부담에 억눌리거나 갑작스럽게 주어진 권력에 휘둘리지 않았다.
오용파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흥분하는 놈들의 토로를 한참 듣던 류신로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일축했다. 핏줄인 그가 지나치게 침착하니 아랫것들의 분통은 더욱 터졌다.
「이게 말이 됩니까요! 보스가 돌아가셨는데, 그놈을 그냥 둔다는 게 말도 안 되지 말입니다요! 제가 가서 놈의 멱을 따고-,」
「그래서 백류파에 무슨 득이 되지?」
「예에?!」
「최오용을 죽인다고 오용파의 사업이 우리에게로 넘어오나? 설사 넘어온다고 한들 검경 쪽에서 가만히 두고 보지도 않겠지. 다른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야. 지금 흥분해서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게 무슨 소용이지?」
「다른 놈들이 우습게 본단 말입니다요! 복수해야 백류파의 거, 뭐냐 가오가 살지 말입니다요!」
「더욱 쓸모없군.」
「작은 보스!」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움직인 놈들은 대가로 개밥이 되었다.
류신로는 그제도 어제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였다.
지금껏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한 번뿐이었다.
아버지인 류동하가 죽었을 때.
그가 얼굴을 찌푸린 이유는 분노가 아니었다. 박덕수조차 보스를 잃고 분노와 슬픔으로 억장이 무너지는데 정작 아들이 보인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미 저세상으로 간 류동하에게 묻고 있었다.
「대체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급히 움직여야 할 마지막까지도 답을 구하는 류신로가 넋이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수습할 필요 없어. 경찰들이 알아서 하겠지. 놓고 간다. 나중에 돌려받으면 돼.」
류동하의 시신을 들고 도망치다 붙잡히는 상황까지 각오했던 박덕수는 “예?”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네가 감옥에 가면 안 돼. 너는 필요하니까.」
시신을 그대로 둔 채 류신로는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현장을 벗어났었다.
형사들이 희희낙락 영장을 들고 와 이제 네놈들은 끝장이라는 양 들쑤셨지만, 증거물은 모두 파기되고 꼬투리가 될 자료 역시 처리된 뒤였다.
류신로는 사소한 것 한 가지도 놓치는 법 없이 차분하게 일을 처리했다.
무식해서 돌 굴러가는 소리가 나는 박덕수를 비롯한 측근들은 빠르게 돌아가는 그의 판단을 따라가지 못해 허덕거렸을 따름이다.
백류파의 왼팔쯤 되는 노대식은 꼬투리가 잡힐 증거를 처리하며 이걸 그냥 다 먹어서 똥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고시랑댔다.
“‘유래’, 내부 수리는 끝났어? 오늘 보고서가 올라와야 하는 거 같은데.”
“알아보겠습니다.”
“카지노에 쥐가 있다는군.”
“지시하시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쥐는 정말 쥐를 뜻하지 않는다. 카지노에 잠입해 정보를 빼내는 경찰 쪽 끄나풀을 말하는 것이다.
“줄을 잡고 있는 쪽을 먼저 처리해.”
박덕수가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자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한 허락이 떨어졌다.
“보고해.”
부르지도 않은 박덕수가 계속 서서 기다린 이유를 아는 것이다.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는 류신로는 보고할 내용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시간을 끈 것은 지금부터 할 보고가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인 탓이다.
류신로는 서류에서 손을 떼고 얼굴에 걸친 은테 안경을 벗었다. 그의 미간에 벌써 희미하게 줄이 가 있다.
류신로는 아무 감정도 없는 것처럼 아니, 실제로도 무기물 컴퓨터처럼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처리한다. 그가 유일하게 감정을 담은 표정을 짓게 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차온하’다. 그에 관한 보고를 들어야 할 때면 의식적으로 가장 나중으로 미뤘다.
긴 시간 기다려 어렵게 떨어진 허락에 박덕수는 눈을 내리깔았다.
“며칠 전, 차온하의 조모 차숙자가 죽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는지 일어서서 욕실로 향하는 류신로를 따라붙으며 박덕수는 덧붙였다.
“일주일쯤 됐는데, 지키는 애들의 말로는 장례 후 집에 들어간 뒤 아무런 기척이 없다고 합니다.”
“죽었어?”
차온하가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는 듯 무심한 어투에 박덕수는 한숨을 쉴 뻔했다. 샤워라도 할 생각인지 바닥으로 흘리는 신로의 넥타이를 줍는 척 얼굴을 숨기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차온하는 류신로의 배다른 동생이다.
백류파의 보스였던 류동하가 함정에 빠져 죽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서울을 차지하고 있는 조직은 크게 세 개로 나뉘었다. 그중 오용파와 백류파는 강남 지역에서 상권이 얽혀 있었다. 서로 같은 구역에서 활동하다 보니 부딪힐 일도 많았다.
오용파의 보스 최오용은 유독 류동하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제 여자를 뺏겨서라고 소문이 퍼져 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차온하의 모친인 이혜리는 최오용이 운영하는 클럽의 호스티스였다.
최오용이 이혜리에게 무슨 감정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집착은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혜리를 마구 내돌렸다. 제가 취하면서도 접대는 접대대로 시켰고, 상품인데도 툭하면 폭력을 행사했다. 미모가 빼어난 탓에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야 했던 그녀가 류동하를 만나 사랑에 빠진 건 당연했다.
팔이 안으로 굽어 팔불출 같다고 비웃는다고 해도 박덕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류동하는 남자가 봐도 멋있었고 여자가 보면 더 멋있었다.
성격도 그랬지만 외모 또한 그만하면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혜리가 가뜩이나 마땅찮은 류동하와 사랑에 빠지자 최오용의 눈은 더 뒤집혔다. 폭력은 물론이고 조직원을 모아 놓고 돌려 가며 강간했다. 엉망으로 만들려고 작정하고 보란 듯이 지랄을 하던 최오용에게서 그녀를 구해 온 이도 류동하였다.
원한다면 조직 간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사랑해 준 보람도 없이 이혜리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조폭 따위 지긋지긋하다며 찾지 말라는 싸가지 없는 쪽지만을 남겨 두고.
도망칠 때까지도 몸이 성치 않았던 그녀였다.
류동하가 이혜리의 근황에 관해 마지막으로 들은 얘기는 그녀가 임신한 것 같았다는 동료의 말뿐이었다.
이 바닥을 떠나서 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주고 싶다며 류동하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아이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고픈 그녀의 마음을 존중해 주고 싶다고 했다.
단순한 박덕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스 역시 이혜리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곁에 둬야 하는 거 아닌가? 물음표가 둥실 떠올라도 하늘 같은 보스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어쨌든 이혜리는 죽은 지 오래였다.
성치 않은 몸으로 애까지 낳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차온하는 조모인 차숙자 손에서 자랐다.
차온하를 찾은 건 우연이었다.
십 년도 훌쩍 지났건만.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최오용이 차를 타고 지나던 길에 이혜리를 봤다며 발광을 시작했다. 그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지고 지랄한 덕분에 이쪽에서도 소식을 접했다.
어떻게든 먼저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움직인 결과 이혜리가 아니라 차온하를 찾아냈다.
최오용이 본 이는 차온하였다. 나이 어린 남자애라고 생각 못 한 최오용 떨거지들이 삽질하는 사이 다행히도 이쪽에서 먼저 발견했다.
제 어미를 똑 닮은 얼굴이 꼭, 뭐 같았다.
「형님, 자가 사내놈이라 안 혔소? 염병.」
차온하를 본 노대식의 첫마디였다.
그러게, 남자 여럿 잡아먹은 팔자 사나운 년으로 아직도 가끔 얘기가 나오는 이혜리의 판박이였다.
사진을 건네받은 류동하는 예쁘게도 생겼다며 이런 ‘딸’이 있었으면 했다고 헛소, 아니, 하여튼 그랬다.
그는 지지리도 가난하게 사는 차온하를 당장 데리고 와야겠다고 했다. 박덕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난은 차치하더라도 이미 최오용에게 존재가 노출된 상태였다. 미친놈이 헛지랄을 하기 전에 데리고 오는 게 상책이었다.
솔직히 생김새도 문제였다.
이혜리가 세상을 떠난 지 십여 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최오용의 집착은 여전했다. 툭하면 여자를 때리고 강제로 범하며 이혜리를 부른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박덕수 눈에도 엄마를 똑 닮은 차온하는 아슬아슬했다. 미친 변태 새끼가 요즘에는 남자도 건드린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니. 걸리면 인생 조지는 지옥 순환선에 강제 탑승된다.
박덕수가 출발한 직후 류동하는 차온하를 데리고 있다는 최오용의 전화를 받았다.
딸같이 어여쁜 차온하를 만난다고 기대하던 류동하는 이성을 잃었다. 아들이 미친 새끼한테 붙잡혔다는 말에 혈혈단신으로 최오용에게 달려갔다. 박덕수는 차온하가 멀쩡하게 집에 있음을 확인하고 보스인 류동하에게 연락했지만 이미 연락 두절 상태였다. 함정이라고 깨달았지만, 누구도 최오용이 그 정도까지 미친 짓을 할 줄은 몰랐다.
보스가 말도 없이 홀로 간 곳의 위치를 알아낸 사람도 류신로였고, 최오용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움직일 거라고 예측한 사람도 류신로였다. 보스를 구하러 직접 움직인 건 의외였지만.
박덕수가 알기로 류신로는 그때 처음 현장에 나갔다.
류신로는 인간 백정이었다. 칼을 잡은 귀신이었다. 사람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썰었다. 두부라도 자르는 줄 알았다.
검도는 보스의 특기로, 그는 불필요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 특유의 카리스마로 상대를 제압하는 편이었다. 그와는 달리 류신로는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양, 앞을 막는 놈들을 사정없이 갈랐다. 저 사람이 검사로 발령도 났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모골이 송연했다.
최오용은 차온하를 찾지 못했다. 다만 이쪽이 찾았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이다.
최오용은 제 여자를 또 뺏긴다는 망상에 눈이 뒤집혔다. 거짓으로 한 협박이 이리 잘 먹힐 줄은 놈도 생각지 못했고, 그게 변수였다. 최오용은 눈엣가시 같은 류동하가 제 손에 들어왔다는 희열에 찼다. 광기에 사로잡혀 오래 묵은 원한을 해소했다.
덕분에 차온하에게는 그대로 관심을 끊었다. 이혜리가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안 탓이다. 다만, 이혜리를 똑 닮은 얼굴을 확인하면 바로 미친놈처럼 눈이 돌아가리라.
「류신로, 동생을 챙기거라……. 예쁜 아이더구나.」
보스의 당부에 류신로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 순간 박덕수는 같은 편도 섬뜩할 정도로 무감했던 어떤 ‘것’이 잠시 사람처럼 보였다.
「왜 그래야 합니까.」
류신로는 이유를 물었지만 보스는 이미 굳게 눈을 감은 뒤였다. 남자 여럿 잡았다는 팔자 사나운 이혜리는 기어이 보스의 발목을 잡고 목숨 줄까지 끊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혜리의 아들인 차온하가 그랬다.
비록 차온하가 보스 죽음의 화근이어도, 미친놈 손에 떨어지도록 두고 싶진 않았다. 박덕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나 류신로는 보스의 마지막 당부에도 불구하고 차온하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저 감시하라고만 했다. 때때로 근황을 보고하면 미간을 찌푸리고 듣기 일쑤였다.
류신로는 누구에게도 특별히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원수인 최오용 앞에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런데 차온하가 거론되면 유일하게 감정이 드러났다.
정확하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짜증’이 제일 비슷한 감정으로 보였다. 이대로 차온하가 죽었다고 해도 짜증으로 끝날 것만 같았다.
벌거벗은 몸으로 샤워 부스로 들어가는 류신로의 뒤에서 박덕수는 조심스레 물었다.
“확인해 보라고 할까요?”
샤워기의 쏟아지는 물 아래서 한참을 서 있던 류신로가 눈을 떴다.
“다 철수해.”
“예?”
“차온하 감시하던 팀, 다 철수하라고. 이제 그곳은 신경 쓰지 않는다.”
차가운 물줄기 밑에 서 있던 신로는 수도꼭지를 내려 물을 잠갔다. 얼어붙을 듯 차가워진 몸에 가운을 걸치고 창가에 서자 유리창에 물방울이 툭툭 부딪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대로 닦지 않은 머리카락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일주일이나 기척이 없다……라.
그 정도 굶는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계속 먹지 않고 버티면 며칠 뒤에는 죽을 것이다.
아버지는 거짓된 정보에 속아, 아니 거짓일지 모른다고 짐작했으면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놓지 못하고 함정에 빠졌다. 아이의 안위만 걱정한 류동하를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최오용이 집착한 쪽은 이혜리지 차온하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핏줄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설사 같은 핏줄이라고 해도 십수 년이 넘게 떨어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보호 대상이 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류신로, 동생을 챙기거라……. 예쁜 아이더구나.」
차온하의 사진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예쁜 건가. 먼 기억을 더듬어 이혜리의 얼굴을 떠올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챙기라니, 최오용은 이제 더는 차온하를 이용해 백류파를 흔들지 못한다. 왜 그 아이를 챙겨야 하는지 의문이고 이해도 안 됐지만, 유일하게 남긴 명령이라 따랐을 따름이다.
“곧 죽어 당신 곁으로 갈 테니 그곳에서 만나면 되겠습니다, 아버지.”
창밖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리던 신로의 머리가 한쪽으로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렇군, 죽으면 아버지를 만날지도 모르겠어.
“그건 거슬리는군.”
신로에게 아버지인 류동하는 단 하나의 중한 것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부자지간의 감정은 모르겠지만, 성장하는 동안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매사에 무감한 신로를 아껴 주었다. 그가 해 준 만큼 언젠가 갚아야 한다고 여겼다. 전공으로 법학을 선택한 이유도 아버지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제대로 갚지도 못했는데 난데없이 튀어나온 듣도 보도 못한 것 때문에 그를 뺏겼다.
영원히 갚을 길이 없어졌다.
아무런 고난 없이 그의 곁으로 가다니, 허락하지 못할 일이다.
신로의 입술이 사납게 휘어졌다.
문득 신로는 유리창에 거울처럼 비친 낯선 제 얼굴을 손으로 더듬었다. 의식적인 웃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미소는 처음이었다. 불쾌하다는 감각도 마찬가지다.
입매를 매만지던 신로는 가운을 벗으며 돌아섰다.
∞ ∞ ∞
차온하의 거주지는 차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하수구 냄새가 올라오는 좁은 길을 돌고 돌며 올라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래된 페인트가 삭아 부슬부슬 떨어지는 녹슨 대문을 밀자 경첩이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박덕수의 보고대로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틀린 채 반쯤 걸쳐져 있던 현관문을 당기자 바닥으로 기울어지며 시멘트에 긁히는 자국을 냈다. 그리된 지 오래된 모양으로 시멘트에는 비슷한 자국이 반원을 그리며 남아 있었다.
집 안에서 묵직하게 고여 있던 공기가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가로등의 주홍빛이 조그마한 창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어둑한 방의 한중간에 동그랗게 말린 조그만 덩어리가 보였다.
신로가 구둣발로 들어서도 그것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다가가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자 미약한 숨소리가 예민한 귀에 닿았다.
“죽고 싶어?”
고개를 기울인 채 답을 기다리던 신로는 한 번 더 물었다.
“죽고 싶으면 죽여 줄까?”
“…….”
“대답이 힘들면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여. 답한 걸로 해 줄게.”
열 오른 몸뚱이로 웅크린 차온하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무엇도 바라보지 않았다.
마른 팔에는 자그마한 상자가 안겨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뻗은 순간,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신로의 손을 매섭게 쳐 낸 차온하가 벽으로 붙었다.
어두운 방에서 티 없이 하얀 자위만이 형형하게 빛났다. 급작스러운 움직임으로 단박에 거칠어진 숨에서 열이 샌다.
“거…, 건드리지 마.”
숫제 누구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게 뭔데?”
뺏길 거라고 생각했는지 독이 오른 차온하가 상자를 더욱 그러안았다.
“그게 뭔데.”
모든 기력을 다 끌어서 좁디좁은 방구석으로 도망친 차온하에게 한계가 왔다. 힘없이 무너지며 천천히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도태된 작은 짐승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신로가 가까이 다가서도 이번에야말로 바르작대지 못한다. 당기는 대로 끌려와 품에 안겼다. 그럼에도 품 안의 상자는 여전히 놓치지 않았다.
경첩이 벌어져 기울어진 현관을 통과하자,
“……보물.”
희미한 목소리에 지저분한 꼴의 차온하를 내려다봤다.
그는 헛소리처럼 내, 보물이라며 중얼거렸다.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것은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귀퉁이는 삭고 구겨져 모양도 망가져 버린 상자를 차온하는 보물이라고 말했다.
“사장님, 제가.”
문밖에서 대기하던 박덕수가 안고 있는 차온하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무시했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차온하는 상자를 놓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다. 눈이 하얗게 뒤집히면서도 꽉 붙들고 있자 응급실 의사는 짜증과 피곤이 섞인 눈으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환자분-.”
보기에도 만만찮은 인상인 박덕수나 사장이라고 불리는 표정 하나 없이 냉랭한 류신로에게는 표현하지 못하고 의식도 없는 환자에게 괜한 성질을 부렸다.
“아, 진짜.”
조그맣게 짜증을 낸 의사가 상자를 잡아당기다 인상을 찌푸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신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감췄지만 말이다. 그는 현저하게 다른 눈높이에 기죽은 눈동자를 굴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류신로는 오로지 차온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다가가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였다.
“놓지 않으면 너와 함께 상자를 불태우겠어.”
나직하지만 선명한 목소리는 가까이 있던 의사와 박덕수에게 확실하게 들렸다. 당황한 의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박덕수 쪽을 바라봤다.
“지금 놓으면 그대로 뒀다가 돌려주지.”
할 말이 끝났다는 양 몸을 곧게 편 류신로가 상자를 당기자 차온하의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의식은 가물가물하면서도 서늘한 약속을 믿는 모양새다. 마침내 손아귀에서 놓게 한 류신로는 상자를 그대로 박덕수에게 넘겼다.
의사가 진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류신로는 의자에 앉았다.
“뭔지 확인해.”
허리를 숙인 박덕수는 상자를 가지고 응급실을 벗어났다.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들리긴 해도 상자는 매우 가벼웠다.
“8,904,600원입니다.”
귓가에 속삭이는 보고에 신로의 눈동자가 두툼한 손에 들린 상자에 닿았다.
딱히 대단한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보물이라며 독하게 품은 것이 고작 얼마 되지도 않는 푼돈이라는 말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가치가 있는 지폐나 동전인지 확인해 봤지만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꼬깃꼬깃한 지폐, 동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보고하는 박덕수의 표정도 오묘했다.
극심한 영양실조와 탈수 외에는 심각한 질병은 없다는 차온하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병원으로 데리고 와 꼬박 하루가 넘도록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간다.”
병실을 나서던 신로가 멈춰 서자 따르던 박덕수와 노대식도 걸음을 멈췄다.
“한 명은 남아 있다가 깨어나면 데리고 와.”
박덕수가 노대식을 돌아보자 귀찮다는 양 입술이 실룩거리다 도로 병실로 들어갔다. 상자를 만지작거리던 박덕수는 그대로 들고 신로의 뒤를 따랐다.
차온하는 사흘 만에 퇴원했다.
눈을 떠도 생기 하나 없는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보아하니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은 듯했다. 노대식에게 팔뚝을 잡힌 채 끌려오며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인사 안 하냐!”
노대식은 멀거니 선 차온하를 윽박지르고 억지로 뒤통수를 눌러 인사를 시켰다.
차온하는 작은 몸으로 버티지 못하고 눌리다 못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미? 야! 아가! 누가 보면 때린 줄 알것다, 안 일어나냐! 인사하랬더니 자빠지고 지랄-.”
맥없이 주저앉은 차온하를 잡아 일으키려던 노대식은 얼른 손을 떼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얼음보다 차가운 류신로의 시선이 떨어지고 나서야 노대식은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눈동자를 굴려 박덕수의 눈치를 살피자 나가자고 신호를 줬다.
“사장님, 저희는 대기하겠습니다.”
대답 없는 신로에게 인사하고 나가다가 문 앞에서 한 번 더 깊이 머리를 숙인 박덕수가 노대식과 함께 사라지자 사무실 안은 온하의 숨소리만 울렸다.
“너 나에게 빚졌어.”
온하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유난히도 검은 눈동자가 차분하게 마주쳤다.
“병원비, 갚아.”
제대로 알아듣긴 한 건지. 빤히 바라보는 온하를 마주하며 신로는 몇 가지 답변을 떠올렸다.
‘돈이 없으니 한 번만 봐주세요. 얼마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저는 이제 고아예요.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내가 살려 달라고 한 적 없어요. 마음대로 치료해 놓고 이제 와서 빚이라고 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때려죽여도 돈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세요.’
차온하의 하얗게 일어난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얼마, 예요?”
예상치 못한 답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관자놀이에 손을 댄 신로가 지그시 바라봐도 차온하의 표정은 다름없이 버석하고 무덤덤했다. 대답하지 않는 신로에게 온하는 작지만 분명하게 재차 물었다.
“얼마예요?”
“8,904,600원.”
실제 병원비가 얼마인지는 묻지도 않았다. 증명하라고 따지기는커녕 놀란 기색조차 없다. 미미하게 떨리는 눈으로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눠서 갚아도 돼요?”
“이자 받을 거야.”
알겠다는 듯이 끄덕이다 고개를 숙이는 온하를 바라보는 신로의 미간이 더욱더 구겨졌다. 소파 팔걸이를 규칙적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했다.
“이자가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끄덕이는 거야?”
“얼만데요……?”
“원금의 백 프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도 차온하는 그러냐는 얼굴이었다.
원금 기준 이자가 백 프로라면, 차온하가 무슨 짓을 해도 못 갚는다는 뜻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듯 흐린 눈동자를 일깨우려 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상자에 붙박였던 차온하의 시선에 그제야 이채가 돌았다.
고작 얼마 되지 않는 병원비가 아니라 차온하의 보물을 뺏고 싶었다. 당장 내놓을 수 있는 돈이 이 안에 있었다. 소중하게 품고 있었으니 그게 뭐였는지 모르고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장 갚는다면 이자 없이 원금만 받을게.”
상냥한 척 꾸민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달래자 깜박이는 시선이 겨우 상자에서 떨어졌다.
“지금은 가진 돈이 없어요. 죄송해요, 나누어서 갚을게요.”
멍청한 게 언제까지 갚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상자를 내놓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어리고 멍청해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판가름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오기를 부리는 철부지를 바라보며 신로는 이를 드러냈다. 오금 저리는 광기 어린 눈동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순간 핏줄인가 싶기도 했지만. 아니다. 차온하는 어리석은 멍청이다.
“이건, 담보야. 잘 보관하다 빚 다 갚으면 돌려줄게.”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자 차온하는 어둡게 내려앉은 시선을 상자로 흘렸다. 신로는 붉어진 눈가에 어린 번들거리는 물기를 조용히 관찰했다.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생각 바뀌었으면 말해.”
“갚는 데 오래 걸려도 상관없나요? 돈은……, 버는 대로 가지고 올게요.”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에 신로는 깔끔하게 설득을 포기했다.
“물론이야. 평생 걸린다 해도 상관없어.”
이자가 백 프로라는 말은 다음 달에 갚을 돈이 두 배가 된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갚을 수 없다. 차온하의 보물은 뺏은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기분은 저조하기만 했다.
∞ ∞ ∞
전봇대에 설치된 낡은 백열전구가 제빛을 내지 못하고 깜박였다. 노란 전구 아래로 나풀나풀 눈송이가 휘날린다. 흩날리는 눈이 상자에 담긴 잡동사니 위로 사락사락 쌓였다.
온하는 대문 앞에 서서 물끄러미 버려진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상자에는 교과서들, 허물어진 가방, 교복 등 자질구레한 짐들이 들었다.
할머니 짐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 버린 건가? 온하는 시선을 들어 밖에서 들어가지 못하게 잠가 버린 회색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온하가 자라고,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도 저 안에 고여 있다. 어둡고, 먼지 가득한 작은 방은 이제 할머니도 없고, 차갑기만 할 터다.
살아야 하나. 꼭 살아야 하나?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차갑기만 한 방바닥, 희미해지는 할머니의 냄새. 눈물조차 나지 않는 서러운 낮이 지나고 밤이 왔다.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찾아왔다. 억지로 끌어냈다.
그는 빚을 졌으니 갚으라고 종용했다.
기억하라는 듯이 남자는 온하의 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누군가에게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베풀 수 있는 고작 며칠의 병원비지만, 온하에게는 할머니가 푼푼이 모아 남겨 준 유산이다.
아무도 모르겠지.
차온하가 암 덩어리처럼 할머니를 갉아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할머니가 남겨 준 애정이 상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빚은 갚으면 된다.
할머니도 잃고, 함께한 시간도 잃고, 십오 년을 살아온 곳도 사라졌다. 모두 잃었지만 할머니의 상자는 안전한 곳에 있다.
온하는 입술을 깨물고 눈 쌓인 상자 안에서 검은 점퍼 하나를 꺼냈다. 솜 점퍼를 걸쳐도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는다. 사이즈가 커 넉넉하게 남는 품에 서늘한 바람이 가득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부끼는 눈송이가 아득하다. 볼에 떨어지는 눈송이는 차갑지도 않다. 눈송이보다 차가운 볼을 감싸 주는 사람은 없다. 얼어붙은 손가락에 입김 불어 주는 이도 없다.
아무도 없다. 온하에게는 오직 그 상자뿐이다. 가장 소중하다. 그래서 또 서럽다.
온하는 빨갛게 언 손으로 담담히 지퍼를 채우고 고개를 들었다.
파랗게 식은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인다. 웃는 듯 우는 듯 파들거린다. 하얗고 마른 손가락이 점퍼에 붙은 모자를 머리 위로 뒤집어씌우자 작은 얼굴이 어둠에 가려진다.
미련 없이 돌아선 자리에 잡동사니가 버려진 상자만 남았다. 어느새 소복하게 쌓인 눈이 교복 위에 새겨진 이름을 가렸다.
∞ ∞ ∞
차온하는 한 달 만에 삼백만 원가량의 돈을 들고 나타났다.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는 차온하에게 붙여 놓은 노대식의 보고를 받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차온하는 거의 종일 일했다. 하루 스무 시간 넘게 쉬지 않고 하는 일들이 하나같이 고됐다.
미성년자를 쓰는 곳이 드무니 시켜만 주면 온하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가리지 않았다. 이른 새벽부터 청소를 하고, 소규모 공사장에서 잡일을 도왔다. 기술이 없으니 공구를 나르거나 자재 정리를 하거나, 기술공들이 시키는 온갖 심부름이 온하의 일이었다. 엄동설한에 목장갑 하나 주지 않아서 빨갛게 언 손이 점퍼 소매 밖으로 자주 보였다. 공사장 일이 끝나는 오후 시간이 되면 물류센터에서 새벽까지 택배 상자를 분류했다.
쉬는 날도 없다. 잠도 되는 대로 따뜻한 아무 곳에서 웅크리고 두어 시간 조는 게 전부다. 택배나 공사장이 쉬어 시간이 비는 주말에는 새벽에 같이 일하는 청소업자가 소개한 사우나에서 탕 청소 일을 했다. 사우나에서 일하는 주말이 휴식 비슷했다.
원래대로라면 시급이 꽤 높은 일이었지만, 세상 물정 따위 알지 못하는 미성년자에게 제대로 된 시급을 주지 않았다.
겨우 최저 시급에서 조금 더 챙겨 주며 생색을 내도 소처럼 일한다고 보고하는 노대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주먹은 꽉 쥐고 평소보다 콧구멍은 확장되었다. 치미는 울화를 눌러 참고 있는 듯이 보였다.
노대식은 거칠고 무식해도 약한 자가 괴롭힘을 당하면 나서기를 좋아했다. 생김새가 험악하다 보니 도움을 준 상대는 도리어 겁먹었다. 목소리도 크고 행동도 거칠어 도망치기 일쑤였다.
보기만 하고 참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으면 당장에 차온하의 고용주들 멱살을 잡고 탈탈 흔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분통을 터트리며 고래고래 짜증을 내는 노대식에게 괜한 짓 하지 말라고 경고한 박덕수도 돈을 들고 온 차온하를 보고 기가 막혀 입이 벌어졌다.
한 달 새에 뼈다귀가 되었다. 병원에서 퇴원시켰을 때도 기력 없이 마르고 작은 아이였지만, 지금은 불모지에서 기아로 허덕이는 눈만 댕그란 소년 같았다.
가뜩이나 커다란 눈 주변이 퀭하니 꺼져 시커멓고 볼은 푹 들어가 제대로 끼니도 먹지 않은 듯했다.
이자가 백 프로라 차온하의 빚은 한 달 만에 천칠백만 원을 넘겼다.
제아무리 몸을 갈아서 번 돈을 모두 가져온들 절대로 줄지 않을 빚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노대식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어린애를 학대한다고 느끼는지 눈이 뾰족하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그냥 보내 주지, 애 코 묻은 돈을 꼭 받아야겠냐고 구시렁거려도 정작 류신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3,121,000원입니다.”
노대식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돌려주고 싶은지 온하의 돈뭉치를 움켜쥐고 버텼다. 박덕수가 입을 쑥 내민 노대식의 발을 짓밟자 겨우 돈을 내려놓았다.
“너-! 밥은 먹고 다니냐? 어?!”
“네.”
“목소리 봐라! 사내자슥이 모기처럼 앵앵거리고 그라는 거 아니재! 큰소리로 대답혀야지!”
웬만하면 노대식이 지르는 소리에 오줌 지리며 주저앉을 법도 한데 차온하는 겁먹는 기색도 없이 고개만 꾸벅 숙였다. 박덕수가 끊어 준 영수증을 확인도 하지 않고 주머니에 구겨 넣고 인사했다.
“한 달 뒤.”
류신로의 차가운 목소리에 차온하는 다른 대꾸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을 나섰다.
온하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서 있자 노대식이 쫓아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네.”
“밥 먹고 가!”
“아르바이트 가야 해요.”
“알거든! 두 시 반부터 택배 분류 센타 가는 거 알고 있거든?! 기냥 늦게 가! 그 자슥들이 뭐라고 하면 나가 어! 확 조사 부릴랑게. 아따, 뭐 혀? 이리 오라니께!”
“늦으면 안 돼요.”
쳐다보지도 않는 차온하의 얼굴을 보려고 노대식이 허리를 푹 숙였다.
“귓구멍 막혔냐? 나가 태워다 줄 테니께 처먹고 가.”
윽박지르는 노대식을 그제야 올려다보는 차온하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눈도 아니었고 두려움도 없다. 오히려 눈이 마주친 노대식이 오싹하니 소름이 돋았다. 새카만 차온하의 눈동자는 죽은 사람의 눈과 마주친 느낌이었다.
차온하는 이미 죽었고, 얘는 귀신인가?
노대식이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차온하는 더는 붙잡지 않는 노대식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차온하는 눈을 내리깐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멍청하게 바라보던 노대식은 문이 닫히고서야 머리를 마구 긁적이며 혀를 찼다.
“왜 그러고 있어? 대식이.”
“에이 씨부럴. 대체 보스는 왜 아를 못 잡아서 난리래?! 어? 삐짝 마른 꼴을 봐, 저러다 뒈지겠소!”
언제는 뒈졌으면 좋겠다더니.
“그냥 둬.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아니, 죽이고 싶으면 그냥 발라 버리지, 이기 무슨 놀이여! 형님이 쟈 뒤를 계속 쫓아다녀 봐-. 나가 으째서 요렇코롬 속이 터지는지 알 텡게! 깝깝해 디져 부러! 밥 좀 먹고 가랬더니 눈은 썩은 동태처럼 뜨고 멀거니 쳐보기나 허고! 에이, 씨펄!”
박덕수도 노대식도 더러운 일을 하는 건달이긴 하지만 말라 죽어 가는 어린애를 지켜보기만 하는 처지가 마뜩잖다.
차온하의 반은 보스의 핏줄이었다. 혹시 몰라 확인해 본 DNA 검사 결과는 둘이 혈연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보고했는데도 류신로는 흘려들었다.
“형님, 보스가 왜 저러는지 좀 물어봤소?”
몰라, 미친놈아.
“시끄러워. 나불거리지 말고 부지런히 쫓아가기나 해.”
“에이, 진짜 차라리 가서 최오용 모가지를 따라고 혀! 진짜! 이기 뭔 지랄이오, 지랄이! 엘리베이터 씨펄! 왜 안 와?! 에이 썅!”
노대식은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몇 초를 기다리지 못하고 비상계단으로 나가 버린다. 그의 뒤통수를 보며 박덕수 또한 혀를 찼다.
빼놓았던 인이어를 귀에 꽂고 오픈 준비 중인 카지노 매니저에게 무전을 보냈다. 곧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박덕수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돈을 벌지 못해 죽은 귀신 붙은 소처럼 일만 하던 차온하는 이후 두 달도 안 돼 쓰러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가 봐.”
류신로의 반응이라고는 미간의 주름과 책상을 두드리는 손가락뿐이었지만, 철수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박덕수는 그래서 그가 꽤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병원 입구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는 노대식을 본 박덕수는 혀를 찼다. ‘이 몸은 조폭이다!’라고 이마에 문신했어도 저 꼬락서니보다 더 그럴싸하진 않겠다.
“대식이, 여기서 뭐 해?”
삐딱하게 선 노대식이 차창 너머를 들여다보더니 냉큼 차로 올라탔다. 타자마자 운전석을 발로 걷어차며 차 돌리라고 욕을 했다.
“여긴 왜 왔소, 형님?”
“입원했다면서.”
“입원은 씨펄!”
“이 새끼가. 네가 전화했잖아.”
“나가 혔지! 입원도 시키려고 혔고! 근디 일한담서 갔다고!”
노대식이 왜 이렇게 부아가 났는지 눈치챈 박덕수가 혀를 차며 담배를 물었다.
“아니, 어린아가 왜 저렇게 독혀, 엉? 그냥 얼라처럼 힘들면 울고! 씅나면 씅내고 그래야지! 형님, 저거 중이병인가 그거요? 어? 나는 중딩 때 어? 안 저랬던 거 같은디! 아오, 나가 살다 살다 이런 기이이잎은 빡침은 또 오랜만이네! 씹, 야, 근디 니 으디 가냐!”
운전석 쪽으로 버럭 소리치자 이마가 땀범벅이 된 놈이 백미러로 노대식의 눈치를 살피며 “어, 어디로 갈까요? 형님.” 한다.
“나는 내려 주고 가야지, 등신아!”
괜한 화풀이를 하는 노대식을 두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박덕수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류신로에게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할지 속이 답답했다.
∞ ∞ ∞
“빨리 배달 갔다 와!”
비척거리면서 걸어오는 차온하를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며 주인은 짐짓 사납게 윽박질렀다.
“저번처럼 엎어 먹으면 일당 제할 거야!”
차온하는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배달 통을 드는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가게를 나서는 차온하의 마른 등을 보며 주인은 혀를 찼다. 오늘이 지나면 해고해야겠다. 싸게 부릴 수 있어 좋았는데, 더 일을 시켰다가 재수 옴 붙겠다는 예감이 든다.
“……어이구, 진짜 써먹을 놈이 없네.”
온하가 가게 문을 닫는 틈 사이로 주인의 언짢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픈 티 내지 않으려고 허리를 폈지만, 온몸의 마디마디가 욱신거렸다. 내리쬐는 태양 빛이 그리 강하지 않은 해 질 녘인데도 눈앞이 흐려졌다.
안에 든 내용물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스쿠터 뒤에 배달 통을 싣는 일도 힘에 부쳤다.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아.”
돈 벌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면 월급이 나왔다.
할머니를 도와 폐휴지를 줍곤 할 때는 하루에 이삼만 원 벌기가 힘들었다. 한 달 꼬박 리어카를 끌고 다녀도 많이 벌어야 삼사십만 원 남짓이었다. 지금은 열 배를 벌었다.
등신 같은 차온하.
진작 이렇게 할걸. 그랬다면 할머니도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병원비가 없어서 치료를 못 할 일도 없었을 거고, 장지를 정하지 못해 할머니를 몰래 강에 뿌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죽기 전까지 제 걱정만 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우리 강아지, 울지 마라. 요걸 놓고 내가 어찌 갈꼬…….」
온하는 고개만 도리질 쳤다. 그런 말 하지 말고 영원히 곁에 있어 달라고 떼를 썼다. 할머니 없으면 죽어 버릴 거라고 울었다. 할머니는 그런 말 하면 못쓴다고 달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미 없다고 죽는다느니 그러면 안 돼. 할미 속상해서 눈 못 감아. 우리 강아지, 지금처럼 착하고 바르게, 죄짓고 살지 말고 사람을 미워하지도 말고, 알았지? 열심히 살면, 그러면 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온하의 손을 토닥거리는 할머니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당시에는 상실감에 할머니의 마음은 담아 둘 여유가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걸.
숨만 쉬어도 긴 하루가 살아지는데.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는데. 약속 한마디 말 못 하고 철없이 굴었다.
어지러운 탓에 스쿠터에 올라타려다 말고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온하의 팔이 뒤로 와락 당겨졌다. 비틀거리다 겨우 균형을 잡으니 익숙한 사람이 제 팔을 끌고 있었다.
“어…….”
세 번밖에 보지 않았지만 류신로라고 소개한 남자.
그는 빚을 갚으라고 하면서도 독촉하지 않았다. 빚을 갚으러 가면 정작 돈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할머니가 남겨 준 유품을 담보라고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 달 빚은 갚았는데.
이유를 물으려다 묵묵히 걸어가던 류신로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올려다봤다.
“타.”
열린 자동차 문 안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도로 올려다보니 그는 온하를 버려두고 운전석 쪽으로 돌아갔다.
“……배달 가야…….”
맥 빠지는 목소리에 신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류신로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온하는 언뜻 그에게 인사를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빚을 갚으러 가면 매번 인사하라고 닦달당한 기억을 떠올리고 온하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왜 여기에 있어?”
눈을 끔벅거리고 있자니 류신로가 이를 갈았다.
“왜 여기에 있어.”
나직이 으르는 목소리에 온하는 뒤를 돌아 배달용 스쿠터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지금 배달 가려고,”
“병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쓰러졌다면서.”
온하는 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린 마르고 거친 얼굴을 숙이며 어색하게 콧등을 문질렀다. 들리지도 않을 낮은 목소리로 괜찮은데,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온하는 갑자기 매운 음식을 먹은 듯 콧속이 아렸다. 열이 올라서 따가운 눈을 찡그렸다. 얼굴에서 떨어진 수분이 회색빛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져 동그랗게 자국을 남겼다.
왜 이러지. 어지러워서?
아래로 떨군 시야에 매끄러운 구두코가 보였다. 턱을 붙잡혀 고개를 들자 류신로는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 울어?”
차온하는 몽롱하게 풀어져 초점이 흐린 눈을 찡그리고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빈약한 몸뚱이가 힘을 잃고 하느작하느작 흔들렸다. 백치 같은 꼴에 신로는 손에 힘을 주었다. 붙잡힌 턱이 아픈지 하얗게 일어난 입술에서 희미하게 신음이 새었다.
“무슨 생각해?”
차온하의 아랫눈썹에 수분이 방울졌다. 툭 터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신로의 손가락을 적셨다. 수분 가득한 새카만 눈동자는 생기 없이 무감각했다.
이미 죽은 것처럼.
아버지 류동하가 살리고, 제가 또 한 번 살려 낸 차온하는 빚을 갚으며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죽여 준다고 했지. 말을 하면 죽여 준다고 했잖아.”
목이 조여 모자란 숨을 조금이라도 몸으로 넣어 보려고 입을 벌린 온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순간이야.”
나직한 속삭임에 온하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하루가 가면 다음 하루가 온다. 빚을 갚아야 하니까 계속 움직여야 했다. 온하가 숨 쉬며 버티는 이유는 그뿐이다.
그런가. 더 살지 않아도 되는 건가. 그가 그래도 된다고 허락한다면…….
신로에게서 눈을 뗀 온하가 본능적으로 밀쳐 내던 손에 힘을 풀고 몸을 맡겼다.
바닥으로 눈물이 톡톡, 떨어지고 온하의 몸이 축 늘어졌다. 종잇장처럼 가벼운 몸을 안은 신로의 입술 새에서 이 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새어 나왔다.
“으어어! 형님! 아니, 보, 아니 사장님!”
쩍!
“으아이코! 내 팔!”
차창 유리와 차온하의 사이로 팔을 끼워 넣은 노대식이 엄살을 피우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기절한 온하의 머리칼을 움켜쥔 신로가 노려봐도 모른 척 눈을 마주치지 않고 능글거렸다.
“혀, 아니 사장님. 야가 뭐 실수했습니까? 아, 아파서 그럴 겁니다요. 형님, 사장님. 제가 잘 교육시킬 테니까 거, 음-….”
노대식의 눈이 온하의 머리칼을 움켜쥔 손으로 향했다. 차온하의 머리를 부숴 놓을 생각이었던 신로가 나지막이 을렀다.
“비켜-.”
노대식은 입술을 실룩이면서도 비켜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장님, 잠시.”
황급히 다가와 옆에 선 박덕수에게서도 당황한 기운이 느껴졌다.
“왜-.”
“사장님, 보는 눈이 있습니다.”
“뭘 보냐! 구경났어? 확 눈깔 뽑아 버리기 전에 안 치워!? 캭-!”
노대식이 커다랗게 소리치며 요란하게 이목을 끌었다. 신로의 주의를 돌리려는 시도였다. 때를 놓치지 않고 박덕수도 속삭였다.
“차온하는 저희에게 맡기시면 사무실로 끌고 가겠습니다. 처리는 그곳에서-,”
“아이쿠!”
늘어진 차온하를 던지듯 밀어 버리자 노대식이 기다렸다는 양 냉큼 받아 옆구리에 끼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신로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차를 끌고 사라지는 동안에도 노대식과 박덕수는 허리를 숙인 채 있었다. 차가 골목을 돌아 사라지자 그들은 겨우 허리를 폈다.
“안 그래도 다 죽어 가는 앤디, 꼭 이렇게 약해 빠진 뿌시래기를 괴롭히시는 이유를 모르겠네. 아이고, 형님. 나 팔 부러진 것 같소.”
“닥쳐, 이 새끼야. 그러게, 누가 그 사이로 팔 집어넣으래?!”
“아, 형님. 너무하시네. 얘를 봐요-. 그렇게 처박히면 대굴빡 아작 나. 요, 요, 얼굴 좀 보슈! 째까내서 눈, 코, 입 다 들어가느라 비좁은 얼굴을 보고도 그 말이 나와?”
혀를 차며 기절해 늘어져 있는 차온하를 보자니 절로 담배가 당긴다. 겨우 숨만 붙은 차온하는 시체처럼 창백했다. 박덕수는 당장에 담배를 물었다.
차라리 패라면 패고 죽이라면 죽이고, 어떤 명령도 망설이지 않겠지만, 이렇게 서서히 죽어 가는 어린애를 보는 기분이 씁쓸하다. 정말 뒷맛이 좋지 않았다.
“정말 사무실 데려가요? 그전에 닭털 강인가, 뭐시기 강인가 하는 의사 나부랭이 새끼 불러서 약이라도 쳐야 하는 거 아니오?”
“야, 이, 그 새끼가 의사냐? 약 파는 새끼지! 애한테 뽕이라도 놓을래?!”
“왜 씅질을 내고 그러슈?! 그냥 물먹은 걸레처럼 늘어진 거 데려가기보다 뽕이라도 치는 게 낫지 않것소!”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정말. 됐다, 내가 사장님한테 잘 말해 볼 테니 병원이나 데리고 가.”
“괜히 그러다 형님 불똥 튀는 거 아뇨? 거, 보스한테 강냉이가 털려도 나가 털려야, 컥!”
박덕수의 주먹은 웬만한 아기 머리통만 했다. 그만한 주먹이 정수리에 직각으로 떨어지자 혀를 깨물 뻔한 노대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기어올라라? 병원 가라는 말 안 들려!”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차온하를 옆구리에 낀 노대식이 실룩거리든 말든 박덕수는 혀를 차며 뒤를 돌았다.
∞ ∞ ∞
한 달이 더 지나고 차온하는 갚을 돈을 들고 사무실에 찾아왔다.
“백이십만 원입니다.”
금액을 들은 신로가 온하의 흐릿한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고 곁눈으로 박덕수를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이는 꼴을 보니 정말 백만 원 돈을 들고 온 모양이다.
“왜 적어?”
이전에도 대답이 빠르진 않았지만, 컨디션 탓인지 한참 입을 벌리고 서 있던 차온하가 아, 하고 눈을 깜박였다.
“……려서……. ……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박덕수를 바라보자 고개를 숙이고 대신 답했다.
“몇 군데에서 해고당한 모양입니다.”
“왜?”
차온하가 일하다 쓰러졌던 사실은 아예 잊은 듯 무심한 얼굴이다. 아르바이트가 연락도 없이 무단으로 사라졌으니 해고는 당연하고, 그중 한 곳은 오히려 손해를 봤다며 제대로 일한 일당도 주지 않았다.
가슴에 묵직한 돌을 얹은 기분이다. 박덕수는 마음을 다스리며 모르겠다고 답했다.
신로가 눈동자를 굴려 온하를 본다.
“왜?”
차온하 역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남은 빚이 얼마지?”
원금은 이미 갚았다. 차온하가 넉 달 동안 가져온 돈은 들쭉날쭉했지만 오늘까지 총 천만 원이 조금 넘었다.
차온하는 허덕이며 번 돈을 거의 빚 갚는 데 퍼부었다. 달동네 쓰레기 같은 방에서는 애초에 쫓겨났다. 교통수단도 거의 이용하지 않고 걸어 다녔다. 끼니를 제대로 챙기기는커녕 자지도 않고 학대에 가깝게 몸을 혹사한 결과다.
“34,509,500원입니다, 사장님.”
팔백만 원 남짓이던 빚이 넉 달 만에 삼천이 넘었다는데도 차온하의 멍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귀에 제대로 소리가 닿지도 않는 모양인지 눈빛도 흐릿했다.
차온하의 보물 상자를 책상 위에 놓은 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신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 사 개월로 깨달은 점이 있다면 차온하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차온하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물건을 감정하듯 꼼꼼히 살폈다.
얼굴이 왜 이따위지. 처음에도 이런 얼굴이었나.
비루먹은 개 같은 꼴이었다. 몸이 이래서야 장기를 팔 수도 없었다. 넉 달이나 지나도 역시 이것에게서 어떤 가치도 찾을 수 없다.
“약하면 죽어.”
“…….”
“죽고 싶어?”
초점 없이 흐리멍덩한 눈에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아왔다.
“그건……, 그쪽이 결정하는, 거잖아요.”
“뭐?”
“빚이, 있잖아요. 빚은 갚아야 하는 거니까 나는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살고 있어요. 내게 돈을 받아야 하는 건 류, 신로 씨니까.”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는 말이야?”
“아니요.”
“그럼?”
“류신로 씨에게 빚이 있으니까, 살아 있는 동안은 당신에게 진 빚을 갚아요. 빚이 없어지면,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에요.”
신로가 찾아가지 않았다면 차온하는 예전에 죽었을 것이다. 부실한 몸뚱이를 굴리는 이유는 오로지 빚을 갚기 위함이다. 빚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목숨조차 빚이지만, 채무 외에는 아무 연결 고리가 없다고 차온하는 단언했다. 신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사실 채무조차도 억지였기에.
여전히 왜 이것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갚지 않아도 된다고 놓아주는 순간 고리는 끊어진다. 자유로운 차온하는 훌훌 털고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문은 여전한데.
“이따위로 해서 언제 갚을 건데?”
잘도 나불거리던 입술을 감쳐물고서 차온하는 제법 형형한 눈으로 빤히 바라봤다. 멍하니 죽은 눈빛은 사라지고 흰자위에 이채가 감돌았다.
“저는 버는 대로 가져온다고 했어요. 그렇게 하고 있고요. 류신로 씨는 한 달에 갚아야 할 금액을 정하지 않았고, 평생 걸려도 된다고 했어요. 저는 잘못한 게 없어요.”
제법 똑똑하게 꾸민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소리 내서 웃고 있었다.
신로의 웃음소리에 박덕수는 소름이 끼치는 팔뚝을 쓸어 올릴 뻔했다.
“그래서 몸이 견디지 못하고 네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이렇게 벌어서 가져다 바치려고?”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상냥하게 속삭였다.
달콤하게도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리자 온하는 언젠가처럼 콧속이 아렸다. 눈가도 뜨거워졌다. 눈을 깜박이면 눈물이 흘러나올까 봐 부릅떴지만, 아무 소용없이 볼을 타고 물줄기가 흘렀다.
“네 몸이 빨리 고장 나 버렸으면 좋겠지?”
“…….”
“왜 이렇게 질기게 버티는지 모르겠지?”
“…….”
“죽을 만큼 힘든데 왜 죽지 않을까 궁금해?”
할머니가 죽은 뒤 내내 떠올린 의문을 하나하나 짚어 준 신로가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사람이 죽는 건 순간이지만, 찰나가 오기 전까지는 꽤 질기거든.”
“……정말요……?”
조용한 목소리엔 절망이 가득했다.
얼마나 더 힘들어야 죽어지지.
솟아난 눈물이 버석한 볼을 가르자 축축한 혀가 볼에 닿았다. 흐르는 눈물을 따라 눈가까지 천천히 핥은 류신로가 웃었다. 입술은 웃어도 눈은 번들번들 광기가 가득했다.
이번에는 끝내 주려나?
온하는 숨이 가빠져 왔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줄 알고?”
온하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신로가 바싹 당겨 으르렁댔다. 뿌리치는 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온하가 바닥에 꼬꾸라졌다.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한참이나 밀려 나갈 정도로 굴렀다. 어지러워진 온하는 고개도 들지 못했다.
“돈도 되지 않는 일, 그만둬. 제대로 사용해 줄 테니 시들한 몸뚱이부터 정상으로 만들어 놔.”
데리고 나가라는 말에 온하는 눈을 번쩍 떴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무릎으로 기어가서 매달리자 신로가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왜-…! 왜?! 빚, 가, 갚을게요! 왜, 왜 이래요! 내가 갚는다잖아!”
“박덕수.”
박덕수는 살기에 짜릿짜릿하게 흥분하는 몸을 억제하며 신로의 다리에 매달린 온하를 떼어 냈다. 힘이라고는 한 자락도 없는 비실거리는 몸이라 힘들이지 않고 어깨에 둘러멨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을 나서자 차온하는 격렬하게 버둥거렸다.
“왜 이래요……? 왜! 싫어, 할머니-, 할머니-!”
차온하의 시선은 류신로가 기댄 책상 위의 낡은 종이상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젖은 얼굴을 바라보는 류신로에게서는 아무런 표정도 찾을 수 없이 냉엄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