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온하는 뿌듯한 얼굴로 양손을 내밀었다.
하나는 빚을 갚을 돈이고, 하나는 식비라고 설명하는 볼이 발그레 익었다.
현관 앞에서 신로는 꽤 오랫동안 봉투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불편한 손으로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구해 주라 했더니 이번에는 봉투 덮개에 양면테이프만 붙이면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신로 입장에서는 비슷한 일이라 지급하는 돈은 같았다. 조금 더 쉬운 일인데 받는 돈이 같다는 말에 온하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심히 열중했다.
한 치도 삐뚤어지지 않으려 하는 온하에게 그거 좀 삐딱해도 돈은 똑같다고 대충하라고 노대식이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고지식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결국 조금이라도 많이 하겠다는 욕심에 화장실도 안 가고 매진하다 퇴근하는 신로도 마중하지 않았다. 거실로 들어선 신로를 뒤늦게 알아채고 벌떡 일어서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리가 저린 탓이었다.
차온하의 옆에는 갈색으로 변한 사과와 떡 같은 간식이 놓여 있었다. 일하느라 입도 대지 않고 심지어 간식의 존재 자체를 잊었다. 할머니 말을 추상같이 따르는 차온하가 먹을거리를 버려두고 말이다.
이런 식이면 아무것도 못 하게 하겠다는 협박을 듣고서야 차온하는 대책 없이 일만 하던 푼돈 집착 상태에서 겨우 벗어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일하다 말고 간식을 먹거나 노대식의 짜증 섞인 잔소리를 들으며 화장실이라도 다녀왔다.
자면서도 손을 꼼질거릴 정도로 봉투에 매달리며 일주일 정도 지나자 차온하의 손에 이십오만 원이 쥐어졌다. 그걸 제가 만든 봉투에 넣어 퇴근하고 온 신로에게 고스란히 넘긴 것이다.
하나에는 이십만 원이, 나머지에는 오만 원이 들어 있었다.
대체 어느 쪽이 식비라고 내민 걸까, 한심한 생각을 하며 신로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내일은 깁스 푸니까 이제 더 빨리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온하는 이제부터 제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충일감에 겨워 방긋이 웃었다. 입술이 휘어진 온하를 스쳐 안으로 들어가며 신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깁스를 풀 때가 되었나.
“저기, 그래서요. 깁스 풀면 전에 일했던 곳에 갔다 오려고요.”
쫑쫑 신로를 쫓아가던 온하는 갑자기 멈춰 선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왜?”
“저 제법 단단해진 거 같아서요.”
쑥스러운 듯 방시레 웃는 차온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은 신로의 입술이 한쪽으로만 치켜 올라갔다.
“따라와.”
신로는 앞서 나가 버렸다. 온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긴 했지만, 어디로 가냐고 묻지 않고 도로 현관을 나가는 신로를 따라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에 앉아 있던 관리인이 신로가 들어서자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운동하시려고 하십니까, 사장님?”
“따라오지 마.”
“예? 예.”
고개를 숙인 관리인은 신로의 뒤를 따르는 온하를 의문이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너는 누구냐는 시선에 온하 역시 당신은 누군데요, 하고 응수했다. 신로의 뒤를 따르느라 의미 없는 눈싸움은 금세 끝났지만.
“올라서.”
신로가 트레드밀 앞에 서서 턱짓을 했다. 온하는 의심도 없이 검은 기계 위로 올라가 신로를 바라봤다.
한 계단쯤의 높이에 올라서니 신로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온하는 기분이 오묘해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신로는 온하가 웃든 말든 어깨를 잡아 앞을 바라보게 돌려세웠다. 온하는 그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라도 하라는 대로 따랐다. 신로가 기계 계기판에서 시작 버튼을 눌렀다.
주행 벨트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어벙하니 서 있기만 하던 온하는 그대로 뒤로 밀려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 내려서려던 노력이 무상하게 비틀거리며 양손을 파닥거리다 주저앉을 뻔하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신로는 웃음기 하나 없이 어설프게 버둥대는 온하를 바라보기만 했다. 온하는 표정 없는 신로를 바라보다 다시 느리게 돌아가는 기계를 바라봤다.
택배 분류 작업할 때 쓰이는 컨베이어 벨트 비슷하다. 벨트 길이는 택배 창고에서 본 것보다 훨씬 짧고, 물건을 나르는 용도라기에는 쓸모가 없어 보인다. 더군다나 창고에서는 사람은 벨트 위에 절대 올라가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침을 꿀꺽 삼키고 신로의 눈치를 살폈다. 뭔지는 모르지만 류신로는 온하가 벨트 위로 도로 올라가길 바라는 기색이다.
누군가 사용하고 있으면 보고 따라 할 수 있을 텐데.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온하는 입에 힘을 주고 결심했다. 느릿느릿 기계 앞으로 걸어가 빙빙 돌아가는 벨트를 내려다보았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벨트에 온 신경을 쏟으며 올라설 타이밍을 쟀다.
느리니까……. 움직이지만 그래도 느리니까 괜찮겠지. 올라가면 밀려서 떨어지기 전에 앞으로 달려가 볼까? 일단 올라가자.
온하는 눈을 꽉 감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굳은 결심을 하고 발을 번쩍 들었다. 막 발끝이 닿기 전에 다행히도 벨트의 움직임이 멈췄다.
안도하며 이제야 편히 올라서려는 온하의 몸이 어느새 다가온 신로에게 잡혀 번쩍 들렸다.
“걸어야지, 가만히 서 있으면 어떡해?”
나직하게 타박하며 벨트 위로 올라가 기계를 작동했다.
“아…….”
그런 거구나. 달릴 생각만 했던 온하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고 신로의 목을 한 손으로 끌어안은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빠르게 움직이는 벨트 위를 신로는 거침없이 걷고 있었다. 온하를 안고 있는데도 긴 다리가 한 번 휘청이지도 않았다.
“신기해요…….”
“그런 기계야. 신기할 거 없어.”
아래로 내려선 신로가 다시 온하를 벨트 위에 올려놨다.
“이번에는 움직여.”
“아, 네.”
신로가 어떻게 하는지 봐 뒀으니 이제는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온하는 그를 올려다봤다.
“옆으로 걸을 거야?”
“아.”
앞쪽을 보며 몸을 바로 하자 신로는 조금 전과 같이 버튼을 작동시켰다. 속도가 느려서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었던 온하는 방긋 웃으며 신로를 보는 여유도 부렸다.
“이제 할 수 있지?”
“네.”
삑, 삑, 삑. 류신로가 무심하게 버튼을 눌렀다. 기계음이 울리고 벨트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당황하는 사이 거의 뛰듯이 걸어야 할 정도로 빨라졌다. 온하는 신로 쪽으론 눈길 줄 새도 없이 바삐 걸음을 옮겼다.
물건을 옮기기에는 너무 짧은 이 기계의 용도를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고문 기계였던가. 샘물처럼 땀이 솟구쳤다.
신로는 바싹 긴장하고 걷는 온하를 조용히 지켜만 봤다.
십 분쯤 지나자 숨이 턱까지 차올라 온하는 기어이 비틀거렸다. 비로소 벨트를 멈춰 준 신로가 기우뚱 기울어지는 온하의 몸을 받아 안았다.
“겨우 스피드 8로 비틀거리면서 단단해졌다고 하지 마.”
온하는 말할 기운도 없었다. 숨만 허덕대며 잠깐 사이 땀에 젖은 몸을 신로에게 기댔다.
“매일 아침 식사하고 나면 내려와서 운동해. 스피드 8로 30분 정도 걸어도 조금 숨찬 정도가 되면 단단해졌다고 해 줄 테니. 그전에는 어림없어.”
“…….”
“알아들었어, 차온하?”
온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한다. 될 것 같지가 않은데.
그래도 별수 없이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보낼 테니 관리해.”
“예, 사장님. 고객님 성함을 알려 주시면 고객 카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차온하.”
관리인에게 이름을 일러 준 신로가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저 일 하러 나갈 수, 있을까요……?”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던 신로는 문득 거울처럼 전신을 비추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지독하게 저를 닮은 낯선 남자가 보였다.
표정이 굳어지자 익숙한 얼굴이 되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의가 치밀 정도로 낯선 자의 모습이었다.
차온하의 신음이 새고서야 지나치게 꽉 안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에서 힘을 풀었다.
“……왜요?”
“아냐, 아무것도.”
신로는 조용히 중얼거리고 차온하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고작 십 분 만에 이마가 땀범벅이다. 촉촉하게 젖은 이마를 훑어 주자 아이는 크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정리했다.
“이상한 게 옮나 봐.”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고 무구하게 올려다보던 차온하는 그저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 ∞ ∞
“온하야, 니 깁스 처음이재?”
“네.”
병원에서 대기 중인 온하에게 낄낄 소리 내 웃으며 노대식이 이를 드러내고 놀렸다.
“그거 풀면 인자 팔에 털이 숭숭 자랐을 거여! 우리 온하, 남자다잉!”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 소리였는데 온하의 눈이 반짝거렸다.
“털, 이 자라요?”
“이…, 그렇고말고. 수북……. 그챠?”
옆에 서 있던 수하에게 말을 걸자 격하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말입니다, 형님.”
들었쟈? 하며 바라보자 온하는 깁스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차온하 님-.”
간호사의 부름에 발딱 일어나 처치실로 가는 온하의 발걸음이 기분 탓인지 신나 보였다.
“생긴 건 여시 같은 기, 꼴에 남자라고 털은 많았으면 허나 보네. 같잖은 게 귀엽쟈?”
“그렇지 말입니다, 형님!”
“그래도 눈깔 조심혀라? 사장님 눈에 띄면 대굴빡 뽀사징께.”
노대식이 하는 말은 다름 아닌 이미 두 차례나 머리가 터진 본인에게 해당했지만, 부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늘어서 있었다.
“안녕하신가, 노대식이.”
다리를 가볍게 떨며 무심히 고개를 돌린 노대식의 낯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우연히 나타났다고 하기에는 몹시 수상쩍은 놈이 히죽대며 복도 끝에서 건들건들 걸어오고 있었다.
최오용은 변덕이 심한 더러운 성격에 기본적으로 의심이 짙어 능력 있는 놈을 곁에 오래 두는 법이 없었다. 몸 한 군데가 잘리거나 부러져 영구적인 손상을 입고 말단으로 밀려나든, 어느새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든 둘 중 하나였다. 그 와중에 요리조리 몸을 사리며 버티는 유일한 미친놈이 저 임문기라는 놈이었다.
“이 배암 새끼를 보게, 군번도 안 되는 새끼가 지금 누굴 부른 겨?”
‘이무기’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지만, 제 동료를 팔고 모함해 미꾸라지처럼 살아남은 놈에게 과분한 별명이라 그리 불러 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딴에는 같잖은 별명이 마음에 드는지 등에 구렁이 문신을 새겼다. 좋으면 혼자나 할 것이지 애인 몸에도 문신을 강요하는 변태 새끼였다. 몸 어딘가에 강제로 징그러운 문신이 새겨지고 어디론가 팔려 간 여자가 수도 없었다. 하여튼 간에 최오용이나 임문기나 오십보백보로 변태에 미친 새끼였다.
아니지, 오용파는 다 쓰레기 잡놈들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해서 왔지. ……어딨어?”
“지랄 싸지 말고 곱게 보내 줄 때 후딱 끄져라?”
“이혜리 애새끼, 어딨어? 저긴가?”
처치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임문기의 앞을 가로막은 노대식이 살기를 뿜으며 이를 드러냈다.
“확! 대굴빡 함몰시켜 버릴라. 귓구멍이 막혔나, 시방 나가 끄지라고 혔어, 안 혔어?”
목덜미를 손으로 주물럭거리던 임문기가 눈을 치켜뜨며 입술을 비틀었다.
“이혜리를 쏙 뺐더만? 여우 같은 그년하고 아주 판박이라 깜짝 놀랐지 뭐야?”
“주둥이를 확 잡아 뜯어 불라. 누굴 닮았든 뭔 상관이여, 쓱 끄지라고-! 진짜 죽여 버리기 전에.”
“니들이 뭔데 부자 상봉을 방해해?”
“뭐여?!”
“이혜리 새끼면 당연히 우리 형님이 아버지 아니겠어? 그년하고 빠구리 뜬 놈이 한둘이 아니긴 해도 싸지른 좆물 무게로만 치면 우리 형님이 최고 아니겠냐고. 확률적으로다가 당연히,”
순간 눈이 돌아간 노대식이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스테인리스 쓰레기통을 들어 휘둘렀다. 사방을 울리는 파열음과 비명이 복도에 난무했다.
쓰레기통에 맞아 쓰러진 건 임문기가 아니라 놈의 뒤에 있던 오용파 중 하나였다. 부하를 방패 삼아 뒤로 물러난 임문기가 비리게 웃었다.
“성질머리 하고는.”
“이 후레잡놈의 새끼!”
달려드는 노대식과 백류파, 그리고 임문기와 오용파가 병원 복도에서 잔뜩 흥분한 채 일촉즉발로 맞부딪혔다. 연장 없이도 충분히 흉흉한 조폭의 기세에 환자를 비롯해 간호사들까지 멀찍이 물러섰다.
“……대식 님?”
욕설이 난무하는 사이로 작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노대식이 임문기의 멱살을 잡은 채 소리 나는 쪽을 돌아봤다.
깁스를 풀고 나온 온하가 문을 잡은 채 서서 동그랗게 뜬 눈으로 노대식과 임문기를 번갈아 봤다.
“허어-, 이거야 원. 직접 보니 뭐, 형님이 안달할 만하네.”
“어허! 보지 마, 에비! 드러운 거 옮아야?”
냅다 임문기를 팽개치듯 밀어낸 노대식이 손을 휘저어 시선을 끌며 얼른 온하의 주의를 돌렸다.
병원의 보안팀이 달려오는 기척에 임문기도 혀를 차며 물러났다. 오용파가 다가오는 보안팀을 막아서며 소란이 일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당장 나가 주세요!”
“알았어, 알았어. 갈 거야. 잠-깐, 볼일만 보고 갈 거거든.”
“잠깐은 무슨 잠깐이요! 당장 나가요! 여긴 병원입니다! 다른 환자분들에게 피해가 가니,”
“우리도 환자 있거든. 저기 봐. 사람이 피를 질질 흘리는데 병원에서 환자 차별하는 거 아니지?”
노대식에게 후려 맞고 피를 흘리며 기절한 놈을 가리키자 보안팀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저으기, 덩치 큰 형님이 애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사실 우린 아무것도 안 했어?”
건들거리는 오용파가 이를 드러내며 노대식을 손가락질했다.
빤히 쳐다보는 온하의 시선에 노대식은, “빡치게 해서-….” 하고 꿍얼꿍얼 변명했다.
“차온하?”
임문기가 고개를 길게 빼며 짐짓 다정하게 꾸민 목소리로 온하를 불렀다. 대번에 노대식은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부르지 마라, 엉?”
“네 아버지가 기다리셔. 같이 가야지?”
온하를 보호하듯 막아선 노대식이 임문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무슨 헛소리! 야는, ……씨펄!”
임문기는 더 해 보라는 양 건들건들 머리를 흔들었다. 손을 입 앞에서 빙빙 돌리며 놀리는 임문기의 재수 없는 낯짝에 노대식은 분해서 이가 갈렸다.
온하 앞에서 사실을 말할 수도 없고, 울화병이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 아저씨가 내 아버지를 알아요?”
“그럼! 나랑 같이 가면 만날 수 있어. 자, 이리 오렴?”
임문기가 내미는 손을 빤히 바라보는 온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노대식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아니여! 네 아버지는 우리 형님이여!”
……라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사실을 말해도 머리가 깨지고, 말 안 해서 온하가 저걸 따라가기라도 하면 깨지는 정도로 안 끝난다. 두통이 몰려왔다.
그냥 온하가 또 화가 나서 다시는 얼굴을 안 보여 준다고 해도 일단 여기서 데리고 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대식 님.”
“으으응?”
온하를 달랑 들어 올리려고 두 손을 펼치던 노대식이 그물에 걸린 듯 멈춰 버렸다.
“돌아가요.”
“어-…?”
“돌아가요.”
“어! 그랴! 그래야지! 어, 그래야지!”
삽시간에 걱정 근심이 사라진 노대식은 통쾌하게 웃었다. 그가 손짓하자 백류파는 겹겹이 둘러싸며 온하를 보호하고 오용파를 막아섰다.
“돌아가긴, 야! 어디 가?!”
“일하러요. 이천 장만 더 붙이면 오만 원 받아요.”
“뭐, 오만 원? 무슨 소리야? 야! 내 말 못 들었어? 네 아버지가-.”
“내가 왜 보러 가야 해요?”
감정이라고는 한 자락 담기지 않은 차온하의 눈빛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싸늘했다. 노대식은 이전에 저 새카만 눈동자를 볼 때마다 복장이 터졌다. 지금 보니 새삼스럽게 안심이 된다. 저런 눈의 차온하는 무슨 소리를 해도 듣지 않고 고집이 쇠심줄이었다.
“아니, 아버지니까 당연히 봐야지. 안 보고 싶어? 기다리고 계시다니까? 우리 회장님이 얼마나 너를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
“회장 같은 소리 허고 자빠졌네.”
노대식이 입술을 이죽거려도 상황 파악이 안 된 임문기는 애가 닳아 온하를 얼렀다.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왜 모르는 사람이야! 아버지라니까?! 유일한 가족인데, 당연히.”
“내 가족은 할머니뿐이에요.”
입이 떡 벌어진 임문기를 뒤로하고 온하가 몸을 돌렸다. 히죽 웃은 노대식이 주먹 쥔 손가락 사이로 엄지를 내놓으며 욕을 하고 아이를 따랐다.
아이고, 꼬시다.
신나는 발걸음으로 온하를 따라나서는데 임문기가 본색을 드러냈다.
“아─…나, 간만에 뚜껑이 화악! 열리네. 친절하게 말하니까 우스워? 하여튼 주제 모르는 쌍년 기질은 내력인가? 시건방도 아주 쏙 뺐어?”
저 껍데기를 확 발라 버릴 새끼가. 주둥이 놀리는 것 보소. 나가 온하만 아니면 당장 저 뱀 새끼 혓바닥을 뽑아 버리는 건데, 미쳐 부리것네. 오매, 울화가 치밀어서 막 어지러워 부러-!
노대식은 팔자에 없는 인내를 모두 끌어모았다. 이마에 굵은 핏대가 솟았지만, 긴 심호흡으로 가까스로 화를 다스렸다. 노대식은 귀찮은 기색으로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확-, 저 후레잡놈을 그냥! 대충, 막아. 장소가 허벌 눈이 많아 부리니께 괜히 여서 연장질은 허지 말고, 알았쨔?”
“예, 형님!”
“우린 가자, 온하, 어-? 온하야, 같이 가야지!”
고개를 돌리자 그새를 참지 못하고 온하는 벌써 앞으로 총총히 멀어지는 중이었다.
“온-.”
순간 다른 쪽 통로와 교차하는 복도 벽 뒤에 숨어 있던 오용파 놈이 번개같이 튀어나와 온하의 몸을 붙잡았다.
“이 개새끼가-!”
노대식의 인내심은 거기서 끝나 버렸다.
빠악-! 눈이 뒤집힌 노대식이 온하를 붙든 놈의 머리채를 잡고 벽에 박아 버렸다. 문제는 거센 기세에 놈에게 잡혀 있던 온하도 덩달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는 점이다.
“으헉! 아이고! 온하야!”
허둥지둥 뛰어오는 노대식 쪽으로 몸을 돌리던 온하의 눈이 커졌다.
“아….”
퍽―!
깨진 대형 화분의 잔해가 노대식의 몸을 타고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새어 나온 핏물이 이마로 주르륵 흘렀다.
“허-, 이, 씨펄. 어떤 잡것이-…….”
눈을 희게 뒤집고 뒤를 돌아보자 화분을 집어 던진 놈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두툼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쓰윽 쓸던 노대식이 묻어 나오는 피를 보며 혀를 찼다.
“씹, 꼬맨 데 또 터져 부렸네. 후우…, 야, 니는 인자 디-졌어!”
얼굴이 피범벅이 된 노대식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휠체어의 링거 거치대가 들려 있었다.
“내 별명이 뭔지 알아, 븅신아?”
노빠따. 서울 지역에서 조직에 몸담은 건달 중에 노대식의 별명을 모르는 놈은 거의 없을 터다. 노빠따 손에 뭐가 쥐어지는 순간 끝이라고, 그런 소문이 파다했다.
같잖다고 비웃는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자 마주 보고 있던 놈이 덜덜 떨며 위협의 소리를 내질렀다.
“씨, 씨발! 덤벼!”
품에서 잭나이프를 꺼낸 놈이 벌겋게 흥분한 얼굴로 팔을 휘둘렀다.
“놀고 있-, 엌! 온하야!”
잭나이프를 든 놈의 팔뚝에 가는 팔이 휘감겼다. 가만히 어딘가 찌그러져 숨어 있진 못할망정 차온하가 놈에게 매달렸다.
“헉! 씨발! 뭐야! 안 놔?!”
놈은 대단치도 않은 작은 아이에게 붙잡혀 대경실색했다. 얼굴이 허옇게 뜨는 꼴을 보니 놈의 간덩이가 콩알만 한 게 분명했다. 놈은 오두방정을 떨며 온하를 털어 내려 칼 든 팔을 위험하게 휘둘렀다.
“으아악! 온하야!”
자칫 온하가 잘못될까 봐 노대식은 다가가지도 못했다. 안절부절못하고 간이 쪼그라들어 비명만 질렀다.
쟈가 왜 저런대!
힘도 없고 몸도 얄팍한 온하는 질질 끌려다니며 휘청거리면서도 끝내 잡은 팔을 놓지 않았다. 더불어 야무지게 물기까지 했다.
“으아아악! 씨발!”
그 바람에 칼을 놓친 놈이 대신 온하의 머리카락을 잡아채 배를 걷어찼다. 복도 벽에 내동댕이쳐진 온하가 밀짚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삐이이이-!
“모두 꼼짝 마!”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몰려든 정복 경찰들과 그에 합세한 보안팀이 주변을 둘러싸자 놈은 온하를 더 응징하지 못하고 팔뚝을 감싸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경찰들이 있건 말건 식겁한 노대식은 링거 거치대를 냅다 던지고 허둥지둥 온하에게 달려갔다.
“온하야! 온하야! 아가! 정신 좀 차려 봐!”
거의 울먹임에 가까운 호통을 치며 노대식이 정신을 잃은 온하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저, 저기-…. 그, 그렇게 흔드시면-….”
멀찍이 물러서 상황을 지켜보던 익숙한 얼굴의 레지던트가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야, 야가…! 머리를 시게 받았는디!”
“알아요. 보고 있었으니까. 일단, 내려놓으세요.”
“온하야-, 아가. 정신 좀 차려 보아…….”
울먹울먹, 노대식이 떨리는 목소리로 온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동시에 움찔 몸을 떤 온하가 눈을 떴다.
“온하야! 정신이 들어?! 니가 뭘 한다고 거길 끼어들어, 끼긴! 몸도 요렇코롬 등신같이 약하면서 뭐 하는 짓이당가! 미쳤냐! 엉?!”
큰소리로 잔소리를 퍼부어도 온하의 시선은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 온하가 여전히 몽롱하자 조바심이 난 노대식이 레지던트를 다그쳤다.
“야가 맛이 갔잖어! 왜 이려! 머리 박아서 바보 된 겨?! 야가 원래 바보같이 우직하긴 한디, 거기서 더 바보 되면 노망이여! 야 나이가 몇인데 벌써 노망나면,”
“저, 저기-, 잠시 진정 좀…….”
“나가 진정하게 생겼어! 이 후레잡새끼, 이 새끼 어디 갔어, 아주 모가지를 뽑아 버릴랑게!”
눈이 뒤집힌 노대식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노성을 터트리자 경찰의 등장으로 잠시 소강상태가 된 복도가 쩌렁쩌렁 울렸다.
“야이-, 너 이, 씹, 개새끼야, 너.”
경찰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노대식이 벌떡 일어났다.
“으헉! 우,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쏜다!”
전기총을 빼 든 경찰이 노대식을 겨냥하며 경고했다.
“뭐여, 지금 날 쏘게? 아가 쓰러졌는디, 잡아야 헐 놈들은 두고 누굴 위협혀? 쏴 봐-! 쏴! 쏴 봐!”
“아, 안 움직이면 안 쏠, 우, 움직이지 말라니까! 안 들려요?!”
“들려, 이 썩을 놈의 짭새,”
“대식 님-….”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곧바로 얌전해진 노대식이 잽싸게 온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가! 나 불렀냐? 이제 정신이 들어?”
온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꿈틀거린다. 노대식은 얼른 등을 받쳐 줬다.
“움직이면 안 좋은 거 아녀? 살살 움직여, 입원혀, 온하야! 머리가 돌아 버리면 안 돼야, 입원혀서 어? 그 엠알아이인가 뭔가도 찍고 아주 종합적으로다 샅샅이 검사허자!”
“……괜찮아요. 안 아파요.”
“니가 의사여?! 이봐-, 레지 양반! 야 좀 입원시켜 줘, 어? 어디 분명 아픈디, 야가 둔해서 모르는 거여! 안 아플 리가 없잖어! 기절했는디! 니-! 니! 또 어른들 대화하는 데 끼어들면 아주 크게 혼내 줄 거여!”
목소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흥분한 노대식을 멍하니 보던 온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치료는 대식 님이 받아야 할 것 같아요. 피 많이 나요.”
“어? 어? 나? 아, 이런 건 기냥 핥으면 나서. 나는 걱정 마러. 나가 열이 올라서 피가 좀 꺼꾸로 솟은 겨.”
온하의 시선이 천천히 레지던트에게로 향했다. 검은 눈동자가 진실을 묻고 있었다.
사실 노대식의 상태가 가볍진 않았다.
노대식이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싶을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차온하도 검사받는 편이 나을 테지만……. 노대식은 재수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레지던트는 생각했다.
“음, 온하 씨는 입원하는 게 좋겠어요. 이분 역시 치료받아야 하고요.”
“아, 나는 별거 아니랑께…….”
광견병 걸린 개처럼 날뛰던 노대식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부끄러운 듯 코를 훌쩍거리는 모습이 기막힐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이게 무슨 소리지? 어딘가에서 아련하게 익숙한 트로트가 들렸다. 살벌한 분위기의 복도에 주책없는 트로트 노래가 가득 찼다.
노대식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한참 내려다보았다. 우울한 얼굴로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고 전화를 받았다.
“예-…, 형님. ……예, 입원시키려고요, 아니, 겉으로는 멀쩡한데 혹시 모르잖아요. 예, 예. 아따, 알아요. 예. ……나야, 뭐, 즌화 받는 거 보면 모르것수? 예, 괜찮아요…. 형님, 근디 병원 좀 후딱 와 주셔, 아. 알았소.”
뚱하니 전화를 끊은 노대식이 잇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아야, 입원허자? 결과 보고 아-무 이상 없다고 하면 가면 돼야?”
달래듯 말하는 노대식을 뚱한 얼굴로 올려다보던 온하의 눈동자가 옆으로 흘렀다.
“저…….”
노대식에게 다가온 경찰이 수갑을 들고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을 체포합니다. 서로 같이 가주……오.”
앳된 얼굴의 경찰은 체포하려는 건지 부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게 공손한 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엉? 아, 그려. 근디 우리 아가 병실에 드가는 거 보고, 보호자 오면 그때 가도 돼야? 얼라 혼자면 불안허자너.”
“안 되는데-. 안 돼요. 지금 가야 합니다.”
“안 돼야, 야를 혼자 두고 절대 안 가야?”
파리하게 질린 채로도 제 업무를 수행하고자 수갑을 들어 올리는 경찰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보소, 사람이 시방 오고 있다고 혔어, 안 가겠다는 기 아니라-,”
“예?! 조폭이 더 온다고요?!”
경찰이 빽 소리를 지르자 건들거리면서도 순순히 호송되던 놈들의 눈이 돌변했다. 백류파가 몰려오고 있다고 받아들인 오용파가 눈을 부릅뜨고 욕설을 퍼부었다.
“백류파가 다 온다잖아! 썅! 이거 놔-!”
“헉! 가만히 있어!”
조폭 하나에 경찰이 두엇은 붙어 억류하려고 애를 쓰며 고함을 지르자 복도는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리 애들도 불러! 씨발!”
난데없이 들썩이며 발광하는 놈들을 돌아본 노대식이 황당한 얼굴로 혀를 찼다.
“왜 또 지랄병이 나서 염병들이여…….”
노대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눈으로 피가 흘러들자 따가운지 끔벅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이거 안 놔! 우리 애들도 부르라니까! 지랄하는 놈들 사이로 임문기를 찾던 노대식이 혀를 찼다. 뱀 새끼가 딱 저답게 이미 몸을 뺀 모양이었다.
“하여튼 이봐-, 짭새 양반.”
“……예?”
“나가 부탁 좀 할게, 오래 안 걸릴 겨.”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레지던트가 퍼렇게 질려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생침만 삼키는 경찰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몇 달 전 제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무섭지. 이렇게 피를 질질 흘리면서 웃으면 이빨에 피가 끼여서 아주 괴물 같고 뭐, 나도 이해해요.
속으로 중얼거리며 경찰의 어깨를 툭툭 친 레지던트가 입을 열었다.
“이분은 지금 치료부터 하셔야 해요. 동행하셔서 치료가 끝나면 연행하시죠.”
의사의 말이니 변명거리가 생긴 경찰이 그제야 환하게 밝아졌다.
노대식은 분위기도 잘 맞추고 제법이라고 웃어 주며 엄지를 척 올렸다.
핑계가 아니라 당신 정말 치료해야 하거든요.
“뭐, 그래서 다 같이 이동하시죠. ……처치실로.”
레지던트의 안내에 움직이며 노대식은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온하에게 의견을 물었다.
“온하야, 안 어지럽냐? 머리 심하게 박으면 막 토하는 놈들도 수두룩혀. 어디 저리거나 찌릿찌릿허거나 보자…, 아! 눈앞이 침침하거나 그러진 않어?”
“괜찮아요.”
“이기 몇 개여?”
손가락을 두 개 펼치고 마구 흔들며 묻는 노대식은 매우 진지했다.
“……두 개요.”
“이건?”
“세 개요.”
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답하는 차온하나 다섯 살 취급하며 안달하는 노대식이나 퍽 신기한 광경이었다. 레지던트야 노대식의 오버가 처음이 아니라 무심하게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지만, 곁에 있던 경찰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기 아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앞서가던 레지던트는 입술을 삐딱하게 비틀었다. 남모르게 한껏 비웃음을 지었다.
∞ ∞ ∞
병원에서의 일은 큰 소란을 일었음에도 단순 시비로 결론이 났다. 주고받은 폭력에 관해서는 서로 합의했고, 병원에서 일으킨 소란 역시 병원 쪽에서 고소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해 파손된 부분에 대한 손해 배상만 진행되었다.
겉으로는 그렇게 큰 문제 없이 부드럽게 마무리된 것으로 보였다.
온하의 병실에는 박덕수가 가 있었다.
류신로는 병원에서 공격당했다는 소리를 듣고도 자정이 다 되어 가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자꾸만 살기가 끓어오른 탓이었다.
신로는 조만간 최오용이 움직이리라 이미 예상했다. 무식하게 정면으로 들이받든, 뒤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든, 어떤 식으로든 차온하에게 접근할 것을 알았다.
모르지 않았음에도 소식을 들었을 때는 뱃속이 서늘하게 식었다. 손에 익은 장도를 가까이 두고 이성을 제어하려고 노력했지만, 들끓는 화는 차온하가 무사하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진정되지 않았다.
툭하면 아프고 가볍게 스쳐도 별스럽게 다치는 차온하였다.
당장 마주하면 섬약하기만 한 차온하를 제 손으로 부수어 버릴 것처럼 화가 났다.
김인희에게서 호출이 있지 않았다면 절대로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을 터다.
온하가 입원한 병원은 김인희가 경영권을 가진 계열사였고, 그게 아니라 해도 이 정도로 소란이 일었는데 모를 여자가 아니었다. 당연하게 최오용도 불려 왔다.
정작 불러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오용은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유영 그룹의 셋째 딸이 이번에 귀국한다며, 바이올린 전공인 그녀에게 좋은 바이올린을 선물하려는데 그쪽으로 아는 바가 없어서 난감하다는 등의 쓸모없는 소리였다.
뻔뻔한 최오용을 바라보는 신로의 시선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귀담아듣는 듯이 보였다. 김인희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비서에게 손짓했다.
비서는 들고 온 태블릿을 조작해 저녁 뉴스 보도 영상을 틀어 주었다. 카메라는 엉망이 된 병원 내부를 비추다가 이내 경찰서로 화면이 바뀌었다. 일부러 통일이라도 한 양 전부 검은 옷의 조폭들이 비쳤다. 재킷을 뒤집어써 얼굴을 가린 백류파와 오용파가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있다.
우연히 병원에서 마주친 두 개의 폭력 조직이 난동을 부린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결론을 내린 앵커의 보도가 끝나자 화면이 정지됐다.
“이런 뉴스, 어떻게 생각하나요? 두 분.”
최오용이 초조하게 두 손을 꽉 쥐고 있다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젊은 놈들이 혈기가 넘쳤나 봅니다. 저희 애들이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김 여사님.”
못마땅한 눈빛으로 고개 숙인 최오용을 바라보던 김인희의 시선이 신로에게 닿았다.
김인희는 골자 그대로 조직 간의 사소한 다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최오용도 그 사실을 알지만,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그저 우연이며 어쩌다가 그런 것이라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확실히 교육시키겠습니다. 백류파와 저희는 한 식구 아닙니까? 그렇지, 신로야?”
최오용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동조하지 않고 뭐 하냐고 신호를 보냈다. 김인희는 신로가 어떤 대답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에는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뭐-!”
자리를 잊고 흥분한 목소리를 내지른 최오용이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최오용은 미간에 주름이 잡힌 김인희의 눈치를 살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화를 삭이느라 숨소리가 시근덕거렸다.
“오늘 병원에서 있었던 소란은 죄송합니다. 제가 모두 보상하겠습니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가락으로 눈가를 짚고 있던 김인희의 얼굴에는 드물게 미소가 없었다. 권력과 재력을 동시에 가진 여왕이 본모습을 드러냈어도 신로는 줄곧 침착했다.
“오용파와 백류파는 기질 자체가 다릅니다. 아버지의 백류파와 제가 유지하는 백류파도 다르겠지요. 하지만 별다른 일이 없다면 저는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백류파를 유지하려 노력할 겁니다. 백류파는 여전히 류동하의 백류파입니다. 아직은-, 말입니다.”
마지막 말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최오용을 보며 덧붙였다. 의례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최오용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을 억지로 내리누르는 모습이 볼만했다.
“마지노선이 어디야, 류 사장?”
“차온하입니다.”
“약점을 그렇게 드러내도 되는 거야, 류 사장?”
김인희가 웃으며 물었다.
신로는 지금도 왜 아버지가 충분히 예상하고도 최오용의 함정에 빠졌는지, 왜 마지막 순간에 차온하를 지키라 했는지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신로에게 차온하는 저들이 생각하는 약점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보이도록 유도했을 뿐이다. 특히 최오용에게.
가진 자격지심이 많아 무시당하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 최오용의 판단력을 흐릴 장치 중 하나였다.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는데 신경을 긁는 불유쾌함이 기분을 저조하게 가라앉혔다.
“모두가 아는 것을 숨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그도 그러네.”
만족한 듯 김인희가 웃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백류파와 오용파를 각각 쓸모 있게 유지하고 싶으면 차온하가 무사해야 한다고 말한 바나 다름없음에도 김인희는 크게 기분이 상한 듯 보이지 않았다. 신로가 한 말의 속뜻을 최오용 역시 알아챘다.
건드리지 말라고 대놓고 말한 것이다.
찍어 누르고 싶던 여자 앞에서 망신을 당한 최오용이 가만히 넘어갈 리 없음을 김인희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신로가 일부러 최오용을 자극했다는 사실도 이미 눈치챘다. 화를 참지 못하고 얼굴색이 붉어진 최오용을 보는 눈이 곱지 않다. 한심하다는 빛이 역력했다.
“최 사장, 내가 류 사장하고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옆의 룸에서 잠시 기다리겠어요? 아니면 돌아갈래요?”
“……기다리겠습니다.”
이를 악문 최오용이 고개를 숙이고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룸을 나서자 김인희가 싱긋 웃었다.
“그래서 아이는 지금 어떻대?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류 사장? 내가 너무 오래 잡아 뒀나?”
“괜찮다고 연락받았습니다. 하지만 곧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길게 붙잡지는 않을게. 내가 요즘 고민이 조금 있는데, 부끄럽지만 류 사장 의견을 좀 듣고 싶어서.”
“말씀하십시오.”
“나에게 애인이 둘 있었어요.”
수줍은 척 가장한 미소를 짓고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애인은 그저 비유였다. 에둘러 표현하며 사방에 지뢰를 심는 게 신로가 파악한 김인희의 어법이었다.
“두 명은 아주 성향이 달라서 서로 가진 매력도 다르거든. 예를 들어 내가 한겨울에 코스모스가 보고 싶다고 하면 한 명은 자신이 키운 코스모스가 피는 곳으로 데려가 주는 반면, 한 명은 내 집 마당에 코스모스를 꺾어서 산처럼 쌓아 주는 차이랄까? 근데 최근에 한 명의 애인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보내 줘야 했어요. 그래도 나는 그가 참 그리웠거든, 그래서 닮은 애인을 또 사귀었지. 비슷한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다른 거야. 나쁘진 않은데 좋은 것도 아니랄까? 하긴 사람이 같을 수야 없지. 같기를 바라는 게 내 욕심인가 싶기도 하고. 어쩐지 내 사람이 아닌 거 같아서 마음도 허하고 그렇더라고. 그런데 마침 원래 있던 애인이 자꾸 한눈을 팔려고 하잖아. 내가 잘해 준 거 같은데 말이야. 애인을 둘이나 둔 내가 할 말은 아니라서 그냥 이번은 넘어가 줄까 하다가도……. 점점 자존심도 상하고 그러네. 속상해서 어쩌지?”
마치 연애 상담을 하듯 상냥하게 속삭이는 김인희가 은근한 미소를 띤 채 신로를 바라봤다.
“……제가 감히 조언해 드릴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진정 애인 얘기로 알아듣지도 않았으면서 의뭉스럽게 시치미를 뗀다고 김인희는 코웃음 쳤다.
“그러지 말고, 말해 봐요. 참고만 할게.”
“제가 김 여사님의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놀란 양 눈을 동그랗게 뜨긴 했지만 김인희는 재미있다는 듯 곧 눈가를 접으며 곱게 웃었다. 쉰이 넘은 여자라고 보이지 않게 고운 얼굴이긴 했다.
“저라면 김 여사님께 다른 애인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머-. 류 사장 보기와는 다르게 집착이 있나 봐? 냉정한 줄만 알았는데.”
“제 것을 남과 나누는 취미는 없습니다.”
“하지만 둘은 다른 매력이 있는걸?”
“비슷한 사람은 흉내만 내고 있는 걸 알고 계시다면서요. 저라면 여사님의 정원을 코스모스로 채우겠습니다.”
“어째서?”
“그쪽이 번거롭지 않으니까요.”
“그럼 꽃이 금방 죽지 않을까?”
“저에겐 코스모스 정원도 있을 겁니다. 시들지 않는 꽃을 보고 싶으시면 말씀하십시오.”
가만히 신로를 보던 김인희가 대답에 만족한 듯 빙그레 웃었다.
“조언 고마워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해야겠어.”
신로는 말없이 시선만 내리깔았을 따름이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김인희가 식은 차가 마음에 안 드는지 옆으로 밀고 신로를 바라봤다.
“동생이 기다리겠어, 류 사장.”
신로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 룸을 나왔다. 김인희가 최오용과 무슨 대화를 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신로에게 늘어놓은 말은 최오용의 역할까지 네가 할 수 있겠냐고 물은 것뿐이었다. 같은 말을 최오용에게도 할 터다.
지금은 백류파 쪽이 조금 더 마음에 드는 듯이 행동하고 있지만, 그것은 순수한 호의가 아니다.
김인희는 양쪽 모두 부리고 싶겠지만, 주제를 모르고 설치며 통제에서 벗어나는 개를 두고 볼 만큼 너그럽지도 않았다.
어느 쪽 짐승을 거둘까, 지금이야 싸움에서 이겼다고 기가 살아서 설치지만 완벽하게 숨통을 물어뜯을 수 없다면 납작 엎드려 충성하는 최오용인가. 마치 순종하는 양 고개를 숙이지만 입술 안으로 이빨을 숨겨 넣고 속내를 감춘 류신로인가.
김인희는 재고 있었다. 그녀가 아직 최오용의 쓸모에 미련이 남았다면, 미련은 없애 버리면 된다.
“어디로 모실까요?”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까지 신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운전사는 아파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의 아파트에 다다를 무렵에야 신로는 병원으로 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주차장으로 진입하기 직전이었지만 운전사는 유연하게 핸들을 돌려 온하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미리 연락받은 박덕수는 병실 문밖에 서서 대기하다가 나타난 신로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자?”
“아닙니다. 놀라서 잠이 안 오는 모양입니다.”
“뭐 하고 있어?”
“그게…….”
박덕수는 헛기침하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어색하게 입술을 당긴 박덕수는 시선을 맞추지 않고 그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온하는 요즘 애들이 좋아한다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 줘도 보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서 만화책을 사다 줘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먹고 싶은 음식이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냐고 거듭 질문하자 차온하는 딱 한 번 입을 열었다.
「집에서 제 일 가져다주실 수 있어요? 봉투…….」
오늘은 쉬라고 하자 시위하는 양 침대에 웅크리고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 꼴로 몇 시간이나 꼼짝도 하지 않아서 석상이 되어 버린 줄 알았다. 박덕수는 별수 없이 일감을 가져다주었다.
차온하는 일감이 도착하자마자 뭐에 씐 사람처럼 봉투만 붙잡고 있었다. 박덕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별반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탓이다.
새삼 온하의 기행을 보며 노대식이 정말 아이를 많이 예뻐하는구나 감탄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애교도 없고, 웃지도 않고, 말도 안 듣는, 속을 알 수 없는 어린애를 그렇게 애지중지할 리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참으로 많이 닮은 형제라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덕수는 병실 문이 대차게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몸을 세웠다.
노대식은 온하가 검사를 받고자 옷을 갈아입으러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실신했다. 피를 철철 흘리며 히죽거릴 때부터 정상이 아닌 줄이야 알았지만, 수술까지 해야 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회복 중이라 의식이 없기에 망정이지 어설프게 다쳤다면 신로에게 세 번째로 머리가 깨지고도 남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도 온하는 봉투를 놓지 않았다. 침대에 붙은 보조 테이블 위에 코를 박을 듯 수그리고 봉투에 양면테이프를 붙인다. 매트리스 위에 완성한 봉투와 잔해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병원에 가면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류신로가 욱기를 눌려 보려 애쓰는 동안, 차온하는 봉투 따위나 접고 있었다. 한심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장 뺏으려고 했었다.
차온하가 저렇게 필사적이지 않았다면 실행했을 터다. 사방을 차단하고 오로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인 봉투에 양면테이프 붙이는 데에만 몰두한다.
류신로가 작은 손에서 봉투를 빼내고 말없이 테이블을 넘겼다.
온하는 망연히 류신로의 손을 보고 있을 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별안간 류신로의 손을 얽어 꽉 잡았다. 서서히 고개를 들고 새카맣게 물든 눈동자로 말없이 바라본다.
반대쪽의 손도 다가와 신로의 팔목을 꽉 움켜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제법 강렬하게 휘감아 힘껏 당긴다. 당겨도 당겨지지 않자 일어나 그대로 달려들어 목을 끌어안았다.
양팔과 양다리로 신로의 몸을 칭칭 감고 매달린 온하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예상치 못한 온하의 격한 행동에도 신로는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언짢았던 마음이 풀어지고 있었다. 늘어트리고 있던 팔을 들어 온하의 몸뚱이를 꼭 끌어안자 줄곧 신경을 긁어 대던 불편함이 사라진다. 내내 막혀서 갑갑하던 숨이 트였다.
류신로는 비로소 사전적인 의미가 아닌 감정으로 안심이라는 단어를 이해했다.
다치지 않아서인지, 오롯이 의지하기 때문인지, 매달린 몸뚱이가 제법 따뜻한 탓인지, 그도 아니면 알 수 없는 어떤 것 때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늦었어?”
고개를 끄덕인 차온하가 보잘것없는 힘으로 꼭 끌어안은 목덜미에 나직한 숨을 뱉었다.
입수한 병원 복도 CCTV에 녹화된 차온하는 당돌한 모습 그대로였다. 주눅 들지도 않고 고개를 당당히 들고 독 오른 새끼고양이처럼 칼을 들고 있던 오용파 놈에게 달려들기까지 했다.
아무렇지도 않았을 리 없다.
무섭고 낯설고, 그나마 익숙한 노대식도 없으니 낯선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차온하는 이를 악물고 버틴 모양이다.
봉투나 붙이면서, 류신로가 올 때까지.
“그 사람들 누구예요?”
“몰라도 돼.”
“내 아버지라는 사람을 보러 가자고 했어요.”
“……보고 싶어?”
“뭐가요?”
“아버지.”
흠, 하고 호흡을 길게 내뱉는 차온하를 침대 위로 내려놓자 양손을 차분하게 깍지 끼고 망연히 발끝을 바라봤다.
“……할머니가요.”
신로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자 눈꺼풀을 감았다가 천천히 시선을 맞췄다.
“엄마는 남자한테 속은 멍청한 년이랬어요. 썩을 년, 나쁜 년, 망할 년, 이수연이라는 예쁜 이름이 있었는데 만날 엄마 얘기만 하면 울면서 욕을 했어요.”
이혜리라는 이름이 가명이었던가 보군. 차분하게 늘어놓는 온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신로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엄마를 꼬여내서 속인 사기꾼이 아빠라고. 엄마를 임신시켜 놓고 버렸다고. 그 나쁜 년은 애만 덜렁 낳아 놓고 가 버렸다고. 저를 안고 우셨어요, 할머니가. 저는 그냥 슬퍼하는 할머니를 따라 울고…….”
차온하는 말을 멈추고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망설이며 오물거리다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소름이 돋은 볼에 솜털이 바싹 일어섰다.
신로가 볼을 쓸어 주자 온하는 자연스럽게 손바닥 위로 무겁지도 않은 작은 머리를 기댔다.
“……왜 그랬을까, 엄마에게 왜 그랬냐고 묻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언젠가 아버지를 만나면……,”
“하지 마.”
“……하지 마요?”
손바닥 위에 머리를 기댄 채 차온하가 씁쓸한 얼굴로 신로를 바라봤다. 이유를 안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답을 알고 있는 처연한 눈동자가 신로를 바라보다 조용히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눈을 감았다.
차온하에게 너의 아버지는 류동하고, 너와 나는 형제라고 말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혜리가 어떻게 살았고, 왜 그렇게 죽었는지도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놈들은 네 아버지를 몰라.”
“몰라요? 거짓말한 거예요? 왜?”
짐작은 하겠지만, 임문기가 말한 아버지가 류동하는 아니었을 테니.
“그렇게 말하면 네가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온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커다란 눈을 찌푸렸다. 이해가 안 가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불룩 내놓았다.
“내 가족은 할머니뿐인데……. 아, 그래서 그랬구나.”
“뭐가?”
“아까 그 사람들이요, 내가 안 가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화냈어요. 갈 이유가 없어서 안 가겠다고 했는데, 너무 화를 내서 이해가 안 됐었거든요. 거짓말이 안 통해서 그랬나 봐요.”
혼자 납득한 차온하가 침대 위를 차분하게 살피더니 흩어져 있는 봉투들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한쪽으로 모아 다발 묶음을 만들어 상자에 차곡차곡 쌓았다.
바지런히 움직이는 아이를 지켜만 볼 뿐 신로는 돕지도, 말리지도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마침내 정리가 다 끝나자 신로 앞으로 돌아온 온하는 어딘가 개운한 얼굴이었다.
“경찰서 가요.”
“뭐 하러?”
“가서 그 사람들이 먼저 시비 걸었다고 말해야 하잖아요.”
신로가 침묵하고 움직이지 않자 온하는 이해를 못 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덧붙였다.
“류신로 씨 회사 사람들 억울할 거예요. 내가 증인 할게요.”
별로 억울하거나 하지 않을 텐데. 행사한 폭력이 있어서 단순히 목격자 증언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CCTV에 고스란히 찍히기까지 했으니 어느 쪽이든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든 서로 고소하지 않았기에 몇 시간 만에 모두 석방되었다.
“나설 필요 없어.”
“필요, 없어요?”
“해결됐어.”
“……아.”
어깨를 힘없이 아래로 축 늘어뜨린 차온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할 일을 빼앗겼을 때처럼 의기소침한 기운에 신로는 아래로 점점 내려가는 차온하의 턱을 잡아 올렸다.
“왜 그래?”
“그냥 또 도움이 안 돼서요. 아까도 나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잖아요. 근데 저는 도움은커녕 거치적거리기만 하고……. 화나서요.”
화났다는 사람치고는 얼굴에 별다른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새카매진 눈동자를 보면 거짓말은 아닐 터다.
심화를 다스리려는지 온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긴 날숨을 뱉었다. 내리뜬 속눈썹이 가늘게 떨린다.
“그래서 칼 든 사람에게 덤볐어?”
“……별로 도움 안 됐어요.”
평소라면 코웃음을 치며 알면 다행이라고 했을 텐데 신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손을 뻗어 온하의 환자복 윗도리를 걷어 올렸다.
하얗고 말랑한 배 한중간에 시커먼 울혈이 올라와 있었다. 신로의 얼굴이 밀랍처럼 굳자 온하는 환자복 끝자락을 당겨 슬그머니 아래로 내리고 물러섰다.
“싸웠으니까.”
마치 학교에서 동급생이랑 다툰 양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였다. 더군다나 동급생도 아니었고 상대는 구타가 침 뱉는 것보다도 쉬울 폭력배였다.
“칼을 든 사람한테 함부로 덤비는 거 아니야. 그자가 양손을 썼으면 네가 찔렸을 수도 있어.”
신로라면 애초에 잡히지도 않았겠지만, 왼손도 충분히 오른손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아니, 칼을 안 들어도 차온하의 목을 비트는 일쯤은 수고로운 일도 아니었다.
“…….”
차온하는 언제나 저 자신을 한도까지 몰아붙여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무작정 하지 말라고 해도 정작 차온하가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이리 와.”
신로는 침대에 기대앉아 온하를 불렀다. 온하는 순순히 다가왔지만 눈동자를 보니 이런 일이 생기면 또 덤벼들 모양새였다.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듯 고집이 가득하다.
신로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온하의 목을 더듬어 경동맥이 지나가는 자리를 짚어 줬다.
“짚어 봐.”
목을 짚은 신로의 손가락 위에 겹쳐 제 손을 올리는 온하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 목에서 같은 위치를 찾아서 짚어 봐.”
이유를 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목덜미를 더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조심조심 목을 더듬어 용케 경동맥을 찾아 힘을 주고 꾹 누른 온하가 맞느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기억해 둬. 기술이 없어도 이곳을 찔리면 죽어. 볼펜이든, 유리 조각이든, 끝이 날카로운 것으로 최대한 깊이.”
“…….”
웃고 있던 온하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흠칫 떨어지려는 손가락을 잡아 다시 목덜미를 찌르듯 누르며 새카맣게 변한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대번에 파리하게 질린 온하가 손가락을 빼려고 애를 썼다.
“어설프게 하지 말고, 한 번에 찔러야 해. 너는 느리고, 힘도 약하니까 기회는 한 번밖에 없을 거야. 그러니까 상대가 방심했을 때를 노려. 알았어?”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빼려고만 하던 온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면 네가 죽어.”
몸부림치던 온하의 몸이 우뚝 멈췄다. 잠깐 애를 썼다고 이마에 땀이 밴 온하가 숨을 할딱거리며 신로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어깨가 크게 들썩이는 온하의 땀을 닦아 준 신로가 허리를 안아서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해 주었다.
“위험한 일을 하려거든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
“그렇게 못 하겠거든-,”
“…….”
“내가 갈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
“알아들었어, 차온하?”
차온하가 신로의 재킷을 꽉 잡았다가 천천히 어깨로 손을 두르고 이마를 비볐다.
“……네.”
동그란 뒤통수를 쓸어 주는 신로의 손길에 안심한 온하가 따뜻한 숨을 내쉬며 더욱 기대 왔다. 어색하지만 규칙적으로 토닥이는 손길에 긴장으로 고단했던 몸이 휴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기처럼 소록소록 고른 숨을 내쉬며 온하가 단잠에 빠진 뒤에도 등을 쓸어 주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 ∞ ∞
컹! 컹! 컹!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나무에 기대 헐떡이던 임문기는 흠칫 몸을 떨었다. 구름이 하늘을 온통 가린 밤이라 숲은 바로 한 발 앞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어둠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언제나처럼 중국 놈들이 들여온 마약의 진품을 확인하려고 와인 창고로 향했다. 국내를 통해 일본으로 밀반입하는 일을 돕는 대신 일부를 받아 국내에서 유통했다.
임문기는 최오용이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제 류동하는 죽었고, 류신로는 공부만 한 경험도 없는 어린놈이었다. 무엇보다 보복 행위가 없었다.
류동하가 죽을 때 직접 왔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혼자 온 것도 아니었고, 결국 들이닥친 경찰 때문에 제 아버지 시체도 버려두고 도망친 놈이 아니던가.
게다가 보통 대를 이으면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뭐라도 드러나는 일을 하는데 놈은 조용하기만 했다. 정말 전문 경영인이라도 된 양 가식적인 꼴이 구역질만 났다.
어쨌든 속이 좁쌀만 한 탓인지 자격지심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오용은 류신로를 꽤 경계했다.
이제 백류파 따위는 한 입 거리도 아니라고, 형님의 세상이라고 몇 번이나 추켜세워도 사업에는 순서가 있다며 감질나게 움직였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털을 세우는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어차피 임문기는 이득만 얻을 수 있으면 최오용이 무슨 지랄을 해도 상관없었다. 속으로는 혀를 차며 조심스러운 최오용을 좀스럽다 비웃었을망정 겉으로는 입안의 혀보다도 매끄럽게 굴며 아부했다.
백류파의 카지노에서 약을 유통하던 놈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같은 날 눈가림으로 만들어 놓았던 이석파가 모두 쓸려 나갔다. 그때는 좀 싸했지만, 어차피 대단한 놈들로 만든 조직도 아니었다. 언젠가 버릴 패였다. 시기가 생각보다 빨랐던 것뿐이다.
최오용은 사무실을 뒤집어엎고 미친놈처럼 날뛰었지만, 임문기는 그저 귀찮게 일이 틀어졌다고만 생각했다.
고작 쓰레기를 치우고 의기양양 기가 살았을 백류파를 비웃었다. 어차피 왕년에 좀 날렸다는 박덕수나 노대식이 움직였겠지.
검찰 쪽에서 뭐라도 건져 보려고 설쳐 댔지만, 건물에 불을 지른 덕에 증거는 남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쪽이 수고로울 일은 없었다.
그 일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혜리의 자식이 나타났다. 우연히 마주친 이후로 최오용은 그게 왜 류신로와 있느냐고, 왜 둘이 있느냐고 펄펄 날뛰었다. 차마 몰라서 묻느냐, 지 동생이니까 데려왔나 보지-, 라고 말하지 못하고 알아보겠다고만 했다.
과거 이혜리에 대한 최오용의 집착은 정상이 아니었다. 좋을 대로 접대시킨 건 본인이면서 더러운 년이라고 때리고, 잘못했다고 울면 울지 말라고 윽박지르며 강간했다.
하여튼 팔자 더럽게 타고난 년이었다. 그 멍청한 년이 하필 류동하와 눈이 맞았다. 본디부터 좀팽이인 최오용은 당연히 돌아 버렸다. 이혜리가 류동하에게서 도망가지 않았다면 아무리 몸 사리는 최오용이라도 전쟁을 불사했을 터다.
십몇 년이나 지난 뒤에 갑자기 이혜리를 봤다면서 미친놈처럼 굴 때만 해도 정녕 망령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덕에 눈엣가시 같던 류동하를 처리했다.
둘 다 등신 같다고 여겼는데, 부하들이 찍어 온 이혜리 새끼 사진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사내새끼 주제에 이혜리의 얼굴을 쏙 뺐다. 거의 가물가물하던 그때의 요망한 얼굴이 단번에 떠오를 정도였다. 최오용이 왜 그렇게 돌아서 날뛰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게다가 류신로는 이혜리의 새끼를 누가 보면 애인이라도 되는 양 싸고돌았다. 안고 다니기 일쑤고 소름 돋을 정도로 다정했으니 최오용의 온 신경이 모두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사업에는 일절 관심도 없는 꼴을 보다 못해 납치라도 해 줘야겠다고 병원에 갔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최오용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골프채를 휘둘렀다. 임문기의 마음도 몰라주고 분풀이했다. 임문기는 잘못했다고 빌며 바닥을 설설 길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온전하게 데리고 오겠다고 하고서야 놈은 휘어진 골프채를 내려놓았다. 자리에 앉지도 못할 정도로 엉덩이가 터졌지만, 머리에 휘두르지 않은 것이 어디냐고 생각했다.
어쨌든 일은 해야 하니 와인 창고로 향했다.
중국 놈들은 주제에 아무나 하고는 거래하지 않겠다고, 매번 중간 보스 이상과만 얘기하겠다고 지랄을 해 댔었다.
처음에는 귀찮았는데 매번 마주치다 보니 좋은 점도 있었다. 제 몫으로 약을 좀 빼돌릴 수 있었던 덕에 어느 시점부터는 임문기도 놈들과의 만남을 즐겼다.
창고에 도착해서 지키는 놈들이 안 보일 때 이상한 상황을 눈치챘어야 했다.
문을 여는 순간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피바다 한중간에 류신로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 고고하게 다리를 꼰 모습이 헛것인가 싶을 정도로 여유로워서 할 말을 잊은 사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여자가 비명을 질러 댔다. 퍼뜩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이 꿈틀거렸지만 뒤통수를 강타하는 충격에 그대로 의식이 끊겼다.
그리고 어딘지 모를 산중에서 정신을 차렸다. 임문기는 헐벗은 채 손이 뒤로 묶여 있었다.
눈앞에는 백류파의 행동대장인 황금 이빨 김지원이 서 있었다. 그 뒤로는 목줄이 팽팽하도록 몸을 뻗은 커다란 사냥개들이 임문기를 보며 침을 뚝뚝 흘렸다.
“Quarry.”
헥, 헥, 헥! 시커먼 사냥개 세 마리를 잡은 군복의 외국인들이 김지원의 말에 허연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의아하게 눈을 굴리는 임문기를 보며 김지원도 빙긋 웃었다.
“사냥감이라고, 이 등신아.”
“무, 무슨 소리야!”
“상황 파악이 안 돼?”
싱글싱글 금니를 보이며 다가오는 김지원을 피해 뒤로 몸을 무르려 한 노력에도 머리카락을 생으로 한 움큼 뜯겼다.
비명을 꽥 지르자 흥분한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요란하게 짖어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지원은 두피까지 뜯긴 머리카락을 들고 개들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게 했다.
“얘들이 평소에는 소고기를 먹는데 가끔 별식으로 다른 것도 먹어.”
다른 게 뭔지 임문기는 모르지 않았다.
“애기들이 오랜만에 야외에서 사냥할 일에 들떠서 많이 흥분했어. 열심히 도망가야 할 거야, 임 씨.”
줄이 조금 느슨해지자 사냥개 한 마리가 쏜살같이 임문기를 향해 달려들다 바로 코앞에서 뒤로 당겨졌다. 컹컹 짖어 대며 남자의 명령에도 이를 드러내다 서서히 복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임문기의 말에 김지원은 쯧쯧 혀를 찼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으니까 그렇지, 몰라서 물어?”
“내가 뭘 건드렸는데?!”
“모르면 별수 없고.”
싸늘하게 변한 김지원이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목을 돌렸다. 핸드폰을 들어 알람을 맞추더니 임문기에게 내보였다.
“이제부터 얘들하고 숨바꼭질할 거야, 재밌겠지? 그렇지? 잘 도망쳐 봐. 시간도 많이 줄게. 삼십 분이면 되겠지?”
“이, 이봐!”
“말해 두는데 잡히면 뼈도 안 남아. 얘들 곰도 잡거든.”
이미 카운트가 시작된 숫자를 보며 임문기는 입술을 벌벌 떨었다.
“뭐 해? 발바닥에 땀 나게 달려?”
임문기는 그때부터 미친 듯이 내달렸다.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맨발바닥도 터진 지 오래였지만, 멈출 때마다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삼십 분이 벌써 지났나? 그 새끼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눈을 굴리며 도망칠 곳을 찾아봐도 여기가 어딘지 당최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도 움직여야 했다. 산이니 계속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 도로든 마을이든 뭐든 나올 것이다. 지금은 우선 숲에서 벗어나야 한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어째서 이렇게 됐지? 대체 뭘 놓쳐서? 임문기는 끊임없이 달리며 생각했다. 이렇게 비참하게 개새끼한테 쫓기며 빤스 바람으로 산속을 달리다니, 이게 정녕 꿈이 아니란 말인가?
컹! 컹! 컹!
개 짖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져 뒤를 확인하던 임문기는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사정없이 비탈길을 굴러떨어졌다.
“……!”
드디어 멈췄을 때는 잠깐 숨이 멎었다. 경련하다가 끄어억! 하고 숨을 들이쉬며 낙엽이 쌓인 곳을 굴렀다.
컹컹컹! 컹! 컹!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개 짖는 소리가 가까웠다. 굴러떨어진 바로 위쪽에서 들렸다.
씨발, 씨발, 씨발, 이게 꿈이 아니라니!
임문기는 숨죽이고 이를 갈았다. 도망쳐야 했다. 금세 이곳을 찾아낼 것이다. 더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며 도망치던 임문기의 눈에 나무들 사이로 빛이 보였다. 개 짖는 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렸다.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달려간 임문기 앞에 구원과 같은 낡은 펜션이 있었다.
“사-,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
절뚝절뚝, 뛰어가며 임문기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컹컹컹! 개 짖는 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Go! Go!”
영어로 지껄이는 목소리도 들렸다.
임문기는 닫힌 문을 부술 듯 어깨로 부딪히며 살려 달라고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컹컹! 멀리서 달려오는 검은 사냥개들의 번쩍이는 눈알이 섬광처럼 이어졌다.
“살려 줘! 문 열어! 살려 줘! 살려 주세요! 문 열어! 문 열란 말이야!”
순간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빼꼼 열렸다. 아주 좁은 틈 사이로 머리부터 들이밀어 파고든 임문기가 낡은 마룻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드디어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개들이 쫓아 들어오기 전에 문을 막아야 한다. 임문기는 겨우 문을 닫고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문을 쉽게 열지 못하도록 받칠 물건을 찾아 뒤를 돌아본 임문기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숨을 멈췄다. 기시감이 온몸에 퍼지고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류신로!
폐허인 펜션 안, 의자에 앉은 류신로의 얼굴은 여전히 밀랍과 같이 무표정했다.
달도 뜨지 않은 밤, 개가 짖어 대는 깊은 산 펜션 밖으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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