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펫 위의 커다란 비닐봉지에는 맨몸의 갈색 곰 인형이 가득했다. 또 다른 비닐봉지에는 ‘I♥YOU’라고 인쇄된 빨간 티셔츠가 있다.
온하는 맨몸의 갈색 곰 인형에 빨간 티셔츠를 입히고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신중하게 하나하나 부지런히 옷을 입혀 주고 나니, 어느새 맨몸 인형은 없다.
“크어엉, 푸…… 크허어어엉! 푸우우우….”
온하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였다. 시선 끝에 두툼한 손에 들린 곰 인형이 걸렸다.
양반다리를 하고 조는 노대식이 곰 인형의 머리를 붙들고 있다. 그에 손에 들린 인형은 마치 괴수에게 잡힌 인질처럼 불쌍해 보였다. 온하는 조심스레 그의 손에서 인형을 빼내었다.
노대식은 이게 다 뭔 지랄이냐고 투덜거리면서도 심심하다며 인형을 낚아챘다. 섬세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손길로 우악스럽게 옷을 입히다 그대로 잠들었다. 코 고는 소리가 천둥처럼 요란했다.
살펴보니 노대식의 손을 거친 인형은 제대로 해 놓은 게 없었다. 목만 끼워져 있거나, 옷이 뒤집혔거나 죄다 그랬다. 온하는 그가 건드린 인형은 모조리 다시 작업했다.
야무지게 마지막 곰 인형의 팔까지 끼워 주고서야 온하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거실 한가득 갈색 곰의 향연이다.
「집에서 하는 일이라면 해도 돼.」
온하가 겨우 침대를 벗어나자 지나가듯 허락이 떨어졌다. 온하의 축 늘어졌던 어깨가 바싹 올라왔다.
일은 구해다 줄 테니 쏘다니지 말라는 말에 온하는 얌전히 기다렸다. 노대식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왔다. 양손에 곰 인형이 가득 든 커다란 봉지를 들고 말이다.
노대식은 갈색 곰 인형, 손바닥만 한 붉은 티셔츠, 인형의 눈이 될 검은 단추 봉지까지 차례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양 혀를 끌끌 찼다.
가만히 사장님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포동포동 살이나 찌울 것이지 왜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냐며 복을 걷어찬다고 투덜거렸다.
온하는 일을 꼭 해야 했지만, 노대식에게 이유를 설명하진 않았다.
한 봉지당 곰 인형이 사십 개였다. 하나하나 옷을 입히고 눈알을 붙여서 완성하면 봉지당 이만 원을 준다고 했다.
봉투에서 인형을 꺼내 세어 보던 온하는 몇 개 되지도 않는데 사만 원이나 벌 수 있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세 하고 또 받아 올 수 있느냐 물으려던 온하는 팔십 마리 곰돌이에게 옷을 모두 입힌 다음에야 하루에 이백 마리쯤 해치우겠다는 허황한 꿈을 포기했다.
쉬워 보여도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그래도 하루에 사만 원이나 벌 수 있다는 사실에 온하는 바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눈을 붙일 차례가 되어 꼬물거리며 움직이다 불현듯 콧속이 간지러워 재채기를 했다.
“에취!”
“크헝-!”
코를 골던 노대식이 짐승 소리를 내며 눈을 부릅떴다. 잠든 적 없다는 양 붉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느새 옷을 다 입고 있는 인형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끝났냐?”
“이제 눈, 에취! 붙, 에취! ……에취! 치!”
연달아 재채기를 하고 온하가 얼굴을 붉히자 노대식이 쯧쯧 혀를 찼다.
“차암, 부실허다!”
담배를 문 노대식이 베란다로 나가고서야 겨우 재채기가 멈춘 온하는 콧물을 훌쩍 들이마시며 눈알을 붙일 준비를 했다.
눈알은 글루건으로 붙이면 된다고 사용법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두었다. 10분간 예열을 해 두어야 한다고 들어 전원을 켜고 주방으로 향했다. 감기가 덜 나은 건지 목구멍이 칼칼한 까닭이다. 가사 도우미가 끓여 놓고 간 보리차를 한 컵 마시고 자리에 돌아왔다.
“아따, 인자 밤에는 제법 쌀쌀혀. 아야, 오늘은 고만혀, 사장님 퇴근해서 오실 시간 다 돼 부렀어.”
시간을 힐끔 확인하니 자정이 다 되어 간다.
오늘 끝내려고 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쉬고 글루건 전원을 껐다. 너저분하게 보이지 않게 이리저리 정리하자니 노대식이 도와준답시고 발로 곰 인형을 슬슬 밀어냈다.
“대충 햐, 대충.”
온하는 이제 노대식이 눈 맞춘다고 벽 보고 돌아앉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린애답게 방실거리며 곰살갑게 굴지도 않았다. 그래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준다.
이게 어디냐고, 노대식은 장족의 발전으로 친밀감을 형성했다고 믿으며 뿌듯해했다. 핸드폰을 확인하고 노대식은 현관으로 갔다.
“아야-, 내일 또 보자잉. 나는 사장님께 인사드리고 바로 갈랑게?”
눈도 안 마주치고 미미하게 끄덕이는 온하였지만, 역시 인사를 받아 주었다고 흐뭇해진 노대식은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신로를 기다리며 현관에 쪼그려 앉은 온하는 조그맣게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신로의 퇴근은 보통 자정 무렵으로 새벽 두 시는 넘지 않았다. 가물가물 눈이 감기는 찰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온하는 잠기운을 떨치고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신로가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바로 인사를 해야지, 생각했는데 입술만 오물거리는 사이 늦었다. 신로는 이미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는 머뭇머뭇하는 온하에게 손을 뻗어 머리카락에서 뭔가 떼어 갔다.
신로의 손에 붉은 실밥이 들렸다. 곰 인형 티셔츠의 부스러기다. 온하는 이게 뭐냐고 묻는 듯한 신로에게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신로는 오목하게 모아진 두 손을 내려다보고 실밥을 내려놓았다.
“그대로 있어.”
나직이 이른 신로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머리카락, 귓가, 어깨, 가슴에 이르기까지 붙어 있던 곰 인형의 잔해가 손바닥 안에 소복하게 모였다.
“뭘 붙인 거야?”
“……인형이요.”
집 안으로 들어선 신로가 붉은 티를 입고 겹겹이 쌓인 인형 더미를 잠시 바라봤다. 차온하는 여전히 두 손을 모아 실밥들을 들고 뒤에 서 있었다. 신로가 돌아보자 온하는 얼른 설명했다.
“아르바이트예요. 팔십 개인데, 다 하면 사만 원 준대요.”
드레스 룸에서 옷을 갈아입는 신로를 기다리며 온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신로는 느릿느릿 셔츠의 단추를 풀다가 온하를 돌아봤다.
“좋은 일거리 골라 주셔서요. 열심히 할게요. 아직 손에 익지 않아서 얼마 못 했지만 요령이 생기면 조금 더 빨라질 거예요.”
변명이 부끄러운지 온하는 볼을 붉혔다. 얼굴이 발긋한 온하를 지그시 바라보던 신로는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신로의 긴 한숨에 온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신로가 퇴근하기 직전 온하는 졸려서 하품도 했는데, 침대에 누워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자꾸만 한심한 신로의 눈빛이 떠올랐다.
온하는 살금살금 침대를 벗어나 거실에 쪼그리고 앉았다. 글루건의 전원을 켜고 잠시 기다렸다.
일을 얼른 끝내고 자야겠다. 눈알은 접착제를 발라서 붙이기만 하면 된다.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야-.”
손끝에 닿은 뜨거움에 온하는 화들짝 손을 뗐다. 직접 닿지도 않았는데 화끈한 손끝에 물집이 뽈록 올라왔다. 벌써 두 개의 물집이 생겼다. 장갑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하다 곧 고개를 저었다. 당장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적응되면 더 데이진 않으리라 낙관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후…….”
입바람으로 물집을 불어 식히며 온하는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첫 시도에 실패해 놓친 눈알이 바지에 붙어 버렸다.
노대식은 글루건을 주며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가 알려 준 대로 했지만, 한 번도 써 본 일 없는 글루건은 다루기 어려웠다. 접착제가 너무 많이 나왔고, 손가락에 닿았다. 뜨거움에 놓친 눈알이 바지 위로 떨어졌고 그대로 붙어 버렸다. 첫 번째 물집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물집 옆에 또 생긴 물집이 여전히 화끈대는 기분이다. 온하는 나직하게 한숨지었다.
금방 될 줄 알았는데. 몇 개 하지도 못하고 이 모양이라 약간 주눅이 든다. 처음 해 보는 일이어서 그렇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온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모든 일은 열심히 하면 된다.
눈알에 접착제를 발라 인형에 꾹 누르는데 얼굴 옆으로 손이 불쑥 내려왔다. 놀라서 잠시 얼었던 온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파자마 차림의 긴 다리를 거슬러 올라가자 신로와 눈이 마주쳤다.
“왜 안 자.”
인형을 들고 추궁하는 신로를 고개가 꺾일 듯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던 온하가 멍하니 벌어진 입을 수습했다.
“잠이 안 와서요. ……일이 덜 끝나서.”
“얼마나 남았는데.”
옆에 쌓인 곰 더미를 바라보는 온하의 얼굴이 붉어졌다. 눈이 제대로 붙은 곰은 열한 개뿐이었다. 남은 수는 빤했지만 그가 기막혀할까 봐 말없이 입술만 잘근잘근 물었다.
“이걸 붙이면 돼?”
신로는 검은 눈알을 들며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앉은 신로가 인형을 끌어다가 허벅지에 놓았다.
눈알을 쪼르륵 바닥에다 늘어놓고 총을 쏘듯 글루건으로 찍찍 한 개 한 개 접착제를 바르더니 빠른 속도로 눈알을 붙였다.
“아.”
“제대로 붙었는지 확인이나 해.”
곰을 휙휙 던지며 하는 그의 말에 온하는 정신없이 눈의 위치를 확인하고 옆으로 정리했다. 대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정확한 위치에 붙은 눈알이 신기했다. 속도도 엄청 빨랐다.
설명해 주지 않아도 잘하는 모습을 보니 이 일이 류신로의 주된 업무인가 보다. 그가 하던 일을 나눠 주었나, 이 일을 구해 준 이유를 수긍하고 온하는 속으로 감탄했다.
척척 인형에 눈을 붙이는 속도에 온하는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과연 저런 속도로 하면 많이 벌겠다.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그가 일하는 모습을 신중하게 눈여겨보았다. 온하가 열한 개 붙이느라 들인 시간에 그는 벌써 세 배를 붙였다.
“에취! 에-…취! 에취! 치!”
느닷없이 재채기가 연달아 나왔다.
온하는 훌쩍 콧물을 들이마시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신로는 잠시 손을 멈추고 온하를 가만히 바라봤다.
“……죄송해요.”
콧물이 흐르려는 코를 틀어막으며 웅얼거려도 싸늘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감기, 안 나았어?”
“나았어요.”
“코 나왔는데.”
“재채기해서.”
“닦아.”
후다닥 일어난 온하가 티슈로 코를 문질렀다. 피라도 배어 나올 지경으로 붉은 얼굴에도 신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이어 말했다.
“물도 마셔.”
“……네.”
온하는 거스르지 않고 얌전히 주방으로 갔다. 보리차를 따라 마시고 거실로 돌아가려고 하니 온하 쪽을 보지도 않은 신로가 입을 열었다.
“거기 앉아.”
“여기요?”
“그래.”
온하는 식탁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기다렸다. 새카맣고 윤이 나는 눈동자가 곰 더미 사이에 앉은 신로에게 향해 있었다.
“멍은 어때?”
“이제 별로 안 남았어요.”
“말할 때 아프지는 않아?”
“괜찮아요.”
더는 물을 게 없는지 신로는 인형 눈 붙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두 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아 팔십 개의 곰은 모두 까만 눈알을 붙이고 여기저기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정리는 자고 해.”
“정리는 제가,”
신로의 미간이 구겨지자 용케 눈치챈 온하가 입술을 감쳐물었다.
“……자고 일어나서 제가 할게요.”
먼저 가라고 비켜선 신로를 지나쳐 온하는 고분고분하게 침실로 향했다. 신로는 온하가 침대로 올라가 눕자 당연하다는 듯이 옆자리에 누웠다. 이제는 같은 침대에서 자도 낯설지 않은 탓에 온하는 셔츠에서 팔을 빼 잘 준비를 했다.
“그거 빼지 마.”
“네?”
“이불 덮어.”
“……네.”
온하는 슬그머니 팔을 제자리에 두고 이불을 당겼다.
“아르바이트비 반은 내 거야.”
어째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온하에게 신로는 삐딱한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인형 눈알, 내가 다 붙이지 않았나?”
“…….”
온하는 벌어졌던 입술을 추스르고 슬그머니 돌아누웠다. 어쩐지 억울했다. 그의 말이 옳은데도 기운이 쏙 빠졌다.
“……네, 받으면 반 드릴게요.”
“빚은 갚을 거야?”
“……네, 반 드리고……. 나머지는 빚 갚을게요.”
신로가 토라져 돌아누운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온하는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다음에는 혼자 할래요…….”
작게 웅크린 어깨가 잡혀 벌렁 신로 쪽으로 돌아 눕혀졌다. 동그랗게 눈을 뜨자니 신로는 대수롭지 않게 스탠드를 끄고 누웠다.
“이쪽 보고 자.”
“……왜요?”
물어도 신로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잠든 것처럼 숨이 고르게 퍼졌다. 한참을 신로의 오뚝한 콧날을 바라보던 온하의 눈꺼풀도 점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고른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단잠에 빠져들었다.
∞ ∞ ∞
류신로는 침대에서 몰래 빠져나간 온하가 무엇을 하려나 일말의 기대를 했다. 차온하는 인형을 잡고 궁상맞게 앉아 있었다.
차라리 도둑질을 하지.
벽에 기대 한참을 보고 있어도 눈치채지도 못한다. 더군다나 일하는 꼴이 밤을 새워도 진도가 나갈 성싶지 않았다. 그까짓 인형 눈 하나 붙이는 데 얼마나 신중한지, 누가 보면 예술 한다고 착각할 법했다. 왜 이제껏 끝내지 못하고 있었는지 알 만했다.
「집에서 할 만한 일이 뭐가 있지?」
신로의 질문을 한참을 곱씹은 박덕수는 조심스레 온하의 일이냐고 물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대충 어림짐작한 박덕수가 가져온 일이 저것이었다.
노대식에게 들려 보내라고는 했지만, 값은 이미 치른 후다. 일하고 싶어 안달이 난 온하에게 던져 줄 일감이 필요했을 뿐이다.
차온하의 쓸모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제대로 사용하기도 전에 함부로 내돌려져 망가지는 꼴을 두 번 보는 일은 사양이다. 인형 놀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일 소개해 줘서 고맙다고 하질 않나. 아르바이트비의 반을 내놓으라고 하자 억지 빚을 갚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주제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눈으로 바라봤다.
따지는 양 버릇없는 눈초리가 딱히 거슬리지는 않았다.
“으으응…….”
잠결에 기어코 팔을 소매에서 빼내 몸통으로 집어넣던 온하가 이마를 찌푸렸다. 웬일인지 왼손을 도로 빼내 꼼지락대다 신음했다. 엄지손톱 옆에 물집이 커다랗게 잡혀 있었다. 이게 걸려서 도로 팔을 빼낸 모양이었다. 볼록하게 솟은 물집을 내려다보던 신로의 구겨진 미간이 펴질 줄을 몰랐다.
“때려치워.”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인형 놀이는 그만하라고 해야겠다.
스르륵 침대에서 벗어난 신로가 핸드폰을 들었다.
―사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새벽에 자다 받았을 박덕수는 그럼에도 목소리에 잠기운 하나 없었다.
“전에 왔던 레지던트 불러.”
―누가 다쳤습니까?
“차온하.”
―많이 다쳤습니까?
“손에 화상을 입었어.”
―곧 데리고 가겠습니다.
핸드폰을 끊고 거실을 어지럽히는 인형들을 노려보다 신로는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자다가 봉변처럼 끌려온 레지던트는 온하의 물집을 보고 왈칵 신경질이 솟았다. 엄청 다급하게 독촉하는 바람에 손 전체에 화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작은 수포 두 개.
이것도 화상이라면, 화상이겠지. 암요. 화상이지요. 그렇다고 티를 낼 수 없어 적잖이 서럽다.
“조심해야지요. 이렇게 큰, 화상을 입고 그러면, 큰일 납니다.”
이를 악물고 으르자 정작 당사자는 잠기운이 가득 묻은 얼굴로 멍하니 네, 할 뿐이다.
헐레벌떡 제대로 옷도 못 입고 새벽부터 레지던트를 납치하다시피 한 박덕수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르바이트, 다른 걸로 찾아.”
“……예, 사장님. 무슨 문제인지 알려 주시면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쳤잖아.”
“……예…, 안전한 일로 찾도록 하겠습니다.”
박덕수의 눈이 어깨에 신경질을 장착해 숨이 시근거리는 레지던트에게로 향했다. 솔직히 같은 심정이지만 침착하게 고개를 숙였다.
목까지 졸라 죽일 뻔한 류신로의 말이라 정확한 의도가 뭔지 알 수 없어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라는 선에서 이해하려 노력했다.
박덕수는 다음 날 편지 봉투를 접는 아르바이트를 찾아 노대식에게 건네주었다.
“하나에 십 원.”
이것도 이미 공장에서 구매를 마친 물건이었다.
“하던 일도 안 끝났는디 이 봉투는 뭐다요?”
“그거 다 끝났더라. 온하한테 사만 원 주고 이게 새로운 일이라고 하고. 오천 장이야.”
노대식이 후,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언제 그걸 다 했대, 하고 중얼거렸다.
“이것도 받으면 좋아하려나. 나가 얘기혔소? 어제 곰, 그거 으찌나 붙들고 있던지. 어울리기는 하더만, 하나에 꼴랑 육백 원인디 많이 준다고 겁내 좋아혀? 귀엽지, 형님? 근디, 같은 곰이 아니고 왜 다른 거요?”
묵직한 상자를 받아 들며 노대식이 히죽 웃었다. 약하고 여린 걸 보호한답시고 붙어 있다 정까지 들었는지 노대식은 나름대로 온하를 아꼈다. 박덕수가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로 낯을 가리는데 인사를 받아 줬다, 대답해 주었다, 그날그날 갓 딸이 태어난 바보 아버지처럼 자랑해 댔다.
“어제 온하가 글루건을 만지다 다친 모양이야. 사장님께서,”
“뭐요?! 으데를! 으데를 다쳤는디!”
“이 씹, 귀 따가워. 이봐, 노대식이-.”
“형님, 나 가오!”
듣지도 않고 쌩하니 가 버리는 노대식을 보며 박덕수는 혀를 쯧쯧 찼다.
딱, 딸 바보의 전형이다.
웃긴 건 딸도 아니다. 혈연도 아니고 심지어 남자아이를 저렇게 싸고도는 줄 정작 본인은 몰랐다.
“……아!”
담배를 빼 물던 박덕수는 깨달음을 얻은 듯 입을 벌렸다. 담배가 아래로 뚝 떨어졌지만, 번뜩 떠오른 생각이 너무도 그럴듯해서 주울 생각도 못 했다.
류신로의 태도가 노대식과 상당 부분 비슷했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고, 딸을 대한다기보다는 어딘가 좋아하는 여자애 괴롭히는 초등학생…….
“에이, 설마.”
고개를 저으며 새 담배를 꺼내 초조하게 불을 붙이고 쓰으으으, 깊게 숨을 들이쉰 만큼을 길게 내뱉었다.
“에이-…. 설마.”
또다시 중얼거리며 쓸데없는 기우라고 머릿속 저 멀리로 밀어 버렸다.
차온하의 왼손에는 과하다 싶을 만큼 붕대가 감겨 있었다. 처음에는 깁스를 한 줄 알았을 정도였다.
“손이 왜 이려! 나가 조심허라고 혔어, 안 혔어! 씨펄! 병신 된 거여?! 이잌! 꼴랑 이것도 지대로 못 혀서 다치고 지랄이여!”
미친놈처럼 고래고래 소리치는 노대식을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온하는 뚱하니 외면했다. 외면했다기보다는 제 왼손을 우울하게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괜히 애 기를 죽였나 싶어 미안해진 노대식은 머리를 긁적이고 지갑에서 사만 원을 꺼내 주었다.
“곰 새끼 알바 값.”
“…….”
좋아할 줄 알고 얼른 일당을 줬는데 차온하의 눈빛은 더한층 우울해졌다. 시무룩하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감사하다며 받아서 왠지 모르게 이만 원씩 나누어 양쪽 주머니에 넣었다.
영 기운 없어 보이는 탓에 노대식은 지갑에서 이만 원을 더 꺼내 주었다.
“치료비라고 생각혀. 일허다 다친 거니께, 뭐, 상재 처리라고 치고.”
“상재 처리요?”
“상업 중에 다치면 회사에서 치료해 주는 거여. 그런 것도 모르냐?”
“……처음 들어요.”
지식을 자랑할 기회가 온 데에 노대식은 기쁜 마음으로 설명했다.
“상-업-재-해, 한마디로 일허다가 다치거나 뒈지면 재수 없게 해를 입은 거잖여. 그때 회사에서 보상혀 주는 거여. 다른 데는 안 혀 준다? 우리 백류파만 의리가 있어서 겁나게 멋있어 부러. 하여튼 고것을 줄여서 상, 재.”
이해가 안 되는지 눈을 깜박이는 온하를 보며 노대식은 혀를 찼다.
“나가 니를 붙잡고 너무 어려운 소릴 혔다! 하여튼 재수 없게 다쳤으니께 주겠다는 거여. 넣어 둬.”
“재수 없게 다친 게 아니에요. 이건 제가 어설퍼서 그래요. 안 주셔도 돼요.”
모처럼 길게 말한다 싶더니. 입술을 실룩이던 노대식은 투덜거리며 지갑에 도로 이만 원을 구겨 넣었다.
“어른이 준다면 그냥 받으면 되지, 깐깐하게 굴기는.”
“이유 없는 돈은 받는 거 아니랬어요.”
“누가!”
“할머니가요.”
“뭐여, 죽은 할머니?”
“네.”
“꼬장한 늙은이네.”
“…….”
투덜거리던 노대식은 새파랗게 불이 이는 눈으로 노려보는 온하를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나가 욕헌 게 아니라……. 에이, 씹! 꼬장꼬장혀서! 꼬장꼬장허다 혔는디! 뭘 고렇게 눈깔을 부라리고 지랄이여! 나가 틀린 말을 혔어?!”
노대식은 손아랫사람에게 미안하다고 고개 숙인 적이 없었다. 괜스레 큰소리치며 윽박질러도 차온하는 굳은 얼굴로 노려볼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 할머니 함부로 말하지 마요.”
“……에이, 썅.”
담배를 물고 도망치듯 베란다로 나간 노대식은 울적해졌다.
어린 것이 할머니를 위한답시고 눈가를 붉히며 바락바락 대드는 꼴이 괜히 안쓰러워진 탓이다.
조실부모하고 어릴 때부터 조직에 몸담았던 노대식은 처지가 비슷한 고아들을 보면 마음이 짠했다.
조심스럽게 새로운 일거리인 봉투 상자를 온하 앞에 내려놓으며 말을 걸어 봤다.
“이거 새로운 알바. 봉투를 접어서 풀 붙이면, 하나에 십 원이랴. 오천 장이니까 다 허면 오만 원이여.”
웅크리고 앉은 온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겨우 인사도 하고 말도 섞었는데, 원점으로 돌아와 싸늘했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도 안 잡혔다.
“으험험! 그거, 나가 우리 아들 불러다가 접게 해 줄까? 손도 병신 됐잖여.”
“……할 수 있어요.”
상자를 끌어다 제 앞에 가져다 놓는 모양새가 꼭 일을 뺏길까 봐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돈은 그냥 너 갖고.”
“일 안 하고 돈 받는 거 아니에요.”
“그으려, 일허고 받아야지. 할머니 말이 백번 옳아. 아무렴.”
“…….”
나름대로 비위를 맞추며 말했는데도 온하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쬐깐한 게 쌀쌀맞기는. 미안하다고 에둘러 말하면 대충 알아먹고 받아 주고 그래야지, 니미럴…….
주둥이 간수 못 하고 괜히 지랄 맞게 군 십 분 전을 후회하며 노대식은 소파에 벌렁 누웠다.
차온하는 노대식과 반대쪽으로 몸을 물리고 상자에서 봉투를 하나씩 꺼내 천천히 접었다. 왼손에 붕대가 감겨 있으니 움직이는 종이를 발로 고정한다.
노대식은 한참을 낑낑대며 애쓰는 차온하를 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거 대충해도 사장님이 오만 원 줄 거라고, 사실은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심심풀이 땅콩이라고 이실직고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할머니 많이 보고 싶냐?”
“…….”
“허긴, 말해 뭣 혀? 당연히 보고 싶겠지. 30년이 지나도 우리 어무니 보고 싶더만.”
“…….”
“나도 누가 울 어무니 욕하면 죽여 버릴 겨.”
차온하의 손길이 느릿해졌다. 노대식은 제 주절거림을 온하가 귀담아듣고 있다고 확신했다.
“씅나는 거 나도 이해헌다, 뭐 그런 말이여.”
“……우리 할머니 꼬장하지 않아요.”
“……그려.”
노대식은 머리를 긁적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노대식 나름의 사과를 받아 준 느낌이었다.
“나가 좀 도와줄까?”
슬며시 곁에 앉는 노대식을 피해 뒤로 엉덩이를 무른 온하가 경계의 눈빛을 보였다.
“괜찮아요. 제 일이에요. 혼자 할래요.”
어제는 같이 곰 인형 옷도 입혀 놓고 오늘은 혼자 하겠다고 우기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노대식은 순순히 물러났다. 괜히 또 온하의 기분을 긁고 싶지 않았다.
오전 내내 온하는 불편한 자세로 봉투와 씨름하면서도 힘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완성된 봉투의 숫자는 당연하게 몇 장 되지 않는데도 볼이 발긋하게 물들 만큼 집중했다.
“후-.”
온하는 일하는 중간에 흘러내린 앞머리가 귀찮은지 입으로 불곤 했다. 손도 발도 바쁘니 입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은 입바람으로 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손을 멈추고 귀 뒤로 넘겼지만, 결이 고운 머리카락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후-, 후-.”
애쓰는 모습에 노대식이 혀를 찼다.
“아따, 머리카락 한번 치렁치렁허다. 계집아이마냥 머리 기르는 거여?”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무시할 줄 알았는데 온하의 시선이 닿았다. 노대식은 저도 모르게 변명처럼 안 어울리는 건 아니고, 하고 덧붙이며 괜히 입을 실룩거렸다.
온하는 집중하던 일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눈동자가 허공을 망연히 헤매다 주방 쪽으로 향한다.
밑반찬 준비를 하던 가사 도우미가 먹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묻자 온하는 고개를 저었다.
“가위…… 어디 있어요?”
“가위? 뭐 하게?”
“머리 자르려고요.”
주방 가위는 음식용이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였다. 가사 도우미의 눈이 거실에서 빈둥대며 온하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노대식에게 향했다.
“미용실에 가면 될 텐데, 왜?”
“그런 돈 없어요.”
이런 집에서 살면서 미용실 갈 돈이 없다는 온하가 의아한 가사 도우미는 슬쩍 노대식 눈치를 살폈다.
노대식 역시 어리둥절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온하에게 돈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비를 준 게 몇 시간 전이니까 주머니에 여전히 사만 원이 있을 텐데, 돈이 없다니.
“아야, 번 돈 으디다 쓰려고 그러냐. 알바비 줬잖어.”
“이건, 안 돼요. 반은 빚 갚고, 나머지 반은 류신로 씨 줘야 해요.”
“……뭐어?”
이기 뭔 소리당가.
온하는 빚과 류신로에게 줘야 할 돈이 다른 듯 말했다.
“그게 그거 아녀?”
고개를 젓는 온하의 얼굴이 어두웠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양이 시무룩해서 더욱더 오리무중이다.
“가위, 없어요……?”
“아니, 있긴 한데…….”
줘도 되냐고 눈으로 묻는 가사 도우미를 보며 노대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위 내놔 보소. 거시기, 바가지는 없나?”
“바…가지요? 바가지는 없고, 대접은 있는데…….”
“그거라도 줘. 머리에 씌우면 다 똑같지, 뭐.”
영문을 모르는 온하의 눈을 보며 노대식은 씩 웃었다.
“나가 또 한 머리 자르잖어. 거실에 가서 앉아 보드라고! 시원허게 잘라 줄게!”
“아-.”
내도록 드리웠던 우울한 기색이 조금이나마 가신 온하가 얼른 거실로 가서 앉았다. 가사 도우미가 내미는 가위와 대접을 받아 들고 어깨를 휙휙 돌려 푼 노대식이 온하의 머리에 대접을 씌웠다.
“자른다?”
“네.”
간만에 예술 좀 하것네. 이기 사시미면 나가 더 예술로 발라 줄 것인디-.
노대식이 가위의 날카로움을 눈으로 재고 허공에 찰칵찰칵 소리 내며 어디부터 자를지 고민했다.
막 온하의 머리카락에 날을 가져다 대는 순간, 트로트 멜로디가 거실을 가득 울렸다. 노대식의 핸드폰 소리였다.
“아하, 나 증말, 어떤 자슥이…….”
하필이면 이 중요한 타이밍에 방해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혀를 차던 노대식은 화면에 뜬 이름에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았다.
“넵! 사장님!”
―내려놔.
“예?”
―가위.
어찌 아셨을까, 아.
노대식의 시선이 구석에 설치해 놓은 감시 카메라에 닿았다. 이곳을 보고 있을 신로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며 가위를 내려놓자 온하가 돌아봤다.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소곤거리며 통화하는 노대식에게 맹한 눈길이 닿았다. 온하는 기울어지는 대접을 한 손으로 잡고 노대식이 이발해 주길 기다리는 중이다.
특별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온하를 힐끔힐끔 보며 노대식은 식은땀을 닦았다.
“예, 예-! 후딱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노대식이 온하의 머리에 씌워 놓은 대접을 슬며시 벗겼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가사 도우미에게 가져다줬다.
“큼큼, 거시기, 사장님이 데리고 호텔 사무실로 오라시네.”
“류신로 씨가요?”
“으응…….”
“왜요?”
“나야…, 모르지. 기냥 데리고 오라고 허싱게.”
“머리 자르고 가요.”
“아, 안 돼야! 나 뒈져 부러!”
“네?”
“그냥 가자. 가서 사장님헌티 직접 왜 불렀냐고 물어보면 되것지! 아, 맞다! 너 사장님한테 빚 갚아야지! 줄 돈도 있다믄서!”
“아…….”
어둑한 얼굴로 주머니를 내려다본 온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 볼끄나?”
온하는 옷을 툭툭 털어 준비를 끝마쳤다.
온하를 데리고 호텔로 가는 내내 노대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로의 나직하고 서늘한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느낌이 달랐다.
노대식은 장염으로 앓아누운 온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해 머리가 깨졌었다. 또 한 번 대굴빡이 벽을 뚫을 때까지 처박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누가 내 것에 함부로 손대라고 했지?」
내 것.
류신로가 내 것이라고 소유욕을 드러낸 차온하는 뒷좌석에서 창밖을 무심하게 구경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따, 새삼 동생이라고 아껴 주고 싶으신갑네.
살짝 기분이 꼬인 노대식은 룸미러로 류신로와는 눈곱만큼도 닮지 않은 차온하를 살폈다. 이혜리를 닮은 앳된 얼굴을 보며 노대식은 혀를 찼다.
남자 놈 생김새가 아무리 봐도 참…….
류신로고 차온하고 둘 다 보스하고는 닮지 않았다. 둘 다 외탁을 많이 한 얼굴이라 참 안 닮은 형제다.
최고로 잘생기고 멋있었던 우리 보스나 닮을 것이지. 쯧쯧.
노대식은 제 이마를 문지르며 침을 꿀컥 삼켰다. 머리는 왜 잘라 주겠다고 나대 가지고, 염병. 벌써 깨질 머리에 고통이 느껴진다.
“으이구, 씨부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자 차온하의 새카만 눈동자가 뒤통수에 닿았다.
“아무것도 아니여.”
노대식의 짱구가 깨져도 차온하는 알 필요 없었다.
∞ ∞ ∞
“으그그그극……!”
바닥에 쓰러진 몸뚱이가 끝도 없이 경련했다. 입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눈이 허옇게 뒤집혔다. 속옷만 간신히 걸친 몸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음습하게 지하에 울리고 곧 고요해졌다. 경련이 일며 뒤틀리던 몸도 축 늘어졌다.
“우우우우! 우우우우우! 우우우우!”
변명 한번 못 해 보고 옆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자 남자는 머리를 바닥에 찧어 가며 빌었다. 입이 막혀 뭐라고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깨진 이마를 문지르며 남자는 엉엉 울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비참한 울음이 지하실을 가득 메워도 어두운 곳에 앉은 신로의 얼굴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깡! 시끄럽다는 듯 쇠 파이프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남자는 가까스로 울음을 삼키고 헐떡였다. 눈치를 살피며 눈을 굴리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잡은 사람이 우악스레 위로 당겨 올렸다.
카지노 보안팀장이 남자와 눈을 맞췄다.
보통은 김 팀장이라고 부르지만, 뒤에서는 황금 이빨로 불렸다. 앞니가 모두 금니인 까닭이다. 마르고 평범한 인상에 처진 눈이 순해 보여 무섭다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다.
백류파라느니, 앞니 여덟 개가 전부 보이면 죽는다느니 하는 소문을 비웃었던 남자는 번쩍이는 이빨을 모두 드러내고 웃는 김 팀장의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그 약, 누가 제공했는지 말할 생각이 들어?”
말하지 않아도 죽는다. 말해도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1분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두려움에 남자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입을 가린 테이프가 떨어져 나갔다. 입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양말도 빠져나갔다.
“말씀드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야, 약을 판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누, 누가 판지는 이이, 조, 종철이, 저, 저 사람…!”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시체를 가리키며 남자는 앞을 바라봤다.
남자는 이 모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사람에게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새로운 사장, 백류파의 젊은 보스라는 류신로의 앞에 엎드려 두 손 모아 빌며 남자는 헐떡거렸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달라는 말만 반복하자 김 팀장은 혀를 차며 류신로의 눈치를 살폈다.
팔걸이에 기댄 채 무심하게 앉은 류신로의 시선은 줄곧 손목시계에 닿아 있었다.
사람이 하나 죽어 나가도, 그리고 시체가 하나 더 추가될 예정이어도 류신로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카지노에서 약을 팔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봐주시면 충성하겠습니다. 제, 제발 사장님! 보스! 한 번만 살려 주세요! 제발, 제, 제발!”
불쑥 자리에서 일어선 신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남자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을 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으면 달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빡! 청각에 닿은 소리가 제 머리통을 부수는 소리라고 남자는 알지 못했다. 류신로의 재킷에 붉은 피가 몇 방울 튀었지만, 검은 옷이라 색이 드러나진 않았다.
달뜬 얼굴 그대로 남자는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가볍게 쇠 파이프를 휘두른 장본인인 김 팀장이 쓰러지는 몸을 슬쩍 피하며 몸을 틀었다.
“죄송합니다.”
남자의 대답을 끝내 끌어내지 못하고 마무리를 한 김 팀장이 고개를 숙였다. 카지노의 관리는 김 팀장의 몫이다. 마약으로 물을 흐리는 놈들을 잡아 두긴 했지만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류신로는 김 팀장의 멱살을 잡고 뺨을 후려쳤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김 팀장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도무지 손바닥으로 뺨을 치는 소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소리가 연신 지하실을 울렸다.
“최오용 쪽에서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심어 놓은 자들이 처리된 소식을 곧 접하겠지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중간에 눈가림으로 만들어 놓은 신생 조직도 처리하는 게 깔끔하지 않을까요?”
박덕수의 차분한 말에 손찌검이 멈췄다. 신로가 멱살을 꼬듯 틀어쥐자 김 팀장이 하얗게 질렸다.
“김지원.”
“네, 사장님.”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대답하는 김 팀장의 코에서 코피가 줄줄 흘렀다.
“흔적 남기지 마.”
“네-…. 사장님.”
쥐어짜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손아귀에 힘을 푼 신로가 지하실을 나섰다.
김 팀장의 어깨를 툭툭 쳐 준 박덕수는 황급히 신로의 뒤를 쫓았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복도 바닥에 피가 튀었던 신로의 재킷이 떨어져 있었다. 재빨리 주워 뒤따르는 놈에게 넘겨주고 뛰듯이 걸어 간신히 신로의 뒤에 섰다.
“어디 있어?”
차온하의 위치를 묻는 것이다. 류신로가 지하에 있을 때 차온하와 같이 호텔로 왔다며 노대식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온하랑 도착했소. 올라가?」
왜인지 잔뜩 풀이 죽은 노대식에게 기다리라고 해 둔 터였다.
“7층에서 대기 중입니다. 시간이 길어질 듯해서 식사라도 해 두라고 일러뒀습니다. 가신다고 연락해 둘까요?”
“……하지 마.”
사무실에 딸린 샤워실로 들어가는 신로에게 고개를 숙인 채 박덕수는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느슨하게 풀며 뻣뻣한 목을 주물렀다.
최오용이 눈가림으로 만든 신생 조직에서 호텔 카지노에 마약을 풀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김지원은 출입하는 고객을 상대로 이곳을 거래처로 이용하려는 놈을 잡아냈다. 마약을 들고 출근한 바텐더 놈과 고객으로 위장해 몰래 촬영하던 놈을 잡아서 추궁한 결과를 류신로에게 보고했다.
역시 놈들은 신생 조직의 조직원이었다고 흥분한 김지원이 불안하더라니. 놈들은 어차피 버리는 카드였다.
쓸모가 있으면 좋고, 아니면 적당히 써먹다가 던지는 그런 놈들이라 당연히 가진 정보도 없다. 모르고 지나쳤더라면 백류파가 마치 마약을 거래하는 양 찍은 사진을 검찰 쪽으로 넘겨 빌미를 제공하거나, 검찰에서 심어 놓은 쥐새끼가 정보를 넘기거나. 지금이 아니어도 거미줄처럼 이중 삼중 엮였을 가능성이 컸다. 어차피 처리하긴 해야 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집에 있던 온하를 불러낸 류신로의 기분은 지하실로 내려가기 전부터 좋지 않았다. 기복이 심한 사람은 아니지만 단 하나, 차온하가 관련되면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류신로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며 박덕수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느는 건 주름과 한숨뿐이다.
아마도 노대식이 뭔 지랄을 했지, 싶다. 매번 귀청 떨어질 만큼 당당한 목소리가 풀 죽어 있는 꼴을 보면 놈도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좋은 거나 먹고 얌전히 기다려야 할 텐데 눈치 없이 굴고 있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샤워하고 나온 류신로의 뒤를 따르며 박덕수는 내내 걱정으로 마음을 졸였다.
아무 쓸모 없는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착실하게 적립됐다.
“……그래, 서요,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자기 맘대로, 해 놓고……. 눈알…. 눈알 나도, 잘 붙일 수 있었, 는데.”
한식당 예약 룸의 미닫이문 사이로 온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만히 선 채 듣고만 있는 류신로 뒤에 선 박덕수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노대식 이 미친놈아……!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되게 빠르게 붙, 이긴 했어요. ……류신로 씨는 이상해요. 하지, 말라고,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고, 다 하지 말래……. 일해야 돈, 버는데 막, 뺏어 갔어요.”
느릿하게 말을 잇는 차온하는 분명히 취했다. 노대식 이 미친놈이 애한테 술을 먹인 것이다.
“아가, 그기 무슨 말이여. 당최 무슨 소리를 허는 건지 알아먹을 수가 없네. 고만 씨부리고 차라리 처자라니까! 겨우 고거 처먹고 이러기여! 누굴 쥑일, 흐억.”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류신로를 발견한 노대식이 식겁하여 황급히 일어서다 의자를 쓰러트렸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류신로는 재빨리 인사하는 노대식은 안중에도 없고 볼이 발그레해진 온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류신로다.”
눈을 게슴츠레 뜬 온하가 툭 뱉듯이 신로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처럼 류신로 씨라고도 하지 않고 이름만을 부르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기가 막혀 박덕수도 노대식도 벙하니 보고 있는 사이 온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숨을 색색 내쉬며 걸어온 온하가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으응.”
온하는 안 받고 뭐 하냐는 듯 콧소리를 냈다. 신로의 가슴팍 앞에서 작은 주먹을 흔들고 붉어진 눈으로 흘겨봤다. 미간을 살며시 찌푸린 신로가 손을 내밀자 그 위로 꾸깃꾸깃한 돈이 놓였다.
“빚.”
물끄러미 구겨진 이만 원을 내려다보는 사이 온하는 다른 쪽 주머니를 뒤적여 나머지를 꺼냈다.
“……반띵.”
총 사만 원의 구겨진 돈을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온하가 도톰한 입술을 불룩 내놓았다.
“이제 혼자, 할 거야. 나는 해 달라고 안 했는데. 할 수 있었는데. 눈알, 할 수 있었어…….”
고시랑대던 온하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묵묵히 듣고만 있는 신로를 뚱하니 흘겨보고는 옆으로 빠져나갔다.
“갈래…….”
서 있을 때도 앞뒤로 조금씩 흔들대던 몸이 기어코 기우뚱 기울었다. 노대식도 박덕수도 엉겁결에 손을 뻗었지만, 온하의 팔을 잡아 품에 넣은 건 신로였다.
“어딜 가?”
“……아파.”
꽉 잡고 있는 팔이 아프다고 밀어내는 온하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어디를 가냐고.”
손을 밀어내던 온하가 몸을 바로 세우려다 신로의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두 번 말하게, 했네. 자, 때려.”
혀를 차는 소리에 놀란 쪽은 오히려 박덕수와 노대식이었다.
노대식의 심장은 아래로 떨어지다 못해 이제는 지하로 묻혀 버린 기분이었다.
쟈가 어쩌자고 저 지랄이여. 나 돌아 부러. 아니 약주로 혀를 축이고 너처럼 꽐라가 되는 놈은 처음 봤고만. 왜 그랴, 미쳤냐?
차온하를 업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노대식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겁을 상실한 차온하는 머리로 신로를 밀며 수작을 부렸다.
“일단은 좀 재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장님. 애가 몸이 부대끼는 거 같은데.”
박덕수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신로는 말없이 온하를 안아 들었다. 당장 애를 패 죽이지는 않을 듯해 박덕수도 노대식도 안도했다.
스위트룸으로 들어가는 신로와 온하를 뒤따르던 박덕수는 문이 닫히고 나서야 노성을 터트렸다.
“뭘 먹인 거야!”
“아니, 형님! 나 음청 억울하오! 몸에 좋으라고 삼계탕을 시켜 줬는디, 그거에 딸려 나오는 인삼주 있잖소, 쥐똥만 한 거! 그건 약이잖어, 그래서 기냥 마시라고 했재! 고게 어?! 무신 술이여, 그냥 입에 바르는 거지! 근디 고걸 입만 대고 저 모양이 됐다니까! 쟈는 왜 저렇게 부실혀, 씨부럴! 저게 사람이여, 삥아리지!”
호소해 봤자 류신로에게는 통하지도 않을 변명이라 노대식은 억울하기만 했다.
∞ ∞ ∞
“가야 해. 갈 거야.”
룸으로 들어서자 온하는 바르작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자꾸 같은 말 반복하는 이유가 뭐야?”
“……일하러, 일해야지. 일해야, 돈을, 벌지. 시간이 아까워, 돈 벌어야 되는데.”
“술 깨면 해.”
“술?”
취한 건지도 모르는지 눈을 깜박였다.
“나 술 안 먹었어.”
“안 마셨다고?”
잔뜩 취해서 제대로 주사를 부리는 주제에 기가 막힌 소리를 했다.
“술은 어른 되면 먹는 거야. 난 술 마시지 않았어.”
“그럼 뭘 먹었는데.”
“여기 와서?”
“그래.”
“삼계탕?”
“또.”
“인삼 물.”
“그게 술이야.”
“약이랬는데.”
온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원망스레 신로를 노려봤다. 그래 봐야 제대로 힘도 안 들어간 눈매에는 아무런 위력도 담기지 않았다.
“술을 먹으면 말이 많아지는군.”
“약이랬어.”
도톰한 입술이 또 튀어나왔다. 색색 크게 내쉬는 숨에 가슴이 들썩댔다. 불합리한 상황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집스레 버티더니 한 모금의 약주에 숨겨 둔 어린 본성이 드러났다. 칭얼거리는 차온하가 새로웠다.
신로는 침실로 가지 않고 방향을 바꾸었다. 어쩐지 차온하를 내려놓고 싶지 않은 탓이다.
따뜻해서가 아닐까. 온하를 안은 채 외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테라스로 나섰다.
찬 바람이 불자 온하는 별안간 몸을 경직하고 떨었다. 몸에 닿은 손바닥으로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왜?”
얼굴을 신로의 어깨에 묻고 온하는 옷자락을 꽉 잡았다.
“……던지지 마…….”
테라스 난간에 너무 붙어 서서 그러는지 차온하는 착각에 빠졌다. 겁먹은 목소리에 신로는 뒤로 한 발 물러서 주었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는지 차온하는 간헐적으로 떨었다.
“안 던져.”
설사 던진다고 한들, 이곳은 아니다. 류신로는 증거가 남는 짓은 하지 않는다. 확언을 속삭여 주자 그제야 안심한 듯 몸이 풀어졌다.
온하는 여유를 찾고 내내 목덜미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난간 너머 야경으로 눈을 돌렸다. 선선한 바람에 열이 오른 몸이 식은 모양이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자 한숨을 내쉰다. 슬슬 술이 깨는지 발갛게 익었던 볼도 차츰 하얗게 돌아왔다.
“일하러 갈래요…….”
“그러니까 어디로 갈 건데.”
“류신로의 집.”
모처럼 마음에 차는 대답에 신로의 입술이 보기 좋게 휘어졌다. 물끄러미 신로를 바라보던 온하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겼다.
“많이 길었어.”
신로는 손을 들어 온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목덜미에 닿은 손가락이 몸을 움츠리던 온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내내 보진 않는다. 그저 하루에 한두 번, 생각날 때 들여다보곤 했다.
온하는 대부분 거실에서 일하다 신로가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현관 앞으로 이동했다. 단순한 움직임을 온종일 보고 있을 만큼 신로는 한가하지 않았다.
하필 감시 화면을 켰을 때 노대식이 온하의 머리에 그릇을 뒤집어씌웠다. 한 손에는 가위를 들고 공중에 찰칵거리는 노대식의 손짓을 본 순간 다음 상황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에 손을 댄다고 생각하자 불쾌했고 이미 전화를 걸고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온하를 불러내고서도 내내 이유를 알 수 없는 탓에 기분은 점점 가라앉았다.
건질 것도 없는 피라미 두 명을 잡아 둔 지하실에서 바닥을 친 기분은 온하의 주정을 보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되바라진 눈으로 흘겨보며 아르바이트비를 나눠 주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재밌었다. 평소에는 감춰 둔 속내를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내려 주세요…….”
새삼 안겨 있는 것이 부담되는지 몸을 틀며 내려오려고 하는 온하를 던지듯이 추슬렀다.
“흑!”
차온하는 테라스 밖으로 던지는 줄 알았는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목을 조르듯 감싸고 매달렸다.
“안 던진대도.”
“…….”
믿지 못하고 달달달 떨리는 손으로 목을 꼭 끌어안는 온하의 엉덩이를 받치고 신로는 실내로 들어왔다. 폭삭 안긴 모양이 꽤 흡족했다.
그대로 안고 소파에 앉자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냥 있으라는 신호로 머리를 꾹 눌렀다.
“술은 좀 깼어?”
차온하는 지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신로는 손가락에 휘감기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계속 매만졌다.
“이거 귀찮아?”
“머리카락이요?”
“응.”
“자꾸 눈을 찔러요. 답답해요.”
“촉감 괜찮은데.”
정말 촉감이 좋았다. 적당히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이발할 돈도 아까워하는 온하가 머리카락에 돈을 썼을 리 없으니 이건 타고난 것이다. 문득 차온하와 눈이 마주쳤다. 허리를 세운 온하가 허벅지를 타고 앉은 채 까만 눈을 깜박였다.
발긋한 눈가에 희미하게 남은 술기운이 느껴졌다.
신로의 손가락이 미끄러져 눈가를 스쳐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며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연한 피부가 닿자 손바닥에 열이 느껴졌다. 도드라진 목뼈를 매만지는 손길이 명백하게 애무와 같은데도 떼고 싶지 않았다.
까맣고 말간 눈동자는 신로의 손끝에 담긴 음습함을 알아채지 못하고 올곧게 바라봤다. 이전에 이렇게 똑바로 제 눈을 볼 수 있던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이제는 차온하뿐이다.
“이상해.”
속삭이는 말에 온하의 눈이 깜박였다.
“내가요?”
“응.”
“어디…가?”
지그시 씹는 도톰한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났다. 자꾸만 씹어 대는 탓에 다른 때보다 부은 입술이 꼭 유혹하는 양 붉었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에서 힘을 뺀 건 서로의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다음이었다. 당기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다가온 온하의 숨이 입술에 닿았다. 새카만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무구하게 반짝였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서로의 입술이 닿을 텐데도 다음을 짐작하지 못하는 듯했다.
키스를 하다니. 차온하와?
가까운 거리에 오히려 신로가 얼어붙었다.
기가 막히는데도 차온하를 밀어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멈춘 상태 그대로 눈앞의 먹이를 잡아먹을까 말까 갈등하고 있었다.
“많이 이상해요?”
조심스럽게 묻는 입술 사이로 희미한 차온하의 향기가 새었다. 막 자라난 새싹처럼 연한 들풀 주제에 살랑살랑 유혹하는 냄새를 흘렸다.
“어디가 이상해요……?”
“다.”
자꾸만 이상하다고 하니 신경 쓰이는 듯 어깨가 축 처진 온하가 신로의 가슴을 밀어냈다. 물러나려는 몸짓에 오히려 잡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가만히 있어.”
뻗대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새무룩하게 눈꺼풀을 내리뜬 탓에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길고 휘어진 속눈썹이 보였다. 쌍꺼풀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인정해야 했다. 차온하를 만지고 싶다는 것을.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고 하면 강제로 덮칠 것이 분명했다. 아니, 깨닫자 더욱 강렬하게 욕망이 일었다.
만지면 안 될 이유가 뭐지?
닿은 입술은 매우 부드러웠다. 촉촉하고 말랑거렸다.
차온하의 크게 뜨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번 더 입술을 핥았다. 닿으면 왜 닿고 싶은지 알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더욱 쑤시고 싶어졌다.
“눈 감아.”
차온하는 까만 눈동자에 한가득 류신로를 담고 있었다. 눈 감는 방법을 잊어버린 맹추 같다. 신로는 뚫어지게 바라보는 차온하의 입술 새를 혀로 갈랐다.
“열어.”
입술을 맞붙인 채 명령해도 차온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가는 허리를 한 팔로 죄여 끌어당기자 희미하게 거부하며 팔을 펴고 밀어낸다.
같잖은 힘이라 쉽게 제압할 수 있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차온하.”
입을 앙다물고 바라보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순진하다고 한들 입술을 핥는 행위가 뭔지 모르지는 않았다.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저으며 한사코 물러나려고만 했다.
“자극하지 마. 도망치면 잡고 싶어.”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왜 이러느냐고 눈으로 묻는 차온하에게 답을 주었다.
“하고 싶으니까. …벌려.”
입술을 열고 들어간 혀로 고른 치열을 더듬자 이번에야말로 살며시 벌어졌다. 자꾸만 도망치는 혀를 옭아매며 빨아들이고 구석구석 닿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더듬었다.
더는 들어갈 수 없는 깊숙한 곳까지 혀를 밀어 넣으며 허리를 끌어당기자 온하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뒤로 힘없이 넘어가는 등을 받치자 한껏 휘어진 채 크게 입을 벌려 숨을 들이쉬었다.
“……허억……!”
키스하는 내내 참은 숨이 한 번에 터진 온하는 물에 빠졌다 건져 낸 사람처럼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차온하.
허리를 쓰다듬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대자 연한 피부가 마치 달라붙는 것처럼 감겨 왔다. 육질이 연한 상등의 고기처럼 야들야들한 피부를 빨아들이자 어깨를 짚은 차온하의 손가락이 그만큼 오그라들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체 향이 자신의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같은 곳에서 지내니 쓰는 제품도 같을 텐데 제 몸에서는 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취할 정도로 강한 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땀 냄새인가? 헐렁한 셔츠를 뒤로 당기며 고개를 숙이는 찰나 우두둑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단추들이 튀었다.
그리고 품 안도 비었다.
단추가 떨어져 활짝 벌어진 셔츠의 한쪽 끝은 신로의 손아귀에 인질처럼 잡혀 있었다. 그 탓에 멀리 가지도 못하고 셔츠를 빼내려고 바동대며 애쓰는 차온하는 두피까지 붉었다.
“차온하.”
어깨를 옹그리며 숨을 멈춘 차온하가 일어서는 신로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도망치면 잡고 싶댔지.”
“도망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장실, 나… 오…, 매……요.”
다가오던 신로가 멈춰 서자 온하는 새빨간 얼굴로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망, 아니에요. 잡지 마요.”
“섰어?”
신로의 물음에 온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니, 아……. 온하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더듬다가 욕실로 급히 뛰어갔다. 온하의 뒷모습을 보며 신로는 고개를 기울이고 미간을 좁혔다. 보드라운 감촉을 떠올리자 주린 배를 채울 고기를 앞에 둔 것처럼 입맛이 돌았다. 당장 입에 처넣을 게 필요했다.
홈바에 비치된 보드카를 반쯤 비우고서야 차온하는 욕실에서 나왔다. 세수를 한 건지 머리를 처박은 건지 머리카락을 반쯤 적시고 욕실 문 앞에서 신로를 바라봤다.
“이리 와.”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신로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식욕과 비슷한 갈증이 성욕과 닮아 있었다.
“……그거, 할 거예요?”
“어떤 거.”
“입 맞추고, 냄새 맡는 거.”
“싫어?”
차온하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만 깨물었다. 키스하기 전부터 살짝 부풀어 있던 입술이 이제 피가 맺힐 것처럼 붉었다.
“싫었어, 차온하?”
신로의 발치에 머물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똑바로 마주했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까만 눈동자에 신로의 입술이 휘어졌다. 가까이 오라고 카운터 위를 톡톡 두드리자 온하가 어렵게 발걸음을 떼었다.
첫발을 내디디고 두 번째부터는 망설임이 없었다.
스툴에 앉은 채 가까이 다가온 차온하를 이끌어 허벅지 사이에 세웠다.
“키스, 할까?”
눈가가 붉은 차온하가 턱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부드럽고 말캉거리는 혀를 감아 빨고, 숨 쉬는 타이밍을 몰라 헤매는 차온하를 위해 이따금 입술을 떼고 틈을 만들어 주었다. 기도하듯 모은 손을 보듬어 매만지자 차온하는 바르르 떨면서도 마주 잡았다. 그의 팔을 당겨 목에 둘러 주고 허리를 끌어안아 카운터에 앉혔다.
“너도 빨아 봐.”
혀를 밀어 넣으며 주문한 말에 살며시 신로의 혀를 빤 온하가 가늘게 눈을 떴다. 벌어진 입에서 더운 숨이 새었다.
입술로 혀를 물고 가볍게 핥으며 넓은 면을 비비는 행위가 음란하기보다 순수했다.
애무 따위, 섹스하면서 한 번도 한 적 없건만 간지럽고 어설프기만 한 차온하가 마음에 들었다. 조금 더 어줍은 몸짓이 보고 싶었다.
“더.”
빨아 보라고 요구하는 신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차온하의 눈이 야릇하고 멍했다. 마치 취한 듯이.
“차온하.”
“……응.”
느릿한 반말이 식전주를 먹고 취했던 때와 비슷했다.
설마. 류신로의 눈동자가 카운터에 놓인 보드카를 스치고 차온하에게로 돌아왔다.
얼굴부터 단추가 다 떨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가슴까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신로가 마신 보드카의 영향이었다. 입 안에 남은 알코올의 흔적으로 겨우 해독됐던 취기가 올라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헛웃음을 흘렸다. 이 수준이면 제대로 마시면 독이 될 정도다.
“기가 막히는군.”
목덜미를 안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차온하가 입술을 감쳐물었다.
“왜……?”
“또 취했잖아.”
“안 취했는데.”
“취했어.”
아니라고 고집부리며 고개를 저은 차온하가 손가락으로 신로의 입술을 더듬었다.
“부드러워.”
“…….”
“근데…, 왜 해? 키스.”
“하고 싶으니까.”
“왜?”
“몰라.”
“좋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문 사이 차온하가 비실비실 웃었다.
“자꾸 오줌 마려. 금방, 쌌는데.”
부끄러운지 신로의 어깨에 얼굴을 감추며 목을 꼭 끌어안았다.
“좋아, 하면 하는 거야…….”
그렇지? 하고 되묻는 차온하가 눈을 접으며 방긋방긋 웃었다.
또 취했다는 사실이 어이없었지만, 조금은 말이 많고 헤프게 풀어진 입매는 나쁘지 않았다.
“류신로?”
“정말 막 부르는군.”
“좋…아?”
“뭐가.”
자꾸만 웃는 눈가가 간살스러웠다.
“…아, 나, 도. 류…, 로, 좋….”
느릿느릿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차온하는 긴 한숨을 내쉬고 류신로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자세를 바꾸어 안아도 깨지 않았다. 신로는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차온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끝이 올라간 입술을 내내 바라보다 침대로 옮겨 주었다.
별로 깨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째서, 라는 의문은 남았지만 흔들어 깨우는 대신 동그랗게 만 몸뚱이를 끌어안았다. 난로를 품은 것처럼 배 속까지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온하溫夏-따뜻한 여름.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알면 기함하겠군.”
비록 배가 다르다곤 하나 형제가 입술을 비비고 서로를 탐하는 일이 정상은 아니겠지. 차온하는 전혀 모르고 있지만.
이름과 같은 몸을 그러안으며 드러난 어깨를 살며시 물었다. 연한 살결을 찢지 않게 힘을 조절했다.
아버지도, 차온하의 조모도 죽지 말지 그랬어. 그랬다면 차온하를 그냥 그 자리에 두었을 텐데. 당신들이 죽어서도 눈 못 감을 일은 없었겠지.
“이제 늦었어.”
이것은 이제 나의 소유다.
잠든 몸에서는 여전히 짙은 향기가 배어 나왔다. 목덜미 깊숙이 코를 묻고 있던 신로가 기척 없이 침대를 빠져나왔다.
침실과 분리된 문을 열고 응접실로 나오자 박덕수와 노대식이 고개를 숙이며 신로를 맞이했다.
홈바에 남은 보드카를 따라 마신 류신로가 나른하게 스툴에 걸터앉았다. 강렬한 수컷의 페로몬이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감춘 박덕수와는 달리 노대식은 야릇한 기운에 당황한 듯 눈알을 굴리며 자꾸만 침실 쪽을 힐끔거렸다. 박덕수가 눈치 없이 구는 노대식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어 주었다.
“보안팀이 준비 끝났답니다.”
“흔적 남기지 마.”
“네, 일러두겠습니다.”
크리스털 잔을 입술에 대고 있던 류신로의 눈동자가 천천히 노대식에게 향했다. 옆구리를 맞고도 침실 문을 힐끔대던 노대식이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노대식.”
“네, 사장님.”
“보지 마.”
주어를 말하지 않아도 류신로가 무엇을 거슬려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형제의 애틋함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탓에 노대식은 머리를 갸웃거리다 박덕수에게 발을 밟히고서야 고개를 숙였다.
“아, 형님. 왜 자꾸,”
속닥이며 불만을 토로하던 노대식은 박덕수의 희게 뒤집힌 눈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사장님. 나가 보겠습니다.”
박덕수는 자꾸만 침실 쪽으로 눈이 돌아가는 노대식의 목깃을 잡아채고 질질 끌고 나섰다. 눈치 없는 놈이 어어, 형님, 와 이라요, 아따 넘어진다니께, 라며 낮게 구시렁거렸다.
“노대식.”
어째 그냥 넘어가신다 했지. 노대식을 구명하는 데 실패한 박덕수는 깔끔하게 손을 놓고 인사한 다음 먼저 나가 버렸다. 불똥이 튀는 건 사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