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충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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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하야, 안녕!”
변호사와 함께 경찰서의 면담실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온하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들이닥친 남자의 쾌활한 인사에 머뭇거리면서도 미미하게 고개를 숙였다.
서민구가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전에 온하는 인사했으니 되었다는 양 담당 형사에게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서민구는 냉랭한 태도에도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덥석 잡았다.
“이런 일이 있었으면 연락을 하지 그랬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응?”
“서민구 검사님-,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서로 몇 번이나 마주친 덕에 그를 알고 있는 이문형이 온하의 앞을 슬쩍 막아섰다. 서민구는 입술을 비틀며 히죽 웃었다.
“또 뵙네요, 이문형 변호사님? 요즘 바쁘지 않아요? 김지원 변호하랴, 뭐 기타 등등 일도 많으신 걸로 아는데요.”
“변호사 업무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이문형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답하자 서민구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쓰러워서 그러죠. 그쪽 법무팀이 한둘도 아닌데 유독 업무가 몰린 건 아닌지?”
“김수영 형사님, 오늘 차온하 군을 부르신 건 추가 증언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이 자리에 관계자도 아닌 서민구 검사님이 오신 이유가 뭡니까?”
이문형의 투명한 안경알이 형광등에 반사되어 싸늘하게 빛났다. 형사는 헛기침하며 서민구에게 눈치를 줬다.
“뭘 그렇게 빡빡하게 따져요. 여기도 중앙지검 관할인 거 모르시는 것도 아니면서. 우리 온하가 어려운 일을 겪었다고 들었는데, 내가 안 와 볼 수 있나? 오늘 온다는 소리를 들어서 도와주러 온 거예요.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까, 그지?”
시원하게 이를 드러낸 서민구가 온하와 시선을 맞추고 친근한 척 싱글거렸다.
“도와주실 거 없습니다. 거의 다 해결된,”
“온하야, 그치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는 거 알아? 네가 이렇게 증언을 열심히 협조했는데도 말이야.”
이문형은 이를 뿌드득 갈다가 정말이냐고 바라보는 온하의 시선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온하야, 그치들이 왜 풀려나는지 모르지?”
“서 검사님!”
“황지 로펌이라고, 좀 그렇고 그런 데가 있는데 거기서 놈들을 아주 열성으로 변호하고 있거든.”
“로펌이 뭐예요?”
“관심 가질 필요 없어요, 온하 군. 서민구 검사님, 이러시면 곤란하다고,”
이문형은 말을 자르고 온하의 주의를 끌려 노력했다. 하지만 서민구는 이문형이 노려보며 경고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로펌이 뭐냐면, 완전 큰 변호사들 회사? 라고 생각하면 돼. 여기 이문형 변호사님 같은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 엄청-! 무지막지하게 비싸거든.”
관심을 보이는 온하의 귀를 막을 수도 없고, 이문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그 이용칠이 일당이 선임할 수 있는 그런 만만한 데가 아니고, 더 웃긴 건 말이야-. 아이고, 잠시만요?”
뜸을 들이듯 온하의 관심을 끌던 서민구가 어딘가 연락하려고 하는 이문형의 손에서 핸드폰을 날쌔게 빼앗았다.
“서민구 검사님!”
“우와, 핸드폰 좋아 보인다. 구경 좀 하고 돌려 드릴게요.”
“돌려-,”
이문형이 달려들자 서민구는 빼앗은 핸드폰을 옆의 형사에게 넘겨 버렸다.
“우, 우와, 좋아 보인다!”
부지불식간에 핸드폰을 전해 받은 형사는 어색하게 탄성을 지르며 면담실 밖으로 도망쳤다. 온하를 두고 따라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문형은 이를 갈았다.
“차온하 군은 범죄 사실에 협조하러 온 참고인입니다. 온하 군의 진술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건 그쪽의 문제이지 않습니까? 자발적 진술을 위해 서까지 온 온하 군에게는 어떤 것도 강제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서민구 검사님의 월권행위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항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온하 군,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가시죠?”
숨을 쉬긴 하는지 걱정될 정도로 이문형은 빠르게 말했다. 새파랗게 질린 이문형을 보니 오히려 온하가 숨찬 기분이었다. 온하는 크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참, 누가 강제했다고 그러십니까? 그냥 사실을 알려 주는 건데.”
“그게 월권-.”
이문형은 이를 악물고 으르다 온하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멀뚱히 서 있기는 하지만 차온하가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일이 생기는 날에는 사달이 난다. 괜히 여기서 더 뾰족하게 굴어 차온하가 깊이 생각할 일은 만들지 않는 편이 좋다.
이문형은 온하에게 문을 열어 주고 나갈 수 있게 비켜섰다. 막 문으로 나서기 직전 서민구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온하야, 넌 널 속여서 이용한 그자들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냐?”
“대답할 필요 없어요, 온하 군.”
이문형은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판단해서 될 일은 아닌 거 같아요.”
차분한 대답에 서민구는 테이블에 기대 고개를 기울이고 피식 웃었다.
“기분이란 게 있잖아, 기분. 화나니까 확 죽었으면 좋겠다든가, 그런 거 말이야.”
무표정한 얼굴에 검은 눈동자가 반질거렸다.
이문형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어도 서민구는 여유롭게 온하의 대답을 기다렸다.
황지 로펌은 거물들만 담당하며 돈만 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죄 사면을 시키는 악독한 놈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용칠 일당은 그저 피라미다. 피라미치고는 오래 해 먹은 피라미지만, 어쨌든 대단한 놈들이 아니었다. 황지 로펌을 선임할 수 있을 정도가 절대로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런 로펌이 수임료도 받지 않고 놈들을 무죄 방면시키고자 혈안이 되었다.
하물며, 놈들은 변호사를 요청한 적도 없었다.
또한 이문형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항의하거나 방어하지 않았다. 능력 없는 변호사도 아닌 이문형이 온하를 데리고 얌전히 경찰서를 오가면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차온하가 류신로와 형제라고 암암리에 소문이 퍼져 있었다. 소문이 아니라 둘은 정말 형제다. 유전자를 대조했다는 흔적도 남았다.
한동안 류신로와 차온하의 뒤를 쫓은 감시팀에게서(사진은 빌어먹게도 삭제되었다) 둘 사이가 대단히 돈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쓰다듬고 안아 주고 차온하가 스스로 걷는 일보다 류신로가 안고 다니는 일이 더 많다고 했다.
그 류신로가. 사람 새끼 같지 않던 류신로가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서민구는 알 수 있었다.
이건 뭔가 있다. 황지 로펌을 움직이는 놈은 틀림없이 류신로다. 감옥에 보내지 않으려는 수작은 직접 처리하기 위해서라고 서민구는 확신했다.
차온하의 분노가-. 아이의 상처가-.
분명, 저 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은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그 사람들에게 제가 무슨 기분을 느껴야 하나요?”
“어?”
당황한 서민구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무 소리 내지 않았지만 이문형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온하의 차분한 옆얼굴을 바라봤다.
“화, 화나지 않아? 그러니까 너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했으니까?”
“아…….”
그제야 서민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는 듯 작게 탄성을 뱉은 온하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이 말랑하게 풀어지자 서민구는 넋을 놓았다.
“괜찮아요. 안 늦었으니까.”
“어? 엉? 뭐?”
“안 늦었으니까 괜찮아요.”
알 수 없는 소리를 반복한 온하의 눈이 싱그럽게 빛났다. 두 볼도 발긋하게 물들었다. 기쁜 기색이 담뿍 묻어나는 미소를 짓고는 면담실 밖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이문형 역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문형은 복도에서 대기하던 형사가 공손하게 두 손을 내민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거칠게 낚아챈 이문형은 멍청하게 서 있다가 놓칠 뻔한 온하를 서둘러 따랐다.
형사는 복도로 따라 나와 멀어지는 온하의 등을 벙하니 보는 서민구를 힐끔 바라보았다.
“뭐 건지긴 하셨어요, 서 검사님?”
입을 벌린 채 바라보던 서민구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아아아아무것도 못 건졌습니다!”
이를 악물고 으르는 서민구를 보며 형사는 혀를 쯧쯧 찼다.
“그러니까 용칠이파가 사실은 제2의 오용파라니까요? 뒤에 최오용이 뒤통수를 치고 달아난 임문기가 있을 거라니까?! 류신로는 그만 캐고 좀!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저번에도 경고 먹었다면서요! 지방으로 쫓겨나시면 검사님만 손해예요. 눈치도 좀 보고 그래요. 예?”
잔소리를 해 대는 형사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뒤통수를 마구 긁은 서민구는 알았다고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야 풀려날 이용칠을 개인적으로라도 감시하겠다고 생각했을망정.
하나 몇 달 뒤 이용칠은 생뚱맞게 도박으로 진 엄청난 사채를 안고 도망치다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류신로나 백류파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음주 운전이었다.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도박에 갑자기 빠진 것도, 간이 좋지 않아 술을 끊은 지 오래됐다는 것 또한, 몹시 수상쩍은 상황이었지만 류신로와 연결할 증거는 없었다.
이용칠의 일당이었던 자가 하나둘씩 실종되어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하악!”
어둠 속에서 작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킨 작은 등이 바들바들 떨렸다.
「일어나요, 일어나요. 눈 떠 봐요.」
의식 불명이었던 류신로가 깨어난 뒤로 차온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차가워진 손으로 한밤에 신로를 흔들어 깨우기를 반복했다. 매번 안아 주고 달래 줬지만 불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에는 죽은 듯이 자기에 나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누명을 쓰고 일을 그만둔 뒤로는 또다시 한밤중에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이어서 거칠게 호흡하며 돌아보는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흔들기 전에 팔을 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놀라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어지고 이내 미안하다고 속삭인다.
“내가 또 깨웠어요, 미안해요.”
“안 잤어.”
차온하는 용케 거짓말을 알아채고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또 사과의 말을 웅얼거렸다.
“자.”
“네.”
토닥거리는 손에 차온하의 몸이 차츰 나른하게 늘어졌다. 규칙적으로 숨을 쉬며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류신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잠들어도 언제 비명을 지르며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땀에 젖은 볼을 쓸어 주며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샤워하고 나와 보니 달그락달그락 그릇이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온하는 어느새 일어나 가사 도우미를 돕고 있다. 식사를 준비하는 가사 도우미를 따라 그릇을 식탁 위에 놓다 신로를 발견하고 총총히 다가왔다.
“씻어.”
부스스한 뺨을 톡 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로 향했다. 가사 도우미는 눈이 마주치자 인사하고 일을 이어 갔다. 류신로는 눈을 가만히 찌푸렸다.
“도와 달라고 했나?”
“예? 아, 아. 아니요, 온하가 그냥, 애가 착해서. 저는 안 해도 된다고 그랬는데-, 죄송합니다, 사장님.”
가사 도우미는 오랜만에 간이 쪼그라들어 심장이 벌렁거렸다. 벌벌 떨리는 손을 앞치마로 감추고 있었다. 류신로는 물소리가 나는 욕실 쪽을 돌아보고는 드레스 룸으로 사라졌다.
류신로가 입원한 동안 긴장이 풀어졌던 가사 도우미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다시는 온하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리라 다짐했다.
“당신에게 할머니라고 부르지?”
“에구머니나!”
가사 도우미는 아무 기척도 없이 불쑥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싱크대를 잡고 겨우 버텼을 뿐 치마 속의 다리가 벌벌 떨렸다.
“차온하가 당신을 할머니라고 하지 않나?”
“예, 예! 그, 그렇게 부르는데요?”
“…….”
가사 도우미는 느릿하게 벌어지는 류신로의 입안에 뾰족한 이빨이 있는 환상을 보았다. 무서워 죽겠다. 눈을 감지도 깜박거리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데 물어뜯든 말을 하든 뭐라도 할 줄 알았던 류신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씻어서 말끔해진 차온하가 주방으로 오고 있었다. 류신로는 말 건 적 없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돌아섰다.
사표를 내리라.
오늘은 기필코 사표를 내고 이 무서운 집에서 탈출하리라.
“퇴근하면 사무실에 들르지.”
주문처럼 일을 그만두자 스스로 세뇌하던 가사 도우미는 입을 쩍 벌렸다.
혹시 그만두기 전에 날 어디다 묻어 버리려는 건가!
영화에서처럼 가사 도우미는 보면 안 되는 것을 봤는지도 모른다.
“살-.”
……려 달라고 말하지 못한 이유는 입 다물라고 강렬하게 구겨진 그의 미간 때문이다.
“차를 보낼 테니, 편히 타고 오도록.”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급에 위험 수당까지 포함된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시간을 거스른다면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을 텐데. 따위의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장의사의 차로 보일 법한 시커먼 승용차에 올랐다.
“차온하를 피곤하게 만들어 줬으면 해.”
오만가지 상상을 했지만, 그중에 전혀 없었던 요구에 그녀는 멍청하게 “예?” 하고 반문했다.
“집안일을 시키든, 같이 장을 보러 다녀도 좋아.”
으리으리 번쩍번쩍한 호텔 사무실의 고급 소파에 앉아 넌 곧 죽는다, 만 아니면 된다고 몹시 긴장했던 가사 도우미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손자라고 생각하고 적당하게 움직여. 급료는 두 배로 책정해 줄 테니.”
적당하게, 라니. 무서운 말이다.
류신로가 차온하를 어떻게 대하는지 뻔히 보고 있는데, 애를 데리고 다니다가 병이라도 나면 그걸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두 손을 꽉 잡고 있던 여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어떻게 잘 맞춰 볼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사장님. 왜 그랬으면 하시는지…….”
“불안한지, 잠을 잘 못 자.”
“예에…….”
“할머니를 좋아하니까, 낯선 사람보다 당신이 적당해.”
“아, 예….”
요는 아이가 밤에 잠을 설치니, 덜 경계하는 자신이 데리고 다니면서 피곤하게 해 밤에 깨지 않게 해라, 라는 소리다.
조폭이 애한테 약을 처먹여서 재우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랄지.
“저어, 사장님.”
가사 도우미는 땀이 나 촉촉하게 젖어 드는 손바닥을 맞잡고 어렵게 류신로와 눈을 맞췄다. 그녀에 비하면 한참이나 어린 남자가 너무 무서웠다. 오한이 일었지만 그가 평소 온하를 대하는 태도에 기대를 걸었다.
“평소에 제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온하가 아직 많이 어리고……. 원래는 학교에 다닐 나인데, 이렇게 집에만 있고,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는 게 안쓰럽고, 해서요.”
“학교에 보내라는 말인가?”
“그, 그래도 되고.”
“싫다더군. 돈을 벌겠다고 했어. 빚도 있고.”
“비, 빚이요?”
당신이 갚아 줘요, 그거 애가 빚져 봤자 얼마나 된다고!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불만이 고스란히 눈에 담겼다. 다행히도 신로의 시선은 장식장으로 향해 있었다.
고급스러운 장식장에 어울리지도 않는 낡은 종이 상자에 머물던 시선이 천천히 돌아왔다.
“차온하가 원하지 않는데 학교에 보낼 필요가 있나?”
“그건 아니지만.”
아니, 학생이 학교에 가야지요! 중학교까지는 의무 교육인 거 몰라? 요즘 같은 시대에 초졸이 뭐예요! 초졸이!
속이 터져도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조폭들이 무식해서 학업의 중요성을 눈곱만큼도 모른다고 욕을 했을망정 말이다.
“그, 꼭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애가 너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그렇고, 또래 아이들하고 너무 달라 안쓰럽고 그, 그러네요, 사장님. 제 손자라면 기술이라도 배우도록 권하지 않았을까, 그래요. 제가 어느 날 죽어도 아이가 기술이라도 있으면 덜 걱정될 거 같고.”
여자의 조심스러운 조언에 류신로는 피식 웃었다.
온하는 기억해 달라고 했다. 평생, 기억하겠다고도 했다. 사무치게 외로워하는 차온하는 세상에 혼자 남으면 어차피 살지 못한다. 외로움에 말라 죽을 터다. 류신로의 죽음은 곧 차온하의 죽음이다.
그러나 가사 도우미가 알 필요 없는 진실이다.
“당신이 가르칠 게 있다면 가르쳐. 청소든 요리든.”
“예, 예, 사장님.”
그녀가 말한 건 학교가 아니라면 검정고시라도 치러서 대학을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뜻이었지만, 이놈의 조폭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
무섭기만 하고 눈치는 더럽게 없는 그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그녀는 그래, 그렇다면 아이를 프로 가사 도우미라도 할 수 있도록 가르치자고 결심했다.
“아야, 온하야.”
다림판 위에서 침대 시트를 다리고 있던 온하가 고개를 들었다. 요즘 직업 노선을 주부로 정했는지 도우미 아줌마를 도와 집안일 하기에 열을 올리는 온하였다. 마트에 가서 장도 봐 올 줄 알고, 그래서 이제 물건값도 대충 알아챘다.
아이가 사회생활을 익혀 가면 기꺼우면서도 귀찮아졌다. 무엇보다 뭘 사다 안기기가 까다로웠다. 이래서 아이가 성장하면 서운한가 보다. 시원하고 섭섭하기도 한 이상한 양가감정을 느끼며 노대식은 온하를 지켜봤다.
가사 도우미는 온하를 데리고 문화센터에서 이것저것 배우기 시작했다. 대체 온하가 인형은 만들어서 뭐에 쓰고, 꽃꽂이는 배워서 어쩌자는 건가.
……라고 생각했던 노대식은 온하가 인형보다 귀엽고 꽃보다 어여뻐서 헤벌쭉 입이 벌어졌다. 아무 쓸모 없어 보여도 뭐, 어쨌든 언제나 그렇듯이 온하는 열심히 했고 노대식은 우리 애가 천재라고 부하들을 모아 놓고 온하 작품을 자랑했다.
“내일이 무신 날인지는 아냐?”
온하는 눈만 깜박거렸다. 꼴을 보니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1월 10일이요.”
날짜를 말하는 온하를 보고 노대식은 혀를 찼다. 그럴 줄 알았다.
작년에도 류신로의 생일은 흐지부지 지나쳤다. 파티라도 해 드려야 하는 게 아니냐, 그래도 조직의 보스인데 이렇게 지나가도 되는 거냐 말들은 많았지만, 끝내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동하 형님 때는 그래도 거하게 술판도 벌이고 그랬는데. 생각해 보면, 아버지 생일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던 류신로가 제 생일이라고 챙길까 싶긴 했다.
어쨌든 온하가 알긴 해야지 싶어 노대식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내일이 사장님 생신인디, 몰랐쟈?”
끄덕.
“알아 두라고, 딱히 뭐, 생신 같은 거 챙기시는 분은 아니지만…….”
코를 비비며 수건을 탈탈 털어서 옆에 걸치던 노대식이 억! 하고 짧은 신음을 터트렸다.
“탄다! 온하야! 거시기! 이불이 탄다, 타!”
“아!”
“아이고, 이게 무슨 냄, 어머나!”
급히 다리미를 들어 올렸지만 하얀 시트에는 이미 시커멓게 자국이 남은 뒤였다.
“아따, 그거 잠깐 대고 있었다고 타고 지랄이여, 영 못 쓰것네.”
온하는 입술을 감쳐물고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가사 도우미 눈치를 살피는 얼굴이 혼날 아이 같다.
“어쩔 수 없지, 뭐. 이게 천이 얇아서 원래 금세 그렇게 돼. 괜찮아, 괜찮아. 근데 뭐 하다 이렇게 된 거야? 한눈팔았어?”
가사 도우미는 다리미를 옆으로 치우고 삼각형으로 자국이 난 시트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물었다. 온하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웅얼댄다.
“내일 생신이라고 해서.”
“나? 나 아닌데? 아, 대식 님 생신이세요?”
가사 도우미는 온하가 대식 님이라고 부른다고 덩달아 대식 님이라고 불렀다. 노대식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녀, 아줌마. 나 말고, 우리 사장님.”
“어머.”
하긴, 그도 사람인데 태어난 날이 있겠지.
벌써 이곳에서 일한 지 1년하고도 반년이 넘도록 생일상을 챙겨 본 적도 관심 가져 본 적도 없는 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몰랐네요. 혹시 뭐, 얘기 들은 거 있어?”
기대 없이 온하에게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그란 눈을 내리깔고 온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사장님이 막 그런 거, 겁네 챙기고 그런 쪼잔한 스탈은 아니지만! 축하헌다고 말이라도 혀 주고 그라라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온하를 두고 가사 도우미는 수건을 다리기 시작했다. 굼벵이같이 느린 온하와는 달리 프로인 그녀의 손에 닿은 수건들이 빠르게 다려졌다.
“……미역국.”
“응?”
“생일날은 미역국 먹는 거잖아요.”
고민 끝에 말해 놓고 정작 난감한 표정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 탓에 가사 도우미는 빙그레 웃었다.
“네가 해 볼래? 내가 알려 줄게.”
우울하게 잠겨 있던 얼굴이 금세 환하게 꽃피었다.
장 보러 가서 분홍 소시지를 바구니에 담는 온하는 여전히 소박했지만, 그게 아이에게 제일 맛있는 거였다.
나름대로 고용주의 생일상인데, 간만에 힘 좀 써 볼까? 온하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며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 있는 가사 도우미는 신나게 장바구니를 채웠다.
가사 도우미가 작정하고 온하에게 살림(?)을 가르치고부터는 그게 나름대로 고됐던지 그동안은 중간에 깨는 법이 없었다.
오늘은 새벽녘부터 산만한 기운이 느껴진다. 경기를 일으키며 일어나진 않았지만 일어날 시간도 아닌데 잠에서 깬 모양이다. 온하는 꼼지락꼼지락, 제 깐에는 최선을 다해 기척을 죽이고 일어났다. 평소와는 다르게 신로를 깨우지 않고 침실에서 살금살금 빠져나갔다.
달그락달그락.
주방에서 바지런히 움직이는 아이를 물끄러미 보다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겨우 새벽 네 시였다.
온하는 냉장고에서 꺼낸 것들을 식탁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뭘 하는 거지. 가사 도우미가 출근하는 시간은 여섯 시였다. 그녀가 미리 해 놓으라고 시킨 일이 있는 건가? 따로 보고받은 일은 없었는데.
문틀에 기댄 채 아이를 지켜보다 노대식에게 연락했다.
“어제 보고하지 않은 게 있어?”
―예? 아, 아니요? 무슨 일 있습니까, 사장님?
“이상한 짓을 하는데.”
―예에? 온하가 요상헙니까? 으데가요! 레지헌티 연락할까요?!
법석을 떠는 수화기 저편을 무시하고 신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뭘 하는 거지.”
음산하게 중얼거리자 잠시 침묵하던 노대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사장님. 혹시 온하가 주방에서 사부작거리고, 그랍니까?
“보고해.”
설명을 요구하자 노대식은 뜸을 들이며 답하지 않았다. 종종 헛소리를 지껄이긴 해도 보고는 꼬박꼬박하던 노대식이 침묵하자 신로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저으기, 사장님. 지가, 약속한 게 있고, 그라지 말입니다.
무슨 헛소리야?
―거시기, 쪼까 지둘리시믄 아가 와 그라는지 금방 아실 겁니다요. 그, 모른 척허시고 한 번, 음, 히, 힘드시겠죠? 버을써 눈치채셨는디 모른 척허기가 쉽지 않으신 거 압니다요. 근디, 그라도, 아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횡설수설 늘어놓는 통에 핸드폰을 끊고 팔짱을 꼈다. 차온하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류신로가 나와서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주방을 종종종 돌아다닌다.
눈매를 좁히며 아이를 보던 류신로의 잇새에서 나직하게 숨이 새었다. 엉뚱한 차온하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노대식의 권유대로 얌전히 침실에 머물며 보고서들을 보던 류신로는 전자 패드를 사이드 테이블에 놓고 침대에 기댔다.
빼꼼 열린 문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발끝을 든 차온하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침대에 올라와 신로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다. 색색, 어쩐지 흥분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류신로 씨.”
잠기운 하나 없는 눈을 뜨고 바라보자 볼이 발갛다. 전에 없이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다 뒷머리를 잡아 내렸다.
보드랍게 닿은 입술을 혀로 가르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리 사이에 작은 몸뚱이를 단단히 가두고 깊게 입 맞추자 차온하는 나긋하게 몸을 기댔다. 그래 봤자 잠깐이었다. 차온하는 여전히 키스할 때마다 숨 쉴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코로 쉬면 된다고 했잖아.”
오뚝한 콧등을 이로 물자 그제야 퐁퐁 숨이 새어 나왔다.
“뭐 했어?”
차온하가 부르러 오기까지 무려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어찌 된 일인지 가사 도우미는 출근하지 않았고, 노대식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달콤한 미소를 지은 아이가 신로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가볍게 당겼다. 일어나라는 몸짓에 따라서 움직이자 뭐가 그렇게 다급한지 발걸음이 재다.
아침 식사를 챙겨 주는 미션이라도 시킨 건가.
차온하가 차려 놓은 식탁을 보니 소꿉놀이라도 하는 기분이다. 옆에 나란히 서서 올려다보는 시선에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왜?”
“……생일 축하해요.”
말해 놓고 제 얼굴이 빨갛게 익은 차온하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신로는 식탁 위에 놓인 미역국을 보고 다시 차온하를 돌아봤다.
“생일?”
끄덕끄덕.
이상했다. 생일을 챙겨 준 사람이 차온하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도 있었고, 가끔은 아버지와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수많은 날 중에 하나일 뿐, 태어난 날을 기념해야 할 이유가 있던가.
낳아 줘서 고맙다고 말하기엔 낳아 달라 부탁한 적 없었고,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데 누군가에게 축하받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한 적도 없었다.
차온하는 뿌듯한 기운을 머금고 신로의 손을 잡아 식탁 쪽으로 당겼다. 티도 안 나게 미약한 힘이었다. 신로는 흔들림에 가까운 차온하의 몸짓을 가만히 음미하다 걸음을 떼었다.
신로는 식탁에 차려진 찬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반찬 중에 유난히 도드라지는 분홍 소시지부터 입에 넣었다.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입에도 넣어 주자 빠끔 벌려 받아먹고 웃는다.
“네 생일에도 이렇게 해 줄까?”
당연히 기억하고 있는 차온하의 주민번호를 떠올리며 조용히 물었다. 차온하는 동그란 눈을 가늘게 접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곁에 서서 류신로가 음식을 하나하나 맛볼 때마다 따라 움직이는 눈동자가 별이라도 담은 듯 반짝거렸다.
오로지 차온하 혼자 준비한 음식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도움을 받았겠지만, 어쨌든 신로는 아이의 손을 거쳤을 음식들을 차례로 먹고서야 젓가락을 놓았다.
“……달아.”
“설탕 넣은 건 없는데.”
당황했는지 음식을 입에 넣고 맛을 가늠하며 온하가 고개를 갸웃댔다. 신로는 차온하의 목을 끌어당겼다.
“아주, 달아.”
달아, 아주.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어.”
달랑 아이를 안아 올리자 당황으로 물든다.
느리게 벌어지는 입술을 평소라면 기다려 주었겠지만, 닿는 곳이 모두 녹아 버릴 듯 맛있는 향이 나 왈칵 깨물었다.
벽으로 몰아넣고 허리춤으로 넣은 손으로 맨살을 더듬었다. 숨이 모자라 머리를 돌려 숨을 들이쉬면 따라가서 막아 버렸다. 연한 볼이 푹 파이도록 혀를 빨아 당기며 옷을 헤치고 들어간 손으로 등을 쓸어 올렸다. 손끝으로 날개뼈를 덧그리고 척추를 훑어내리자 허리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차온하가 나직하게 신음했다.
“흐응…….”
목소리에 반응한 손아귀가 오그라들어 뒷머리를 휘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신로는 저절로 벌어지는 입술에서 뱉어지는 탄성을 삼키고 온하의 숨 한 톨까지 훔쳐 냈다. 호흡이 곤란해진 아이가 점점 허물어지다 못해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차온하.”
차온하의 흐릿한 눈동자가 신로를 향했다. 가쁜 호흡을 내뿜으면서도 온하는 가는 팔로 신로의 목을 휘감고 매달렸다.
“코로 숨 쉬려고 했는데…….”
할딱이면서도 귓가에 속삭인 차온하가 어리광 부리는 어린 짐승처럼 기댔다.
“잘 안 돼요…….”
말랑한 몸뚱이가 부서질까 꽉 끌어안지도 못하고 류신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욕망이 흉포하게 날뛴다. 대체 어쩌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식욕에 가까웠다. 향기마저 달콤했다.
“자자.”
“식사….”
“맛봤으니 됐어. 아주 달고 맛있다고 했잖아.”
아이의 앞치마를 벗겨 던져 버리고 빠르게 침실로 향했다.
“자.”
신로는 온하를 이불로 꽁꽁 싸매고 끌어안았다. 고치처럼 말린 차온하가 해맑게 웃었다.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졸려요?”
“어서 자.”
“별로 안 졸린데…….”
순순히 눈을 감은 차온하는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혼자 애를 썼으니 당연했다.
살며시 벌어진 입술로 손가락을 넣어 훑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입천장을 간질이자 오므리고 본능처럼 혀를 감는다. 류신로는 아이의 관자놀이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머리카락부터 발가락 끝까지 맛보고 싶었다.
잠든 아이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다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어느새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한 줌에 잡히는 발목을 꽉 조이다 풀었다.
부러트리고 싶은 것도 같았다. 빈 곳이 없을 정도로 잇자국을 내고 싶고, 닿은 적 없는 곳을 점령하고 싶었다.
초등학생이 그러듯이 괴롭히고 싶다. 유치해서 기가 차다.
온하의 잡히지 않은 쪽 다리가 꿈틀거린다. 둘둘 이불에 싸매진 몸을 틀고 신로에게 더욱 바싹 붙는다. 발목이 부러질 뻔한 줄도 모르고 온기를 찾아 파고든다. 조그만 발을 꼬물거리며 신로의 허벅지 사이로 끼웠다. 신로가 잡고 있던 발마저 스르륵 빠져나가 똑같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두 발을 신로의 허벅지 사이에 끼운 차온하는 만족한 듯 입술 끝을 올렸다.
온기를 찾는 듯한 몸짓에 심장이 불쾌하리만큼 뛰었다. 열이 오르고 귓가에 이명이 울릴 만큼 저리고 뻐근했다.
웅크린 작은 몸을 그러안고 처음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을 담아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섹스하고 싶다, 차온하.”
불쾌한 감각조차도 기껍게, 오직 너와.
∞ ∞ ∞
온하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여 별안간 눈을 떴다. 악몽을 꾸면서 일어난 적은 있어도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스멀스멀 몸에서 이상 신호가 느껴졌다. 잠기운이 멀어질수록 심장은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온하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용기를 내어 침대 시트를 살금살금 더듬었다. 그리고 흡, 숨을 들이켰다.
어떡하지?
침대에 실례를 한 것 같았다.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온몸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은 온하가 심호흡했다. 꿈결인지 실제인지 확인해야 한다. 손가락을 꼼질꼼질하고 또 한 번 허리 아래의 침대 시트를 더듬어 보았다.
“하아-.”
이번에는 안도의 한숨이 새었다.
아래가 축축하게 젖은 느낌이었는데 다시 만져 보니 시트는 뽀송뽀송했다.
온하는 쿵쾅대던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어릴 때처럼 실수한 줄 알고 등골이 서늘했었다. 잠깐 새에 얼마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팬티가 축축……. 축….
“……!”
아아악! 온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나 욕실을 향해 달려갔다. 변기 위에 앉아 속옷을 내린 온하는 절망했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일단 벗은 속옷을 돌돌 뭉쳤다.
패닉에 빠져 안절부절못하며 샤워기를 틀었다. 온수 쪽으로 되어 있지 않은 탓에 찬물이 쏟아졌지만, 온몸이 불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온하는 그게 찬 줄도 몰랐다.
쪼그리고 앉은 온하의 셔츠가 점점 젖어 들어갔다. 미끈거리는 팬티를 빠느라 정신이 팔린 온하는 욕실 문틀에 기대선 신로를 눈치채지 못했다.
“몽정했어?”
무심한 목소리에 온하는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 미끄러져 벽에 부딪혔다. 타일 바닥으로 나뒹군 온하의 위로 차가운 물줄기가 콸콸 쏟아졌다. 숨까지 엉망진창 거칠어졌다.
신로는 한심한 꼴로 널브러진 온하에게 다가와 샤워기를 잠갔다. 속옷을 뒤로 숨기느라 급급한 온하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가볍게 들어 올렸다. 힘없이 늘어진 다리가 달랑거린다. 젖은 셔츠는 몸에 달라붙어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 젖어요.”
속옷은 주먹 안에 감추고 온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로는 그런 온하를 아랑곳하지 않고 방까지 안고 갔다. 침대에 앉히고 젖은 셔츠를 벗겨 준다. 그는 어느새 손에 들고 있는 큰 타월로 알몸이 된 온하를 대충 닦아 주었다.
“샤워하려면 옷을 벗어야 된다는 것도 가르쳐 줘야 해?”
그런 거 아닌데.
대답하고 싶지만 차갑게 식은 몸이 바들바들 떨려서 숨만 서럽게 뱉어졌다. 주먹에 꽉 쥐고 있는 젖은 팬티를 본 신로가 손을 내밀었다.
“그건 왜 쥐고 있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오그라들어 펴지지 않는 주먹에서 물만 뚝뚝 떨어졌다.
“차온하.”
“……네.”
온하는 겨우 쥐어 짜내어 희미하게 대답했다. 신로는 미간을 살며시 구겼다.
“처음이야?”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니 긍정이었다.
이제야 첫 몽정을 하다니, 참 많이 늦되었다. 멍청하고 둔하고 늦되고, 모두 다 차온하다웠다.
이런 어린애와 섹스하고 싶다니, 갈 길이 아득했다.
온하는 이를 부딪칠 정도로 떨었다. 하얀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신로는 시트를 끌어다 머리에 뒤집어씌우고 드라이기를 가져왔다.
온하는 이불 귀신이 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신로는 굳은 온하의 몸을 당겨 무릎에 앉히고 머리만 끌어냈다.
위잉. 뜨거운 바람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며 손가락으로 빗겨 주자 떨림이 조금 잦아졌다.
“자연스러운 거야.”
성교육을 담당하는 학교 보건 교사가 된 기분으로 신로는 우울하게 푹 꺾어진 뒤통수를 가만히 쓸어 주었다. 잘 익은 목덜미나 핏물이 떨어질 듯이 붉어진 귓바퀴가 선명했다.
“학교에서 알려 줬을 텐데?”
온하는 또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보아하니 처음이라 놀란 모양새다.
“………했…요?”
웅얼웅얼. 입속에서 도는 말이라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도 뭐라고 물었는지는 빤했다.
류신로 씨도 했어요?
“아니.”
섹스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쌓아 둘 정도로 상대가 없던 적도 없었다. 솔직한 대답에 차온하의 몸이 덜컥 굳어졌다.
드디어 마주친 눈에 류신로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왜, 왜 웃어요……?”
그야, 네가 날 걱정하는 눈으로 보니까.
몽정을 한 적 없다는 말에 류신로의 기능에 문제가 있는지 걱정하는 얼굴을 보자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겨우 몽정 안 한 걸로 불구 취급이다.
코를 쥐고 흔들자 차온하가 희미하게 신음했다. 엉뚱한 방향으로 튀곤 하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졌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느닷없이 파고들어 가슴을 간지럽혔다.
찡그린 눈매에 습기를 담고 있는 차온하는 여전히 걱정이 많은 눈이었다.
“내가 걱정스러워?”
차온하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신로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을 오그라뜨려 옷을 가만히 잡고 조바심이 나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거. 해야, 정, 정상이잖아요. 혹시, 다친 게 안 나아,”
신로는 점점 파랗게 질리는 차온하의 입술을 가만히 물었다.
“다 안 나아, 서.”
밀어내고 제대로 전달하려고 바르작대는 아이의 입술에 신로는 바람을 불어 주었다.
“쉬-.”
차온하는 금세 불안에 물들어 색색 거친 숨을 내쉬었다. 들썩이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신로는 재차 괜찮아, 하고 아이를 진정시켰다.
“사고 전에도 몽정한 적 없어. 그건 아무런 관계없어. 난 다 나았어, 차온하.”
“하지만 다른 곳이 고, 고장 난 걸 수도-.”
“차온하, 날 믿지 못해?”
새까매진 눈동자가 그날의 스케치북 그림처럼 깊고 어두웠다.
누구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바닥을 모를 어두운 그림 속 어딘가, 얼어붙은 차온하가 있었을 것이다.
“믿고 싶은데…….”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눈에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꿈일까 봐 무서워요. 일어나면 류신로가 깨어나지 않았을까 봐 무서워요. 나 혼자 남아 있는 게 현실일까 봐.”
악몽을 꾸고 소스라치며 일어나면 차온하는 코밑에 손을 대 숨을 느끼고 기어코 이름을 불러 신로를 깨웠다. 눈이 마주쳐야 안심이 되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어두움, 고인 공기, 고요하게 멈춘 시간.
할머니도 없고 쓸쓸한 먼지 냄새 가득하던 단칸방에 홀로 웅크리고 있을 때, 춥고 외롭고 무서웠다. 그래서 점점 무감각해졌다.
온통 검기만 했던 세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가 되어 모두에게 잊혔던 시간은,
바깥의 냉랭함을 감싼 류신로가 나타났을 때 비로소 흘러갔다.
이름도 없는 어떤 덩어리에서 슬픔을 느끼고, 해야 할 일도 있고, 알아봐 주는 이도 있는 ‘사람’으로.
무서워. 들리지도 않을 작은 소리를 한숨처럼 뱉고서 차온하는 바닥으로 내려섰다. 류신로의 미간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본 온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귀찮게 굴고 있는 걸까. 불안으로 얼룩진 얼굴을 가리려 시트를 뒤집어썼다.
“……옷 입고 올게요.”
시트를 바닥에 질질 끌고 나가는 뒷모습을 따라 신로의 눈동자도 움직였다. 추를 매단 듯, 묵직하게 끌려 어둠에 스미는 자락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다 신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서자 하얀 덩어리가 보였다.
소리 없이 경련하는 덩어리를 끌어안고 들어 올리자 가녀린 흐느낌이 샌다.
“흐으…….”
혼자 남지 않는다면, 그래서 오래 기억한다면,
아이의 저변에 깔린 두려움은 집착이 되고 괴상한 애정으로 변질되었다. 딱히 상관없었다.
상담? 치료? 개나 주라지.
류신로는 속으로 웃었다.
차온하가 보는 건 나뿐이어야지. 다른 사람은 볼 필요 없다.
대신 원하는 것,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줄 테니까….
“병원 갈까?”
“…….”
“네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대로, 만족할 때까지 치료받을게. 고장 났으면 고칠 테니까.”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쓸어 올렸다. 대충 말려져 습한 두피가 차오르는 열에 부딪혀 진한 체 향을 내뿜었다.
눈꺼풀 위를 핥아 주고 눈꼬리를 입술로 눌렀다. 입술 사이로 차온하의 눈물이 뜨겁게 스몄다. 혀로 입술을 핥아 맛을 음미했다.
“그만 울어.”
신로의 미간이 패이자 온하는 주먹으로 얼굴을 슥슥 닦았다.
“……짜요?”
“맛없어.”
“미안해요.”
풀 죽어 입술을 깨무는 온하를 가만히 보던 신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달아지게 해 줄게.”
수분으로 축축해진 가뭇한 눈동자에 조명이 반사되어 일렁였다. 넘실거리며 새로 차오른 눈물이 표면장력으로 동그랗게 부풀었다.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가 눈가가 가늘게 접히자 툭 터져 흐른다.
온하는 스스로 눈물을 닦아 내고 기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줍게 미소 지으며 목에 팔을 감고 나긋하게 기댔다.
“지금은 달지도 몰라요…….”
“그래.”
차분하게 등을 쓸어 주자 또 지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신로는 일주일이나 입원해 종합 검진을 받았다.
온갖 검사를 다 하고 관련된 과에서 나온 의사들에게 아무런 이상 소견이 없다고, 더없이 건강하다는 말을 듣고서도 온하는 만족하지 못했다.
“류 사장이 또 입원했다기에 어디 다친 줄 알았지 뭔가?”
VIP실에 찾아온 병원장은 환하게 웃었다. 신로의 반대편 소파에 앉은 백발의 병원장이 웃으면 뒤에 시립한 하얀 가운 무리도 덩달아 웃었다.
“건강을 염려해 미리 검진하는 습관은 꽤 좋은 거예요. 젊을 때부터 그렇게 관리해야지, 암. 어허허허허!”
신로가 말없이 듣고만 있어도 병원장은 혼자 크게 웃었다. 그렇다며, 맞는 말이라며 또다시 가운 무리도 웃었다.
“추가로 검사할 것은 없습니까?”
“내가 차트를 다 받아서 살펴보고 보고도 받았는데, 없었다니까. 아주 깨끗해. 그렇지?”
“네, 병원장님.”
“아주 깨끗합니다, 병원장님.”
신로의 옆에 나란히 앉아 의사들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온하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신로는 거보라며 크게 웃는 병원장을 무시하고 초조해하는 온하만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이 가득한 눈동자가 가뭇하다. 조용히 지켜보던 신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병원으로 가 볼까?”
병실 안 공기가 쨍하니 얼어붙었다. 백류파의 류신로가 면 안 사는 건강 염려증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직전이었다.
병실 안에서 대기하던 박덕수와 노대식은 그만 온하가 괜찮다고 말해 줬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
심호흡을 한 차온하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낯가리는 성격이라 볼이 점점 빨개진다.
“몽정을 안 했대요, 할아버지.”
병실이 냉동고처럼 싸늘해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뿐더러 모두 동태처럼 굳었다.
류신로에게로 눈동자가 쏠리지 않게 하려고 눈 주위 근육에 힘을 주며 안간힘을 쓰는 건 의료진뿐만은 아니었다.
“그거……, 이상한 거잖아요. 고장 난 거면 검사해야 하잖아요.”
고장. 류신로의 그곳이 고장.
병원장을 비롯한 의료진은 지레짐작을 시작했다. 설마 정말 몽정을 하지 않았다고 걱정하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백류파라는 커다란 조직을 이끄는 자니, 성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달리 표현했다고 넘겨짚었다.
“아니, 온하야. 우리 사장님 아랫도리는 무지 왕성하시다! 오줌 줄기가 바위를 가르고 허리짓 한 번에 땅이 요동치는 변강쇠 같다!”
……고 주장하자니, 박덕수도 노대식도 지난 1년간 여자와 밤을 보낸 류신로를 본 기억이 없다. 아니, 사실은 한 번도 못 봤다.
끄응, 설마. 박덕수와 노대식은 깊고 묵직한 탄식을 뱉었다. 난감한 기류가 흐르는데도 온하는 해맑았다. 병원장에게 할아버지라고 불러 대며 거기 검사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비, 비뇨기과에서 검사받으면 되긴 하지만…….”
“큭.”
짧은 웃음소리가 울린다. 끝내 시선 단속에 실패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류신로에게 몰렸다.
“……집요해서는.”
돌아보는 아이의 붉은 볼을 툭 친 신로의 눈가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헛걸 봤다고 여긴 노대식이 고개를 흔들고 눈을 비볐다. 박덕수도 같은 심정이었지만 침착하게 굳은 채 서 있었다.
달콤한 기운을 풍기던 류신로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검사 결과 직접 알려 줘서 감사합니다, 지영태 병원장님. 다음에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어, 어, 어, 그, 그래요, 류 사장. 뭐, 부족한 거 있으면 말하고.”
“네.”
나가라는 태도에 병원장은 헛기침하며 대동하고 온 의료진을 이끌고 병실을 나섰다.
“나가.”
우물쭈물 서 있던 박덕수와 노대식도 쫓겨났다.
사람들이 다 일어서자 따라 일어섰던 온하도 움직였다.
“어디 가?”
“나가라고…….”
“너 말고.”
팔을 잡아당겨 안아 올리자 당연하단 듯이 허리에 다리가 감겼다. 그저 매달리기 편한 자세를 취한 것으로, 이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신경 쓴 적이 없는 차온하였다. 그러니 조직원과 의료진 앞에서 뱉은 말이 어떻게 해석될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다른 누가 착각을 하든 아무 상관 없지만, 작은 머리통이 쓸모없는 걱정으로 가득 차는 일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보여 줄게.”
온하를 침대에 내려놓고 신로는 몸을 기울였다. 온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뭘 보여 줄 건지 묻지도 않는다. 류신로가 주는 것은 무엇이라도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순종했다.
신로가 입을 맞추며 혀로 목구멍 안쪽까지 깊이 헤집었다. 차온하는 입을 크게 벌리고 받아들인다. 물이라도 삼키는 양 꼴깍꼴깍 울대를 움직였다. 신로의 목에 팔을 휘감고 꼬옥 감싼다.
숨 쉴 기회를 주며 신로는 조금 떨어졌다. 온하의 벌어진 입술에 신로의 아랫입술이 살며시 닿아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는 온하를 기다려 주며 신로는 그의 젖은 입술을 매만졌다. 볼에도 턱에도 입을 맞췄다.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고 벌어진 틈으로 가지런한 이빨도 매만졌다.
“빨아.”
귓불을 우물거리며 속삭이자 오므라진 입술로 젖이라도 빠는 양 손가락을 흡입했다. 손가락을 빼내고 대신 혀를 내주자 가르치지 않아도 혀를 빨았다.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젖은 손가락으로 허리춤을 매만졌다. 아이의 열이 오른 피부가 스며든 공기와 맞닿아 오톨도톨하게 올라왔다. 니트 재질의 조끼와 함께 셔츠를 밀어 올리자 한 줌에 잡힐 듯한 가느다란 몸뚱이가 드러났다.
초라한 몸뚱이. 봉긋한 가슴도 없고 제대로 살이 오르지 않아 갈비뼈의 형태가 또렷했다. 납작하다 못해 푹 꺼진 배가 며칠 굶은 비루한 개처럼 등가죽에 바싹 붙었다.
그럼에도 군침이 돌았다. 식욕과 닮은 성욕이 끓어올랐다.
할딱거리며 오르내리는 가슴을 물끄러미 보다 소름으로 솟아오른 돌기에 혀를 가져다 댔다. 콩알보다도 작은 것을 혀로 굴리자 비명 비슷한 탄성이 터졌다.
“흐아앗!”
머리카락을 휘저으며 밀어내려는 손짓에 당황이 느껴졌다. 왜 이러는지 이제야 의문이 드는 모양이다.
그러게 진작 물었어야지. 이빨로 단박에 붉어진 돌기를 물자 이번에는 조금 더 강력한 제지를 했다. 그래 봐야 이마를 밀어낸 것이지만. 표정을 보고 싶어 신로는 고개를 들어 주었다. 온하는 여지없이 빨개졌다.
온하는 커다란 눈을 뜨고 방금 깨물린,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꼭 눌러 가렸다. 밀려 올라간 옷을 내리면 될 것을, 분명 생각도 못 했을 터다.
신로가 나직하게 웃자 온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나 얼굴에 힘을 줬는지 미간이나 입술까지 쪼글쪼글하게 오그라들었다. 신로는 손등을 깨물어 주고 허리를 세웠다.
“손.”
입술을 앙다물고 버티던 차온하는 신로가 떨어진 기척에 슬며시 눈을 떴다.
무릎을 꿇고 일어선 신로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적당히 떨어진 거리감에 온하는 일단 안심했다. 젖꼭지를 보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차온하, 손 줘.”
온하는 재촉하는 신로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그는 온하가 내민 손을 잡자마자 양쪽으로 팔을 벌렸다.
침대에 양손이 잡혀 억눌리자 놀라 혀를 깨물 뻔한 온하 앞에 류신로가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그는 헐떡이는 온하의 입속에서 혀를 끌어내 빨았다. 아릿하게 아픔이 느껴지면 놓아주고 아픈 혀를 웅크리기가 무섭게 따라 들어와 입천장을 문지르고, 깊은 곳까지 가득 메웠다.
그는 코로 숨 쉬면 된다지만, 온하는 입을 벌릴 때마다 뭔가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입맞춤으로 익사할 듯했다.
“하아-! 하! 하아! 하아!”
차온하는 속박에서 벗어나고도 오랫동안 부족한 숨을 메우느라 헐떡였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목덜미에 입술이 닿고 또다시 젖꼭지에도 입술이 닿았지만 밀어낼 기력 따위 없었다.
류신로는 조금 전처럼 덥석 물고 빨지는 않았다. 입술로 간질이듯이 슬쩍슬쩍 비볐다. 기다려 주듯이. 그리고 다시 류신로는 입을 맞췄다. 입안으로 매끄럽게 파고드는 혀가 너무도 뜨거웠다.
“으, 흐-.”
아픈 것도 같고 타는 것도 같았다.
“…류, 으읍.”
말하려고 해도 손가락이 입속을 헤집어서 말하지 못했다. 온하는 본능처럼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빨았다. 손가락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데 빨고 있으면 좋았다. 손가락이 하나였다가 두 개로 늘어나고 세 개가 되었다. 입안을 가득 채운 손가락이 혓바닥과 입천장을 동시에 문지르자 목구멍 속으로 찌르르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목구멍을 가슴을 아랫배를 찌릿찌릿 자극한다.
아래가 점점 간지러워졌다. 온몸의 간지러움이 아랫배, 아니 그 아래로 몰려왔다. 가랑이 사이가 점점 불편하게 죄였다. 다리를 오므리고 싶은데 류신로의 몸통이 가랑이 사이에 껴 있어서 몸만 뒤틀었다.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가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간지러워서 긁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앞에서 속옷 위를 더듬고 싶지는 않았다. 온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빨며 끙끙 앓았다.
입안을 헤집는 손가락이 이곳저곳을 건드릴 때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입에서 칠칠치 못하게 침이 넘쳐흘렀다.
신로가 목덜미를 이로 긁자 차온하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으응.”
이상할 정도로 부은 아래가 류신로의 몸과 스치자 머리가 하얗게 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이상한 줄도 모르고 감각을 좇아 몇 번이고 허리를 치댔다. 류신로에게 몸을 비비고 문지르고서 뒤늦게 낯이 뜨거워졌다.
입맞춤도 하지 않았는데 잠시나마 숨 쉬는 방법을 까먹었을 정도로 부끄럽다.
이상해. 이거 이상해. 나 고장 났나 봐.
생경한 감각에 당황한 차온하의 얼굴이 울기 직전이다. 류신로는 귀를 물고 웃었다.
“만져 줄까?”
신로의 속삭임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는 온하를 짜부라질 만큼 억눌렀다. 맞붙은 아래가 터질 듯했다.
“아아….”
느릿하게 비벼졌다. 아픈 건 아니었다. 간지러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원해지지도 않았다. 몸이 공처럼 오그라들었다.
온하의 무릎을 좀 더 벌린 신로가 조금씩 빨리 움직였다. 두 사람 사이의 천이 비틀리고 당겨졌다.
“아, 안 돼.”
“돼.”
“아아-. 아! 아! 흐읏.”
무릎을 잡아 벌린 손을 차온하가 더듬더듬 매만졌다.
밀어내는가 싶었지만 잔뜩 어그러지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온하는 떨리는 손을 더듬거리며 뻗어 왔다. 살금살금 신로의 손목을 훑고 팔뚝으로 쓰다듬고서 이윽고 안아 달라고 팔을 펼쳤다. 신로는 목을 휘감을 수 있도록 상체를 숙여 주었다.
차온하는 두 팔로 힘껏 매달려서 신로의 목을 안았다. 파들파들 떨며 목을 조른다. 정작 숨 막히는 쪽은 신로인데 온하가 더 죽을 듯 헐떡거렸다.
신로는 한 줌인 허리를 움켜잡고 마치 정말 섹스라도 하는 것처럼 하체를 비볐다. 아이는 숫제 엉엉 우는 신음을 내었다.
“나와, 나와, 나와! 나와! 나앗, 흐윽! 아! …으!”
“싸.”
“안, 아, 아안, 옷에 묻어, 묻, 흐… 아, …!”
숨을 멈춘 아이가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저 비벼 대는 행위로 절정에 다다른 온하의 눈이 멍하다. 목을 안았던 팔도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브리고 숨만 헐떡인다. 목덜미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차온하.”
몽롱한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다가 마침내 신로의 얼굴에 맞춰졌다. 정신 차리고 부끄러워하며 화장실로 달려가기 전에 늘어진 손을 잡아 이끌었다.
“잘 잡고 있어.”
아이의 두 손을 모은 신로는 제 성기를 잡게 했다. 그제야 정신이 든 가뭇한 눈동자가 황급히 아래로 쏠렸다.
“네 손으로 할 거야.”
“…….”
“몽정 따위는 하지 않아. 그래도 아무 문제 없으니까, 잘 봐.”
아. 벌어지는 입술을 보며 신로는 저기에 쑤셔 박아도 좋으리라 생각했지만, 지금 했다가는 정말 기절할 것이다.
놀라서라기보다 숨을 못 쉬어서.
키스도 제대로 못 하는데 펠라티오는 너무 일렀다.
가르치면 되려나. 언젠가는 할 수 있겠지.
아이의 입술을 매만지며 류신로는 허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잘 보라고 한 덕분인지 아이의 시선은 손바닥에 비벼지는 성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차온하-.”
손바닥 외에는 접촉이 없는데도 차온하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다물어질 줄을 모르고 발갛게 벌어진 입에서 혀가 기어 나왔다. 신로는 기어코 입맛을 다시는 혀를 잡아챘다.
“응, 흐으…….”
신음에 가볍게 쥐고만 있는 아이의 손을 움켜잡았다. 강하게 압박하며 허리를 거칠게 놀렸다.
절정이 다가왔을 때 몸을 일으킨 건 입술에 가까이 하고 싶은 욕망이 강해서였다. 빨려서 붉어진 입술에 성기를 들이댄 순간 차온하의 혀가 삐죽 비어져 나왔다. 홀린 듯 멍한 얼굴로 신로의 성기 끝을 살며시 핥았다.
만족감으로 긴 숨이 터졌다. 좋아. 짧은 감상을 내뱉고 휘어지는 입술에 아이의 열 오른 눈동자가 고정됐다.
오랜만의 사정에 뜨거운 정액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모조리 아이의 얼굴에 쏟아 놓고도 파렴치한 짓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눈을 뜨지 못하고 찡긋거리는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대충 훑어 주자 차온하가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류신로는 늘어진 온하를 안고 병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상의를 벗기고 정액으로 엉망진창으로 젖은 하의와 속옷도 벗겨 냈다. 제 옷도 훌훌 벗은 류신로는 샤워기 아래 차분하게 선 아이를 닦아 주었다.
“기분 나빴어?”
늘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움직이던 차온하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처럼 똑바로 마주한 눈시울이 살며시 주름 잡혔다. 배시시 웃는 볼이 발그스름히 잘 익어 있었다.
“사랑을 나눈 거잖아요. 우리는……. 그런 사이니까 해도 괜찮아요.”
경멸하지 않을 것은 알았지만.
“우리가 한 게 뭔데?”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
“응?”
입술을 감쳐물고 눈을 치뜬 차온하가 빤히 바라봤다. 경험이 없어 설 때마다 화장실로 뛰어간 주제에 반질거리는 눈알이 몹시 당돌했다.
“섹-스.”
“유사 섹스.”
정정해 주자 깜박깜박, 모났던 눈알에서 힘이 풀어졌다.
“달라요?”
“연인끼리만 하는 것은 맞아. 너와 나, 둘이서.”
그럼 됐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머리를 기댔다. 몸이 나른한 모양이었다.
“그거, 있잖아요…….”
한숨 같은 웅얼거림이 물줄기의 소리를 가르고 파고들었다.
“…뜨겁고,”
솔직한 감상을 내뱉으며 온하는 부끄러워했다. 입술을 깨물고 목에 달랑 매달렸다.
“……달았어요.”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음에는 차온하의 것도 먹어 봐야겠다고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차온하의 것은 틀림없이 다디달겠지.
“고장 난 곳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과정은 비효율적이었지만 드디어 안심한 모양이다. 따뜻한 입술이 볼에 닿아 류신로 역시 흡족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작은 몸뚱이가 여름처럼 무더웠다.

Fin

আপোনাৰ আৰু মোৰ মাজৰ সংযোগ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