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이따금 들리는 고성에도 차온하의 시선은 봉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각도를 맞춰서 반듯이 접고 적당한 양의 풀을 바르는 손길은 느리지만 꼼꼼했다. 열심인 것은 분명하나 속도가 굼벵이 기어가는 수준이다. 곰의 눈알을 붙일 때와 마찬가지로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집중하고 있던 차온하는 사무실의 문이 요란하게 열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이러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사만 하고 간다니까 그러네. 어이, 류 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검은 양복의 남자가 신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낯이 익었다.
“서민구.”
“오! 내 이름 기억하네, 류 검!”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남자는 사법 연수원 동기였다.
“봤지?! 당신네 사장님하고 내가 아는 사이라니까 더럽게 말을 안 들어 처먹어. 비켜 주지?”
서민구는 이를 빠득빠득 가는 가드를 한쪽으로 밀어내며 기어코 안으로 들어섰다.
온하는 낯선 사람이 들어오자 신로를 힐끔 바라봤다.
나가 있어. 소리 내지 않아도 용케 알아들은 온하가 테이블 위에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봉투를 차곡차곡 쌓아 정리하고 그중 한 뭉치를 챙겨 일어났다.
서민구는 종이 뭉치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온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온하의 정체를 수상쩍다 여기는 시선을 차단하며 신로는 입을 열었다.
“앉아.”
“아, 아-. 응, 그래.”
신로의 눈짓을 읽은 가드가 온하를 따라 밖으로 나서며 문을 닫았다.
“이게 다 뭐야? 부업 해?”
쌓여 있는 온하의 일거리를 훑어보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든 서민구가 다가오는 신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용무지?”
“아, 용무. 뭐, 꼭 일이 있어야 오나? 연수원 동기잖아, 우리. 순수하게 인사 왔다니까, 정말로. 근처로 발령도 났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품에서 지갑을 꺼낸 서민구가 명함을 내밀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강력부 조직범죄수사과 검사 서민구]
“업무 파악하다 보니까 보고서에 아는 이름이 있잖아? 발령도 나보다 먼저 난 류 검이 쿨내 나게 사표 냈다고 그러기에 나는 어디 조건 좋은 로펌이라도 간 줄 알았더니. 이야아아-….”
사무실을 둘러보며 과장되게 감탄사를 연발한 서민구가 류신로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하긴, 호텔 사장인데 박봉 검사를 왜 하겠어.”
모든 부분의 평가가 상위였던 류신로가 청에 배치되자마자 그만둔 이유가 부친상 때문이라는 얘기는 들었다. 그게 백류파의 전 보스 류동하일 줄은 몰랐다.
사실 몇 마디 나눠 보지도 않았고 이름만 아는 사이였지만, 서민구는 항상 그의 존재가 거슬렸다. 영역 다툼을 하는 수컷처럼 같은 공간에 있으면 저절로 몸이 긴장되곤 했다.
위압감. 어떤 위협을 가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강한 기류가 느껴졌었다. 안전해야 할 울타리 안에 양가죽을 쓴 늑대가 숨어 있다고 본능이 경고했다.
저것은 우리와 다르다고.
미친 개새끼가 사람 행세를 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괴상할 수밖에.
“신세 한탄할 만큼 검사 일이 여유로운 줄은 몰랐군.”
고저 없이 심상하게 말한 류신로가 소파로 다가왔다.
“차라도 대접해야 하나?”
“커피에 금가루라도 뿌려 줄 거야?”
“원한다면.”
“……됐다. 금커피라고 금똥이 나온다면 모를까. 얼굴도장 찍으려고 왔다는 건 거짓말 아니거든. 이래 봬도 백류파 담당이라고?”
“그래서?”
얼굴색 하나 변화 없이 침착한 태도는 연수원에서와 별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은 쓰고 있던 양가죽을 벗어 던졌다.
심장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묵직한 서슬이 느껴졌다.
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조폭 두목이라……. 인텔리 조폭이라고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유일하기도 했고.
공부를 했다고 해도 대학을 나온 정도지, 류신로처럼 사법 연수원까지 수료한 놈은 없었다. 게다가 실제로 발령도 났었고.
이래서 본인 외 가족까지 자격 심사 조항에 넣어야 한다니까. 하마터면 조폭 새끼가 검사 자리를 차지하고 대대적으로 물을 흐릴 뻔했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고……. 뭐, 얼굴이나 보고 갈까 해서 들렀어. 마침 조사할 게 있어서 근처에 왔었거든. 오늘 새벽부터 일 하나가 크게 터져서 잠도 못 잤어. 다음에는 제대로 한번 보자, 류 검?”
“멀리 안 나가지.”
인사를 끝낸 류신로는 깔끔하게 돌아섰다. 류신로의 등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노려보던 서민구 역시 돌아섰다. 그는 사무실의 손잡이를 잡고 의식적으로 돌아보며 아, 하고 운을 뗐다.
“아, 혹시 이석파라고 알아? 최근에 생긴 조직인데.”
“조직 일을 나에게 물을 이유가 뭐지?”
무감하게 되묻는 류신로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평연해서 자칫 미안하다고 사과할 뻔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 태연했다.
“너희 구역에서 몰래 놀던 놈들이니까 혹시 알까 했지.”
“호텔 VIP는 아닌 것 같군.”
차분한 대답에 서민구는 피식 웃었다.
얼마 전부터 검찰청에서는 이석이라는 놈이 이끄는 신생 조직을 주시했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튀어나와 대량의 마약을 유통하니 당연하게 이목을 끌었다.
원래 놈들은 규모가 크지도 않고 근처 노점상을 대상으로 일수나 하는 양아치였다. 보잘것없는 놈들이 보란 듯이 백류파의 근거지를 거래처로 이용했다. 뒷배가 그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백류파가 마약에 손을 뻗는지 의심하여 심어 놓은 정보원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차곡차곡 모았다. 그러던 차에 사건이 터졌다. 이석파 놈들이 하룻밤 만에 싹쓸이로 쓸려 나갔다.
놈들이 아지트로 이용하던 3층짜리 허름한 건물에 불이 났다. 소방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건물은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겨우 화재를 진압하고 남은 불씨를 확인하러 들어간 지하에서 새카맣게 불탄 시체 더미를 발견했다. 이석을 비롯한 삼십여 명의 떨거지였다. 피라미드처럼 쌓인 시체가 등유에 절여져 통구이가 된 탓에 현장에서 건질 증거는 별로 남지 않았다.
국과수에서는 사인이 두개골 함몰인 시체가 다수고, 흉기는 현장에서 발견된 야구 방망이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다. 가진 단서는 그게 전부다.
증거를 말살할 때 등유를 즐겨 사용하며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대는 자는 ‘노빠따’라는 별칭을 가진 노대식이었다.
정황상, 팀에서는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백류파가 뒷배가 아니라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놈들이 몰래 활동하던 곳은 백류파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 호텔 카지노였다. 허락 없이 저지른 일이면 보복은 당연했다. 영 억측은 아니었다.
어쨌든 백류파의 넘버 쓰리 노대식을 들쑤셔 볼 가치는 있다고 여겼는데, 하필이면 그 시간에 놈은 응급실에 있었다. 그것도 남의 머리를 터트리기는커녕 제 머리가 터져 응급실을 찾았단다. 일곱 바늘을 꿰맸다는 병원 기록이 완벽한 알리바이였다.
“뭐, ……그래.”
어깨를 으쓱인 서민구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 류신로와 직접 대화를 나눠 본 서민구는 더욱 확신했다. 증거가 없어서 그렇지 이석파의 궤멸은 저놈 짓이다.
지금은 물러나지만 언젠가 꼭 감옥에 처넣어 주리라.
서민구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저으기…….”
풀을 바르기만 하면 되게끔 봉투를 먼저 접고 있던 온하가 고개를 들었다.
류신로의 사무실에서 나오자 문 앞에 있던 남자가 온하를 어제 잠들었던 커다란 방으로 안내했다. 크기는 류신로의 집과 비슷했지만, 익숙한 냄새도 나지 않고 낯설어서 불안했다. 봉투를 챙겨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한창 집중할 무렵 대식 님이 들어왔다.
노대식은 건너편 소파에 앉아 머리를 잡고 한참을 끙끙댔다. 씨부럴, 아파 뒈져.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붕대 감은 머리에 하얀 그물 같은 걸 쓰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 채로 괜찮다고, 하나도 안 아프다고 말했다.
조금 전에는 아파 뒈진다고 하지 않았나?
금세 다른 말을 하긴 했지만 온하는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고 일에 집중했다.
“아야, 온하야.”
볼을 긁적이며 힐끔거리는 노대식을 빤히 바라보자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거으기. 목에, 그거, 뭐시다냐?”
노대식은 본인의 목과 온하의 목 오른쪽을 번갈아 가리키며 부산스럽게 손짓한다. 온하가 손을 올려 목덜미를 짚었다.
“어어, 거기, 거기. 거가 왜 그라냐?”
“……?”
“……벌건데.”
“아…. 벌레한테 물렸나 봐요.”
노대식은 대번에 얼굴빛이 환해졌다. 큰 소리가 나도록 박수 한 번, 양손으로 허벅지를 탁탁, 내리치며 그럴 줄 알았다고 껄껄 웃었다.
“그라재, 거시기일 리가 없지! 미친, 대굴빡에 똥이 차서 이상한 상상할 뻔혔네, 씨펄.”
온하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노대식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봉투를 접었다.
아직 안 끝났나, 슬슬 풀을 발라야 할 거 같은데.
천장을 올려다본 온하는 초조하게 한숨 쉬며 여남은 봉투를 힐끔거렸다.
류신로의 사무실로 가서 풀만 가져오면 되는데. 갔다 오는 김에 그냥 상자째 다 들고 와야겠다.
다 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온하는 열심히 하는 편이지 손이 빠른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집중하려고 해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어떤 장면에 자꾸만 산만해진다.
미묘하게 아랫배가 간지럽던 순간과 부드러운 촉감이 어른거려서 입술을 자꾸만 물게 됐다. 하도 물었더니 입술에 감각이 사라졌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류신로의 품에서 깼을 때는 낯선 곳이라고 인식도 못 했다. 류신로는 언제나처럼 기다려 주다가 온하가 깨니 침대에서 빠져나갔다. 그것도 평소랑 똑같았다.
온하는 무심결에 아침마다 하는 일인, 신로의 넥타이와 커프스를 골라 주려 그를 따랐다. 잠에서 덜 깨 몽롱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뒤늦게 낯선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당황은 온하 혼자의 몫이고 류신로는 여느 때와 같았다.
달라지지 않은 자연스러움에 우리 혹시 입을 맞췄냐고 물어볼 엄두가 안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꿈일 리 없는데. 분명히 류신로와 입을 맞췄는데. 기억이 또렷하지 않고 뜨문뜨문해 확신이 안 선다.
“아.”
온하가 고개를 들자 노대식이 머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고 있다가 왜? 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인삼 물은 술이래요.”
“……에이 씹. 그 얘기 꺼내지도 말어. 하여간에 니는 앞으로 보리밭에도 가지 마. 아가, 니는 사람이 아니고 삥아리여, 주둥이 한번 박았다고 꽐라가 돼야. 나가 따질 것도 참 많지만 넘어간다, 넘어가!”
온하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반도 못 알아듣겠다고 생각했다. 사투리가 심해서 뭘 넘어간다는 건지 도무지 파악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아야, 몇 개나 접었는가? 꼬라지를 보아하니 뭐 그렇게 많이 혔을 거 같지는 않다만…, 반절은 혔어?”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온하가 우울한 숨을 내쉬며 꾹꾹 종이를 눌러 봉투를 접었다.
어제 밖에 나오지만 않았어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괜스레 마음이 부산스럽지 않아도 조금 더 했을 텐데. 침울하게 손을 놀리며 온하는 중얼거렸다.
“열심히 하는 중이에요.”
“열심히 허는 거 몰라서 그라는 게 아니고, 내 말은 그냥 대충대충 허라는 소리지. 뭣이 중허다고 그라고 용을 쓰냐, 그깟 일에.”
“돈 받는 일인데 대충하면 안 돼요.”
“으이구…, 마음대로 혀. 도와준다고 혀도 싫다 허고, 요령도 없고 손도 느려 터졌고. 나가 봤을 때 니는 돈 벌기는 글렀다.”
혀를 쯧쯧 차며 노대식이 머리를 부여잡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대놓고 핀잔을 들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요령이 없고 손이 느린 것도 사실인 데다 지금은 어쩐지 마음이 산란해서 집중도 못 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데 ‘단단해’져야 하는 숙제 탓에 집에서만 할 수 있는 일에 한정되어 그저 답답했다. 가는 손목을 내려다보며 온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원래 이랬는데. 단단해지라는 뜻이 설마 대식 님 같은 우람한 사람이 되라는 거면 어떡하지. 엄청나게 오래 걸리지 않을까?
온하는 우울한 시선으로 노대식의 드넓은 등을 바라봤다.
소파에 누운 지 오 분도 안 되었는데, 노대식은 그새 잠들었다. 코 고는 소리가 끊기면 앓는 소리가 나오고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며 잠꼬대를 하다 코 골기가 반복됐다. 본인은 괜찮다고 안 아프다고 했지만, 끙끙 앓는 신음이 엄살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저렇게 단단해도 아픈데. 체격과 건강은 상관없지 않나. 온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봉투까지 다 접은 온하는 몸을 웅크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말아서 꼭꼭 물어 보다가 가만히 손을 댔다.
「너도 빨아 봐.」
입술을 매만지던 온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릎에 이마를 마구 비비고 벌떡 일어났다. 뭐라도 해서 야한 생각을 떨쳐 내야겠다. 틈만 나면 떠오르는 류신로의 목소리에 심장이 마구 쿵덕거렸다.
풀, 풀을 가져오자.
가지러 가도 되냐고 물어볼 노대식은 깊이 잠들었다. 류신로의 사무실은 바로 위층이었다.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던 온하는 살그머니 문 쪽으로 걸어갔다.
“워디 가냐, 아가.”
“어?”
분명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는데 노대식이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고로코롬 부산시렵게 발랑대는디 모를 줄 알았냐. 워디 가는데?”
“풀, 가지러.”
“풀? 아…. 아서, 아서, 괜히 촐랑대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자리로 돌아오라고 까닥이는 두툼한 손이 흡사 강아지 부르는 모양새다. 온하는 입을 삐죽이고 자리로 돌아왔다.
풀만 가져오면 일할 수 있는데. 그러면 음흉한 기억도 덜 떠오르는데.
온하가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처박자 노대식이 낮게 혀를 찼다.
“아야, 보스, 아니 우리 사장님이, 니헌티 독촉을 허기를 허냐, 윽박지르기를 허냐. 음청 잘혀 주고 있는디 그걸 몰라야. 좋은 거 먹여, 옷 사 입혀, 따뜻한 곳에서 재워 줘, 아프면 새벽이라도 의사 불러서 치료혀, 은제 돈 달라고 한 적 있기나 혀? 나는 니가 뭣 땀시 그라고 용을 쓰는지 모르겠다, 증말. 모르긴 몰라도 사장님이 이런 일 맽긴 거는 니가 하겠다고- 하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 싸니까 마지못해 내준 거지. 안 그러하냐?”
“빚 갚아야…….”
“아따, 그거 말 잘혔어. 빚이 말이여, 우리가 아아아아아무리 더러운 조폭이어도 말이여, 나름 룰이 있어야? 어디를 뒤져도 이자 백 프로가 어디에 있냐, 찾아봐라, 맹추야. 니가 죽을 똥을 싸고 무슨 지랄을 혀도 그기 갚을 수 있는 거여? 어? 그거는 말이여. 갚으라고 말헌 게 아니라-. 아이, 답답혀 뒤지겠네.”
가슴을 퍽퍽 내리치며 담배를 찾아 문 노대식이 씨펄 금연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온하는 온하대로 충격을 받았다.
“갚으라고 한 거 아니에요? 언제가 됐든 갚으면 된다고…….”
“아야, 말이 그런 거지, 처음에 후딱 내놓았으면 모를까, 계속 두 배로 뿌는 걸 니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갚을 거여. 인자는 불가능하지.”
“…….”
온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도 노대식은 눈치 없이 푸우, 마치 담배 연기를 내뿜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가- 사장님이 뭔 생각허시는지는 정확허게 알 수 없어도 말이여, 열심히 대굴빡을 굴려 봤거든. 사실 사장님이 니 코 묻은 푼돈 받아서 뭣을 허겠냐. 나으 생각에는 말이여, 사장님은 니헌티 돈을 받을 생각을 허는 게 아니여. 그냥 그건 구실이지, 구실. 너를 붙잡아 둘, 그런 거. 나가 계속 니 옆에 있는 것도 그렇고, 사장님은 말여, 너를 보호,”
동공이 커져 눈동자가 새까맣게 변한 차온하에게 나름대로 차분히 설명을 이어 가던 노대식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벌떡 일어난 그가 온하의 뒤를 향해 90도로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안으로 들어선 류신로의 시선은 얼어붙은 듯 경직된 차온하의 어깨로 향했다. 룸으로 들어왔을 때 신로는 소파 쪽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소리에 멈춰 섰다.
바로 응접실로 오지 않은 이유는 빚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에 차온하가 뭐라고 하는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말도 안 되는 추리에 곧 걸음을 떼긴 했지만.
차온하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박덕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를 살피는 노대식을 끌고 룸에서 나가 버렸다.
차온하는 류신로가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웅크린 채다. 류신로 역시 차온하를 부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보고만 있었다.
차온하가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 그것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단지 뺏고 싶었을 뿐 그 외에는 어떤 생각도 없었다.
8,904,600원. 상자 안에 있던 의미 불명의 돈이 차온하에게 왜 그렇게도 소중한지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저 보물이라고 했으니 그렇다고 여겼다.
“……소중한 거예요.”
말없이 앉아 있던 차온하가 돌아보지도 않고 잠긴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갚으면 돌려줄 거잖아요.”
“…….”
“갚으면 돌려줄 거지요?”
“……그래.”
갚을 수 있으면.
답을 듣고 나서야 차온하는 뒤를 돌아봤다. 새카맣게 변한 눈동자가 올곧게 마주쳤다.
“노력할 거예요. 열심히 갚을게요. 지금은 돈 많이 못 벌고 있지만, 그래도 벌면 다 드릴게요. 제가 갚는 돈 필요 없는 거 아니죠? 그거……, 담보. 없애거나 그러지 않을 거죠?”
대답하지 않자 온하가 눈가를 바르르 떨었다.
“제가 억지 부려요?”
“억지 아니야. 담보잖아, 네가 빚을 갚지 않고 도망가지 않는 이상 그건 망가지지 않아.”
그제야 안심했는지 창백하던 차온하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어깨를 들썩이며 제대로 내쉬지도 못하던 숨을 길게 내쉰 온하가 눈을 접으며 수줍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멍청하기는. 무엇을 근거로 저를 믿고 있는지 류신로로서는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차온하의 보물을 어떻게 할 생각이 없었지만, 앞으로의 일은 모른다. 말 그대로 차온하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 그때 어떻게 할지 정할 터다. 그게 현재가 아닐 뿐이다.
“저, 그럼…….”
꾸벅 인사하고 움직이는 온하의 팔을 잡으니 물끄러미 올려봤다.
“어디 가?”
“아, 손님은 가셨어요?”
“갔어.”
“풀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럼 올라가서 일해도 돼요?”
온하는 테이블 위에 정리된 봉투를 들어 가슴에 안고 눈을 깜박였다. 신로는 차온하가 가슴에 소중하게 품은 봉투를 사납게 노려봤다.
“어-!”
신로는 온하의 손을 움켜잡고 양쪽으로 활짝 펼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온하는 반항다운 반항도 못 했다. 온하의 품에 있던 편지 봉투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어어.”
신로는 온하의 팔목을 움켜쥐고 룸을 나섰다. 신로에게 끌려가며 온하는 바닥에 흩어진 봉투를 밟지 않으려 깡충깡충 뛰었다. 체력이 달리다 보니 그걸로 쉬이 숨이 거칠어졌다.
“왜, 어디 가요? 잠깐만요, 봉투.”
“둬, 챙기라고 해 둘 테니.”
성큼성큼 걷는 류신로를 따라가지 못해 복도로 나서자마자 비틀거리던 온하의 무릎이 보기 좋게 꺾였다.
류신로는 주저앉은 온하를 끌고 갈까, 안고 갈까 고민했다. 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지 모르겠다. 신로의 고압적인 시선에도 온하는 바닥에 주저앉아 제 손목을 감싸고 입술을 깨물고만 있었다.
류신로가 온하를 질질 끌고 복도로 나오자 놀란 기색을 감추며 쫓아오던 박덕수와 노대식이 안절부절못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일어나. 끌고 가지 않게.”
류신로의 명령에 일어서려고 바닥을 짚던 온하가 짧게 신음하며 도로 주저앉았다.
“아야, 왜 그러, ……혹시 어디 아프냐?”
노대식이 류신로의 눈치를 보면서도 참지 못하고 온하에게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저 딸아들 바보 새끼가. 박덕수는 머리를 일곱 바늘이나 꿰매고도 천지 분간을 못 하는 팔불출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걱정되기는 마찬가지라 슬쩍 곁으로 다가섰다.
“허미, 식은땀 나네. 워디가 아파? 아프면 말을 혀야지. 참지 말고 말혀 봐야?”
고개를 저으려는 차온하의 턱을 받쳐 올린 류신로가 인상을 구겼다.
“어디 아파.”
입술을 깨문 차온하가 몹시 억울한 눈으로 노려봤다.
“보여 줘.”
한사코 가리고 안 보여 주려는 차온하에게 묵묵히 손을 내밀자 감싸고 있던 손목을 겨우 놓았다. 손목을 가린 소매를 올리니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오메! 삔 겨?!”
노대식에게서 비명처럼 돼지 멱따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미쳐 부리겠네. 아니 뭘 혔다고 고새 삐고 자빠졌어, 니 팔이 수수깡이냐!”
차온하의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 조심스레 품 안에 안은 신로가 도로 룸으로 들어서며 짧게 을렀다.
“의사-.”
소파에 온하를 내려놓고 반대쪽에 앉은 류신로의 이마에 팬 주름은 펴질 줄을 몰랐다.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짚은 채로 노려보는 눈길에 차온하 역시 드물게 화난 얼굴을 했다.
“왜.”
“뭐가요.”
“왜 화났어?”
“화 안 났어요.”
“눈이 새까매.”
“원래 까매요.”
“사람의 동공은 자율 신경에 의해 확대하거나 축소하게 돼. 단순하게는 빛에 의해서 움직이지만, 빛이 일정한 곳에서 동공에 변화가 있다면 그건 감정에 따른 정동 반응1] 때문이야. 분노나 두려움 같은 정동 반응이 자율 신경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동공의 움직임으로 감정을 읽을 수 있어. 너는 특별히 동공이 좀 더 솔직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당연하게도 눈동자는 더욱 까맣게 변했다.
“어려운 말, 잘 몰라요. 나는 화나지 않았어요.”
고집부리는 온하를 보며 류신로는 입을 다물었다. 온하 역시 입을 꾹 다물었다.
창백하게 얼어붙은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입술을 깨문 채 신로의 답을 기다리다가 이내 일어나 바닥에 흐트러진 봉투를 긁어모은다.
“자리에 와서 앉아, 차온하.”
“정리하고요.”
“앉아.”
“정리하고요.”
신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온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놀라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은 차온하를 번쩍 들어서 소파에 앉혔다. 어느새 차온하는 눈물을 쏟아 냈다. 젖어 버린 눈가를 바라보다 신로는 입안을 가만히 깨물었다.
“…아파?”
눈을 꿈쩍, 감았다 뜬 온하가 퉁퉁 부은 입술을 조금 내밀고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파요.”
손목은 아까보다 더 부어올랐다. 부러졌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신로는 미간을 좁혔다.
“너는 정말 예상 밖이야. 지나치게 약해.”
“…….”
“앞으로는 조절하도록 할게. 조심할 테니까…….”
흐으, 끝내 입술 새로 신음을 흘린 차온하가 서럽게 울음을 흘렸다. 눈물이 방울져서 후드득후드득 구슬처럼 낙하했다.
“왜…… 화났어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화난 게 아니야.”
“근데 왜 그래요?”
“모르겠어. 그냥, 난 너와 식사하러 가려고 했을 뿐이야.”
“그냥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안 돼요? 다음에는 잘 쫓아갈게요. 질질 끌어당기지 마요.”
“그래.”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차온하가 그깟 봉투를 소중하게 안은 꼴이 보기 싫었고, 그깟 일을 하겠다고 식사 시간마저 잊었다는 사실이 약간 짜증이 났었다.
우니까, 아파하니까 거슬리던 기분이 가라앉긴 했다.
차온하는 끄윽, 끄윽, 서러움을 삼키고 있었다.
숨죽여 우느라 바들바들 떠는 차온하가 괴로워 보였다.
공기가 순환이 안 되는 탓인 거 같았다. 숨을 들이쉬어야 하는데 사방의 공기가 정체된 듯 묵직해서 호흡이 어려운 것처럼.
천장에 달린 에어컨디셔너를 노려보다 차온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화상을 입었던 왼손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이제는 오른쪽에도 붕대를 감게 생겼다. 코가 새빨개진 차온하가 그쪽이 덜 아픈지 왼손을 들어 눈물을 슥슥 닦아 냈다. 감겨 있던 붕대가 축축해지자 어깨를 들어 볼과 턱을 흠뻑 적신 눈물을 문질렀다.
불편해 보여 신로는 두 손으로 차온하의 볼을 감쌌다. 단순하게 닦아 줄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혀로 눈물을 핥고 있었다.
“…짜.”
인체에서 만들어진 눈물이니 짠맛이 정상이다. 기쁘면 달다고 한 말대로 언젠가는 달았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확실히 짰다.
“…….”
도리질 치며 물러나려는 온하의 몸을 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감쌌다. 붉게 물든 볼에서도 짠맛이 났고 부어오른 입술에서도 짠맛이 났다. 어느덧 몸을 맡긴 차온하의 입술을 가볍게 한 번 더 물고 신로는 제 입술에 남은 눈물도 핥아 냈다.
“나 때문에 짠 거야?”
“…….”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온하는 입술을 달싹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도, 입 맞췄어요……?”
“응.”
“그렇구나…….”
“싫어?”
“…….”
어제는 알 수 없는 소리라도 계속 조잘거리더니 맨정신인 차온하는 언제나 그렇듯 말이 없었다.
“차온하, 싫어?”
얼굴을 감추듯이 숙이고 있는 온하의 턱을 들어 올리자 붉어진 눈으로 시선을 맞췄다.
“……두 번 말했네요.”
“안 때려. 그러니 대답해.”
바로 어제, 두 번 말하게 했다고 때리라며 이마로 밀던 모습을 떠올린 신로가 말을 잘라 냈다. 어렴풋이 뺨을 때리면서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떠올랐다. 후로, 두 번 말하면 손을 올린다는 공식을 세웠는지 아니면 서러워서인지 각인된 것처럼 두 번에 집착을 보였다.
“……좋아요…….”
“키스가?”
“……아니요.”
“그럼 뭐가 좋다는 거야?”
차온하가 희미하게나마 웃었다.
아주 잠깐 머금었던 열없는 미소를 잡아내며 신로는 역시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차온하의 표정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도 알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차온하의 감정의 흐름이, 기쁘고 슬프고 화내는 것이 조금씩 잡혔다.
독기 외에는 아무 반응이 없던 차온하가 언제부터 감정을 내보인 것인지, 다른 사람과 공감하지 못하는 그로서는 알 수도 없고 그저 신기했다.
“……좋으니까 싫지 않아요.”
주어가 생략된 채라 뭐가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싫지 않은 것은 키스다. 신로는 저도 모르게 빙긋 웃은 모양이다.
“웃네요.”
“내가?”
“네.”
“흠.”
“좋아요?”
“키스?”
“…….”
“딱히.”
대화가 뚝 끊어졌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차온하의 얼굴을 매만져도 피하거나 얼어붙지 않기에 귓가에 하지 않아도 될 고백을 했다.
“키스한 게 너뿐이라 비교 대상이 없어.”
커다랗게 열린 까만 눈동자가 신로에게 향했다. 깜박깜박, 두어 번 빠르게 감겼다 뜨이는 눈동자가 진실 여부를 판단하려는지 뚫어져라 직시했다.
섹스는 수도 없이 했지만, 단 한 번도 입술을 섞은 적은 없었다. 필요 없는 행위라 하지 않았는데, 차온하의 입술은 탐이 났다.
“키스하고 싶은 사람은 너뿐이야.”
나도요, 수줍게 고백하는 차온하는 조금은 기쁜 듯이 보였다.
묵직하게 내려앉아 답답하던 실내 공기가 조금씩 흘렀다. 이제야 공기 청정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사장님.”
헛기침 소리와 함께 박덕수가 들어왔다.
의사가 도착했다는 말에 류신로는 진찰할 수 있도록 약간 떨어져 섰다.
의사는 부러지지는 않았고 살짝 접질린 듯하지만, 엑스레이를 찍어 보는 편이 좋겠다고 권했다. 정확한 진단을 하려 온하는 낯익은 레지던트를 따라 병원으로 향했다.
류신로도 함께.
∞ ∞ ∞
손목은 별다른 문제 없이 단순 염좌로 진단되어 반깁스로 마무리되었다.
왼손은 화상으로 인한 붕대를, 오른손은 고정하기 위해 반깁스를 한 온하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거울에 비친 제 팔을 보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류신로가 거울에 비친 온하의 얼굴을 바라봤다. 슬며시 시선을 피해도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손이 그 모양이라 젓가락질하기 어려워 온하의 식사는 전복죽이 되었다. 전복죽은 온하에게 생소했다. 색깔부터가 그랬다. 이상한 황녹색의 되직한 죽을 시무룩하게 노려보다 일단 입에 넣었다. 별로 입맛이 없어도 남길 수 없으니 부지런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깁스한 손이 불편해 흘리지 않으려다 보니 속도는 매우 느렸다.
같이 식사하자고 해 놓고 정작 류신로는 식사에 관심이 없는지 건너편에 앉아 온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집요한 시선은 깁스에 닿아 있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미안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온하는 더는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류신로는 어른이고, 온하는 아직 미성년자다. 어른이 손아랫사람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일은 어려울 터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이제 아프지는 않지만……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온하는 그게 제일 속상했다. 병원을 다녀왔으니 빚은 또 팔백만 원쯤 불어났을 것이다.
요사이는 말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대체 빚이 얼마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감도 안 잡히는 숫자를 들어봐야 우울할 뿐이라 묻지도 않았다.
열심히 갚으면, 열심히 살면 돼. 도망치지 않으면 할머니의 상자는 안전해.
온하는 계속 안심이 될 때까지 되뇌었다.
“식사는 어떠셨습니까? 입에는 맞으셨는지요?”
상냥한 얼굴의 종업원이 허리를 숙이고 온하에게 눈을 맞추었다. 낯가리는 온하는 눈을 테이블로 내리깔고 입술을 살짝 감쳐물었다.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어요.”
온하는 이런 식당이 익숙하지 않고, 전복죽도 처음 먹었다. 죽은 너무 뜨거웠고, 양은 많았다. 흘리지 않는 데만 집중해서 입에 맞았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온하의 솔직한 답변에 종업원의 얼굴이 칙칙한 흙빛이 되었다.
“맛없었어?”
“……아뇨. 잘 모르는 맛이라서…….”
맛없었던 사람은 류신로가 아니었을까?
온하의 시선이 전혀 손대지 않은 류신로의 스테이크로 향했다. 온하가 식사하는 내내 류신로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음식 남기면 안 되는데. 눈을 깜박이며 스테이크를 바라보자 류신로는 온하의 시선 끝을 확인했다.
“스테이크 먹고 싶어?”
“남아서……. 왜 안 먹어요?”
“먹고 싶으면 새로 시켜.”
류신로는 질문에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먹고 싶어서 본 게 아니었는데. 온하는 고개를 젓고 테이블 언저리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어서 오도카니 앉은 모습이 인형 같았다.
트레이를 끌고 온 종업원들이 신속하게 움직이며 그릇을 치웠다.
“디저트는 무엇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차온하.”
신로의 부름에 온하의 시선이 움직였다. 류신로는 먹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었다. 무슨 맛인지는 몰라도 온하는 꽤 많은 양의 전복죽을 다 비운 탓에 배가 빵빵했다. 고개를 젓자 종업원이 재빠르게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이스크림은 어떠신지요? 저희 레스토랑의 아이스크림은 수제로, 셰프께서 특별히 개발하신 디저트입니다.”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에 테이블 모퉁이를 보고만 있던 온하가 고개를 들었다. 볼에 화색이 돌고 발긋하게 물들자 류신로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손짓했다.
“그걸로.”
레스토랑의 자랑인 회심의 디저트를 가지러 룸을 나선 종업원은 사실 지배인이었다.
백류파의 새로운 보스라는 류신로를 처음 접대하는 터라 직접 나섰다. 류신로는 어쩐 일인지 스테이크에 입도 대지 않았고 데리고 온 어린애는 음식이 맛없다 했다.
서늘한 눈동자가 지배인에게 향하자 몸이 꼬챙이로 뚫리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심장이 아팠다.
아이에게 권한 디저트는 본래 정식 메뉴다. 류신로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지배인은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전복죽이야 아이 입맛에 안 맞을지 몰라도 아이스크림은 달랐다. 게다가 플레이팅마저도 예술이다.
표정 없던 아이도 아이스크림이란 말에는 반응을 보였으니 제발 먹고 맛있다고 연신 감탄해 주기를 소원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지배인 회심의 아이스크림 디저트를 보며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몰랐는데 남자애가 꽤 미인이다. 예쁜 얼굴로 좀 웃으면 좋을 텐데, 눈을 크게 뜨긴 해도 여전히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입 넣자 지배인도 덩달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류신로의 입술도 천천히 벌어졌다.
“맛있어?”
올 것이 왔다.
맛있지! 물론 맛있지! 그게 얼마나 예술인데!
아이는 나릿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음미하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지배인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자마자 아이는 외국에서 큰돈을 주고 삼고초려로 모셔 온 셰프가 들으면 기절할 말을 뱉었다.
“롯데리아 소프트콘 맛이랑 똑같아요. 700원인데 많이 더우면 할머니가…….”
지배인이 기가 막혀 선 채로 기절하건 말건 온하는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다 푹 찔러 넣은 숟가락으로 꽤 큰 덩어리를 퍼 올렸다.
“먹어 볼래요……?”
아무것도 먹지 않은 류신로가 이거라도 맛보면 좋겠다. 그는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팔도 아프고 아이스크림은 녹아 아래로 떨어지려고 해 온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맛있는데. 입으로 반쯤 들어간 숟가락을 어느새 다가온 신로가 잡아채 방향을 틀었다. 숟가락에 허물어진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넣고 온하의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닦아 줬다.
“다네.”
숟가락을 든 채 잠시 멍하니 류신로를 보던 온하가 아이스크림을 한 번 더 떠서 내밀었다. 이번에는 바로 입에 넣은 신로가 온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주지 마.”
고개를 끄덕이며 차온하는 혼자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맛있게 느껴져 저절로 입술에 미소가 어렸다.
“할머니랑요, 따라다니면 겨울에는 호빵, 여름에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 줬어요. 굉장히 맛있어서 조금씩 아껴 먹으면 할머니는 빨리 먹고 자기 것을 먹으라고 했어요. 아이스크림은 녹으니까 빨리 먹어라, 호빵은 식으니까 빨리 먹어라, 그랬죠. 할머니는 이가 시려서 못 먹겠다, 혀가 뜨거워서 못 먹겠다고 하면서 매번 두 개를 샀어요. 초등학교 때는 그게 정말인 줄 알고 허겁지겁 먹곤 했었는데…….”
점점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을 멍하니 바라보던 온하는 말을 멈추고 부지런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정말 맛있어요. 할머니가 사 준 아이스크림이랑 똑같아요.”
아이스크림과 같이 먹도록 곁들여진 빵을 이용해 싹싹 긁어서 깨끗하게 먹은 온하가 열없이 웃었다.
지배인은 저도 모르게 온하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미각 없는 중딩 새끼, 어디 그따위 허접한 불량 식품과 비교질이냐고 속으로 한 욕은 까마득하게 잊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마도 차온하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칭찬이었음을 알아챈 까닭이다.
“더 먹고 싶은 거 있어?”
“없어요.”
딱 잘라 말하는 온하의 대답에 신로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열린 문을 고정한 지배인이 온하가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서서 기다렸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짝거리는 복도를 걷는 신로를 쫓아 걸으며 온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자꾸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유니폼의 직원들이 익숙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왜 인사하는지 모르겠다. 마주 인사를 해야 하나 싶다가도 앞서가는 신로를 쫓아가느라 길게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그저 인사도 뭣도 아니게 고개만 아래로 점점 내려갔다.
“아.”
온하는 앞을 보지 않고 걷는 바람에 신로의 등에 이마를 박았다. 민망해 눈치를 봤지만, 신로는 별다른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왜 멈췄는지는 몰라도 이유가 있을 테니 얌전히 기다렸다.
“안녕하십니까, 김 여사님.”
“어머, 류 사장을 여기서 보네. 그렇죠, 최 사장님?”
“네, 여사님. 또 보는구나, 신로야.”
“식사 끝내고 가는 중?”
“네.”
“식사 전이면 같이 하면 좋을 텐데…….”
번갈아 말하던 낯선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조용한 침묵이 이어졌지만 온하는 신로의 등 뒤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기묘한 정적 사이로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파고들었다.
“어험, 험. 신로는 여기 애인하고 온 거냐?”
“그래요? 사귀는 아가씨가 있어, 류 사장?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김 여사님 신로가 벌써 서른입니다. 만나는 아가씨 한 명 없겠습니까? 허허허!”
“애인하고 왔다면 아쉽지만 보내 줘야겠네…….”
“아닙니다. 애인 없습니다.”
“혼자 왔을 리는 없고, 그럼 친구?”
“아닙니다.”
뒤를 돌아보는 신로와 눈이 마주친 온하는 말간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신로의 눈은 처음 본 탓에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사이 그가 옆으로 비켜섰다.
“동생과 왔습니다.”
“동생? 류 사장 외동, ……어머.”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움찔한 온하는 숨을 멈췄다. 아줌마는 예뻤지만 그 뒤에 선 아저씨는 눈이 벌겠다. 험악한 눈이 밤샘한 사람처럼 충혈되었고 온하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모르는 사람인데 왜 노려보지?
아는 사람인가 자세히 봤지만, 역시 모르는 사람이다. 온하는 시선을 피하고 신로의 뒤로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아기처럼 낯을 가리네. 저 예쁜 아이는 누구야, 류 사장?”
“차온하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워낙 붙임성이 없는 아이라.”
가만히 미소 지으며 눈을 맞추는 신로의 얼굴이 이상하고 낯설었다.
“인사드려. 김인희 여사님이라고 형이 신세 지는 분이야.”
목소리에 들은 바 없는 다정함이 묻어났지만 다른 사람인 듯 거북하다. 게다가 형이라니, 처음 듣는 호칭에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웃음기 어린 인사에 고개를 들고 미소 띤 아줌마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뒤에 선 남자도 덩달아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크게 홉뜬 눈에서 눈알이 빠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화가 난 것처럼 굳은 얼굴로 너, 하고 소리 없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류 사장.”
“네.”
“언제 우리도 식사 한번 해, 온하가 같이 와도 좋고.”
“실례가 안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예쁜 아이랑 같이 식사하면 내가 더 좋지. 데리고 와요.”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음에 또 볼까, 온하야?”
온하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신로의 눈치만 살폈다. 지금의 신로의 모습은 너무도 생소해서 소름이 돋았다.
가늘게 접은 눈가가 미소와 비슷하게 보이긴 했다. 가면 같은 모습이 낯설고 서먹서먹해 온하는 눈을 내리뜨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살짝 주억거렸다.
“그럼. 우리 갈까요, 최 사장님?”
온하를 쳐다보느라 잠시 넋이 나갔던 최오용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예. 김 여사님.”
지나가는 김인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신로가 뒤를 따르는 최오용을 보며 미미하게 입술을 틀었다. 그녀를 따르면서도 눈은 온하에게서 떼지 못했다. 정신이 팔린 나머지 최오용은 신로의 비웃음을 미처 눈치채지도 못했다.
최오용이 하도 집요하게 바라보니 온하는 의아한 듯 그를 빤히 마주 보았다.
신로는 다정하게 온하의 얼굴을 살며시 잡았다. 맑은 눈동자가 이번에는 그에게로 돌아온다. 신로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딜 봐.”
보니까 봐요.
차분한 눈동자는 차온하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형만 봐야지.”
온하에게는 가면을 쓰고 대한 적이 없었다. 보인 적 없는 가식을 바로 알아 차온하는 생소한지 입술을 빠끔히 벌렸다. 그리고 들으라고 속삭인 말에 최오용은 미끼에 걸린 물고기처럼 눈이 희번덕대며 뒤집혔다.
“……여사님, 잠시 류… 사장에게 할 말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계시면 곧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최오용을 힐끔 올려다본 김인희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와도 돼요, 최 사장님.”
상냥한 척 꾸민 목소리여도 곧장 돌아서는 냉랭한 태도에 그녀의 기분이 이미 상했음이 드러났다. 김인희가 복도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던 최오용이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신로는 그새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있었다.
걸음을 서두른 최오용이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을 넣어 억지로 열었다. 류신로는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빙그레 웃었다. 입술만 휘어졌을 뿐 눈동자에서는 살기가 번졌다.
“너.”
하나 최오용은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흥분 상태였다.
“이혜리하고 무슨 관계야!”
최오용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와 윽박질렀다. 온하는 그를 피하지도 않고 똑바로 바라본다. 신로는 이번에는 온하를 막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누구세요?”
“뭐야, 이 새끼가!”
“저 아세요?”
“묻는 말이나 대답하지, 이 건방진 새끼가!”
최오용은 온하를 붙잡으려 험악한 기세로 손을 뻗었다. 최오용의 손은 신로에 의해 막혔다. 눈앞까지 다가왔다가 신로에게 잡혀 멀어지는 손을 온하는 새까만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님!”
최오용의 가드가 엘리베이터로 뛰어들려 했다.
최오용의 팔을 꺾고 멱살을 틀어쥔 신로가 다가온 가드의 배를 걷어차고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았다. 투명하게 바깥이 다 보이는 엘리베이터가 레스토랑이 있는 22층부터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으윽! 이, 씨발 개새끼가!”
신로에게 멱살이 잡힌 최오용은 벗어나려고 용을 썼다. 몸을 비틀수록 목이 조인다. 압박을 풀지 못한 최오용이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
“남의 것에 함부로 손대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뭐, 남의-, 이 씹-! 여기서 해 보자는 거냐!”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버둥거리던 최오용의 이마에 점차 땀이 배어 나왔다.
“설마요.”
신로가 목을 조이던 옷깃을 놓자마자 최오용이 달려들었다. 간단하게 옆으로 피한 신로가 손등으로 최오용의 얼굴이 돌아가도록 후려쳤다.
뻑!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육중한 몸이 문에 부딪혔다. 거센 충돌에 엘리베이터가 쿵, 하고 흔들렸다.
“접대해야 하는 사정을 고려해 손대지 않으려고 했는데, 꼭 이러셔야겠습니까. 작은아버지, 진정하시죠. 보기 좋지 않습니다.”
“씨발, 너 이 씹…….”
“주제를 알아야 훗날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류신로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를 노려보던 최오용이 이를 빠드득 갈았을 때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온하.”
모퉁이에 바짝 몸을 붙이고 있던 온하는 까맣게 물든 눈을 움직였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다 신로가 손을 내밀자 조심스레 다가온다.
“너 이, 씹. 이혜리 그년하고 무슨 관계냐고 했지!”
침을 뱉은 최오용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열린 엘리베이터 밖으로 울려 퍼졌다.
VIP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 중이던 박덕수와 노대식이 인상을 슬며시 찌푸렸다.
박덕수와 견제하고 있던 오용파 놈들이 엘리베이터 문을 막고 선 최오용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혀, 형님?”
최오용의 시선은 신로의 품에 안긴 온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신로는 온하의 어깨를 감싸고 표정 변화를 지켜보았다. 온하는 멀뚱하니 서서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최오용의 눈에 광기가 어리든 말든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다.
“이혜리가 누구예요?”
“뭐?”
“그런 사람 몰라요.”
차온하는 정말 이혜리가 누군지 모르는 듯했다.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면서도 답했으니 됐냐는 당돌한 얼굴에 신로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전부터 느꼈지만, 차온하는 은근히 겁이 없었다. 한번 눈이 돌면 사람 목줄을 물어뜯어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다는 미친 불도그 박덕수도, 알루미늄 야구 배트로 사람 머리를 터트려 죽여 노빠따라고 불리는 노대식도, 하물며 아버지 외에 몇 초 이상 똑바로 바라보는 사람이 없던 신로에게서조차 시선을 피한 적이 없었다.
순진하고 무구해서 그런 건가 생각한 적도 있지만, 눈치가 없진 않았다. 수긍하지 못한 일에는 건방지리만큼 맹랑한 눈으로 또박또박 할 말 다 하는 차온하였다.
겁 없는 하룻강아지 같으니.
“부하들 앞에서 한 번 더 정신 들게 해 드릴까요, 작은아버지?”
“뭐?!”
기분 좋게 차온하의 어깨를 가만히 주무른 류신로가 윤기 나는 까만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입술에 걸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자 긴장의 기운이 스멀스멀 퍼졌다.
“비켜, 최오용.”
“뭐, 이 씨발놈이 지금 뭐라고, 억…!”
엘리베이터 밖에서 상황을 살피던 오용파 중에 한 놈이 크게 외치며 나서다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이 느자구없는 새끼가 여가 어데라고 나대고 지랄이여. 나가 가만히 있응께 가마니로 보이냐, 죽고 싶쟈, 븅신아?”
히죽 웃은 노대식이 손목을 풀며 넘어진 놈에게 다가섰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멱살을 잡고 뺨을 몇 번이나 내리치자 놈의 코에서 피가 터졌다. 노대식에게 덤비려니 만만찮고 가만히 있자니 자존심이 상한 오용파 놈들이 무기라도 꺼낼 듯 품에 손을 넣었다.
박덕수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소란 떨어도 난 손해 볼 게 없어. 접대하고 있는 건 최오용 당신이지.”
“류신로……!”
싸움에서 진 개가 으르렁대며 입을 열 때 경쾌한 음을 내며 옆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서 오용파 놈들이 쏟아져 나오자 박덕수가 걸음을 옮겨 사방을 경계했다.
“최 사장님.”
오용파 사이에 김인희의 비서도 끼어 있었다.
비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최오용과 일촉즉발의 무리를 훑어보았다. 최오용은 엘리베이터 입구를 막고 있었고 류신로와 차온하는 마치 안에 갇힌 듯 보였다. 그의 눈썹이 희미하게 일그러지자 최오용이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밖으로 나섰다.
“아아, 김 비서! 지금 막 올라가려고 했어! 아이고, 내가 실수로 엘리베이터를 타 버려서 1층까지 와 버렸네! 허허허! 데리러 온 건가? 이거 번거롭게 해서 참 미안하네? 허허허!”
“네, 올라가시죠.”
단정한 얼굴로 옆으로 비켜선 비서가 움직이라는 듯 최오용을 노려봤다. 그는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기며 온하를 한 번 더 주시하고 급히 옆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남겨진 오용파는 경계하는 눈으로 신로를 보면서도 쉽사리 덤벼들지는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시선이 쏟아지는 로비를 지나쳐 마중 나온 차에 오를 때까지도 온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차 문이 닫히고서야 신로를 바라본다.
“놀랐어?”
커다란 눈이 긍정의 신호로 두 번 깜박였다.
이제 보니 이마가 땀에 젖어 있었다. 겁먹은 모습이 놀랍지는 않아서 신로는 손으로 땀을 훑어 줬다.
누군지도 모르는 최오용이 미친놈처럼 달려들고 눈앞에서 험한 상황이 펼쳐졌으니 당연히.
“……왜 형이라고 했어요?”
엉뚱한 질문에 신로의 입술이 나른하게 휘어졌다.
“항상 예상에서 빗나가지.”
둘의 대화에 앞자리에 앉은 박덕수와 운전하던 노대식이 얼어붙었다.
“왜-…?”
꼭 대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다. 조바심이 나는지 차온하의 몸이 신로 쪽으로 기울었다. 룸미러를 통해 노대식과 박덕수를 보는 신로에게 끈질긴 시선이 달라붙었지만 단호하게 무시했다.
“가드 늘려.”
“예, 사장님.”
최오용이 이혜리 이름을 부르며 발광하는 꼴을 봤으니 말하지 않아도 온하를 가드 할 이들이었다.
박덕수는 은근히 움직일 테고, 노대식은 대놓고 보호하겠지.
최오용의 행패를 떠올리는지 노대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차온하를 대하는 태도가 감정적으로 지나친 면이 있지만, 긍정적인 방향이라 경고 수준에서 두고 보는 중이다.
차창에 비치는 차온하의 곧은 시선은 여전히 끈끈했다.
형이라. 최오용을 자극하려 선택한 단어가 진실을 모르는 차온하도 자극한 모양이었다.
대답해 줄 이유가 없다.
우리가 사실은 형제라고 말할 이유도 없었다. 차온하와 류신로는 남남보다 못한 사이, 서로 중요한 것을 빼앗은 그 정도의 관계다.
끝내 대답해 주지 않자 차온하는 포기하고 빳빳한 허리에서 힘을 풀었다. 작은 한숨을 내쉬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우연이지만 알맞게 세팅된 무대라면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이혜리와 차온하가 그렇게 닮았던가? 내보이자마자 의도한 대로 그렇게 날뛸 줄이야. 흡사 된불 맞은 멧돼지 같았다.
“……쯧.”
낮게 혀를 차는 소리에 박덕수가 무슨 일이냐고 돌아봤다가 혼자 생각에 잠긴 신로를 확인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상황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신경 쓰이는 쪽은 사실 최오용이 아니라 김인희였다.
가지고 있는 권력도 재력도 우습게 볼 수 없을뿐더러 타고난 자질 역시 만만찮은 여자였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로 사업체를 세울 수도 무너트릴 수도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오용파나 백류파나 은밀한 곳에서 그녀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는 이유였다.
지금은 백류파의 편을 드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오용파를 견제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기르는 개새끼가 주제를 모르고 짖어 대는 건 그녀가 원하는 그림이 아닐 터이다.
최오용은 근본부터 마초다. 여자에게 굽실거리며 충성하는 척하지만 틈만 나면 이를 드러낼 기회를 노린다는 사실을 김인희는 분명히 안다.
신로가 정보를 흘렸으니 김인희는 최오용의 와인 창고가 무엇인지 이미 알아봤을 것이다. 그녀가 알아냈음을 최오용도 짐작했겠지. 김인희가 어디까지 파악했는지는 몰라도 최오용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오늘의 접대는 아마도 김인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척, 그녀를 떠보려는 의도가 다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망쳐 버렸지.
마약을 이용해 백류파를 흔들고 해외 자본을 끌어들여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려고 했던 최오용의 계획은 이미 틀어졌다.
눈속임이긴 해도 이석파가 괴멸됐으니 놈에게 마약과 자본을 대 주던 쪽에서는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중일 터.
신로로서는 재밌는 타이밍이긴 했다.
그래도 역시 김인희에게 온하를 보인 점은 거슬렸다.
오용파와 백류파가 동일한 힘을 가지고 서로를 물어뜯기를 바라는 이상, 여봐란듯이 백류파에 보인 호의가 언제까지 지속될 리 없다. 백류파를 누르려 오용파의 손을 잡아 주는 순간이 얼마든지 올 수도 있다는 소리다.
고개를 돌리자 고단했는지 차온하는 어느새 창에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구석으로 구겨지듯 작은 몸뚱이를 동그랗게 만 차온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신로는 입술을 비틀었다.
너는 참 문제가 많아.
김인희도 이용 가능한 수단으로서 차온하의 값어치를 잴지도 모르겠다.
채찍질한 후에 고기를 던져 주는 너그러운 주인을 연기하는 그녀 역시 어쩌면 이혜리에 대한 집착을 이용해 최오용을 제 입맛대로 조종하려 들지도…….
“나쁘지 않지.”
차라리 그쪽이 류신로의 계획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적절하다면 차온하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최오용은 물론이고 김인희도 낚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미끼다.
류신로의 동생, 유일한 피붙이, 우애 좋다 못해 애인처럼 다정하게 보이면 더 자극적일 것이다.
차온하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류신로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고개를 기울였다. 축 아래로 늘어진 붕대 감긴 손을 들어 부드럽게 허벅지 위에 놓아줬다. 편하게 기대도록 등을 받치고 기울어지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준 신로가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노글노글하게 풀어져 벌어진 입술 새로 따뜻한 숨이 번져 목덜미를 간지럽혔다.2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