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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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걸로.”
온하의 선택에 어떤 의견도 덧붙이지 않고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던 신로가 오늘만은 색을 지정했다. 짙은 회색 셔츠와 어울리는 암적색 넥타이를 손에 쥔 온하가 뒤를 돌아봤다.
온하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을 뿐, 그가 원한 검은색의 넥타이를 다시 골랐다. 단단한 몸을 감싼 슈트와 비슷한 재질의 검은 넥타이를 신로 목에 걸쳐 주었다.
온하는 넥타이를 맬 줄 몰랐다. 그저 능숙하게 매듭을 짓는 신로를 기다렸다. 넥타이를 매던 신로가 거울에 비친 온하와 시선을 맞췄다.
“왜?”
“저…….”
온하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가볍게 감쳐물었다가 놓으며 짧은 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거울로 눈을 내리깐 온하를 바라보며 신로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알고 있는 건가?
하긴 노대식이 쓸데없는 짓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오늘은 아버지의 생일이고, 제사가 있었다. 류동화는 지금도 백류파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아버지의 일주기에 신로는 병원에서 의식 불명이었다. 그 바람에 아무도 챙길 정신이 없이 지나가 버렸다.
신로의 건강이 회복되자 박덕수는 생신이라도 챙기고 싶다고 신로에게 절에서라도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 드리자 제안했다.
아버지를 존경해 아들인 류신로를 보스로 모시는 데 아무런 저항도 없던 박덕수의 청이었다. 노대식은 의견을 보탠답시고 보고해야 할 일이 있지 않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용파가 없어졌으니 말씀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로는 필요 없는 행사라고 여겼지만, 대외적으로 그게 평범한 일이기에 허락했다. 언제까지 감정적일지 한심하기 그지없다.
어쨌든 쓸데없는 정보는 온하에 대한 지극함이 아슬아슬하게 한계에 걸친 노대식이 무심코 흘렸을 가능성이 컸지만.
촉. 입술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근하던 신로가 현관을 열다 멈춰 섰다. 현관 손잡이를 잡은 채 뒤를 돌아보고 서 있자 밖에서 대기하던 노대식과 박덕수도 눈치를 살피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
아버지를 모르는 차온하를 그의 제사에 데리고 갈 이유가 없었다. 스스로 말했듯이 차온하의 가족은 조모인 차숙자뿐이므로.
그럼에도 신로는 온하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한 온하가 현관에 오롯이 서 있다.
“……같이 갈래?”
고요한 물음에 차온하의 입술이 빠끔 벌어졌다.
“그래도 돼요?”
류신로의 고개가 모로 슬며시 기울어졌다.
「류신로, 동생을 챙기거라. ……예쁜 아이더구나.」
아버지라면, 보고 싶어 하려나. 단순한 제례에 대단한 의미도 없고,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차온하에게 손을 내밀자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은은한 향냄새가 나직하게 깔려 있다. 불경을 외우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하얀 국화의 화환이 늘어서 있는 사찰 입구에는 신로처럼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지나가는 신로와 온하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채였다.
온하는 제사가 준비되는 동안 류신로와 함께 본당 근처의 중정을 걸었다.
커다란 기와집도 처음 보고 커다란 불상도 처음 봤다. ‘그냥 큰 절이구나, 이런 곳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구나. 몰랐다.’라고 온하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주 조금, 할머니도 이런 데서 해 줄 수 있으면 좋았겠다고 온하는 쓸쓸히 미소 지었다.
눈이 마주친 신로가 새파랗게 언 온하의 볼을 쓸어 주었다.
“차에 가서 기다려.”
“괜찮아요.”
“준비 다 되면 부를 테니 차에서 기다려.”
두 번이나 말한 신로를 가만히 바라보다 온하는 곁에 대기하던 노대식을 따라 차로 돌아왔다.
“배는 안 고프냐?”
“괜찮아요.”
차의 시동을 걸고 온열 시트를 작동한 노대식이 트렁크에서 담요까지 꺼내 주며 덮고 있으라고, 감기 안 들리게 꼭꼭 여미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하고는 본당으로 돌아갔다.
슬슬 눈발이 휘날리는 소나무 숲을 바라보며 온하는 한숨을 쉬었다.
상심할 신로가 걱정되어 따라왔는데 그는 어른이라 그런지 담담해 보였다. 괜히 할머니 생각에 온하만 마음이 어수선했다.
“하아-….”
창문에 기댄 채 한숨을 쉬자 창문에 뿌옇게 입김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어이차!”
갑자기 차 안으로 커다란 덩치가 밀려 들어왔다. 얼마나 커다란지 검은 곰이 덮쳐 오는 줄 알았다. 차 안을 꽉 메우는 덩치에 밀려 온하는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아이고, 추워.”
남자가 손바닥 마구 비비며 혼잣말했다. 데우기라도 하듯 맞댄 손이 온하의 얼굴만 했다. 아니, 그보다 더 컸다. 남자의 춥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지 입술이 파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
“안녕?”
그럼에도 싱긋 웃는 인상이 좋았다.
“…….”
입은 꼭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는 인사에도 남자는 타박하지 않고 싱글싱글 웃었다.
“누구세요?”
“아, 나 본 적 없나? 하긴 나도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이니까 당연한가?”
“저 아세요?”
온하의 물음에 남자는 웃기만 했다. 커다란 손으로 피할 곳도 없이 구석에 몰린 온하의 머리를 쓱쓱 쓸어 주었다.
“너희 엄마를 알아.”
온하의 눈이 커지자 남자의 눈웃음은 더욱 진해졌다.
“정말 많이 닮았구나. 수연이랑.”
엄마의 이름을 알고 있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머쓱하게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보고 싶었단다, 차온하.”
“저를요?”
“응.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해서 그게 참 아쉬워. 내가 엄청 아껴 줄 수 있었는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남자였지만, 어쩐지 거북하지는 않아 온하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예쁜데, 아아…! 이렇게 예쁜데……. 지나가는 시간이 다 아깝구먼. 그동안 고생만 시키고, 하여튼 정신 나간 놈. ……미안하다, 온하야. 그놈이 모자란 놈이라 그래. 이해해라, 네가.”
“……누가 모자라요?”
“누구긴 누구야? 류신로지. 도통 사람 감정도 모르고 표현하는 것도 문제가 심각하잖아.”
“전 괜찮아요.”
입을 다문 남자의 눈가가 어쩐지 붉어 보여 온하는 한 번 더 말해 주었다.
“전 괜찮아요.”
“온하야.”
“네.”
“한번 안아 봐도 될까?”
눈을 깜박거린 온하가 고개를 저었다. 절박해 보이는 얼굴이 퍽 실망한 눈치라 낯을 가리는 제 성질에서 조금 양보해 손을 내밀었다.
“손잡는 건 괜찮아요.”
온하는 남과 닿는 것이 어색했다. 예전에는 할머니만이 온하를 안아 주었고, 지금은 류신로가 유일하게 온하를 안아 주었다.
그건 소중한 이들과만 하는 거니까.
남자가 울 것 같은 얼굴이어도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남자는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보다 조심스레 잡았다. 어미 새가 알을 품는 것처럼 작은 온하의 손을 한동안 그렇게 조용히 품고 있었다.
“……고맙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남자에게 온하는 고개를 저었다.
“……류신로한테 내 말 좀 전해 줄 수 있니?”
“네.”
“챙기라고 했더니, 그걸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엉뚱한 짓거리냐. 이왕 이렇게 된 거 고생시키지 말고 잘 좀. 예쁜 아이 예뻐하는 법도 모르는 빡 돈 새끼야.”
남자의 입 새에서 으르렁으르렁 화난 곰 같은 울림이 새었다.
멍하니 바라보자 잡고 있던 온하의 손을 아쉬운 눈길로 가만히 내려다보다 꼭 쥐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남자는 마침내 짧은 한숨과 함께 무릎에 덥혀 있던 담요 안으로 온하의 손을 넣어 주었다.
“나 간다.”
남자는 시원하게 웃었다.
“안녕히 가세요.”
제멋대로 군 남자는 온하의 얼굴을 담듯이 고요하게 보다가 차에서 내렸다. 서늘한 바람이 차 안으로 스몄다가 사라졌다.
차창 틀에는 소록소록 눈이 쌓이고 있었다.
눈가를 스치는 차가움에 온하가 눈을 떴을 때는 신로가 옆에 있었다.
“준비 다 됐어요……?”
“가 볼래?”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서다 온하는 문득 사방이 어둑하게 어둠에 잠겨 있음을 깨달았다. 걸어가는 길은 비질이 되어 눈이 치워졌지만, 다른 쪽은 제법 눈이 쌓인 것을 보니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같이 있어 주려고 했는데 너무 오래 자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온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식이 다 끝났는지 본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러려고 따라온 게 아닌데. 우울하게 하얀 국화에 둘러싸인 영정 사진을 가만히 보던 온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온하를 데리고 가서 그 앞에 향을 피워 꽂은 신로는 말없이 사진을 보고만 있었다.
“……아버지예요?”
“응.”
깜박거리다가 눈을 비빈 온하가 뚫어지게 사진을 보고 있자 신로는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신로를 가만히 올려다본 온하는 향이 다 될 때까지 서 있었다.
향이 모두 타고 밖에 나오자 바야흐로 어두운 밤이 되었다. 하늘에서 또다시 굵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박덕수는 기다리고 있다가 커다란 우산을 내밀었다. 신로는 우산을 받아 들고 온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바닥에는 쓸어 냈는데도 고새 눈이 쌓였다. 신발 끝으로 꾹 눌러 밟자 뽀드득 소리가 났다.
문득, 소나무 위에 쌓여 있던 눈덩이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어두운 그림자에 이제 막 누군지 알아챈 남자가 보였다.
그것은 아주 짧은 찰나였고 곧 사라졌지만.
“있잖아요.”
온하는 그가 부탁한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고심하며 입안을 잘근거렸다. 신로는 온하가 입을 열기를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전해 달래요.”
“무엇을.”
“말을.”
“……해.”
“챙기라고 했더니, 그걸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엉뚱한 짓거리냐. 이왕 이렇게 된 거 고생시키지 말고 잘 좀. 예쁜 아이 예뻐하는 법도 모르는 빡 돈 새끼야.”
……래요.
곱게 바꿔 보려고도 했지만 온하에겐 그런 주변머리가 없었다. 온하는 남자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편이 나을 거로 생각해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전했다.
신로는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영정 사진을 돌아봤을 뿐이다.
신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바로 했다.
“들어.”
류신로는 우산을 펼쳐 온하에게 내밀었다. 그에게서 순순히 우산을 받아 들자 신로는 우산을 든 온하를 안아 들었다.
“나중에 만나거든.”
눈이 옅게 쌓인 길을 성큼성큼 걸으며 신로는 속삭였다.
이제 관심 끄시죠, 라고 전해.
신로가 속삭이자마자 소나무에 쌓여 있던 눈덩이들이 툭툭 아래로 떨어졌다. 온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전해 주지 않아도 이미 들은 것 같아요, 라고 신로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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