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악기의 연주가 실내를 은은히 채웠다. 연주자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신로의 뒤로는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와인 잔을 들고 선 신로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지만 존재 자체가 강렬했다.
“류 사장.”
눈동자만이 느리게 움직인 신로가 상대를 확인하고서야 몸을 틀었다.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다가오는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곱게 치장한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 여사님.”
김인희. 우양 물산을 이끄는 이문경의 아내.
남편은 그저 월급을 받는 사장일 뿐, 실질적 경영자는 김인희였다. 그녀가 신로에게 직접 말을 걸자 리셉션장 내의 시선은 모두 이곳으로 집중됐다.
그녀가 파티의 주최자이자 이곳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탓이다.
“비싼 얼굴 이제라도 보여 주는 게 어디야? 아버지 따라서 종종 얼굴 좀 내밀지, 너무했어.”
“죄송합니다.”
“됐어, 공부한다고 바빴잖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 사장 아버지 장례식에는 못 가서 미안하네. 내가 그때 중요한 일정이 있었어.”
“신경 써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예의 바른 고분고분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김인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백류파의 중심인 류동하가 죽었을 때, 장례에 참여한 건 백류파뿐이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경찰들의 이목이 쏠리기도 했지만, 보스를 잃은 백류파는 이제 건재하지 않으리라 쉽게 예상한 까닭이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오용파에 흡수되지 않을까 짐작했다. 예상과 다르게 시간이 지나도 백류파는 별일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경찰들은 날을 세우며 조직 간의 전쟁을 대비했지만, 전쟁은커녕 자잘하게 있던 구역 다툼마저 점차 사라졌다.
몇 달이 지나도 백류파는 여전히 건재했고 겉으로는 조직폭력배가 운영하는 곳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깔끔해졌다. 세대교체니, 물갈이니 지성 깡패의 등장이라는 식으로 소문이 퍼졌다.
지난 몇 달간은 류동하를 직접 처리했다는 기쁨에 흥청망청 살았던 최오용이 슬슬 제정신을 차리고 있으니 사실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리셉션장에 모인 이들은 표정을 감추고 있었지만, 백류파의 새로운 보스인 류신로에게 신경의 끝을 대 놓고 있었다. 과연 앞으로 백류파의 행방은 어찌 될 것인가, 흥미진진한 것이다.
백류파가 운영하는 곳의 상업지구 대부분은 김인희 개인 소유였다. 그것은 오용파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곧 권력인 세상이다.
김인희가 손을 뻗지 않은 곳은 없었다. 정·재계는 물론, 폭력이 난무하는 밑바닥까지 누구도 그녀의 입김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런 김인희가 류신로를 파티에 초대하고 직접 말을 걸었다. 일단은 그를 백류파의 보스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사람들하고 인사는 했어?”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류 사장이 보기와는 다르게 낯을 가리나 보네. 내가 소개해 줄까?”
“영광입니다.”
김인희는 신로의 팔짱을 끼고 직접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마치 애인이라도 되는 양 다정한 모습이었다.
“김 여사님 어째 더 젊어지신 거 같습니다. 옆의 훤칠한 청년은 누구십니까?”
“이스트 리버 호텔의 새로운 대표예요. 인사해요, 류 사장. 이쪽은 우양 건설 최지호 회장님.”
“아아-. 류동하 사장의 아드님이군요. 반가워요, 최지호요.”
고개 숙이는 신로에게 최지호는 손을 내밀었다.
“류신로입니다.”
“류 사장 아버지의 소식을 듣긴 했는데 내가 그때 마침 일이 있어서 가지 못했어, 미안하네.”
“아닙니다. 이제라도 신경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인 류동하의 죽음에 대해 상투적인 인사치레가 몇 번이고 반복돼도 류신로는 담담했다. 사업하는 자라면 손을 뻗고 싶을 만한 유혹적인 인사들에게 인사를 시켜도 류신로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법이 없었다.
마치 김인희의 잘 훈련된 명견처럼 절도 있었다.
글쎄, 그렇지는 않은 거 같지만.
김인희는 속으로 웃었다. 비록 꾸며진 행동이어도 일단은 마음에 들었다.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온 우양 물산의 대주주 중 하나에게 류신로를 인사시키고서야 인사할 타이밍을 노리며 서성이는 최오용을 돌아봤다.
“김 여사님! 안녕하십니까!”
성큼성큼 다가와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최오용을 내려다보며 김인희는 의례적으로 미소 지었다.
“그래요, 오랜만이네요. 지난번에 보내 준 선물은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어째, 마음에는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고마운 거지요. 취향은 아니었지만요.”
“그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김 여사님의 취향을 꼭 맞춰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이번에는 성의가 고마워서 받았지만 다음에 또 선물하실 필요 없어요. 내가 해 주는 것도 없는데, 부담스럽잖아요?”
“해 주시는 게 없다니요! 얼마나 많-…은 것을 봐주시는데요. 언제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약소하게 준비하는 것이니 부담스러워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여사님.”
최오용이 김인희의 뒤로 흘렀던 시선을 재빨리 다잡았다.
“서로 잘 아는 사이지요? 아니면 내가 소개해 줘야 하나?”
옆으로 올 수 있게 공간을 내주자 류신로가 옆으로 와서 섰다. 실은 이 파티는 최오용이나 류신로가 올 자리가 아니었다. 이곳으로 둘을 부른 이유는 백류파의 새 보스가 된 류신로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부릴 수족으로 최오용이 이끄는 오용파가 필요할 때가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백류파의 류동하가 필요할 때가 있었다. 서로 성향이 달라서 쓰임새도 달랐다. 류동하가 죽고 나서 어찌 되려나 했는데 류신로는 트러블도 없이 조직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두 조직이 비등한 힘을 유지하며 존류存留하기를 바라는 김인희로서는 류신로의 수준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필요하면 류신로에게 조금은 힘을 실어 줄 생각도 있었다. 물론 그럴 그릇이었을 때.
“오랜만이네, 신로야.”
“오랜만입니다, 최 사장님.”
“작은아버지라고 해도 돼, 신로야. 우리 사이에 무슨 내외야? 오랜만이라 서먹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류동하는 최오용이 죽였다. 내막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도 없이, 최오용은 비열한 수를 썼을 것이다. 김인희도 쉽게 짐작하는 술수를 류신로가 모를 리 없다고 여겼지만, 그의 얼굴은 변화 없이 여상했다.
“친근한 호칭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 사장님.”
곧 죽어도 머리 안 숙이지? 최오용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자리 어색하지? 형님이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너무 무심했네. 앞으로는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최오용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뻔뻔하고, 류신로는 소름이 오를 만큼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김인희에게도, 최오용에게도 매한가지로 예의 바를 따름이다. 설마 류동하를 죽인 게 누군지 모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업 부분에서 어려운 건 없고? 공부만 하던 너에겐 버겁지 않아? 어려우면 내가 좀 도와줄까?”
저열한 미소를 드리운 최오용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자 호응하듯 류신로의 입술도 자연스럽게 휘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조언이 필요한 일이 있었는데, 도와주신다니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린 최오용이 흥미롭게 지켜보는 김인희의 눈치를 살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그럼! 뭐든지 내가 도울 수 있다면야.”
“저희 호텔에서 취급하는 와인을 중간 마진 없이 직접 계약하고 싶어서요. 혹시 추천해 주실 곳이 있으십니까?”
“……와인이라,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알아봐 주마.”
일순 표정을 굳힌 최오용이 얼른 뻣뻣한 얼굴 근육을 풀고 웃었다.
“그렇습니까? 강원도 쪽에 와인 공장을 하나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잘못 안 모양이군요.”
담백하게 미소 짓는 신로를 바라보는 최오용의 눈에 이채가 어리며 번들거리는 찰나 김인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와인에 대해서는 내가 추천해 줘도 되겠어, 류 사장?”
“감사합니다.”
“내일 그쪽에서 연락하도록 할게.”
“알겠습니다.”
최오용에겐 눈짓으로 인사한 김인희가 뒤를 돌았다.
“그럼 나는 이만. 갈 때는 따로 인사할 필요 없어요. 피곤해서 곧 들어갈 거 같거든.”
“얼른 쉬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김 여사님!”
허리를 90도로 숙인 최오용과 예의 바를 만큼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류신로의 차이는 확연했다. 잔잔히 웃으며 돌아선 김인희가 비서에게 손짓했다.
“최 사장이 가지고 있다는 강원도 와인 공장이 뭔지 알아봐.”
“네, 회장님.”
“재미있어.”
“예?”
“아니야.”
붉은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을 싱긋 올리며 김인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만 가라는 말을 알아듣고 리셉션장을 가로지르며 밖으로 향하는 류신로는 이곳에서 확실히 튀는 존재긴 했다. 젊고 똑똑하고, 우아하기까지.
그에 비해 최오용은…… 음료를 제공하는 여자 직원의 엉덩이에 시선이 닿아 있었다. 시선 관리부터 류신로와는 차이가 확연했다.
“김 비서.”
“네, 회장님.”
“내 파티 물 흐리지 말고 저거 가라고 해.”
김인희의 시선이 스친 최오용을 돌아본 비서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류신로는 유유히 빠져나간 뒤였다.
∞ ∞ ∞
“어이, 류신로.”
대기하고 있던 박덕수가 열어 준 문으로 차에 오르려던 신로가 뒤를 돌아보자 최오용이 건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최오용은 위에서는 인사도 잘하더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류신로가 영 거슬렸다.
“뭐 하나 맡았으면 알아서 인사를 와야지. 어른들한테는 먼저 인사하는 거라고 안 배웠나?”
“최오용!”
최오용을 본 순간부터 살기를 피워 올리던 박덕수가 주차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아이고-, 귀 따가워라.”
우습지도 않다는 양 귀를 후비며 최오용이 빙글빙글 웃었다.
“덕수야, 거기서 뭐 하냐. 애 코 닦아 주지 말고 이쪽으로 와. 내가 잘해 줄게?”
박덕수가 눈이 뒤집혀 앞으로 나서기도 전에 신로가 최오용에게 바싹 다가섰다. 최오용보다 큰 신로가 다가서자 올려다봐야 눈높이가 맞았다.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라 턱을 들어 올린 최오용이 이를 악물었다.
“이 새끼가 어딜-!”
밀어내려는 최오용의 손목을 낚아챈 류신로가 다른 한 손으로 최오용의 허리를 감쌌다. 언뜻 보면 왈츠라도 출 듯 허리를 당긴다. 쉽게 당겨질 정도로 힘없는 최오용이 아니다. 버티며 우위를 보이려 했지만 당기는 척 속임수를 쓴 신로는 도리어 최오용의 힘을 이용하여 틈 없이 바싹 몸 안쪽으로 다가섰다.
“형님!”
“형님!”
최오용의 뒤에 서 있던 덩치 큰 놈들이 눈을 부릅뜨며 다가서자 박덕수와 기다리고 있던 백류파도 앞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목 밑으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최오용은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지하실 관리나 잘해, 최 사장.”
자못 상냥하게 속삭인 류신로가 움켜잡고 있던 팔목을 놓아주고 떨어졌다.
최오용의 턱 밑을 누르던 것은 엄지손가락만 한 잭나이프였다. 길이는 짧아도 멱 하나 따는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흉기였다. 접으면 라이터 크기라 슈트 안주머니에도 충분히 보관할 수 있지만, 류신로가 그것을 꺼내는 순간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을 죽이려는 순간의 긴장 따위, 류신로에게서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칼을 접어서 안주머니에 넣는 태도 또한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너 이 새끼, 후회하게 해 주지.”
목을 문지르며 최오용이 음산하게 으르자 류신로의 고개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당신 사업은 별로 구미가 안 당기는데. ……부수면 되려나.”
“뭐야?!”
“아니, 아버지와 저는 확실히 다를 겁니다. 저는 호인이 아니어서요.”
“호인? 류동하가 말인가? 별 씨발, 헛소리를 다 들어 보네. 그 새끼는 남의 여자나 강간하는 그런 새끼야.”
“최오용!”
차에 타려고 돌아서던 류신로가 박덕수를 힐끔 바라봤다. 무감동한 눈에 박덕수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나름대로 인내하는 박덕수에게서 눈을 뗀 류신로는 뒤를 돌아보고 빙긋 웃었다.
“강간이 취미인 건 당신이지 않나?”
“류신로! 이 새끼!”
삐요삐요-.
경고 음과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온 순찰차가 10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순찰차에서 느릿하게 내린 정복 경찰이 이쪽을 바라봤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될 성싶은 관리팀이 신고한 모양이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던 최오용이 침을 퉤, 뱉어냈다.
“너 이 새끼, 두고 보자!”
최오용은 나직하게 경고하고 부하들과 자동차에 올랐다. 창문을 내리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경찰들도 딱히 잡을 생각은 없는지 지나가는 최오용의 차를 힐끔 볼 뿐이었다.
끼끼끼긱, 최오용의 차가 요란한 바퀴 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보던 신로도 차에 올랐다.
“할 말 있으면 해.”
출발하고 내내 옆에서 손가락을 움찔거리던 박덕수가 신로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제가 제거하러 가겠습니다!”
최오용을 죽이겠다는 소리다. 분에 찬 목소리 끝이 원통했다.
“지금은 아니야.”
“보스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었습니다! 하지만 최오용은 독입니다! 그냥 두면 저렇게 주제도 모르고 날뛸 겁니다! 복수를 허락해 주십시오!”
“함정에 빠진 아버지가 실수한 거잖아. 그게 어째서 복수할 일이지?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복수한다고 얻을 만한 이득이 있던가? 이 건에 관해서는 이미 결론 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목소리가 조용하고 냉랭하다. 운전하던 놈도 룸미러로 류신로를 바라볼 정도로 놀란 눈치다.
보스를 잃고 슬픈 부하들보다 억장이 무너져야 하는 쪽은 부친을 잃은 류신로였다. 아무리 감정이 둔해도 상식적인 문제 아닌가.
“……분하고 억울합니다. 보스께서는 저런 말을 들을 분이 아닙니다.”
침중하게 속내를 토해 내며 박덕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왜 당신이 몰라주는 건가. 존경하는 보스를 잃고 실의에 빠진 부하들 마음을 왜 몰라주나, 섭섭함이 극에 달했다.
“허락해 주십시오. 놈의 멱을 따고 제가,”
“죽이는 게 뭐 어렵다고 그래?”
허락인가 싶어 박덕수는 눈을 끔뻑거렸다.
“아까도 죽일 수 있었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 장소에서 함부로-,”
“넌 되고 난 안 돼?”
“사장님이 안 계시면 저희 백류파는 어떡합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뭘 모르는군, 박덕수.”
“예?”
“지금 백류파에서 아버지 역할을 하는 건 너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한 거고. 나는 중요하지 않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백류파가 바라던 이는 그저 핏줄만 이어진 아들 류신로가 아니라 아버지가 가장 신뢰한 박덕수였다. 백류파의 유지를 위해 제일 필요한 인재였다.
류신로는 자신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감정 변화도 드물었다. 왜 울고, 화내고, 기뻐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상태였고, 아버지는…….
「정 이해 못 하겠다면 외워.」
라고 했었다.
외우라고 명령하니 외웠다. 당최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이 구분하기가 어려워 눈물이 나오면 우는 거고, 그게 없으면 웃는 거라고 판단했다.
차온하의 얼굴은 그나마 구분이 잘된단 말이지.
김인희의 초대에 응하고자 옷을 갈아입으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했더니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차온하가 환히 웃었다. 그것이 반가워하는 감정임을 알아채고 차온하를 한참이나 바라봤었다.
“사장님, 저는 사장님을 보필할 뿐입니다.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무슨 오해를 했는지 진지하게 말하는 박덕수의 목소리가 나직하고 사뭇 비장했다.
“그러니 곁에서 잘 보필해. 또 말하게 하지 마.”
다음에는 봐주지 않는다는 뜻을 알아챈 박덕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네, 사장님.”
류신로는 시트에 뒷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최오용은 기다리도록 해.”
“네, 사장님.”
아마도 그쪽에서 슬슬 몸이 달아 움직이겠지.
강원도에 있는 최오용의 와인 공장은 와인을 취급하는 곳이 아니다. 와인 속에 불법으로 제조된 마약을 숨겨서 몰래 유통하는 곳이었다.
마약은 원래 오용파의 주 수입원이 아니었다. 해 본 적 없는 마약 사업에 손댔다는 뜻은 오용파에 협력자가 있거나, 다른 조직을 돕고 있거나다. 명동과 종로에서 활동하는 대호파도 마약 사업은 하지 않으니 지방 혹은 국외 조직과 손을 맞잡았을 터다.
조직의 크기로 보면 대호파가 가장 크고, 오용파와 백류파가 엇비슷했다. 아버지는 오용파를 쓸고 대호파처럼 크기를 키울 수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크기가 크면 관리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식구들 밥값만 벌면 됐지, 그런 욕심은 내서 뭐 해. 건드리지만 않으면 나 역시 오용이를 어쩔 생각은 없어.」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를 본 적 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거든.”
“예? 잘 못 들었습니다, 사장님.”
“건드리지 않으면, 이라고.”
그러니, 필히 건드리게 해 주면 되는 것이다.
조직을 이을 생각은 없었지만 아버지, 당신이 그렇게 가 버리고 남긴 당신의 소중한 것이라 맡아 준 겁니다. 당신이 원한 상태 그대로 유지해 드릴게요.
다만, 말입니다. 유지하기 위해서 조직원들에게 선물이 필요한 듯하니 최오용은 치워야겠습니다.
“사장님?”
박덕수가 불러도 류신로는 더는 답할 마음이 없는 듯 느리게 눈을 감았다.
대체 새 보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워 박덕수는 땀이 뻘뻘 났다. 류동하 밑에서 20년을 충성하면서도 존경심은 있었을망정 그가 무서웠던 적은 없었다.
류신로는 무섭고 잔인했다.
이 남자는 제 일도 남 일처럼 객관적인 평가를 했다. 그런 사람이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면 더 무섭고 소름 끼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사장님, 저는 보스 자리를 노리고 있지 않습니다, 라고 백만 번쯤 강조하고 싶었으나 더욱 수상할 뿐이라 꾹 입을 다물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 ∞ ∞
현관에서 기다리는 온하를 내려다보는 일은 아주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때로는 잠들어 있었고 어느 때는 깨어 있었다.
침대에서 자라고 하고부터 온하는 구석에 처박혀 잠드는 일이 없었다. 신로가 제 침실을 쓰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몸에 익은 대로 자연스럽게 함께 잤다.
신로는 누구도 곁에 두고 잠든 적이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웅크리고 잠든 차온하를 관찰했다.
일정한 숨소리가 입술에서 새어 나온다. 깊이 잠든 차온하는 다람쥐처럼 몸을 말고 소매에서 팔을 뺐다. 신로가 옆에 누우면 몸을 꼭 붙였다.
타인의 접촉을 즐기지 않는데, 차온하의 체온은 거슬리지 않았다.
“개.”
돌아와 눈이 마주치면 어눌하게 인사하며 일어서는 차온하가 개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차온하.”
속삭임 같은 목소리에 차온하가 눈을 뜰 리 없었다.
“차온하.”
네가 대체 뭘까.
조직 외에 아버지가 남긴 짐. 의문.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
집에 가둬 둔 지 두어 달 사이에 자란 머리카락은 이제 눈을 가리다 못해 단발머리로 보일 지경이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스포츠에 가까운 짧은 머리였는데, 이만큼 시간이 지나도록 여전히 왜 이것 때문에 아버지가 목숨을 버렸는지 모르겠다.
“계집아이 같군.”
가는 목덜미, 작은 몸뚱이라 더욱 그랬다. 차온하의 식사는 유동식에서 일상적인 밥상으로 바뀌었지만, 가사 도우미는 소화가 어려운 찬은 차리지 않았다. 육류보다는 채소 위주다. 아직도 기름진 음식을 받아들일 정도가 아니라서 그런지 좀처럼 살이 붙지 않았다.
류신로는 차온하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전에 비하면 제법 볼에 살이 올랐고 혈색도 꽤 좋아졌다.
일전에 일하면 안 되냐고 물었던 이후로 더는 묻지 않았지만 무슨 생각인지는 짐작이 갔다. 단단해지면, 이라고 말했으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노대식은 풀만 먹어서 살이 찌겠냐고 답답해했지만, 고기 먹는 차온하보다 풀 먹는 차온하가 그럴듯했다. 샐러드를 먹으면 토끼같이 앙다문 입술이 오물오물했다. 다문 입속에서 새는 아삭거리는 소리가 듣기 나쁘지 않았다.
이제 차온하는 노대식이 집 안으로 들어와도 경계하지 않았다. 노대식은 제가 골라 준 옷이 마음에 들어서라며 큰 소리로 웃었다.
「마음에 들어?」
끄덕이는 차온하가 아니었으면 노대식에게 고스란히 던져 주고 사이즈에 맞게 몸을 줄이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왜 사이즈도 맞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슈트를 몇 벌이나 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속옷이나마 맞는 사이즈로 산 것이 용했다.
헐렁헐렁한 셔츠에 두 팔을 욱여넣고 자는 차온하의 모습은 좀처럼 편해 보이지 않는데도 잘만 잤다.
노대식의 센스가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면 차라리.
문득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신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는 온하를 보는 시선이 점차 차갑게 변했다.
목덜미로 내린 손을 조일까 말까 힘을 줬다 풀었다 하는 사이 가볍게 목이 졸린 차온하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작은 자극에 근육이 수축했다. 가는 목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한번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르는 차온하라도 목이 졸리니 눈을 떴다. 모자란 숨을 채워 보려는지 입을 크게 벌렸다.
벗어나 보려 옴짝거렸지만, 옷 속에 팔을 집어넣고 자는 버릇 탓에 버둥대기만 할 따름이었다. 마치 구속복처럼 제 몸을 조이는 옷 속에서 팔을 빼내지도 못하고 도리질을 치는 온하의 눈을 가렸다.
“차온하.”
발버둥을 치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벌어진 입술로 뭐라고 말할 듯 뻐끔거리다 그대로 축 늘어졌다.
그제야 손을 뗀 신로가 목덜미의 맥박을 확인했다. 죽일 마음이 없었기에 죽진 않았다.
죽일 마음이 없었는데도 신로는 힘을 빼지 않았다. 차온하의 얼굴은 식은땀에 젖어 머리카락이 얼굴에 어지럽게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걷어 주고 신로는 차온하가 기절할 때까지 조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도무지 차온하의 목을 왜 졸랐는지 알 수 없었다.
유난히 온하에게는 제멋대로 손이 나갔다. 다른 때에는 말대꾸해서라는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영문을 모르겠다.
온하의 몸을 불편하게 죄고 있는 하얀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옴짝달싹 못 하고 갇혀 있던 팔을 자유롭게 해 주고 나서야 신로는 그 곁에 누웠다.
“이 괴상한 잠버릇 고쳐. 저항하기 힘들잖아.”
변명을 중얼거리면서도 흰 목덜미를 물들인 붉은 손자국은 꽤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감, 감기인 것 같습니다.”
“……가암기?”
“아마도 감기가 맞을, 겁니다.”
“기라는 거여, 아니라는 거여! 똑바로 말혀!”
노대식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제 레지던트 8개월 차라고 소개한 남자가 불안하게 들고 있던 체온계를 아래로 뚝 떨어트렸다.
“살려 주세요!”
급기야 운다.
“아오, 답답하네! 누가 죽인대?!”
“어이, 대식이. 좀 나가 있어 봐.”
“왜요, 형님! 아가 요로코롬 열이 펄펄 끓는데 그냥 감기라니, 말이 되오? 걱정도 안 돼? 아가 거시기 색색, 숨도 거칠고! 막 안쓰러워 뒈지것구만!”
“니 목소리가 너무 크단 생각은 안 하냐, 이놈아! 방해되니까 나가!”
“아따, 형님 너무하네, 내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류신로의 시선이 노대식에게 서늘하게 닿았다. 합, 하고 입을 다문 노대식이 허공으로 시선을 띄우며 품에서 더듬더듬 담배를 찾아 물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레지던트 양반.”
“예, 에?”
“정말 감기요?”
“아, 아마 그럴 겁니다! 열이 좀 심하긴 한데, 숨소리가 거친 건 감기 탓이라기보다 목이 부어서…….”
“으음….”
굵은 엄지로 눈썹 부분을 쓱쓱 문지른 박덕수가 침중한 소리를 내었다.
차온하의 목에는 손자국이 선명했다. 누가 봐도 목이 졸려 남은 자국이다. 범인은 얼어붙을 듯 싸늘한 기운을 내뿜는 류신로일 터이고.
“그럼 어떻게 하면 되오?”
“이, 일단 약을 먹으면, 거, 건강한 사람이면 곧 나을, 겁니다.”
“약? 약만 먹으면 나아? 주사는 안 놔도 돼?”
“예, 예? 리, 링거도 놔 드릴까요?”
“뭐가 됐든 빨리 낫는 걸로 놔 줍시다.”
박덕수는 수고하라는 의미로 레지던트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해 주었다. 두툼한 손의 격한 응원에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레지던트는 빚이 있었다. 학비가 모자라 학자금 대출을 받았는데, 제때 못 갚고 연체가 반복되자 제3금융권으로 넘어갔다. 휴학하고 메우기를 반복해도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조직원의 치료를 도우면 추심에서 제외해 주겠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추심에서 제외되고서야 겨우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을 거쳐 조금은 늦은 나이에 레지던트로 올라갔다. 그동안 몇 번이나 불려 다녔지만, 이렇게 무서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자리는 처음이었다.
오기 전에 기본적인 약을 챙겨 온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겨우 바늘을 꽂아 넣었다. 목덜미에 남은 흔적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오로지 가느다란 팔뚝에만 집중했다.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링거를 연결하고 혈관으로 이어지는 줄에 해열제와 진통제를 투여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신로의 눈치를 살피고 환자의 이마에 어린아이들에게나 사용하는 해열 시트를 붙여 주었다.
“열, 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거예요. 여덟 시간 지속되니까 그냥 두시면 되고, 약은 식후에 한 알 드시면 됩니다. 여덟 시간 뒤에도 열이 내리지 않으면 병원으로 내원을, 아니 연락 주세요.”
“또 없소?”
박덕수가 노대식보다 젊잖다고 해도 레지던트는 이 사람 역시 무섭다. 화들짝 놀라 돌아서자 박덕수가 눈으로 신호를 보내듯 환자의 목덜미 쪽을 가리킨다.
“그, 건조하지 않도록 해 주시고, 따뜻한 물도 많이 드시면 좋습니다.”
레지던트는 얼른 대답하고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건조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지?”
“가습기나, 어, 없으시면 젖은 수건을 짜서 걸어 두셔도, 방이 넓으니까 빨래를 널어도 될 것 같습니다. 아하하하! 하하! 하…!”
“물은 그냥 생수면 되고?”
“보리차도 좋구요…….”
“끝이요?”
머리가 떨어질 만큼 끄덕이자 그럼 나갑시다, 하고 박덕수가 손으로 문을 가리킨다. 레지던트는 그것만 기다렸는지 빠르게 침실을 나갔다.
박덕수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침실을 나가자 침묵이 찾아왔다.
침실 안은 차온하의 더운 숨이 가득 차 마치 열대 지역처럼 습했다. 색색 숨을 몰아쉬는 차온하를 물끄러미 보다 이불을 끌어서 목까지 덮어 주었다.
대체 옷 속으로 팔을 집어넣고 자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는데 보온을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기절한 차온하의 셔츠를 열어젖히고 내버려 뒀더니 이 모양이 되었다.
차온하는 지나치게 약했다. 이래서야 단단해지기는 어려울 성싶다.
박덕수가 설치한 가습기에서 뿌연 습기가 뿜어졌다. 옆에서 결재 서류를 보고 있던 신로는 어느새 눈을 뜨고 이쪽을 보는 온하를 알아챘다.
자고 있다가 갑자기 목이 졸렸으니 겁을 먹었을까?
“……꿈에.”
쉬어서 잠긴 목소리가 꺼질 듯 작아서 곁으로 다가갔다.
“몸도 움직일 수 없고…….”
그건 네가 옷에 갇혀서 그래.
“갑자기 숨도 막히고…….”
목을 졸랐으니까.
“괴로워서, 힘들고, 그랬는데, 류, 신로 씨 목소리가 들, 렸어요.”
“…….”
“내, 이름.”
“차온하.”
불러 주자 온하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희미한 미소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입술을 만지자 가만히 눈을 감았다.
“……편해졌어요.”
“…….”
“……저 왜 이래요……?”
움직이기 힘든 몸이 부대끼는지 깜박거리며 시선을 돌리던 온하는 매달린 링거를 발견했다.
“감기래.”
“누가요?”
“레지던트.”
그게 의사라고 생각도 못 하면서 차온하는 고개를 끄덕이곤 고단한지 눈을 감았다.
“특별히 안 좋은 데가 있으면 말해.”
“……괜찮아요…….”
“먹고 싶은 건?”
잠이 들었는지 입을 벌린 채 고른 숨을 내쉬는 온하를 한동안 바라보다 옷깃을 벌려 목덜미를 들쳤다.
“멍청하긴.”
목을 조른 게 누군지도 모른다. 악을 품고 소리쳐도 부족하지 않을 텐데 꿈이라고 현실에서 도망쳤다.
한껏 비웃어 주고 싶은데 단 한마디도 진실은 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차온하 때문에 죽은 것도, 차온하가 갑자기 온순한 개가 된 것도, 자신의 제어되지 않는 충동도, 차온하와 관련된 것들은 전부 이해되지 않았다.
“차온하.”
입속말로 속삭이듯 혀를 굴리고 한 번 더 소리 내었다.
“차온하.”
미소를 그렸던 입술을 뭉개듯이 엄지로 문지르며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더 웃어 봐.
∞ ∞ ∞
볼에 손이 닿는 느낌에 눈을 뜨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이곳에 온 뒤로 잠에서 깨면 항상 류신로가 보였다.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해서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는데, 점차 안정되었다. 이제는 눈이 마주쳐도 담담하고 때로는 편안하다.
목이 말라서 입을 빠끔 벌리자 목마르냐고 물어 왔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는데 컵에 빨대를 꽂아서 내밀었다. 마른 입안이 축축해질 정도로 마시고 목구멍도 적당히 촉촉해졌을 때 빨대를 혀로 가만히 밀어냈다.
“아직 아파?”
“모…….”
거칠거칠한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목에 손을 대자 수건이 감겨 있었다.
“목이 많이 부었어.”
그런가 봐요.
제대로 답하고 싶은데 목구멍에서는 쉭쉭, 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만 새었다.
“더 자.”
조용한 타이름에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할머니가 있을 때는 감기 한 번 안 걸렸는데. 강건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잔병치레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 배탈 정도로 정말 죽는 줄 알고 겁을 왈칵 집어먹었다.
죽는 것이 쉬워 보였다.
할머니는 며칠 앓지도 않았고 병원에서 막무가내로 퇴원한 며칠 뒤 금세 싸늘하게 변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하고 할머니의 딱딱해진 몸을 흔들며 무기력하게 울었다.
119에서 나온 것은 옆집 단칸방에서 살던 누나가 신고해 준 덕분이었다. 이미 사망한 상태라고 말하던 응급대원은 아니라고 우기는 온하를 난처하게 내려다봤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철없이 세상을 똑바로 보려고 하지도 않고 품 안에만 있으려던 손자를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다.
사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와 같이 있고 싶다고 해도 고개를 저으며 학생이 학교를 가야지, 하고 등을 떠밀어 별수 없이 등교하곤 했었다.
무엇이든 돈을 주고 구매하는 법이 없었던 할머니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온하에게 새 책가방을 사 주셨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셨다.
다만, 학교에 들어가니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글을 익히지 않고 온 아이는 온하뿐이었다. 열심히 하려고 애써 봤지만, 빠른 수업 속도를 따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숙제도 빠트리지 않고 꼬박꼬박했건만 결국 반년 만에 할머니는 학교로 불려 왔다. 담임이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그날 무척 한숨을 많이 쉬셨다.
할머니는 불쌍하게 왜 저한테 왔냐고 한탄했다. 잠든 척 누운 머리맡에서 내내 한숨 소리가 들렸다.
불현듯, 무섬증이 일었다. 냉기가 스미어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할머니가 날 모르는 곳에 버리면 어쩌지?
불쑥 든 생각을 내내 떨치지 못해 악몽이 되었고 밤새 시달렸다.
그다음부터는 할머니를 불러 오라고 해도 전하지 않았다. 핸드폰도 없고 집에 전화도 없던 터라 온하가 전하지 않으면 연락할 방법이 없었고 담임도 점차 포기했다. 그렇게 온하는 초등학교 내내 담임들이 꺼리는 귀찮은 학생으로 낙인찍혔다.
왕따는 당연했지만, 너무 수준 차이가 나니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투명 인간이었다. 누구도 차온하라는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자리만 메우다 학교가 파하면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곤 했다.
할머니에게 안겨야만 뛰는 심장이 느껴지고 답답하던 숨이 쉬어졌다. 비로소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철없는 손자가 기대기만 한 채 그녀의 삶을 갉아먹어도 금이야, 옥이야……. 그렇게 폐휴지를 팔아 어렵게 모은 돈을 아끼고 아껴 홀로 남을 손자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했다. 그랬는데.
눈가가 시큰해 고개를 돌리는 온하의 얼굴을 잡아 돌린 신로가 슬며시 미간을 구겼다.
“왜.”
입술을 깨물고 그를 보다 눈을 끔뻑이자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흘렀다.
“왜.”
또 두 번 말하게 했어. 하지만 차라리 맞는 게 속이 편할 거 같았다.
“저-, 이, 일하게, 해 주세요.”
듣기 싫은 쇳소리와 거친 숨이 한데 얽혀 목구멍을 통과했다.
“제발…….”
“…….”
“제발요……. 빚, 갚게 해 주세요.”
할머니가 피를 깎아 남겨 준 보물을 류신로가 가지고 있다.
되찾아야 해.
설령 찾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죄송해요, 제발 일하게, 크흑! 콜록! 콜록!”
소리내기도 힘든 성대를 쥐어짜 자극받은 목구멍이 경련을 일으키자 끝도 없는 기침이 나왔다.
목구멍에서 쇠 비린내가 진동하고 온몸이 울리는 탓에 뒷골이 뻣뻣해질 정도로 두통이 일었다. 입으로 폐를 뱉어 낼 만큼 기침이 멎지 않았다.
류신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란한 기침이 겨우 잦아들자 온하는 몸에 남은 힘이 없어 침대로 축 늘어졌다.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고 탈진한 온하는 엎드려 서럽게 숨을 들이켰다.
온하의 등이 잔잔히 떨리자 지켜보던 신로의 미간에 실금 같은 주름이 패었다.
류신로는 움츠린 목덜미로 손을 뻗었다. 땀이 흥건한 가느다란 목덜미에 그림자가 지자 악의를 예민하게 눈치챈 온하가 흠칫 떨었다.
어깨를 옹송그리고 돌아보는 눈에 수분이 가득했다. 차온하는 젖은 눈으로 신로의 얼굴을 한 번, 단단하게 쥐어진 주먹을 또 한 번 보았다. 입술이 할 말이 있는 듯 파들거리며 경련했다. 숨을 몰아쉬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내민다.
차온하의 손이 신로의 주먹을 감쌌다. 손바닥이 진땀으로 촉촉했다.
“때리셔도 돼요……. 마음 풀리실 때까지, 때리고 대신 일하게, 해 주세요.”
제가 노력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이대로 당신에게 기대지 않게. 사는 의미가 있도록.
쇳소리를 쉭쉭 내뱉고는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는 듯 차온하는 눈을 감았다. 따가울 정도의 강렬한 시선에도 눈꺼풀은 결연하고 고요했다.
신로는 잡힌 주먹을 뿌리치지 않았고 온하는 이마를 주먹에 댄 채 열에 끓는 숨만 할딱였다.
“이 멍청한 게.”
별안간 손이 빠져나갔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자 온하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눈을 꼭 감았는데도 그림자가 느껴지고 두려움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러나 머리 위에 내려앉은 것은 고통이 아니라 시트였다. 머리까지 푹 씌워진 시트에 그대로 감싸인 몸이 거칠게 침대로 내리꽂혔다.
침대가 출렁거리는 느낌에 온하는 눈을 떴지만 머리를 덮은 시트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으로 눈을 껌벅이는 사이, 시트가 얼굴 양옆으로 당겨졌다. 시트에 눌린 온하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신로는 얇은 시트 위로 드러난 온하의 실루엣을 노려보았다. 앙증맞은 콧대와 벌어진 입술이 형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를 악문 신로는 고개를 숙여 그에게 다가갔다.
얼굴 위로 지는 그림자에 온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함부로 조르지 마.”
일순간 내리누르는 압력이 풀어졌다. 쾅!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온하는 시트를 조심스럽게 걷어 냈다. 침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온하는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쳐 냈다. 조금 기다려 봤지만 문밖에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 버렸다.
온하는 몸을 웅크려 얼굴을 팔에 묻었다. 틈새에서 숨죽인 울음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몸이 아픈 것보다, 끝내 허락해 주지 않았다는 것보다, 혼자 남겨져서 적이 서러웠다.
관계도 없는 타인이라도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사무치게 외로워서 한심했다.
“어이, 레지-.”
아예 온하의 곁에 붙어 열성으로 간호하던 남자의 어깨가 절로 흠칫거렸다. 예에, 하고 주눅 든 대답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손을 놀려 손가락 사이를 젖은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사실 열을 식히는 데 큰 도움 되는 일은 아니다. 그저 뭐라도 해야 할 분위기라서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차온하 환자는 도로 열이 올랐다. 레지던트는 새벽녘부터 닦달의 전화를 받았다.
다짜고짜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왜 열이 더 올랐냐고 따졌다. 다그침에 내원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면서도 헐레벌떡 달려왔다.
레지던트는 병원으로 돌아가서도 매시간 전화로 환자의 상태를 체크했다. 분명히 아이의 열이 내렸다는 소리를 듣고 안심해 잠들었는데, 쪽잠 자는 몇 시간 만에 갑자기 또 열이 치솟은 이유를 모르겠다.
이거 다 스트레스라고! 만병의 근원! 이 조폭 개새끼!
“지대로 약 쓴 거 맞아? 어? 아가 으째서 더 아퍼 부러!”
“……그러게 말입니다. 일단 해열제 놓았으니까, 곧 열은 내릴,”
“은제!”
“곧이요! 곧! 살려 주세요!”
“아니, 왜 뻑하면 살려 달라쌌고 지랄! 이 새끼가, 나가 살인범이여? 으엉?! 봐라, 다 죽게 생긴 건 니가 아니고 우리 아잖어!”
“아, 아닙니다. 열만 내리면.”
안 죽어! 감기로 안 죽는다고! 목까지 조르고 학대한 새끼들이 뻔뻔하게 누굴 다그치고 지랄이야!
“안 내리기만 혀 봐!”
뿌직! 노대식이 들고 있던 사과가 으깨져 과즙이 뚝뚝 떨어졌다.
“에이, 뭐야. 씨부럴!”
한 손에는 껍질이 길게 늘어진 깎다 만 사과를, 한 손에는 과도를 든 모습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옷에 과즙이 묻자 욕설을 내뱉으며 노대식이 침실 밖으로 사라졌다.
레지던트는 그 틈에 열이 따끈한 차온하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고 기도했다. 하나님, 예수님, 성모마리아, 부처님, 알라신 등 세상 모든 신을 찾았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이 아이 열 좀 내려 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빌었다.
기도가 통했는지 아니, 약 기운이 돈 덕이겠지만, 한 시간쯤 지나자 차온하의 열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호흡도 안정되어 숨소리도 한결 편안했다.
“운동은 끝나셨습니까, 사장님!”
거실에서 들리는 우렁찬 소리에 졸고 있던 레지던트가 화들짝 눈을 떴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놈들의 보스가 온 모양이다. 레지던트는 긴장하여 물수건으로 뽀얀 손을 더욱 세심하게 닦았다. 바로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침실 쪽으로 오지 않았다.
수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레지던트는 어느새 긴장이 풀어졌다. 닦아 주던 손길은 차츰 무뎌지고 고개도 점점 수그러들었다. 상모 돌리듯 고개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크헝!”
레지던트는 머리가 뒤로 넘어가던 순간 콧소리를 내며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언제 온 건지 소리 없이 서 있는 신로를 발견한 탓이다.
류신로는 샤워를 했는지 아랫도리만 수건으로 가리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물방울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히도 류신로는 잠든 온하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 졸던 레지던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열은-.”
“아까 내렸, 지만 다시 재 보겠습니다.”
황급히 체온계를 꺼내 귓가에 넣고 체온을 잰 남자는 약간의 미열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서늘한 눈동자는 온하에게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반듯하게 선 반라를 멍하니 바라보던 레지던트는 새삼 신로의 몸에 감탄했다. 같은 남자지만 심히 부러운 몸이었다. 조폭이 아니라 모델인가 싶었다.
“목소리가 쉬었던데.”
“그건 목이 졸려서.”
신로의 몸에 정신을 팔고 있던 레지던트는 저도 모르게 진실을 뱉어 버렸다.
헉. 숨을 들이켠 레지던트는 냉랭한 눈동자와 마주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메두사와 눈이 마주쳐 돌이 된 사람처럼 몸이 뻣뻣해졌다.
“성대가 자극받은 탓에 부어서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거지만 신경 손상이 아니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따뜻한 보리차를 많이 드시고 다 나을 때까지는 되도록 목소리를 내지 않고 성대를 쉬어 주면, 나이도 어리니까 금세 좋아질 겁니다.”
숨도 쉬지 않고 사실을 전하자 남자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기침도 하던데.”
“그럴 수 있는, 아니 감기도 같이 겹쳐서 열이 있으니까요, 많이 떨어져서 지금은 미열이지만 그래도 몸 안쪽에서는 열이 있을 수 있거든요. 목 졸, 아니 자극을 받아서, 목이 말입니다. 그래서 기침이 동반할 수 있으니까 되도록 물을 많이 드시고 당분간 목소리는 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인턴 시절 교수에게 리포트를 발표할 때처럼 바싹 긴장한 채 환자의 증상과 처방을 달달달 늘어놓았다.
“아픈가?”
“네, 아플 겁니다!”
보기에도 아파 보이잖아요.
레지던트는 울고 싶었다. 가 봐야 하는데, 가겠다는 말을 꺼낼 용기가 없었다. 전공 서적을 들춰 봐도 모자랄 시간에 엉뚱한 곳에서 감기 환자나 보고 있으려니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쯤이면 사람들이 한낱 1년 차 레지던트 주제에 무단으로 이탈한 그를 알아챌 때가 되었다. 연차 높은 선배들은 스트레스를 모조리 후배들에게 풀었다. 눈을 시뻘겋게 부라리며 날뛰는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그래도 역시 가겠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처치는 끝났음에도 말이다.
한참을 우두커니 선 채 아이를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신로에게 말할 시기를 재던 와중에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안 아프게 만들어.”
“넵! 알겠습니다!”
레지던트는 속으로 난 그냥 끝났어, 를 세 번 복창했다.
빨리 낫게 해야만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레지던트는 끝도 없이 잔소리했다. 열성으로 온하를 돌보면서도 귀가 아프다고 느낄 정도로 설교가 이어졌다.
입맛이 없어서 죽을 깨작거리자 도끼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꼭꼭 씹어 천천히라도 다 먹으라고 압박했다. 기세에 눌려 온하는 열심히 그릇을 비웠다.
다 먹고 나면 삼십 분 알람을 맞춰 정확한 시간에 약을 내밀었다. 또 삼십 분이 지나면 가사 도우미에게 부탁해 내린 과즙을 마시게 했다.
목을 보자, 아 해 봐라, 물을 마셔라, 열 좀 재자, 혈압도 재자, 몸무게도 재자, 왜 이따위로 말랐냐, 힘들어도 운동해야 한다, 근육이 없으면 무기력해지고 따라서 입맛도 사라지고 움직이지 않게 되며 이런 순서로 건강이 악화된다고 세뇌했다.
의사의 말이니 귀담아들으라는 말에 레지던트가 의사냐고 해맑게 물었던 온하는 귀신 같은 벌건 눈과 마주했다. 지금 전공의 무시하느냐는 날 선 목소리에 주눅 들어 눈만 또르르 굴렸다.
종일 이글거리는 눈총을 받았다. 병간호는 더더욱 매서워졌고 온하는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야 겨우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