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꿈은★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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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로는 새벽에 일어난다. 같은 침대에서 자는 차온하는 항상 옆구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신로가 어깨에 기댄 작은 머리통을 베개로 옮겨 주면 온하는 큰 숨을 내쉬고 웅크린다.
깊은 잠에서 빠져나오는 듯 감긴 눈꺼풀이 미미하게 경련한다. 휘어진 속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고 이윽고 잠잠해진다. 깨지 않은 차온하를 조용히 들여다보던 신로가 몸을 일으켰다.
침실에서 나오자 노대식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별일이 있지 않은 한 신로가 출근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는 노대식이 웬일인지 안에 들어와서 대기 중이다.
“왜.”
“가사 도우미네 집에 조사가 생겨서 못 온다고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요.”
가사 도우미의 기척이 없던 이유를 이해한 신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운동하러 밖으로 나섰다. 허리를 숙이고 있던 노대식이 현관이 닫히는 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살금살금 침실로 가서 문틈에 귀를 댄다.
새액, 새액 아이의 고른 숨소리를 들은 노대식이 발끝으로 걸어 다시 거실로 나왔다.
아따, 나가 드디어 솜씨를 보여 줄 때가 되었고만!
두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들어선 노대식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온 온하는 주방을 보고 눈을 비볐다. 익숙한 가사 도우미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시커먼 곰이 보인다.
“어! 온하 벌써 일어났냐!”
오븐 장갑을 낀 곰이 장국이 넘쳐흐른 뚝배기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얼른 와서 맛 좀 봐 보더라고?”
의자를 빼며 웃은 노대식이 손짓으로 온하를 불렀다.
“할머니는요?”
“어, 오늘 상…, 아. 집에 일이 있댜. 한 며칠 못 나올 거 같구만?”
노대식은 그녀가 상 중이라 못 온다는 말을 얼버무렸다. 할머니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온하를 자극할지도 모르니 말을 아꼈다.
온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가만한 눈으로 식탁을 훑어보았다. 노대식이 중앙에 내려놓은 뚝배기에는 된장찌개가 가득했다. 크기가 제멋대로인 감자, 두부가 보이고, 주황색 당근도 보였다.
당근은 왜……. 대식 님만의 레시피인가?
“아야, 아- 혀 봐!”
노대식이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서 온하에게 내민다. 온하가 저항 없이 입을 벌려 받아먹자 콧구멍을 실룩거리며 평가를 기다렸다.
“맛있어요, 대식 님.”
온하의 후한 평가에 노대식은 입술을 푸르르 떨고 흐뭇하게 웃었다.
“모양은 좀 그렇지만, 음식은 손맛이랑게.”
사실은 라면 스프 맛이다. 노대식은 증거를 인멸하려 주머니에 버린 라면 스프 봉지를 툭툭 두드렸다. 아무래도 밍밍해서 부하를 불러 먹게 했더니 놈이 긴급 처방으로 알려 주었다. 죽은 음식도 살린다는 라면 스프의 힘이 참으로 위대하다.
“그럼 온하야, 사장님 오시면 같이 먹드라고. 나는 나가 있다가, 이따 사장님 출근하시면 올랑게?”
노대식이 오븐 장갑을 벗어 던지고 신나게 주방을 나섰다. 뿌듯한 마음에 발걸음이 춤출 듯 가볍다. 온하는 식탁 앞에 얌전히 앉아 노대식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삐리릭.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온하의 도톰한 입술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었다.
싱크대에 음식 재료의 잔해가 흩어져 있고 바닥도 엉망이다. 노대식은 온하가 일어나기 전에 공작(?)을 서둘러 마치느라 뒷정리는 전혀 하지 못했다. 뒷정리가 남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정도로 섬세하지도 못하다. 엉망인 주방을 치우는 일은 당연하게도 온하의 몫이 되었다.
온하는 일단 뜨거운 뚝배기를 다시 인덕션으로 옮겼다. 노대식의 말대로 모양은 그렇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가사 도우미 할머니가 해 주는 맛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같은 재료를 썼을 텐데 맛의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온하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당근 덕분인가?
찌개가 있으니 국을 해야겠다. 냉장고를 연 온하는 김치를 꺼냈다. 가사 도우미 할머니는 늘 육수를 미리 끓여 냉동해 놓았다. 2인용으로 포장된 육수를 끓이고 김치만 넣으면 된다. 송송 김치를 썰던 온하의 눈동자가 슬며시 옆으로 흘렀다.
궁리에 빠진 눈동자에 이체가 돌았다.
온하가 주방을 거의 치웠을 무렵에 운동이 끝난 신로가 돌아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온하의 목덜미에 입 맞추었다. 돌아보는 온하와 콧대를 비비고 가볍게 입술을 빨아 인사를 마무리했다.
온하는 생긋 웃으며 보글보글 끓는 김칫국을 약간 덜어 내 내민다. 작은 접시를 받아 국물을 맛본 신로가 슬쩍 입술을 비틀었다. 가사 도우미가 작정하고 일을 가르치더니 음식 솜씨가 제법이다. 그녀가 담근 김치로 만든 국이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원래 김칫국에 당근을 넣던가.
“괜찮아요?”
“괜찮아.”
신로는 사소한 의문은 접어 두고 긍정적으로 답해 주었다.
온하가 입술을 감쳐물고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떴다. 어쩐지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했다. 제가 직접 한 아침을 신로와 둘이 먹는다니,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설렜다.
“씻고 오면, 같이 밥 먹어요.”
신로는 아이가 볼을 붉히는 이유가 다만 국에서 솟는 열기 탓이라고 여겼다. 욕실로 향하다가 돌아보니 앞치마를 입은 온하가 주방에서 종종 돌아다닌다. 주방을 누비는 온하의 모습이 새삼스럽지도 않은데 눈길을 자꾸 잡아끈다. 신로는 아이를 만지고 싶은 손가락을 까닥이다가 어렵사리 뒤를 돌았다.
그날의 집안일은 온하가 대신 했다. 가사 도우미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일하는 온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노대식은 몰래 사진을 찍었다. 앞치마 입고 먼지떨이를 들었거나, 집중한 표정으로 빨래를 개는 온하의 사진이 신로에게도 고스란히 전송되었다. 어떻게 찍어도 예쁘게 나오는 사진을 보며 노대식은 좋은 카메라를 사들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저녁이 되어 퇴근한 신로는 온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일당.”
온하가 환하게 웃으며 얼른 두 손을 내밀었다. 번 돈은 고스란히 빚을 갚는 데 써야 하지만, 받는 순간만은 기뻤다. 신로가 머리칼을 쓰다듬고 드레스룸으로 향하자 온하는 뿌듯한 마음으로 냉큼 봉투를 열었다. 막상 돈을 꺼낸 온하가 갸우뚱 머리를 기울였다.
넥타이를 끄른 신로가 거실서 들려오는 잰걸음 소리에 셔츠 단추를 풀다가 고개를 돌렸다.
온하가 드레스룸으로 쏙 고개를 디밀었다. 한데 동그란 눈만 슴벅일 뿐 정작 입은 열지 않는다.
“왜.”
“여섯 장.”
온하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인다. 기다리고 있으면 부족한 언어를 채워 넣기에 신로는 소매의 커프스를 빼 장 위에 내려놓으며 시간을 보냈다.
온하의 숨소리가 여느 때보다 크고 눈알도 반질거린다. 보기 드물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여섯 장이에요.”
“뭐가.”
“돈.”
신로는 뒤늦게 온하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일당으로 준 돈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고 되묻는 대신 신로는 셔츠를 벗어 바구니에 넣으며 시간을 뒀다.
온하가 부스럭거리며 봉투에서 오만 원권 지폐를 꺼냈다. 잘 보이도록 부채처럼 활짝 펼치고 기다린다. 신로는 지폐로 얼굴의 반을 가린 온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다려도 신로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온하는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지폐를 하나 꼽았다.
“하나.”
이어서 하나씩 더 빼내며 숫자를 세었다.
“둘, 셋.”
지폐를 하나씩 하나씩 잘 보이도록 세어도 신로는 말이 없다.
이상하다. 이럴 리 없는데.
“……넷?”
뜸을 들이며 네 개째 지폐를 세자 신로가 다가온다. 온하는 입술을 가만히 감쳐물며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키 차이가 있으니 가까워지면 고개를 들어야 그가 제대로 보였다.
“다섯, 여섯.”
신로는 남은 지폐를 뺏듯이 가져가며 숫자를 마저 센다. 온하가 가져온 봉투에 여섯 장의 지폐를 모두 넣고 돌려주었다.
온하는 손에 쥐인 봉투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잘못, 센 거 아니에요? 일당이 너무 많은데.”
온하가 받은 오늘 하루 일당은 무려 삼십 만원이었다. 예전에 배달하고 받은 주급과 비슷했다. 겨우 하루인데 주급과 같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잘못 센 줄 알고 몇 장 되지도 않는 돈을 세 번이나 다시 세었다. 그 후엔 신로가 착각해서 잘못 줬다고 결론지었다. 서둘러 그를 쫓아와 잘못된 숫자를 일러 주었다.
사실은 모른 척할까 하는 유혹이 아주 잠시 스치긴 했다. 동시에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도 떠올렸다.
사람이 거짓말하면 못써.
온하는 제 마음이 바뀔까, 유혹에 져 버릴까 봐 신로에게 얼른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심장이 심하게 쿵쾅댄다. 이렇게 많은 일당을 처음 받은 탓에 아득하고 어지럽기까지 하다.
“가사 도우미의 일당은 삼십만 원이야, 차온하.”
일당이 삼십. 일주일에 5일 일하면 백오십. 4주면 육백! 시간이 남으니 아르바이트까지 더하면……. 온하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많아……!”
순수하게 감탄한 온하는 흥분으로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신로는 헛웃음을 지으며 벌어진 입술에 입을 맞췄다. 반사적으로 도톰한 입술을 오물오물 맞추면서도 온하의 영혼은 반쯤 빠져 있다.
“가사 도우미는 전문직이야. 전문적인 일을 하려면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해. 그녀의 일당은 합리적인 가격이야.”
“정말요?”
“응.”
일 외의 특별 수당도 포함한 금액이지만, 신로는 불필요한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전문직. 가사 도우미는 굉장하구나. 온하는 일을 가르쳐 준 그녀에게 감사했다. 또, 그녀가 쉬어서 일을 대신 할 날이 앞으로 이틀이나 더 있어서 기뻤다.
하루에 삼십이니까 사흘이면 구십이다. 가사 도우미 일은 잘하면 하루에 두 탕도 가능하니까, 한 달이면 천만 원이 넘게 벌 수도 있다. 순식간에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성스러운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옷을 모두 벗은 신로가 알몸으로 다가와도 온하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씻었어?”
성공한 가사 도우미로서의 미래를 꿈꾸느라 온하는 넋이 빠졌다. 감명을 받아 두 손을 모으고 돈 봉투를 꽉 쥔 채다. 망상만으로 행복해진 온하의 휘어진 입술 끝이 이따금 바들거린다.
신로의 물음도 한 귀로 들어가 반대쪽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는 다시 묻는 대신 온하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달콤한 냄새가 솔솔 피어올랐다.
신로는 차온하를 달랑 들어 욕실로 향했다. 욕실 거울 앞의 장식장에 내려놓고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에도 아이는 돈 봉투에서 눈을 못 뗐다.
목욕할 준비를 마친 신로가 온하를 가운데 두고 장을 짚어 팔 안에 가뒀다. 지긋한 시선에도 온하는 온통 돈 봉투에만 꽂혀 있다. 푼돈에 영혼이 팔렸다.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인 신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돈 봉투를 빼앗아 던져 버렸다.
“어? 내 돈!”
온하가 날아가는 봉투를 보며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공중으로 날아가는 돈 봉투를 낚아채 보겠다는 양 몸뚱이가 휘어진다. 마치 새라도 잡으려는 고양이 같다.
정말 고양이였다면 제대로 착지하겠지만, 차온하는 놀라울 정도로 운동 신경이 없다. 균형을 잃고 장에서 굴러떨어지기 직전이다. 기민한 신로가 허리를 낚아챘기에 온하는 바닥을 구르지 않았다. 나름대로 거셌던 몸치의 비상으로 따라온 결과는 박치기였다.
온하가 신로의 단단한 어깨에 코를 들이받았다.
“앗!”
이어지는 신음에 신로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약하고 비루할 수가 있다니 신로에게는 신기한 일이다.
부딪힌 코를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든 온하의 눈가가 찔끔 젖어 있다.
“코피 나요?”
온하가 손을 살짝 벌리고 보여 준다. 코뼈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끝이 조금 빨갛게 변했을 뿐이다. 다만, 아픈지 가만가만 매만지는 손길에 피부가 점점 더 빨갛게 변했다. 먹음직스러운 색깔이다.
“안 나.”
사실을 말하고 신로는 입을 벌려 아이의 코끝을 살짝 깨물었다. 풍풍, 거칠어진 호흡이 신로의 점막에 닿았다.
온하가 팔로 목을 휘감고 손끝으로 조르듯 신로를 간지럽혔다. 가볍게 입술이 맞닿고 서로의 혀가 꿈틀거리며 교차했다. 키스 따위 입술이 부르트도록 했음에도 차온하의 혀는 매우 어설프다. 이제는 코로 숨을 쉬긴 하지만 길어지면 여지없이 숨이 가빠져 온다. 손가락을 오므라뜨리면 신로는 숨 쉴 틈을 만들어 주곤 했다. 살짝 떨어져 벌어진 윗입술, 아랫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웃음을 터트린다.
“간지러워요…….”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욕실을 낭랑하게 울린다. 신로는 새살거리는 온하의 이마를 콩, 들이받았다. 이제야 푼돈에 빨려 들어갈 뻔했던 영혼이 돌아와 신로를 바라본다.
몸을 바쳐야 봐 주는 건가. 신로는 어이없었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온하가 애교처럼 코끝으로 꾹, 신로의 입술을 눌렀다. 상판에 앉아 공중에 달랑거리던 다리가 신로의 몸통을 슬쩍 끌어안아 당긴다.
“기다려요. 내일모레 내가 엄청, 맛있는 거 사 줄게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제법 의기양양하다.
푼돈에 행복해하는 차온하는 참 저렴하지만, 류신로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다.
다시 닿은 입술에서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달콤한 맛이 스며들었다.

너와 나의 연결 고리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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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Última actualización: Mar 25,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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