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간 전]
“시우… 선배?”
기다란 머리를 포니테일로 높게 묶은 여자애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를 미심쩍은 듯 살펴보는 중이었다.
180cm를 훌쩍 넘긴 키와 곧게 뻗어진 어깨, 색이 옅은 머리카락, 그에 어우러지는 피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희었다. 갸름하게 뻗은 눈꼬리는 동그랗다기보다 얄쌍한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따뜻한 밤색의 동공이 보기 좋게 휘어있었다.
“야, 저 사람 시우 선배 맞아?”
여자애가 제 옆의 단발머리 동기를 툭 치며 물었다. ‘시우 선배’라는 말에 고개를 홱 쳐든 동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 맞네! 시우 선배!”
“어머어머, 선배!”
익숙한 듯 어색한 캠퍼스 진입로를 막 넘어선 찰나, 여자애 두 명이 도도도 달려와 시우의 주변을 에워쌌다. 작은 얼굴에 반가운 표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세상에, 선배! 학교 나와도 되는 거예요?”
“몸은요! 좀 어떠세요?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여자애들이 종알종알 말을 건넸다.
“저희 저번 달에 선배 병문안 갔었어요. 아마 기억 못하실 거야. 그때 계속 주무셔가지구.”
시우는 조금 난처한 듯 웃었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반가움을 표하는 이 어린 후배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은 탓이었다.
“안녕. 잘 있었어?”
그래서 상투적인 인사를 선택했다. 이전과 다름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여자애들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럼요! 잘 있었죠!”
“선배 다시 학교 나오신 거 보니까 너무 좋다.”
밝은 목소리에 시우는 빙그레 웃었다. 여자애들의 얼굴이 기억날 듯 말 듯, 어렴풋했다.
시우가 병원에서 눈을 뜬 건 한 달 전이었다. 3개월 동안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오랜 시간 의식 없이 누워있었던 것 치고 몸은 가뿐했다. 단지 기억이 흐릿할 뿐이었다. 제법 큰 사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희미한 표정의 시우를 보며 주치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가벼운 심인성 기억장애입니다. 가장 최근의 일, 혹은 충격적이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는 일을 잊는 현상 중의 하나로, 일시적인 것이란 설명을 이어갔다. 일상으로 돌아가시면 많은 부분 기억이 돌아올 겁니다. 당분간 답답하시겠지만… 안경을 스윽 밀어 올리며 의사가 비스듬히 웃었다.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시우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반가운 인사가 쏟아졌다. 시우의 주변으로 몰려든 아이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이제 괜찮은 거냐, 몸은 좀 어떠냐, 보고 싶었다, 같은 것들. 시우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발이 닿는 대로 강의실 맨 뒷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선배가 여기 앉으니까 뭔가 안심된다. 여기는 뭔가 선배 자리 같단 말이에요.”
여자애 하나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시우는 가볍게 웃었다. 내가 늘 이 자리에 앉곤 했나. 이곳으로 자연스레 몸이 움직인 건 사실이었다.
시우는 이미 자신의 기억에 대해 최대한 밝히지 않는 것이 좋으리란 판단을 내렸다. 일상생활에 큰 무리가 없고, 자신이 다소 불편함을 감수하면 되는 거라면, 구태여 다른 이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 새끼가 꼴사납게 옆에 앉지만 않았어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슨 못처럼 불쑥 튀어나온 악의에 찬 목소리. 다소 험악한 표정으로 입을 뗐던 남학생은,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된 것을 인식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 선 여학생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무랐다.
“눈치 없이 그 얘기는 왜 해?”
시우가 응? 하며 둘을 바라보자, 여자애도 금세 입을 다물었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금 어색한 대답이 돌아왔다. 뻣뻣하게 웃는 얼굴이 조금 이상했다.
“다들 앉으세요.”
다행이랄까, 어색한 순간은 짧았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지긋한 중년의 여자 교수가 들어서자, 흘레 흩어져있던 학생들이 저마다 자리를 찾아갔다.
“어머, 시우 퇴원했니?”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은 시우를 발견한 교수가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시우는 반쯤 몸을 일으키며 꾸벅 인사했다.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교수가 강단 앞을 걸었다. 익숙한 교수의 걸음걸이. 잘 알던 교수님이 분명했다. 지금의 시우는 온전히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고, 완벽히 기억하는 것도 아니었다. 주치의 말대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무척이나. 하지만 괜찮다. 기억은 곧 돌아올 테니까.
강단 앞에 선 교수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죄송합니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남학생 하나가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조심스레 허리를 숙이는 행동이 몹시 소극적이어서 시선이 가지 않을 법도 했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제법 독특해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시우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비단 시우 뿐만은 아니었다. 몇몇 학생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그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뚜렷하고도 익숙한 적의가 떠올라 있었다.
적의…?
그러나 방금 들어온 남학생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
남학생은 망설임 없이 비어있는 시우의 옆자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걸음을 좇던 시우에게 몇몇 학생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뻔뻔한 새끼…
무슨 낯짝으로… 시우 선배 옆에…
얼핏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시우는 자신도 모르게 앞을 돌아보았지만,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이미 흔적도 없이 흩어진 후였다. 드르륵,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리고 남학생이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선배.”
강의실을 둘러보던 시우가 옆의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파리한 안색. 흡사 도자기 인형 같은 외모였다.
“응? 어, 안녕.”
작고 하얀 얼굴이 매끄러워 보였다. 하지만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결 좋은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검어서 묘하게 차가운 인상이었다. 머리카락만큼이나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상한 기시감이 든다.
“괜찮아요?”
인사 다음의 마디는 평범했다. 다른 동기들과 학생들이 그러했듯 사고에 대한 안부. 시우는 잠시 홀린 듯 멈칫했던 눈을 부드럽게 깜빡이며 웃었다.
“응, 괜찮아. 고마워.”
남학생은 반달처럼 휘어지는 시우의 눈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다 할 표정이 어리지 않은 무색의 얼굴로.
“기억 안 나요?”
고저없는 물음에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야?”
“정말 기억 안 나시나 봐요.”
자신의 기억이 절름발이라는 것을 이 애가 아는 걸까. 시우가 언뜻 떠오른 난처함을 숨기고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 찰나, 남자애는 여상히 시선을 거두었다. 불이 들어온 빔 프로젝터를 바라보는 그의 옆얼굴이 빛으로 얼룩졌다. 다시 한번 고저없는 목소리가 시우의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괜찮아요. 전 기억하니까.”
기억은 온전하지 못했지만, 모두 조각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시우는 마치 몸에 익은 것처럼 캠퍼스 곳곳을 기억해냈다. 반은 시우와 함께 움직이고 싶어 하는 학생들 때문이었고, 반은 정말로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인가 싶었다.
“선배, 선배!”
처음 캠퍼스에 들어섰을 때 알은체를 해왔던 여자애였다. 포니테일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발랄하게 흔들렸다. 거의 팔짱을 끼어오듯 옆에 붙어 종알종알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저희 전공 듣는 애들끼리 술 마시기로 했었거든요. 선배 학교 오실 줄 몰랐을 때.”
“아, 그랬어?”
“네! 그런데 마침 선배 오셔가지구 너무 잘됐다 싶어서요.”
“응?”
“선배도 같이 술 마셔요!”
시우의 팔을 잡아 길게 늘어뜨린 여자애가 애교 있게 말했다. 올망한 눈을 보니 자신이 꼭 자리에 참석해주었으면 하는 모양이었다. 시우는 손목의 시계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딱히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거절할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럴게.”
와아, 정말? 여자애가 신이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단톡방에 얘기해 놔야지! 다들 엄청 좋아할 거예요!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터치하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공 듣는 친구들이면… 걔도 오나?”
“네? 누구요?”
여자애가 방긋 웃는 얼굴로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핸드폰 액정 위에 올라간 손은 여전히 톡톡 움직이고 있었다. 시우는 전공 시간에 제 옆에 앉았던 남학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무턱대고 왜인지 마음이 끌리는 애라고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전공 시간에 내 옆에 앉았던 애. 하얗고… 좋은 냄새 나는.”
핸드폰을 톡톡 두드리던 여자애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방긋방긋 터지던 웃음도 퓨즈가 내려간 전구처럼 순식간에 꺼졌다.
“설마… 산호 얘기에요?”
이름이 산호였구나. 이름이 특이하네. 시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산호.”
아는 체를 하는 것이 나을 듯해 얼버무렸다. 그런데.
“선배 아직도 산호한테….”
조금의 조롱, 조금의 악의, 그리고 아주 다분한 측은함이 물든 목소리로 여자애가 중얼댔다. 그러나 곧 귀찮은 파리를 쫓아내듯 고개를 흔든다. 다시 방긋 웃는 얼굴로 여자애는 밝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올 리가 있겠어요? 안 와요. 걔는.”
“아.”
“위치는 문자 드릴게요! 여덟 시에요!”
손을 흔들며 종종 멀어지는 여자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우는 잠시 우뚝 서 있었다. 뭐지…?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여덟 시는 금세 찾아왔다. 시우는 일부러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았고, 익숙한 장소 몇 군데를 찾아냈다. 중앙 도서관이나 그 앞의 흡연구역 같은 곳들이었다. 꽤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연못도 익숙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시우 선배 00술집이요.]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주소는 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술집이었다. 벌써부터 메뉴를 고르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아마도 자주 모이는 장소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자주 다녔을까? 익숙한 곳이라 가면 기억이 떠오를까. 시우는 눈썹을 덮는 머리카락을 슬몃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로 통하는 술집 계단이 낯설지 않았다. 좁다랗고 가파른 곳이라서 위험해 보였는데, 왜인지 예전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묘한 기시감은 불쾌하다기보다는 반가웠다.
“…….”
시우는 안으로 들어서기 전, 담배를 한 대 피우기로 마음먹었다. 모퉁이를 돌아 좁다란 골목에 다다라 주머니를 더듬는데 누군가 불쑥 말을 붙여왔다.
“술 마시러 온 거에요?”
쏟아지는 네온사인을 등진 그림자였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살짝 눈가를 찌푸려 보았지만, 흐릿했다. 상대가 한 걸음 더 다가오고 나서야 그가 누군지 알아챘다. 하루 종일 묘하게 마음이 쓰이던 사람이었다.
“응.”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온다고 하더니. 전공 시간에 옆에 앉았던 남학생. 이름이 산호라고 했었지. 시우는 그를 향해 호의를 담아 눈꼬리를 휘었다.
“산호 너도 온 거야?”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의아함을 담은 눈동자가 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꽤 집요한 시선이었다.
“이름.”
“…응?”
“내 이름.”
호의로 곱게 휘었던 눈꼬리가 편평히 곧아졌다.
“누구한테 들었어요?”
“누구한테, 뭘?”
“내 이름 기억난 거 아니잖아요.”
무슨 말이지? 이 애는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어떻게? 연방 주머니를 더듬던 손길에 담뱃갑이 잡혔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대신 시우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저도 담배 하나만 빌려주세요.”
남학생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시우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담배 한 개비를 들려주었다.
“불도요.”
대체 이 애는 뭘까. 이 애의 행동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라이터에 불꽃이 오르자 담배를 문 얼굴이 가까워져왔다. 순간 습기 먹은 단내가 훅 끼쳐왔다. 어…! 갑자기 풍겨온 향에 시우가 몸을 뒤로 물릴 새도 없이 어떤 손이 시우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지지직, 하는 잡음이 들린 것도 한순간, 뒷덜미에 찌르르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대로 암전이었다.
***
[다시 현재]
족쇄는 튼튼했다. 그리고 단단했다. 거칠게 무두질한 가죽의 밀도가 어찌나 높은지 작은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것을 끊기 위해선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있어야 했다. 커터칼이나 과도 같은 작은 예기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날이 두꺼운 도끼 정도는 되어야 끊어낼 수 있지 않을까. 침대에서 내려와 족쇄를 비틀고 사슬을 당기는 시우를, 산호는 빤히 바라보았다. 덫에 걸려 희망을 잃은, 무기력한 짐승의 눈빛과 퍽 닮아있었다.
“소용없어요.”
빈틈없이 가죽의 접합부를 옥죈 잠금 쇠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산호가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뱀처럼 늘어진 사슬을 따라 시선을 올린 시우가 산호를 마주 보았다.
“그거… 안 풀려요.”
기실 시우도 내심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 족쇄가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는 걸. 그리 쉽게 풀릴 거라면 저희를 가둔 사람이 이렇게 족쇄만 채운 채 방치했을 리 없다는 것을. 상황은 진작에 판단했다. 자신이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후배와 소름 끼치도록 하얀 방에 갇혔다는 사실 까지도, 머리로는 인지했다. 그러나 인지하는 것과 납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우리…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 알고 있어?”
산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저도 선배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깬 것뿐이라.”
두 시간이나 일찍 깼다고? 그렇다면 왜 자신을 깨우지 않은 거지? 각자의 침대에 단단히 고정된 사슬의 길이는 제법 긴 편이었다. 정방형의 방이 그리 작지 않았음에도, 방 구석까지 발이 닿을 정도는 되어 보였다. 묶여있기 때문에 자신을 깨우지 않은 것은 아닐 터다. 당황한 자신과 달리 차분해 보이는 산호를 바라보며 시우가 눈가를 찌푸렸다. 산호가 그런 시우의 눈빛을 눈치챘는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선배가 깨워도 못 일어났잖아요.
“못 일어났다고…?”
“우리한테 약 먹인 거 아닐까요? 아니면 가스 같은 거라든지….”
산호의 이야기는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곳에 갇혀 있는 상황 자체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산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깨질 듯한 두통도, 약인지 혹은 가스인지 모를 어떤 인위적인 것 때문에 생긴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 그 편이 더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시우는 천천히 자신의 침대 위에 무너지듯 앉았다. 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게….”
“선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하얀 회칠의 바닥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자신의 맨발을 바라보며 시우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제 입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마저 낯설게 들릴 만큼 모든 게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었다.
“…선배.”
“넌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누가, 왜, 우리를 가둔….”
아무것도 말이 안 됐다.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설정 아닌가. 하얗게 칠해진 방 안에 실험 쥐처럼 갇힌 두 사람. 왜 하필 우리 둘이지? 우리에게 무슨 연결점이 있어서? 산호, 이 애가 누구인지 시우는 기억도 하지 못했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일지라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우와 산호는 둘 다 남자다. 그것도 신체 멀쩡한 20대의. 산호가 선이 얇고 마르기는 했어도 평균 남자들의 체구에 비하면 작은 편도 아니었다. 게다가 시우 자신은 어떤가. 시우처럼 건장한 20대의 남자를 단번에 제압해 어딘가에 감금한다는 건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일자로 뻗은 산호의 어깨가 천천히 앞으로 숙어졌다. 가지런한 쇄골 아래가 살짝 드러났는데 가로로 길게 그어진 흉터가 눈에 띄었다. 이미 아문 것을 보니 제법 오래전에 난 상처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상처가 조금 낯익었다. 낯익다 못해, 왜인지 심장이 따끔했다.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산호 넌, 넌 어디까지 기억나?”
시우가 다시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관자놀이의 맥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잘 기억 안 나요. 여섯 시에 마지막 강의 끝났고… 아마 집에 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눈썹 뼈 부근을 꾹꾹 누르던 시우의 손이 문득 멈칫했다. 그렇지, 수업 끝나고 전공 수업 듣는 동기들끼리 술을 마시러 가기로 했었다. 시우는 손을 천천히 내리면서 산호를 바라보았다.
“너도 술 마시러 왔잖아.”
“술?”
“전공 듣는 애들끼리 모여서 술 마신다고 해서. 그 지하에 있는 술집. 계단 좁고 가파른데.”
산호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시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의구심이 떠오른 표정. 그 표정에서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는데. 기억이 불안정한 시우도 10시간 전의 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껄끄러운 목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술집에 들어가기 전 담배를 피우려고 골목으로 들어갔었다. 그리고 그때 산호를 봤었다. 네온사인을 등지고 선 산호의 인영이 얼룩덜룩했다. 무언가 곤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이후에 산호의 손에 담배를 쥐여 주었고, 불을…
“담배 빌려달라고 했잖아, 나한테.”
“담배요?”
산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저 담배 싫어하는데. 지독하게. 기억 안 나요?”
기억나지 않느냐는 이 애의 물음은 연쇄적으로 또 다른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고 이후,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이 애는, 산호는, 자신의 기억이 고장 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기억 안 나시나 봐요.’
전공 시간에 했던 말과.
‘내 이름 기억난 거 아니잖아요.’
지저분한 골목에서 했던 말까지.
이 애는, 산호는 시우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 확신이 아니라 인지였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조금 전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어렴풋이 잡히는 듯했다. 시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왜 내가 네 이름 기억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시우가 산호의 침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자, 시우의 걸음을 따라 딸려오는 사슬이 스르렁 소리를 냈다. 산호는 바닥에 긁히는 사슬을 흘끗 바라보다가 제 앞에 선 시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내가 기억 잃은 거, 어떻게 알았어?”
시우가 산호의 어깨를 쥐었다. 생각보다 손이 거칠었는지, 산호의 몸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갈 듯 휘청였다. 시우가 황급히 손을 뻗어 다른 쪽 어깨까지 틀어쥐었다. 산호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하얀 팔뚝에 힘줄이 돋았다. 난데없이 양어깨를 잡힌 산호는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건 기억해요?”
“나한테 기억 안 나느냐고 물었잖아.”
“음, 지금 기억은 괜찮은 것 같네.”
“네 이름 누구한테 들었느냐고, 기억난 거 아니지 않느냐고 그랬잖아.”
당황한듯한 산호의 표정을 보니 도리어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 애가 무언가 알고 있어.
납치된 이 상황은 온통 납득할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여 던져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헤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조금이나마 형체를 띤 의문이 손끝에 잡힌 거다. 적어도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상대가 눈앞에 있다. 물어야 할 것이, 물어야 할 대상이 생긴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시우는 눈앞의 이 애가 자신이 이곳에 갇힌 이유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건 기억하냐니.”
“…….”
“지금 기억은 괜찮은 것 같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야?”
난처해 보였던 산호의 눈이 잠시 멈칫하더니 샐쭉 찢어졌다. 설마… 지금 웃는 거야? 시우가 다시 산호를 다그치려는 듯 어깨를 꾸욱 쥐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뱉기도 전, 짙은 향기가 온몸을 덮치듯 훅 끼쳐왔다.
“어…!”
그건 습기 먹은 단내였다. 먹음직스러운 과일을 잔뜩 짓이겨 물속에 풀어놓고 휘휘 저으면 날 법한 그런 향.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뇌를 마비시키는 강렬한 향이었다. 단순한 향에 불과했다면, 이렇게 이성을 마비시킬 리 없었다.
게다가, 이 향. 분명히 맡은 적이 있어.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시우가 본능적으로 산호의 어깨를 놓고 뒷걸음질을 쳤다.
“선배…? 갑자기 왜 그래요?”
고개를 모로 갸웃하는 산호의 얼굴이 아릿하게 보였다. 잔뜩 찡그린 눈을 감지 않으려 애를 쓰며 시우는 두어 걸음 더 물러났다.
“잠, 깐만.”
“어디 아픈 거예요? 얼굴이 창백한데.”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쏟아지는 그 향은, 그리고 몸이 먼저 반응하게 만드는 그 향은, 분명히 페로몬이었다. 그것도 우성 오메가의.
알파와 오메가로 명명되는 특수한 형질은 인구의 5%만이 가진 희귀한 것이었다. 구태여 표현한다면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베타로 나뉠 수 있지만, 인구의 95%가 베타의 형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알파와 오메가만이 특이한 형질로 인식되는 편이었다.
형질인들 중 인구의 1%만이 오메가의 형질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 4%는 알파의 형질을 가졌는데, 이들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형질을 띠는 이들을 ‘우성’으로 명명했다.
사실 이들의 대부분은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형질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 편이었다. 구태여 숨길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랑할 만한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뻔했다. 시기와 질투.
알파와 오메가는 각각 결은 다르지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비슷했다. 그들 대부분은 베타보다 유려한 외모와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평균적인 지성도 조금은 더 높은 편이었다. 정치, 사회, 경제 부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형질인들이라는 점 때문에 날 선 시선을 받는 경우가 흔했다.
시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10살이 되던 해에 우성 알파로 발현하고 난 후 원치 않는 시기와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었다. 어떻게든 시우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부류들과 어떻게 해서든 시우를 폄훼하려는 부류들을 숱하게 만나왔다. 정말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형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건, 그래서였다.
그리고 ‘정말 특별한 상황’이라는 건 일상에서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노골적으로 알파를 유혹하는 오메가의 페로몬이 주변을 빽빽하게 에워쌌다. 알파에게 오메가의 페로몬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때로는 각성제이기도 하고, 때로는 치료제이기도 했다. 더러는 환각제로 쓰이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산호, 야.”
발정제였다.
스르렁, 시우의 발목에 이어진 사슬이 음산하게 으르렁댔다. 잔뜩 찌푸려진 눈꼬리와 피가 밸 정도로 사리물은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무자비하게 시우를 덮쳐 온 짙은 페로몬이 순식간에 정신을 마비시켰다. 흐릿한 이성이 마지막 승부처인 양 발광했다.
“…저기로 떨, 어져, 있어.”
끄, 으, 참지 못한 신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따뜻했던 다갈색 동공을 시뻘건 이채가 서서히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쪽, 나한테 오지 말, 고.”
손목으로 한쪽 눈을 꾸욱 누른 채 계속 뒷걸음질을 쳤다. 일부러 산호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였다. 어째서 이 공간에 오메가의 페로몬이 가득 찼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대로 이 페로몬에 계속 노출되면 지금 이 공간에 있는 유일한 상대에게 자신이 짐승처럼 달려들고 말 것이라는 것.
시우는 페로몬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편이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라고 해도, 자신의 의지로 어느 정도 반응을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페로몬은 단순한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시우를 집어삼켰다. 실낱같은 이성을 부여잡고 있는 와중에도 오메가의 페로몬이 그를 폭력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건 발목을 거머쥔 족쇄보다 더 집요했다.
“왜 그러는 건데요?”
어룽진 시야에 산호가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하얀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이 모로 기울어진 채 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파요? 선배. 말 좀 해봐요.”
“괜찮, 으니까 저리 좀….”
이를 까득 깨문 시우가 손을 뻗어 산호를 저지했다. 조금 더 가까이 오면 더이상 버틸 수 없을 터였다.
“안 괜찮아 보이니까 하는 말이잖아요.”
저지하듯 뻗은 시우의 손을 산호가 덥석 잡았다. 순간 시우의 몸을 옥죄어 왔던 페로몬이 파도처럼 훅 밀려들었다. 얇은 피부 표면에 스펀지처럼 흡수된 페로몬은 폐부로 깊숙이 쏟아졌다.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마지막 방어선을 뚫은 셈이었다.
쿵.
산호가 손끝을 쥐는 순간, 시우가 거칠게 산호를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무방비하게 침대 위로 풀썩 넘어간 산호는 자신의 위에 올라탄 시우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선배, 흣.”
양팔 사이에 산호의 몸을 가둔 시우는 성마르게 산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읏…!”
짐승처럼 드러난 알파의 이가 하얀 목덜미를 허겁지겁 핥았다. 숫제 물어뜯는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릴까. 피부가 찢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붉은 멍울을 남기기에는 충분했다. 피부에 입술 점막이 닿자, 페로몬이 한차례 더 크게 물밀듯 쏟아졌다.
“크윽.”
산호를 가둔 시우의 양팔이 잘게 떨려왔다. 침대 시트를 꾹 쥔 시우의 주먹도 부르르 떨렸다. 산호의 가는 목덜미를 목마른 듯 핥아 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참아보려는 노력의 발로였다.
커다란 손이 산호의 하얀 리넨 상의를 찢어발길 듯 네크라인을 거칠게 쥐었다. 투둑, 하고 실밥 뜯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시우가 가까스로 산호에게서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이 페로몬-.”
“선배?”
어찌나 세게 이를 물었는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시우가 산호를 내려다보았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겨우 입을 뗐다.
“이 페로몬, 네 거야?”
“…….”
“너 오메가였어?”
가까스로 산호에게 몸을 떼어냈지만, 그것이 무색하게 산호는 시우의 목덜미를 양팔로 천천히 감싸 안았다. 앞으로 당겨지는 힘에 산호의 몸 위로 시우의 상체가 다시 가깝게 달라붙었다. 잠시 따뜻한 밤색으로 돌아왔던 동공이 다시금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선배.”
“너, 대체 뭐야.”
“왜 참는 거예요?”
“지금 무슨….”
“나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시우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자신의 입술을 깨물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조용히 속삭이는 산호의 입술을 삼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참아낸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산호가 제 무릎을 접어 시우의 하반신을 뭉근하게 비벼왔다.
그리고 툭.
산호의 발목이 위로 들리자, 그 발목을 감싸고 있던 족쇄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철그렁.
아득한 와중에도 시우는 고개를 들어 발치에 떨어진 가죽 족쇄를 보았다.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족쇄. 하지만 그 족쇄는 산호의 가벼운 발동작에 풀어졌다. 허무하리만치 쉽게도. 이게 가능한… 건가?
“저게 어떻게 풀린-.”
아니, 그것은 풀린 게 아니었다. 애초에 잠금 쇠의 톱니가 빠져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저 잠겨 있는 것처럼 맞닿아 있기만 했던 잠금 쇠가 아가리를 쩌억 벌린 채 열려있었다.
시우는 자신의 발목에 채인 족쇄만을 확인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산호가 찬 족쇄까지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하지는 않았었다. 생각을 더듬어보면 산호는 방금 전 자신에게 손을 뻗은 것 외에는 계속 침대에 앉아있었고, 걷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움직임이 커지면, 애초에 묶이지 않은 족쇄가 풀릴지도 모르니까. 바로, 지금처럼.
자신의 발목에서 툭 떨어진 족쇄를 흘끗 바라본 산호는 시우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시우의 찌푸린 눈가가 바닥에 떨어진 족쇄로 향한 것을 확인했다.
진시우가, 상황을 파악했다.
명백한 사실을 깨닫자 산호의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이 일순 흔들렸다. 그러나 곧 붉은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쌔액 올라갔다.
“이런, 벌써 들켰네.”
짐짓 재미있다는 목소리였다. 산호는 여유로운 손짓으로 시우의 목덜미를 조금 더 제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잇새에 물려 핏물이 배인 시우의 입술을 잠시 응시했다.
“이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참는 이유가 뭘까.”
“…큿.”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될 텐데.”
산호가 날름 혀를 내어 시우의 입술 위를 핥았다. 생크림을 핥아먹는 듯한 행위였다. 성적인 뉘앙스가 짙은 건 아니었지만, 시우에게는 이마저도 지독한 자극이었다.
“지금 선배 좆 터질 거 같은 건 알고 있어요?”
“…하지 마.”
“엄청 뜨거운데.”
산호의 동그란 무릎이 노골적으로 시우의 하체를 지분댔다. 부드럽게 문질러지는 아래에 불끈 피가 몰린다. 시우도 자신의 아래가 발정 난 짐승처럼 부피감을 키워가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얗게 센 이성을 뒤로하고 향기로운 눈앞의 몸뚱이에 마구잡이로 자신을 밀어 넣고 싶었다. 정신없이, 거칠게. 그 어떤 페로몬도 저에게 이만큼의 욕구를 불러일으킨 적은 없었다. 저 몸을 헤집고 싶다. 촉촉하게 젖은 몸은 부드럽게 열릴 것이고, 뜨거운 내벽은 자신의 성기를 게걸스럽게 빨아댈 것이다. 젖은 입술은 야한 신음과 다디단 숨을 쏟아낼 테지.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눈앞에 발정 난 오메가가 다리 벌리고 있는데, 왜 아무것도 못 할까.”
그런데, 왜 안 되는 거지?
달아오른 전구가 팍 터지는 것처럼 이성이 순식간에 점멸했다. 그르렁거리며 목울대를 울린 시우가 정신없이 산호에게 달려들었다.
시작은 입술이었다. 살끔 열려있던 산호의 입술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우의 혀를 받아들였다. 시우의 커다란 손이 산호의 뒷머리를 안았다. 시우는 엄지로 산호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거칠게 입 안을 헤집었다. 그건 통통하게 살이 오른 과일을 씹어 먹는 느낌이었다. 축축한 입 안 점막은 뜨거웠고, 날름거리는 혀는 농밀했다. 한없이 빨아먹을 수도 있을 만큼 달콤한 타액이 질척거리며 입꼬리로 새어 나왔다. 시우가 혀로 산호의 입천장을 꾸욱 누르자, 목덜미를 안은 산호의 양손이 작게 움찔 떨었다.
“하아, 선배….”
열락에 달뜬 목소리가 야살스러웠다. 시우는 구깃해진 산호의 상의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으윽.”
단번의 손길로 상의가 뜯어졌다. 애초에 얇은 재질이긴 했지만, 순식간에 뜯어질 만큼 거센 악력이었다. 활짝 벌어진 상의 사이로 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산호의 목빗근을 따라 주욱 핥고 내려가 오목하게 패인 쇄골의 윗부분을 빨아들였다. 퓨릅, 젖은 마찰음이 적나라하게 샜다. 짐승처럼 세운 이가 곧게 뻗은 쇄골에 콱 하고 박혀왔다.
“흐읏, 아파요. 선배.”
산호의 뒷머리를 안은 시우의 손끝에 발끈 힘이 들어갔다. 아프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통제할 이성이 남지 않았음에도, 시우는 잠시 멈칫했다.
“괜찮아요. 더요, 더 해줘요.”
다시 한번 날 선 이가 쇄골의 여린 살을 씹었다. 하아, 하아, 달뜬 숨이 머리맡에서 터져 나왔다. 폭력적으로 엉겨 붙던 페로몬의 양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공격적으로 찔러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면, 지금은 느른하게 쓰다듬는 형국이었다. 페로몬의 주체인 오메가 역시 흥분한 탓이리라. 감도는 더욱 부드러웠지만, 발정한 알파에게는 이쪽이 더욱 성감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시우의 혀가 쇄골 아래 주욱 그어진 상처를 핥았다. 산호가 문득 어깨를 파드득 떨며 홱 목을 젖혀 올렸다. 하악, 하고 젖은 탄성이 쏟아졌다. 순간 시우가 눈을 번뜩 떴다. 허리를 강하게 짓쳐 넣자 산호의 두 다리가 활짝 벌어졌다. 뜨겁고 단단한 살덩이가 안쪽 허벅지는 물론이고 회음부까지 퍽퍽 찍어댔다. 벌어진 두 다리가 허공에서 나풀댔다. 둘 모두 하의를 입고 있었음에도, 얇은 천 아래 드러난 성기가 오히려 야릇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허리를 길게 쑤셔 박으며 시우가 산호의 뒷머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다른 손은 옷 사이를 파고들어 판판한 아랫배 위를 더듬었다. 한참을 쓰다듬던 손이 천천히 위로 기어오른다. 마침내 시우의 손끝이 유륜에 닿자 으읏,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더 만져주세요. 더….”
쇄골을 핥았던 입술도 아래로 미끄러졌다. 봉긋하게 선 유두에 입술이 닿는다. 도톰하고 불그스름한 것이 얼핏 앵두 같아 보였다. 동그란 과실을 짓이기듯 시우가 혀를 내어 그것을 꾸욱 눌렀다. 동시에 반대쪽 유두를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아, 하아…! 읏, 선배…!”
외설적인 신음이 거르지 않고 연달아 터져 나왔다. 산호의 허리가 옴폭 패이면서 들썩였다. 시우가 유두를 강하게 쯉, 빨아올리자 허리가 더욱 깊게 휘었다. 산호의 양손이 시우의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헤집었다.
달고, 또 달았다. 이를 내어 잘근잘근 씹기도 하고, 혓바닥으로 꾹꾹 누르기도 했다. 이 달콤한 과실을 계속해서 빨고 싶었다. 퉁퉁 불어 봉긋해진 유두를 입 안에 넣어 굴리고 마음껏 씹으며 마구 허리를 짓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제 몸짓에 맞추어 터져 나올 뜨거운 숨을 계속, 계속해서 들이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흣.”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시우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산호의 가슴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불룩 솟은 유두 끝에 맺힌 타액이 은색 실처럼 주욱 늘어지다가 끝내 툭 끊어지고 만다. 허억, 허억, 헉, 미간을 찌푸리며 멀어지는 시우의 얼굴을 산호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산호의 하얀 뺨은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흐무러진 눈가와 발그레한 코끝, 귓바퀴와 목덜미까지 열꽃이 피었다. 자극에 달아오른 눈동자와 흐트러진 얼굴은 비단 오메가나 페로몬 때문이 아니더라도 단전을 뜨겁게 달굴 만한 것이었다.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참아야 했다.
“…박수라도 쳐줘야 하나.”
“…산호야.”
“대단하긴 하네요, 선배. 이 상황에서도 참을 수 있다는 게.”
산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우가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려고 애쓰는 시우를 보며 산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누가 보면 내가 병균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뭔데.”
시우가 조금 더 몸을 뒤로 물리며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이렇게… 이렇게 함부로 손 댈 순 없어.”
알파와 오메가의 교합은 자연적인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둘은 서로에게 끌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유혹한 쪽은 산호였다. 노골적으로 페로몬을 푼 것도, 직접적으로 먼저 몸을 더듬기 시작한 것도 산호였다.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는 말은, 신기루 같은 자기변명에 불과했다. 시우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머리가 시키는 말을 내뱉고 만다. 난 너한테 손 대면 안 돼. 자조적이나마 미소가 어려있던 산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너한테 함부로 손 댈 순 없어. 나는, 나만큼은 그러면 안 돼.’
언젠가, 내가 비슷한 말을 했던가? 언젠가 내가 이 애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서… 시우가 천천히 눈을 가린 손을 내렸다. 딱딱하게 굳은 산호의 얼굴이 얼핏 과거의 모습과 겹쳐지는 듯했다. 달아올랐던 산호의 얼굴은 다시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럽고, 건조하고, 텅 빈 표정으로 돌아왔다. 잠시 슬픔일까, 혹은 분노일까 싶은 표정이 떠오른 듯도 했지만, 그것은 금세 사라졌다.
“…….”
산호가 거칠게 찢어진 상의를 여미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시우가 이성을 잃고 남긴 붉은 울혈이 곳곳에 보였지만, 쇄골 아래 길게 뻗은 상처가 더욱 시선을 잡아끌었다. 상처에 시우의 입술이 닿았을 때 파드득 어깨를 떨던 몸짓도 생생했다. 마침내 산호가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누워요.”
산호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묶인 침대 가까이 서 있던 시우가, 자리를 뜨려는 산호를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아직 물어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는데…!
하지만 쉽사리 산호를 건드릴 순 없었다. 또다시 이성을 잃을 게 분명하니까. 저에게로 뻗어지다 아래로 툭 떨구어지는 시우의 팔을 바라보며 산호가 작게 웃었다.
“이렇게 페로몬 뒤집어쓰고 그거 배출 못하면.”
노골적으로 아래를 훑은 시선이 다시 시우의 얼굴로 끌어올려진다.
“어떻게 되는지 알죠.”
“…….”
“그러니까 누워있어요. 약 가져다줄 테니까.”
페로몬이 서서히 갈무리되기 시작했다. 턱까지 차올랐던 숨이 점차 제 호흡을 찾아간다. 조금씩 정상의 맥동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시우가 산호를 바라보았다. 산호는 자신의 발목에 채워져 있던 톱니 빠진 가죽 족쇄를 발끝으로 툭 밀어 차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세웠다.
“너…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러나 갈라진 시우의 목소리에 한 걸음 떼지 못하고 다시 천천히 몸을 돌린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산호는 잠시 시우를 응시했다.
“말하면. 들어 줄 거에요?”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산호는 시우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다시 몸을 돌려세웠다. 하얗게 페인트칠이 된 문 앞에 우뚝 섰다가 이내 문고리를 쥐어 돌렸다. 철커덕, 거짓말처럼 문고리가 돌아갔다. 한 줄기 빛도 새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이 참으로 쉽게도 열렸다.
“잠, 깐…!”
방을 벗어나려는 산호를, 시우가 다급히 붙잡았다. 문이 열린 지금이, 어쩌면 지금만이 이곳을 벗어날 기회일지도 모른다. 쿵, 하는 소리와 철그렁거리는 사슬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쿵, 소리와 함께 돌려 세워진 산호가 벽으로 난폭하게 떠밀렸고, 동시에 산호를 벽으로 밀어붙인 시우의 사슬도 팽팽하게 당겨졌다. 철그렁, 소리만이 잔음을 남기며 이어졌다.
세게 벽에 처박힌 어깨가 아픈지 산호는 눈살을 잘게 찌푸렸다. 하지만, 산호의 입에서 터진 비명은 그리 크지 않았다. 머리까지 세게 부딪혔다면 또 달랐겠지만, 산호의 뒷머리에 닿은 건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었다.
“…….”
벽에 등을 기댄 채 산호가 천천히 가까이 선 시우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한쪽은 자신의 어깨를 난폭하게 쥐었으면서 다른 한쪽은 자신이 벽에 머리를 부딪힐까 봐 큰 손으로 감싸 막아준 남자를. 거칠게 벽에 찧어진 손등에 제법 충격이 있었는지 시우의 눈꼬리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이채가 서렸던 눈은 다시 따뜻한 밤색을 띤 채였다.
“…….”
시우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사슬이 느슨해지며 바닥에 닿았다. 산호가 거칠게 시우의 손목을 잡아챘다. 눈앞으로 끌어온 시우의 손등은 벌겋게 마디가 부어올라 있었다. 미간을 좁히며 산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시우를 올려다보는 눈이 원망으로 가득했다.
“…그거 알아요?”
“…….”
“선배는… 정말 개자식이에요.”
빠끔 열린 문밖의 어둠은 요요했다. 시우의 손목을 놓은 산호는 그 안으로 홀연히 사라졌다.